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새벽공과와 설교

20210131 / 요 5:1-5 / 베데스다 못가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2.03|조회수975 목록 댓글 0

베데스다 못가

요 5:1-5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 5:1-5 / [베데스다 못에서 병을 고치시다] 그후 유대인의 명절이 되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 양문 가까이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행각 다섯이 세워져 있었다. 3) 이 행각들 안에는 절름발이, 맹인, 손발이 마비된 사람 등 수많은 병자들이 즐비하게 누워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 그것은 때때로 주님의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그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다 낫는다는 날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었다. 5) 거기 누워 있는 병자들 중에는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첫 번째 이적을 행하고, 이어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의 7대 표적 가운데 세 번째 표적으로 베데스다 못가에서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치신 이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1)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절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7대 절기(레 23:4-44)를 지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는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절기 외에도 부림절, 수전절도 지켰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명절이 어떤 명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예수님도 그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동행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고 혼자 올라가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올라갔을지라도 예수님만 언급한 것은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려 함에 있습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2-5) 양문(the sheep gate, 느 3:1; 12:39)은 예루살렘 성의 북편에 있는 문으로 양들을 성 안으로 들여올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그 양문 곁에 베데스다 못이 있었고, 거기에 행각이 다섯 개 있었습니다. 그 행각 안에는 많은 병자와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곳에 많은 병자들이 모인 이유는 주의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의술로는 고치기 어려운 병자들이 많았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베데스다 못 행각에 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서른여덟 해 된 병자는 그 기간이 명시된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적용: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베데스다 못 가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하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38년 된 병자는 현대인인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많이 아프지요?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파하고 있습니다. 영혼육이 모두 아픈 병자들입니다. 뉴욕의 생명 연장 연구소에서 45세 이상 된 사람 25,000명을 조사하였더니 단지 20% 만이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조사하니 일의 양과 휴식의 양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도 12살에서 20살까지는 지금 약 800만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약 40만 명이 살인, 강도, 절도, 음주, 폭행 등으로 경찰 신세를 졌던 이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모두가 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오직 치유의 답은 한가지 뿐~~

 

< 설 교 >

배려, 사랑의 다른 이름

요 5:1-18 / 이수영 목사

우리는 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있었던 일 속에서 예수님의 두 가지 행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베데스다 못가로 가신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온갖 병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정결법에 예민한 사람들은 가려 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 가신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며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안식일에 병자를 낫게 해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식일 범한다는 이유로 비난과 정죄와 박해를 받을 것이 뻔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정결법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한 병자의 고통을 끝내주시려는 배려가 앞섰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있었던 일 속에서 예수님의 언행과 대비되는 두 무리의 사람들의 언행을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목도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삼십팔 년 동안이나 앓던 사람이 깨끗이 나아 걸어가는 것을 보고도 기뻐하거나 축하하거나 감사하지는 않고 병 나은 사람에게 말하기를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본문 10절) 한 것입니다. 그가 답하기를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본문 11절) 하자 그들은 그에게 묻기를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본문 12절) 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못 고치는 병을 고친 데 대해 감사하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을 해서 안식일을 범하느냐고 비난하고 정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병을 고친 이가 예수님이심을 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행한다고 예수님을 박해하게 되었습니다(본문 15-16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꾸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습니다(본문 17절).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고 예수님을 아예 죽이려 했습니다(본문 18절). 그들에게는 오랜 세월 고통 가운데 사는 병자에 대한 배려나 그를 불쌍히 여기고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 무리는 베데스다 못가에 모여 있던 병자들입니다.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했습니다. 거기 모인 병자들이 다 그 나름대로의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불리한 신체조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치유경쟁이라 할 수 있는 생존경쟁에서 늘 쓰디쓴 패배와 좌절을 겪으며 무려 삼십팔 년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베데스다 못가에 모여 있었을 병자들의 심리상태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다 병이나 장애를 갖고 있었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낫고 싶은 갈망이 말로 다할 수 없이 컸으리라고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다 보니까 그들에게는 다른 병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마다 내가 먼저 들어갈 생각만 했지 우리 중 누가 더 불쌍하고 치유가 더 절실한지를 헤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삼십팔 년이 되어도 나을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다른 이들을 배려할 줄 알고 그래서 순번을 정해서 그 순서대로 물에 들어가게 함께 도와주었다면 삼십팔 년씩이나 물에 못 들어가서 고통의 세월을 연장하고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이에 대한 배려 없음이 자기를 포함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배려는 남을 생각하고 그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며 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배려, 그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 상대방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사는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는 사랑, 그래서 남을 불편하게 하고 부담스럽게 하며 불쾌하게 만드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제 아내가 “카톡”으로 보내준 이야기 하나 소개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 며느리가 쓴 시어머니 이야기인데 실화입니다.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있는 이 며느리는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전업 주부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때부터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습니다. 자연히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지 2년 만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만1년 만에 친정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어머니 건강도 걱정이었지만, 수술비와 입원비 걱정부터 해야 했습니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며 내일 돈을 융통해 볼 터이니 오늘은 푹 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다음 날, 친정어머니를 입원시키려 친정에 갔지만 그 어머니는 선뜻 나서질 못했습니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몇 개 있으니 4일 후에 입원하자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그녀의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은아(그 며느리의 이름입니다), 너 울어? 울지 말고 내일 3시간만 시간 내 다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그녀는 시어머니와의 약속 장소에 나갔습니다. 시어머니는 무작정 한의원으로 며느리를 데려갔습니다. 미리 전화예약을 했는지 원장님은 “간병하셔야 한다고요?” 하고 물으며 맥을 짚어보고 몸에 좋은 약을 한 제 지어주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또 며느리를 백화점에 데려가서 트레이닝복과 간편복 네 벌을 사주었고 선식도 사주었습니다. 솔직히 속으로 좀 답답해하고 있던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서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보다 간병하는 사람이 더 힘들어. 병원에만 있다고 아무렇게나 먹지 말고 아무렇게나 입고 있지 마라.” 그리고는 봉투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병원비 보태 써라. 네가 시집온 지 얼마나 됐다고 돈이 있겠니. 그리고 이건 죽을 때까지 너랑 나랑 비밀로 하자. 네 남편이 병원비 구해오면 그것도 보태 써. 내 아들이지만, 남자들 유치하고 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부부싸움 할 때는 꼭 친정으로 돈 들어간 거 한 번씩은 얘기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우리 둘만 알자.” 며느리는 마다했지만 시어머니는 끝끝내 그 봉투를 손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며느리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시어머니에게 기대어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2천만원이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그 도움으로 수술을 받고 치료도 받았지만 이듬 해 봄에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에서 오늘이 고비라고 했을 때 남편에게 전화한 그녀는 갑자기 시어머니 생각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에 남편보다도 빨리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의식이 없는 친정어머니의 귀에 대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우리 어머니 오셨어요. 엄마, 작년에 엄마 수술비 어머님이 해주셨어. 엄마 얼굴 하루라도 더 볼 수 있으라고...” 그러나 어머니는 미동도 없었습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지갑에서 주섬주섬 무얼 꺼내서 친정어머니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며느리와 아들의 결혼사진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사부인, 저예요. 지은이 걱정 말고 사돈처녀 정은이도 걱정 말아요. 지은이는 이미 제 딸이고요 사돈처녀도 내가 혼수 잘해서 시집 보내줄 게요. 걱정 마시고 편히 가세요.” 그때 거짓말처럼 친정어머니가 의식 없는 채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족들이 다 왔고 어머니는 2시간을 넘기지 못한 채 그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망연자실 눈물만 흘리고 있는 며느리를 붙잡고 시어머니도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만 집에 들어가시라는 데도 3일 내내 빈소를 함께 지켜주었습니다. 며느리에게는 친척도 없었습니다. 사는 게 벅차서였는지 어머니는 따로 연락 주고받은 친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빈소가 썰렁하면 가시는 길이 외로워.” 하신 시어머니 덕분에 어머니의 빈소는 3일 내내 시끌벅적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동생까지 잘 챙겨주었습니다. 가족끼리 외식하거나, 여행 갈 땐 꼭 며느리의 동생도 챙겨주었습니다. 그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또 다시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며느리는 “어머님, 남편이랑 따로 정은이 결혼 자금 마련해놨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 게요.” 하며 도망치듯 돈을 받지 않고 나왔습니다. 버스정류장에 다달았을 때 문자가 왔습니다. 며느리의 통장으로 3천만원이 입금된 것입니다. 며느리는 그 길로 다시 시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너무 죄송해서 울면서 짜증도 부렸습니다. 안 받겠다고. 시어머니가 함께 울면서 말했습니다: “지은아, 너 기억 안나? 친정 엄마 돌아가실 때 내가 약속 드렸잖아. 혼수해서 시집 잘 보내주겠다고. 나 이거 안하면 나중에 네 엄마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에게 혼자 하신 약속을 지켜준 것입니다. 며느리는 그 날도 또 엉엉 울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말하시기를 “순둥이, 착해 빠져가지고 어디에 쓸꼬. 젤 불쌍한 사람이 도움을 주지도 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야. 그리고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하고 울고 싶을 땐 목 놓아 울어버려.” 했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제부 될 사람이 그녀의 시어머니에게 따로 인사드리고 싶다 해서 시부모님과 며느리 부부와 동생네가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때 시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초면에 이런 얘기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사돈처녀 혼주자리에 우리가 앉으면 좋겠는데...” 언니는 사실 동생 결혼식 혼주자리에 자기 부부가 앉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가 다시 말했습니다: “다 알고 결혼하는 것이지만, 그 쪽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 친정 부모님 안 계시다고 말씀 안 드렸을 텐데... 다른 사람들 보는 눈도 있고....” 며느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시부모는 헤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네는 너무나 감사하다며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언니 시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부입장을 했습니다. 동생 부부는 언니 부부 이상으로 언니 시댁에 잘 해주었습니다.

그토록 며느리를 배려하며 많이 사랑해주셨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49제를 드리고 돌아온 날 그녀는 10년 전 시어머니와 했던 비밀 약속을 남편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그 때 친정엄마 병원비 어머니께서 해주신 거”라고.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어머니 그리움에 엉엉 울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아들이 둘 있습니다. 그녀는 생활비를 쪼개서 적금을 들고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해준 것처럼, 자기도 나중에 며느리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녀의 휴대폰 단축번호 1번은 아직도 시어머니입니다. 항상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녀는 오늘도 이렇게 다짐합니다: “어머님, 우리 어머님, 너무 감사합니다. 어머니 가르침 덕분에 제가 바로 설 수 있었어요. 힘들 시간 잘 이겨낼 수 있었고요. 어머님,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제가 꼭 어머니께 받은 은혜,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사랑하고 나누며 살겠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며느리에게 이런 사랑 한 번 주어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생각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아들 잘난 줄만 알지 남의 딸 귀한 줄은 모르고 며느리를 압박하고 핍박하고 구박하고 쪽박 깨는 무지한 시부모들 되지 말아야 합니다. 금지옥엽같이 자란 남의 집 딸 데려다가 종처럼 부려먹으며 툭하면 흉보고 욕하고 때리고 내쫓을 권리를 누가 부여했습니까? 자녀들이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함께 행복하게 잘 살기만을 바라야지 혼수 때문에 평생 며느리 미워하고 아들 힘들게 하며 살아서 되겠습니까? 혼수 타령하는 것은 자기 아들을 내다팔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짓에 불과합니다. 그러지들 맙시다. 며느리 둔 부모님들은 언젠가 며느리를 위해 요긴하게 쓸 사랑의 예금통장 지금부터 아들 숫자만큼 하나씩 마련하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얼마 살지 모르는 세상,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여한 없이 실컷 사랑하다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기에도 너무나 짧은 세월을 미워하고 헐뜯고 비방하고 싸우며 사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삶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내 식으로, 일방적으로 하지 말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사랑하는 우리가 됩시다. 사랑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기쁨과 이 세상 살 가치를 느끼게 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하나님을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pool)의 주변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양문은 예루살렘의 여러 개의 성문 중에 동북편에 위치한 문으로 양의 시장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양문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들어가는 사람들이 이 양문 근처에서 양을 사가지고 끌고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스데반 문이라고도 불리웁니다(느 3:1, 3, 12:39). 이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는데 못의 길이가 17미터가 되는 아주 큰 못입니다. 지금도 가면 연못 옆에 기념 예배당을 세워놓은 베데스다 연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못에 세상의 별별 환자들이 다 모여 왔습니다. 수 백명에 이르는 대부분 병자들은 난치병이나 말기 환자들로 삶의 끝자락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처절한 모습들이었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 등과 같은 무기력한 병자들, 아무런 힘도 없고 인생의 소망도 없으며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갖가지 고질적인 질병과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거기에 38년 동안 앓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연못가에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또 그가 그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지를 아시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환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5:7)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연못에는 민간에 널리 알려진 전설이 있었는데, 그 연못물이 움직일 때 그 순간 연못에 들어가면 어떠한 질병도 치유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38년된 환자는 막상 연못까지에는 누군가에 들려 실려 왔지만, 막상 그 연못물이 동할 때, 연못물에 데려가는 사람이 없다는 안타가운 호소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의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38년 동안 앓고 있던 환자로서는 오매불망(寤寐不忘) 소원하던 바는 바로 그 지긋지긋한 병에서 치유되는 것인데, 그 사실을 다 아시는 예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그 환자로 하여금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렇게 질문하신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물으시는 데는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모든 것들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지켜야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창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창3:4-5)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결국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고 맙니다. 그 결과 사탄의 말대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벌거벗은 것을 부끄럽게 느끼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숲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어디에 있는가, 왜 그들이 숨었는가, 그리고 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는가를 모르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며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사실을 아시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범한 죄를 진실되게 고백하고 회개할 것을 기대하시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회개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창3:10)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창3:11)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 솔직하게 죄를 고백하지 않는 아담에게,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며 그 지은 죄를 묻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창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며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시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어주시지 않았으면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인데, 괜히 여자를 만들어주시어 죄를 범하게 되었다며, 하나님에게도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파렴치한 모습입니다. 지은 죄에 대해 전혀 회개하지 아니하는 뻔뻔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하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며 죄를 추궁하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며, 하와 역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뱀에게 전가시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둘 다에게 회개할 것을 기대하며, 그리고 계속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질문을 던졌지만, 회개하기는커녕 자신들의 범한 죄를 변명하며 그 책임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든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로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 두 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예물을 드렸는데,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는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받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는지 여부는 여러분 삶에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열납은 죄사함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납되지 아니한 제사는 죄가 그냥 남아있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아니하므로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아니하면,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의로운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당연함에도, 도리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악한 마음이 탄로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다시 말하면 “네가 왜 얼굴을 들지 못하느냐? 그것은 네가 바르게 제물을 드리지 않았음을 네가 잘 알기 때문이 아니냐? 네가 옳은 것을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없이 드린 제사에 대해 분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롭지 못한 행위를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권고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악행을 회개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으로, 가인의 범죄 가능성을 경고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어느 때보다 범죄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마음의 죄를 잘 다스리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몹시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들로 나가 아우를 죽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우려대로 가인은 마음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거침없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고,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회개하기는커녕 뻔뻔스러운 항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완강하게 끝까지 범행일체를 부인하고 은폐하려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그래도 뻔뻔한 가인에게 결국 형벌이 떨어졌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139:1-4)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렇게 우리의 과거의 현재, 그리고 그 앞날까지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는 진실되게 우리의 삶의 모습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만 합니다.

 

3. B.C. 450년경,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 앞에 일천 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대하1:7) (7)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시니

솔로몬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하1:8-10) (8) 솔로몬이 하나님께 말하되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내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시고 내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9)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주는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사오니 (10)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기도 내용은, 첫째 아버지 다윗 왕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보잘 것 없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것에 진실로 감사드린 것입니다. 과거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언약궤가 왕궁 한 구석에 비치되어 있는 것이 몹시 마음 아파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읽으신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시기며 다윗 왕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삼하7:1-16)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간단히 말하면, 다윗 네 이름을 땅에서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모든 대적으로부터 평안을 누리게 하리라, 네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는 축복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을 받은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아들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전합니다.

(대상22:7-12) (7)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9)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10)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11) 이제 내 아들아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며 (12)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솔로몬은 이렇게 아버지 다윗 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왕이 되었으나, 통치해야 할 백성은 너무나 많고 자신이 어리기 때문에,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라며,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구한 것입니다. 여기 ‘지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한 지혜야말로 도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으로 성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와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할 수 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고 말씀하셨을 때, 솔로몬이 이같이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며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대하1:8-12)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12)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구하라는 질문에, 솔로몬이 구한 것이 너무나 하나님 마음에 흡족하여,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지혜와 지식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 상 솔로몬 시대에 가장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질문하실 때, 무엇을 구하게 될 때, 하나님 마음에 맞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에 따라 대답하고 구하게 되면, 솔로몬과 같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롬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도 여러분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하시는 성령이 함께하시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차고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4.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고 하시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곧 바로 능력이 나타나 즉각적으로 완치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창공이 생기고, 말씀하신대로 창공 아래에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거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고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창1:1-11)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와 마르다를 위로하고자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 무덤에 장사지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께서 조금 일찍 오시지 않으셔서 섭섭한 마음으로 “(요11:21-22)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마르다가 “(요11:24)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며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의 고백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예수님께 “예, 주님. 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보시고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그를 어디 두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주님, 죽은 지가 4일이나 되었으니 냄새가 날 것입니다.” 면서 만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항상 내 말을 들어주시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둘러선 이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크게 외치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손발이 베에 묶인 채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어 예수님은 그들에게 “풀어서 다니게 하라.” 하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완전하게 다시 살아나서 걸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다가 이 광경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11:1-44)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말씀하시자 곧 바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시자 그대로 되었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말씀하시자 곧 바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자기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자 예수께 찾아가 고쳐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시자 백부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에 놀라시며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이스라엘 온 땅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께서 직접 오셔서 만져주시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며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뻐하고 원하시는 믿음은 백부장처럼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며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이같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는 믿음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마을에 들어 가시자 문둥병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제사장한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러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 하시고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눅17:11-19)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제사장한테 가는 도중에 10명 모두 문둥병에서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이, 자신이 문둥병에서 깨끗이 치유된 것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렸습니다. 그러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께서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감사로 표현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감사로 하나님께 드릴 때, 문둥병만이 아니라, 그 영혼까지 구원받게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감사드리는 삶을 통해 영육간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최소한 38전 38패의 사람일지라도

요 5:1-9 / 김상수 목사

오늘 본문은 베다스다라는 연못가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베데스다 연못의 터의 일부가 지금도 예루살렘에 남아있다. 이 연못은 인공으로 만든 일종의 저수지다. 예수님 당시의 베데스다 연못은 두 개가 붙어있는 형태였는데, 그 길이를 합하면 100-110m, 넓이가 62-80m, 깊이 7-8m 정도 였다. 이 연못은 솟아나는 샘물이 아니라, 빗물 등을 모아놓는 형태였고, 성전에 물을 공급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후에 로마황제가 연못위에 이방신전을 건축했다 파괴되었고, 비잔틴 시대에는 연못 위에 성전이 건축되었다가 역시 파괴되다. 그후 십자군 시대에는 연못 주변 교회가 지어졌는데, 베다스다 연못 곁에 지금도 남아있는 성안나교회가 바로 그 교회다. 어쨌든 이 연못은 연못 위에 지어진 교회건물이 파괴된 이후 오랜시간 흙에 뭍혀 있다가 발굴되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이 연못에 전해지는 전설같은 이야기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4절을 함께 보자.

“1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1-4절)

4절 내용을 보면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동(動)하게 하는데, 물이 동한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다섯 채의 행각 주변으로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로 넘쳤다. 베데스다 주변에 모인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 마디로 베다스다 연못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모인 사람들이다. 본문의 정황으로 볼 때, 짐작컨대 연못의 물이 동할 징조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환자의 가족들이 환자를 들러매고 달리고, 연고가 없는 환자들은 서로 의지하고 절뚝거리며 또는 소경들은 허공에 손을 내저으면서 정신없이 달리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이야 말로 마지막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실날같은 희망의 끈을 붙잡고자 경쟁하는 생존경쟁의 현장이다.

그런데 그곳에 무려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바로 그 사람, 그 현장 그곳에 주님이 찾아가신 것이다. 찾아가서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러한 주님 모습에서 주님은 이 시간에 최소한 2가지의 중요한 깨달을 말씀하신다. 그것이 무엇이 인지 함께 나누며 기도하자.

 

첫째로 아무리 오래된 문제라도 주님은 능히 해결하신다는 것이다. 38년이라는 년수를 생각해 보라. 어쩌면 그는 거기 모여있는 환자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병자였을 것이다. 38년 된 병자라는 말은 최소한 38년 동안 고통당했다는 말이다. 4절 말씀에서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했는데, 그 가끔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는 명확치 않다. 평균 몇 달에 한번꼴인지, 1년에 한 두 번 꼴인지, 그야말로 그때와 시기를 알 수가 없다. 38년이라는 말은 최소한 1년에 1번씩만 천사가 내려왔었다고 해도 최소한 38번(실제로는 더 많을 것) 이상을 그 연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려고 시도했을 것이고, 그때마다 번번히 실패했다는 말이다. 1년에 1번씩만 물을 동했다해도 그것만 가지고도 7전8기 정도가 아니라 최소한 무려 38전 38패다. 우리 속담에 ‘긴병에 효자없다’는 말도 있듯이(효자만 없겠는가 친척도 친구도 다 없어진다), 이로 인해 모든 관계는 단절되고, 이제는 설령 물이 동한다 해도 넣어줄 사람조차 주변에 없는 소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상태였다. 확실하고 완전한 인생의 밑바닥이다. 바로 거기에 그 사람에게 찾아가신 것이다. 5-6절을 보라.

“5거기 삽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니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6절)

“거기”가 어딘가? 베다스다 연못가 이지만, 이곳은 모든 소망이 끝어진 한계선(限界線)을 의미한다. 6절에서 주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랜 줄을 아니고, “네가 낮고자 하느냐?”물으시는 모습 속에서 사랑의 주님의 숨결과 음성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이곳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모든 죄와 죽음과 고통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주님께서 오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는다.

“아하, 아무리 오래된 문제라 할지라도 주님은 능히 해결하실 수 있구나. 능히 해결하는 분이시구나. 주님께 내 문제를 내어 맡기면 해결될 수 있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랜시간 동안 가슴에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는가? 그릇 속에 무언가를 채우려면 그 만큼 비워야 하듯이 내 마음을 주님으로 가득 채우려면 주님 아닌 것들을 먼저 비워야 한다.

혹시 오늘 이 예배시간 직전에 발생한 문제가 있는가?(감정 상하는 일, 걱정스러운 소식, 무거운 마음)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란다.

혹은 몇 일 전, 몇 년 전의 문제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힘들게 합니까?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란다

또는 30년, 40년, 그 이상의 몇 십년 전의 문제들.... 결혼 전, 신혼초기의 잊혀지지 않는 상처들 아니 잊고 싶지 않은, 용서하고 싶지 않은 상처들이 있는가? 아주 어린시절에 부모님께 받은 상처인가? 그러나 그것까지도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란다. 아무리 오래되고 케케묵은 가슴을 짓누르는 불덩어리(恨, 홧병), 질병 그래서 평생 안고가야 할 고통이라고 느껴지는 문제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해결하실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하셨다. 해결해 주신 것을 믿고,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면 된다.

심지어 몇 십 년 전 문제뿐만이 아니다.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문제들(유전적인 질병, 가문에 흐르는 저주 등)라 할지라도 주님을 만나면 해결된다. 더 놀라운 것은 아담과 하와 이래로 모든 인류에게 흐르는 원죄(原罪)의 뿌리까지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28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셨다.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이 좋아하는 찬송들 중에 “기도할 수 있는데”라는 찬송이 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정말 그렇다. 지금 이 순간의 문제든 아니면 몇 시간 몇 일 전, 몇 년전, 몇 십년 전의 어떤 문제든 간에 그 문제를 주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면, 그 순간에 그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고, 기도할 때는 주님께 맡겼다가 기도 후에는 다시 문제를 되찾아가면서 염려하고 방황을 필요가 없다. 기억하라. 아무리 오래된 문제라 할지라도 그 문제의 기간이나 내용에 상관없이 주님 앞에 내려 놓으면 해결 받을 수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깨달음은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실 때, 38년 된 병자는 이렇게 대답했다(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그의 평상시의 마음의 상태를 대변해 주는 말이다. 이 대답은 쉽게 말하면 ‘나는 혼자입니다’, ‘내 주변에는 나는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내 편은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슬프고도 슬픈 말이다. 이 사람은 혼자였다. 이 사람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세상적인 빽과 힘이 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소외된 사람, 잊혀진 존재, 가정에서 조차 버림받은 사람, 왕따, 고단한 날개를 접고 싶어도 그의 피난처가 되어줄 공간이 없는 사람, 피할래야 피할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그에게 가족과 친척, 친구들은 없었을까? 짐작컨대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3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모두에게 ‘으레 그 사람은 그렇거니’하고, 그들의 관심 속에서 열외 된 존재다.

물론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큰길이나 지하철, 버스 안에서 또는 학교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몸을 부딪히고 접촉하는 사람들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이 병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 사람과는 상관없는 그냥 스쳐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경쟁대상일 뿐이다. 나를 주저 앉히고 자기만 살고자 하는 일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군중 속의 고독이다. 이 사람은 몸의 질병도 고통이지만, 마음의 상처와 외로움은 어쩌면 더 큰 상처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병자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만나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홀로두지 않으신다.

주님의 주옥같은 약속을 말씀들을 몇 곳만 보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1-2)

“18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43:18-20)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다시 본문 말씀을 보자. 계속해서 8-9절을 보면 주님은 이 병자에게 구원의 말씀을 선포한다.

“8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8-9절)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이 명령이 선포될 때, 단순히 질병만 고침받은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의 죄(罪)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다. 뒤에 나오는 14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절)

그러니까 38년 된 이 병자의 질병은 자신의 죄인지 조상의 죄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뭔가 죄와 연관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이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명령을 할 때, 그의 죄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38년 동안 아무리 작게 잡아도 최소한 38전 38패 이상을 했을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에게 친히 찾아가셔서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렵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까지 몇전 몇패였는가?지금 우리들에게 38년이 아니라 그 이상 아무리 오래된 문제,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이라할지라도, 반대로 조금 전의 발생한 일이라도 주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피와 물을 다쏟으시면서 해결해 주셨다. 그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믿음으로 내려 놓으면 된다. 맡기면 된다. 주님은 결코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홀로두지 않으신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성령 안에서 친히 우리와 동행하신다. 다같이 그 주님 앞에 두 손을 모으자.

 

(기도멘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8년 동안 38전 38패 아니 그 보도 훨씬 많은 실패를 경험했을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에게 주님이 찾아가서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떠한 오래된 문제와 고민이라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질병이나 죄악의 문제라할지라도 주님이 해결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원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고민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 시간 자기포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내 문제를 끌어안고 해결하고 싶어는 권리까지도 내려놓으십시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고 방황하십니까? 주님이 이 시간 내가 함께 함으로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앞에 새일을 행하시고, 우리를 위해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을 내서 우리들에게 마시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웁시다. 주의 도움을 간구합시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8 / 이규헌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가지 이적 중 세 번째 이적입니다. 이것은 베데스다에서 일어난 일인데, 가끔 이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데, 원래 성경에 있던 것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 안에 넣어 나중에 추가한 것입니다. 가끔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간 사람이 낫는다는 것으로 보아 잘 안 나았거나 알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연못 주변에는 병자들, 다리 저는 사람, 맹인들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가 건강하면 정신적으로 병들었고, 정신이 건강하면 육체가 병들었기도 합니다. 멀리서 보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모두가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성 환자, 중독 환자들도 많습니다. 중독도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없는 불구의 몸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가의 사람들은 몸도 불편한데, 가끔 물이 동할 때 먼저 뛰어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언제 물이 동할지 알 수도 없고, 누군가 먼저 뛰어들어가면 그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자비와 은혜의 집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실제적으로 자비와 은혜 밖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거기에 가면 희망이 있을 것 같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정작 해결 받지 못하고 고통의 문제가 그대로 있으면서 막연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베데스다 연못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주셨습니다. 38년이라는 숫자에서 주는 느낌은 ‘불가능’입니다. 혹시 병상에서 1년 정도 누워있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병상의 1년도 굉장히 긴 시간인데, 38년은 엄청난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절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자신은 시도조차 못 하고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지금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들어갈 수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실패를 자주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떤 것에도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계속 실패가 반복되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패보다 실패의식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당장의 문제 해결에 급급하고 멀리 내다볼 시야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38년 된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굳어질 대로 굳어진 마음입니다. 전신 불구가 된 경우, 부상 후 1~2년이 가장 무섭다고 합니다. 행복에 대한 기대치가 원초적 수준으로 떨어져서 마음이 드러누워 어떤 희망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병자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이상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너무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주님은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분명히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병자에게 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질문은 당연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8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상태가 어떨까요? 1,2년도 아니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성적인 병자로 살아온 사람들도 예전에는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무언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기대가 무너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반복이 38년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만성적인 절망과 실패는 스스로 자기는 안 된다는 결론을 가집니다. 이런 상태 속에 있는 병자에게는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 있습니다. 자신의 그런 삶에 오히려 익숙해져 있습니다. 인간은 고통이나, 불편한 것도 오래되면 익숙해지고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벗어나고 싶은 환경에서 돌아섰다가도 앞으로의 길이 보이지 않으면, 익숙함 때문에 다시 그 환경으로 돌아갑니다. 죄를 지어도 처음에는 치를 떨지만, 그것에 빨리 익숙해집니다. 화장실에 처음에 들어갈 때는 냄새가 나서 죽을 것 같지만, 조금 있으면 익숙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알코올 중독의 피해가 크지만, 술을 끊으면 다시 미련이 생깁니다. 변화하고 싶고 금단 현상도 있지만, 술이 주는 쾌락이 있고, 술친구를 잃어버리는 것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변화를 원하지만 동시에 변화를 원하지 않는 마음이 공존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그 삶에 익숙해진 그 삶의 고리는 굉장히 강합니다. 우리 삶에도 반드시 변화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는 절규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은 ‘정말 지금 네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진정으로 그 변화를 원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익숙하고 운명 같은 삶에서 그것을 걷어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일상에 매여 평생을 살아갑니다. 실제로 그 당시 병자들 중에는 낫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아보았자 더 궂은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으며 동냥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해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변화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변화를 원했느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변화를 원할 때 어떤 것으로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변화를 가로막아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이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변화보다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삶에 변화를 추구하면 현실에 붙잡힌 고리를 끊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는, 현실과 타협하며 안주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의 삶이 진정으로 새롭게 되길 원하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38년 된 질병보다 더 무너진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 깊은 내면을 터치하는 것입니다. 몸의 질병보다 마음의 병이 훨씬 더 깊습니다. 어떤 역사가 일어나려면, 가장 먼저 마음에서 불이 붙어야 합니다. 꽁꽁 얼어붙었거나 닫혀져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결론을 가지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안에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내면과의 싸움입니다. 우리 안에 해묵은 상한 감정들로 인해 마음이 닫혀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불안과 절망으로 만들어져 있는, 표현하지는 않지만 덮어놓고 살아가는 그 영혼을 향해 주님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정말 변화되기 원하느냐, 지금의 삶을 정리하기를 원하느냐” 주님은 병자 안에 깊은 반응이 일어나기를 원하면서 터치하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병자의 마음을 살리기 원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할 일은 우리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좌절과 실패와 절망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희망이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며 세상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닫힌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열린다는 것은 내 스스로 결론짓던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 열린 곳으로 미리 준비된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기 진단과 절망으로 무너진 마음 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는 순간, “하나님!”하는 외마디 외침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의 출발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베데스다 연못에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집이라는 베데스다에서 병자들은 물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절망하고 있는 이 모습은 은혜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은혜의 반대는 인간의 노력과 행위입니다. 자기 스스로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반복되는 실패와 절망을 경험한 베데스다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간단하게 한 말씀을 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때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고 했습니다. ‘곧’은 38년과 대조를 이룹니다. 38년의 고통 속에 살았던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파워는 굉장히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이 밀려오면 단숨에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38년의 무게가 한 번에 날아가는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몇십 년 묵은 문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한 번에 해결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은 논리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독특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삶에 복잡한 문제들이 수십 년 동안 얽혀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단숨에 역전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한 해 동안 여러분이 꿈꾸던 것이 현실로 되었습니까? 정리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나를 붙들고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특별새벽기도에 이런 기대를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기 전에는 복잡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간단합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은혜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였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가 단 한 번에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오늘도 우리 삶에 모든 문제가 단 한 번에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네 자리’가 무엇일까요? 병자가 38년 동안 깔아뭉갰던 자리입니다. 원망과 탄식이 베여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자리를 치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런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나를 주저앉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힘들게 하고 변화 없이 살게 했던 운명의 자리를 깔고 살아온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38년은 얼마나 억울한 시간입니까. 자리를 깔고 막연하게 도움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 것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도박과 같습니다. 우리 삶은 요행이나 다른 사람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놓인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막연한 기대감이나, 나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에 대해 원망과 불평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의 집’에서 누가 먼저 들어갈 것인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그 모든 것이 종결될 줄 믿습니다.

 

오늘 베데스다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내가 구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절망과 실패 속에서 스스로 기대를 끊어버리고 안 된다고 생각하고, 불가능이라고 말했던 그 영역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주의 은총을 붙잡아 내 마음을 열면, 주께서 역사하셔서 내가 할 수 없던 일들이 해결될 줄 믿습니다. 우리 안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영적 집회를 앞두고 우리 마음의 태도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새 또 하네”, “다음에 또 하겠지”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기회를 볼 때 어떤 마음으로 열려있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받는 은혜의 강도가 달라집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정말 그 문제가 해결되기 원하느냐”, “네 인생이 새롭게 되기 원하느냐”고 하실 때, 변화 없는 나의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너무 오랫동안 가지고 있어서 그 문제를 문제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생을 인생답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주님 앞에 마음을 열고, “주님이 필요합니다. 찾아와 주시기 원합니다.” 하고 우리 마음을 드릴 때,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은혜의 세계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지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나는 너를 낫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한다면 내가 낫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낫기를 원하고 변화되기 원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변화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자기 인생에 결론을 내려버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인생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충분히 열리기를 바랍니다. 내가 낫기를 원하고 변화되고 새롭게 되길 원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인생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생으로 이끌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모든 것을 맡기고 역사해주시기를 원하는 갈망을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마음껏 역사하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 삶을 이전과 다르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이 스스로 불가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기대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38년 된 병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기 원하시고 변화를 돕기 원하십니다.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오늘도 기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한순간에 바뀌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도 강력합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나를 칭칭 감고 있는 문제 때문에 나도 이제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한 분들이 계십니까?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변화되기 원한다는 고백이 가슴에서 일어나 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낫는 것이 축복인데도 두려움으로 인해 변화를 원하지 않는 태도가 있다면 그것을 주님 앞에 가져가십시오. 주님은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아름답고, 멋있게 우리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분입니다. 때로는 그 변화로 인해 어떤 것을 잃어버리게 될지라도 주님은 내 인생을 가장 완벽하고 멋있게 회복시키실 것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을 바랄 때 우리 인생에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새롭게 하시는 회복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시편 23편의 다윗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나아갈 때, 주님이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서 멈춰 서 더 이상 자신의 삶에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고 풍성하며 멋진 세계가 있고, 하나님은 그런 삶을 우리 삶에 세우기 원하십니다. 38년 동안 무너진 마음의 성벽을 다시 세우고, 그 인생을 바꾸기 원하시는 그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나아갈 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38년만의 외출

요한복음 5:1-9 / 전철민 목사

 

올해 교회의 표어가 ‘변화와 성숙’입니다.

일생일대의 변화를 맞은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불치의 병 때문에 신음과 절망 속에서 부질없는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조차도 없는 지체 장애자였던 것 같습니다.

의술로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마지막 선택한 방법은 신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베데스다 연못가였습니다.

베다스다 연못에는 가끔 천사가 목욕을 하러 내려온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목욕을 시작할 때 물결이 흔들리면 그 때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환자는 무슨 병에 걸렸든 지간에 낫는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입니다.

그래서 그 주변에는 소경, 절름발이, 전신장애 등 도무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을 접은 사람들이 누워있었습니다.

물론 베데스다는 하나의 전설일 뿐 실제로 치유가 일어났다는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이렇듯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엇인가를 붙들려고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다닌 교회에 한 장로님이 계신데 위암에 걸렸습니다.

대기업 임원이셨기 때문에 두루 두루 아는 것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누구에게 들었는지 위암에는 갓 잡은 싱싱한 소눈깔을 생으로 먹으면 효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부인 권사님이 마장동 소시장에 소눈깔 사러 가는 것을 보면서 끔찍한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아니잖아요.

건강할 때 누가 손 눈깔을 생으로 먹을 생각조차 합니까?

하지만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그것도 하나의 희망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는 병자들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전설을 믿고 대책 없이 천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전설보다도 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리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38년 된 병자를 주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병자가 오랫동안 병으로 거동치 못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병자는 자신이 나을 수 없었던 여러 이유들을 변명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변명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으신 듯,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38년 된 병자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8년 만에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병자의 변화를 통해 변화의 원인과 주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내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I.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 부패를 생각하게 됩니다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혹 베데스다의 전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자기를 연못에 넣어 주어야

하는데 자신을 도와 줄 사람도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고침을 받을 길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상태가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0장 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 의지, 모든 기능이 총체적으로 부패해져 있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더구나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를 에베소서 2장 1절에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시체는 생각이나 마음이나 의지나 행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죽어 있는 것입니다.

자연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공중권세 잡은 자’의 영향권에서 살기 때문에 그는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운동하게 됩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혼과 정신기능인 혼과 관절과 골수 같은 육체까지 수술하여 치유합니다.

그리하여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생각과 의지가 바뀌게 되고, 병든 육체가 치유되는 전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도 부릅니다.

 

내가 나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원칙을 정하고 규칙을 만들어 잠시 내 행동을 조절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나의 마음과 성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겉모양은 흉내를 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운동할 때만이 바뀌게 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 봉사하는 성도가 있는가하면 하나님의 힘으로 봉사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살아서 운동할 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스스로 충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어떤 누구의 도움이 사실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우리가 기뻐지고 축복을 받기 때문에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봉사하고 헌신하고 헌금하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100억을 헌금하고 500억을 헌금한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뭐가 모자라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쁘라고 내가 살맛이 나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일 때 내가 기쁘기 때문에 남이 알아주건 말건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 힘으로 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내 체면 때문에, 혹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기쁨이 없고, 짜증이 나기도하고, 츄러불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임하는 곳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께서 나타나 성경 말씀을 풀어서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때 그 두 제자가 이렇게 서로에게 반문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분부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에 최후의 분부를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고, 읽고, 들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 속에서 힘차게 운동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I.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 많은 병자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을 주목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입니다.

그곳에 있던 병자들을 다 만나 주신 것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자신의 운명이 변화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선택이 창세전에 이미 예정이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어 성령께서 찾아 오셔서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언제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까?

모태 신앙입니까?

아니면 누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인도에 와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까?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자는 때가 되면 믿을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선물로 인해 진정한 감사를 매일 매일 구체적으로 드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III.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제한된 사람에게만 임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한 구속’ 혹은 ‘제한된 속죄’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 오셨을 때 그곳에 있던 모든 병자들을 다 불쌍히 보셨습니다.

하지만 다 고쳐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보다 더 불행하고 더 처참한 병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38년 된 병자만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했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모두에게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많은 세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몇 사람에게만 구원이 임했습니다.

세리 마태, 세리장 삭개오...

당시 수많은 소경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경 바디메오라든지 몇 사람만 고쳐 주었습니다.

당시 많은 창기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많은 귀신들린 여인들이 있었습니다만 막달라 마리아를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위험한 사역자들이 종종 눈에 띕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의 병을 예수 이름으로 고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모든 병든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런 능력의 종들 때문에 고침을 받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만하고 병에 걸린 수많은 대중들은 소외와 절망에 빠져 돌아갑니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지만 누가 보아도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게 보입니다.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지만 자신의 신념이 더 강해 보입니다.

주님이 고치신다고 겸손을 가장하지만 그 속에는 영적 교만과 무지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모든 병자를 다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다 고칠 수 있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의사들도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병원들도 영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안수를 많이 합니다.

불치의 병자가 많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기적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병원에 가라고 말합니다.

열나면 기도 받고 병원에 가서 혈액 검사해서 말라리아인지 장티푸스인지 댕기피버인지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합니다.

저도 아프면 병원에 가서 입원을 합니다.

병원에 가서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는 사람이 기도로 낫겠다고 산으로 올라가 병을 키워서 그 병으로 죽는 믿음 충만한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그게 믿음이 아닙니다.

 

안수는 만병통치가 아닙니다.

안수할 때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그렇습니다.

제가 델리의 어떤 가정을 전도했습니다.

말로만 전도할 때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 집에 아들 하나가 B 형 간염 보균자입니다.

밤에는 피부가 가려워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의 배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아이의 치유가 되었고,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했는데 B형 균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분은 지금 집사님이 되어 교회를 잘 섬기고 있습니다.

치유는 구원을 위해 주께서 특별한 경우에 베풀어 주십니다.

안수로 치유된다고 해서 특별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치유가 안 된다고 해서 버림받았다는 생각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안수해서 병 고침 받아도 또 병걸려 결국 죽습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은혜가 내게 임했음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V.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불가항력적 은혜’ 혹은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이 나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기에 자격이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는 허물과 죄가 많아요,

나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주께서 병자에게 질문한 것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낫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은 반드시 실현이 됩니다.

병자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면 거부할 수 없이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면 그냥 일어나 걸어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주께서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로마서 9장 15절에,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신이 정하신 기쁘신 뜻이기 때문에 받는 방법 외에 다른 초이스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 자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사람을 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 은혜를 깨닫도록 성령을 보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V.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돌보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도의 궁극적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는 마침내 일어나 38년 만에 외출을 했습니다.

스스로의 걸음으로 성전에 갔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분이 예수신 줄 몰랐습니다.

13절에 보면,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성전에서 예수께서 이 사람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바쁘십니까?

그런데 이 사람을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38년 만에 외출한 고침 받은 이 사람은 비로소 자기 병을 고치신 분이 ‘예수’신 것을 알았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마다 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방문해 주십니다.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내가 여전히 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고, 죄를 범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성도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납니다.

왜냐면 주께서 끝까지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하심과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한 구속하심과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구원이 인간의 조건에 의해 왔다 갔다 하고 얻었다가 잃기도 하는 그런 불완전한 구원이겠습니까?

결코 그렇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고, 하나님은 성실하시면 하나님은 실수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은 결코 여러분을 놓지 않을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38년만의 외출,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38년간을 누워서 지냈습니다.

인간답게 산 것이 아니라 구걸하며 연명하던 삶이었습니다.

이제 혼자 걸어서 외출을 했고 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혹 이 병자처럼 영적으로 오랫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누어 지내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외출의 기쁨이 있습니다.

스스로 걸어서 일하시는 새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새로운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임하신 은혜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와 허물로 죽었었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했었고 무능력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해 주셨습니다.

그 증거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임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믿음은 내가 노력해서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은총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십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이제 이 38년 병자가 치유 받고 외출을 했듯이 더 넓은 신앙의 세계로 더 넓은 기쁨의 세계로, 더 넓은 보람의 세계로 외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