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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00714 / 행 16:1-10 /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보다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0.07.11|조회수3,152 목록 댓글 0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보다(1)

16:1-10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6:1-10 / [바울과 실라를 따른 디모데] 바울과 실라는 더베에 들렀다가 루스드라로 갔는데 거기서 디모데라는 신도를 만났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 태생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신도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3) 그래서 바울은 자기들의 전도여행에 동참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출발하기 전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할례를 받게 하였다. 4) 그러고 나서 그들은 도시마다 두루다니면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결의한 이방인들에 대한 사항을 전달하였다. 5) 교회는 날이 갈수록 믿음이 자라고 신도가 점점 늘어갔다. 6) [바울이 본 환상] 그 다음에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그냥 통과하였다. 성령께서 아시아 지방에는 가지 말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이다. 7) 그들이 무시아 지경 가까이 이르러 북쪽 비두니아 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또다시 예수의 영이 허락하시지 않았다. 8) 그래서 무시아 지방을 통과하여 곧장 드로아로 갔다. 9) 그날 밤에 바울은 바다 건너 마게도냐에 사는 사람 하나가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았다. 10) 우리는 곧 마게도냐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께서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우리를 보내시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합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죽음 직전까지 고통을 당했던 곳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 곳에서 바울은 어떤 은혜를 경험하게 될까요?

 

디모데를 만나게 되다(1-5)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서 바울은 디모데라는 제자를 만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를 가리켜 믿는 유대 여자라고 하는데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와 더베를 방문했을 때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14:6-7). 디모데후서 15절에서는 바울이 유니게라고 이름을 소개하면서 그녀의 믿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렇듯 어머니로부터 좋은 믿음을 물려받은 디모데는 믿음뿐만 아니라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까지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부터 30km 떨어진 이고니온에까지 좋은 평판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이 얼마나 좋았는지를 알게 합니다. 바울은 그와 함께 동역을 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보면 혼혈인이라는 것이 디모데에게 큰 약점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은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1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지만 바울은 이방인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을 보게 되다(6-10) 바울은 계획을 따라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 거기서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는 수 없이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가게 됩니다. 거기서 바울은 환상을 보게 됩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자신들에게로 건너와서 도와달라고 바울에게 간청하는 환상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몇 번이고 바울은 선한 의도로 복음을 전하고자 힘썼지만 그 때마다 벽에 부딪혔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방향을 바꿔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10절에 등장하는 우리입니다.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사람은 디모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도 역시 바울과 뜻을 같이하여 순종했던 겁니다. 이런 일을 통해 복음이 더욱 효과적으로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적용: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는 데는 성삼위 하나님의 인도하심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아름답게 세워지기 위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솜뭉치 1kg과 쇳덩어리 1kg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요?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당연히 둘의 무게는 같습니다. 입으로 후 불기만 해도 날아가 버리는 솜도 뭉치고 뭉치면 쇳덩이와 같은 묵직한 무게를 가질 수 있습니다. '힘들다, 어렵다, 포기하고 싶다' 지금 전 세계는 여러 어려워진 사정으로 힘겨워하는 이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동안 지금보다 더 힘든 역사와 고통의 시간을 함께함으로 잘 극복해 왔습니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개인의 힘만 발휘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함께한다면 우리의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삶의 밤을 지날 때

16:1-10 / 임병익 목사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삶의 밤을 지날 때'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그의 선교계획 중 큰 충격을 받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겠다고 크나큰 포부와 꿈을 가지고 아시아로 출발했습니다. 바울 선생과 그 일행은 아시아로 나가서 복음을 증거 하려고 하는데 가는 곳마다 성령이 그들을 막았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복음 증거는 처참하게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바울 선생같이 유능한 주의 종이 선교에 실패하다니 생각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용기를 내어서 그러면 이대로 우리 비두니아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자. 돌아서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비두니아로, 비두니아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선교 사역을 시작했는데 여기에서는 또 예수의 영이 하지 못하게 막는지라. 그는 비두니아에서 아주 큰 좌절을 갖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연속해서 두 번 그들은 목회에 실패를 하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마음이 좌절됐습니다.

성경은 보니 바울은 그 이후로 도로야?로 내려오니 담?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데 올라갈 때는 좋지만 내리막길을 갈 때는 대단히 힘듭니다. 밝은 대낮에 사는 것은 좋지만 캄캄한 인생의 밤을 맞이할 때는 그 때의 안타까움과 절망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바울은 두 번 크나큰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그의 선교 사역에 두 번 실제로 큰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로야로 내려왔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이 떠났다. 그는 아시아도 실패하고 비두니아에도 실패한 사람이다. 보아라. 지금 도로야에 내려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지 않냐. 바울 선생의 생애는 밤중과 같이 캄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그는 기도하고 있는데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마게도냐에 있는 환상이 나타나서 바다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그는 실패하고 실망하고 좌절되고 그리고 내리막길을 내려가서 밤중에 처했을 때 새로운 환상을 얻는 기회를 얻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일행이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간 것이 전 유럽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동기와 기회가 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 증거의 성공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바울 선생과 같이 여러 가지 실패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한번 실패하고 좌절하고 또 자른 일에 손을 대었다가 또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그렇게 되면 좌우간 우리는 어찌 할 수 없이 인생 내리막길을 내려갑니다. 마음도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생활도 내리막길을 내려갑니다. 주위사람들도 모두다 실패자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캄캄한 인생의 밤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 것은 이 밤을 맞이할 때 우리가 그만 원망하고 불평하고 방황하기 시작하면 파멸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바울처럼 그 밤중에서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면 그 밤을 통하여 하나니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는 환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밤중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희망찬 길을 하나님은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한 두 번의 인생의 실패가 우리 인생에 절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그 좌절과 절망과 밤이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개척해 주고 새로운 내일의 꿈을 펼쳐주는 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실망을 하고 좌절되고 밤에 처했을 때 어떠한 삶의 자세와 태도를 취해야 될까요.

 

1. 우리가 인생에 좌절하고 밤에 처할 때는 회개하는 기회를 삼아야되는 것입니다

 

.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되었던 간에 우리를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내리막길을 걸어가게 하고 환난에 처하게 하고 밤에 처하게 할 때는 우리에게 그 무언가를 가르치시려고 하고 그 잘못된 길을 깨우치게 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옛길을 버리는 회개를 해야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만의 딱딱한 껍질이 내 몸에 붙을 수가 있습니다. 또 불순종이 내 몸에 붙을 수 있고 세속이 나를 덮어 씌울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껍질을 개고 이러한 천을 들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기회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과 환난을 당하고 캄캄한 밤에 부딪칠 때는 자기의 죄와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하고 깨어지는 그러한 시간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시험, 환난 당할 때 회개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으면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같이 멸망을 자초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와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할 뿐 아니라 조상의 죄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상이 잘못하면 조상의 죄로 말미암아 자손 3-4대까지 하나님께서 심판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의 잘못한 죄까지라도 우리는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사회와 민족의 죄도 회개해야되는 것입니다. 사회와 민족이 잘못한 것이 그 사회와 민족 가운데서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크나큰 타격과 충격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회와 민족을 위해서 대신해서 회개하는 기도라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과 환을 통하고 좌절되고 밤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될 것은 자아를 깨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5절로 13절에 보면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징계가 다가올 때 낙심하지 말고 피곤해서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무릎이 흔들려서 그만 이젠 못 걸어가겠다고 주저앉지 말고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 밤이 어두울수록 맑은 낮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좌절하고 실망하고 캄캄한 밤에 처한 그때가 새로운 인생의 태양이 떠오르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러한 밤을 맞이한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고 크나큰 희망을 주는 동기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 모두다 인생에 좌절하고 밤을 맞이한 사람들이 그 밤중에서 부르짖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고 삶의 새로운 태양을 발견하게 된 사실들을 다 간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밤을 지날 때는 그 무엇보다도 첫째로 해야 될 것이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성경에는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성경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그러면 내가 저와 같이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환난의 캄캄한 밤중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간구 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사는 길을 주님께서 고쳐 주셔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생활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이 세상살이에 너무 바빠서 세상 출세하기 위해서 부귀를 얻고 영화를 얻기 위해서 세상 삶의 너무 치중해서 그만 십자가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치를 전도시킵니다. 중요한 거 하지 않고 먼저 할 것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몸이 의복보다 중하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이 추운 날 맵시내려고 스타일 내려고 패션 옷을 속옷도 입지 않고 입고 아주 멋있게 패션을 내는 것은 좋지만 그로 말미암아 감기가 걸려서 나중에 집에 가서 몸살로 들어 누우면 그 패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몸이 의복보다 중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위해서 옷을 입어야지 패션을 위해서만 옷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또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않으냐. 여러분 미식가가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배탈이 날줄 모르고 여기저기 먹어댑니다. 그래서 몸무게가 뚱뚱하게 늘어지고 온갖 병이 옵니다. 술 먹는 사람은 제1차를 마치고 또 어깨동무해서 2차 마시고 또 3차 마시고 어허라 좋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 위장은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합니다. 인생에 우리가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가치를 전도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며 깊은 밤에 취하게 되면 인생을 살펴보게 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가며 무엇 때문에 사는가 지금 내사 무얼 하며 살고 있는가 살펴보게 될 때 아 내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의 삶을 떠났구나 예수만이 가장 중요하고 십자가 못 박힌 예수를 믿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 중심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방황했구나. 기도할 때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것을 깨닫지 못해요. 예수 중심을 찾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중심에 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환난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간절히 구할 때, 우리 마음의 잘못된 삶의 가치 전도를 주님께서 바로 잡아주시고 그와 함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도움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무엇인지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면 내가 응답하리니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여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캄캄한 밤중에 우리가 할 일은 우리는 간절히 우리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찾고 부르짖는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운명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캄캄한 밤에 처해 있을 때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춥고 어두울수록 여러분 찾아갈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흥청망청 살고 우리가 잘될 때는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우리가 고난에 처하면 그런 사람들 다 떠나가고 맙니다. 내가 가까이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왜 이러한 일을 당하는가 깨닫게 하는 교훈을 해줍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더 좋은 교훈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교훈하면 섭섭함을 느낄 때가 있지만 하나님 말씀이 내게 가르칠 때 이 말씀이 내게 주는 교훈은 두 날 가진 검보다 예리합니다. 내 속에 들어와서 나의 잘못된 인생을 수술해 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을 지날 때는 하나님 성경을 찾아갈 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찾아갈 때인 것입니다. 말씀이 주는 위로보다 더 큰 위로가 없습니다.

여러분 고통 당할 때 고난 당할 때 하나님 말씀 읽고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주는 위로는 우리의 영혼을 정말 물댄 동산같이 만들어줍니다. 옛날에 세상에 취해서 허덕일 때는 주의 말씀이 내 마음에 건성으로만 들려오고 뼛속에 사무쳐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크나큰 계시로서 임하시고 말씀이 그렇게도 우리 마음속을 위로할 수 가 없습니다. 꿀보다 달고 송이꿀 보다 더 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열어주시고 용기를 넣어주시고 희망을 넣어주시고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거 없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나는 나갈 것이다. 나는 피하지 않는다는 그런 긍정적인 삶의 힘의 근원을 우리는 말씀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고 밤을 지날 때는 하나님 말씀에서 새로운 삶의 원동력을 찾을 때인 것입니다.

 

4. 우리가 시험과 환난 당하고 캄캄한 밤을 지날 때는 믿음의 선배나 동지들과 대화를 할 때인 것입니다.

 

세상 친구들은 좋을 때는 대문이 미어져라 다가와도 내가 약해지면 다 떠나가고 없어집니다. 우리 한국의 옛말에 정승의 개가 죽으면 집이 미어지도록 사람이 오지만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안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30년 목회하면서 많이 보았습니다. 권세 있고 세도 있는 사람들 집에 문제가 생기면 꽃다발이 온 집안을 뒤덮을 만큼 들어오고 사람들이 돌보지만 그 권세 있고 세도 있는 사람이 가버리니까 그가 장례식을 갈 때 얼마나 쓸쓸한지 몰라요. 세상 친구들은 좋을 때 좋은 친구들이지만 여러분 고난 당할 때는 떠나갑니다. 잠언서에도 그 말이 있어요. 친구는 좋은날에 있고 형제는 환난 날을 위해 있나니라.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는 여러분 그래도 자기의 형제들이 제일 가깝습니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는 말이 그 말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 형제와 친구들은 고난 당할 때 떠나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떠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믿음의 선배나 동기들과 대화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나 혼자서 고독하게 기도하고 울고 있지 마십시오. 그 때문에 구역장이 필요하고 조장이 필요하고 주의 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당할 때 나 혼자 있지 말고 구역장을 찾아가십시오. 조장을 찾아가십시오. 주의 종을 부르십시오. 주의 종을 찾아오십시오. 왜냐하면 성경에 말하기를 너희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하늘의 계신 아버지가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 혼자 기도할 때 힘이 없어서 안될 때 다른 사람이 옆에서 도와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성경에는 홀로 걸어가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니 이는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없거니와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면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추울 때 혼자 누워서 자면 춥거니와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자면 체온 때문에 따뜻해지고 세 개의 실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 이상이 합심해서 기도할 때 내 기도는 약하나 환난과 시련을 이겨낸 나의 선배의 기도, 동료의 기도는 강하기 때문에 이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축제를 주셔서 온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다 모여서 혹은 한 주일씩 혹은 두 주일씩 축제를 가지곤 합니다. 저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왠 축제가 이렇게 많으냐 축제일 무슨 장막절 이니 무슨 추수절 이니 무슨 77절이니 무슨 절이니 하고 절기를 지킨다고 온 백성들이 와서 다 모여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찬송을 부르고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왜 하나님은 축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이기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부르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닙니다.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이면 의견이 불일치 되어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서로 물고 찢기도 하고 그리고 또 화해하고 또 용서하고 또 서로 손을 합쳐서 밀고 가기도 하고 이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두 세 사람 함께 모여 축제의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일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수요일 날 와서 함께 성경책을 펼쳐놓고 해석을 하고 기도하고 듣고 아멘을 하고 그리고 또 구역예배에 구역끼리 모여서 찬미하고 성경보고 감사 드리고 혹은 철야기도하고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이 다 모여서 함께 찬송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가정예배를 드리고 이것 모두다 축제입니다. 하나님은 축제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같이 계시겠다고 한 것이지 외로운 길을 혼자 걸어가는데 하나님이 같이 계시겠다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환난과 고난 당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와서 그 환난과 고난 시에 축제의 하나님을 모셔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함께 기도를 하고 함께 외치면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셔서 흑암은 광명으로 무질서는 질서로 죽음은 삶으로 실패는 성공으로 가난은 축복으로 변화시켜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선배나 동지들과 함께 항상 모여야 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모여야 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를 하고 함께 찬송을 하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외로울 때는 약해져요. 그 마음도 약해지고 신앙도 약해지고 생활이 약해져요. 그럴 때는 믿음과 격려의 말씀 동정의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자기가 약해지고 자기가 무능력해질 때 그 신앙의 선배나 동료나 목사님이 오셔서 위로해주는 한마디 한마디가 평소에 자기가 다 아는 말이지만 그 말이 굉장한 마음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혼자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면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줘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께서 고난 당할 때는 믿음의 선배나 동지들과 반드시 대화를 하십시오. 그 대화를 통해서 여러분은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고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여러분 고난당할 때는 그 고난을 인하여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과 고난은 신앙 인격을 성숙시키고 인생을 새롭고 깊게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환난과 고난을 한번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도리가 없습니다. 자기가 밤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가 배가 고파 보지 않은 사람이 남 배고픈 사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전쟁과 환난을 통해보지 않은 사람이 전쟁과 환난이 무엇인지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일정시대에 태어나서 일본사람의 압제를 당한 것을 알고 6.25사변 때 그 생활의 고난과 슬픔과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전쟁을 당하거나 배고픈 사람이나 피난민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찡 합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그것을 봐도 재미있게 봅니다. 왜냐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에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리가 말씀만 읽고 성령 충만하고 기도만 한다고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건성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 가운데 시련과 환난과 고난을 통하게 되면 그를 통해서 그는 신앙이 깊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말미암아 신앙의 인격이 성숙되고 인생을 더 깊은 눈으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다른 사람의 고난을 깊게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면으로 햇빛 쨍쨍 나는 찬란한 축복도 주시거니와 또 천둥 번개 치고 비가 쏟아지는 고난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격이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또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깊이 깊이 인생을 알고 신앙을 아는 사람으로 성숙하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고난 당하지 않는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축복과 함께 시련과 고난을 하나님이 반드시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연속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고 하나님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고난의 길이 바로 희망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 잊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얼마나 신앙이 좋고 올바른 사람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에 가 있는 형들에게 아버지 심부름으로 음식을 갖다 주는데 형들은 요셉을 잡아서 옷을 벗기고 아라비아 대 상인에게 종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그가 갑자기 사랑 받던 아버지의 품을 떠나 형들에게 배반을 당하여 팔렸습니다. 묶여서 아라비아 대상인의 종으로 끌려갈 때 그 길은 어마어마한 고난의 길입니다. 그의 앞길은 칠흑같이 어두웠었습니다. 절망은 마치 깊은 대양의 파도처럼 그를 엄습해왔습니다. 끌려가는 요셉에게는 이제는 희망이란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도 요셉이 가는 길은 절망의 길입니다. 그 당시에 종으로 팔리면 종은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었습니다. 그는 애굽에 끌려가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렸었습니다. 그는 종으로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억세게, 억세게 일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다시 인정을 받아서 종의 들의 총무가 되었습니다만 그만 보디발의 아내의 참소를 받고 난 다음에 무참하게 버림을 당하고 수없이 시위대장에게 짓밟히고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시위대 감방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절망입니까. 거기는 어두운 밤도 그런 밤이 없습니다. 어떻게 운명이 그렇게 변해갑니까. 요셉이 무슨 큰 죄를 지었습니까.

그는 죄를 짖지 않았습니다. 17살의 나이에 그는 이제는 30살이 될 때까지 그 기나긴 세월동안 13년 동안 종으로 죄수로 그는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요셉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주었었습니다. 그런데 술 장관과 떡 장관이 모의를 하다가 잘못돼 잡히어서 동일한 감옥에 들어왔으나 요셉이 그들에게 꿈을 잘 해석해 주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훗날에 바로가 어려운 문제를 당해서 해결하지 못할 때 그것이 소문이 나서 요셉은 순식간에 감옥에서 인도해 나와서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7년 가난을 환난을 면하게 해주시고 그 온 식구들을 다 구원하는 위대한 희망의 길을 열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고난의 길이 바로 희망의 길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우리가 시험과 환난을 당해서 드로아의 캄캄한 밤에 맞아주신 그 때 새로운 희망의 환상의 별이 떠오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결코 시험과 환난이 우리에게 절망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시험과 환난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은 머릿속에 있는 지식적인 하나님이지만 시험과 환난을 통하고 난 다음 체험하는 하나님은 내 뼛속에 하나님이 되고 내 살 속에 하나님이 되고 내 핏속에 체험하는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 성?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한쪽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할 가치가 없다. 오늘날 신앙도 한가지입니다. 고난을 당해보고 인생에 좌절을 당해보고 캄캄한 밤을 만나보지 않은 사람과 신앙을 논할 가치가 없다. 신앙이란 단지 와서 성경 일고 찬송하고 기도함으로만 신앙의 도란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깊은 고난의 골짜기를 통하고 인생의 깊은 좌절을 맛보고 깊은 밤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되고 새로운 소망의 길이 열리고 황량한 빛을 안고 나온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위대한 신앙인이 되고 그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알게되고 이러한 사람의 신앙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고 새로운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그 신앙의 우리의 모범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인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버림당하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그는 매맞고 그는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히고 창을 받아 심장이 터져 물과 피를 다 쏟고 처참한 고난 중에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몸부림쳤습니다. 그의 몸부림과 그 고통과 그 눈물과 그의 흘리신 피와 그의 흘리신 땀과 그 모든 것이 ?같이 닫혀진 저 심판의 하늘 문을 활짝 열어 제끼고 천당 길을 밝게 비춰놓고 만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희망의 길입니다. 고난의 길은 바로 천국의 길인 것입니다. 고난의 길은 바로 하나님과 손을 잡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너희 중에 환난 당한 자가 있느냐 고난 당한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고난은 여러분을 멸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밤을 지날 때는 새로운 소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앙의 한 단계 깊은 세계로 연단한 길이란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별과 깉이 빛나는 사람들(18)

16:1-3, 2:19-22, 딤후4:9 / 김명혁 목사

오늘은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18번 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두 주일 동안, 큰 별 사도 바울을 만든 작은 별들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두 주 전에는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 지난 주일에는 바울의 형제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저들은 사도 바울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들의 격려와 도움과 수고와 희생 때문에 사도 바울은 기쁨을 가지고 생명을 다 바쳐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큰 별 사도 바울을 만든 또 하나의 작은 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별은 디모데 별입니다. 아들 별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자기의 참 아들 또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큰 위로와 큰 기쁨과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디모데는 바울이 환난 중에서 만난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만난 곳은 루스드라였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루스드라는 바울이 제 1차 선교여행 때 그곳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되었던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14:19). 박해가 가장 심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를 떠나 더베와 안디옥과 예루살렘에 갔다가 제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다시 더베와 루스드라에 왔을 때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로이스와 유니게로부터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믿음의 청년이였습니다. 성품이 선하고 착해서 루스드라 지역의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모범적인 청년이였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16:2). 아마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제 1차 선교여행 때 돌에 맞아 죽게 되면서도 예수님을 진지하게 증거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을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딤후3:11). 바울이 돌에 맞는 모습을 보고 디모데는 마음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디모데는 바울이 생명을 바쳐 전하는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디모데가 사도 바울을 다시 만났을 때, 루스드라를 찾아 온 사도 바울을 다시 만났을 때 디모데는 사도 바울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믿음의 아들로 삼아 달라고 청원을 했을 것입니다. 평생을 다 바쳐 사도 바울을 스승으로 아니 영적인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무릎을 꿇고 서원을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모두 다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세상인데 특히 유대인들은 자기를 잡아서 죽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자기에게는 가정도 없고 아내도 없고 아들도 없는데, 믿음의 청년이 그 지역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듣는 모범적인 청년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아들로 삼아달라고 청원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한 돌 맞음의 복음 전도가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가장 극심한 박해가 가장 큰 기쁨과 위로의 열매를 가져온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부터 사도 바울은 고난과 핍박과 박해를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12:10). 디모데의 사건은 사도 바울의 삶의 색깔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기뻐하는 밝은 색깔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기뻐하나니"(5:3). 디모데가 위로와 기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고 (그의 부친이 헬아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므로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디모데는 이제부터 바울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게 됩니다. 빌립보로 가면 빌립보로 가고 데살로니가로 가면 데살로니가로 가고 로마 감옥에 가면 로마 감옥에도 함께 갑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한 평생 큰 위로와 격려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환난 중에서 만난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2. 디모데는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않고 예수의 일을 구하는 충성된 일군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일을 구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성공과 자기의 평안과 자기의 행복을 구합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않고 바울의 일을 구했고 교회의 일을 구했고 예수의 일을 구했습니다.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의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는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2:20-22). 바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모두 다 자기 일에 바빠서 사도 바울의 일을 돕지 못하고, 모두 다 자기 아이들 일에 바빠서 교회 일도 하지 못하고, 모두 다 자기 사업 일에 바빠서 예수의 일도 하지 못하는데, 디모데는 자기의 일을 돌아보지 않고 바울의 일과 교회의 일과 예수의 일 만을 구하며 힘쓰고 수고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도 바울은 얼마나 큰 힘을 얻었을지 모릅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의 아들과 제자가 된 후 언제나 바울을 따라다니며 바울의 일을 도왔습니다. 빌립보에 갈 때도 데살로니가에 갈 때도 베뢰아에 갈 때도 고린도에 갈 때도 에베소에 갈 때도 거기 가서 사도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관찰해 보니까 디모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돕는다고 하면서도 교회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일을 한하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의 몸과 자기의 자기의 가족과 자기의 사업과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성공과 자기의 행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데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디모데는 몸이 약했는데도 자기 몸에 대한 관심은 없었고 디모데의 관심은 오직 사도 바울을 돕는 일이었고 오직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이었고 오직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디모데에게 아무 주저 없이 맡기곤 했습니다. 마게도냐에 보내어 전도를 하게도 했고 에베소에 머물며 자기 대신 목회를 하게도 했습니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19:22).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딤전1:3).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디모데] 밖에 없음이라"(2:20,21).

디모데는 바울의 일과 교회의 일과 예수의 일에만 미친 사람이었고 바울을 참으로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일에 미친 디모데를 바라볼 때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치 요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사위가 될 번 했던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오직 예수의 일에 미친 것을 발견하고 큰 감동을 받았던 것처럼 사도 바울도 예수의 일에 미친 디모데를 바라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디모데를 바라볼 때마다 사도 바울의 가슴이 뜨겁게 뛰었을 것입니다. 자기도 디모데처럼 생명을 다 바쳐 예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자극을 받았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않고 예수의 일을 구하는 충성된 일군이었습니다.

 

3. 디모데는 바울의 마지막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순교를 기다리면서 누군가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누군가를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믿음의 아들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마지막 순간에도 믿을만한 사람이었고 사랑할만한 사람이었고 소망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에 아무런 미련 없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도 인간적으로 말하면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자기가 할 일을 다 맡기고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교자 바울의 별이 로마의 밤 하늘에 그리고 천국의 낮 하늘에 찬란하게 그리고 기쁘게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믿음의 아들 디모데의 작은 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보고 싶었습니다. "디모데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9).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딤후4:21). 마지막 순간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야"(딤후1:2). "내 아들아"(딤후2:1). 마지막 순간에 뜨거운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디모데에게 맡기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부탁하신 사명을 이제 아들 디모데에게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내가 네게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2,5).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못 다 한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큰 별 사도 바울을 만든 작은 별 디모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환난 중에서 만난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않고 예수의 일을 구하는 충성된 일군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마지막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주역도 필요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조역이 더 필요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주역 조역의 구별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에게 꼭 같은 칭찬을 했습니다. 여러분들과 제가 디모데와 같은 위로와 기쁨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일을 구하는 대신 예수의 일을 구하는 충성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와 같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대상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서 디모데와 같은 충성된 일군, 주님의 사랑 받는 아들과 딸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칭찬 받는 신앙생활

16:1-5 / 서화평 목사

칭찬하며 삽시다. 이는 곧 남의 잘한 것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며, 축복하며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 청년들은 칭찬 릴레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끊이지 않는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칭찬은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는 사람도 기쁘지만 듣는 사람에게 큰 격려와 용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3번의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2차 선교여행 때에 루스드라에서 아주 소중한 젊은이를 만납니다. 그가 바로 바울의 평생 동역자요 신앙의 아들인 디모데입니다. 디모데가 어떤 인물인지 오늘 본문은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이 구절에 바로 신앙의 열매이자 인생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고 사람에게 칭찬 받는 자가 인생의 성공자 아닙니까?

 

그럼 칭찬 받는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이 으뜸이요,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로 택했을까요? 믿는 형제들로부터 칭찬 받는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칭찬을 받을 욕심으로 스스로 자기를 높이면 오히려 칭찬을 잃어버립니다. 영혼의 기쁨과 감격을 소멸합니다.

요새 결혼생활 때문에 고민을 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행복한 꿈을 안고 결혼한 젊은이들이 며칠 안 가서 실망을 합니다. "결혼이 그런 줄 몰랐다! 저 사람이 그런 줄 몰랐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나는 옳은데 상대방이 틀렸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괜찮은데 상대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자기 자신의 처지에만 집착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은 칭찬 받을 수 없습니다. "내 탓입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여유 있는 사람이요,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깨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꿈을 깨라!"는 말입니다. 즉 비전을 가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척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는 척하는 태도는 참 피곤합니다. 없어도 있는 척, 못해도 하는 척, 이렇게 척 하는 버릇 때문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제가 생깁니다. 아무리 서울대학을 나왔어도 살기 힘들면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공사판에서도 일하고자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거품을 빼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무엇보다도 인격의 거품을 제거해야 합니다.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부풀어 있는 마음!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제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곧 칭찬 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칭찬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따라 어려운 전도자의 길을 결단합니다. 그는 사명의 길을 갔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니까 그들은 계산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이처럼 계산하지 않고, 책임감과 사명감 있는 사람이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이왕이면 신앙생활도 칭찬 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을 따라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계산하지 말고, 그저 선한 일에 매진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발견하고 책임적인 삶을 살면 반드시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책임 있게 사명에 충실해 보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칭찬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3. 먼저 칭찬할 줄 하는 사람이 칭찬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보며 칭찬하기를 잘합니다. 칭찬하다보면 서로의 마음이 기뻐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칭찬하기에 너무 인색합니다. 말하는 것마다 말꼬리를 잡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칭찬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 칭찬 받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회사의 경리 책임자가 갑자기 자살을 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경찰은 즉각 조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표면상으로는 자살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맡아서 했던 회사 장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휴지통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나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번도 칭찬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제는 진절머리가 난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니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칭찬 한마디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 듣기를 원합니다. 칭찬을 아끼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칭찬 듣기를 원합니다. 칭찬을 아끼지 말고, 지금 바로 칭찬을 시작하십시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의 학교생활은 엉망이었습니다. 소년시절의 앙드레 지드는 '거짓말''속임수'에 능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꾀병으로 3주 동안이나 학교에 결석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가련할 정도로 겁이 많고 심약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비전이 없어 보이는 '열등한 학생'에 불과했습니다. 한번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를 낭송하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그저 평범하게 시를 읽었고 앙드레 지드는 감정을 한껏 실어 멋지게 시를 낭송했습니다. 선생님은 그에게 칭찬해 주었습니다. "넌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될 소질이 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잘난 척하는 학생'으로 몰려 왕따를 당했지만, 선생님의 칭찬을 생각하며 문학소년의 꿈을 키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은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지휘자의 '격려''칭찬'이 결국 명곡을 만드는 것입니다.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말은 청소년의 꿈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천국방언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누가 잘한 일이 있으면 '잘했습니다'라고 해보십시오. 남에게 미안한 일이 있으면 '미안합니다' 또 남이 미안해 할 때는 '괜찮습니다'라고 해 보세요. 또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많이 사용해 보세요. 서로의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칭찬은 생활의 활력소가 됩니다. 칭찬하는 사람도 기분이 좋고 칭찬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칭찬하는 사람은 자신이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라면 감동도 하고, 그 좋은 것을 마음껏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는 칭찬과 감사에 인색하지 말고 마음껏 칭찬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칭찬하며 살아야 할 환경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부터 실천해 보세요. 아내들은 사랑하는 남편을 보면서 칭찬할 것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남편들은 아내에게서 칭찬할 만한 것들을 찾아서 실천해 보세요. 자녀들에게도 늘 이것저것 하라고만 하지말고 칭찬해 보세요. 사실 칭찬처럼 훌륭한 교육방법이 없습니다. 칭찬을 잘하는 사람이 결국 칭찬 받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칭찬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먼저 따뜻하게 맞아 주어보세요. 그리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좀 실수가 있어도 더 잘할 것을 생각하며, "잘했어요. 훌륭해요."라고 격려와 칭찬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칭찬이 넘치는 가정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칭찬을 잘하는 사람에게 "이런 가정이라면 복을 주어도 좋겠다"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너무 따지기를 좋아하지 마세요. 너무 비판하지 마세요. 미안한 일을 한 사람에게 더 미안하게 만들지 마세요. 예수님은 우리가 잘나서 받아준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사랑으로 우리를 보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보면 모든 것이 좋습니다.

자녀들이 잘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징계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실수와 연약성에는 관대해야 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자녀의 인격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한 원리는 남편에게도, 형제 자매에게도, 교회 식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말에 칭찬이 넘쳐서 여러분들이 속한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칭찬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가 보여준 신앙생활의 7대 운동

피종진 목사

본문 5절에 보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앙운동이란 바로 믿음생활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는 갈수록 점점 더 믿음이 견고하게 성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운동이 점점 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성령의 역사와 함께 확산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믿음이 신앙생활 속에 깊이 뿌리가 내리는 열매가 맺혀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어떠한 신앙이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말씀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이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을 만나 배 안에 있는 276인이 다 죽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아우성치고 정말 죽고 사는 이런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하나님이 바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났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27:24)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배 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7:25)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이런 생활이 확장되는 것이 바로 신앙운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말씀중심의 신앙이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 바울의 이 한마디 말 속에는 그의 사상과 철학과 그의 삶의 이정표 그리고 그의 모든 생활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었고,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액면 그대로를 순수한 복음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에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말씀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신대로 순종했습니다. 사도들은 저들에게 도덕과 윤리와 철학, 처세술, 그리고 인생의 어떤 삶의 방향을 이 인간세계의 어떤 생활 속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속에서 삶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섬겨야 될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잘 받았습니다. 여기에서도 보면 저들이 말씀 중심으로 신앙이 서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고, 사탄이 내어쫓깁니다. 절망과 좌절, 죄악과 방탕 속에 빠졌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힐 때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모든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런 놀라운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그 말씀대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1에도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성경을 상고합니까? 주일 예배 때만 합니까? 아니면 월요일만 상고해서 한 주간 지내려고 합니까? 초대교회는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은 신사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눈 뜨는 순간마다 말씀을 펴놓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삶의 이정표를 설정하여 나갈 때는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서있는 이런 신앙 인격이 갖추어질 때 베뢰아사람처럼 신사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머릿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꽉 차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져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입술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나팔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영적 생활의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붙잡고 나가면 절대 천국 가는 길이 자기 앞에 혼동되거나 막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D.L 무디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기 인생의 삶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최후까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그 어머니가 하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땅 백마지기 가지는 자가 되지 말고, 성경 한 권을 가지는 자가 되라'는 이 말씀이 항상 그의 마음에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말씀하신 이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그는 미국의 위대한 16대 대통령으로서 오늘의 미국을 건설하는데 큰 공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43명의 대통령 가운데서 42명이 기독교 신자였고, 이 중에 한사람만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자들이 대통령이 되어서 한사람도 불신자가 미국을 다스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은 짧은 역사에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 된 것입니다. 바로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의 율법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회사의 율법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국회의 법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국가의 법령이 되어진다면 우리나라는 세계 1등국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가문은 뛰어나는 가문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9:20) 저들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습니다. 바로 예수의 십자가, 예수의 부활, 예수의 재림을 언제나 복음 중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신앙의 중심이요, 교훈의 중심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성가에 있는 가사처럼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옵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만족이 되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중심이 되고, 예수님으로만 만족하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세상의 것을 많이 가져도 교만하거나 거기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비록 내게 있는 것이 다 사라지고, 내가 기도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세상이 나에게 실망을 주고, 좌절 속에 빠져들게 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그렇게 상처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중심은 예수 중심, 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나의 생명은 곧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생각 속에는 예수님의 생각으로 꽉 차 있어야 됩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겸손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온유와 예수님의 거룩함이 나타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에 예수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시면 '아멘' 하세요. '주여, 나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이 내 중심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목적이 되게 해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초와 방법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가 없는 곳에는 아무런 생명도, 소망도, 기쁨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어디에 가서 하루 종일 앉아서 주고 받는 얘기 가운데 예수 얘기 한마디 없고, 찬송 한마디 없고, 기도 한마디 없으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국가의 모임이 있어서 가보면 거기에 경제계 대표, 교육계 대표, 종교계 대표 등 여러 분야의 대표가 모였는데, 한 시간 두 시간 앉아서 들어보면 다 좋은 얘기이지만 예수에 관한 얘기가 없고 기도 없이 시작하는 일에는 얼마나 지루하고 무의미한지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예수님이 계시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최대의 부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있는 것이 다 사라져도 예수님만 계신다면 여러분은 가장 귀중한 생명되신 예수님과 함께 부요한 자요, 복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처녀들이 시집을 가면 그 집에서 뭐가 제일 귀합니까? 금반지, 다이아반지, 진주반지와 같은 보석입니까? 신랑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신랑이 없는 그 집에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비록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신랑만 있다면 만족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귀하지만 신랑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다면 그것은 생명 떠난 송장이요, 불꺼진 겨울 난로요, 비 없는 구름, 향기 없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 살다가 이사간 빈 집과 같습니다. 예수 중심의 삶이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오늘 이후의 삶이 더욱 빛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스러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18:5에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구원'이라고 모든 사람 앞에 거리낌없이 전할 수 있는 예수 중심의 신앙으로 신앙이 성장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교회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2:46)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얼마나 주님이 사랑하는 곳이고, 또 주님을 만나는 곳으로써 얼마나 우리에게 복된 처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하는 자녀가 되도록 신앙을 심어주어야 됩니다. 교회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똑바로 심어주어야 됩니다. 교회를 멀리하는 자녀가 되면 이 세상의 황금 부귀 영화 다 권세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면 넘어지고 엎어져도 방주에 있는 사람은 바다에 빠져죽지는 않듯이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되는 일도 언젠가는 되게 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389장에 "세상 나라들은 멸망 받으나, 예수 교회 영영 왕성하리라"고 한 가사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영영 왕성하게 해주십니다.

여러분, 이 지상에서 교회의 문이 닫힌 나라가 잘되는 나라를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건재한 나라가 망하는 나라를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건재한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해주십니다. 교회의 문이 열린 교회는 날마다 하나님의 축복의 문도 열려 있습니다. 교회 문이 닫힌 나라는 하나님의 은총도 닫혀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교회의 문을 닫아버린 캄보디아, 라오스, 북한, 소련, 중국을 보십시오. 다 잘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노력도 많이 하고 노동도 많이 하는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기 때문에 어렵게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문을 새로 열면 축복도 다시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등한시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쓰임을 받는 지체의 사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사신 곳(20:28)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주님의 지체들이 모인 곳입니다.

서로 지체된 전후 좌우의 여러분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합니까? 서로 인사하세요.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당신을 도와주십니다' 농담이라도 우리는 절대 저주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복된 말과 소망적인 말을 하고, 하나님 앞에 서로 축복된 말, 칭찬하는 말, 위로해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아홉가지 단점이 있더라도 한가지 장점이 있으면 그것 가지고 마르고 닳도록 해보세요. 아홉가지도 다 잘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곳이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곳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축복해주시는 곳입니다. 여러분, 대통령 앞에서 국무위원들이 싸울 수 있겠습니까? 부모와 어른 앞에서 자식들이 싸워서 되겠습니까? 거기에서는 서로 좋은 말을 하듯이 우리는 성전에서 늘 이렇게 좋은 말만 해야 합니다.

 

넷째, 성령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4)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 때 성령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마게도냐로 환상 중에 인도했습니다(16:6,9). 그 때 바울은 '아멘' 하고 순종하면서 성령이 이끄는대로 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는대로 생각하고, 성령이 말하게 하는대로 말하고, 성령이 행동하게 하는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사로잡힘을 받아 말에도 손에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함께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 중심의 신앙, 예수 중심의 신앙, 교회 중심의 신앙, 성령 중심의 신앙으로 신앙이 성장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게도냐의 환상

박충길 목사

우리의 삶은 계획에 따라 진행됩니다. 그러나 삶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는 길이 막혀 있어 고생할 때도 있고, 하나님의 시간표와 일치하지 않아 오랫동안 인내하기도 합니다. 그때 좌절하고 무너지는 어려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의 손길을 느낍니다. 이 사실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배경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대인들의 결정

 

본문 말씀은 아시아에서 출발한 복음이 서방 세계로 옮겨가는 첫 과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끊임없이 보이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4,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4절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전도여행에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이방 지역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교회들이 세워지자 많은 성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볼 때, 바울이 2차전도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예루살렘의 많은 지도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논의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율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유대 남자 아기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했을 때 이방인들은 율법을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할례 의식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이방인이나 외국인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할례를 행하고 율법에 명한 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15:29)고 결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 외국인들을 할례나 율법때문에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복음은 변함없지만, 복음이 증거 되는 지역의 문화나 역사에 어긋나지 않게 전파해야 함을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 결정 이후 바울과 몇몇 사람들이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본문 5절은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다

 

하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오늘 온누리교회에게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첫째로 교회는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머뭇거리며 멈춰서거나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하루에 3, 5천 명이 회개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교회로 모여들어 교회는 든든히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가 계속 전진하기를 주저하고 자신들의 공동체로 안주했을 때, 하나님께서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예루살렘교회를 만방으로 흩으셨습니다. 교회가 발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흩어버리십니다.

사도행전 81절은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사마리아, 안디옥에도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안디옥교회는 부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안주하지 않았고 교회 지도자들은 금식하고 기도하며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 전진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계속 전진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순례를 행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후퇴하지도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039절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홍해를 만날 수도 있고 막다른 길에 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극복하고 전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홍해를 갈라야 하고, 막다른 길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침륜에 빠질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고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누리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온누리교회는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현 상태에서 만족감이 찾아들 때, 더욱 전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찍질하시고 흩으실 것입니다.

 

유럽으로 전진하는 교회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진해야 합니다. 6,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가고자 하는 비두니아라는 곳은 아시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소아시아 즉 터키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예수님의 영이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아(그들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지 않으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35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는데 사람들이 믿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시지 않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이 성령님의 강력한 능력에 사로잡혀 입을 열 수 없었기 때문에 복음을 증거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6, 7절 말씀을 통해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이를 하나님께서 막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아시아에 복음 전하는 것을 막으신 것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으시고 우리의 걸음마다 뜻을 두십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20:24).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16:9).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다를 수 있고,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뜻과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3723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순탄한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고 아예 우리가 가는 길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은 항상 우리에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보다 완전하시고 하나님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정확하십니다.

욥기 2310절에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이 홍해 앞이거나 막다른 길이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개인의 의지로 벗어나기 위해 술책이나 다른 방편을 일삼아선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결론이 최선임을 고백하고 다시 그분을 바라봐야 합니다.

 

셋째로 교회는 지경을 넓혀 가야 합니다. 8, 9절 말씀입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고 싶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소아시아에 가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유럽이란 더 넓은 곳으로 지경을 넓혀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세 번에 걸쳐 전도 여행을 다녀옵니다. 1차전도여행은 작은 지역을 다녀옵니다. 2차전도여행은 유럽 지역까지 다녀옵니다. 3차전도여행은 로마와 서바나라는 스페인까지 다녀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이 없는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현실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세계로 지경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울이 고향이나 아시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유럽과 로마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 의해 복음은 유럽으로 건너간 뒤 미국으로 전해졌고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온 복음은 북한, 중국을 거쳐 이슬람 그리고 이스라엘에도 전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도 지경을 넓혀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길을 바꿔주심으로써 복음의 지경은 확장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 초기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언더우드는 어렸을 때부터 중국에 대한 선교 소명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기도 모임에 참석했다가, 일본에서 선교하다가 오신 분의 소개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조선에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언더우드의 마음에 왜 너는 못 가느냐, 왜 너는 가지 않으려 하느냐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언더우드는 중국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중국으로 가는 길을 돌이켜 조선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한국에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93년에 인도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인도가 아닌 중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목사님은 중국에 오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아주 특이하고 재미있는 답변을 원했지만, 저는 물어보지 마세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꾸 물어봅니다. 결국 제가 한 대답은 하 목사님이 가라고 하셔서 오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중국에 머물렀던 기간은 짧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인도에 가고자 했던 것이 중국으로 옮겨졌지만, 저와 가족에게 중국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완전한 선교지였으며, 그곳에 있는 동안 많은 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결론은 우리의 결론보다 낫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우리의 뜻과 계획보다 완전하십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막혀 다른 길로 가는 것으로 인해 교회는 지경을 넓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지경을 넓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환상 중에 보았던 마게도냐 사람의 권유로 유럽으로 갔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시고 지경을 넓혀주시는 은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전을 따라 움직이는 교회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는 일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10절에 바울 일행은 즉시 마게도냐 빌립보로 떠나기를 힘썼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명을 받으면 흔히 은퇴한 후에, 돈을 좀더 번 후에 가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바로 순종하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는 기회가 항상 우리를 기다려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일은 우리의 몸에 힘이 있을 때 해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도 곤하지 않을 때 선교사로 나가야 합니다. 모든 일에 때가 있고, 그 때에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실 그 때에 즉시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과 헌신을 드릴 때 시간과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이 옳아야 합니다. 곧 주님의 비전을 따라 순종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환상을 본 후에 비전을 따라 갔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순종하고 곧바로 떠났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은 머무는 곳이고 안주하는 곳이며 사명감도 없이 그냥 지내는 곳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많은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제가 중국에 있을 때 함께 사역하시던 장로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치과 의사이셨는데 50세가 되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선교사로 가겠다고 서원하셨습니다. 치과의사로 유명해졌고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으며 모든 것이 안정되었습니다. 50세가 되었을 때 집, 병원, , 재산을 정리하고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그 분은 여행을 많이 다니셨는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았던 지난 삶을 정리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사진들을 전부 태워버렸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권사님이 우셨습니다. 그런데 장로님께서 우시는 권사님에게 여보, 이제 우리는 뒤를 돌아보고 울 시간이 없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날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볼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에 주신 ‘ACTS 29 비전을 이뤄나가는 일에 머뭇거려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따라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뒤로 물러나면 안 됩니다. 이쯤이 좋다고 안주해서도 안 되고, 이 만큼이면 됐다며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비록 예배드릴 자리가 없을 정도로 풍족하더라도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선교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에 처음 말씀 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기도 사역과 2/1만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제 선교사 2천 명과 2천 교회를 세우는 ACTS 29 비전을 주셨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해 나가자는 비전입니다. 여기가 좋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 전진해야 합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즉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나아갔던 것처럼 온누리교회는 서빙고에서 양재로 나아가 중국, 일본 등 땅 끝까지 이르러 교회를 세우는 비전을 이뤄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전진해 지경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에 주신 비전을 끝까지 이루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온누리교회가 계속 전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비전을 갖고

지경을 넓혀 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령 사역의 진행

사도행전 16:6-10 / 이필재 목사

성령에 대한 칭호가 성경에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절에는 하나님의 성령’, 로마서 819절에는 그리스도의 영’, 요한복음 1614절에는 진리의 영’, 히브리서 1029절에는 은혜의 영’, 로마서 82절에는 생명의 영’, 에베소서 113절에 약속의 성령’, 오늘 말씀 사도행전 167절은 예수의 영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모든 칭호는 한가지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그때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과 불과 바람 성격으로의 성령을 3주간 동안 설교했는데 그 외에도 성령님의 성격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님은 기름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의 임재를 나타내기 위한 구약의 문화는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직식을 했던 문화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성직자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말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주의 기름 받은 종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기름의 성격은 모든 것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기계는 기름의 도움을 받아야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름이 말라버리면 그 순간부터 기계는 고장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치유적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감람기름이나 알로베라 같은 기름은 가공 없이 직접 치유 효과가 나타나는 기름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도 제자들이 환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치유하는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물에 참기름 몇 방울이 내는 효과는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줍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사역은 기름과 같아서 모든 거친 심령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갈 수 있는 효과와 변화를 우리에게 줍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임재 속에 성령 충만하면 사람도 변화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경험하시는 대로 사람이 변화하기는 힘이 듭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이 변하는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됩니다.

 

 

 

외국에는 이런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한때 우리 한국에는 깡패 세계 두목이 목사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주먹 깡패 아니면 목사가 안 되는 것 같이 유행했었습니다. 주먹 세계의 두목이 예수를 믿고 목사까지 되는 일이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이점이 있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이런 사람들이 간증 집회를 하면 아주 인기입니다. 간증 집회는 과거가 험악할수록 효과가 있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그 성격을 가지고 어떻게 목회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동기생만 해도 주먹 하나로 서울을 휩쓸었습니다. 20대 후반에 서울을 주먹 하나로 장악하고 자기 밑에 1,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향락생활을 하던 사람이, 내가 봐도 주먹이 보통 주먹보다 크기도 하지만 힘도 얼마나 센지 그거 하나로 출세해서 서울 장안에 내놓으라 하고 휘어잡았었는데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성격을 이기고 성령의 임재가 부드럽게 나타나서 사람이 변해서 얼마나 거룩해지고 부드러워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가끔 옛날 버릇은 남아 있더라고요. 그런 왕초가 성령 받아 목사 되어 개척교회를 하려고 나갔을 때 일입니다. 열심히 사역하려고 하는데 자꾸 시골 조무래기 건달들이 사람을 몰라보고 건드립니다. “목사님! 술 한 잔 사주면 우리가 교회 나가지!” 툭툭 건드리고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저런 것들은 옛날 같으면 반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와서 저렇게 나를 건드리네!’

그런데 자꾸만 그러니까 화가 났습니다. 실화입니다. 하루는 믿는 사람들을 툭툭 건드리면서 비아냥거리니까 어휴! 하나님 안 되겠습니다.” 그 중에 대장격 하나를 잡았는데 목사가 두들겨 패면 안 되잖아요? “우리 기도하자.” 목덜미를 잡고 꽉 찍어 누르고 하나님 아버지! 이놈도 나와 같이 되게 해주십시오.” 얼마나 세게 조이는지 죽을 거 같거든요? “아이고! 사람 죽는다!” “성령이 역사할 때는 그렇다.” 놔주질 않은 겁니다. 기도도 얼마나 오래 했는지 나중에는 그 다섯 명이 무릎 꿇고 거기서 빌었습니다. “제발 목사님, 살려 주십시오. 절대로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아니다. 오래 기도해야 된다. 그 다음에는 네 차례다. 너 이리 와라.”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모여 있을 때 이 목사님이 다 같이 기도하자.” 하면 다 도망가 버렸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이 예수 믿고 성격 참고 산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변화는 기름과 같아서 바르면 부드럽게 변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임재를 기름으로 표현한 겁니다.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 임직식 때 기름 사용해서 부어주었는데 무슨 뜻입니까? 성령 충만하라는 뜻입니다. 시편 133편에 나와 있잖아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젊은 제사장이 제사장으로 탄생하는데 임직식을 하잖아요? 우리 갈보리교회에서도 목사 안수식 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이 자리가 모자랐습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 임직식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서 선배 제사장이 후배 제사장에게 안수하면서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면 기름이 흐를 것 아닙니까? 얼굴에 흘러내리고 또 제사장들은 젊어도 수염을 다 길렀습니다. 수염으로 내려와서 뚝뚝 옷까지 흘렀습니다.

 

그래서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광경을 보고 거기 참석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 가운데 우리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우리의 죄 지은 것을 속죄하여줄 제사장이 또 탄생했도다.” 그러며 좋아하면서 제사장 임직식을 했는데 이 기름이 곧 성령의 충만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임재가 제사장에게 임하여 이제 제사장 하나 탄생하는 기쁨을 다 같이 누리는 행복한 순간을 상상한 그런 시편의 말씀이 나와 있는데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설교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입고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왜 상처에 그것을 붓습니까? 기름은 치유적 물질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치유가 됩니다. 야고보서 5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치유 물질로서의 기름입니다. 더 확실한 성경 말씀은 고린도후서 121~22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기름과 성령을 동일시한 성경문화입니다. 유대인들은 왕도 성령 충만해야 국민을 다스린다.” 그래서 왕을 세울 때도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무엘상 101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 위에 붓고 입 맞추매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이 네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가 왕을 기름 부어서 왕을 세우는 임직식을 해주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기름을 머리에 붓는다는 것이 성령 충만을 의미하는 문화로 구약 때부터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머리 위에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면 왜 성령을 비둘기 같다고 표현을 했는가? 비둘기는 구약시대 하나님 앞에 사용되는 속죄 제물이었습니다. 레위기 57절에서 10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그 속죄제물의 피를 제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잘못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비둘기는 죄가 없습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희생시켜 피를 흘려서 뿌리고 목을 비틀어 죽이면서 이것의 희생으로 네 죄는 사해졌도다.”라고 하는 속죄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는 인간 속죄를 위한 희생물입니다. 창세기 86~12절을 보면 비둘기는 인간의 희망으로 나타납니다. 노아 홍수 때 노아가 물 뿌린 세상에 비둘기 하나를 날려 보내니까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물고 오니까 ! 희망이다. 이제는 물이 빠져서 나뭇잎을 물고 왔도다.” 희망상징으로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016절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하심으로 비둘기의 순결성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러한 성경말씀 때문에 비둘기의 상징 문화가 생긴 것인데 세계 공통입니다. 평화의 상징입니다. 유엔이 하는 일에는 항상 비둘기 그림을 그려 넣습니다. 왜 비둘기 그림을 그립니까? 세계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지만 유럽을 가보세요. 도시마다 비둘기가 너무 많아서 도시 행정에 문제가 됩니다. 날마다 광장의 비둘기한테 먹이를 뿌려주니까 수많은 비둘기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그 도시의 새로 지은 건물, 시청 건물 할 것 없이 수많은 비둘기가 똥을 싸니 이게 얼마나 더러워집니까? 그런데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비둘기는 여인 같은 아름다운, 가장 편한 동물, 가장 선한 동물, 순결한 동물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의 사역은 비둘기 같다. 아름답고 순결하며 선하고 평안하다.” 우리 성가대가 예배 시작할 때 송영하잖아요? “비둘기 같이 온유한 은혜의 성령 오셔서 거친 맘 어루만지사 위로의 평화 주소서아가서에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비둘기는 나쁘게 사용된 데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비둘기와 같습니다.

 

그 다음에 가장 확실한 성령님이 나에게 사역하는 약속은 에베소서 113~14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어서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성령님은 인치심이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도장 문화가 제일 발달한 나라입니다. 도장으로 뭐든지 다 합니다. 성경에도 도장 문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든 계약 문서에 도장을 찍으면 끝납니다. 땅을 사고 팔 때, 어떤 서류를 증명할 때, 무슨 상장이나 졸업장 할 것 없이 그 종이에 무슨 도장이 찍혀있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가 평가되는 문화가 도장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했으면 거기에 기록되는 모든 조건에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도장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함부로 사인도 안합니다. 왜 그럽니까?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그런 일이 없지만 미국에는 콜사이너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동차 사고 집 사고 그럴 때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되는데 못 갚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럴 때는 갚을 만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면 됩니다. 그것을 콜사인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못 갚으면 내가 갚겠습니다.” 사인해주는 것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어쨌든 돈을 주니까 교인들이 저한테도 찾아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 목사님한테 부탁하면 해줄 거 같으니까 와서 목사님! 여기다 사인 좀 해주세요.” “그게 무엇입니까?” “콜사인이에요. 자동차 사려고 그래요.” “그거 네가 못 갚게 되면 어떡합니까?” “에이! 그럴 일 없어요. 그냥 사인만 해주세요.” 이민 와서 고생하면서 자동차 하나 구입해서 타고 다니려고 하는데 안 해주면 목사는 사랑도 없어! 교인 콜사인도 안 해주나? 네가 무슨 손해 끼칠까봐. 어휴!” 이러잖아요? 그래서 에이 모르겠다. 사인해주자.’ 그런데 어디로 가버렸어요. 나한테 당신은 콜사이너라고 돈 내라고 왔어요. 꼼짝도 못해요. 저에게 이런 경험도 있습니다. 이 도장을 찍고 난 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뭡니까? “성령님이 너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도장을 찍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천국에서 인치심을 받은 자도장을 받은 자, 그 사람들만 천국에 온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에베소서 4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의 도장을 찍었습니다. 우리 눈에 안보이지만 이것은 최고의 약속이며 최고의 행복이며 최고의 영광이며 최고의 권위의 도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장은 성령님이 찍었기 때문에 성령님이 책임을 지신다는 겁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가 이해할 부분이 오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아시아 전도가 그의 사명이었죠? 우리가 늘 들어온 말로, 바울의 1차 전도여행, 2차 전도여행, 3차 전도여행이 있습니다. 아시아가 자신의 선교 활동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이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 , 7절에 보면 바울 일행의 전도 스케줄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전도하려고 계획을 짜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느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바울 사도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일을 내가 하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가?’ 이런 원망이 언제나 있잖아요? 이것이 참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좋은 계획이 있다 하여도 그것이 꼭 하나님의 계획이라고는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기록은 전도를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시아에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답을 얻어야 하잖아요? 나의 훌륭한 하나님을 향한 이 좋은 계획은 왜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항상 방해에 걸리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더 좋은 계획이 계심으로입니다. 오늘 말씀 9~10절 아시아를 막으신 성령님은 이들을 어디로? 유럽을 열어주시지 않습니까? 여기 환상을 보잖아요?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일러라.” 마게도냐는 유럽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 배를 타고 건너가서 유럽 최초의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계속해서 데살로니가, 에베소,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가 되었습니까? 유럽의 서구 문명을 발달시켰습니다. 그래서 서유럽이 다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바울의 발걸음이 아시아로 향하였다면 아시아가 유럽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럽은 인구의 90퍼센트가 다 기독교인입니다. 아시아는 90퍼센트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유럽 사람들이 건너간 나라가 미국이고 그래서 유럽을 통해서 서구 문명을 통해서, 서구 기독교 문명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역사가, 그리고 미국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주었잖아요? 성령님의 사역 진행은 때로 우리의 계획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지혜로운 사역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하고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어느 것이 성령님의 지시인가를 기다리며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역 예배 때 간증한 적이 있는데 제가 뉴욕에 있다가 LA로 온다는 말을 듣고 LA에서 즐거운 두 가지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저에게 제1목회지와 제2목회지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목사님! LA에 오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좋은 조건으로 기다렸는지 그때 제가 30대 초반인데 하나는 파사데나라고 하는 도시에 한인교회가 하나 있는데 거기가 얼마나 좋은지 LA에서 그 도시가 제일 먼저 생긴 고풍스러운 도시이고 그 도시 안에 한인 교회는 그거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제일 좋은 건물 얻어서 예배드리는데 교인도 200명 정도가 되고 목사님이 이 교회에 오셔서 목회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30대 초반에 그 시절만 해도 35년 전인데 얼마나 좋아요? 그러자고 하고 신이 나서 기다리는데 또 한군데에서도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는 교회가 7개 있었는데 거기서 새로 개척되는 몇 사람이 모여서 잔디밭에서 예배드리다가 20~25명 들어가는 조그만 방 한 칸 빌려서 이제 시작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나한테 세례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필재 목사님만 모시면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든지 모십시다.” 하면서 요청이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거기에 마음이 없었습니다. 거기는 한인교회가 7개가 있는데 나까지 들어가서 경쟁하면 이민 사회는 좁기 때문에 와도 신경 쓰이고 가도 섭섭하고. 그런데 파사데나는 교회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거기에만 마음이 쓰이는 겁니다. 그래서 잔뜩 기다리고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는데 방해 되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급한 일이 생겨서 안 된다고 하고, 오라고 하신 집사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내가 무슨 문제가 생기고. 만나지지를 않는 겁니다. ‘이상하다.’ 저는 영적으로 느낌이 왔습니다. ‘이게 뭔가 있는 거 같다.’ 또 한쪽에서는 와서 목사님! 이번 주부터 우리 교회에 오시지 않고 뭐하시는 겁니까? 왜 꾸물대시는 겁니까?” “꾸물대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겁니다.” 사실 거기에 마음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기도하러 가야겠다.’ ‘팜델이라고 하는 사막 가운데 기도원이 하나 있는데 2~3시간 운전해 가서 이틀 밤 거기서 밤이슬 맞으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해 주세요.”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사막이라서 아주 건조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놓고 나 이쪽 교회를 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세요.” 기도하면 기도 방해가 일어나는데 뱀 같은 것이 지나가는지 사각사각 소리가 나서 ? 이게 뭐야?” 그러니까 기도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방에 들어가서 잠자고 또 기도하려고 하면 안 되고. ‘이거 영적 방해가 보통 심한 게 아닌데?’ 그런데 하루 지나고 내가 가기 싫어했던 그곳을 놓고 기도하면 기도가 술술 나오고 얼마나 마음이 평안해 지는지 너 왜 욕심 부리느냐? 내가 다 알아서 할 텐데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지.’ 이런 생각이 나고 그러는 겁니다. ‘! 이거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한쪽을 접고 안 가려고 했던 그곳을 간 것이 제가 23년 동안 목회했던 교회가 된 역사가 일어났고 내가 가려고 했던 그 교회는 1년 만에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도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해서 분별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제가 갈보리교회 올 때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응답 받고 왔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이렇게 만남을 이룬 것이 이렇게 만나서 세계 선교를 이루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대로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와 인도는 언제 나타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만나지 못할 관계입니다. 하나는 로마 사람이고 하나는 유대 사람인데 유대인 종교 지도자가 이방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법적으로 위법입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사도행전 1028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내게 지시하사 만났다. 왜 나를 불렀느냐?”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당신을 초대하였나이다. 설교해 주소서.”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길게 했는데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자에게 내려오시니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 들을 때 우리 영 가운데 임재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이 옆에 가는 데도 몰라 봤습니다. 그런데 언제 깨달았습니까?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설교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세 가지 확실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120성도들 성령 충만의 사건은 합심 기도 때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의 여러 가지 사건은 설교 중에 성령님의 은혜 역사가 임재했고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찬송 부르다가 초월적 기도의 응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어려워지면 교회는 끝난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가 정한 공식적 예배는 철저하게 참석하라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찬송과 기도와 그리고 말씀 강론은 직접적인 성령님의 은혜 체험의 시간이 되는 영적 은혜가 있기 때문에 예배만은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성령님의 역사를 잘 분별해서 따라야 하는데 어떨 때는 내 주관적 고집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소멸시키는 미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제일 미련한 사람이라고 성경에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교회 대학부를 맡고 있는 전도사님이 학벌이 미국에서 한인들 가운데 제일 좋을 겁니다. 프린스턴을 졸업했고 하버드 박사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전도사였습니다. 그러니 좀 잘난 체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사람들은 미국 교인이나 한국 교인이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TV 목사가 있는데 베니힌 목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은사 집회를 합니다. 수만 명씩 모아놓고 사람들을 나오라고 해서 은혜 받은 간증을 하라고 하는데 나와서 걷지를 못하는 사람이 예배 참석해서 걷게 되었다고 하고 무슨 병이 있었는데 금방 나았다고 하고 나와서 기도 받으면 쓰러지기도 하는 집회를 하시는 분이거든요? 미국에서는 유명합니다. 저도 그분 집회하는 것이 TV에 나오니까 참 능력 있는 하나님이 쓰시는 이 시대 영적 지도자이다.’ 이 정도로 생각하고,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은 그 목사님을 매일 비판하는 겁니다. “목사님! 그거 다 가짜입니다. 다 짜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항상 보면 어떻게 간증하고 아픈 사람이 항상 앞자리만 나와 있습니까? 이것은 다 짜고 하는 겁니다.” 대학생들 모아놓고 그런 곳에 가지 마라. 다 사기다.” 늘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그거 다 짜고 하는 거 실제로 가서 보여주겠다. 날 따라와라.” 그래서 대학생들 데리고 거기 참석했단 말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은 은혜 받았다며 눈물 흘리고 찬송 부르고 성령의 은혜라고 소리를 치는데 이 친구는 앉아서 계속 비판하는 겁니다. “저기 저 사람 잘 봐라. 이제 곧 나을 테니 잘 봐라. 저거 다 짜고 하는 거다.” 예배 도중에 거기 앉아서 비아냥대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이 전도사가 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몸이 굳어져서 팍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주변에서 아니, 예배 도중에 사람이 왜 저래?” 말도 못하고 몸이 굳어 버렸습니다. 돌멩이 같이 굳었습니다. 죽지는 않고 나중에 깨어났습니다. “목사님, 그게 뭐죠?” 제 대답은 이거였습니다. “너 죽지 않길 다행이다.” “하나님이 너는 전도사이니 살려주셨다. 그렇게 강하게 성령의 역사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는 그 현장에 가서 비아냥거리고 마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성령님이 너를 가만히 두었겠냐? 너 은혜 받았다.” 그 친구가 그 이후에 신학 사상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 목회 잘 하고 있습니다. “너 좋은 경험했다. 지식 있다고 까불지 마라.” 그래서 이 친구는 그 사건 이후에 사람이 달라져서 얼마나 보수적으로 설교를 열심히 하는지 지금은 굉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조명하면 성령님이 어느 때는 나의 가는 길을 막기도 하시고 다른 길을 열기도 하십니다. 성령님 사역하실 때 조용히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 예배 때마다 성령 체험이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결심

사도행전 16:6~10 / 이필재 목사

 

오늘은 교회가 지키는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가대도 불같은 성령을 찬양해주신 것입니다. 교회 처음 나오신 분들은 약간의 혼동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말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한 하나님을 말하는 칭호인데 어떤 때는 마치 하나님이 셋인 것 같이 생각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역하신 모습이 처음에는 예언자들을 세워서 사역하신 것이 구약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직접 세상에 오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고 지금은 성령의 역사로 사역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를 일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지금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교회 나온 것은 내 영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가 함께 계셨기 때문에 되어진 일로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온 세상에 이렇게 많은 교회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함 속에 되어진 일로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실행이 이루어진 결과라고 보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성령 강림주일에 성령님의 하시는 일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또는 어떤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인가? 이 문제를 성서적으로 밝혀보는 것이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먼저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똑같이 소원하는 일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신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기다리고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소원과 나의 소원이 합의점을 이루었는데 왜 성령 충만의 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이유가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내게 임하는 것을 아주 악착같이 방해하는 악령의 역사가 있음을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이 광야에 나가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데, 기도란 내 능력으로 절대 가능하지 아니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자신에게 그대로 나타나라고 40일 금식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드린 영적 능력의 현장에 마귀가 무서워서 근처도 오지 못해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40일 금식 기도하는 자리에 마귀는 친절하게 다가와서 11로 예수님과 결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40일이나 굶었으니 배고프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 그리고 배고픈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 그게 복음이야.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제일 좋아해. 빵이 구원이야. 그런 일이라면 너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영광스럽게 살 수 있어.” 예수님이 물리치니까 성전에서 뛰어내려봐! 기적을 보여줘. 그러면 너는 인기인이 될 거야. 세상이 너의 그 신비한 것에 취해 다 너를 따르고 영원히 인기인의 영광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해!” 이것도 예수님이 물리치셨습니다.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자가 되어라. 나한테 절만 해! 그러면 네가 온 세상을 네 맘대로 다스리는 권력자가 된다. 그러면 행복해.” 그러면 초장부터 예수를 넘어뜨리려고 유혹하던 마귀가 누가 무서워서 못가겠습니까? 예수님마저도 11로 들러붙었던 마귀는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한테나 달라붙어서 유혹을 합니다. 악령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찾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우는 사자는 배고픈 사자를 말합니다. 우는 사자 앞에서 어떤 동물도 굴복 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끊임없는 악령의 방해 때문에 성령 충만의 길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마귀를 대적하라. 전신갑주를 입으라. 깨어 기도하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 모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악령의 방해를 싸워 이기라는 의미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대표적 사건이 하나씩 나타났습니다. 구약의 사울왕 사건입니다. 블레셋 골리앗이 침략했을 때 유대나라는 꼼짝 못하고 패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국가적 위기를 구원해 낸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돌팔매질을 해서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가 살아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국민들은 나라를 구원한 자는 다윗이라고 찬양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가장 훈련이 잘 된 3천명의 군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다윗을 찾아내서 죽여라. 내가 큰 상을 주겠다.” 그래서 다윗은 13년 동안 산골짜기로 숨어 다녔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이 시편은 이때를 말한 것입니다. 제사장 85명이 다윗을 살리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다윗을 피신시키고 먹을 것을 갖다 주어 살려 냅니다. 이것이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제사장 85명 모두를 끌어다 목을 쳐서 죽여 버렸습니다. 왜 사울이 그렇게 악한 일을 했을까? 성경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사울이 악신이 들린지라.”라고 했습니다. 악령이 시키는 대로 한 것입니다. 또 신약 시대에는 인신 매매, 노예 매매 제도에서 사람을 돈을 주고 사면 그 노예는 주인이 생명까지 산 것입니다. 이런 문화에서 노예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문화를 잘 아는 가룟유다가 어떻게 예수를 인신매매해서 팔아 넘겼는가? 예수를 양심의 가책 없이 돈을 주고 샀으니까 노예와 같이 죽여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가룟 유다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 답도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223절에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고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사탄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힘의 능력으로는 절대 악령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만 예수가 있기 때문에 성령 충만을 위해 영적 능력을 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는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성령의 역사는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초기 단계와 성숙 단계로 나눕니다. 초기 단계는 고린도전서 123절에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임한 성령의 첫 번째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나로 하여금 고백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세례 받으실 때 다 이 고백을 하셨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느 날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다 천국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네 자신의 지식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아버지의 영이 네 영에게 가르쳐준 것을 네가 말했다.” 이것을 초기 단계의 성령 임함이라고 말하고 아울러 이 자체를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숙 단계는 은사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단계로 발전합니다. 그냥 조용히 예수를 믿고 살다가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도 괜찮습니다. 그런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은혜에 임한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은사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어떤 사역에 몸을 바치게 하는 단계로 인도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에서 12절은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령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통달합니다.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다 아시고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6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하나님에 대해서 성령님은 항상 나를 교육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든 지식은 성령님의 끊임없는 교육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님은 나를 위해서 끊임없이 하시는 일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826~27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몇 가지 갈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는, 항상 우리는 연약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연약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바로 우리의 그 연약 부분을 도우시는 도우미 역할을 항상 약속하십니다. 내가 뭐든지 연약하지만 매우 강건하게 보이는 것은 성령님께서 나의 약한 부분에 도우미 역할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방치해 둘 것인가? 내가 하지 않는 기도를 성령님이 대신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지 않는 나를 대신해서 기도드려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보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 마음 가운데 임하실 때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성령을 영접하라.” 바울 서신 많은 곳에 너희는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며 소멸치 말며 멸시치 말고 훼방하지 말라.” 이런 하나님의 말씀들은 성령님이 나에게 가르치시고 마음을 두드리시고 역사하실 때 마음을 열고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나를 절대로 떠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가르치시고 기도해 주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 마음속에도 신앙적 회의가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나를 떠나셨는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설교할 때 제 친구 이야기를 늘 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30년이나 친하게 지낸 내 친구 목사가 하나 있는데 이 친구와 함께 신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개척교회를 시작했고 그 친구는 군목으로 갔습니다. 저는 개척교회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 가서 온갖 고난을 겪었는데 이 친구는 군목으로 가서 가자마자 장교 계급장을 달아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시간이 지나니까 연관급 장교로까지 올라갔습니다. 또 이 친구는 복이 얼마나 많은지 카투사 부대로 가서 군대 생활이 배고프던 그 시절에 그 친구는 미군 식당에서 스테이크만 썰어 가면서 지프차 운전병 두고 지냈습니다. 군목이 뭐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교인 걱정 안 해서 좋다는 겁니다. “천명 모여 있어!” 하면 다 모이니까요. 어디를 가나 그랬습니다. 개척교회를 가면 한사람 예수 믿게 하려면 온갖 정성을 다 들여야 되는데 군목은 운동장에 천 명씩 군인들이 척척 모이고 가서 계급장 번쩍번쩍 하면서 설교하고 미군 목사들과 만나서 20년 동안 영어도 배우고 제대하면 미국에 와서 살라고 약속도 되고. 신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20년 후에 제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나이가 남았으니까 민간인 목회를 그때 시작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군대처럼 안 됩니다. “모여라!”해도 20명도 안모입니다. 낙심이 되었습니다. 나를 만나면 항상 뭐라고 낙심했느냐 하면 이 목사! 나는 군대 생활 20년 하다가 성령이 떠났어. 이 목사는 주일날이면 4~5천 명씩 교인들이 교회에 몰려가는데 나는 4~50명도 안 모이는데 그 이유가 뭐야? 나는 부족할 것이 없는 장교 생활, 군목 생활 가운데서 성령이 아무래도 떠났어. 이제 큰일 났어.” 나를 만나면 이렇게 탄식을 자꾸 하는 겁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돼?” 그러면 저는 성령님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냐? 목사가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 그러면서 책망하고 그랬는데 아니야. 나는 심각해.” 목회가 잘 안되니까 무엇을 했느냐 하면 미국에는 서비스 미니스트리(Service Ministry)라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교인 많아지는 것을 원치 않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한 목회! 그래서 한인교포 할머니들이 병원에 가서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통역도 해주고, 또 마켓에 장보러 갈 때 도움을 주는 마켓 버스 봉사도 하고. ‘나는 이 목회를 해야겠다.’ 할머니들이 도움이 필요하니까 올 것 아닙니까? “할머니! 뭐 도와드릴까요?” “나 병원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고, 또 아프면 어디가 아픈지 통역도 해드려야 하잖아요? “할머니, 어떻게 아프세요?” “무릎에서 바람이 살살 나옵니다.” 그래서 무릎에서 바람이 살살 나온다고 통역했더니 미국에서 그런 병은 세상에 없다고 하고. 열심히 도와드리니까 할머니가 미안하니까 교회 나오잖아요? 그래서 몇 십 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뭘 알아야지요? 교회에 나오면 꾸벅꾸벅 졸고 삼위일체가 뭔지, 거룩한 게 뭔지 이 할머니들은 한국에서 살 때는 무당집을 단골로 다녔던 분들입니다. 그래서 1부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고 2부는 점쟁이 집에 가서 돈도 내고 온단 말입니다. 목사도 인간인지라 화가 났습니다. ‘이 점쟁이 집에 내가 한번 가봐야 되겠다. 웬 사람이 우리 할머니들을 매일 불러?’ 그래서 목사가 아닌 척 하려고 담배 한 갑을 와이셔츠에 집어넣고 갔더니 점쟁이가 젊은 여자랍니다. 들어가서 나 이민 와서 되는 게 없는데 점 좀 봐주세요.” 목회도 안 되니까 되는 게 없는 건 맞지요. “그러세요? 앉으세요.” 그리고 점을 치는데 목사도 그때는 젊었을 때니까 젊은 목사와 이 젊은 점쟁이가 서로 마주 보고 눈이 마주쳤는데 사고가 생겼습니다. 무슨 사고냐? 여자가 심장마비로 쓰러진 겁니다. 목사가 이것 봐라? 나는 이것도 안 되네?’ “여보세요. 이거 왜 이러는 거예요?” “아저씨! 목사님이지?” 용하기는 용합니다. 목사라고도 말 안했는데 아는 겁니다. “그래요. 나 목사요! 그런데 지금 왜 이러는 겁니까?” “아저씨! 빨리 나가세요. 목사님이 이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내가 이상해지기 시작하더니 내가 숨을 못 쉬겠어요. 나 살리려면 빨리 나가세요.” 정말 죽겠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가 내가 우리 교회 할머니들이 이곳에 온다고 그래서 일부러 찾아와 본겁니다. 당신 이것 그만두고 예수 믿어!” 점쟁이 집에 가서 목사가 큰 소리 치고 한번 나왔는데 죽지 않았답니다. 이 사건을 이 목사가 스스로 해석했습니다. ‘오늘 일어난 일은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젊은 여자가 왜 나를 보고 숨이 넘어 가냐? 이게 도대체 뭐냐?’ 이 목사가 스스로 이것은 영적 싸움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해석으로 자기를 보니까 지금까지 자기는 낙심이 되어 성령이 다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얼마나 성령이 충만하면 점쟁이 여자가 나와 11로 앉아서 죽을 뻔 했느냐 말입니다. ‘! 나는 불같은 성령이다. 점쟁이가 보고 죽을만한 성령이 충만한 목사다.’ 그래서 자기를 다시 해석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성령 충만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래서 이 친구는 점쟁이한테 은혜 받고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그 다음주일부터 설교가 힘이 있고 교회가 부흥이 됩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나한테 언제나 와 계십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성령이 시키시는 일을 열심히 하고 그러면 성령이 신이 나서 나를 붙잡고 일을 하시는데 그렇게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말씀으로 임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때려잡으려고 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세요? 온갖 불치의 질병 환자들을 현장 치료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은혜 받았습니다. 깜짝 놀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하는 일을 지금 했잖아? ! 그러면 이 예수가 정말 메시아야?” 이 광경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성령이 임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님! 우리가 잘못 했습니다. 당신은 메시야입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영적으로는 굉장한 성령의 역사로 이는 메시야다.”라고 외치려는 마음이 목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자존심! 예수를 때려잡으려 왔잖아요?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저런 일을 하는 거야.” 그랬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너희들 가운데 성령이 그렇게 강하게 역사하는데도 그렇게 훼방하면 그런 사람은 영원히 사하심을 얻을 죄가 없어진다.”

그 다음에 성령이 하시는 일은 매우 중요한 사역 하나가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 소원이 있습니다. 아시아의 복음화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뭡니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아니,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왜 성령이 못하게 합니까? 그 다음에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아니, 바울이 이렇게 거룩한 일을 하는데 왜 못하게 하느냐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나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인도도 하시지만 못하게 역사할 때도 많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아무리 좋은 일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라고 판단을 했는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성령님은 우리를 못 가게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하나님의 가장 선하고 좋은 일이라서 추진했는데 절대로 안 되었을 때는 성령님께서 이 길을 막으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LA에 도착했더니 두 가지 즐거운 소식이 생겼습니다. “목사님! 잘 오셨습니다.” 지금 어느 도시에 한인 교회가 하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몇 백 명 모이는데 그 전체 도시에서 한인 교회는 하나라는 겁니다. “목사님이 담임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상의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교회 중진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처음으로 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저는 급해 죽겠는데요. 그런데 또 다시 날짜를 정해서 만나려고 했는데 그때는 제가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못 갔습니다. 콧물 쏟아지고 열이 나고 머리 아프고 어떻게 갑니까? 아무리 시도해도 이상한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저에게 세례 받은 사람 한 분이 저한테 와서 목사님! 우리 잔디밭에서 몇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는데 조그만 미국 교회 교육관을 하나 얻었습니다. 개척교회인데 목사님이 한번 해주세요. 목사님, 개척교회 잘 하시잖아요?” “어휴! 가만히 계세요. 나는 갈 곳이 있습니다. 좋은 교회 예약되어 있으니까 아닙니다.” “아니, 목사님! 개척교회 잘 하시는데 개척교회를 하시지 다 된 교회를 뭐 하러 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기도원에 올라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사명을 주시면 열심히 목회해서 부흥시키고 선교사도 많이 파송하고 다 하겠습니다.” 제가 가고 싶어 하는 교회를 놓고 산등성이에서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놓고 기도하면 기도 방해가 얼마나 생기는지 산등성이에 뱀이 쉬리릭 쉬리릭 지나가고 아니! 이게 뭐야? 뱀 때문에 기도 못하겠다.” 또 어떤 때는 갑자기 토끼가 내 앞을 후다닥 지나가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개척교회를 놓고 기도하면 기도가 얼마나 잘 나오는지 영적으로 편안한 겁니다. ‘! 하나님이 나를 이쪽으로 안 보내고 이쪽으로 보내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23년 동안 미주 한인교회로 잘 발전한 것이고 제가 23년 동안 목회 생활을 한 것입니다. 제가 가고 싶어 했던 교회는 없어졌습니다. 흔적도 없이 교회가 없어졌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영적으로 살피면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고자 했던 것이 다 무산되었을 때 마케도니아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건너가서 유럽이 서구화되는데 최초의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빌립보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유럽을 기독교 사회로 만드는 관문을 유럽에 가서 만들었잖아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지막! 성령의 역사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영적인 일이라 알 수 없잖아요? 알 수 있는 길이 성경에 하나 주워졌습니다.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 무슨 열매를 맺고 있으며 그 교회는 무슨 열매를 맺고 있는가? 성령 충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지니그래서 우리가 나타나는 일의 열매를 보면 성령 충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이렇게 확실하게 나와 있잖아요? 이것을 보아서 성령의 충만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절에 우리 갈보리교회 교우들 모두가 성령 충만하셔서 열매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성령 강림주일에 저희들은 성령의 역사를 거룩하게 조명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지시하고 계신가 기도하면서 조용히 성령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영적 분별력이 있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사 날마다 우리는 영적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이 주시고 성령님이 인도하여 주시는 은혜로운 길을 갈 수 있는 사역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주간도 주어지는 시간을 우리가 그렇게 성취하며 열매 얻으며 살아가는 한주간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아를 중립에 놓고 기다리라

16;6-10 / 강문호 목사

9월 마지막 주 우리 교회에서 와서 간증 말씀을 주셨던 이 혜훈 의원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인상깊은 이야기를 하나 남기고 가셨습니다. 항상 기아를 중립에 두고 앞으로 갈지 뒤로 갈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집회를 정리하면서 기아를 중립에 두라는 말씀을 정리할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주차창이 복잡한 곳에 차를 세워 둘 때에는 기아를 중립에 놓아 달라는 부탁을 많이 합니다. 차를 이리 저리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아를 중립에 두지 않으면 차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기아를 중립에 두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기아를 중립에 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1. 바울이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6장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위하여 이 곳 저 곳을 다닐 때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아시아에서 복음을 증거하지 못 하게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두 손을 펼치고 막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지 못 하게 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사건을 통하여 그리고 환경을 통하여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지나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를 썼지만 또 그 곳으로 가지 못 하게 예수님의 영이 막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 데 자꾸만 막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환경의 음성임을 영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증거를 방해하는 사건이 생기는 것이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로아로 가서 밤에 되자 잠이 들었습니다. 밤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환상속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말했습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바울에게 들린 특이한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여 유럽 복음화의 문이 처음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마침 루디아라는 여자가 자주 장사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 놓고 있다가 바울을 맞아 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럽 최초의 교회 빌립보 교회를 세운 이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기아를 중립에 놓고 적어도 6개월 이상 기다렸던 것같습니다.

 

소천의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사촌이 땅을 사 배가 아픈가?

그럴 수 있지

얽히고 설켜서 죽을 것만 같은가?

그럴 수도 있지

어디서나 나서는 자들을 보는가?

그럴 수 있지

가진 것 다 잃고 거지 되었는가?

그럴 수 있지

어처구니없는 억울함을 당했는가?

그럴 수 있지

하는 것 마다 연속으로 망했는가?

그럴 수 있지

콩을 팥이라고 우기는가?

그럴 수도 있지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을 들었는가?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렇지 우리의 인생!

그럴 수 있지

 

기아를 중립에 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1948년에 퇴역한 다음 콜롬비아대학교의 학장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컬럼비아에서 공부하였기에 몇 번 그 학교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학생들은 건물에서 건물로 옮겨 다닐 때에 잔디밭을 밟고 다녔습니다. 입구에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고 푯말을 붙여 놓았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길이 아닌 곳 잔디밭으로 다녔습니다. 길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 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란 팻말을 붙여놔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학교 직원이 학장인 아이젠하워에게 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그 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편리하고 가까웠습니다.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불편하고 조금 멀었습니다. 그 때 아이젠하워는 아주 간단한 해결방안을 내 놓았습니다. 학생들이 다녀 누렇게 잔디가 죽고 자연적으로 길이 난 잔디밭에 길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다니지 않는 길에는 꽃을 심었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기아를 중립에 놓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2. 모세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종살이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인구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번성시켜 주시겠다고 하시던 약속을 애급에서 이루시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인구 말살 정책을 썼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 부모는 다른 부모와 달리 생명을 걸고 모세를 길렀습니다. 더 이상 숨겨 기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세를 갈대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일강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갈대상자는 히브리어로 테바라고 말하는 데 이는 키가 없는 배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맡긴 배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를 담은 갈대상자는 항상 중립기아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이 잘 운전하여 주셨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발견하고 애급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습니다. 그래서 후에 바로와 대결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바울도 모세도 모두 기아를 중립에 놓았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세계적인 전자저울 회사 카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동진 장로님이 세운 기업입니다. 김 장로님이 처음 저울을 만들고 나자 인기가 없었습니다. 너무 정확하고 조작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장사꾼들은 저울을 약간 속이면서 이익을 남기고 있었는 데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팔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 정육점에 억지로 저울 하나를 팔았습니다. 이 정육점은 정확한 저울로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박장로님은 정확한 저울로 속이지 않고 팔면서 놀라운 일이 생기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정육점이 정직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손님들이 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정육점들은 그 때서야 비로서 이 전자저울을 사기 시작하였습니다. 3개월만에 1,200대가 팔렸습니다. 일약 번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 대나무 같았습니다. 중국 어떤 대나무는 5년 동안 땅속에서만 자라다가 6년째가 되면 한 여름에 6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카스 회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중립기아에 놓고 경영하였더니 하나님이 때가 되니 국내 시장점유율 1위가 되게 하셨습니다. 현재 550명의 직원, 연매출 600억원의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기아를 중립에 놓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축복하여 주십니다.

모세 그랬습니다.

 

3. 유다가 그랬습니다.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도할 모세같은 영성있는 지도자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전쟁에 능한 지도자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데려가시고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보니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7 족속이 이미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모두 죽이거나, 모두 내쫓거나 모두 종으로 만들어야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전쟁뿐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순간부터 다윗에 통일 왕국을 이룰 때가 100여년은 온통 전쟁이었습니다. 첫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차를 중립에 놓고 물었습니다.

하나님! 누가 먼저 올라가 싸우리이까?” 하나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유다가 먼저 올라갈 지니라”(1;2)

그래서 100여년 전쟁할 때마다 유다가 가장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12 지파가 같이 애급에 들어가서 같이 400년 살다가 같이 나왔습니다. 광야에서 몇 명이 출애급하였나를 세어보았습니다.

유다지파가 74,400명이었습니다. 므낫세지파가 32,000명으로 가장 작았습니다. 군사수였습니다. 하나님은 애급에서 유다지파를 가장 번성시켜 주셨습니다. 왜 그런지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났습니다. 유다지파를 앞장 세워 싸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었음이 400년만에 들어 났습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하는 일들은 모두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4.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땀이 땅에 흐르는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기아를 중립에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중립기아를 놓은 가장 확실한 모델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돈을 좋아 하는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 냥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병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잡혔습니다. 끌려가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십자가상에서의 선언이었습니다. 구원사역을 마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아를 중립에 놓은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1. 하나님께서 개입하기 시작하십니다.

중립에 놓으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사작하십니다. 네가 부정하였으니 내가 긍정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에게 맡겼으니 내가 맡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중립 기아에 놓은 순간에 하나님은 마케도니아아 청년을 보여 주시면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모세를 갈대상자에 넣어 하나님께 맡긴 순간부터 하나님이 오묘하게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유다도 그렇습니다.

누가 먼저 올라가 싸울 지 하나님께 물은 순간 하나님은 유다를 지목하시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중립기아에 놓은 순간부터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한나도 그렇습니다.

둘째 아내 브닌나는 10명의 아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아들을 낳지 못 하여 고통중에 몸부림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아들을 달라고 기도할 때에는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중립에 놓았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도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중립에 놓았을 때 응답이 왔습니다.

우리도 모두 기아를 중립에 놓고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릴 때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하십니다.

월간지 좋은 생각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영웅 나폴레옹이 폴란드로 진격하였습니다. 농촌 마을의 영주가 나폴레옹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저녁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도착하자 영주는 문밖에까지 나가 영접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온 나폴레옹은 식사가 마련된 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주인은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도 그 다음 자리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자리에 나폴레옹을 앉게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기분이 나빠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수행신하가 영주를 꾸짖었습니다. “대 프랑스 제국의 황제 폐하를 이렇게 대접하면 안 됩니다. 영주는 두려움이 없는 모양이군요.” 그러자 영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자리는 제 부모님이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프랑스에서는 황제폐하가 제일 높으시지만 저희 집에선 제 아버님과 어머님이 제일 높습니다.”.

그렇습니다. 국가에서는 황제가 제일 높으신 분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이 제일 어른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높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 제일 주의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인도하여 주십니다.

 

2. 중립에 놓고 응답은 고난부터 시작됩니다.

중립에 놓고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축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고난부터 시작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간 곳을 빌립보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감옥에 가서 죽을 뻔 하였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인강에 띄웠습니다. 악어밥이 되기에 가장 적당합니다. 바로왕의 공주가 다가가기 전에 악어가 먼저 냄새를 맡았다면 모세는 악어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이 덮칠 수도 있습니다. 위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유다도 그렇습니다.

전쟁에 앞장 선다는 의미는 가장 희생자가 많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장 전사자가 많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고통스러운 처형입니다. 인간이 생각하여 낸 사형방법 중에 가장 비참하게 죽이는 방법이 십자가 처형입니다.

중립기아 놓은 순간부터 어려움이 따르기 시작합니다.

 

3. 결론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축복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바울을 감옥에서 인도하여 냈습니다. 그리고 평생 하나님이 보호와 인도의 손길이 바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각종 위험을 다 물리치고 바로의 공주가 발견하여 궁중에 가서 살게 하셨습니다. 최선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유다가 그랬습니다.

전쟁에 앞장 섰던 유다를 12 지파 중에 하나님은 가장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왕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지파중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를 구원하여 주신 우리의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기아를 중립에 놓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의 결론은 축복입니다.

선거할 때 인터넷에서 가장 나를 괴롭히던 목사님이 계십니다.

내가 선거에서 나오고 금권선거 개혁에 기수가 되자 그가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이 선거판에 들어서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개혁에 힘을 보태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1031일 비텐베르그 교회 청동문에 95개 조항을 붙인 것이 종교 개혁에 불을 질렀습니다. 루터도 그렇게 큰 불이 될 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나를 강 루터라고 말합니다. 강 잔다르크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총회 특별재판위원회에서 나를 증인으로 불렀습니다. 나는 두 번 거절하였습니다. 강화중앙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마지막 재판위원회가 열렸습니다.

 

화요일 11시부터입니다.

월요일 밤 11시에 전화가 왔습니다. 증인으로 출석하여 감리교를 바로 잡아 달라는 부탁 전화였습니다. 그 때까지 나는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루에도 10번도 더 오가며 결정을 내리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나가면 바른 말을 하여야 하고, 바른 말을 하면 5년만에 정상화된 감리교가 또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11시에 그가 전화한 것은 평생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나가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새벽에 나가 목사님에게 새벽에 광고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오전 집회를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여야 했습니다.

113년 된 교회에서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강화중앙 장로님은 지난 선거에서 내가 사퇴한 것도 모르고 나를 찍었던 분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하나보다 교단 일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오전 집회를 없애고 재판이 열리는 종교 교회로 갔습니다. 한 목사님이 나를 못 들어가게 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은 실갱이를 하다가 1110분에 들어갔습니다. 모두가 놀라는 눈으로 나를 챠다 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내 증언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시간 가량을 내가 이야기 하였습니다. 금권선거가 이루어졌음을 증언하며 8억을 요구한 이도 있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감리교에 불을 질렀습니다. 온 감독들이 모여 나를 성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혼자만의 의를 위하여 감리교를 혼탁한 집단으로 낙인 찍었다고 사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우리 선교지로 가서 선교관 기공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 국민일보가 다시 보도하였습니다.

온 기독교에 불을 질렀습니다.

나는 겁이 났습니다. 이렇게 전체 기독교를 뒤흔들어 놓을 줄 몰랐습니다. 일파만파였습니다. 이제까지도 중립에 놓고 주님의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이제부터도 개혁의 기아를 중립에 놓고 주님의 방향 명령을 기다리려고 합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콜럼버스 고속도로 변에 이런 광고판이 있답니다.

하나님을 믿지 말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Don't believe in God. You are not alone.)

사탄은 계속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마귀는 디아블로스입니다. 틈을 내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사탄에 속지 말고 하나님은 온전히 의지하며 중립기아를 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이에게 하나님은 임재하셔서 축복하여 주십니다.

 

 

 

 

 

첨부파일 2020071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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