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교회 공동체
행 2:37-47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37-47 / [개종한 첫 사람들] 베드로의 이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38)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여러분 모두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받아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주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자녀들과 또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하신 약속입니다.' 40) 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긴 설교를 통해 예수에 대해서 알려 주고 악한 세대에서 구원받을 것을 모든 청중에게 강력히 호소하였다. 41) 이날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여 믿은 사람들은 다 침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3천 명이나 되었다.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기도회에 날마다 빠짐없이 참석하여 서로 교제하면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43) [신도들의 생활] 사람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났고 사도들은 많은 기적을 베풀었다. 44) 신도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으며 45)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로의 집에 번갈아 모여서 기쁨과 감사에 넘쳐 음식을 나누며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를 본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들이 그들에게 호감을 가졌으며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 늘어나게 하셨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는 무리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회개하며 주께 돌아온 사람이 삼천 명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활하는 모습을 소개하며 모범된 교회의 신앙생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37-41) 성령의 권능으로 선포되는 말씀은 심령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마음의 찔림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묻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빛을 받은 신자의 정당한 반응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질문에 두 가지의 도전과 두 가지의 약속을 제시하며 구원의 길로 초청합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지식적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애통해 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과 삶의 실제적 변화를 위한 결단입니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기초로 세례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자들에게 세례는 구원자이신 예수를 따라가기 위한, 눈에 보이는 회개의 증거이자 약속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결단을 한 이들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와 성령의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과 약속은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각각) 행하여야 하는 결단입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약속으로 차별이 없습니다.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42-47) 이제 막 시작된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는 네 가지의 특징적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 떡을 뗌, 기도하기의 모습입니다. 힘쓰니라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행위들은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은혜의 자리에 온 사람들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 아래 구별된 삶에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야 할 모습입니다. 또한 초대교회 안에는 단순히 신앙 공동체의 구별된 모습 이상의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러한 모습은 자신이 가진 소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인정하는 고백이고 감사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경건과 기쁨, 감사와 나눔이 온 백성에게 칭송 되었으며 하나님은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적용: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구별된 경건과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말씀이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지배하시고 통치하도록 내 자신, 내 지혜를 버리고 말씀 앞에 날마다 더 많이 자라나야 합니다.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이루시리라”하신 말씀을 의지하여 성령께서 그렇게 되게 해주실 것을 믿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 설 교 >
성령을 받으려면?
사도행전 2:37-42 / 이상호 목사 / 세광교회
성경의 시대는 성부, 성자, 성령시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부시대는 성부 하나님이 역사하신 구약시대이며, 성자시대는 복음서 시대, 성령시대는 사도행전부터 계속되는 은혜시대 교회시대입니다. 이러한 구분에 의하면 지금은 성령시대로서,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의 위로와 가르침을 받는 시대입니다. 성령에 의하여 부름 받은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는 시대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 날 성령강림의 경험 후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와 청중들의 반응과 그들에 대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구약의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메시야가 오신 다음에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너희들이 저주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한 예수,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예언한 시편을 인용하면서 말씀합니다. '예수는 보통 어떤 종교인처럼 도덕이나 종교적 지식을 가르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었기에 성령을 받은 것이다'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 설교를 들을 때에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성령이 임재하셔서 마음에 찔림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성령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받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1. 회개입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죄, 윤리적인 죄의 회개입니다. 또 하나는 원죄입니다. 이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죄성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선설이 아니라 성악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죄성이 씻김 받고 세례를 받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니아'입니다. 그 뜻은 '방향을 바꾸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저주받을 자로,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고, 예수를 거역하고 반역했던 그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는 주시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계시하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첫째의 회개입니다. 또한 자범죄, 즉 윤리적인 죄를 토설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빛되고 소금되지 못하게 살았던 모든 죄와 허물들을 다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대속하시고 도말해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은혜 받는 첫 출발점입니다.
2. 세례입니다.
세례는 누가 받습니까?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고백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하나님 앞에서 자녀로 인정됨의 표시이며, 모든 회중 앞에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례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을 때에 성령께서 기뻐하시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3. 순종입니다.
순종이란 나 중심의 의지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꺾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주님 말씀 앞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5장 32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구약적인 해석을 한다면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제물입니다. 번제물입니다. 번제는 죽어서 각이 떠져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것입니다. 의지가 꺾어지고 생명이 바쳐진 것이 번제물입니다. 그 위에 하나의 불이 임하여 태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기 9장에 나오는 번제입니다. 매주일 예배에 성령의 불의 임재를 경험하시는 집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의지를 꺾으셔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번제물이 되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4. 사모함입니다.
사모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고 은혜를 많이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복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사모했던 사람들은 그의 목회나 인생이 축복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의 은혜를 사모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5. 기도입니다.
본문 42절에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1-13절에서, "너희 중에 아비 된 자가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기도하시는 시간이 즐거운 시간이요 능력있는 시간이요 은혜받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6. 기도응답의 확신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자세는 이러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실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이는 기도에 대한 매우 중요한 고백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을 압니다. 언어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구한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을 또한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십시다. 성령님의 은혜만이 어려움에 빠진 민족과 개인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역사와 문화가 바꾸어집니다. 경제도 바꾸어집니다. 믿고 회개하며 사모하여 성령충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당시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신도가 된 사람이 무려 3천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41절)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42절)
■ 우리나라 초기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1907년 소위 평양대부흥이었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은 말씀과 회개 위에 임한 성령의 바람이었습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4개 장로교 선교회 연합사경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아침에 경건의 시간과 찬양, 그리고 3시간 동안의 성경공부가 진행되었습니다. 오후에는 노방 전도 시간이 있었고, 저녁시간은 남자만 1500명 이상 모이는 특별전도집회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집회의 말씀은 설교 제목만 보더라도 그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월 6일부터 한 주간 매일 저녁 길선주 목사님에 의해 진행된 연합부흥회의 설교 제목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 “지옥을 취하랴 천당을 취하랴,” “성령 앞에 숨을 자는 없다” 등이었습니다.
이 말씀들은 회중의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말씀들이었습니다. 회중들은 성령께서 말씀의 검으로 휘두르는 예리한 칼에 마음이 찔린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의 기록을 연구하면 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1907년 평양대부흥은 성령의 강한 역사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평양의 오순절은 말씀과 회개 위에 임한 성령의 폭풍이었습니다.
모인 청중들은 성령께서 말씀으로 그들의 영혼을 치심에 따라 계속해서 울부짖었고, 그것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었습니다. 블레어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몇 사람은 바닥 위에 몸을 던져 쭉 뻗어 있었고, 수백명이 하늘로 뻗고 서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서로 용서했습니다. 그들은 각자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기 내면에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죄악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맥큔 선교사의 보고에, “기도의 물결이 운집한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자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합류하여, 그들의 간구가 죄로 인한 탄식과 뒤섞였습니다. 그런 후 잠시의 막간에 이 사람 저 사람이 일어나 자비를 호소하며 영혼의 무거운 짐을 토로했습니다.”
15일 저녁 집회에서 선교사들은 성령 강림의 역사에 너무 놀라서, 참석한 청중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상의할 정도였습니다. 성령의 강림을 기도했던 대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한국교회를 축복하신 것에 감사하면서, 그 강한 성령의 역사에 당황했던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이들은 옛 생활에서 돌아서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했고, 그들 중에 여러 사람들이 수년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은혜 가운데 거했습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여 전국 각지로 요원의 불길같이 번져 나갔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907년 9월에는 마침내 한국교회가 독립적으로 총회조직을 갖게 되어 명실공히 독립된 교회 정치체계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평양대부흥은 이후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제주도와 중국선교를 통해 국외로 번져나갔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그후 1909-1910년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확산되었고, 그리하여 일제에 짓밟힌 나라를 먼저 영적으로 살리고, 후에 육적으로 살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시대에 다시 한번 평양의 오순절을 경험해야겠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이 우리 시대에 다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의 부으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예리한 검으로 사용하여 설교하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외쳐지는 말씀을 통해 예리하게 지적된 죄악을 회개하고 청산하면서 하나님께로 철저히 돌아와야 합니다.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실패를 양심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의 실패가 그리스도와 세상에 대한 범죄(offense)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의 말(talk)과 교회의 삶(walk) 사이에 공신력의 갭이 있음을 보고 통곡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에 대해 쉽게 변명하고 우리의 실패를 쉽게 묵인해버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자식을 주님보다 더 우선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명예와 지위를 위해서는 하나님 싫어하시는 일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행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교만, 탐욕, 사기, 성적 타락, 횡령, 미움, 나태, 분열, 가정 파괴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공적으로 지은 죄는 공적으로 회개하고 청산해야 합니다. 손해 끼친 것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갚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날마다 생명적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바로 섬겨야 합니다.
부흥의 폭풍이 불어오게 하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죄를 지적하고 깨우치는 말씀, 그리고 그 말씀에 아멘하며 철저하게 회개하고 청산하는 실천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 개인과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 위에 성령의 폭풍, 생명의 폭풍, 기적의 폭풍, 부흥의 폭풍이 불어오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건강한 교회와 행복한 성도
김명혁 목사 / 행2:37-47
오늘 “건강한 교회와 행복한 성도”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건강한 교회”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를 너무너무 좋아했고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주일에 교회에 가지 못하게 했고 학교에 오라고 했지만 저는 10살 11살 때 평양에 있는 제 오 인민학교에 다녔는데 2년 동안 주일 날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평양 서문밖교회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고 때로는 정학을 당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자유롭게 예배 드리기 위해서 고향과 부모를 떠나 떠나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저는 11살 때인 1948년 8월 캄캄한 밤에 38선을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같이 오던 어른들은 38선을 넘다가 모두 인민군에게 붙잡혔고 저만 혼자서 남쪽을 향해 40여분 동안 달려서 월남했습니다. 저는 남한에 와서 고향과 부모를 떠난 고아와 나그네로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외롭게 한 평생을 살았지만 남한에 와서 주일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모두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들은 아닙니다. 학원과 같은 교회들도 있고 회사와 같은 교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소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을 내려다 보셨을 때 일곱 교회들 중에서 주님의 칭찬을 받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는 두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다섯 교회들은 모두 주님의 책망을 받은 문제가 많은 교회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던 라오디게아 교회와 비슷하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되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와 빌립보 교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평양의 장대현 교회와 산정현 교회와 여수의 애양원 교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되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기도”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기도” 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 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마21:1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부탁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일백이십 여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서 열흘 동안 전력을 다해서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예루살렘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행1:13-15).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로 시작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기도”에 전력을 다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교회가 성장한 후에도 사도들이 새로운 행사나 멋진 프로그램에 치중하지 않고 무식할 정도로 기도에 전무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4). 얼마나 소박하고 무식하고 순진하고 행복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안디옥 교회도 “기도”가 충만한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고 빌립보 교회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성장한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기도”가 부족한 교회는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로 시작했고 “새벽기도”로 성장해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김익두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등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특히 “새벽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새벽기도” 보다는 행사와 프로그램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옥한흠 목사님이 교회가 무슨 학원처럼 프로그램에 치중하냐고 책망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등한시하는 교회는 교회의 기본을 상실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기도”를 힘쓰는 교회이고 특히 “새벽기도”를 힘쓰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한꿈 교회가 “기도”하는데 전력하는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회개”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리”(마4:17)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에 부탁하신 메시지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7,48).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다섯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계2:5,16,22,3:3,20).
예루살렘교회는 “회개”하므로 시작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회개하라” 라고 외쳤을 때 3천 여명이 회개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2:38). 베드로는 계속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3:19). 예루살렘교회는 “회개”로 시작해서 “회개”로 이어갔습니다. “회개”가 부족한 교회는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회개”로 시작했고 “회개”로 성장해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김익두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등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은 모두 “회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회개” 보다는 행사와 프로그램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고 무릎 꿇고 울면서 기도했는데 지금은 각종 음악과 프로그램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들어요.” 한꿈 교회가 “회개”에 전력하는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3.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막1:1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 12:49,50).
예루살렘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 선포로 탄생했고 사도들의 “말씀” 가르침으로 발전한 “말씀”이 충만한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소리를 높여 가로되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14,36).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4). 안디옥 교회도 빌립보 교회도 “말씀” 전파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충만한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들이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도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듣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말씀”을 순종하는 “말씀”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인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 독했고 요한계시록을 모두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에만 전력했습니다. 세상 유행에는 뒤 떨어진 좀 무식한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조선교회에는 처음에는 부흥회는 없었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경회만 있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유명한 사람들의 유창한 말이 너무 많이 들리고 인기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멋진 프로그램과 행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고 사회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와 빌립보 교회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꿈 교회가 “말씀”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쓰는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4. “교제”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나서 “교제”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도덕한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셔서 친밀하게 교제하시고, 세리장 삭개오를 찾아가셔서 친밀하게 교제하시고, 저주 받아 마땅한 핍박자요 포행자요 살인자인 사울을 찾아가서 친밀하게 “교제”하신 너무너무 이상한 분이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교제”가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인들은 물론 메소보다미아 가바도기아 애굽 구레네 로마 아라비아 등 십 사오 개 지역에서 온 다 문화 다 인종들 수 천 명이 함께 모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1,42). 안디옥 교회의 특징도 여러 종류의 다 문화 다 인종이 함께 모여 “교제”하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행13:1,2). 빌립보 교회야말로 사랑의 “교제”가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루디아의 본을 따라서 모두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의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과 은혜 안에서 서로 “교제”했고 바울의 고난과 선교 사역에 “참예”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1980년 4월 6일 청담동에 교회를 세우면서 교회 이름을 강변교회라고 지은 이유는 강변에 세워졌던 빌립보 교회를 닮기를 소원했기 때문이었고 강변교회 표어의 첫 부분을 “서로 돌아보고” 라고 한 것은 빌립보 교회처럼 “교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는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성도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교제”가 충만한 교회라고 라고 생각합니다. 한꿈 새터민교회가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성도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5. “봉사”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과 “봉사”를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했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과 병자들을 친히 “섬기고” “봉사”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루살렘 교회는 “섬김”과 “봉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2:44,4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구제”와 “섬김”과 “봉사”를 전적으로 하게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전도도 바나바의 “착함”의 행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4). 빌립보 교회야말로 “착함”과 “섬김”과 “봉사”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착함”과 “섬김”과 “봉사”가 없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도 아니고 아름다운 교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세우면서 표어를 정했는데 둘째 부분이 “기쁨으로 섬기면서” 였습니다. “섬김”과 “봉사”를 강조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도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힘있게 이루어졌습니다. 제주도 복음화의 주역이었던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기도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에 최선을 다하므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중요한 비결도 “기도”와 함께 나환자들과 원수들에게 쏟은 순수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다운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펴는데 전혀 힘써야 할 것입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일이 너무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꿈 교회가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에 최선을 다하는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6.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친히 기뻐하셨고 그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눅10:2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
예루살렘 교회는 “기쁨”이 충만한 아름다운 교호히였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6,47).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0,41).
빌립보 교회야말로 “교제”와 “봉사”가 충만했고 그 결과 “기쁨"이 충만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서 “기쁨” 이라는 말을 17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1:3-5).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빌4:10).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봉사”가 있을 때 그것은 사랑의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제가 1980년 4월 6일 청담동에 교회를 세우면서 교회 이름을 강변교회라고 지은 이유는 강변에 세워졌던 빌립보 교회를 닮기를 소원했기 때문이었고 강변교회의 표어를 “서로 돌아보고 기쁨으로 섬기면서” 라고 정한 이유는 빌립보 교회처럼 “교제”와 “봉사”와 “기쁨”이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제”와 “봉사”와 “기쁨”이 없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도 아니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도 아니고 행복한 교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쁨”을 지니지 못한 교회는 불행한 교회입니다. 회사와 같은 교회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을 염려 두려움을 지니고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과 후원과 격려로 한 평생 근심 걱정 원망 불평 염려 두려움을 지니는 대신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을 지니고 “행복하게”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한꿈 교회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봉사”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귀중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첫째로, “기도”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회개”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교제”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봉사”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여섯 가지를 줄여서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말합니다. 한꿈 교회가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행복한 성도”에 대한 설교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저는 “행복은 하나님의 품과 교회의 품과 자연의 품” 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품을 떠날 때 슬픔과 불행을 느낍니다. 어린 아기가 엄마 품 안에 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소리 내어 우는 것은 엄마의 품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소리 내어 우는 것입니다. 행복은 품입니다.
1. 행복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멀리 가서 허랑방탕하며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을 떠났던 둘째 아들 즉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로 아버지는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반갑게 맞았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아버지 품 안에서 다시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46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너희를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라.” 시편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 73:28).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대부분 약하고 병들고 버림 받았던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상하게도 약하고 병들고 버림 받았던 불행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품어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한 평생을 기쁘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를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73:28).
2. 행복은 “교회의 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떡을 떼며 기뻐했다고 했습니다(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 옛날 다윗 왕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편 16:3).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여러분들은 교회와 성도들의 품 안에서 하루 하루를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품을 떠나지 말고 교회와 성도들의 품 안에서 한 평생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한 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저를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집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4).
3. 행복은 “자연의 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해와 달과 별들과 나무와 풀들과 꽃들과 짐승들과 새들과 물고기들을 창조하시고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공중의 새들을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연 만물을 향해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친밀하게 말했습니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찌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찌어다” (시148:3,4).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시148:7-13).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공생의 대상이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형제요 친구들입니다. 자연과 친하게 지낼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저를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자연의 품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오늘 “건강한 교회와 행복한 성도”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기회말교봉기” 즉 기도와 회개와 말씀과 교제와 봉사와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행복한 교회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행복한 성도는 “하나님의 품”과 “교회의 품”과 “자연의 품” 안에 있는 성도가 행복한 성도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정부 한꿈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여기 모인 여러분들 모두가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찬송가 246장(208장). “내 주의 나라와”를 다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으라
행 2:37-42 / 양인순 목사
■ 어떤 청년이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요정이 나타나서 청년에게 묻습니다. “주인님, 무슨 선물을 받기 원하세요?” 그러자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저는 많은 돈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와 행복한 결혼을 원합니다.” 그러자 요정은 난처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꼭 세 가지 선물을 모두 원하시나요?” 청년은 단호한 표정으로 “예~ 저는 돈, 여자, 결혼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얼마 후 <돈여자>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하나님께서 이 시간 ‘내가 지금 받고 싶은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육신이 연약하신 분은 건강을 구하실 것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에 어려움이 있는 분은 직장과 사업의 형통을 구하실 것입니다.
재정에 어려움이 있는 분은 재물을 구하실 것입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것을 선물로 받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물로 받기를 원하는 것들은 대부분 일시적입니다.
부족할 때는 그것만 있으면 감사하고, 최고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곧 원망과 불평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가 진정으로 받기를 원하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1-13)
세상에서 악한 부모도 자식에는 좋은 것을 선물로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무엇을 선물로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성령님”이라고 단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 가운데 성령님이 충만하게 계시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육신의 문제, 정신의 문제, 영혼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가지고 있어도 성령님을 선물로 받지 못한 인생은 불행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으라’입니다.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성령님을 받는 비결을 말씀을 통해서 함께 배우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는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어찌할꼬?(What shall we do?)였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이 행하신 큰 권능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음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을 조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자신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사건과 무관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너희들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였다’고 선포할 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성령님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하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12:10)
일명 성령 모독죄입니다.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면 그 죄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입술로 부인하다가도 다시 회개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는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부인하거나 모독하면 결코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또한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그 십자가의 현장에 없었다고 해서 나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 값을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자신의 온 몸을 속전으로 드림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런 안타까움과 죄송함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앞에서 큰 소리를 칠 수 있습니까?
어찌 우리가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무엇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교만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말발굽이 파이는 것처럼 큰 찔림을 받습니다.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반응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책임을 전가하거나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바로 제가 죄인입니다. 용서해주세요’
이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가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3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의 원래 의미는 각주를 보시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로 번역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와 능력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성령님을 통해서 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성령 자체가 목적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자체가 최고의 선물임을 의미합니다.
저는 설교 제목을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이미 받은 자들이 계속해서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와 능력을 받으라는 취지입니다.
그러면 최고의 선물인 성령님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요?
베드로 사도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단어는 ‘메타노에오’는 ‘길을 바꾸라’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입니다.
길을 가다가 방향이 잘못됐으면 바로 길을 바꿔서 돌아서야 합니다.
미련을 가지고 계속가면 갈수록 되돌아오기가 어렵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I am sorry’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생각이 아닙니다. 후회가 아닙니다.
회개란 죄로부터 확실히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행동입니다.
회개의 시작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죄를 보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항상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다른 사람들은 사기도 치고, 폭행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는데 그들에 비하면 난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의 기준이 윤리나 도덕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상대적으로 너보다는 내가 낳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너무나 무서운 죄인들입니다.
실내 공기가 깨끗하게 보여도 창문 틈으로 한 줄기 햇살이 비추면 어떻습니까?
얼마나 많은 먼지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모습도 예외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교양이 있고, 경건하고, 깨끗한 모습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서로를 비교하면서도 내가 너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 깊숙이 다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더 이상 버틸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죄를 보게하는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찌르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추악한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우리가 어찌할꼬?”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시작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회개함이 없는 성령님의 임재도 없습니다.
철저한 회개의 과정을 거쳐 예수님의 보혈로 씼겨진 심령에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회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 죄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가롯유다처럼 됩니다.
그는 스승인 예수를 은 30에 팔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자신을 비하하며 수치심에 사로잡힙니다.
결국은 아겔다마(피 밭),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죄를 자기 스스로 책임지고 계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아무리 산 속에서 도를 닦고, 참선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남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란 도저히 면목이 없지만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뉘우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의 결론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집을 나갔던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자존심 때문에 돼지 쥐엄열매를 먹으며 버팁니다.
“그래도 내가 염치가 있지 어떻게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겠어?”
자존심을 내세우고, 자기가 끼친 손실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 생각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태도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이 집을 나간 순간부터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잘못한 행위를 보지 않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기대는 아들이 속히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존심이나 미안한 감정, 그 이상의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태산같이 크고 무겁더라도 주님께로 돌이키면 우리 주님은 팔 벌려 안아주십니다.
‘너 왜 그랬느냐?’ 따지거나 책임을 추궁하지 않습니다.
실은 오늘 설교를 하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뒤를 생각해보면 그토록 맹세했던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과거의 죄에 매여 있었다면 어떻게 ‘너희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설교할 수 있었을까요?
비록 실의와 좌절에 빠져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헛 그물질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생선을 구워놓으시고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사랑의 음성에 베드로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라도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말씀으로 새롭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가롯유다의 잘못과 베드로의 잘못의 차이가 얼마나 될까요?
가롯유다는 스스로 책임을 지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의 주님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철저한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 성령의 사람이 됐습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가 됐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이 시간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기쁘게 받으실까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하나님께서는 간음죄와 살인죄까지 저질렀던 다윗의 회개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예배는 바리새인들처럼 의인행세를 하며 위선에 찬 모습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들의 상한 심령을 원한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바라보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원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 의를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여!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왔사오니 나를 용서하소서.
나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이 겸손한 고백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상한 마음을 치유해주시고, 깨끗게 하십니다.
중세 시대에는 감옥이 부족해서 죄수들을 배에 실어서 지중해 한복판에 세워두면 그곳이 감옥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총독이 죄수들의 배를 순시하는데 한결같이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합니다.
억울하게 잡혀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머리를 숙이고 있더랍니다.
총독이 궁금해서 “너는 왜 여기 왔느냐?” 묻습니다.
그는 “예 저는 죄인입니다. 가족이 굶어 죽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도적질을 했습니다. 이런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그 총독이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이 괘씸한 놈.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이 배에는 죄인이 아무도 없는데 너 같은 죄인이 여기 있다니 이놈을 당장 배에 실어서 이곳에서 내보내라”
자신의 죄를 인정한 그 죄수만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얼룩진 죄의 모습들이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 앞에 고백하며 회개할 때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고, 용서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여러분의 인생에 유쾌한 날이 이뤄지기를 원하십니까?
이 시간 회개하고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십시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할 때 자유케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역사가 임할 줄 믿습니다.
둘째,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세례는 회개의 외적인 표시요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차일피일 미루고, 핑계를 댄다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섰다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회개한 사람이 따라야 할 주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회개한 사람은 죄를 떠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바로 그 결단의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모든 정과 욕심을 못 박고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3-4)
세례를 받은 자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가 예수와 함께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새 생명을 받은 자로 살아야 됨을 강조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각 개인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배우자나 친구나 부모의 신앙에 묻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수많은 사람이 들었지만 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죄 용서를 받습니다.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실히 믿습니까?
이것을 보증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나의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보증하신 결과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5-17)
성령님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증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이 놀라운 주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주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지만 무섭게 정죄하거나 야단치지 않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의 마음으로 선포합니다.
다같이 39절을 보십시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2:39)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못 미치는 곳이 없습니다.
‘먼데 사람’ 이방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얼마든지 부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음의 찔림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참회는 청중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죄사함을 받으라’고 선포합니다.
진심으로 모든 말씀을 듣는 자들이 주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40절에서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한 영혼이라도 돌이켜 회개함으로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일시에 3천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패역한 세대’에서 ‘패역한’은 ‘스콜리오스’로 ‘비뚤어졌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비뚤어져 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생각도, 행동도, 삶도 온통 진리에서 벗어나 계속 비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고, 세례받은 자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은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성령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반대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여전히 우리는 비뚤어진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이미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님을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을 이미 받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육체의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날마다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리를 바꿔야 합니다.
낢마다 자신의 의에 대하여 죽고, 주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나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패역한 세상을 올곧게 세워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어찌할꼬?’ 통탄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대답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2:38)
우리 이 시간 다같이 찬양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오~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고 변치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
날마다 부흥하는 교히(2)
양인순 목사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령충만한 베드로는 설교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너희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에서 예수를 풀어 살리셨다고 강조합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하면 좋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하여 성령님을 조롱하지 말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라고 명합니다. 그리하면 너희들도 죄사함을 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즉석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가 삼 천 명이나 됐습니다.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된 초대교회는 이렇게 부흥의 역사를 이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례를 받고 난 후에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교제에 힘썼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나누었습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서로 나눴습니다. 진정한 나눔을 통한 성령님 안에서의 코이노니아가 이뤄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셨는지요? 성경을 읽기 전에 신문이나 식사를 하지 말자고 했는지 그 말씀을 의식하셨는지요?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진정한 나눔과 교제를 하려고 애를 써 보셨는지요?
우리가 매주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한 주간 중국 청도를 중심으로 여행을 하고, 밤에는 세미나를 했습니다. 80분이 참여하셨는데 대부분은 나이가 좀 드신 목사님, 장로님들이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나이가 제일 어린 것 같았습니다. 노회 규칙부 부장으로 강의를 해야 한다고 해서 12년 만에 처음 참석을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분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매번 식사시간마다 전쟁을 방불케 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먹거리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테이블별로 식사를 하는데 중국 식탁은 원형으로 음식을 가운데 올려놓고 돌려가면서 각자 그릇에 떠먹습니다. 입맛에 맞는 음식이 나오면 반 바퀴도 돌기 전에 음식이 바닥이 납니다. 다 목사님 장로님들인데 먼저 자기 몫을 챙겨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끼리끼리만 나눕니다. 혼자 오신 목사님들은 거의 찬밥 수준입니다. 다 자기 교회 목사님만 챙기지 다른 교회 목사님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때 고린도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배를 마치고 애찬을 나누다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뒷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다 먹어치웁니다. 부자는 부자끼리 음식을 나눕니다. 여기에 함께하지 못한 가난한 자들은 서운합니다. 먹는 것으로 차별을 하면 상처가 커집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식탁의 교제가 중요하지만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저는 강사라고 잘 챙겨주셔서 잘 먹었지만 소외된 분들도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이것은 에피소드인데요 우리 여행은 대부분 새벽부터 기상해서 하루 종일 차를 타고 가다가 잠깐 들러서 사진 찍고, 또 이동을 합니다. 이번 여행의 절반은 버스타고 이동 시간이었습니다.
가이드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거의 눈을 감고 입신상태입니다. 그때 가이드가 퀴즈를 냈습니다. “악어의 발가락은 몇 개일까요?” 여러 가지 답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나이드신 장로님이 ‘18개 아니가!!!’ 가이드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장로님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참고로 악어는 앞발의 발가락이 퇴화되어서 4개씩 8개입니다. 뒷다리의 발가락은 5개씩 10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이 드신 장로님이 이것을 아셨을까요? 여기서 폭소가 터집니다. ‘야아~ 가이드! 4x4=18 아이가?’ 잠결에 장로님이 곱셈을 잘못하신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사건은 귀국 시 공항에서 벌어졌습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농산물 주문을 받았습니다. 콩, 참깨, 호두, 잣, 땅콩 등, 그런데 욕심이 지나치셨는지 대부분 화물 무게가 초과입니다. 그래서 가방 무게가 적은 사람들과 짝짓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남아서 어떻게 했을까요? 곡물상에서 제공한 똑같은 빨강 비닐 가방을 머리에 이고 검색대 앞으로 열 분이 줄을 지어 갑니다. 그때 직원이 하는 말에 빵 터집니다. “아니 써커스하시는 분들이십니까?” 똑같은 빨강 비닐 가방을 머리에 이고 죽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유무상통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자기의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눴습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으로 음식을 서로 나눴습니다. 우리 성지교회 가운데 이런 성령 안에서의 교제가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진정한 나눔과 사랑이 넘쳐날 때 기쁨이 있습니다. 감동이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임합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초대교회 공동체의 두 가지 모습을 말씀드립니다. 42절을 보시면 “떡을 떼며, 오르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에 초대교회 공동체의 부흥의 비결 두 가지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떡을 떼는 예배와 전심으로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성전에서든 가정에서든 모일 때마다 떡을 뗐습니다. 여기서 ‘떡을 떼며’는 음식을 나누는 애찬의 의미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예식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년에 3번만 성찬식을 합니다. 그 이유는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성만찬 예식은 자주하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가 모일 때마다 성찬을 행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찬에 담긴 의미가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매 미사 때마다 성찬예식을 합니다. 개신교는 주로 말씀 중심의 예전이지만 천주교는 의식 중심입니다. 신부의 강론보다는 의식, 그 중에서도 성만찬이 최고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천주교의 성찬식은 특별합니다. 신학적으로 그들은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신부가 떡을 떼는 순간 그 떡이 실제로 예수님의 살이 됩니다. 그리고 신부가 포도주를 따를 때 그 포도주는 실제로 주님의 보혈의 피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시간은 제일 중요한 은혜의 자리요,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오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떡을 받고,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거룩한 떡을 입에 넣어줍니다. 포도주는 아예 신자들에게는 주지도 않습니다. 포도주는 주님의 피라고 여기기 때문에 잔에 그것을 남길 수 없습니다. 그것을 떨어뜨리거나 버리면 주님을 버리는 큰 죄를 범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신부가 혼자 대표로 마십니다.
종교개혁 신학자들의 성만찬에 대한 입장은 조금씩 다릅니다. 그 깊은 의미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종교 개혁자인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변질된 중세 카톨릭의 성찬입니다. 지나치게 사제 중심적이고, 형식에 빠진 성찬의 회복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 라는 책에서 중세 캐톨릭의 성찬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평신도에게는 떡만 주고, 포도주를 주지 않는 것, 둘째는, 마술적인 화체설의 오류, 셋째는, 단순한 희생의 반복으로 보는 점입니다.
그래서 실재로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단순히 떡과 포도주 속에 주님이 영적으로 함께 거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공재설이라고 합니다.
또한 쯔빙글리는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을 ‘상징설’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찬의 의미를 지나치게 상징으로 해석해서 그 의미를 약화시키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루터의 공재설과 쯔빙글리의 상징설의 중간입장을 취합니다.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 속에 함께 하지만 떡과 포도주는 단지 주님을 상징하는 표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주님의 살과 피가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님과 말씀이라고 합니다. 즉 단순히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있어야만 주님의 살과 피로 인식되는 은혜가 임한다고 믿었습니다. 칼빈은 말씀 안에서 성령님의 임재를 통한 성찬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영적 실재설’ 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의 입장에서 성만찬을 행합니다. 함께 나누는 떡과 포도주가 실재로 주님의 살과 피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실재로 떡과 포도주에 임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구별된 모습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성찬 예식을 집접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3-26)
성찬예식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떡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전에서든 집에서든 모일 때마다 성찬예식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직접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처음에는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하면서 주님이 그토록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이유를 깨닫습니다. 찟기신 주님의 몸에서 흘리신 피는 바로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철저하게 깨닫습니다.
그 주님의 보혈만이 자신들의 더러운 몸과 죄를 씻을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만이 자신들을 구원하는 능력이요 생명의 능력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행하면서 이미 그들 가운데 임하신 주님의 생명을 재확인했습니다. 그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제물로 삼아 자신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사랑에 감격했습니다. 주님의 생명을 먹고 마시며 이제부터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 것을 결심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구로 살 것을 결단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을 성찬으로 불러주시는 이유입니다. 성찬은 주님께서 친히 유월절 어린양의 제물이 되셔서 당신의 몸을 다 찟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을 감사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겠습니다 라는 고백과 결단의 자리입니다.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겠습니다 라는 결단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성찬의 의미를 삶으로 재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매일 성찬식을 행한 이유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해골의 곳’ 이라 불리는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왜 하필이면 해골 위에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졌을까요? 그 해골은 바로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의 결과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해골 위에 십자가를 세우십니다. 해골 위에 주님의 보혈이 흘러내릴 때 해골에 주님의 새로운 생명이 잉태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성령님의 생기가 들어갈 때 생명의 지닌 사람으로 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음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해골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위에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지고, 보혈이 흘러내릴 때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 모든 죄를 사함받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됐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 천국을 상속받는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됐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덧입고 이 자리에 오게 됐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 답게 살고 있는지요? 여전히 우리가 세상의 것에 매여서 십자가를 회피하고 있다면 그것은 해골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해골 위에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도 그것은 결국 허무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해골 같은 인생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든든히 세우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새 생명 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매일 모일 때마다 성찬을 행한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은혜의 통로로 쓰임받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나누고, 함께 떡을 떼고, 성찬을 통한 교제의 결론은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임재와 충만함을 경험했습니다. 성령충만을 경험하는 삶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르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오르지’ 라는 말은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필요할 때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시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이라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호흡을 멈추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기도는 생명줄과 같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의 줄을 잡고 있으면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평안한 상황이라도 기도줄을 놓치면 영적으로 죽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성도들의 곁에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축복하십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8)
하나님은 겸손하게 엎드려 간구하는 자, 미사여구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간국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누가 복 있는 자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자가 복입니다. 세상에서도 능력이 있고, 지혜 있는 자와 가까이 있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비결은 바로 기도입니다. 진실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누구나 예외 없이 다가오셔서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어제 일본에 있는 미즈노 집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이 세상일을 하는 과정에서 시험에 빠졌다는 거예요. 믿는 자로서 부끄럽다는 거예요. 매일 어려울 때만 목사님을 찾고, 기도부탁을 해서 죄송하다며 쌔게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욥기 23장 10절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아멘!
그리고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새 힘을 얻었고, 새롭게 거듭난 삶을 살겠다고 결단의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하기에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때 바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그 위기가 바로 기회가 됩니다.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라 축복의 디딤돌이 됩니다.
운동은 계속해서 반복할 때 근육이 생기고 몸이 건강해집니다. 신앙의 근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의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무장을 하고, 호흡을 하듯이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영적 근육이 탄탄하게 우리 삶 가운데 붙습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곁에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이길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했습니다.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 것을 결단했습니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공포가 아닌 존경심과 놀라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이유는 말씀과 기도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해골의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사랑의 교제가 넘쳐나야 합니다. 성만찬의 의미를 회복하여 주님의 십자가 위에 믿음을 든든히 세우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가까이 하는 비결입니다. 가까이 계시는 주님의 능력을 덧입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그 속에 놀라운 부흥이 임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감으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통로로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찬양드리기를 원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 까지>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설교에 대한 반응
사도행전 2:37-38 / 마경훈 목사
설교를 하다보면 같은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정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만나 정신없이 물을 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사모하며 갈급한 심령으로 설교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너는 외쳐라 나는 안 듣는다 식으로 완전히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목사의 설교를 못마땅하다는 식의 표정으로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설교를 하고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경우는 말씀대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나올 때 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볼 때도 보람을 느낍니다. 평상시 대화 중에 설교 말씀을 기억하면서 인용하는 분들을 보면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사람들처럼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가 있었고 스데반의 경우처럼 화가 나서 돌로 스데반을 죽였던 것처럼 핍박자가 되는 경우입니다.
말씀이 능력이 있어 듣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참으로 영적 신비입니다. 저는 저의 평생 이런 영적으로 신비로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사람 속에서 역사하여 삶의 가치와 인생의 목적을 바꿔놓으려면 몇 가지 충족 요건이 필요합니다. ❶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절대적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이나 물을 주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듯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없이는 설교로 사람이 변화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퍅한 사람이라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자신도 모르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❷ 설교자가 중요합니다. 설교자가 중심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진리를 전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부단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통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성도들은 목회자가 늘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❸ 회중이 중요합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그 때 자신의 상태에 따라서 달리 들릴 수도 있습니다. 늘 듣던 말인데도 자신이 좋은 마음을 준비하고 있으면 은혜롭게 들리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들으면 시험이 돌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오순절 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역사가 있은 후 모여든 3천명의 사람들이 설교를 듣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의 3천명의 사람들은 그 설교를 듣고 성령을 받고 새로워졌습니다. 부디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1. 듣고(37절)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 선포된다 하더라도 듣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기본은 듣고 보고 말하는 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보고 주님을 말하는 교육입니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 듣는 교육입니다. 이스라엘의 교육 방법을 쉐마 교육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듣는 교육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28장에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비결이 1절에 나옵니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삼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마7장에 보면 신앙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비결이 나옵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고 둘째는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듣는 것이 기본입니다. 마13장에도 좋은 밭에 떨어진 씨를 통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방법을 가르쳐주는데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고 둘째는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기본이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 듣기 위해서는 첫째, 준비를 잘 하십시오. 죄를 범한 것이 생각나거든 회개하십시오. 잘못된 감정을 바로 잡으십시오. 미리 오셔서 기도로 준비하십시오. 열심히 찬송하며 마음에 불을 붙이십시오. 둘째, 귀를 기울이십시오. 신경을 곤두세우시고 말씀을 들으십시오. 잡다한 소리들은 들리지 않고 말씀만 들어올 것입니다. 셋째, 설교자를 바라보십시오. 특히 설교자의 눈이나 입을 바라보십시오. 귀만 사용하는 것보다 눈까지 사용하면 효과가 더해질 것입니다. 넷째, 아멘으로 화답하십시오. 그렇게 믿는다는 신앙의 고백으로 아멘하십시오. 설교 말씀이 옳다는 동의의 표현으로 아멘하십시오, 그렇게 살겠다는 결심으로 아멘하십시오. 귀로만 듣는 설교보다 눈을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귀와 눈만 사용하는 것보다는 입까지 사용하여 듣는 설교가 더 효과적입니다. 다섯째, 설교를 방해하는 생각들을 차단하십시오. 우리의 생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셔서 사고를 바꾸십니다. 사단은 온갖 잡생각들을 통원해서 생각을 분산시키고 말씀을 마음에 세기지 못하게 합니다. 생각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좋은 음식에 쓰레기를 섞는 것과 같습니다.
2. 마음에 찔려(37절)
설교를 하다보면 성도들의 마음을 찌르는 설교가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흔히 '까는 설교'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들에게는 이 까는 설교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설교를 듣는 사람이 마음에 찔려 자신을 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찔림이 은혜가 돼서 변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찔림이 아픔이 되어 설교자에 대한 반발심을 갖기도 합니다. 늘 좋은 결과가 있다면 설교자가 그 찌르는 설교에 갈등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좋지 않은 결과를 보게 되기 때문에 갈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갈등은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설교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듣고 회개한다면 감사한 일이고 반발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설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그 사람이 회개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고 반발한다면 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적당히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성경에 나오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설교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설교였습니다. 물론 백성들의 상한 마음을 치료하고 감싸주는 설교도 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소망을 심어주는 설교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설교가 회중의 패역함을 책망하고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듣는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찌르는 설교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원칙을 세워봅니다. 첫째, 나 스스로 어떤 특정한 사람을 찌르기 위하여 설교를 준비하지 말자.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만 설교하자. 감싸게 하시면 감싸고 찌르게 하시면 찌르자. 셋째,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맡기자. 미리 예상하지 말고 어떤 결과가 있어도 그 결과를 받아드리자.
여러분은 마음에 찔림이 있는 설교를 들을 때 몇 가지 원칙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감정과 상관없이 받아드리자. 둘째,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찔림을 받은 그 부분을 말씀대로 고치자.
3. 우리가 어찌할꼬(37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반항하며 돌로 스데반을 쳤던 것처럼 악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겸손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설교를 듣고 그 말씀의 적용을 설교자에게 맞추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실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재판을 받으실 때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는 골고다 언덕에도 나타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다른 제자들 선동해서 물고기 잡으러 갔던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갑자기 설교를 합니다. 만약 그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베드로의 부족한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면 결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설교자의 부족함을 보는 대신에 자신들이 말씀에서 부족함을 발견하고 '어찌할꼬'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설교를 듣고 말씀의 적용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의 절기가 되면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고 타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아마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있던 이민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시던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없었을 것입니다. 유월절과 오순절이 50일 차이가 나는데 타국에서 유월절에 고향을 찾았던 사람들이 오순절에 다시 고향을 찾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오순절에 모인 3천명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타국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정황으로 볼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 설교를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제들아 유월절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어찌해야 하느냐?"라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이 설교 듣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를 판단하거나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말고 자신에게 적용해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 속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4. 너희가 회개하여(38절)
자신의 설교에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첫 번째 하는 권면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화개하라고 하는 권면을 하는데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빗나간 길에서 올바른 길로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참된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구약의 율법과 제사 제도만을 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만약 그들이 그 장소에 있었다면 그들도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말은 불신앙의 길에서 돌아와 신앙의 길에 서라는 말입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설교를 통해서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잘 못된 길에 서 있다면 올바른 길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2. 회개하라는 말은 그리스도 없이 살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연합하라는 말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생활을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일 뿐입니다. 요즘은 조화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해서 멀리서 보면 조화인지 생화인지 구별이 안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화와 생화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영생과 영벌의 차이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생명과 사망의 차이입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이 설교를 듣고 참된 회개를 하게 되면 그리스도 없이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과 연합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무엇을 하든지 내 의사를 따라 행하던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고 나면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위하여 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자신을 청결하게 하여 성령을 모셔 드리라는 말입니다.
회개하여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나는 죽고 그분의 부활과 연합하여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큰 유익은 죄사함의 유익입니다. 그분이 흘리신 보배로운 피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분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더러운 죄가 씻어지는 놀라운 영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요일1:7에 보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4. 믿음을 선포하라는 말입니다.
세례의 참 뜻은 물에 잠김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에 대하여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믿음으로만 끝 내지 않고 의식으로 행하는 것은 믿음의 선포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도 기독교는 세계 여러 곳에서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그리스도를 믿거나 그 도를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안됩니다. 그 이유는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공식적인 선포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사도행전 2:37-41 / 손상률 목사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성령 받은 사도들의 활동으로 놀라운 부흥을 거듭하였습니다. 오순절날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또는 불의 혀와 같이 강렬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거리에 나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방언을 하며 각종 신유의 은사를 동반한 표적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사람들은 신기해하기도 하고 어리둥절 하는 표정이지만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본문 말씀 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41절에는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건전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이후 그리스도 교회의 전통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과 성도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이 의식에 대한 신령한 뜻을 살펴보고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I. 세례의 의미
구약시대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로 그 의미가 있습니다(창 17:9-14). 신약시대에는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에 차별 없이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면 세례를 받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상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1. 신약 교회의 표증(表證)입니다.
신약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세례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적사역을 시작하기 직전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마 3:16). 그 예수님께서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최후로 당부하신 말씀 가운데 제자들에게 세례 줄 것을 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는 신약교회는 사도들이 전파하는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어 신자가 되는 확증을 갖게 하였습니다(행 8:36-39, 16:15, 33).
2. 죄 사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를 듣고 양심이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부르짖는 무리들에게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을 것을 권했습니다.
여기에는 회개와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이 함께 나타나지고 있습니다. 곧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는데(요1서 1:9), 세례는 그것을 증거하는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물 세례” 또는 “불 세례”라는 말이 있습니다(마 3:11). 여기서 물과 불은 더러움을 깨끗하게 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성결케 하는 예식(潔禮) 중 어떤 부정한 것에 접촉되었거나 몸에 더러운 것이 묻었을 경우 그 옷을 물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레 11:25). 그러나 악성 문둥병에 접촉되었을 경우 모두 불에 태우도록 하였습니다(레 13:52). 이런 의식은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써 성도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3.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죄는 연합을 깨고 흩어지게 하거나(창 11:6-9) 분열을 가져옵니다.
죄가 들어온 후 사람이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갈등의 장벽이 가로막혔습니다(엡 2:15). 그러나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된 자요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형제자매가 됩니다(엡 2:18-19).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에 세례의 의식이 나옵니다. 세례 받는 자가 먼저 자기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고백을 하여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것을 인증하는 의식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26-39에는 에디오피아에서 온 간다게 여왕의 내시가 빌립에게 세례 받은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내시는 물 있는 곳에 이르자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하고 물었습니다. 다른 사본에 보면 “빌립이 네가 마음으로 온전히 믿으면 가하니라”고 했고, 이에 내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는 나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인증하는 표식입니다.
II. 물 세례와 성령 세례
신약의 복음 운동은 세례 요한의 등장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가복음 1:1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막 1:4). 여기 대하여 요한 자신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막 1:8). 그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다른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세례의 의식
오늘날 교회가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게하고 공회 앞에서 세례를 행하게 되는데 이는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분부를 따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지상명령으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마 28:19-20).
이에 따라 교회에서는 목사가 세례자의 머리에 물을 얹고 “예수를 믿는 ○○○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하고 선언하게 됩니다. 이렇게 머리에 물을 얹는 것 외에 세례 받는 자를 물속에 잠기게 하는 침례를 거행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3:21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에 물을 얹는 약식 세례는 죄 씻음의 의미가 있다면,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침례는 옛사람 곧 죄의 사람은 죽고, 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물 세례와 성령 세례
물 세례와 성령 세례는 주체가 다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주는 세례를 물 세례라 하고,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마 3:11). 물 세례는 사도들이나 오늘날 교회의 목사가 주는 것이지만, 성령 세례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물 세례는 성령 세례의 전 단계요 성령 세례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물 세례를 받았다고 반드시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9:2-3에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도 성령을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회개하고 세례 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부어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입니다(행 11:16).
3. 성령 세례의 증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 중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행 1:4-5). 이 말씀대로 제자들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열흘 동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오순절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와 같은 모양으로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행 2:1-3). 이 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즉시 거리로 뛰쳐나가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의 말하게 하심에 따라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였습니다(행 2:4).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습니다(행 2:43).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 신비로운 사건들을 체험합니다. 고린도전서 12:4에 보면 한 성령이라도 여러 가지 사역을 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행 3:8).
Ⅲ. 세례 받은 자의 신분
교회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고 하는데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 공동체의 정회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였습니다(요 15:5).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거기 연결된 사람의 집단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요 불가분리의 관계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의 소유된 자라는 뜻입니다.
1.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디모데후서 2:4에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존재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20-21에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소유된 사람으로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생활원리를 가지고 그의 삶을 가름하는 자들입니다.
2. 헌신자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자의 삶입니다. 이것은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났습니다(행 16:14). 그는 당시 소아시아와 유럽지역을 오가며 사업을 하였고,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6:14-15에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후 바울과 그의 일행은 루디아의 헌신으로 그 집에 거하며 그곳을 전도의 거점으로 삼고 유럽과 세계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상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게 있는 모든 것을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하여 값지게 쓰여지는 것을 최상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확장되고 이루어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인 뵈뵈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천거하면서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고하였습니다(롬 16:1-2).
3. 축복의 증거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창 17:23-27). 할례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의 표로서 할례를 받으므로 구별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창세기 18:18-19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할례 받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세상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의와 공도의 표본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들에게 자자손손 복을 주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형통케 되는 가를 증거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믿음의 생활을 잘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진력하는 사람과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행사하는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 12:3에 있는 말씀처럼 궁창의 빛과 같고 밤하늘의 별과 같이 영롱하게 빛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재에서 불꽃으로
사도행전 2:37-42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 복된 일입니다. 또 성령강림하신 일도 큰 복입니다. 신앙의 삶은 성령과의 만남의 삶이고 체험의 삶이고 성령을 받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앙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는 순간부터 나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가 하면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I
성령을 받고 가장 극적으로 변한 것은 베드로의 변신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번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아주 용렬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를 전후해서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도망가고 부인하고 문을 잠그고 숨어 있다가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령이 강림하시던 성령을 받고 나서 베드로는 비로소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가 그 예수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서 길거리로 나아갑니다. 사람들이 운집한 곳마다 가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렇게 설교했더니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매 그날에 믿은 사람들이 3천이나 더했다“고 했습니다.
참 기적 같은 일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습니까.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역동적으로 만듭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움직이게 하십니다. 의기소침하던 사람이 베드로 같이 입을 열게 하십니다. 입을 열어 전도했더니 한번 설교에 3천명이나 회개하고 그날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변신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이 같은 변신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넘어진 자리에서, 재에서 어느 날 불꽃으로 타오르는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초라함에서 영광으로, 실패에서 승리의 자리로, 무능에 열정으로, 재에서 불꽃으로 타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지옥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로 그 생명이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문제는 내가 그 성령께 나아가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성령께 나아가기만 하면 이런 변화와 환희의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몇 가지 독특한 일을 하시는 영이십니다.
II
1. “인도하시는 영”이십니다.
우리의 삶과 생각과 판단을 인도하시고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갈 길을 안내하시고 할 일을 인도해 주시는 영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지나온 과거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돌아보면 내 인생 모두를 성령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좀 깊은 신앙적인 안목을 가지고 나의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면 참 신비할 정도로 오묘하게 하나님의 영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은 인도하시는 영이시고 안내하시는 영이십니다. 인도하시되 선한 길로, 온전한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은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불행한 일이 주어질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합동해서 유익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그 불행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섭리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2. “눈을 뜨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영적 세계는 육신의 눈으로 불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육신의 눈은 지극히 적당한 거리에 있는 것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좀 멀어도 깊은 곳도 너무 밝아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눈의 한계입니다. 하물며 이 육신의 눈을 가지고 영적인 세계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하여금 영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눈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고 부활을 믿게 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보고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신비한 일입니다.
인도의 영성신학자 앤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라는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든 채 태어나서 잠든 채 살며 잠속에서 혼인하고 잠속에서 자녀를 낳고 깨어나 본 적이라고는 없이 잠속에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잠은 생리적인 수면이 아니고 영적차원의 잠을 말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 태어나서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그냥 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그냥 죽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이 잠에서 깨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다행스럽게도 이 영적인 눈이 뜨여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부활을 믿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살아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알고 보면 이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영적인 눈이 뜨여지는 축복입니다.
베드로 일행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그 눈이 뜨여지지 않아서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눈이 뜨여지지 않으면 믿고 중심 있게 살아갈 권위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도마가, 가룟 유다가 눈이 뜨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깊이 감추어있는 것을 어떻게 보고 믿을 수 있습니까. 보지 못하면 구체적인 신앙의 길을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왔다 갔다 하는 신앙인이 얼마나 많으며, 한다 안한다 하는 신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눈이 뜨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미숙한 일입니다. 지식의 눈이 뜨이질 않으면 보여주어도 알지를 못합니다. 감각이 발달되지 못한 사람은 손에 쥐어주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제자들이 아직 영적인 눈을 뜨이기 이전이기 때문에 변화산에서 다 보여주었는데도 보고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내일 십자가에서 죽으면 3일 후에 살아나 부활하리라고 여러 차례 말해 주었지만 제자들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눈이 뜨인다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성령이 오셔서 이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금 천국을 믿고 부활을 믿고 십자가를 믿고 구속을 믿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을 뜨이게 되면 믿음의 세게도 깊어지지만 동시에 생각도 변화를 받게 됩니다. 이 생각이 변화된다는 것이 또 큰 은혜입니다. 생각이 어떻게 변화되는가 하면 매사를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변화됩니다.
이것이 또 축복입니다. 매사를 소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런 판단, 소망, 생각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또 주변에 그리고 환경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전염됩니다. 그래서 주변을 쇄신시키고 그곳에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긍정적인 생각과 판단은 소망을 불러오고 삶을 실제로 소망 적으로 이끌어갑니다. 성령은 소망의 영이시고 미래의 영이시고 은혜의 영이십니다.
■ 항상 “폐하 잘된 일입니다”하고 말하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과 사냥을 갔습니다. 왕이 잘못해서 손가락 하나를 잃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때 이 신하가 “폐하 참 잘되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이 신하가 미움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이 왕이 다시 사냥을 갔습니다. 사냥하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식인종에게 붙잡혔습니다. 식인종이 입맛을 다시며 다가와 몸에 무슨 상처가 있는가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손가락 하나가 없는 것을 보고는 먹이에 흠이 있다고 버리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그 왕이 왕국에 돌아와 감옥에 있는 그 신하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왕이 지금까지 된 일을 자세하게 말하고 “미안하네, 자네 덕분에 내가 살았네” 하고 사과했습니다. 그때 그 신하가 또 말했습니다. “폐하 참 잘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폐하와 또 사냥을 갔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저는 꼼짝없이 흠 없는 음식이 되어 식인종의 밥이 되었을 것 아닙니까“하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그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이고 마음이고 생각이고 판단입니까.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도 성령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누구나 다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소망적으로 말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도 성령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매사를 소망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또한 소망적인 환경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3. “능력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내 안의 상태를 일신시키시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때로 감격하게 하시고 감동하게 하시고 나를 변화시키기도 하십니다. 요한 웨슬리가 1738. 5. 24 저녁에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벅찬 감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밤 9. 15분경에 이르자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마음속의 모든 정욕과 죄가 물러가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온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웨슬리는 성령운동을 시작하여 마침내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영국을 건져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능력의 상징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디엘 무디가 34세 때 11월 어느 날 뉴욕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때 걸으며 무디는 “성령이여 나를 강하게 붙잡으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 입에서 방언이 터지면서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되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그 능력에 힘입어 전무후무한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찰스 피니라는 전도자는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 19세기 2차 대전 때 미국에서 대 각성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설교할 때 사람들이 구르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을 체험한 후 베드로가 설교할 때 3천명이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인도하시기도 하고 벅찬 감격도 주시지만 때로 능력으로 나타나시기도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이라는 설교가가 말하기를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설교를 60년 하는 것 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여섯 마디 하는 설교가 낫다“고 했습니다.
4.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전도와 선교하는 일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순전히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입니다. 목회도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목사를 통해서 교회를 부흥하게 하시고 사역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선교와 전도는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는 성령과 함께 동역하고 매사를 함께 하여야 비로소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 8:29를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라고 하나님의 영이 빌립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행 16:6을 보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전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고 했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순전히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인도하시고 안내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전도하게 하십니다.
III
이렇게 되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1.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움직이시는 영이십니다. 삶을 이끄시는 역동적인 영이십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움직이시고 사용하시고 활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사람들을 불러내시고 활용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여기 이 자리에 까지 나와 앉게 된 것도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여기 이 자리에 까지 와 앉게 된데 는 누군가로부터 인도받고 안내받고 오셨지만 성령은 그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을 여기 이 자리에 까지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2. “성령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일”입니다. 성령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힘으로 이해하고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물론 성령은 힘으로 다가오시고 능력으로 다가오시지만 그 성령과는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삶이 더 진정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사람과도 인격적으로 대하게 되면 더 깊어지고 이웃과도 인격적으로 대하게 되면 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성령과의 관계도 이 인격적인 관계의 삶이 중요합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베니 힌 목사라는 분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을 잘 때까지 수시로 성령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상담하고 동행하는 삶이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간마다 때마다 성령과 상의하고 묻고 상담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성령과의 인격적인 만남이고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인격적으로 모시지 않으면 성령을 거부하는 삶이고 성령을 무시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이 이렇게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무시하며 살면 성령의 생각은 없어지고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적인 욕망에 집착하게 되고 내 뜻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5:16절을 보면 그런 삶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리하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의 열매인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롬 8:5를 보면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내재하심과 동역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강한 내주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신앙인이고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때 무능하기로 소문난 베드로가 하루아침에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되듯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에서 실패의 자리에서 불꽃으로 타오르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