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3:44-52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44-52 /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45) 유대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자 질투가 생겨서 욕설을 퍼부으며 바울이 하는 말끝마다 반대를 하였다. 46)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하게 그들에게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이 기쁜 소식은 먼저 당신들 유대인들에게 전해져야 했소.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당신들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증명해 보였소. 그러니 우리는 이제 이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오. 47) 이미 주께서는 ㅂ) `나는 너를 세계 만민의 빛으로 세워서 온 세상의 어둠과 혼란을 없애고 땅 끝까지 이르는 세계 만민이 너를 통하여 나의 구원과 해방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으니 주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오.' (ㅂ. 70인역 사49:6) 48) 이 말을 들은 이방 사람들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은 다 신도가 되었다. 49) 하나님의 말씀이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50) 그러자 유대인들은 율법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쫓아냈다. 51)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항의하는 뜻으로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떠났다. 52) 안디옥의 신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바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영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의 시민들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다시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를 자아냈습니다. 유대인들의 비방은 박해로 발전하였고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그 지역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유대인 전도보다 이방인 전도의 문을 먼저 여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의 설교를 비방하는 유대인들(44-45) 다음 안식일에 수많은 사람이 회당에 모여 들었습니다. 바울의 선포가 성공적인 결과를 내자 유대인들은 질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들이 바울을 반박하고 비방한 동기는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은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23)과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것(30), 그리고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38)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함(46-47)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적대적인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며 유대인들의 반박과 비방에 맞섰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유대인들)에게 전할 것이로되’(46)라고 하였습니다. 구속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고 있는 특권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1:8; 마 10:5). 이런 특권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13:17, 23, 32).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속사에서의 특권을 무시하며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했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선포한 경고의 말씀(40-41)을 스스로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이방인들과 박해하는 유대인들(48-52)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될 때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롬 8:28-30). 46절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았지만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믿는 행위’나 ‘믿지 않는 행위’를 작정했다는 뜻이 아니고 믿는 자는 영생을 주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로 자처하며 박해하자 주께서 자신들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셔서 이방인을 구원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담대히 선언합니다.
적용: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핍박할수록 복음은 더욱 힘차게 전파되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과 비교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 인간의 행복은 이 한마디로 다한다.>- 톨스토이. 복음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왔던 이방인들, 죄인들을 변화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것, 그리스도인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못 견딥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공동체에서 냉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핍박이 심해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제대로 비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는 법입니다. 비방하는 자들이 주위에 많을지라도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의 빛을 더욱 밝게 비추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 설 교 >
복음에 대한 긍정과 부정
김영규 목사
바울 설교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행한 설교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회당에 모였습니다. 어떻게 단 한 주간 만에 시민 전체가 동원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유대인 회당에 이방인들이 몰려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물론 성령의 역사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적인 관심이 첫째 이유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종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종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영혼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천국 문제에 관심이 있고, 구원 문제에 관심이 있고, 영혼이 잘 되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는 도대체 영혼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합니다. 오직 육체적으로 살다가 육체가 끝나면 종결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인간 만사는 오직 돈으로 통합니다. 돈 만 있으면 다 된다! 정치하는 사람은 오직 경제만 살면 다 된다고 외칩니다. 대학생들은 오직 돈 벌이 되는 전공에 매달립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은 돈 많은 배우자만 찾습니다. 그래서 연예인에 관심이 많고, 로또에 관심이 많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착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어요. 종교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사느냐 아니면 짐승처럼 육체로 사느냐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닙니다. 육체적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이 잘 돼야 만사가 잘 됩니다. 영혼이 안 되면 만사가 안 됩니다. 안디옥 사람들처럼 영혼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다수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행13:43)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중심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인데, 이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유대화 된 이방인입니다. 둘째는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인데, 이들은 할례는 받지 않았으면서도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입니다. 아무튼 이들 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듣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있고,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 복음을 듣고 크게 환영했습니다. 이 복음은 단 한 주간 안에 전 시민이 동원될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배척
이런 결과에 대해 유대인들을 매우 당황했습니다. 자신들의 회당에서 새로운 복음이 전파되고, 이방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부정하고 반대하고 배척했습니다. 이런 기조는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기심은 만사를 망치는 원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보세요.
1. 반박하고 비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45) 복음의 내용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적인 배척의 이유를 대지 못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을 근거로 반대하든지 비난하든지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감정만 드러냈을 뿐입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다 말고 회당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42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나갈새”라고 되어 있는데, 이 구절은 영문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nd when the Jews were gone out of the synagogue, the Gentiles besought that”(KJV) 나간 사람들을 유대인들로 해석한 겁니다. 이 해석을 따른다면 과격한 유대인들은 바울 설교를 듣다 말고 흥분해서 나갔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든지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란 사실에 대해서 무조건 흥분하고 배척했습니다.
2.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도들을 도시에서 내쫓았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50) 유대인들은 종교 문제를 떠나서 정치적인 선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 도시에서 유대인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안디옥에 정착하여 종교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꽤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들의 존재가 흔들리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도층 인사들을 동원했습니다. 첫째는 “경건한 귀부인들”입니다. 아마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부인들인 듯합니다. 둘째는 성내 유력자들입니다. “유력자”(prwvtou")라고 번역된 단어는 우두머리나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아마 시장이나 거기 버금가는 관리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유대인들은 인맥을 동원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내쫓았습니다.
3.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으면서 바울은 중대 선언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
❶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❷ 유대인이라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나님 백성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❸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앞으로는 이방인을 향해 복음을 전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국면의 전환입니다.
이 선언 속에는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❶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이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이란 선언입니다. 역사상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 백성, 선민으로 자처해 왔습니다. 그러나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 자녀는 아닙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든 이방인이든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나님 자녀로 인정됩니다. 이런 내용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의 글에 명백히 선포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6-7,29)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4:16)
❷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한 결과로 이방인을 향해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은 어디 가든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거부하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 우선, 그러나 배척하면 이방인에게로!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오늘날 복음은 유대인보다 이방인 중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거부한 것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런 섭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에 대한 부정과 긍정
복음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후통첩입니다. 복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고 거부하면 그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지 혹은 배척하는지 여부에 따라 최종 신분이 확정됩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믿는 자는 하나님 자녀로 인정받지만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 자녀에서 제외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여부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인류 구원은 창세기 타락 과정의 逆順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류는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하나님 자녀의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같은 운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담의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불가항력의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즉, 인류의 죄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세요. 문명 발전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의 죄는 점점 깊어갑니다. 점점 인간성이 상실되어 갑니다. 점점 짐승처럼 되어갑니다. 세상 종말이 다가올수록 인간의 심성에서 사랑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12) 인면수심 되어가면서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 지금의 인간들입니다. 이런 구제불능의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죄 없으신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이제는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미 창세전에 세워졌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예수님은 이런 구원 계획에 따라서 오셨고, 이런 구원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일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배척했습니다. 이유는 선민의식입니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면 무조건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혈통이 하나님 백성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 타락한 아담의 자손일 뿐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0-18,20)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역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긍정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최후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녀이기를 거부하는 최후 결정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녀로 인정되는 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믿는가, 거부하는가? 오늘 내 결단에 따라 하나님 자녀로 영원히 살기도 하고, 영원히 지옥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분을 확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방의 빛이 되라
바울은 설교의 마지막에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들의 미래 행로를 제시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47) 이제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리라!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어 땅 끝까지 구원하리라!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임을 선언했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롬11:13)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8)
오늘 우리는 이방인으로 예수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이나 땅에 속한 모든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보다 더 큰 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요즘 매주 식탁에서 이 말씀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49:25)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여러분, 이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방인의 빛이 되세요.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구주이신 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 중에도 아직 믿지 않는 이방인이 있습니다. 매일 어울리는 직장 사람들 대부분이 이방인입니다. 매일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 친구들, 이웃들이 다 이방인입니다. 이들에게 빛을 비추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빛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의 빛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구주라는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내용이 바로 복음입니다. 더 줄이면 예수님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신 그 자체가 바로 복음의 빛입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안디옥 교인들은 무슨 기적을 보고 모여들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구주라는 소식을 듣고 몰려 왔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48-49)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2) 안디옥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기적을 본 게 아닙니다. 단지 말씀을 듣고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찬송했습니다. 말씀 내용에 기뻐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써 능력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기쁨을 줍니다. 바로 이 복음이 우리가 가진 빛입니다. 안디옥에 기적이 퍼진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비췰 빛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비췰 빛은 복음의 빛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복음, 이 복음의 빛을 사방에 비취세요. 남은 생애 동안 어디서든지 예수 믿는 것을 보여주세요. 그것이 우리가 비췰 빛이며, 우리의 마지막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
사도행전 13:48-52 / 장경동 목사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본문 속에는 7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 7종류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즉, 구원 받은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방인, 바울, 바나바, 제자들을 ○표 라고 놓고 유대인, 귀부인, 유력자를 X표라고 할 때, ○표는 구원받은 사람을, X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표의 사람은 기쁨이 있고 찬송이 있고 믿음이 있고 성령이 충만 합니다. 그러나 X표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X표의 사람들은 선동을 합니다. 선동은 구원받은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들은 또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합니다. 여기서 알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더라도 핍박을 하여서는 안된 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냅니다. 위의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같은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반응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 모든 것들에는 다 양면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것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습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듯이,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습니다. 강한 것이 있으면 약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만 알면 안 되고, 둘을 다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13:34-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비유를 통해 나타내고 비유를 통해서 알게 하셨습니다. 마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 함이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알게도 하시고, 감추고 알지 못하게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비유의 양면성입니다. 그렇다면 양면성의 다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잔꾀를 부리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순진한자들에게는 나타내집니다. 마11:25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 하나이다’ 우리는 기도도, 감사도, 봉사도 순진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잔머리는 감동이 없습니다. 순진하게 우직하게 하십시오. 진실 속에는 언제나 감동이 옵니다.
2. 영생에 있어서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택함 받은 자는 은혜 입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자는 기쁨이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이 있어야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3. 십자가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처럼 여겨지시길 바랍니다.
4. 복음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고후4:3-4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이니라 ’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진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5. 구원에 있어서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 이니라’ 마10:5-6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오늘 우리가 구원 받았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마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구원 받은 자요 행치 않는 자가 구원 받지 못한 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한 자 입니까? “나는 지혜로운 자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자인가?” 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나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인가? 아니면,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인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인가? 아니면, 행치 않는 자인가? 나는 ○표 인생인가? 아니면 X표 인생인가? ”를 깊히 생각해보고 위대한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기도합시다. “ 주여 우리로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는 왜 그렇게 교파가 많은가
사도행전 13:48-52 / 장경동 목사
몰라서 오해하지, 다 알면 이해가 된다. 한편, 다 알고도 이해 못할 일이 있다. 또, 몰라도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은 네 박자로 보아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아 희미해도,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된다. 그러나 천국가도 어떤 부분은 잘 모른다. 다 아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안 계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정확하게 보신다. 그러기에 그 분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 아까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왜 그렇게 교파가 많은가? 교파가 하나면 다툼이 없으나, 전도 열의가 약해진다. 교파가 많으면 교인 쟁탈전이 벌어지나 전도 열의는 강하다. 중문교회 철야에 다른 교회 사람들이 모이니까 다른 교회에서 철야가 시작 되었다.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교파가 하나면 편협된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교파가 여럿이면 하나님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개미들이 코끼리를 볼때 각기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과 비슷하다.
북한은 당이 하나다. 그러므로 다른 당을 용납하지 않는다. 통일성은 있으나 자율이 없다. 한국은 당이 여럿이다. 복잡하다. 그러나 정당의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다. 이렇듯 교리적 차이는 인정 되어야 한다. 천주교는 오직 하나만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오류가 있다. 그예로, 초대 교황 베드로는 분명 결혼했다. 그런데 왜 신부님이 결혼을 안하는가? 결혼의 자유가 교권으로 인해 구속당하고 있다. 성경은 하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 민주주의는 부작용이 있어도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것처럼, 교파가 나뉘긴 했지만, 여러 관점으로 하나님을 좀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기독교가 옳다.
오늘은 예정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는데, 먼저 질문을 하나드리면 “내의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아니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가?” 하는 것이다. 감리교와 성결교는 내 의지를 강조하고 장로교는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다 말하고 있다. 요한 3:16 은 다 외워야한다. 군대에 가면 초코파이를 준다. 그런데 일요일 날 모두가 다 교회 간다고 하니까, 주기도문 할수 있는 사람만 교회 보냈다. 롬10:13 “주의 이름 부르면 구원 얻는다.” 구원의 의지가 너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문 48절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예수믿는 것은 작정되어 있다. 택함 받았다 는 뜻이다. 또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다.(요6:44) 즉,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셨다는 것이다. 행18:11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고 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대전 시민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따로 있다.
“내가 안 믿으면 지옥, 믿으면 천국이라면 억울하지 않은데,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이라면 좀 억울하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죄인이 지옥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죄인을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은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사형수가 사는 방법은 대통령특사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사형수는 죽어야하는데 김현희가 산 것은 감사한 것이다. 특사로 사는 사람은 당연한 게 아니다.
예수 믿으라는 것은 억울함에서 당연함으로 오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함에서 감사함으로 오라는 것이다. 선생이 잘 가르쳐야 한다. 한국에서 공부 못하는 애가 미국가면 잘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작은 것에도 큰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나의 나된 것은 주의 은혜다. 나의 노력까지도 주의 은혜다. 그러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 익명으로 까운을 해 준분이 훌륭하다. 뭐 해놓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신앙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침을 받기로 작정된자가 고침을 받는다. 여자 장로님에게서 메모가 왔다. 허리가 이상이 왔는데 다리가 아팠다. 목사님 부흥회에서 은혜받고, 안수를 못받아서, 길거리에서 안수를 해달라고 했다. 환자한명 때문에 과거 시험을 놓치는 허준이 생각나서 안수를 했다. 그런데 허리가 싹 나았다. 어떤 사람은 주차장에서 해도 되는데 어떤사람은 정식으로 해도 안되는가? 그답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교인이 테잎으로 전도했다. 안받는다고 테잎을 던져버렸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주어서 듣고 은혜받고 예수님 믿었다.
축복을 받기로 작정된자는 축복받는다. 그럼 하나님은 아무나 구원하고 아무나 축복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롬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또는 강팍케 한다. 즉, 그렇게 할 자를 그렇게 한다. 그가 하는 짓이 축복받을 짓이요, 응답받을 짓이었다.
1)이세상의 모든 일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다 이루어지고 있다. 우주, 자연, 사람이나 다 그렇다. 먹는 것은 내 의지이지만 소화는 내의지가 아니다. 혈압도 그렇다. 하나님의 예정도 구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엡1:3-5 “신령한 복주시되,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다. 내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정도 사는 것도 내가 한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러분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2)그러나, 의지와 무의지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음식 먹는 양을 조절하여 소화를 조절할 수있다. 내 삶은 조절하면 혈압을 어느 정도 조절가능하다. 가만 있어도 하나님이 다하신다는 것은 운명론자이다. 심방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그 집이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그분 말씀이 “누추해서 그런다.”그래서 제가 “담임목사가 못 먹는 음식을 누구에게 주겠는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긍지를 가져라. 여러분이 라면가게 하면 나를 라면 먹여라. 지금 만두가 어렵다. 만두 많이 사가라. 선량한 만두가 희생당하면 안 된다. 그 교인이 그 고비를 넘겨서 잘나가면 얼마나 좋은가? 이런 마음이 온 국민의 마음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기독인은 만두를 사먹어라. 기독인은 무슨 독을 마셔도 괜찮다. 어렵다고 낙심하지 말고 지혜롭게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있지만 인간도 해야 할 몫이 있다.
해찬들 창업주가 믿음이 있다. 예배를 드리니 좋아한다. 해찬들이 잘 될려면 직원이 해 찬들 고추장 먹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자기도 안 먹는 것을 누구에게 먹이겠는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긍지가 없다면 그만 둬라. 이것이 은혜의 소스가 된다.
비는 하늘이 내리지만 아무데나 내리지 않는다. 비는 사막에 내리지 않고 나무가 있는 곳에 내린다. 은혜받을 짓속에 은혜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리고, 믿는 사람답게 살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맡깁시다.
성령충만한 사람
사도행전 13:48-52 / 김경년 목사
십여년전 통계청에서 금년도 인구센서스를 통해 밝혀진 국민의 종교분포 조사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여기보면 불교 인구가 1천 72만 6천명, 기독교 인구가 8백 61만 6천명, 천주교 인구가 5백 14만 6천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불교 인구는 3.9%, 천주교 인구는 지난 10년 사이에 74.4%로 급성장을 했는데, 기독교는 오히려 1.6% 감소했다는 사실입니다. 10년 전보다 14만 4천명이 감소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감소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보면 교회의 분열, 분쟁과 교회학교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것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것은 1885년입니다. 그러나 유교나 불교사상의 박해와 조정의 박해 등으로 인해 교회가 세워지고 전도를 하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1907년 1월 16일, 평양에 있는 ‘장대현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어떻게 하면 이 나라에 부흥을 일으키고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 길선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핍박을 이기고,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기를 사모합시다.”
그래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께 회개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 갑자기 성령의 역사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해서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병 고침을 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때서부터 한국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당시에 평양에서 한 해 동안 4만 명이 예수를 믿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그 부흥의 불길은 우리나라 전체에 번졌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의 부흥사건이 100년에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어게인1907년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시한번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서 침체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고, 지금도 성령의 역사로 다시금 교회에 부흥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지키는 거룩한 날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대조적으로 사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과 술 취함은 매우 유사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술로 충만한 사람은 평소에 없었던 용기가 생겨 담대하게 됩니다. 술이 들어가면 겁이 많던 사람도 겁이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해집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나 말도 잘 못하던 사람이 담대하게 말을 잘하게 됩니다.
본문 50-51절 말씀을 봅시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여러 동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드렸지만, 또 어떤 동네에서는 욕을 실컷 얻어먹고 쫓겨나기도 하고, 심한 핍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 가운데 귀부인과 유력자들이 선동하여 방해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는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참으로 당당했습니다. 참으로 담대했습니다.
오늘 본문 52절에 보면“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기뻐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설교하실 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눅9:5절)
성도들은 인간적인 정에 끌리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발에 티끌을 떨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외로움이 되고,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된다고 해도 우리가 때로는 단호하게 끊을 것은 끊고, 떠날 곳은 떠나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핍박을 받고, 동네에서 쫓겨나면서도 조금도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타협하거나, 영적인 침체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았습니다.
매우 당당하게, 담대하게 사명을 다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기도회에 이명박장로님의 간증을 보았습니다. 금요일날 나오신 분들은 큰 은혜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명박장로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은혜를 받았지만, 그 가운데서 그렇게 가난하고, 힘든 삶 속에서 그의 어머니가 거지처럼 얻어 먹이지 않고, 얻어 입히지 않고, 자식들을 당당하게, 정직하게 키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자기에게는 거지 근성이 있었는데 어머니를 통해서 그것을 완전히 버리고, 당당하게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서울시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다가 보면 때때로 좋은 일과 평탄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적지 않은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험과 위기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 일을 멈추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은 “성령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동력이 끊어진 방앗간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방앗간에 동력이 있으면 수십 가마도 금방 빻아줍니다. 그러나 동력이 없어 사람이 직접 하게 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쉬운데, 성령을 받지 못하면 혼자서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다가 지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마치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라면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상관없이 어디를 간다 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오토바이를 탄 사람과 같이 지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능력이 있습니다. 권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앞장서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 지도자요,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장로님은(1882~1950) 16세까지 친구들과 술 마시고 도박하고 싸움을 하는 길거리의 불량배였습니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고, 서당에 가서 한문도 공부했지만, 친구들을 잘못 사귀어 불량소년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술에 취해 길을 걷고 있는데 미국 선교사가 그를 보고 “이 사람아,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일본이 이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있는 데, 젊은 사람이 술 마시고 방탕하면 되겠나?”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그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그의 귀에 맴돌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자신을 책망했던 선교사의 집을 찾아가 “내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으로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도박을 끊을 수 없습니다. 건달 생활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능력과 권능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모아놓고 이제부터는 술을 마시지 않고,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자신과 계속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읽고, 그 당시에 기독교정신으로 세워진 숭실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한 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어 오산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을 가르쳐 지도자를 배출하고 3·1운동을 주도하여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 받습니다. 새로워집니다. 악한 사람이 착하게 됩니다. 용기가 없던 사람이 담대해 집니다. 정직하게 됩니다.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 충만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
사도행전 13:49-52 / 신성종 목사
옛 속담에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바이러스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삶의 활력소요 원동력이 되는 기쁨을 회복하여 우리들이 이 땅에서의 생활이 좀더 활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절)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기쁨이 항상 충만하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가장 짧은 구절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1장 35절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말씀과 다른 하나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의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요한복음 11장 35절은 세 단어로 되어 있고,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만이 두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 구절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동정의 눈물, 사랑의 눈물의 울음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기뻐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참 기쁨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분들만 한번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세 가지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참 기쁨은 무엇인가?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기쁨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 기쁨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 모두가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참 기쁨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잠정적인 기쁨]이 있고, 또 [영원히 계속되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참 기쁨은 항상 성령이 임할 때 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더라”고 기쁨과 성령을 함께 언급했습니다. 기쁨과 성령이란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수퍼마켓에 가면 일회용 종이 접시, 일회용 플라스틱 칼과 포크, 일회용 컵 등을 팔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쁨도 거의가 다 일회적 기쁨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화장실에 갔다오면 끝나고 맙니다. 좋은 옷을 새로 사 입어도 세탁소에 한번 갔다오면 끝나고 맙니다. 새 차를 사면 처음에는 열심히 세차를 하고, 닦지만 일년이 지나고 나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또 새 집을 사도 일년 지나고 나면 그 감격은 살아지고 맙니다. 미국에 이민 간 분들을 보면 처음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환경이나 집이나 자동차나 음식이나 모든 것이 좋아서 기뻐하지만 영주권을 받고 나면 끝나고 맙니다. 교회건축도 그렇습니다. 예배 볼 때가 없어서 공원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어디 세라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일단 들어가 놓으면 작아도 내 교회가 있으면 눈치 안보고 신앙생활 할텐데 하다가 이제 본당도 크게 짓고 나니까 그 감격도 없어져서 무엇이 불편하고, 무엇이 어떻고 하면서 불평이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참 기쁨입니까? 참 기쁨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영원한 기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주는 기쁨은 다 잠정적인 기쁨이요 일회적인 기쁨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직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이라야 영원한 기쁨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 주시는 영적인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죄의 기쁨]입니다. 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 양녀]가 되었다는 기쁨입니다. 장차 누리게 될 [천국에서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천국에서 받게 될 상속을 생각할 때 더욱 커집니다. 이 땅에서도 밥이나 먹고, 그저 건강하게 돼지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데 참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직업의 높고 낮음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물론 다윗처럼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에스더를 통해서 민족을 구원한 모르드개 같은 사람은 대궐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는 창녀출신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 같은 사람은 세리출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큰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참 기쁨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2.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쁨은 어디서 왔습니까?
1. 48절의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대로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을 보면서 기뻐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때 기쁨이 옵니다. 저의 기쁨도 우리 교인들이 잘 믿는 것을 볼 때에 옵니다. 반대로 교인들이 주일성수를 하지 않고, 슬슬 잘 빠지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세상길로 갈 때에는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영적 기쁨이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제자들이 가졌던 두 번째 기쁨은 49절에 보니까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참 기쁨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기쁨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3. 그런데 이상한 것은 50절에 핍박을 받아 쫓겨날 때 제자들은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아요? 인정받고, 진급되고, 성공할 때 기뻐한 것이 아니고, 핍박을 받고, 쫓겨날 때에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고 이 핍박과 쫓겨남이 바로 경건의 증명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핍박은 천국에서의 상급에 대한 보증수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현재의 고난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4. 52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실 때에 기쁨도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참 기쁨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두 번째 선물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먼저 우리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인도하여 형통케 하십니다. 그래서 참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믿습니까?
3. 그러면 오늘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 기쁨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1. 먼저 소극적인 방법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잊지 않을 때] 기쁨이 계속해서 생깁니다. 반대로 [건망증]은 우리의 참 기쁨을 상실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깁니다. 이것이 불행과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쁨은 표현할수록 커집니다. 나눌수록 커집니다. 반대로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집니다. 그래서 기쁨은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것이 좋고, 슬픔은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서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기쁨을 표현해야 합니까? [항상 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웃으면 엔돌핀이 나옵니다. 긴장하거나 슬퍼하면 아드레나린이 나와서 우리들을 더욱 슬프게 만듭니다. 그래서 한국의 속담에 [웃는 집에 복이 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기도가 영적 건강에 좋듯이 웃음은 신체적 건강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웃을 때에는 엔돌핀이 나와서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온 몸에 윤활유 노릇을 합니다.
웃음은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 않지만 많은 것을 창조합니다. 웃음을 준다고 가난해지지도 않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을 풍족하게 만듭니다. 웃음은 잠간 동안 번득이고 지나지만 그 기억만은 영원합니다. 웃음은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가정의 행복을 창조합니다. 피곤한 사람에게는 안식을 주고, 낙심한 사람에게는 빛을 주고, 슬픈 사람에게는 위로를 줍니다. 또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해독제가 됩니다. 그래서 일본의 속담에는 “웃음이 명약”이란 말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시간에는 우리의 웃음을 연습하여 보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하면서 옆에 사람에게 여러분들의 웃음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 강아지는 절대로 웃지를 못합니다. 그냥 꼬리만 흔들고 와서 손을 빨 뿐입니다. 왜냐하면 웃음은 사람만이 가지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웃음을 잃고 사는 사람은 죄송하지만 개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웃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2. 장차 [주실 기쁨을 소망할 때] 우리에게 기쁨이 넘칩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을 보면 보는 사람에게도 기쁨이 옵니다. 신랑감은 싱글벙글하고, 신부는 표현하지 않으려고 문을 닫고, 혼자서 거울만 보면서 "흥 나한테 반했어" 하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아느냐구요? 저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주실 기쁨을 소망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주안에서 살 때에] 기쁨이 넘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주안에서 기뻐하라”(4:4)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사는 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기쁨은 두 번째 열매가 바로 기쁨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런데 성령의 열매를 조사해보면 처음의 세 가지,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기쁨이 옵니다. 믿습니까?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불신] 속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유명한 불신자였던 볼테르는 “나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행복은 [쾌락]에도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쾌락의 삶을 살았던 바이런 경은 오직 내게는 벌레와 궤양과 슬픔만이 있을 뿐이라고 탄식했습니다. [돈]에도 참 행복은 없습니다. 미국의 백만장자였던 제이 굴드는 죽으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또 행복은 [지위와 명예]에도 없습니다. 지위와 명예를 가졌던 비콘스필드 경은 “나의 젊음은 실수요, 장년은 투쟁이요, 노년은 후회뿐”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3장 1절에 보면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우리가 기쁨을 누리는 실제적인 방법은 우리들이 주님의 [기쁨 조]가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는 김정일을 위한 기쁨조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 교회에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모를 위한 기쁨 조가 있습니다. 사모가 교인들이 하는 말에 충격을 받고,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우울증 같은 증세가 나타날 때에는 몇몇 분들이 자원해서 사모를 위로하기 위해서 만든 모임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 모두가 주님의 기쁨 조가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됩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나는 주님의 기쁨 조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옆에 있는 부부들끼리는 손을 잡고, 혼자 사시는 분들은 주먹을 꼭 잡고 이렇게 서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부들은 [나는 당신의 기쁨 조입니다]라고 고백하고, 혼자 사시는 분들은 [나는 오직 주님의 기쁨 조입니다]라고 다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웃기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속에 참 기쁨이 옵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방법은 우리가 [의미 있고, 보람있는 일을 할 때]에 참 기쁨이 옵니다. 제가 왜 목회를 하는지 아십니까? 가장 보람있고,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보람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위를 보면서] 살 때옵니다. [밖을 향해서] 볼 때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소라처럼], 조개처럼 자기 안에 갇혀서 살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 나와야 기쁨이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월평 동산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너, 나를 막론하고, 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안에 있을 때에 오고, 과거에 주신 은혜와 기쁨을 잊지 않을 때 오고, 성령을 받을 때옵니다. 중요한 것은 기쁨을 표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기쁨들이 충만키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