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에서의 사울의 사역
행 9:19b-25
19b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행 9:19-25 / … [사울의 다메섹 전도]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신도들과 며칠을 함께 지낸 뒤에 20) 회당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예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전파하자 21)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귀를 의심하였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닌가? 우리가 알기로는 그가 여기 온 것도 신도들을 붙잡아 고랑을 채워서 대제사장들에게 끌고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더 열심으로 전도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23) [사울의 피신] 얼마 후에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24) 밤낮으로 사방의 성문을 지키며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울은 곧 그들의 계획을 알아챘다. 25) 그래서 어느 날 밤에 그의 제자들이 사울을 광주리에 넣어 성밖으로 달아 내렸다.
사울은 완전히 회심하며 주구보다 강력하게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일은 고난도 따라오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19b-20)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방문하기로 되어있는 장소가 회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복음을 전파하는 장소로 뒤 바뀌었습니다. 이는 그가 회심했음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선포입니다. 구약을 들어 예수가 그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했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됨을 선포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21-22) 아마도 일부는 감복해서 사울의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과 죽음을 이긴 부활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 사람들은 당혹해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부정적인 반응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 힘 있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무리의 부정적인 반응에 위축되지 않고 생명을 걸고 더욱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려던 열심과 열정, 담대함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열심과 열정으로,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건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23-25) 여러 날이 지나도 사울의 설교를 막을 길이 없자 유대인들이 모여서 사울을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 그들은 밤낮으로 성문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메섹에서의 사울의 설교에 감동되어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이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은밀히 성벽 꼭대기에서 성 밖으로 달아내려 탈출시켰습니다. 이는 사울이 첫 사역지에서 광주리에 담겨져 탈출 한 것은 그 당시의 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회심으로 인해 겪게 되는 사울의 첫 수난이라는 점에서 16절에서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예언한 그의 고난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적용: 당신은 정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살아계신 분’으로 믿습니까? 지금 당신은 매순간 그분을 의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있습니까? 아직도 두려움, 근심걱정, 우울함, 미음, 증오 등과 같은 부정적 생각이 우리 내면을 지배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가정이야말로 축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타락과 불의의 온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사가 남긴 교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도덕 불감증과 가정의 파괴였습니다. 로마 가정들의 붕괴와 함께 역사가 무너져가는 그 마지막 황혼을 지켜보면서 한 철학자는 “애국자여 가정을 지키시오.”라고 호소했으며 “신이여, 기도하는 가정을 로마에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시오.”라는 기도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 설 교 >
그릇된 자아 깨기
행 9:19-22 / 이정익 목사
성경 인물 중에 가장 극적인 인물은 사도바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부르신 이유는 이방 전도 때문입니다. 12제자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식이 너무 강했고 이방전도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 늙은 선지자 시므온이 결례받기 위해 성전에 온 예수를 품에 안고 예언하기를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눅 2:32)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루살렘과 유대인만을 속량하시는 것이 아니고 전 세상 사람을 모두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속량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유대인만의 의식이 강하고 이방세계에 대한 의식이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과 의식이 열린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시민권자 였습니다. 그리고 헬라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의 세계화를 이루는데 적임자였습니다. 마침내 바울이 부름 받아 사도가 되어 오늘 모든 신앙인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이 확실했고 오직 예수만 부르짖는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목회자들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소명이 분명하였고 열정이 있었습니다.
부름받기 전 병든 자아에 매임
그러나 그는 부름받기 전에는 자기 자아에 너무 강하게 취해 독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유대교와 율법에 심취해 열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 종교, 자기주장과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와 율법을 강요했습니다. 이것을 독선이라고 하고 도그마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권세를 잡으면 독재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종교인일 경우 대부분 교주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사람이 시어머니 일 경우 시집살이를 엄청 시킬 확실한 시어머니가 됩니다. 사람이 이런 태도로 살면 도전을 받습니다. 독재자는 국민들로부터, 교주는 이탈한 교인들로부터, 시어머니는 장차 며느리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어느 인질범이 시어머니를 납치하고 “시어머니를 납치했으니 돈을 내라”고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나는 모르니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납치범이 “그러면 시어머니를 돌려보내겠다”고 하니까 며느리가 “그러면 빨리 계좌번호를 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강하면 이런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울은 너무 자기주장이 강했고 독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을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자아가 병들거나 건강치 못하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 뜻을 강요합니다. 이단은 자기 교리를 강요합니다. 독재자는 개혁한다고 내 뜻을 따르라고 강요합니다.
이런 그릇된 자아에는 불필요한 힘도 있고 열정도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어느 날 다메섹으로 달려갑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은 230km 나 되는 거리입니다. 그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믿는 유대교와 율법을 무시하고 예수와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한다고 잡아오려고 달려갔습니다. 얼마나 독기가 서려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아가 건강치 못한 사람은 불필요한 일에 힘을 쏟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속에서 무서운 힘이 솟아나옵니다. 병든 자아 때문입니다. 술 취한 사람도 속에서 술의 힘이 솟아나옵니다. 고집 자들을 보면 돌아다니며 편을 만드는데 열정적입니다. 모두 병든 자아가 주는 힘 때문입니다. 바울이 부름받기 전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웃에 피해를 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해를 주었겠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살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피곤합니다. 자아가 이렇게 건강치 못하면 가는 곳 마다 불화를 일으키고 갈등과 불편을 야기합니다. 자아가 병들어서 건강치 못해서 그렇습니다.
부름 받음
바울이 그렇게 미친 듯이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환상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 환상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며 무시하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만나서 알고 보니까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토록 무시하던 기독교의 진리가, 십자가가, 부활이, 예수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믿던 율법과 비교를 해 보니까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행동들이 모두 폭군이었고 깡패였고 폭력배였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 길로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칩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황당함 때문에 부끄러웠을 것이고 지난날 있을 수 없는 행동 때문에 망연자실 했을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의 강했던 병든 자아를 완전히 부수어 버립니다. 무지한 자신을 송두리째 깨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3년간의 칩거를 끝내고 사막에서 나오면서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 괴수로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 그는 삶을 완전 전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전도자로 나섰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자신이 그렇게 부정하던 십자가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고 그토록 증오하던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극적인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전도도 그냥 전도가 아니고 온 몸을 바치고 목숨을 내 놓은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문에서 기록자 누가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들이 다 놀라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에 온 것도 우리를 결박하여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20)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태도를 이렇게 바꾸었으니 자신도 놀랐을 것입니다.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자아를 깨고 변화를 받는 삶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들이 진정한 사랑을 발휘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이 강한 자아가 깨질 때 가능합니다. 악화된 관계회복도 우리 마음으로는 회복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조건이 있다면 내 강한 자아가 깨질 때 가능합니다. 바울은 그날 다메섹에서 아주 강하던 자아를 완전히 깨고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딴 인생을 살게 되었고 딴 목적을 위해 살게 되었고 완전히 자신을 초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던 길을 바꾸고 삶의 여정을 아주 분명하게 하고 확실한 길을 찾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서 자기부정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이 자아를 깨트려야 합니다.
자아를 깨트리는 삶
이 자아가 깨지지 않으면 바울처럼 자기기만 속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독선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기 등등하여 ...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부부들이 싸우는 원인을 보면 서로가 상대방을 뜯어 고치겠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부부생활은 원만해질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뜯어 고치겠다는 말입니까. 그 생각 자체가 아직 자아가 깨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상대를 내 기준에 맞도록 내가 개혁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오고 다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못 마땅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 눈으로 자녀들을 보면 매사가 눈에 거슬리는 것만 보일 것입니다. 아직 기준에 미성숙하고 서툰 것이 많은 아이들이 오죽하겠습니까. 아이들의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지 않으면 뱀이 될 수 없습니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은 날이 채워져야 가능합니다. 급하다고 깨면 망쳐버립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다름이 곧 은사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사람 모두가 똑같아지면 어떤 모습이 되겠습니까. 옷 가게에 가보면 아주 유치한 색깔의 옷들을 걸어 놓고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저 옷은 누가 사 입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데 그런 색깔을 좋아서 사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조화가 이루는 것입니다. 부부도 정돈을 잘 하는 남편이 있고 못하는 부인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함께 살면 매일 다투게 됩니다. 내가 저 못된 습관을 반드시 고쳐주겠다고 부르짖으면 조화가 깨집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안 고쳐집니다. 그때 두 가지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하나는 빨리 포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평안해집니다. 또 하나는 정돈을 잘 하는 내 은사를 발휘함으로서 상대방을 돕는 방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아내도 정돈에 익숙해지는 사람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일이고 세상을 원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은사일 수 있습니다. 그 다름 들이 모여 모여 이 세상의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도 집안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있는 곳이면 불화와 갈등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직 자아를 깨트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자아를 깨트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려면 이 서툰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깨트리지 않으면 내 주인인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가 주인인 것처럼 행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멋대로 생활하고 죄에 물들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는 것이고 안 믿으려고 하는 것(롬1:28)입니다. 그래서 내 자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 안에서 다시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게 됩니다(골 3:9-10). 내 자아가 깨진다는 것은 내 능력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고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서툴고 쓸데없이 고집스러운 왜곡된 내 자아를 교정시키는 것입니다. 옛 자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리하고 무시하려는 자아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을 보면 막말을 하며 하나님을 부정하고 욕하고 비난합니다. 그것은 그의 자아가 병들고 깨지지 않고 미성숙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자아를 깨야 합니다. 그러면 내안에 의롭고 건강한 자아가 회복되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자아를 덧입게 되는 것(엡 4:24)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그 인생이 성실치 못한 자기이익에 집착해서 형도 아버지도 속이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가정에 분란을 일으켰고 불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피신생활을 했고 외가에 가서도 그 버릇 버리지 못하고 외삼촌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형과는 관계를 풀지 못하고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 병든 자아를 고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 병든 자아를 빨리 부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병든 자아를 깨지 않는 한 그의 인생은 피곤하고 형제간의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고향에 갈 수도 없습니다. 야곱은 완전히 욕망과 탐욕과 시기와 질투와 거짓으로 가득차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이 고향에 돌아가던 길에 얍복강에서 깨졌습니다.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므로 자신을 완전히 부숩니다. 그리고 야곱이 비로소 이스라엘로 거듭납니다. 이 자아를 깨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언제나 큰소리를 쳤고 덤벙댔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예수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에 맴돌았습니다. 그러니까 멀찍이 서 있다가 스승을 배반하게 되고 부인하고 저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악해서가 아니고 아직 자아가 미성숙했고 깨지지도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언제 깨지게 되었는가 하면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깨지게 되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립니까. 그 통곡하는 시간이 베드로가 자신의 자아를 산산이 깨부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가 진정한 제자가 됩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김익두라는 사람이 독보적입니다. 그가 자아가 깨지기 전에는 엉망진창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폭군으로, 불량배로, 이웃을 괴롭히는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그러다가 어느 날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공중화장실의 넓은 똥통에 빠지는 순간 깨집니다. 그 속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누구 하나 바라만 볼뿐 건져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이 혼자서 간신히 건져 내 놓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후 그 소리를 듣고 김익두가 비로서 정신을 차립니다. 자신의 모습에서 그는 비참함과 초라함과 불쌍함을 느낍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기에 이 정도로 외면 받는 인생이 되었는가” 그리고 자신을 주저 없이 깨부수었습니다. 그 순간 김익두가 변화되었고 병든 자기 자아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례를 받는 날 사람들에게 김익두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부고장을 보냈고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보다시피 나는 물에 빠져 죽고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물에 빠져 죽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김익두가 마침내 김익두가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한때 방탕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주변에 많은 방탕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방탕한 짓을 할 때마다 동료들은 멋있다고 손뼉을 쳐 주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 말에 힘입어 더 박수를 받기 위해서 더 강도 높게 방탕생활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어찌 멋이겠습니까. 병든 자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이 멋있게 보인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그 방탕의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그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어거스틴은 “나는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눈물로 고백을 합니다. 자아가 깨지고 건강한 자아가 회복되니까 비로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오늘 목회자들도 이 건실치 못한 자아가 깨져야 목회가 가능합니다. 깨지지 않은 분들은 힘들게 목회를 하며 “나는 아닌가 봐”라는 말을 되풀이 합니다. 소명의식이 불분명한 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새벽기도가 힘들고 억지로 하니 한두날도 아니고 어떻게 평생을 그런 모습으로 목회를 하겠습니까. 그 뿐 아니고 자존심도 이기지 못하여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고 권위의식에 사로잡히고 불화를 야기합니다. 깨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교회 중직자들 중에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가는 곳 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불화를 야기합니다. 내가 깨지지 않는 것은 나만의 불행이 아니고 모두의 불행이고 결국 하나님께도 불행한 일입니다.
바울이 어느 날 다메섹에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가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주님께서 예리하게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아주 강한 빛 속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로 하여금 자신이 신봉하던 율법이 얼마나 오류투성이 인가를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 바울은 비로소 굳게 쌓여있던 자아를 깨버렸을 것입니다. 자신을 깨는 것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바울은 그때 진정 행복한 전도자로 변신을 하게 됩니다. 그 후 옥에 갇히면 찬송을 불렀고 매를 맞으면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였고 법정에 세우면 전도를 하였고 굶주리게 되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내 병든 자아가 깨지고 건강한 자아로 회복하니까 성령이 내안에 임하시고 내게 행복한 삶을 부여하십니다. 모두에게 덕을 기치고 평화를 이루는 삶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바울
행 9:19-22 / 이규왕 목사
거창한 일을 새로 시작하거나 아니면 더욱 확장하려고 할 때 많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고 시설을 확장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기계와 시설을 잘 운용할 수 있는 적임자를 찾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일은 기계나 도구로 할 수 있지만 그 기계와 시설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사업을 하는 이들을 보면 기계가 고장이 나서 사업을 실패한 경우보다 사람을 잘못 세우거나 잘못 만나서 실패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 기업일수록 시설 투자 못지않게 세계 각국에서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는 일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흔히 하는 말로 인사가 만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흔히 하는 말은 사람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는 일에 무엇보다 큰 비중을 두심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사람을 쓰실 때 잣대로 삼으시는 기준이 세상 일꾼처럼 학벌, 재능, 미모, 성격 일까요?
만약에 하나님께서도 대 기업의 총수와 같이 그와 같은 것들을 일꾼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면 과연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임을 받을 일꾼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학마다 수능점수가 차이가 나고 회사마다 시험 점수가가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기준은 그 보다 더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교회사나 현실 교회를 둘러보면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깨달아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축복의 사람들이 다 되기 바랍니다.
1. 하나님 나라의 확장
예수께서 행 1:8에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 시작된 기독교의 복음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폭발적으로 부흥하게 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가를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대 교회임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를 못자리판으로 하여 세계를 향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확장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은 여러 가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향해 차근차근 진행되어 나갔습니다.
물론 그 일에 주도권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내세워 복음을 확장시켜 나가셨습니다.
그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열두 사도요, 일곱 집사요, 무명의 평신도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부터 8장까지의 역사적이 배경입니다. 이제 복음은 그와 같은 지역에서 좀 더 자라 성숙해져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유기적인 상호 관계와 성령의 수직적인 관계 조화를 통해서 땅 끝까지 확산되기 위해서는 역시 유능한 사람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들어 쓰신 사람들보다 인간관계에서 보다 더 유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다 더 성령이 충만하고 많은 선교의 경험과 비전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회가 키워온 사람들 가운데 그와 같은 적임자가 과연 누구라고 생각이 됩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 외에 빛을 보지 못했던 사도들이나, 스데반 빌립 외에 아직 쓰임을 받지 못한 나머지 다섯 집사 가운데서 그와 같은 적임자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셨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셨습니다.
(사 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있어서 새로운 지도자로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은 그와 같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판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 사울입니다.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렇다면 사울이 과연 적임자이며,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그와 같은 큰일을 맡기시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요즈음 정부각료들이 바뀔 때마다 국회에서 인사 청문회를 열어 여러 가지 집요한 질문을 통해 그 사람의 능력과 신상을 꼼꼼히 짚고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울을 그와 같은 청문회에 붙인다면 합격일까요? 불합격일까요? 인간의 상식으로도 불합격자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도리어 훼방하던 대적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탄압하고 장래가 촉망되었던 스데반 집사를 돌에 맞아 죽게 하는 일을 주도했던 유대교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울을 이방 나라에 복음을 확장시키는 일을 주도해나가야만 하는 일을 주도하는 일꾼으로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다.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라며 나가 버렸다. 이렇게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 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놀랐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참모들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라고 했다.
한번은 링컨이 국가안보문제로 자신의 집무실로 그를 호출하였지만, 그는 바쁘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오히려 링컨이 스탄튼 집에 방문했는데 자신의 생일 파티로 대통령을 만날 시간이 없다는 전갈을 받자 링컨은 그의 응접실에서 파티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자, 이쯤 되면 링컨의 비서와 참모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한데, 그들이 링컨에게" 각하 저런 무례한 인간을 왜 해임 시키지 않습니까? 라고 하자
링컨이 각료들에게 "스탄튼이 모든 전쟁에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가 탄 말 꼬리라도 잡고 있을 수 있다네" 과연 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다운 멋진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울을 들어 쓰시고자 하는 이유도 그와 마찬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사울은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백해무익한 존재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은 앞으로 사울이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크게 공헌할 것을 기대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도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오늘도 일꾼들을 찾고 계시며, 택하시고 부르시고 계시는 중에 바로 사울과 같이 부자격자인 저와 여러분들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믿습니까?
(롬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롬(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인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일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하는지 오늘 본문의 사울을 통해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찬란한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사울을 부르신 이유는 사마리아 너머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위해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사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야 하는 복음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흉악범이나 달리는 사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겸손히 낮아지신 복음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복음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합당치 못한 성품과 인격과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것이 변하지 않고서는 오히려 지금까지 전해 온 복음을 망칠 위험요소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1. 그의 속에는 종교로 위장한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여기서 살기가 등등하다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는 마음이 계속 마음 속에 불타오르고 있는 현재 분사의 동사로 사울이 얼마나 강퍅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2. 그의 외적인 환경으로 인해 교만이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유서 깊은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고 헬라 철학이 융성했던 다소에서 자라 예루살렘에까지 유학시킬 정도의 가문이고, 유수한 학파인 가말리엘 문화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행 22:3). 그와 같은 외적인 신분은 그를 한없이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3. 부르심을 받는 현재까지도 핍박하는 일을 계속 중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는 그 일을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수께 부르심을 받을 때도 당국자에게 합법적인 기독교 박해를 위해 영장을 발부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과연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어 행 1:8에 약속하신 나머지 선교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놓은 기독교를 허물어 버릴 위험이 더 많은 요주의 인물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을 하나님은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울을 어떤 방법으로 들어 쓰셨을까요?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의 용병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1) 부서져야
문화재급의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를 보면 먼저 흙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여러 번 짓이겨서 부드러운 반죽으로 만들어 원하는 모양대로 도자기를 만들어 그늘에 말린 다음 유약을 발라 불가마에 집어넣어 구워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사울을 부르실 때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교만하던 사울에게 햇빛보다 찬란한 빛을 비추어 겸손히 땅에 굴복시키셨습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이제 사울은 남에 손에 이끌려야만 하는 소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어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오만 방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교만 하는 자를 낮추시는 방법이 바로 고난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후로 사울은 남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으로 변했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교만이 변하여 날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2) 힘을 얻어야
하나님은 낮추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높이시며 아프게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핍박자 사울을 불러 그를 낮추시고 쳐 복종시키신 것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그를 낮추시고 난 다음 아나니아를 통해 그를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그 같은 영적 체험을 한 사울은 이제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게 되었고 핍박자에서 복음 전도자로 거듭나게 되면서 지체하지 않고 즉시 일어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행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그로 말미암아 과거의 적이 친구가 되고 과거의 친구가 적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울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도함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학문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어주신 새 힘 때문이었습니다.
(행 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여기서 힘을 이라는 말은 신약에 일곱 번 쓰이는 단어로 믿음과 영적인 면의 강건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적을 이기려면 적을 먼저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최대의 걸림돌인 유대교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이제 기독교를 핍박해온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어 담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도하였을 때 압도를 당하여 큰 혼란과 당혹스러움에 빠뜨리는 승리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3) 인내해야
인생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확장시키는 일은 마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아서 순풍과 풍랑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사울이 복음을 전함으로 유대인들을 압도하였지만 너무나 그들의 저항이 강력함으로 인해 교회가 끊임없는 도전을 받게 됨으로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죽이기 위해 총 연대를 함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게 큰 위험이 닥쳤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잠시 숨고르기와 휴식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간에 사울을 더욱 성숙시키시기 위해 그를 아라비아 광야로 이끌어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관계를 갖는 기회를 갖게 하셨습니다.
(갈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갔을 때에도 사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에 평안이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훼방꺼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부득이 사울은 고향으로 내려가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행 9: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로 인해 바나바를 만나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를 향한 선교의 대장정을 이끌어가는 일에 선장이 될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그처럼 사울이 고향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교회는 더욱 더 부흥하고 든든히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사도행전이 계속되는 되는 계속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끝이 나도 선교 행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나 빌립처럼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사울과 같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은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았고 지금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비록 하나님 앞에서 사울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사울처럼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나의 어두운 눈의 비늘을 벗기시고, 나의 잘못된 성격이나 성품을 박살내어 부서뜨리시고, 교만한 나를 낮추어 겸손히 무릎 꿇도록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직도 이 지구상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남은 생애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도 말씀과 성령 안에서 ❶ 부서져야 합니다. ❷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❸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사울을 들어 바울이 되게 하시고 바울을 통해 사도행전을 계속 써가게 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사도행전을 계속 써가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의 증인 사울
행 9:20-25 / 김상복 목사
한 사람이 변하여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변하는 사건이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의 변화입니다. 아마도 예수님 이외에 사도 바울만큼 인류의 역사와 윤리, 도덕, 영적인 세계뿐 아니라 정서까지 변화시킨 분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비판하는 어떤 학자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갑자기 쓰러진 일을 두고 “바울은 간질병에 걸린 환각의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간질병에 걸려 정신이 혼란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근본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로 인해 세계 역사와 기독교 역사가 달라졌으며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읽으면서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변화는 스데반의 순교에서 출발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젊은 사울은 사람들의 옷을 모아 보관하면서 스데반이 죽는 것을 눈앞에서 봤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죽습니다. “하나님, 저들이 몰라서 저럽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날 때려죽이는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얼굴이 환하여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사울이 봤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용서할 수가 있나? 어떻게 저렇게 사랑을 보여줄 수가 있나?’ 스데반의 말과 죽는 모습을 보면서 사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날부터 사울에게는 큰 갈등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냐? 예수는 도대체 누구며 스데반은 어떻게 끝까지 남을 용서할 수 있었나….’ 물론 스데반은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저주하지 않고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용서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축복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천사와 같은 얼굴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죽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사상으로도 이해할 수 없어요. 예수님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슴속에 와서 그를 변화시키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울의 내면은 점점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마음이 어두워지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두워진 마음으로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눈마저 어두워졌습니다. 마음에 갈등이 생기면 몸에 바로 나타납니다. 몸은 마음이 하라는 대로 하니까요. 저도 예전에 할렐루야 교회로 오기 전에 고민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나를 미국에서 나오라고 하는데 나는 나갈 형편이 안 되고, 또 나가고 싶지도 않았고 아주 죽을 지경이었어요.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가라든지 말라든지 하시면 속이 편할 텐데 아무 응답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눈이 잘 안 보이더라고요. 제가 그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귀도 안 들리고, 목소리도 안 나와 설교를 할 수 없었고, 피부는 온 몸을 바늘로 마구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었습니다. 우리는 내적인 고민과 스트레스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우리의 삶은 내면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여러분도 스데반처럼, 사울처럼 변화되어 여러분의 삶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평화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다메섹에서 꼬꾸라진 사울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너무 혼란스러워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어느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저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길거리에서 만났던 그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사울을 만난 아나니아의 첫 마디는 “사랑하는 형제 사울이여!”였습니다. 이것은 사울에게 또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찾아와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겠다는 겁니다. “원수 사울이여, 당신을 저주하러 왔도다!”가 아니라 다가와 사울의 몸에 손을 얹고 “눈을 뜨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가슴 속에 갈등이 끓고 눈도 보이지 않고 밥도 못 먹던 사울이 자기를 형제라고 부르는 따뜻하고 온유한 사랑과 화해의 손길로 안아주는 아나니아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스데반이 그랬고, 아나니아가 그랬습니다. 사울은 여기서 완전히 예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변화되었습니다.
내면의 세계가 변하면 외면의 세계도 변합니다. 사울이 예수님께로 돌아서자 몸이 바로 회복되었습니다. 영적인 경험을 하면 육신의 병이 낫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몸은 마음이 다스립니다. 사울은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고 식욕이 돌아와 음식을 먹고 원기를 되찾았습니다(19절). 예수님을 체험하면 몸과 마음과 영혼이 변합니다.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도 삶에서 이런 축복들을 체험하기 바랍니다. 그러자 사울은 바로 전도자가 되어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체험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기도 응답을 받거나 성경을 통한 깨달음을 얻거나 신앙 안에서 가능한 여러 체험을 하면 확신이 생깁니다. 그때부터 자기 체험을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다른 점을 간증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체험 후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20절)하였습니다.
핍박하던 자의 열정이 방향을 바꿔 예수를 전하는 열정으로 나타났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여러분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여러분이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누군가가 여러분이 만난 예수님을 알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사울을 변화시켜서 바울로 만드신 것처럼 제 인생에 오셔서 저를 사용하사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간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간증하면 성장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표현하면 힘이 생기고 내 자신의 영적 성장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거든요.
어거스틴도 30세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로마서 14장 한 구절을 읽다가 그 말씀 때문에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논리학 교수였으나 타락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변하여 성 어거스틴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고백했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르다도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도마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신앙고백은 구원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는 신앙고백을 보면 압니다.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습니다. 나를 위하여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구주인 것을 믿습니다.” 이 한마디가 여러분의 구원을 증명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신앙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이 없는 분은 이 시간에 고백하십시오. “주여, 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날 위하여 돌아가신 구주임을 믿습니다.” 이 한 마디의 단순한 고백으로 사도 바울과 같은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내가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 체험하고 깨달은 것을 사람들과 나누면 새 힘이 일고 신앙이 성장합니다.
로버트 라토너는 미국에서 가장 큰 엔지니어링 회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성공적으로 사업을 하던 이 분이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라서 예수를 믿고 나서도 전도나 간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로터리 클럽에서 강연을 요청 받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내가 예수 믿고 달라진 모습을 간단하게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은 사업가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든지, 그 때부터 여기저기 로터리 클럽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고, 이 분은 사업가들을 위한 간증 연설가가 되었습니다. 말할 줄 모르던 사람이 간증 한 번 했다가 입이 터진 겁니다. 평생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고, 그 외에도 유익한 강연을 많이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십시오. 그러면 입이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생긴 삶의 변화에는 감동이 있고, 간증을 듣는 사람들의 삶에도 변화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변화 때문에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이 변화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울의 변화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21절). 사람을 잡아 죽이러 다니던 핍박자가 하루아침에 변해서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못 살게 굴고 죽이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려 함이 아니더냐?”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예수님의 발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인류의 역사가 바울 때문에 달라졌습니다. 자기만 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예가 많습니다. 삭개오, 마태, 니고데모의 변화 등 예수님께로 돌아설 때 삶에 변화가 있습니다. 변화는 순간적인데, 그것이 영원한 변화가 되어버립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체험하는 것들이지요. 우리가 교회는 잘 몰라도 예수님은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성경과 교리는 잘 몰라도 예수님은 알아요. 저도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전에 예수님을 먼저 알았어요. 여러분의 자녀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님과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성 원리를 만든 역사상 최고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부인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남편이 만들어 놓은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그런 것은 이해 못해요. 그러나 저는 제 남편은 이해합니다.” 학문이나 교리가 아닌 한 인간, 인격체는 어린이도, 청소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청소년 시절, 중고등학교 때 믿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청소년기에는 몸은 성장하여 어른처럼 되지만 마음은 아직 어립니다. 가치관도 설정되지 못하고 왔다갔다 방황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방황하지 않고 영원히 그 분과 함께 안정적인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방황하는 그 시절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깨닫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그 인생이 변합니다. 낭비하는 인생을 살지 않고 똑바로 갑니다.
옛날에는 범죄하고 감옥에 가고 한참 헤매다 돌아온 사람이 있으면 간증을 많이 시켰습니다. 저도 어릴 때, ‘나도 예수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좋을 뻔했다. 저런 간증 좀 하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깨닫고 나니까 예수 믿는 집에서 태어나서 방황하지 않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똑바로 산 것이 최고인 줄 압니다. 우리 가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고 하는 삶이 최고의 행복인줄 아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주님을 알기 때문에 복된 자녀들입니다. 아이들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입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22절) 간증하고 전도하면 힘이 솟습니다. 굴복시켰다는 것은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아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아프리카에 아주 험한 탄광이 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싸움과 행패를 많이 부리는 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 크리프라는 선교사가 온 후로 한 사람씩 변화되더니 마을 전체가 변해 갑니다. 어느 기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크리프 선교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분은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그분은 꼭 예수님 같아요!” 너무 예수님 같은 것이 그분의 문제랍니다. 예수를 믿어서 성령의 도움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분도 크리프 선교사와 같이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임재하시니까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핍박하던 자가 이제는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23절). 악은 선을 싫어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예수 믿는다고 핍박받는 분들이 있는 줄 압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상이 크니라.” “세상이 나를 미워했는데 나를 미워한 것처럼 너희도 미워할 수 있다.” 이해를 못하니까 핍박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문에서 처음 예수 믿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당장은 핍박을 받는 것 같아도 여러분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변화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에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핍박을 받더라도 예수님께서 핍박을 받은 것처럼, 스데반이 핍박을 받은 것처럼, 사도 바울이 핍박을 받은 것처럼, 우리의 조상들이 순교한 것처럼,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고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위로와 하늘의 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5절에 재미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내리니라.” 며칠 되었다고 제자가 생겼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을 통치하시기 시작하면 내 마음에 열정과 능력이 생겨서 예수 이야기를 하게 되고 나로 인해 예수 믿는 사람이 생깁니다. 여러분 속에 계신 성령님이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여러분을 통해서 제자들이 많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예수를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울에게 제자가 생긴 것은 영적 변화에 나타난 풍성한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었던 사울도 예수 믿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육신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 살아나는 축복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꼭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사울은 은혜를 체험하자마자 바로 그 은혜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값없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이 시대에 영원히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메시지를 가지고 여러분 주위 사람들의 삶에 중심을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새 생명으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 주셔서 우리가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광야를 이겨내는 길
사도행전 9:23-25 / 이한규 목사
선천적 재능만큼 후천적 준비도 중요하다. 준비는 상당한 능력의 원천이다. 미래를 잘 준비하는 삶이 위대한 예언자적인 삶이다. 인생 광야도 잘 준비하면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 수시로 찾아오는 인생 광야를 잘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인기에 얽매이지 말라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많은 깨달음을 얻은 후 사도 바울은 곧장 화려한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다메섹 유대인들이 바울 죽이기를 공모했다. 그 계교가 바울에게 알려졌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다(24절). 그때 바울의 제자들이 밤에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려 탈출시켰다. 그 사실을 알면 바울의 대적들이 비겁하다고 했겠지만 그래도 바울은 그런 비판에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사람의 칭찬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비판이나 칭찬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그리고 칭찬이나 인기를 추구할 때는 바르게 추구하려고 하라. 요새 유튜브 1인 방송에서는 구독자를 늘리려고 무리수를 많이 쓴다. 좋은 콘텐츠로 정당하게 구독자를 늘리기보다 자극적인 말로 남의 명예와 인권을 침해하고 구독자를 늘리는 경우도 많다. 어떤 사람은 남의 사생활을 무차별적으로 폭로한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씌워 무차별로 폭로하는 사생활 침해를 잘 분별해서 걸러내지 않으면 내 영혼도 점차 오염된다.
나의 기분 전환용으로 서슴없이 남의 사생활 침해를 자행하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따른다. 특히 남의 사생활 폭로로 구독자 수를 늘리고 돈을 버는 비열한 돈벌이는 스스로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식으로 남의 행복과 성공을 질투하는 본능에 편승해 비열하게 칭찬과 인기를 얻으려고 하면 혹시 대중의 인기는 얻어도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얻지 못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으로 당대와 후대가 추락한다. 내 미래 및 후대의 행복을 생각해서라도 남에 대한 손가락질은 지극히 주의하라.
어떤 유튜버는 오래 전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까발려 사람들을 키득거리게 하고 구독자 수를 늘린다. 그런 유튜버에 성도마저 휩쓸린다면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만약 나의 몇십 년의 이력도 작은 일까지 탈탈 털린다면 얼마나 가관이겠는가? 독방에서 혼자 행했던 수치스런 일까지 하나님은 탈탈 털어 야단치실 수 있지만 그 수치를 예수님의 보혈로 덮고 보지 않으신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남에 대한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삼가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심히 슬퍼하실 것이다.
남의 눈의 작은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큰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사생활의 무차별 폭로는 악마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폭로 대상에게 큰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다. 고대나 중세에는 명예 훼손죄를 목숨을 걸어야 할 중범죄로 여겼다. 남의 명예 훼손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진중히 드러내라. 명예 훼손을 통해 유튜브 구독자 수와 수입을 늘리는 비열한 인기 전략과 돈벌이 전략에 놀아나지 말라.
풍설에 좌우되기보다 사실에만 좌우되도록 나를 지키라. 잘 모르면 한 발 물러서고 한 마디 덜 말하라.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심을 가지라. 유명한 공인이라도 그의 사생활을 무차별적으로 폭로하는 것은 범죄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사회가 성숙하고 건강한 사회다. 정당하고 신중하고 진중한 폭로가 때로는 필요하지만 낄낄거리며 하는 천박하고 무차별적이고 비신사적이고 비겁한 폭로에 휩쓸리는 것은 나의 수치다. 그런 수치가 내게 없게 하라.
2. 열린 마음을 가지라
바울의 제자들이 바울에게 피신하라고 했을 때 바울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떻게 여러분들을 놔두고 나만 혼자 떠납니까? 그럴 수 없소.” 그때 바울과 바울의 제자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표출된 ‘밀어내기와 버티기’가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라고 설교했던 자기가 십자가를 피하는 것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 체면을 생각하면 다메섹이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더욱 큰 뜻을 위해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고집을 꺾었다.
사람은 원래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 착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좋은 일에 대한 고집은 필요할 때도 있다. 문제는 나이가 들면서 고집이 심해지는 것이다. 과거의 지식과 경험을 따라 편리하게 살고 싶은 본능 때문이다. 어른의 인생 경험을 참고하면 매우 유익하다. 다만 어른이 되면 지식 수용 능력과 수용된 지식의 연산 처리 능력이 떨어지는 현실을 인정하고 의식적으로 열린 마음과 열린 귀를 가지도록 더 힘쓰고 세대 차이도 인정해야 한다.
■ 필자의 경우에 어렸을 때 부모가 가장 존경스럽게 느껴질 때는 부모로부터 고생한 얘기를 들을 때였다. 필자의 부친은 1945년에 평양에서 해방의 기쁨을 맞은 후 북한 정권의 정치적 반대자로 몰려 고문을 받고 3개월 간 투옥되었다. 그 얘기를 들을 때는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지금도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부친이 살아계실 때 이런 얘기를 못 나눈 것이다. “아버님! 1945년부터 육이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 사셨는지 자세히 알려주세요.”
부친은 1946년 서울로 내려와서 학교 선생님으로 있다가 1948년에 한국은행에 다니던 22세의 모친과 결혼했다. 모친은 23세에 첫 딸을 낳고 이듬해에 육이오 전쟁을 겪었다. 전쟁 직후 서울이 3개월간 공산 치하였을 때 부친은 평양에서 수감되었다가 월남한 전력과 선생이란 신분 때문에 총살 일 순위가 될 가능성이 커서 서울 인왕산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 밤에 먹을 것을 구하러 산에서 집으로 내려왔다.
당시 공산 치하에서 남대문 시장과 필자의 부모가 거주하던 옥인동은 10리 길밖에 안 되는데 쌀값이 크게 차이 났다. 결국 24살의 어린 딸 한 명을 업은 젊은 엄마가 남대문에서 쌀을 사서 옥인동에서 팔아 인왕산에 숨은 29살 남편을 먹여 살렸다. 그때 시청 주변으로 즐비하게 널린 죽은 사람의 시체를 걸어서 지나치며 젊은 엄마가 겁도 없이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고 목숨을 건 장사를 했다. 그런 얘기를 모친으로부터 들을 때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크게 들었다. 물론 철없던 필자는 곧 그 얘기를 잊었다. 그 나쁜 기억력이 문제다.
명절의 가족 모임은 그 나쁜 기억력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는 모임으로 존재해야 한다. 필자 세대는 부모로부터 육이오 전쟁 얘기를 들으면 더 사랑하고 효도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 세대에게 육이오 전쟁 얘기를 하면 별로 진중하게 들려지지 않는다. 그것을 철없게 여기며 “너희는 인생을 너무 몰라.”라고 할 수만은 없다. 선대가 먼저 열린 마음을 가지고 후대에게 육이오 전쟁과 같은 괴리된 얘기로만 소통하기보다 다양하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사려 깊게 후대를 철든 인생으로 이끌어야 한다.
자녀를 철들게 하는 방법도 때와 시기에 따라 변화를 주어야 한다. 자녀의 철없음만 탓하지 말라. 세대 갈등이 자녀의 철없는 모습 때문일 수도 있지만 부모의 과거지향적인 모습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성찰을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생각 없이 무작정 기도만 하지 말라. 생각하고 성찰하고 땀 흘려 준비하면서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무작정 많이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기도를 생활화해서 매 순간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창조적인 지혜를 받으며 살라는 말씀이다. 그때 생기는 열린 마음과 열린 귀가 복의 원천이다.
3.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예전에 인생의 핵을 가진 삶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할 때 갑자기 우주의 광대함으로 생각이 미쳤다. 우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항성, 행성, 위성과 같은 별들이 있는 부분과 그 사이에 있는 훨씬 광대한 암흑 공간 부분이다. 광대한 우주의 암흑 공간에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을까를 생각하면 인생의 연약성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면 하나님을 더욱 추구하게 되고 그러면서 광야의 삶도 비교적 쉽게 이겨내게 된다.
욥은 극심한 고난을 당한 후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했다(욥 1:21). 자신의 연약함과 피조물 됨을 겸손히 하나님 앞에 인정한 것이다. 불행의 밤이 찾아오면 먼저 자신이 연약한 피조물임을 인정하라. 불행의 이유를 철학적으로 너무 자세히 분석하지 말라. 광야의 고난과 상처를 이기는 가장 위대한 비결은 ‘분석’이 아닌 ‘예배’에 있다.
앞으로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뵙고 고난의 비밀은 물론 신비한 우주만물의 원리를 다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소망이 있기에 빨리 하나님께 가고 싶다. 어떻게 빨리 가는가? 순교의 길로 억지로 가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에 천국에 가기를 원하신다. 성도는 아무리 힘들어도 스스로 생명을 주관하려고 하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 빨리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활용해서 복음 전파라는 성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려고 열심히 사는 방법이다.
요새 매달 <월간새벽기도> 한 권을 계속 집필하니까 필자에게는 한 달이 정신없이 지나가면서 마치 한 주처럼 느껴진다. 그처럼 거룩하고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다 보면 사회에 큰 공헌도 하면서 어느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을 빨리 뵙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서 천국에 가기 전에 이미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인생 광야를 두려워하지 말라. 칭찬을 너무 바라지 말고 십자가의 복음을 꼭 붙잡고서 열린 마음과 열린 귀를 가지고 양심과 현실과 후대의 소리를 잘 들으며 살라. 무엇보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루라. 그러면 광야조차 성숙한 믿음을 가진 나를 빚어내는 창조적인 장소로 변할 것이다. 늘 사도 바울처럼 광야 기간을 앞으로 주어질 인생 성공과 천국 상급을 예비하는 최대 준비 기간으로 만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