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의 설교 6
행 7:44-53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44-53 /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 있을 때부터 메고 다닐 수 있는 성전, 곧 증거의 장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이 들어 있는 이 장막은 천사가 모세에게 일러준대로 정확하게 만든 것입니다. 45)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이 장막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방인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 새로운 땅을 점령하자 장막을 그곳으로 운반해 가서 다윗 때까지 보존하였습니다. 46) 하나님의 크나큰 복을 받은 다윗은 야곱의 하나님을 위해서 영원히 보존될 성전을 건축할 특권을 달라고 간구하였지만 47) 실제로 성전을 건축한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48-4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는 머무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예언자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ㄷ)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인데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디에 성전을 지을 수 있겠느냐? 내가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느냐? (ㄷ. 사66:1-2) 50) 하늘과 땅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냐?' 51) 이교도처럼 목이 뻣뻣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까지 성령을 거역할 셈입니까? 당신들의 조상이 한 짓을 당신들도 똑같이 되풀이할 셈입니까? 52)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거든 그 이름을 대보십시오. 그들은 의로우신 그분이 오실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당신들은 바로 그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 53)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천사에게서 받은 하나님의 율법을 당신들 스스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모독했다는 거짓 증인들의 고발로 인하여 받게 된 재판에서 스데반은 참된 성전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에게 바른 성전관을 가르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44-45) 증거의 장막은 43절의 몰록의 장막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증거 장막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을 보관하기 때문에 증거의 장막으로 불리었으며(민 9:15, 10:11),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장소였기에 회막으로도 불리었습니다(출 27:21; 신 31:14). 이 장막은 모세가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대로 만들었습니다(출 25-27장). 이 장막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가지고 들어갔으며(수 4:16) 다윗의 때까지 전해졌습니다(삼하 6:1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46-50)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하고 화려한 궁전에서 생활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장막이 초라하므로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지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성전건축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했습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준비했던 것을 가지고 마침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대하 3-4장). 성전을 건축한 후에 솔로몬은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실 뿐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는 분이시라고 찬양했습니다(왕상 8:27).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51-53) 스데반은 지금까지 완악하고 패역했던 그들의 조상들의 모습과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그 죄악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음을 꾸짖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았지만 교만하여 목을 곧게 했으며, 외형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지만 그들의 조상들처럼 항상 성령을 거슬렀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것처럼 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적용: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이 같은가, 다른가? 여러 사람과 같이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하여 서로 나누어 봅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인요 국립공원 삼림지에서도 해발 3,000m 이상의 고지대에는 무려 4,900년 된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 이름을 성경 인물 중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의 이름을 따서 부릅니다. 보통의 나무처럼 므두셀라 나무에도 형성층이 있어 굵기가 계속 굵어지는데, 4,900년 동안 굵어졌으니 엄청나겠다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나무는 아주 더디게 조금씩 자라, 100년 동안 고작 3cm밖에 굵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므두셀라는 혹한의 날씨와 사나운 바람, 적은 강수량 등 가장 나쁜 생존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므두셀라의 장수 비결은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내는 강인한 생존력과 다른 나무보다는 더디지만 아주 조금씩 꾸준히 자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롱런하는 비결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 설 교 >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행 7:44-50 / 양형모 목사
이스라엘 지도자들 앞에서 행한 스데반의 설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서 듣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중요하게 여기고 자세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이 설교가 단순히 보통 자주하는 그런 한편의 설교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문제의 진실을 순교를 각오하고 말하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설교를 마친 후 스데반은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냥 대강 적당히 변명을 하거나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으면 돌에 맞아 죽는 그런 비참한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또 우리가 이 설교를 중요하게여기는 이유는 이 설교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면서 가장 오해가 심한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분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과 성전을 무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6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온 예수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규례 즉 율법을 고치겠다고 했다는 말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런 나쁜 사람을 따르는 너희들을 처벌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시비 거리 중에 성전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을 하셨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성전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성전에 관한 오해의 문제는 유대교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오늘날 현대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유의해서 잘 들으시고 신앙인이 가져야 할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본문 44절과 4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성전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의 시작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의 장막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꾸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보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금귀고리를 거두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신이라고 섬기고 기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아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해 주시기 위해서 만들라고 하신 것이 이 장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막에 계신다고 하면 사람들은 또 장막을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장막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장막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서 장막에다가 대고 절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장막을 화려하게 만드시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장막 안에 있는 도구들은 금으로 은으로 귀한 재료를 써서 만들기는 했지만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 인간들에게 아주 중요한 약속들이 생각나게 하는 물건을 만들어 넣어두셨습니다. 언약궤라고 하는 것인데 그 안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기념적인 물건들을 넣어두셨습니다. 그런 중요한 언약이 있는 장막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스데반은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장막을 대할 때 장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증거의 장막이 성전이 되고 오늘날 교회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장막을 성전으로 만들면서 그 의미를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성전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그 성전이 주는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1.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먼저 두 돌 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이 알고 지켜야 할 중요한 핵심계명을 두 돌 판에 써서 주셨습니다. 두 돌 판에 열 가지 계명을 써 주시면서 서론으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돌 판을 보면서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 애굽 땅에서 노예가 되어서 짐승과도 같은 비참한 삶을 살던 우리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너무나 고마우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제 짐승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것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핵심을 계명으로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막에 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구원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알면 조금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 장막에서 날마다 행하여지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 나머지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장막에서 날마다 행하여지는 것은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왜 제사를 드려야 했을까요? 십계명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법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짐승의 피를 흘려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막에서 십계명을 보고 또 피를 흘리는 그 제사를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면 교회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기본적인 계명마저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죄로 인해서 영원히 멸망을 당해야 할 사람이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에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아론 집안의 자손인 고라라는 사람이 그를 따르는 250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불만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왜 모세와 아론만이 지도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가 되어서 우리 위에 군림하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서 광야에서 고생을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민16:13)라고 하면서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반항을 하고 다시 애굽을 그리워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란을 일으켰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반란에 화를 내시고 엄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250명은 불에 타서 죽게 하셨고 그들의 집과 물건들은 땅을 갈라서 매장을 시켜버렸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염병에 퍼지게 해서 일만 사천 칠백 명이 죽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을 후 이런 일을 기억하고 더시는 그런 불평이나 반역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론을 들어 쓰신다는 증거로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시고 그것을 보관하게 하신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아론의 지팡이를 보관하라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민17:10) 오늘날 우리가 이 교회에 와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란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반란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애굽으로 향하는 것이 반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사탄의 소굴이기 때문에 사탄에게 종노릇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애굽에서 구원해 내서 가나안으로 가게 해 주셨는데 다시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그 사탄의 소굴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반역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반역자들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산다고 하면서도 늘 소망은 세상을 향해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다가 새 생명의 싹을 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말라비틀어진 지팡이처럼 도저히 다시 살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생명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만나
만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물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와서 먹을 것이 없을 때 광야에 들어온 후부터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때까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살게 한 것이 만나입니다.
이 만나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해서 보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저희들이 배가 고픕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먹을 것을 허락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려서 받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몸에 밴 것이 그냥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준 것에 대해서 불평입니다. 자기들을 노예에서 해방 시켜서 인간답게 살게 하고 더 중요한 일을 하게하시려고 구원을 해 주었는데 그것을 원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출애굽기 16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2,3)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 때 고기 가마 곁에서 먹고 떡을 배불리 먹었는데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불러내서 굶어죽게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 같은 일들을 통하여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아직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들이 먹고 살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원망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하시고 메추라기 떼를 내려 보내주셔서 고기도 먹게 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약식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만나를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비단 이 세상의 육신의 양식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양식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약속이 그 만나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하늘에서 온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영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 물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우리가 장막에서 죽임을 당하는 짐승들처럼 죄로 인하여 죽임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내 죄 대신 죽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본문 46,4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은 증거의 장막인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그것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의 장막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기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성전을 건축하여 법궤를 성전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허락을 하지 않으시고 대신 솔로몬 시대에 와서 건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솔로몬 때에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음 성전 건축을 생각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건축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집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함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그를 위해서 성전을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는 하나님을 가리키기 보다는 아버지 다윗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좋게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하서 7장에 보면 성전건축에 대한 다윗의 청원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삼하7:5)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인데 그런 하나님이 계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으시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7: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파 그 누구에게도 왜 성전을 건축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를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너의 몸에서 난 후네 씨를 통하여 왕위를 잇게 하시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유지할 것이고 그 씨 중에 한 자손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영원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말의 뜻을 해석합니다. 다윗은 이 말씀이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한 것으로 알았고 모든 준비를 마쳤고 솔로몬은 아버지의 뜻대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전건축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워질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신을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은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장막이요 성전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믿음을 고백하고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성전입니다. 그곳이 높은 산이건 거친 들이건 넓은 곳이건 좁은 곳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인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붙잡고 있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증거의 장막을 바로 알지 못해서 자기 마음대로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못 이해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들이 그와 같이 화려한 교회당을 짓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외쳐지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건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거기 진정한 예배가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교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세가지 책망
행 7:44-50 / 변영익 목사
여러분 ! 스데반의 운명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면 비겁해질수도 있습니다. 즉 살기 위하여 거짓말도 할 수 있고 자기의 주장을 접고 상대 주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자는 담대해지고 용감해질 뿐 아니라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 여러분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즉 1941년 12월 7일에 있었던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을 아시는지요, 미국은 이 폭격으로 인해 12척의 미 함대가 침몰 당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를 당했으며 2.403 명의 미군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미국이 일본군에게 이렇게 크게 당한 것은 일본군의 가미가제 때문이고 합니다.
= 즉 일본군의 가미가제는 죽기로 결심한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로 죽음을 각오하고 공중에서 미군 비행기와 충돌할 뿐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미 함대로 떨어져서 불을 지르는 특공대라고 합니다. 아무리 전력이 막강한 미군이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가미가제 특공대에게는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군대나 사람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 여러분 !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매우 용감했고 매우 담대했으며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공회원들 앞에서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낫낫이 지적 할 뿐 아니라 격한 말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책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 ! 무엇이 스데반을 이렇게 용감하게 했고 담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그렇게 용가하고 담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 베드로도 성령에 충만을 받기 전에는 죽음이 두려워서 공회원들 앞에서 거짓말이나 하며 비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체험한 후 그는 공회원들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 (행4:19)에 배드로는 말하기를 < 하나님 앞에서 너희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고 했습니다.
= 여러분 ! 죽음을 각오한 스데반은 마지막으로 공회원들을 향하여 무서운 책망을 합니다. 스데반의 책망은 대체적으로 3 가지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스데반은 공회원들에게 책망하기를 .....
1,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는 자
= 본문(48-4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며 나의 안식처가 어디뇨 >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스데반은 지금 공회원들의 잘못된 성전개념을 책망하려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밖은 죄 목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성전 모독죄입니다. (요2:19)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대답하기를 <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 라고 했습니다.
= 여러분 ! 예수님께서 네가 이 성전을 헐라, 라는 성전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참된 성전임을 말씀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십자가에 죽게 해 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리라, 는 말씀입니다.
= 여러분 ! 유대인들의 율법적 성전 개념은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만 계신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전 안에서는 거룩한 예복을 입고 거룩한 모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성전 박으로 나오면 거룩과 율법에서 해방이 되어 자유로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 왜 그런지 아십니까 ?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다, 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 스데반의 책망이 무엇입니까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성전에서만 거룩하고, 성전에서만 제사하며, 성전에서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본문(48절)에서 말하기를 <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 >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전에 갇히어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 스데반은 본문(49절)에서 말하기를 <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 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느뇨 > 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 하나님은 성전에만 가둘 수 없는 분이시며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어느 곳에도 존재해 계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 어떤 부부가 주일아침에 크게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대충 타협하기를 오늘은 주일이니까 월요일에 다시 하기로 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이 두 부부는 교회에 가서는 내색도 하지 않고 성도들과 반가운 인사도 하고, 성가대도하고, 설교들을 때 아멘도 하며 아무 은혜로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든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부인이 남편에게 먼저 말하기를 쇠뿔은 단번에 빼라고 했는데 뭐 내일까지 기다리겠느냐고 하면서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분은 안 계시는지요?
= 여러분 !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은 성전에 가두는 사람이라고 스데반이 책망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 우리 하나님은 주일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며 성전에만 계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일에도 계시고 월요일에도 계시며 자동차 안에도, 집에도 계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 공회원들을 향한 스데반의 두 번째 책망이 있습니다. 두 번째 책망은 ..
2. 의인을 핍박하는 자
= 스데반은 본문(52절)에서 다음과 같이 공회원들을 책망합니다. <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뇨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자가 되나니 > 라고 했습니다. 즉 스데반은 말하기를 너희는 의인으로 오신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달므로 살인한 자들이라는 책망인 것입니다.
=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 의하여 톱으로 몸을 잘리 우는 죽음을 당했고, 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애급 땅에서 동족의 손에 매를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스데반이 의인을 핍박했던 조상을 상기 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 여러분 ! 스데반이 공회원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의인들을 핍박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희들의 의인에 대한 무지가 곧 예언을 따라 구주로 오신 예수를 곧 핍박 했고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 사실을 책망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스데반의 설교는 매우 성경적이며 스데반의 설교는 매우 역사적 증거가 분명한 설교입니다.
= 여러분 ! (54절) 말씀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공회원들이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 왜 이들의 마음이 찔렸습니까? 너무도 그 말씀이 분명하므로 할 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코너에 몰리면 신사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므로 자신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여러분 !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에 대하여 무지할 때 진리 안에 있는 자를 핍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도 복음의 진리를 깨달지 못했을 때 교회를 핍박하고 진리 안에 있는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한 것은 개인적 미움이 아니라 진리에 대지 때문입니다.
= 둘째는 예수께서도 억울하게 핍박을 받으셨고, 스데반도 억울하게 핍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께서도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 일이 있다면 예수님을 생각하고 스데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나 스데반과 같이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여러분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조롱하는 무리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시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어서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핍박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시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음으로 축복을 받는 나라가 된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무서운 복음의 핍박을 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의 핍박이 헛되지 않은 것 같이 여러분이 받는 핍박도 절대로 헛되 않을 것입니다.
= 스데반이 말하는 네 번째 책망을 다음과 같습니다.
3,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는 자
= 본문(53절)에 보면 다음과 말씀이 나옵니다. < 너희가 천사의 전하 율법을 듣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 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여러분 ! 스데반은 마지막으로 공회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율법을 듣기만하고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책망을 합니다.
= 여러분 ! 여기서 스데반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모모양은 가졌지만 마음과 귀에 할레를 받지 못한 자들로 사실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남 보기에 율법을 지키는 자로 보이기 위하여 길거리에서 손을 들고 기도 하는 사람들이였고, 그들은 또 성전에서 긴 옷을 입고 거룩한 자처럼 외식하는 사람 이였다는 말입니다.
= 여러분 ! (약1:22)에 보면 <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고 했습니다. 또 (약2:22)에서는 <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하므로 믿음이 온전케 되느니라 > 고 했으며, (약2:17) 에서는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 고 했습니다. 여러분 ! 이 모든 말씀들이 동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말씀을 받았으면 그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여러분 ! 행함을 강조하는 순수한 한국 속담들도 있습니다. 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말로만 큰소리치는 사람 무섭지 않다, 라는 말들도 있습니다.
= 여러분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말씀에 대한 불신입니다. 기적은 언제 일어납니까?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해 볼 때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 앞에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 볼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널 때 에도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을 믿고 첫발을 내 디뎠더니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나만 장군도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했더니 문둥병이 낳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도 일어나서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봤더니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 여러분 !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기를 바라십니까 ?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한번 행해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공회원들에게 하는 스데반의 세 가지 책망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는 자, 라는 것이며 둘째는 진리에 무식하므로 의인을 핍박하는 자, 라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율법을 받고 지키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행여나 나와 여러분은 이 세 가지 망에 무관한 사람인지 자신을 살피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전의 역사와 의미
김영규 목사
성전 모독에 대하여
스데반 설교의 세 번째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성전입니다. 유대인들과 공회원들은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씌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런 죄목을 적용해서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성전을 모독한 것은 곧 신성을 모독한 죄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했을까요? 이점에 대한 스데반의 반론이 바로 본문 내용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스데반은 성전을 모독한 일이 없습니다. 성전을 모독한 예수님을 추종했다는 것이 스데반의 죄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을 모독한 일이 없습니다. 단지 헤롯 성전을 헐면 사흘에 짓겠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유대인들이 일부러 왜곡한 것뿐입니다. 성전에 대해서 진짜 죄를 지은 것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 조상들은 대대로 성전을 모독해 왔습니다.
우선 광야시절부터 돌이켜 봅시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44) 광야 시절의 성전은 성막입니다. 성막은 예루살렘 성전과 비교할 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솔로몬 성전도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받은 설계인 것은 사실입니다.(대상28:19) 그러나 성막은 본래부터 하나님이 지으라고 명령하신 성전입니다. 반면에 솔로몬 성전은 다윗이 짓겠다고 자원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전입니다. 더구나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헤롯 성전은 하나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헤롯이 정치적 목적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짓게 된 배경이 전혀 다릅니다. 둘째로, 성막은 이동식입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솔로몬 성전이 더 화려하고 견고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광야의 성막은 텐트입니다.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전의 기능이나 그 내포하고 있는 의미로 본다면 솔로몬 성전보다 몇 만 배 더 신성한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은 모든 구조물 하나하나가 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물건들입니다. 성막은 이동식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성막을 “증거의 장막”, “tabernacle of testimony!”라고 부릅니다. 무엇을 증거 합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합니다. 성막은 광야 40년간 이스라엘과 함께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정복 때에 성막은 이스라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성막을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이동식 성전, mobile temple 앞에서 그들은 성전을 모독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앞선 부분을 말씀드렸지요?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뭘 했습니까? 한 편에서 여호와를 섬기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끊임없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몰록의 장막, 레판의 별, 애굽이 송아지, 바알브올 들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60,3550명의 장정들 중에 단 두 명만 살려두시고 다 죽이셨겠습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모세를 신성시하고, 헤롯 성전을 신성시 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과거 성막 시절에 끝없이 성막을 모독하던 조상들의 후손들입니다.
다음은 다윗 시대 이후의 성전입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에 열렬한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나단을 불러서 성전을 짓겠노라고 했습니다. 나단은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을 짓지 말라는 응답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습니다.(역대상22장-29장) 금은동철 목재 석재 인부 설계도까지 다 준비했습니다. 시공은 솔로몬이 했지만 모든 준비는 다윗이 했습니다. 성전 명칭도 솔로몬 성전이라고 했습니다만 실상은 다윗 성전입니다. 어쨌든 솔로몬 성전은 약 400여 년 동안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전을 얼마나 사랑했을까요? 나름대로 제사는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엉망입니다. 성전을 보통 모독한 게 아닙니다. 몇 몇 왕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성막이나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은 건물 관리를 잘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건물은 멀쩡합니다. 그런데 성전 안팎에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사를 욕되게 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러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0,13) 성전 밖에서는 두 가지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입니다. 성전에서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밖에서는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므낫세 시대에 얼마나 우상에 빠졌는가? 산당, 바알, 아세라 목상, 성전 마당의 일월성신의 제단,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고, 태양수레,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 등을 섬겼습니다. 성전을 국가의 중앙에 두고 전국적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해도 보통 모독한 게 아닙니다. 둘째는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선지자들은 왕국 시대의 타락상에 대해서 누누이 경고합니다.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습3:4)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사1:23)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3:11) 하나님 백성이 겉으로 거룩한 체 하면서 윤리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성전을 모독할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라도 망하고, 민족도 망하고, 성전도 망하게 하셨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BC586년에 바빌론에게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에 세워진 스룹바벨 성전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황폐화되었습니다. 세 번째 세워진 성전, 곧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에 있었던 헤롯성전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붙었다고 하나님의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도 않는 건물이 무슨 성전입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빙자하고, 율법을 빙자하고, 모세를 빙자하고, 성전을 빙자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제 스데반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 스데반이 성전 모독자가 아니라, 그들이 성전 모독에 신성 모독자들입니다.
성전 건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
스데반은 성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일깨워 줍니다. 성전이란 뭐냐? 성전은 하나님을 가두는 곳이 아닙니다. 이방 신들은 신전에만 거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48-50) 스데반은 손으로 지은 집을 강조합니다. 이방 신전들은 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실 분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온 천하가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늘도, 땅도, 만물도 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입니다. 온 우주가 다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 속에 갇힐 수 있겠습니까? 다구나 사람 손으로 만든 초라한 건물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 우리는 성전에 대해서 두 가지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첫째로,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는 처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허락하신 처소입니다. 이점을 바로 알아야 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 놓고 하나님 앞에서 긴 기도를 했습니다. 그 내용이 열왕기상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기가 지은 성전에 오셔서 거주해달라는 부탁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부탁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대하6:18-20) 하나님이 어떻게 제가 만든 성전에 계시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이 성전에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소서! “하늘에서 들으시고”라는 말을 여덟 번이나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다만 성전을 바라보시고 거기서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솔로몬 성전의 용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사56:7)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막11:17) 광야 시절 성막은 백성들이 죄를 씻어주시는 속죄의 장소였습니다. 동시에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면회소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의 처소입니다. 결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는 神殿이 아닙니다.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8:2)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9:7)
둘째로,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의 집을 지어주시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46절), 하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은 한 편으로 죄송스러웠습니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집은 낡은 텐트에 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역시 인간이 지은 집에 사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내 집을 짓겠느냐? 내가 네 집을 지어주겠다!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0-12,16) 다윗이 짓겠다고 한 것은 돌로 만든 건물입니다. 나름대로는 꽤 화려한 건물입니다. 다윗은 이 건물을 가리켜 “처소”( skhvnwma)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본문 46절) 이 단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에 “habitation”(거주지, 거주 공간), 혹은 “bivouac”(야영지)란 단어로 번역합니다. 다윗이 황금으로 도배를 한다 해도 그 건물은 하나님께 일개 비박의 장소도 안 된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지어주실 집은 영원한 집입니다. 영원한 왕국, 영원한 가문, 영원한 통치권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짓겠다고 한 성전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지어주시는 왕국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지어주실 집에 대해서는 영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집은 바로 다윗 왕국을 말합니다. 다윗 왕국은 영적으로 그리스도 왕국, 곧 참 교회를 의미합니다. 다윗이 가나안 땅에 세웠던 이스라엘 왕국은 400년 만에 망했습니다. 그 왕위도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왕위나 왕국이 어떻게 영원히 지속됩니까?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다윗의 족보는 예수님까지 이어집니다. 다윗 왕국은 영적인 그리스도 왕국을 예언한 겁니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을 행진하실 때에 사람들이 이런 찬양을 불렀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12:13) 예수님이 헤롯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하신 것은 한편으로 맞는 말입니다. 헤롯 성전은 단번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짓겠다고 한 것은 비유입니다. 예수님을 고소하던 자들이 이런 고소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14:58) 성경은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오늘 우리가 진정 신성시해야 될 성전은 주님이 지어주신 교회, 즉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또한 주님이 구원하신 성도 자신들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가 아끼고 영원히 신성시해야 될 성전은 주님의 몸이요, 교회요, 성도 자신입니다.
누가 성전 모독자인가?
그러면 다시 유대인과 스데반의 논쟁으로 가 봅시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선지자를 박해해 왔습니다. 광야 성막 시대에는 모세를 거역하고 성막 밖에서 우상 숭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대 사람들을 거의 전멸시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시대에는 끝없이 우상 숭배를 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독했습니다. 왕국 시대에는 바른 말을 하는 선지자를 지속적으로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므낫세 왕에 의해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왕궁에 갇히고, 우물과 굴속에 던져지고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과거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이런 변명을 하고 가르쳤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마23:29-30)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의 변명을 이렇게 반박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1-33)
이제 스데반은 자신을 재판하는 공회원들을 마지막으로 공격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7:44-53) 너희는 목이 곧고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교만하다. 바른 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너희는 항상 성령을 거스리고 있다. 너희도 조상의 악행을 미련하게 반복하고 있다! 너희는 조상들보다 더 나쁘다. 왜냐하면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였지만, 너희는 참 메시야를 죽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성전을 위한다면서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도들과 스데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성전이 없어서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망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도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주님의 집을 지어드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을 바꾸세요. 오히려 주님이 내 집을 지어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몸 된 교회 공동체를 세우셨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 육체를 영광된 부활의 몸으로 지어주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 가문을 지어주십니다.
지금도 꽤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절반이 크고 작은 갈등과 분쟁에 휘말려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지킴이”라는 사람들 때문에 마귀의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누가 지킵니까? 다윗처럼 감히 자기가 주님의 집을 세우겠다는 생각입니까? 교회는 주님이 세우셨고, 주님만이 지키십니다. 교회가 부패하면 콘스탄티노플이나 소아시아 교회들처 1000년 교회라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니 감히 내가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요즘 교회 안에도 노동조합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은혜는 떠나고 법으로 해결하자는 겁니다. 헤롯 성전처럼 사람이 지은 집에, 성도 아닌 인간들이 좌우합니다. 이런 시대에 정신 차리세요. 겸손히 섬기세요. 주님 성전을 위한다는 생각 말고, 주님이 성전을 세워주시기를 믿고 기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