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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129 / 요 4:27-42 /와서 보라(1)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1.30|조회수1,288 목록 댓글 0

와서 보라(1)

요 4:27-42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요 4:27-42 / 바로 그때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떤 여자와 이야기하고 계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으나 아무도 그 여자와 무슨 내용으로 이야기하셨는지는 묻는 사람이 없었다. 28-29)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세요. 나의 지난날을 낱낱이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그분을 만나보세요.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30)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보려고 동네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31)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은 예수께 잡수실 것을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절하시며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제자들은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을까?' 하고 수군거렸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시작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라! 인간 영혼의 광막한 밭은 우리 주위에서 이미 누렇게 익어 이제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다. 36) 추수하는 사람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영혼들을 하늘의 곳간에 거두어들인다. 그러면 씨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할 것이다. 37) 한 사람은 뿌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게 하였다. 다른 사람이 일한 것을 너희가 추수하게 될 것이다.' 39) 그 동네의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분이 내 지난날의 일을 낱낱이 알아맞히셨다'는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 메시야라고 믿게 되었다. 40-41) 그래서 우물가로 달려가 예수께 자기네 동네로 들어가 묵으실 것을 청하자 예수께서는 그 동네에 이틀 동안 묵으셨다. 그동안 더 많은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 42) 그들은 그 여자에게 `이제 우리는 당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가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여자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먼저 목마른 사람을 보았고, 그 다음은 한 유대인을 보았으며, 그 다음은 랍비를, 그 다음은 선지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물동이를 버려 두고(27-30)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가 대화하는 것을 본 제자들은 당황합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예수님께 묻기조차 꺼려할 정도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경험했습니다. 영원한 생수를 얻은 여자는 이제 더 이상 물동이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동네로 들어가서 늘 피해 다니던 동네 사람들을 만나 ‘와서 보라’고 소리쳤습니다. 자기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 와서 직접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들을 피하던 여자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메시야를 만났으니 와서 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가하여 여자를 따라 나섰습니다.

 

나의 양식(31-38) 여자가 마을로 돌아간 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피곤하고 주리신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생을 위한 양식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양식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 그분이 맡겨주신 일을 이루는 데 온 힘을 다할 때 얻는 것으로 그침이 없는 양식입니다.

 

유하시기를 청하니(39-42) 요한복음에서 유하다(거하다)는 단어는 구원사적 용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된 자로 증언하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고 말합니다(요 1:14).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이틀을 더 있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역사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바르게 인식한 한 여인의 놀라운 증언은 증오와 살육으로 얼룩진 유대와 사마리아의 증오를 깨뜨렸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거하며 기뻐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내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뿌리 깊은 증오와 분단의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저주받던 땅 세겜은 기쁨과 화해와 축복의 땅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적용: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을 차별하던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받아들입니다. 선입견은 무서운 벽입니다. 나는 누군가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지는 않습니까?(참조 요일 1:1-4)

 

한 남자가 과녁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화살이 두 개가 있고,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백발의 스승은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화살 하나는 버리거라!" 남자는 스승의 말에 납득이 되지는 않았지만, 화살 하나를 버리고 남은 하나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남자는 평소보다 더 좋은 실력으로 과녁의 가운데를 맞출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스승은 맑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습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화살이 많아도 과녁을 제대로 맞히기 어렵지." 무슨 일을 하든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임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변화되라

요한복음 4:27-30 / 박찬길 목사

어떤 사람이 탈무드 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입학사정관이 묻습니다. “당신은 왜 이 학교에 들어오려고 하십니까?”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입니다.” 붙었을까요? 떨어졌을까요? 떨어졌습니다. 다른 학생이 대답합니다. “학교가 좋아서입니다.” 이 학생도 떨어졌습니다. “이 학교는 공부를 잘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 학생도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은 합격했습니다. 이 학생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좋은 랍비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지만 만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아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잘 만나면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라기 때문에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친구를 잘 만나면 신의와 우정을 쌓기 때문에 관계가 좋아지게 됩니다. 스승을 잘 만나면 인격적인 가르침을 배우게 되어서 인격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를 잘 만나면 신앙공동체에서 주는 영적인 기쁨을 얻게 되어서 신앙생활이 재미있습니다. 목회자를 잘 만나면 신앙생활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배우자를 잘 만나면 날이 갈수록 사랑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만남의 복을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한 없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복된 만남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이 부유해지고 행복해지고 보석같이 빛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어요. 다섯 번 이혼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데, 언제 헤어질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들이 나오지 않는 가장 더운 정오에 우물가에 나왔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은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분열되는데, 남쪽에는 유다가 세워지고 북쪽에는 이스라엘이 세워집니다.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앗시리아)의 침략으로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강제로 이주시켜서 혼혈정책을 씁니다. 결국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과 결혼함으로 혼혈족이 되고 맙니다. 열왕기하 17장에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반면 남쪽의 유다는 순수혈통을 유지합니다.

 

자, 남쪽의 유다는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순수혈통을 유지했고, 북쪽의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결혼해서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고 외면했습니다. 요한복음 4:9,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잖아요. 더욱이 유다에서 갈릴리를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는데 유다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걸려도 돌아서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에게 뜻밖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대 사람인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물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깜짝 놀랍니다. 9절에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이래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의 대화가 시작되는데, 예수님께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는 물은 영원한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더니 귀가 번쩍 뜨입니다. 그런 물이 있어요? 그런 물을 나에게 주셔서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에 물 길러 오지 않게 해 주세요.

여러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원어를 보면 물의 의미가 다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은 ‘피에’라는 말인데, 한번 마시는 물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말한 물은 ‘피논’으로 계속해서 마시는 물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의 갈증이 일어날 때에 마시는 물을 이야기한 것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수를 말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더니 말이 바꾸어집니다. 한번 마시는 물, 하나님이 주시는 샘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피에’를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갑니다. 완전히 변화된 것이지요.

여러분,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29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예수님은 율법학자가 아니었어요. 예언자도 아니었어요. 스승도 아니었어요. 위대한 성인 중에 한 사람도 아니었어요. 예수님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야’라는 말이지요.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헬라어로는 “그리스도”, 메시야는 구약적인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신약적인 표현입니다. 뜻은 마태복음 1:21, 죄에서 구원한 자라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세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지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답답하시니까 제자들에게 물으시지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5)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내 죄를 구원할 분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때에 상대방을 향한 고백이 바로 되어야 행복한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바로 되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고, 세상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백이 잘못되면 교회만 다니는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겁니다.

서울에서 전도사할 때에 전도 나가면 어른들은 안 나가고, 애들은 데리고 가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가면 좋은 말씀을 듣고 배우니까 좋다는 거예요. 이 분은 예수님을 성인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교회는 성인의 말씀을 듣고 배우려고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지요. 이민생활에서 만날 사람이 없으니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성경을 보면 사람은 죄인이잖아요. 죄인에게 필요한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죄인이 아닌데, ‘남의 물건을 훔치지도 않았고, 사기 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죄인이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세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도덕적으로 지은 죄나 윤리적으로 지은 죄나 사회적으로 지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영적인 죄를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된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는데,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에 모든 인류는 누구나 죄의 DNA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우리 교회에 영유아들이 많지만 재들도 죄의 DNA를 가지고 태어났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성장하면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내 정욕대로,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살아갑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야망대로 살아갑니다. 로마서 1:28의 표현대로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이 원죄이지요.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기분 나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어요. 나의 죄를 해결해 주실 분을 보내주신 겁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살았던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나를 천국에 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멀리한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지요. Good News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우물가에서 만난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고, 친구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고, 스승을 잘 만나는 것도 복이고, 직장을 잘 만나는 것도 복이고,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내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구세주로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보면 이 축복을 모르고 지나칠 때가 간혹 있어요. 지옥에 갈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가게 되었는데, 삶의 환경이나 여건이나 사람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거나 좌절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가치에 절대적인 가치가 흔들릴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가끔 예수 믿는데 왜 이래? 안 믿는 사람은 잘 풀리는 것 같은데, 취직도 잘 되고, 돈도 잘 벌고, 결혼도 잘 하고, 아이들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런데 나는 주일예배 한번 안 빠지고, 기도 열심히 하고, 십일조 열심히 드리고, 충성하고 헌신하는데, 나는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서 답답하지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예수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려고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귀영화를 꿈꾸기 위하여 예수 믿는 것도 아니고, 성공하려고 예수님을 만나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는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살려서 천국가게 하려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육체의 만족을 채우는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를 만나면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여건이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태도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대로입니다. 예수 믿으면 삶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과 가치관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120년 전에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에 놀라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계급이 있었습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신분이 세습이 되었습니다. 양반으로 태어난 사람은 양반으로 사는 것이고, 상놈으로 태어난 사람은 평생 상놈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에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법제상으로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의식과 관습 속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면서 백정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백정은 가축을 잡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백정은 결혼식 할 때에 말이나 가마를 탈 수가 없고, 죽은 뒤에도 상여를 쓸 수가 없었어요. 백정 아닌 사람을 만나면 허리 굽혀서 인사를 해야만 했고, 상대가 어린아이일지라도 깍듯이 존댓말을 써야 했습니다.

백정 중에 한 사람이 왕손(임금의 후손)의 마부가 되었습니다. 왕손이 말을 타고 여기저기 다니기를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마부가 예수 믿고 왕손에게 전도합니다. “나으리, 예수 믿으시지요.” 왕손은 빈정거립니다. “예수 믿으면 너 같은 상놈이 양반이 되느냐?” 그 때에 마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으리, 예수 믿는 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부 노릇을 더 잘해야 합죠.” 충격적인 말이지요. 예수 믿으면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왕손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만나면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나 여건이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백정이 양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부가 왕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태도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도는 마부 노릇을 더 잘해야 합죠. 너무 근사하지 않습니까?

 

흔들리지 마십시오. 환경에 기죽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의식 때문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여기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내 영혼이 구원받은 절대적인 기쁨으로 인하여 삶이 반듯해집니다.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빌 4:12)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에게 이러한 축복이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을까요?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면 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이신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내가 받아드리면 내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약을 먹으면 신기합니다. 내 속에서 약효가 나지요. 두통약을 먹으면 머리가 안 아프고, 소화제를 먹으면 소화가 잘 되고, 진통제를 먹으면 몸이 쑤시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인정하고 받아드리면 내 심령이 치료되는 겁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어서 말씀을 증거 하면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이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받아드리면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생각을 심어주고,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주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시기 바랍니다. 죄인이라고 증거 하면 내가 죄인이라고 받아드리는 겁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3:10)고 하면 ‘맞다. 의인은 하나도 없지.’ 받아드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고 하면 ‘맞다. 내가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지’ 그냥 받아드리는 겁니다. ‘내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 ‘맞습니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드릴 때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 번째 변화는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입니다. 물동이는 계속해서 마시는 물, ‘피논’을 담는 그릇이잖아요. 사마리아 여자가 육신의 만족을 채우려는 도구였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육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갖고 다니던 물동이를 버리는 것입니다.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잖아요. 자신이 계획을 세우고, 야망과 같은 비전을 세우고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물동이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존심도 버리게 되고, 성질도 버리게 되고, 주관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만난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자존심을 버렸는데 누가 뭐라고 해도 성질을 발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성질을 버렸는데 성질이 나와요? 예수 만난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을 정말 만난 사람은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습니다. 기분 나빠서 이 교회 못 다니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겉으로 인사만 드린 분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만난 사람은 자존심, 성질, 철학이 없습니다. 물동이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28절과 29절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사마리아 여인은 전도하기에 좋지 않은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는 어떤 사람이 하면 잘 될 것 같습니까? 소위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 학벌이 좋다든지,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든지, 의사나 교수나 변호사나 과학자가 전도하면 잘 되지 않겠어요.

 

요즘 같은 때에 싸이가 전도하면 얼마나 잘 될까요? 유튜브를 시청한 사람이 2억 명이 넘는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하지 않겠어요. 또는 과거에 좋지 않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가 지금은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전하면 잘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잘 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방금 전까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물 길러 나간 여자입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돌아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고 전도합니다. 과거에 자기가 무슨 일을 했어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어요. 자신의 욕망 채우는 일을 전념했던 여자인데, 본인도 수치스러워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물을 길러 나왔는데, 그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전도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전도하러 다니면 하나님의 영광만 가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왔습니다. 39절에 보면 이 여인의 말을 듣고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고, 42절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인 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출세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 주변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채운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해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 전도가 안 되지요.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말로 하니까, 지식으로 하니까, 외워서 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기술로 하려고 하니까, 사람 눈치 보면서 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증인은 내가 본 것을 말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체험한 것을 말하는 사람, 예수를 만난 사람이 증인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자동적으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가르쳐 주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면 말씀이 작동해서 내 심령이 기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과 감격으로 인하여 저절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여러 사람과 축복의 통로로 발전시켜서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의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구원되는 놀라운 일이 있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와서 보라!

요 4:27-38 / 이성우 목사

스님 한 분이 지하철에 타서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얼마 후 어느 아주머니가 탔는데 예수 믿으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다니던 중 그 스님을 보게 됐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연방 예수 안 믿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삿대질까지 하면서 그 스님을 향해 설교를 해댔습니다. 승객들이 그 스님의 반응에 관심을 갖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정말 범상치 않은 내공이 있는 웃음소리로 ‘허허허’ 이렇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 웃음소리에 아주머니는 잠시 주춤 하더니 또 다시 예수 안 믿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릴 때가 되셨던지 옆에 내려놓았던 봇짐을 짊어지면서 뱉은 스님의 한마디에 승객들 모두가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따 고년 참 말 많네.” 비록 이 아주머니는 그 스님으로부터 듣지 말아야 할 ‘고년’ 소리를 듣긴 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며, 이 아주머니가 결국 승리한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여러 명의 성도들과 함께 교회 주변에 전도 활동을 나갔습니다. 행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전도하는 것을 꺼려하고 힘들어하며 두려워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 보지 않은 일이라서 힘들게 느끼기도 하고 두렵게 느끼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도할 때 상대방의 반응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에 전도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도지를 들고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전도를 하다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렇게 느끼며 생각하게 되는 가장 분명한 이유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과 영혼 사랑의 마음이 적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가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정말 기쁘고 신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법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기쁜 감정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표정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44절~46절까지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천국의 참된 기쁨을 소유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이 말씀은 천국의 가치와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의 기쁨을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천국의 기쁨을 알게 된 자의 반응에 대해서 설명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맛있는 것을 먹게 되거나 좋은 것을 보게 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마련이며, 그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것, 맛있는 먹거리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금방 소문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소유하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즐기고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며 신나는 것이 있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것을 더 많이 즐기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 현상과 욕구를 충족하고자하는 욕심이 오늘의 사회를 더 발전시켜 오게 된 원동력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과정 중에 사람들의 입소문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게 되면 하나의 여론을 형성하는데 활용되게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처럼 이렇게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게 된 배경과 과정 가운데는 앞서 말씀드린 이런 심리적인 현상들과 사람들의 거룩한 욕심이 중요하게 작용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지나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발견한 천국의 보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의 제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거쳐 유명 무명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함으로 얻게 되고 누리게 된 이 천국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일을 위해서 갖은 고초와 핍박과 박해를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령 자신들이 이런 과정 중에 육체적인 고난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 받은 자의 기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복음 전파의 제단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헌신이 오늘의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지구촌 곳곳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원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을 통해서 그 분께서 주시는 구원의 감격과 천국의 기쁨을 분명하게 체험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로막고 방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가슴 속에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참된 기쁨과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장 3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초기 공생애 중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자기 스승 요한을 통해서 그 분이 바로 메시야, 곧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장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하루 밤을 함께 보내게 되면서 예수님이 자기 스승의 말대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야를 만난 확신과 기쁨을 간직하게 된 안드레는 지체하지 않고 자기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아가서 그에게 자기가 메시야를 만난 사실을 전하면서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서 함께 주님께로부터 부름을 받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4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안드레와 베드로 형제와 같은 동네 사람인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서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는 자기를 부르신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알게 되자 역시 지체하지 않고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 나다나엘은 율법 연구에 몰두하며 율법에 충실한 사람으로서 빌립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4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와서 보라” 결국 이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님께 나오게 되었고 구원의 기쁨과 더불어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다나엘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4장 27~38절까지의 말씀은 사마리아 성의 한 여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대낮에 수가 성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러 물동이를 이고 나왔다가 뜻밖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기쁨에 겨워서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메시아를 증거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여인은 본문 말씀에 의하면 남편을 다섯 번씩이나 바꾸어 가면서 부정한 생활을 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여인으로써 소외감으로 인한 상처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이 여인은 세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으로 인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던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런 아픔과 갈증을 꿰뚫어 알고 계셨습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나서 앗수르 왕이 이주 정책과 혼합 정책을 편 결과로 사마리아 성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피가 섞여서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쪽 유대 사람들은 이들과 상종하지 않았고 그 땅에 들어가는 일조차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음을 본문 27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사마리아 성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서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로 생각하고 그들을 제쳐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제자들과 달랐음을 본문 말씀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땅 사마리아에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가셨으며 더군다나 사마리아 여인과 더불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셨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 더불어서 ‘물’ 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시다가 자연스럽게 ‘남편’ 으로 그 대화의 내용을 옮겨 가셨으며,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는 ‘예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남모르게 여러 가지 갈증으로 허덕이고 있음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 여인의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장 13~14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여인은 우물가에 물을 길러 갔다가 뜻밖에 메시아를 만나서 자신의 갈증의 문제가 완전히 해갈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으며, 그 기쁨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메시아를 통한 갈증 해소의 기쁨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본문 28절~30절 말씀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구원 받은 확신과 감격이 있습니까? 그래서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한 갈증을 해갈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기쁨과 감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인생의 갈증 가운데 허덕이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여러분이 발견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듣고 가슴에 깊이 새기시는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처럼 여러분들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 터져 흘러넘치는 기쁨과 감격이 있게 되시기를 바라며 이 기쁨과 감격을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하심으로써 구원과 참된 기쁨의 통로로서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로 인하여 이루는 인생의 변화

요 4:27-30 / 최종천 목사

요즘 참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 어려서부터 일찍 공부 시작했고 또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배우고 갈등하고 이러저러한 삶을 겪으면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힘들고 앞으로 남은 삶의 시간을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기대하며 바라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남은 인생 어떻게 아름답고 우아하게 살까 생각하다 보면 내게 갖추어진 여건은 그렇지 못한데 하고 마음에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삶이 참 시원하게 풀린다거나 아니면 최소한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우리들의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다수를 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 취업, 가족관계, 경제문제, 인간관계, 삶의 성취와 내가 원하는 꿈의 실현, 뭐하나 그렇게 썩 만족하게 이뤄지지 않았기에 가슴 답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요즘 저는 무슨 생각을 하냐하면 인생에 있어서 참 비하적인 표현이지만 참 죽기 살기로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피곤하면 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곤하게 일을 하면 무리해서 병나고 효율도 오르지를 않아요. 하지만 피곤할 때마다 쉬면 우리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일은 내 작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이 없어요. 내 능력대로 산다고 하는데 그 능력이 별로 크지 않아서 능력대로 사는데 그래도 살만한 여건을 갖춘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아주 인생의 기대수준을 확 낮추어 버리면 괜찮을 듯싶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또 그렇지 않지요. 늘 배운 것은 많고 아는 것은 많은데 능력은 비록 못 미친다 할지라도 기대 수준을 대폭 낮춘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좀 자유인으로서 한가하게 거하면서 인생을 관조하며 살면 좋겠지만 삶은 때론 투쟁적이고 우리 인생 하나하나 어려움을 극복해 가지 않으면 안 되게 우리에게 전투의 장면을 강요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몸이 아파서 이제까지 기쁨으로 삼던 모든 일을 중단해야 할 때도 있고 정말 의지와 열심 가지고 그 병을 극복하기 위해서 애써야 할 때가 생깁니다. 갑자기 생각 못 했던 내 잘못이나 혹은 거친 세상을 능가할 능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내가 탈락되어서 낙오자의 반열에 섰을 때의 가슴 아픔, 그렇게 원했지만 자식하나 내 마음대로 잘 커주지 못해 마음 아파하는 상심, 내 앞에 남편이나 아내조차 내게 있어서 동지요 나를 돕는 자 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마음의 부담이 되는 사람이 라는 생각이 들 때 부대끼는 심정, 정말 세상 어떻게 살아야 될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믿고 사는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이러한 인생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우리 인생의 놀라운 대 반전, 전환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내용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 지역을 지나가게 됩니다.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성을 지나가게 되는데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한 여인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 한 그릇 다오” 하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그 물 한 그릇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대해서 가시 돋친 말을 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이 어찌하여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이와 같이 물 한 그릇 달하고 하느냐 하고 쏘아 붙이죠. 다름이 아니라 그 여인에 마음에 맺힌 한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개처럼 취급했어요.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는데 그 점령군 앗수르와 북이스라엘 백성가운데 태어난 혼혈 민족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람들은 민족의 혈통을 더럽혔다고 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람취급하지 않고 개 취급을 했죠. 그런데 가뜩이나 당시 여성은 물건처럼 여김 받던 이와 같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사람 그리고 나 같은 여자에게 당신이 목말라서 필요하니까 물 좀 달라고 부려 먹고 평상시에는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하니 당신 필요할 때에만 우리에게 요청합니까? 하고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톡 쏘는 말로 마음속에 짜증을 발산한 거죠. 그런데 사실 이 여인에게는 그와 같이 말 할 수밖에 없는 그의 마음속에 정말 맺혀있는 또 다른 삶의 짜증들이 가득했던 거죠. 왜냐하면 나중에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 나타나게 되지만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자신의 남편이 아닌 이와 같은 정숙하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동네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어요. 물 길으러 올 때 대부분은 아침이나 저녁녘에 물 길으러 오죠. 그런데 그 여인은 그 때 물 길으러 오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그 여자를 보면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고 질시하므로 그 경멸의 눈총을 이겨내기가 어려워서 이 여자는 사람을 기피하게 되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한 낮 땡 빛에 혼자서 물을 길으러 왔던 것입니다. 보통 우물가는 물 길으러 오는 사람이 여럿 있어 서로 대화도 하고 물도 긷고 하는데 이 때 여인 혼자 있는 것을 볼 때도 이 시간에 물 길으러 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을 한 그릇 달라고 하는 이와 같은 대화를 시초로 하여서 마침내 이 여인과 대화 속에서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 되시고 생명의 근원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 여인에게 가르치죠. 그리고 이 여인은 그것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젭니다. 이 여인은 물 길으러 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를 향해서 갔어요. 사람들을 찾아서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께 자기가 깨달았던 진리를 전해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오는 거죠. 세 가지가 달라진 겁니다.

첫째는 이 여인의 목적과 목표가 달라졌어요. 물 길으러 왔던 목적이 달라져서 이 여인은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려는 삶의 목적이 생겨서 동네로 갔던 겁니다.

두 번째 마음과 자신감의 변화예요. 뭐죠. 이 여인은 마음이 달라지고 자신감이 달라졌어요. 이 전에는 어떻게 됐냐하면요, 이 여인은 그냥 예수님에 대해서 깨닫고 난 순간부터 사람 기피하고 대인 공포증이 있고 뿐만 아니라 우울증이 있어서 사람들 대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들을 향하여 달려 간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하게 된 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달라졌습니까? 사람 피해 다니던 사람이 사람 찾아 나선 거죠. 자신감과 마음이 달라 진 거예요.

세 번째 사람들에게 질시 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여인이에요. 누구도 이 여인 말을 인정해 주거나 누구도 존중해 주지 않는 이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어요. 여인은 사람을 설득시키고 움직이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에게 바뀐 것이 뭐냐 하면 목적과 목표의 변화, 그리고 가지고 있었던 모든 마음과 그리고 그 여인의 가지고 있는 자신감의 변화, 그리고 실제적인 삶의 능력이 변화됐던 거죠. 정말 이 여인은 달라진 겁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 만나면 우리도 이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되죠. 예수그리스도 만남으로 또 내가 예수그리스도와 동행하다가도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내 마음의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내 마음의 자신감이 달라지고 내 실제적인 삶의 능력이 달라져 내가 이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주의 영광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예수 믿으면 달라지는 것은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달라지는 겁니다.

 

오늘 <28절> 보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에게 이르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여인의 목적은 우물가에 온 것이 물동이에 물을 채워서 먹고 살려고, 즉 물을 길으러 왔던 거예요. 그런데 그 목적이 달라져서 이제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딴 목적이 생긴 거예요.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고귀한 삶의 목표와 목적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달려가야 할, 우리 가슴을 벅차게 하는 진정한 의미 있는 목표를 찾지 못해 지루하고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는 거죠. 우리인생을 달려갈 목표를 내게 허락 해 주십시오. 우리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뭐라고 기도 합니까? 하나님 내 자녀가 하나님 앞에 분명한 삶의 비전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달려갈 삶의 목표를 허락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잖아요. 삶의 목표가 주어지면 인생은 달라지는 겁니다. 내가 가야할 길이 보이면 인생은 달라져요. 근데 우리들에게 새로운 역사가 우리들에게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은혜가 임하게 되는 거죠. 그래요. 우리 인생의 새로운 길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형편이나 우리의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목표가 생기게 되는 거죠.

가야할 길을 보게 하옵소서.

내가 달려갈 삶의 길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현재 형편이나 나이나 건강이나 여건이 문제가 아니에요. 내 삶의 분명한 길을 보면 우리 인생이 달라지는 거죠.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 삶의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제 차차 연세 드시더라도 노후관리 할 생각하지 마시구요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분명한 삶의 목표와 비전을 받아야 되겠다. 내가 하나님 앞에 그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다가 주님 앞에 마지막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주님 품에 안겨 달려가서 주님 품에 뛰어가 안겨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달려가느라 오늘도 시간이 부족하고 내일도 시간이 모자라요. 이제까지 우리가 길으며 살아왔던 삶의 물동이를 잠시 내려두고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감격으로 부여하신 생명의 귀한 역사를 위한 삶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쁘고 감격하여 걸어갈 수 없고 항상 뛰어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감격하여 외치게 될 것이고 확신을 가지고 다른 이를 구조해 낼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상위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하위가치는 의미가 없어진다고 말씀드렸죠. 물 길으러 왔던 여인이 물 긷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생겼어요.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이와 같은 기쁨을 전해야 되겠다. 그 사람 너무 불쌍한데 내가 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되겠다. 라는 마음의 목표가 생기니까 물 길으러 왔던 것 잠시 젖혀두고 사람을 향해 가는 겁니다. 예수 만나면 이 세상의 삶이 전체 달라집니다.

제가 청년들한테 이런 말해서 청년들에게 기도하라 라고 말씀 드리는데 뭐냐 하면 정말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청년들이 요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청소년 시절부터 시작해서 이 대학 입시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고 많은 시간 또 많은 여건, 그리고 온 힘을 기울여요. 그리고 또 대학에 들어가면 또 취업하기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고 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안타까운 거 같아요. 그런데 정말 이 대학에 입학 하는 것보다 취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결혼이잖아요. 제가 보니까요 정말 남자가 여자 잘 못 만나면 길이 없어요. 정말 길이 없는 거 같아요. 근데 또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남자 잘못 만나면 정말 이건 더 길이 없어요. 깜깜 절벽이에요. 정말 길이 없어요. 그럼 이미 한 사람은 어떡해요. 상대방 깜깜하지 않게 해줘야죠 뭐. 제가 청년들한테 그런 말을 해요. 정말 입시보다 더 중요 한 것이-우린 입시 준비하기 위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준비하고 어쩌면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했을지 몰라요. 십 수 년 준비했을 지도 몰라요 근데 그 입시보다 더 중요한 게, 그리고 취업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쓴 거보다 더 중요한 게 결혼이에요. 그게 결혼입니다. 그런데 정말 결혼 잘못하면요 평생 동안 가슴 아프며 살아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결혼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고 내가 입시 준비했던 것 보다 더 열심히 준비해서 결혼해야 돼요. 그리고 내가 상대에게도 그래줘야 되고요, 정말 내가 취업준비 한 거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더 뜨겁게 기도해서 정말 좋은 알맞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배우자와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것을 위해서 애를 써야 해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먼저 된 우선적인 중요한 것이 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인생의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거예요.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 영원한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란 말이죠. 정말 우리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인생이 달라지는 거예요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가야할 모든 길이 달라지고 우리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만남으로 인생의 목표와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거예요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을 달려가고 숨가쁘게 달려가도 가슴 벅찰 분명한 삶의 목표와 목적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예수 믿으면 달라지는 것은 마음과 자신감이 변화되는 겁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야 하니’ 이 여인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어요. 그 확신을 그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겁니다. 마음이 달라졌어요. 대인기피증, 대인공포증 사람과 대하고 싶지 않은 이와 같은 사람이었어요. 동네 사람 피해서 물 길으러 왔던 사람입니다. 근데 그 마음이 달라지고 상태가 달라지고 우울증, 기피증, 공포증 이와 같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담대해졌습니다. 사람을 피하던 사람이 기뻐함으로 사람을 만나러 달려가는 겁니다. 그래요. 왜죠? 이 여인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생겼어요. 난 이제까지 다른 사람에게 줄 것 아무것도 없고 늘 피해가운데 옹성거리고 살았단 말이에요.

‘주님 정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가진 가장 큰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옵소서.’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잖아요.

하나님 내가 평생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기쁜 것 줄 수 있게 하옵소서. 평생 기도해 줄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남에게 평생 줄 수 있는 삶이면 얼마나 기쁩니까?

전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을 위해 이런 기도 늘 드려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늘 남에게 주기 위해서 주머니에 손 넣을 때 허전하게 빈손으로 손을 꺼내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옵소서. 무엇인가 주기 위해서 창고 문을 열었을 때 빈 창고 허전하게 바라보며 망연하게 창고 문 다시 닫는 이런 일 없게 하옵소서.’

그래요. 얼마든지 날마다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입니까? 사람이 두렵지 않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면 오히려 찾아가게 되요. 무엇인가 내가 그들에게 줄 것이 있고 기쁘고 감격스럽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요. 그들에게 너무나 큰 기쁜 일이니까요. 동네 사람을 찾아 갔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자신 있게 예수를 소개하는 겁니다. 자신감이 없던 사람이 자신이 생겼어요. 본인이 직접 체험한 것이 가장 자신 있는 거예요. 남에게 들은 얘기나 책으로 본 것보다 더 강한 것은요, 내가 직접 체험 한 겁니다. <요한복음 9장 25절~27절>을 보면요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위하여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서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을 순종해서 눈이 떠진 맹인 청년이 있죠.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 아버지를 불러다 얘기 합니다.

“정말 예수가 아들의 눈을 뜨게 했느냐?”

이 아버지는 벌써 옆에서 구경한 사람이잖아요. 뭐라고 얘기 합니까? 비겁해요.

“내 아들도 성인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아니 눈앞에서 그 눈을 뜬것을 분명히 봤는데도 왜 이렇게 치사하게 얘기 합니까? 벌써 자기가 체험자가 아니라 관찰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들을 불렀어요.

“정말 예수가 니 눈을 뜨게 했느냐?” 그랬더니 아들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자기가 직접 체험 했잖아요. 뭐라고 얘기 합니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눈을 뜨게 한 것은 분명하다.” 뭐라고 얘기 합니까? “당신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느냐?”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니까 내가 부인할 수 없고 강하고 담대하게 그의 모든 행보를 이룰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요. 주님을 만나되 남이 만남 주님을 내가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주님을 만나야 돼요.

오늘도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뭐라고 얘기 합니까? 이 여인이 처음에 말해서 그들이 이 여인 때문에 예수를 믿었어요. 근데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말씀 들었어요. 그랬더니 여인에게 뭐라고 얘기 합니까? 처음에는 당신이 우리에게 예수에 대해서 말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었지만 우리가 직접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으니 이젠 당신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는 직접 예수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렇게 더 확실하게 고백을 하게 되죠.

그래요. 진정으로 상대를 도와주는 것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본인이 기쁘고 자신 있고 감사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 하며 너무나 자신 있는 겁니다. 저도 목사로서 성경 읽다가 꼭 이 말씀을 전해 주고 싶다 하는 이런 말씀이 생겨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러면 마음이 너무 기뻐요. 전해주기 위해서 전해드리기 위해서 너무 마음이 기뻐요. 그래요 뭔가 줄 것이 있을 때에는 마음이 기쁜 거예요. 우리 성도님들 정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기쁨과 은혜와 감격이 생기면 그것을 주고 싶어서 마음에 자신감이 생기는 겁니다. 복음을 전할 때 자신감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어요. 절대 진리의 전파의 사명성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 진리를 전파하는 사명자로에 삶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우리를 변화시켜갑니다.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우리는 너무 기쁘고 자신 있어요. 절대 진리를 소유하면 그것은 전파에 대한 사명성을 부여해요. 절대 진리는 나만 혼자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요. 남에게 전파하게 될 사명성을 스스로 부여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빛을 발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보아스라는 넉넉한 사람이 있었어요. 마음도 넉넉하고 사람이 속이 깊습니다. 룻이라는 여인이 자기의 밭에 와서 이삭을 줍는 것을 알았어요. 이 보아스라는 사람이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인들에게 얘기 합니다. “자 밭을 끝까지 베지 말고 모퉁이를 남겨 둬라 그리고 이삭을 주우러 오는데 그저 이삭을 좀 뿌려 놔라. 그러면 그 이삭을 주워갈 것이다.” 그러니까 룻을 도와주기 원하는데 자존심 상하지 않게 도와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와 같은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룻이라는 여인을 도왔던 겁니다. 그래요. 결국 이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는데 정말 보아스가 룻에게 그런 넉넉한 자비를 베풀 때 그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의 선물을 받으면요 나 혼자 가지고 있을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요. 그 때 우리 마음의 넉넉함, 자신감, 기쁨 이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죠. 이제는 삶을 비판하고 비관하고 숨고 싶었던 삶이 변하여 사명자가 됩니다. 등불을 켜서 동네 어귀에 두는 것 같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빛을 발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예수그리스도 전해주면 그들의 삶이 바뀌어져요. 우리가 하는 일에 자신감이 생기면 우리는 힘이 들어도 기뻐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 피곤하지 않고 기뻐요. 여러분 운동과 노동의 차이를 아시죠. 노동은 억지로 해요. 참 피곤해요. 똑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이 운동인 경우에는 참 기쁘고 피곤이 풀어져요. 여러분, 예배드리는 거 이 노동이 되면 참 힘들어요. 예배드리고 1시간 드리고 나면 어 예배드리는데 너무 힘들었어. 좀 쉬어야 돼. 예배드리고 나면 좀 쉬어야 됩니까? 오히려 더 힘이 납니까? 갑자기 헷갈리는 것 같아요. 예배드리는 거 우리에게 노동이 아니라 운동이 되어야 돼요. 그래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노동이 되지 말고 운동이 되어 운동적 삶을 살아가야 돼요. 하나님 안에 마음이 기쁜 사람이 되어야 해요. 저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 만나 주셔서 마음의 색깔이 바뀌고 그 마음에 자신감이 생겨 어떤 일이든지 담대하게 사람을 찾아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이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예수 믿으면 달라지는 것은 실제 능력이 변화 돼요.

 

사람들에게 말을 했을 때 정말 사람들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손가락질 당하던 여인이 그 사람들을 설득시켜 움직여 주님 앞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신 겁니다. 이 여인에게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셔서 능력이 생긴 겁니다. 이 여인이 달라졌어요. 사람 피해 다니던 사람이 대인 공포증, 대인 기피증 있던 사람이 사람에게 찾아가서 찾아 갔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설득시켜서 데려고 올 수 있었어요. 사람의 위치 이동에는 벌써 능력이 가미 된 거죠. 위치를 이동시킬 능력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어요. 마을에서 이 우물가로 나왔단 말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을 초빙까지 했단 말이에요. 이와 같은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겁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 체험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입어 능력이 달라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예수 믿으면 목표도 달라지고 자신감도 달라지고 능력도 달라져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소망 없던 내 삶에 소망 생기고,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시도하게 하고, 그것이 쌓여서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주님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고난을 넘어 마침내 시간이 쌓여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평생 탓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넘어뜨리려고 하지 않고 우리는 평생 감사하고 기뻐하고 다른 사람 세워주고 칭찬하며 부러워하고 마침내 그를 위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그와 더불어 나 까지 받게 되는 거죠. 잘 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잘 되는 사람을 축복하고 축하하는 사람은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하고 저 사람하고 마음 씀과 생각과 행동이 틀려요.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해 봅시다. 쉽게 말해서. 그런데도 저 사람이 어떤 일이 잘 될 때가 있어요. 그 땐 무슨 마음이 듭니까. 저 사람 뭔가 속여서 잘 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우린 소인배에요. 야, 저 사람 내가 모르는 좋은 점이 있나보다. 내가 보는 것이 저 사람의 모든 면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럼 내가 모르는 더 좋은 면이 있고 내가 모르는 하나님이 저 사람 인정하는 면이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또 그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가지자 생각하면 우리 인생은 비교적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요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더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잘 되어서 그가 오히려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우리 삶은 더 풍요로 와지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 축복하고 축하하고 내가 잘못했다 생각하면 열등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근거로 삶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우리는 더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거죠. 다른 사람 공격해서 내 속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사과하고 죄송하다고 해서 내 속이 시원해지면 우리는 더 기쁜 거죠. 우리는 주장하므로 큰 사람 되지 않고 다른 사람 배려하고 사과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위로해줌으로 더 큰 사람이 돼요. 우리는 늘 이겨서 큰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어도 상대를 배려해서 한 번쯤 져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승리자가 돼요. 요즈음은 사람을 내가 말로 설득시켜서 내 추종자가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나를 돕는 사람 되게 정말 도움을 구함으로 함께 동역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하죠. 내가 똑똑하니 너는 내 아래 와서 일 해. 라는 것이 아니라 제가 부족하니 좀 도와주세요. 해서 사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반짝하는 것이 이기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릇이 큰 경우가 이깁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승패는 열 번 뒤집어 져요. 그 열 번 뒤집어지는 승패의 기간 동안에 울렁거리지 않고 결국 그것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은 인내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큰 그릇이 되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이와 같은 인내의 심정과 연단의 심정을 가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아무것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줄 것이 많이 생겨요. 여인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요. 근데 이 여인이 갑자기 줄 게 생겼어요. 사람들을 찾아가서 줄게 생겼어요.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단 말이죠. 주님 만나면 줄게 많이 생겨요. 달라진 거 없어도 내 마음이 달라지니까 줄게 많아져요.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바꿔지니까 갖고 있는 게 너무너무 많아요. 우리 성도님들 많은 능력을 부여 받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 만나 능력이 달라진 사람들, 모세는 목숨하나 부지하고도 광야로 은거했어요. 숨어들어갔어요. 피신한 겁니다. 거기서 40년 동안 피신하고 살았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셔서 그에게 사명을 줄때 모세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바로 앞에 가서 담대하게 내 백성을 보내라 하고 외칠 수 있는 그리고 바로가 굴하지 않을 때 끝까지 열 번의 재앙을 일으켰어도 그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빼어 내 올수 있는 이와 같은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단 말이에요.

기드온은 소심하게 포도즙 틀에서 밀이나 타작해서 먹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 바알의 신당을 쳐부수고 그리고 미디안의 대군을 향하여 기도온의 칼이라 하나님의 칼이라고 외칠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이 되었단 말이에요. 삼손은 정말 평생 동안 허랑 방탕하다가 마지막에 두 눈 뽑히고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을 때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하나님께 간절히 소원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기여하고 공헌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요. 우리의 삶 가운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순간 우리의 능력이 달라지는 겁니다. 물고기나 잡던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를 직접 체험하게 될 때 그들은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하며 순교자들이 되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벌벌 떨고 접근도 못하던 이런 사람들이 어느 날 성령 충만의 역사를 받게 될 때 그들의 인생이 달라져 능력자가 된 겁니다.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의 자리까지 가게 되었던 겁니다. 예수 믿으면 생각이 달라져요, 목표도 달라져요, 능력도 달라집니다. 나 위주의 생각에서 주님의 생각으로, 나 위주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배려하는 삶으로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지고요, 생각이 달라지고, 인격이 달라집니다. 말투가 달라지고, 표현이 달라지고, 방법이 달라지고,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사려 깊은 마음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이뤄져요. 실제 어떤 일을 이루는 능력이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 다 어려워하는데 나는 그 일 하니까 쉽게 되더란 말이죠. 요즈음 인생의 모습을 보면 참 사는 게 쉽지 않다 생각해요. 하다못해 자연속의 미물들도 그래요. 그 여러분 동물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보면 그렇잖아요. 그 힘없는 동물들도 살아보려고 버둥거려요. 그 맹수들이 오면 또 살아보려고 버둥거리다가 맹수들에게 또 잡혀 먹고 정말 그런 것 보면 너무나 안타까워요. 그런데 맹수의 입장을 살펴봅시다. 슬슬 놀다가 어디 오늘 한번 몸 풀어 볼까 그러고 사냥을 하는 거 아니잖아요. 맹수들도 굶어 죽는 거 정말 그 모면하기위해서 살기 위해서 아주 피나는 노력으로 사냥을 하는 거 아닙니까? 정말 어느 게 더 강할까요? 맹수가 강할까요, 잡혀 먹히는 이와 같이 약한 동물이 더 강할까요? 맹수의 개체 수는 점점 더 줄어들어요. 약한 동물의 숫자는 끊이지 않고 지구상을 점령하고 있죠. 가장 아무것도 남을 공격하지 못하는 식물, 이 풀들 한번 보면 늘 뜯어 먹히기만 당해요. 그래도 지구상에 가장 끝까지 남아 있고 더 많은 것은 풀들 아닙니까? 가장 약해 보이는 게 가장 강한 겁니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고 약함으로 겸손해져 오히려 더 강한 하나님의 은혜를 심는 게 우리 인생의 진리잖아요. 그래요. 내가 약하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그것이 가장 강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게 되죠.

오늘 이런 말씀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러저러한 생각하며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정말 인생이라는 것은 힘을 다해 달려가야만 겨우 생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근데 문제는 그 힘을 다해 달려갈 수 있는 내 마음의 상태가 준비돼야 돼요. 바로 주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주님을 만나면 목표도 달라지고, 주님을 만나면 마음과 자신감도 달라지고, 주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의 능력도 달라져요. 오래 교회 다녔는데 내 삶은 왜 연속인가? 아니에요. 주님 만나면 또 달라집니다. 은혜 체험하면 또 달라져요. 넘어졌을 때 또 은혜 체험하면 또 달라집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더 깊은 믿음과 은혜의 세계로 달려가게 되는 거죠.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가 살고 내 식구 살고 내 주변 사람 잘 살고 명예로워지고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면 된다하고 생각 했지만 어느 날 우리에게 새로운 꿈이 생기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살 수 있는 것, 주의 백성을 위해서 어려운 백성을 위해서 내가 살고자 하는 꿈이 생겼어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세계에 눈이 떠지더란 말이에요. 그 때부터 삶의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우리 마음이 달라지고 사는 것이 달라져요. 일을 지속적으로 이루려면 건강해야지. 내 시간과 삶을 계획적으로 살아야지. 시간을 아껴야지. 힘이 제한되어 있으니까 힘과 능력을 잘 배분해야지. 사람을 얻어야하니까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어떤 마음을 써야할지 결정해야지. 더 큰 능력을 가져야 되니까 더 기도하고 더 노력해서 내 능력을 이 수준에서 끝나지 말고 어떤 형태로든지 더 배양해야지. 인생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사역이 생기면 우리의 삶의 범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 허덕거리며 살아가요. 그래요. 우린 몇 십 년 동안 수고해서 살아온 결과가 지금이 아닙니까? 그렇게 애쓰며 살아온 결과가 지금이 아니에요. 우리 이러한 삶 다시 반복하시겠습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똑같이 살아서 노력하며 애쓰게 살아서 지금의 모습으로 이렇게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새로운 목표를 바라보며 우리는 후회 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기를 소원 합니까? 그래요. 한 번 바꿔 봅시다. 이제는 나 하나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살아 봅시다. 이 여인은 이제까지 아무것도 줄 게 없었어요. 사람 피해 다녔어요. 이제 줄 것도 생겼고 사람을 향해서 달려가게 됐다는 말이죠. 매일 앞산만 오르다 높은 산을 오르게 됐어요. 삶의 목표가 달라진 것이죠. 더 높은 산을 오르려고 연습하고 마음 강하게 먹습니다. 그리고 더 큰 기쁨을 누립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야속한 것이 아니라 가엾고 안 되어서 꼭 도와주고 싶어요. 사람이 섭섭한 것은 내 마음이 꽉 차지 못해서 그래요. 살다 보면 섭섭한 것 없어지고 감사하고 죄송하고 더 애써 잘 도와 드리고 싶은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 때 우리가 변화되고 더 커지는 것이죠.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 만나시길 바랍니다.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우리 인생의 마음가짐과 자신감이 달라지고 우리 능력이 달라지는 하나님의 권능과 인생이 달라지는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요 4:27-30 / 윤태성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람과 함께 장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어느 곳에서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링컨의 연설 가운데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 민주주의의 이상을 표현하는 이 말은 게티스버그의에서 남긴 연설입니다. “주님 나는 이곳에 섰습니다. 뒤로 물러갈 수 없습니다. 나를 보호 하소서” 마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보름스국회에서 받을 때 남긴 말입니다. 이 말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수가성에서 한 여인을 만나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은 장소가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하신 말씀이 왜 중요하는가? 먼저 사마리아는 북쪽으로 갈릴리지역과 남쪽 유다의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시면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질 때 북이스라엘의 수도였기에 남쪽 유대와 정치적인 라이벌관계에 있는 지역 이였습니다. 그 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고 이방의 피가 많이 섞이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극으로 지내는 견원지간이 됩니다.

사람들은 길이 멀더라도 사마리아를 피해서 유다로 갈 때 갑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땅 “사마리아” 그곳에 관한 특별한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강도 만난자의 비유” 가운데도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됩니까? 도와 줄것 같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지나가지만 유대인과 원수처럼 지내는 사마리아인이 도와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애착을 갖고 계실까?

 

1. 문둥병자가 전한 기쁨의 소식

 

성경을 보시면 사마리아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7장을 보시면 아람군대의 침략으로 사마리아가 고립이 됩니다. 그때 얼마나 힘이 들었는가 하면 성안에 갇혀 있는 군인들이 굶어죽게 되고. 가정에서는 배가 너무 고프니 눈이 뒤집혀서 자기 아들을 삶아 먹는 여인들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엘리사를 통하여 살리십니다. 칼 하나 뽑지 않고 신비로운 초자연적인 소리로 아람군대를 두렵게 하여 모두 다 도망을 가게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람군대가 다 도망을 갔는데 먹을 것이 가득한데도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교회에 오면 영원히 사는데 그것을 모릅니다. 그때 네 명의 문둥병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기에 가족들이 먹을 것을 전해줘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막상 전쟁이 나니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없어서 거기에 있어도 죽고 성에 들어가도 부정한 사람이라 맞아 죽을 상황입니다.

이제 이 네 명의 문둥병자는 “아니 우리가 여기서 죽기를 기다리나 성안에 들어가도 죽고 여기 있어도 죽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 아람진영에 가보자 그들은 군량미가 많아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주면 살고 죽이면 까짓것 죽자 그래도 여기 있는 것 보다는 낮지 않겠느냐”

그래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람 진영에 가보니 모든 군사는 다 빠져나가고 보초병도 한명이 없습니다. 준비해 논 저녁식사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 배불리 먹고 은과 금과 옷을 감추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앉아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였지만 이제 갑자기 거부가 되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모습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들은 배가 불렀지만 가슴이 전율합니다. “오늘 우리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오늘 이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 것이다.” 그들은 피곤했지만 다시 걸음을 재촉해서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사실을 고합니다. 그리고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게 됩니다. 연약한 자를 통해서 기쁨의 소식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납니다.

우리인생의 문제가 있습니다. 내 앞을 가로 막는 질병의 문제 재난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려워하는 자리에서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최근에 신종 플루가 얼마나 걱정입니까? “내 60평생에 이런 일 처음이다.” 학교가 휴교를 하고 지금 서울에서는 지하철에서 마스크만 기침 한번만 해도 옆자리에서 슬금슬금 피한다고 합니다. 신종 플루는 사람, 돼지, 조류등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물질이 서로 혼합되어서 새로운 형태의 바이러스입니다. 이전의 독감보다 사망률이 적음에도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새로운 변종이기도하고 언론이나 방송에서 집중적으로 보도를 해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가 더합니다. 제가 어제 병원에 계신 분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병원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대뜸 우리나라에는 자동차로 죽는 사람이 더 많고 이제까지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시지 마라” 우리 사회가 심리적이 안정감이 없는 것은 아닌가 광우병 파동 때와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소동을 벌였지만 그때일은 지금은 잘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과 같이 너무 두려워 하면 누가 좋아합니까? 백신을 만든 제약회사와 두려운 마음을 품게한 학한영이 좋아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이런 때 꼭 필요한 것은 문제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정답은 성전의 기도에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에서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열왕기상 8:37-39절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거든 무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신종 플루가 지나가도 또 다른 어떤 질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 만이 우리인생의 문제를 아십니다. 그 주님 께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자에게 담대한 마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때에도 우리는 담대함의 근거는 누가 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담대한 삶을 통한 증거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수가성 여인의 복음 증거

 

지금 이야 우리가 이메일을 보내지만 옛날에는 우리가 편지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씁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빠지게 되면 그 밑에 Postscript. PS라고 씁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다시 사마리아 땅에서 다시하시고 싶은 말씀입니다. 영어로 PS 추신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고 계십니다. 이 여인은 정오쯤 되어서 사람들의 통행이 없는 시간에 나옵니다. 이 여인에게는 남모르는 부끄러움이 있는데, 다섯 번을 시집을 간 여인입니다. 남편이 다섯이나있다. 어떤 이는 음탕한 여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 당시에 여인 혼자서 과부로 살아가는 일은 너무 힘이 들었기에 그저 남자를 의지해서 살려고 한 여인입니다.

상처가 있고 살아가는 일이 어려움에도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여인입니다. 우리가 보면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낙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하면 그 사람을 터부시하고 외면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한 두번 복음을 전하다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지 않는가 보다” “우리 남편은 이제 내 힘으로 되지 않고 주님이 특별한 은혜로 만져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구원해야할 대상을 영적인 소외를 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20번의 복음전도를 들어야 교회에 나올 수 있고 한사람의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그가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여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러한 위대한 주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8v 물동이를 버려두고. 요한이 이 사건을 통해서 물동이는 스쳐지나갈 수 있음에도 그럼에도 분명히 기록한 목적한 목적이 있습니다. 여인이 우물가에 온 이유는 물을 길러온 단순한 목적 고단한 삶이 였지만 이제 여인의 삶의 태도와 목적이 바뀌었다. 그즉시로 마을로 달려가서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녀가 만난 예수님을 담대함으로 전합니다. 두려움 없이 전합니다.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합니다.

구약에서 문둥병자들은 “이제 적군이 물러갔다 이제 우리는 살게 되었다 먹을 것이 풍족하다.” 육적인 죽음에서 이제 구원 받았다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마을에 가서 육보다 귀한 영의 말씀입니다. 밀러박사의 책 “아스팔트에서 낚시질”에서는 기독교인들은 평균 6000천 번 설교를 듣고 8000천 번의 기도를 드리고 2만 번의 찬송을 부르는데 전도하는 의무는 거의 행하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번을 듣고 그 말씀이 은혜가 되어 그대로 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마을의 수치였지만 이제는 그 마을의 자랑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듣기만 하는자 입니까. 들은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는 자입니까 바라기는 보고 들은 대로 담대하게 전하는 자에게 구원의 역사가 임하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구원 계획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유대에 있는 대제사장과 높은 사람들에게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낮은 자들을 향하고 계심을 알수 있습니다.

낮은 자가 누구입니까? 자신의 자신이 스스로 환경을 만들어 가지못하지만 주어진 상황가운데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ex) 중국의 임어당는 세계적인 석학입니다. 그런 그가 어떤일로 큰 슬픔을 당해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항상 미소가 가득하고 생기가 가득차서 즐겁게 노래 부르는 한 여자하인이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그 여자 아이에게 뭍습니다. “애야 너는 뭐가 그리 좋아서 늘 웃으면 사니” “예 주인님 저는 예수님을 믿어요 예수님을 믿어서 기뻐요 주인님도 예수님을 믿으면 저처럼 기쁠거예요” 그래서 임어당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자기 집 종의 얼굴에서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것 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가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그 자리에서 우리 주님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불노동은 어떤 동네입니까? 넉넉한 사람보다도 자기 일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동네입니다. 이곳에 주님께서 누군가를 만나시기 원하는데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작지만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나오는 말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대상은 먼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입니다. 전도에서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전도자가 전하지 않으면 죄인들이 구원 받지 못한다는 사실 로마서 10장 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지 아니하면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면 믿지 못함을 강조 우리 모두 누군가 전했기에 믿게 되는 것이다.

코카콜라는 세계적인 브랜드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광고를 합니다. 이 회사의 광고부장이 하는 말이 코카콜라가 계속해서 광고하는 이유는 코카콜라를 아는 사람이 죽고 모르는 아이들이 자꾸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 들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도 아이들도 계속 태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그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나의 물동이도 중요하지만 물동이를 버리고 뛰어가 전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짐해야하는 것 우리는 증인이 됨. 증인은 보고 들은 바를 바르게 전하기만하면 됨, 그것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분은 주님. 내가 들은 바를 전하기만 하면 주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보고 들은 바를 바르게 전하시는 전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받은 은혜를 누리십시오

박찬길 목사

우리 교회는 지난주간에 부흥회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참석하셔서 많은 은혜를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월요일에 강사님과 아침 식사를 하면서 부탁드렸습니다. "목사님께서 3일간 우리 교회에서 지내시면서 저와 좋은교회가 고쳐야 할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우리는 좋은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있지만, 강사님은 외부에서 오셨기 때문에 정확히 볼 수가 있습니다. 강사님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진단하고자 했던 겁니다.

 

강사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가 많은 도전을 받고 갑니다.' 교회가 고쳐야 할 것보다는 열심히 헌신하는 우리 교우들 모습에 감동이 되셔서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대로 꾸준히 하면 됩니다.' 부흥회에 참여하여 헌신하는 마음 그대로 하면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이번 부흥회는 강사님도 은혜를 받을 만큼 특별한 집회였습니다. 그만큼 모든 교우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 통로가 두 가지이잖아요. 좋은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받기도 하고, 좋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에 때로는 좋은 이야기를 통해서 교훈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서 양육하듯이, 하나님은 강사님을 통해서 주님을 잘 섬겨서 복 받은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하셨고 하나님을 멀리해서 벌받은 교훈을 통하여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사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깨닫고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서 복 받은 이야기를 하면, '아! 저렇게 신앙 생활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구나. 나도 저렇게 신앙생활을 해야겠구나' 생각하지요. 하나님을 멀리 한 이야기를 하면 저렇게 하면 망하는구나 이런 교훈을 받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지혜롭기 때문에 어떠한 말씀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목요일 부흥회 전야제 때에 말씀드린 것처럼 금을 많이 캐셨지요. 금 속에 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금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돌을 캐지 말고 금을 캐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모든 부흥회가 마찬가지이지만 돌도 많지만 금도 있습니다. 저도 부흥회 가서 설교를 하지만 저의 설교에도 돌도 많지만 금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이번 집회를 통해서 금을 캐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은혜를 주셨을까 생각했습니다. 창립10주년을 계획하게 하셨고 부흥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한 마디로 말하면 은혜를 누리라고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서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스승이 학생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것은 직장과 인생에서 써먹으라고 주듯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써먹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하늘의 것을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한 삶을 살라고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은혜를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 부분에 아주 강합니다. 집회가 있다고 하면 얼마나 열심히 사모합니까? 너무 쫓아다녀서 걱정이잖아요. 사모하니까 은혜를 받지요. 엄청난 은혜를 받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고 맙니다. 은혜 받아서 펄펄 뛰기만 합니다. 받은 은혜를 누릴 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 성숙이 안 됩니다. 은혜는 누리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누릴 때에 신앙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고, 성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은혜를 누릴 때에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은혜 받은 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마음 그대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은혜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왜 부흥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잖아요.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찬양을 부르다가 가사가 너무나 좋은 거예요. 이 가사 대로 살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지요. 그 마음 그대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은혜를 누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면서 살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은혜가 열매로 맺어져서 은혜가 갑절이 됩니다. 성경에는 30배 60배 100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사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그냥 받으면 우리가 깨닫지를 못하니까, 하나님은 먼저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이 순종하면 그 때에 복을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순종을 통하여 복을 주십니다.

 

어느 교인이 첫날 집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교인인데 오셔서 은혜를 받았어요.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기도하고 있었던 문제에 대해서 3일간 금식기도를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오더랍니다. 이 교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받아드렸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로 금식을 했는데, 3일 금식기도를 하고는 얼마나 기쁘고 즐겁던지,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답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누릴 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받은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는데 그 마음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좋은교회 모든 교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는 누리기만 하세요. 부지런히 누리세요. 누리세요. 할렐루야! 은혜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복이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받은 은혜를 누리지 않으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누리지 않으면 은혜는 소멸하게 되어 있어요. 은혜를 아무리 많이 받았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은혜를 아무리 많이 받았어도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은혜는 누릴 때에 은혜가 되는 거예요.

 

우리 주위에 보면 은혜는 받았는데 좀 수상한 사람이 있지요.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마음에 품고만 있어요. 신앙생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고...,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면 빠지는 법이 없고..., 받지 않은 은혜가 없어요. 그런데 은혜를 말로만 해요. 이런 사람들에게 정말로 은혜가 있나요? 은혜가 없어요. 껍데기 은혜만 있어요. 은혜의 열매가 없어요.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LA에서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고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복권에 당첨되게 해 주세요. 당첨되기만 하면 이런 저런 일을 하겠습니다" 매주일마다 새벽기도마다 철야기도마다 온 힘을 다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당첨되지 않는 겁니다. 어느 날에도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복권에 당첨되게 해 주세요. 당첨되기만 하면 이런 저런 일을 하겠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더랍니다. "김 집사, 복권 좀 사라. 복권을 사야 역사를 하든 말든 하지..."

 

우리가 복권을 사지도 않고, 교인들은 복권 사면 안 되는 거예요. 복권을 사지도 않고 당첨되게 해 주세요. 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하나님, 나에게 역사해 주세요." 하나님이 역사하실까요? 안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 그대로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감동 받은 대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 받은 것만큼 역사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은혜를 누리는 것만큼 역사하시는 거예요. 은혜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크게 역사하시고, 은혜를 누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저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오늘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데에 열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이런 복이 없어요.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하나님이 주신 마음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는데..., 얼마나 좋아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인생의 진도도 나갈 것이고, 나의 실력보다 월등할 것이고, 내 능력으로는 맛보지 못할 기가 막힌 것들을 체험하며 살 것이고, 삶의 새로운 길이 열려질 것이 아니겠어요. 수지 맞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 어떤 은혜를 받으셨나요?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주셨나요? 교회에 자꾸만 오고 싶은 마음을 주셨어요. 자주 오시기 바랍니다. 예배 때마다 기도회 때마다 그냥 오세요. 모인다고 하면 그냥 오세요. 누릴 때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이 생기셨나요? 영적으로 너무나 약하니까 기도하라고 성령께서 마음에 속삭이시나요. 기도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시면 됩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겁니다. 기도의 맛을 보게 되실 겁니다.

 

헌신하는 마음이 생기셨나요? 교회를 다닌다고 다녔는데, 하나님께 드린 것이 별로 없어요. 시간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몸도 거룩하게 드리지 못하고, 물질도 온전하게 드리지 못해서 마음에 안타까움이 생기셨어요. 헌신하시면 됩니다. 시간으로 몸으로 물질로 헌신하시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셨나요? 그 동안 나를 위해서만 살았어요. 교인들 사정은 둘러보지를 않았어요. 챙기지를 않았어요. 부흥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인들을 나도 사랑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으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숨기지 마시고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으로 교인들을 사랑할 때에 사람을 얻는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셨나요? 내가 잘못 살았구나. 신앙생활을 너무나 편하게 했구나. 교회만 들락거렸구나. 교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구나. 자신의 삶을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이 들면 회개하시면 됩니다.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을 찾아가서 내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용서를 빌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마음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갈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방해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은혜를 받아서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놔두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누리도록 가만히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부단히 방해하고 해방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누리려면 이것을 알고 미리 대처하고 나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누리는 데에 방해하는 것은 계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음에도 순종하지 못하여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계산을 하지 않는데 유독 신앙생활 부분에서는 온갖 계산을 다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계산이 얼마나 정확한지 모릅니다. 맞는 계산을 하면 좋을 텐데 틀리는 계산을 하고는 맞는다고 착각하고 지냅니다. 믿음의 계산이 아니라 이성적인 계산, 세상적인 계산을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순종하지도 못하는 것이고 은혜가 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에는 처음부터 남도록, 이익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세요. 성경 어디에도 처음부터 남는 계산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지요. 이삭이 풍년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내려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흉년든 땅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그래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농사를 짓습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성경에 보니까 흉년든 땅에서 백 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에 하루에 한 바퀴씩 돌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시지요. 도무지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 그대로 하지요. 어떻게 되었나요? 철옹성 같은 여리고 성이 단번에 무너졌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익이다. 남는다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미련한 것 같고, 말도 되지 않고, 손해나는 것 같은데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보았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계산하지 않고 순종하여 누릴 때에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실 때에 이제부터 아예 손해라고 생각하고 사세요. 주님의 일은 내가 손해다. 손해도 그런 손해가 없지요. 시간을 내니 시간이 손해이고 십일조를 하니 물질의 손해이고 몸을 드리니 몸이 축나고..., 어느 것 하나 처음부터 이익이 되는 것은 없거든요. 그러니 아예 주님을 위한 일은 손해라고 생각하세요. 그게 믿음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의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손해는 보지 않으려고 하니까 은혜를 받아도 은혜가 되지 않는 것이고, 은혜를 받아도 은혜를 누릴 줄을 모르는 것이고, 누릴 줄을 모르니 복을 받지 못하는 거예요.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손해라고 생각하고 덤벼드는 믿음이 오늘부터 여러분의 마음에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고 삶이 달라졌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성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전에 남편 다섯이 있었어요. 과거의 행실이 복잡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거예요. 그런 이유로 해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어요. 물을 길러 가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뜨거운 햇볕이 비칠 때에 나갔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복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여인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워서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28절에 보니까 물동이를 버려 두고..., 여러분, 이 표현을 이해하시겠어요. 사람들을 피해서 물을 길러 온 여인인데, 구세주를 만나고 나서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외쳤다는 거예요.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받은 은혜를 누렸습니다. 구세주를 만난 감격을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하여 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누릴 때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저녁에만 모이는 약식 부흥회는 여러 번 했지만 이번과 같이 새벽 오전 저녁, 3일 동안 여섯 번의 집회를 갖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부흥회를 하는 과정에서 괜한 걱정을 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완벽하리만큼 깔끔하게 부흥회를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근사하게 감당하셨어요. 이번 부흥회는 우리에게는 어떠한 사역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열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부터는 부흥회를 통하여 받은 은혜를 누리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려면 우리의 힘과 능력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누릴 때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마음, 성령께서 주신 마음 그대로 누리셔서 여러분에게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부흥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를 누릴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주일마다 이 제단에서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누리도록 역사해 주시고, 이번 한 주간도 누림의 은혜가 충만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영혼 섬기기

이동규 목사

저는 어릴적 어머님을 따라 은사부흥 집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돈암동 미아리 고개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유명한 부흥강사로 본교회의 부흥회를 연속으로 인도 하고 있었습니다. 집회가 한 창 진행될 때에는 능력이 나가는데 박 목사님이 손가락으로 쉭~ 하고 능력을 내보냅니다. 그러면 능력이 나가는 그 줄 방향의 사람들은 다 넘어지며 방언하고 입신하고 진동하고 병 치유 받습니다. 더 뜨거워지고 성령이 충만해 지면, 목사님은 뒤로 돌아서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쉭- 하고 능력을 내 보냅니다. 그러면 그 머리 방향의 사람들은 다 넘어지며 방언하고 입신하고 진동하고 병 치유 받습니다 그 어린 시절에 저는 충격이었습니다. 야, 주의 능력 있는 사자가 되면 저렇게 되는구나. 나도 커서 저렇게 능력 있는 불의 사자가 되어야지. 이렇게 다짐을 했더랬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보니까 별로 부러워할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지상에 계실 동안에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에게 몰려 왔지만 한 사람씩 고쳤습니다. 몇 천명을 주~욱 세워놓고 그냥 말씀 한 마디면 몇 천 명이 병 고침을 받았을 터인데, 예수님은 고집스레 수공업적인 방식을 고집하셨습니다. 제가 성경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병치유 사건의 기사는 성경에 한 20번 가량 나옵니다. 그런데 2번을 제와하고는 전부 한 사람씩 고쳤습니다.

문둥병자(눅5:12)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 고침(눅5:18) 베데스다 못가 절름발이(요5:2) 손 마른자(눅6:6) 백부장의 종(눅7:10) 나인성 과부 아들 살림(눅7:12) 귀신들린자 고침(눅 8:28) 베드로 장모 열병(마8:14) 야이로의 딸 살림(마9:23) 혈루병 여인(눅8:48) 수로보니게 여인딸 고침(막7:25) 귀머거리 벙어리 고침(막7:32) 벳세다 소경 고침(막8:22) 귀신들린 소년(막9:17) 예루살렘 소경(요9:1) 나사로 살림(요11;1) 귀신들려 꼬부라진 여인(눅13:11) 소경 바디메오(막10:46) 두 소경 고침(마10:27) 열 문둥병자(눅17:12)

이 중에서 예수님이 두 소경과 열 문둥병자 치유사건을 빼고는 전부 한 사람씩 고쳤습니다. 천하의 예수님이 한 사람씩만 상대하시다니. 이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사역의 대부분인 병치유 사역에 한 사람씩 상대하셨습니다. 물론 설교를 하시거나 가르칠 때는 5천명 군중이나, 12제자를 상대하시기도 했지만, 한 생명을 얻고자 할 때, 한 생명을 병 고칠 때는 한 사람씩 상대하셨습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인격적인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물량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상대화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상화 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곧 나 한사람이 천하인 것처럼, 내 한 사람이 곧 세상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시고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진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성경본문에도 이와 같은 한 생명 사랑의 예수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을 지나다가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쁜 와중에도 수가성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온 시간과 정렬을 쏟아 지성(至誠)을 다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부정한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장시간의 대화, 끈질긴 노력, 영혼을 두드리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 지성을 다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대단한 열정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혼혈을 해버린 사마리아인들을 거의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까닭에 상종하지도 않고 부정한 사람취급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 ” (9절) 이건 일종의 모욕입니다.

이런 장벽을 뚫고 간 거예요. 한 여인을 구원하겠다는 열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끈질긴 대화 시도 끝에 먹는 물에서 영원한 생수의 이야기로, 다음에는 남편 이야기로 그리고 여인의 목마른 삶과 욕망의 삶에 대한 고단함에 관한 이야기로 진리의 핵심에 관한 이야기로 끈질기게 접근합니다. 형이하학적인 먹는 물에서 형이상학적인 영생의 샘물 진리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어느덧 상승했습니다. 기막힌 맞춤형입니다.

물, 야곱, 목마르지 않는 물, 진리의 샘물, 남편, 예배, 메시야! 이렇게 일곱 단계에 걸쳐 대화의 차원을 끌어 올립니다. 두레박 우물물에서 메시야까지 이끌었습니다. 대단한 정렬이십니다. 상종하지 못할 여자 남편이 다섯이나 있는 부정한 여인을 상대로 맞춤식 끈질긴 대화, 한 영혼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한 나절의 시간을 다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아마 혼신의 힘을 다하여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심정으로 이 만남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영원이냐, 찰나냐? 멸망이냐 구원이냐? 슬픔이냐, 희열이냐? 허깨비의 길이냐, 진리의 길이냐? 이 기로, 이 백척간두에 서서 이 만남을 이끌었습니다. 한 개인을 향해, 맞춤형으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도매금으로 넘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개인 소매형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기성품 취급점을 하지 않습니다. 완전 개인 맞춤형 양복점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전력투구하십니다. 나 개인의 사정과 형편에 맞게 만나주십니다. 나의 성격과 장단점을 잘 아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게 성장하게 하시고 그렇게 꽃 피도록 하십니다. 대단한 은총입니다. 까닭에 오늘 나의 나됨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나 한 사람에게 전력투구 하십니다.

 

주님은 나 한사람만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나 한사람을 위해 전력 투구하셨습니다. 부속품이 아닌 전체로 취급하셨습니다. 물건이 아닌 천하를 주고도 못할 고귀한 한 영혼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이 돋아나고 기쁨의 샘이 솟아 날 때까지 나를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저는 특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경 구절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1)”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가장 좋아 하는 말은 “끝까지”입니다. 끝까지(에이스 텔로스)는 무한히, 완벽하게, 포기하지 않고 이런 뜻이 잇습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죽도록, 목숨 바쳐서 사랑하십니다. 한 때 하고 마는 사랑 아닙니다. 이용해 먹기 위한 사랑도 아닙니다. 무늬만 사랑인 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실망시켜도 부족해도, 거절해도 끝까지 사랑하는 겁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거절해도, 내가 배반해도, 내가 못나도, 내가 허랑방탕해도, 내가 죄를 저질러도, 내가 패망해도, 내가 몹쓸 짓을 해도, 내가 변덕을 부려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요즈음은 이런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우리 교우들을 끝까지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하기 힘든 무서운 기도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저도 흉내를 내보려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기쁨을 터트리러 갑시다

 

그 결과 한 여인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한 숨에서 기쁨이 샘솟아 올랐습니다. 이 여인은 참 진리를 발견하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는 기쁨이 샘솟아 올랐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내리 달려갔습니다.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4:28)

물 길러 가던 여인이 물동이를 내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내려갔다는 것은 무엇 말입니까? 그 만큼 기쁨이 컸다는 거지요., 그만큼 새로운 진리의 발견이 충격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혼자 간직하기에는 벅찼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발견한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기쁨이 있습니다. 죽을 목숨이 살아난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기쁨이 있습니다.

수학 문제를 하나 풀어도 기쁜데, 인생 문제가 풀렸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않던 병이 나아도 기쁜데,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만나도 기쁜데,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기쁘니까 혼 자 간직하기에는 너무 벅찼던 것입니다. 이 기쁨을 터트리는 것이 복음증거입니다. 이 기쁨을 터트리는 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기쁨을 터트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딸의 삶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 버린 자가 죽어 버렸는데, 나는 잘 먹고 잘 살고 그 은혜 묻어두고 지낸다면 말도 안 되지요. 배은망덕 중에 상 배은망덕일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울면서 울면서 갚으려고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그 사랑 갚을 길이 없어 울면서 울면서 다녀야 합니다. 이것이 기쁨의 발원지, 행복의 발원지, 은총의 발원지 아닙니까? 이런 삶을 삽시다.

구원은 간단합니다. 구원은 순식간입니다. 구원은 아주 초보적인 것입니다. 구원은 유일회적인 것입니다. 구원은 평생을 거쳐 달성하는 과제가 아닙니다. 그저 어느 한 순간의 회개로 이뤄지는 단 일회적인 사건입니다. 구원을 위해 평생 노력한다는 것은 율법입니다. 구원 얻은 자의 평생 과제는 사랑뿐입니다. 구원 그 다음에는 사랑만 남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면 복음증거가 되고요, 육신을 사랑하면 사랑의 실천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일평생 사랑하며 사는 일만이 과제로 남습니다. 이것만이 우리 필생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 필생의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 필생의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사랑하며 삽시다. 복음증거 사랑실천, 영혼사랑 -생활사랑, 영혼 섬김-생활 섬김, 영혼의 빵 공급-생활의 빵 공급. 이것만이 구원받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필생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누리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환한 빛된 삶이 또 하나 있습니다.

복음증거를 하다가 보면, 우리보다 더 빛난 자들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을 입은 자가, 뒤에 오는 자가 더 크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안드레와 베드로, 아나니아와 사울, 세례요한과 예수, 셜리반과 헬렌켈러, 록펠러의 어머니와 록펠러.. 참 많습니다.

까닭에 우리는 사랑의 영광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이 큰 역사를 일으킵니다. 사랑의 씨앗을 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사랑의 씨앗을 심으면 얼마나 풍성한 결실이 열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다 일으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씨앗을 심을 수는 있습니다. 씨앗을 심는 자의 위대함을 맛봅시다.

우리가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의 빚, 일평생 갚아도 못 갚을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빚은 주님의 삶을 본받음으로 갚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지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지요.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행동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예수의 삶을 복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증거 사랑의 실천입니다.

저희는 이제 내일부터 100일 간 한 영혼 사랑하기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사랑에 어눌한 저희가 이제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기만 한 저희가 이제 사랑 주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폭포수처럼 받고도 가두어 놓은 저희가 이제는 사랑의 발원지가 되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진리의 삶의 스타일로 내 인생을 바꾸는 것은 연습함으로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살아서 무얼 그리 많은 업적을 남기겠습니까? 재물을 쌓고, 명성을 얻고 학식을 쌓고 재능을 빛낸다 할지라도 사랑의 발원지가 되지 못 한다면 울리는 꽹과리 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한 영혼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다면 허망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한 영혼을 제대로 섬겨 봅시다. 한 영혼을 제대로 사랑해 봅시다. 이윤의 동기나, 대상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 봅시다. 많이도 말고 주님처럼 한 영혼만 끝까지 사랑해 봅시다.

그가 변하여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는 나보다 더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는 나보다 더 멋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는 나보다 더 활짝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는 나보다 더 빛날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 로 뛰어 내려갈 정도의 기쁨을 전달해 봅시다.

그리고 그대의 영혼은 기쁨이 두 배나 되시기 바랍니다.

 

 

 

 

 

와서 보라

김동호 목사

 

사마리아 땅 수가라는 마을, 따가운 햇살로 인적 드문 낮 12시. 사람들은 그늘을 찾아 쉬고 있거나 집안에서 식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 향해 걸어갑니다. 그 우물은 옛날부터 “야곱의 우물”이라 불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우물가는 마을 사람들이 매일 최소한의 사회적인 교제를 나누는 장소입니다. 서로의 일상사를 묻기도 하고 자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동네의 돌아가는 이야기들도 수집할 수도 있는 장소입니다. 때문에 마을 아낙네들은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시원한 시각이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우물가에 모여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왕래가 없이 조용한 이 시각을 기다린 그녀에게는 깊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알고 보니 무려 다섯 남편과 헤어져야 하는 아픈 과거가 있는 여자입니다. 아무리 정식 결혼이라 해도 3번 이상은 수치스런 일입니다. 더욱이 지금 함께 사는 남자는 정식으로 결혼한 남편도 아닙니다. 믿고 사랑하는 대상이 자꾸 달라졌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서로 의지하는 인생의 반려자가 바뀐 겁니다. 그 정서적 손상은 얼마나 컸겠으며 그 상처는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더욱이 수가 마을 사람들은 이 여인을 gossip 거리로 전락시켜버립니다. “한두 번까지는 동정하겠는데 사내를 다섯 번이나 갈아 치웠으니 저 여자에게 더 큰 문제가 있는 거야!”이 여인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눈을 흘기면서 상종을 꺼립니다. 교제의 단절! 남편의 버림을 받고 사회의 버림까지 받게 되니 이 여인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물가를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퍽이나 외로워 보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따돌림 받은 상처, 이웃과 벽을 쌓고 살아가야하는 아픔으로 그녀의 눈동자와 얼굴에는 이미 생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녀의 어깨는 고달픔의 무게로 축 쳐져 보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조차도 내리누르는 그녀의 무거운 짐을 결코 가볍게 해주지 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물을 찾는 그녀가 목말라한 것은 사실 육신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아파하고 신음하는 그녀의 영혼입니다. 여러분 느낄 수 있으십니까? 이 기갈 들린 영혼의 고통을! 그렇게 도착한 우물가에는 한 낯선 청년이 앉아 있습니다. 오랜 여행 때문인지 지쳐 보이는 모습입니다. 이 낯선 청년이 “물 좀 주시오”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흠질 놀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의 행색과 말투를 미루어 보니 분명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 온 것도 흔한 일이 아니지만 사마리아 사람인 자기에게 말을 건넨 것도 의외입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부정하다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대인을 사마리아 사람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종교적, 사회적으로는 담을 쌓고 사는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벽을 뛰어넘고 있는 이 낯선 청년은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이상한 그의 태도는 계속됩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물 좀 주시오 하던 사람이 이제는 도리어 자기가 생수를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녀가 묻습니다. “아니 당신에게는 물을 길을 그릇조차 없는데 무슨 수로 이 깊은 우물물을 나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이 낯선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 “이 우물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니 그런 물이 있다면 나도 좀 주세요. 다시는 물 길러 올 필요가 없겠네요.”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약간은 빈정거림이 섞여 있습니다. 그때입니다. 이번에는 갑자기 남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닙니까? 대화의 내용은 이제 도덕적인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인은 당황했습니다. 수치스런 과거가 들춰지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입니다. 왜 이 사람은 남의 아픈 곳을 건드릴까? 참 싫다. 그녀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제게는 남편이 없어요.” 말합니다. 그 때 이 낯선 사람의 입에서는 더 기막힌 음성이 들려옵니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맞다.” “아니, 나를 다 알고 있는 이 낯선 유대 청년!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나하나 짚어 오시는 이분은 하나님의 선지자임에 틀림없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게 된 이 여인은 이제 신앙적이고 영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온 종교를 비교합니다. 두 종교가 주장하는 하나님 만나는 장소가 다르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이 유대 청년은 놀라운 말씀을 들려줍니다. 21-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임했다. 새 시대가 도래했다. 아버지가 그러한 자들을 찾아다니고 계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인은 그 같은 일은 메시아가 오셔야만 벌어질 수 있다고 대꾸합니다. 그러자 이 선지자는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드러냅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절)” 여러분! 그녀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을 찾아오신 겁니다! 주위 모든 사람이 이 여인을 피하고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여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목마른 인생을 살 필요 없도록 생수까지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꺼이 받아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평생 처음 자신의 전 인격이 받아들여지고 용납되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우리를 꺼려하고, 배척하며 심지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끄럽고 자격 없는 우리들을 귀하게 받아주십니다. 지워 버리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우리의 수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괜찮다 하시며 찾아오십니다. 벗으려야 벗을 수도 없는 무거운 짐 하나님은 맡아 주마하시며 다가오십니다. 지금까지 목말라하던 그녀의 영혼이 일시에 해갈됩니다. 얼굴에는 생기가 돕니다.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감사 찬양이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수가성의 회심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만나 회심한 경험이 있습니다. 혹시 갑작스런 질병으로 자신의 생명이 꺼질지도 몰라 불안해하다가 기적같이 고쳐주신 주님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잘 자라던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며 부모한테 반항하고 신앙마저 버린 것 같아 속을 푹푹 썩였는데 언젠가부터 다시 건전하게 생활하도록 역사하신 주님의 손길을 경험한 분도 계십니다. 사업에 완전히 실패하여 캄캄한 낙오자가 된 것 같았는데 희한하게 재기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을 만난 분도 계십니다. 이 수가성 여인처럼 사회와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는 것 같은 괴로운 삶을 살다 모든 것을 이해해 주시고 품어주시는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신 분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평소 좋아하던 친구의 권유로 교회생활을 시작했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참으로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된 분도 계십니다. 어떤 설명도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했는데 성경을 읽다가 그 모든 고민이 일순간에 풀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분도 계십니다. 또한 나름대로 성경도 읽고 성실하게 교회 봉사를 하다가 어느 날 기도 중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헌신하는 분도 이 자리에는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소위 남들이 말하는 특별한 체험은 없어도 말씀 공부하다 보니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깨닫고 잔잔하면서도 꾸준히 주님을 섬기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참 다양하게 우리는 주님을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외로운 인생길에 우리는 결코 고아와 같이 내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도 없이, 주변에 함께 하는 이도 없이 아이 혼자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속에 남게 되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하지만 부모님과 같이 함께 관광지 동굴에 들어갔다 오면 평생 가장 재미난 추억거리가 될 겁니다. 여러분, 밀폐되고 갇힌 것 같은 인생길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사실 두렵지 않습니다. 저 시 23의 다윗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걷는 인생길은 아무리 캄캄할지라도 흥미진진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무슨 일을 보여주실 지 기대마저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실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털까지도 헤아린바 되셔서 나의 약점과 단점도 잘 알고 계시고 나를 진심으로 위하며 나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돕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잘 모를 그 때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대신 기도해 주고 계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경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과 상관없이 참 외로운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책임져야할 짐들로 인해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꼼짝없이 갇혀 낭패를 당하는 순간도 찾아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누구도 돌봐주지 않습니다. 꼭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이런 분들도 우리가 누리는 복을 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가만히 있질 않았습니다. 28절을 보니 여인은 이고 온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갑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예 달려갑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전달되어 온 생수로 인해 마음의 항아리가 차고 넘치니 머리에 이고 간 항아리가 더 이상 의미 없어졌는지 모릅니다. 그 동안 마음 텅 빈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녔습니다. 이제는 도리어 먼저 사람들을 만나 담대하게 말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29절).”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다닙니다. 사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만나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아, 내 인생을 바꾸어 놓으신 예수님을 와서 보시오! Come and See!” 그녀를 일찍부터 알아 온 수가성 사람들은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이 여인의 얼굴에 생기를 가져다주었는가?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인생이 살맛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게 했을까? 사람들은 궁금하기도 했을 겁니다. 30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예수님께로 몰려오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 이 장면은 장엄하기조차 합니다. 수가성 한 한 여인의 회심이 곧장 수가성 다른 사람들의 회심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조직신학적으로 장황하게 설명할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영혼을 품고 언젠가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이 여인처럼 사람들을 찾아가 오는 5월 27일에 열리게 되는 높은뜻 축제에 한번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서울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 일원에서도 몰려 온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된다면! 오! 이런 대 회심의 역사가 오는 5월 27일 생명축제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천국잔치일 겁니다. 눅 15:10에 의하면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저 영혼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힘듭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때는 우리가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나아오는 수가성 사람들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35절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자연법칙에 의하면 예수님 주변의 밭은 적어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모양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밭은 지금이 추수할 때입니다. 빨리 거두어들이라고 제자들에게 촉구하십니다. 한반도에는 순교의 피를 통해 복음의 씨가 뿌려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 손으로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할 영혼이 누구입니까? 우리와 함께 높은뜻 가족이 되어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함께 감당해갈 우리의 예비 가족은 누구이겠습니까? 주위에 한 영혼 한 영혼 살피는 한 주간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명의 양식

김영규 목사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

 

주님과 수가성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음식 잡수시기를 간청했습니다. “랍비여 잡수소서!”(31)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먹는 문제 때문에 꽤나 신경을 썼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눅9:12) 주님께서 수가성 우물에서 잠깐 쉬시는 동안에도 그들은 부지런히 음식을 구해왔습니다. 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든지 제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여전히 의식주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내놓을 때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32) 어! 누가 주님께 음식을 드렸지?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33) 제자들은 누군가 음식을 먼저 갔다 드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답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 여기서부터 얘기가 복잡해집니다. 무슨 말씀인지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눠야 될 양식이 바로 이 양식입니다. 제자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 양식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구해온 양식보다 더 중요한 양식. 우리가 반드시 먹어야만 될 양식. 주님이 가지신 양식. 그 양식을 우리는 얻어야 합니다. 이 양식이 뭘까요?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부터 두 부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첫째로 만드신 것은 육체입니다. 하나님은 흙을 재료로 아담의 육체를 만드셨습니다. 두 번째로 만드신 것은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숨결을 불어넣으실 때에 살아 움직이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hy:j; vp,n<”(생령 ;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인간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양식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육체의 양식입니다. 둘째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영혼의 양식입니다.

육신의 양식에 대해서는 누구나 말하지 않아도 다 잘 압니다. 사람마다 양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영의 양식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육체가 굶주리면 참지 못하고 어떻게 하든지 양식을 찾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주리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영혼이 굶주리고 있는지, 무슨 양식을 먹어야 되는지 잘 모릅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영혼이 굶어 죽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좀 어폐(語弊)가 있습니다.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굶주린다는 것은 곧 영혼이 계속 배고픈 상태에서 고통당한다는 뜻입니다.

영혼이 굶주리면 증상이 나타납니다. 세상 일이 아무리 잘 풀려도 기쁨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평안하지 않습니다. 人生無常 그저 허무를 느낄 따름입니다. 권력도, 재산도, 결혼생활도, 다 그저 그렇고 시큰둥합니다.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입니다. 오늘 혹시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까? 인생을 살아봤자 별 볼 일 없다! 그럭저럭 빨리 가는 게 상책이다! 그런 분이 있다면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세요.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양식이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32) 주님에게만 있는 양식, 주님만이 주시는 양식! 그 양식이 뭡니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 영혼의 만족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수가성 여인을 구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부정하게 여기는 여인이지만, 그 영혼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기꺼이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명 수행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이 구해온 양식이 주지 못하는 영혼의 만족을 얻으셨습니다. 육의 양식은 먹으면 또 배고프지만 하늘 뜻을 행하는 만족은 오래갑니다. 수가성 여인도 주님을 만남으로써 영혼의 만족을 체험했습니다. 그 결과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예수를 전하는 일은 더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체험했습니다. 복음의 만족, 복음을 전하는 기쁨! 영혼의 만족을 체험해 보세요.

우리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놀고먹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돈 많은 부모 만나서 유학 가서 공부하고, 재산 상속 받아 골프나 치고 여행이나 다니면서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나는 왜 가난한 부모를 만나서 이렇게 고생인가? 남편이라도 잘 만났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을 만나서 여행 대신 이사만 다니고.” 원망하지 마세요. 진정한 만족은 돈에 있지 않고, 놀고먹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명으로 일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노는 사람보다는 일하는 사람에게 만족이 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 빈둥빈둥 노는 학생보다 만족하고, 자수성가 한 사람이 부모 재산 물려받은 사람보다 만족합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남의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행복하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만족합니다. 전도 하는 사람이 전도 받는 사람보다 만족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맨손으로 교회만 오락가락하는 사람보다 더 만족을 얻습니다. 저는 이것을 “영혼 만족의 원리”, 혹은 “사명의 원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늘의 사명을 실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최고의 만족, 최고의 배부름 속에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은 사명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이런 명령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자식을 낳고 번성하는 것도 사명이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도 사명입니다. 말하자면 가정을 잘 세워가는 것도 사명이고, 자연을 잘 보존하는 것도 사명이고, 정치를 잘 하는 것도 사명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자녀 양육을 하나님의 사명으로 알고 잘 기르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못 이룬 욕망이나 대타로 이루려고 기르고 있습니까? 직업적인 일을 하면서 나는 지금 하늘의 사명을 수행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 수 없이 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십니까? 내 몸이 하나님의 소유인줄 알고, 건강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오래만 살고 싶어서 온갖 보양식만 먹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늘의 사명입니다. 인생을 사명으로 사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만족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추수하게 되었도다.

 

내 인생에게 주신 사명의 눈을 떠야 합니다. 주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눈을 들어 받을 보라!”(35) 눈을 들어 사명의 필드(field)를 바라보세요. 내가 일해야 될 일터를 바라보세요.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했습니다. 농부에게 밭은 사명의 일터입니다. 회사원에게는 회사가 사명의 일터입니다. 가정주부에게는 가정이 사명의 일터입니다. 학생에게는 학교가 사명의 일터입니다. 각 사람마다 자신이 속한 사명의 일터가 있습니다. 눈을 들어 내가 일하는 사명의 일터를 바라보세요!

거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 추수할 곡식이 보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인 탈무드에 의하면 일 년을 두 달씩 여섯으로 나눕니다. 파종기, 겨울, 봄, 추수기, 여름, 뜨거운 계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 수가성 주변에는 밀이나 보리가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보아 넉 달이 지나면 추수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해석에 난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밀이나 보리는 추수하기 넉 달 전에는 흰색이 아니라 초록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합니다.

첫째로는, 영적인 추수는 언제나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파종에서 추수까지는 넉 달이 걸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파종한 즉시 추수할 수도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말씀을 전한 즉시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 여자는 추수하기 힘든 영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천국 자녀가 됐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때를 기다리지 말고 즉시 영혼을 추수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가까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변명합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과연 그렇습니까?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넉 달을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느냐? 당장에 추수하라! 당장 곁에 있는 사람들을 추수하세요!

둘째로는, 주님은 보리나 밀밭을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보셨다는 뜻입니다. 수가성 여인의 전도를 듣고 몰려오는 사람들이 마치 흰 밭을 연상시켰습니다.(30절) H. V. MORTON은 이렇게 자기의 경험을 말했습니다. 그는 언젠가 예수님처럼 수가성의 야곱의 우물곁에 앉아서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것처럼 멀리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아랍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떼를 지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옷이 햇빛에 반사되어 굉장히 희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도 그런 장면을 보시고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보리나 밀밭을 보신 것이 아니라, 여인의 전도를 듣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농사에는 절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백성을 부르시는 인간의 추수에는 절기가 없습니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추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 추수보다도 사람 추수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불러들이는 추수만큼 더 보람되고 만족된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에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추수기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점이 바로 추수 시기이고, 우리 모두가 다 추수꾼들입니다. 눈을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세요. 얼마나 구원에 갈망하고 있습니까? 지금 곧 영혼 추수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다

 

우리는 영혼 추수에 부름 받은 사명자들, 즉 주님에게 고용된 품군들입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36-38)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몇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미 주님께 품삯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품삯이 뭡니까? 영생을 얻었습니다. 천국 시민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천국에 거처를 얻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미 받을 것은 다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주님이 명하신 추수에 나서야 됩니다.

둘째로, 영혼 추수에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따로 있습니다. 여기서 뿌리는 자가 누구며 거두는 자가 누구인지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볼 때에 뿌리는 자는 앞선 세대의 전도자들이요, 거두는 자는 그 다음 세대의 전도자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세례 요한은 씨를 뿌린 자요 제자들은 그 씨에서 난 열매를 거두는 자들입니다. 아무튼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뿌려서 내가 거두기를 갈망합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영혼 추수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른 것이 인간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 윤택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사람들이 뿌린 결과가 아닙니다.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린 결과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중동에 가서 일했습니다. 때로는 생명의 위협도 받고, 때로는 가정 파탄의 아픔을 겪어가면서 일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 속에 견디면서, 주당 60시간 80시간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따 먹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도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성도 한분이 몹시 섭섭해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몇 년이나 전도해 놓은 사람을 다른 교회 교인이 빼앗아 갔다는 거예요. 서운할 것 없습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위해 준비했고, 솔로몬은 건축했습니다. 성전 부지를 사 놓는 사람 따로 있고, 성전을 짓는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있습니다. 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으며, 노력하는 자와 그 노력한 것에 참여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법칙이요 원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만이 심고, 나만이 거두려는 탐심을 버려야합니다. 오늘 심고 오늘 거두려는 욕심도 버려야 됩니다. 부지런히 심는 자도 되시고, 거두는 자도 되십시오. 거기에서 참 만족이 옵니다.

셋째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합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36)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뿌리는 자들과 거두는 자들이 천국에서 함께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뿌리는 것과 수확이 동시에 일어나서 함께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뿌린 씨가 당장 수확이 되어 함께 거두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든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합니다. 세상일에는 노력하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를 때 난리가 납니다. 내 노력은 내가 거두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누가 뿌리고 누가 거두든지 함께 기뻐합니다. 38절 말씀에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38절) 제자들은 지금 앞선 사람들이 뿌린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앞서 노력한 사람들과 그 노력한 것을 거두는 자들이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반목하지 않고 함께 기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 추수입니다.

현재 내가 맡은 교회의 직분도 그렇습니다. 누가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 누가 칭찬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뿌리고 누가 거두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명으로 함께 기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뿌리는 자에게나 거두는 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사명으로 뿌리고, 사명으로 거두세요.

 

 

오늘 어떤 씨를 뿌리고 어떤 추수를 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왔을 때, 주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식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명 수행의 양식입니다. “내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 주님은 십자가에서 바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 주님은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가장 만족케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명 수행입니다. 인생을 사명으로 사세요. 가정생활도, 직업도, 교회 생활도 다 사명으로 하십시오. 마지못해 굴러가는 인생에게는 만족은 영원히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하늘 뜻을 수행하는 사명으로 사세요. 그러면 정말 만족한 인생이 될 겁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 품삯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받았습니다. 천국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천국 거처를 받았습니다. 품삯을 선불(先拂)로 받았으니, 이제는 영혼 농사에 참여하세요. 우리가 오늘 뿌리는 씨를 우리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거두게 됩니다. 先代의 열매를 우리가 거두어 누리듯이 우리의 후손도 우리가 뿌린 것을 거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번영에 대해 겸손해야 하고, 내일의 번영에 대해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리가 만일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우리 자손들은 거둘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거두는 일만 하지 말고 내일을 위해 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역사는 추수 작업입니다. 선대가 뿌리고 후대는 거둡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리세요. 영혼 추수에 헌신하세요. 영혼을 추수하는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사명입니다. 할렐루야!

 

 

 

 

영혼의 양식

오정호 목사

얼마 전 북한에서 귀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남한에서의 생활이 행복한가에 대한 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응답자 중 80%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남한의 금전만능주의와 불신풍조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렇게 갈망하던 자유를 얻고 새로운 제도와 환경가운데 살게 되었지만 그 가운데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정치적인 자유만으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물질, 지위, 명예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행복의 필수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영성에 참여하도록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삶이 역동적이 될 수 있고 인생의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한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동네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사이에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 그 인생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예수님과 대화 중에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고백합니다(25절).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임을 밝히십니다(26절). 이로 인해 한 여인의 생애가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마련해온 제자들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34절).

 

여러분, 믿는 자들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양식입니다(34절).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영의 차원이 있습니다. 이 믿음의 세계, 영의 세계가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는다면 그 성도의 삶은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치시고 허기지시며 목마르셨지만 또 다른 양식, 즉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참 인생답게 만들고,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구원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요6:38-40).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높고 확실한 뜻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뜻을 붙드신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앞세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그 뜻을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9:30).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으셨다면 더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믿는 자들의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비록 그가 처한 자리가 고난의 자리이며 물질이 궁핍한 자리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을 양식으로 삼는 자는 주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2. 영적 추수가 우리의 양식입니다(35절).

 

당시 유다 사람들은 이방인과 혼혈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대하였습니다. 사마리아는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우물가의 여인은 가정적으로 실패한 아픔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가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영적 추수의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마침내 이 여인을 통해 그 동네의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39절).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버려진 사마리아 성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방인처럼 여겨졌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아브라함의 거룩한 자손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영적인 추수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 중에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랑하는 남편과 시댁의 어른들을 위해 기도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의 동료를 위해 영적 추수의 열매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기도의 씨앗을 파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회교권에서, 불교권에서 영적 추수를 기대하며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당장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파종 후 넉달이 지나면 추수의 때가 오는 것처럼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35절).

 

새로남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 추수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물질, 지식, 비전, 성전건축 이 모든 것이 영적 추수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영적 추수의 열망을 가질 때 비로서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양식입니다(26절, 요 6:47-51).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6:48절). 예수님은 지구촌의 모든 인류의 양식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위대한 사건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역사 속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이 사건을 통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40년 동안 광야의 식탁을 베풀어주신 사건에 대해서는 대단한 자긍심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늘의 참 만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만나를 먹으면 내 몸이 건강하게 되듯이, 산 떡이 되시는 에수님을 먹으면 내 영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십니다(55절). 이는 신비중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내게 임하시고 내게 영적인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세상의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또다시 허기집니다. 그러나 한번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영적인 생명을 무한히 공급받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56절).

 

하나님의 뜻과 영적 추수,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우리 안에 깊이 깨달아질 때 우리는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뜻과 영적 추수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행복과 사업, 우리의 성전건축의 방향성을 대전과 중부권의 방황하는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뿌린 복음씨앗의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파종해야 합니다. 이 영적 추수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는 영적인 만족과 즐거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4:36절).

 

우리의 남은 생애와 우리 교회의 방향이 영적인 추수에 집중되기를 소원합니다.

 

 

 

주께서 즐기신 먹을 양식

윤영택 목사

남쪽 유다 지방을 떠나 갈릴리로 여행하던 주님은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시다가 곤하여 수가라 하는 성의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고 제자들은 마을로 먹을 것을 사러 들어갔습니다. 때는 낮 12시였고 사람들은 한 낮의 더위를 피하여 시원한 그늘을 찾아 쉬고 있을 시간에 수가 성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물동이를 들고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그 시간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 영생하는 물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않았던 큰 구원의 기쁨이 이 여인에게 임하였고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메시야를 발견하고 기쁨에 넘쳐 동네로 들어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소개하였고 사람들은 여인의 말을 듣고 우물가에 있는 예수께로 나왔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동네에서 사온 음식을 펼쳐놓고 예수께 드시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서로 말하기를 누가 선생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제자들 생각에 누군가 가져다 준 음식이 있을 리 없고 그 사이에 예수께서 드신 것이 없을 텐데 무슨 먹을 음식이 있다고 하시는 건가 궁금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아무 것도 드신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 시간 내내 쉬지도 못하고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곤하여 앉아 쉬시던 주님은 시장한 기색도 보이지 않으시고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먹을 양식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제자들 몰래 숨겨둔 비상식량이라도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 제목을 ‘주께서 즐기신 먹을 양식’ 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특별한 음식이라도 있다는 말일까요?

 

예수께서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신 것은 어떤 특정한 음식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리킨 말씀이었습니다. 물을 길러 나온 여인에게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생수를 말씀하신 것처럼, 점심 식사거리로 음식을 준비해 온 제자들에게는 영생하는 양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는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 설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양식’은 입으로 먹는 음식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간 사이에 주님이 이미 즐겁게 드신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셨으니 다름 아니라 바로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발견하고 기쁨이 넘쳐 마을로 달려들어가는 모습을 보시고 피곤함도 목 마르고 배고픔도 한 순간 다 잊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이 주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것을 보시고 기쁨으로 충만한 순간에 배고픔은 저 멀리 물러나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께는 점심식사 하는 일이 그리 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충만함이 육신의 고단함과 배고픔까지 만족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가뜩 시장한 자녀들을 위하여 정성껏 음식을 만든 어머니가 밥상에 둘러앉아 맛있게 음식을 먹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여 자신의 배고픔을 잊고 즐거워하는 광경입니다. ‘엄마는 안 드세요’ 물으면 엄마도 당연히 시장한데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배고픔도 잊은 어머니가 ‘난 괜찮다 난 안 먹어도 배가 부르구나. 너희들이나 어서 먹어라’ 하시는 듯한 광경입니다.

 

물을 길러 왔던 여인이 생명의 구주를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들어가는 모습과, 기뻐하는 그 여인 때문에 음식이 눈 앞에 있음에도 배고픔마저 잊어버리신 주님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음료와 양식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은 동일한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도 이와 똑같은 기쁨을 누리신다는 사실을 생각해봅시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5:7, 10).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서 나 때문에 고단함도 배고픔도 잊고 기뻐하신다 생각해보았습니까? 내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분을 내 삶의 주인과 왕으로 모셔드린 순간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사와 함께 기뻐하셨다는 생각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이렇게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고 기쁨으로 맞아주신다고 생각하니 우리 주님이 더욱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요한복음 6장27절을 보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니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하도록 허락하셨다’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질문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그때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신 참된 양식이 무엇인지 정리가 됩니다. 주님께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도록 하는 일이고, 제자들이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 분을 믿는 일이 참된 양식입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먹었다. 그 떡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참 떡을 주러 왔다.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내가 주는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로부터 즉시 반응이 왔습니다. ‘주여 이 떡을 우리에게 매일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구나’(요6:34-36) 하셨습니다. 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나의 살이로다’(요6:51) 하셨습니다. 자신을 가리켜 하늘로부터 내린 떡이라고 하자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으로 여겨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날 예수를 떠나고 다시는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떡을 가장 급하고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같은 경제위기에 대단히 민감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금 시장의 흐름을 날마다 살핍니다. 통장의 수입이 반 토막이 나는 것 때문에 한숨을 쉬고 시장 바구니를 줄여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떡은 무관심으로 지나치려 합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뭔가 더 소중하고 영원한 교훈을 얻으려 하기 보다는 당장 눈 앞에 닥친 물질세계의 고민부터 해결하려고 전전긍긍합니다. 경제위기와 비할 수 없이 중요한 내 영혼의 위기에 대하여는 무감각하여 언제나 이 다음에 이 다음에 하며 뒷전으로 밀쳐놓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이나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 범주에 속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더운 한 낮에 물 길러 나가야 하고, 배고프면 먹을 것을 사러 시장으로 가야 했습니다. 누구나 시작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영생하는 양식을 얻은 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시는 물 길러 우물가에 나오지 않았고 먹을 양식을 사러 시장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목 마를 때 한 잔의 시원한 샘물이 주는 즐거움과, 시장할 때 입으로 먹어 내 위장을 채우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이 정말 소중합니다. 그런데 즐거움의 크기와 깊이로 생각하면 내 영혼을 새롭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심이 더 기쁘고 풍성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이것을 발견한 즉시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에 너무 소중한 기쁨 때문에 물동이를 그 자리에 두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물을 함께 얻으러 나오라고 광고하였습니다. 이왕 우물가에 왔으니 물 한 동이 짊어지고 들어가 차근차근 설명을 해도 될 텐데 그럴 틈이 없이 먼저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이 여인을 보면서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됩니다. 샘물이야 조금 있다가 다시 와서 길어가면 되지만 영생하는 물은 지금 그리고 조금이라도 빨리 길어야 된다는 절박감이 이 여인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충만한 한 사람을 바라보고 계시던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마치 맛있는 음식 먹고 즐거워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그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하였고 순간 피곤함도 배고픔도 잊으셨습니다.

 

이후로 여인은 우물가에 나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첫 사랑의 감동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 길러 나가는 일이 어제까지는 마지 못해 해야만 하는 일상의 일이었습니다. 남편을 다섯씩이나 두었던 여자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싫어 사람을 피하여 뜨거운 한낮에 물 길러 나가야 하는 것이 너무 귀찮고 싫은 일이었는데 이제는 즐거움으로 물을 길러 나오는 일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주인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우리를 새롭고 기쁜 인생을 살게 합니다. 육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때로는 귀찮고 지겨운 일일 수 있습니다. 꼭 내가 이렇게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일까? 인생의 보람도 즐거움도 없고 마지 못해 정말 죽기 싫어 일하며 사는 그 속에 무슨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까요? 그런데 그 일상의 삶이 더 이상 지겹고 귀찮은 것이 아니라 기쁨의 자리로 변합니다.

 

공부가 즐겁고, 직장 생활이 즐겁고, 노동이 즐거우며,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는 일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즐거운 보람으로 변합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 생명의 주인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영이 그 안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삶이 즐겁고 기쁩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비록 삶이 벅차지만 너무 심각하고 근심스런 얼굴로 살지 맙시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 또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부릅니다. 그 편지에 사랑의 언어가 담겨 있고, 그 향기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그리스도의 냄새입니다. 이런 사명을 지닌 우리가 마지 못해 사는 것 같고,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이웃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하면 전도가 제대로 될까요? 당신이나 잘 믿으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기쁨입니다. 삶이 피곤하고 위기를 만나며 내 몸은 속속들이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샘 솟듯 솟아나는 주님의 생명과 그 기쁨은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나 이 생명을 발견하였고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처럼 교우 여러분에게 옥스포드가 주님을 모셔드리는 감동의 자리, 추억의 자리가 되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만난 주님이었으나 한 동안 잊고 살았던 분들이 있습니까? 삶이 피곤하여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없어지고 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이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맞나 하며 마음이 편안치 못한 분들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옥스포드가, 옥스포드한인교회가 지난날 주님을 만났던 우물가의 벅찬 감동과 기쁨의 기억을 되살리는 은혜의 자리가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속담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옳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씨를 뿌리고 넉 달이 지나야 추수를 할 수 있다’는 유대인 격언은 씨를 뿌리지 않고 추수하는 법이 없고 때가 되어야 추수를 한다는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뿌리지 않고 거둘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하시며 천국 창고에 거두어들일 충실한 알곡들이 벌써 세상 밭에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씨앗은 벌써 뿌려졌고 지금은 추수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추수하는 사람들이 품삯을 벌써 받고 영생을 위한 열매를 거두고 있는 중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함께 즐거워하게 되었으니 ‘한 사람은 씨를 뿌리고 다른 사람은 열매를 거둔다는 말이 참으로 옳다’고 하십니다. ‘씨 뿌리고 기르는 노력을 하지 않은 너희를 추수하러 보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에 동참하게 되었느니라’ 하셨습니다.

 

한 여인의 기쁨이 수가 성 온 동네 사람들의 기쁨으로 흘러 넘쳤습니다. 그 기쁨의 생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께로부터 복음의 씨앗을 받은 여인은 그 즉시 마을로 들어가 자기가 가진 그 씨앗을 사람들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들었고 하늘나라 복음 듣는 일이 너무 즐거워 자기들과 함께 머물기를 청하였습니다. 유대인을 자기 마을로 초청하는 일은 사마리아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청을 기쁘게 받아 그들과 함께 이틀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셨고 그 동네에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믿는 자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영혼들이 이처럼 알곡으로 익어가는 모습을 보시며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영혼을 추수하는 때가 가까워진 사마리아 들판을 바라보며 제자들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뿌리는 자가 있었고 이제 거두는 기쁨을 너희가 함께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즐기신 먹을 양식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는 일이 예수께서 즐기신 양식이었습니다. 곧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기까지 하면서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하시는 일 말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먹을 양식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와 신앙의 선배들이 뿌리는 사람들이었고 예수께서 열매를 거두러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뿌리는 분이셨고 제자들은 그 열매를 거두는 일에 함께 수고한 일군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복음의 씨앗을 세상에 뿌리는 자들이었고 그 씨앗이 지금까지 열매로 자라 오늘 우리가 그 열매를 거두는 일군들이 되었습니다.

 

요즘 신천지라는 이단 집단이 ‘추수군’이라는 이 좋은 용어를 독점하다시피 하여 우리 모두가 주의 추수군이라고 말하면 혹시 신천지 사람인가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어 참 아쉽습니다. 우리는 주께 부름을 받아 주님이 주시는 생명 양식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받은 그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하늘나라 창고에 들일 열매를 거두는 하나님의 추수군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기쁨을 주님과 함께 나누는 일군으로 살아갑시다. 우리 교회 안에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게 되어 너무 기쁘고 즐겁습니다. 한 사람이 주를 영접하고 돌아올 때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분은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즐거움에 참예한 사람들입니다. 이 기쁜 일들이 계속하여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수가성 사람들을 구원한 여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소식이야 말로 가장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하는 데, 용기가 없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감람산에 모인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먼저 성령부터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한 120명의 성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순절 날이 되어 갑자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담대하! 게 나가서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 두려움도 사라지고, 담대하게 나아가 그리스도의 증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한 번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 4절에 보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는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남자가 오천이면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적어도 만 오천 명 내지 이만 명은 될 것입니다. 굉장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교인들이 너무 많아서 열두 명의 사도들이 쩔쩔매고, 실수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일곱 사람을 집사로 세워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전무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져서 제자의 수가 심히 더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나 큰 은혜를 받으면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기쁨이 넘치고,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어집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소원이 생깁니다. 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으니까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장차 예수님 만날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가장 기뻐하실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내가 전도를 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을 하나하나 전도하여 교회에 데려가는데, 얼마나 기쁘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때 전도한 친구 중 한 명은 자카르타에서 큰 나이키 운동화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 선교사가 고아원을 운영하니 건축비 등을 후원하며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니 예수를 위해서 살고 싶은 소원이 생겨나고, 그래서 전도도 열심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은혜 받을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도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만 은혜 받지 말고,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데리고 와서 말씀 듣게 하시고 은혜 받을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 어른들보다 은혜를 더 잘 받습니다. 그 아이들이 은혜를 받으면 일생이 달라집니다. 이것도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마리아 수가성에 사는 여인이 수가성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받게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이 여인은 전도자로서의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사람이 전도하러 다니면,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만 가리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이 여인은 전도에 방해되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이혼도 다섯 번이나 하였습니다.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에 한 번도 결혼을 못하는데 이 여인은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나 봅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이 여인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별별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에 있는 지방 이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730여 년 전(주전 722년)에 앗수르 군사의 침략으로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가 앗수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앗수르 왕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또 그들이 점령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강제로 이주시켜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마리아 땅에는 이방인들이 와서 살게 되었고, 이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결혼함으로 결국 혼혈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말도 하지 않으려 했고, 개나 돼지와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야곱의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는데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시니 이 여인은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이 전도하려고 할 때에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 내가 전도한들 누가 예수를 믿을까?’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전도를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담대하게 수가성에 들어가 전도를 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했습니다. 메시아를 전하기 위해서 물동이도 버려두고 달려가 전도했습니다. 메시아를 만나니 너무 기뻐서 이 기쁨을 혼자 누리기가 아까운 것입니다.

이 여인의 전도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4장 28~30절을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과거를 다 아는 이분이 메시아가 아니냐 그러니 와서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엄청납니다. 30절을 보면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39~42절에 보면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보잘 것 없는 사람,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도 전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간증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 어떤 집사님이 계시는데 이분이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가 자기에게 늘 전도를 했지만, 이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친한 친구였지만, 예수 믿으라는 말만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60세가 넘었는데, 그만 남편이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남편이 죽음을 앞두게 되니까 이분이 당황했습니다. 그때 대학시절부터 자신을 전도하던 그 친구가 와서 남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병상에서 남편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구원받는 모습을 보고, 이분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다른 친구가 자기 남편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와서 복음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 안 되었고, 성경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그런 요청을 받으니까 무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요청을 했으니 병원에 가긴 했는데,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만 하다가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자신은 친구의 도움으로 남편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또 다른 친구가 자기 남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했는데도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핑계로 그냥 돌아왔으니 그 친구의 남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친구 남편의 병원으로 가서 자기 남편이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지, 자신도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지금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친구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설픈 전도였지만, 그 전도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전도할 줄을 몰라서 그냥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예수 믿고 천국에 갔으니 얼마나 아슬아슬 했습니까. 까딱 잘못했으면, 그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잘 것 없어도, 아는 것이 없어도, 자격이 없어도, 전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서투르고 한심합니까? 그럼에도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전도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예수 믿게 하시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면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가 전도해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전도하면 우리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이 생겨날 줄 믿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에 생겨납니다. 그런데 듣지 않고서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전도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해서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전도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일로 전도의 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4절을 보면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 됩니다.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식물인간으로 있는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신문을 보니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1983년 스무 살 때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서 23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아온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전에 의식이 살아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특수 키보드로 의사소통까지 가능해진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그는 “나는 계속 비명을 지르고 소리를 쳤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못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뇌 스캐닝 기술 덕분인데, 이 기술로 의식장애 환자의 40%가 의식이 있다는 것으로 판정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환자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해주고, 소망을 가지는 말과 사랑 고백을 해주고, 가족들이 안아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였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에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사도 바울이 받는 그 칭찬과 면류관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때 그 주위에 사도바울이 전도해서 구원받은 수백 수천 명의 영혼들이 있을 때 얼마나 기쁘고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 사람들을 보고 나의 기쁨이고 면류관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전도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많을수록 상급과 면류관이 크고, 영광이 클 줄 믿습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면 이 세상에서 백배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중국에 ‘송전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송전도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천국가라.’고 외치며 전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애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보십시오. 아버지 없이 고아가 된 자녀들을 축복하셔서 큰딸 송경령은 중국의 국부라고 불리는 손문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딸 송미령은 장개석 총통의 부인이 되었고, 아들 송자문은 재정장관이 되어서 한때 송전도의 자녀 3남매가 중국 전역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좋고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가장 귀하고 큰 상급과 영광을 받는 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금년도 다 지나고 12월 한 달이 남았습니다. 이 마지막 한 달 동안 총력해서 열심히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믿던지 안 믿던지 열심히 기도하면서 전도해 보십시오. 할 줄 몰라도 해보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전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수가성 사람들을 구원한 여인

요한복음 4장 28~30절 / 정필도 목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소식이야 말로 가장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하는 데, 용기가 없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감람산에 모인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먼저 성령부터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한 120명의 성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순절 날이 되어 갑자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담대하! 게 나가서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 두려움도 사라지고, 담대하게 나아가 그리스도의 증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한 번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 4절에 보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는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남자가 오천이면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적어도 만 오천 명 내지 이만 명은 될 것입니다. 굉장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교인들이 너무 많아서 열두 명의 사도들이 쩔쩔매고, 실수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일곱 사람을 집사로 세워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전무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져서 제자의 수가 심히 더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나 큰 은혜를 받으면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기쁨이 넘치고,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어집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소원이 생깁니다. 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으니까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장차 예수님 만날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가장 기뻐하실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내가 전도를 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을 하나하나 전도하여 교회에 데려가는데, 얼마나 기쁘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때 전도한 친구 중 한 명은 자카르타에서 큰 나이키 운동화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 선교사가 고아원을 운영하니 건축비 등을 후원하며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니 예수를 위해서 살고 싶은 소원이 생겨나고, 그래서 전도도 열심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은혜 받을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도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만 은혜 받지 말고,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데리고 와서 말씀 듣게 하시고 은혜 받을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 어른들보다 은혜를 더 잘 받습니다. 그 아이들이 은혜를 받으면 일생이 달라집니다. 이것도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마리아 수가성에 사는 여인이 수가성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받게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이 여인은 전도자로서의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사람이 전도하러 다니면,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만 가리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이 여인은 전도에 방해되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이혼도 다섯 번이나 하였습니다.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에 한 번도 결혼을 못하는데 이 여인은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나 봅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이 여인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별별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에 있는 지방 이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730여 년 전(주전 722년)에 앗수르 군사의 침략으로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가 앗수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앗수르 왕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또 그들이 점령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강제로 이주시켜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마리아 땅에는 이방인들이 와서 살게 되었고, 이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결혼함으로 결국 혼혈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말도 하지 않으려 했고, 개나 돼지와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야곱의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는데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시니 이 여인은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이 전도하려고 할 때에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 내가 전도한들 누가 예수를 믿을까?’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전도를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담대하게 수가성에 들어가 전도를 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했습니다. 메시아를 전하기 위해서 물동이도 버려두고 달려가 전도했습니다. 메시아를 만나니 너무 기뻐서 이 기쁨을 혼자 누리기가 아까운 것입니다.

이 여인의 전도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4장 28~30절을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과거를 다 아는 이분이 메시아가 아니냐 그러니 와서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엄청납니다. 30절을 보면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39~42절에 보면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보잘 것 없는 사람,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도 전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간증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 어떤 집사님이 계시는데 이분이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가 자기에게 늘 전도를 했지만, 이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친한 친구였지만, 예수 믿으라는 말만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60세가 넘었는데, 그만 남편이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남편이 죽음을 앞두게 되니까 이분이 당황했습니다. 그때 대학시절부터 자신을 전도하던 그 친구가 와서 남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병상에서 남편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구원받는 모습을 보고, 이분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다른 친구가 자기 남편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와서 복음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 안 되었고, 성경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그런 요청을 받으니까 무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요청을 했으니 병원에 가긴 했는데,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만 하다가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자신은 친구의 도움으로 남편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또 다른 친구가 자기 남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했는데도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핑계로 그냥 돌아왔으니 그 친구의 남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친구 남편의 병원으로 가서 자기 남편이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지, 자신도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지금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친구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설픈 전도였지만, 그 전도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전도할 줄을 몰라서 그냥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예수 믿고 천국에 갔으니 얼마나 아슬아슬 했습니까. 까딱 잘못했으면, 그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잘 것 없어도, 아는 것이 없어도, 자격이 없어도, 전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서투르고 한심합니까? 그럼에도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전도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예수 믿게 하시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면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가 전도해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전도하면 우리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이 생겨날 줄 믿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에 생겨납니다. 그런데 듣지 않고서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전도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해서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전도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일로 전도의 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4절을 보면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 됩니다.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식물인간으로 있는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신문을 보니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1983년 스무 살 때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서 23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아온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전에 의식이 살아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특수 키보드로 의사소통까지 가능해진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그는 “나는 계속 비명을 지르고 소리를 쳤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못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뇌 스캐닝 기술 덕분인데, 이 기술로 의식장애 환자의 40%가 의식이 있다는 것으로 판정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환자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해주고, 소망을 가지는 말과 사랑 고백을 해주고, 가족들이 안아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였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에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사도 바울이 받는 그 칭찬과 면류관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때 그 주위에 사도바울이 전도해서 구원받은 수백 수천 명의 영혼들이 있을 때 얼마나 기쁘고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 사람들을 보고 나의 기쁨이고 면류관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전도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많을수록 상급과 면류관이 크고, 영광이 클 줄 믿습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면 이 세상에서 백배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중국에 ‘송전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송전도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천국가라.’고 외치며 전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애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보십시오. 아버지 없이 고아가 된 자녀들을 축복하셔서 큰딸 송경령은 중국의 국부라고 불리는 손문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딸 송미령은 장개석 총통의 부인이 되었고, 아들 송자문은 재정장관이 되어서 한때 송전도의 자녀 3남매가 중국 전역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좋고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가장 귀하고 큰 상급과 영광을 받는 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금년도 다 지나고 12월 한 달이 남았습니다. 이 마지막 한 달 동안 총력해서 열심히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믿던지 안 믿던지 열심히 기도하면서 전도해 보십시오. 할 줄 몰라도 해보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전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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