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
막 16:9-13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막 16:9-13 /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 마 28:9-10, 요 20:11-18] 다시 살아나신 예수께서는 그날 이른 아침에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이 여자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일이 있었다. 10-11) 마리아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자기가 예수를 뵈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마리아가 전한 말을 믿지 않았다. 12)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눅24:13-35] 그후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나타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3) 마침내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급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으나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심(9-11) 무덤에서 나온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눅 8:2). 부활의 주님을 처음 만난 복된 사람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일곱 귀신’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이시니’ 라는 말은 오로지 하나님의 현시를 나타낼 때만 쓰이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가 슬퍼하며 울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기쁜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시골로 가던 두 사람의 증언(12-13) 누가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24:13-35). 누가에 의하면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서쪽 약 11㎞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 밖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다른 모양’으로 함께 하십니다. 다른 모양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천상적인 모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알아본 두 제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의 놀라운 소식을 보고합니다. 하지만 남은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 때처럼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4)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 없음과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듣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라고 제자들을 꾸짖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4:38). 완악한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도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이방인에 대하여서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엡 4:18). 예수님과 3년 넘게 동고동락 했으면서도 제자들의 마음은 굳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들의 영적인 무지와 불신앙을 꾸짖으시며 복음의 증인으로서, 그들에게 사명에 대하여 명령을 내리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적용: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지식적으로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고 있나요? 아니면 뜨거운 심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셨나요?
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머리와 눈을 다치고 눈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시력은 회복되었으나 기억력이 저하되었습니다. 기억력의 회복을 위해 치료를 받아 좋아졌으나 다시 시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담당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과거에 집착하는 기억력을 찾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력을 찾겠습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어제의 실패와 아픔을 기억해야 할 시간이 아니라 오늘 부활의 기쁨과 내일의 승리를 확인해야 할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뒤집기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최대의 뒤집기가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일 것입니다.
< 설 교 >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의 변화
마가복음 16:9-18
1. 부활은 영광스러운 예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형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부활절을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화려하고 성대하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입니다. 특별한 순서와 특별한 행사와 특별한 모든 시간들이 이 부활절을 그렇게 특별하게 만듭니다. 아마 대부분의 교회가 부활절을 그렇게 보낼 것입니다. 부활절을 우울하고 평범하며 초라하게 보내고자 하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힘이 닿는 대로 이 부활절을 어떻게 해서든지 기쁘고 감사하게 보내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절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함도 잠시였고 그분은 죽으신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셨고 모든 절망과 두려움을 이기셨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 되시며 죄없으시며 어떤 권세도 그를 누를 수 없음을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은 놀랍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속에서 부활은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부활의 순간에는 아무런 찬양도 아무런 영광스러움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 영광스러움이 새벽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나심에는 천사들의 찬양이 울려 퍼졌고 그것이 목자들을 통해서 증거되었지만 부활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변화된 것이라고는 오직 무덤의 돌이 옮겨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온 여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무덤의 돌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부활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나타나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은밀함입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만남입니다. 예루살렘이 떠들썩하지도 않았고, 대제사장들이나 군병들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사건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살아나신 주님이 친히 만나주시면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성격은 관계적이었고, 개별적이었으며, 또한 내면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부활을 통해서 정말로 하려고 하셨던 것이 사실은, 그 부활의 소식을 친히 온 세상에 선포하시면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부활하심을 부인하고 의심하며 낙심했던 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각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음을 고백하고 용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어쩌면 여전히 여러분들도 주님이 죽으시기 전에 무슨 말씀을 했었는지 기억을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구요. 마태복음20장입니다.
마 20:18-19 /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주님은 이외에도 마태복음 16-17장, 누가복음 9, 13, 18, 24장에서 반복적으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 27:62-63 /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63)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뉘인 무덤에 무거운 돌을 옮겨놓는 것뿐만 아니라 군병들을 시켜 그 무덤을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이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서 향품을 사다놓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막 16:1 /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그들은 애는 썼지만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더군다나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녀는 자신 앞에 있는 분이 동산지기인줄 알고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떼를 썼던 것입니다.
요 20:14-15 /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안타까운 것은 여자들만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더욱 한심합니다. 여자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그 부활의 아침에, 3일째 된 바로 그날 아침에 그들은 뭐하고 있었는 줄 아십니까? 10절을 보십시오.
10절 /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 중 아무도 혹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슬퍼하며 울고 애통해하며 절망해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주님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믿지 않았음을 회개하고 용서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전에 알던 ‘랍오니,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던 같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구세주였습니다. 그분은 성자 하나님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제자들은 믿지 않음을 회개해야 했고 주님은 그 믿지 않음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을 다 용서하시는 이유는 그 죄값을 자신이 다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3. 부활을 믿는 믿음은 용서의 고백을 하는 것이고 용서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신 뒤에 하신 일은 온전히 그 부활하심을 믿지 않은 자들을 용서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용서해주셔서 그들이 믿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바로 다시 살아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일에는 모종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제자들편에서의 불신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10-11 /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직접 본 마리아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는 자들은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말도 믿을 수가 없었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만났다는 마리아의 말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강하게 부인하며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셔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믿게 하셨습니다. 그 두 제자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의심과 절망은 너무나 컸습니다.
12-13 /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오늘날, 이러한 씨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되어진 모든 것을 믿습니다. 또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믿습니다. 앞으로 죽으면 천국가는 것도 믿으니까요. 그래서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단, 현재뿐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믿었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겠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다닙니다. 예수님 바로 앞에서 예수님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하나님은 이미 충만한 은혜로 함께 하시지만 그것은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원하는 것은 내가 향품을 바를 수 있는 예수님의 시신일 뿐인 것입니다. 내가 순종하고 섬겨야 하는 살아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또는, 여전히 제자들처럼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데 예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는데 예수님은 바로 이 순간에도 그분의 뜻을 놀랍게 이루고 계시는데 그들은 다 끝난 것처럼,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신다고, 하나님이 자신을 저주하셨다고 울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셨지만, 그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우리 옆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슬퍼하느라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이제, 주님의 씨름을 보십시오. 주님은 결국 제자들이 다 있는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하십니다.
14절 /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주님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그렇게 믿음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이미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꾸짖으십니다.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들의 거부와 불신을 꾸짖으십니다. 주님 앞에서 그들이 했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용서를 구했습니다. 믿지 않았음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제는 부활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4.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이름을 나타내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는 주님을 믿지 않았던 지난 날의 삶에 대해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믿지 않았던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용서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믿음없음을 용서해 주십니다. 오히려 더욱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는 그 용서 속에서 더욱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심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의 고백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어져서 용서의 삶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용서의 삶이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16절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오늘 우리가 세례를 베푸는 것도 이전에 주님을 믿지 않았음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믿음을 가지겠다는 고백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주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부인한 것으로 인해 정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세례를 받으면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고백이지 삶이 아닙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삶의 표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17-18 /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여기서 말씀하신 그 표적들의 초자연적인 현상에만 집중하지 마십시오. 진실한 표적은 믿는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일할 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함을 통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합니다. 그분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 3:21 /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오늘 부활절을 주님께 드리시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잊지 맙시다.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주시는 바로 그분을 여러분 자신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온전한 신앙과 삶의 변화를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변화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정말로 믿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갈 것입니다.
부활을 정말 믿습니까?
하루살이와 개미가 대화를 했습니다. 개미가 ‘저 하늘에 해가 지면 어두움이 임하고 어두움 후에는 날이 밝아 내일이란 하루가 시작한단다’ 하루살이는 ‘우리 조상들이 말하는데, 역사적으로 그런 일은 없다던데, 거짓말하지 말라’ 개미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설명했지만, 하루살이는 믿지 않았습니다. 하루살이가 개미의 말을 못 믿던지, 개미가 거짓말을 하던지, 둘 중에 누군가는 잘못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은 쉽게 하루살이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수많은 밤과 낮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하루살이 같이 자신의 경험상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많은 사람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만일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고전 15:1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장차 부활할 것을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악인의 부활로, 믿는 사람들은 의인의 부활로 모두가 부활할 것입니다(행 24:1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에 계시(啓示)되었습니다(9). 동시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모든 천하 만백성들에게 증거가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능력을 받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두려움에 쌓여있는 어두움의 사람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며 부활을 부인하고 있으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본 것은 믿으나 보지 못한 것은 못 믿겠다는 말을 합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믿지를 못했을까? 자기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이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죽을 것이다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그러나 그 제자들은 설마 예수님이 죽으실 리가 있나?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말인가? 이해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러니 듣기는 들었어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설마’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상식과 경험, 지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부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으려 할 때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께 SOS를 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즉시 오시지 않고 나사로가 죽은 후 나흘만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마리아와 마르다가 똑같은 소리를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이 말을 뒤집으면 ‘주께서 늦게 오셨기 때문에 우리 오라비 죽었다’라는 것이 됩니다.
주님이 살릴 수 있었는데 왜 늦게 왔냐는 것입니다. 서운한 마음이 담긴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능력을 공간적으로 제한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여기 계셨다면 살았고 저기 계셨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말씀하시자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합니다. 그 말은 지금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늦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 만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만큼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내 믿음이 크면 큰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복을 누립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느냐, 예수님의 능력으로 얼마나 믿느냐가 우리 신앙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수준으로 낮추어 믿으시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얄팍한 지식으로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결정적 요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한 것은 이유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요20:30-31절‘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필요치 않는 것은 다 빼고 요21장, 신구약 성경 66권만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간단한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도 생명의 주인입니다. 그러니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은 주님의 능력으로 보면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분이라면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각종 병자를 고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물위로 걷는 기적을 행하신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1885년의 부활주일 아침에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라 목사 부부와 북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부활의 복음을 들고 한국의 인천항구에 상륙한 날입니다. 그러니 벌써 선교 130년을 맞이한 부활절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복음 선교는 크게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러 1000만 성도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큰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부활은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 이루어진 복된 소식을 다시 한 번 들으며 저와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큰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성도들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부활주일을 하나의 기념 주일처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머리로는 동의하는데 실제로 삶 속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매너리즘에 빠진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기념주일입니까? 아니면 부활의 주님과 함께 부활의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승리의 자리입니까?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성현들은 죄의 결과로 죽어서 무덤을 남겼습니다. 석가모니도, 공자도, 모하메트도 무덤이 있습니다.
그곳이 오늘날 성지가 되어 많은 신도들이 참배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 무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생각 속에 머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류 가운데 일어난 실재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만약 부활하신 주님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의 종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저주받은 자리요 심판의 자리요 실패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덤에 장사지낸 예수를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권세를 철저하게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탄의 머리를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온 인류에게 새로운 소망과 기쁨과 승리의 감격을 안겨주신 인류 최고 최대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실재로 확신할 수 있을까요?그것은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로마의 군병들에게 잡혀 끌려 갈 때, 재판을 받으실 때 그는 3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을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스승을 배신하고 팔아먹고 자살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행1:22절‘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의 부활 증거’가 사도직의 초점인 것을 명백하게 규정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인도에 가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를 핍박하고 잡아 죽였던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배신했던 자들, 로마의 박해가 두려워서 숨었던 자들, 실의와 좌절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갔던 자들...그들이 갑자기 담대하게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부활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사자굴에 던져지고, 화형을 당해 죽을 지언정 부활의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하늘 소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활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부활은 새로워지는 것(Renewal)입니다.
우리들이 새로워지는 것은 자신의 고백이나 결단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의 회복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죽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목적을 깨닫고 내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과거와의 단절과 포기, 그리고 희생이 없이는 안됩니다. 내가 죽지 못하고 옛 자아가 삶을 지배하는 한 우리는 무늬만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다시 한번 결단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의 욕망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불의와 거짓과 탐욕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로 나의 이 더러운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이기게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죽음을 통한 새로운 회복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의 모습입니다.
2. 부활은 ‘부흥(Revival)’입니다.
부흥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회복을 하면 우리 삶 속에 예수 생명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머무는 곳에는 새로운 기적과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병든 자가 치유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풍랑이는 바다가 잔잔케 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머무시는 곳에는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어둠에서 빛을 발하는 능력입니다. 가난에서 부요와 풍성함을 주는 능력입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능력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불행에서 행복을 꽃피우는 능력입니다. 사탄의 지배에서 성령의 지배를 이루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는 부활 신앙의 회복과 부흥이 중요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부활의 사건은 20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오늘 나의 사건으로 나의 체험으로 나의 삶 가운데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의 소망이 없고,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하루살이가 메뚜기 하고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다가 저녁이 됐습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하루살이야,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다시 만나자’ 그러자 하루살이가 메뚜기에게 묻습니다. ‘내일이 뭔데’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기 때문에 ‘내일’을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지닌 자들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삽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지하에 동굴을 파고 그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예배하던 곳입니다. 한 번은 이곳에 로마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워낙 미로여서 입구에 있던 몇 사람만 잡혔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카타콤 입구에 이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깊은 밤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돌아간 뒤에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아버지 밑에 어린 자녀들이 섰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들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란다. 너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을 버리지 말아라. 주님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과 딸아! 잠시 뒤에 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초대교회 순교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영생의 보증을 받고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더 이상 죽음은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실패가 찾아오고, 질병이 에워싸고, 그 앞길에 험산준령이 가로막혀 있다고 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납니다.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시작합니다. 그래서 끝내는 이기고, 끝내는 이루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의 원동력이요 비결입니다. 부활신앙은 죄를 이깁니다. 죽음을 이깁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소망을 안겨줍니다. 절망 가운데 신음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 줍니다.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진 몰트만(Moltmann)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은 약속이며 성취일 뿐만 아니라 현실을 철저하게 변혁하는 원동력으로 사명을 완수케 하는 소망의 힘이다’그렇습니다. 부활이 단지 성경에 쓰여진 약속의 성취로만 받아들여진다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 삶 가운데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목자 없는 양처럼 죄에 빠져 방황하는 우리들을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능력입니다.
부활은 절망과 좌절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부활은 애벌레가 나방이 되듯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혁시키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소망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품고 사는 자들은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니다.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언젠가 오늘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 우리 주님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부활의 아침!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명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자들은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말했을 때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11절) 엠마오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고, 그들이 돌아가 남은 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역시 믿지 않습니다.(13절) 그리고 그 후에는 예수님이 친히 음식을 먹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아니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당시에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나서 마가는 부활의 사실을 목격하고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막16:15-18절‘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부활의 소망을 확신하고 사는 자는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귀신을 좇아내는 능력을 주십니다. 새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게 하십니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게 보호해 주십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미 우리 주님께서 이런 놀라운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지 않기에 이런 능력이 소멸된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부활의 실재를 믿는다면 지금부터라도 온 천하에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바로 부활의 증인됨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증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한번 부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절에만 기억되는 부활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 절망을 뚫고 다시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날마다 우리의 모든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죽었다가,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부활신앙의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여전히 찾아오십니다. 그 부활의 주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다시 만나는 시간되기를 축복합니다. 내 인생의 배에 주님이 승선하실 때 우리는 만선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부활의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우리가 주님을 만났다고 선언한 것처럼 우리 인생의 배에 다가오셔서 만선의 기쁨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망구스라는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이 동물은 저 무시무시한 코브라를 공격하는 천적입니다. 대부분 코브라를 두려워하는데 이 망구스는 코브라와 싸워 이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망구스의 몸에는 뱀의 독을 해독하는 효소가 있답니다. 그래서 코브라에게 물려 몸 안에 독이 들어와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고 있습니다.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세상의 어떤 악한 독도 해독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와 부패도 깨끗하게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죄악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아침!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어둠이 물러가고, 병든 자가 치유되고, 눌린 자가 자유케 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것을 역전시키시고, 모든 비극을 승리의 증거로 바꾸어 주시는 역사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모두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는 부활의 산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
막 16:9-11
1. 들어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초석 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짜를 믿다가 우리의 인생만 낭비하는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짓 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할 소망이 있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부활이 여러분에게 평안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 날에,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2.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
오늘 본문은 예수의 부활의 첫날, 예수님이 만나셨던 첫번째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예수 부활의 날에 예수께서 가장 먼저 만났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 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처음으로 만나셨을까요? 그리고 반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오늘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쫒아내어 주신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짧은 소개이지만 우리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지배하는 삶을 살았던 한 여인. 생각만 해도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쳐 날 뛰는 여인. 인격이 파괴된 한 사람. 귀신의 지배를 받는 끔직한 인생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는 외로운 인생입니다.
귀신 들렸기에 모든 사람에게 혐오를 받아야 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빛이 되어주었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삶을 지배하던 더러운 귀신들을 쫒아내 버리시고 그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못된 영들로 부터 해방된 자의 기쁨이 마리아에게 있었습니다. 그를 짓누르던 모든 것이 사라지던 그 날이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 예수께 새로운 생명을 얻은 날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존재였을까요! 그의 삶을 묵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고맙고 감사하신 분이신가요? 그러시길 바랍니다.
그날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에게 생명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부모가 되었고,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가시는 어느 곳이든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그가 다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그가 지켜보았습니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인생.
그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과 평안이 있었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이에 대한 기록이 누가복음 8장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의 12제자들과 함께 예수와 함께 했던 몇 명의 여자 제자들이 있다고 되었습니다. 그 제자 중 한명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12제자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모두 도망갔지만, 그 순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순간에도, 죽으신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시던 그 밤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부활 후 처음으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보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의지를 가지고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셨데요. 막달라 마리아의 삶이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징적으로 일곱 귀신은 죄를 의미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벽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는 완벽하게 죄의 노예로 살았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지배했던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예언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의 삶은 대표적으로 예수의 부활 사건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적격자였음을 알 수 있스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지배했던 일곱 귀신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그를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예수를 사랑했던 사람, 막달라 마리아
그렇다면 어떻게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실 때 다른 제자들은 죽을까봐 다 도망갔지만, 끝까지 예수님의 엪을 지켰던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모멸당하심을 모두 지켜보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모멸 당한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 요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이 일로 매우 슬퍼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 맞았다고 생각해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을 때, 무덤 안에서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를 보고도 막달라 마리아는 놀라지 않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만 보입니다. 마리아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를 찾으셨나요? 그는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그가 새벽을 기다리다 무덤으로 달려갔던 이유입니다. 예수를 보고 싶은 마음,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마리아에게 주님이 처음으로 모습을 들러 내신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빵입니다. 목 마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예수가 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 예수로 목마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찾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말씀이 목마른 사람에게, 예수의 빛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만나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주신 선물이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4. 주님이 불러주신 이름.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셨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눈을 띄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이 마리아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이 해 주신 그 한 마디는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수천마디 말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마디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 아침에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해 주시는 한 마디.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심.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아무개야! 예수께서 나의 이름을 아시고,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아침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이 영광이고, 축복입니다.
예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자, 마리아가 바로 히브리어로 ‘랍오니’라고 대답합니다. 선생님이라고 뜻인데, 주인님 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의 부름에 마리아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주실 때, 우리의 대답도 마리아의 것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부활의 아침. 예수께서 처음으로 만나주신 사람. 막달라 마리아.
그의 인생은 소망 없는 인생. 꿈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미래가 없는 인생이고, 쓸모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귀신에 사로 잡혀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자유가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만남으로 그가 자유를 누렸고, 꿈을 꾸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하나님의 나라를 품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로 생명을 얻고, 새로운 생명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그의 빛이 되었고, 예수가 그의 신랑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그의 보호자가 되었고, 예수가 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에수가 그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기도하기는 우리의 삶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과 후 마리아의 삶이 완벽하게 달라졌듯이,
여러분의 삶도 예수를 만나기 전과 후가 완벽하게 달라졌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망 권세 이기신 예수를 만난 마리아처럼, 여러분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바라기는 예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영광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만 보이시길 바랍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축복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이 땅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부활의 소망
김태영 목사
오늘은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 때, 부활의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부활 신앙으로 죽음을 정복하고 소망으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여인들은 슬퍼하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돌무덤 속에 갇혀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주일 새벽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찾아간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6절을 보면 시체를 찾는 여인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죄의 값으로 찾아온 죽음을 십자가에서 다 지불하심으로 우리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삯인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였으니 우리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에 종노릇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주님 만난 사람들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살아났습니다. 주님이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장례하는 행렬에 나타나서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니 청년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섞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시니 수족을 동인체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 걱정을 몰아내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슬픔과 눈물로 냉랭한 가슴에 불을 붙여 주십니다. 낙심과 좌절로 방황하는 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죽음을 극복하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납니다. 이 시간 예배드리면서 무덤을 찾지 마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소망 가운데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2. 부활 신앙으로 불신을 정복하고 믿음으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는 죽은 시체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습니다. 11절을 보면,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13절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증거 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었습니다.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교만하고 완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 여인들에게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라고 합니다. 즉 말씀대로 부활하였으니 말씀을 믿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슬퍼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 만날 소망을 가지고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마 26:32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며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더디 믿는 믿음에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파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넘어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연약한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은 믿음으로 늘 염려와 두려움, 의심과 회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말씀으로만 얼마든지 믿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의 사실을 확실히 믿음으로 불신과 불신으로 오는 걱정과 근심을 떨쳐 버리고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3. 부활 신앙으로 두려움을 정복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번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무덤에 찾아간 사람들도 여인들입니다. 그렇게 장담하던 제자들도 다 떠나 버렸습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슬퍼하고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일곱 귀신들렸다가 낳은 여인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여인의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증인으로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마리아의 말을 듣고 부활을 믿지도 않았고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 남자 두 사람이 고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남자의 증거는 완벽한데 그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면 예수님께서 권능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부활신앙은 불완전한 믿음을 온전케 합니다. 부활신앙은 사단의 권세를 물리칩니다. 부활신앙은 신비로운 역사를 체험하게 합니다. 부활신앙은 실패자에게 소망을 줍니다. 제자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인생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행 2:32에서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남긴 유언은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두려워하지 말고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안에서는 약자가 없습니다
막 16:9~20
지난 금요일 저녁 저는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너무도 죄송했습니다. 그 날 저녁 지역연합금요기도회가 있었는데, 지역에 55개나 되는 교회의 교우들이 연합으로 모인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겨우 이삼 백 명뿐이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한 교회의 새벽기도회 참석 숫자만 해도 수만 명이나 된다는데, 지역교회들이 모두 연합을 한 것이 겨우 이삼 백 명뿐이라니 너무 초라했습니다. 아니 그런 큰 교회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우리 교회 교인만 다 참석해도 그 몇 배는 될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왜 모이지 않는가? 우리는 왜 젖은 장작처럼 성령의 불이 붙지 않는가? 우리는 왜 하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무관심한가?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초라함을 방치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답답해하지 않는가? 왜 이런 우리 자신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정말 심각한 것은 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이런 생각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일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입니까? 우리는 언제까지 구경꾼으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열심히, 최선을 다해 모이는 이들과 우리는 DNA부터가 다른 것일까요?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잘 하도록 태어났고, 우리는 못하도록 태어난 것일까요? 본래 연합이란 잘 안 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연약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정확하고 공평한 공통점입니다. 그분들도 혈과 육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분들도 병이 듭니다. 그분들도 쓰러집니다. 그분들도 피곤을 느낍니다. 그분들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 똑같이 연약한데, 왜 우리는 잘 못하는 것일까요?
지난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우리 국민 모두를 흥분시켰습니다. 특히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은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습니다. 다른 종목의 금메달보다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가져다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피겨라는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피겨는 서구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종목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 왔습니다. 선수 이름도 몰랐고, 규정도 몰랐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연아 선수는 <우리는 못한다>는 무서운 선입견을 허물었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금메달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 아니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이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도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될 씨앗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본문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그 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도한 초대교회의 기둥들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을 통해서 기독교 복음이 로마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도마 등, 얼마나 위대한 이름들입니까? 우리는 그 분들을 기억하고 흠모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들과 그 분들이 이룬 일들을 생각할 때 버려야 할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처음부터 우리와 달리 특별하고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일반 무리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면 이해가 되지만,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본문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다고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 이건 복음을 위해 일해야 할 제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몸이 약하다, 돈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 약점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달려와 전해 주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또 13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던 두 사람이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14절을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도 우리와 비슷하였습니다. 그분들도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분들도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들은 모두 도망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이룩한 제자들도 우리와 같이 연약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처음부터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강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들에게만 사명이 주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 좋은 사람, 강한 사람만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증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방금 전 14절에서 제자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책망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어서 그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사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명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가까운 친구나 이웃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이 없어서 책망을 받은 그들에게 온 천하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믿음이 없어 책망 받은 그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큰 사명 아닙니까? 이것은 마치 덧셈도 못하는 아이에게 미적분 문제를 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힘도 없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이토록 중차대한 사명을 주신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은 믿음이 없고 약한 사람들도 위대한 삶을 살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족한 사람도 우뚝 일어서서 사명을 향해 달려가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존귀하고 빛나는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들에게도 사명을 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은 약한 우리도 사명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사명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으니까, 나는 믿음이 없으니까, 나는 약하니까 나는 사명을 받기에는 너무 부족해>
우리의 약함을 핑계 삼아 그 뒤에 숨지 맙시다. 믿음이 약해도 사명이 있습니다. 여건이 힘들어도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충분히 준비된 후에 사명을 받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준비된 다음에 하려고 생각하면 평생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배운 다음에 하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배운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란 후에 전도하는 게 아닙니다. 전도하면서 믿음이 자랍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분들도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준비된 사람, 오래 믿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로 부족한 우리들이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이 없었지만, 거둔 열매는 놀라웠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할렐루야! 제자들이 나가서 전파할 때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능력과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말씀을 확실하게 증거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 약한 사람, 준비가 부족한 사람에게도 표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고 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열매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이 20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셨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마태복음 28장 18절을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전능자입니다. 그 분은 우리처럼 약하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무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어리석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지쳐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연약한 사람들이 사명을 향해 나갈 때 결코 혼자 두지 않습니다. 함께 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도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능력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 제가 믿음도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저와 함께 하신다면 제가 일어서겠습니다. 사명을 위해 나아가겠습니다!> 이런 결단이 있길 기원합니다.
바로 여기 설교자의 용기가 있습니다. 저는 정말 부족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설교는 할수록 어렵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설교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말고 정확하게 전하는 데 있습니다. 또 알아듣기 쉬워야 합니다. 그리고 지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능력이 있어서 뜨거운 감동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를 위해 늘 기도합니다. 발음까지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가급적 완벽한 설교가 되도록 토씨까지도 정확하게 해 보려고 합니다. 원고가 완성되고 나면 영어 예배팀에 보내 드립니다. 김선매 집사님, 박선분 사모님, 이봉만 집사님이 토요일 밤 늦게까지 영어로 번역합니다. 그 번역된 것을 가지고 3부 예배 중에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로 동시통역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원고를 보내드리고 난 후 다시 읽어보면 이게 문제가 많습니다. 고쳐야 할 부분, 모자라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일 밤 동안에 수정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해도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통역하는 분들이 2부 예배에 오신다고 합니다. 2부 예배에 와 보면 제가 보낸 원고에 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원고에 있는 것을 빼기도 하는데, 그것을 표시했다가 3부에 통역하신다고 합니다.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란 것, 그게 설교입니다. 부족한 제가, 연약한 제가 부족한 설교를 들고 강단에 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 저는 약하고 믿음이 적고, 준비도 덜 되었지만,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셔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란 고백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 저와, 제 입과, 제 영혼과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과도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 모두 믿음이 없고 약했지만, 주님 안에서 강자가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약자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믿음 없는 사람도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도 부잣집 아이들보다 더 아름답게 자라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학벌이 부족한 사람도, 몸이 약한 사람도, 여건이 안 좋은 사람도,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다 위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 안에는 약자가 없습니다.
주님의 품안에, 그 능력 안에 있으면 보잘것없는 사람도 복을 받아 <담장을 넘는 가지>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의 노예였고, 후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지만. 하나님 안에 있으니 그는 담장을 넘는 가지처럼 번성하였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비록 믿음이 없고 약하지만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셔서 역사하셨다고 했는데, 주님이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주님이 무조건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이 말씀의 연결 고리를 잘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나갔습니다. 가서 열정적으로 증거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그들은 <주님,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방금 전에도 믿음이 없다고 꾸중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그들은 믿음이 부족하지만 순종했습니다. 나가서 전했습니다. 순종할 때. 행동할 때 주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나는 약해요, 믿음이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결코 그들을 통해 일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함께 하셔서 도우시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없다고, 여건이 어렵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순종하십시오. 결단하십시오. 우리 모두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만 58년 전, 1952년 3월 10일에 우리 선배들은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60주년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장로님들,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모든 성도들 열심히 모여 보세요. 모여서 사명자로 살겠다고 결단 하십시오. 다가오는 지역 연합집회에 모두 개근하여 은혜를 받으십시오. 각 부서의 회장님들이 출석이라도 부르십시오. 연락하십시오. 그리고 모여서 의논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음도 없고 약하지만 어떻게 한번 멋지게 할 수 있는지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약 오르지도 않습니까? 새벽에도 수만 명씩 모이는 이들도 있는데 같은 예수님을 믿고, 같은 성경책을 읽으면서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까? 왜 우리는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합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을 격려하길 원합니다. 또 우리 스스로를 격려하길 원합니다. 교우 여러분 각자가, 우리 교회가 기적을 이루게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비록 약하지만, 믿음이 부족하지만, 여건이 좋지 않지만, 우리 한 번 해 봅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주인공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