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막 9:14-29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14-29 /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마17:14-20,눅9:37-43상반절] 예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와 보시니 다른 아홉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학자 몇 사람과 논쟁을 하고 있었다. 15) 사람들은 예수를 보자 모두 달려와 인사를 하였다. 16) 예수께서 `무슨 일로 이렇게 다투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17)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며 말하였다. `선생님, 제가 병든 아들을 선생님께 보이려고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귀신 들려 말을 못하는데다가 18) 한번 발작이 일어나기만 하면 거품을 내뿜고 이를 갈며 몸이 빳빳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들이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1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믿음이 적은 세대여. 내가 얼마나 오래도록 너희와 함께 있어야 온전히 믿겠느냐? 그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라.' 20) 그들이 아이를 예수께 데려오자 귀신이 예수를 보고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 아이는 땅에 넘어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다. 21) 예수께서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으셨다. `아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되었는가?' 아이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어렸을 때부터입니다. 22) 발작이 일어나면 아이는 불속이나 물속으로 마구 뛰어들어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만일 선생님께서 하실 수만 있다면,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2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실 수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만일 네가 믿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다.' 24) 아이 아버지가 소리쳤다. `제가 믿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저를 도와주십시오.' 25) 예수께서는 군중이 더욱더 밀려드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이 말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 26) 그러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며 그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키고 나갔다. 그 바람에 아이가 쓰러져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군중들의 입에서 `아이가 죽었구나' 하는 말이 흘러 나왔다. 27) 그때 예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아이가 일어나 돌아갔다. 28) 그 뒤에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조용히 물었다. `왜 저희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기도하지 않고는 쫓아낼 수 없다.'
산 위에서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의 외아들이, 산 아래에서 귀신에게 사로잡힌 외아들에게 오십니다(눅 9:38). 산 위에서는 순종하는 아들을 보시는 하늘 아버지의 신뢰와 기쁨이 있었지만, 산 아래에서는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의 탄식이 들려옵니다. 주님은 바로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산 위(하늘)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산 아래(세상)로 내려오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14-21, 25-26)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상태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17-18). 그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아들을 데리고 왔지만 그들이 능히 쫓아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19) 예수님께서는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느냐며 탄식하십니다. 당신의 죽음이 멀지 않은데 제자들과 세상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보자 아이를 흔들어 대어 아이가 땅에 쓰러져 뒹굴었습니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귀신은 예수님과 그분의 권능을 알고도 마지막까지 발악합니다(25). 사탄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 5:8). 이것이 우리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22-24, 27-29) 이제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일깨워주십니다(23). 믿는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통로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여는 것이 기도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사탄과 맞대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요, 기도는 나와 세상이 하나님 안에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의 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 결론입니다(29).
적용: 예수님의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믿음과 기도가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기도하면서 세상의 유혹과 맞서라고 말씀하십니다(14:38). 제자들을 십자가 위의 영광으로 끝까지 데려가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오늘도 오직 믿음, 오직 기도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도 기도를 통하여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결코 고통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지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한다면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 설 교 >
내가 믿나이다
서명석 목사
바른 진단을 할 때 바른 처방이 나옵니다. 요즘 연약한 교우들을 보니 보다 정확한 진단을 하기 위하여 검사하는 부위에 따라 MRI를 찍기도 하고 CAT scan을 하기도 하고 초음파 검사도 하기도 합니다. 공생애 사역의 후반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계속 진단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참 제자가 되기 위한 처방을 제공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도 진단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각자를 비추어보고 그에 따른 처방을 적용하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제자로서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1장부터 8장까지 마가복음의 전반부라 한다면 9장부터 후반부입니다. 귀신을 쫓는 사역은 전반부에 여러 번 나오지만 후반부에는 한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도 제자 훈련의 기회로 삼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당한 수난에 대하여 처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실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더불어 변화 산에 올라가 장차 갖게 되실 영광의 모습을 잠시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며 계속 머물기를 원하지만,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옵니다.
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셨지만, 산 아래에서는 귀신이 한 아버지의 아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산위에서는 순종하는 아들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있었지만 산 아래에서는 귀신 들린 아버지의 탄식이 있습니다. 산위에서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산 아래에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 오십니다. 산 위 영광과 대조적으로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이 귀신 때문에 쩔쩔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산 위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주님의 진단: 불신(14-19)
본문을 보니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며 무력한 모습을 보이자 금방 조롱거리가 됩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음대로 살지 못하고 각종 사건, 사고에 연루되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일을 저지를 때 세상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은 교회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없는 산 아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귀신 들린 아이로 인한 고통과 탄식, 그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불신과 자기가 잘났다고 우기는 논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들과 함께 내려오시다가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산 아래 있던 아홉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귀신 들린 아이를 제자들 앞에 데리고 왔을 때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7을 보면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두 사람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기에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홉 명이 다 달라붙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볼거리가 있나 하여 점점 모여드는데 아이에게 붙어있는 귀신은 떠나지 않으니 제자들은 몹시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무엇인가 시빗거리를 찾고 있었던 서기관들에게 제자들의 무력한 모습은 놓칠 수 없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서기관들은 무능한 제자들을 비난하며 내친 김에 예수님까지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세 제자와 더불어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온 무리가 예수님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에서 영광의 광채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무리들이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왜 서기관들과 변론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묻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먼저 주님 앞에 나타납니다. 선생님,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어디서나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를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마침 선생님이 안 계셔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저들은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지금 이 말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 누가 이 말을 듣고 있습니까? 제자들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흥분하여 제자들의 무능함을 질타합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것은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 아래의 사람들을 가리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부릅니다. 그동안 말씀을 전하는 권세, 병을 고치는 권세, 귀신 쫓아내는 권세,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능력을 행하셨는데 여전히 예수님에게 인격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실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제자들을 포함한 세상을 향한 것입니다. 또한 산 아래 남아 있던 세대뿐 아니라 그가 승천하신 후 남겨진 오늘의 세대를 향한 것입니다.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가 아주 가까웠음을 보여줍니다. 아들의 고통을 보고 제자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요청한 아버지처럼 세상은 구원의 손짓을 하고 있지만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들이 제자들처럼 무능력 속에 빠져 있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며 행동하지 않을 때,‘예수님을 믿으라’하면 ‘너나 믿으라’는 식으로 우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는 주님의 탄식을 듣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확신 속에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처방 1: 믿음(20-27)
예수님이 귀신 들린 아이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귀신이 예수를 보자 아이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땅에 엎드러져 뒹굴게 하고 거품을 흘리게 합니다. 귀신은 예수님과 그분의 권능을 알고도 발악을 합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기대를 꺾어놓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아이를 고치기 위한 정보가 필요해서 물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묻지 않고도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 아이의 상태를 아시고 또한 고치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던지신 이유는 그 아버지가 말하면서 자기의 안타까운 상황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둘러선 무리들에게 그가 당하고 있는 상황을 알게 함으로 그 아이를 고친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함입니다. 자기 아들을 고쳐보려고 아버지가 그동안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겠습니까? 용하다는 사람들은 다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7:14에는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렸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릴 때 아이의 병이 시작되었고 귀신이 물과 불에 자주 던졌다는 것은 이 병이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임을 암시합니다. 더구나 제자들의 치유 실패는 예수님에 대한 의구심을 부추겼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라고 말한 것은 믿음의 고백이 아닙니다. 부탁을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반드시 치유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도 나름대로 무엇인가 해보라는 제안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며 우리말 번역에는 살이 붙어 있지만 원문에는 단순히 “할 수 있거든(If you can)”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 그 아버지에 대한 주님의 책망은 사실은 제자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히 4:12). 예수님이 큰 소리로 말씀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아버지의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갑니다. 말씀이 그 안에 역사하는 순간 자기의 부족함이 깨달아집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않은 것이 마음에 찔립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I do believe; help me overcome my unbelief!). 아버지가 지금까지 자기 집의 문제는 자기 아들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들만 온전해질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진짜 문제는 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부탁하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곧바로 주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치유 뿐 아니라 그 아버지의 믿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질병의 치료는 잠깐으로 그치지만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육신의 병보다 아버지의 영혼의 병인 불신앙을 먼저 치료하십니다. 아버지가 큰 소리로 외치니 무리는 무슨 일인가 하여 사방에서 모여듭니다. 그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 먹은 귀신아” 그의 정체를 밝히면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명령하시니 즉시로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로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축 늘어집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수군댑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섭니다. 무리들은 깜짝 놀랍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아버지가 믿음을 가지니 귀신들린 아이가 온전해집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는 아버지의 절규는 바로 제자들의 고백이 되어야 하며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아버지의 절규를 들으시고 아이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 주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위해서, 산 아래에서 더러운 귀신에 의해 고통당하는 그 아이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문제없는 사람, 문제없는 가정, 문제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를 깨달으며 주님께 도와달라고 엎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시기보다 고쳐주기 원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약속하십니다. 이 불신의 시대에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믿음을 대체할 성공 전략은 없습니다.
주님의 처방 2: 기도(28-29)
제자훈련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아니라 제자들이 귀신 쫓는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사역의 현장에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지만 그 이후에 예수님이 그 권세를 거두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실패한 것은 과거의 성공에 도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에게 나타난 능력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들에게로 시선이 옮겨졌을 것입니다. “내가 안수하면 병이 낫고 내가 기도하면 귀신이 나간다”는 자만에 빠졌을 것입니다. 믿음은 관계이기에 늘 자라고 다져져야 합니다.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9명의 제자들은 무리 앞에서 아마 귀신 들린 아이를 놓고 서로 먼저 고치겠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 축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에 합당한 믿음의 자세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시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떠나갔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사탄에 매여 있던 한 영혼을 구하셨고, 이 사건을 논쟁거리로 삼던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권위 있게 꾸짖어 귀신을 쫓아내시는 주님의 권능이 대조된 가운데 제자들은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집에 들어 왔을 때에 제자들은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마가복음에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종합해 보면 제자들은 믿음이 적었기에 적게 기도하였고, 적게 기도하다보니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여전히 자기들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하다가 창피를 당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 능력을 행하는 믿음이요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신 성품을 이루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자기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인격적인 응답입니다. 때로 고통을 동반하는 회개와 수고가 요구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선물도 하나님 자신을 날마다 신뢰하는 지속적인 믿음의 기도가 없을 때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참다운 성도의 능력은 신앙경력이나 과거의 경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실하고도 지속적인 교제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교제를 나눌 때 우리의 믿음이 자랄 뿐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이 해결하실 수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일을 능히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염려를 기도 제목으로 바꾸고 주님께 매어달리며 귀한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광야에서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권세를 받았지만 믿음으로 기도하지 못하였기에 사역의 현장에서 실패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문제가 영적이든 육신적이든 사람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그 도우심을 얻기 위하여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 땅의 어두운 권세를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 부족함을 인하여 한탄하기보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기도함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29절에 “기도 외에는”이라 되어 있는데 나중에 기록된 일부 사본들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순절, 특히 고난주간에는 금식을 많이 합니다. 한번 묻습니다. 보통 기도보다 금식기도가 더 효험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실제로 믿음의 사람들이 금식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경험합니다. 다만 금식기도 자체에 효험이 있다거나 금식을 하면 하나님이 빨리 응답하신다거나 금식을 마치 문제해결을 위한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금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굵은 베옷을 입고 기도하고 옷을 찢고 기도하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기도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보통 기도보다 금식기도가 더 좋고 1일 금식기도보다 40일 금식기도가 더 영험하고 그것보다 일천번제 기도가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지극한 정성으로 드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내가 행위를 더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자랑스럽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기도응답도 빨리 주시고 문제도 잘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금식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도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셨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욕심을 절제하고 기도에만 전념하도록 하며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단 9:3,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이 굶으며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낮아진 마음 자세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얼굴을 주께로 행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금식기도를 하고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 5:33)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금식을 하는데 반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투덜댔습니다. 그들의 금식은 자기만족과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지 자기 마음을 낮추고 주님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재물을 사랑하고 외식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했지, 그 마음과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금식기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쁘게 받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낸 것도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그 백성들에게 능력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이었듯이 우리 능력의 원천은 금식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금식기도를 했더니, 내가 100일 작정기도를 했더니 하는 간증들이 자칫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 의를 세울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금식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에 의해 제한받지 않습니다. 제가 금식기도의 가치를 경시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금식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기도의 능력, 금식 기도의 능력을 이야기 할 때 언제나 그 능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기도는 그분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수단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의 원천 = 하나님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 = 기도
기도에 전념하도록 도와주는 수단 = 금식
산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지만 산 아래는 고통과 탄식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개입하시니 고통이 치유로, 탄식이 기쁨으로, 불신이 믿음으로 바뀝니다. 문제를 통하여 먼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주님의 능력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여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기에, 구하지 않기에, 순종하지 않기에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어떻게 진단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처방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성경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과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실상은 가난한 자이면서도 부한 자처럼 행하지는 않습니까? 이제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아뢰며 주님의 긍휼하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께서는 높은 산위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변화산의 영광을 뒤에 두고서 심각한 어려움에 놓인 산 아래 제자들에게 내려오십니다. 주님은 결코 제자들을 아주 떠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더욱 신뢰하고 사모하도록 잠시 자리를 비우셨을 뿐입니다. 주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두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우리들을 내버려 두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할 때 다시 오시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 9:38절을 보면 귀신 들렸던 아이는 외아들이었습니다.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아들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 있고 42절에는 나은 아들을 그의 아버지에게 도로 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것들이 병들거나 망가지지는 않았습니까? 우리의 아들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며 창백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딸들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자녀들의 고통과 수치와 실패를 안으시려고 가까이오십니다. 주님은 그것들을 우리의 손에서 받아내기 위해 오늘도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회복시켜서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하며 기도해야합니다.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며 기도해야합니다. 당면한 문제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됨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회의로 가득한 세대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영광의 산을 내려와 우리의 짐을 지고 수난의 산 골고다로 올라가셨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
박한응 목사 / 찬 송 : 93, 340, 343, 432, 434, (457)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도 하루를 허락하셔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으로 이 하루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지금은 사순절기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온 후에 되어진 기적의 사건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항상 구하는 자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이 이 시간도 각가지 은혜와 은사로 충만 충만하게 베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믿습니다’를 연발하면서도 정작 믿음의 본을 보이고 또 믿음을 증거해야 할 때는 여지없이 세상 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아주 비근한 예로 주일성수를 하야여 한다는 것은 교인이라면 누구 나가 그렇게 믿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탄 마귀들은 우리 성도들이 한가롭게 주일을 지키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꼭 주일날 무슨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주일날 아들딸들이 부모님 생일잔치를 해 준다느니, 아니면 주일날 친척 중에서 결혼식이 있다든지, 또 주일날 군대 간 아들의 면회를 가야할 일이 생긴다든지, 내중내 가만히 있던 사람이 느닷없이 주일날 품 갚으라고 한다든지, 등등 피치 못할 일들이 우발적으로 생기면 여지없이 믿음을 배반하고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행함이 없는 사람이요 죽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고 말씀하셨고 야고보서에도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대상이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나 아니면 제자들일지라도 믿음 없는 것을 보시면 즉시 책망을 하셨습니다.
(막4:40)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 없는 사람들과 또 믿음 있는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들은 믿음 있는 사람이 되어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과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 있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믿음 있는 사람은 칭찬을 받았는데 믿음 없는 사람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1. 먼저 믿음 없는 사람은 누구이며 어떤 책망을 받았는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아홉 명의 제자들을 남겨두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대동하시고 등산을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아홉 명은 남겨두고 세 명만 데리고 가셨을까 하고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사랑하시는데 차별을 하신 것일까? 세 명은 많이 사랑하시고 나머지 아홉 명은 덜 사랑하신 것일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결코 그런 분이 아니라고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취게 하시고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비를 골고루 내리시는 너그러우신 분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상에서는 자신을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해서 사죄를 비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가신 곳이 세 번 있습니다.
①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 시체가 있는 방에 가셨을 때와
②오늘 본문처럼 변화산 위에 올라가셨을 때와
③마지막 잡히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을 때입니다.
이 세 곳은 모두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이며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또한 힘들고 어려운 곳이기도 합니다.
산 위에 올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렵게 왜 산에 올라가는가 하고 아홉 명의 제자들은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강제성을 띄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따라오면 제자를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서도 대접받고 유익한 장소에는 항상 따라갔지만 힘들고 어렵고 손해보고 고생하는 그런 곳에는 가기를 꺼려하는 제자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고 하셨지만 오늘날도 주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1. 예수님을 따라간 세 명의 제자들은 산위에서 신령한 환상을 보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을 따라서 올라간 산 위에서 지금까지 평생 말로 듣기만 하던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눈을 뜨고 바로 볼 수조차 없이 변형되신 예수님의 찬란한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세상으로 내려오기가 싫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환자들로 아우성이고 또 유대인들은 이유 없이 예수를 책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고 이 산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빛난 구름도 사라졌고,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도 그쳤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 남아 계셨습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2.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에는 들은 체도 안 하시고 제자들을 독촉하여 산을 내려왔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현실의 세상을 떠나 베드로의 말과 같이 산상에 집을 짓고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영광중에 상주하기 위하여 소위 수도원 생활을 선택하였다면 편안한 생활은 하였을지 몰라도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온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기에 산을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산을 내려옵니다. 아마도 내려오면서도 예수님의 심중의 알지 못하였기에 불평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세 명의 제자는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어도, 자신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내 맘대로 안 되고, 또 교회에서 하는 일이 내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일단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면 그것에 내게 축복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3. 산 아래에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뒤에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는 큰 사건이 생겼습니다. 바로 어떤 사람이 귀신들려 벙어리가 되고 간질 하는 아들을 데리고 와서 귀신을 내어 쫓아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즉시 귀신에게 명하여 나가라고 하였지만 귀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도 한때는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전도하러 가서 귀신을 좇아내기도 하였지만 이날은 웬일인지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초조해지지 시작하였고 이로 인하여 제자들과 사람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서둘러 하산하신 까닭이 여기 있었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이 있었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혀 많은 고통을 당하는 한 영혼이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 기적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산 위에서 신령한 은혜의 체험을 하고 돌아온 세 명의 제자들에게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오늘 이 시간 은혜 받고 돌아가면 분명히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을 기다리는 손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기다리는 손길이 있습니다.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는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4. 예수님은 남겨 두었던 9명의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자초지종을 들으신 후에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19절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예수님은 그 동안 3년 동안이나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시기도 하시고 보여주시기도 하시면서 가르치셨지만 지금 제자들의 믿음은 너무나 한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까? 과연 지금 이 시간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없고 패역한 너희여!!” 하고 책망 듣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들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께 책망 듣지 말아야 합니다. 책망을 듣지 않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믿음 있는 자를 칭찬하셨습니다. 축복하실 때에도 사람을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누구도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자신의 믿음 없는 것과 잘못을 깨닫고 즉시 시정하여야 합니다.
아들이 귀신들려 간질하고 벙어리 된 것을 고치려고 소문만 듣던 예수님을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만날 수 없고 그의 제자들을 만나서 고쳐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 오셨는데도 반신반의 한 나머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라고 하자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왔던 아비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즉시 고백하기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책망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실 때에 절대로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면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잘하려고 하였는데, 결과로는 주님 뜻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하고, 자기 생각을 하여,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잘못한 것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기만 하면 회개할 수 있고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시49:20절 말씀에 이르기를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6. 이 외에도 주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제자를 책망하였습니다.
①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에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마6:30-31)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② 예수님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믿음 없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마8:26-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③ 예수님은 제자들이 떡 남은 것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할 때 책망하셨습니다.
(마16: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④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막16:13-14)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⑤ 예수님은 또한 재림하실 때에 믿음 있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눅18:8)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2. 이번에는 믿음이 있고 믿음이 충만해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들이 무슨 칭찬을 받고 또 어떤 상급을 받는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1.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아들을 고치려고 찾아온 아비의 믿음을 칭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귀신들려 간질하고 벙어리 된 것을 고치려고 소문만 듣던 예수님을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만날 수 없고 그의 제자들을 만나서 고쳐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 오셨는데도 반신반의 한 나머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라고 하자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왔던 아비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즉시 고백하기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2. 예수님의 제자 중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질문에 할 수 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이 와서 예수님께 청탁을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냐” 라고 묻자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주님은 조금은 실망도 하시고 걱정도 되어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그들이 십자가의 쓴잔이 어떤 고통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대답을 하였든지 모르고 하였든지 간에 예수님의 질문에 “할 수 있나이다”라고 담대하게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는 것을 알고 자신도 걷게 해 달라고 하여 물위로 걸었습니다.
(마14:28-29)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니라”
예수님께서 벳새다 들녘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제자들을 명하여 배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라고 하시고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배를 저어 가는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님이신 것을 알고 자신도 명하여 물위로 걷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능력이시면 자신도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위로 걸은 사람은 예수님 외에 베드로가 전무후무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4.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그의 병이 고침을 받았을 때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막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12년 동안을 투병 중이던 여인이 간신히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믿음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 헬라 여인이 자기의 딸이 귀신이 들려 고통당하는 것을 고쳐 달라고 간구할 때 그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왜 그 먼 곳까지 가셨을까요?
그때 가나안 여자인 한 여자가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마15:22)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할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신 말씀대로라면 이방나라인 두로 지방에 왜 가셨을까 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간구 하였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여전히 냉정하였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낙심하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자 주님이 감동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렐루야!!
이와 같은 끈질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응답하시고 들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이와 같은 결과를 볼 때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을 가신 것은 바로 이 한 여인의 딸을 고치려고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이 얼마나 간구하여 부르짖었으면 예수님이 이방나라인 그곳까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서 고쳐 주셨겠습니까?
6. 백부장이 자기의 하인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이 가서 고쳐 주신다 고 하였으나 말씀만 해 주시면 낳을 줄로 믿을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돌아오시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 때에 백부장이 나와 간구하기를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하는 말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감동하시고 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마8:10-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성도의 자본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파선한자와 같습니다.
(딤전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삶은 확실히 풍성한 삶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에서나 우리들 주변에서 기적으로 사는 믿음의 주인공들을 많이 봅니다. 저들은 모두 육신적으로는 환난을 당해도 영적으로는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나의 생활이, 나의 영혼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믿음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믿음 없이 어설프게 하는 신앙생활은 참으로 중노동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가지고 하는 신앙생활은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의 연속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믿음의 감격과 기쁨의 기도로부터 오는 진정한 하늘의 평화를 맛보지 못하였다면 아직도 미숙한 믿음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믿음으로 환난 중에 기뻐하고, 내가 내 믿음으로 감사할 수 없는 중에 감사하고, 내 믿음으로 슬픔을 당해도 기뻐하고, 감금을 당하여도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고 풍성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내가 세상을 이기며,
믿음으로 남모르는 평강을 누리고 살며,
믿음으로 시간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며,
믿음으로 주님께 헌신하며,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축복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오직 믿음으로 기쁨과 감격과 평강이 있어야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오늘 이 예배를 드리다가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지위나 명예가 권력이 줄 수 없는, 또 가족이나 부모가, 또는 자식이, 줄 수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위로가 폭포수 같이, 소낙비 같이,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이제 온 인류를 구원하실 십자가의 구원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데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자들아!”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와 여러분들은 과연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듣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시간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으면 이 시간 부르짖어 기도하여 믿음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계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솔직하게 고백을 하여 이 말세에 주님이 주시는 성령과 능력을 충만하게 받아 사명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나는 할 수 있을까?
노경모 목사
'나는 사랑받을 만한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신념은 부모가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유능함에 대한 신념은 격려와 칭찬만으로는 생기지 않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스스로를 유능하게 생각하도록 키우는 데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야!"라는 신념은 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힘들어도 스스로 참고 견뎌내는 경험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직접 해보는 것만큼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어려운 일을 해낼 수록 자신감과 자부심은 더욱 커지지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을 부모가 대신해주는 것은 사실 아이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숙할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자녀교육 전문가인 조선미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격려하십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단다, 딸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인도하마’ ‘너는 나에게 보배롭고 존귀한 자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우리 또한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좋아합니다.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런 설교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알지 못하고,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과 자부심이 부족할 때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힘이 되고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든든하게 세우는 은혜를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와 위로 속에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해 갑니다. 마치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 되었는데도 우리가 아직 여기가 좋아오니하고 여기에 그냥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유가 맛있고 고소하고 부르럽게 목구멍으로 솔솔 넘어가니 얼마나 좋아요. 아이가 이제는 젖을 떼고 이유식을 해야하고 밥을 먹어야 하는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우유만을 마시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걱정을 합니다.
이제는 대소변을 가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기저귀를 차려고 한다면 걱정이 되지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음성, 격려의 음성, 위로의 음성, 칭찬의 음성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계속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좀 더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좀 더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좀 더 단단한 음식을 먹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서 5:12-14 말씀을 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우리가 초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수준이 있고 깊이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배운 말씀으로 우리의 지혜가 지식과 지각이 성장해서 그것으로 악한 것과 선한 것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아니면 마귀의 유혹의 계략인가를 분별도 해야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도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군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일들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군인은 예수님이 명령하는 것을 그대로 복종해야 하고 죽은 한이 있더라도 그 명령을 따라합니다. 마귀들과 싸워야 합니다. 악과 싸워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은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으로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군인으로서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유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야’ ‘너는 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인도해 주마’와 같은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을 좋아하고 이 음성에 안주해 있으면 안됩니다. 이 음성을 듣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이 음성만으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군사로 자격을 갖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과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조미선 박사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힘들어도 스스로 참고 견뎌내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십니다. 그냥 편하게 기저귀나 차고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우유나 죽이나 먹으면서 격려와 칭찬과 좋은 말을 듣기만하고 바닥에 뒹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일어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각을 통해서 우리가 분별하고 배우고, 훈련받고, 고난을 받고, 실천하고 도전하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먼저 홍해를 육지같이 갈라 놓으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어린 수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기들이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먼저 건너갈 수 있도록 다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생활 한 지가 오래되고 믿음이 자랐다고 생각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다루지 않으실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땅 바로 앞까지 왔습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요단강물이 넘치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요단 강을 먼저 갈라 놓지 않았습니다. 먼저 요단강물을 발로 밟으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물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러셨습니까? 이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고 체험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영적으로 어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 내 앞에 있는 홍해를 갈라주셔야 내가 건너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는 식으로만 기도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으면 안됩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음성이 있을 때 과감하게 요단강으로 둘어가는 식으로 순종하면서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사람의 아들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알고 너무나 안타가워 하셨습니다. 본문 18-19절을 봅시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귀신을 내어 쫓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귀신을 내어 쫓지를 못했을까요? 우리는 궁금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무기력하고 연약하고 실패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19절을 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제자들은 이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다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실은 마가복음 6장 7절을 보면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6장 13절을 보면 실제적으로 이미 귀신을 내 쫓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들어간 귀신은 과거에 자기들이 쫓아냈던 그런 귀신보다도 강한 귀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귀신에 대해서 아이의 아버지는 18절에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22절을 보면 이 귀신이 아니를 물과 불에 자주 던졌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귀신을 향하여 더러운 귀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못하고 못듣는 귀신이라고 했습니다. 하여튼 이 귀신에 대하여 제자들은 겁이 났습니다. 과연 이 귀신이 나갈까 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한 두 번 귀신을 내어 쫓아보려고 해 보았지만 되지를 않자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할 수 있다는 강하고도 확신에 찬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가졌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18년동안 피가 몸밖으로 흘러 빠져나가는 혈루증이라는 무서운 질병을 앓아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움직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것을 비집고 예수님께서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 여인이 18년 동안 앓아왔던 고약한 혈루증이 즉시 낫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5:27-28을 봅시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내가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는 나을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어려움과 방해가 있지만 그것을 뚫고 예수님께 가서 그 옷자락에 손을 댔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5장 3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네 믿음이 너를 고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성숙한 성도라고 말할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군인으로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는 야고보서 4장 7절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는 요한복음 14장 14절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마태복음 7장 7절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기도는 병든 자를 고치리라’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안 믿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할 수 있을까? 의심하면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6-7절에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영국의 한 도시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 바로 옆에 술집이 생겼는데 예배시간마다 술집에서 떠드는 소리, 음악소리, 술 취한 소리가 교회까지 넘쳐 들어왔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술집이 나가도록 모여서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정말 그 술집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술집주인은 교회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교회대표로 나온 집사는 우리가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꼭 그것 때문에 술집이 망했겠느냐고 펄쩍 뛰었습니다. 드디어 판사의 판결이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판결이 났을까요? '술집 주인 믿음 있음. 교회 대표 믿음 없음'
우리가 믿음을 가졌으면 이제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모든 것을 이루어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병을 떠나갈지어다” 하면 소리내어 기도해봐야 하지 않습니까?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를 피하리라는 말씀을 믿는 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는 떠나갈찌어다’ 한 번 크게 외쳐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나는 못해 나는 할 수 없어어 목사님이나 하지 나는 안돼’하고 이렇게 우리가 나약한 믿음의 상태에 놓여 있으면 안됩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기도로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28-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물었을 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은 것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기도합니다. 식사할 때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하고 초보적인 기도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기도할 때 성령의 권능이 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하기를 게을리합니다. 기도하기를 힘들어합니다. 기도하기를 싫어합니다. 기도를 해도, 그냥 형식적으로 간단하게 해 치웁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무기력해집니다. 연약해 집니다.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이 군인으로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인이 식료품 가게에 와서 성탄절 만찬에 아이들을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식료품을 달라고 했습니다.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주인이 물으니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서 기도밖에는 정말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기도를 종이에 써주십시요. 그러면 그 무게만큼 식료품을 주겠소.” 놀랍게도 부인은 접혀진 노트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인에게 건네주면서 “우리 어린애가 지난밤에 아파서 옆에서 병간호를 하며 기도를 적어 두었지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읽어 보지도 않은 채 주인은 구식 저울의 추를 놓은 곳에 기도가 적힌 종이를 놓고는 “자 이 기도가 얼마치의 식료품 무게가 되는지 달아 봅시다”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놀랍게도 빵 한 덩어리를 놓았는데도 저울은 꼼짝을 안했습니다. 다른 식료품을 올려놓았는데도 저울은 움직이지 않자 주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드디어 저울에 더 이상 올려놓을 수 없으니 당신이 봉지에 담아 가시요. 나는 바쁘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눈물 흘리고 감사하며 그 부인은 감사 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저울이 고장 난 것을 얼마 후 주인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주인은 가끔 의아했습니다. 그때 일이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왜 그 부인이 미리 기도를 써가지고 왔을까? 왜 그 부인이 저울이 고장 났을 때 왔을까? 그때 그 부인이 적은 기도문은 “주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였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군사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하고 초보의 신앙의 단계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능력있을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끝까지 이 믿음으로 전진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단순히 기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금년에는 오늘 주신 말씀대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삶을 사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이종철 목사
주님과 제자 일행은 높은 산에서 산 아래의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높은 산과 산 아래 세상 둘 다 필요합니다. “종교에는 고독이 있어야 하지만 고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바클레이) 우리는 고독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고독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산 아래의 세상에서 생활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독 속에만 있는 수도원 운동이나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주님이 원하시던 모습은 아닙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던 베드로를 데리고 주님은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됩니다. 가끔은 은혜의 높은 산으로 올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목마르고 기진한 현대인들에게는 은혜의 높은 산이 더욱더 필요합니다. 고요한 가운데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인생은 높은 산과 아래 세상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전진해 가는 순례길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오자마자 주님과 제자들은 혼란과 무능력과 맞대면 하게 됩니다. 어떤 아이의 아비가 귀신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이 아이는 상태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귀신들렸다고도 하는데 그 증상은 간질병과 유사했습니다. 어디서든지 넘어져 입에 거품을 흘렸습니다.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졌습니다. 아비의 말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는데 자주 물에도 뛰어들고 불에도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이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지만 예수님은 산으로 가시고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다. 귀신을 쫓기는커녕 저희들끼리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서기관들까지 합세하여 논쟁이 붙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주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9)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시며 자신이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재한 곳에서 이제는 제자들이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능력하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답답함은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향한 주님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있기 때문에 실망도 큰 법입니다. 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서 치유와 권능을 행하고, 진리와 말씀을 전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 교회가 무능력해졌다면 큰 문제입니다. 등대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그렇지 못한다면 세상은 혼란에 쌓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무능력해지는 원인은 대부분 세상의 물질과 권력을 가까이 할 때 나타납니다. 물질과 권력의 힘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중세기에 대신학자 아퀴나스와 교황 이노센트 4세간의 대화는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교황 이노센트 4세가 라테란 성당 문으로 보물을 가득 담은 자루들이 옮겨지는 모습을 보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나, 이젠 교회가 ‘은과 금은 없어도’란 말을 하던 시대도 지나갔네. 저 보물들을 보게” 교황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고 말했던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이여 오늘날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현대 기독교를 향하여 이렇게 냉소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심심한 물과 같은 교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위기의 때에, 도움이 필요할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을 도와 줄 대상이 필요합니다. 혼돈의 시대에 사람들은 진리의 길을 보여줄 존재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대이고, 이런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며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하며 화를 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저는 우리 사회가 마치 귀신들린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성지 순례를 하면서 좋았던 것은 무엇보다 한국사회를 떠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람을 만나지 않고, 한국 뉴스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한국이라는 현실을 대하자마자 다시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사회는 물질의 귀신에 들려 있습니다.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경쟁과 속도와 효율성으로 몰아갑니다. 경쟁을 통해 1%의 특권층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도록 만듭니다. 1%에 들어가지 못한 99%는 절망하고 자존감을 잃습니다. 이익극대화라는 명목으로 비정규직 등 저임금 구조와 불안정한 노동을 강요합니다. 앞서 가지 않으면 죽는다는 듯이 모든 비인간적인 제도를 합리화합니다. 사람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물질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이고 이것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듭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물속에라도, 불속에라도 뛰어들 태세입니다.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미쳐 있습니다. 낙오되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자녀들을 닦달을 합니다. 영어교육이다 학원이다 하며 자녀들에게 온 재산과 몸과 마음을 올인하며, 심지어 멀리 해외로까지 유학 보내는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덕분에 우리 자녀들은 행복하지 않고 학업과 경쟁에 미쳐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념의 귀신에 들려 있습니다. 경제는 더 성장하고, 사회는 더 자유롭게 되어 가고 있는데 이념의 갈등만은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좌익, 우익, 빨갱이라는 단어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 사상과 주체사상 귀신에 들려 있고, 다른 한쪽은 반공주의라는 귀신에 들려 민족을 분열과 갈등으로 끝없이 몰아갑니다. 역사 문제도 좌파 우파, 정치문제도 좌파 우파로 나뉩니다. TV를 틀거나 인터넷 창을 열기만 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정의나 진리나 상식은 없고 어느 편이냐만 문제 삼고 있습니다. 언론 또한 진실이나 정의에는 관심 없고 자기편에 유리하면 어떠한 왜곡이나 편파보도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미친 사회에서 쉴 곳이 어디 입니까? 이런 혼란스러운 곳에서 바른 길을 제시해 줄 곳이 어디입니까?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그러한 일을 감당해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해결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물질과 권력을 탐하고, 이념과 갈등의 중재자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열하고 악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떠나고 말씀을 떠나면 교회는 무기력해집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하여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하고 탄식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요즘은 가톨릭이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분열되지 않는 모습과 물질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성직자들의 모습이 감동을 줍니다.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정의의 목소리를 내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가톨릭은 성장하고 개신교는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9월은 개신교 각 교단총회가 있는데 여기서 보고하는 성도수 추세를 보면 대부분 지난 한 해 동안 숫자가 감소했다는 통계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위기의 때에 기댈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병원처럼 병을 고쳐주고, 기업처럼 일자리를 주고, 정치 권력가처럼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고, 상담사나 정신병 전문의처럼 우울증을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함으로 인생의 위기를 해쳐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 마음에 심어주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요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주님은 무능력한 세대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26) 아이의 아비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보이신 주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실로 위대한 선언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는 예수님의 말씀을 덧붙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어느 때는 힘을 얻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실상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를 많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이 치료되게 해달라고 해도 응답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물질이나 어떤 문제에 대한 간구도 응답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는 우리 믿음이 부족한 탓입니까? 예수님도 십자가를 피하지 못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난과 고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자 밥이 되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이 부족했습니까?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포인트를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데 두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강조점은 믿음에 있습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이나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은 믿음의 힘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과장법입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산이 옮겨지는 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들이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할 뿐이고, 믿음으로 도전할 뿐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보다 믿음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기적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러합니다. 예수님 안 계신 상황에서도 기적을 가져다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었습니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풍부한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탓이 아니다. 은혜가 감질나게 조금씩 흘러드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어중간하게 믿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에게서 배울 수 있다.” 아이를 고치는 것은 예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나에게, 나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제가 가끔 말씀드렸던 예화가 믿음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고사성어 중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태행산과 왕옥산 기슭에 우공(寓公)이라는 나이 90세 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노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을 위해 봉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을 가로 막고 있는 태행산과 왕옥산을 옮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두 산이 마을의 통행에 지장을 주고 마을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결심을 한 우공이 시작했던 일은 고작해야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산에서 흙을 퍼다가 바다에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우공을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언제 저 태산 같이 큰 산을 다 옮길 수 있겠느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때 우공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못 이루면 내 아들이 이룰 것이요, 내 아들이 못하면 그 손자가 이을 것이니, 그러다보면 산은 언젠가는 모두 없어질 것이요.”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 산의 산신령들이었습니다. 산신령들은 곧 바로 하늘의 천제에게 가서 우공이 우리 산을 없애기 전에 먼저 옮겨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산이 원래의 자리에서 먼 곳으로 옮겨졌다는 고사입니다.
이것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의 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낙담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용기 있게 나가는 것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일도 쉽게 말 한 마디로 이루지지 않습니다. 며칠을 가고, 심지어 몇 년의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때에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이루실 수 있지만 주님의 다른 계획이 있기 때문에 지체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은 준비되어 있더라도 우리 믿음이 부족하여 아직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비처럼 이렇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24)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29) 제자들은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내쫓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6:12-13) 제자들은 어제의 성공에 취해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세 제자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서열 다툼이나 시기로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의 유혹과 가치관에 흔들리기 때문에 믿음을 잃습니다.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칼 바르트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제자들은 전적으로 안에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밖에 있다. 제자들이 자신의 힘에 의지하려 할 때 그들은 밖에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로 자신들을 이해하게 될 때 그들은 안에 있다. 자신의 힘을 의존하려는 의지의 극복, 인간의 행위, 즉 거짓 종교의 극복이 참 종교에 이르는 길이다.” 기도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듭니다. 내 안에 주님으로 가득할 때 거기서 능력이 나옵니다.
이 구절을 기록한 마태복음의 다른 사본에서는 여기에 ‘금식’을 덧붙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마태복음 17장 21절에 ‘없음’이라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본에서는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삽입하고 있습니다. 금식이라는 금욕을 강조하고 싶었던 분파가 아마 집어넣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실제 어떤 금식 기도원에는 이 말씀을 간판으로 걸어놓기도 합니다. 본래 예수님 말씀은 아니지만 금식이 강력한 기도의 일종이라 생각하면 그리 문제가 될 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금식이나 기도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고, 믿음을 가진 자가 많은 기적들과 주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의 능력과 무능력은 믿음으로 판결나고, 믿음은 기도로 말미암아 생깁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 우리 삶에서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응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믿으려고 해도 안 믿어질 때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으려고 해도 안 믿어질 때」어떻게 하느냐 그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성도들에게 믿음이란 굉장한 수수께끼입니다. 어떤 때는 확실하게 믿어지고 할렐루야. 이제 믿음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는데 또 다른 때는 의심의 파도에 휩쓸려 심한 마음의 갈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갈등은 모든 사람들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염려, 근심, 고통이 다가올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께 기도할 때 응답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응답 안 받은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 같기도 하고 안도와 주실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한 가운데 마음에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금요철야기도 때 모대학교 대학생 한 사람이 안수 기도할 때에 기도를 받았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으라." "아멘." 그리고 나은 사람 간증하라고 하니까, 일어나서 "나는 위궤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오늘 예배에 와서 기도를 받고 나았습니다." 그러더니만 "아이고 안 믿어지네." 평생에 그 대학생의 부르짖음이 내 마음속에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말 얼마나 솔직합니까? 꼭 낫긴 나아야 되겠는데 나았다고 믿으라니까 안 믿을 도리는 없고 "믿기는 믿습니다" 했는데 의심이 들어와서 안 믿어지니까 "아이고 안 믿어지네" 그게 우리 모든 사람들의 절박한 고백인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믿어지는 것 같기도 하니 "믿습니다. 아이구 안 믿어지네." 그것이 오늘 읽은 성경말씀 가운데 미친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지의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아홉 제자들을 데리고 내려오니 큰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거기에 한 아버지가 뛰어 나와서 "주님, 내 아들이 몹시 귀신 들려서 고통을 당합니다. 물에도 쓰러지고 불에도 쓰러지고 죽을 뻔 당한 적이 수없이 있는데 제자들에게 데려와도 고치지 못하더이다. 우리 아들을 고쳐 주옵소서." 주님께서 믿음이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를 돌봐야 되겠느냐"고 탄식하시고 "그 아들을 데리고 오라" 하니 데리고 오니까 귀신이 그 아들을 덮쳐서 넘어져서 거품을 물고 파리해져 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아들을 바라볼 때 그 아버지가 하는 말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주십시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주여 믿나이다. 아이고 안 믿어지네. 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얼마나 솔직한 말입니까? 절박하지요. 아들이 귀신 들려서 파리해져 가는데 낫기는 나아야 되겠는데 주님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했으니 큰 부담 아닙니까? 믿기는 믿어야 되는데 "주여 내가 믿나이다. 아이구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이러한 절박한 체험을 우리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믿으려고 할 때, 마음에 안 믿어지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염려 근심이 소용없는 것을 깨달으라
깊이 생각해 봐야 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안 믿어진다고 해서 염려 근심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는데, 문제가 해결 안 되니 염려 근심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걱정한다고 키가 작은 사람이 한자나 더 크게 할 수도 없고 내가 염려 근심 한다고 머리가 검은 머리를 한 터럭도 희게 하거나 흰머리를 검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5장 36절에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염려 근심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염려 근심하므로 우리 자신이 더 파괴될 따름인 것입니다.
염려 근심이 일어날 상황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그 자신을 분명히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힘으로도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다." 염려한다고 조금도 영향력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병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마음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근심할수록 뼈가 마르니 살이 녹아지지요. 염려 근심은 엄청난 질병과 고통과 연약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다고 한 것입니다.
근심을 하면은 영육 간에 사망이 다가와요. 뼈도 마르고, 살도 녹고, 사망이 다가오는 것이 염려, 근심이기 때문에 이것은 일도 해결되지 아니하고 반대로 사망이 다가오고 뼈가 마르고 살이 녹는 고통이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 근심은 절대로 하지 말고 이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우리 인생을 살면서 염려 근심이 안다가 올수는 없지요. 다가오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이 다가올 때 누구에게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짐이니까요. 무거운 짐을 맡겨야 돼요. 내가 요사이 젊은이들 보면 우리 시대와 다릅니다. 우리 시대는 짐이 있으면 마누라에게 다 맡겨 버립니다. 마누라가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남자는 턱 포켓트에 손 넣고 따라 오는데 요사이는 마누라가 전부 짐을 남자에게 맡겨서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양손에 짐을 지고 어깨 걸머지고 오는데, 여자는 양산 쓰고 착착착착.. 따라옵니다. 친정 어머니는 보고 "사위 잘뒀다. 좋다. 내 사위 잘한다." 시어머니는 "저런 저런! 저런! 애써서 공부 시키고 장가보냈더니 마누라 위해서 저런 노동을 하고 일을 하니 아이고 답답해라. 아이고 답답해라." 그런 시대에 와있는 것입니다. 짐을 내가 다 짊어지면 힘이 들기 때문에 남이 맡겨 줄 수 있으면 남이 맡으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짐을 누가 져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 짐은 내게로 다 가져오너라. 내가 맡아 주마!"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팔자가 늘어졌습니까? 우리의 크고 적은 짐을 맡아 주겠다는 분이 계신데 짐을 다 사양하는데, 예수님은 맡아 줄 터이니 내게 와서 맡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엎드려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주님 맡깁니다. 맡아 주옵소서. 맡아 주옵소서. 내 마음 속에 평안이 올 때까지 자꾸 주님께 맡겨요. 자꾸 맡겨요. 자꾸 맡겨요. 복잡한 말 하지 마십시오. "주여 나는 못 집니다. 맡아 주시옵소서.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맡아 주시옵소서. 나는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맡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나중에 마음에 평안이 오고 주님께서 짐을 맡아 주는 것입니다.
일석 이희성 선생의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이라는 책에 그는 90평생의 삶을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그가 자손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한 삶의 유산으로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걱정도 팔자라고 말하면서 아무리 걱정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근심의 멍에를 걸머지고 사는데 이를 다 벗어 버리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오늘 근심은 그날에 족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염려 근심을 예수께 와서 맡겨야 될 일은 이판저판 사판일 바에야 억지로라도 믿어보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걱정해도 해결이 안 되고 염려해도 해결이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걸머질 수도 없고 날 대신 걸머질 자도 없으니까 '에라 주님께 맡겨 버리자! 이판저판 사판이다. 살려주면 살고 죽으면 죽으리다.' 완전히 마음에 결단을 내리고 주님께 내어 맡겨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맡기면 돌보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약속을 했지 않습니까? 주님의 약속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마음에 깨달아지지 않습니까? 약속의 말씀 위에 염려 근심을 내어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보세요. 염려와 근심을 간절히 주님께 고하면 마음에 평안이 와서 마음의 생각과 모든 심사를 지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평안이 올 때까지 기도해라. 맡아줄 자는 있다. 주님이 반드시 맡아 준다. 진정을 맡기는지 안 맡기는지를 주님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네가 간절히 기도해서 주님께 진정으로 맡기면 주님께서 맡아주고 그 대신 평안으로 우리 마음 속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 존 월턴이라는 사람은 되는대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어느 것 하나 오랫동안 집중하는 법이 없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방랑생활을 하고 거지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듣다가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6절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 듣고 그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야, 겨자씨 한알만 있으면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던지라고 하는데 내가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거지 생활을 할 필요가 없구나.' 그래서 이리저리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겨자씨 한 알을 구했어요. 그것을 갖다가 조그마한 유리병에 넣어서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아침에도 일어나서 겨자씨를 보고 "이만한 믿음이야 내게 있지 않느냐." 저녁에도 잘 때 그것을 내어 보고서 "야, 겨자씨만한 요 믿음이야 내게 있지 않느냐." 그래서 그는 그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난 다음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고 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믿음이 없다 해도 이 겨자씨만한 믿음은 있지 않느냐. 그러니 할수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그리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여러가지 시련과 환난이 다가올 때마다 그 병을 내놓고 들여다 보고 '어, 이만한 믿음이 있으니까 이 환난도 지나간다. 이 문제도 해결된다. 믿습니다.' 그리고 오똑이처럼 일어나곤 했습니다. 나중에 크게 성공해서 큰 부자가 되었어요. 영국 여왕의 작위까지 얻었습니다. 그리고 71세에 은퇴하면서 그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이렇게 된 것은 어려울 때마다 겨자씨를 보고 나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문제는 해결되고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난다고 확신해서 모든 난관을 이기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런데 여러분 "아이구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겨자씨를 보세요. 겨자씨.. 얼마나 작습니까? 나도 겨자씨 때문에 큰 위로를 받은 것은 서대문에 있을 때 중동에서 온 친구 한 사람이 겨자씨를 좀 갖다 주어서 너무나 겨자씨가 적기 때문에 내가 성도들에게 보여 주려고 새벽기도회 나가서 성경책 위에 펼쳐 놓고 지나오면서 보라고 했는데 쭉 성도들이 줄을 서서 성경에 펼쳐 놓은 겨자씨를 보는데 할머니 한분이 가까이 와서 "목사님, 안 보이는데요?" 가까이 와서 보라니까 "그래도 안 보이는데요?" 하니까 입바람에 다 날라가 버렸어요. 얼마나 마음에 화가 나든지 왜 겨자씨 구경을 시켜 줬는데 너무 가까이 와서 말을 해서 바람에 다 날아가게 하느냐. 뒤에 사람들도 불평을 하는데 그때 성령이 내게 깨닫게 한 것입니다. '봐라! 할머니 입 바람에도 날아가는 겨자씨가 얼마나 적으냐? 그만한 믿음만 있으면 오케이다. 무슨 태산만한 믿음을 원하지 말아라. 겨자씨 만한 믿음이야 네가 갖고 있지 않느냐.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문제지.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면 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로마서 12장 3절에,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믿음을 분량대로 나누어 주셨으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2:3)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이 있는데 자꾸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문제라구요. 큰 믿음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언제 큰 믿음을 가지라고 한 것입니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다 가지고 있는 그만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내가 있다고 확신하고 일어나면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짐을 맡기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왜,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너는 믿고 있으면서 그대로 될 것인데 왜 환난을 당하면 믿음을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당신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십시오. 그러니 우리를 너무 값싸게 취급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값싼 존재가 아니에요.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태산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신대로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마음에 배수진을 쳐라
여러분에 마음에 배수진을 쳐야 되는 것입니다.
믿을 때 자꾸 뒤를 돌아보면 안돼요. 강을 건넜으면 다리를 불태워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여러분 행보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었으면 끝까지 믿고 나가야 돼요. 믿다가 안 되면 36계를 낼 수 있다. 믿다가 안 되면 도망치자.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너 엉터리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예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믿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 16절로 18절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다 청년들인데 바벨론에 가서 포로가 되어서 특별 교육을 받고 바벨론도의 지사들이 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수르광야에 자기 신상을 금으로 만들어 놓고 모든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다와서 제막식에 와서 절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유대인이라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큰 환난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고발을 당해서 느부갓네살 앞에 잡혀 와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왕이 "너 우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불, 풀무불 가운데 던져서 태워 죽이겠다." "왕이여,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아무리 우리를 불, 풀무불 가운데 던져도 건겨내시거니와 그렇게 안 해줄지라도 우리는 절하지 않겠다." 아예 배수진을 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건져 주실 줄 우리는 믿습니다. 안 건져 주셔도 우리는 우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이 화가나서 풀무불 가운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던져 넣었을때 제 네 번째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불의 세력을 멸하고 그들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와같은 믿음이 있으면 오늘날도 하나님이 현장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믿다가 안 되면 뒤로 도망치고 물러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아에 물러갈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 너 물러갈 것을 알고 나를 시험하는구나. 그러면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않으니까 너에게 역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크거나 적으나 내가 한번 기도하면 죽더라도 믿겠습니다." 그와 같은 각오로 나가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에스더의 신앙고백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파사왕국에 있는 유대인들이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만이라는 국무총리가 유대인을 멸살하려고 할 때 유대인은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국무총리가 유대인을 멸망하기로 결정을 하고 왕의 허가를 받았으니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마침 그때 왕비가 에스더인데 에스더는 자기 신분을 감췄지만 유대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왕에게 가서 호소하라고 그 오라버니가 그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습관으로써는 왕이 부르지 않는데 왕궁에 들어가면 참수형에 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왕의 아내더라도 왕이 불러야지, 부르지 않는데 왕의 집무실에 들어가면 참수를 당합니다. 에스더가 그 오라버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흘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왕이 나를 용납하지 아니하고 죽이면 죽으리다. 왕의 허락없이 나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들어가겠다." 그런 각오를 하고 뒤로 물러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가니까 왕이 앉아있는 보좌를 향해서 저 입구에 들어가서 에스더가 아주 화산한 웃음으로 웃으면서 왕에게 서니까 왕이 간장이 녹도록 사랑스럽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홀을 싹 내밀었습니다. 왕이 잡고 있는 그 지팡이가 홀인데 홀을 내밀면 그 홀을 만지면 사형을 면하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가서 홀 지팡이를 잡았습니다. 왕이 "에스더여 왜 왔는고? 네가 원하면 나라 반이라도 주겠노라." 이러니 해결 다 됐지요. 그러니 에스더가 왕에게 사정을 말해 가지고서 유대민족이 다 구출을 받은 적이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다는 각오로써 나갔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지 "나는 죽을까 겁이 나서 못하겠습니다." 했으면 그런 역사는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사도바울 선생이 복음을 증거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온 소아시아를 복음화 했는데 어떤 답을 했냐면 망하면 망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로 21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이라"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나는 일신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증거 한다. 살면 예수 전도하고 죽으면 천당 가니까 더 이익이다.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국이라는 우리 최자실 목사님의 슬로건처럼 그와 같은 각오로써 바울선생이 나갔기 때문에 천하가 그 앞에 뒤집혀진 것입니다. 자기 일신을 다 생각하고 자기 생명의 안위를 생각하고 형편이 좋으면 나가고 형편이 나쁘면 뒤로 물러가겠다는 그러한 약삭빠른 생각으로 나아갔더라면 세계는 복음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국이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기를 원한다. 그와 같은 각오로 나가는 앞에 마귀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 때 이와 같이 배수진을 치고 믿어야지 그렇지 않고 약삭빠르게 좋을 때는 뛰어 나가고 어려우면 뒤로 물러가서 도망치겠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서, 기도하고, 믿으니까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말씀에 집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산만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집중을 해야 돼요.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부정적인 것은 보지 말고, 공포를 보지 말고,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낙하산을 타는 훈련을 시킬 때 교관이 언제나 군인들 보고 말합니다. "밑을 내다보지 마라. 어지러워서 못 뛰어 내린다. 먼 산을 바라보아라. 비행기 안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뛰어 내리면 되지 밑을 내려다보면 불안하고 공포에서 무릎이 떨려서 못 뛰어내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안하고 공포가 오는 것을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까지도 스키를 탔는데 가장 높은 언덕에서 스키를 탔습니다. 스키를 탈 때 한 가지 조심해야 될 것은 밑을 바라보면 안돼요. 아주 밑을 바라보면 어지러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자기 발밑만 바라봐야 돼요. 자기 발밑만 바라보면 자기 발밑하고 거리가 가깝지 않습니까? 발밑만 바라보고 미끄러져 내려갈 때 '주여, 살려 주소서. 주여 살려 주소서. 주여 살려 주소서.' 그리고 내려가면 끝까지 내려가요. 그러나 타고 내려가다가 저 밑에 바라보면 '아이고 죽었다. 저 계곡을 어떻게 내려가느냐.' 그러면 다리가 떨려서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좌우를 살피고 환경을 살피고 두려움을 바라보고 마음에 떨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집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에 집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5절에도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걷다가 왜 빠졌습니까? 그들이 밤바다를 건너가는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서 아주 고통을 당하고 바다를 건너가는데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왔습니다. 캄캄한 밤에 바람은 불고 파도는 치는데 허연 물체가 떴다 내렸다 하면서 다가오니까 유령이 나타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뱃사람들은 파도치는 바다에 유령을 보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징크스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배가 가라앉는 줄 알고 제자들이 다 아비규환이 되어 고함을 쳤을 때, 예수님이 "내니 두려워 말라."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님이시면 나로 물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나는 베드로를 존경합니다. 나 같으면 말 못해요. 그 캄캄한 밤에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부는데 주님이 아니고 진짜 유령이었다면 물에 빠져서 죽었지 별 도리 있나. 그런데도 베드로는 용감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모험이기 때문에 용감해야 되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용기를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누르고 환경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위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물이 얼음같이 단단해졌어요. 베드로가 저벅저벅 물위로 걸어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을 기억하고 집중하여 갈 때는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람이 확 불면서 물보라가 얼굴을 치는 바람에 파도를 바라보고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공포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고 '사람이 어떻게 물위로 걷느냐. 이것 내가 잘못했구나. 이제 죽었다.' 공포가 들어오자마자 물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에 빠지면서 "주여, 내가 죽나이다. 나를 도와주소서." 예수님이 와서 베드로를 붙잡아서 일으키시면서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건져주신 것입니다. 의심을 하면 물에 빠집니다. 의심을 안하려니까 주님을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말씀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의심할 수 있는 환경이 언제나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람과 파도가 끊임없이 다가와요. 수없이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쳐오고 '너는 이제 죽었다. 너는 망했다. 너는 할 수 없다.' 이러한 암시가 마음속에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그런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면 의심이 들어오고 불안과 공포가 들어오면 낭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내 두려워하는 것이 내게 미쳤고 내 무서워하는 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하고 욥은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면 그 대상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려우면 형벌이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그 대가로써 형벌이 따라와서 두려워하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난을 두려워하면 가난이 다가오고, 병을 두려워하면 병이 들어가고, 원수를 두려워하면 원수에게 지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가면 모든 것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항상 우리 주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람과 파도처럼 여러분에게 마귀는 와서 속삭이고, 협박 공갈을 하고 환경을 바라보게 해서 마음에 공포심이 일어나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벌벌 떨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수작인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은 떠나가고 여러분께서 믿음의 능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하고 말이 틀리기 때문에 하나님도 거짓말쟁이인줄 우리가 오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말이지 우리가 어린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거짓말을 몇 만 번 듣고 몇 만 번 행했었습니다. 사람은 거의 다 거짓말쟁이고 또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도 '아이고 거짓말 하는 거지. 하나님이 참말을 안 하는 것이지.' 또 마귀가 와서 '하나님 거짓말이다. 믿지 말라.' 그렇게 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신지라 거짓이 없으시고 인자가 아니신지라 식언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인 것입니다.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집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묵상하고 말씀 위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언제나 말씀을 생각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어떻게 지키는 것입니까? 말씀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면 여러분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마음속에 꿈을 꾸십시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소원은 꿈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집을 소원하면 집을 꿈꾸게 되고 바다에 가기를 원하면 소원하면 바다를 마음에 꿈꾸게 되고 자동차를 사기를 원하면 자동차를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항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꿈꾸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고 은혜주신 것을 마음속에 꿈꾸는 것이 정말 하나님 말씀을 굳게 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구하기나 생각하는 것보다 넘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꿈을 꾸고 있으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 아주 오래전에 릴리언 딕슨이라는 여인이 그의 남편과 함께 대만에 선교를 결정하고 미국을 떠났습니다. 이들 부부는 대만에서 대만 정부의 사회사업 관리인과 선교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담당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미쳐 듣기도 전에 과거 선교 단체들이 모두 실패를 했다고 예를 들면서 "무조건 대만에서는 안 됩니다. 대만에서는 기독교 복음을 증거 해도 안 받아 줍니다. 실패합니다. 미국으로 돌아가십시오. 당신들이 여기서 기독교를 전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대만 사람들은 우리 종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여기에 선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가능하니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릴리언 딕슨 부인은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나가서 바다를 향하여 손가락을 가리켰습니다. "저기 바다가 보이지요? 대만 사람들을 도와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치 저 바닷물을 한 양동이씩 퍼내는 것처럼 어렵긴 해도 불가능 하지는 않습니다. 바닷물을 퍼내는 심정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남편이 곁에 있다가 하는 말이 "여보, 일어나서 빨리 복음 전하러 갑시다. 의논할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과 꿈을 가졌습니다. 아무리 안 된다 해도 대만에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서 대만에서 50년 넘게 선교사역을 했는데 학교와 병원 교회 등을 5천개나 짓게 된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믿고 꿈을 꾼 결과로 꿈꾼 대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꿈을 꾸면 그 꿈꾼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꿈을 못 꿉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들어와서 모든 꿈을 포기하게 되지요. 아무 문에 증거 안보이고 아무 귀에 들리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흙같이 어두워도 믿고 꿈을 꾸십시오. 꿈이 여러분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잡고 꿈꾸고 나아갈 때 이처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서 이방인이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하고 생각하고 꿈꾸며 믿고 선포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한번 믿었으면 믿음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할 수 있다 없다 말하지 말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안 믿으니까 안 되지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전에도 말한 것처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있습니다. 나도 빠른 시일 내에 겨자씨 하나를 조그마한 유리병에 담아서 포켓트에 넣고 다닐 작정입니다. 내가 50년 동안 목회했지만 지금도 마귀가 와서 안 된다. 네 믿음이 약하다. 정말 네가 믿느냐? 의심이 생길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겨자씨만한 믿음은 있거든 그리고 겨자씨 보고 나는 요만한 믿음은 있다. 요만한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더 큰 믿음은 필요 없다. 그렇게 하고 나가기 위해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필요하면 겨자씨 하나를 구해가지고서 병에 담고 다니십시오. 그것을 보고 믿음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집회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장차 올 미래에 대하여 많은 설교를 했는데, 그렇다면 목사님, 목사님의 장래를 압니까?" 그래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가 역사가 어떻게 될지 장래 일을 그렇게 담대하게 말합니까?" "나는 내 장래 일은 몰라도 장래를 붙잡고 있는 그 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장래를 좌우하시는데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않고 맡겨 놓습니다." 여러분 우리 장래일은 하나님 손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고 믿기만 하십시오. 믿기만 하십시오. 믿고 꿈을 꾸십시오. 장래는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미래가 여러분의 힘으로 붙잡아 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꿈꾸고 한 것을 입으로 늘 긍정적으로 말하십시오. 부정적으로 말하면 나라가 망하고 개인도 망합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너무나 부정적인 말을 좋아합니다. 긍정적인 말은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틀어 보십시오. 거의 말하는 것은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생활에도 언제나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이나 이웃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든지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을 소리 내어 수 백 번, 수 천 번 고백하십시오.
여호수아 1장 8절에 보면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어떻게 하면 내 삶이 형통하고 평탄해 지겠습니까? 형통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 누가 있어요?평탄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 누가 있어요? 형통과 평탄은 믿고 꿈꾸고 말하는데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꿈으로 바라보고 입술로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못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나는 된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일은 이루어진다. 승리한다. 성공한다.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말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도 "울어보고 웃어보니 웃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해서 좋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마귀에게 선수를 주어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도록 만드는 길밖에 없지 않습니까? 긍정적인 말을 하면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통해서 오셔서 어둠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무질서에서 질서를, 절망에서 소망을 주는 역사를 베풀어 주자는 것입니까? 할 수 있습니다.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기적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됩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둡고 스산스러워도 그것은 환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도와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줘서 사는 것입니다. 환경의 손을 잡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잡고 사는 것입니다. 환경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지만 바람을 맞받고도 파도 위를 걸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꿈꾸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술로 고백하고 나가면 여러분 생활 속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염려 근심, 불안 공포가 태풍처럼 불어 닥칠 때, 우리의 마음은 바다 물결처럼 흉용하고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립니다. 그때 우리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찾고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파멸에서 건져주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여러분의 미래를 열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이면 뽕나무도 뽑혀서 바다로 가고 태산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패배자가 아닙니다. 물러갈 자가 아닙니다. 승리자요, 영광을 쟁취할 하나님의 용사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겨자씨 만한 믿음은 다윗이 손에 든 물맷돌인 것입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키가 장대하고 철갑옷을 입고 놋경갑을 하고 창이 베틀채만큼 커도 다윗의 물맷돌 하나에 거꾸러진 것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으시시하고 무서워도 물맷돌만한 겨자씨 믿음 앞에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하세요. 믿으면 됩니다.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습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는 믿음
마가복음 9장 21~29절 / 정필도 목사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만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산 아래에 있던 나머지 제자 9명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서 망신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가면 낫는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고,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다며 그동안 아이가 귀신들려 고생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22절에 보면, 아이의 아버지는 모든 사정 이야기를 한 후에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내용을 보면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느냐가 중요한데,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과 의지하는 믿음이 생기고,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면 자연히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똑바로 알고, 얼마나 깊이 아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닌 지 수십 년이 되어도 도무지 믿음이 자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면 정신이 들 것인데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모르니 신뢰하고 의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생활에 재미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은혜 받을 길이 없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 충성 봉사하지 않게 되고, 그러니까 믿음이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하나님을 똑바로 알고, 깊이 알아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아이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하시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축복하셔서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면 죽은 사람이라도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시니,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니 귀신이 소리를 지르면서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죽은 것 같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수군대었고,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자 아이가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날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모시고, 그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의 사람들에게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까요?
첫째,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기도하는 믿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호흡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호흡이 끊어지면 죽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중요한데, 자고 일어날 때 삼십 초씩 기도하고, 식사할 때 십 초 기도한다는 분이 계십니다. 숨을 그렇게 쉬면 살겠습니까? 우리가 규칙적으로 호흡해야 하는 것처럼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6장 12절을 보면,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과거가 있는데 왜 이번에는 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 본문 29절의 예수님의 말씀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믿음이 좋았고, 능력이 나타났던 사람이라도 그것은 과거일 뿐이고, 기도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믿음이 점점 약해지고, 능력도 전부 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과거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자라나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많은 체험을 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연히 믿음이 약해지다 없어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급하면 ‘주여!’라고 부르게 됩니다. 죄가 있든지 없든지, 의롭든지 불의하든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환난 당했을 때 낙심하지 말고, “주여, 나를 건져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건져주실 뿐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또, 아모스 5장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소망이 생기고 살길이 열립니다. 아무리 깊은 죄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절망 가운데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살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과 에서는 아브라함의 손자이고, 이삭의 쌍둥이 아들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장점이 있고, 허물도 있었습니다. 같은 집안의 쌍둥이지만, 야곱은 축복을 받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에서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은 언제나 하나님을 찾았지만 에서는 한 번도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거나 하나님을 찾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은혜 받을 뿐 아니라 응답도 받고, 믿음이 자라고, 체험적인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응답을 받지 못했어도 계속 끈기 있게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이 아직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계속 기도하다 보면 반드시 은혜를 받고, 그만큼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응답을 받게 되는데, 이렇게 기도한 것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 체험적인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머리로, 지식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니 그 믿음이 더욱더 강해지고 확실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간증거리가 생깁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은 기뻐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 목사님은 간증거리가 많은 분입니다. 수백 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아주 추운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얼어 죽게 되자 사람들은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뮐러 목사님은 성경책을 가지고 교회로 가서 밤을 새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했습니다. “날씨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어린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생명들입니다. 이 어린 생명들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저는 총무일 뿐입니다. 시간과 때를 주장하시는 아버지께서 일주일 동안은 봄 날씨로 변화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동풍이 불기 시작해서 영국 전체의 날씨가 봄 날씨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기상이변도 흔치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조지 뮐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북풍을 중지시키고 동남풍을 불게 해서 영국 전체가 온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보일러 수리가 끝나자, 다시 한겨울의 세찬 바람이 불었다고 합니다. 조지 뮐러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 미국의 유명한 신학교인 달라스 신학교는 1924년에 재정 적자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설립자인 쉐퍼 박사는 다른 교수들과 함께 학장실에서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하다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산과 들과 가축들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신 부자 하나님, 저 가축들을 팔아서 우리에게 재정을 주십시오.”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달라스의 한 카우보이가 마차 두 대에 가축을 실어다 팔고 그 돈으로 투자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하고 싶다는 감동이 와서 그 돈을 가지고 신학교로 찾아온 것입니다. 서무실의 아가씨가 영문도 모르고 돈을 가지고 황급히 학장실로 뛰어갔을 때, 쉐퍼 박사와 교수들이 기도를 막 끝마치고 있었습니다. 그 수표를 받아든 쉐퍼 박사는 “우리 하나님께서 가축을 팔아서 이 수표를 보내주셨습니다.”라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기도생활이 재미가 있고, 신앙생활이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손입니다. 그 큰손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큰 손으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고, 답답해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실 것을 믿음으로 상상하고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기뻐하고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고, 큰일을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다윗과 같은 기도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그들과 언제나 함께하시니 큰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 목숨을 거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기도하고 충성하는 하나님의 종들과 함께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거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는 로마서 14장 8절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살아도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숨을 건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죽을 각오를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셔서 사자굴에서 살아나오게 하셨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자, 풀무불 속에서도 살아나오지 않았습니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는 믿음을 가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시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셋째,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말씀대로 사느냐 아니냐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은 부분적으로는 지키지만, 지키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자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살기위해 애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까지 순종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평소에는 잘 믿는 것 같지만, 원수는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이것까지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믿음이 강해지는지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함께 하시며, 이런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능력을 부어주심으로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게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 5:44)」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다 보면 은혜 받고, 은혜 받으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방법은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원수라도 끌어안아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날마다 기도하다 보니, 아프리카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떠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선교사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주님이 말씀하시니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분에게 선교사가 되라고 하셨을까요?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가장 열심히 일하고, 희생하며, 가장 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에 사람을 사용하실 때,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시고 세우십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선지자이지만 원수까지 사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 때, 원수는 망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갈 수 없다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기에 곤란한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우리를 통해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는 믿음, 목숨을 거는 믿음, 원수까지 사랑하는 믿음을 가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못할 일이 없으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