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배신
막 14:1-11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막 14:1-11 / [예수를 죽일 음모;마26:1-5,눅22:1-2,요11:45-53]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무교절과 유월절 잔치가 시작되기 이틀 전이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잡아 죽일 기회를 찾으려고 모여 앉아 궁리하고 있었다. 2) 그러나 여러 사람이 `유월절 기간 중에 예수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군중이 소동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이 기간만은 피합시다' 하고 말하여 그 일은 잠시 뒤로 미루어졌다. 3)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마26:6-13,요12:1-8] 예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였다.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4-5) 그러자 함께 식탁에 앉아있는 몇 사람들이 화를 버럭 내며 `왜 향유를 그렇게 낭비하는가? 이 향유를 팔면 300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으니, 차라리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고 나무랐다. 6)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라. 이 여자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는데 왜 괴롭히느냐? 7)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주변에 있으니 너희가 마음만 있으면 아무 때든 그들을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9) 내가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고 또한 높이 평가될 것이다.' 10) [유다의 배반;마26:14-16,눅22:3-6] 그때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겠다고 말하였다. 11)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 줄 기회와 장소를 엿보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을 둘러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차분히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하는 종교지도자들(1-2)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인 산헤드린 회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조상 대대로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이 지켜오던 기존의 교리와 율법에 저항하여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일반 백성들이 봉기할까 두려워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체포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3-9)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머무실 동안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유월절 음식을 대접 받고 있을 때,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요 12:3). 이러한 장면을 목격한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4-5)고 마리아를 책망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합당한 관심이지만 그 이면에는 제자들의 금고를 책임지고 있는 가룟 유다의 탐욕이 숨겨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향해 비난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위하여 사랑과 헌신의 표현으로 그녀의 행동에 대해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녀가 행한 일과 복음 선포와 함께 증거 되어 “그녀를 기념하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10-11) 산헤드린 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군중들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은 30개를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마 26:15; 눅 22:6). 이는 은화 30세겔을 의미하며 이 금액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습니다(출 21:32).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는 첫째, 그는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갈릴리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회의 명령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고, 둘째, 그의 꿈은 예수님과 함께 정치적인 왕국을 건설하여 큰 보상과 특권을 얻을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음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마리아의 향료 사건처럼 사명보다는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물질적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적용: 당신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명분을 말하여 예수님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말과 행위는 없는지 찾아봅시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돈으로도 가치가 큰 향유지만 여자의 마음은 더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드리고 싶었던 마음,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행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는 뜻하지 않은 큰 의미와 보람을 얻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보고 비난했습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선하고 복된 일이었지만 사람들의 구설수와 입방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했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주변의 비난을 들은 경험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기대 이상의 칭찬으로 당신을 격려하십니다.
< 설 교 >
무엇이 주님을 그토록 감격시겼는가!
노경모 목사
감동이라는 말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감동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말이나 그 사람의 행동 또는 삶의 모습으로 인해서 콧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뭉쿨해지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 바로 ‘감격’입니다. 감동보다 더 마음이 깊이 느끼어 크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격은 소리를 지르고 싶어집니다. 안아주고 싶습니다. 눈물을 쏟아내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을 감격시키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다르게 묻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감동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감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정말로 멋지고 보람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한 여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오늘 본문에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여인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와 동일시하려고 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 두 사건이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사건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을 하나로 보게 된다면, 무리하게 여러 가지 가정을 해야 한다. 즉 억지로 짜서 맞추어야만 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장소가 베다니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인데 반해 오늘 본문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나옵니다. 이 두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나사로의 아버지가 문둥이 시몬이었을 것이다 혹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남편이 문둥병자 시몬이었을 것이다라는 추측을 합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틀렸고 발에 부은 것이 맞을 것이다. 혹은 머리에도 부었고 발에도 부었다라는 많은 가정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일어난 사건의 날짜를 서로 맞추어야 하는 무리한 가정을 하게 되지요. 오늘 본문은 유월절 2일 전,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이틀 전에 일어난 사건이요, 요한복음 12장의 사건은 유월절 6일 전의 사건이라고 분명히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많은 주석의 참고자료를 보면 복음서를 시간 순으로 열거한 내용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그 주간의 수요일에는 ‘기록이 없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것은 바로 요한복음 12장의 항유를 부은 사건과 오늘 본문이 마가복음 14장의 향유를 부은 사건을 동일 사건으로 보려고 오늘의 사건이 분명히 유월절 이틀 전에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유월절 6일전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 토요일에 일어났다고 생각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요일, 즉 유월절 이틀 전에 일어난 사건을 마태복음26장 1-16절과 마가복음 14장 1-11절에서 정확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날에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공모가 있었고, 오늘이 본문에 말하는 향유 붓는 사건이 있었고,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려고 처음으로 대제사장들을 접촉해서 은30을 약조금으로 받은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의 행동에 주님은 감격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이 여인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은 이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감격시켰느냐 하는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옥합은 향유를 담은 그릇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향수병이라고 할까요? 향유는 주로 여자의 머리에 바르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기름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기름을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드는 동인도의 식물에서 채취되는 향료를 말합니다. 하여튼 아주 값비싼 잘 정제된 향유입니다. 약 300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하니 당시 노동자 하루 일하고 받는 일당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아주 좋은 값비산 향유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처녀들은 시집 갈 때 결혼 지참금과 같은 것으로, 돈이 생기는 데로 향유를 모아서 이 옥합에 한 방울, 두 방울 사서 담아서 꽉 차면 끝을 밀봉을 해서 그것을 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집안에 큰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을 내다 팔아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또 가정에 필요한 일에 썼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옥합을 예수님께 와서 깼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단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드릴 용의가 있습니까?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바칠 결단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가장 귀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높은 천국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은 땅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갖은 고초를 당하시다가 드디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뿐만 아나라 우리들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고 오늘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기도하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에게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감격시키려면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결단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고향에서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 아브라함은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고향을 떠납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 였다고 했습니다. 사람 나이 75세가 되면 심리적으로 보아서 안정을 추구할 때 입니다. 더 좋은 일이 있다고 해도 새삼스럽게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때 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약점을 극복하고 과감하게 일어나서 고향을 떠납니다. 거기다 다 늙은 아내와 어린 조카를 데리고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고난의 길인 나그네의 길을 떠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세 때에 아브라함이 얻은 독사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다음날 일찍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산으로 향합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결단합니다.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일에 결단을 합니다.
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감격하셨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축복의 약속을 어떻게 하셨는지 보면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정말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감격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다니엘 아시지 않습니까? 다니엘은 바벨론의 포로 잡혀갔지만 바벨론의 유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하나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결단을 합니다. 자기는 비록 사자굴에 던져지는 한이 있더라고 하나님을 항상 경배하기로 결단을 합니다. 이 다니엘의 결단에 대해서 하나님의 얼마나 감격하셨지 아시지요? 하나님이 포로인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까지 올렸습니다. 하나님이 굶주린 사자들의 입을 봉했습니다.
신앙은 한마디로 “결단(Decision)”이라는 말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란 그리스도를 향해 혹은 위해 결단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결단이란 말은 이것을 택하기 위해서 저것은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저 사람은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포기 할 줄 아는 결단이 지혜로운 결단입니다.
폼페이시의 최후라는 영화를 보면 한참 연회가 무르익어 가는 시간에 도시의 뒷산에서 화산이 터져서 용암이 흘러 도시를 덮어 옵니다. 사람들이 모두 피하여 도시를 탈출하려고 야단 입니다. 그때 어느 여인은 용케도 잘 피신하여 도시를 잘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다 생각해 보니까 금고 속에 들어 있는 보물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나오던 길을 되돌아서 다시 사람들을 비집고 집으로 달려갑니다. 가서는 금고를 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보물들을 끌어안고 황급히 달려 나오지만 이 여인은 그만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벽에 깔려서 한줌 보물들을 가슴에 안고 죽고 맙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 결단은 바로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결단을 하실 겁니까?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시간입니까? 우리의 마음입니까? 건강입니까?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실제적으로 자기에게 가장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결단한 대로 실제적으로 행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입증한 현신이었습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갑정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과도 같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습니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사랑의 표현인 사랑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을 위한 헌신입니다.
헌신하는 사람들은 주변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까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바난도 조롱도 책망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주변 사람들의 분노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여인이 헌신하는 데에는 많은 방해가 있었습니다. 4-5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러나 주님의 평가를 보십시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주님은 이 여인의 헌신에 대해서 매우 기뻐하시는 평가를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 드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참 고만우신 분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야지 하고 말합니다. 다 좋습니다. 여기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헌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여인처럼 말입니다.
인도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미국 선교사님 한 분이 어느 날 갠지즈 강가로 나갔습니다. 강가에 가 보니까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강둑을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인도에서 오랫동안 사역했던 분이시라 퍼뜩 뭔가를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아! 저 여자가 두 아이 중 하나, 아니면 둘 다 강에 빠뜨려서 신에게 제사드리려고 하는구나’
그래서 그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그 부인을 붙들고 제발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아무 쓸 데 없는 일이라고, 왜 아이를 희생시키려고 하느냐고 간곡히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완강했습니다. 한 아이는 잘 생기고, 또 한 아이는 몸이 불구인데다가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에게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선교사님은 발길을 돌렸습니다.
한참 지난 후에 궁금해서 그 선교사님이 다시 또 강가로 나갔는데 아까 전의 그 여인이 강둑에서 걸어 나오고 있더래요. 두 아이 중에 한 아이는 보이지 않더래요. 그래서 가까이 가 봤는데 잘 생기고 성한 아이는 없고, 불구요 시각장애인인 아이만 데리고 돌아오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너무 놀라서 “아니, 바치려면 불구에다 눈이 멀어서 인생 살기 어려운 아이를 바칠 것이지 왜 성한 아이를 바쳤나요?”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인도에서 섬기는 신은 우리가 최선의 것을 드리기를 기대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좋은 아이를 드려야지 어떻게 덜 좋은 아이를 드리겠습니까?”
그러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힌두교의 신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습니까? 그 신이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까? 못들어 보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신에게 최선의 것을 드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결단하고 실제적으로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뜨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매정하고 인색하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뭔가 반응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는 종종 하나님이 나에게 감격하시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제가 너무나 하나님 앞에 죄가 많고 부족하지만 착각에는 커트라인 없는 것 아닙니까? 착각이라도 좋습니다. 상상을 해보면 너무나 좋습니다. 스바냐 3장 7절의 말씀을 묵상할 때 더더욱 이 상상이 얼마나 좋고 나에게 가습이 벅찬지.
스바냐 3장 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찬양합시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
박상훈 목사
이제 우리는 마가복음을 세 장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이들 마가복음의 세 장, 곧 마가복음 14장과 15장 그리고 16장은 마가복음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마가복음 전체를 성전에 비유한다면, 이제 우리는 마가복음의 지성소에 이른 셈입니다.
이들 세 장의 주제는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14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의 일들을 설명합니다. 15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일 자체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16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난 직후의 일들을 말씀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2:2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요1:29과 1:36에서 세례 요한이 반복적으로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어린 양이 하나님께 열납되려면, 반드시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해 그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음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막 14: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일점 일획도 의미 없이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은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말씀합니까?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하나님의 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인들의 절기 두 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입니다. 먼저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내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들을 치실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그들의 집 문에 뿌리게 하셨습니다. 그 피를 보고서, 애굽의 장자를 멸하는 사자는 그들의 집을 넘어갔습니다. 여기서 유월절이라는 명칭이 생겨났습니다. 유월이라는 말이 넘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자손은 각자의 집에서 누룩을 제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칠일 동안 누룩이 없는 떡 곧 무교병을 먹어야 했습니다. 누룩은 영향을 뜻합니다. 따라서 무교병을 먹는다는 것은 옛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유월절이 되면, 곧이어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막14:12 말씀과 같이, 유월절은 무교절의 첫 날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눅22:1 말씀과 같이, 때로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하나의 절기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오후 세 시부터 성전에서 유월절 양들이 죽임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성전에서 유월절 양들이 죽임을 당하는 바로 그 시각에 맞추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도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시도가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헤롯 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 근처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은 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롯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 죽이려 하는 사실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의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막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입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겪으셨던 일이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으로 그들의 죄악상을 지적하시자, 그 곳 나사렛 사람들은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밀쳐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셔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지를 못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 가의 서른 여덟 해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요5:18 말씀과 같이, 그들은 당장에라도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지를 못했습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막3:6과 11:18 그리고 12:12에도 같은 시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요7:25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이제까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시도들은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를 요7:30과 8:20 말씀은 이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아직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언제입니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유월절이 되는 바로 그 날 곧 금요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유월절 양들이 죽임을 당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각인 오후 세 시에 예수님은 숨을 거두셔야 했습니다.
고전5:7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셔서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인 유월절에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요10:18 말씀과 같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가 찼을 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때가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때에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였습니다.
막14: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마26:3 말씀과 같이, 그 때 백성의 장로들도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인 곳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때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서 공회가 열린 것입니다. 헬라어로 공회를 산헤드린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산헤드린 곧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공회원들이 무엇인가를 의결하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 날의 의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죽일 방도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방치해둘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죽일 방도를 모색하기 위하여 공회를 열었습니다.
왜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참을 수 없게 여겼을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온 백성의 마음을 예수님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면서,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임의로 내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허락도 없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일들이 겹쳐지면서, 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님을 잡아죽일 방도를 구하려고 함께 모였던 것입니다.
그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을 죽일만한 아무런 혐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흉계로, 그러니까 거짓된 일을 조작해서 예수님을 잡아죽일 방도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그 때 열린 공회의 광경을 좀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1:47 말씀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죽일 방도를 구하기 위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서 공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48절 말씀입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들은 온 백성의 마음이 예수님에게로 향할까봐 두려웠습니다. 만일 온 백성이 예수님의 힘을 믿고서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면, 로마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를 잃고 말 것입니다.
이어서 49절과 50절 말씀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참으로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은 예수님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모든 사람이 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이 죽는 것이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중에 그 사실을 밝혔습니다. 말하자면 그 순간 하나님이 그를 주장하셔서, 그의 입에 진리의 말씀을 담아주신 것입니다.
그 내용이 51절과 52절 말씀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마지막으로 53절 말씀입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 날 공회에서 내린 결론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흉계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꾸민 흉계는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가서, 거짓으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눅 23:1~2 말씀입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당시 로마는 식민지 백성의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어차피 로마인들의 종교가 다신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식민지 백성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않거나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면, 그 때는 아주 잔혹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당국자들은 이 두 가지와 관련해서 흉계를 꾸몄습니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다고 고발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고 고발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백성을 선동해서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그들의 거짓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눅23:4, 14, 22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밝혔습니다. 또한 헤롯왕도 눅23:15에서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밝혔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잘 말씀했습니다.
사53:6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리고는 사53:10 말씀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상함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53:5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막14: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에게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 또는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그들이 중심이 되어 예수님을 열렬하게 맞이했을 것입니다. 이미 공회는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명절에는 하지 말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명절이 지나면, 각자가 자기 집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죽이더라도, 민란이 일어날 소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실행하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때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그 즉시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 그들은 명절만큼은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의 시도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깊은 밤중에 사로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에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금요일 오전 아홉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세시 곧 유월절 양들이 죽임을 당하는 시각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같은 날인 금요일 해지기 이전, 예수님은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일도 하루로 계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금, 토, 주 곧 죽으신 지 사흘만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당국자들이 무리를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죽일 방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명절에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 인해, 무리가 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틀 후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처럼 무리는 변덕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당국자들만 무리를 과대 평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 사탄도 역시 무리를 과대 평가했습니다. 흔히들 사탄이 가룟 유다를 이용하고 또한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인들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세 번 시험했습니다. 목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사탄은 베드로를 이용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사탄의 시험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이와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사탄이 바라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사탄은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가 예수님을 배신하게 만들었습니까? 당국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탄도 무리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사탄은 무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열렬하게 환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무리가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바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무리를 이용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는 바라바를 원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던 사탄의 시도는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후5:21 말씀을 읽어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십자가를 일컫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된 삶을 사신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대신 이제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예수님의 온전한 삶을 산 것처럼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의 사랑에 푹 파묻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우리 모두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며,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는 복된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름다운 낭비
막14:1-9 / 2015년 11월 04일 / 임현수 목사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딱 두 가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만찬 사건이고, 또 하나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사건입니다. ‘기념’이라는 것은 어떤... 매우 뜻깊은 일을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혼 50주년 기념…
이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에 의해 예언된바 있습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9절) 그렇습니다. 소위 설교자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이 여인의 존재와 헌신은 계속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리아의 사랑을 낭비하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는 낭비라는 말은 항상 나쁜 것이라는 쪽으로만 이해하여 왔습니다. 현대 산업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말 가운데 <소비는 미덕>이라는 말이 있지만 <낭비가 미덕>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낭비도 미덕 일수 있다는 귀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낭비라는 말이 요즘 지나치게 타산적인 현대인들에게는 좀 이해하기 힘든 개념 일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도 너무 타산적입니다. 그래서 사랑보다 계산이 앞서고 사랑보다 실리가 앞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산 이 맞지 않으면 약혼도 결혼도 쉽게 파혼해 버립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계산에 의해 태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라는 측면보다 가족계획과 가정예산 이라는 철저한 타산적인 생리가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인들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모두 지나치게 타산적이어서 순수한 인간관계를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타산적인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절약하며 절제하며 저축하며 검소하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원칙에는 언제나 예외가 존재 하는데 이런 예외를 무시하면 그 사회는 율법주의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예) 결혼식장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비싼 보석도 낭비로 보일 수 있고, (예) 특별한 경사가 겹친 가정교회의 푸짐한 만찬이 낭비라고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리아도, 삭개오도, 마태도, 어떤 바리새인도 예수님을 모시면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것도 낭비라면 낭비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낭비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허비하는 사랑의 삶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저는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후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은 바로 이 은혜와 사랑의 비밀을 아는 여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주목해야 합니다.
막14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막 14:1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막 14:2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민요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그 당시에 인기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민요를 피하기 위해서 일단 명절을 지나자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시기적으로 볼 때 이때는 대단히 위험한 시각 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바쳤던 아름다운 헌신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보십시오.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장소는 베다니 마을 문둥이 시몬의 집입니다. 이 시몬은 누구일까요? 학자들에 의하면 이 사람은 나병 환자였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이 병을 치유받는 기적을 체험 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 을 초청해서 잔치를 열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사람은 이런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문둥이 시몬>
똑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내용이 요12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장에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는 남매지간 임에 틀림이 없는데 이들과 문둥이 시몬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것 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은 베다니 마을이라는 곳에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로 다르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런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문둥이 시몬은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아버지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든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한 여자가 등장 합니다. 막14장에 보시면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요12장은 이 한 여자를 <마리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갑자기 예수님 앞에 다가오더니 옥합을 깨뜨리고 그 안에 있었던 인도산 최고급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보통 1-2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이 그 당시의 관습 이었는데 이 여인은 이 향유를 통째로 부은 것입니다. 그 향유가 예수님의 발등에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자기의 머리채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있었습니다.
머리털은 여인에게 있어서는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 서는 푸는 법이 아닌데 지금 예수님 앞에서 이 여인은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생명과 정조처럼 소중히 간직했던 그 향유를 붓고 주님의 발을 씻은 것입니다…..그런데 이 놀라운 장면을 바라보면서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막 14: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사람들은 분내면서 이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비싼 고급 향유를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막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런데 이 여인을 책망하고 야단치던 대표적인 사람은 요12장에서는 <가룟 유다> 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표면적으로만 관찰하면 가룟 유다의 설득이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말을 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이 향유의 값은 300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 돈이 과연 얼마쯤 될까요? 이것은 그 당시 일반노동자 1년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수만 불 쯤 되는 값이 나가는 향유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 순간에 몇 만 불이 다 날아가 버린 것 입니다.그래서 유다를 비롯한 몇 사람은 이 여인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여기서 유다의 보이지 않는 동기를 아셨기에 그의 말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여인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막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영어성경에 보면 이 좋은 일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표현 하고 있습니다. BEAUTIFUL THING
교회사가인 라투렛은 교회역사를 연구하면서 중요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교회를 지켜온 사람들-그들은 신학자가 아니다. 정치가도 아니다. 부유한 사업가도 아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아니다. 이름없이 인정없이 주의 제단에 사랑을 바친 수없이 많은 성도들 바로 그들이 에클레시아의 주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리아같은 성도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켜온 주역들입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마음-그것은 주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를 지키는 사람들도 이런 마리아의 영성을 지닌 성도들입니다. <저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것은 낭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아름다운 낭비였다고 칭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사건을 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셨을까요?
1. 이 여인의 행동의 동기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 이시며 우리의 깊은 동기를 보시는 분 이십니다.그런데 주께서 보실 때 이 여인의 동기가 아름다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의 마음의 동기가 순수한 사랑의 동기임을 보신 것 입니다…..사랑의 동기, 은혜의 동기는 언제나 <계산>을 초월 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계산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 입니다. 핸드폰 비용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국제 전화비도 아까워하지 않고 냅니다…..여러분 한때 사랑에 빠져 헤메이던 시절을 더듬어 기억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시간을 계산해 가면서 만나셨습니까? 아니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왜 그리도 빨리 가는지? 하루 종일 함께 있었어도 헤어질 때는 아쉬워하는 것이 연인들의 모습입니다. 사랑은 시간을 초월 합니다. 사랑은 시간을 낭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계산을 초월합니다. 사랑은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일생동안 끊임없이 경제적으로 투자하고 항상 적자를 보면서도 그 적자를 즐거움으로 삼는 사업이 무엇일까요? 자녀교육 아닙니까? 어떤 어머니가 자녀에게 투자 하면서 뮤튜얼 펀드(Mutual fund)에 투자 하듯이 이익을 계산하면서 투자하는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있다면 그런 어머니를 진정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정말 희한한 것입니다. 사랑은 인간을 눈멀게도 하고, 인간을 맹목적 인간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은 계산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서양 부부들 가운데 식당에서 밥 먹고 나서도 각자가 계산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저 사람들 이 부부일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 사건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이 비싼 것을 허비하다니…>
이 향유는 몇 만 불짜리입니다. 여러분 이민생활 하시면서 일반적인 노동을 하시면서 3-4 만불 버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 많은 돈을 한 순간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도울 수 있는지 아는가…?> 이것은 합리적인 설득입니다.
그런데 요12장에 보시면 예수님은 이 유다를 가르켜서 말하기를 <저는 도적이라>하셨습니다. 유다의 속에는 다른 동기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주장을 내세우는 그 밑바탕에 있는 아주 이기적인 동기를 보신 것입니다.
때때로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 저 사람은 미쳤어.. 저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닌가봐…>
자기는 헌신하기 싫고… 자기 속에는 사랑이 없고… 자기는 희생하기가 싫기 때문에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도 이기적인 동기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런 이기적인 동기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에서 사도는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그 말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고, 아름다운 말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비밀을 알고, 지식이 있더라도.. 아무리 정보에 뛰어나도..(주식 시장에서 10초만 주식 정보를 빨리 알면 수천만 불 범) 아무리 구제헌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돕는다 할지라도… 자기 얼굴, 체면 때문이고….사랑의 동기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사랑의 동기에서 하고 있는가?> <은혜의 동기에서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아름다운것 입니다.
막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 사건은 왜 아름다운 일이었을까요?
2. 일을 행한 시기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인은 <마지막 기회>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아름다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가 마지막 봉사의 기회였다는 것을 마리아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여자의 직관으로 알았을까요? 여하튼 그것을 주님이 인정하셨습니다.
막 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리아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앞에 나와 값비싼 옥합을 깬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떠나가는 내 남편, 내 아내에게, 그들의 마지막 소원 한번 들어주는 것을 낭비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수술을 받고 싶어 할 때, 가능성이 없는 수술이라도 내 아내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그 소원을 들어 주지 않겠습니까? 돈 낭비라고 거절? 냉정?
이 여인 마리아는 이것이 예수님께 드리는 마지막 봉사였음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중요한 성경적인 암시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비교하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마르다는 항상 서있고, 뭔가를 항상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앉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냥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청종하고 있는 마리아를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 보면 <마리아는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나는 죽어야 하리라.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리라>
대부분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느 날 마리아는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이제는 주님께 봉사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면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을 표현할까? 어떻게 주님을 위해 헌신할까? 그러다가 마리아는 자기의 옥합을 깬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봉사할 수 있을 때 하셔야 합니다. 할 수 있을 때 봉사 하세요. 할 수 있을 때 헌신하세요.
지난번에 어떤 분이 임종 직전에 하시던 말씀 이 생각납니다.<목사님, 교회 한번만 더 나가서 예배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예배당에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오지 못할 날이 올 때가 있어요. 봉사하고 싶어도 봉사 할 힘이 없을 때가 있어요.
어둔밤 쉬 되리니…..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교회 봉사의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섬김, 봉사, 시간, 재물을 드릴 기회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유태인 할머니는 제2차 대전 때 어린 동생과 함께 부모님과 떨어져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 7살 밖에 안 된 철없는 남자동생이 덤벙대다가 들고 있던 장난감을 떨어뜨렸는데 그 때 성질이 고약했던 이 할머니는 매정하게 동생에게 쏘아 붙였다고 합니다. <야 이 칠칠맞은 바보 멍텅구리야. 넌 항상 떨어뜨린단 말아! 정신 좀 차려!> 그리고 그 직후 동생과 다른 막사로 격리되었는데 누나인 자기만 살아남고 동생은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 입니다.
그 뒤로부터 그 날 마지막이 될 줄 모르고 어린 남동생에게 너무 매몰차게 해준 그 말이 두고두고 누나의 가슴에 한이 되어서 그는 그 뒤부터 이런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누구에게든 영원히 남겨도 후회가 없을 사랑의 말이 아니면 안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는 삶도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살아계실 때 잘해 드릴 걸… 마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주님께 가장 높은 헌신을 드렸습니다. 지금 최고의 기회가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기회의 청지기가 되십시오.
마리아의 삶의 낭비를 주께서 칭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최선의 것을 주께 드렸기 때문 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옥합을 가지고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과거가 어두웠던 마리아에게 있어서 이 옥합은 생명처럼 정조처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처녀들은 보통 시집갈 때 가져가기 위해서 이 옥합을 소중하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께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깬 것입니다. 여기서 <옥합을 깼다>는 말을 주의 하십시오. 옥합을 열고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상식) 옥합의 일부를 붓고 나머지는 뚜껑으로 닫은 것이 아닙니다.(헌신적) 마리아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옥합의 목 부분을 깬 것(돌이킬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린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마리아는 최고 최선의 헌신을 드린 것 입니다. 주께서도 이것을 아셨습니다.
막 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저가 힘을 다하여…> 이것은 최선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최선을 드린 것입니다.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산 제사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예배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최선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발견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예배 중심이었습니다. 광야를 행진 할 때도, 광야에 유숙할 때도 언제나 언약궤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 가지입니다. 성도의 삶은 예배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가는 곳마다 단을 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최고가 되기보다는 최선을 다 하십시오.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명연주가 파가니니는 열심히 연주 하는 동안 줄이 하나 끊어 졌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한 줄이 남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연주했다고 합니다. 줄 하나로 완벽한 연주를 했습니다. G선 하나로 지선상의 아리아 같은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연습했으면….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뉴저지 의과대학 교수로 있던 ‘습한’이라는 크리스천 교수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반복합니다) 그가 군의관으로 일하던 시절에 독일에서 근무할 때 급한 사고가 있어 가보니 한 젊은이가 사고로 피투성이가 되어 왔는데 눈도 잃고, 두 다리도 잃고, 한 팔을 잃고, 갈비뼈도 부러지고… ‘이런 사람을 살려야 하느냐?’ 회의 하다가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고 최선을 다해 이 사람을 수술 했는데 21번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 받다가 회복이 되어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퇴원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이 ‘습한’이라는 의사가 독일을 방문하면서 그 청년 생각이 나서 2주간 동안 방송국을 통해서 이 청년의 소재를 찾았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 청년은 얼마나 자신을 학대하며 살까? 하면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때 그 청년의 나이는 45세였는데, 그는 그 후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공부하며 일해서 독일의 유명한 도르벤도르게 라는 도자기 회사의 일급 감별사가 되어서 잘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성 불구자가 되어서 결혼도 못했고 자녀도 없었지만 놀라운 것은 그는 그 동안 20명의 불행한 아이들을 양자로 받아 기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한 의사가 최선을 다한 결과였습니다. 팔 다리도 없고 눈도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대충 수술하다가 죽었다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그러나 그는 사랑의 낭비를 한 것 입니다. 최선을 주님께 드리는 삶의 자세는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마리아만 옥합을 깬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옥합을 깨기 전에 예수님은 이 여인을 위해서 자신의 옥합을 깨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것은 그분의 옥합을 깬 것을 말합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옥합을 깨뜨리셨습니다. 자기의 전존재의 옥합을 깨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에서 보배로운 피를 쏟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죄 사함 받고 그 피로 깨끗함을 얻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다면 여러분,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옥합을 깰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옥합은 무엇입니까? 내가 깨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간의 옥합을 깨어 시간을 주께 드려 보십시오. 나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만 사용되던 물질의 옥합을 깨어 그 향유를 주의 발 앞에 부어 보십시오.
물질을 쌓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재능을 쌓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을 쌓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을 쌓아 두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사랑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동안은 진정한 의미로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쓸 때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드리는 연습, 주는 연습을 하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것이 축복의 법칙입니다. 야고보서 5장 3절에 보면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쓸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타임 아웃! 하면 끝!
저와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사랑으로 주께 드리는 거룩한 낭비, 허비하는 사랑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추가>>>>
무엇이든지 쌓아 두려는 죄악된 마음 때문에 불행이 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무엇을 쌓아 두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면
① 물질을 쌓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12장 13절 이하에 보면 쌓아 둔다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오고 '내가'란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결국 자기만을 위하여 욕심을 부리면서 쌓아 두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의 산상수훈중의 말씀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은 자기 욕심만 채우기 위해서 세상에만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쓰라는 말씀 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보면 지식이 많거나 재능이 많은 사람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고 얼마나 주를 위해 헌신하며 일할 수 있는가, 주님의 사업을 위해 배와 그물도 다 버리고 부모와 처자까지라도 뒤로 하고 충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고, 요한 웨슬레(John Wesley)도 죽을 때 그릇 몇 개와 숟가락 몇 개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복음만 전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말년에 남겨 두신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9절 이하에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히브리서 13장 5절에 보면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 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절대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결코 떠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런고로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고 매일 매일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3절에 보면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쓸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서 5장 13절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사람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전5:13)
② 재능을 쌓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 가운데 l달란트 받은 자는 가만히 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책망을 받고 있던 것도 빼앗겼으나,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자는 열심히 장사하여 이를 남겨 많은 칭찬과 상금을 받았습니다.
영어로 탤런트(talent)란 말은 재능, 재주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자꾸 활용해야 하나님께서 더 주시고 상 주시는 것입니다.
농속에 넣어두고 쓰지 않는 비단옷보다는 마루에서 쓰여지는 걸레가 더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제각기 재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업, 구령사업을 위해서 쓰십시오. 그래야 더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어떤 분은 전도은사를 받았는데 전도를 안 하면 괴롭고 답답하답니다. 또 기도의 사명을 맡은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전도 잘 하시는 분, 심방 잘 하시는 분, 기도 열심히 하시는 분, 헌금 많이 하시는 분,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 소그룹, 목장, 청년회, 여선교회, 남선교회 등 무슨 부 어떤 분야든지 가담해서 힘써 일해야 하나님께서 재능과 은사를 더 주시고 많은 상금을 주시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③ 지식을 쌓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 되로 배우고 말(斗)로 쓰는 이가 있고 말로 배우고 되로도 못 쓰는 이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석사 학위나 박사 학위가 몇 개씩 되는데도 실제로는 아는 지식을 활용치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이고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배웠는데 활용을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쓰지 못하는 지식은 많을수록 교만만 더해주고 번민만 낳게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아는 지식을 자주 활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어리석게 이 세상에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물질도 재능도 지식도 시간도 사용하여 하늘의 영원한 상급으로 바꾸시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 쌓아 두는 것이 왜 나쁜가 하면…..
1. 재물을 쌓아 두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만나를 l일분씩만 주셨고 많이 거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2. 참 행복과 위안은 결코 많이 쌓아 두는 데 있지 않음을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 보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랑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리라 ."고 하신 말씀처럼 돈 많고 지식 많은 사람 가운데 불행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는 이가 더 많이 있습니다. 더욱이 영적 생명, 영적 은혜는 쌓아둔 것과 무관한 것입니다.
3. 내가 소유하고 있는 동안은 진정한 의미로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소유한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쓸 때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4. 쌓아 두기만 하면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못받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보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셨습니다.
5. 쌓아 두기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쌓아 두지만 말고 쓸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 하늘의 큰 상금을 쌓는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6:18-19).
칭찬받은 낭비
이필재 목사
부활주일 전까지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보내자는 교회들의 약속입니다. 마가복음은 모두 16장으로 되어 있어서 14장에서부터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고 있는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성찬 기록도 14장에 나오고, 겟세마네의 기도 내용도 14장이고, 14장에서 로마 군사들에게 잡히셔서 재판 받으시는 날 순서로 사순절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예수님 자신이 발표했습니다. 자신의 장례식 준비를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의 배경을 보면 유대 나라의 제일 큰 국가 절기 유월절 이틀 전이라는 시기적 발표를 한 것이 나오고 장소는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오늘 말씀을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2절, 3절에서 9절, 10절에서 12절입니다. 먼저, 1~2절에는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유월절과 무교절은 같은 말입니다. 유월절을 기념해서 먹는 빵으로 누룩 없는 빵을 무교병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무교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는 히브리 민족의 광복절 개념입니다. 그러한 절기를 이틀 앞둔 시간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렇게 오늘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흉계’란 말은 ‘흉악한 계획’을 말합니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흉악한 계획을 꾸며서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으로 오늘 성경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런 흉괴를 꾸몄는가? 먼저 이 사람들의 직책을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라 했는데 유대나라는 이 세상에 존재해 온 유일한 신정 통치 국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국법으로 정하고 살아온 민족이며 사울 왕이 초대 왕이 될 때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사울왕때부터 왕정 통치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영적 지도자들이 대통령의 역할을 해온 나라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정해주신 직책이 아주 뚜렷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행정 통치 기관이 열두지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의 계보를 따라서 모든 행정을 실행했는데 그 중에서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성전 봉사 직으로 하나님이 정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 성전 관리를 하고 예배드릴 때 음악 봉사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레위 지파들 가운데서 아론의 자손을 선택해서 제사장이 되는 영적 특권을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 가운데도 아론의 후손들은 약간의 차별화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아마 가문의 영광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 가운데서 또 제사장이 선택됩니다. 이 제사장이 된 사람은 그 사회에서 영적 특권층으로 일반인들과 차별이 됩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백성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 의식을 집례하면서 영적 지도자로 일반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관계성을 정리하고 성경공부를 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차별화가 생기는데 제사장 중에서 대제사장이 선택이 됩니다. 대제사장들은 국가의 국무위원이 되는데 그 이름을 ‘산헤드린 공회’라고 국회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적, 정치적 권력이 모두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권위적 직책에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거라는 종교적 분위기 때문입니다.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비교할 수 없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그 나라 법정의 대법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서기관들과 함께 했다고 했는데 서기관들은 뭐하는 사람들인가? 이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전문직이며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 역할을 하는데 이 사람들은 공부 밖에 모르는 학구파들입니다. 이들의 성경 연구가 얼마나 실력이 있었는지 성경에 나옵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 땅에 왔습니다. 메시아 탄생 장소를 몰라서 헤롯왕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동방으로부터 왔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어디서 나겠습니까?” 물었습니다. 헤롯도 모릅니다. 그래서 급히 비상 국가 회의를 소집합니다. 대제사장, 서기관들을 궁으로 다 오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메시아 탄생의 징조를 보고 동방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메시아가 나면 어디서 나겠느냐?” 현장에서 대답합니다. “베들레헴입니다.” “왜 베들레헴이냐?” “성경에 베들레헴이라고 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네게서 한 다스리는 목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100퍼센트 정확합니다. 그 실력은 알아줘야 합니다. 아마 지금 대한민국에 그 정도의 실력 있는 목사가 나타나면 그 목사는 한국 교회의 국보급 목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유대 사회의 최고의 권력자요 영적 지도자요 지혜자요 재판관입니다. 유대 사회는 서기관들을 향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의 깨우침은 영혼의 지침서로다.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 그의 말을 듣는 자는 공정한 판단력과 올바른 지식이 있어질 것이며 신비를 경험할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빛낼 것이며 만인의 칭송을 받을 것이로다.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할 것이며 만백성이 그의 지혜를 찬양할 것이로다. 대대로 그들의 이름은 빛이 날 것이며 모임에서는 그를 칭송할 것이로다. 그가 장수하면 그의 이름은 천명의 이름보다 더 영광될 것이요 만일 그가 일찍 죽는다 해도 그의 이름은 살아있으리로다.” 서기관 찬양 노래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관계에 있어서 제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하나님 말씀 가르치는 일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왜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아들을 죽이려고 흉계를 꾸미는 것일까요? 기독교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인정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2천년 역사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죽인 숫자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왜 죽였는가? 마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의 교리적 해석 차이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무고하게 죽이는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 유럽의 여러 나라 길거리에 예배당 안에 있는 조각품이나 길거리 안에 있는 조각품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길바닥에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 조각품이 있을 것입니다.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한 사람이 발로 밟고 창을 가져다 그의 목을 찌르고 있는 동상이 유럽에 많습니다. 그 쓰러진 사람이 개신교 신자입니다. 죽이고 있는 사람이 가톨릭 신자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프랑스에서 많이 있는 일입니다. 7만 명의 개신자가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내가 지금 7만 명이라 했는데도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노트르담 사원 관광을 가시면 안내자가 이 설명을 꼭 합니다. 어느 날 가톨릭교회에서 “노트르담 사원에 개신자 모여라!” 했습니다. 개신자 3만 명이 “야! 드디어 개신자들을 노트르담 사원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구나!” 좋아서 3만 명이 모였는데 가톨릭교회에서 그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과거에 여러분이 마녀 사냥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바티칸에서는 죄 없는 20만의 여인들을 죽였습니다. 프랑스의 유관순 잔 다르크도 그때 죽었습니다. 지금 카타피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또 하나의 십자군 전쟁이다.” 그렇습니다. 과거의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가 잘못한 전쟁입니다. 카타피가 그것을 이용해서 “그러니 우리 이슬람은 서방세계의 이 십자군 전쟁을 막아야 한다.” 이러면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기독교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주의라는 변질된 유대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죽인 작업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져있는 고난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가장 잘 한일이 예수를 죽이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로 끌고 간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지금 있고 그 다음에는 중간을 넘어서서 10절에서 11절을 보면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려고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여기 또 하나의 흉계가 제자에 의해서 꾸며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 기독교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에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시저를 배반한 부르터스이고 하나는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가룟 유다를 향해서는 마귀라고 성경에 저주 선언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누구도 알 수 없고 성경에도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추측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들 중 11명이 갈릴리 지방 사람들인데 유다만이 남쪽 유다 그리욧 지방 사람입니다. ‘갈릴리 지방 열한 제자에게 왕따를 당한 소외감 때문인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몇 번의 마찰이 있었는데 오늘 말씀에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씻는데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리니까 어떤 사람이 화를 냈다고 했는데 이 화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름까지 실명 거론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와 정 반대 입장을 취하시니까 많은 사람 앞에서 가룟 유다는 체면 손상이 생기고 이 의견 충돌에서 생긴 자존심이 예수 배반의 마음을 먹게 했습니다. 그래서 일이 끝나자마자 ‘흉계를 꾸미자.’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가룟 유다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상대하시는 주변 인물들이 너무 천박스러운데 유다는 실망했습니다. 가뜩이나 유다 출신은 자기 밖에 없습니다. 갈릴리 촌사람들과 일하자니 자존심 상하고 성경에서조차 갈릴리 사람들은 멸시를 당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상대하지 아니하는, 그 사회 아주 소문난 창녀 출신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를 데리고 다니시고 삭개오 집에는 누구도 들어가지 않는데 그 죄인 집에 들어가서 점심 한 끼를 얻어먹는 일을 하시고 날마다 상대하는 사람들은 문둥병자, 귀신 들린 사람, 시시한 존재들이니 ‘이거 원 창피스러워서….’ 유다는 그런 자존심이 넉넉히 있을 만한 출신입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메시아라면 메시아다운 일을 빨리 시작하셔야 되는데 안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온 백성이 종려나무 가지 흔들어 환영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때다.”하고 빨리 빌라도 정부를 때려 부수고 과도정부를 세우시고 자기들을 앞세우셔서 독립선언문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민족 국권 회복의 깃발을 휘날려야 되는데 아무것도 안하십니다. 그리고 요즘에 와서는 “나는 죽을 것이다.”하시니 ‘이게 도대체 뭐야? 혹시 우리가 메시아 사기 사건에 걸린 거 아니야? 가짜 메시아인가?’ 혼란이 왔습니다. 더구나 지금 예수의 반대 세력은 심상치 않게 자기들의 생명을 위협해 오고 있습니다. ‘어? 이러다가 나까지? 어떡하지? 내가 살 길은 이 망하는 집안을 뛰쳐나가서 반대편에 공을 세우면 확실하다.’ 즉시로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내가 공을 세워주겠다. 예수 처치하는데 내가 도와주겠다.” “그래? 그러면 너에게 돈을 주겠다.” “그렇게 하자.” 합의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앞뒤는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는 두 그룹의 모의가 기록되어 있는데 중간 기록은 예수님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 기록이 요한복음에는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타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아니면 그 집에 살고 있는 베다니 마리아 둘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성경에 실명이 거론되어 있습니다. 문제의 발달이 뭔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는데 너무나 큰 낭비를 한 것이 논쟁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가격이 300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한국 돈으로 얼마인가? 쉬운 해석이 성경에 나옵니다. 포도원 농장에서 일꾼 한 사람에게 하루에 주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건강한 청년이 하루 종일 일용직으로 열심히 일을 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데 아무 불평이 없는 것으로 봐서 넉넉한 임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300데나리온은 300명이 하루 종일 일한 임금이 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건강한 젊은이가 건설 현장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용직으로 열심히 땀을 흘려 일했을 때 종류는 여러 가지 많지만 10만 원 정도 받는다고 계산하면 3천만 원이고 약간의 기술노동을 제공한 사람이 20만원씩 받으면 6천만 원입니다. 그 정도의 가격을 소비했기 때문에 지금 논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마리아가 낭비하는 이 향유는 지금 다른데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발을 씻는데 소비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발 씻는데 기름 붓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필요치도 아니하고 더군다나 그 많은 돈을 발 씻는데다 한꺼번에 왈칵 쏟아버린 것이 지혜로운 일인가? 아마 이 광경을 우리 머릿속에 그림 그려보면 예수님은 입장이 난처해지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의논 없이 별안간 와서 왈칵 쏟아 부었는데 다른 성경에 보십시오.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습니다. 아까워서 병뚜껑을 열고 쫄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팍 쏟아 부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책망했는데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화를 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돌발적 사건입니다. 아마 이런 때 예수님이 그 자리를 어색하지 않게 넘기시려면 다른 사람들의 책망에 편승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분위기상 좋을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여! 의논도 없이 별안간 이런 일을 저질러서 왜 나를 난처하게 하느냐? 내 생각에는 이런 일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맞다. 무모하다. 300데나리온의 이 큰 가격의 돈을 더 효과 있게 투자할 수 있는 얼마든지 좋은 일이 있는데 아무 유익이 없는 발에다 쏟아 부으면, 그리고 나까지 난처하게 만들면 이게 잘한 일이냐? 이건 아무래도 네가 열심히 했지만 잘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분위기는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태도는 정 반대였습니다. 여기 사실 점잖게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이렇게 쓰여 있지만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그 사람들이 화낸 거만큼 책망하시는 겁니다. “너희들 입 좀 다물고 있어. 뭐 그렇게 참견이 많아? 잘하고 있는데?” 이 자리는 그야말로 썰렁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욕을 먹은 사람은 지금 가룟 유다입니다. 이 사건 후에 바로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해서 대제사장에게 가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아주 결정적으로 유다의 마음이 삐뚤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의 생각은 상식도 안 되나? 아니, 자기 발 한번 씻는데 물이면 되지, 저렇게 엄청난 낭비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잘했다고 하면 예수의 정신 상태는 정상인가? 내가 저런 사람의 제자가 되어서 내 인생을 허비하다니…. 안되겠다!’ 결정적 욕심을 품고 발길을 돌려버렸습니다. 아마 가룟 유다뿐만 아니고 그 현장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여인 보호의 발언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파격적 선언으로 발전을 합니다. 9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다니면서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라. 이 자체가 복음이다. 그렇게 해라.” 이러니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와! 이게 그렇게 잘한 일이야?”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왜 그런 상식 없는 말과 행동을 하셨을까? 예수님과 이 제자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돈입니다. 얼마나 빨리 계산을 했는지 그 순간에 향유의 가격까지 정확성 있게 발표를 합니다. 그러면 그 문화에서 33년을 살아오신 예수님은 그 가치를 모르시겠습니까? 먼저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라보신 가치는 돈의 환산이 절대 아닙니다.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이 여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 향유의 가격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향유 사업이 가장 발달한 곳이 그쪽 지역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도 동방 박사들이 예물 드린 것 중에 몰약이 있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니고데모가 몰약을 가지고 와서 시체에 발라 방부제 처리를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지금도 수천 년 전 미라가 간혹 발견되는데 몰약 처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안 썩는 것입니다. 김일성 죽었을 때 이집트 사람들이 재료 가지고 와서 시체에 방부제 처리를 했습니다. 카이로 박물관에 가보십시오. 그런 것들이 지금도 보관되어 있고 시내 쇼핑몰에는 향유 산업이 90퍼센트입니다.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여인들은 이 향유를 사용목적보다 재산 가치로 보관했습니다. 와인이 몇 백병 되면 한 병에 몇 만 달러 나가는 것과 똑같은 발상입니다. 마리아도 그런 재산용 향유를 옥합에 담아 보관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직 처녀로 나타나고 있는데 아가씨의 오천만원 정도의 경제는 지금 수준으로도 적지 않은 재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감동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주변은 어떻습니까? 앞뒤 모두, 제자도 제사장도 서기관들도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는 분위기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마리아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이 점점 험악한 사지로 몰려간 그 시간에 마리아는 자기 할 일을 하나 찾은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해야 돼.’ 이것은 십자가를 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낭비라는 것입니다. 왜 그 일을 온 세계에 널리 홍보하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아름다운 낭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성취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 우주 만물이 다 내 아버지의 것인데 이 기름 한 병이 그렇게 나한테 중요하냐?” 솔직히 모든지 돈으로 환산하고 돈이 아까운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은 이렇게 낭비적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누구든지 자신의 인생을 한꺼번에 투자할 수 있는 가치관을 찾아서 헤매는 것이 인생입니다. 못 찾아서 그렇지 찾기만 하면 옥합이 뭡니까? 생명까지 던집니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국가 재단에 내 인생의 옥합을 한꺼번에 팍 깨뜨리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이다.” 그래서 국가 재단에 아낌없이 몸을 바치는 청년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나라 민주 발전에 내 몸을 던져 옥합을 깨드려 버리겠다. 다 없어져도 괜찮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을 이 세상의 진리 과학 발전을 위해서 투자하고, 사회 정의를 위해서 자기 옥합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고, 경제 번영이나 예술, 스포츠 어떤 것이든 내 인생을 한꺼번에 깨뜨릴만하다는 가치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아낌없이 거기에 투자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주님을 정한 것입니다. “내 할 일은 이거야. 이것 보다 더 귀한 일은 없어. 지금 주님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중이야. 기회도 이제는 없어. 오늘이야.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내게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드릴 텐데 이것밖에 없어.” 누구와 상의할 시간도 없이 옥합을 깨서 십자가로 향하신 예수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몸이라는 옥합을 깨서 피 흘려 돌아가십니다. “그래! 조금 있으면 내가 십자가 위에서 내 육신이라고 하는 이 옥합을 깨뜨려서 피를 흘릴 것이니 네가 그러한 나의 장례식을 위해서 미리 준비해 주었다. 기쁘다. 내가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에 유일한 기쁨과 위로를 네가 주었다. 잘했다.”
오늘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은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책망이고 하나는 칭찬입니다. 그런데 책망은 여럿이 했습니다. 칭찬은 예수 혼자 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님 한분의 칭찬이면 만족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비판의 소리에 이렇게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신앙의 가치관으로 내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했습니다. 주님 이후 지금까지 누군가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는 이만큼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한 일이 자신의 장례식을 위해서 미리 한 일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행위는 인류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과정의 아름다운 한 토막의 향기 나는 꽃송이로 이렇게 남겨졌습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온 세상 모든 가치를 돈으로만 환산하는 상업주의 원리에 물든 제자들의 마음과 같은 현실에 모든 사람들이 돈이 없어지는 것이 너무나 아까워서 책망을 했고 주님은 그것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여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낭비입니다. 여러분! 옥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내 옥합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리아는 그것을 주님으로 정한 것입니다. ‘이때밖에 할 수가 없어. 이제 십자가를 지실 거야.’ “예수여! 아버지의 나라로 가시는데 이 사건 하나로도 위로가 되소서.” “팍!” “어찌하여 이것을 허비하느냐?” “듣기 싫습니다. 나의 할 일은 이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순절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계산을 잘 하셔야 합니다. 마리아를 본받으시길 축원합니다.
허비인가 헌신인가
막 14:1-9 / 김영주 목사
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주님을 위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순수한 의도로 그랬는데 내게 비난이 쏟아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듣기 싫으니까 안 하면 되는 것입니까? 비난하던 말던 상관치 않고 그냥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와 유사한 환경에 처했던 한 사람 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다. 이틀이 지나면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 중의 하나인 유월절이 됩니다. 유월절에 이어서 있는 것이 무교절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 명절을 앞두고 아주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아죽일 방책을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궤계'로, 올가미를 씌워서, 트집을 잡아서 잡아죽이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대제사장, 서기관들은 당시 최고의 종교기관인 산헤드린의 멤버였습니다. 산헤드린의 멤버들은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신앙적이고 존경받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모여서 계략을 짜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 무슨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기','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따르지 않고 예수님만 따르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요12:19절 보시면 당시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온 세상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좇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디가나 예수님이 계신 곳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왔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들의 인기는 떨어져도 예수님의 인기는 계속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 위협과 질투를 느꼈습니다. '저 사람 가만히 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종교인들의 살인모의입니다.
저는 여기서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를 봤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너무나 선명하게 종교인과 신앙인이 대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아죽이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종교인이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어야만 하는 예수님은 신앙인 입니다. 우리도 까닥 잘못하면 나도 모르는 순간에 종교인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종교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종교를 통해 자기 유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입니다.
--손해가 오거나 고난, 어려움이 닥치면 미련 없이 신앙을 벗어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한 경우 남을 죽입니다. 이런 것이 신앙에 위배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느냐,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인기와, 기득권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했을 때 기꺼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뜻을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게 얼마나 이득이 있는가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나보다 잘될 때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을 결정짓는 가장 큰 차이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대할 때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종교인은 십자가가 주어지면 벗어버리고 도망가버립니다. 목적이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유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십자가가 주어지면 묵묵히 감당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성숙했는가는 십자가를 지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참 예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절부터는 그 유명한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먼저 3절 보십시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였습니다. 문둥이 시몬은 과거 문둥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이 치료해주셔서 나은 사람입니다. 이 장소에는 15명 정도가 참석했습니다. 예수님과 12제자, 문둥이 시몬,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입니다. 여자들은 밖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식사준비를 한 것입니다. 이 식사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문둥이 시몬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준 사실에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때 한 여자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유대인들은 손님이 식탁에 앉으면 몇 방울의 향유를 그 손님에게 뿌리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놓고 두 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제자들은 아주 화를 내면서 왜 이 향유를 허비하느냐?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왜 저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을 일을 하였다 하시면서 칭찬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습니까? 이 여자의 헌신이 평소의 습관을 벗어난 너무 파격적인 헌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3절을 다시 보십시다.
'매우 값진 향유'라 했습니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 입니다. 나드는 히말라야에서 자라는 나무뿌리에서 추출한 향유입니다. 당시 어떻게 해서 히말라야에 있는 것이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지만 무척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무척 비싼 것입니다. 하루, 이틀에 이런 엄청난 양의 향유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리고 그 전부를 예수의 머리에 부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안 좋게 보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향유를 몇 방울만 뿌려도 되는데 전부를 부었다는 것이요,
--옥합을 깨뜨리지 않아도 되는데 옥합까지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에 그 옥합을 써먹을 수 없잖아요?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들어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이만한 양이면 엄청난 액수인데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자를 돕지 않고 왜 허비하는냐 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말에서 제일 맘에 안 드는 표현이 나옵니다.
4절에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하는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면서 저 여인이 향유를 '허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비'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헛된 일에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그만한 가치나 자격이 안 되는데 했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화를 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왜 주님께 드리는 것이 '허비'입니까?
그럼 반대로 주님께 안 드리고 사람에게 드렸다면 허비가 아닙니까? 주님께 드리는 것보다 더 가치 있게 쓴 것입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이런 것을 받을 자격이 없고, 죄인인 사람들은 이런 것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까? 만약 이것이 주님께 드려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가치 있게 썼다한들, 주님께 드려진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많은 것들은 대게 죄짓는데 사용되기 쉽습니다. 허망한 일에 사용되기 쉽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주님께 드릴 때 정말 가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허비'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허비한 것입니까?
그럼 제자들의 주장처럼 주님께 드릴 것을 사람에게 드리는 것은 허비가 아닙니까? 이런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허비가 아니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허비 입니까? 문제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일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무엇인지 들어봐야 합니다.
6절,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좋은 일이다 하셨습니다.
8절,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다고 하셨습니다.
9절, "...온천하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예수님이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을 두고두고 후세에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이 여자의 행한 일도 꼭 말하여 그 여인을 일을 기념하라하셨습니다. 너무 기뻤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것은 주님은 기뻐하시는데 정작 제자들은 성질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것이 제자들 아닙니까? 선생님은 기뻐하는데 제자들은 화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 여인과 제자들의 차이는 한 가지 였습니다. 주님의 가치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입니다. 더 드리고 싶고, 전부 드려도 전혀 아깝지 않은 분입니다. 못 드려서 아쉬울 뿐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주님은 누구보다 가장 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주님께 드려지는 것은 아무리 귀한 것을 드려도 허비가 아닙니다. 주님은 마땅히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적용해봅시다. 오늘날 믿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복음 방송을 들어보니까 이런 상담을 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목사님, 십일조를 꼭 교회에 드려야 합니까? 차라리 가난한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 좋지 않습니까?"
아마 이 사람은 주님께 드리는 것보다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더 가치 있게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여기 본문의 제자들하고 비슷하죠?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쓰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주님께 드리고 남은 것으로 도와줘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 것을 빼서 가난한 사람을 드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것은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절대 '허비'가 아닙니다. 가장 잘 드린 것이고, 가장 가치 있게 쓴 것입니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이 있노라 하면서도 주님께 대한 태도를 보면 엉망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 헌금 많이 드리는 것은 성질내면서도 자기를 위해 물건 사는 것은 과도하게 사도 화내지 않습니다. 주님이 자기만 못하다는 것입니까?
--데이트하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교회 모임이 많은 것은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예배가 어쩌다 10분만 늦게 끝나면 시계 쳐다보면서 속에서 끓어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예배가 너무 끝나서 손해봤다고, 시간 허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다.
--아르바이트하는 시간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모임에 오는 시간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인색한지 모릅니다. 교회 가서 시간 허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허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해도 되는데 너무 지나치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께 드리는 것은 어떤 것을 드려도 허비가 아닙니다. 가장 잘 드린 것이요,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한 것입니다.
이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1)여인은 오랫동안 이 일을 위해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3절의 순전한 나드 한 근은 하루아침에 모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5절에서는 이 향유의 양이 최소한 3백 데나리온 이상 된다고 했습니다. 일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1년 분의 임금입니다.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하루 5만원 씩 300일하면 1500만원 어치의 향유입니다. 이 여인은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마리아의 가정은 부유한 가정이 아닙니다.
이 가난한 여인이 이 정도 모으려면 몇 년은 걸리는 액수입니다. 이렇게 한 옥합을 가득 채웠다는 것은 그만큼 오랬 동안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몇 년을 못 먹고 못쓰고 절약하면서 모았을 것입니다. 준비했다는 것도 아름답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이것을 준비하면서 늘 마음에 주님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집사람과 데이트 할 때 집사람이 스웨터를 짜준 적 있습니다. 스웨터를 받았다는 것도 좋았지만 더 좋은 것은 이 스웨터를 짜면서 저를 생각했을 것이란 생각이 더 좋았습니다. 저를 주려고 짜면서 다른 남자 생각하겠습니까? 마리아가 이것을 모으면서 주님을 생각했던 그 생각, 그 믿음이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준비한 사람들의 헌신을 주님은 귀하게 받으십니다.
2)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처음 이 본문을 읽을 때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뭐 깨뜨릴 것까지 있나? 그냥 들고 부으면 되지....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다시 본문을 보면서 참 대단한 것을 느꼈습니다. 역시 깨뜨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왜 마리아가 이 옥합을 깨뜨려버렸을까요? 예수님을 위해 준비했으니 예수님께만 사용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어느 날은 주님을 위해 사용되고, 어느 날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고, 또 다른 날은 다른 것을 담는데 사용되기를 원치 않은 것입니다. 그릇하나 조차도 주님을 위해 온전히 드려지기를 원했습니다.
순결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만 드려지는 것입니다. 만약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매춘이지 순결이 아닙니다. 여기에 마리아의 신앙이 있어요. 주님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지고 주님을 위해서만 드려지고 싶었습니다. 다 드려지고 깨져버리기 원했습니다. 남겨두면 다시 언젠가 세상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예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양다리 걸치지 마세요.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면서, 한쪽으로는 세상적으로도 잘 해보겠다는 생각 없습니까? 주님이 부르신 길을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조건이 오면 언제든지 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기회보지 마세요. 주님을 위해 살기로 했으면 주님께만 드리십시오. 드리려면 다 드려야하지 않겠어요? 다시 세상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거부하십시오. 오늘날 영적인 매춘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깨져버리면 되는데, 안 깨지고 남겨두려니까 그런 유혹이 오는 것입니다.
3)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도 사람에게 욕을 먹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4절 보십시다. 어떤 사람들이 서로 분내며 말했습니다.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어떤 사람들' 이라고 한 것을 보면 한 명이 한 것 아닙니다. 여러 명이 함께 화내며 비난했습니다. 너무 괴롭힘을 당하니까 보다못해 예수님이 나섰습니다.
6절,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을 일을 하였다"
여러분이 주의 일을 할 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이라고 해서 항상 칭찬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이었다해도 사람에게 욕을 먹고 괴롭힘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믿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잘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는 갈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제일 견디기 힘든 때가 언제입니까? 같은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괴롭힐 때 비난할 때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그러면 참고 견딥니다.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그럴 때는 정말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응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내 편이 되어서 해결하시기 때문입니다. 9절 보시면 주님이 이 여인을 도와주십니다. 여인 편에서 힘이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힘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제자들에게서 위로 받으려고 했다면 큰 상처가 되어 평생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만 바라봤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얼마나 기분 좋은 말입니까? 사람은 몰라주지만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주님이 가장 기억하고 싶고 헌신의 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가장 기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기쁘게 하다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외면치 않으십니다. 반드시 보호하시고 은혜 베푸십니다.
4) 이 여인만큼 주님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몸은 철저히 깨어질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을 위해 귀한 피를 다 쏟아 붓게 될 것입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린 사람이 바로 이 여인입니다.
옥합을 깨뜨렸습니다--주님의 몸이 깨진 것처럼 말입니다.
향유를 다 쏟았습니다--예수님이 피를 다 쏟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만 위해 한번에 다 드려졌습니다--죄인을 위해 단번에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주님의 마음을 안 것입니까? 여인의 헌신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흡족하게 했습니다.
아직도 이 여인이 '향유를 허비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너무 무리하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교회 와서 괜한 시간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많은 것이 드려서 물질을 허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 드린 것은 어떤 것도 '허비'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만한 가치와 자격이 넉넉히 있기 때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심장에 새겨진 사람
지용수 목사
■ 청주시 우산동 3통 2반에 한 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3살 박이 아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기르던 어머니는 어느 날 오후 아들에게 간식을 만들어 주려고 가게에 갔습니다. 밀가루를 사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철길 건너편에 있는 엄마를 보고 반가워하며 철길로 달려오는 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철길로 청량리행 열차가 막 진입해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오지 말라고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기차 소리에 놀라 넘어진 아이는 엄마 쪽으로 오려고 더 기를 썼습니다. 다급해진 어머니는 철길로 뛰어 들어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아이의 생명은 구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미처 기차를 피하지 못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고귀한 사랑입니까? 그러나 그 어머니가 목숨을 버린 것은 아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기로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아들을 살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즉흥적으로 오시거나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늘나라에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희생의 피를 흘리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고난, 그 희생, 그 고마움을 늘 기억하며 하나님을 잘 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고마우신 예수님께서 유월절 이틀 전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마을인데 베다니에 살던 시몬이 집에서 잔치를 벌여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잘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서 기회를 찾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월절 이틀 전이기 때문에 조심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이스라엘 각처에 사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큰 축제를 벌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의 기원은 출애굽기 12장에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퍅한 바로를 비롯한 모든 애굽 백성들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까지 다 치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바르게 하시고 그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들이 그냥 넘어가고, 넘어가고,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유월절(passover)의 유래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의로워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죄가 많아도 살았습니다. 왜입니까?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감사함으로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이 바로 십자가의 예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하나의 짝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모두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29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앞으로 나오시는 것을 보고 감격해서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우리에게 아무리 죄가 많고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우리 영혼의 문설주에 예수님의 피, 십자가의 피가 묻어 있으면 우리는 살게 됩니다.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도 그 영혼에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죽고, 아무리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야 됩니다. 그러니 잔치 자리에서도 십자가 지실 것을 생각하시면서 음식을 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또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러니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고,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계시다 돌아가시게 될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도 힘이 드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4절에 보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내가 죽을 지경이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기쁨을 누리고 복을 받지만 때로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가문에서, 어느 공동체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잘 인내하고 이겨야 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한 여인이 아주 값진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갖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 나드 향유는 히말라야산맥이나 인도에 있는 ‘나드’라는 향나무의 뿌리나 잎에서 뽑아내는 것으로 그 한 병의 값이 그 당시 시세로 일 년 연봉 이상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 붓습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주님께만 쏟아 붓습니다.
그때 어떤 제자들이 분노하면서 여인을 꾸짖습니다.
“어찌 이 비싼 것을 이렇게 낭비하느냐?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를 도와주어야지.” 그럴듯한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항상 구제에 힘쓰지만 성탄절이면 더 크게 힘을 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돕듯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유월절이면 평소보다 더 크게 구제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는 몇 방울만 떨어뜨리고 나머지로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 될 것을 이런 때에 예수님께 그 향유를 다 부어서 낭비하느냐?’ 하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치에 맞는 말 같지만 마귀의 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에 보면 그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고, 그렇게 질책한 제자는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가룟 유다는 도적이라. 헌금 궤를 맡아서 헌금을 훔쳐 먹는 도적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아먹고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그 저주 받을 인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헌신하는 그 자리에서 감히 비난을 하고 책망을 했던 것입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고 해도 불평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대개 마귀가 쓰는 사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모임에서든 불평하고 수군수군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 저 사람은 마귀구나. 유다구나.’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붓는 향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못해 아쉬운 것이 아니라 향유를 팔아 자기 호주머니에 넣지 못하는 것이 분해서 불평을 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유다를 꾸짖으십니다.
“그냥 두어라. 저가 나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 저가 힘을 다해 내 몸에 향유를 부음으로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내가 참으로 네게 말한다. 천하에 복음이 증거되는 곳은 어디든 이 여자가 한 일이 전파되고 기념될 것이다.” 할렐루야!
이 여인은 예수님의 심장 속에, 예수님의 가슴에 새겨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이란 만남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엄마 아빠를 만나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척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골목길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병원에서, 여행길에서, 직장에서 또 수많은 만남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 수많은 만남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잊혀지지만, 끝까지 가슴에 남는, 심장에 새겨진 듯 깊이 새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게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 가슴에 새겨진 귀한 분들, 고마운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은 특별히 예수님의 가슴에 “하나님의 고마운 딸”로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냥 흘러가는 크리스천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왕에 예수님을 믿었으니 일생에 한 번이라도 예수님의 가슴에 새겨지는 헌신을 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슴에 새겨지는 귀한 헌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8절에 있습니다.
따라 합시다. “저가 힘을 다하여.”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음으로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리아는 부자가 아닙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여인입니다. 그런 그가 그 귀한, 보석 같은 옥합을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감격하셔서 “저가 힘을 다하여 내게 부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오로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께는 아낄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 향유를 예수님께 다 쏟아 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38절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내 마음, 내 목숨, 내 뜻을 다 쏟아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십니다. 우리가 헌금 궤에, 헌금 주머니에 헌금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이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은 칭찬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렙돈을 넣을 때 “진실로, 진실로 내가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저 많은 사람보다 더 많이 했느니라. 저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했지만 이 여인은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바쳤느니라.”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그렇게 헌금을 하고 굶어 죽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더 좋은 복을 주셔서 잘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 우리 교회와 제가 어렵게 살던 때 저희 가족이 수년간 어묵 반찬만 먹고 지냈습니다. 어묵도 가게에서 살 여유가 없어 어묵 공장에서 자르고 남은 부스러기를 사서 먹었습니다. 지금도 아들이 “어묵은 진절머리 나요.” 라고 합니다. 그때는 다들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네」하고 찬송을 부르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찬송은 이렇게 하면서 한 번도 있는 것을 다 쏟아 주님께 바친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여보, 우리 한 번이라도 우리 집에 있는 돈 전부를 쏟아 주님께 바쳐 보자.”라고 했습니다. 주머니를 다 털었더니 50여 만 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모두 주일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때 50여 만원은 저희에게 지금의 5천만 원보다 더 큰 돈이었습니다. 그렇게 헌금을 하고 나니 가슴이 시원하고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주일날도, 월요일 새벽에 설교할 때까지도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새벽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려고 엎드리니 제가 서울에도 가야 되고 책 값 30여만 원 줘야 할 것도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것저것 처리하려면 50만 원 정도가 필요한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가진 돈을 모두 헌금한 것입니다. ‘아이쿠, 내가 잘못했구나. 왜 내가 그렇게 헌금을 했던고!’ 하면서 후회를 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해요? 생각 없이 헌금해서 오늘 서울도 못 가게 되었습니다. 헌금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 생각 없이 그렇게 헌금을 했군요.’ 그때부터 ‘헌금 잘못했다. 안 할 걸 했구나.’라는 생각만 나고 기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터덜터덜 걸어서 집에 갔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어깨가 푹 처지지 않습니까? 힘없이 집에 가니 아내가 “여보, 어느 집사님이 다녀가셨는데 그 집사님이 봉투 하나를 주셨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그 속에 50만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럽던지, 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집사님을 통해서 이미 50만 원을 준비해 놓으셨는데, 저는 새벽에 계속 ‘괜히 헌금을 바보처럼 해 가지고…….’라고 투덜댔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그때 한 번쯤 그렇게 헌금한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제가 몇 년 전에 큰 교회에 부흥회를 섬기러 갔을 때 그 교회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회사의 사장이신 그 교회 집사님이 처음에는 ‘교회 건축헌금으로 100억을 해야지.’라고 정했는데 마음이 변해서 ‘아니야, 어떻게 헌금을 100억이나 하나? 그냥 50억을 해야겠다. 우리 교회에서 50억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50억을 해도 우리 교회에서 내가 제일 많이 하는 것일 텐데.’라며 50억을 하기로 결정하고 50억을 헌금했습니다. 그런 사정을 모르시는 목사님께서는 그 헌금에 감격하셔서 그 회사가 잘 되기를 늘 손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그 회사에 큰 사고가 발생하여 TV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 회사 소식이 전국에 전해졌습니다. 그 사고로 회사는 3, 4백억을 손해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 건축하는데 50억이나 헌금을 했으면 복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3, 4백억이나 손해를 보게 되었으니 목사님께서도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목사님께서 무거운 발길로 그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목사님, 제가 망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100억을 헌금하라는 감동을 주셨는데 제가 아까워서 50억을 떼먹고 50억만 헌금했습니다. 그러고도 우리 교회에서 제가 제일 헌금을 많이 했다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세가 틀려먹었으니 저는 망해야 마땅한 놈입니다.”라고 하면서 우셨습니다. 그 후 그분은 300억인가 400억을 빚내어 다시 회사를 경영하시게 되었습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되었지만 3년 후 모든 것이 회복되어 그 회사는 다시 건강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회복되자 집사님은 “목사님, 교회 지읍시다. 짓다가 부족한 자금은 제가 대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만 평 대지에 큰 교회를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힘을 다해 드린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50억도 큰돈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헌금은 가증한 예물이었던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있는 힘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집에서 TV나 라디오나 테이프로 설교를 들으며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내 몸으로,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한 집사님 이야기입니다. 집사님 몸에 결석(結石)이 생겨 수술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수술하기 하루 전 날이 주일이었는데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저녁 예배에 가겠어?’ 하고 망설이다가 ‘아니야, 그래도 가야지.’ 하고는 아픈 배를 안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했는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직접 집사님 몸 속의 돌을 제거해 주셔서 수술을 받지 않고도 깨끗이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배뿐 아니라 모든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경영주는 경영주대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서 회사를 일으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학생은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가정주부라면 가정에 힘을 쏟아 가정을 천국처럼 가꾸고, 내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으면 힘을 다해 남편을 섬겨서 남편의 가슴에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남편이 되었으면 힘을 다해 내 아내를 사랑해서 아내의 가슴에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슴뿐 아니라 사람의 가슴에도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안수집사님은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어느 회사에 말단 사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뒤늦게 경남대학교 야간 과정에 입학해서 경영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명문대 출신이 많은 그 회사에서 지방대학교 야간 출신은 명함도 내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우리 집사님은 힘을 다해 회사 일을 하니 회사에서 승진에 승진을 계속하게 되었고, 그 얼마 후에는 서울 본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본사에서도 그 전 계열 회사를 총괄하는 컴퓨터 그룹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구성원 8-90명이 모두 명문대 출신, 유학 출신의 석학들인 그 그룹에서 집사님이 리더 자리를 맡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집사님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 그룹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명문대 출신의 석학들이고, 유능한 인물들인데 지방대학 야간 출신인 내가 리더의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이 회사에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회사에 유익이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그때 마침 이 나라 굴지의 회사에서 그 집사님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해 왔습니다. 높은 직급으로 자리도 준비해 두고 좋은 차에 기사까지 붙여주겠다고 하면서 자기 회사로 와 달라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아, 감사한 일이다. 내가 우리 회사에 있으면 회사에 부담이 될지 모르는데……. 회사를 옮겨야겠다. 그러면 회사도 좋고 나도 좋고.’
이렇게 생각한 집사님이 회사에 사표를 냈더니 회사에서 펄쩍 뛰며 절대로 안 된다고, 사표를 받을 수 없다고, 꼭 회사에 남아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일주일이 지나도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집사님은 지방야간대학 출신이지만 그래도 힘을 다해 성실히 일하니 쟁쟁한 인물들이 그렇게 많은 중에서도 ‘우리 회사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회사에, 회사 경영주의 가슴에 기억되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힘을 다 쏟아 맡은 일을 성실히 해야 합니다.
■ 제 이야기를 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는 비천한 출신입니다. 그래서 힘을 다해 노력합니다. 저는 운동할 때도 테이프를 들으며 공부하고, 책도 봅니다. 이렇게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합니다. 저는 자동차 안에서도 늘 공부를 해서 제 자동차는 저의 대학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저는 밥을 먹을 때도 혼자 먹을 때는 반드시 책을 보거나 테이프를 들으며 공부를 합니다. 비록 비천한 출신이지만 이렇게 노력을 하니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셔서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줄로 믿습니다. 또 제 아내에 비해서도 저는 비천한 남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주 같은 귀한 아내를 얻어 사니 혹시 아내에게 설움 받고 천대 받을까 봐 저는 힘을 다해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제 아내에게 마음을 다 쏟습니다. 지난 봄 제 아내가 3부 예배 시간에 가스 레인지에 냄비를 올려놓고 나와서 저희 집에 불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희 집으로 소방차 3대가 오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제가 설교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봐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저는 저녁 예배가 끝나고 집에 가서야 그런 사건이 벌어졌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도 저는 힘을 다하여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놀라지 않았어요? 집이야 탄들 어때요? 당신 놀라는 게 더 큰 일이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50만 원을 챙겨서 다음 날 소방서에 가서 인사하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힘을 다해 아내를 위로하니 아내가 저렇게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제가 청주에 연합 집회를 섬기러 갔을 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바람이 많이 부는 것을 보고 바람에 머리가 흐트러질까 봐 아내가 제 머리에 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헤어스프레이를 막 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뿌리고 나서 보니 헤어스프레이가 아니라 에프킬러였습니다. 제가 모기도 아닌데 제게 그렇게 모기약을 뿌린 것입니다. 아내가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습니다. 그 때도 저는 힘을 다해 웃으며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괜찮아요. 몰라서 그런 건데…….” 그리고 다시 머리를 감고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좋은 남편이 되려고 힘을 다해 애씁니다. 아마 저는 제 아내의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어차피 세월은 가고 세월이 가면 우리도 흘러갑니다.
성가대를 하든, 교사를 하든, 구역장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힘을 다하면 그곳에 우리의 향기가 드러나고, 우리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릴 때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내가 예수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리면 예수님께서 내게 큰 복을 주시겠지?’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 귀한 향유를 다 쏟아 부은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여인의 모습에 감격하신 것입니다.
충청도에 새 행정 수도가 들어선다고 하니 갑자기 땅값이 7배, 10배로 뛰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충청도의 젊은이들이 모두 효자 효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님께 빗발치듯 전화를 드리고 주말마다 부모님을 찾아뵙고 아들은 “아버지! 아버지!” 며느리는 “어머님, 아버님.”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고 합니다. 일 년에 한 번도 잘 찾아오지 않던 자식들이 땅값이 오르니 아버지의 재산을 많이 받으려고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아버지께 잘 해서 유산을 많이 받으려고 잘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사랑에 감사해서 부모님께 잘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교회에도 ‘내가 이렇게 하면 교회에서 나를 장로로 세워주겠지? 목사님이 나를 알아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충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안수집사로 세워주겠지. 권사로 세워주시겠지.’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충성이겠습니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그것이 아름다운 충성입니다.
■ 한 목사님께서 시골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셨는데 그 마을은 여관도 호텔도 없는 곳이어서 목사님께서 그 교회의 한 할머니 집사님 댁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인 그때 그 할머니 집사님께서 목사님께 드리려고 콜라를 가지고 오셨는데 콜라가 따뜻했습니다. “목사님, 감기 드실까 봐 콜라를 데워 왔습니다.” 세상에! 콜라는 시원한 맛에 먹는 것인데 그것을 불에 데워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그 콜라를 마시면서 감격하셨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 집사님께서 나를 위해 이렇게 콜라를 데워 주셨구나.’ 마음이 귀하니 끓인 콜라를 먹으면서도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과자를 주며 ‘할아버지, 이거 먹어.’라고 버릇없이 말해도 할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주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도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여인이 며칠만 더 늦게 그런 마음을 먹었어도 그런 충성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끌려가 돌아가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며칠만 늦었어도 그런 충성을 할 수 없었을 텐데 여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만일 며칠이 지난 후에 여인이 그 옥합을 사용하려 했다면 이미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여인은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 부어 드려서 여인이 이렇게 역사에 길이 남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불면 가만히 있을 수 없고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싶어도 부모님께서 떠나시면 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을 하고 싶어도 내가 없어지면 할 수 없고, 가진 것을 다 잃고 나면 할 수 없습니다.
■ 7년 전, 제가 보스턴 사랑의 교회 성회를 섬길 때, 지금까지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외모를 보면 분명 중후하고 부(富)티가 나는 회장님이나 사장님 같은 분이셨는데 새벽 일찍 교회에 나와 청소를 하시고 교회 불 켜는 일을 하셨습니다. 비가 올 때는 제가 차에서 내리면 뛰어와 우산도 받쳐주셨고, 교회를 사찰 집사님처럼 섬기셨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그분은 원래 서울에서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었고 제가 집회를 섬기러 갔던 적이 있는 K교회의 안수집사님이셨답니다. K교회에 다니실 때 그 집사님은 한 번 크게 헌금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는데 ‘내가 좀 더 크게 된 다음에 크게 한 번 해보자.’라고 생각하시면서 그것을 미루셨답니다. 그러다 IMF가 오고 그분이 받은 수표가 모두 부도가 나서 결국 그 회사도 부도를 맞게 되었답니다. 급하게 사채를 빌려서 부도를 막다가 회사가 다 무너지게 되니 사채업자들의 협박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집사님께서 손가방 하나만 챙겨 가지고 미국으로 도망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장이셨던 집사님이 미국에서 세탁소 심부름을 하며 살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하나님께 뭔가 드리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어서 자기에게 있는 시간을 바쳐 교회 청소를 한다고 하시면서 예전에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오늘이 구원의 날이고, 또 바로 오늘이 충성할 때입니다. ‘다음에 어떻게 되면 잘 해야지.’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나의 최선을 다해 순수한 마음으로 충성할 때 우리도 오늘의 마리아가 되고, 오늘 우리 주님의 심장에 새겨지는 귀한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면 낭비를 한다
조상호 목사
■ 지난 2005년 8월11일자 조선일보에 ”죽음을 아름답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제목이 신기해서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경기도 하남시에 사는 정사분씨는 그의 나이 40세인 1987년 정월 초 하루날, 성묘 가던 길에 그녀가 탄 자동차가 중앙선을 넘은 트럭과 정면충돌 하는 바람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로 겉은 멀쩡했지만 속은 만신창이가 되어 비장이 터져 피가 뱃속에 가득 차게 되어, 병원에서는 거의 포기하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온 몸이 골병이 났고, 우울증까지 생겼습니다. 길가는 도중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여러 번하면서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죽기 위해서 3년 동안 수도 없이 한강을 찾아갔다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두 살 많은 남편 김행수씨가 “우리 애들 장가보내고 같이 가재. 저 숙제 나한테만 맡기고 가면 어떡하노….”라고 설득하는 말에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정사분씨는 남편이 못 배운 공부 실컷 하라고 권유해서 주부학교인 한림여자중학교에 등록하였습니다. 그녀는 늦게 배운 공부가 재미있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친김에 대학까지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대학을 선택할까 고민하다가, ‘장례지도과’라는 과가 눈에 띄었습니다. 시신위생처리법부터 심리학까지 ‘죽음을 돌보는 법’을 가르치는 과목들이 마음에 끌렸습니다. 왜냐하면 가까스로 되살아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산 자와 이별하는 죽은 자를 돕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중요한 줄 알았는데, 이제는 잘 죽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그 분은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해서 5년째 시신에 메이크업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나 지금 다니고 있는 성당에서 부탁이 오면 주저하지 않고 찾아가서 봉사를 하는데, 주로 한국에서 외롭게 숨진 외국인 노동자의 얼굴을 곱게 메이크업 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5전 6기 끝에 미용사자격증까지 따서 시신의 머리도 예쁘게 꾸며 주고 있습니다. 정사분씨는 지금 너무 행복하고 더 바랄 게 없는데, 있다면 나중에 그가 이 땅을 떠난 후에 사람들로부터 그리운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합니다. 저는 ”죽음을 아름답게”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신문기사를 다 읽고나서 ”죽음을 아름답게”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정사분씨는 올해로 61세가 되어 손주나 보고, 맛있는 음식이나 먹으러 다니고, 좋은 곳에 여행이나 다니며 인생을 편히 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말렸지만, 정사분씨는 죽음을 아름답게 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정사분씨와 비슷한 한 여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아름답게 준비해 준 한 여인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이틀 남겨놓고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동네에 가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약 3.2Km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동네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 사항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십니까? 시몬의 집 안에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오라비 나사로의 집에 종종 머무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과 2절에서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집에 종종 머물며 식사대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던 오빠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려주셨기 때문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배경은 나사로의 집이 아닌 시몬의 집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나병환자 시몬’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나병에 걸렸다가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시자,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누가복음 7장 36절에서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몬은 바리새인으로서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엘리트였고 나름대로 돈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 예수님이 베다니에 방문하실 때에는 나사로가 예수님을 모셨지만, 이번만큼은 시몬이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받은바 은혜를 갚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여 예수님과 12명의 제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한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여자가 예수님 일행이 식사하는 자리에 갑자기 들어왔습니다. 본문을 보아서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지만, 누구복음 7장과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이 여인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에서는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하고, 요한복음 12장 3절에서는 ‘마리아’라고 각각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여자는 마리아라고 불리 우는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마리아라는 이름이 흔하게 나오는데, 본문의 이 여인이 어떤 마리아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벵겔(Bangel)이나 메이어(Meyer)는 이 여인은 과거 창녀였다가,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과거에는 죄를 짓고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과거가 있는 여인이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고 있는 시몬의 집에 불쑥 찾아왔습니다. 넷째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시몬의 집에 찾아온 이 여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초대도 받지 않은 이 여인이 불쑥 찾아와서 어떤 일을 벌였습니까? 이 부분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여기 ‘나드’라는 말은 향나무 뿌리에서 추출한 향기로운 점액성 액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향유를 추출하는 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자라지 않고 히말라야 산맥이나 인도 지방에서 자라기 때문에 수입해서 써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격도 매우 비쌌습니다. 보통 한 옥합에 300데나리온 정도 되었는데, 당시 일반 노동자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인 것을 감안한다면 매우 고가의 향유였습니다. 이곳 뉴질랜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하루 일당이 80불이라고 가정한다면 300일 동안 벌어야만 모을 수 있는 24,000불이나 되는 고가의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옥합은 값비싼 기름이나 향유를 넣어두는 병인데, 3절을 자세히 보면 이 여인은 그 향유담은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샤워중이십니까? 아니면 피부 마사지를 받고 계십니까? 3절 상반절에서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 예수님은 식사중이십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과거가 있는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값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본문 속으로 들어가서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고 가정한다면 여러분,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황당한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당시 유대 관습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와 달리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 초대도 받지 않은 여자가 불쑥 남의 집에 방문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도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는 죄를 지은 여자가 허락도 없이 잔치 집에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가 그냥 조용히 남의 잔치 집에 왔다가 사라졌다면 그래도 나을 텐데, 시끄러운 소음을 내면서 값비싼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버린 것은 해외토픽에 날 일입니다. 그 향유가 얼마나 비싸냐 비싸지 않느냐를 떠나서, 식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버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장면을 보고 흥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들은 이 여인을 비난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이렇게 이 여인을 책망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배운 지식인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갈릴리 출신 제자들은 가방 끈이 짧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학벌이 좋은 그는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회계 일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2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은 30을 받고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긴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돈 욕심이 많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적어도 300데나리온 이상 받을 수 있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았을 텐데, 왜 쓸데없이 낭비를 했느냐’고 이 여인을 책망을 했는데, 얼핏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팔아 그 판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정말 구제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돈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남이 하는 좋은 일을 비난하거나 방해하는 것은 악한 행동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을 비난하거나 방해하는 것은 사단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안 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남이 하는 일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방해함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앞잡이가 되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라도 헌신할 수 있도록 칭찬하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가 시간이 없어서, 내가 물질이 없어서, 내가 건강이 나빠서 헌신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라도 잘 할 수 있도록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가룟 유다는 자기는 그렇게 헌신하지 않으면서, 값비싼 향유로 헌신하는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를 칭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의 말에 동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기 '좋은 일‘을 원문에 보면 ’아름다운 일‘ 영어로 ’A beautiful thing'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낭비한 행동으로 보이는데,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행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낭비라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 화리현교회를 섬기시는 주용수목사님이 ‘낭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주장에 의하면 여자 분들을 보면 중간계층이 제일 많지만, 더러는 아주 잘 생긴 여자 분이 있고 아주 안 생긴 여자 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잘 생긴 여자 분이나 아주 안 생긴 여자 분이 화장을 하는 것을 경제적인 용어로 ‘낭비’라고 한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워낙 인물이 좋으신 분이 화장을 하면 오히려 얼굴이 구겨질 수 있고, 아주 안 생긴 분이 화장을 해도 개선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있는 그대로가 차라리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 목사님의 글을 읽고 나서 어제 오후 집사람에게 “화장을 하나마나 인 것 같은데”라고 그랬습니다. 집사람이 아주 잘 생겼든지 아주 안 생겼든지 둘 중의 하나인데,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사전에 보면 시간이나 재물을 헛되이 헤프게 쓰는 것을 ’낭비’라고 합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낭비였습니다. 그리고 책망 받을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 여인을 칭찬을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찌하여 이 향유를 낭비하는가’라고 그녀를 책망했지만, 주님께서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녀의 행동을 비난하고 야단을 쳤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시며 위로해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보는 것과 주님께서 보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도 가룟 유다는 책망한 반면, 주님께서는 정반대로 칭찬하셨습니다. 똑같은 행동을 보고도 가룟 유다와 주님은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가룟 유다처럼 비난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님처럼 칭찬하는 사람입니까? 가룟 유다처럼 야단을 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님처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입니까?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처럼 할 수만 있으면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같이 8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여기 ‘힘을 다하여‘라는 말씀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녀는 당시 관습에 따라 옥합을 열고 향유를 조금 부어 향유 몇 방울을 주님께 떨어뜨릴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옥합의 뚜껑을 열고 향유를 주님께 부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최고의 헌신으로 평가 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아예 처음부터 향유를 담은 병 주둥이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향유를 가지고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림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을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최소한의 헌신이나, 최고의 헌신이 아닌, 전부의 헌신을 한 것입니다. 주님도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자신의 전부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무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오셔서 용서해주셨습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채 왕따 당하며 외롭게 살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입은 그녀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아낌없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드릴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사랑하면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을 써보신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하기 위해 거액을 쓴 후에 아깝다는 생각이 드셨습니까? 만약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면, 진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에는 낭비의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 어느 유머집에서 ‘사랑할 때와 사랑이 식었을 때 커플들의 반응’이라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랑할 땐 그녀의 통통한 아랫 뱃살이 귀엽게 느껴져 장난삼아 주물러 주고 싶었는데, 사랑이 식었을 땐 정육점에 맡기고 싶어진다. 사랑할 땐 그녀가 먹는 것이 천사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사랑이 식었을 땐 ‘이제 고만 좀 처먹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돼지 취급을 한다. 사랑할 땐 돈이 없어도 신용카드를 긁었는데, 사랑이 식었을 땐 신용카드 분실신고 했다고 한다. 사랑할 땐 마켓에 가서 남편 좋아 하는 것만 사왔으면서도 더 많이 사오지 못한 것에 미안해하지만, 사랑이 식을 땐 자기 먹고 싶은 것만 잔뜩 사온 후 남편 몰래 숨어서 먹는다. 사랑할 땐 남편을 위해 사온 것이 없어서 “여보 미안해”라고 말하지만, 사랑이 식을 땐, “도대체 쥐꼬리만한 월급가지고 어떻게 살라고 그래”라고 버럭 화를 낸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아내와 남편을, 여러분들의 여자친구, 남자친구들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낭비하고 생각을 낭비합니다. 사랑하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어 만나려고 합니다. 사랑하면 국제전화비가 얼마 나오든지 상관하지 않고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소곤거립니다. 사랑하면 뭐든지 주고 싶어 합니다. 제가 호주에 있을 때, 어떤 형제가 슈퍼마켓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20년 전이기 때문에 시간당 8불 정도 받을 때인데, 학생들은 Tax File Number을 고용주에게 보여주지 않고 현금으로 6불 50 정도 받았습니다. 그 형제는 새벽 일찍 일어나 하루에 3시간씩 힘든 일을 하고 나서 영어학교에 갔습니다. 이렇게 5일 동안 열심히 일해야 100불도 채 되지 않는데, 어느 자매를 사랑하고부터 아낌없이 돈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도 어떤 자매를 여자 친구 만들기 위해서 1인당 20불이 넘는 뷰페 레스토랑에 가서 값비싼 식사를 사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면 Double Bay라고 불리 우는 동네에 가서 값비싼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그 다음에는 시드니에서 남쪽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울릉공이란 곳까지 드라이브를 시켜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 형제가 왜 이렇게 낭비를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낭비할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합니다. 사랑은 나를 주기를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값비싼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린 후 주님의 머리에 부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도 회복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값비싼 향유 담은 옥합을 아낌없이 드릴만큼 주님을 사랑했던 마리아와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300데나리온이나 될 만큼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주님의 죽으심을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다같이 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4복음서 어디에도 이러한 축복과 약속을 받은 예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약속대로 그녀의 이름과 행적이 복음과 함께 소개될 것입니다. 복음이 아프리카에 전해지면 아프리카에 그녀가 행한 일이 소개되고, 복음이 남태평양에 전파되면 남태평양에 그녀가 행한 일이 소개되고, 저 남미에 복음이 전파되면 남미에 그녀가 행한 일이 소개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 끝으로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빈 지갑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어나보니까 지갑에 돈이 채워져 있더랍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지갑 속에 돈이 들어왔을까?’ 궁금했습니다. 알고 보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 지갑에 돈을 넣어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아버지 지갑에 돈이 없는 것을 보고 나를 먹여 살리시느라고 이렇게 돈이 다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저금한 10만원을 빼내어 아빠의 지갑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빠가 기뻐했을까요?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기뻐했을까요? 10만원이라는 돈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10만원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마음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목사님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원금 10만원에다가 이자까지 몽땅 붙여서 아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드린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가치가 있는 향유 때문에 기뻐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사실 그 향유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가치가 있는 향유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가치가 나가는 향유 때문에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가 있는 향유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마리아의 마음 때문에 기뻐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네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느니라’고 칭찬하셨을 뿐 아니라, 그녀의 이름이 세상 구석구석에 알려지는 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기쁘시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헌신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처럼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조목사야, 김집사야, 박집사야, 이형제야, 전자매야, 네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느니라’는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향유담은 옥합을 깨드린 여인처럼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치는 계속되어야 한다
오정호 목사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남녀노소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잔치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 세상의 패배자들을 모아놓고 계속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 가운데 믿음의 잔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한주를 보내시면서 몇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무엇이 믿음의 잔치를 계속되게 하는 모습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제의 나의 생각과 태도의 결과물입니다. 주님께 대한 나의 생각이 주님께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주님께 대한 나의 궁극적인 태도가 교회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를 파들어 가면 그 성도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밝히 드러납니다. 주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주님을 어떤 태도로 대하십니까? 피로 값 주고 사신 믿음의 공동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1. 과거를 딛고 일어선 사람 시몬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사람은 과거를 확실하게 딛고 일어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시몬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3절) 시몬은 베다니 사람이요, 과거에 문둥병을 앓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병에서 회복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따르면 문둥병이 발병하면 사람들로부터 떠나야 하고, 격리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건강한 사람이 자기에게로 다가올 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그 마음이 얼마나 무너지겠으며, 얼마나 자신의 삶을 탄식하며 원망하며 살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늘 마음에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비록 과거에는 아팠고 절망 상태였지만은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함을 받고 새롭게 된 것입니다. 시몬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사람입니다. 상처를 뛰어 넘은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쁨이 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조건 없이 용납되었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은총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변하고 우리의 태도가 변하고 그 결과 우리의 삶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시몬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시몬은 2천 년 전에 살았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 가정에 살고 있고, 우리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시몬입니다. 과거 아픔이 있었지만, 나의 죄 때문에 형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주의 놀라운 사랑, 상상을 초월한 은혜를 체험한 주님의 제자며, 아들과 딸들입니다. 보통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아픔이나 쓰라린 추억들이 우리의 믿음의 진보를 막고 있다면 믿음으로 그것을 뛰어 넘으시길 바랍니다. 창조적인 파괴가 일어나야 합니다.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십시오.
2. 주님의 사랑에 이끌린 사람 마리아
또 한 사람 우리가 주목할 사람은 익명의 여성입니다. 다른 성경에는 마리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도 시몬처럼 극복해야 할 장애물들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내부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우선 여성됨의 장애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인격과 인권은 존중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내부의 장애물은 경제입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순전한 나드 한 컵입니다. 이것은 삼백 데나리온 이상, 노동자의 1년 품삯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성이 이 정도의 소유를 드리는 것 쉽지 않습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외부의 장애물도 있었습니다. 외부의 장애물은 주님 가까이 있는 제자들과 사람들의 평판이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려 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고 비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인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 모든 내부와 외부의 장애물을 뛰어 넘었습니다. 이 여인을 주님은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녀의 마음 태도와 자세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8절) 그 여성이 신학적인 지식이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주목하지 못할 때에 성령의 이끌림을 받은 이 여인은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영광스런 일에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9절) 예수님이 기념해 주시고 기억해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두 가지 영광이 우리 맘에 갈등을 줍니다. 세상의 영광을 따를 것인가 주님의 영광을 따를 것인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를 위하여 썩어질 것을 구하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뿌린 대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따라야 합니다. 마리아가 가졌던 또 하나의 축복은 시의적절한 섬김의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올 수 없습니다. 마지막 주간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허비되거나 낭비되면 소용이 없습니다. 타이밍이 맞아야 합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젊을 때 부를 노래가 있고 찬양이 있고 기도가 있습니다. 중년에 부를 노래와 찬양과 기도가 있습니다. 노년에 부를 노래와 찬양과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루고 미루어 놓으면 결정적인 순간 다 놓쳐 버리고 후회와 탄식만 남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추는 믿음의 사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분위기에 자신을 방치한 제자들
세 번째 우리가 만나는 인물들은 분위기에 자신을 방치한 제자들입니다. 요한은 가룟 유다가 이 비난을 선동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주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는 맘으로 드린 이 모든 희생과 헌신을 비난했습니다. 어리석었던 제자들은 동조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다 동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 소리에도 다 동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동조할 사람은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소리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향한 소리,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소리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소리에 동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동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소리인지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리라면 박수치며 환호하며 같이 협력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리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인정한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세 종류의 사람들 과거를 딛고 일어선 사람 시몬, 주님의 사랑에 이끌린 사람 마리아, 분위기에 자신을 방치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공동체에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를 다듬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공동체성이 무너지면 나 혼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다 무너집니다. 공동체에 헌신하십시오. 여러분의 작은 섬김과 결단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무명의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함께 피어야 봄이지요
꽃 한송이 피어난다고 봄은 아니지요
파랗게 대지 전체가 일어나야 봄이예요
함께 봄이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