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요 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 3:16-21 /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보내셨다. 18) 그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어둠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인으로 판단을 받은 것이다. 19) 죄인으로 판단받았다는 것은 곧 빛이 하늘로부터 세상에 들어왔는데도 그들이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 20) 그들은 어둠 속에서 죄짓기를 즐기고 하늘의 빛을 싫어한다.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서 수치를 당할까봐 빛을 멀리한다. 21) 그러나 올바른 행실을 하는 사람들은 즐겨 빛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은 기독교 진리를 가장 단순하면서 심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출발(16-17)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생에 대한 약속의 출발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신 엄청난 사건입니다. 신이 인간을 위하여 대신 죽는다는 이야기는 세속 종교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세속 종교는 도리어 인간에게 신을 위하여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기꺼이 하나뿐인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며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존재를 위해 파격적인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의 초림은 심판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에 다시 오실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오십니다.
믿음의 기준(18) 장차 다시 오실 재림주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 기준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진심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다면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역사적 종말의 시간이 다가와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면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19-21)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1장에서 예수께서 참빛이시며 생명의 근원으로서 사람들에게 비취는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어둠에 빛이 비춰졌지만 세상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비밀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던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믿게 하려 했지만 알지 못하므로 영접치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난 자라면 진리를 따라 빛 가운데 행하고 있는지 자신을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적용: '이처럼'이란 단어에 감격하고 있는지! 독생자, 스스로 오신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정죄와 구원의 기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참조 롬 5:8-11).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꺽지 않고 내가 스스로 깨닫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좋아하고 즐거워하게 하셔서 순종하게 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나님은 억지로 시키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에 하고 싶은 소원을 먼저 주십니다. 스스로 깨닫고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행하게 하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 설 교 >
오직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요한복음 3:11-16 / 최창훈 목사
구원이라는 용어는 기독교가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도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란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영생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과는 뜻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롬3:10-12절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죄 없는 존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창3장의 내용대로 모든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타락함으로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죄의 유전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지은 죄가 그 후손에게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죄의 유전을 허구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지은 죄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유전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신빙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5천년전의 미이라의 뼈 속에 남아있는 DNA를 가지고 복제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유전인자만 남아 있으면 죄가 없는 인간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는 유전인자보다 더 강한 유전성과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롬6:23절을 보면 "죄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민주국가와 독재국가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죄를 처벌하는 방법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우 죄를 범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대통령도, 대통령 아들도, 장관도, 장군도 죄를 묻고 법에 따라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독재국가의 경우는 선별적으로 벌을 줍니다.
그래서 힘을 가진 권력집단은 다 빠져나가고 힘이 없는 사람들만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3:16절을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절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요3:16절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이 기록되었고, 신약이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했고 신약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사실을 밝히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3:16절이야말로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 얻는 단순 명료한 진리를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직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모세의 구리뱀 사건으로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했고
15절을 보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민21:4-9절을 근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거친 광야생활을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의 여정은 한마디로 험난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을 가로막는 부족들과의 전쟁, 더위와 추위, 맹수들의 위험, 배고픔과 목마름과 계속되는 주거이동 등. 모든 것들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영적 방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생을 견디다 못한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싸잡아 원망했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단, 한번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망을 그냥 지나치신 일이 없었습니다.
반드시 원망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원망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그들의 원망의 원인을 "악한 건망증 때문이었다"고 했고
메튜헨리나 베이커는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출 14:11절을 보면 "모세를 향해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려느냐"라며 원망했고
출16:2-3절을 보면 "우리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굶주려 죽게하려느냐"라고 원망했고
출17:3절을 보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목말라 죽게하려느냐"라고 했고
민11:5-6절을 보면 "애굽에서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거늘 이제는 정력이 쇠약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고
민14:2절을 보면 "애굽 땅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을뻔했다" 고 했고
민16:41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을 죽였다"고 대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때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원망한 백성들은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원망을 싫어하십니다.
민21:5절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느냐 이곳에는 식물도 물도 없도다"라며 원망하고 대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즉시 불뱀을 동원해 그들을 물게 하셨고, 독이 올라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리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민21:9절에 보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놋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는 것입니다.
구리로 만든 뱀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물 수도, 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은 그 놋뱀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바라본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요3: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그 놋뱀 사건을 십자가 사건과 대비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요, 비과학적이며, 비합리적인 가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치에 맞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믿고 바라본 사람들은 죽지 않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2천년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33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결과는 둘입니다.
그 약속대로 믿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약속을 불신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1:18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고
고전1:25절을 보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멸망받을 사람들에게는 유치하고, 어리석고, 허무맹랑하고, 허약한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사건이 능력과 사랑과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고 바라보아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오직 에수님을 믿어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15절에서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했고
16절에서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고
18절 역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믿어야 영생을 얻고 멸망치 않고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16절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과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믿어야 하고, 믿을 수 있고,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주이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왕도, 대통령도, 회장도, 장군도, 박사도, 남자도, 여자도, 서양인도, 동양인도, 어른도, 어린아이 등, 누구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구원받지 못하고 뜨거운 지옥 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믿지 않고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마10:33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부인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 일부러 죄짓고 타락하는 사람들입니다.
히10:26절을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했고 히10:29절을 보면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는 당연히 중한 형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6:4-6절을 보면 "예수 믿고 은사 받고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버림받는다"고 했습니다.
셋째, 예수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까지 되었지만 예수를 팔아 넘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었습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교회를 섬기는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교회 안에서 못된 짓만 골라 했는데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믿음이 파선했고, 사단에게 빠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빌2:12절에서 바울은 "두렵고 떠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이미 받은 구원을 저버리거나 사단의 유혹에 빠져 내어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칼마르크스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만 공산주의 이론을 만들어 인류를 죽음과 절망의 공포 속에 빠지게 했고 자신도 멸망했습니다.
앞으로도 세계는 유신론과 무신론, 유신론과 다신론, 기독교문명과 반기독교문명의 충돌이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 3: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공식을 벗어나서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라는 신학사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어도 구원받고, 부처를 믿어도 구원받고, 마호메트를 믿어도 구원받고, 공자를 믿어도 구원받는다는 사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믿는다는 그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무엇을 믿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4:12절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는 것 하나뿐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요14:6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진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미 받은 구원을 잘 지켜서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위해 천국의 능력 있는 일꾼들이 되시고, 때가 되어 천국에 이르는 날 면류관을 받으시고, 자랑스런 구원자로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시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김삼환 목사
요한복음 3장 13-18절천 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온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아들을 보내어주신 것은 우리 온 인류를 어떻게 하면 축복하실까. 만 가지 축복과 은혜와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영접하면,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인간이 받아야 할 복은, 인간에게 있어야 할 축복은 다 받을 수 있는, 이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독생자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인간은, 인간이 원래 가졌던 행복과 영광과 축복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아들로 말미암아, 이 메시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독생자로 말미암아 우리인간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수많은 저주, 불행, 멸망, 죽음, 심판,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면하게 하기 위해서, 누구든지 이 아들만 믿으면 인간은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불행과 저주가 있는데 이 저주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저를 믿으면 망하지 않는다 그 말씀입니다. 불행하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저주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많고 많은 이 세상에 고통스러운 눈물의 슬픔과 후회와 저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어떤 분은 “아이고 꼭 교회 나갈 필요 있냐. 인간이 의지가 강해야지, 인간이 정신력으로 살아야지 무슨 교회 나가냐.” 아니 인간의 의지와 정신이 모든 저주를 다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의지와 정신이 모든 문제, 죽음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복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어떤 분은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무슨 인간이 약하게 하나님을 믿고, 인간이 지성적으로 살고 과학적으로 살아야지. 아니 예수 믿는다고 비과학적으로 삽니까? 예수 믿는다고 비지성적으로 삽니까?
이 지상에 예수 믿는 나라같이 지성이이 없는데. 모든 지식은 기독교를 통해서 오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 것은 무식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약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더 강하게 사는 것이고, 더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지식이 인간구세주가 됩니까? 과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과학이 우리를 죄에서 건질 수 있습니까? 불행에서 우리를 과학이 건져낼 수 있습니까? 과학이 우리를 마귀에서, 사망에서 건져낼 수 있느냐 말입니다. 과학이 필요하지만 과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은 인간이 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면 되는 거지 꼭 교회 나갈 필요 있냐. 전에 포철회장 박태준 회장도 그 말씀을 했습니다. 자기는 좋은 일만 하고 살면 되는 거지 꼭 교회 나갈 필요 있냐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본인이 불행한 일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 보니 착한 것 가지고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선한 것 가지고 몇 가지 좋은 일 했다고 사람이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박태준 회장이 늦게 교회 나와서 믿고 세례 받아보니 아이고 진작 내가 교회 나가야 될 텐데, 오늘 오신 여러분들도 진작 오실 터인데. 오늘 잘 나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모든 저주와 멸망에서 건지실 이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아들로 태어나서 시골에서 하루 종일 농민은 낫을 가지고 삽니다. 농민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낫입니다, 낫.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분명히 낫을 갈게 되어 있습니다, 낫을 갈게. 낫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무슨 일, 꼴해도 낫, 밭에 가도 낫, 논에 가도 낫, 산에 가도 낫, 낫이 낫을 피할 수 없습니다. 벼를 베도 낫, 콩을 베도 낫, 보리를 베도 낫, 밀을 베도 전부 낫입니다. 낫으로 농사를 짓는, 그러니까 이 낫으로 일하다보니 손을 많이 베입니다. 일하다보면 손을 많이 베입니다. 그래서 저도, 저는 온 몸이 거의 참 신체적으로 완벽한데 장애가 하나 딱 있습니다. 잘 모르는데, 이렇게 손가락보면 이 손가락이 약간 끝이 휘어졌습니다. 자세히 봐 봐요. 왜 그러냐 하면 낫으로 일하다가, 꼴 하다가 이게 딱 잘려져 가지고. 보니까 이렇게 꺾였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붙였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붙지를 않고 이만큼 달려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어도 좋은 약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머큐롬이라고 하는 빨간약, 아카쟁키라고 그러는데 이게 나와 가지고 이것만 바르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참 신비합니다. 열 번이고 뭐고 간에 이것만 바르면, 이거 바르고 붕대를 감아놓으면 상당히 큰 상처도 싸매어집니다. 이거 없을 때는 우리어머니가 김치를 갖다 매어주고 된장을 갖다 매어주고 늘 그렇게 했는데 그다음부터는 이거 바르면 기적같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빨간색깔이, 그래서 빨간 거 이렇게 갖다가 딱 바르고 나면 그만 간곳없이 상처가 싸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빨간 머큐롬 입니다. 영적으로 우리를 치료해 주는 보혈의 은혜입니다. 사람은 다 죄의 상처가 있습니다. 마음이 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처 없는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많이 긁어지고, 이 긁어진 상처를 누가 싸매어줄 사람 없습니다. 부모가 이 상처를 싸매어 줄 수 없습니다. 아내가 상처를 싸매어줄 수, 남편이, 선생님이 어느 누구도 내영혼의 상처를, 죄악의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의 보혈만이, 주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빨간 물이, 십자가의 붉은 피가, 내 모든 영혼에, 내 모든 심령에, 내 모든 삶에 상처를 깨끗하게 치료해서 그래서 예수 믿으면 상처가 다 싸매어지고, 회복이 되고 치료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상처가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고, 상처를 싸매면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야 됩니다. 임금도 예수 믿어야 되고,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 믿지 아니하면 이 상처는 그대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못 나오듯이 건지려고 하면 다 같이 빠져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죄에서, 멸망에서, 심판에서 건져주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구세주가 아닙니다. 공자도 우리구세주는 아닙니다. 공자선생님이 내가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 그랬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절대로 우리를 건져줄 구세주는 아닙니다. 그분들도 다 죄인이고 물에 빠져 허덕이면서 어떻게 살려고 몸부림 친 분이지, 우리를 살려줄 구세주는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이는, 우리를 모든 저주와 멸망에서 건지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습니다. 교회 나오면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망해 가는 집안이라도 회복이 되고, 망할 수밖에 없는 팔자라도 고쳐지는, 팔자는 고치면 구자 되는 것입니다. 아멘.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 가지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 따라 가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평생 길 잃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따라가면 길을 잃습니다. 지식을 따라가도 길 잃고, 사람이 스승을 따라가도 스승이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같이 길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으로 따라가는 개인이나 민족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영원히 주님은 나의 길이 되셔서 안전한 길로, 평탄한 길로, 행복한 길로, 구원의 길로, 의의 길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집입니다. 우리인간은 진화론 같이 동물에게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거룩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값진 피조물입니다. 짐승이 아닙니다. 동물이 절대로 아닙니다. 원숭이가 우리조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학자가 잘못되게 본 것입니다. 사람이 왜 짐승입니까? 사람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신비하게, 신령하게, 거룩하게, 영광스럽게 창조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사귀고, 아버지를 가까이 해야 됩니다. 인간의 행복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하 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은 이 교회에 계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영광 받으시고,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지어주신 거룩한 집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다 계시지만 특별히 이곳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새가 하늘에 다 있지만 자기 집에 가있듯이 우리 대통령이 지금 다보스에 가계시고 대한민국 다 계시지만 청와대에 센터를 정해 놓고 그 안에 계시듯이 우리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다 다스리시고 안 계신 곳이 없지만 교회에 특별히 이것은 아버지 집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은 아버지 집이 아닙니다. 교회는 아버지 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 집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와 만나고 귀하신 아버지, 영광의 아버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능력과 권세가 무한하신 부유하신 아버지를 만나니 얼마나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 나와서 좋은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직장도 없이 헤매는 사람은 내일은 저곳에 가면 일하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사람도 오늘 이 사람 만나 사랑하고 내일 저 사람 만나 사랑하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한 사람을 만나 사랑해야 행복하고, 한 가정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고, 한 직장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 교회를 사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내게 한 가정을 주신 것처럼 한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한 교회를 정하고, 한 교회 다녀야 한 교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두 교회를 다니면 두 배의 복이 있는 게 아닙니다. 여자를 둘 사랑하면 그럼 두 배나 행복합니까? 둘 사랑하면 할수록 그건 미친놈이 되는 거고,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해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교회 나오셔서 하나님이 계신, 아버지 집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만나는 이 시간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일에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간에도 우리가족들과 함께 아이들, 손자들과 함께 지나는데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자고,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잠 많이 자고, 이야기하고. 그러니 교회 오면 잠도 잘 옵니다. 설교 듣는 중에도 잠이 오고, 아버지 집이니까 그렇게 행복합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는 것 이것은 이 세상에 가장 값진 일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최고의 베스트입니다.
보화도 값진 보화가 있습니다. 전 세계 제일 값나가는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지위도 제일 높은 지위가 있습니다. 인기도 가장 높은 인기가 있습니다. 집도 제일 좋은 집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 교인 집에 갔더니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 집에 있는 것은 하나도 국산품이 없습니다. 전 세계 수입을 해가지고 제일 좋은 것으로 지었습니다.” 가보니 정말 좋습니다. 집에 있는 모든 방바닥에 있는 것까지 전부 해외 것입니다. 국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잘 지었습니다. 수십억을 들여서 지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제일 좋은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모시고 살면 집은 별로 좋지 않아도 우리 집에 계신 주님 때문에 좋은 집이 부럽지를 않습니다. 항상 행복합니다. 제일 좋은 차가 있듯이 예수님을 모시면 티코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11자 자동차를 타도 행복합니다. 11자 자동차는 걸어다니는 것입니다. 걷는 차입니다. 걷는 자를 타도 행복합니다. 다이아를 값진 것을 가지면 그 다음에는 다이아에 대한, 보석에 대한 유혹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심상해 집니다. 제일 비싼 거를 가졌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모든 출세에 대한 유혹이 없어집니다. 왜? 더 이상 높은 자리가 없으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이 없습니다. 유혹을 안 받습니다. 유혹을 안 받습니다. 저는 어려서 객지에 나왔지만 술 한 잔 안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담배 한 대 피우지를 않습니다. 왜? 유혹이 되지 않더라고요. 예수님이 계시니 그런 걸 호기심이 없어집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내 친구들은 연애도 많이 하는데 나는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더라고요.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나에게 좋은 영자씨 한분을 만나게 하겠지 이런 믿음이 생기고, 그런 데 대한 유혹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 안에 계시면 보화가 있는 것과 같아서 유혹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사기 당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인생을 잘못된 길을 걸어가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이 계시니까, 예수님이 계시니까. 할렐루야! 오늘 예수님을 믿고 교회 나오는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가장 복된 삶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은 현실에 대해서 불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어디에 살아도 어떤 형편이어도, 좋든지 나쁘든지, 힘들고 어려워도 불만이 없습니다. 항상 기쁨으로, 감사하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로또 1천억을 받으면 뭐하겠느냐? 남자들에 물으니까 남자들은 제일 많은 것이 해외로 이민가겠다. 이 돈 가지고 해외에 가서, 좋은 나라 가서 잘 살겠다. 무슨 별 나라가 있는지 압니까? 여자들한테 물었습니다. 이 천억을 받으면 뭘 하겠냐 그러니까 이 남자하고 이혼하겠다. 이 남자하고 이혼하면 천억을 받으면 그래 가지고 멋지게, 천억 가지고 멋지게 좋은 사람 만나 잘 살겠다. 많은 사람은 오늘 보다는 이 다른 나라 가서, 여기 보다는 저기 가서, 이 직장 보다는 다른 직장, 이 사람보다는 저 사람 만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여기가 천국입니다, 여기가 천국. 이대로가 좋은 것입니다. 오늘이 최고인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되는,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면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예수 믿으면 100% 확실히 복 받습니다. 예수님 잘 믿는 일에 끝까지 올인(All-IN)해야지 믿다가 말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그렇게 믿음의 생활하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예수님 잘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말레이시아에 갔는데 그곳에 선교사가 여자선교사님이 그곳에서 회장이더라고요. 이순희 선교사님이 말레이지사 선교사로 회장으로 저를 도와주고 있는데, 그분은 경주가 고향이고, 경주 양동마을이 자기 살던 마을이랍니다. 이 마을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그런 마을입니다. 아주 양반집마을입니다. 수백 년된 고가들로 마을이 다, 그 마을에 종가 댁이 이 가정이었답니다. 자기는 어려서 교회를 다녔는데 얼마나 핍박하는지 그렇게 딸인데도 때리고, 어려움 많이 주고, 끝까지 교회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중학교 다니는 남동생이 몸이 아파서 병이 들어서 죽게 되었는데, 서울대학병원 와도 안 되고 대구동산병원 가도 안 되고, 천하의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 아이를 고치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 문중전체가 이 마을 전체가 수심에 잠긴 것입니다. 이 하나 밖에 없는 손자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이 순희가 할아버지한테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 예수님을 믿으면 내 동생 분명히 낫습니다.
예수님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구원을 얻으면 내 동생은 분명히 낫습니다. 교회 나가세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고민하고 몇 달 지나서 길이 없으니까 이 애가 점점 죽어가니까 나중에 그러더랍니다. “고쳐만 주면 나갈게.”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외상 그런 말하지 마세요. 나가야 고칩니다. 교회 나가야 낫습니다. 교회는 나와야 됩니다.” 아멘도 안 하네. “고쳐주면 나갈게.” 외상은 하나님 그렇게 안 합니다. 바로 나와야 됩니다. 나오면 은혜, 예수 앞에 나오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그러더랍니다. 돌아가신 조상보다는 살아있는 손자를 살려야 이 손이 내려가지 내가 손자를 위해서 교회 나가겠다 그래서 나왔는데, 이 중학교 다니던 이 남동생이 깨끗하게 나아서 목사가 되어서 LA에 이정원 목사님이 바로 남동생이라고 합니다. 이 종가 댁이 다 온 가정이 구원함을 받고 잘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삽니다. 교회 나오면 삽니다. 구원함을 받습니다.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야 됩니다. 예수의 품 안에 안겨야 됩니다. 이 품안에 안겨야, 오늘 성가대 찬송한대로 피난처입니다.
예수 믿은 만세반석입니다. 이 품 안에 안겨야 됩니다. 여기에 안겨야 평안이 있고, 여기에 안겨야 승리하는 것입니다. 교회 품안에 안기기를 바랍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속에는 큰 구멍이 있어서 이 공간은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채울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 공허함 외로움 허전함이 있습니다. 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불안함이 있습니다. 이 불안함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이 공허함을 술로 채우려고 하면 술은 구멍을 더 크게 냅니다. 공허함이 더 많아집니다. 도박하면 공허함이 더 많아집니다.
물질로 채우려고 하면 물질은 이 세상 것을 다 가져도 채울 수, 공허함이 더 많아집니다.
오늘 현대인들 보십시오. 오늘 지식이 이렇게 많고, 과학이 이렇게 발달하고, 물질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울증이 더 많고, 자살하는 더 많습니다. 점점점점 사람들이 공허함이 더 많아집니다. 너도 나도 안정이 안 되어 가지고 외로움에 떨고 있고, 불안함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도 겁이 나서 못하고, 자식도 겁이 나서 못 낳고, 낳은 자식도 겁이 나서 그냥 기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공허함이 없어집니다. 술 안 먹어도 기쁘고, 물질이 없는 것 같은데도 부유하고, 저는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굶고 지나는데, 제이야기를 듣고 우리 내가 기숙사에 있었는데 그 맞은 편에 우리 집안 어른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2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좋은 집을 가지고 우리 집안어른이 계셨습니다. 그 형수님이 그럽니다. 그렇게 굶었으면 좀 우리 집에 와서 밥 달라고 그러죠. 우리는 도련님이 그렇게 굶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 내가 항상 웃고 살고, 즐겁게 살고, 아니 가난한 게 무슨 사람이 앞으로 얼마나 복 받을 터인데, 가난 때문에 낙심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새가 아무 것 없어도 기쁘게 살듯이 오늘 우리는 내일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데 무슨 걱정이 많고, 불안하고, 염려가 되겠습니까?
늘 기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형수님이 전혀 그런 것을 몰랐답니다.
모르죠. 우리 가난한 것을 왜 누구에게 드러냅니까? 걱정을 왜 남에게 말합니까? 예수님이 계시는데, 할렐루야! 그 형수님이 하루는 내게 편지를 했습니다. 도련님, 우리 남편이 그때 그 형님은 대학을 나오셔 가지고 학교선생님이 되셨습니다. 중학교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중학교 선생은 그 당시에 50년 전에는 중학교 선생님이 최고입니다. 모두 선생님 자리로 다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생님이 되었는데, 30년을 선생님을 해도 사립학교는 교장으로, 교감진급이 안 됩니다. 백이 없으면 안 되니까 저보고 학교교장, 교감 자리 하나 좀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영광여자고등학교를 인수해 가지고 하던 때에 형수님이 남편을 교감시켜 달라 평생소원이 남편교감이라고 그럽니다. 제가 교장으로 발령 냈습니다. 영광여고 교장선생님으로 8년을 교장선생님으로, 그 가문에, 형님가문에도 큰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거지 같이 살던 내가 우리형님을 교장으로 딱 만들었다는, 아멘도 안 하네, 별로. 예수 잘 믿으면 좋은 날이 오는 줄로 믿습니다.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 안에 오시면 빈 구멍이 없습니다. 다 벌집과 같이 꿀로 꽉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루살렘성전에는 전부 석류로 꾸미는데 기둥마다 전부 석류인데 석류특징인데 뭡니까? 안이 꽉 차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여러분의 심령이 꽉 차고, 행복으로 꽉 차고, 은혜로 꽉 차고, 가정에 축복으로 꽉 찰 줄로 믿습니다. 예수 떠나면 안 됩니다. 될 것 같지만 안 됩니다. 예수 떠나도 출세합니다. 나중에 안 됩니다. 출세 안 한 것만 못합니다. 예수 떠나도 인기 있습니다. 최고의 인기탤런트 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안 돼서 자살합니다. 전 세계 내노라하는 인기 있는 사람이 다 자살합니다. 안 됩니다. 예수 떠나서 대통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안 된 것만 못합니다. 예수 떠나 돈 벌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돈 안 번 것만 못합니다. 예수 잘 믿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잘되고, 끝까지 잘되고, 모든 일에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북한이 예수 믿지 않고 남북이 나누어졌을 때는 북한이 훨씬 더 잘 살았습니다. 예수 안 믿는 것 때문에 북한이 저렇게 어려워졌습니다. 얼마나 가난합니까? 제가 책에 며칠 전에 요사이 그 책을 읽어 봤습니다. 북한에서 내려온 교수님 김일성대학의 교수님이 지은 책입니다. ‘21세기 이념의 유목민’이라는 책을 지은 김현식 교수님이 지은 책입니다. 얼마나 북한은 가난한지, 김일성대학의 교수님이니까 러시아에서 교수님 한분이 이번에 가서 당신 집에 한번 가겠다 그러니 집이 먹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정부에서 국가에서 빨리 연락이 오더랍니다. 오늘 당장 집을 옮기라고. 정부에서 마련한 아파트들에 들어가서, 가니까 전부 전자레인지가 있고, 냉장고도 있는데 집사람이 한 번도 다뤄본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전부다 소고기 구워먹는 것도 다 구해 가지고 전부 진열해 놓고 와가지고 러시아에서 왔는데, 고기를 한 번도 못 먹었는데 운동선수도 고기를 못 먹는 답니다. 그래서 안 됩니다. 그래서 운동을 못하는 못한 답니다.
키가 안 큰답니다. 책에 다 나옵니다. 그래서 군에 가는 남자를 워낙 키가 안 커가지고 그전에는 1미터 45까지 군에 가게 했는데 지금은 1미터 45까지 가게 하니 그이하의 젊은이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지금 몇 년 전 부터는 1미터40부터 군에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1미터 40은 우리나라 초등학교 2학년, 3학년도 벌써 1미터 40 되는데, 여러분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먹을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도 고기 한 점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니 어떻게 뛸 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도는 생리대가 없어가지고 정부에서 다, 전부다 배급이니까 생리대도 전부 배급이 내려오는데 광목으로 된 것 같은 걸 2미터를 잘라준답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잘라서 한 번씩 사용하는데 1년 내내 그걸 재활용해야 된답니다. 그러니까 물이라도 더운 물이 있으면 연료가 없으니, 물을 데울 수 없으니 빨아도 이것을 깨끗하게 빨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오는 분들은 이것을 알고 생리대 선물을 북한에 많이 하는데 북한에서는 그런 생리대는 필요 없답니다. 화를 낸답니다. 한번 쓰니까 다 망가지는 거를 뭐 하러 이런 것을 했냐고 그러고, 그러니 얼마나 북한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참한 것입니다. 비참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옵니다. 우리대한민국이 이렇게 복 받은 것은 교회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복 안 주시는데 인간이 무슨 짓으로 잘되느냐 말입니다. 힘쓴다고 됩니까? 인간이 동물입니까?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머리로 되는 게 아닙니다.
북한은 누구보다도 힘쓰고, 누구보다도 노력하지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다 없습니다. 오늘 이 지상의 나라 가운데 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나라는 어느 나라도 되는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예수님 잘 믿어 만대에 축복받는 나라 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해 주세요.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 믿으면 하나님 보내신 예수님 믿고 교회 나오면 하나님 자녀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자녀 되는 절차는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가장 귀한 신분입니다. 변화입니다. 가장 존귀한 명문가 양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박지원씨 소설 가운데 양반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한 사람이 양반이 되려고 돈을 많이 들여 가지고 양반을 샀는데, 군수님이 설명해 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배고픈 것도 참아야 하고, 가난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하고, 세수할 때 주먹의 때를 밀지 말고, 길을 걸을 때는 느릿느릿 걸을 것이며, 밥을 먹을 때는 맨상투바람으로 먹지 말고, 국부터 먼저 마시지 말며, 국을 먹을 때는 방정맞게 후루룩 소리 나게 마시지 말고, 양파를 먹고 냄새를 풍기지 말며, 춥다고 화롯불을 꾀지 말라” 양반은 다른 것입니다. 수천가지 예절이 있는 겁니다. 예수믿으면 양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걷는 것도 그전처럼 방정맞게 걸으면 안 됩니다, 조심. 말도 예수 믿으면 함부로 욕을 하거나 비방하는 말 성경에 하지 마라 그랬습니다. 왜? 하나님 자녀 됐으니까.
그전에 마귀에게 속했을 때 그런 행실을 버리라 그랬습니다. 술 먹고 방탕한 일을 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교회직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3장에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기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여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요. 교인이 되면 신분이 바뀝니다. 그전에 먹던 술 먹지 않아야 합니다. 그전에 하던 욕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전에 가족 간에 싸우고, 원망불평하고, 바뀌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 믿고 나서 욕 한마디 안 합니다. 군에 3년 동안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때려본 일이 없습니다.
나는 무수히 맞았지만 누구 한 사람 때려온 일이 없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욕먹었지만 3년 동안 욕 한 마디 안 하고 제대했습니다. 왜? 욕할 일이 없습니다. 내안에 주님이 계시는데 누구를 보고 욕하겠습니까? 부부간에도 싸울 일이 없습니다. 아내를 보고도 존댓말을 하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고, 그거 상놈하던 짓 하면 됩니까? 모든 아내를 귀히 여기고, 자식들 보는 데라도 아내를 귀히 여겨야 자식들도 귀히 여기지 자식들 보는데 아내를 함부로 뭐라고 그러면 그것은 교육적으로 아주 나쁜 겁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잡수세요.” 말도 존경하는 말, 웃는 것 보세요.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 가든지 “집사람 저 있어요.” 어디 가든지 내 위치를 알려야 됩니다. “저는 지금 여기 와 있습니다. 지금 가는 중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도착합니다.” 집에서 걱정하는데 걱정 안 하도록 전화해야지, 몇 며칠 지나도 집에 오지도 않고, 그것은 상놈입니다, 그것은. 양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당연합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에게라도 부모님 우선 잘해야 됩니다. 부모님 기쁘시게 하고, 부모님 잘 공경해야지 가족끼리 먼저 잘 지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가족한테 하지 못하면서 교회 나오지 말라 그랬습니다. 가까운 가족들한테 잘 하고, 친절하고, 사기하고, 강도질하고, 도박하고, 온갖 나쁜 짓하는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길가다가 보면 길가에 술 먹고 자는 사람 얼마나 많이 보지 않습니까? 우리자동차에 대고 와서 소변을 보면 남자들 세상에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거 어디가 화장실인지 모르는 겁니다. 말이 됩니까, 그게요. 예수 믿으면 그런 것이 다 끝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옷도 단정하게 입고, 뭐 때문에 찢어가지고 입고, 다리 뻥뻥 구멍 뚫은 것 입고, 왜 그렇습니까? 단정하게 살고, 화장도 깨끗하게, 손에 뭐 하러 자꾸 찍어 바르고 그럽니까? 양반으로 살아요, 양반으로. 믿으시면 아멘.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활도 달라지고, 잘 산다고 그게 다가 아닙니다. 잘 살아도 개떡같이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잘 살아도 못산 것 같이 살고, 겸손하게 살고, 좋은 일하며 살고,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계 온 인류를 위해서 좋은 일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게 영적양반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아 그렇게 삽니다. 영국 사람이 원래는 상놈들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영국이 신사나라가 됐습니다. 영국은 원래 바이킹족입니다. 아주 해적들입니다. 예수 믿고 전 세계 제일 신사는 영국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한분이 영국신랑을 만났는데 물어보니까 진짜 최고의 신랑감은 영국이더랍니다. 아내가 할 게 아무 것도 없답니다. 전부 먼저 나와서 신발 다 이렇게 놓고, 옷 다 들고 있다가 다 입혀드리고, 내가 이 말하면 나도 살기 어려워가지고, 들어보니까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게 영국신사입니다. 예수 믿으면 신사가 되는 것입니다, 신사. 신사라는 게 뭐냐? 약한 자에게 잘하는 게 그게 신사입니다. 할렐루야! 호주사람이 원래는 상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전 세계 양반이 호주사람이고, 미국사람이 원래 형편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 믿고 미국사람이 양반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예수 잘 믿고 양반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고 나면 영적으로, 육적으로 다 부유해 집니다. 영적, 마음도 부유해야죠. 생활도 부유하고, 여러분 교회 잘 다니면 가난한 사람이 없어집니다. 우리교회도 다 잘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느 집에 강도가 들어갔는데 이래 훔치려고 그러니까 방안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화투를 치고 있더랍니다. 화투를 치고 있는데 할머니가 말하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이제 모르는데 화투를 치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빨리 먹어.” 그러니까 “먹을 게 없어.” “그렇게도 없어?” 그러니까 “똥밖에 없어.”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부인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거라도 먹어.” 그러니까 “참 오늘 안 되네. 왜 똥밖에 없네.” 그래요. “아이고 먹어야 되겠다.” 그러고 강도가 가만히 훔치려고 보니 세상에 똥밖에 없다는데 무슨 뭐를 훔치겠냐고 그러고 강도가 그냥 도망치더랍니다. 사람이 가난하면 진짜 아무 것도 없는 집안이 있습니다. 똥밖에 없는 집안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쌓을 곳이 없도록, 쌓을 곳이 없겠네 우리 하나님 내리시는 복 쌓을 곳이 없겠네. 여러분에게 쌓을 곳이 없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면 주일을 잘 지켜야 됩니다. 이 주일은 양반, 하나님 자녀된 사람들에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초등학교 밖에 졸업을 못하고 런던에 와서 막노동일하고 극장에서 심부름 일하고 그런 비참한 일을 해도 한 번도 주일을 범하는 일이 없답니다. 주일을 범한 적이 없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 다니니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글을 써서 세계적인 최고의 문학가가 됩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모든 글에는 신앙이 있고, 복음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고, 선과 악이 있고, 하나님의 의가 셰익스피어의 책에 쭉 흘러내립니다. 영국은 셰익스피어하고 영국을 어느 것을 팔라고 하면, 어느 것을 더 귀하냐고 하면 셰익스피어어가 더 귀하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영국 나라보다 셰익스피어도 더 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는 예수 믿고 주일 잘 지키면서 그 복을 받은 것입니다.
글리스턴 경은 국무총리를 네 번이나 한 세계적인 최고의 정치인입니다. 정치인 하면 글리스턴입니다. 글리스턴은 나는 너무 바빠서 아침인지 저녁인지는 몰랐지만 주일은 분명히 기억하고 지켰다 그랬습니다. 주일을 지킴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훌륭한 정치적인 아이디어가 힘이 주일날 다 나온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하루를 주일 잠시 와서 교회를 다녀가는 이 발걸음이 복되고, 이곳에 와서 듣는 말씀이 복되고,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축복이 되는 줄로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데 모든 필요한 영양분을 하나님은 오늘 포도당 주사처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흑인들도 보면, 제가 이렇게 가서 보면 그렇게 주일이 되면 예쁜 옷을 입고, 참 그들은 건강합니다. 정말 100키로가 기본입니다. 그런데도 모자 쓰고, 얼마나 예쁘게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지, 주일날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비싼 옷을 입으라는 게 아닙니다. 집에 있는 옷 가운데서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마귀가 물러갑니다. 마귀를 이길 길이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갖가지로 접근합니다. 질병 가져다주고, 사고 가져다주고, 가정불화 가져다주고, 온갖 질병 다 가져다주고, 실패 가져다주고, 불행 가져다주고, 죽음 가져다주는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마음을 불행하게 하고, 공허하게하고, 음란한 마음이 들어와서 음란한 일을 하게하고, 악한 마음이 들어와서 악한 일 하게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와서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 가져다 심어주고, 게으른 마음 심어주고, 미움 심어주고, 마귀는 몸과 마음과 삶을 다 파괴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사탄입니다.
이 사탄을 막아내는 길이 예수 믿고 교회 나오면 마귀는 다 물러갑니다. 이거 하나만 해도 억 천만 가지 은혜입니다.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갈 줄로 믿습니다.
우리 마을에 형수님이 한분 계시는데 하루는 잠을 자는데 동서가, 돌아가신 동서가 와가지고 “너 나 따라오라. 가자.” 그러더랍니다. 돌아가신 동서가 새카만 옷을 입고 아주 앙칼진 옷을 입고 “너 나 따라오라. 가자.”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동서한테 “내가 어머님 제사를 지금 1년 더 지내야 상을 벗는데 어머님 제사 지내고 갈게요.” 그러니까 “내년에 보자” 그러고 그만 가더랍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서 ‘내가 내년에 죽겠구나’ 그래서 교회로 나왔습니다. 교회 나오면 사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 교회 나오면 마귀는 역사, 이 피만 보면, 예수님 십자가만 보면 여러분 학교 다닐 때 드라큘라 못 봤습니까? 천하에 없는 귀신의 왕도, 마귀왕도 이것은 믿어야 됩니다. 십자가만 보면 천하의 마귀가 다 물러가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가 저주의 마귀, 우리를 망치는 마귀가 물러갑니다.
우리마을이야기, 우리형수님 집안이니까 내가 잘 압니다. 이 형수님이 교회 나왔습니다. 열심히 나왔습니다. 온 가족이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 나왔던 다른 동서가 딱 제사지낸 날 그날 제사 끝내고 났는데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온 동네가 비상이 났습니다. 보세요. 여러분, 귀신 겁나지 않습니까? 찾아오는 귀신을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교회 나오면 모든 천만, 억천만 귀신은 다 물러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가정이 자유함을 얻고, 모든 일에 영육이 강건하고, 형통하고, 복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예수님 믿고 교회 나온 성도들이 많습니다. 오늘 홈커밍의 달 우리 아버지께 나온 모든 성도들 예수 믿고 구원함을 받고, 저주는 저주라는 저주는 다 물러가게 하시고, 축복이란 축복은 다 오게 하여 주시옵시고, 영원한 축복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이 복되게 하시고, 건강의 복을 내려주시고, 자손만대 복을 내려주시고, 예수 믿고 영적양반이 되어 아브라함의 자손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십자가의 도
요한복음 3:13-16 / 지용수 목사
귀한 손님이 오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창문을 열고 집안을 청소하고 가지런히 정리 정돈했습니다. 손님이 오실 시간이 되어서 창문을 닫고 이것 저것 준비하는데, 초대하지 않은 왕파리 세 마리가 들어와 왕왕거립니다. 왕파리가 왕왕거리면 정말 시끄럽습니다. 파리채를 찾아 파리를 잡습니다. 어떤 파리는 잘 잡히는데 왕파리 중에서도 초고속으로 날아다니는 잽싼 파리는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천장에 붙어 있어서 의자를 갖고 가면 그 사이에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 버리고….
파리를 다 잡지 못했는데 시간이 되어 손님이 오셨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왕파리가 왕왕거리며 시끄럽게 다녔습니다.
여러분, 파리가 그렇게 잡히지 않았다고 계속 삽니까? 아닙니다. 그때 파리채에 맞은 파리도 죽고 파리채에 맞지 않은 그 왕파리도 죽습니다.
파리의 생명이 얼마나 됩니까? 파리는 37일이면 죽습니다. 두 달 사는 파리가 없습니다. 파리는 하루살이에 비하면 오래 살지만 한 달 7일만 살면 죽습니다. 파리채로 잡지 않고 그냥 두어도 죽습니다. 파리가 죽지 않으려고 파리채를 피해 요리조리 초고속으로 달려보아도 37일만 살면 죽습니다.
사람 목숨도 파리 목숨 같습니다.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전쟁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죽는 것을 보고 파리 목숨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은 평소에도 파리 목숨입니다.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모든 사람이 애쓰지만 그래도 다 죽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오래 살려고 일억 수천만 원짜리 특별 침대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죽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건강 식품이다 뭐다 하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봅니다. 에어로빅도 하고, 등산도 하고, 이것 저것 운동도 하고 별것을 다 하지만 그래도 죽습니다.
참 오랜만에 창원의 몇 분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을 모시고 가서 추어탕을 대접해 드렸습니다. 추어탕과 함께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고추와 된장이 나왔습니다. 저는 고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고추와 된장만 있으면 밥을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그래서 고추를 된장에 찍어 맛있게 먹는데, 목사님 한 분이 저를 보더니 깜짝 놀라셨습니다.
“지 목사님, 고추는 그렇게 드시면 안 돼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그럼요. 고추는 끝을 잡고 꼭지 부분부터 드셔야 돼요. 고추는 이렇게 달려 있기 때문에 고추에 친 농약이 다 고추의 끝 부분에 내려와 모여 있대요.”라고 하시며 고추의 꼭지를 떼셨습니다.
고추 제일 끝에서부터 1cm까지는 농약이 많아서 먹으면 큰일난답니다. 고추 끝 부분을 먹으면 농약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제가 “저는 이 때까지 그것을 다 먹었는데 어떻게 하지요?”하면서 그 목사님 얼굴을 보니, 고추 끝을 드시지 않은 그 목사님이나 저나 별 다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나니 고추 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고 고추 하나 먹을 때도 이렇게 신경을 쓰며 애쓰고 노력하지만, 또 다이어트도 하지만, 200년을 삽니까? 300년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세월이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제 그제가 봄이었던 것 같은데, 며칠 전만 해도 더워서 고생했는데 벌써 가을입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 14절에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는 어느 도시에 가서 일년을 살며 사업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한 달 안에 죽을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잘 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회장님이 이야기하시기를, 소나타와 그랜저가 큰 차이가 나듯이, 사람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대학을 나온 같은 회사원이라도 일을 시켜 보면 어떤 사원은 그랜저처럼 일하고 어떤 사원은 소나타처럼 일한답니다. 그런데 결국엔 일을 못하는 사람도 죽고, 일을 잘 하는 사람도 죽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서울 대학에 가려고 애쓰고 하버드 대학에 가려고 애쓰지만, 그 대학에 들어가도 죽고 떨어져도 죽습니다. 결국 인간은 똑같이 누구나 흙이 됩니다.
파리가 왕왕거리지만 다 없어지듯이, 꽃이 아름답지만 다 떨어져 흙이 되듯이, 사람들도 “내가 누구네.”하고 으스대지만 결국 다 썩습니다. 영원히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죽고 나서 그냥 흙이 되어 없어지면 좋은데,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그 심판은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의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 법정의 심판입니다.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사람을 죽여도 세상 법정은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 법정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 법정에서는 형을 주어 감옥에 보내지만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보내십니다. 감옥은 입구도 있고 출구도 있지만, 지옥은 입구뿐입니다. 지옥에는 출구가 없어서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옥에는 불이 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한증탕에 들어가셔서 누웠는데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가 화상을 입었습니다. 뒤늦게 사람들이 알고 화상을 입은 그분을 병원으로 옮겼지만 생명이 위독하다고 합니다.
뜨거운 한증탕에도 오래 있지 못하는데 지옥에 어떻게 있겠습니까? 발갛게 달아오른 난롯불 위에도 5분간 앉아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지옥불은 난롯불보다 얼마나 더 뜨거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옥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합니다. 지옥에서는 죽지도 못합니다.
지금 제가 연속극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화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을 한 마디도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자살해도 됩니다.
그러나 죽어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고민입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최고 스승이요, 최고 지도자요, 엄청난 권력가요, 재산가입니다. 하지만 그는 늙음과 죽음, 그리고 죽음 후의 세계를 생각하니 막막하고 공허했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은 없는가?’하고 생각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병자를 어떻게 말씀 한 마디로 일으키시나? 죽어서 장례식을 행하고 있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하시니 어떻게 죽은 청년이 살아나나? 나면서부터 장님 된 사람에게 손을 대시니 그 장님이 어떻게 눈을 뜨나? 예수님께서 ‘고요하라!’하시니 험한 바다가 어떻게 조용하게 되나? 예수님께서 축복기도를 하신다고 어떻게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을까? 어떻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까? 이분은 사람이지만 사람보다 더 귀한 메시야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앞으로 오신다고 예언하신 메시아시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이 다 아는 유명한 선생인 니고데모가 밤에 30대 초반의 예수님께 나아가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큰 선생님이여,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인 줄을 저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신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깊은 마음을 아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아시고 제 마음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을 아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고민을 덜어 주시기 바랍니다. 근심을 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속을 다 아십니다.
니고데모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하늘나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나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5장 21절에서 24절에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긴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에녹이 너무 귀여우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무덤이 없습니다.
또 열왕기하 2장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엘리야도 죽게 하지 않으시고 회리바람으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제게도 그런 복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휙 하고 하늘로 들림 받아 올라가면 톱 뉴스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니엘, 요셉 같은 사람들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낙원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말씀의 뜻은 에녹이나 엘리야나 아브라함이나 엘리사나 모세나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서 살다가 하나님 은혜로 하늘에 올라갔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데 성탄절에 이 세상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나셔서 사시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은 예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에서 오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은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고데모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실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서야 ‘아! 그 밤에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구나.’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구나.’라고 깨닫고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릅니다.
무덤에 갇히신 예수님께서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십 일을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도 니고데모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민수기 21장 4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산에서 홍해 길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데 길이 너무 험하니 불평합니다.
저도 추석 때 차가 너무 밀려 어느 터널에서 40분간 갇혀 있으니 불평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운전해 가다 보면 터널도 지나고 아스팔트도 지나고 때로는 비포장 도로도 지나가게 됩니다. 비포장 도로를 만나면 “제기랄! 미치겠네.”하며 불평한다고 길이 좋아집니까? 불평하면 자기만 열 받습니다.
따라 합시다.
“길이 좋아도 길이 나빠도 그냥 달리자.”
날씨가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좋은 날, Fine day가 좋지만, 언제나 날씨가 좋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비가 와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소낙비가 오든 가랑비가 오든 폭우가 쏟아지든 비가 와야, 물이 있어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가 와도 감사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형편대로 살아야 합니다. 2억, 3억짜리 자동차를 타다가도 사업이 부도나서 망했으면 어떻게 합니까? 자전거를 타야 합니다. 사실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까?
별장을 세 개 두고 살다가 사업이 망해서 월세 방에 들어가 살게 되어도 미칠 필요 없습니다. 월세 방에서 살면 됩니다.
따라 합시다.
“환경에, 분수에 맞게 살아가자.”
불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대개 결혼하고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나면 후회합니다.
‘아이고, 내 눈이 나를 찔렀지. 내가 사기를 당했지.’
그러나 신비로운 것은 상대방도 ‘아이고, 내가 속았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속았어도 그냥 살면 됩니다. 속았다고 헤어지면 그것이 이혼입니다.
여러분 중에 결혼하고 나서 ‘잘 했군. 잘 했어.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기를 정말 잘 했네.’라고 생각하셨던 분이 계십니까?
속았어도 그냥 사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자기 뼈가 마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지만 불평은 자기 뼈를 마르게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삶의 자세를 터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환경이 조금 어려우니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잘 되는 것도 없네. 하나님을 믿으니 험한 길만 나오네.”
그리고 매일 먹는 만나에 대해 불평합니다.
“이 거친 음식, 이 박한 음식은 이제 싫다. 지겹다.”
만나는 농사를 지어서 얻은 곡식이 아니라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떡가루처럼 뿌려 주시는 신비로운 음식입니다. 그 신비로운 것을 먹으면서도 불평하니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불뱀을 보내십니다.
즐겁게 살고 감사하며 사는 집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보내시지만, 불평하고 싸우며 사는 집에는 하나님께서 뱀을 보내십니다.
뱀이 오면 놀랍니다. 놀랄 일이 옵니다.
뱀이 물면 죽습니다. 죽는 일이 옵니다.
불평하면 마귀 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불평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고 원망하니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셨는데, 그 뱀이 사람들을 뭅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퉁퉁 부어 죽습니다. 남편이 죽고 아들이 죽고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죽어가니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을 차립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열심히 목회하시는 목사님께 교인 세 사람이 늘 함부로 말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사님께 늘 불평하고 함부로 말하던 그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은 철판에 깔려 죽고, 두 사람은 무서운 병으로 급사했습니다. 그 후 교회가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죽기 싫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그 교회를 세워 주신 줄로 믿습니다.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모세여, 하나님과 당신 앞에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뱀을 물리쳐 주세요. 뱀이 떠나가게 해 주세요.”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
모세는 급하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외쳤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는 자는 누구든지 와서 놋뱀을 쳐다 보라. 바라본즉 살리라.” 할렐루야!
“여보, 어서 나와 보세요. 아들아, 어서 나와서 놋뱀을 보아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게 하셨는데, 그것을 바라보면 산대.”
그 말에 “그래요?”하며 놋뱀을 바라본 자는 신비롭게도 바라보는 순간 놋뱀으로부터 하나님의 전자파가 임해서 뱀의 독이 다 빠져나가고 해독되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독사에 물려 퉁퉁 부어 죽어가면서도 “쓸데없는 소리! 뭐? 놋으로 만든 뱀을 본다고 나아? 말도 안 돼!”하면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신비로운 것은 바로 이것이 십자가를 가리키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은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달았듯이 나도 나무에 달리는 날이 온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날이 오는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도(the message of the cross)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할렐루야!
오늘도 구원받는 사람은 십자가를 보면 ‘아! 저기에 십자가가 있네. 오, 주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능력이 나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멸망 받을 사람은 십자가를 보지도 않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는 해도 그 뜻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쟁이들, 교회에 십자가는 왜 그렇게 달아 놓지? 밤마다 발갛게…. 저 십자가만 없어도 좋을 건데, 서울의 밤이 온통 발갛네.”하고 불평이나 하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여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의 독이 없어지고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면 멸망합니다.
살인은 큰 죄입니다. 살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간음도 큰 죄입니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딸을 시집보냈는데 사위가 딸을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면 좋겠습니까? 아들을 장가보냈는데 며느리가 아들을 두고 다른 남자를 몰래 만나면 좋겠습니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남의 귀한 집 딸을 데리고 살면서 어떻게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고 다닌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저주감입니다. 또 그보다 더 악한 일은 길가는 여자를 강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죄를 지었어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의 독이 없어지고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 18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를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중요한 말씀을 드립니다.
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게 되어도 놋뱀만 바라보면 꿈처럼 낫게 되었듯이, 30년, 50년, 70년간 지은 죄가 너무 크고 죄의 독이 너무 많아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라도 오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강간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남을 도우며 착한 일을 하고 살아도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고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그것이 가장 큰 죄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볼테르는 프랑스의 무신론 철학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라고 하면서 책을 쓰고 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오랜 세월에 건설되었지만 나는 앞으로 50년만에 기독교를 허물겠다. 그리고 앞으로 100년 안에 성경이 한 권도 없도록 만들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을 스위스 성서공회에서 사들여 성경 창고로 써 그 집의 방과 마루에는 성경이 가득했습니다. 또 그는 죽을 때 “아!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 받았다. 나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지옥으로 떨어진다.”하며 덜덜 떨다가 죽었습니다.
프랜시스 뉴톤도 무신론자인데 “나는 하나님께 저주받아 무서운 저주의 고통, 죄의 고통을 당하는구나.”하며 떨다가 죽었습니다.
무신론자 코마스 스코트도 “나는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가 느낀다. 하나님도 계시고 지옥도 있구나. 나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떨어지는구나.”라는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을 때 떱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죽을 때도 복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믿으면 살 동안에도 복이 있고 죽을 때도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먼저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죄 짐이 벗겨지게 됩니다.
70kg 되는 짐을 어깨에 지고 가다가 내려놓으면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죄 짐이 벗겨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무거운 죄 짐이 벗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 우리 나라 큰 회사에서 일하시는 노른자위 같은 집사님이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서울에 있는 암 전문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하니 암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때 집사님도 저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암에서 나아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는데, 죄의 암에서 해방을 받으면 그 기쁨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영성의 뿌리 같은 분이 호남 지방에 계셨습니다.
큰 부자 이세종 씨는 많은 머슴을 거느리고 살았지만, 부인이 아기를 잉태하지 못했습니다. 몸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지만 오히려 그 약의 독으로 부인이 쓰러졌습니다.
그는 어릴 때 머슴살이를 하며 부자를 부러워했지만 부자가 되어 보니 부자도 별 것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아내가 아이도 낳지 못하고 병들어 죽게 되자 그마저 화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던 한 여자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미친 듯이 “예수 믿어야 산당께.”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에게서 떠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성경을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성령을 받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마을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산에서 부자 영감이 껑충껑충 뛰며 “내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았네.”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동민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된다. 우리가 살길은 이 길밖에 없다.”
춤을 너무 열심히 추며 떠들어대니 바지가 다 벗겨졌지만 그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의 빚을 무조건 탕감해 주었습니다. 마을 주변에서 그에게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그 빚을 무조건 탕감해 주고,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은 누구나 와서 쌀을 퍼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이세종 씨, 그가 우리 나라 영성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오신 분도 예수님을 믿어 이런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기쁨, 이 감격은 돈으로 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만 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에녹처럼, 엘리야처럼 데리고 가시면 좋겠지만, 우리는 거의 다 죽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의 관문을 통과할 때 평안합니다.
영국에 중병으로 죽게 된 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일곱 살 먹은 어린 딸이 죽게 되자 그 아빠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죽는 것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라. 아빠는 네 예쁜 얼굴을 보지 못해서 섭섭하지만 너는 이 집보다 엄청나게 더 좋은 하나님의 집에 가서 예수님과 같이 살게 되니 기뻐해야 된다. 그리고 훗날, 아빠도 너를 만나러 네가 있는 곳에 가게 된단다. 그러니 기쁘게 죽어야 된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딸이 물었습니다.
“알았어, 아빠. 그런데 죽는 것이 뭐야?”
“죽는 것?"
"응."
"얘야, 며칠 전에 네가 이 소파에서 잠들었지?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니 네가 어디에 있었지?”
“2층 내 방에.”
“어떻게 그리 되었을까? 여기에서 잠들어 있는 너를 아빠가 안고 네 방으로 옮겨 주었기 때문이지. 죽음도 그와 똑같은 거야. 네가 여기에서 눈을 감고 죽으면 하나님께서 너를 안고 천국의 네 방으로 옮겨 주시는 거야. 그래서 눈을 뜨면 예수님을 보게 된단다.”
“야! 좋겠다.”
그리고 나서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집에서는 일곱 살 먹은 딸이 죽으면 그 부모의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면 죽어도 천국으로 가니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다 같이 죽음의 잔을 마셔도 십자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이렇게 큰 차이가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예수님을 믿으신 분들은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은 이 시간이 참으로 중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말씀하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어서 오늘까지 여러분의 몸과 영혼에 있는 죄의 독이 다 사라지고 구원의 큰 축복을 받게 되는, 일생에 최고로 소중한 이 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요 3:13-18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사순절의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하여 사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력 가운데 사순절은 여러 절기 중에서 매우 중요하며, 우리는 이 사순절을 잘 보내므로 경건과 영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장 성숙하기를 원하시면, 사순절을 잘 지키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광야로 물러나서 기도와 묵상으로 보내셨던 것을 본받아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40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부활하시는 시간을 계산해보았는데, 약 40시간으로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무덤에 들어가 계셨던 그 시간은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40시간은 금식하면서, 기도에 힘쓰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경건의 시간으로 40시간을 지키다가 기도 시간이 확대되어 한 달간 지키게 되었고, 니케아종교회의에서는 주일을 제외하고 40일간을 경건한 시간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부활절에 세례받기 위하여 예비자들이 보낸 경건훈련이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면서 참회와 자기 부정의 기간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우리 영주교회가 속한 평양노회는 2012년에 노회설립10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책임을 맡고 있어 연로하신 증경노회장님들을 모시고 사업을 위한 간담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너무 연로하시고 신장투석 중에 계신 원로목사님이 노회가 100주년 사업을 한다고 하는데, 후배 목사님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휴대폰으로 말씀하시는데,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의 말씀만 하시는데, 휴대폰에 너무나 가까이 대고 힘을 들여서 크게 말씀하시는지, 왕왕거리기만 하지 무슨 말씀인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말씀을 부탁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목소리를 낮추어 적게 말씀해달라고 하고, 천천히 말씀하시라고 해도 제 말은 듣지 않고는 당신의 말씀만 하시고 끊었습니다. 그 분의 친구이신 다른 목사님이 간담회 시간에 전달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전화하신 내용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일생 목회하시고 물러나서 자신의 목회를 되돌아보니, 부끄럽기 한이 없었답니다. 설교라는 것이 철학과 윤리적인 설교요, 마치 사탕발림과 같은 설교였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듣기 좋으라고 축복을 말하고, 무조건 잘 되는 것처럼, 그런 말씀이나 선포했습니다. 이제 다시 목회할 수 있으면, 예수 십자가의 구원을 선포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 이것만 선포해야 영혼이 살고, 많은 심령들이 예수 믿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피를 토하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교회을 개척하면서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고전2:1-2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 구원을 강조해야 우리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의 영성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십자가의 복음을 먹어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 하와가 범죄한 후로 죽음이란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라는 병균이 자리 잡고 온 몸으로 확산되어 치유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어있는데, 우리의 영과 육은 죽음의 병에 걸렸고, 죽음이라는 병균에 점령당하였습니다. 죽음의 증세가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모든 죄악과 질고와 환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창조주 하나님만을 의존하면서 살아가야할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태도를 버리고 자기주장만 관철하면서 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사람인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하고 부자유하게 얽어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 동산에 두시고 동산의 모든 실과는 따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창2:16-17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말하는 뱀의 유혹을 받아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고, 자기의 남자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유대나라에서 여성들은 남자들에게 쥐어 살고, 매여 있어야 했습니다. 하와가 먼저 범죄하고 남자에게도 그 실과를 먹게하여 범죄하게 만들었다고 하여, 여성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것 또한 죄인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죄가 더 많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원죄와 자범죄(실행죄)라고 합니다. 원죄는 아담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죄,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자세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는 근본적인 죄를 말합니다. 원죄는 자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닫아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범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을 실행죄라고 합니다. 자범죄라고 하면 생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 말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가 있습니다. 생각의 영역에서 죄가 싹을 트고 말의 영역에서 죄가 자라고, 행동의 영역에서 죄가 커지게 됩니다. 죄는 생각에서 시작하여,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죄는 점점 더 커지고 무서운 죄악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는 미움, 시기, 분노 같은 것입니다. 말의 영역에서 남을 욕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사람은 말하면서 듣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행동으로 죄를 마무리합니다. 죄는 폭력을 낳습니다. 생각에서 그치는 죄보다, 말로 이어지는 죄가 더 무겁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죄는 사실 저 무겁고, 중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회에서 큰 죄를 말할 때에 전통적으로 7가지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 질투, 분노,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입니다. 다 큰 죄입니다. 다만 순서를 정하자니, 좀 더 우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부들이 생각할 때에 교만이란 죄가 가장 큰 죄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던 사람도 조금만 추어주면 교만해집니다. 조금만 잘했다고 칭찬해주면, 자기 설 자리를 벗어나서 교만해집니다.
교만이 질투를 부르고, 분노로 이어집니다. 교만, 질투, 분노는 같은 선상의 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 이런 죄도 같은 유형의 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탐심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탐심이 탐식으로 이어지고 게으름으로 자리 잡고, 정욕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여러 큰 죄 가운데 탐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탐식이 무엇입니까? 음식을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음식에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중세에는 탐식을 5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너무 빨리 먹는 탐식, 너무 비싼 음식을 먹는 탐식, 너무 많이 먹는 탐식, 너무 오래 먹는 탐식, 너무 거하게 먹는 탐식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처음에 일곱 가지 죄를 체계화하였던 그리스의 수도사 ‘에바그리오’는 탐식을 가장 심각한 죄악으로 꼽았습니다. 당시에 먹을 것이 늘 부족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배가 부르면 게을러지고, 나태에 빠지고, 정욕이 침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는 삼중적인 소외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의존적인 관계를 정립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진정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 나의 계획, 나의 의지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면,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고, 분순종 하게 됩니다. 자기를 주장하면 자아를 잃어버립니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자아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죄를 해결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깊이 숨어있는 죄를 들추어내고, 우리들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것을 놓고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여러 죄악에 대하여 깊이 다룰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일생 떠나지 않는 그 많은 죄를 어떻게 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실존의 문제는 죽음이란 문제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라먹다가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끝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래시계가 멈출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력을 가진 존재인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으며, 정말로 짧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세기 100년 안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죽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사망은 한 걸음 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다”고 했으며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아침안개와 같으며, 잠시 피었다고 시들어버리는 풀의 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는데,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여야 합니다. 죽음도 나의 생애의 아주 소중한 순간이라고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란 생명의 새로운 변화에 불과합니다. 지금 나는 육신에 쌓여 살아가고 있지만, 죽은 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전혀 새로운 몸, 신령한 몸을 입고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심판하시고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의 후손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4)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벌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18:23의 말씀에 아주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악인을 심판하고, 죄인을 정죄하여 지옥에 보내셔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고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위하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죄인을 반드시 심판해야 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최후 최선의 방책을 계획하셨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죄를 지으므로 인류에게 죄가 들어 왔다고 하면, 한 사람- 의로운 한 사람, 죄 없는 한 사람, 인간을 대표하고 대신할 사람, 한 사람만 심판하여 죽게 하고, 모든 인간이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 죄 없는 사람, 인간을 대표할 사람, 그리고 세상 죄를 다 짊어질 사람을 찾아보니,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각하기를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가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그러나 죄를 묵과할 수 없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뿐이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죄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왔습니다. 그 분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삶을 사시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이요, 우리의 죄 값을 치르고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형벌하는 자리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나를 위한 죽음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 이사야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상업적인 용어인데, 완불되었다, 빚이 갚아졌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 치르시고 이루신 것이기에 같은 죄를 가지고 두 번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처벌을 받겠다고 나갔더니 이미 완불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죽음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인생을 주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말이요,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만 믿습니다”라고 하니 하나님은 믿음을 그 믿음을 그의 의로움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성경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란 예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혀 내려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손을 주님에게 내어 밀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선물로 받기 원하시면 하나님 앞에 믿음이란 손을 펴서 내어 밀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 맘대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만이 나의 주인이시며, 내가 믿고 신뢰하고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도 부활하여 살아계시는 우리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주인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호소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십시오.
요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위하여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은 다 구리뱀을 쳐다보라고 하셨습니다. 구리뱀을 바라본 사람은 많이 물렸던지, 적게 물렸든지 지금 죽어가든지 구리뱀만 바라보면 살아납니다. 옛날 구리뱀을 바라본 사람은 구원받은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기만 하면 그는 구원받습니다. 옛날 구리뱀을 장대에 높이 매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살아난 것처럼 지금은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뿐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오늘 구원의 확신과 감격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느냐
요 3장 14~21 / 조용기 목사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느냐”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잘 사는데 나는 왜 유독이 예수 없이는 못 사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히 예수 없이는 못 살아요. 예수님 믿기 때문에 삶에 용기와 힘이 생기고 또 예수 믿기 때문에 너무나 행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행복은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행복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파스칼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웨슬레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이란 없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144편 15절에“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었으며 시편 16편 2절에“내가 야훼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고 예수님 없이는 복도 행복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러느냐.
<본론>
1. 예수님 안에서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첫째로, 저는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깨달아 알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본 자가 없잖아요. 여러분도 하나님 보시지 못했잖아요. 하나님을 왜 믿습니까? 어떻게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셨으므로 우리가 따라서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계신 것을 확실히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있고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도 안받으면 정말 외롭고 쓸쓸하고 버림받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나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믿는 자마다 공부 잘하는 사람마다, 돈 많은 사람마다, 지위가 높은 사람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하시니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다가 육신의 장막집 벗어 버리면 하늘나라 집으로 간다는 것을 가르켜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육신은 장막집입니다. 장막집이라는 것은 쉬운말로 말하면 천막집인 것입니다. 천막이라는 것은 영구히 있을 곳이 못됩니다. 비도 새고 낡아지고 바람불면 날라가고 나중에는 걷어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육신은 장막집이 되어서 언제 거두어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위해서 천국에는 집을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장막집이 아닌 주택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집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운 영광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 천국을 체험한 사람도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바울 선생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처럼 천국은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막 속에 바람불고 비새며 덥고 춥고 하는 곳에 사는 우리들이 영원한 주택으로 들어간다는 것 상상도 못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이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께 이처럼 사랑을 받았으므로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정욕이나 탐욕도 사랑하고 그 부분에 하나님도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부분적인 사랑이요, 전적인 사랑이 되지 못하고 가짜 사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할 것 먼저하면 나중할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아 주신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끊임없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이 다 돌보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로 밥 먹인 것을 보십시오. 3백만을 매일같이 하나님이 아침, 점심, 저녁을 준비하셨습니다. 보통 많은 손님들 아니지 않습니까? 3백만을 대접하려니까 엄청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집에 손님 30명이 와도 감당하기 힘들 것인데 하나님은 매일같이 3백만을 아침, 점심, 저녁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고기도 먹이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물을 다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것 왜 그랬느냐.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는 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서는 나는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이 돌볼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할 때 진짜로 응답해 줄 것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기도하면서 형식적으로 하는 사람 많습니다. 정말 기도 응답하실까? 마음 속으로 안하실꺼야. 그러나 해보자! 밑져야 본전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 많은데 밑져야 본전으로 기도해서는 안돼요. 정말로 하나님 진리를 알고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 주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예수님 안계시면 천국 있는 것을 모르지요. 예수께서 천국 있는 것을 확실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처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맨션인지 아파트인지 모르겠지만 천국에 아파트는 없을거에요. 맨션일 것인데 예수님이 같이 있겠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위해서 몸찢고 피흘려 십자가에서 희생해 주신 예수님은 그 전체가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어제가 무슨 날입니까? 부부의 날이지요? 많은 남편들이 부부의 날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잊어 버렸어요. 저도 잊을뻔 하다가 기억을 했습니다. 그러면 부부의 날에는 무엇을 해야 되나요?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되는데 사랑이라는 것은 입술의 말로만 사랑해서는 증명이 되지 않아요. 말로써 사랑합니다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돈 안드니까. 그러나 부부의 날이 다가왔을 때 나 당신 사랑합니다. 그 말하면 아내가 속으로 뭐라고 하겠습니까? 40년이나 같이 살았으면서 입술로 얼마나 그런 말을 많이 해도 증명되지 못했지 않았느냐.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증명하려면 뭐냐. 뭘 드려야 돼요. 조금 드려가지고서는 효과가 없어요. 듬뿍 드려야 돼요. 예수님은 우리 남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입술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뭘 조금 해주시고 난 다음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가면 입이 딱 벌어지고 놀라서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이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놀라운 우리 남편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행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장차 어떻게 할까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딱 믿고 가십시다. 지금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분 죽는 것은 영원히 사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은 죽음이란 영원히 사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잠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고 또 살고 살고 또 살고 영원히 사는데 늙어지지 않고 영원히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젊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나는 어떠한 사람이냐. 죄와 흑암에 잡힌 사람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받아 구원받은 사람으로 나를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조용기 너가 누구냐? 내가 누군지 알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죄에서 용서받은 나, 더러움에서 씻음 받고 거룩하고 의롭다함을 얻은 나, 채찍에 맞은 공로로 병에서 고침받고 건강한 나,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나, 부활 영생 천국을 얻은 나!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런 나를 보면 내가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전인구원을 받은 사람 아니냐. 나는 이런 사람이다. 또렷이 말할 수 있어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보고 당신은 누구냐고 말하면 확실히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나는 땜쟁이입니다. 나는 농부입니다. 나는 장사꾼입니다. 나는 공무원입니다. 나는 관리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자기가 누군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정체성이 뭐냐. 모르지요.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허무하게 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구름같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 밑에 가면 예수님을 쳐다볼 때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 첫조상 아담을 통해서 얻은 육신의 삶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청산되고 육의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건강한 사람, 축복받은 사람,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사람된 것은 매일같이 갈보리산 밑에서 예수님을 쳐다보고 확인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가 누구인 것을 확실히 알고 자기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형통케 해주는 것입니다. 꿈이 없고 환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형통케 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꿈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밑에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내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된다
둘째로, 내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은 희망과 꿈이 없으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이 희망인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오늘 어떤 고생이 있어도 참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내일 희망이 없으면 오늘 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고 꿈이 있으면 정말 양쪽 날개단 것과 같은 것입니다. 훨훨 날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을 살아도 그 가운데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 아니십니까? 우리 함께 이 성경구절을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어려움을 당하거든 하나님을 찾을 때 아실 것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내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이지 재앙을 주어서 나를 낭패와 실망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재앙에서 건져내 주지 않았었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의 재앙을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앞에 있을 때 모든 재앙에서 해방되고 미래와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그 깃으로 너를 덮으시리니 내가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해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패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려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로다(시 91:2~7) 재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참으면 내일과 희망이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얻게 되므로 예수님 믿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어떻게 벗어버립니까? 내가 죽었다가 새로 태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옛사람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이요, 더럽고 추하고 마귀의 종이 된 사람, 아무리 물로 씻어도 때가 지지 않는 옛사람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돌보아 주마. 우리를 덥썩 안고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우리는 실제로 안죽었는데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안고서 죽어서 누가봐도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죽었어요. 내가 옛사람을 청산했어요. 내가 예수를 통해서 부활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벗고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고통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벗어준 것 우리가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새로 지어준 것 입는 것입니다. 그 속에 희망과 꿈이 넘쳐 나는 것입니다. 새것이 되는 희망과 꿈을 예수님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은 사람이 되고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 은혜로 치료받고 축복받고 부활 영생 천국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로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인하여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도 그렇지만 고린도후서 5장 17절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 예수 안에서 새것입니다. 죄가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더러움이 씻어진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병이 와서 여러분 들러붙고 병이 여러분을 물고 찢고 하지만 하나 아십시오. 병의 주인은 누구냐. 마귀입니다. 귀신이 여러분 몸에 강제로 쳐들어와서 점령을 했는데 그 귀신이 점령을 하고 난 다음 자기 성품을 나타내는데 폐병 귀신은 폐병으로 나타나고 암의 귀신은 암으로 나타나고 관절염의 귀신은 관절염으로 나타나고 그 귀신이 자기 모습들 드러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암은 암 자체가 암이 된 것이 아니라 암의 귀신이 들어와서 암의 집을 지은 것입니다. 암 귀신이 암의 집을 짓고 폐병의 귀신이 폐병의 집을 짓고 관절염의 귀신이 들어와서 관절염을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자꾸 집을 허무러 뜨리려고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수술도 하는데 그보다 먼저 우리가 신앙적으로는 주인을 쫓아내 버리면 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 암의 귀신은 물러가라! 폐병은 물러가라! 관절염은 물러가라고 대항하는 것은 그 때문인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인이 쫓겨나가면 주인이 살던 집은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병이 들었을 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십시오. 저항을 하십시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병이 다가왔는데 저항을 안합니다. 아이구 아파라. 아이구 고통스럽다. 아이구 괴롭다. 그것은 귀신에 대한 환영사입니다. 너 성공했다. 네가 와서 정말 성공을 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프다. 내가 죽을 고생이다. 너 정말 훌륭하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를 피하리라. 이 귀신아 물러가라! 이 관절염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고혈압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당뇨병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심장병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어지럼증의 귀신아 물러가라! 강제로 들어와서 점령한 놈이 한두번 말한다고 물러가겠어요? 백번이고 천번이고 명령을 하라고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안물러갑니다. 왜냐하면 갈데가 없으니까 귀신이 여러분을 집을 삼고 들어왔으니까 강제로 점령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강제로 물리쳐야 돼요. 침례 요한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침노라는 것은 나팔 불고 북치며 걸어가는 것이 침노가 아닌 것입니다. 총을 쏘고 창을 찌르고 전격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침노입니다. 마귀와 싸움은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각오하고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면 새사람은 마귀에게 집을 허락해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병에서 해방되고 건강하게 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 귀신들 참 흉악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귀신에게 점령당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데 제발 물리쳐야 돼요. 저는 귀신이 점령해서 병을 가져온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아는 것하고 깨닫는 것 하고는 틀려요. 알고 있으면서도 안깨달으니까 별로 실천을 안했어요. 그러나 그 다음 하나님께서 제게 하루 기도하는데 야, 병이 오면은 병의 집주인은 귀신인데 귀신이 집주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너 그만 두느냐. 몰랐습니다. 네가 알면서 깨닫지 못했다. 깨달으면 이제부터 싸우라. 요사이는 귀신하고 적극적으로 싸웁니다. 제가 싸워서 이겨보니 참 기분이 좋더라구요. 여러분도 싸우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진리를 깨달아 주므로 우리는 깨닫고 이 진리에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주님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간구한다. 간구가 무슨 말입니까? 간절히 원한다. 간절히 원한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회개하고 성령받고 영적으로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사업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고 그리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절히 원한다. 이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의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편 23편 1절로 6절에 선한 목자로써 내 삶을 자비와 긍휼로 채워주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세상에 어디가도 부족함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내 목자가 되면 내가 양이니까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우리가 그대로 지나가면 안됩니다. 목자되신 주님께 부족함을 채워 달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풀밭은 형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푸른 풀밭에 누워 있으니 먹을 것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쉴만한 물가는 마음에 평안을 말합니다. 쉴만한 물가에 가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평안합니까?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고 우리 영혼을 소생시킨다. 우리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은 행복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를 형통케 하시고 평안케 하시고 우리를 행복케 하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롭게 이끌어 주신다. 죄에서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우리가 매일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어두움의 세력이 와서 우리를 크고 적은 골짜기로 끌고가도 해를 받지 않는다. 왜냐, 주께서 같이 간다.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리라. 주님 같이 계시므로 주님은 지팡이를 들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막대기를 들고 원수를 쳐 주어서 상처입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진짜 원수가 달라들어서 여러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할 때 원수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오면 원수를 대적해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얻게 밥상 차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 밥상 베풀어 준다. 제가 젊을 때는 그것을 잘 몰랐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까 배가 고프니까 힘을 쓸 수가 없어요. 많이 먹어야 돼요. 그러므로 집회에 나갈 때는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여, 먹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냐, 집회 나가는데 설교 반쯤 하다가 배가 텅비면 소리가 안 나와요. 배가 불러야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어야 힘이 있어 집회를 할 수 있는데 여기 싸움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먹어야 싸울 수 있다. 원수가 오면 목전에서 우리에게 진수성찬 차려 주어서 힘을 얻게 만들어 주신다. 그래서 원수 앞에서 하나님이 진수성찬 차려 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서 잔이 넘치게 해주신다. 결국 원수가 오는 것은 우리가 삶에 잔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 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원수가 와도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오면 좀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결과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밥상을 차려 주시고 여러분 인생에 잔이 넘치게 해주는 것입니다. 잔이 넘친다는 것은 만족을 말하지 않습니까?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축복도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복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꿈을 놓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원수가 와도 여러분 속으로는 하나님은 나에게 결국 복을 주신다. 요셉이 보십시오. 형들에게 발가벗겨서 종으로 팔렸죠.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었지요. 그 아내 참소를 받아서 감옥에 들어갔지요. 사사건건이 안되는 것만 있었는데 나중에 그 길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잔이 넘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고통이 나중에 보니까 결국 잔이 넘치게 하는 길로 이끌어 가게 하더라. 사람들은 요셉을 고통주고 괴로움을 주고 죽이려고 했지만 그 도모가 다 결국에는 요셉에게 잔이 넘치게 되고 축복이 되고 말았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가 같이 계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다가오는 모든 시련과 환난과 고통이 두고 보세요. 나중에 잔이 넘치게 만드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고통은 그 후에 큰 축복을 가져온다. 거짓말 아니에요. 여러분 괜히 내가 꾀려고 이런 소리 하는 것 아닙니다. 사람이란 오랜 세월을 살아보면서 신앙을 체험하면 더 큰소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체험했으니까요. 한두번 체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원수가 오고 고통이 다가오면 또 진수성찬 차리고 잔이 넘치게 하려고 오는구나. 그러므로 꿈을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형통하게 하시고 평안하게 하시고 행복과 기쁨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 24절로 26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야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야훼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야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니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떠한 원수가 다가와도 크고 적은 원수를 결국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부모와 같이 결국 선하시고 인자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게 돼요. 좋은 하나님 모시고 있으니 좋게 돼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좋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로 11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풍성한 삶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이유는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목숨까지 버린 것입니다. 목숨까지 버려서 여러분을 풍성한 삶으로 이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차원 높은 삶
셋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앎으로 예수님을 믿고 차원 높은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각적이고 이성적이고 체험적인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세계에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믿음의 세계를 몰라요.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호킹 박사도 이번에 신문에 발표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컴퓨터가 꺼지는 것처럼 뇌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죽어버리고 없는 것이지 뭐가 있느냐. 그렇게 모른다구요.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믿음의 세계가 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운명을 바꾸고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이제 보십시오. 많은 사건을 믿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환경을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하고 아름답고 귀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놓으면 험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인데도 불구하고 믿으면 하겠네. 믿으면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나누어 주셨는데 믿음을 왜 사용하지 않습니까? 사용하면 내가 달라지고 내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운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로 죽고 사는 권세를 믿음을 가지고서 행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환경에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합동하여 유익이 된다고 믿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된다고 믿으면 그런 것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그렇게 되는데 안 믿으면 그런게 안온다 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이 적으면 적은대로 크면 큰대로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안 믿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안 믿는 사람들은 이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신령한 믿음을 분량대로 주셨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여러분 잘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므로 믿음 없다는 말 하지 마세요. 믿음을 안쓰고 있지 쓰기만 하면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믿음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으세요. 나는 영원히 잘된다고 믿으십시오. 지금 없는데도 그렇게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로 된다구요. 범사에 형통한다고 믿으십시오. 믿으면 그렇게 된다구요. 나는 강건하게 된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로 된다구요. 믿고 생각하고 꿈꾸고 말하세요. 그러면 그대로 된다구요. 믿음과 생각과 꿈과 말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꿈꾸게 되고 그렇게 말하게 돼요. 그러므로 믿음은 놀라운 능력을 여러분 인생을 변화시켜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진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안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대로 돼요. 된다 할 수 있다 변화된다. 믿으면 그대로 돼요. 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앞에 보여줬잖아요.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었어요.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대로 두면은 썩어서 살은 다 흙이 되고 뼈다귀만 남습니다. 누가 그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렇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마르다야 무덤문을 열어 놓아라. 마르다가 우리 오라버니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마르다는 말할 때 예수님 마르다를 보고 마르다야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믿으면 영광을 보고 안 믿으면 영광을 안봅니다. 여러분 생애에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안 믿으면 영광이 안나타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귀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안쓰니까 문제지. 안쓰니까 문제에요. 오늘도 주님 여러분 보고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마르다가 믿고 무덤문을 옮겨 놓으니까 나사로야 나와라! 살아 나왔습니다. 환경과 운명이 변화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마귀의 공격 속에 살면 우리는 실패하고 패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믿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인데 마귀의 텃밭입니다. 두려워하면 마귀가 춤추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병을 두려워하면 병이 오고 가난이 두려우면 가난이 오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실패가 오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그 사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나쁜 하나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쁘지 않아요.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에요. 좋은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시간부터 여러분 여러분 환경과 운명에 좋은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벌써 믿음을 주셨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같이 계시므로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오면 거기에 남부공동묘지가 있어서 많은 시체를 파뭍은 공동묘지가 있어요. 그 옆을 제가 지나와야 돼요. 그러니 언제나 학교 갈때도 그렇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그렇고 그 공동묘지 지나갈 때는 반 죽음이에요. 꼭 귀신들이 나와서 나를 확 덮칠 것 같아요. 겁이 나서 거기가서는 뭘 하느냐. 뛰기 시작하는데 한번 뛰기 시작하면 내 발걸음에 놀래가지고서 끝까지 뛰어야 해요. 숨이 턱에 닿도록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에게 할머니, 나 너무 겁이 나서 여기 오기가 힘들어 날 좀 도와줘. 내가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 할머니 나이가 70이 넘은 것 같아요. 그런 할머니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런데 내가 올 때쯤 되면 가파른 산꼭대기에 할머니가 앉아가지고서 늘 불러요. 용기야~ 오냐~ 그런데 그 산밑에 와서 할머니의 음성만 들으면 두려움이 싹 사라져요. 마음에 기쁘고 용기 백배해서 할머니 나 여기있어~ 아이구 내 새끼야 빨리 오너라. 그 할머니 음성을 들으면 두려움이 싹 사라지고 할머니 손을 잡으면 천지가 다 내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참 어리석기 짝이 없어요. 할머니가 나보다 더 힘이 없는데 걸음도 더 빠르지 못한데 그 할머니가 있어도 용기백배한데 예수님이 용기야~ 거기 있느냐~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같이 하리라.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시편 91장 1절로 7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우리 좋은 하나님이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극한 염병에서 건져 주실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지 나쁜 것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의 말씀을 늘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질그릇 아닙니까? 이 질그릇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사방으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낭패와 실망에 욱여쌈을 당하여도 여기 예수님이 턱 들어 앉아 있으니까 싸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환경보다 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예수님만 바라보면 우리가 싸이지 아니한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면 싸이지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계시니 낙심할 리가 있습니까?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사람이 핍박해도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데 뭘 두려워할 것입니까?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망하려고 달려들어도 거꾸러뜨려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안 망해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 만사형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여러분의 모든 부정적인 세력을 십자가에서 다 멸해 버렸던 것입니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러분 위해서 승리를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면 하늘과 땅이 내 편에 서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백성들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믿음을 탁 가지면 분위기가 내 마음에도 분위기가 확신의 분위기가 있고 주위 환경에도 분위기가 좋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분위기를 만들어 잡아 놓으면 온 천지에 악한 귀신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향기가 나면 벌과 나비가 날라오듯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믿음, 소망, 사랑으로 좋은 것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참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 너무나 좋은 것을 약속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보고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근심하고 늘 두려워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 것은 내가 대신 근심했고 내가 대신 두려움과 싸웠다고 말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주님이시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말할 필요없이 우리 마음 속에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 박사는 노이로제나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 하루에 두 번씩, 아침 저녁으로 시편 23편을 묵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환자들이 노이로제에서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시편 23편 한번 읽고 저녁에 한번 읽게 했는데요.
미국의 하워드 캘리 박사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성경은 나에게 동료 의사의 역할을 해 줍니다. 성경 말씀은 매우 훌륭한 의술이 되기 때문에 성경의 처방대로 했을 때 한 사람도 치료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워드 캘리 박사는 의사입니다. 의학박사이면서 항상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데로 의학과 같이 환자를 치료하니까 환자가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암 전문의사인 황성주 박사는 치료 과정에서 한 부인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들었답니다. 그녀는 매일 밤 불면증과 번민으로 시달리는 남편에게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편 23편을 읽어주었더니 남편이 신앙도 회복하고 불면증도 완전히 나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뿐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정신질환을 비롯해서 일상생활에서 겪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치료하고 우리를 승리와 평안의 분위기로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 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므로 내가 한탄하도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 손에 쥐었으니 내가 어찌 너를 버리랴. 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너희를 값주고 샀으니 어찌 내가 내것을 버리고 떠나랴. 마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속지 말라. 항상 나는 너와 같이 있느니라. 이와같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 감사 박수를 드립시다.
<결론>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심으로 나는 사는 이유도 알고, 내일의 희망과 꿈도 예수 때문에 가질 수 있고, 강하고 담대하게 창조적인 믿음으로 마음과 환경을 다스릴 수 있고 예수님이 내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다 되시므로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놋뱀과 예수 그리스도
요 3:14-15 / 김양인 목사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밤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백성들을 가르치는 랍비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관원이란 정부의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사건이나 민사 사건을 관장하는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인 산헤드린의 회원을 말합니다. 당시 산헤드린 회원의 수가 의장인 대제사장을 포함해서 71명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들의 지위가 얼마나 존귀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산헤드린은 의구심을 갖고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원으로서 예수님과 사귀는 것은 대제사장과 동료들의 미움을 받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 대뜸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르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일이 어찌 가능하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깊이 연구한 바리새인이요 랍비라도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몸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영이 소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구원 받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을 적에 우리의 실상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였다니, 우리가 언제 죽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이 말은 육신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영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는데,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서 영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영의 기능은 영적인 일을 이해하고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나 종교생활을 할 수도 있고 학문을 탐구하고 예술적인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일뿐입니다.
그러나 영이 거듭나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과 사랑이 믿어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의심 없이 믿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고난 받아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거부감 없이 믿어지고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런 변화가 거듭난 사람에게 생겨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의미합니다. 거듭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세상 말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죽은 영을 거듭나게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영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일하셔야 합니다.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령께서는 살리는 영이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죽은 영이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거듭나는데 우리가 할 바가 무엇일까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 이르기를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주시는데, 그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곧 거듭난 자들입니다. 이 때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은혜를 받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우리의 공로로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요 우리는 다만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선을 행하고 스스로 의롭게 되어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으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한편,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르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근거가 무엇인지 일러줍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불뱀에 물린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장대에 높이 매단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나무에 달려 들려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주님의 대속의 희생이 우리 믿음의 근거요 토대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믿음은 마땅한 근거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면 먼저 내 통장에 그만큼의 잔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통장이 비어있다면 한 푼도 인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이 제 기능을 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이 바로의 압제로 인해 고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의 손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데, 에돔 족속이 자기들의 땅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부득이 홍해 길로 돌아서 가게 되었는데 길이 험했습니다. 또한 매일 같이 단조롭게 만나를 먹다보니 싫증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길과 식물로 인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고 원망했습니다. 이 같은 백성의 태도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와 애굽인들을 벌하시고 홍해를 갈라 그들을 무사히 건너게 하셨으며,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무역을 해서 양식을 사올 수도 없는 광야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를 내려 먹이셨건만 그들은 감사는커녕 원망 불평으로 일관했습니다. 이 같은 백성의 태도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불뱀들을 보내어 백성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불뱀은 광야에 서식하는 붉은 빛깔의 뱀으로서 독성이 매우 강하여 한번 물리면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심한 갈증을 느끼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민수기 21장 6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았더니 불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해독이 되어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볼 때,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이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다는 성경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독사에게 물렸으면 상처를 째고 독을 빨아내던지, 해독제를 써야지 어떻게 불뱀 모양으로 만든 놋뱀을 쳐다보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은 놋뱀 자체에 독을 치료하는 효험이 있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놋뱀을 쳐다본 것은 곧 이를 명하신 하나님을 바라본 것과 같으므로 치료의 은총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통해서 백성들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인 모세를 불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놋뱀을 쳐다보는 것은 그들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심으로 놋뱀을 예수님 자신에 대한 모형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놋뱀은 불뱀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독성이 없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으나 실제로는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의 구세주가 되실 충분한 자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또 한 가지, 놋뱀과 예수님의 공통점은 나무에 높이 들린 것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높이 매단 것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실 것을 미리 보여준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높이 들리신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신명기 21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것을 가장 흉한 죽음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으신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3장에 이르기를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나무에 달려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당하셨으므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독으로 인해 죽었듯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로 인해 죽을 운명을 타고 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종교가 사람들의 영혼에 침투한 죄의 독을 없애지 못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출현했지만 철학이 인류를 죄에서 구해내지 못합니다. 정치가들이 저마다 세상을 구하겠노라고 외치지만 그들의 말을 실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즘은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것 역시 헛된 꿈에 불과합니다. 이 외에도 인간들이 생각해 낸 방법으로는 절대로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우리를 대신하여 나무에 달려 저주스런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0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선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선을 행하고 법과 도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정직하고 선량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불뱀에 물린 자마다 놋뱀을 본즉 살았던 것처럼, 오늘날도 죄인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면 그들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는 말이 광야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이었듯이,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메시지가 곧 복음입니다. 이제 우리가 힘써서 할 일은 이 구원의 복음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구원을 위한 첫 단계는 복음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파하는 사람이 없다면 수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원하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먼저 주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의 본분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내리신 마지막 명령이 무엇입니까? “15)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는 것이었습니다. 보초가 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도 함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적이 침투해서 아군 가운데 다치고 죽는 사람들이 생기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고 했습니다. 우리도 사도와 같이 영혼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전도에 열정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도는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1)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이 돈과 성공과 안일과 쾌락에 치중해 있는 까닭에 복음을 전해 주어도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허탄한 이야기에는 귀를 쫑긋하고 듣지만, 영생의 진리는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과에 얽매이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하신 대로, 완강하게 거부하던 사람도 자주 복음을 전해 주면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주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전도에는 주님의 칭찬과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을 보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한 몸에 짊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에 이제 주님을 믿는 우리가 저주에서 놓여나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뱀에 물린 자마다 장대에 매단 놋뱀을 쳐다본즉 살았듯이, 오늘날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위대한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누릴 뿐 아니라, 아직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전도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건 중의 사건
요 3:14-16 / 임덕순 목사
2005년도에는 어느 해보다 큰일들이 훨씬 많이 터졌습니다. 황 우석 교수사건, 사학 법 통과, 국정원 도청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이 터져서 참으로 시끄러운 한해였습니다.
금년 한 해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다 합쳐도 비교가 될 수없는 큰 사건이 있을까요? 아니 유사 이래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사건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2005년 전에 일어났던 우주 최대의 사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당신이 만드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셔서 얼마동안 사람으로 사셨던 사건중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945년 8월에 있었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보다도 더 놀라운 사건이고, 1968년 아폴로 11호가 달나라에 간 사건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사건입니다.
태양이 지구로 떨어지는 사건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구에는 재앙이 발생합니다. 지난 7일자 영국 일간지 가디언 인터넷 판은 “지구가 우리 세대에 행성 충돌을 겪을 확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고 소개했습니다. 위협의 주범은 7, 8년 주기로 태양계를 돌고 있는 지름이 390m인 ‘아포피스’ 라는 소행성이랍니다. 최근 천문학자들이 이 소행성 궤도를 계산해 보니까, 2036년에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5500분의 1에 이른다.’는 결론이 나왔답니다. 전문가들은 이 행성이 지구와 정면충돌하면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10만 배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방출돼서 즉시 수천 km²가 폐허로 변하고, 이때 발생한 먼지가 태양을 가려서 지구의 기온이 뚝 떨어짐으로 지구에 대 재앙이 될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행성이 아닌 지구보다 훨씬 큰 태양이 지구와 충돌한다면 인류는 그 순간 멸망합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지구보다 수 천 배나 큰 진짜 태양이 지구로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분을 의에 태양이라고 칭했습니다. 하늘의 태양을 만드신, 의에 태양이신 하나님이 이 작고 추한 인간이 되어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그 당시 사람들이 보았고 그 시대 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동거하였는데,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에 오신 그분을 체험한 뒤 감격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 사건, 이 우주 최대의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1. 구주성탄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대 선언입니다.
21세기가 되기까지 인간의 지식은 초고속으로 발달하였습니다. 사람이 달나라에 가고, 지구 저편의 사람과 즉시통화를 하게 되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보가 순간에 공유되며 짐승을 복제하고 사람도 복제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이 사람끼리 사랑하는 사회는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21세기인 오늘에도 지구촌 곳곳에선 총구가 불을 뿜고 있으며,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북에서는 인권이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고, 북한 핵 문제로 세계는 고민에 빠져 있으며, 대한민국안에서 남남갈등이 도를 넘어서 파멸을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이 세상은 과학의 발전 때문에 행복이 상승한 것이 아니라 파멸이 만들어져 왔을 뿐입니다. 핵무기라는 것을 만들지 못했었다면, 북한이 우리를 위협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남남갈등도 없었을 것입니다.
기초과학이 최고로 발달하여 미국보다 먼저 달나라에 우주선을 쏘아 보낸 소련이, 경제난으로 붕괴되어버린 사건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십니까? 그들은 자연에 대하여는 얼마큼 알았지만, 인간 자신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개인소유를 폐지하고 개인이 전체를 위하여 사심 없이 일하고, 국가가 그 열매를 골고루 분배해준다면, 그야말로 낙원이 될 줄로 믿고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인간을 천사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간은 천사가 아니라 자기욕심만 차리는 사악한 존재였고, 자신에게 직접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한없이 나태하고 눈속임이나 하는 악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사회는 누가 침략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도 사람을 사랑하는 사상은 아닙니다. 자본은 가진 자에게로 몰리게 마련이고, 빈익빈 부익부현상은 끝없는 갈등과 불안을 초래합니다. 오늘의 세상은 물질만능, 부의 편중, 개인주의 사상이 팽창하면서 파괴적인 범죄가 늘어 가는데, 납치, 폭력, 살인 등이 폭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할 제도나 사상이나 구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일 사람에게 세상을 구원할 사상이나 방법이 있었더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계명을 주셨건만, 사람들은 모두가 남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욕심을 위해서 상대를 이용하기에만 바빴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만들고 모든 환경과 생명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마저도 사랑하지 않고 배신만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당연히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만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의 칼을 보내셨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의 하나님은 심판의 칼 대신에, 당신의 외아들을 파멸을 당해야 마땅한 인간의 구주로 보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성탄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롬 5:8-10에 보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을 때에, 우리가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에 합당한 처분은 온 인류가 형벌을 받아 멸망하는 것인데, 처벌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자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들끼리도 서로 미워해서 세상을 망가뜨리는 죄인을 향하여 심판하러 오셔야만 마땅한 것인데, 하나님은 심판의 양날 가진 칼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집의 어린 아기 모습으로, 마구간에 당신이 친히 사랑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마구간에 오신 것은, 그 누구라도 두려움 없이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 약하고 누추한 사람들 중에 하나처럼 우리 곁으로, 우리를 구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상하신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체면이나 유익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직 구원받아야 할 인간들만 생각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섬세하고 따스한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받읍시다. 나 하나만 잘살면 된다. 나 하나만 복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립시다. 개인주의는 북한이나 소련처럼 사회를 붕괴시키고 냉랭한 사회를 만듭니다. 당신은 손해를 보면서도 우리를 위해서 찾아와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일지라도 상대를 귀하게 여기고 돕겠다는 마음을 가져봅시다. 이것이 우리 신자가 가져야 할 마음이고 이런 마음만이 우리 사회를 살려내는 힘이 됩니다. 사랑을 회복하는 성탄이 됩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여, 미워해야 할 사람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의 능력이 이번 성탄절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해 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구주성 탄은 하나님의 신실성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예언은, 구약성경에 456회나 나타난다고 합니다. 맨 처음에 주신 약속은 창세기 3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하여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아담과 하와가 누리게 하셨습니다. 단 하나,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려고, 그 동산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것은 따먹지 말라고 엄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남편과 함께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가 생겼습니다.
절망감에 떨고 있던 아담 하와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며, 장차 여자의 후손이 와서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해치기 시작한 거친 환경에서 보호받으라고 가죽 옷을 지어 입혀주셨습니다. 그런데 가죽옷은, 그들의 죄에 가담하지 않은 죄 없는 짐승이 죽은 결과로 얻어지는 것으로, 죄인 된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 없는 의인이 오셔서 이렇게 희생하여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주 예수님을 보내실 것을 맨 처음으로 약속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고 저주받는 날부터, 불행한 인생들을 구원할 작정을 하시고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구약성경은 오실 구주에 대한 상세한 약속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애굽에서 노예화되어 고생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하여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시는 재앙의 밤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게 하시고, 양의 피를 바른 가정은 양이 대신 죽었으므로 죽음의 재앙이 지나가게 해주신 유월절이라는 절기가 시작되는데, 죄인이 공로 없이 받게 될 구원, 어린양 예수님의 피의 대가로 받게 될 구원을 약속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민수기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감사는 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뱀에 물린 기사가 나옵니다. 그들의 죄 값으로 벌을 받았으니 죽는 것이 당연 했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 매달고,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이 누구든지 높이 달린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게 되는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높이 달렸던 그 놋 뱀은 죄의 형벌로 죽게 된 인간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입니다. 본문14절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구체적으로 예언한 사람인데, 그분 메시야는 우리 대신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히 끌려갈 것이며,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은 우리의 대속을 위함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계시하였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분이 베들레헴 동네에 오신다고 장소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러한 약속들은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저자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시대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바라보게 하려고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약속하신 그 모습으로 약속하신 그 장소에 태어나셨습니다. 단 하나도 예언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잉태한 처녀 마리아는 이스라엘의 북부지방인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마리아의 출산일이 가까워집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나신다는 예언은 맞지 않게 되고, 구약의 예언이 잘못 되었든지, 아니면 나사렛예수가 가짜이든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로마황제 가이사가 자기 치하에 있는 나라의 시민들에게 각기 자기 본적지로 가서 호적을 갱신하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은 북부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지만 본적은 남부 베들레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는데,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할 즈음에 갑자기 산고가 임하였고, 그래서 베들레헴의 여관집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신다는 예언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신실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고 그분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드러낸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 역시 신실하셔서 아멘이시며 참된 증인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실 때에 마치 습관처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고, 그분은 언제나 ‘아멘’ 그 자체이셨습니다. 아멘이란 ‘옳다.’ ‘찬동한다.’ ‘진실하다’ ‘맞다’ 는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멘이시고, 그분의 신실성이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함을 증명하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나를 믿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고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에 대한 완전하고 영원한 용서를 약속해 주셨고,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번 성탄절은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그가 우리에게 해 주신약속들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확실히 믿고 견고하게 붙잡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구주 성탄은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헬라 사상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헬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리스 헬라 신화에 보면 신들이 보통 사람 같습니다. 전쟁의 신, 바람의 신, 불의 신, 대장장이 신, 농사꾼의 신 등 별의별 신이 다 있으며, 그 들도 싸우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죽고 하는 등,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과 거의 비슷한 존재이거나 사람보다 약간 우월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신 개념도 비슷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섬겼던 신들도 참 많기도 했지만 그 신들은 맡은 지역이 따로 따로 있습니다. 광을 맡은 신이 따로 있는데 그 신의 이름은 업 신이고, 변소를 맡은 신은 몽달귀신, 물이 고인 방죽을 맡은 신은 물귀신, 부엌을 다스리는 신은 조왕신, 뒷동산을 맡은 신은 서낭당신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능력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당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궂을 할 때면, 어떤 전능한 신 한 분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여러 귀신들을 몽땅 다 불러내었고, 그리고 그 신들 중에 하나의 비위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모든 신에게 빌고 또 빌었습니다.
이렇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신에 대한 관념은 그 신 자신이 내리신 계시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궁리해 낸 것, 인간의 이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여 만들어낸 신이 아니라 오히려 혼자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생들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조물주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자세하게 계시하신 특별한 신이십니다.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분과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였습니다.
그의 능력은 전능하시고, 그의 주권은 하늘과 땅 끝까지 미칩니다. 하나님은 마당이나 부엌이나 뒤뜰이나 뒷산 등, 자기의 영역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작은 신이 아니라 천지를 혼자서 만드시고 혼자서 주관하시는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엿볼 수가 있을까요? 그중 하나가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장본인이 당신이 만드신 세상으로, 당신이 만드신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분이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무한한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이 한 가지만 가지도고 그분의 전능한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요 10:30-33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라고 하셨고, 요 14:8-9에서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마 9:2에서는 “나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졌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하셨고, 요14:6에서는 “나는 그 길이요 그 진리요, 바로 그 생명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으로만 그렇게 큰 소리를 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하실 것이라고 예언한대로 문둥병을 고치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으며, 사람에게 들어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귀신들을 추방하여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하셨고, 죽은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죽어 나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심으로, 당신이 생명을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실 때, 예언된 그대로 오신 것은 그의 신실성을 드러내신 일이고, / 그가 오셔서 경천동지할 능력을 행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일이며, / 그가 오셔서 자기를 버리면서 인간을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드러내신 일이며, / 그가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내용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신 계시입니다. /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절대 권력자이십니다.
그 능력으로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어 인간의 완악한 심령을 바꾸어 주십니다. / 그 능력으로 천국을 건설하시고 믿고 순종한 사람을 그리로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 그가 보이신 능력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우리의 영생도 확실히 가능합니다. / 그분이 우리에게 그날을 분명하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러므로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는 말씀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이 말씀들을 더욱 새롭게 기억하십시다.
성탄은 2005년 전 사건입니다. 주님이 올해 다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하나님우편에 앉아계시며,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을 준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당연히,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성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 때문에 주님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이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약속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어떠한 절망적 상황을 만났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면서, 주님이 이루시고 초청하실 미래의 소망을 더욱 든든하게 붙잡는 귀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요 3:14-16 / 임덕순 목사
맥추 감사절은 보리농사를 하던 시절의 한국교회가 시작한 절기가 아닙니다. 보리를 추수하고 나서 그것이 감사해서 시작한 절기도 아닙니다. 맥추감사절의 기원은 지금으로 부터 약 3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아 홍해를 건너고 광야길 40년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하고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그들이 애굽에서 해방받은 절기인데, 그날 어린 양이 자기들 대신에 죽어주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50일이 지난 뒤에는 하나님이 가나안에서도 함께 해 주셔서 양식을 먹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해서 오순절을 지켰는데, 그때 거둔 곡식이 보리여서 맥추감사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1500년이 지난 어느 유월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유월절 어린양처럼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던 소망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50일 뒤인 오순절, 다른 유대인들은 맥추절을 지키고 있을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들에게 새 힘을 공급하시며 동행하시는 성령님이 강림하셨습니다.
맨 처음 맥추감사절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나안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절기였고, 신약의 오순절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동행하시며 힘주시고 보호하실 성령님이 강림하신 절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맥추감사절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오늘도 성령을 보내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감사하는 특별한 명절이지, 보리를 추수해서 그것을 감사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보리 농사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지만, 구원을 받지 않거나 성령의 도움 없이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이 맥추절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령강림절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가 많은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사람은 누구나 좋은 것 먹고 좋은 옷 입고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내 안에 있는 영혼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요구를 자동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본능입니다. 행복이나 만족은 욕구가 충족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요, 불행은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였을 때 느끼는 감정이요 고통입니다. 육체의 욕구는 아주 강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날마다 육체의 요구에 끌려 다니며 삽니다.
그러나 내 안의 영혼도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삶이 왜 이렇게 메마르냐, 마음의 평안과 만족을 좀 누리고 살자, 내 생명을 만드신 분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느냐, 그분을 만나서 그분의 말씀 도 듣고 그분의 사랑도 받고 싶다. 나의 영혼도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살자.”라고 외칩니다. 그렇지만 육신의 욕구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대개는 영의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듣고도 육체의 일에 쫓겨서 이내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도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만일 사람이 육체뿐이라면, 먹고 입고 구경하고 자고 육체의 욕구만 채워주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입니다. 배고픈 시절에는 먹을 것 배부르게 먹는 것만 가지고도 만족 했었는데, 배부르고 평안하고 필요한 것이 채워질수록 사람은 더 불만족스럽습니다. 한국은 요즘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몇 나라들 중에 하나가 되었지만 한국인의 자살률을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이것은 뭘 말해줍니까? 내 육체 안에는 또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영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육체덩어리만 만드시지 않고 당신의 영혼을 불어 넣어서, 인간이 영혼을 가진 육체 즉,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살지 못하면, 육신이 별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행복하지 못하고 텅 빈 가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영혼이 있다는 증거이고, 내 영혼이 육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꽃꽂이 했다가 시들은 꽃은 나중에 어디에 씁니까? 아무 쓸모가 없어서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었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서 말라지고 시들어지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점점 흉해지고 썩어지기 때문에 내다 버려야 집안이 개운합니다. 사람의 몸이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죽으면 그 육체는 썩고 냄새나고 정 떨어지기 때문에 신속히 장례식을 마치고 땅에 묻든지, 화장터에 가서 화장을 하던지 해야 합니다. 공동묘지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죽은 육체를 버리는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영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죽은 영혼은 육체처럼 금방 썩는 것이 아니고 아주 오래 존재합니다. 그런 것을 영존이라고 합니다.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속에서 캐낸 우라늄이라는 원소는 핵발전소의 연료로 사용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사용하고 나면 재가 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처리하여 쓸 수가 있습니다. 한번 사용하고 난 플루토늄이나 우라늄 재는 도리어 원자폭탄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북한의 원자로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라늄의 타고난 재가 정말로 쓸모없게 되려면 수 만년이나 걸려야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플루토늄 쓰레기를 꽁꽁 가두어 두는 곳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곳을 핵폐기장이라고 합니다. 부안의 어느 섬에 핵 폐기장을 건설하려고 했다가 지역주민들이 반대해서, 찬성하는 경주로 옮겼는데, 경주는 그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유익을 얻었다는 뉴스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우라늄보다도 더 생명이 깁니다.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것이 영혼입니다. 그래서 몹쓸 영혼, 하나님을 반역하고 주시는 구원도 거절하는 망해먹은 영혼들을 폐기처분 하는 곳이 어딘가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런 곳을 만드셨는데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세상을 만드신 분이 지옥도 만드셨다니 의심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일단 죽으면 미련 없이 사흘 내에 매장하든지 화장하든지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도 망해먹은 영혼, 즉 하나님과 등진 망해먹은 영혼을 처리하는 데는 미련 갖지 않으십니다.
박사학위 다섯 개 받은 이도 죽으면 사흘 안에 내다 버리고 다시 찾지도 않으며, 클레오파트라나 한국의 톱스타도 죽으면 사흘 안에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어려서 글도 깨우치지 못한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 하나가 유괴 되면, 온 사회가 다 나서 찾기 시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아이가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바로 생명에 있는 것입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가치는 너무나도 큰 것이 사실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는 이와 영혼이 죽은 이의 가치 차이는 이보다 훨씬 더 큽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끈이 든든한 신앙의 사람,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한 사람의 값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옥에 던져질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영혼,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며 영생을 누립니다.
세상에 어떤 종교도 사람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라고 말한 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사랑한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하셨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본문 요한복음 3:16에서는 분명하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까지도 주셨다.”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스레 만드셨으며, 지금도 어지간히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어지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짝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호세아를 불러서 “너는 나 하나님의 역할을 좀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그 도시에서 가장 더럽고 행동이 나쁜 고멜이라는 여자를 중매해 주시면서 그 여자하고 결혼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종 호세아는 너무나 어이없었지만 하나님이 시키시는지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창녀인 고멜이라는 여자를 데려가다 결혼하여 아주 아끼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가 이유도 없이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또 바람이 나서 어떤 남자 집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여자를 데려다가 다시 사랑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여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여자는 남의 애기를 배고 와서 애를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애기를 놔두고 또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남의 자식을 키우는 호세아는 울분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 번번이 남의 애기만 낳아서 호세아의 가정생활은 완전히 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이 여자가 또 없어졌습니다. 듣자하니 이번에는 누구와 바람이 나서 놀아나다가 누구네 종으로 팔려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미워하고 저주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여자였습니다. 호세아는 아예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리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또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이번엔 돈을 주고 그 여자를 사서 데리고 와서 다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는 할 수 없이 또 순종해야 했습니다.
호세아가 그런 지긋지긋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멜이 네게 하는 것이나, 이스라엘백성, 인생이 내게 하는 것이 똑 같으니라. 너희 인생들이 나에게 그렇게 하지만 나는 너희들을 아직도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향하여 얼마나 짝사랑 하셨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인생들은 깨닫거나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품을 뛰쳐나와서 세상과 돈과 쾌락을 사랑하고 우상만 찾아 헤매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에게 진노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진노를 사람들에게 쏟으시면 인간이 다 멸종하고 마니까, 다른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셔서 인간에게 쏟으실 진노와 저주를 그 아들이 대신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인간의 배신에 대한 분노를 당신의 외아들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렇게 화를 푸시고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다시 부활 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간의 죄에 대한 진노요, 어리석은 인간을 향한 끝없는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예수를 인간의 구주로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가 너희 죄를 대신하여 내 진노를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이제 너희가 그를 믿기만 하면 너희의 죄를 다 면죄하리라, 이제 너희가 그를 믿을 거냐 안 믿을 거냐? 그것은 너희가 선택해라, 만일 그것마저도 믿지 않으면 이제는 별 수 없이 너희를 지옥에 던지는 수밖에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최후의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려고 당신의 종들을 세워서 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동네마다 교회를 세워서 이 사실을 알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파송하셔서 사람들을 도우셔서 복음을 들을 때 믿을 마음을 주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새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하셨고 사랑하시는데도 그 사랑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산다면 그 인생은 어디로 보내야 할까요? 정말로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갈6:7에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끝까지 우롱하는 자에게는 우롱을 당하지는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이십니다.
우리 이웃 가운데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 가셨다는 사실이 안 믿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안 믿어지는 일이 답답하지만, 그것을 비웃거나 욕할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너무나 완악하고 미련의 껍질이 두꺼워서, 힘 있는 하나님이 그 껍질을 깨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스스로 그 미련과 불신의 껍질을 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그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믿어진다면,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여 나의 무지와 불신의 껍질을 깨 주셨다는 증명이므로 감사할 일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을 가진 여러분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엡2:8-9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는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믿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님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가장 값진 선물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가 보내신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죽었던 우리 영혼의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며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짜 성도는 그리스도를 마음 안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고, 성령을 모신사람은 생명을 소유한자요, 그를 모시지 않은 사람은 죽은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일5:11-12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 그 영혼이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에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얼마나 위대한 복음입니까? 이 사실을 아주 감사함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복음으로 이 은혜로 여러분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복음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사랑 때문에 여러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주님 때문에 여러분이 진노의 자식에서 사랑하는 아들로 대우받게 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며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우리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다.
지금까지는 하나님만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으나,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파송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하루하루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분 하나님께 항상, 순간마다 감사해야 하고, 순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당연히 날마다 순간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일가요? 감사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맥추감사절이 되었으니까 예의상 얼마의 헌금을 드리는 것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이에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항상 감사합시다.
무감각, 원망, 불평, 비난은 감사의 반대입니다. 그런 것은 절대 하지 말고 대신에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야 진짜 구원받은 신자입니다.
광야에서 원망한 이스라엘을 봅시다. 감사거리가 없어서였습니까?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주었고,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셨으며, 먹을 양식과 마실 물과 덤벼드는 대적들을 다 이기게 해 주셨고, 그 뜨거운 태양 볕과 차가운 밤기운을 막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따라다니면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시는데도 그들은 원망과 불평과 작당을 했습니다. 나중에 핑계거리가 없으니까 심지어 생선과 수박과 마늘과 부추 안준다고 불평했습니다.
민11:4-6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받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면, 이미 주신 복 외에 더 주십니다.
감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아 누리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당연한 감사지만 감사를 잘 하면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호롱불 주신 것을 감사했더니 달빛을 주셨고, 달빛 주신 것을 감사했더니 햇빛을 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50:14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미주리 주, 캔사스 시티에 250명 정도 모이는 크라이스트 처치의 웰 보엔 목사님은 2007년부터 ‘불평그만운동’ (No, Complains Campaign)을 시작했답니다. 그는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의 뿌리는 불평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라.”는 보라색 팔찌를 만들어서 자기 교인들의 오른쪽 손목에 채워주고는, 살아가다가 불평이나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면 얼른 왼쪽 손목에 옮겨 끼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에 평균 15번 내지 30번씩 팔찌를 옮겨 끼게 되더랍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루에 15- 30회씩 습관적으로 불만을 떠뜨리거나 남을 비난하며 산다는 증거입니다.
이 보라색팔찌운동에 참여한 데보라 브루스(53.여) 라는 사람은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매일 수차례 팔찌를 다른 팔목으로 바꾸는 나를 발견했다. 우리가 얼마나 부정적인 습관과 문화에 깊이 빠져있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답니다. 이 운동은 21일 동안 한 번도 팔찌를 옮기지 않게 되면 비로소 습관을 고쳤다고 평가하는데, 그 팔찌를 손목에 끼고 자기의 불평과 비난 습관을 고치는 데는 4내지 10개월이 걸리더랍니다. 보웬 목사님은 “부정적인 말이 부정적인 생각을 낳고, 그것이 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더라.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우리는 불평을 멈추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꼭 기억합시다. 감사절은 계절 따라 헌금 한 번 더 하는 절기가 아니라, 완악한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절기이고, 감사 대신에 원망하고 불평하던 우리의 마음 고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고 동행해 주시는데도 조건 따지며 감사 할 줄 모르고 불평과 원망하는 우리의 모습이 광야의 이스라엘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주님 안에서는 오늘의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실패한 것도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실패 때문에 감사하면, 인생관이 바뀌고 신앙이 더 깊어지며, 내가 가야할 새로운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질병에 빠진 것도 감사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질병에 걸려 수술실에 가면서 원망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만날 기회가 될 줄로 믿고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진학에 실패한 것도 감사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조건이 좋아야 감사할 참입니까?
다시 기억합시다. 감사절은 계절 따라 헌금 한 번 더 하는 절기가 아니라, 완악한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절기이고, 감사 대신에 원망하고 불평하던 우리의 마음 고치는 절기입니다.
오늘부터 원망, 불평, 비난을 멈추고 감사하는 사람으로 자기 마음을 고치는 감사절이 되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어지간히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아름다운 상황을 날마다 만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