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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00509 / 막 15:16-32 / 십자가에 못 박히심

작성자천성교회|작성시간20.05.08|조회수903 목록 댓글 0

십자가에 못 박히심

첨부파일 20200509.hwp


15:16-32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 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28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15:16-32 / [가시관을 쓰시다;27:27-31,19:2-3] 로마 군인들은 총독 관저의 뜰로 예수를 끌고 들어가서 온 부대를 집합시켰다. 17) 그리고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뒤에 18) 경례를 하면서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외쳤다. 19)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는가 하면 무릎을 꿇어 경배하였다. 20) 이렇게 실컷 희롱을 한 후에 자색 옷을 벗기고 다시 그의 옷을 입혀서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21) [십자가에 못박히시다;27:32-44,23:26-43,19:17-24] 마침 그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올라와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를 붙들어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다. 22) 그들은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는 곳으로 갔다. 골고다는 `해골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23)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드렸으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셨다. 24)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고나서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 옷을 나누어 가졌다. (. 22:18) 25)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때는 아침 9시였다. 26) 예수를 못박은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죄목을 붙인 패가 달려 있었다. 27-28) 강도 두 명도 그날 아침에 십자가에 달려 예수의 십자가 양쪽에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악한 자의 하나로 간주되었다'라고 한 성경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2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조롱하였다. `하하! 꼴 좋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더니! 30) 그런 이적을 보일 수 있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구해 보시지.' 31)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도 둘러서서 예수를 조롱하며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32) 이봐,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어드리지' 하고 빈정거렸다. 심지어 양쪽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까지도 예수께 욕을 퍼부었다.

 

본문은 마가복음의 절정이자 신구약 성경 전체의 절정입니다. 구약성경이 수천 년에 걸쳐 예언했던 그분이 드디어 세상에 오셔서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입니다.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16-20) 브라이도리온은 총독의 관저를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로마군인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막힌 곳에서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황제가 입던 자주색 옷을 입히고, 왕관 대신 가시관을 씌었습니다. 황제에게 하듯 경례의 몸짓과 함께 평안을 기원합니다. 모두 예수님을 비웃는 행동이었습니다. 머리를 치고, 침을 뱉습니다. 또한 꿇어 절하는 행동으로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와 사명을 모르는, 잔인하고 야비한 사람들에 의해 묵묵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21-25)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수들은 자기가 매달려야 할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지고 가야 했습니다. 무게는 약 45kg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난밤 체포된 이후 계속 혹사당하였기에 더는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진통제인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타인을 위해서는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셔서라도 도움을 주셨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사용하지 않으시고 모든 삶의 질고를 받아내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진통제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이는 자기 몫의 고난을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 기꺼이 담당하시려는 철저한 순종입니다. 마가는 수식이나 설명 없이 너무 단순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십자가에 못 박고라고 진술합니다. 사실 당시 독자들에게는 정교한 묘사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참혹함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26-32) 제삼시는 오늘날의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은 아침 6시에 열렸으며(19:14), 약 세 시간 동안 로마 군병에게 희롱당한 후, 곧바로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도, 심지어 함께 달린 강도들마저 십자가의 예수님을 비웃고 모욕했습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수난의 자리, 저주의 자리,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여 가신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경륜을 이루려 스스로 걸어가신 자리였습니다(53:12).

 

적용: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었지만, 고통과 수치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담담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말할 때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어렵고 힘든 길을 말할 때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동료들 중에서 누구도 나서지 않는 어려움과 수고를 내가 담당하겠다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선진국가일수록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모든 일들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봉사한다면 그것은 그 교회의 성숙도와 건강도가 아주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예수님의 고난

엄기호 목사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을 종려 주일[(悰櫚週日), Palm Sunday]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주께서 자신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메사야로 오셨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일이며, 또한 인류의 구속 사역을 위해 고난의 발걸음을 내딛은 예루살렘 입성은 일주일 후에 있을 부활의 승리를 예견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경축하기 위해 부활주일 전에 사순절을 지켰습니다. “사순절이란 서방교회에서 사용하는 교회력 중에 부활절 이전 46일간, 즉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사순절과 부활절이 특별히 교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교회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과 예배에 있어서 그 핵심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과 함께 성금요일을 포함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고난에 참여하고, 자신의 모습을 참회하며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에 종려주일이자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몸으로 받으신 고난

우리 주님이 하늘 영광 보좌를 내놓고 낮은 세상에 내려오신 것부터가 고생이셨습니다.

식민지의 나라에서(2:1), 말구유에서 나시고(2:7), 가난하고(2:24 : 12:8), 천대받는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 나셨으며(13:55), 집도 없이(9:58), 산에서 기도로 지내시고(8:1), 행로에 곤하셨으며(4:6 : 8:24),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6:31) 바쁘셨습니다.

죄인들은 회개시키시고(9:11), 병자들은 치유해주셨으며(5:6), 귀신들린 자들에게는 귀신을 쫓아내 주셔서 자유케 하시고(5:6), 슬픔을 당한 자들을 돌보시면서(7:11 : 11:35), 곳곳에서 전도하시느라(1:38) 고생이셨습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페니키아 사람들이 생각해 낸 심히 악한 죄인들, 특히 노예들을 못 박아 죽이던 형틀이었습니다. 본래 십자가에 사람을 다는 습관은 옛날 파사 나라, 즉 오늘의 이란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옛 이란 사람들은 사람이 죽는 것은 악마와 싸워 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거룩한 땅에 묻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시신을 나무에 매달거나 침묵의 망대라 불리는 망대에 올려놓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에 전해지면서 십자가형이 생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로마 정부는 극악한 죄인들만을 골라서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도망갔다가 잡혀온 종이라든가, 반역자라든가, 혹은 외국인으로서 살인, 강도를 범한 사람을 사형에 처할 때에 십자가를 사용했습니다.

로마 정부가 사람을 달아 죽이기로 작정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은 사형수를 마음대로 취급했습니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침을 뱉고, 망치로 치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무서운 벌은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때의 채찍에는 손잡이 하나에 여러 줄을 매어 놓고 줄 끝마다 쇠 조각이나 뼈 조각을 붙여 놓았기 때문에 매를 칠 때마다 살점이 뜯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이 이런 채찍에 몇 차례 후려 맞으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 이런 채찍에 맞았습니다(27:26). 가시관을 쓰셨으며(27:29) 목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패가 걸려 있었습니다. 이러 저리 골목을 돌고 돌아서 오랫동안 십자가를 지고 길을 따라 골고다(해골, 갈보리)라는 언덕까지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두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정신)으로 받으신 고난

육신의 형제들(7;5), 친척(3:4), 제자들(16:22) 그 누구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궤변을 늘어놓던 서기관들, 거드름을 피우던 왕족이나 귀족들, 잘난 척하는 산헤드린의 학자들, 위선적이고 비열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사악하고 포악한 로마 병정들, 이들 모두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쉴 새 없이 괴롭혔습니다.

유다가 배반했고 베드로가 부인했으며 도마가 의심하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하늘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우주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땅에서도 버림받았고, 온 세상이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를 끌고 간 군인들이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씌우면서 놀려대고, 희롱을 하고 채찍과 주먹으로 때리고 갖은 수모를 주어도 주님은 그 모든 모욕을 말없이 다 받으셨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양옆의 강도들까지 주님을 정죄하고 모욕했어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묵묵히 참고 계셨습니다(53:7).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고 모욕을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을 말없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얼굴을 하늘로 향해 들고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 자기를 죽이는 무리를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 기도드린 예수님, 자기를 죽이는 무리를 용서하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로마의 백부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

 

영으로 받으신 고난

예수님은 세상이 지음 받기 전에 영이신 하나님과 한 몸이셨습니다(1:1 : 2:6 : 17:5, 24). 그런데 크고 높으시며 귀한 왕이신(17:14) 예수님이 사람이 되시고 종이 되셨습니다(2:7~8).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의 백성(6:34), 썩을 양식만을 구하는 무리들을(6:27) 보시고 괴로워 하셨습니다.

그 백성을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21:23)라고 했듯이, 예수님은 그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를 받으셨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리심을 당하셨습니다(15:34).

따라서 몸으로 당하신 고난보다, 혼으로 당하신 고난보다, 영으로 당하신 고난이 가장 큰 고난이셨습니다.

이 고난의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이었으며(5:8), 목적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9:12 : 53:5~6 : 20:28 : 10:11~15).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고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당신만 생각하셨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견딜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참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하셨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받으셨고, 예수님은 우리로 평화를 누리게 하고자 징계를 받으셨으며, 예수님은 우리로 나음을 입게 하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고난이며, 구원의 고난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고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절대적인 사랑을 다시 한 번 삶 속에 되새기며, 예수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더욱 견고하고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억지로 헌신해도 복을 받습니다

마가복음 15:16-22 / 조상호 목사

옛날 조선 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서울을 떠나 개성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개성 근처에 쫙 퍼지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이 개성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 중,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나이 많은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 동안 내가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한 번도 임금님의 얼굴을 뵙지를 못 했다. 그런데 내가 죽기 전에 임금님의 얼굴을 멀리서라도 좀 뵙고 죽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그래서 아들은 임금님이 오시는 날, 어머니를 업고 오십리 길을 걸은 다음 길가에 나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해 드렸습니다. 임금님은 신하들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고 그 효자아들을 불렀습니다. "너는 효자로구나.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오십리나 업고 온 너에게 금 백냥과 쌀 한 섬을 상으로 주노라.“ 이 소식이 개성 근처에 쫙 퍼졌습니다. 그 중에 한 불효자도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효자처럼 임금님으로부터 상을 받기 위해 어머니가 원치도 않는데, 억지로 업고 나가 임금님이 행차에서 돌아오는 길가에서 임금님을 보게 했습니다. 임금님은 신하들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고 또 그 불효자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도 금 백냥을 주노라." 그 때 신하들이 임금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 저놈은 불효자랍니다. 한 아들이 그렇게 해서 임금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상을 받으려고 싫다는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왔다고 합니다. 저 아들에게 상을 줄 것이 아니라, 벌을 주어야 될 것 같습니다." 임금님은 신하들에게 "효도는 흉내만 내어도 좋은 거란다. 저 아들에게도 내가 큰 상을 주노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은 억지로 효도하는 척하다가 왕으로부터 큰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짜 효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효도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해야 하기 때문에 의무감에서 억지로 효도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상 모든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좋아해서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마지못해서 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할 때도 있지만, 할 수 없이 억지로 할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자원해서 충성한 사람들이고, 또 다른 부류는 억지로 충성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할 수 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이 등장합니다. 지난 주일이 부활주일이었는데,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자원해서 지신 십자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흉악한 살인강도들이나 흉악범과 같은 죄수들을 처형하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빌라도 법정에서 무시무시한 가죽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가죽 채찍은 끝부분에 뼈나 쇠붙이가 달려있었습니다. 맞으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갈 만큼 무서운 채찍을 우리 주님께서는 약 100~120대 정도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통치수단으로 흉악한 죄를 범한다든지 반역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끔찍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 사형수로 하여금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직접 등에 지고, 그 동안 살던 성안을 한 바퀴 돈 후 처형 장소까지 가게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60~70kg 정도의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빌라도의 법정에서부터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셨습니다. 그 길을 라틴어로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sa)’라고 하는데, '슬픔의 길‘ ’고통의 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작년 12월 단기선교 기간 동안 그 비아돌로로사를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다가 너무 힘이 드셔서 중간에 가시던 길을 멈추고 쉬신 곳을 다 표시를 해놓았는데, 15곳이나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체포되신 후, 밤새도록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니며 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너무 지치셨습니다. 거기다가 무시무시한 채찍에 맞으시고 희롱을 당하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가다가 쓰러지고 가다가 쓰러지기를 반복하셨습니다. 그 때마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을 맞고, 또 다시 일어나서 가다가 쓰러지면 채찍을 맞고, 또 다시 일어나서 가다가 쓰러지기를 반복하셨습니다. 5번째 쓰러지셨을 때, 로마 군인들은 주님께서 더 이상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무거운 짐을 대신 지울 수 있는 로마법에 따라, 구경꾼 중에서 한 사람을 지목하여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억지로 지게 된 십자가

 

그는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달리,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입니다. 다같이 본문 21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여기 구레네는 오늘날 북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를 말합니다. 시몬은 아프리카의 구레네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이라는 이름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쓰는 이름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추측컨대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아프리카 흑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혈통을 따질 때, 부계 중심의 혈통이 아닌 모계 중심의 혈통을 따릅니다. 아버지가 유대인이지만,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유대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이방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을 합니다. 이러한 유대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구레네 시몬은 유대인 어머니와 아프리카 흑인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서, 유대교를 신봉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대인들처럼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아프리카 구레네로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로마 군인들의 지시에 의해 주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억지로라는 단어입니다. 본문과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2732절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여기에도 역시 억지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은 자원해서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주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자원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강하게 반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병사들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는 자원해서 하는 일보다, 마지못해 해야 할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청소년, 청년들에게 억지로 일을 시키면, 어떻게 반응하는 줄 아십니까? 억지로 일을 시키면 오히려 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면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원해서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억지로 해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대한민국 성인남자들은 특별히 문제가 없는 한, 군대에 가야 합니다. 가기 싫다고 군대에 가지 않고 도망 다니다가 붙잡히면 느즈막에 군대에 가서 더 큰 고생을 합니다. 설령 붙잡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평생 동안 병역 기피자가 되어 취직이라든지 사회활동을 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들은 군대에 가기 싫어도 가야합니다. 여자들은 엄청난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기를 낳아야합니다. 물론 해산의 고통이 크다고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평생 동안 자기 자녀를 갖지 못합니다. 학생은 학교 가기 싫어도 반드시 가야 하고, 공부하기 싫어도 반드시 해야 하고, 기말고사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합니다. 성질 더러운 직장상사 때문에 직장생활이 힘들어도 직장을 그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직장 그만 두면 입에 풀칠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자원해서 해야 할 일보다 억지로 해야 할 일이 훨씬 많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믿음생활 하는 것보다,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믿음생활을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원하는 봉사를 자원해서 해야 할 때보다, 내가 원치 않는 봉사를 억지로 해야 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구약 시대의 요나 선지자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니느웨에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멸망당하지 않도록 회개하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자기 나라와 원수관계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에 빠뜨렸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서 회개하여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싫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바다에 던져져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보낸 후 그제 서야 마지못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기쁘게 해야 할 일보다 마지못해 해야 할 일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할 수만 있으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찾으시고, 그러한 사람을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억지로 헌신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헌신에 따라 우리에게 거두게 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고 억지로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은 대로 이 땅에서 거두게 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Rick Warren 목사의 말대로, “우리가 어디에 헌신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헌신하는 자에게 반드시 보상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대로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1.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음

구레네 시몬은 비록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졌지만, 나중에 그는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는 큰 축복을 누렸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어깨를 만져 보았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와 요한 앞에서 자신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베드로 사도님, 저의 이 어깨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었답니다. 이래봬도 이 어깨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멘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은 고개를 숙이며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또 사도행전 131절에 보면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리스트 안에 구레네 시몬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니게르라는 말은 흑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시몬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구레네 시몬은 유명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5명 중에 한 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그가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졌지만, 나중에는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증거자로, 말씀으로 훈련시키는 교사로, 교회의 여러 가지 영적인 일을 담당하는 지도자로 쓰임 받았다는 것입니다.

 

2. 가정과 가문에 축복이 임함

뿐만 아니라 억지로 진 십자가 때문에 그의 가문에 엄청난 축복이 임했습니다. 다시 한 번 21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보통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아버지가 유명하면 누구누구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반대로 아들이 유명하면 누구누구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21절에서 구레네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시몬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꽤 유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당시 모든 교회에 알려질 정도로 유명 인사였습니다. 로마서 1613절에 보면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언급한 인사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 교회에 루포라는 이름을 소개할 만큼 시몬의 아들 루포는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루포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부탁할 만큼 루포의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아내 역시 로마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존경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레네 시몬의 아들들 뿐 아니라 아내까지도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되었고, 구레네 시몬의 온 가족이 로마교회 안에서 존경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양향력입니다. 아버지 시몬 한 사람 때문에 가정에 복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을 수 있지만, 축복은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무엇을 심든지 그것이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거두고 싶은 열매가 있다면, 거두고 싶은 그 씨앗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얻고 싶은 그 씨앗을 뿌리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시작하기 전 광고시간에 말씀드렸다시피 지난 주 제직기도회에서 전교인이 건축헌금 작정을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론이 내려지기 전 제가 제직기도회에 참석한 제직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돈에 매우 약한 목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크라이스트처치 순복음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11년 동안, 돈 설교는 4번 정도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이 고백은 사실입니다. 10여 전 쯤 로마서 연속 강해설교를 하는 도중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돈 설교를 했고, 9년 전 쯤 말라기 연속 강해설교를 할 때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짧고 간단하게 약 2번 정도 더 돈에 대한 설교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돈 설교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돈 설교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참석했던 많은 제직들이 전 교인에게 건축헌금을 약정하게 합시다. 약정하되 자유롭게 소원이 나는 대로 하게 합시다. 목사님이 결단을 내리시지요.”라고 말씀하시고 또 어떤 제직은 이런 식으로 반문하셨습니다. “목사님, 분명히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우리 성도들이 풍성하게 거두려면 심도록 해야 할 것 아니에요?” 또 어떤 분은 이렇게 까지 말하셨습니다. “목사님, 작년 홈커밍데이 태신자 작정을 하라고 할 때는 강력하게 말씀하셨으면서, 건축헌금 작정은 왜 그렇게 못하십니까?” 정확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성전건축보다 영혼을 더 귀하게 생각합니다등의 말을 하면서 얼버무리며 넘어갔습니다만, 1주일 내내 계속해서 제직들이 저에게 사랑으로 해주신 말들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작년 홈커밍데이 태신자 작정을 하라고 할 때는 강력하게 말씀하셨으면서, 건축헌금 작정은 왜 그렇게 못하십니까?” “목사님, 분명히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우리 성도들이 풍성하게 거두려면 심도록 해야 할 것 아니에요아무리 생각해도 그 분들의 말이 성경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경제상황이 어려워도, 또 극심한 불경기 때문에 직장마다 사업장마다 어려움이 있어도, 오히려 먼저 심는 것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비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동안 제가 이것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돈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시험이 든다는 생각 때문에 돈 설교를 하지 않았는데, 돈 설교를 하는 것이 목사가 성도들을 위해서 해야 할 큰 의무 중의 하나라는 결론을 다시 한 번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뛰어난 목사님들은 성도들에게 복 받는 비결을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고 한경직 목사님께서 영락 교회를 건축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의 교인들의 수가 약 150명 정도 되었는데, 교회 건축을 앞두고 한경직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 건축을 하려면 하나님께 헌금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10일 동안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께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성전 기공 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듣고 150명의 교우들 가운데 53명이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건물이 바로 지금의 영락교회 예배당 건물입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한경직 목사님께서 30년 전에 10일 동안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다 헌금으로 바쳤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다 굶어 죽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국의 지도층의 자리에 올라가 있거나, 또는 한국의 300대 재벌 속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절대로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 헌신하는 손길 위에 한없는 은혜와 복으로 갚아주십니다. 여러분, 할 수만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부속성전 건축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부속성전 건축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에 억지로 동참한다 할지라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은 한량없는 복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칭기스칸과 관련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그가 황제가 될 것을 믿고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한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칭기스칸은 그들을 타르탄이라고 불렀습니다. 칭기스칸은 거대한 몽골제국의 황제가 되자마자, 타르탄들에게 다음과 같은 특권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첫째, 언제든지 누구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궁궐에 들어올 수 있다. 둘째 전쟁이 끝나고 나면 노획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먼저 골라 가질 수 있다. 셋째 세금이 면제 된다. 넷째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어도 9번 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 다섯째 나라 안에서는 가지고 싶은 땅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여섯째 이러한 권리는 앞으로 4대까지 이어줄 수 있다.

몽골제국의 칭기스칸에게 헌신을 해도 이러한 특권이 부여되는데, 하물며 모든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헌신을 한다면 얼마나 더 큰 축복이 주어지겠습니까? 여러분, 무슨 열매를 거두고 싶습니까? 억지로라도 거두고 싶은 그 씨앗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얻고 싶습니까? 힘이 들어도 얻고 싶은 그 씨앗을 뿌리시기 바랍니다. 물론 억지로 십자가를 지다보면 너무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지는 십자가조차 축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처음에는 갈등이 될 수도 있지만, 감당하고 나면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 따르는 줄로 믿습니다. 억지로 짊어지는 십자가는 찬란한 영광의 가문을 이루는 축복의 징검다리가 되고 기적의 사닥다리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억지로 져야 할 십자가가 많이 있습니다. 억지 봉사, 억지 십일조, 억지 건축헌금, 억지 전도, 억지 선교, 등이 억지로 지는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그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시기 바랍니다.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면 가장 좋고, 그렇지 않고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그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고 더 나아가 여러분들의 가문에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마가복음 15:16-23 / 손상률 목사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16:24). 이 말씀은 훈련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그 소임을 다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도를 익히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다 십자가 현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구레네 시몬이 그 현장을 따라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골고다 언덕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의 사건을 중심으로 성도와 십자가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의 의미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그 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본래의 십자가

본래의 십자가는 죄인을 징벌하는 사형 도구입니다. 크고 무거운 통나무를 십자 형태로 만들어 그 위에다 범죄한 사람을 묶거나 아니면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죽을 때까지 버려두는 잔인한 제도입니다. 그 당시 사람을 죽이는 사형의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은 가장 흉악한 죄수에게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고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성경에서 십자가를 논할 때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의 송사를 받아 몇 차례나 심문했지만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19:4). 그러나 유대인들의 집단행동으로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작정으로 보았습니다. 이사야 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범죄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양면성

본래의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사형도구로써 모든 사람이 혐오하는 저주의 대상입니다. 자다가도 소름이 끼치게 할 만큼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오히려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평화와 소망을 안겨주는 축복의 도구가 되어졌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죽음과 생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적인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인간이 저지른 죄와 죽음의 비참함과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기서 해방되는 사죄와 생명의 원리를 증거하게 됩니다(8:1-2).

 

2. 십자가를 질 수 있나

그리스도인들이 성지순례를 가게 되면 예루살렘에서 반드시 들르게 되는 코스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 길입니다. 일명 슬픔의 길”(Via Dolorosa)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브라이도리온이라는 곳에서부터 갈보리 언덕 못 박히신 곳까지 14코스가 있습니다. 그중에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진 곳은 5코스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는 장면을 통해서 성도에게 십자가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예측 못한 상황입니다.

본문 말씀 21절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로마 군병들이 계획적으로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우려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지치시고 쓰러질 때 군병중 하나가 그 옆에 있는 사람을 잡아서 억지로 지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 구레네 시몬은 전혀 예측 못한 상황에 부딪쳤고 어쩔 수없이 십자가를 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도 미리 알고 그 길을 찾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예수가 좋아서 그를 따르다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억지로 진 십자가

마태복음 27: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면 베드로처럼 어떻게든지 이를 모면하고 피하려고 애를 씁니다(26:69-72).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시며 억지로 밀어 넣는데도 못하겠다고 떼를 쓰곤 합니다. 모세도 그랬고(4:10),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1:6).

오늘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은 억지로라도 그 길을 좇아야만 됩니다. 베드로전서 2:21에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신비

일찍이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십자가에 두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18).

 

1. 기독교의 심벌(Symbol)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그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여러 가지 색깔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 근본은 죄인을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표시가 있는 곳에는 사랑과 희생과 평화의 정신이 있고 또한 구원과 소망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결국 십자가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죽음이 있으므로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령 받은 베드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2:36).

2. ‘임마누엘의 특징입니다.

성도의 복된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임마누엘의 특권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하면 만사가 형통케 된다고만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십자가도 같이 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이 영광 받으실 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을 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20:22).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멍에를 같이하는 사람이며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6:14).

3. 신령한 축복의 근거입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시몬이라고 소개 하였습니다. 본서의 기자 마가는 이 성경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면서 구레네 시몬의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들 형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바울이 로마에 보낸 서신중에도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한말이 있습니다(16:13).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바 있는 구레네 시몬은 자기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크게 봉사하면서 초대교회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신 말씀은(13:43) 마치 이들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 나를 향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나?”하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 재직하던 E. B 마랏 교수는 헌신예배 때 부를 찬송시를 지으면서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대답해야 될까를 고민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십자가를 질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519장 찬송의 가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마랏 교수의 이 찬송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고백이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 칼럼 - 청지기 정신과 이어지는 행복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먹거리 중에 향토색 짙은 브랜드가 있다. 거기에는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과 함께 정성이 담긴 손맛이 들어 있다. 예를 들자면 경주의 황남빵이나, 통영에 있는 충무 할매 김밥, 그리고 천안 의 명물로 불리는 호도과자가 그런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도 사람들의 입맛과 기호에 따라서 많이 발전해 왔고 또 대부분 값싸고 편리한 인스턴트식품이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는 고속도로 휴게소를 비롯해서 전국 어느 곳이나 없는 곳이 없고, 또 남녀노소 모든 계층이 다 선호하는 식품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호도과자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수익성 있는 상품으로 인기를 누리게 되자 여기저기서 유사품이 나오고 또 자동 기계화 시설을 갖추어 대량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70년이 넘도록 호두과자 하나에 전념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있다. 올해 92세인 심복순(沈福順)할머니. 천안 성심교회 권사님이신 이 할머니는 어린 시절 측량 기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가정에서 불편을 모르고 자랐으며 대전 정명 여학교를 졸업하고 열아홉 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남편 조귀금씨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일찍부터 대전에 있는 한 제과점에 점원으로 일을 한 것이 빵과의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되었다. 그는 13세 때 일본인 주인을 따라 일본에 가서 본격적으로 제빵 기술을 배워 왔다. 이후 이들 부부는 천안의 특산물인 호두와 흰팥을 원료로 하여 그 유명한 호도과자를 개발한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먹거리가 흔하지 않았던 때에 비싸지도 않고 오며 가며 쉽게 먹을 수 있는 호도과자가 오래도록 인기를 누리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을 길들여 놓았다.

이토록 70년이 넘게 한길을 걸어오면서도 변함없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성공하게 된 것은 심복순 권사님의 청지기 정신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부터 교회에 나가고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훈련된 심권사님은 평생 동안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오신 분이다. 그분의 신앙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28:1)고 하신 말씀을 확신하고 따르는 삶이었다. 권사님은 선선자(先善者) 후득복(後得福)”을 가훈으로 하고 언제나 선을 베푼 다음 반드시 축복이 따라온다는 믿음을 자손 대대에 실천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느 때는 천안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재산가였다고 하는데 그 재산을 자기와 가족들만을 위해서 쓰려 하지 않고 베푸는 삶을 실천한 것이다. 그분은 돈은 언제나 돌고 돌다가 잠시 내 손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곧 썩는 냄새가 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평생 10개 이상 교회를 세우게 하여달라는 기도를 했고 결국 그 약속을 지켜 지금까지 10개가 넘는 교회를 지어서 봉헌했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신학생들을 뒷바라지해서 목회자로 배출하는가 하면 장애인 단체와 선교 사업에도 아낌없이 지원해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지금 92세의 고령인데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3대째 가업으로 계승하는 자손들에게 돈을 벌고 쓰는 것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청지기 정신으로 실천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여기 심복순 권사님의 신앙과 삶처럼 어떤 경우에나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감사하며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되면 주어진 행복도 흔들리지 않고 대대로 계승되어 가는 것을 배우게 된다.

 

 

 

 

대속의 십자가

마가복음 15:16-39 / 박덕기 목사

우리 기독교회에서는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주님께서 겪으신 최후의 고난을 묵상하며, 고난 주간으로 지키게 됩니다. 이 고난 주간 동안의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주 일-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심.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어다 보시며 우셨습니다.

월요일-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성전을 청결케 하심.

화요일-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비유,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등을 가르침.

수요일-베다니 촌에서 조용히 쉬셨습니다.

목요일-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면서, 성찬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

금요일-재판을 받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토요일-무덤에 계시다가

주 일-새벽 미명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지상 생애 마지막 날, 저 성금요일에 겪으신 참담했던 주님의 고난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보면서, 고난 주일과 성례 주일로 지키며,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께서 계획된 불법 재판 끝에, 전격적으로 사형 판결을 받으신 후,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고, 인간들의 온갖 조롱을 감수하시면서,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아주 극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총독인 빌라도에게 형식적 절차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 때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식민지의 죄수에게 가해지는 로마 군인들의 학대는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주님의 이마에는 가시관이 씌워졌고, 채찍질과 침 뱉음과 온갖 모욕이 가해졌습니다.

16-19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고,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고 했습니다.

온 군대란, 200여명 되는 총독 저택의 수비대를 말합니다. 군졸 몇 사람 앞에서 행해진 모욕이 아니라, 수비대 전원이 목격한 가운데 행하여진 잔인무도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군병들의 장난질을 보면 1)예수께서 왕이시라고 하니까 조롱하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히고 2)역시 조롱하기 위해서 금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땅이 받은 저주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담이 행한 범죄의 결과로 땅에 내려진 저주를 가져가기 위해서 가시 면류관을 쓰셨던 것입니다. 3)그리고 거짓으로 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조롱을 하고, 갈대로 머리를 쳤습니다. 4)그 거룩하신 주님께 침을 뱉고 5)꿇어 절하면서 조롱을 하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가득한 우리 인간들이라도 자존심은 팔팔 살아서 조그만 비판의 소리도 듣기 싫어하는데, 만 왕의 왕 되신 주님께서 그 조롱과 그 희롱, 그 멸시, 그 수모와 모욕을 어떻게 다 견디어 내셨을까요? 군병들은 온갖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다시 예수님의 옷을 입혀서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끌고 나갔습니다. 십자가의 사형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십자가에 처형하기 전 채찍으로 맞는 무서운 태형이 있는데, 채찍을 만들 때 그 사이에 짐승의 뼈를 넣으므로 그 채찍에 맞으면 온 몸이 찢어지게 되어 있어서, 이 형벌 또한 십자가의 고통 못지않게 고통스럽습니다. 매를 맞은 죄인이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끌려 갈 때는, 될수록 많은 거리를 지나가야 하는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범죄자는 저렇게 비참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형장으로 행진할 때의 십자가는 죄인이 메고 가는데, 從木은 미리 사형장에 세워 두고, 橫木을 사형 받을 죄수가 메고 옮기게 됩니다. 심문과 재판으로 밤새껏 시달리고, 채찍에 맞은 주님은 형장으로 향하면서 넘어지고 쓰러지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수없는 채찍이 가해졌습니다. 간신히 일어서서 몇 발자국 옮기다가 또 쓰러지셨습니다. 극도로 쇠약해져서 무거운 십자가의 형틀을 운반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잔인한 로마 군인까지도 지나가는 구레네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을 대신 지게 하였다는 것을 보아서, 예수님이 그 때 얼마나 심한 탈진상태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22-23절에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란 일종의 마취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철저히 다 치르시기 위해서 마취제를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형장에 도착하면 사형수의 옷을 벗긴 다음 팔을 벌려 수평 대에 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난후 형장에 미리 세워둔 수직 대에 수평 대를 얹고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는 가장 천한 노예, 죄수나 도망가다 잡힌 노예들을 처형할 때 사용한 사형 기구입니다. 로마인은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으나, 로마인이라도 십자가를 쳐다볼 때에는 사지를 떨 만큼 십자가의 처형은 가혹한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철인 시세로는 십자가는 가장 잔혹하고 등골이 떨리는 사형이라고 했습니다. ‘히타라라는 의사는 십자가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십자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불균형한 위치와 신체의 긴장은 한없는 고통을 가져온다. 못이 박힌 두 손은 신경이 예민한 부분으로 움직일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고, 피의 순환을 막는다. 이 때 신체의 긴장은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이토록 무서운 고통을 당하시는데, 그 때 인간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29-31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짖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강도들마저 예수님을 조롱하고 능욕했습니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예수님을 능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오전 9시였는데, 12시가 되매 온 땅에 캄캄한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두 강도 사이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을, 아들이 아닌 죄인의 괴수로 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지 6시간 만인 오후 3시 무렵,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이는 1)너무도 참기 어려운 고통 때문에 부르짖는 절규이기도 하고 2)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려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 때 유대인의 반응은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나 보자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엘리야에게 구원을 청한 줄로 착각했던지, 아니면 일부러 조롱삼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울부짖음까지도 잔인하게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후, 운명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바로 그 순간 한 가지 매우 의미 깊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8절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은 히 10:19-20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영상)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고난 주일로 지키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께서 겪으신 그 무서운 십자가의 고통을 회고해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십자가에 자기 몸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더러운 인간과 친히 사귀시고, 마지막에는 가장 무서운 죽음까지도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사실 사랑은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 다미엔은 문둥병자들에게 복음을 아무리 전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려고 자신이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위해 오시고,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말구유의 나무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달리신 십자가는 같은 나무의 다른 조각이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2)인간의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할 길이 없어, 십자가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죄의 문제가 해결됨을 보여줍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설명하면 죄는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줍니다. 죄는 인간이 고민하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며, 죽음이 피조물의 세계에 와서는 안 되는 것인데, 이 죄 때문에 왔다고 밝혀줍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도 아니며, 자연적인 현상도 아니고, 오직 인간의 죄 값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죄를 제거하셨고, 우리가 영원히 맛보아야 할 사망과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구속의 십자가대속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을 들으면 의례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하면 십자가가 생각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십자가의 관계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난생 처음으로 기도 부탁을 받고, 무슨 말로 기도를 해야 좋을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참을 망설이다가 생각나는 것이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십자가!’ 라고 한 마디 했습니다. 기도라고 해야 오직 십자가!’ 라는 한 마디 말뿐이었는데, 그 십자가! 라는 말 한마디에 그만 온 교인들이 울었다고 합니다. 믿는 자, 곧 신자 하면 십자가의 도,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구속의 도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어떠한 믿음도 다 헛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없이 고마워, 보잘것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심정으로 주님께 충성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마가복음 15:20-27 / 최낙중 목사

 

저는 작년 여름에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 50여명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를 갔습니다.

성서고고학 협회에서 청소년 유대광야캠프를 실시하는데 저를 주강사로 초청했기 때문에 함께 가서, 비아 돌로로사, 즉 그 말은 슬픔의 길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 길에 가서 먼저 저는 청소년들을 앞에 놓고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설교한 후 학생들 여러명에게 번갈아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그때에 찬송을 함께 불렀는데,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왠일인가. 왠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주 십자가 못 박힐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이 찬송을 부르는데 학생들이 흐느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선 학생 뒤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 간증을 하는데 어느 한 대학생이 나와서 펑펑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20m밖에 걷지 못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십자가를 마땅히 져야 하지만 죄없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 지신 것을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한 것을 돌이켜보니 너무 잘못했구나, 죄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내 죄를 없애 주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였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누가 울면 함께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갈보리산 언덕에 올라가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50여명이 서로 껴안고 울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는 이미 십자가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하셨고, 온 밤을 지새워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 헤롯왕의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심문을 당하시고,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은 흔적에서 피가 나고, 그런 몸으로 180근이 넘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힘들어 쓰러지셨고, 그때마다 로마 병정이 내려치는 채찍에 맞아 다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중에서 18번이나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힘이 없어 십자가 지지 못하기에 저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온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으나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는 주님이 그 십자가를 다시 지셨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피흘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원래 십자가라는 것은 페니키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흉악무도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좌우편에 두 살인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던 것은 그들이 지은 죄때문에 형벌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기에 흉악무도한 살인강도나 반역자들에게만 지게 했던 십자가 형틀을 주님에게 지워서 죽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확증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었으니 이것을 유전죄, 원죄라고 말합니다. 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으니 사망이라는 말은 죽었다, 끝났다는 의미에 앞서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정해주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고기는 물 속에서만 살라, 그렇게 고기의 삶의 영역을 물로 한정시켜 주었는데 고기가 물이 싫다고 물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그것을 분리된 상태라고 말하고 결과를 사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영역을 하나님 말씀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인간에게 죽음이 온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사망이 왔습니다. 이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 즉 영적인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럽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모습을 시 107:10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죄로 타락한 인간은 사망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사는 것인지, 한 세상 살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여 흑암, 캄캄한 밤에 방향을 잃어버린 나그네처럼 그런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이렇게 사망길에서 허덕이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얼굴에 흉터가 너무 많아서 동네 아이들이 그 어머니를 문둥이라고 놀려댔고, 그 아이는 문둥이 아들이라고 비방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고, 학교에서도 놀림 당하다 보니 학교 가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 안가겠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왜 그러느냐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나보고 문둥이 아들이래 하고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네가 두 살 때 일이었다. 나는 밭에서 일하고 있었고, 넌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에 불이 났단다. 내가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너는 불 속에 갇혀있었단다. 그러나 난 네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담요로 너를 감싸고 뛰어나왔는데 너는 담요에 감싸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는 불에 휩싸이는 바람에 얼굴을 너무 많이 데여 오늘날 이렇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아이는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문둥이처럼 돼버린 것은 바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후 그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시 가게 되었고 동네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처럼 멋있는 어머니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5분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칼로 하늘을 향해 내지르면서 하나님이 만약 있다면 5분내로 이 칼을 가지고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5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외쳤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니요, 또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교회를 잘 다니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에 나가서 그 칼을 뺏어 들고 그 젊은이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렇다면 당신은 그 귀여운 아들이 이런 칼을 들고 와서 아버지, 이 칼로 나를 5분내로 죽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젊은이는,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요. 하나님은 어떤 죄인,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독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죄인을 심판하러 보내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콩쥐, 팥쥐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또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이야기의 내용과 교훈에는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나쁜 사람은 벌을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의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자라도 벌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 못하며 경건하지도 않다 할지라도 그를 벌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면 그것이 조건을 초월하는 사랑인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4:5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한 일을 하거나 경건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었으니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니 이것은 인간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때, 아들이 저희가 살고 있던 아파트 마당에서 친구하고 장난치다가 그만 아파트 현관문을 깨버렸습니다. 수위 아저씨가 화가 나서 달려오니까 얘가 겁에 질려 도망와서 내 뒤에 숨었습니다. 막 떨면서 큰일났다고, 유리를 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뒤쫓아온 수위 아저씨가 당신 아들이 유리 깼으니 빨리 유리 값 물어내라고 성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15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제 아들에게 네가 깼잖아? 네가 물어줘 했더니, 아빠 나 돈 없어 하고 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들은 15만원이 없었습니다. 단돈 15원도 없었습니다. 돈 없으면 경찰서에 가서 며칠 살다가 와. 그러자 아니야, 싫어. 나 무서워, 하며 막 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15만원을 수위 아저씨에게 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3시간 후에 가서 보니까 깨진 유리는 깨끗이 치워지고 아파트 현관에는 새유리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유리가 박살나 있을 때는 우리 아들이 수위 아저씨를 보면 구석으로 도망다녔습니다. 그런데 새유리가 끼워지자 어깨를 쭉 펴고 목에 힘을 주고, 수위 아저씨를 봐도 하나도 겁내지 않고 떳떳하게 그 길을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자기 공로는 1원도 없었습니다. 15만원 내가 다 물어주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자기 행위는 0.01%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어린양 예수의 피로 된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으니 이것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된 것이니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비밀,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화목을 위한 화목제물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이후부터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죄악의 담이 있었습니다. 불러도 대답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올 수도 인간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내렸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평생 자랑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욥기서 22:21절 말씀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으니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 우리 죄를 없애버리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마 16:24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십자가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따르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이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죽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수치와 고난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병고침 받고 복 받았고, 아들 딸 잘 되고 그런 간증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은혜주신 목적이 그런 것 자랑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은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십자가를 일컬어 사명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는 에스더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에 유태인으로서 한 관리였던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고, 유태인 여인으로서 아하수에로왕의 부인, 왕후 에스더가 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가 세계를 제패하여 모두 127도나 되는 큰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그때 국무총리의 이름이 하만입니다. 그런데 이 하만이 교만합니다. 또 그렇게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이 그를 신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이 길을 지나가면 누구든지 다 엎드려 절을 하는데 유태인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굽신거리지 않고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 때문에 화가 나서 신분을 조사해보니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되 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일까 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그 날이 1213일이었습니다. 그 날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려는 엄청난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성중에 나가서 방성대곡하다가 대궐 문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왕궁에 있는 에스더가 알게 되어 무슨 일인지 묻자 모르드개가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왕궁에 홀로 있으니 모든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너만 홀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오늘날 왕후가 되게 한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고 말이 없으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유대인을 구원할 것이요 너와 네 집은 망할 줄 알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관계는 사촌지간입니다. 모르드개는 나이가 많았고, 에스더는 일찍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모르드개가 친딸처럼 길렀던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왕후가 된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가 이 나라 경호법은 엄한여서 왕후나 왕의 아들 딸이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가면 죽이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얼마전에 내가 신문을 보니까 북한의 김정일에 대한 경호법이 얼마나 엄하든지 김정일 별장 2km안에 어떤 사람이 실수하여 들어왔는데 총살해서 죽였습니다. 아마 페르시아 왕 경호법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통지합니다.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십자가 지겠습니다. 3일동안 내 시녀와 더불어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서 이 사실을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모르드개여 당신과 수산궁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를 위해서 3일동안 금식해 주십시오.

금식을 마치고 에스더가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왕후복을 차려입고 왕궁 맞은편 뜰에 서있습니다. 보좌에 앉아있던 아하수에로왕이 에스더를 바라보니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인지라 금홀을 내어밉니다. 금홀이란 금으로 된 왕의 지휘봉입니다. 내어민다는 말은 너를 용서한다하는 의미와 함께 무슨 소청이 있기에 왔느냐, 말해 보라하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에스더가 금홀 끝을 만지면서 내가 왕을 위해서 잔치를 한번 벌일테니 하만과 함께 오시라고 초청을 합니다. 그 후 잔치자리에서 하만의 모든 음모를 폭로하자 왕이 노하여 국무총리 하만은 높은 장대에 달아 처형시키고, 유대인이 죽임을 당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1213일 날에는 하만과 합세해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대신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은 처형당하고 모르드개는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에스더는 왕의 사랑을 더 입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 은혜로 편안히 살 수 있었고,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부러워하여 유대인으로 적을 바꾸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중의 하나인 부림절에는 삼일동안 잔치를 벌이는데 그 절기는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 주님이 지라고 명한 십자가가 어떤 것입니까?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과 수치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 대우받거나 자기 이름을 내려는 사람은 많아도 이름 없이 빛 없이 힘들고 어려운 짐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 지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그에게 복을 주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면 희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썩지 않은 밀알은 언제나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십자가 지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때 금세에서 백을 얻고 내세에 영생 얻지 못할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10:29-30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역리적 진리입니다. 버린 만큼 얻게 하시고, 낮아진 만큼 높여주시며, 희생한만큼 얻게 하시는 비밀,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낮아지면 주님이 높이십니다. 희생하면 주님이 보상하십니다. 그런 십자가를 능히 지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는 이유가 자기는 희생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라도 자기가 출세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전쟁이 있는 것이고, 작게는 부부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결심만 갖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이시라도 이 대속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고, 22:40절 이하 말씀에 보면,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얼마나 깊은 기도,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를 했든지 그 때가 겨울인데도 얼굴에서 땀이 솟구쳐 나오는데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위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힘을 도왔다고 했습니다. 위로부터 힘이 와야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지혜가 임해야 주의 일 할 수 있습니다.

시계추처럼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힘있고 능력있고 권능있는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그 뿌리를 강변과 진토에 내릴 때 수분, 양분 다 뽑아 잎으로 공급하고 가지로 공급해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을 나무로 비유했습니다. 나무를 의인화하여 가르친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5:14절 말씀에 보면,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좋은 열매 맺는 나무는 더 많이 맺도록 깨끗케 하고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버린다. 그것은 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인간을 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내려야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고 어떤 것을 생산해 내는 것과 같이 인간의 뿌리는 어디이겠습니까? 인간의 뿌리는 머리이고, 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이 지었으니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이 모든 것을 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6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던 바로왕은 그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찾기 위해서 다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그때에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합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군대를 바라보면 오금이 저립니다. 앞에 있는 바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혔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강한 동풍을 불어오게 하사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가운데로 열려진 길을 따라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 백성 괴롭히는 애굽군대는 수장되어 심판을 받게 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 인간의 한계상황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사는 길은 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어지고 얻어지는 지혜와 경험으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베트남 전쟁시에 존슨대통령은 군사들을 향해서 미국이 개발한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10년동안 싸웠는데 결과는 패전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걸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당시 대통령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이틀동안 기도회하고 전쟁했는데 6일만에 승리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한 대통령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전쟁을 했던 대통령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학교에서 배운 공부나 학원에서 배운 기술, 그리고 많은 경험을 토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방법은 조금 달라야 합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역대상 10:7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성경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당한 사울은 갑옷이 벗겨지고 잘려진 그의 목은 블레셋 사람의 우상, 다곤 신앞에 전리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역대상 10:13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 앞에 범죄함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는 매사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백성 통치하라고 세운 것입니다. 사울도 처음엔 잘 했지만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복된 마음을 끝까지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합니다.

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칩니까?

왜 처음엔 겸손하다가 나중엔 교만해집니까?

그러나 다윗은 정반대입니다.

역대상 14장에 나오는 말씀,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에서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쳐들어옵니다. 르바임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이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들을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일 것이니 올라가라 하매 다윗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올라가 치니 승리하였습니다.

그 다음 몇 년 지난 뒤에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침범해왔습니다. 그때도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가로되 마주 올라가서 치리이까? 이번에는 마주쳐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가라.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나가서 싸우라. 하나님이 네 앞에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매 이번에는 뒤로 돌아가서 적을 치니 또 승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반복된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 이것 하리이까, 그만두리이까,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범사에 그를 인정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잠언서 3:5-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혜로운체 하지 마십시오.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학벌, 지위, 명예, 권세, 경험 가진 사람일수록 무릎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 도움없이 내 멋대로 살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돕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보다는 사울이 훨씬 훌륭했습니다. 키도 컸고, 싸움도 잘하고, 힘도 세고, 가문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릎 꿇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고, 선지자의 말을 우습게 알고 곁길로 가더니 망했습니다.

모든 것을 볼 때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약했던 다윗이지만 때마다 일마다 무릎꿇고 기도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똑똑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좀 부족해도 십자가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혜롭게 하지 않느냐, 모든 것을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느냐?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반드시 주님은 보상하시고 함께 하실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의의 병기로 쓰임받을 때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사울처럼 살지 말고, 다윗처럼 삽시다.

시련과 연단이 와도 좋은 날을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그 날이 오기까지 참으십시오. 십자가는 참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은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모든 실패도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옵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원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고 로마 군병이 시켜서 억지로 십자가 졌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다보면 자원해서 지는 십자가도 있지만 때로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도 있는데 억지로라도 주를 위한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은 복을 주십니다.

그의 가족이 다 예수 믿게 되었고, 그의 십대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고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 지며, 안 믿는 영혼을 위해서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 당대 아니면 우리 후손에까지라도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사순절기입니다. 근신할 때입니다. 정신차리고 기도하고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기에 주님 만나고 영성을 강화시켜 예수 닮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변화받아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

이필재 목사

저는 작년 여름에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 50여명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를 갔습니다.

성서고고학 협회에서 청소년 유대광야캠프를 실시하는데 저를 주강사로 초청했기 때문에 함께 가서, 비아 돌로로사, 즉 그 말은 슬픔의 길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 길에 가서 먼저 저는 청소년들을 앞에 놓고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설교한 후 학생들 여러명에게 번갈아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그때에 찬송을 함께 불렀는데,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왠일인가. 왠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주 십자가 못 박힐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이 찬송을 부르는데 학생들이 흐느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선 학생 뒤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 간증을 하는데 어느 한 대학생이 나와서 펑펑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20m밖에 걷지 못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십자가를 마땅히 져야 하지만 죄없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 지신 것을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한 것을 돌이켜보니 너무 잘못했구나, 죄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내 죄를 없애 주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였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누가 울면 함께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갈보리산 언덕에 올라가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50여명이 서로 껴안고 울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는 이미 십자가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하셨고, 온 밤을 지새워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 헤롯왕의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심문을 당하시고,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은 흔적에서 피가 나고, 그런 몸으로 180근이 넘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힘들어 쓰러지셨고, 그때마다 로마 병정이 내려치는 채찍에 맞아 다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중에서 18번이나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힘이 없어 십자가 지지 못하기에 저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온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으나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는 주님이 그 십자가를 다시 지셨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피흘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원래 십자가라는 것은 페니키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흉악무도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좌우편에 두 살인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던 것은 그들이 지은 죄때문에 형벌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기에 흉악무도한 살인강도나 반역자들에게만 지게 했던 십자가 형틀을 주님에게 지워서 죽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1.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확증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었으니 이것을 유전죄, 원죄라고 말합니다. 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으니 사망이라는 말은 죽었다, 끝났다는 의미에 앞서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정해주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고기는 물 속에서만 살라, 그렇게 고기의 삶의 영역을 물로 한정시켜 주었는데 고기가 물이 싫다고 물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그것을 분리된 상태라고 말하고 결과를 사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영역을 하나님 말씀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인간에게 죽음이 온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사망이 왔습니다. 이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 즉 영적인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럽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모습을 시 107:10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죄로 타락한 인간은 사망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사는 것인지, 한 세상 살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여 흑암, 캄캄한 밤에 방향을 잃어버린 나그네처럼 그런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이렇게 사망길에서 허덕이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얼굴에 흉터가 너무 많아서 동네 아이들이 그 어머니를 문둥이라고 놀려댔고, 그 아이는 문둥이 아들이라고 비방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고, 학교에서도 놀림 당하다 보니 학교 가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 안가겠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왜 그러느냐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나보고 문둥이 아들이래 하고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네가 두 살 때 일이었다. 나는 밭에서 일하고 있었고, 넌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에 불이 났단다. 내가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너는 불 속에 갇혀있었단다. 그러나 난 네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담요로 너를 감싸고 뛰어나왔는데 너는 담요에 감싸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는 불에 휩싸이는 바람에 얼굴을 너무 많이 데여 오늘날 이렇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아이는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문둥이처럼 돼버린 것은 바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후 그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시 가게 되었고 동네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처럼 멋있는 어머니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5분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칼로 하늘을 향해 내지르면서 하나님이 만약 있다면 5분내로 이 칼을 가지고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5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외쳤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니요, 또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교회를 잘 다니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에 나가서 그 칼을 뺏어 들고 그 젊은이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렇다면 당신은 그 귀여운 아들이 이런 칼을 들고 와서 아버지, 이 칼로 나를 5분 내로 죽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젊은이는,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요. 하나님은 어떤 죄인,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독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죄인을 심판하러 보내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콩쥐, 팥쥐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또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이야기의 내용과 교훈에는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나쁜 사람은 벌을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의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자라도 벌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 못하며 경건하지도 않다 할지라도 그를 벌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면 그것이 조건을 초월하는 사랑인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4:5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한 일을 하거나 경건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었으니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니 이것은 인간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때, 아들이 저희가 살고 있던 아파트 마당에서 친구하고 장난치다가 그만 아파트 현관문을 깨버렸습니다. 수위 아저씨가 화가 나서 달려오니까 얘가 겁에 질려 도망와서 내 뒤에 숨었습니다. 막 떨면서 큰일났다고, 유리를 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뒤쫓아온 수위 아저씨가 당신 아들이 유리 깼으니 빨리 유리 값 물어내라고 성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15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제 아들에게 네가 깼잖아? 네가 물어줘 했더니, 아빠 나 돈 없어 하고 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들은 15만원이 없었습니다. 단돈 15원도 없었습니다. 돈 없으면 경찰서에 가서 며칠 살다가 와. 그러자 아니야, 싫어. 나 무서워, 하며 막 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15만원을 수위 아저씨에게 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3시간 후에 가서 보니까 깨진 유리는 깨끗이 치워지고 아파트 현관에는 새유리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유리가 박살나 있을 때는 우리 아들이 수위 아저씨를 보면 구석으로 도망다녔습니다. 그런데 새유리가 끼워지자 어깨를 쭉 펴고 목에 힘을 주고, 수위 아저씨를 봐도 하나도 겁내지 않고 떳떳하게 그 길을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자기 공로는 1원도 없었습니다. 15만원 내가 다 물어주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자기 행위는 0.01%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어린양 예수의 피로 된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으니 이것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된 것이니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비밀,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화목을 위한 화목제물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이후부터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죄악의 담이 있었습니다. 불러도 대답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올 수도 인간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내렸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평생 자랑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욥기서 22:21절 말씀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으니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 우리 죄를 없애버리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마 16:24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십자가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따르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이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죽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수치와 고난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병고침 받고 복 받았고, 아들 딸 잘 되고 그런 간증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은혜주신 목적이 그런 것 자랑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은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십자가를 일컬어 사명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는 에스더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에 유태인으로서 한 관리였던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고, 유태인 여인으로서 아하수에로왕의 부인, 왕후 에스더가 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가 세계를 제패하여 모두 127도나 되는 큰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그때 국무총리의 이름이 하만입니다. 그런데 이 하만이 교만합니다. 또 그렇게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이 그를 신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이 길을 지나가면 누구든지 다 엎드려 절을 하는데 유태인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굽신거리지 않고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 때문에 화가 나서 신분을 조사해보니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되 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일까 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그 날이 1213일이었습니다. 그 날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려는 엄청난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성중에 나가서 방성대곡하다가 대궐 문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왕궁에 있는 에스더가 알게 되어 무슨 일인지 묻자 모르드개가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왕궁에 홀로 있으니 모든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너만 홀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오늘날 왕후가 되게 한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고 말이 없으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유대인을 구원할 것이요 너와 네 집은 망할 줄 알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관계는 사촌지간입니다. 모르드개는 나이가 많았고, 에스더는 일찍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모르드개가 친딸처럼 길렀던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왕후가 된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가 이 나라 경호법은 엄한여서 왕후나 왕의 아들 딸이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가면 죽이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얼마전에 내가 신문을 보니까 북한의 김정일에 대한 경호법이 얼마나 엄하든지 김정일 별장 2km안에 어떤 사람이 실수하여 들어왔는데 총살해서 죽였습니다. 아마 페르시아 왕 경호법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통지합니다.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십자가 지겠습니다. 3일동안 내 시녀와 더불어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서 이 사실을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모르드개여 당신과 수산궁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를 위해서 3일동안 금식해 주십시오.

금식을 마치고 에스더가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왕후복을 차려입고 왕궁 맞은편 뜰에 서있습니다. 보좌에 앉아있던 아하수에로왕이 에스더를 바라보니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인지라 금홀을 내어밉니다. 금홀이란 금으로 된 왕의 지휘봉입니다. 내어민다는 말은 너를 용서한다하는 의미와 함께 무슨 소청이 있기에 왔느냐, 말해 보라하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에스더가 금홀 끝을 만지면서 내가 왕을 위해서 잔치를 한번 벌일테니 하만과 함께 오시라고 초청을 합니다. 그 후 잔치자리에서 하만의 모든 음모를 폭로하자 왕이 노하여 국무총리 하만은 높은 장대에 달아 처형시키고, 유대인이 죽임을 당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1213일 날에는 하만과 합세해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대신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은 처형당하고 모르드개는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에스더는 왕의 사랑을 더 입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 은혜로 편안히 살 수 있었고,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부러워하여 유대인으로 적을 바꾸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중의 하나인 부림절에는 삼일동안 잔치를 벌이는데 그 절기는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 주님이 지라고 명한 십자가가 어떤 것입니까?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과 수치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 대우받거나 자기 이름을 내려는 사람은 많아도 이름 없이 빛 없이 힘들고 어려운 짐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 지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그에게 복을 주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면 희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썩지 않은 밀알은 언제나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십자가 지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때 금세에서 백을 얻고 내세에 영생 얻지 못할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10:29-30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역리적 진리입니다. 버린 만큼 얻게 하시고, 낮아진 만큼 높여주시며, 희생한만큼 얻게 하시는 비밀,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낮아지면 주님이 높이십니다. 희생하면 주님이 보상하십니다. 그런 십자가를 능히 지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는 이유가 자기는 희생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라도 자기가 출세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전쟁이 있는 것이고, 작게는 부부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결심만 갖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이시라도 이 대속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고, 22:40절 이하 말씀에 보면,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얼마나 깊은 기도,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를 했든지 그 때가 겨울인데도 얼굴에서 땀이 솟구쳐 나오는데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위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힘을 도왔다고 했습니다. 위로부터 힘이 와야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지혜가 임해야 주의 일 할 수 있습니다.

시계추처럼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힘있고 능력있고 권능있는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그 뿌리를 강변과 진토에 내릴 때 수분, 양분 다 뽑아 잎으로 공급하고 가지로 공급해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을 나무로 비유했습니다. 나무를 의인화하여 가르친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5:14절 말씀에 보면,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좋은 열매 맺는 나무는 더 많이 맺도록 깨끗케 하고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버린다. 그것은 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인간을 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내려야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고 어떤 것을 생산해 내는 것과 같이 인간의 뿌리는 어디이겠습니까? 인간의 뿌리는 머리이고, 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이 지었으니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이 모든 것을 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6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던 바로왕은 그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찾기 위해서 다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그때에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합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군대를 바라보면 오금이 저립니다. 앞에 있는 바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혔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강한 동풍을 불어오게 하사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가운데로 열려진 길을 따라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 백성 괴롭히는 애굽군대는 수장되어 심판을 받게 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 인간의 한계상황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사는 길은 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어지고 얻어지는 지혜와 경험으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베트남 전쟁시에 존슨대통령은 군사들을 향해서 미국이 개발한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10년동안 싸웠는데 결과는 패전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걸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당시 대통령은 빌리 그래험 목사님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이틀동안 기도회하고 전쟁했는데 6일만에 승리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한 대통령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전쟁을 했던 대통령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학교에서 배운 공부나 학원에서 배운 기술, 그리고 많은 경험을 토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방법은 조금 달라야 합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역대상 10:7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성경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당한 사울은 갑옷이 벗겨지고 잘려진 그의 목은 블레셋 사람의 우상, 다곤 신앞에 전리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역대상 10:13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 앞에 범죄함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는 매사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백성 통치하라고 세운 것입니다. 사울도 처음엔 잘 했지만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복된 마음을 끝까지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합니다.

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칩니까?

왜 처음엔 겸손하다가 나중엔 교만해집니까?

그러나 다윗은 정반대입니다.

역대상 14장에 나오는 말씀,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에서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쳐들어옵니다. 르바임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이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들을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일 것이니 올라가라 하매 다윗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올라가 치니 승리하였습니다.

그 다음 몇 년 지난 뒤에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침범해왔습니다. 그때도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가로되 마주 올라가서 치리이까? 이번에는 마주쳐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가라.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나가서 싸우라. 하나님이 네 앞에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매 이번에는 뒤로 돌아가서 적을 치니 또 승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반복된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 이것 하리이까, 그만두리이까,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범사에 그를 인정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잠언서 3:5-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혜로운체 하지 마십시오.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학벌, 지위, 명예, 권세, 경험 가진 사람일수록 무릎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 도움없이 내 멋대로 살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돕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보다는 사울이 훨씬 훌륭했습니다. 키도 컸고, 싸움도 잘하고, 힘도 세고, 가문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릎 꿇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고, 선지자의 말을 우습게 알고 곁길로 가더니 망했습니다.

모든 것을 볼 때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약했던 다윗이지만 때마다 일마다 무릎꿇고 기도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똑똑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좀 부족해도 십자가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혜롭게 하지 않느냐, 모든 것을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느냐?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반드시 주님은 보상하시고 함께 하실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의의 병기로 쓰임받을 때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사울처럼 살지 말고, 다윗처럼 삽시다.

시련과 연단이 와도 좋은 날을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그 날이 오기까지 참으십시오. 십자가는 참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은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모든 실패도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옵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원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고 로마 군병이 시켜서 억지로 십자가 졌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다보면 자원해서 지는 십자가도 있지만 때로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도 있는데 억지로라도 주를 위한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은 복을 주십니다.

그의 가족이 다 예수 믿게 되었고, 그의 십대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고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 지며, 안 믿는 영혼을 위해서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 당대 아니면 우리 후손에까지라도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사순절기입니다. 근신할 때입니다. 정신차리고 기도하고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기에 주님 만나고 영성을 강화시켜 예수 닮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변화받아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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