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바울의 사역
행 28:23-31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 28:23-31 / 이렇게 해서 그들은 날짜를 정해 두었다가 그날이 되자 많은 사람이 바울의 집에 모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모세의 다섯 책과 예언서를 통해 예시된 예수에 대하여 가르쳤다. 그의 설교는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24) 믿는 사람도 많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25) 그러나 여러 가지 의견으로 토론을 벌이며 돌아간 그들의 귀에는 바울이 한 마지막 말이 울려왔다. `성령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 지당합니다. 26) ㄱ) `이 백성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아무리 많이 듣더라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가 끊임없이 보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ㄱ. 70인역 사6:9-10) 27)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귀를 막아 버려라. 눈을 아예 감겨 버려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이 고침받는 일이 없게 하여라' 28-29)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의 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으며 그들이 이 구원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ㄴ. 시66:3,67:2) 30) 바울은 셋집에서 만 2년을 지내며 찾아오는 사람을 친절히 맞아 31)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였다.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로마에 가고자 했던 것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꼭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는 명분으로 로마에 갑니다.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23-29)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기 위해서 날짜를 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지런히 증거 하였습니다(23).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은 로마의 유대인들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바울의 말을 믿는 사람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2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청중들은 분열되고, 서로 맞지 않아서 흩어졌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증언합니다(사 6:9-10).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귀를 막고,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입니다(27).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다가 바벨론에게 망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와 같이 조상의 완악함을 따라 유대인들도 바울이 전하는 말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청중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28).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31) 사도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자기의 숙소에서 2년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합니다. 바울은 순교하기까지 로마에서 자기의 마지막 생명을 주님의 교회를 위해 불태웁니다. 사도행전을 지탱하는 축이 되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는 말씀이 이어져 가는 역사를 사도행전은 담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님에 의해서 복음이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를 지나 로마까지 전해졌고, 오늘날 땅 끝까지 전파되고 있습니다. 1-7장은 베드로와 스데반에 의해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해졌고, 8-12장은 빌립과 베드로에 의해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13-28장은 바울에 의해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사도행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책입니다. 왜냐하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역사는 희생과 헌신 그리고 순교의 역사인 것 같습니다. 스데반 이후 모든 사도들, 그리고 최초 그리스인들, 속 사도들까지 거의 다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우리들까지 내려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어 진 것입니다.
적용: 선교의 역사는 희생과 헌신 그리고 순교의 역사인 것 같습니다. 바울과 같은 순교적인 삶의 자세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남은 이야기를 써내려 가시겠습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렵고 할 말이 없다면 복음을 알고자 힘쓰며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하루 종일 전해도 시간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을 전체를 통해 예수님 안에 성취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누구에게든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설 교 >
사도행전적 비전
하용조 목사
최근에 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한국에 들어와 불법 체류자가 되어 경범죄로 구치소에 갇혀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면회 오는 사람도, 영치금을 넣어주는 사람도 없이 외롭게 쓸쓸하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찾아와 “목사님, 교회가 그들을 돌봐줘야 합니다. 교회가 찾아가 함께 교제를 나눈다면, 그들은 외국에서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과일 하나와 소액의 영치금이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위로가 될 것으로 봅니다. 상대방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용기를 주는 것이 바로 감동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동
감동은 쾌락과 다른 것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감동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순화시키고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감동입니다. 인간은 감동을 받으면 분노, 미움의 감정마저 풀게 됩니다. 강하게 내세우던 주장도 서서히 양보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감동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7, 28장 말씀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결박당한 채 간수의 호위를 받으며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합니다. 도중에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 행선하던 사람은 모두 276명이었습니다. 바울을 비롯해 그를 호위하는 간수도 있었고 상인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광풍을 만나 해도 달도 별도 볼 수 없는 암흑의 상태에서 14일 동안 바다 위 배 안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마 그들은 죽음과 같은 공포감으로 인해 질식한 상태였을 겁니다. 무서운 파도와 거센 비바람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모든 짐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상태라 먹을 것도 하나 없이 절망적인 상태로 지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련한 사공도 아니고 훈련된 군인도 아니었습니다. 곧 죄수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끌려가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바다 위에서 대작하는 광풍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27장 23절에서 25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어 봅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에게 감동 받은 사람들
광풍을 만나 엄청난 공포감 속에서 모두 혼비백산한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함께 행선했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안심할 것을 일러줍니다. 바울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결국 배는 멜리데 섬에 닿았습니다. 선체는 파선 직전의 상태였지만 행선했던 사람들은 완전 초죽음 상태로 전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떨고 있었지만 바울에게 큰 감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멜리데 섬에 살고 있던 토인들은 죽음의 바다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을 환대해 주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차서 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한 뭇나무를 불에 넣자 독사가 튀어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토인들은 바울을 향해 살인자라고 했습니다. 풍랑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벌을 받아 결국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이 붓거나 죽지도 않자 토인들은 마음을 바꿔 바울을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가 바울의 일행들을 사흘이나 유숙하도록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들어가 안수하고 기도하자 토인의 아버지는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런 기적은 사도행전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세계 각 처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 사이에도 많이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고 여호수아 선교사님은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고 선교사님은 고막이 터져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들이 많은 지역에서 사역했습니다. 그에게는 부인과 중보기도 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통성 기도를 하고 나면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이비인후과 의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세밀하게 진단할 수 없었지만, 소견대로 의술을 펴면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버블리오의 아버지를 낫게 해 주자, 그로 인해 토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감동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거센 광풍에서도 살아난 감동이 있습니다. 둘째는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감동과 안수로 병을 낫게 되는 감동이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믿게 되는 감동이 있습니다.
광풍은 잠잠해지고 모든 정황은 정상 상태를 되찾았으며 다른 배를 얻어 타고 로마로 향하게 되었지만, 바울은 여전히 죄수라는 타이틀은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간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로마로 향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 그곳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방문객들에게 간증도 하고 성경 말씀도 증거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진정한 비전은 감동을 주는 것
진정한 비전이란 쾌락이 아니라 감동입니다. 감동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적 비전을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도행전적 비전이란 땅의 감동이 아니라 하늘의 감동이며, 순간적 감동이 아니라 영원한 감동인 것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했지만 그에 대한 재판 일정은 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형사범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신 구속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간수는 일정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바울에게 달리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소 여유를 자질 수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우거하는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날짜를 정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바울과 삶의 패턴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나라의 일로, 기업체의 업무로, 개인적인 목적으로 세계를 여행하면서 이상한 일을 경험합니다. 배, 비행기, 기차, 자동차 안에서 예기치 못한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다가 이장희 형제를 만나 길거리에서 영접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계획도 없이 그 분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저는 열심히 사영리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성령님의 감동을 입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안전을 위해 잠시 차를 세우게 하고 영접 기도를 한 후에 다시 운전하게 했습니다. 저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저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로마에서 일정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예기치 못하게 틈틈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갑니다.
감동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바울은 우거하던 집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르치는 바울이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 상당히 흥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접촉하게 되면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 밤을 지새우며 성경을 읽기도 하고, 때로 자다가 일어나 기도도 하게 됩니다. 그 현상은 어떤 분께서 만져 주시고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억지로 예수님을 믿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마지못해 찬송하고 설교 듣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불같은 심령이 되어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흥분의 상태로 바울은 로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강론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르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둘,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구약 성경 전체 내용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 오경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항상 그것을 연구하는 자세를 견지합니다. 셋,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에 대해 세 가지 핵심 주제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주제로 하든지 설교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경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를 포함해야 합니다.
흔히 설교를 통해 헛소리를 많이 합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친다고 해 놓고 그 핵심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보게 됩니다. TV 뉴스의 사설이나 신문 기사로 설교하면 안 됩니다. 설교는 수필이 아니며 명상은 더욱 아닙니다. 설교는 기쁜 소식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파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바울과 방문객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을 가르치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들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만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설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목사나 선교사라는 타이틀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적 비전입니다. 24절 말씀을 봅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세상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매우 객관적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지만, 본문에선 복음을 전하자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곧 은혜이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곧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로 믿는 것입니다. 잠도 못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 세수하고 단장한 후 교회에 오면 주차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은혜이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은혜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믿지 못할 이유가 더 많습니다. 이성적으로 따진다면 못 믿을 게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그분의 크고 놀라운 은혜 때문입니다. 25~27절 말씀을 읽습니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떠올립니다. 25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절묘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사도 바울과 같은 전도자를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은 파송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이유도 복음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서 15절까지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이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게 되는데, 믿지 않으면 어찌 구원이 있으며 보내지 않으면 어찌 전파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하는 사람을 파송하는 일입니다. 전도자는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듣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것까지 전도자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가 ‘사도행전적 비전’
우리는 복음 전도자를 세상 끝까지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해야 합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그대로 믿지만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자꾸 두드려 봐야 합니다. 사람이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이 로마에 가지 않았더라면 로마에 있던 백성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를 거쳐 서머나까지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듣지 못하면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냐 아니냐, 재판을 받느냐 못 받느냐, 수감 되느냐 마느냐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부탁하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의 발걸음이 곧 비전이었습니다. 우리가 병들고 수모를 받으며 병신이 되고 바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만 있다면. 그 길로 걷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비전’입니다.
이번에 ACTS 29 헌금에 일만 명이 넘는 성도님들이 참여해 165억 원을 작정해 주셨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어려운 때에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강요한 것도 아니고 기도를 부탁했는데, 성도님들이 마음을 모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헌금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선교센터를 건설하며 비전교회와 선교지교회 그리고 협력교회를 돕게 됩니다. 또 건강한 세상을 꿈꾸는 일에 헌금을 사용할 것입니다.
저는 ACTS 29 헌금을 통해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 비전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도 뛰어넘는 것이 비전인 것입니다. 둘,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은 역경을 극복하려는 열정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셋, 개인의 힘보다 함께 하는 힘이 파급 효과가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남양주교회가 세워집니다. 또 경기도 동탄과 평택에 교회 설립이 준비 중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나고야교회, 중국 모처에 3개 교회, 미국 포틀랜드에 협력 교회가 설립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목사님들은 모두 그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가서 전하고 나눠줘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가 조금 적게 갖더라도 잘 훈련 받은 좋은 목사님들을 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비전이고 사도행전입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에서 사도들의 행적들로 꿈틀대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속편의 주역이 되자
성흥모 목사
여러분의 아버지는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은 함께 천국에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우리 집안에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혹 없습니까?
우리는 오늘부터 한 주간 총력전도주간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선지자 에스겔이란 분을 만나게 됩니다. 에스겔이란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읽게 됩니다. 에스겔2장에서 하나님께서 “보내노라”는 말씀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고하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오고 있습니다. 에스겔 3장에서는 에스겔을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우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고 있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18)라고 하셨습니다. “그 악인은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그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실 때문에 죽을 것이지만 그 사람의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라는 말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그 사람의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라고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원문을 찾아보았는데, 분명히 “피 값을 네 손에서 찾겠다” 요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소원한 것은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6)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속편의 주역이 되자”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님의 일생을 가지고 누가복음을 기록하였고,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사도들의 행전을 기록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저자들이 한 책을 기록하고 마칠 때에는 분명히 마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록하였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를 마치는 사도바울은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의 여러 저자들은 한 책을 마친다는 분명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모든 성경들이 다 그렇습니다. 무슨 글을 쓰던지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고, 마지막으로 마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맺고 끊는 맛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분명히 마치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더 쓰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후에 장절을 나누었지만, 저자는 분명히 29장 30장을 쓰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저자는 분명히 끝맺고 있지 않습니다. 사건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저자인 누가는 바울의 생애에 대하여 마지막을 기록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전념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그대로 붓을 놓은 것 뿐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저자인 누가가 교회의 역사에 대하여 계속 기록하려고 하였다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이란 복음의 확산을 기록하려는 것이기에 행28장의 사건으로도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도행전의 역사 치고는 너무나 아쉽게 끝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자인 누가가 제 3편을 기록하려고 했다는 말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2년 동안 지내던 형편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그 이후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의 행적도 행28장으로 끝나고 그 다음의 행적은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바울의 공식적인 재판은 로마에 도착한 2년 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되어 3-4년 더 활동하다가 재차 감옥에 투옥되었고, 사형 당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좋은 일꾼을 배출하면서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요, 주님이 꿈꾸시고, 주님이 이루려고 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속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자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 와서 단 한번 살고 가야 하는데,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교회다운 교회, 가장 아름다운 교회에 속하여 진실하게 살다가 가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을 가장 진실하게 믿다가 가야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일도 감당하지만, 예수 잘 믿는 일이 아니라고 하면 그런 것은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적인 속한 일들, 내가 안 해도 될 수 있는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 주님이 기뻐하실 일만 찾아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 주님이 만족하시고, 우리 성령님이 기뻐 춤추시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적인 교회요, 주님이 세우신 교회인 것입니다.
저는 제 자랑이 아니라, 목사로서, 언제나 우리 영주교회만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잠을 자면서도 우리 영주교회, 일어나면서도 우리 교회, 길을 가면서도 언제나 주님의 몸된 영주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 것인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와 같은 초대교회를 이룩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교회만이 그것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습니다. 국가 조직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사회의 교육을 가지고도 되지 않습니다. 법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잘 깨닫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교회로서의 사명만 제대로 감당하면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고,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교회들이 속한 지역 사회로부터 모두다 칭찬을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도 교회는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교회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아주 쉽고,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알아듣기 쉬운 복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에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2:21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요엘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요엘2:32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얼마나 쉬운 말씀입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시는 복음인데, 이것을 듣지 못하여 멸망당한다고 하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한 영혼이 귀하고, 소중한 것을 생각합니다. 온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이라고 하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많은 돈을 들여서라고 그를 초청하여 구원에 관한 말씀, 소망의 이유를 들려줄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까울 것입니까? 다음 주일에 초청하시는 분들을 잘 영접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다만 여러분의 초청하시는 노력만 남아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온 것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하여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끌려왔습니다. 그는 12-22절 말씀에서 로마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유대인으로 잡혀온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저자인 누가와 아리스다고 그 외 몇 분의 성도들이 함께 로마에 왔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끌려간 것이요, 저자인 누가는 지금 바울의 건강을 염려하여 유대인의 가이사랴에서부터 로마에까지 동행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 대표들에게 자기가 유대인으로 로마에 잡혀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왔을 때에 그를 지키는 군인 한 사람이 매일같이 교대로 따로 붙어 있고, 사람들을 만나도록 허락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사흘 후에 유대인들 중에서 원로들을 청하여 자기가 유대인으로 잡혀온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20절의 말씀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 잡혀 왔다고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곧 인류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간절히 소원하고 갈망하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메시아의 소망입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흑암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소망이요,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 되십니다. 바울은 본래 예수는 이단자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잡아들여 배교하게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려고 핍박하였는데, 그 예수님에게 붙잡혀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쇠사슬에 매여 로마에까지 끌려 온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정말 쇠사슬에 매인 채로 끌려왔습니다. 바울은 즐거운 여행으로 로마에 온 것 아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곧 인류의 소망이 되십니다. 이 세상에 조금 잘 사는 것이 소망입니까? 이 세상에 명예를 가지는 것이 소망입니까? 이 세상에 잘 생긴 사람을 붙잡는 것이 소망입니까? 건강하면 우리가 영원히 건강할 것입니까?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 예수뿐이십니다.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 영원한 소망은 우리 구주 예수님뿐이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안보하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를 통하여 느낄 수 있었고,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8:23-31을 통하여 사도바울이 마지막까지 힘쓰던 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였습니다. 찾아온 사람들을 권하였다는 말은 설득하였다는 말입니다. 혹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 믿지 않는다고 하여 영원히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실망할 것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한번 말씀을 들은 것을 가지고 믿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고, 여러 번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본다고 하지만,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귀로 듣는 것이 둔하고, 보는 눈이 감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이방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데,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질 줄 알았고, 그들 이방인들이 잘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2년 동안 바울은 셋집에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사였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파송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러면 바울만 파송을 받았고, 우리는 말씀만 받으라고 하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파송된 자요,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라고 보냄을 받은 사도들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생명은 예수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가치관, 그의 목표, 그의 사는 목적, 그가 추구하는 사명 모두가 예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드리기만 해도 예수님이 흘러 넘쳤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였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전파하였습니다.
로마에 오면 즉시 황제의 재판을 받게 하시지 않고, 황제의 친위대 뜰에 있는 한 셋집에서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그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자기를 구금하고 있는 군인들, 자기의 손과 함께 묶여 있는 군인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친위대의 군인들은 바울과 함께 사슬에 그 몸을 매고, 함께 하루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공인될 무렵에 어느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믿었느냐 하면 군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친위대 군인들에게 많이 전도한 끝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2년 동안 군인 전도할 수 있도록 재판을 연기해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바울은 2년씩이나 재판을 연기하면서 군인들에게 전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로마에 가보면 사도 바울이 마지막 갇혀 있었다는 감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은 마메르티네 지하 감옥 (Carcere di Mamertino)인데, 아주 좁은 방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68년 6월 초순 경에 목베임을 받아 죽었습니다. 바울이 참수당한 곳에 세 우물의 교회가 세워져 있고, 그 예배당 안에는 석대라고 하여 바울의 목을 치기 위하여 목을 올려놓은 곳이 남아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참으로 멋진 책입니다. 왜냐하면 끝을 맺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이 없다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2년 동안 셋집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에게서 성경을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들을 사람들,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은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죽었지만,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그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스승 바울은 죽었지만, 복음은 점점 더 확산되어서 전 로마를 국교로 만들고 전 유럽을 복음화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는 죽었지만, 속 사도는 계속하여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은 끝을 맺지 못하고 붓을 놓았지만, 그 후에 계속하여 속사도를 통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교회는 확산되고, 복음은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에게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전해듣고,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믿고 고백한 사람들이 전해주고, 또 충성된 사람들이 전해주고, 그들은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우리 교회,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들려졌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산된 것입니다. 이제는 사도행전의 속편, 사도행전의 후편, 후서를 쓰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9장을 써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 후서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온 복음이 다시 다른 나라와 다른 지역,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확산되는 것이 사도행전29장이요, 사도행전의 후편을 쓰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성령의 역사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영주교회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위대한 일꾼들이 일어나고,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어나고,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잘 믿는 이들이 이 전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교회요, 성령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약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적인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잉태된 교회, 주님의 교회요, 예수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소유를 나누고 도와주어 핍절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복음전도에 두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구원하고 이끌러가는 영적인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파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달라고 하셨는데, 이 세계의 땅 끝이 어디입니까? 내가 사는 집, 내가 활동하는 회사, 내가 몸담고 있는 기관, 사업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는 우리의 현장이 땅 끝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따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던 결과, 이제는 인도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귀한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써 가는 교회
안효관 목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독일은 굉장히 비참했다고 합니다. 패배한 전쟁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 부은 바람에 국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작은 오두막집에서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아야 했고, 수용소나 임시 막사에서 집단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독일 백성들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절망과 깊은 고통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콜로네(Cologne)라고 하는 도시에 있는 한 교회에서 교회창립 70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700주년이라는 참으로 뜻 깊은 역사를 맞이했지만, 그 교회당은 거의 방치된 폐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창문은 다 깨지고, 기둥은 기우뚱 해서 곧 넘어질 것만 같고, 지붕은 낡아 비가 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 극심한 가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독일 국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쓰러져가는 그 예배당 건물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700주년이라는 뜻 깊은 역사를 생각해 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교인이 쓰러져가는 그 교회의 창립 700주년을 기념하자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그 소문은 인근 마을을 퍼저나가더니 어느 새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700주년을 기념하는 그날, 폐허된 그 교회에는 3만 명의 독일 국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700주년 기념예배가 시작되자 오랜 고통과 실망 속에서 눈물 흘리던 그들의 입술에서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차게 울려 퍼진 찬양과 함께 오랫동안 막혔던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00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들이 이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란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폐허가 되어 쓰러져가던 그 700년 된 교회는 다시금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복구하는 동안 절망에 빠져 있던 독일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감사가 되살아났고, 그 마음으로 ‘새롭게 독일을 건설하자’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을 짓기 시작했고, 학교를 짓고, 공장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는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뭔가를 시작하는 작은 믿음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창조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도행전은 제목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들고 사역한 사역의 현장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역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후반부는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사역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의 마지막 사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을 오늘 우리가 읽었는데, 읽으면서 우리는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건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이지만 웬지 마지막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죽음으로 사도행전이 마무리된 것도 아니고, 사도행전의 기록을 마무리하겠다는 어떤 종결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무리하는 어떤 글귀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종결 문장이 없이 끝났다고 하는 것은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도 사실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평생 그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당시 땅 끝이라고 알려진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다’는 그의 열망처럼, 정말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신앙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28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28장이지만, 사도 바울 이후 복음을 위해서 사역한 사람들이 사도행전 29장을 계속 써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3절에 보면, 사도들의 이름이 하나 하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이름이 더 이상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들의 이름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사도행전에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역에 충성했고, 신앙전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대로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복음을 위해서 한 일이 하나도 없다면 그들이 순교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많은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사역을 다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서 몇 명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흔히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한 활동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지만, 사실은 사도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도록 역하하신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신 성령사역의 기록’이란 의미에서 ‘성령행전’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사도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목숨을 걸고 사역했습니다.
그 성령께서 사도 바울의 마음에도 임하여 감동시키셔서 세계의 중심인 로마를 거쳐 땅 끝인 스페인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을 주셨고, 그런 열망을 따라 살아가도록 사도 바울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소 로마에 무척이나 가고 싶었지만 쉽게 그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덮어씌운 죄목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을 비방했다는 것과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감으로 거룩한 성전을 더렵혔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1:28) 그러나 사실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로마서 9:3) 그런데 동족을 비방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단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가지고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아무튼 그런 오해들로 인해서 사도 바울은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분위기는 사도 바울을 곧 죽일 기세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한 40인의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어떤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면 황제에게 고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재판이 일시 중지되고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생명의 위협를 느낀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고소했고,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미결수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오긴 했지만, 사도 바울은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긴 하지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0절에 의하면, 로마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유가 허락된 셋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바로 앞인 16절부터 보면, 자기가 머물던 셋집으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했던 것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결수입니다.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재판 결과에 따라서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구금되어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재판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결이 나도록 부죄를 입증하기 위한 변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재판에서 변론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하나 -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유의 몸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지금 형편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유대인들이 날짜를 정하여 다시 사도 바울을 찾아왔고,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에 머물러 있는 2년 동안 자기 집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셋집에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본문 마지막절인 31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 55주년을 맞았습니다.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기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주셨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 죽음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언젠가 이 땅에 재림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고,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55년 전에 우리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당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예배당 건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고의 사역은 결코 아닙니다. 예배당 건축이 우리 교회의 목표가 아닙니다. 예배당은 도구일 뿐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도구,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 교제하고 지역을 섬기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전도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다면 우리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도구여야 합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초기지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된 사람들이어야 하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해서 부르시는 사람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좋은 가문에, 사회적인 지위도 좋고 배움도 많은 사람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대부분 하나님과 동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그래서 사도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시고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 12명의 제자들은 모두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큰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그리고 복음의 역사는 사도 바울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의사 누가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의 사도행전의 역사도 없었습니다.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실라,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 생명을 바쳐 바울의 사역에 헌신했던 에바브라 디도, 사도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도망처 온 노예였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 신실한 동역자가 된 오네시모 등등. 그 이름을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당한 환란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가장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이라는 것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일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울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위대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예배당을 훌륭하게 지은 교회가 위대한 교회가 아닙니다.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인 교회가 위대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진정 위대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을 잊지 않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복음을 거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당을 잘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의 숫자보다 몇 배, 몇 십배, 몇 백배 더 많은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이 고난의 삶일지라도,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복음전도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하나님의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로 쓰임받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분명한 신앙고백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미국의 에이든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토저 목사님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아주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한 세 가지의 덕목이 있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디선가, 이 사람들이 아닌 어떤 사람들을 축복해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이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한 세 가지 수면제이다.”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세 가지로 지적합니다. ‘지금 축복하신다’가 아니라, ‘언젠가 축복해 주실 거야’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오늘 내 삶의 현장인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축복해 주실거야’라는 믿음이고, 세 번째는 ‘바로 나’가 아닌 ‘어떤 누군가를 축복하실 거야’라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긴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로 여기에서 나에게 복을 주시고,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것이란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저 두리뭉실하게 ‘언젠가 축복하시겠지, 어디선가 축복하시겠지, 누군가는 축복을 받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토저 목사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하는 수면제라고 말합니다. 이건 분명 불신앙입니다. 신앙 같지만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서 나를 축복해 주실 것도 믿으십니까? 그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 있는 바로 나를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신다는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있는 누군가가를 쓰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바로 나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언젠가는 쓰시겠지’가 아닙니다. 지금 내 모습 그대로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으십니다. 복 주실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역에 동역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교회를 통해서 사도행전을 계속 써 나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계속 써 나갈 오늘의 사도 바울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의 누가, 오늘의 디모데, 오늘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오늘의 오네시모를 찾고 계십니다.
어느 병원에서 한 환자에게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이틀밖에 살지 못합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데,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의사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다른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을만한 의사, 정말 신뢰가 가는 의사를 만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그렇게 외치고 있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당신 말고 진짜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고 말입니다. 당신 교회 말고 다른 교회였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이건 비극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신뢰받는 그리스도인, 세상에 신뢰를 주는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들이 사역하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요, 오늘 우리 시대가 간절히 찾는 교회입니다.
꿈꾸는 교회 춤추는 교회
사도행전 28:30-31 / 하용조 목사
올해 우리 교회의 비전은 ‘꿈꾸는 교회, 춤추는 교회’입니다. 저는 교회를 생각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편,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병들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고, 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진정한 교회를 ‘꿈꾸는 교회, 춤추는 교회’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존재하는가?
교회에 대해 몇 가지를 질문하고 싶습니다.
❶ 세상에 진정한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교회는 사도행전 시대에도, 2,000여 년이 지나 다양한 욕구가 분출되는 오늘날에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❷ 교회가 이 시대의 진정한 희망이고 대안일까요?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희망이고 대안입니다. 교회가 살면 세상이 살고, 교회가 죽으면 세상도 죽습니다.
교회가 많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도 세상은 어둡고 복잡하기만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내용을 상실한 채 형식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야 교회를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살아있는 교회를 실현해야 합니다.
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교회가 대안이라고 믿습니다. 정치계에 몸담고 있는 성도는 많은 비난을 무릅쓰고 정치 현장에서 순교하겠다는 각오로 정직하게 정치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정치가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업을 운영해야 합니다. 탈세하지 않고 노동력 착취하지 않으며 성실하게 사업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대학교 총장님, 교수님, 교장 및 교감 선생님 그리고 일선 학교의 선생님들이 계실 줄 압니다. 이런 분들로 인해 한국의 교육계와 학교가 크게 변화할 줄 믿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대안이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권위주의를 버리며 물질 왕국을 만들지 않는다면, 세상의 빛이 되고 희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교파나 교단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Kingdom Church)를 교회의 이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상에 온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특징
이제 사도행전의 교회를 살펴보면서 온누리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열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성령으로 잉태한 교회
첫째, 성령으로 잉태해 성령 사역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것처럼,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공동체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세례가 임한 것입니다.
성령의 경험이 없고, 성령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도행전적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인들이 많고 건물이 크다 해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사도행전적 교회가 아닙니다.
2) 서로 통용하는 예수 공동체 교회
둘째, 예수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말씀을 읽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의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예배를 드리며,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극장이 아니고 헌금은 입장권이 아닙니다. 모두 함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배우며, 찬양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교회입니다. 현대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사회, 예수님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3) 기적을 체험하는 교회
셋째,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3장 6~10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여서 희망도 미래도 없던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영적 앉은뱅이, 영적 청각 장애, 영적 백치가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림으로써, 날마다 뛰고 들으며 깨닫는 기적들이 교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교회입니다.
4) 고난에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
넷째, 고난 중에도 계속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4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고 잡아다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리고 칼로 찌르거나 성전의 높은 꼭대기에서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주십니다. 곧 ‘고난당하는 교회(Suffering Church)’인 것입니다. 교회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5) 재물을 나누는 교회
다섯째, 재물을 나눠 쓰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35절 말씀을 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초대 교회는 물질에 대한 유혹을 초월했습니다. 교회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습니다. 배운 자도 있고 배우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건강한 자도 있고 건강하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개인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질을 초월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6) 정직, 순결, 거룩한 교회
여섯째, 정직과 순결과 거룩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5장 1~4절 말씀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초대 교회에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땅을 팔아서 얼마를 감춘 후에 헌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의 액수에 관심이 없습니다. 부부가 원해서 땅을 팔았고, 팔고 나서 받은 땅 값도 그 부부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부를 냈다’고 말해 하나님과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교회가 정직과 순결, 거룩을 원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많은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는 게 아니라, 중심을 보고 취하십니다. 저는 온누리교회가 진실하고 정직하며 내적 성숙이 있는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7)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교회
일곱째,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6장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교회의 리더십은 한 사람이 독점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나눠 가집니다. 교회의 주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모두 조연에 불과합니다.
교회에서 사람이 영광을 받으면 죽은 교회가 되고 맙니다. 사람 중심의 교회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교회의 리더십은 나눠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시대를 이끌 수 있는 리더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8) 이방인을 품는 교회
여덟째, 이방인을 가슴에 품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0장 44~48절을 읽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로마의 군대 장관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줄 수 없다며 거부했다가 하나님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런 후에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백인과 흑인, 동양인과 서양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1, 2, 3차 전도 여행을 통해 이방인들을 찾았습니다. 저는 한국이 복 받는 방법은 이 땅에 찾아온 이주 노동자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복을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불법 체류 이주 노동자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많은 문제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힘없고 약한 자를 찾고 소외된 자를 품어야 합니다.
9)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
아홉째,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적인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가 선교지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이방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비전과 열정이 있습니다. 서울 시내는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울의 선교사들입니다. 서울의 환경, 교통, 쓰레기 문제 등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선교지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선교사이고 직장의 선교사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순교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8시간 일하라고 한다면 10시간 일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수당을 주지 않아도 기쁜 마음으로 밤새워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교사의 마음입니다. 서울시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을 변화시키고, 대전에 사는 사람들은 대전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10)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교회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교회, 새로운 교회를 낳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8장 30~31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들의 행적은 끝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8장 끝 부분에 보면,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셋집에서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서로 왕래해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과 2년 동안 성경을 공부한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새로운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 주님의 기적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9장을 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낳는 일은 2,000여 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저는 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열 가지 모습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를 꿈꾸며, 그로 인해 즐겁게 춤추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28장
행 28:30-31 / 박봉수 목사
지구의 자연현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 가운데 하나가 화산활동입니다. 화산활동이란 지구의 내부 에너지가 지표로 분출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지구의 내부 에너지가 내부 물질을 녹여서 만들어낸 마그마에 실려서 지표면 밖으로 분출됩니다. 이 때 지각에 변화가 생기는데 그 분출되는 자리에 화산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마치 화산활동과 같은 놀라운 영적현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영적 에너지가 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이 땅에 그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의 한 복판에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화산활동과 같은 영적 현상의 그 시작에 관한 기록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인해 교회가 세워지고 이 땅에 복음의 역사가 시작될 때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초창기 이야기를 28장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28장으로 종결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 이후 계속되었고 오늘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들은 사도행전 28장 이후를 계속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 대열에 서 있습니다. 지금 사도행전 29장을 써 가고 있는 것입니다.
화산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입니다. 지금도 지구 내부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지금도 뜨거운 마그마를 뿜어냅니다. 둘은 역사상 활동 기록이 남아있는 휴화산입니다. 활동했던 시기가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지금은 쉬고 있는 화산을 말합니다. 그리고 셋은 사화산입니다. 화산과 같은 모양은 있지만 가까운 과거에 활동한 흔적을 찾기 힘든 그래서 지금은 죽은 것과 같은 화산을 말합니다.
화산이 세 종류가 있듯이 교회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입니다. 오늘도 뜨거운 마그마의 운동처럼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나타나 수많은 영적 사건이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둘은 휴화산과 같은 교회입니다. 과거에 많은 활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쉬고 있는 휴화산처럼 많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흔적은 있지만 지금은 잠자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셋은 사화산과 같은 교회입니다. 활동한 기록을 찾아볼 수없을 정도로 거의 활동이 정지된 사화산처럼 성령의 역사가 전설처럼 아득한 그래서 거의 성령의 역사가 소멸된 교회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을 써 내려갈 때 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우리 상도중앙교회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로 기록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행여라도 휴화산과 같은 교회로 기록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절대로 사화산과 같은 교회로 기록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활화산과 같은 교회로 사도행전 29장을 써 내려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오심에 관한 예언으로 시작됩니다. 1:4-5을 보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8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 그대로 행 2장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마치 화산 폭발 예고가 있은 뒤에 마그마가 지각을 뚫고 분출해서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나듯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갖가지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기록의 핵심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이 임재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를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교회적 차원
성령이 오시면 교회적으로 성령 주도적 역사가 나타납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겠습니다. 빌립이 전도할 때의 기록입니다. 8:29절에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8:39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안디옥 교회의 사역에 관한 기록입니다. 13:2절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13:4절에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에 성령이 주도적으로 간섭하시고 역사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활화산과 같은 교회로 사도행전을 써 내려가려면 우선 성령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마치 풍향계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 지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처럼 성령이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끼리 모여 회의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서 교회의 나아갈 바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휴화산과 같은 교회가 됩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사화산과 같은 교회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2. 개인적 차원
성령이 오시면 개인적으로 성령 충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몇 가지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2:4을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집사들이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주의 사역을 담당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충만하다는 것은 가득 채워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며느리가 10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었는데 10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됐답니다.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 기쁨이 권사님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한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슬픔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한 사람 안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무엇인가가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을 말합니다. 무엇인가가 그 사람의 존재를 강력하게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이 심령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심령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존재를 강력하게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교회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 사람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변화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 두 가지입니다.
담대함
성령이 오신 뒤에 우선 사람들이 담대해 졌습니다. 원래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 때문에 떠나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박해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성령이 오시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담대하게 사람들 앞으로 나갔습니다.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스데반처럼 순교를 당하게 되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2:12-3을 보면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4:13을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6:15절을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들이 담대해 집니다. 두려움, 염려, 근심 걱정 다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담대한 사람들 그들이 활화산 같은 교회를 만들어갑니다.
하나됨
행 2장을 보면 성령이 오시자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사건으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한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빈부귀천, 남녀노소 모든 인간적인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하나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별히 2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나눔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마다 가진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게 되었습니다. 자기 가진 것을 내어놓고 서로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저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음과 마음 사이의 장벽이 다 무너졌습니다. 함께 모이기를 기뻐했습니다. 매일 모여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함께 말씀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며 함께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대화가 단절되고, 마음이 갈라지고, 뿔뿔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서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진정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도 하나, 마음도 하나, 헌신도 하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가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셋째, 복음의 전진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저들이 주님의 일꾼이 되어 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나아감
마 28:19절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명령입니다.
행 1:8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성령이 오시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대로 성령이 오신 뒤에 초대교회 사역자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Outreach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추진합니다. 때로는 국내로 또 때로는 국외로 활발하게 나아갑니다. 우리 교회도 활발하게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청년들이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강릉으로 나아갔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린이들에게 나아갔습니다. 제가 격려차 가보았습니다. 공원에 큰 이벤트 마당을 만들었습니다. 어디서 왔는데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왔습니다. 신나게 한 바탕 물놀이를 했습니다. 맛있는 간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가슴으로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강릉 땅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8월에는 저 중국 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중국의 오지 감숙성에서 중국교회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게 됩니다. 교사 강습회도 엽니다. 청년 수련회도 하게 됩니다. 그곳에 또한 놀라운 성령의 바람이 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담장을 쳐놓고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끼리만 우리끼리만...” 곤란합니다. 아파트 단지로, 직장으로, 농어촌으로, 중국으로, 전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증거함
행 1:8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오신 뒤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주된 목적은 바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행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너무도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3:12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를 증거한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가서 병도 고쳐주고, 배고픈 문제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외로운 사람 돌봐주어야 합니다. 사회의 구석구석 어두운 곳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예수의 증인이 되려 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그 분을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저들이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의 능력으로 저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열심히 예수를 증거할 때 우리 교회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우리 교회가 창립된 지 48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활화산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앞으로 더욱 불타는 활화산처럼 뜨겁게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더욱 왕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를 통해 복음이 더욱 전진해야 합니다.
문은 열렸다
엄기호 목사
근대올림픽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108년 만에, 역대 최대인 202개국 1만 5천 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제28회 아테네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세계인의 화합과 평화를 지향하는 올림픽의 문이 그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다시 열린 것입니다.
문이 열린다는 것은 구별된 공간과 공간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익숙한 공간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장소를 이동하거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문을 통과해야 하듯이 우리 삶에도 우리가 통과해야 할 다양한 문이 준비되어 있으며 또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의 삶에는 어떤 문이 있었고 그는 어떤 문을 열었으며, 어떤 문을 통과했고, 닫힌 문을 어떻게 열었는지 그 비결을 함께 나누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통과해야 할 문
바울은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통과해야 할 문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을 ‘그리스도 주 예수의 종’,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막문을 통과해야 했듯이 우리는 예수라는 문을 먼저 통과해야 합니다. 구약의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한 곳,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거하는 곳이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막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막문을 통해야만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구약의 성막문을 말합니다.
이 성막문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청색은 생명을 의미하는 색으로써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원의 문임을 상징합니다. 자색은 왕권을 의미하는 색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분임을 상징하며, 홍색은 피를 의미하는 색으로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늘게 꼰 흰색 베실은 부활을 의미하는 색으로써 성결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한 구약의 성막문은 오직 하나의 문으로 크게 되어있었습니다. 하나의 문이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큰 문은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고 또한, 누구든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도 들어와야 합니다. 유다 사람도, 사마리아 사람도, 땅 끝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들어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지만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오직 하나의 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의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는 야웨의 문으로(시 118:19~20) 믿음의 티켓이 있어야 통과할 수 있는 문입니다.
외국을 가더라도 여권이 있어야 하고 비행기 티켓이 있어야 하며, 그 나라에 입국허가를 받은 비자기 필요하듯, 의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티켓 즉, 죄 사함의 티켓,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티켓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그네 같은 이 세상에서 죄사함의 티켓, 믿음의 티켓을 가지고 의의 문을 통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이 문이 지금 잠겼을 지라도 우리는 영원한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문이 잠겼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의 문이 닫혀있을 때 그 이유를 하나님께 여쭤보기도 전에 문 앞에서 먼저 포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곳곳마다 방해를 받으면서도 문 열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이 잠겼든지, 열렸든지 환경과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가 열 수 있는 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열 수 있는 문은 복음의 문임을 발견했습니다(고전 2:2).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세계 복음화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굳게 닫혀 영영 열리지 않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닫힌 문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열 수 있는 문들을 하나하나 열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비록 죄수의 몸이긴 해도 마침내 바울은 로마에 가는 문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울은 맘대로 행동할 수 없는 죄인이었기에 오히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그의 앞에 열린 문을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지름길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역경을 이김으로 복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감옥도 선교의 전초기지로 사용했고, 광풍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문이 닫혔을 때 닫힌 문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면서, 오직 한 가지 사명만을 마음에 품고 그가 열 수 있는 문들을 열어나갔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 안에서 모든 문이 닫혀 있을 때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닫힌 문을 통해 자신이 열 수 있는 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어야 할 문
요즘 사람들은 서로 분리되어 문을 꼭꼭 닫고 삽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무관심 속에 살아갑니다. 나만 알고, 우리 가족만 아는 이기심과 무관심이 팽배한 세상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마음의 문조차 모두 닫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맘, 긍휼히 여기는 맘이 모두 굳게 닫힌 맘속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무엇보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내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청소년기가 되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자녀와도 마음의 문을 열고 진솔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시어머니, 시누이와도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가정에 행복과 화목이 넘칠 것입니다.
또한, 이름도 모르고, 관심도, 왕래도 없었던 우리의 이웃에게 마음 문을 열고 먼저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베품의 문을 통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허무는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서로 막힌 담을 허물고 분리된 관계를 회복하는 평화의 문, 화합의 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의 문을 열면 틀림없이 하늘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문이 열리면 우리 인생이 변화됩니다.
바울은 2년간 셋집에 유하면서 그의 마음의 문, 거처하는 셋집의 문을 활짝 열고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문, 축복의 문을 열어주고 그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집은 언제나 모두에게 열린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마음은 어떤 사람이든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활짝 열린 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을 통과합시다. 그리고 닫힌 문 앞에서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고 또 다른 문을 두드려 봅시다. 최선의 방법이 막히면 차선의 방법을 활용해 자신이 열 수 있는 문을 찾아봅시다.
그래서 마침내 닫혀있던 문들, 기도 응답의 문, 축복의 문, 기적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비결을 아는가?
오정호 목사
시인 바이런(Byron)은 “세월은 마음에서 열정을 앗아가 버리고, 우리의 손과 발에서 기력을 탈취해간다”고 말했습니다. “청년시절의 하루는 짧고 한해는 길지만, 노년시절의 하루는 길고 한해는 짧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청년은 희망의 그림자를 가지고 살지만 노년은 회상의 그림자를 가슴에 담고 삽니다. 세월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고 말씀합니다. 악한 세대에 사는 우리는 세월에 대한 삶의 원칙을 세워야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삶 속에서 이루며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재산의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뿐만 아니라 사역의 대차대조표, 사랑의 대차대조표도 만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전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서 회심했고 어떻게 주앞에 헌신하며 살았는지를 통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비결을 추적합시다.
1.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려면 시간관(時間觀)이 분명해야 합니다(30절a).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30절a). 온 이태는 이년을 꽉 채운 2년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기한까지 삽니다(전도서 3:1). 하나님이 부르시면 주 앞에 서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직분도, 젊음의 때도 무한히 주신 게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관이 분명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의 시간관이 분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판결받기까지의 소송기간이 2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 취급받으면서 소송을 하는 가운데서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2년이라는 세월을 마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적극적으로 바라보면서 이 시간들을 선용(善用)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선물로 주신 시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정한 시간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라고 기도했습니다.
2.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려면 사랑의 관계로 사람을 얻어야합니다(30절b).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30절b). 사도바울은 2년 동안 셋집에 있으면서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박탈당한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고 자존감도 깨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가려서 영접한 게 아니라 “다”영접했습니다(welcome). 예외없이 그에게 나오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믿음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두를 따뜻한 맘으로 품었습니다.
바울의 삶에서 대인관계(對人關係)가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한해를 결산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샀는지,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가 더 소중합니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사도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요,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뛰어난 학식을 가진 자였지만 사람을 얻기 위해 즉,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종 되기를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남편을 얻기 위해, 내 자녀를 얻기 위해, 이웃을 얻기 위해 얼마나 종된 모습을 가지고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는지 되돌아봅시다. 우리주님은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얻고, 영혼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을 해야 됩니다. 사람을 얻는 것은 우리 평생의 과제입니다.
오는 21일 주일에 교회개척 25년 사역을 마치시고 담임목사님에서 은퇴하시는 서울사랑의교회 옥한흠목사(玉漢欽)님은 저의 목회의 스승이시며, 멘토(mentor)이십니다. 목사님께서는 평신도를 깨워 소명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목회철학으로 초지일관 달려오셨고, 또한 한국교회 대형교회 목사님으로서 지도력이양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신 뒷모습이 이름다운 목사님이십니다.
지난번 목사님의 생신때에 정성을 담아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 날 오후 전화가 왔습니다. 여러 말씀을 나눈 후 수화기를 놓기전에 저의 마음을 채워 담은 두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목사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삶이겠습니까!
3.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려면 직분의식(職分意識)이 분명해야 합니다(31절).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31절). 여기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다는 것은 설교(preaching)혹은 선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는 것은 교육(teaching) 혹은 훈련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은 하나님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Kerygma, 케리그마)하고 가르치는 것(Didache, 디다케)입니다. 교제(Koinonia, 코이노니아) 봉사(Diakonia/디아코니아)도 중요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과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가르치는 훈련사역은 병행되어야 됩니다.
교회가 침묵하면,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합니다. 성도가 침묵하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침묵하면, 영적인 암흑이 온누리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때에 사람들은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시민권자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도성에 살지만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에 속한 사람이라는 자기정체성(自己正體性)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사도의 직분을 불같은 확신으로 실천했던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 교회, 직장,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지를 점검해 봅시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왜 성령께서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31절b)고 마지막에 기록하셨을까요? 만약 사도행전 29장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써야할 부분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단절이 아니라 복음의 연속적인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일반 직장생활이나 우리의 생업에 관심을 가져야 될 뿐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세상 나라도 잘 다스리고 이끌기 위해서는 지도자 스스로가 반듯하게 서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사람들과 회복할 것은 회복하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시간들을 아끼며 적극적으로 활용합시다.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여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사람과 영혼을 얻는 자들이 다 됩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식을 철저히 몸으로 녹여 내며 삽시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우리 교회, 직장, 내 삶의 현장에 희망의 빛을 환히 비춥시다. 기대감으로 설레게 하는 성탄의 계절, 은총의 계절에 의식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무장되어 천국의 삶을 오늘에 실현하며 살아갑시다.
나그네 인생에서 남는 것
휘감아 부는 바람
남기는 것
억새풀잎 환호하는 소리
나그네 인생
삶의 흔적
시간의 방에 찍힌
쏟아진 영혼의 자국
그리스도인
흘러가는 세월 속에
묻어내는 것
예수 향기
섬기는 땀 내음
세상사(世上事)는
영혼사(靈魂事)의 반영
자아가 만들면 인생졸작(人生拙作)
주님과 함께 만들면 인생걸작(人生傑作)
나그네 인생
남는 것
영원을 향하여
열린
믿음의 눈
간구의 입술
더불어 세워진
믿음의 역사(役事)
사랑의 수고(受苦)
소망의 인내(忍耐)
예수사랑
교회사랑
사람사랑
사랑만이
찰라(刹那)를
영원(永遠)으로
이끌어 올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