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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00510 / 막 15:33-41 / 예수님이 돌아가심

작성자천성교회|작성시간20.05.08|조회수642 목록 댓글 0

예수님이 돌아가심

15:33-41


첨부파일 20200510.hwp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 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15:33-41 / [숨을 거두시다;27:44-56,23:44-49,19:28-30] 12시쯤 어둠이 온 땅을 덮기 시작하더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다. 34) 그런데 3시쯤 되었을 때였다.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것은 )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 22:1) 35) 거기 섰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언자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36) 그래서 한 사람이 달려가 해면에다 신 포도주를 적셔 가지고 갈대 끝에 꽂아 올려 주고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예수께서는 곧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38)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39) 십자가 곁에 서서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지켜 보고 있던 백부장은 `이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라고 말하였다. 40)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젊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시중 들던 여자들이었다. 그곳에는 이들 외에도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온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마가는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33) 제 육시는 오늘날 시간으로 정오입니다. 중동의 가장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그 시간부터 오후 세시까지 갑자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요, 하늘의 언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운명이 임박한 예수님의 고통당하는 모습을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감추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것이지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생명이 쇠약해지는 것을 암시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34-3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구약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의 아람어 번역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22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터질 듯한 고통스러운 심정을 토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찢기고 상한 육신 때문에 터져 나온 울부짖음이 아닙니다. 온 세상의 죄가 자신에게 쏟아지면서 찾아오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주는 고통에서 나온 신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동일시하신 자신의 아들인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 형벌을 온전히 당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37-41)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셨습니다. 이 마지막 외침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과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23:46; 19:30). 예수님께서 운명하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길이 열렸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드디어 위대한 새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로마군대의 장교인 백부장마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은 다른 죄수와는 분명 달랐기 때문이고 연이어 일어났던 신비한 징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용: 영광의 메시야를 기대했던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도망쳤지만, 백부장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십자가를 집행한 장본인이 변화되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조롱이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백부장이 경험한 놀라운 이 십자가의 권능이 우리 가족과 친척, 형제, 이웃에게 임하도록 기도합시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성도들과의 만남도 많지만 실은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이 더 많은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목사의 삶이 어떤지, 성도의 생활이 어떤지, 교회가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 그들은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또 평가합니다. “그 목사는 틀렸어. 그 교회 드나드는 사람들은 영 아니야. 그 교회는 우리 동네에 있으나 마나야...” 이런 평가가 내려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나는 아직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나중에 나간다면 반드시 저 교회를 갈 거야. 그 교회는 우리 동네에 꼭 필요한 존재야.”라는 고백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성도 한 사람의 생활 모습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 설 교 >

십자가의 메시지

김태환 목사

여러분,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속에 숨을 거두시는 장면입니다. 그 날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덮였다고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어둠이 덮였는지는 모릅니다. 깜깜한 먹구름이 사방에서 몰려 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는 그 시간에 온 땅에 어둠이 덮였습니다. 3시간 동안 어둠이 온 땅에 덮였습니다. 3시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위에서 고통을 당하신 시간입니다. 찬송가의 왕이라고 칭송을 받은 I. Watts는 그으 찬송시에서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던 빛 가리워서 캄캄게 되었네라고 했습니다.

 

37절에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때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성전에 있던 휘장이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두 쪽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누구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이 그 순간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성경은 이 백부장의 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마태나 마가, 누가, 요한, 성경의 저자들이 백부장에 이렇게 말하는 장면은 목격했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백부장의 말을 전했고, 이 말을 전해 들은 마태, 마가, 누가가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40-4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들이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여자들을 중요하게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했던 첫 번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일 기독교의 핵심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 희생? 기쁨, 영생? 그 밖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용서?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용서라는 말이 특별한 말씀으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왜냐하면, 용서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외에 다른 어떤 종교도 죄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은혜를 가르치는 종교는 없습니다. 어떤 종교는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죄를 지은 장본인이 그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죄값이라는 것이 혹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대의 어떤 원시 종교에서는 자기 아들을 잡아 바치는 희생을 치러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혹독한 참회의 과정과 수행과 고행을 겪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삶의 많은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많은 시험과 아픔과 문제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험과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곧 그것이 우리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는 삶의 많은 시험과 환난 중에서도 내적인 기쁨과 세상이 알 수 없는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영원한 죽음의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치러졌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치러졌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8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요한복음 3:16).” 이 말씀에도 같은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For God so loved the world” 라는 말씀 속에 다만 우리라는 말대신 세상이라는 말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그 아들을 내 주실 정도로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 속에 저와 여러분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또 요한일서 4:10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n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

 

“This is love!”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This”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atoning sacrifice)”로 자기 아들을 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재미 있지 않습니까? 화목제물을 바쳐야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제물을 바쳐서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쳤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의 죄값을 치를만한 화목제물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죄는 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바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 때문에” “because his love for us”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설명할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찬송가 404장 가사를 아시지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The love of God is greater fo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런 말씀을 읽으면 예전 사람들이 썼던 편지투가 생각납니다. “할 말이 태산같이 많지만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할 말을 다 하려면 바닷물을 잉크로 써도 다 못쓰겠지만,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이런 투로 편지를 마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다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는 순간 그만 울어 버리는 것입니다. 말로도 못하고 글로도 다 쓸 수 없으니까 그만 울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독교 신문에 그런 광고가 잘 나지 안보입니다만, 2-3년 전만 해도 십자가 통곡 집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집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울 사람은 어디 어디로 오라는 광고입니다. 실제로 그 집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십자가 통곡 집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에 어떤 사람이 와야 하는지 설명이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써 있습니다.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나,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사양함, 십자가의 은혜를 몰라 울지 않는 사람이 오면 피차 보기에 민망함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피는, 구원을 얻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그 보혈의 공로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 피의 공로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전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그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여러분, 십자가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보세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 4:10-11)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이제 자기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야 십자가의 메시지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전파하는 데까지 가야 십자가의 메시지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버림으로 얻을 수 있는 것

김영주 목사

33절과 34절을 보시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을 잘 보면 사건 상 이어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33절에서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이어서 34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본문을 잘 보시겠습니다. 33절입니다.

제 육 시가 되어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육 시는 12시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으니까 당연히 하늘도 어두워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모두 어두워졌습니다.

이 어두움이 어느 정도 심했는지 아십니까? 외경에 보면, 대낮인데도 한밤처럼 어두워 사람들이 등을 가지고 다녔다고 기록해놓았습니다. 아예 캄캄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것입니다. 33절에는 "제 구 시까지 계속되더니" 했습니다. 오후 3시까지 계속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운명하시면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릴 때까지 계속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볼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 라는 부분을 쉽게 지나칩니다. 그래서 본문의 의미를 많이 놓치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크게 소리지르실 때는 사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외친 소리입니다. 이 세 시간 동안은 사람들에게 많은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맑던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10분이나 30분이 아니라 세 시간동안이나 그랬습니다.

--요즘처럼 전기 불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앞사람의 얼굴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특별히 십자가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간이 상당히 무서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34절입니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깊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운명하시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크게 소리지르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있고, 후에 죽음이 왔습니다. --이 사건을 생각하면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 사건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출애굽기라는 곳에 나오는 10가지 재앙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9, 10번째 재앙이 어둠과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왕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령하셨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그러나 바로 왕은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서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강팍한 바로의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내립니다. 나일 강물이 전부 피로 변하는 재앙부터, 개구리, ,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그리고 아홉 번째가 흑암 재앙입니다. 10번째는 장자, 큰아들이 죽는 재앙입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첫 번째 것은 전부 죽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안에 있는 것들만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 재앙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바로가 재앙이 하나하나 진행되면서 이 재앙이 자연적인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재앙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재앙이 진행되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섭니다. 그러다가도 끝나면 다시 마음이 강팍해져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번이나 두 번이면 끝날 것을 고집부리고 버티다가 910번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영리한 것 같지만 때로는 참 어리석습니다. 이게 도움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나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위기가 지나면 다시 마음이 바뀝니다.

그렇게 미루다가 결국 된통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믿기만 하면 다행입니다. 천국은 가잖아요? 그런데 고생만 하고 믿지도 못하면 그것처럼 불행한 것 없습니다. 바로는 하나님과 싸우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싸울 대상을 봐서 싸워야지 하나님을 이겨먹겠습니까? 처음에 굴복했으면 훨씬 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하나님인줄 알면서도 싸워봅니다. 자기 힘껏 버텨봅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는 빨리 순종하는 것이 상책이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이길 수 없잖아요? 여러분도 하나님이 뭔가를 요구하시는 것 같다? 빨리 순종하십시오. 누가 하나님을 꺽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홉 번째 재앙에 대해서 출10:22-23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10:22,23)

 

또 출11:5-6절에서는 10번째 재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이 부분에서 보면 어둠은 하나님의 최종심판에 대한 일종의 전주곡이었습니다. 흑암이 있은 다음에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흑암 때 회개하고 정신을 차렸으면 장자가 죽는 재앙은 당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장자가 죽는 재앙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 보면 과거 출애굽기의 순서와 너무 비슷합니다. 흑암이 있었고 그 다음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인생의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린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왜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까? 빛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사람들의 영혼이 밝아집니다. 영혼의 눈이 떠집니다. 따라서 어둠은 빛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심판이요,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사실은 죄인들이 죽어야하는데 대신 예수님을 죽게 하셔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35-36절을 보십시오.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님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추측했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의 발음을 잘못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람어로,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언뜻 들으면 엘로이가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부른다 했습니다. 아람어는 당시 사람들이 쓰던 언어였기 때문에 이 사람들도 능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잘못 듣고 엘리야를 부른다 한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어두운 상태에 있는 가를 보여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만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나 보자"

".......보자" 이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표현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이 심각한 순간에 구경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몇 몇 사람들은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엘리야가 오는 지 안 오는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주는 지 안 내려주는지. 그들은 실험하기 원했고, 호기심을 채우기 원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 예수님을 믿으려하지 않고 뭔가 짜릿한 일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보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구경거리로 바라본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영혼의 어두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심판이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바로 앞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계십니다.

몸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도 믿지 못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잖아요? 믿기만 하면 구원하실 수 있잖아요? 일생 중에 예수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잖아요? 작은 소리로 고백해도 예수님이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잖아요? 방금 예수님 옆에 못 박힌 강도가 구원 얻는 것 봤잖아요. 그렇게 형편없는 삶을 산 강도도 한 마디 진지하게 고백을 하니까 구원받잖아요? 일생에 이런 기회가 몇 번이나 오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이 사람들만큼 복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봤죠,

--강도가 구원 얻는 것도 봤잖아요.

 

그런데 이 멍청한 사람들이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해요. 그저 종교적인 호기심이나 채우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안에 있는 종교적인 호기심을 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보자"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이적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보자,

--이 교회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보자,

--이 교회는 어떤 설교가 선포되는지 보자

--이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오는지 보자

--하나님이 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자 ....등등.

 

표현만 다르지 사실은 자기들 안에 있는 종교적이 호기심을 채우려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남이 구원받는 것 보면서 나도 구원받고 싶다는 생각을 못할까요?

남이 용서받는 것 보면 나도 용서받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까요?

남의 인생이 변하는 것 보면서 나도 저렇게 변화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까요?

그런데 이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보러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에 이미 어두움이 임한 것입니다.

 

그 다음 34절을 보십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서 몇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를 때하고는 다릅니다. 평소에는 어떻게 불렀습니까? '아버지!'또는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기본적으로 부자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부르는 호칭입니다. 사적인 호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만큼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입니다. 공적인 호칭이 불려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죄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잠시동안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2.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잠시 예수님을버린 것입니다. 왜 버렸을까요? 혹시 동료나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이때처럼 비참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버림받으면 참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실 때, 하나님이 가장 필요할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진 인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런 죄를 진 예수님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지만 이 당시에는 죄인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죄인이 받는 형벌과 심판을 다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 하셨기 때문에 죄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경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모든 죄인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좋은 것들을 경험할 수도 맛볼 수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죄인에게 주어진 형벌입니다. 모든 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죄인의 모든 것을 겪어 보셨기에 예수님은 죄인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버리고 죄인과 같이 되셨을 때 비로소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겪어봤기에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인들이 당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할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당할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있는 것입니다. 왜요? 죄인들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기 위해서,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결과로 얻어진 것이 38절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니라"

성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성막을 이해하셔야합니다. 성막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 지성소와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로 구분되어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곳에 휘장이 쳐져있는데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바로 이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본래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만 1년에 한번씩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것도 아무 날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날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성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대제사장이라 해도 정해진 날이 아닌 다른 날에 맘대로 들어오면 역시 죽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도 이곳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발에 줄을 묶고 들어갑니다. 혹시 죽으면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니까 밖에서 끌어내려고 그런 것입니다.

이곳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시는 곳이기에 죄인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휘장이 걷혀져야 사람들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휘장에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보면 죽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이 휘장이 둘로 찢어져 버렸습니다. 그것도 아래에서부터 찢어진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찢어진 것입니다. 아래에서부터 찢어졌다면 사람이 몰래 가서 찢었다고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부터 찢어졌기에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찢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하나님이 이 휘장을 친히 찢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간의 막힌 담을 헐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함으로 죄 때문에 당하던 족쇄가 풀린 것입니다. 이 장면을 히9장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9:2-3, 7-8 /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10:19-20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죄인들에게 ''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휘장이 찢어졌기에 더 이상 장애물이 없어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은 저런 분이시구나, 하나님은 저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39절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39절을 보실까요?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이었도다 하더라"

로마의 백부장은 뭐 하는 사람입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군대의 중대장쯤 되는 사람입니다. 로마군대에서 백부장 정도 되려면 수없이 전쟁에 참가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수많은 전쟁에 참여해서 많은 죽음을 봤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면 초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수 없는 죽음을 본 그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39절을 보면, 이 백부장이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여기서 백부장은 단순한 죽음을 본 것이 아니라 특별한 죽음을 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았지만 예수님 같은 죽음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십자가처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던 백부장과 예수님을 창으로 찌른 군병이 회개하고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순교까지 했다고 합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진실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감동을 얻고, 구원 얻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안보여서 못 믿겠네, 몰라서 못 믿었네 하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안 믿은 것이 하나님 책임이 아닙니다. 이젠 개인 책임입니다.

여러분 한번만이라도 십자가를 진지하게 바라보십시오. 그곳에서 여러분을 위해 대신 고난 당하시면서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 IV: '고뇌의 절규'

김홍규 목사

* 필자는 이 시리즈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Erwin W. LutzerCries from the Cross(Chicago: Moody Press, 2002)으로부터 많은 영적 통찰력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Seven Words from the Cross IV: 'A Cry of Anguish'>

 

<: 하나님과 인간이 조우한 자리 십자가>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정면충돌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추악함이 맞닥뜨린 결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죄악이 다투는 장소였습니다.

가상칠언의 네 번째 말씀이 이를 유감 없이 보여줍니다. 오늘 봉독한 막 15: 34은 마 27: 46에도 별 차이 없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아람어로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말씀보다 인간 예수님의 고뇌를 더 깊이 나타내주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이 예수님이 하나님께 철저히 실망해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운명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절망이나 불신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만 한다는 성경의 약속이 이루어진 말씀입니다.

가상칠언의 네 번째 말씀은 시 22: 1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를 버리셨다고 부르짖는 시편 기자의 절규는 믿음 없는 사람이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정반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는 울부짖음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역시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는데 이제 모든 인간적인 소망이 끊어지는 데서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100% 인간이신 예수님의 고뇌가 절절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철저히 버려야지 만 당신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왜 나를 버리느냐고 부르짖으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본질이나 존재가 버림받았다는 절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본질적인 유대 관계는 그대로 있습니다. 이 울부짖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100%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한 과정으로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교제(FELLOWSHIP)가 일시적으로 끊어진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버리고 계신 것에 다름아닙니다!

벧전 3: 18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하셨던 것입니다.

 

<: 어두움 속에서 외친 절규>

지금까지 살펴본 가상칠언의 세 말씀은 모두 밝은 대낮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네 번째 말씀은 온 세상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나온 말씀입니다. 15: 33을 보십시오.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새 날이 아침 6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시간으로 한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전 7시가 됩니다. 그런데 막 15: 25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 시간으로 제 삼시, 즉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세 시간 동안 날이 밝아서 환했는데 제 육시, 즉 정오 12시부터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은 제 구시, 즉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 시간으로 오후 세 시에 완전히 숨을 거두시기까지 세 시간 동안 온 세상이 어두워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두움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나머지 네 마디 최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신 여섯 시간 동안 세 시간은 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세 시간은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대낮에 캄캄해졌을까요? 일식 현상 때문일까요? 이것은 자연적인 일식 현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어두움은 언제나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낮에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불의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악한 인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심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당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시고 우리가 이 죄에 대한 형벌로 마땅히 받아야 할 치욕과 고난과 죽음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사 53: 5-6의 말씀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한낮에 어두움이 온 천지를 뒤덮었던 그 세 시간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시간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으신 시간인 것입니다.

여러분, 10: 21을 보면 모세가 바로 왕에게 보여준 10 가지 기적 중에서 9 번째가 바로 삼일 동안 애굽 땅 전역에 흑암(黑暗)이 덮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어두움의 재앙이 있은 다음에 애굽의 장자를 모조리 친 10 번째 재앙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10 번째 재앙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예수님께서 한 마리의 어린양으로 피 흘려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구원받기 직전에 세 시간 동안 어두움이 천지를 뒤엎었다는 사실을! 어두움으로 애굽인들의 죄악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셨듯이 어두움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어두움 후에 유월절의 어린양 피의 구속 사건이 이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때문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 엘리야를 부른다고 착각한 사람들>

여러분,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절규를 살펴봅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라는 아람어 발음은 '엘리야'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막 15: 35절에 보면 십자가 곁에 섰던 사람들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착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를 불러서 구원을 요청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는 구약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서 죽음을 보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사람입니다(왕하 2: 11 참조). 그래서 말 4: 5-6을 보면 유대인들은 세상 끝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준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5: 36에 보면 한 사람이 신 포도주, 즉 포도주에 식초 탄 것을 해융, 즉 스펀지에 묻혀서 갈대에 꿰어 예수님이 마시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동정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36절 후반에 보면 이렇게 한 이유가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면서 조롱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엘리야를 불러서 당신을 구원해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엘리야보다 더 큰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신 하나님>

그 대신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면서 절규하신 것뿐입니다. 여러분, 4 복음서 중에서 오직 여기에서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시고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아버지'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자 관계임을 알려주는 아주 친밀한 호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아버지' 보다 훨씬 더 거리가 먼 호칭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쓰시고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게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교제가 단절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인간의 죄를 무섭게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온 인류의 죄를 두 어깨에 걸머지신 죄인 예수님의 차가운 법률적인 관계만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버리셨다'(FORSAKEN)는 말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십자가에 완전히 내동댕이쳐지셨습니다. 처절하게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듯이, 자식이 부모를 버리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아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인간 예수님께서 떠맡으신 죄인된 온 인류를 버리셨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은 'Representative Forsakenness,' '대리적 버림받으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은 예수님 개인만이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6에서 선지자 나훔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신다면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버림받으심으로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속도 위반으로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100불의 벌금을 물도록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가난했기 때문에 100불을 낼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이 때 측은히 여긴 판사가 자기가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했습니다. 갑자기 판사석에서 일어나더니만 법복(法服)을 벗고서는 피고석에 가 섰습니다. 그리고서는 자기 지갑에서 100불을 꺼내어서 그 남자 대신 내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판사 가운을 입고서는 판사석에 가서 앉아서 자기가 그 남자 대신 낸 벌금을 받았습니다. 판사가 피고인에게 말했습니다. "벌금 100불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제 당신은 죄가 없으니 자유롭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으신 사건이 꼭 이와 같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벌금을 물어야 되는데, 아니 이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저질러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데, 우리가 그럴 처지가 못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위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벌금을 물게 하셨습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심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버림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것을 막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야말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 사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빛 안에서 살다가 빛 안에서 죽자>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일생 동안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살던 사람이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숨이 가빠져오면서 세상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옆에 있는 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촛불을 꺼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안 돼요. 어두움 속에서 돌아가시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나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괜찮단다. 나는 어두움 속에서 죽고 싶단다." 그는 소원대로 어두움 속에서 평생을 살다가 어두움 속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인생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 대신 세 시간 동안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우리가 빛 가운데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요 11: 5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은 빛 안에서 살다가 빛 안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던 예수님께서 어두움의 절망 속에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 속에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십자가 하나로 어두움의 세계는 끝났습니다. 빛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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