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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00610 / 행 7:54-60 / 스데반의 순교

작성자천성교회|작성시간20.06.11|조회수1,399 목록 댓글 0

스데반의 순교

7:54-60

첨부파일 20200610.hwp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7:54-60 / [스데반의 순교] 유대인 지도자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부드득 갈았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시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다. 56) 그가 소리쳐 말하였다. `보시오! 하늘이 열리고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십니다!' 57) 그러자 사람들은 손으로 귀를 틀어 막으면서 스데반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58) 그러고는 돌로 쳐죽이려고 그를 성밖으로 끌어냈다. 공증인들, 곧 사형 집행인들이 겉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놓았다. 59) 그러나 돌들이 우박처럼 날아오는 속에서 스데반은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말을 남긴 뒤 그는 눈을 감았다.

 

스데반이 논리정연하게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을 꿰뚫어 설교하면서 그들의 죄악을 지적했을 때 그들은 시기와 분노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54) 당시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모였던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때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2:37)하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 마음에 찔림을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습니다. 같은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대적하기도 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5-56)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유대인들(51)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모습이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그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서 외쳤습니다. 같은 장소에 있었음에 불구하고 스데반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지만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막혀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57-60)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은 스데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스데반은 다시 무릎을 꿇고 더욱 크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잔다는 단어는 평화로운 죽음의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적용: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강병화 교수는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생 들풀을 채집했습니다. 그 결과 4,500여 종의 씨앗을 모을 수 있었고 혼자의 노력으로 종자은행을 세우는 큰일을 해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언론에서 취재를 왔는데, 강병화 교수는 말했습니다.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 세상에 잡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그게 바로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그 역시 잡초가 됩니다. 산삼이라 해도 엉뚱한데 나면 잡초가 됩니다. 잡초란 단지 뿌리를 내린 곳이 다를 뿐입니다. 들에서 자라는 모든 풀은 다 이름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 설 교 >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

문기태 목사

장마가 지고 난 후 강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물살을 따라 떠내려 옵니다. 뿌리가 뽑힌 나무도 떠내려 오고, 수박도 떠내려 오고, 수해를 만나 물에 잠긴 가재도구도 떠내려 오고 심지어 돼지새끼도 떠내려 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물이 불어나고 물살이 세게 흘러도 떠내려 오기는 커녕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물고기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조류에 따라 흘러가지만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헤치고 맘대로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세대의 풍조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행따라, 세상의 풍조에 밀려, 세상의 가치관 따라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세상 사람들이 춤 바람이 나면 같이 춤추러 다니고, 세상 사람들이 땅 투기해서 돈 벌면 같이 돈 될 땅 찾아 전국을 누비고, 세상 사람들이 컨닝하며 시험을 보면 같이 컨닝하고, 세상 사람들이 가정을 외면하고 바람피우면 같이 한눈을 피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으면 안됩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풍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갖 악한 영향을 끼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뒤집어 놓을 큰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옥과 같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며 사는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사도 바울을 제사장 아나니아가 벨릭스총독앞에서 고소하며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괴수입니다.(24:5)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이 사는 도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염병과 같이 강하게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세상을 소요케하고 있습니까? 단 몇 사람만 있었어도 그로인해 온 도시가 시끄러웠는데 오늘 우리는 천 만이 넘는 그리스도인을 자랑하는데 무슨 영향을 나라와 민족에 우리가 살고 잇는 도시에 끼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향력이 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대, 이세상의 사람들 꽁무니만 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따라가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이런 기도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주님 저에게 이 세상 이 세대의 물결을 따라 흐르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며 사는 사람 열 명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들과 함께 주님께 만 명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단 열 명만이라도 이세대의 조류를 거슬러 사는 사람만 있으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렇게 살 사람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세상 사람이 다 돈을 하나님처럼 섬겨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주님만 섬기며 사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쾌락만을 쫓으며 죄의 길을 따라 걸어도 단호하게 거기서 나와 유행을 거부하며 사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어도 모두 비난해도 혼자만이라도 의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가난해도 좋다. 고생해도 좋다.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되어도 좋다. 나는 오직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겠다.' 하는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예루살렘교회의 스데반은 아주 짧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집사 안수를 받고서 일년도 사역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사도들도 하지 못한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완악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큰 해를 입힌 사울이라는 청년을 회심시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게 쓰임받게 한 인물이 바로 스데반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죽고 난 후에도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스데반은 어떻게 그런 강력한 능력을 보일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항상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니까 강력한 영향력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습니다. 성령충만하니까 죽어가면서까지 그의 원수까지도 변화시켰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충만하니까 누가 뭐라고해도 요동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가 성령충만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1. 성령 충만하면 영안이 활짝 열립니다. (55)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잇는데 스데반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앗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영안이 열리고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중에 마게도냐 사람들이 손짓하며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3층 천국까지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앞에서 앉은뱅이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육안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갑니다. 영안이 닫혀 있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일어서셨는지 앉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삶을 살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지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육안에만 의지하여 살지 않고 또 다른 눈 즉 영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며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다보면 하늘 문이 열리는 것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2. 성령충만하면 용서가 쉽게 됩니다. (60)

사단에게 사로잡혀 잇는 사람은 미움과 원망으로 충만합니다. 살기가 등등합니다. 본문에서 사울과 따르는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너 나 가릴것 없이 돌을 들어 쳤습니다. 죽이기로 결심하고 사람을 돌로 쳐서 목숨을 끊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어 가면서까지 원망하지 않습니다. 복수심으로 불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죄값을 찾지 않으시도록 죽어가면서까지 돌을 던진 사람들을 예수님께 부탁하고 잇습니다.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죽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감정의 상처를 많습니다. 그리고 보복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가 조금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싸우려고 덤벼듭니다. 용서할줄을 모릅니다. 사소한 실수까지도 보복하려고 합니다. 미움과 원망, 증오등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끌려 다닙니다. 사실은 그 감정 배후에서 사단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실상은 심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가장 심각한 것이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줄 아십니까? 성령충만하지 못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서로 감정을 품습니다. 오해하고 미워하며 저주하고 눈을 흘깁니다. 그러나 스데반처럼 성령충만해지면 다 이해가 됩니다. 용서가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이 풍성하게 주시니까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도 '쯔쯔 은혜를 모르니 저렇지 저러다 멸망당하면 얼마나 비참할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3. 성령충만하면 늘 기도가 나옵니다. (59)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를 합니다. 조용한 공간도 아닙니다. 기도할 분위기도 아닙니다. 몸은 돌에 맞아 으스러지고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마귀처럼 일그러진 사람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스데반은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무엇을 간구합니까?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대제사장도 사울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주님게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주를 위한 열심이었다면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자기의 편협한 선입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없애려고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기도했다면 하나님게서 깨우쳐 주셨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게서 얼마나 안타갑게 여기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임을 잘 압니다.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도 들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주어지고 문제가 해결됨을 알면서도 기도를 잘 못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하고 잇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먼저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쉽습니다. 기도하니까 천사처럼 변합니다. 기도하니까 용서도 절로 됩니다. 기도하니까 영안이 열려서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며 삽니다. 기도하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살게 됩니다.

 

모노 뉴클레오시스란 병이 있습니다. 피에 단핵을 가지고 있는 세포들이 많아지는 전염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입맞춤을 하면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모든 병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린 사람과 있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인해 감기에 걸린 사람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립니다.

올바른 소수가 잘못된 다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며 바른 사상이 잘못된 사상을 바꾸기가 힘듭니다. 좋은 말 열 마디보다 나쁜 말 한 마디가 더 힘이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한 사람보다 몇십배,몇백배 더 건강해야 하고 영적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어두운 세상에 빛의 영향을 줄 수 있기 바랍니다. 부패한 세상에 소금의 영향을 끼치기 바랍니다. 문제 많은 세상에 불행한 세상에 행복을 확산시키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능력이 아닌 성령 충만하여 위로부터 부어진 강력한 능력을 큰 영향을 끼치며 살기 바랍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죽음을 이긴 사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죽음을 이긴 사람여러분? 지금 잠깐 본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의 압권은 누가 뭐래도 8인조 오케스트라가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음악을 끝까지 연주하는 장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 중 악단의 단장인 웰레스 하틀리는 실재 인물이고, 그는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배에 승선했다고 합니다. 찬송가 364내주를 가까이 하게함은여러분? 이 찬송을 천천히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배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승선한 한 사람이 있었으며 배가 침몰하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 분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죽음 앞에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위로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 타이타닉이 세계에서 가장 큰 배이며 가장 안전한 배라고 소개하는 모습은 자연의 위엄 앞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무용지물임을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우리의 삶 또한 지금 제아무리 잘나가고 풍요롭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죽음의 문제를 결단코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주신 분이십니다.

사도행전은 이 예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 약속대로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임하시는 이야기가 처음 나옵니다.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 그리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가 확산되려 할 때에 커다란 장벽이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주저했으며, 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쉽게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결코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의 발걸음이 내딛어 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뜻밖의 한 사람을 소중한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은 이방인들이 공용어로 사용하던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아예 예루살렘 교회에 머무르면서 신앙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열심이 두드러져 7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는 집사로써,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중 마침내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심문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을 뛰어넘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 세계로 힘 있게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둑이 무너진 뒤 물이 밭으로 논으로 집으로 시내 한 복판으로 가리지 않고 밀려들어 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밀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스데반 집사는 복음 전파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복음 전파사역의 귀한 길목에서 너무나도 소중한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예수 믿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를 위해 봉사한 기간 또한 정말로 짧습니다. 그러나 그는 짧으면서도 굵게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짧고 굵게, 여러분? 그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주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 집사의 충성된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쓰실 때 그가 어떤 자세로 쓰임 받았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도구로 온전히 쓰임 받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교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특별히 세 구절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다같이 5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여러분?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스데반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데반은 교회 밖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사람들이 변론하자고 덤벼들었습니다. 변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저들은 거짓 증인을 내 세워 스데반을 종교 재판 대에까지 서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54절을 보면 스데반의 변론을 들은 사람들이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더 이상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바로 그 때 그가 보인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여러분? 고사성어 가운데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온다는 말로써, 사방이 빈틈없이 적에게 포위된 고립무원의 상태,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지금 스데반이 바로 이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자기를 돕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맞아 주십니다.

그러자 두려움에 흔들리던 믿음이 이내 굳건해 집니다. 절망의 파도가 요동치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듭니다. 다시금 주님이 주시는 새 힘이 솟구칩니다. 때론 우리도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 빠져들 때가 분명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보이는 건 온통 적들뿐입니다. 초나라 왕 항우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두려워 도망치다 자결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아직 쳐다볼 곳이 한 곳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방이 꽉 막혀 있다할지라도 하늘은 뚫려 있습니다. 고개를 들고 저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벌써 일을 시작하고 계신 우리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땅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를 도울 손길은 없습니다.

오직 한 곳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입니다.

스데반이 이 위기 상황 속에서 바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그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나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 바로 그들만이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전후좌우 사방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리는 이 사방을 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은 우리에게 하늘을 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시력을 밝혀 주셔서 저 하늘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방은 다 막혀 있을지라도 하늘은 온전히 열려 있습니다. 무시로 주의 전에 나아와 예배를 통해 성령 충만한 자 되셔서, 늘 언제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맛보며,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날 지켜 보호 인도해 주셨노라, 기쁨으로 간증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부르짖어 가로되

59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미 처형이 시작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종교재판에서 제대로 판결 절차도 다 끝나기 전에 성난 사람들에게 성 밖으로 끌려가 내던져 졌습니다. 그리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로부터 돌팔매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공포가 밀려드는 시간입니다. 견디기 힘든 육체적인 고통이 온몸에 넘쳐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데반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기도의 줄을 결단코 놓지 않습니다.

아니 더 굳게 기도의 줄을 잡았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대화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간절한 기도로 그 위기의 순간을 끝내 이겨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사명을 다 완수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결단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기 스데반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십자가상에서의 우리 주님의 기도와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아시고 영혼을 부탁드린 기도를 드린 것처럼, 스데반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금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이 상황에서 끝까지 자기 목숨을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건져주신 것처럼, 지금 자기를 이 위기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내 뜻과 내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결단코 아니 됩니다.

여러분? 언제나 병 낫기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성공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도 안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병중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패하기를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용서와 사랑과 축복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상황에서 저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던지는 돌에, 저들이 맞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저들을 용서했습니다.

저들도 모두다 예수 믿고 축복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영혼 구원과 영혼 축복에 있어야 합니다.

저주의 기도, 복수의 기도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축복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사람은 진정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맞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처럼 아니 스데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부르짖으면서, 진정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자니라.”

다같이 6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스데반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장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통 중에 운명하신 것처럼, 스데반 또한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스데반이 죽었는데 잔다고 표현했을까요? 여기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담겨져 있습니다.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뒤 첫 번째 운명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의 죽음과는 다른 죽음입니다. 그래서 다른 죽음과 같이 죽었다고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잠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것처럼, 부활의 시간을 기다리며 잠시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잠을 잔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장차 부활 후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코 죽음 때문에 무너질 수 없고, 죽음에게 질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의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8:1절을 보시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적들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차제에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박멸할 태세로 거세게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8:4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로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저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이 죽은 것을 똑똑히 지켜본 자들입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두려워서 도망쳐 숨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스데반의 순교에 진정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 또한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이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까지 퍼져가게 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8:1절을 보면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가 왜 이 이야기를 구지 여기에 써 놓았을까요? 사울이 표면적으로는 변화되지 않았지만, 바로 이 때 그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9장에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순간 마음의 동요를 주님께서 보시고 그를 전격적으로 만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의 회심에 지극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 결과 사울이 바울이 되어 이방 세계 곧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산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은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스데반은 단지 복음을 제시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이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 설교했지만 베드로처럼 수 백명, 수 천명이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단 한 명도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토록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피를 토하며 말씀을 선포했건만, 저들은 오히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데반은 저들의 돌팔매질 속에서 그렇게 죽어간 한 사람의 이단자에 불과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토록 잔인한 하나님이셨습니까? 이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신의 뜻만 내세우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다 치고, 이러함에도 왜 스데반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56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이생을 넘어서 펼쳐져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었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완전 종결시켜 주시는 곳,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곳, 기갈이 없고 목마름도 없고 오직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은 결단코 그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라는 위대한 전도자가 탄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처럼, 절대로 허무한 죽음이 아닌 놀라운 영향력을 드러낸 가치 있는 죽음이 된 것입니다.

새생명 전도축제에 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스데반처럼 죽어야 진정 다시 사는 진리를 온전히 체득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것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맞이하시기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스데반을 기뻐 맞아 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 또한 우리 주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기뻐 맞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진정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주를 가까이이 찬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던 타이타닉호의 웰레스 하틀리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들의 돌팔매질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가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았던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 안에서 영원토록 변치 않는 사랑과 참된 행복을 누리며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스데반처럼 승리하게 하소서

이윤재 목사

여러분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흑인 부부가 아브라함 링컨을 너무 존경했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해서 자기들도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아이를 임신했는 데 존경하는 링컨을 닮은 아이가 나오라고 방안에 링컨 사진을 걸어 놓고 매일 바라 보았답니다. 태중의 아이에게는 매일 링컨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링컨을 사모하고 링컨만 생각하며 열 달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아이를 낳고 보니 흑인이 아니고 백인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외토픽감입니다. 그만큼 좋아하고 존경하면 닮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두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는 좋아하고 하나는 존경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구약의 야곱입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합니다. 슬슬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그러다가 급하면 천사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야곱은 저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테반입니다. 그 논리정연한 믿음과 그 장열한 죽음이 어린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스테반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2천년 교회사를 보면 딱 하나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교자가 역사를 다스린다는 진실입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카타콤을 찾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것은 로마의 황제가 아닙니다. 순교자입니다. 그 중에 순교자 세바스티안이 있습니다(그림1). 세바스티안은 3세기, 로마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에 의해 순교당했습니다. 군인이었던 그는 예수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수없이 화살에 맞습니다. 그래도 안 죽자 황제가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하수구에 버렸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죽었으나 카타콤에 살아 2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순교의 역사는 로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도 있습니다. 19194, 당시 일본 경찰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수원 제암리 교인 21명을 교회에 가뒀습니다(사진2). 그리고 교회를 못질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습니다. 그때 교회안에서 21, 교회 밖에 2명이 죽었고 동네 집도 33채가 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급히 달려갔더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교회안에 있었던 교인 21명은 동그랗게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 밖으로 피하지 않고 모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최후 승리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다 순교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인생은 둘중의 하나로 판가름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전도를 하든 선교를 하든 자녀를 기르든 직장생활을 하든 성공이냐 실패냐 둘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날마다 승리하는 것이고 차선은 최후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저는 스테반을 통해서 승리의 세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이번 주에도 이 말씀을 여러번 읽고 그 원리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기뻣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스테반처럼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라

 

첫 번째 원리가 2절에 나타납니다. 7:2, “스테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여기에 영광의 하나님이란 말이 나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스테반은 유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을 죽이기 위해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유대교로부터 이탈하여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스테반이 언제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행6장에 보면 스테반은 당시 훌륭한 믿음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6: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7집사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예수님을 증거하자 유대인은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이 자기만 믿을 뿐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을 예수믿도록 영향준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스테반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유대인이 스테반을 핍박한 첫 단계는 논쟁이었습니다. 6:9절 마지막,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테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변론은 요즘 말로 하면 공개토론입니다. 공개적으로 누가 옳으냐 그르냐 논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개토론을 통해 스테반을 당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말로 안되자 그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중상모략입니다. 중상모략의 내용은 스테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6:11절입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결국 유대인들은 스테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결국 그것으로 스테반을 체포했습니다. 12절입니다. 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처음에는 말로 공개토론합니다. 그것으로 안되자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중상모략합니다. 그래도 안되자 그것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잡아 가두고 불법 재판을 통해 죽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이 과정을 거쳐 공회까지 왔습니다. 6:15절입니다. 6:15, “공회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테반을 주목하여 보니”. , 지금 스테반이 공회앞에 섰습니다. 공회는 72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사법기관입니다.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독일에 갔습니다. 독일 보름스에 가면 루터가 제국의회에서 심문받은 장소가 있습니다. 수많은 카톨릭 신부들앞에 루터가 섰습니다. 그때 했던 루터의 기도가 그가 섰던 자리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도와 주소서”. 그 심정이 바로 스테반의 심정일 것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유대인 대적자들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섰습니다. 유대인들이 스테반에 대하여 제기한 죄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테반이 성정을 헐자고 했다, 또 하나는 스테반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신앙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 성전신앙과 하나님이 율법을 만드셨다“. 율법신앙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어기는 것이 가장 큰 죄였습니다. 이에 대해 스테반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것이 행7장입니다.

먼저 스테반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의 역사를 개관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성전은 솔로몬 시대에 지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때부터 일하셨다”. 그 하나님이 2,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부터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인도했고 이삭, 야곱, 요셉을 세웠습니다. 때가 되자 영광의 하나님은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에 잠시 광야교회를 이루다가 가나안땅에 들어와 다윗을 통해 나라를 세우시고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영광의 하나님이 다스린 역사였습니다.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시대와 공간에 제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History is the His story,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입니다. He is everywhere, 그는 어디나 계십니다. He lives anytime, 그는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이요 우주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는 성전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말씀하시지만 성전에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셨지만 율법에 매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하나님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7:51, 성령의 하나님, 7:52,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은 곧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 믿음 때문에 여기 서 있습니다. 내가 그 믿음 때문에 죽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영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스테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되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을 믿습니까? 모든 인생은 결국 두 가지로 결판납니다. 첫째 하나님을 믿느냐? 둘째 믿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나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젊은 루터가 그랬습니다. 루터가 어느날 친구와 함께 집에 다녀오다가 들에서 벼락을 맞았습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루터는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전전긍긍,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하나님이 벼락을 내리지 않나 공포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25장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을 남기고 두 달란트받은 사람은 둘을 남겼는 데 하나 받은 사람은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다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하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25:24,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알았습니다. “굳은 사람”,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굳은 분입니까? 감정표현도 없고 항상 딱딱하고 무섭습니까? 저도 어릴 때 그렇게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아버지 이미지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 이미지는 아버지 이미지 따라갑니다. 아버지가 좋으면 대부분 하나님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나쁘면 하나님도 나쁩니다. 아버지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자녀에게 하나님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셔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아버지가 누구든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루이스 앤더슨이 말한대로 모든 노력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렇습니다. 모든 능력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모든 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하늘의 예수님을 바라보라

스테반이 보여준 승리의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55절입니다. 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절입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 지금 스테반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죽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억울하게 죽어 갑니다. 그러면 누구를 바라 보겠습니까? 자기에게 돌던진 사람들을 바라 볼 것입니다. “너희들 두고 보자. 내가 하늘 나라 가면 너희들에게 천벌을 내릴거야”. 그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스테반은 사람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스테반은 또한 자기 자신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죽어가는 자기가 안쓰럽고 불쌍하고 또한 대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자기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스테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늘도 어떤 하늘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늘의 구름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를 바라본 것도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다시 55절을 보십시오. 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이면서도 또한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바라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젊고 유능한 은행 간부인 앤디가 아내의 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하는 내용입니다.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고자 애를 쓰지만 부질없는 일임을 알고 탈출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탈출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감옥의 벽돌을 보면서 싫어했지. 그것은 우리를 미치게 했지. 그런데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에 점점 익숙해지고 어느 날부터는 그것이 편하게 느껴지는 거야. 마치 감옥이 없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 거야. 그때 깨달았지. 진짜 감옥은 내 안에 있다고. 그때 나는 결심했지. 탈출하기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감옥이 자꾸 보니까 편안해 지고 집같이 여겨지고 그것 없으면 못 살 것 같게 됩니다. 위기는 내가 감옥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보는냐가 문제입니다. 자꾸 보면 그 사람이 됩니다. 자꾸 감옥을 보면 내 마음도 감옥이 됩니다. 건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건물은 처음에 사람이 짓습니다. 그러다가 그 건물에 오래 살면 나중에는 건물이 사람을 짓습니다. 자꾸 보니까 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모양과 형태가 만들어진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 봅니까? 본대로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브라함과 롯도 그들이 본대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둘이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양과 소가 많아졌습니다. 분가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그때 롯이 눈을 들어 바라 보았는 데 소돔쪽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 당시 소돔은 아무 비옥한 곳, 물좋고 정자좋은 곳이었습니다. 마치 애굽들처럼 물이 넉넉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롯이 떠나고 나니 아브라함은 갈 데가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광야가 보였습니다. 광야에 무엇이 있습니까? 풀이 있습니까? 물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13:14,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롯은 소돔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광야를 바라보았습니다. 롯은 물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얼마후 소돔은 불과 유황으로 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받았습니다. 본대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스테반처럼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바라보면 닮습니다. 스테반이 예수님 바라볼 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59-60절입니다. 7:59-60, “그들이 돌로 스테반을 치니 스테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무릎를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테반은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기전 겟세마네동산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를 더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스테반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으나 죄는 사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죄는 예수님만 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표현했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죽음의 순간,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처럼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패트릭 존스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패트릭 존스톤) . 고난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무 이유없이 핍박당하고 무시당했습니까? 가끔 나만 당하는 슬픔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눈은 지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신 분, 그 분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자기를 버려야 세상을 살린다

스테반이 보여준 세 번째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60절입니다.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테반은 아무 죄없이 죽었습니다. 참 억울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긴 역사를 보십시오. 죽은 자가 세상을 다스립니다. 역사의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 자기를 버린 자입니다. 억지로 버리면 타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버리면 희생입니다. 계란도 자기가 스스로 깨지면 부화가 됩니다. 그러나 남이 깨뜨리면 후라이가 됩니다. 5:13-14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아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니”. 소금과 빛이 무엇입니까?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여 맛을 냅니다. 녹지 않으면 맛도 낼 수 없습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빛은 올리브 기름으로 밝힙니다. 해마다 9월이면 이스라엘 농부들이 올리브를 땁니다. 올리브를 따면 그것을 씯고 찧어 부숩니다. 아주 옛날에는 올리브를 돌위에 올려 놓고 사람이 일일이 발로 밟거나 절구를 이용하여 찧었습니다. 그 후에는 무거운 돌로 눌러서 짯습니다. 올리브 열매위에 무거운 돌을 덮고 누르면 기름이 나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라는 뜻을 눌러서 짠다는 말입니다. 빛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올리브를 찧고 부숴서 나옵니다.

영어 단어에 영향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influence"라고 합니다. 이 말은 ”flu" “흘러가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in flu 하니까 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flow in”, “안으로 유입되는 것입니다. “독감이란 단어가 그래서 나왔습니다. “influenza”. 무엇이 안으로 흘러갔느냐? 감기 균이 안으로 흘러갔습니다. 감기균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influence", 영향력은 안에 들어간 것이 다시 나온 것입니다. 누가 세상을 살립니까? 자기를 버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남에게 들어가 다시 나옵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영향력이 됩니다. 스테반의 죽음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입니다. 7:58절을 보십시오. 7:58,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당시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테반이 죽는 장면을 옆에서 다 지켜 보았습니다. 사울은 그때 유대교 신자였기 때문에 스테반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8:1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니라”.

그러나 막상 스테반이 기도하며 죽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죽어가는 스테반의 모습을 통해 엄청난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신앙은 달랐지만 , 대단하다. 무엇이 저로 하여금 저렇게 죽게 하는가?”. 그 후 사울이 하나님께 돌아와 바울이 된 후 스테반의 영향력이 그에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의 정신이 그 속에 들어가 in flu 했습니다. 평생 스테반의 정신으로 선교했고 마지막에 로마에서 스테반처럼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장면입니다(그림3). 손을 뒤로 묶이우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아마 죽어가면서도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주여 저들의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기도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복음 전파에 불을 붙였습니다. 8장에 보면 스테반의 일로 인해 핍박을 받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을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를 전도해 에티오피아를 지상에서 가장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또 그 영향으로 안디옥교회가 생깁니다. “, 한 사람이 죽어 세상을 살렸습니다”. 바울 한 사람을 살려 그리스, 로마를 살리고 전도자들을 일으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스테반 자신은 죽어 예루살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그로 인한 영향력은 민들레 홀씨처럼, 태평양의 파도처럼, 전 세계로 퍼져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 한 사람만 죽이면 기독교는 끝난다 생각했지만 스테반이 죽음으로 오히려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믿는 우리의 삶을 한마디로 오스왈드 샌더스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얻는 것으로 살고, 잃는 것으로 살린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얻는 것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무엇이나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더 구해야 합니다. “주여, 나로 인해 잃는 것도 있게 하옵소서”. 그동안 우리는 너무 얻는 것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이제 무엇을 좀 버릴까 무엇을 좀 잃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스테반처럼 꼭 순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피흘리는 순교말고 희생하는 순교는 불가능할까요?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좀 버릴까요를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이 그래야 하고 교회가 그래야 하고 한국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시간을 조금 버릴 수 없습니까? 선교를 위해 물질을 드릴 수 없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 지식, , 충성을 드릴 수 없습니까? 그래서 얻는 것으로만 살아온 우리가 조금 잃는 것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까?

누가 최후 승리자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누가 고난속에서도 끝까지 승리합니까? 하늘의 예수님 바라보는 자, 보좌에 앉으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역사를 새롭게 하는 승리자입니까? 자기를 버려 남을 살리는 자, 얻는 욕심으로 살지 않고 잃는 기쁨으로 사는 자, 몸도 물질도 희생도 시간도 사랑으로 잃고 잃고 잃어 예수님처럼 스테반처럼 사는 자, 그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승리자들 되시기 바랍니다.

 

 

 

 

순교의 신앙을 본받아

양인순 목사

지금까지 교회는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랐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진 이후 교회는 수많은 고난을 믿음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186627살의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쪽 복음을 뿌리며 순교했습니다. 양화진에 가보시면 이름 모를 수많은 선교사들이 낯설고 물설은 이곳에 와서 뼈를 묻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산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도 있습니다. 6.25 공산치하에서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피 흘림을 통한 고난의 순교의 흔적이 오늘 우리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순교는 신앙을 지키거나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피 흘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적색순교라고 부릅니다. 피를 흘리고, 생명을 던짐으로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어쩌면 신앙인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일 수 있습니다. 일제치하나 공산치하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순교의 결단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주후 2세기에는 순교자들은 모두 숭배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순교자들의 유품이 제단 위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공격의 대상이 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순교자들을 성자로 추앙하여 성자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자를 숭배하고, 성자들이 지금도 우리에게 무슨 공로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잘못된 행위입니다.

적색순교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백색순교가 있습니다. 비록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바치지는 않지만 날마다 예수 정신을 가지고, 십자기를 지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 때문에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의 자유 속에서 마음껏 신앙고백을 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순교의 신앙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적색순교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순교는 그 상황과 조건 속에서 결단하면 됩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오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백색순교는 더욱 힘들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순교는 어떤 특정한 시대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는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교회가 가진 신조 중에 가장 유명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에 순교신앙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 곧 성자들은 추모를 받아야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강건해질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이 받은 은혜가 무엇이고 어떻게 신앙을 지켜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순교자들은 마땅히 추모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우상시해서는 안됩니다. 그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지켜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간 우리가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은 가장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그는 설교한번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데반 그 이름의 의미대로 면류관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성령충만한 자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충만하여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본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매수합니다.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체포합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여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거슬렀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천사의 얼굴은 무엇을 말할까요? 성령충만, 지혜충만, 능력충만한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은 스데반을 고발한 자들을 향하여 고소 내용이 사실인가를 묻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72절부터 53절까지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내용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무소부재한 분이심을 역설합니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우상시 여기는 그들의 잘못을 질타합니다. 스데반은 성전 안과 밖에서 표리부동한 자신들의 삶을 책망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한 유대인들의 잘못을 질책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고수하기 위해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그들의 죄과도 책망합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미명아래 자신들의 종교적 관행과 전통, 이기심과 욕망, 기득권은 철저하게 고수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그들의 이중성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잘못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 찔리다디아프리오(diaprio)’인데 마음이 온통 분노로 이글거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갈다로 번역된 브뤼코(briko)’물어뜯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닌 짐승에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분기탱천하여 짐승처럼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짐승수준으로 이를 갈면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최고의 법정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자기들의 모든 치부를 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 있는 스데반은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속히 그 자리를 떠나 도망쳐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본문 55-56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7:55-56)

여기서 우리는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스데반의 모습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충만함을 지속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성도는 결코 순교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순교자의 길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용기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마음속에 결단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절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자 분노하는 유대인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영광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백색순교자로 살아가는 비결은 다름 아닌 성령충만함을 날마다 덧입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야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상황이나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삽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로움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고,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기 원하십니까? 날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날마다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고 주께로 돌이키십시오. 날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 앞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을 쳐보십시오. 성령충만하면 우리는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위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나타냅니다.

그 속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칩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자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분기탱천하여 이를 갈고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을 본다는 것은 땅에 것에 매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지금 상황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지만 그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위를 바라보는 동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늘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면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보입니다. 땅을 보면 우리는 낙심하거나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에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3: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었다가 살아난 우리들은 위에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곳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영광의 보좌에 계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생깁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뚫고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은 위기상황에서 땅을 보지 않고, 위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봤습니다. 그 결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은 오직 땅만을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기심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욕망이나 이기심에 매여 있으면 땅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속에 희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안식이 있습니다. 놀라운 평강이 있습니다. 날마다 땅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 가기시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기도와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교자의 길은 아무나 걷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하고, 위에 것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난 후 분노가 극에 달한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지릅니다. 분을 참지 못하는 격앙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듭니다. 성 밖으로 내던지고 돌로 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내는 거룩한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처형할 때는 반드시 성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돌로 그를 칩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돌로 사람을 쳐서 죽일 때는 세 단계를 거쳤다고 합니다. 먼저 증인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잡고 돌로 머리를 내리칩니다. 두 번째로 돌로 가슴을 내리찍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졌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지금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가슴이 터졌습니다. 수없이 날아오는 돌에 맞아 그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깨지고 부숴집니다. 그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바로 그 순간 스데반은 부르짖으며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7:59)

죽음의 상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쳐와도 머릿속이 하얗게 됩니다. Why Me? 하필이면 왜 접니까? 원망 불평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아보였던 사람도 고난과 시련 앞에 무참하게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데반은 그 죽음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드렸던 십자가의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사모했던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도 언젠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때 나도 이렇게 기도해야지 늘 주님의 기도를 품고 있던 자입니다.

우리는 어떤 위기상황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보면 평소에 그 사람의 모습을 압니다. 위기상황에 봉착하면 무의식적으로 그 마음속에 담겨있는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언제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올지라도 스데반처럼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고통 속에서도 무릎을 꿇습니다. 크게 주님을 부르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

이 기도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패역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언젠가 저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의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이 시간 스데반이 지녔던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증인으로 지켜보던 자가 있습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죄인들을 향한 용서를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백으로 스데반의 순교현장에서 지켜본 그의 모습이 얼마나 놀라웠던가를 고백합니다.

순교는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습니다. 비록 스데반은 죽었지만 그 죽음은 핍박자 사울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 바울로 만드는 출발점이 됐습니다. 그의 죽음은 예루살렘 공동체에 머물던 복음을 이방 안디옥으로, 로마로 흩어지게 하는 선교의 폭발점이 됐습니다. 그는 순교의 제물이었지만 그 이름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됐습니다.

경기도 '능내'라는 곳에 가면 미재 부락에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전도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 되었습니다. 신유박해 때 고난을 받고 사형장으로 가면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영원한 길로 가고 있다.”

그리고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할 때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면서 말했습니다. “땅을 보고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낫다.” 이 말에 겁을 먹은 망나니가 자신 없이 칼을 쳐서 목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어 십자 성호를 긋고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 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성령충만함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땅을 보며 살아가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배임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서 조차 주님을 생각하며 용서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 순교의 신앙이 우리 삶 속에서 이뤄질 때 미천한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주님 앞에 영원히 별과 같이 빛나는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십자가의 길> 찬양을 주님께 드립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천사의 죽음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첫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자신의 죽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그의 설교를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맨 끝에 있는 말을 주목합니다.

15절에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말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주석가들이 그것을 스데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밝고 환하게 빛났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 충만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얼굴이 어두울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말을 그저 그의 얼굴이 빛났다는 뜻으로만 보는 것은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 그의 얼굴이 빛났을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때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및 소아시아에서 온 소위 자유민들, 즉 노예였다가 풀려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스데반에게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이 논쟁에서 말로 스데반을 당해낼 수 없자 사람들을 매수해서는 그가 하나님과 율법을 모독했다고 고발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또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붙들어 공회에 세우게 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스데반의 혐의를 확인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십중팔구 그 악랄한 고발자들과 모든 공회원들 앞에서 긴장해 있거나 겁에 질려 사색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분기에 차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환한 얼굴을 하고 있을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겠습니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천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계획과 할 일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는 늘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집행하는 도구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듯 그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였음을 뜻하는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또 그가 그의 할 일과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지혜와 능력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행했을 뿐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예수가 참으로 영광 중에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그의 아들이심을 영안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행7:55-56"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자기가 서있다는 사실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하며 살아야 함을 의식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가 하는 하나님의 일로 인한 어떤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사실들이 그의 얼굴로 하여금 천사의 얼굴 같이 보이게 했던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6:5)으로 인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집사의 한 사람으로 택하여 세움을 받았지만 단지 구제하는 일과 교회의 재정을 출납하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이적기사를 행했고 특히 병든 이들을 고쳐주는 권능을 행사했습니다. 그렇게 충만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주신 은혜와 권능은 그로 하여금 또한 뛰어난 사고능력과 언변을 구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본문 9-10절에 보면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와 더불어 논쟁하던 사람들이 그를 당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공회에 붙들려 가서 그를 고발하는 자들과 온 공회원 앞에서 행한 설교는 참으로 훌륭한 설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신 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내신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바를 적시할 때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을 만큼(7:54) 그의 설교는 웅변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돌로 스데반을 칠 때에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간구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도들과 다름없는 주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얼굴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로 천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 같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로 스데반과 논쟁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으며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 스데반이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순교인 것입니다. 죽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없이 죽을 때 그것이 순교가 됩니다. 악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진리와 믿음과 의를 지키며 살 때에 순교의 위험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순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명하시는 그의 일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로 인하여 벌어질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그에게로 받아주시리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순교입니다.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스데반이었기에 그 어느 사도들에 앞서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순교는 자랑스러운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죽음, 한 천사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위로를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믿음과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 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순교적 삶의 자세를 요구하는 일은 늘 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적 삶의 자세를 항상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그 천사와 같은 얼굴을 우리도 늘 지니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두려운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돌을 맞아야 할 일이 없는데 돌을 맞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은 악한 사람을 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을 칩니다. 거짓된 세상은 거짓된 자를 정죄하지 않고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러기에 악하고 거짓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순교의 위험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처럼 스데반의 죽음도 매수와 충동질과 거짓 증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악한 세상은 매수와 충동질과 거짓 증언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순교적 상황 속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은 사실은 그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반성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바른 말로 깨우쳐주는 사람을 향해 이를 간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이 하는 말을 막으려고 일제히 큰 소리를 질렀으며, 바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향해 계속 돌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며 진리를 말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부끄럽게 여겨서도 안 되고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천사 같이 사는데도 고난을 당한다고 탄식할 것이 아닙니다. 천사 같이 살기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순교적 삶을 사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순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한 순교자를 만드는 핍박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순교자를 만드는 일은 악한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서지 못한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바로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실하게 살며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사적인 감정과 이해관계 때문에 남을 비방하고 모함하며 거짓말로 인격의 흠집을 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른 소리에 귀를 막고 바른 소리 하는 입을 막으려 하거나 그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마음에 찔리는 말을 해주면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얼른 자기 자신을 고치려 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감정을 품고 그 사람을 죽이려 한다면 그런 자보다 더 딱하고 불쌍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순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같은 믿음의 사람을 부당하게 죽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쓴 본문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서 들었겠습니까? 누가는 끝까지 바울을 동행했던 그의 동역자였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바울에게서 스데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7:58에 보면 사람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했습니다. 이 사울 자신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음을 보았으면서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리면서도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던 사람들 중에 사울도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돌에 맞으면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던 스데반에게 계속 돌을 던지도록 사람들의 겉옷을 받아 지켜준 사울이었습니다. 나중에 다메섹을 향해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바울 자신이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22:20)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은 자신이 흘리게 한 스데반의 순교의 피를 자신의 생명으로 갚을 또 하나의 순교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아 순교적 삶을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를 해야 할 때에는 순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그러나 먼저 그 누구도 순교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이들로 가득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천사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나 고통을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

이중표 목사

우리 주님께서 한신교회를 197765일 창립케 하셨습니다. 한국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속에서 한신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한신교회의 창립과 함께 항상 기억되는 서정주씨의 시가 있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밤새도록 울었나 보다"

청계산에 들어가 6개월을 울고서 한신교회 창립 비전을 이 종에게 주셨습니다. 한신교회 비전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우러러 보는 그리스도인을 스데반이라고 합니다. 스데반은 이름 자체가 위대하고 이름대로 산 사람입니다.

예수교 사제이며 심리학자인 헨리 나우엔은 "목회 사역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스데반 교회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이 가장 복된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살다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을 닮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증인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땅끝까지 예수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순교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죽는 것입니다. 영광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감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최고로 인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실로 스데반은 짧게 살았으나 굵고 크게 산 자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까지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죽었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있었다"(22:20)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사도 바울은 땅끝까지 증인으로 이어가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증인입니다. 스데반이 없었으면 사도 바울이 없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령과 은혜가 충만했는지 그에게 능력과 기사와 표적이 따랐습니다. 그가 얼마나 지혜가 충만하였는지 입을 열면 그의 설교에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사랑이 넘치는 집사였습니다. 스데반은 구제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랑의 손을 폈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비의 손을 펴서 언제나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 스데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죽었다'는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 것은 스데반이 죽을 때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신앙이 바울 사역으로 꽃이 피었습니다. 스데반에 있었던 가능성이 바울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대교회 큰 타격이었으나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중대한 섭리였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7:51-53)

이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은 이때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 그때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7:55-58) 라고 하였습니다. "저희가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같은 사건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공통으로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은 예수님께 배웠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무리가 있을 때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심으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6:41).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11:41).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다락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이나 인격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그 모습을 닮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자세는 닮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배워야 합니다.

 

스데반의 믿음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그 믿음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본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을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행전 7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능력을 간구합니다. 또 우리는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자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좋으신 하나님으로 임재하셔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다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 중심적인 소원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고 영광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자나깨나 영광의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리들이 이를 갈며 달려들 때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저 원수의 무리에게서 나를 보호하소서." 하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주여, 나는 죽어도 좋사오니 영광을 받으소서." 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나깨나 영광의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자는 가난해도 영광이 나타납니다. 실패해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환난중에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 영광은 성공이나 부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고 그를 찬양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목적이 고상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간의 실패 가운데 최고의 실패는 사는 목적의 실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사랑했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6)

스데반은 '인자'를 보았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영광스러운 인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보는 그 믿음 위에 섰던 것입니다.

인자 예수는 죽으러 오신 예수였습니다. 죽으러 온 예수는 희생하며 산 예수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인자 예수를 믿엇고 그 예수를 바라보았기에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은 인자 예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으로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 스데반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닮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며 용서하고 죽습니다.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원수들이 이를 갈고 달려들 때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원수들은 이를 갈며 달려들었으나 성령이 충만하고 스데반은 입을 열고 저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는 사랑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사랑은 원수 사랑입니다. 구제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랑은 비교적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해하고 죽이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사랑입니다.

소설가 정연희 씨는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명의순 씨의 숭고한 삶의 일생이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의순씨는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관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방 후에 월남한 그는 한신대학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을 만나 북한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했고, 모진 고생 끝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던 중 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북한군 첩자로 오해를 받게 되고 결국 포로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2년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중환자들을 돌보면서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주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밤새워가며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거룩한 나날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만명의 포로 수용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주변 사람들이 미군당국에 진정한 결과 석방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같은 포로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성 프랜시스의 사상적 영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 프랜시스의 기도를 인용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가 없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남아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나이다."

이러한 프랜시스의 기도를 그는 실천하려 했던 것입니다.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담담하게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 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네. 내가 이 곳에 남아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닐세. 이 곳에 있는 형제들 중에는 나 같은 것이나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밥 한 톨을 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려야 했던 그 살벌한 포로 수용소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오래 하고 또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 온갖 병자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그의 몸은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중공군 포로들은 이렇게 통곡하면서 추도문을 썼습니다.

"1952811일 새벽 3, 우리는 맹선생의 죽음을 통곡합니다. 애통합니다. 선생님께서 환자를 다 씻긴 다음에는 언제나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시던 음성이 귀에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외치시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 잃은 어린 양처럼, 어머니를 잃은 고아처럼 슬픈 포로민으로 이제 누구를 바라보며 살 것인지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곡합니다. 맹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우리는 맹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이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는 저희 한신대학교 선배로 위대한 생을 살다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간간히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모아져서 그의 생애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 '사랑의 잔이 넘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잔을 포로 환자들에게 사랑의 잔으로 부었던 것입니다.

 

천국 소망으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소망은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영혼은 주님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영혼이 가야 할 곳을 알았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드린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산 것입니다.

경기도 '능내'라는 곳에 가면 미재 부락에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전도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 되었습니다. 신유박해 때 고난을 받고 사형장으로 가면서 "나는 영원한 길로 가고 있다"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할 때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면서 "땅을 보고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겁을 먹고 망나니가 자신없이 칼을 쳐서 몸이 끊어지지 않아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어 십자 성호를 긋고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살아서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스데반의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요, 예수 안에서 산 자입니다.

증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이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며,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서도 웃고 소망 중에 기뻐하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사랑하는 맘 변치 못해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순교자는 산자의 신앙을 가졌기에 산자의 행복을 최후로 증거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평소에 가진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이름의 사람

스데반은 참으로 위대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스데반이라고 하는 말은 그 이름 자체가 '스테파노스'( )라고 하는 헬라어로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면류관은 왕이 쓰는 것으로 영광의 상징이며 충성된 자나 사랑하는 자가 받는 영광의 상징입니다. 면류관은 '자랑스럽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면류관이요, 자랑스러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스데반은 어디에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스데반이요, 면류관입니다. 사회나 직장이나 교회 어느 곳이든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그 모임의 자랑이며 면류관입니다.

오늘 이 교회에서 스데반은 누구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언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사는 별세의 성도입니다. 그 사람이 스데반이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성도입니다.

스데반은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되어야 됩니다. 스데반 목사, 스데반 장로, 스데반 권사와 집사, 스데반 성가대, 스데반 구역장, 스데반 성도가 되십시오. 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 스데반아! 어서 오라"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감고 스데반과 같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믿음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사랑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소망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은 살아도 스데반이요, 죽어도 스데반입니다. 예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 때문에 죽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으면서 스데반과 같이 불멸의 웃음을 지어야 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죽이는 자를 용서하며, 그리고 괴롭히는 자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마지막 죽으면서도 그 얼굴에 환희를 가지고 죽어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죽으면서 천사처럼 빛이 났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별세의 증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게 증거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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