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나리라
요 6:36-40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36-40 /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은 내가 전에도 말한 대로 너희가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 일이다. 37) 하지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내게 올 것이고 나는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다. 39)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들을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다. 40)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고 마지막 날에 아들인 내가 그들을 살리는 일, 이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에 빗대어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본문입니다. 계속해서 떡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오병이어라는 큰 기적의 흐름 속에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37) 서로 초점이 다르면 대화는 계속해서 엇나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이야기를 하시지만 사람들은 이를 계속해서 육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본 단락에서 예수님은 좀 더 분명하게 자기를 계시하시고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히 주리지 않을 생명의 떡을 먹을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나아올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그들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이 아니라 영이, 표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에게 나아올 것을 이야기 하고 계시지만, 전혀 영적이지 않은 무리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38-40)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떡을 무리들은 직접 보았고, 들었고, 경험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이들을 믿음의 자리로 초대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행하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은혜에 무리들이 보일 반응은 믿음, 즉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졌던 모세의 만나에 빗대어 자신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올 참 생명의 떡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스스로를 아주 강력하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아울러 분명한 복음에의 초대입니다. 이제 생명의 떡을 믿고 먹는 자는 마지막 날에 살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던져주시는 이러한 메시지는 매우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을 먹는 방법은 다른 표적을 구하지 말고 그들이 보고 들은 바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연이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구원을 향한 예수님의 열정이 가득한 본문입니다.
적용: 내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르침(사 54:13), 용서(엡 1:7; 골 1:14), 능력(빌 4:13), 평안(요 14:27)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구하는 목적과 결과는 영생입니다(요 5:11). 지금 나는 주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가며 그분 앞에 머무는 자인가요?
어떤 교인이 목사님과 상담을 나누면서 "제게는 너무 상처가 많아요. 왜 이러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이 어려운 시련과 문제가 전혀 없는 곳이 없겠습니까?"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대답은 "상처도, 고통도 전혀 없는 세계가 한 곳 있기는 있지요. 공동묘지로 가십시오. 상처도, 고통도 없는 곳은 바로 그 곳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No cross, no Crown) 입니다.
< 설 교 >
생명을 살리는 기적
양인순 목사
최근 매스컴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일이 있습니다. 일명 <타진요 사건>입니다. 타진요는 <타블로의 진실을 요구합니다> 라는 인터넷 까페의 이름입니다. 타블로라는 인기 남자 가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명문 스탠포드대학과 대학원을 3년 반 만에 졸업한 능력 있는 가수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타진요가 어떻게 그렇게 힘든 명문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3년 동안에 졸업했느냐 였습니다. 그래서 졸업과 학위 증명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증명서에 기록된 이름과 다르다는 이유로 졸업 증명서를 위조했다고 공격했습니다. 심지어 스탠포드를 다니다가 죽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무려 19만 명이 이 까페에 가입해서 타블로에게 거짓말쟁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결국은 타블로는 방송 기자와 함께 스탠포드대학을 가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과 가르친 교수들과 당시 상황을 인터뷰합니다. 그리고 타블로가 제출한 졸업 증명서가 틀림없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타진요 측은 기자를 매수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은 경찰이 나서서 사실관계를 조사한 후에 타블로가 스탠포드대학을 졸업한 것은 분명하다고 결론을 냈습니다. 그런데도 타진요 측은 이제는 경찰까지 매수해서 사건을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타진요 운영자는 진실게임을 하면서 만약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졸업한 것이 사실이라면 감옥이라도 가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급기야 타블로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러자 타진요를 이끌었던 왓비컴즈라는 운영자는 경찰이 출두 명령을 내리자 다른 사람에게 인터넷 까페 운영권을 물려주고, 슬그머니 잠적하고 말았습니다.
타블로가 눈물을 흘리면서 인터뷰한 내용을 봤습니다. “제가 억울해서 우는 것도, 속상해서 우는 것도 아닙니다. 제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저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안 믿는 것이 힘들게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보여주면 믿었는데 이제는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아예 믿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어도 조작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국가의 공권력도 신뢰를 못합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이후 촉발된 촛불시위 역시 아예 처음부터 사실관계를 믿지 않고, 정부를 불신한 세력들의 시위입니다. 어떤 과학적, 의학적 증거를 보여줘도 마음속에 답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천안함 사건 역시 동일합니다. 분명한 북한의 소행임을 밝혀주는 과학적 증거와 배후의 사실 관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뢰를 상실한 정부도 문제가 있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이 시대가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인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부부간의 신뢰가 깨질 때 가정은 불행합니다. 의처증과 의부증을 가진 부부관계는 지옥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 역시 불행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신뢰할 때 모든 문제는 풀려집니다. 그런데 의심하고, 불신하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이 좋지 않게 보입니다.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입맛에 맞게 말하고, 해석합니다.
불신은 마귀가 틈타는 지름길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속에 불신이라는 가라지를 뿌립니다. 불신이라는 가라지가 자라면 서로의 관계는 깨어지고, 아픔과 상처를 남깁니다.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증거를 보여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불신이 얼마나 큰 병인가를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12광주리를 거두는 기적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도 불신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엄청난 기적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병이 걸린 모습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좇고 있습니다.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당시에 가난에 시달렸던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면 자신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경제적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적임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의도를 아신 예수님은 잠시 산으로 피하셨다가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걸어갈 때 하늘에서 새벽 이슬과 함께 생명의 만나를 내리셔서 백성들이 주리지 않고 광야를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만나는 일시적인 허기를 채우는 양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의 만나는 다시 배고프지만 산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자는 결코 주리지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산 떡임을 말씀하십니다. 밥은 필수품입니다. 아무리 반찬이 많아도 밥이 없으면 왠지 허전합니다. 예수님은 있어도 없어도 되는 액세서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밥과 같이 반드시 필요한 분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쁨과 행복을 주는 근원이십니다.
밥은 계속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한 끼를 잘 먹었다고 해서 열흘을 굶을 수는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도 매일 매일의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일 밥을 먹는 것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교제가 필요함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밥이 되어서 날마다 교제를 통해 누릴 영적 양식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지은 시 <밥 먹는 자식에게> 라는 시가 있습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 봄부터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 볕 속에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서야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거여
주님을 모시듯 밥을 먹어라 / 햇빛과 물과 바람 농부까지 그 많은 생명
신령하게 깃들어 있는 밥인데 / 그렇게 남기고 버려 버리면
생명이신 주님을 버리는 것이니라
사람이 소중이 밥을 대하면 그게 예수 잘 믿는 거여
밥 되신 예수처럼 밥되어 살거라 / 쌀 보리 밀 옥수수 온 만물들은
자신을 제단위에 밥으로 드리는데 / 그렇게 사람들만 밥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생명 세상을 열겠느냐
사람은 생명의 밥을 먹고 밥이 되어 사는 거여
우리는 생명의 밥이 되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농부들의 사랑의 정성이 깃든 밥을 먹고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반면에 우리의 영혼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삽니다.
이제는 우리가 밥 되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밥이 자신을 제단에 올려진 제물처럼 우리를 위해 날마다 희생하는데,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먹고 살면서도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한 생명의 밥이 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습니다. 시인은 우리는 생명의 밥이신 예수님을 먹고 사는 자로서 우리 또한 생명을 살리는 밥이 되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가리켜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다같이 39-40절 말씀을 읽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9-40)
예수님이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영혼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 말씀을 분명히 믿습니다. 임종을 지켜보면 두 부류가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보면 끝까지 부인할 것 같은데 마지막 순간에 영접기도를 하고 아멘! 하고 돌아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얼굴이 환히 밝아지고, 평안이 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반대로 금방 믿음의 고백을 하실 것 같은데 끝가지 거부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얼굴이 굳어지고,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것을 봅니다. 천국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영혼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정으로나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이 예정하신 영혼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분이 있다면 우리가 굳이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 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든지 아니 믿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찾아 나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소중한 양입니다. 그러나 길을 잃어버린 양을 구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더 급하다는 것입니다. 언제 가시덤불에 빠질지 모릅니다. 언제 절벽으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언제 맹수의 공격에 찢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긴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기도하면 되겠지 라는 여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자녀가 남편이, 형제자매가 한 발짝만 다가가면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천천히 네가 알아서 행동하라"고 놔두겠습니까?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멈추게 해야 합니다.
영국에 "해가 떴을 때에 건초를 말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때가 있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자녀들이 형제 자매들이 친구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장례식장에서 어느 여자 집사님의 절규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지극히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너무 완고하시니까 좀 더 있다가 후에 다시 복음을 전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건강하시던 어머님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관을 붙들고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좀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할 것, 좀 더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 속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2010년 예수 생명잔치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이 내가 품고 있는 영혼을 살리는 절호의 기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안되면 다음에 하면 되지--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열정으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찾아나서기 바랍니다.
한 잃어버린 생명이 주께로 돌아오면 천국에서는 이 세상의 어떤 잔치보다 풍성한 생명의 잔치가 울려 퍼집니다. 천하를 얻었을 때보다 더 크고 놀라운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이 아름다운 생명잔치의 주인공으로 초대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주 전 세계가 흥분과 감동으로 지켜본 빅 뉴스가 있습니다. 칠레 광산매몰 광부 33명이 무려 69일 만에 구조된 소식입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 나쁜 소식만 전해지다가 오랜만에 지구촌 모두 기뻐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지하 700M 탄광에서 붕괴 사고가 나서 33명이 캄캄한 탄광 갱도에 갇혔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작업반장의 리더십을 통해 남은 음식을 공평하게 분배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17일째 되던 날 기적적으로 생사확인 작업을 하던 구조대의 침봉에 살아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던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칠레 정부와 전 세계에서 매몰 광부들의 생환을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결국 33명 전원이 건강한 모습으로 69일 만에 구조됐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갱도에 매몰된 그들이 완벽하게 생존한 이유는 광부들의 양보와 희생입니다. 전 세계가 하나가 된 무결점 구조작업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국민들의 인내입니다. 가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남편, 애인, 아빠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구촌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그리고 가장 감동적인 키워드는 바로 신앙심에 뿌리를 둔 희망이라고 신문은 전했습니다.
이 사건을 생방송으로 전 세계가 생중계하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온 칠레 국민과 전 세계가 가족들에 품에 안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왜 지구 반대편에 일어난 매몰 광부들의 구조 소식에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 기뻐하고 환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죽어가던 생명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뉴스를 보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무리로부터의 배신,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의 배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조차 십자가의 절규를 외면하셨던 그 처절한 몸부림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힘든 십자가의 고통을 끝가지 이기신 힘의 근원은 바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시기 위한 속죄의 죽음이셨습니다. 자신을 죽여 온 인류를 살리시기 위한 몸부림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온 인류가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의 자리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으로 우리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얻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값없이 공짜로 얻었다면 우리는 이 놀라운 소식을 마땅히 전해야 합니다. 아직도 희망 없이 죄의 짐에 눌려 있는 어둠의 백성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피 값을 주시고, 이 성지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목적입니다.
죽어가던 자들이 육신의 생명을 건지는 일도 이렇게 귀하고, 전 세계가 흥분하고 기뻐하는 일인데,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요? 이것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입니다. 찬송가 508장입니다.
영생의 복락과 천국에 갈 길을 만백성 알도록 나가서 전하세
주 예수 말씀이 이 복음 전하라 우리게 부탁하셨네
주 네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최근에 우리나라에 닉 부이치치가 왔습니다. 전에도 한 번 동영상을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의 모습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동영상>
그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행복하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도 손과 발이 없는 사회적 약자이지만 그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한 후 전 세계를 돌면서 새로운 삶의 희망과 행복을 주는 행복 전임강사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일까요? 닉 부이치치는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고 난 후 희망과 행복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됐습니다. 우리의 삶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기적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생명의 밥이 되어 세상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기적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고, 축복해 주신 이유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온 세상에 전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김상수 목사
지난 두 주간동안 제가 중국동포들을 방문했습니다. 첫 주간은 심양에서 4시간 올라가 매하구에 있는 C교회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우리교회 한마음 선교단이 먼저 가서 집회를 인도했으며, 매일 새벽 4시 30분, 낮 10시, 밤 7시부터 10시까지 계속해서 집회를 했습니다.
한마음 찬양단은 오후에도 계속 집회를 하면서 소그룹으로 공부도 하고 하루 종일 새벽 4시 반부터 밤10시까지 계속 성도들이 말씀을 배웠는데 그 모습에서 도리어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침 집회가 10시인데 8시부터 성도들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2시간 전부터 나와서 찬송하고 기다리며 은혜를 사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연길에 가서는 우리교단 출신이면서 동포 목사님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마치고 나서는 그 지역에 있는 몇몇 교회의 제직들이 모여서 제직수련회를 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영적인 수준이 높은 것을 보았으며, 우리 한국교회와 별 차이가 없는 성경지식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에 사람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목사님 한분이 변화되자 그곳의 많은 성도들이 구원받고, 믿음으로 자라며,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편 처소교회들을 저는 가 보지 못했고 함께 가신 장로님께서 다녀오셨는데 예배당 건물은 잘 지어놓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선교는 사람을 키우는 일인데 선교를 하면서 자꾸 돈을 먼저 보내고, 예배당을 먼저 지어주는 것은 선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당을 지어주는 것이 선교가 아니라 구원받은 한 영혼을 구원시키고 길러내서 지도자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선교의 목표입니다. 저희교회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연길에서 조금 관심가진 부분은 그곳이 옛날 북간도 지역으로서 바로 두만강과 접경하고 있는 지역으로 우리 동포들이 많이 있는데 연길 조선족 자치구입니다. 제가 북한 TV방송을 나름대로 들어보려고 했는데 들을 수 없었고, 라디오는 북한 방송이 나온다고 하는데 TV에는 북한방송은 나오지 않고 한국방송만 나왔습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에게 북한방송을 듣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잘 안 듣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똑같은 내용만 방송이 되어서 재미가 없어서 안 듣는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방송을 계속 들을 수 있으니 그곳의 동포들이 점점 한국화 되어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를 현지에서 보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8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라고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자기의 뜻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무엇을 바라고 계실까요?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은혜를 늘 우리가 받는데 은혜를 받았으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나의 의지와 결단을 드려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뜻을 행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 위에서 진정으로 복된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강아지를 집에서 기르시는 분이 강아지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애완용은 예쁜 행동만 하면 되고, 집을 지키는 강아지는 집을 잘 지켜주기만 하면 되듯이 주인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것만 잘 맞추어주면 강아지는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을 바로 알고,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 질 때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믿음의 신앙인격을 갖게 됩니다.
이번에 연길에서 제직수련회를 하면서 어떤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아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그 내용은 “하나님은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따먹게 해서 죄를 짓게 합니까? 처음부터 안 만들고 죄를 안 짓게 하면 될 텐데...”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어떻게 할까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할 수도 있고, 저것을 할 수도 있도록 하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귀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 땅위에는 하나님의 세력과 마귀의 세력 두 가지의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세력 중간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도 있고, 마귀의 세력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 결정권이 인간에게 없었다면 인간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우리의 자유의지를 드릴 때에 축복이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을 때에 초점을 잘 맞추면 사진이 깨끗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방송을 들을 때에도 채널을 잘 맞추면 소리가 잘 들립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하나님께 초점을 잘 맞추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교회에 오시면서 은혜 받는 것만을 요구합니다. 은혜 많이 받아서 많은 것을 얻고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은혜를 받았느냐? 받은 것 만큼 변화되어지는 너희들의 의지와 결단을 내게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지 말라는 것이 있고, 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의지를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 있으며,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맞출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 사람의 의지에서 그 사람이 결정됩니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그 의지를 어디에 두느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혜 받았을 때의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결심한 것, 한번 뜻을 세운 것을 끝까지 잘 지키는 그 사람은 누가 보아도 인격적인 사람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의지는 우리 몸의 뼈대와 같습니다. 뼈대가 없으면 무골호인입니다. 무골호인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최대의 특권이고 선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영적인 능력을 받아서 은혜도 받고, 환상도 보고, 계시를 보고, 음성을 듣고 별일을 다 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의지가 없고 순종하는 삶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은혜는 많이 받았는데 이것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드려야할 의지를 잘못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지를 요구하십니다. 결단적인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했는데 25년을 기다리게 하시고 아들을 주셨으며, 이삭이 자라고 나니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죽여서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소는 모리아산인데 아브라함의 처소에서 그 산까지는 3일 길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3일 길의 뜻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자식이라면 부모의 마음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 생명과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것인데 이 아브라함은 자식을 죽이러 가는 길입니다. 그 3일 길은 100번이라도 돌이키려고 하면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3일 동안의 시간 여유를 주어서 아브라함의 결심이 변하는지 변하지 않는지를 보자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그 결심을 변하지 않고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칼을 가지고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에 그때 하나님은 “됐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너를 알았다고 했으며, 인정해 주셨고, 만민의 아버지가 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죽으라고 할 때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고 높이셔서 만민의 주님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뜻을 세웁니다. ‘나는 채소와 물만 먹을 것이다’라고 뜻을 세울 때에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전기를 젊을 때에 읽었는데 슈바이처 박사는 젊을 때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서른 살 때 까지는 학문을 위해서, 그리고 예술을 위해서, 서른 살 이후에는 내 이웃을 돕는 일을 하겠다’고 결단을 했으며 그는 실천을 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밀림 속에서 40 년 동안 그의 결단한 것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이 세상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받게 해주었고, 세계도처에서 많은 후원자들이 그를 후원하고 높여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캘커타에 가면 테레사 수녀가 일하던 곳이 있습니다. 지난번 제가 가서 보니 그분은 여자의 몸으로 체구도 작은 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우고 길거리 노숙자들을 위해서 살기로 일생동안 뜻을 세우고 일 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얼마나 높여주셨는지 모릅니다.
그곳에 가보니 그의 사무실에 세계 도처에서 후원하는 후원단체들이 지도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전 세계에서 그를 후원하고 있었으며, 한국에서도 그를 후원하는 단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세우고 그 의지를 바친 자를 높여주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최고의 믿음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은혜 받았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깨달았습니까? 그 깨달은 것을 삶의 현장에서 나의 결심, 나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겠습니다’라고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주시는 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면 내 욕심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꼭 아실 것은 죄라고 하면 간음죄, 도적질한 죄를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말은 화살이 빗나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단을 바로 바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고, 여러분이 이제부터 ‘하나님,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매를 들기도 하시고, 고통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맞고 많이 깨어진 사람이 하나님의 귀한 그릇도 되고 신령한 축복도 받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운다고 회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울고 깨달았으면 방향을 바꾸어서 새로운 뜻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우리가 그 안에서 축복받는 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가운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입니다.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뜻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죽이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해주셨는데 그렇다면 가장 큰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구원받아야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 천하보다 귀한 것이 영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대신 죽여서 우리를 살려주셨으니 우리 영혼 하나가 자기 아들만큼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처음 나오신 분들은 아셔야합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왜 주인이냐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아들을 위해서 창조하셔서 아들에게 천지만물을 다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것이 되었기에 이 천지만물이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예쁘고 귀하고 사랑스런 아들을 세상에 가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벌 받고 죽으라고 해서 그 말씀에 순종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서 죽으라고까지 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가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신 것을 생각할 때에 그 하나님 앞에 나도 감사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하는 이 감격이 우리에게 들어와야 될 줄 믿습니다.
이 감격은 제가 설교를 아무리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깨달아져야 하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영으로 감격이 되어져야 될 때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말 한마디를 할 때에 감동이 되어지는 말이 있고, 아무리 말을 해도 감동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감동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감동이 없는 분들은 기도하셔서 ‘하나님,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내 영혼에 대한 감격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 은혜를 받기 전에는 세상을 위한 삶을 살았지만, 은혜 받고 난 뒤에는 “나와 세상은 간곳이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지니 그때부터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고, 출세하는 것이 별것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 제일 좋고, 주님과 관계되어져 있는 것이 제일 좋고, 천국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제일 좋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문학책을 좀 읽었는데 지금은 읽지 않습니다. 문학책을 읽어보면 세상에서 지어낸 이야기지만 성경은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더욱 가치가 있고, 성경에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세속적인 책을 읽어보면 시간낭비밖에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청소년 때에는 문학책을 많이 읽어야 하지만 나이가 들고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 일이 소중하며, 하나님께서 소중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하나님의 소원이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가 이것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선교하는 일이며, 개인은 이 일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 전도하는 일입니다.
야곱 쳄버린 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두 목사를 뒤받침 해야 한다. 하나는 국내에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과 다른 하나는 수억만의 구원받지 못한 해외에 있는 국민들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코크라고 하는 목사님은 “당신의 사랑이 해외로 날아갈 수 없다면 당신의 날개 하나는 부러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날개 하나가 부러진 것과 같습니다. 날개 하나 부러진 교회가 날아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선교하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고, 두 날개를 가진 새처럼 올라가고 부흥되며 축복을 주시는 줄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이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교회이기 때문에 이만큼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줄 아셔야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오셨는데,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지금도 얼마나 일하시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 전 어느 통계를 보니 주후 1세기에 기독교인의 비율이 360:1이었다는 자료가 나와 있었습니다. 20세기가 지나서 1991년 세계인구의 7분의 1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50년 중국 당시의 성도가 백만 명밖에 안되었는데 불과 50년 동안에 8천만에 육박하는 성도가 늘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1900년에 아프리카 지역에 불과 3%밖에 안 되었던 기독교인의 수가 40%나 늘었는데 이는 모두다 복음을 들고 지역 지역으로 들어갔던 선교사님들의 수고와 파송한 교회의 기도와 물질이 열매를 맺어서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에 참여한 모든 성도, 이 일에 참여한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주시는 줄 알고 이 하나님의 뜻을 잘 맞추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전도할 때에 특별히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친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85%는 믿음을 지킨다고 했으며,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도를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된 그 믿음은 쉽게 읽어버렸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계 전도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보기 싫은 것 중 하나가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사람들이 입주하면 그 아파트 입구에 천막을 치고 이 교회, 저 교회들이 서로 자기 교회 나오라고 전도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도하지 말고 내 주위에 가장 가까운 친척과 직장의 동료들과 친구들을 통해 관계전도를 부지런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전도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도 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그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일을 많이 했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나는 뒤 엣 것을 돌아보지 아니한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봉사하실 때에도 자기를 드러내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는 일도 그렇고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도바울을 높여주셨던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려고 할 때에 그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내 생각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삶을 살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일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일생을 바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안양일심교회 성도들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은혜도 받아야 하고, 깨닫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가지고 나의 뜻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고, 나의 뜻을 하나님께 바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서 일생동안 변함없이 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의 신앙이 가장 귀한 신앙이 됩니다.
저는 목사로서 제일 걱정스러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마치는 그날까지 한 가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 목사님은 개척할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목사님이시다’라는 소리입니다. 목표를 거기에 두고 기도하며, 제가 처음 결심했던 것을 하나님께 마지막까지 바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직장에 가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내게로 오라
문기태 목사
어떤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저마다 목사님을 대접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미달이 엄마도 생각다 못해 서툰 솜씨나마 잡채를 만들어서 드리기로 했습니다. 잡채를 받은 목사 부인은 너무나 이상하게 만든 잡채를 받아들고 매우 난감해 하다가 할 수 없이 비닐봉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주일 날 미달이 엄마를 만난 목사님은 어떻게 인사를 해야할지 난감했습니다. 목사님이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면 상처를 받을 것 같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달이 어머니, 친절하게 우리를 생각해주신 성의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잡채는 얼마나 대단한지 받기가 무섭게 사라질 정도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앞 부분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소문이 급속도로 근동에 퍼졌습니다. 그러자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수소문하여 배를 타고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까지 찾아왔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로 오셨습니까?" 하자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고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해 힘쓰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게 하는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모세는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리게 하였는데 당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기적을 행하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주기를 기대하는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보다 더 놀라운 생명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며 수근거립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가 그 부모를 아는데 어찌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 사람이 어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하고 웅성웅성하더니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모두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군중들뿐만 아니라 66절에 '제자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하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까지도 여론의 영향으로 예수님께 등을지고 돌아선 것입니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참 생명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냉정하게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교회를 찾아 왔다가 이들처럼 자신들이 기대했던 예수가 아니라해서 실망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썩는 양식 즉 육의 양식만을 얻고자 나아왔다가는 실망하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분명히 굶주린 무리들을 육의 양식을 가지고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순간적으로 배부르게 할 뿐인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잇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기도 응답이나 능력전도를 강조합니다. 경제문제나 자녀문제, 취업이나 시험등의 문제를 가지고 새벽기도나 심야기도등 기도시간에 교회에 나와 간절히 부르짖음으로 응답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문제든지 하나님께 들고 나아와 기도로 해결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소그룹이나 심야기도 또는 알파코스에서 병든 자를 위한 치유기도를 해 줍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치유받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도 알파에서 치유기도시간에 성령님의 강한 만져주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런 역사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능력의 예수님을 경험하게 하여 그분께 구원이 있음을 깨닫게 하여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내어 맡김으로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영혼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불치의 병에서 치유받고 곤경에서 기도응답으로 빠져나왔다고 해도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겉보다는 속에 숨겨진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본질적인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겉 모습은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외모가 어떻게 생겼으리라고 상상하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배용준이나 장동건처럼 잘 생기지 않았을까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증거합니다. 30대 초반에 50세 정도로 보았을 정도이니 얼마나 초췌한 모습이었을까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화려한 기적을 행할 때는 몰려왔다가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않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예수님 스스로 제물이 되시겠다고 하니까 실망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모여온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스스로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자신을 내어 주시어 영생의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생명의 양식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당장에 잠시 잠간 만족을 느낄 육의 양식에만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었어도 그것을 먹은 이스라엘백성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날마다 먹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으며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늘 나라는 물론 약속의 땅에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아무리 만나를 많이 먹어도 그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성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말슴을 통해서 예수님이 왜 이 땅에 내려오셨는지 설명하시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을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에서 눈을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 돌려 예수님만을 직시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을 체험한 분들중에 예수님을 멀리하고 떠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렇게 확실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적인 착각이었습니다. 위험한 질병에서 치유받고 위기의 상황에서 기도의 응답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경제문제, 가정문제 등 다양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고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내가 반드시 은혜를 갚을것이다. 감격하여 어쩔줄 몰라하지만 다 소용없습니다. 조금만 교회에 섭섭한 일이 있어도 등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맞추어주지 않았다고 존재와 사랑과 능력을 다 부정하고 배반합니다. 떠나갑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죄인의 본 모습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찾아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배가 고파 빵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입니까? 몸이 아파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입니까? 가정의 위기가 찾아와 해결받기 위해서입니까? 불안과 두려움, 스트레쓰 등 정신적인 위안을 받고 싶어서입니까? 물론 잘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경제문제, 건강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 마음의 평안 등 다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해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문제만 해결받고 돌아가면 여러분은 갈릴리 평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배불리 빵을 얻어 먹었으나 수근거리며 예수님을 멀리 떠나간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바가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떡과 생선은 직접 그 현장을 보고 직접 먹어보면 좋겠으나 못먹었어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것은 직접 체험해 보아도 좋고 체험을 못했어도 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표적을 통하여 우리로 참된 믿음을 갖게 도와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르게 믿게 하여 영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로 영생을 소유하게하여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의 주님을 보지못하고도 그 기적의 떡을 맛보지 못하고도 믿어지면 더 좋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대단한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체험하지 못했으나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고 받아들여 참된 만족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굶주린 자에게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항상 먹어도 다시 배고프고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도 여전히 배고픈 인생들에게 참 만족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서서히 죽어가며 멸망에 이르는 자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사람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하고 부르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만족과 기쁨을 채워 주시려고 간곡하게 예수님께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님께 나아오도록 부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예수님께 나오는 자를 내어 쫓지 아니하신다고 말슴하셨습니다. 실력이 없다고 내쫓지 않으십니다. 못났다고 내쫓지 않으십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내쫓지 않으십니다. 죄와 허물이 많다고, 과거가 깨끗하지 않다고 쫓아내시지 않습니다. 구원을 기대하고 나아오는 자들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나아오는 자들을 박대하지 않으십니다. 용서와 죄사함을 구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위로받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이들을 영접하시고 반겨 맞으십니다.
어느 마을에 자기가 못된 아이라고 인정하는 솔직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 애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크리스마스 때 예수님께 선물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선물을 자랑하는 친구들 때문에 상심한 그 아이가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예수님은 어떤 애들한테 선물을 줘?" "음, 거짓말 안하고 착한 어린이한테 준단다."
이에 고심하던 아이가 결심을 한 것인지 방으로 가서 예수님께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거짓말도 안 하고, 착한 일만 하는..." 여기까지 쓴 아이는 갑자기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착한 일을 한 기억이 없는 것이입니다. 아이는 곧바로 편지를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지금까지 착한 일을 한 것은 없지만 앞으로는 착한 일만 하고 살 거예요." 여기까지 쓴 아이는 또 다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앞으로 착한 일을 할 것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아이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집을 나가 동네 성당에 있는 작은 성모 마리아상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네 어미를 인질로 잡고 있다. 어미를 찾고 싶거든 선물을 보내라."
예수님은 착한 일을 하나도 한 것이 없는 사람도 돌아오기만 하면 반겨 맞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찾아 교회까지는 왔으나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교회에 가봐도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 내가 오랫동안 교회다녔는데 다 소용없더라."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훼방하는 방해꾼이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의 관문입니다. 교회에 나오셨으면 거기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품안으로 깊숙히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리에까지는 나아갔으나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결단하고 실천하여 진리를 내것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지금도 살아계셔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으면 그분께 믿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35절 말씀에서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과 삶속에 주인으로 모셔들여 예수님이 나를 주관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도록 자신을 그분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캐나다의 옛날 개척자들은 바빈 요새를 대피소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물자가 거의 바닥나자 빅터 클락과 한 젊은 안내자가 음식을 구하러 요새를 떠나 해즐튼 마을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요새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살을 에는 바람으로 뼈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었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불을 피워 그곳에서 비참한 밤을 보냈습니다. 이윽고 새벽빛이 서서히 밝아오자 그들은 그들이 멈추었던 곳에서 불과 수백 야드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포근하고 안락한 요새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우면서도 또 그렇게 멀리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약속의 땅의 경계선에 있었습니다 (민 13장).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보호, 그리고 승리를 주실 것을 의심했고, 결국에는 광야에서 40년간을 유랑하다가 경계선에서 죽게 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들 역시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또한 그렇게 멀리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수도 없이 들었으면서도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가까이 있으면서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계선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지금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기로 결단하십시오.
하늘에서 결정된 구원
김영규 목사
아버지가 주시는 자는 쫓아내지 않으심
오병이어의 기적 직후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영생에 대해서 문답을 하셨습니다. 영생 양식을 위해 일하라! 어떤 일을 하면 영생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어라! 당신을 믿을 만 한 표적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영생 얻는 길이다! 내게 오면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답을 하는 중에 주님은 오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생이란 주제는 유대인들에게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육신의 번영에 대해서는 잘 알아들었지만 영혼의 번영이나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힘들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60절) 요즘도 그래요. 육체 건강을 얘기하면 다 알아듣습니다. 물질 번영, 정치, 경제, 사회 얘기하면 잘 알아요. 그런데 죄, 영생, 영혼, 천국을 얘기하면 대학 나오고 박사가 된 사람도 잘 모릅니다. 그게 뭔 소린가? 지난주에 본문을 가지고 영생 얘기 했더니 좀 힘들었다고 하네요. 약간은 염려가 됩니다만 오늘은 좀 더 힘든 얘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든지 말든지 영생 얘기를 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오늘 말씀은 앞선 말씀보다 더 힘들어요. 왜 힘든가? 우리의 구원이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기 전에 벌써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우리의 구원이 예정되고 약속되었습니다. 인류 구원은 인간이 시작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어요.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세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이 구절에서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표현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 즉, 성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고, 예수님은 이들을 영접하여 구원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이 먼저 나를 택하시고 예수님께 나오게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구원의 삼 단계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둘째는 성자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셋째는 택한 자들이 주님께로 나아오는 일입니다. 이 일은 주로 성령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예수님께 나와 믿게 되는 것! 이게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이 정말 그렇게 가르치나요? 성경에 가장 넘쳐나는 것이 바로 예정과 선택에 관한 교훈입니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느9:7)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신4:20)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전에 나를 내 부친의 온 집에서 택하여 영원히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나니 곧 하나님이 유다 지파를 택하사 머리를 삼으시고 유다의 족속에서 내 부친의 집을 택하시고 내 부친의 아들들 중에서 나를 기뻐하사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느니라”(대상28: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성부 하나님은 구원할 사람들을 미리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택하신 자들을 단 한 명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위해서 100% 속죄하십니다. 그 결과로 택한 사람들은 다 주님께로 다가옵니다.
37절 말씀 중에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내쫓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입니다. 아버지가 뽑아서 보낸 사람은 절대로 아들이 쫓아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택한 사람에 대해서 두 번 심사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수용입니다. 살인강도든지, 간음하다 잡힌 현행범이든지, 사기꾼이든지, 정신 지체 장애인이든지, 육신의 장애인이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아버지가 택하셨으면 무조건 영접해주십니다.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로 일체의 스펙을 따지지 않습니다. 잘나고,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고, 유명하고, 이런 것을 일체 따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택하셨으면 무조건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교회를 종교인 집단, 의인 집단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한 편 맞는 말이지만, 또 한 편으로 맞지 않는 말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죄인들이 부름 받아 의인이 되어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현재형으로 따진다면 명목상 의인일 뿐이지 실제로는 다 죄인들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의인 운운하지 마세요. 오직 의로운 분은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남을 정죄하지 마세요.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다 죄인입니다. 잘난 척 하고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마세요.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될 죄인들입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 해야만 합니다.
이제 내 신앙을 역으로 추적해 보세요. 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까? 인생의 어느 순간에 갑자기 마음이 약해져서 믿게 되었나요? 이웃집 사람이 끈질기게 권하는 바람에 믿게 되었나요? 가족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믿게 되었나요? 부모님이 교회 안 가면 용돈을 안 준다고 해서 믿게 되었나요? 갑자기 풍파가 일어나는 바람에, 실패 때문에 믿게 되었나요? 아니면 내가 똑똑해서, 상황 판단을 잘 해서 믿게 되었나요? 내가 바르게살기를 잘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나요? 내가 남보다 자선 사업,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나요?
그 어떤 이유도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결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남이 권한다고 다 믿습니까? 압력을 넣는다고, 끈질기게 설득한다고 다 믿나요? 믿음이란 믿어지는 것이지 믿으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는 어느 순간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은 거부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의지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일은 불확실한 일이 아니라, 매우 확정적인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주신 자를 잃지 않는 것
성부 하나님은 구원할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이 택한 사람들을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완벽한 구원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8-39)
예수님이 왜 땅에 내려오셨나요? 자기의 뜻을 펼치려는 게 아닙니다. 오직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뭡니까? 성부 하나님이 택하셔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을 단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즉 세상 종말에 다 구원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완벽하게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걱정을 합니다. 이거 내가 예수 믿다가 실족해서 지옥에 떨어지면 어쩌나? 내 의지가 약해져서 신앙을 버리는 날이 오면 어쩌나? 도로 죄에 빠지면 어쩌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인생행로 중에 어떤 과정을 겪든지, 반드시 구원은 완성됩니다. 내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주님은 내가 아무리 실족해도 다시 용서하실 만큼의 충분한 속죄를 하셨습니다. 희생의 분량이 모자란다든지, 죄 값을 부족하게 지불하지 않으셨습니다. 충분히 속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주님을 믿고 회개하면 됩니다. 요즘 이단자들이 많습니다. 박00, 문00, 이00, 안00, 미국의 요셉 스미스 등등. 이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실패자라는 겁니다. 뭔가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교주가 채워야 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말씀은 있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구원받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0-11)
둘째로, 주님이 확고하게 나를 붙들고 계시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이십니다. 평탄한 길이든 험난한 길이든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66:9)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완벽하게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살다가 두 번의 종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적 종말입니다. 육체가 죽는 날입니다. 육신을 반납하는 날입니다. 이 날에도 우리 영혼은 살아서 하나님 품에 있으니 걱정할 게 없습니다. 둘째는 역사적 종말, 우주적 종말입니다. 그 때에는 흙에 묻혔던 우리 육체가 부활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 그러니 개인적 종말이든 역사적 종말이든 걱정하지 마세요.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넉넉히 살리십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우리가 할 일은 성자를 믿고 영생 얻는 것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고 영생을 이루는 일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40)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을 보고 믿고 영생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 유대인에 빗대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적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영생을 가진 자로 살아야 합니다.
기왕에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구원이라면 거역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따르는 것이 순리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사울에게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가시 돋친 채찍에다 발길질을 하다가는 너만 다칠 뿐이다!”(행26:14, 공동번역) 바위에 머리를 받으면 누가 깨집니까? 기둥에 발길질 하면 누가 다칩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주님을 거역하면 그렇습니다. 인생에 엄청난 대미지(damage)가 옵니다. 사람이 상합니다. 물질적 손실을 입습니다. 좌절에 부딪칩니다. 실패합니다. 노력을 아무리 해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들고도 뭔가 잘되는 사람이 있다면 지옥 자식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녀가 하나님을 대적하면 반드시 망가집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일이 풀립니다. 아들을 보고 믿으세요. 아버지 뜻을 이루세요.
주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말에 주님께서 우리의 죽은 몸까지 다시 살려 내십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최종 목표입니다. 영생을 위해 살고, 영생을 누리면서 사세요! 요즘 나이 많으신 어른들을 전도하다 보면 엉뚱한 말씀들을 하십니다. “죽어서 제삿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예수 믿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한심한 일입니다. 그래 죽은 후에 일 년에 한 두 차례 식은 밥 한 공기나 얻어 잡수시고 사시겠습니까? 육체가 죽은 이후에는 육체적으로는 대접 받으실 길이 없습니다. 영혼은 분명히 하나님의 엄격한 통제 하에 놓이게 되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죽은 영혼은 떠돌아다니는 귀신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처소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만 이 세상에는 수많은 귀신들이 돌아다니면서 조상을 빙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이방인들의 모든 제사는 귀신들에게 대고 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찬밥이든 더운밥이든 얻어먹을 수 없습니다. 헛된 생각 다 버리고 죽은 이후에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확고하게 믿으세요. 영생을 얻으세요. 그리고 영생을 가진 자로서 현세와 내세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박상훈 목사
엡5:25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교회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행여 그 동안 교회를 원망하며, 교회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사랑하지 못했다면, 이 시간 회개합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교회를 사랑합시다.
우선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바르게 알면, 우리는 저절로 교회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쁨으로 교회를 섬기며,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설립된 지 117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며,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여러 가지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대표적인 것 다섯 가지를 택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만 하는지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셨습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내 교회를 세우리니.”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학교를 세우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원을 세우지도 아니하셨고, 무료급식소를 세우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친히 세우신 기관은 오직 교회뿐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교회를 가리켜 “내 교회”라고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아니고, 장로들의 교회도 아니고, 교인들의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음부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곧 무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권세라고 번역된 단어의 본래 뜻은 관문입니다. 그러니까 음부의 권세란 무덤으로 들어가는 관문, 곧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머지않아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 곧 죽음은 예수님이 그의 교회를 세우시는 일을 결코 막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교회는 건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건물은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습니다. 교회란 예수님이 불러모으신 그의 백성들을 뜻합니다. 음부의 권세는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교회를 없애지도 못하며, 우리를 교회에서 분리시키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불러모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이것은 창세 전에, 곧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약속하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딛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① 믿음과 ②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딛1:2 ③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우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 곧 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이 목적하는 바를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믿음을 위함입니다. 둘째, 그들의 경건함을 위함입니다. 셋째, 그들의 영생의 소망을 위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칭의입니다.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둘째, 성화입니다. 경건하게 살면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영화입니다.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딛1:2 말씀의 끝 부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영원 전이라 함은 세상도, 사람도 존재하기 이전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누구에게 약속하셨습니까?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여기에도 똑같이 “영원 전부터”가 나옵니다. 창세 전에는 성삼위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택하신 백성들, 곧 교회를 성자 예수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이 없어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것 없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의 선물로서, 예수님에게 교회를 주시겠다고 창세 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를 예수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내쫓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물로 예수님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받은 선물이 보잘것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준 사람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 선물을 소중히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선물로 예수님에게 주셨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말하자면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에게 이와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택한 백성들을 의롭게 하며, 거룩하게 하며, 영화롭게 하여 너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겠노라. 그들은 영원토록 너를 섬기며, 너를 찬양하며, 너를 존귀케 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불러모으셔서, 그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세토록 예수님을 높이며, 예수님을 찬미하며, 예수님을 존귀케 합니다.
고전15: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15: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마지막 때에 교회는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완성된 교회를 사랑의 선물로 예수님에게 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그 자신을 포함해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교회를 다시금 하나님에게 바치십니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교회를 친히 세우시고, 그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아 안다면, 우리는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졌습니다.
요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성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사랑의 선물로 성자 예수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성부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가 세우신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자 예수님을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고전6:20 말씀과 같이,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 무슨 값입니까? 벧전1:18~19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행20:28 말씀과 같이, 교회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기의 피로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결코 단순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한꺼번에 다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교회보다도 더 귀한 존재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욕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값진 것이 바로 그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를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며 소중히 여겨야 마땅합니다.
마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그의 교회에 속하는 어린 아이 하나라도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 아이를 대할 때에라도, 우리는 마치 예수님을 대하듯이 그 아이를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단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그의 목에 연자 맷돌을 두르고서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죄가 크다는 뜻입니다.
우리 눈에 아무리 작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소홀히 여기거나 무시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자신의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를 사랑하며 그를 소중히 여겨야 마땅합니다.
셋째로,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교회, 곧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성도들 사이에 온전한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행해지는 일들이 이 지상에서는 어디에서 행해집니까? 바로 교회에서 행해집니다. 만일 교회가 없다면, 우리가 주의 날에 어디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예수님을 높이며,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지상의 교회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모인 지상의 교회이기에, 교회 안에는 얼마든지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성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날, 우리는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에서는 우리가 온전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며, 온전하게 예수님을 높이며, 온전하게 성도들과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마6:9~10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과연 이 세상 어디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루어지겠습니까? 국회이겠습니까? 법정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러한 곳은 오직 한 곳 예수님의 교회뿐입니다.
장차 우리는 천국에서 영생하게 됩니다. 그 이전에 우리가 이 땅에 잠시 살면서, 장차 있을 천국에서의 삶을 가장 가깝게 누리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넷째로, 교회는 진리의 보루입니다.
딤전3:15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교회는 진리의 기둥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세우며 떠받듭니다. 아울러 교회는 진리의 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 위에 서있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지키는 보루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쉴새없이 새로운 정보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날로 새로운 지식이 쌓여갑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절대적인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요18:38에서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요17:17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진리임을 밝히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은 오직 한 권 성경뿐입니다.
요8:44에서 예수님은 마귀를 가리켜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진리가 서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이와 같이 거짓된 마귀를 대적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진리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시국 강연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을 가르치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칩니다.
교회를 처음으로 찾아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가 참 재미있어. 내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네. 나는 교회가 좀 특별한 줄 알았는데, 와보니까 전혀 낯설지를 않아.” 생전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한다면, 이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에 와보니까,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 설교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네. 딴 나라의 말을 듣는 것 같아.” 교회를 처음 찾은 사람의 입에서 이와 같은 말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진리를 전파하며 진리를 가르칩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진리의 보루가 되어, 진리를 지키며 진리를 사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섯째, 교회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회사나, 관공서나, 정치 단체를 그의 증인으로 삼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그의 증인으로 삼으신 기관은 오직 한 곳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까? 교회 안에서가 아닙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이나 우리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의 직장 동료들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때로는 우리가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유대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보다 더 멀리 사마리아로 갈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도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고후2:15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향기입니다. 또한 고후3:3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아울러 고후5:20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이 보내신 그의 사신, 곧 예수님의 대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서나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우리 자신이 직접 땅 끝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그 곳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먼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 때 누가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까?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그들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는 선교의 사명을 가진 이들을 따로 세워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도록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그리고는 후방에서 그들을 기도로 도우며, 또한 물질로 그들을 후원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그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교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면, 우리는 저절로 교회를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면, 우리는 저절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셨습니다. 둘째,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졌습니다. 셋째,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넷째, 교회는 진리의 보루입니다. 다섯째, 교회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축구시합에서는 우리가 이길 수도 있고, 반대로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이름도 승동교회(勝洞敎會), 곧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울러 예수님이 그의 교회를 사랑하셔서 그 자신을 주심과 같이, 우리 모두도 예수님의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언제나 기쁨으로 우리 자신을 다 바쳐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을 위하여
백장흠 목사
시간표에 의하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하루의 시작이 아침이라면 마지막은 저녁입니다. 인생의 시작이 출생이라면 마지막은 죽는 순간입니다. 서울역을 출발하는 열차는 종점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가면서 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아니하면 종착역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나는 지금 얼마정도 남았는가? 아니 분명히 마지막이라는 역에 도달할 것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을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한국의 격언에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예비하고 살면 환란을 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느 부자 영감이 있습니다. 자기 집에 수많은 하인들이 있는데 그 중에 그렇게 미련한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센스가 없습니다. 사람은 감각이 예민해야 합니다. 속된 말로 눈치가 빨라야 합니다. 처세술에 능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호감 갈 수 있도록 인사처리도 하고 요즈음말로 정치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답답하게 느꼈던 주인이 하인을 불러 가르쳐도 보고 충고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나중에 그 미련한 종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사는 동안에 여러 사람을 만나도 보고 내 주변에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지만 너같이 미련한 사람은 처음 보겠다. 만일 너보다 더 미련한 사람을 혹 만나게 된다면 이 지팡이를 그 사람에게 주어라. 그러면서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주인 영감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때 미련한 하인이 상전을 만나 문병 인사를 하면서 아니 그렇게 편치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요? 인사하니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 그럽니다. 그때 하인이 묻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멀고 먼 황천길을 가는 거다. 그래요. 그러면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준비는 무슨 준비냐 그때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그의 가슴에 놓아두면서 세상에 이렇게 미련하고 바보 같은 양반은 처음 보겠습니다. 며칠 여행을 가도 가방이며 여권을 챙겨야 하는데 그 멀고 먼 길을 간다면서 준비가 없다니 이 지팡이의 주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노후대책을 위하여 보험을 든다고 합니다. 국민 연금이 있지만 노후를 보장할 만큼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철저하게 준비하자고 말합니다. 그래도 자녀들을 기대해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행히 효자효녀를 두어서 보장받을 수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후대책 이후를 위하여는 무슨 준비를 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 부자가 있습니다. 소출이 많습니다. 보다 큰 창고를 지었습니다. 여러 해 마음껏 쓰고 먹고 즐길 수 있는 재산이 있습니다. 부자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쌓아둘 곡간을 짓겠다. 그러면서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였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계획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가 예비한 것은 어떻게 되겠느냐” 라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눅 12:13-20)
사람이 이 세상에서 수 백년 살 거라고 착각하면서 그 날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겨울이 오면 금방 봄이 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이후에는 그 날이 옵니다. 즉 우리가 세상을 떠나야 할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종말이 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의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죽는 날이 종말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개인적인 종말이라는 게 꼭 나이가 많아야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병사 사고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 오시는 날이 종말입니다. 주님 재림의 날이 종말입니다. 이를 역사적인 종말이라고 합니다. 언제 종말이 오느냐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언제 오신다라고 하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들었던 한국교회였습니다. 앞으로 재림 날짜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그 계산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준비가 되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학자들이 미래를 예측합니다. 미래에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Peter Schwarth’ 같은 이는 『격변기에 다가올 7가지 불가피한 요인들』이라는 책에서 향후 25년 간에 걸쳐서 1)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지금에 비해 크게 연장되어 노년층이 주류 사회에서 활동할 것이다. 건강 개선으로 사람이 120년을 살게 될 때가 온다. 2) 인구이동 패턴이 변화함으로 사회혼란의 요인이 될 것이다. 과학기술분야에서 경이적인 신발명이 이루어질 것이다 등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이후는 예측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죽음이 옵니다. 그리고 더 중대한 일은 우리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마지막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 날을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합시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준비합니까?
1) 예수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에서 내용 있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빈 깡통이 요란합니다. 겉포장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용이 중요합니다. 진짜가 되어야 합니다. 농사꾼의 입장에서 알곡이 있고 쭉정이도 있다면 알곡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왜 시험에 듭니까? 내용분석을 해보세요. 예수는 없고 사람만 있기 때문입니다. 왜 불평이 있고 낙심하게 됩니까? 인본주의 신앙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기주의는 죄 입니다. 예수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실패합니까? 사람마다 약점이 있습니다. 고상한 말로 하면 핸디캡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약점이 경제적인 것이나 지성적인 것 즉 머리가 나쁘다던가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핸디캡입니다.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 약점을 잘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2) 주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오래 믿었는가? 무슨 직분으로 일했는가?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7:21-27절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 날에 주앞에 서게 되는데 주여 주여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주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럼으로 나를 떠나가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21절에는 “다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십니다. 예수를 믿어도 아버지의 뜻대로 믿어야 합니다. 사명을 수행할 때에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설교 중에 사용하였다는 예화가 있습니다. 마귀들이 회의를 합니다. 회의 제목은 어떻게 하면 지상의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것인가? 제1마귀-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의장 안 된다. 그건 예전에 사용했는데 약효가 없다. 제2마귀-나는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이 미련한 놈아 그게 통하냐? 제3마귀-저는 무조건 핍박하고 죽이겠다고 위협하겠습니다. 그건 초대교회 때 써먹었었지. 순교한다고 더 좋아 하잖아. 경험 많은 늙은 마귀 하는 말 신종 개발품이 있습니다. 믿어라. 그런데 내 마음대로 믿어라. 그러면 된다고 했답니다. 이 부분은 조금 고쳤습니다.(조금 있다 믿어라가 원문인데요) 우리는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믿으면 그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2. 마지막에 후회 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누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무엇이 되었다. 물론 자랑스러운 삶입니다. 무엇을 얻었다는 것도 성공이지요. 많은 재물을 얻었다, 높은 지위를 얻었다, 그것이 자랑스러운 것 맞습니다. 얻지 못한 것보다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생의 성공자는 그 날에 후회할 것 없이 마지막을 맞는 사람입니다. 그런 유머가 있습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있답니다. ~걸 ~걸입니다. 예수 믿을 걸, 그때 교회에서 봉사하라고 할 때 봉사할 걸,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 사랑할 걸, ~걸 ~걸 그 소리만 한 답니다. 우리는 그 날에 그렇게 하기를 잘했어. 잘 했어. 다같이 잘했어. 잘 했어. 그런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봉사하면서 살기를 잘했어. 주의 종 돕기를 잘했어. 마지막이 올 때 후회할 게 없는 사람이 됩시다.
1) 철저하게 회개하면 후회 할 것이 없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후회할 때는 이미 늦습니다. 왜 사람이 지옥에 갑니까? 죄 때문에 지옥 갑니다. 회개하면 천국 갑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부부싸움을 심하게 한 이들이 있습니다. 부부싸움 해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삼가 해야 합니다. 남편 되는 이가 너무 화가 났습니다. 아내가 사과하면서 여보 미안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화를 풀지 않습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하면 되요 라고 목사님을 찾아와 하소연합니다. 여러분! 이런 때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울어야 합니다. 잘못했어요 라고 말하면서 자꾸 울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회개도 쉽지 않습니다. 후회 없이 마지막을 맞으려면 하나님께도 눈물로 회개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눈물로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그 날 마지막 날에는 결코 울지 않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그 날에 웃는 사람이 됩니다. 회개를 적당하게 하지 않고 철저하게 한 사람은 같은 죄를 범할 기회가 와도 범죄하지 아니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깨끗하게 청산하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 자리로 돌아 온 것을 말합니다. 예수 잘 믿던 그 자리에 돌아옵니다. 예배 잘 드리지 못하다가 다시 돌아와 예배 잘 드립니다. 충성하지 못하던 사람이 회개하면 충성이 자리에 돌아옵니다. 원위치에 있게 됩니다.
회개는 위대한 결단입니다. 끊을 것을 과감하게 끊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롤로 메이’는 사람이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데는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첫째가 소망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살았다 하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입니다. 둘째는 의지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결단이라 하였습니다. 살기 위하여 버릴 것은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회개는 바로 위대한 결단입니다.
2) 내게 주신 사명을 다하면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사명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와서 하는 일 없이 살다가 오라고 우리를 보낸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1) 나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사명의 식이라고 합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도 사명이 있고 버려진 것 같은 돌 하나도 쓸모가 있습니다. 나를 세상에 나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는 게 있다라고 하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비교적 소중한 날이 어느 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혼하던 날이라고 하는 분도 있을 수 있고, 첫 번째 아들을 낳던 날이라고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시험에 합격한 날이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스위스의 사상가인 ‘칼 힐티’(Cal Hilthey)는 인생에서 최고의 날은 자기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직분 받던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귀중한 분입니다. 내게 주신 사명이 왜 귀중합니까?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명의 귀중성을 모르는 사람은 그 날에 후회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 유명한 달란트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달란트의 귀함을 망각했습니다. 교회가 일하라고 직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분의 귀중성을 모르면 이후에 잘했다라는 칭찬을 듣기 어렵습니다.
(2) 사명을 다하려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의 3대 요소로 재능, 열정 그리고 가치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십니다. 재능은 계속하면 하게 됩니다. 음악을 잘 못하는 분도 계속 성가대에서 봉사하면 잘하게 됩니다. 문제는 열정입니다. 일을 해내는 에너지입니다. 열정이 있는 구역장, 기관장이면 무언가 해냅니다. 열정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는 일이 귀하고 하고 싶어서 흥분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열정이 없으면 인생은 허무하고 공허합니다. 열정 없는 사람에게 일을 맡겨 놓으면 시간만 보내려 하고 놀려고 합니다. 남의 눈치나 살핍니다. 속된 말로 한심하게 보입니다. 사명자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을 다하려 한다면 가치성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이 일은 어느 일보다 귀하고 가치가 있다고 느껴져야 합니다.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입니다. 어느 일류대학 교수가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졸업식을 합니다. 물론 유치원생이 공부를 마치고 사진 찍을 때 가운을 입히듯이 교회 성경공부도 마치고 나면 가운을 입힙니다. 그건 학위 가운이 아닙니다. 그 장로님이 성경공부 마치고 찍은 사진을 전에 박사학위 받을 때 박사 가운 입고 사진 찍어 걸어놓았던 그 자리에 붙여 놓았습니다. 자기 자신은 그렇게 그게 자랑스럽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의 어느 직책보다 값이 있다고 느껴졌다면 이는 삶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3) 사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하여 산 사람은 그 날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Livingstone)은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내게 맡겨주신 사명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최선을 다 하는 게 무엇입니까?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 복음 증거함에는 나의 생명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행 20:23-24)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사보나 롤라’ 라고 하는 중세의 유명한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타락한 교회와 수도사들과 교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부패와 타락한 모습을 회개하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위협으로 느낀 교황은 사보나 롤라를 회유하기 위하여 추기경의 자리를 약속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의 설교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회유하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에게 나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를 원하고 눈앞에 화려한 이익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고 순교자의 붉은 모자를 쓰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소신을 다하였습니다. 사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자랑스러운 마지막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 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한답니다. 그러나 말년이 복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이제부터 승리로 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승리라는 것도 마지막 승리가 진정한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는 내 마음대로 살고, 가고 싶은 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결산을 하셔야 합니다. “누가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 3:7)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겁니까? 사람과의 관계는 원만합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그때까지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철저하게 준비합시다. 준비는 미리 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나의 삶의 마지막이라고 하더라도 후회할 것이 없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그리고 사명을 다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에 후회 할 것이 없고 마지막에 승리한 사람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승리로 팡파레를 울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중생과 부활
요한복음 6장 39-40, 44절 / 김홍도 목사
사형집행장에서 근무했던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책을 보면, 유두영이란 사람은 아주 잔인한 살인범인데 새까만 눈썹이 맞닿은 듯하고 어깨가 딱 벌어진 것이 마주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는데, 어느 날 불러다가 상담을 하는데 살기가 등등해서 냉소적인 태도로 쳐다보고 있더랍니다. 기도하자고 하니까 눈을 빤히 뜨고 째려보더랍니다. 그래도 얼음이 언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성령의 역사로 유두영의 얼굴을 얼싸안고 울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완악한 유두영도 마음문을 열고 울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사형집행 날이 되면 사형수들 대부분이 “난 안가, 죽기 싫어.” 한다던지 “어머니, 엄마” 하며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을 치거나, 바지에 대소변을 보며 벌벌 떨기도 하고 별별 사람이 다 있는데 유두영은 예수님 믿고 거듭난 후부터는 만나는 죄수들마다 “죽을 준비 돼 있어?” 하며 열심히 전도했다고 합니다. 사형집행 날이 되어 유두영이도 끌려가는데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연발하더랍니다. 그래서 “유두영이 겁이 나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마침 박 장로님 앞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두영아, 잘 가. 먼저 가.”하면서 더듬거렸더니 도리어 “예, 장로님 먼저 갑니다.” 하고 힘차게 말하더랍니다.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영적 권위와 능력 때문에 흠칫 물러서게 되더랍니다. 사형장에 도착해서 소장님이 “오늘 법무부 장관의 명령에 따라 유두영 씨의 사형을 집행합니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집행 선고를 했더니 유두영은 “아멘” 하더랍니다. 소장이 이름, 생년월일 등 인정 신문을 끝내고 끔찍한 죄상을 요약해 읽어 가는데 유두영이 손을 쳐들더니 “소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하니까 모두 놀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소장님, 지금 읽으시는 그 죄를 제가 다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제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지은 죄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런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늘 이와 같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늦게나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제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기억도 아니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고 말할 때에 형장 안이 숙연해지더랍니다. “이제 예수님 믿고 8년이란 긴 세월을 살다가 아버지 나라도 가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시고 기억도 아니하시는 그 더러운 죄를 다시 듣고 가기가 싫습니다. 용서 받은 깨끗한 영과 몸 그대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그 부끄러운 죄를 읽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단아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소장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눈에 눈물이 흐르더랍니다. 임종 예배를 드리는데, 유두영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우고 자기의 온몸을 장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다 기증한다고 하더랍니다. “유언을 남기겠느냐.”고 물으니까 잠시 있더니 “소장님, 그리고 검사님, 제 마지막 부탁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제가 믿는 예수님을 믿으시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밧줄 올가미를 목에 거는데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오는데 누가 부르나 하고 살펴보니까 바로 유두영이 부르더랍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찬송을 부른 뒤 “덜커덩” 하고 지하실로 떨어지더랍니다.
1.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생과 부활을 보증하셨습니다.
유두영 같은 잔인무도한 죄인이 죄사함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만민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3일 만에 무덤 문을 박차고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금요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오늘, 3일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보다 더 큰 기쁨의 사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도 없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활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의미를 찾자는 게 아닙니다.
① 부활은 신약 성경의 중심 교리이며 초대교회 설교의 중심이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 사건은 당연한 사건입니다.
② 부활은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믿는 자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 즉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40절에도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었다가 마지막 날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하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란 말씀입니다. 44절에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상 끝 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부활 신앙을 성경에서 빼 버리면 계란에서 노른자를 빼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③ 부활은 사도 바울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뒤부터는 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이 기나긴 장 전체를 통해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봄에 옥수수나 콩을 심으면 죽어 없어지고 맙니까? 다시 수십 배, 수백 배로 다시 사는 것을 보면서 어찌하여 사람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느냐, 어리석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카이로에서는 3,000년 된 완두콩이 살아나서 열매를 맺었고, 불란서에서는 2,000년 된 무덤에서 찾아낸 꽃씨를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잎이 나서 꽃이 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고, 15절에서는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고, 17~18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또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부활과 내세가 없다면 예수님 믿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믿고 영생,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희생도 감수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죽을지라도 재림 나팔소리가 들릴 때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던 자들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홀연히 부활의 몸과 같이 변화되어 들림 받게 된다고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전 메시지의 중심은 부활과 영원한 천국입니다.
④ 부활은 수제자 베드로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전 제자들의 설교 중심은 바로 부활입니다. 사도행전 2장 23~24절에도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했고, 사도행전 2장 31~32절에도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고 했고, 사도행전 3장 14~15절에“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제자들은 겁에 질려 다 도망가 숨었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환희에 차서 순교했습니다. 유대인 학자, 핀카스 라피데(Pinchas Lapide)라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이란 책에서 “골고다의 죽음 직후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부활이 없고 영생, 천국이 없다면 고생하며 핍박을 받으며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4세기 경의 그레고리 나지안첸(Gregory Nagiangen)은 “인간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돌아가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2. 부활은 거듭난 자(重生)에게만 일어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 않고 건성으로 교회에 다닌 사람이 부활을 기대하는 것은 무정란을 부화기에 넣고 병아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계란에는 무정란, 유정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정란은 수탉이 없이 암탉만 가두어 키워서 낳게 한 계란입니다. 유정란은 암탉이 수탉과 함께 살면서 낳은 알입니다. 깨뜨려 보면 그 안에는 생명의 끈이 있습니다. 이런 알은 건강에 좋기 때문에 값도 비쌉니다. 그런데 병아리가 되는 것은 반드시 유정란이어야 됩니다. 무정란은 그 안에 생명의 씨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병아리로 부화하지 않습니다.
계란이 한 번 태어나서 닭이 될 수 없고, 따뜻한 열을 가해서 다시 한 번 태어나야 닭이 되듯이 사람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하나님도 볼 수 있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실 때,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육신이 한 번 태어나고, 성령의 역사로 영혼이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에베소서 2장 1~3절, 로마서 1장 18~32절), 마귀를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이고(에베소서 2장 2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장 3절). 또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장 3절, 예레미아 17장 9~10절, 예레미아 13장 23절). 육신이 태어날 때는 세상에서만 살 수 있는 육신의 생명을 갖게 되고, 영혼이 태어날 때는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부활을 알 수 없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3.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요사이 복제동물, 복제인간을 만들 때 그 사람 혹은 동물에서 DNA를 떼어 접합시키듯이 영적으로 기독교의 신적 DNA를 심령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한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우리는 신의 성품을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35절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고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예수님과 같이 신의 성품을 갖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한 말씀대로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고 영접하며 입으로 고백하면 됩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3장 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전체가 기록된 목적, 특히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멸망할 죄인들이 거듭나서 영생을 얻었다가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거듭나는 역사는 인간의 노력이나 도덕 선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속에 성령의 감동이 오는 것을 묵살해 버리면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