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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00821 / 행 27:9-20 / 광풍에 밀려가는 배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0.08.24|조회수749 목록 댓글 0

광풍에 밀려가는 배

27:9-20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7:9-20 / 거기서 우리는 여러 날을 머물러 있어야 하였다. 금식하는 절기도 지나 그 해도 이미 늦가을로 접어들었으므로 장기간의 항해를 하기에는 위험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선원들에게 말하였다. 10) `여러분, 우리가 이대로 항해를 계속하다가는 반드시 어려움을 당할 것이오. 파선으로 배에 실은 물건들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오.' 11) 그러나 죄수들의 호송을 맡은 장교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 12) 게다가 그 `아름다운 항구'는 사방이 틔어 있어서 겨울을 지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점도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선원들도 해안을 따라 뵈닉스까지 가서 거기서 겨울을 나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뵈닉스는 그레데 섬에 있는 항구로 서남쪽과 서북쪽만 틔어 있어 온화한 곳이었다. 13) [바다에서 만난 태풍] 때마침 온화한 남풍이 불기 시작하여 항해하기에는 좋은 날씨로 보였다. 그들은 닻을 올리고 해안을 따라 나아갔다. 14-1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날씨가 변하더니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휘몰아쳐서 배를 바다 한가운데로 밀어냈다. 선원들은 배를 해안 쪽으로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음을 알자 아예 포기해 버린 채 바람이 부는 대로 맡겨 두었다. 16) 배가 가우다라는 조그마한 섬 뒤로 밀려들자 그들은 뒤에 매달려 오던 구명선을 간신히 갑판 위로 17) 끌어 올려 선체가 부서지지 않게 밧줄로 동여맸다. 그리고 그대로 가다가는 아프리카 해안의 모래톱에 처박힐까 두려워서 돛을 내리고 바람이 부는 대로 떠내려갔다. 18) 이튿날 파도가 더욱 높아지자 선원들은 배에 실은 짐을 바다에 내던졌다. 19) 그 다음날에는 배의 장비마저도 내던질 만한 것은 다 내던졌다. 20)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며칠이나 계속하여,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사나운 폭풍만 휘몰아쳐서 우리는 마지막 희망까지 잃어버린 상태였다.

 

율리오의 감독 하에 바울을 호송하던 배는 항해 중에 큰 위험이 있을 것이라는 바울의 충고를 무시하고 항해하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더 믿더라(9-11)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역풍으로 인하여 항해가 지체되었습니다. 또한 금식하는 절기(속죄일)가 지나면 지중해는 시기적으로 항해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미항에서 겨울을 지나고 갈 것인지, 그냥 갈 것인지 결정해야 할 때 바울은 이번 항해에 큰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곡물 운반선은 로마 정부의 통제 아래 운항되었기에 결정권은 결국 백부장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고 항해하도록 했습니다.

 

더 많으니(12-13) 선장과 선주는 미항이 겨울을 지나기에 불편한 곳이므로 더 안전하고 따듯한 뵈닉스 항구로 가자고 했습니다. 또한 승객들도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기로 하고 미항을 떠나려 할 때 때마침 순풍이 불자 백부장과 선장, 선주, 승객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옳은 줄 알고 닻을 올리고 그레데 해안을 따라 항해하였습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14-20) 항해를 시작했을 때 순풍이 갑자기 태풍 유라굴로로 돌변했습니다. 그들은 유라굴로로 인하여 배를 더 이상 조절할 수가 없게 되어 바람에 밀려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광풍에 밀려가다가 작은 섬 가우다를 지날 때 배의 고물에 달고 다니는 거룻배를 끌어올렸습니다. 혹시 배가 모래톱에 걸리게 될까봐 돛을 내린 채 표류하고 있을 때 사공들은 배의 짐과 기구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또한 그들은 폭풍우로 해와 별을 볼 수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해와 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일기가 나빴다는 것뿐만 아니라 항해자들이 배의 현재 위치를 알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적용: 바울의 충고를 무시한 결과 유라굴로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겪었던 일들을 나누고 그것이 지금 어떤 유익이 되었는지 나누어 봅시다.

 

요동치는 배 한가운데에서 그저 광풍에 밀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심히 애쓰는 우리의 인생여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러한 축복이 있음을 기억하고 주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나아가는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강건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설 교 >

인생의 풍랑속에서 우리는

27:9-25 / 지태일 목사

미국에 사는 사람이 한국의 어느 사람에게 전화가 왔답니다. 지금 한국에 가도 괜찮느냐? 가도 안전한지 물을 정도로 외국에서는 한국이 무슨 전쟁발발 일보 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는 이라크전쟁 문제를 연일 보도하고 있고, 이라크 다음에는 북한이라고 서슴치않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라크 다음으로 북한의 핵무기가 세계 두 번째 이슈로 다루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없다, 만들고 있다. 미국철수냐 감축이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도처에 시위가 끊이질 않고 반전,반미 시위가 끊이질 않습니다. 정기적인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하려고 미국항공모함 칼빈슨호가 부산에 입항해야 하는데 훈련반대, 전쟁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고 물가가 오르고 기름값이 최고치를 기록하고 주식이 떨어지고 달라 환율이 오르고 외국 투자자들이 빠져 나가려 하고 들어오지는 않고 몇 달 동안 무역수지가 적자로 벌써 돌아섰고 아직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잇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치도 권력을 잡았으니 이동하는중 여러 가지 잡음 부작용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제도 교육도 기업도 그 어디에도 소망의 빛을 비쳐주는 곳이 없는 시대입니다. 검찰도 술렁거리는 원치 않는 많은 사람들이 옷을 벗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이런 저런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때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질병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업실패로 인한 경제적인 위기도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에 휩싸이게 합니다.

요즘 나라나 우리 사회 현실이 마치 망망한 바다 폭풍이 몰아쳐 풍랑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알렉산드리아호라는 배도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납니다. 거기에는 당시 로마 총독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고 있는 바울이 타고 있었습니다. 또 바울을 호송하는 백부장과 그 일행, 여행객과 상인 등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항해 전문가는 아니지만 여러차례 전도여행을 하면서 터득한 일기관측법과 영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가 겨울철이고 지중해 바람이 거세게 부는 때여서 항해가 어려우니 겨울철이 지난 후 떠나자고 건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보다 떠나도 된다는 선장이나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소중하게 벌어 모았던 하물, 그리고 승객들의 짐들을 다 바다에 버려야 했습니다. 일부 사공들은 자기들만 살려고 도망치려 합니다. 비상시 쓰려는 선박을 내려 도망을 치려 합니다. 남이야 죽던 말던 자기들의 생명만 부지하려고 도망칠 궁리를 합니다.

거기다가 14일간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몰아쳤으니 배 멀미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해와 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배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살 소망이 끊겼습니다. 그러니 고생은 죽도록 하였어도 살길이 보이지 않으니 먹을 의욕도 없고 결국 다 죽게 되었습니다.

갖은 고생고생 했는데도 길이 안보입니다. 실망합니다.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그저 될 때로 되라식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풍랑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람니다. 결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답도 방법도 분명히 있습니다. 인생의 풍랑속에서 우리는!

 

1.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11,21).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21절을 보면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 부려 떠났다가 배가 파도에 휘말려 좌초당했습니다. 선장은 배를 움직이는 노숙한 경험을 가진 전문가요, 선주는 배의 소유주로서 사업가입니다. 한데 바울은 항해의 비전문가이며 죄수의 몸이었습니다. 따라서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은 것은 상식적으로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개인적인 자기의 경험을 내세우고 사십니까? 자기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타산적인 욕심을 앞세우고 있습니까? 영적 판단을 무시하고 경시하면 유라굴로의 광풍을 만날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출발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도 비합리적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만 가야합니다. 그래야만 일고있던 광풍도 멈추고 우리의 삶을 소망의 항구로 이르게 합니다. 인간의 정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호에 탄 사람들이 왜 광풍을 만났습니까? "그럴듯하다. 그럴싸하다"라는 세상적인 욕망에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미풍이 불어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인간의 재주나 기술이나 돈이 우리를 풍랑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백부장은 신앙인인 바울의 말을 따랐어야만 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줄로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야 인생의 풍랑을 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이민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람니다. 초창기에 이민한 어떤 사람이 이제는 더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헌데 날씨가 좋으면 골프, 비가 오면 보트타고 낚시하는데 미쳐, 교회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내는 가출, 아들은 교통사고로 사망, 딸은 정신이상, 자신은 간암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거센 풍랑이 그 가정에 몰아 닥쳐왔습니다. 비로소 그는 무릎꿇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 풍랑의 원인을 만들지 말아야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가느냐 안 가느냐,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삶의 결정은 자신의 생을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결정 여하에 따라서 광풍을 피할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풍랑을 만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을 경시하고 과학기술, 인간의 경험, 물질을 중시하는 결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부르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의 경우 백부장은 군인입니다. 그는 무력사용이 가능합니다. 선장은 기술자입니다. 그는 고도의 기능을 가진 자입니다. 선주는 배를 소유한 재벌입니다. 그는 돈으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력도, 기능도, 돈도 없는 가난한 전도자입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무시했고, 그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고집을 피우다 풍랑을 만났고,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했습니다. 잃었습니다.

고집과 소신은 다릅니다. 고집은 강할수록 손해고, 소신은 강할수록 좋습니다. 고집은 버려야 하고, 소신은 지켜야 합니다. 소신은 일을 성취하고 꿈을 이루지만, 고집은 인간관계를 깨트리고 분위기를 망칩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가 고집 부리고 떠났다가 풍랑 만난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인생의 풍랑을 안만나려면 그것은 "고집을 버려라, 고집 부리지 말고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의 고집을 아집을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우리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23-25,34).

 

23-25절을 보면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약속, 말씀이 나옵니다. 배가 좌초되어 위경을 헤매던 어느날 밤, 하나님은 바울에게 말씀합니다.

배가 좌초되어 위경을 헤메고 있던 어느날 밤, 하나님은 바울에게 "걱정마라 내가 이 배에 탄 276명의 생명을 네 손에 맡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배에 탄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외쳤습니다.

비록 그 때 상황은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앉고, 안개와 비바람 때문에 해와 달은 몇 날째 보이지 않고, 배고픔과 추위는 겹치고, 배에 있는 물건들은 다 버린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안심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노라"고 소리쳤습니다. 누가 안심하고 살수 있습니까? 누가 거센 인생의 풍랑과 비바람과 안개와 폭풍우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습니까? 누가 좌초하고 있는 배속에서 안심하라고 소리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살게 되고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경험과 지식, 감정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확신이요, 신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 약속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것이 오늘 인생의 풍랑을 만난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복잡하고 얽힌 문제를 놀랍게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믿음도 버리고 내 마음대로 인생을 결정하고, 세상사람들의 말을 쉽게 따라가는 자의 앞날은 얼마 못가 유라굴로 광풍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유라굴로 앞에서는 선장의 기술도 소용이 없습니다. 선주의 돈도 무력합니다. 백부장의 권력도 필요 없습니다. 외적인 조건들은 그어떤 것도 유라굴로 광풍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를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요소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이 불롱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막강한 함대가 있었던 그는 해군대장에게 폭풍을 거슬러 전진할 것을 명령하고 바다를 정복하라고 호령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풍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폴레옹이 탄 배가 성난 파도에 휘말려 거꾸로 처박혀 박살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이 200명이 넘는 불쌍한 군사들은 모두 수장을 당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앞에서는 사회적 신분이나 권력 따위는 숨도 쉬지 못합니다. 인간의 똑똑함도 허사입니다. 사람의 인생 길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신앙적으로 합당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배멀미를 하는 모든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뜻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에도 일시적인 형통이 있음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항로에는 반드시 유라굴로의 광풍이 숨어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인생의 폭풍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며 영적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35-37).

 

35-37절을 보면 풍랑을 만나 죽을 상황에 처한 알렉산드리아호의 사람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일어나시오. 먹으시오. 안심하십시오.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더 걱정하고 위해 기도하는 자입니다. 함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함께 찬송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영적 교제를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며 기도하며 성찬을, 애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정말로 믿는다면 가장 바쁠 때, 가장 힘들 때, 그리고 가장 어려울 때 더욱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감동시킨다면 그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결코 모른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이라는 큰 풍랑을 만남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오리혀 찬송하고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나라적으로, 국제적으로 풍랑을 당하고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먼저 해야합니다. 그것이 예배요, 성도와의 영적 교제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문제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개인 사업도 그렇습니다. 영적 교제가 우선 순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먼저 행하는 것이 풍랑에서 구하는 길입니다.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몰라서 주일도 예배도 교화도 없이 그냥 되는대로 산다 하더라도 적어도 구원을 받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이것에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를 시간 나는 사람이나, 할 일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여러분의 풍랑은 절대로 해결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명을 안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보입니다. 사명을 안고 사랑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풍랑을 만나 끝장이라고 말하며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말하며 손을 잡고 함께 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인생의 풍랑속에서도 믿음으로 외치며 힘들어 하는 자들을 위로하며 소망의 말을 주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과 함께 한 배를 타고 인생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람을 살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알렉산드리아호에 바울이 타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유라굴로로 쓰러져 있는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과 기도의 대상으로 여기며 함께 동행해주는 사람이 옆에 계십니까? 그러면 축복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여러분 각자 각자가 축복속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는 그런 삶을 사시기 바람니다.

부정적이며 절망적으로 말하는 자가되기 보다는 긍정적이며 소망적으로, 신앙적으로 외치는 바울과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람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 가신 길만을 따라 가기 바람니다. 주의 말씀이라면 아멘으로 따라 가시기 바람니다. 늘 예배하며 서로 떡을 떼며 교제하며 함께 함으로 인생의 풍랑을 만나지 말고 또 풍랑속에서도 넉넉히 이겨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503장 고요한.... 큰 믿음 주소서)

 

 

 

 

 

 

 

희망이냐 절망이냐

27:9-26 / 엄기호 목사

로마로 항해하던 알렉산드리아라는 배가 그레데 항구 부근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승선해 있었습니다. 선장과 선주, 여행객과 군인 또는 선원과 장사꾼 등 276명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죄수 몇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기 위해 죄수로 호송되어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풍랑에 밀려서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물결따라 바람따라 흘러가는 대로 쫓겨가는 배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노력도 소용이 없었고 구조작업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다 포기하고 그냥 쫓겨가는데 악천후에 광풍은 계속되는 절망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사공들은 고생 고생하다가 배의 모든 짐과 재산과 소유를 바다에 던져 버렸고, 또 배의 기구도 저희 손으로 다 버렸습니다. 풍랑 때문에 다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완전한 절망이었습니다.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짐은 버릴 수 있고 재산과 소유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의 기구를 버려서는 절대로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배의 기구들은 고장난 배를 고치고 점검하면서 로마까지 배가 운항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풍랑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4일간이란 여러 날 동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밤의 별빛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큰 풍랑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의 풍랑, 환경과 인생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풍랑을 해결하기 위해 토정비결이나 점이나 관상을 보고 자선을 행하고 도를 닦아 보지만 그렇게 해서 되지 않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딴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 해도 햇빛도 밤의 별빛도 보이지 않는 철저한 절망이요 완전한 절망이요 빈틈이 없는 절망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 속에 생명의 길은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종종 전쟁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나 세상향락에 빠졌을 때 다시 말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들로 이스라엘과 전쟁케 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애굽 하였을 때였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들이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아주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웨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야웨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이라크 전쟁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연합국측은 테러 방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기적인 독재자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이라크 국민들의 자유 해방을 위해서다라고 말합니다. 또 반전 주장자들은 이번 전쟁이 이라크의 석유 때문이다’, ‘미국의 오만한 패권 때문이다이렇게 말하면서 미국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도 우리 기독교인은 영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개인의 삶도 주관하고 계시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역사도 주관하고 계시고, 세계 역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이라크 전쟁도 우리는 하나님의 수중이라는 것, 이 전쟁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TV뉴스에서는 물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만을 말하지만 우리는 물 아래에 있는 더 큰 빙산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문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말하지만 우리는 그 속의 의미까지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말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미국을 무조건 비난하며 반전데모에 절정을 이루고있지만 우리는 20년 동안 이라크 국민들을 볼모로 잡고 철권을 휘두르며 공포정치를 했던 후세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하고, 또 악한 흑암의 세력에 붙잡혀 있는 이라크 국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읽어야 합니다. 세상은 반전을 제창하는 사람들을 영웅취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전을 외치는 주장 이면에는 추악한 이권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그 무엇보다 이 전쟁을 이슬람권의 선교에 대한 관점에서, 세계 복음화에 대한 하나님의 눈으로 믿고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이 절망 가운데 있었을 때 단 한사람 바울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믿었습니다. 이제는 다 죽게되었다고 275명의 사람이 절망하고 있을 때 오직 사도 바울만이 입을 열고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275명의 절망과 단 한 사람의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2751입니다. 싸움이라면 이미 승부가 난 싸움이고 투표라면 이미 결과가 난 투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생각해 봅시다.

 

왜 그들은 절망했나요?

 

275명의 사람들이 왜 절망했습니까? 왜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과 부자들이 절망하고, 어째서 지식인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나요? 그들의 절망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풍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소중한 재산과 짐 그리고 배의 기구들을 다 버렸기 때문이며 그래도 풍랑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미항에 이르러 어디서 겨울을 보낼까 하는 문제로 논란을 벌였습니다. 그때 배의 호송을 맡고 있던 백부장은 미항에서 과동하자는 바울의 의견보다는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보내자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선택하였습니다.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바다의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의견을 따르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과 선택은 얼마 가지 않아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뵈닉스에 닿기도 전에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바울의 말보다 인간의 말을 더 신뢰했다는 것이요, 선장과 선주가 비록 바다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바다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생의 항로에는 언제나 무서운 풍랑과 암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이 풍랑으로 인한, 절망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돈을 가지고도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도, 물론 지식을 가지고 있다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시적 순풍에 미혹되어 평안을 추구하려다가 끝없는 고난의 암초, 환난의 풍랑에 걸리지 말고, 현재의 고난을 인내로 극복하고 영원한 평안에 이르게 하는 참 믿음과 지혜를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왜 희망을 가졌나요?

 

똑같은 바다에서 유라굴로를 만났습니다. 풍랑도 같고 버린 물건도 같고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않는 상황도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바울의 손에는 수갑까지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파도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해와 달과 별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풍랑에 흔들거리는 배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선원들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나의 속한 바 되신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희망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 파도를 바라보면 누구나 절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이 모든 저주와 질병, 연약함과 죄악을 대신 지시고 우리에게 온전한 자유를 선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각은 보혈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절망의 계곡에서 소망의 정상으로, 눈물 골짜기가 희락의 연회석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이 희망의 파장은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희망의 말씀을 응답으로 받은 후에 낙관적인 시야를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소망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성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존재들이기에 꿈이 있고 그 꿈은 성공적인 삶으로 인도 받게 하며 큰 일을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의 사람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파도가 일어나고 해와 별이 보이지 않게 되면 쉽게 절망하고 맙니다. 이제는 끝장이라고 자포자기 한 채 세상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져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절망의 바다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보았고, 희망을 외치던 바울 때문에 276명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멜리데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란 누구든지 인생의 항로에서 크든 작든 파선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혹시 불안과 공포, 두려움에 짓눌려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 항로가 아무리 험할지라도, 큰 파도가 치고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않고 모든 짐과 재산을 다 버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기구를 버리는 갖가지 위기가 다가왔다 할지라도 바울과 같이 희망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우리에게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시는 희망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과 영광과 승리를 바라봅시다. 희망이냐 절망이냐는 바로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여러분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환상이 있는 사람

27:9-26 / 손상률 목사

세기의 전도자 바울은 그 당시 권력의 심장부인 로마를 최종적인 공략의 목표로 삼았습니다(1:15). 하나님은 바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총독 베스도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26:32). 그는 미결수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가게 된 것입니다. 백부장 율리오의 호송을 받으며 알렉산드리아호에 몸을 싣고 행선하던 중 그레데 해역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선원과 승객 모두 열나흘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의 공포에 쌓여 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은 환상을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23).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한 그의 증언은 적중하였습니다.

 

1. 예견(豫見)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선지자적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먼저 보는 자(先見者)입니다(삼상 9:9).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을 통하여 먼저 보고 먼저 아는 자이며 그것을 백성에게 증거하는 자입니다.

 

1) 삶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자이기 때문에 사고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치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사람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르게 판단합니다. 바울이 타고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가 미항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백부장에게 시기적으로 행선하기가 위태로운 때이니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고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신뢰했습니다(11).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사람은 백부장처럼 사람들의 기쁨에 따라 결정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자연현상이나 주어진 환경을 통하여 그의 의중을 깨닫게 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초자연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열려진 마음으로 계시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이를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평소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있어서 매순간마다 작동하는 성령의 사인과 환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16:9, 18:9, 23:11). 언제나 깨어 있는 영혼은 하나님의 계시에 민첩한 반응을 나타냅니다(삼상 3:10). 기도에 힘을 쓰며 경건한 삶을 통하여 영혼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에 민감한 사람입니다(1:17-19).

 

3) 효과적으로 대처합니다.

계시와 환상에 민감한 사람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계시나 환상은 신비적 요소가 있어서 자기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 잘못 대처하게 되면 실족하기 쉽습니다. 요한14:1"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짓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유의 은사나 신비적 사건을 감정적으로 대처할 경우 신앙의 균형을 잃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계시와 환상을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혹시 자만할까 봐서 육체에 찌르는 가시로 안전장치를 해 두었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2:1-7).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자기가 행할 일을 지혜롭게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2. 자기의 소임에 충실하는 사람입니다.

 

백부장이 바울의 의견을 무시한 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서 출항했으나 곧 유라굴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자기의 소임에 충실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따라야만 했고, 많은 군중들의 향배에 따라서 생각을 바꾸기도 했지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후에는 어떤 상황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풍랑 가운데서 그를 로마로 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그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곧 그를 가이사 황제 앞에 세우고 권력의 심장부를 향하여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풍랑 속에서 죽어 가는 선원과 승객들을 모두 바울의 손에 붙여 그들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23-24).

 

2) 자기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는 그가 복음 전도자로서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게 하는 사명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풍랑 가운데서 자기 혼자 살기를 꾀하지 않고 그에게 맡겨준 모든 사람을 다 살려내기 위하여 헌신적인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여론이나 주변의 환경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도 그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나 적응하는 일체의 비결을 가졌습니다(4:10-12). 여기서도 그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으로 새힘을 주었습니다.

 

3)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형통하고 잘나갈 때 큰소리치던 사람도 위험에 처하게 되면 저 혼자 살려고 비굴하게 행동하지만 복음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비범한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 때 의기양양해 하던 선장과 선주는 유라굴로 풍랑을 만났을 때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13-19). 심지어 사공들은 저희들만 살기 위하여 야음을 틈타 도망할 궁리를 하였습니다(30). 그러나 바울은 실의에 빠진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 중에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며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34). 그는 또 열나흘 동안이나 먹지 못한 채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떡을 가지고 축사한 다음 먹도록 권유하여 기력을 찾도록 일깨워 주었습니다.

 

3. 비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환상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요셉은 형들의 곡식단과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제게 절을 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 힘든 날을 겪으면서도 결국 그 꿈이 이루어지는 신비를 맛보았습니다.

 

1)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23-25"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바울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은 그가 계시해 주신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 신종합니다. ,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간이 지향해야 될 믿음과 행함의 기준이 되는 유일한 도리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만이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13:11).

 

2) 복음의 능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기독교 복음의 신비로운 도리를 피력한 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할 것 같으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1:3-4). 바울 자신은 이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 택정을 받았고 또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1:1-2). 그는 평생 동안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했고 죽음의 위기에 몰렸지만 그래도 복음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대단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1:16). 그의 말대로 복음이 능력을 발휘하여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간섭하였습니다(27:44).

 

3) 하나님의 역사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반드시 성취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제4차 전도여행지를 로마로 정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객들이 수십 명씩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길을 백부장이 호송하게 하였습니다(27:1-3). 알렉산드리아호가 조난을 당하여 침몰했지만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은 모두 구조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상륙한 멜리데 섬에서 추장을 위시하여 모든 사람이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로마에 입성하여 그곳을 복음의 거점으로 확보하고 기독교의 성지로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말년에 로마 옥중에서 순교를 했지만 그곳에서 기록한 옥중서신들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영원한 진리로 남아 있습니다.

 

 

 

 

 

 

 

 

시계(視界) 제로와 하나님의 비밀

사도행전 279-26/ 조용기 목사

심한 비바람이나 눈보라가 치며, 짙은 안개가 낄 때 눈앞을 바라보는 시계는 제로가 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즉 앞이 캄캄하여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20여 년 전에 호주의 애들레이드에서 대 부흥회를 인도하고 그 다음 퍼스에서 성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호주의 항공사가 파업을 하게 되어 비행기가 한 대도 뜨고 내릴 수 가 없었습니다. 애들레이드에서 퍼스까지는 대형여객기로 3시간, 자가용 비행기로 5시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리하여 퍼스의 성회 관계자에게 항공사 파업으로 갈 수가 없겠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자 퍼스에서는 성회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성도들이 다 기다리고 있는데 목사님이 못 오시면 낭패에 처하기 때문에 자가용 비행기를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좀 께름칙했습니다. 얼마 후 조그만 자가용 비행기가 도착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는 수동으로 작동되는 것으로 자동항법장치도 없어 고속도로를 따라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약 3시간쯤 지났는데 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구름이 꽉 들어차서 시계 제로가 되었습니다. 고속도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행기가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비행기를 조종하던 집사님이 벌벌 떨면서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만일 우리가 여기서 불시착이라도 하면 호주는 너무 넓기 때문에 우리들의 시체를 한달 후에나 찾을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폭풍이 너무나 거세 시계 제로가 되었습니다. 얼마 후 비행기를 조종하던 집사님은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라디오 주파수를 따라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니까 주파수를 찾을 동안 목사님께서 조종간을 좀 붙들고 계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일생에 비행기 조종을 해본 일이 있나요?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으니 별 도리가 없습니다. 조종간을 잡고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정관을 잡고 주여 살려주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폭풍우를 지나는 순간은 마치 생지옥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2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였는데 멀리서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퍼스의 불빛이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운 불빛이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는 불빛이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그 방향으로 이끌어 가서 퍼스에 도착하니 비행장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안전하게 오도록 기도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안전하게 도착한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곳 성도들은 우리가 죽은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와 시계 제로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제자들에게는 시계 제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3년반 공생애는 기적과 권세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적과 능력으로 곧 천년왕국을 세울 것으로 기대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자 그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 처자, 전토, 직업을 떠나서 3년여 동안 따라다녔는데 이젠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3일 후 하나님의 비밀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나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골로새서 215절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53절로 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점에 도달해서 시계 제로가 될 때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시계 제로의 절망이 아무리 짙을 지라도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2. 세계 제로를 체험한 신앙의 위인들

 

성경을 보면 시계 제로를 체험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에서 극심한 기근을 당해 살려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애굽의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절세 미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로가 사래를 자신의 아내로 빼앗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엄청난 비극에 처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속수무책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시계 제로였습니다. 절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크신 비밀이 나타나셨습니다. 바로의 궁전에 큰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재앙의 근원이 사래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었으며, 사래는 아브람의 여동생이 아니라 아내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19절로 20절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초강대국인 애굽의 바로에게 빼앗긴 아내가 도로 자기 품에 돌아옵니까? 이것은 나님께서 시계 제로의 처절한 절망에게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이 있기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20년간 더부살이를 하다가 처자들과 짐승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얍복강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에서가 4백여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복수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20년 전에 형을 속였는데 형이 그것을 절치부심하고 동생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자들과 짐승들을 다 강너편으로 보내고 강 이편에 수그리고 앉아서 형편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어떤 장정이 그를 죽이려고 하여 그는 밤새도록 그 사람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이르매 그 장정이 손을 들어 그의 환도뼈를 쳐서 결국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 습니다. 더 이상 그는 도망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의 시계는 제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쩔뚝거리며 강을 건너가서 모든 처자를 짐승들을 뒤에 두고 앞서 형이 오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에서가 4백인을 거느리고 질풍같이 달려오다가 그 동생을 바라보자마자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형이 말에서 뛰어내려 동생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 나를 버리고 20년 동안 갔다가 이제 절름발이가 돼서 돌아오니? 얼굴은 왜 이렇고 온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니? 앞으로 내가 너를 보호하마라며 에서가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원수된 형제간이 순식간에 화목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시계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난 바울과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배에 탄 선원들과 죄수들은 모두 절망에 처했습니다. 생존의 희망이 없어 시계 제로입니다. 하늘을 보아도 캄캄하고, 바다를 보아도 대풍이 불고 풍랑이 거셌습니다. 사공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루를 견디다가 이튿날에는 짐을 다 바다에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를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그들에 있어 구원의 열망이 없었습니다 시계 제로입니다. 이제는 절대로 살아날 가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21절로 25절에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새로운 희망과 생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배는 파손되었으나 모든 사람들은 섬에 도달할 수 있어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3. 우리가 삶의 시계 제로를 체험할 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삶의 시계 제로를 당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끝났다, 벽에 부딪쳤다, 속수무책이다, 낭패다, 희망이 없다, 이제는 오직 좌절과 절망과 죽음만 있을 따름이다라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시계 제로의 체험이 있습니다. 안개가 가득 끼어서 전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체험 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수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고, 아브라함에게는 아내를 받는 기적이 일어났고, 야곱에게는 형과 화해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바울은 유라굴로 속에서도 천사가 찾아와 구조를 받을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들이 시계 제로를 체험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까요? 가슴을 칠까요? 그렇지 않으면 한강다리에서 뛰어 내릴까요? 고층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릴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들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할 것을 말씀하신 후 노아에게 배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문은 위에만 놓게 하셨습니다. 이는 온 천지가 물바다로 변했을 때 노아가 만일 옆으로 난 창문을 열고 그 광경을 목격한다면 기절 초풍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홍수를 보지 못하게 노아의 방주는 공중에만 창문이 있었습니다. 공중을 열고 서 있으니 노아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하늘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주에 있을 동안 노아는 홍수를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홍수를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늘로만 창문을 내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항해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당할 때 어이구 저기도 풍랑이 오네, 저기도 파도가 오네라며 풍랑을 바라보면 낙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를 당했을 때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시편 10315절로 19절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 하시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다스립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한 것처럼 시계 제로 때는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위로 열린 창문을 통하여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계 제로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울 선생은 그 풍랑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의 신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절로 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면 하나님은 자녀들이 시계 제로의 위기에 처해 절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에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값도 어마 어마하게 지불했습니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여러분을 값주고 소유했습니다. 때문에 그 소유물인 우리들이 낭패를 당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가만히 있을께라고 하시겠습니까? 마귀가 세상에 와서 소유물을 빼앗아 가는데 하나님이 팔장 끼고 구경하고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위기를 처할 때 하나님의 소유물이 된 것을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011절로 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삯군은 위기에 처하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진실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양된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사 죄와 세속과 마귀, 슬픔과 질병, 저주와 가난 그리고 영원한 사망과 음부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삯군이 아닌 목자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어둡고 깜깜할 때 확실히 마음속에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시계 제로에 처할 때 하나님을 옳게 섬기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회개해야 됩니다. 마음속의 죄책을 다 회개하고 믿고 순종하는 생활로 돌아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을 곧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앞길이 캄캄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나아갈 해답의 크고 비밀한 길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밀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수에 막히고 애굽 군대에 둘러 쌓여 시계 제로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홍해수를 갈라지게 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크고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 때 주님께 부르짖으면 우리들의 나갈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크고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시계 제로에 처했을 때 구원을 선언해야 됩니다. 마가복음 1122절로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의심의 문을 닫고 믿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입술로 매고 묶어야 됩니다. 입술의 선언이 바로 믿음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선언하면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편 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 한 분이 골수암에 걸렸습니다. 그는 암이 걸렸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충격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 한 말은 하나님이여 암이 걸려서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정신병자 같지 않습니까? 암이 걸렸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불신자들은 이러한 환경에 빠지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는 항암치료를 받은 후 기도하면서 다리를 잘랐습니다. 여러분 다리를 잘랐으니 이 얼마나 큰 불행한 일입니까? 그래도 그는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X-RAY 촬영을 했는데 암이 전이되어 폐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도 하나님께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몸이 아파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귀신을 쫓아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암의 귀신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땀이 흐르도록 간절히 기도하는데 갑자기 온 몸에 전율이 다가오고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폐에서 뭐가 공기처럼 튀어나오더랍니다. 속으로 이제 암 귀신이 떠나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답니다. 그후 병원가서 CT촬영을 하니 골수암도 폐암도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린 결과 성령께서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시고 치료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감사해야 됩니다. 좋을 때도 감사하고, 안될 때도 감사하고, 편안할 때도 감사하고, 환난 때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일생동안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나 속수무책인 시계 제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 당연한 반응은 절망이요, 탄식이요,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태도는 결코 구원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소유물이요, 그의 기르신 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잘못 섬긴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됩니다. 크고 비밀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고 선언하며 감사를 넘치게 할 때 안개구름은 사라지고 광명천지가 나타나게 되실 것입니다.

시편 103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웃음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계 제로일 때 좌절하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흑암을 광명으로, 무질서를 질서로, 파멸을 생명으로, 가난을 부요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갖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내게 말씀하신 것을 믿노라

27:9-26 / 김영준 목사

미국 농촌의 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하나님이 저를 목회자로 부르셨어요. 신학교에 가고 싶으니 추천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느닷없는 부탁을 받고 목사님이 좀 차분하게 설명을 해보라고, ‘하나님이 당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니까 청년이 제가 들판에 서 있는데 하늘에 구름으로 PC라고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PC 말은 Preach Christ-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목사님이 잠깐 침묵하다가 ‘PC라는 말이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뜻도 될 수 있지만 Plant corn 옥수수를 심으라는 뜻이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줄로 생각하다가 그것이 아니었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인도하신 줄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아니었던 경험.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습니다. 수년 전에 뉴스에 크게 보도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뱃속에 혹이 있어서 배가 남산처럼 불러오는데 부모가 그 딸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유인즉슨 하나님이 고쳐주겠다는 응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시겠다고 응답했기 때문에 배가 남산처럼 불러오는데도 딸을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국가가 개입해서 강권적으로 그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수술해서 혹을 제거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큰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인 것뿐만 아니고 법적인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을 접할 때 우리는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리고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 믿음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나도 하나님의 인도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는 얘기인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인도라고 믿고 있는 것이 그게 진짜인가 아니면 나의 착각인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고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양편에는 절벽이 있는데 한쪽은 광신이고 또 한쪽에는 불신이 있습니다. 광신과 불신 사이에 있는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신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광신은 하나님보다도 앞서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것을 우리가 스스로 착각해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광신은 온갖 오해와 이단을 낳는 온상이 되고 그리고 광신의 가장 큰 피해자는 본인이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광신자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신앙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저런 것이라면 나는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의심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세상에 가짜가 있다는 말은 진짜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진짜가 있기 때문에 가짜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위조지폐가 존재하는 이유는 진짜 지폐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를 흉내 낸 것이 위조지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 위조지폐는 있지만 $80 위조지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80 짜리 진짜 지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신앙적인 실수를 보고 신앙을 부인하게 되면 그것은 사람의 실수를 절대화하는 것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에 대하여 실수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나이 사십 세가 되었을 때 애굽사람이 히브리 사람들 학대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모세가 좌우를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그 애굽사람을 죽여서 모래에 파묻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히브리 사람들을 보러 나가 두 히브리 노예가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왜 같은 히브리 사람들끼리 다투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누가 당신을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당신이 애굽사람을 죽인 것처럼 우리도 죽이려 하느냐. 이 말을 듣고 모세가 두려워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역사하신 것이 아니고 모세가 자기 임의로 그런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광야에서 사십년을 보내게 되는데 그가 광야로 피신한 이유는 자기의 살인이 탄로 난 것도 이유가 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데인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줄 알고 그렇게 했는데 결과적으로 사람만 죽이고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보고 자신이 너무 낙심되고 그래서 모세가 자신의 실수로부터 회복하는데 사십년이란 세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십년이 지난 다음에 하나님이 정말로 나타나십니다. 떨기나무에 불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아마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이번엔 진짜인가, 이번에도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애굽으로 보내실 때 모세가 여러 번 사양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실수를 한 번 해봤기 때문에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여러 번 권고하고 격려해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일에 대하여 실수를 해 본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경험이 되어서 하나님의 인도를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다윗도 신앙적으로 실수한 적이 있습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 언약궤를 소가 끄는 달구지 위에 실어서 옮기는데 소가 갑자기 뛰었다고 했습니다. 소가 왜 뛰었는지는 모릅니다. 소가 뛰니까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가 떨어질까 봐 손으로 언약궤를 만지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이 진노해서 웃사를 그 순간 거기서 죽여 버립니다. 이제 아주 민망한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선한 의도로 이 언약궤를 옮기려고 하는데 언약궤는 옮기지 못하고 애꿎은 사람만 죽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고 낙심되고 그리고 자칫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시험에 들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다윗이 여기에 낙심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읽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곰곰이 모세의 율법을 읽노라니 거기에 어떤 규정이 나와 있느냐면 언약궤를 옮길 때는 그 옆에 고리에 봉을 끼워서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옮겨야 된다는 규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 이렇게 해야 되는걸 몰랐구나! 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그런 성경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선한 동기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동기가 필요하지만 방법이 옳아야 되고 또 때를 만나야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됩니다.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야지 내 의지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이 있어야 되지만 하나님의 방법에 맞아야 되고 때를 만나야 되고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고 기뻐하셔야 올바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서둘다가는 실수하기 안성맞춤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가 실수해 놓고 하나님에 대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실수해 놓고 하나님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치 그것이 앙금처럼 남아서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다윗 같은 인물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을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동기가 나쁘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매정하기 때문도 아니고 사람의 의지와 열심이 하나님보다 앞서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이에요.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고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축복하셔야 되는데 그것은 상당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 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다가는 실수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늘 유념해야 되는 것은 성도들의 실수를 조장하면 그것은 목회자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섣불리 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이러고 나서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좇아가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야 우리가 그 말씀을 좇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기다려야 됩니다. 우리가 요구한다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실 때 당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지 아니했는데 사람이 서두르게 되면 모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들은 말씀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풍랑이 상당히 진행된 다음에야 임했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상당히 진행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울에게 임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서둘렀다면 풍랑이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다가 모든 사람들이 염려하고 사도바울도 염려하게 될 때쯤 되어서 시간이 상당히 경과한 다음에 그때 천사를 보내서 사도바울에게 안심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과정이 정말로 사람이 그 진땀을 흘리는 와중에 임합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나를 구해줄지 아니면 사자의 아침식사가 되게 할지 그것을 모르는 상황처럼 진땀을 흘리는 순간에 하나님이 당신의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경우도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중에서도 풍랑이 이미 상당히 진전됐다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고 도우실 줄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려면 우리의 욕심을 경계해야 됩니다. 욕심이 사람을 미혹시킵니다. 야고보서 114절에 있는 말씀대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서 미혹됩니다. 그런데 이 욕심은 물질적인 욕심, 세상적인 욕심뿐만이 아니고 영적인 욕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 나는 신령해, 이것도 욕심입니다. 사람이 어떤 유의 욕심을 갖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을 미혹시킬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가 이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 자기가 남들보다도 신령하다는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을 미혹시킬 때가 있습니다. 이 욕심, 탐욕, 이것은 우리가 늘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끌려가는데 그 중에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죄수의 신분에서 건져주지는 않았지만 풍랑에서는 건져주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에요. 죄수의 신분에서도 건져주면 좋지 않습니까? 좋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죄수의 신분은 그냥 두고 풍랑에서는 건져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바울이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다음에 그것을 우리의 입으로 시인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타고 있는 이 배에는 크리스챤이 한명도 없어요. 사도바울 이외에는 한 명도 없어요. 이들은 사도바울이 사도인지 목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바울의 신앙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서 죽을 것 같게 되니까 유일하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고, 그의 하는 말을 모든 사람이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평소에는 바울이 전하는 말을 귀찮게 생각하고 듣지 않으려고 하던 사람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반가운 말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23절에 말하기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말라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하시는 첫마디 말씀은 주로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풍랑이 두렵고 죄수 되는 것이 두렵고 미래가 두렵고 고난이 두렵고 두려워하는 건 여러 가지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일괄적으로 두려워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이것은 마음을 평안하게 가지라는 얘기입니다.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게 바로 믿음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고백.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에 이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입으로 시인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이것을 믿고 나는 이것을 의지합니다. 우리의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하게 될 때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울이 이 믿음을 고백하니까 바울에게만 힘이 되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만 득이 되는 것이 아니고 듣는 사람에게도 용기가 되고 힘이 되고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고 듣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게 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조난과 구조 : 깨어진 가정의 회복을 위한 처방전

27:8-44 / 김홍규 목사

<序言: 무너져 가는 가정을 어찌할꼬>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가정이 급속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1962년도에는 오직 51%만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이혼을 고려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1985년에 가서는 무려 82%가 이혼해야만 한다고 응답했습니다. 한 세대만에 이혼율이 거의 배 가까이 증가한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매일 3천 여명 정도의 어린 청소년들이 부모가 이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통계 조사에 따르면 미국 아이들이 매주 어머니와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30분이 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뜻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그 절반 밖에 안 되는데 겨우 15분 정도라고 합니다.

해리스 여론조사(Harris Poll) 팀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어떤 일을 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쓰기를 원하는지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30%가 독서하는데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1%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일에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13%만이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이 책이나 TV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작년에는 이혼율이 40%에 육박해서 아시아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루 평균 840쌍이 결혼하고 398쌍이 이혼한다는 통계로 보아 매일 절반 이상의 가정이 부서지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연구 기관에 따르면 2008년경에는 한국의 이혼율이 미국을 추월해서 세계 최고의 이혼국가가 될 조짐이 엿보인다고 합니다. 가족 간의 대화도 급속히 단절되어서 한국 고교생의 22%는 아버지와 하루 단 1분의 대화시간도 못 가진다고 합니다.

가정은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가장 집요하게 파괴하려고 광분하는 대상이 가정과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무너진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가정이 깨어졌다면 무슨 이유로 어떻게 깨어졌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 깨어진 가정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이러한 물음들을 물으면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파선과 구조: 그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위기와 미래의 해법>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비롯한 276명이 탄 배가 조난을 당했다가 구원을 받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깨어진 가정과 그 회복'이란 관점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정 혹은 교회가 ''라고 볼 수 있으며, 폭풍우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는 이 세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망망대해(茫茫大海)의 세상 한 가운데 우리 가정이라는 배가 떠서 여행을 합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즐겁고 편안하게 항해할 때가 많지만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풍랑이 뱃전을 때릴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파선 일보 직전까지 가서 배에 탄 모든 식구들이 죽음의 위기에 빠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저는 바울이 탄 배가 파선 위기에 빠진 것을 '부서진 가정의 위기'로 보면서 본문 해석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왜 파선할 수밖에 없었는가?

바울이 탄 배가 조난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고 할 때 한 가정이 부서진다면 분명히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조난 사고를 당하게 된 것 역시 세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9절 말씀을 보면 행선하기에 위태한 시간을 택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여기서 금식하는 절기란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가을철의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을 의미합니다(16: 29-31 참조).

유대력으로는 7월이 되지만 오늘 우리 캘린더로는 대개 추분(autumnal equinox), 즉 양력 923일 경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지중해 사람들은 10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항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폐해기'(閉海期, the period of closed sea)라고 부르면서 항해를 자제했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지중해 사람들은 항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습니다. 뱃길이 위험했고 무엇보다도 겨울을 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례 때문에 바울은 10절에서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예상하면서 만류합니다. 바울의 만류는 그 당시의 일반적인 항해 상식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영적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졌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왜 깨어집니까? 대개의 경우 위태한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정욕과 고집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인생을 조금이라도 오래 산 부모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식의 결혼이 위태해 보입니다. 그래서 만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말은 듣지 않고 무리한 일을 강행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바울이 탄 배도 당연히 겨울이 지날 때까지 항해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욕심과 성급한 판단력 때문에 무리한 여행을 강행했다는데 위기는 이미 싹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11절에 보면 바울의 압송을 맡은 로마의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부장은 행 27: 1을 보면 '율리오'라고 하는 사람인데 바울의 로마 압송을 책임 맡은 장교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의 말은 믿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말해줍니까? 백부장은 한 가정의 우두머리, 즉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남편이나 아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이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의 말은 무시하고 세상적인 지식과 욕심만 가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담아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세상의 감언이설에 더 귀가 솔깃해서 그 말에 넘어가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만 확고히 붙들면 우리의 가정이 얼마든지 튼튼히 설 수 있는데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어질 수밖에 것입니다.

 

셋째로, 14절에 보면 '유라굴로'라는 예기치 않은 광풍을 만나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유라굴로'(Eurakylon)라는 광풍은 희랍어로 '동풍'을 뜻하는 'EUROS''북동풍'을 뜻하는 라틴어 'AQUILO'가 결합된 말로서 그 당시 선원들의 은어(slang)였습니다. 그 당시 뱃사람들을 골탕먹였던 위험스럽기 짝이 없었던 북동풍(Northeaster) 허리케인이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왜 파선합니까? 예기치 않은 광풍이 불기 때문이 아닙니까? 몇 년 전에 한국에 IMF라는 유라굴로가 닥쳐서 수많은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하루아침에 남편들이 직장에서 밀려나고 사업이 무너졌습니다. 엄청난 빚더미에 눌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 부부간에 사랑만 있으면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현실의 파도 앞에 많은 가정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입니다. 한국 최초의 법무장관인 강금실 장관 역시 남편이 사업 실패로 빚을 과도하게 져서 결국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유라굴로의 광풍이 우리 가정을 괴롭힐 때가 있는 것입니다.

 

파선의 위기 앞에 선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그러면 이 엄청난 파선의 위기에 직면해서 배에 탄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로, 30절을 보면 믿음이 없는 사공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도망을 치려고 합니다. 아마도 바울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사공들이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척 하면서 거룻배, 즉 구명정을 바다에 내려놓았습니다. 자기들만 구명정을 타고 몰래 도망치려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지요.

아마도 사공들은 누구보다도 바다의 생리를 잘았기 때문에 선수를 치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명을 건져주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우왕좌왕했던 것입니다.

31-32절에 보면 바울은 사공들이 배에 남아있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꾸짖으면서 거룻줄을 아예 끊어 떼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배, 즉 가정과 교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아무리 파선과 죽음의 위기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거룻배, 즉 구명정은 우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가정과 교회 안에 끝까지 머물러 있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위기가 닥쳐와도 우리의 가정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사수(死守)해야 합니다. 그럴 때 풍파가 지나고 구원이 찾아옵니다!

 

둘째로, 바울의 의연한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가득차 있을 때 바울 한 사람만이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22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 또한 34절 후반을 보면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잃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와 같은 담대한 믿음 때문에 배안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며 안심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위기에 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만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의연한 믿음 때문에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배에 탄 276명의 승객들이 순전히 바울 한 사람의 믿음과 담대한 태도 때문에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이 전원 구원을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침몰의 위기로부터 구조받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울을 비롯한 276명이 전원 구조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18-19절을 보면 사공들이 배안에 있던 모든 무거운 짐들과 배안의 기구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JETTISON,' '하물투하'(荷物投荷)라고 말합니다. 선박이나 항공기가 긴급 조난시 중량을 줄이기 위해서 짐을 버리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지요. 침몰 직전에 처한 배가 구조를 받으려면 모든 쓸데없는 물건들을 버려야만 합니다.

여러분, 깨어진 가정이 회복되려면 모든 쓸데없는 욕심을 버려야만 하지 않습니까? 사실 지나놓고 보면 순전히 우리의 과욕 때문에 가정에 금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1: 15절 말씀처럼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자라나서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가정이 살기 위해서는 과욕을 버려야만 합니다. 또한 아무 소용이 없는 자존심 싸움 같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이 가벼워지고 구조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지난날의 잘못을 돌아보면 회개하고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믿음의 사람이요 영적인 지도자인 자기 말을 듣지 않고 믿음 없는 선장과 선주의 말만 듣고 무리한 항해를 강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재난이 일어났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깨어진 이유는 분명히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고, 영적인 눈으로 가정과 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의 지나친 욕심과 무절제와 실수로 가정에 금이 갔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분명히 깨달았으면 회개하고 믿음으로 중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을 지켜 주심을 믿고 담대한 마음으로 현재의 위기를 수습해야만 합니다! 믿음으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해야 합니다!

 

셋째로, 위기에 처할수록 마음을 강하게 하고 여유를 잃지 말아야만 합니다. 33-36절을 보세요.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여러분, 이혼이라는 충격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밥맛을 잃어버립니다. 집안이 침울해지고 온통 기쁨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온가족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있어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린 자식들이나 본인을 위해서 아무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큰 풍파 앞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권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식사기도를 올린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왕지사 이와 같은 위기에 빠진 것 먹지 않고 잠자지 않고 괴로워해 보았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 음식을 먹고 원기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손길을 펼쳐주심을 믿고 더욱 더 터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結語: 가정이라는 배에 탄 온 식구가 구조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조난을 당한 배가 바울 한 사람이 놀라운 믿음으로 깨어 있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44절 후반부를 주목하십시오.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배에 탄 276명 전원이 한 사람도 물에 빠져 죽지 않고 사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가정에 어떤 위기가 몰아 닥친다고 할지라도 바울과 같이 한 사람만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정이 건짐 받을 수 있습니다. 깨어진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가정에 영적 지도자인 바울이 되십시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의 가정이 어떤 위기에 처해도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어떤 거미가 낡은 헛간의 서까래 꼭대기에서 한 가닥 실을 떨어뜨려서 거미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이 거미집은 점점 커졌습니다. 파리나 모기, 그 밖의 다른 곤충들이 이 거미집에 걸려들어서 거미는 많은 먹이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거미는 다른 모든 거미들이 부러워할 때까지 점점 더 큰 거미집을 지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야심만만하고 성공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찬 거미가 한 가닥의 거미줄이 헛간 서까래의 어둠 한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지은 거미집을 가로질러 그 줄이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아니, 이런게 왜 여기에 있지? 이 거미줄은 나에게 어떤 먹이감도 주지 않잖아." 이렇게 생각한 나머지 이 거미는 이 거미줄을 타고 올라가 싹뚝 끊어버렸습니다.

거미가 이 한 가닥 거미줄을 끊어버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난 지 아십니까? 이 거미가 그토록 정성을 다해 아름답게 지어놓았던 거미집 전체는 물론이고 이 거미집을 타고 있던 거미 자신마저도 헛간 바닥으로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한 가닥의 거미줄이 거미가 지은 집 전체를 지탱해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늘 여러분들의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단 하나의 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줄이 아니겠습니까? 그 줄을 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그 줄을 견고히 붙드십시오! 거기에 안전과 회복과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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