세상 앞에 당당한 복음 선포자
사도행전 22:22-29
22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5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행 22:22-29 / [로마 시민권을 행사한 바울]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이런 놈은 없애 버려라! 죽여 버려라! 살려 둘 수 없는 놈이다.' 23) 그들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옷을 벗어 공중에 내던지며 흙 먼지를 움켜서 던졌다. 24) 이 광경을 본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고 들어가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그의 죄를 밝혀내라고 명령하였다. 25) 군인들이 채찍으로 치려고 결박하자 바울이 한 장교에게 말하였다.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오?' 26) 이 말을 들은 장교가 파견대장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어떻게 할까요? 저 사람이 로마 시민이랍니다.' 27) 그러자 파견대장이 와서 바울에게 `정말 당신이 로마 시민이오?' 하고 물었다. `예, 그렇소.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 28) `나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돈이 꽤 많이 들었소!' `나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입니다.' 29)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자 그를 채찍으로 치려고 서 있던 군인들은 곧 물러갔다. 파견대장 또한 바울을 결박하여 매질하라고 명령한 것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죄수로서 자신의 무죄를 밝히고자 하거나, 살기 위해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권세와 복음을 반대하는 세력 앞에서도 당당히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반대세력들 앞에서도 당당한 바울(22-24) 바울의 복음은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성난 군중들은 바울의 설교를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바울을 죽이자고 외치고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날리며 바울이 죄인임을 지목합니다. 천부장이 군사들을 명하여 바울을 영내로 들여오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두려워하거나 살기 위해 급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바울은 분노한 회중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보다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간증의 시간으로 사용합니다. 궁지에 몰린 죄수의 변론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외칠 수밖에 없는 한 전도자의 선포였던 것입니다. 세상이 복음을 반대하며 거칠게 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일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바울(25-29) 세상의 반대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처럼 세상의 권력 또한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있습니다. 이 권력은 말 그대로 지위가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학벌, 혈연, 지연, 외모 등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만드는 요인들입니다. 바울을 채찍질하라고 명령한 천부장의 권력은 당시 로마의 포로였던 유대민족에게는 엄청난 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 전혀 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충분히 활용합니다. 바울의 로마 시민권은 천부장의 그것보다 훨씬 정통성이 있었습니다. 천부장은 그의 고백처럼 많은 돈을 드려 산 것이지만, 바울은 나면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그가 로마시민권자라는 권세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복음 전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반대자들 앞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수 많은 권력들 앞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복음이 주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적 용 : 오늘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믿음을 위축시키려는 세상의 그 어떤 힘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함을 구합시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것이다. 위를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의 종교성을 의미합니다. 위를 향하여 올라가는 것은 인간만이 지니는 종교성이며 미래 지향성입니다. 창조의 과정부터가 인간은 미래지향적이며 위를 바라보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땅에 속해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는 삶을 누릴 때 인간의 가치는 보다 값지게 드러납니다. -박종순 목사-
< 설 교 >
바울의 가슴에 있는 것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하거나 공존하기 어려운 관계를 일컬어 견원지간(犬猿之間)-개와 고양이 사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에 의해 일찍부터 가축화되어 함께 살아 왔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개와 고양이는 서로 어울리지를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두 동물의 의사를 표현하는 신호 형태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개는 상대에게 호감을 표시할 때 꼬리를 세우고 흔드는데 고양이에게는 꼬리를 세우는 것이 위협의 신호입니다. 개가 놀자고 앞발을 올리는 동작이 고양이에게는 공격의 준비 신호라고 합니다. 개는 귀를 뒤로 젖혀서 복종의 뜻을 나타내는 반면 고양이는 공격할 때 바로 그런 자세를 취한다고 하니 하나에서 열까지 서로 반대요 맞는 것이 없습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도 아니고 경쟁 관계도 아닌데 개와 고양이 사이에 생긴 오해와 견제는 쉽게 해결되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이 품고 살아가는 오해란, 눈에 보이는 행동을 보고 말만을 듣고 판단하는데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기 기준으로만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오해와 갈등으로 세상은 갈수록 소란스럽고 서로 발톱과 이빨을 내보이며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나와 다릅니다. 내가 기준이 있는 것처럼 당신에게도 기준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만 인정한다 해도 사람들 사이는 훨씬 부드러워 질 수 있지요. 그리고 내가 상대방의 눈을 가질 때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새기고 삽시다.
행 22:22-23 / [로마 시민권을 행사한 바울]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이런 놈은 없애 버려라! 죽여 버려라! 살려 둘 수 없는 놈이다.' 23) 그들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옷을 벗어 공중에 내던지며 흙 먼지를 움켜서 던졌다.
20절까지는 바울이 회심이야기를 하자 비교적 잠잠하게 듣기만 했는데, 21절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에게로 보낸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말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합니다.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바울의 회심 간증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중에 또 바울의 간증을 듣고 감동받고 회개하는 사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는 없애버려라. 살려 두면 안 된다’ 고함치며, 옷을 벗어 던지며, 공중에 먼지를 날렸다고 했습니다.
여기 옷 벗어 던지며 먼지를 날렸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투우-TV에서 보신 적 있으시지요? 소가 화가 나서 덤벼들기 전에 반드시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발로 땅의 먼지를 일으키지요. 그리고는 목표물을 향하여 온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이 티끌을 날렸다는 것은 악에 받쳐서 바울을 사정없이 죽이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형판결이나 사형 집행은 반드시 로마법에 의해 시행해야만 했습니다. 예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던 이유도 예수를 죽이려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도 만일 저들이 바울을 돌로 쳐죽이면 로마법에 의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는데도 그런 것 상관치 않고 ‘바울을 우리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울의 회심 간증에 감동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같은 설교, 같은 말씀을 듣고 ‘아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구나’ 감동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더 마음이 강퍅해져서 ‘왜 시간만 되면 나를 치느냐?’ 눈 흘기는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말씀들을 때마다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참으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1.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없애려고 했을까요?
지금 바울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무리들도, 바울도 다 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율법을 숭상합니다.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을 꼭 죽여야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잘못된 선민사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간증하면서 ‘자기는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유대인들이 잘 듣지 않으니까 이방인에게로 가라 하셨다. 왜? 이방인을 구원시키려고.’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점이 유대인들을 못 견디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자기들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은 유대인에 비해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이 사상이 지나쳐서 이방인들을 짐승 취급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특별히 미워한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들과는 도저히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을 제쳐놓고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시키시려고 바울을 보내셨다고 하니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 유학 가서 첫 학기에 겪은 일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곧잘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같이 수업을 듣던 한국 학생에게 물어보니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음 시간에 Quiz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Quiz인줄 알았지 그게 시험인줄 몰랐습니다. 또 시험을 본다고 하긴 하는데 어디까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줄 몰랐습니다. 낙담해서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물론 남자 천사였습니다. 자세하게, 또박또박 설명해 줬습니다. 고맙고도 고마웠습니다. 눈물나게 고마웠습니다. 참 미국 사람들 마음 좋다, 착하다, 역시 좋은 사람들이구나. 얼마 후에 성적이 나왔습니다. 영어가 문제이지 신학공부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니 점수가 잘 나왔습니다. 미국 친구가 성적이 어찌되었느냐고 묻기에 자랑스럽게 얘기했더니 그 친구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는 무엇을 물어봐도 잘 가르쳐주질 않아요. 알고 봤더니 그 친구보다 내가 성적이 좋았습니다. 한쪽 구석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안 됐고, 뭔가 도와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내가 도와줘야 할 상대가 아니라 경쟁의 상대라고 여겨지니까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어려워 보일 때는 도와주지만 비슷하게 여겨지면 경쟁의식을 가지고 철저하게 맞서 나갑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안 돼 보일 때는 미워하기까지는 아니했지만 그러나 이방인들도 자신들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구원의 대상이라고 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 탈무드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웃에 사는 사람에게 망치를 빌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안 빌려 줘요. 그냥 왔습니다. 며칠 후 이웃 사람이 톱을 빌리러 왔습니다. 빌려줘야 합니까? 빌려주지 말아야 합니까? 안 빌려 주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망치가 필요할 때 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에게 톱을 빌려줍니다'하고는 빌려줬습니다. 잘한 일입니까? 잘한 일입니다. 그러면 톱 빌려간 사람이 좋아해야 합니까? 글쎄요. 내가 빌려주지 않으면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되니까 내가 빌려 줍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대단한 교만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마음 바탕에 바로 이 교만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이 자기와 똑같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기들은 평생 율법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는데 이방인들은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자기들과 똑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된 선민의식, 잘못된 우월감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릅니다. 우리 중에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고 하면서 은근히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사람 없습니까?
▶ 예수 믿고 변화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하나님 사랑, 예수 사랑을 수없이 말하면서도 아직도 다른 사람이 나와 같아지는 것, 나보다 높아지는 것, 잘 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까? 예수 헛 믿은 거예요. 나보다 잘 되는 것을 더불어 기뻐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정말 예수 믿는 것 아닙니까?
입으로 유대인의 교만을 꾸짖으면서도 나는 더 교만하지 않습니까? 먼저 머리 숙여 인사하면 값이 떨어집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값있게 여겨주실 것입니다. 먼저 웃으며 아는 체하면 못난이 취급받습니까? 주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실 것입니다.
▶ 기독교가 유대의 종교에서 세계의 종교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겠습니까? 한 가정의 개종도 힘이 드는데 한 민족을 상대로 한 개종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유대인의 완고함 때문에 유대인을 건너서 이방인에게로 바울을 보낸다고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격분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덤벼들기보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가슴 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말씀들을 때마다 ‘회개할 것이 생각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좋았다. 나빴다. 은혜가 됐다 안됐다’고 생각하기 전에 ‘내가 회개하고 고칠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앙이 여러분에게 뜨거운 능력이 될 것입니다.
2. 채찍질하는 천부장(24)
행 22:24 / 이 광경을 본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고 들어가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그의 죄를 밝혀내라고 명령하였다.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덤벼드니까 천부장이 그 이유를 알려고 바울을 영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명합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니 로마 사람인 천부장이 무슨 소린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유대인들이 흥분하는 것 보니 무엇인가 바울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만 관심을 가져 보려 합니다.
여기 나오는 채찍은 단순한 매가 아닙니다. 채찍은 가죽 끈에 쇠 조각과 뼈를 매단 것으로 이것으로 주로 등을 때렸는데 한번 맞으면 살이 가죽끈에 묻어 나와 뼈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시며 가는 중에 로마 병정에게 맞은 것도 바로 이런 채찍이었습니다. 채찍으로 심하게 맞을 경우 불구가 되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이 채찍은 로마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나 노예들에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지방에서는 자유인에게도 공공연하게 빠른 자백을 얻어내려고 심문을 할 때 사용했습니다.
천부장을 보면 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입니다. 그렇게 궁금했다면 무지막지하게 채찍으로 때리라고 명령하기 전에 먼저 바울을 붙잡고 물어보든지 아니면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이유를 물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왜 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느냐? 죽일 만한 무슨 이유가 있느냐?’ 그런데 천부장은 이도 저도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먼저 때려놓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고문부터 시작합니다.
왜 고문합니까? 사실을 알아내려고. 세상이 악해지고 사람들이 악해지니까 사실을 알려고 고문하기보다는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고문하는 세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죄를 정해놓고, 죄가 있는지 먼저 밝혀 놓고 벌을 주던지 때리던지 해야지 매 먼저 때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 않습니까? 천부장이라면 당시에 점령지에서는 대단한 힘이 있는 자리였는데 힘이 있을 때에 지혜롭게 지도력을 발휘해야지 무지막지하게 힘부터 쓰고 본다면 대단히 미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힘쓰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일수록 지혜로워야 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막 나가는 천부장에게 바울이 쓴 카드가 뭐였습니까?
3. 로마시민권? 천국 시민권?(25-29)
행 22:25-29 / 군인들이 채찍으로 치려고 결박하자 바울이 한 장교에게 말하였다.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오?' 26) 이 말을 들은 장교가 파견대장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어떻게 할까요? 저 사람이 로마 시민이랍니다.' 27) 그러자 파견대장이 와서 바울에게 `정말 당신이 로마 시민이오?' 하고 물었다. `예, 그렇소.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 28) `나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돈이 꽤 많이 들었소!' `나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입니다.' 29)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자 그를 채찍으로 치려고 서 있던 군인들은 곧 물러갔다. 파견대장 또한 바울을 결박하여 매질하라고 명령한 것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무서운 채찍질이 시작되려 할 때 바울은 자기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죽 줄로 묶는 백부장에게 자기가 ‘로마 사람된 자’ -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힙니다. 이 당시는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로마시민권을 획득하는데 몇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① 원로원에서 유공자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군인들에게도 주었습니다.
② 부모가 시민권자인 경우에 자녀는 자연적으로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28절에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 시민권자였다’고 말합니다.
③ 로마 국가에 특별한 의무를 다하는 자유시에 출생하는 자에게 시민권을 주기도 했고
④ 돈으로 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군인들에게 엄청난 돈을 받고 팔기도 했고 투자이민처럼 돈 많이 내고 시민권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천부장의 경우에는 스스로 자기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로마 시민권 얻기가 쉽지 않았다 - 어려웠다는 것은 그 만큼 로마 시민권자에게 특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로마를 배경으로 한 시민권자에게 돌아가는 특혜도 그에 상당하는 수준이었습니다.
- 로마 시민권자는 먹고 살기가 쉬웠습니다. 노예로 잡혀온 전쟁포로들을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배당해 줬습니다. 주인은 크게 일하지 않아도 노예들이 다 해줬습니다.
로마 시민은 정당한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채찍질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채찍질하려 했으니 부당하다고 항의한 것입니다. 만일 이 법을 어기고 로마 시민을 함부로 채찍질을 가할 때는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로마시민은 로마 법정에 호소할 수도 있었고
- 처형당한다 해도 끔찍한 십자가형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목 베임을 당했고 십자가형은 받지 않았습니다. 또 로마시민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매질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을 채찍질하려 했으니 천부장도 얼마나 당황이 되었겠습니까? 29절에 보니까 천부장도 결박한 것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30절 /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들이 그를 송사 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을 산헤드린 공회에 넘기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로마시민권자임을 내세워 육체적 고통은 비켜갔지만 여기서부터 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언제나 죽을 준비가 되었던 바울이 왜 구태여 로마시민권을 내세우며 위기를 벗어났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준비는 되어 있긴 하지만 자기 생명을 무모하게 던져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전도해야 하기에 그 방편으로 로마시민권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합니다.
❶ 바울은 자신의 로마시민권을 한껏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천부장 앞에서도 당당하게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위기를 피해 갑니다. 시민권 / 국적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해외에 나가서 문제가 생기면 누가 나서 줍니까? 대사관, 나라가 나서지요. 왜? 국민이니까! 미국 국민이 문제 생기면 온 나라가 나서서 해결합니다. 이것이 나라의 힘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국적, 영주권, 시민권 등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만 유효한 것입니다. 성도라면 적어도 ‘천국 시민권’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마 시민권, 미국 시민권보다는 천국 시민권 - 영원한 천국에 살 수 있는 천국 시민권이 더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영생을 누릴 수 있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고 위험에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심을 약속해 주는 천국 시민권. 자부심을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비록 현실이 힘들더라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는 확신을 가지고 싸워 승리합시다.
❷ 바울이 이처럼 환난과 고통 속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수없이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의 가슴속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바울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 중세에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이 수도사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고도 놀라운 것은 이 수도사가 문제가 있는 곳에 가서 특별히 하는 행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가서 조용히 침묵하고 그 사람 곁에 그냥 앉아 있다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병이 낫습니다. 한 가정에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 가정에 가서 하루를 지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떠납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한 고을에 문제가 있다면 언덕 위에 올라가 그 고을을 바라보고 조용히 침묵하다가 몇 날 후에 떠납니다. 그러면 그 고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런 사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성을 배우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이 수도사는 몰려든 사람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나 함께 가서 노동하고, 농사를 짓습니다. 그리고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가 되면 그는 나무 밑에 가서 침묵하기를 즐겨합니다. 기다리다 못해 제자들이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스승님의 인생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성경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이 무엇을 묻든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마디 대답 외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결 론
겸손하게 말씀을 들읍시다. 남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변화된 성숙한 인격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 들을 때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변화됩니다.
예수 믿고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 예수는 죽은 예수 아닙니까?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우리도 세상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을 만나게 됩니다. 좋은 일도 만나고 궂은 일도 만납니다. 쉬운 일도 만나고 어려운 일도 만납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꼭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며 사모해야 할 것은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게 하옵소서"입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평생 소원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