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2-59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 6:52-59 /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예수의 말씀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이 사람이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겠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53)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할 수 없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모두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다. 57)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능력으로 내가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내 능력으로 살 것이다. 5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떡이다.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그런 떡이 아니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59) 예수께서 이 설교를 하신 곳은 가버나움 회당이었다.
예수님은 참된 양식을 먹으라 하십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은 여전히 다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다(52-55) 예수님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역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서로 다툼으로써 그들의 영적인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서로 다투다는 것은 투덜거리며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참고 출 17:2; 민 20:3). 그들이 서로 다툰 이유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매우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만일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자신 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35절에서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성만찬적인 용어로서 고난을 받으실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를 “참된”이라고 합니다. 이는 만나와 같은 불완전한 물질적인 양식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 된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된 현재적 구원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완성 될 미래적 구원인 것입니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6-59) “그가 내안에 머문다. 그리고 나는 그의 안에 거한다.”(56)는 말은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한 말씀과 같이 성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데, 이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인 역할로 인하여 성도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과의 연합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연합에 참여하게 됨으로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며, 이것은 인간에게 더할 수 없는 가장 큰 축복이며 영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삶이야 말로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인 것입니다.
적용: 모든 육체를 가진 생명 가운에 인간만이 땅을 디디고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일 것입니다. 당신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우리 몸에 5리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액체 속에 우리의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을 때 해골이란 뜻을 가진 골고다에 그 피가 스며들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해골, 곧 죽음 속으로 그분의 피가 스며들어 왔습니다. 해골들이 예수님의 피를 마셨습니다.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해골이며 죽음입니다. 무덤인 우리는 예수님의 피가 들어와 그 피를 마셔야 살아납니다.
< 설 교 >
생명의 떡과 피
요한복음 6:47~59 / 이필재 목사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사건 중에서 규모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것이 오병이어 사건이라고 보는데 약 1만 명 정도가 참여하고 체험한 일이고, 또 그 내용은 보기만 했던 기적이 아니라 자신들이 먹고 배가 부른 사건이라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기적에 속합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신비로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우리 갈보리 교인들이 영아부에서부터 노인층까지 주일날 출석하는 모든 교인이 야외예배를 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갈보리교회에 등록한 1만2천명의 교인이 다 모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점심식사 준비는 하나도 안 해서 빈손으로 갔습니다. 야외예배를 드리고 오락도 하고 재미나게 놀았는데 저녁때까지 있다 보니까 모두 배가 고팠습니다. “큰일 났다. 너무 배가 고프다.” 그런데 가지고 간 음식은 주일학교 학생 가운데 한 아이가 햄버거 5개와 꽁치 두 마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한번 했더니 1만2천명의 우리 교인들이 모두 다 배불리 먹고 12바구니가 남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너무나도 신비스러운 사건이 지나갔습니다. 이 요한복음 6장에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적 사건을 본 사람은 또 보고 싶어 합니다. 이제 떡을 먹은 사람들의 좋지 않은 버릇이 생겼습니다. 사람만 많이 모이면 떡을 만들어내라는 은근한 기대와 요청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온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4천명 먹이는 기적을 또 한 번 행사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만 보면 다른데 마음을 쓰지 않고 ‘설교를 왜 이렇게 길게 하시나? 빨리 끝내고 어서 떡을 만들어주시지!’ 이렇게 한 끼 배부르게 먹고 싶은 요청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오늘 말씀 6장 전면에 나오는 기적 사건인데 이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서 그런 육신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을 주시겠다고 설교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먹은 군중들에게 바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한 끼를 배부르게 하려는 데는 예수님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초능력의 사건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이 일을 행하는 이가 누구냐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이는 메시야로다.” 이 고백을 들으려고 행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기적을 베풀어주셨는데 군중들은 배고픈 한 끼를 해결한 그 기쁨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원히 배부른 생명의 떡을 내가 주겠다.” 오늘 이렇게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떡보다 배부르게 먹은 사람도 그 이튿날 또 배가 고파집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셨다면 그 백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백성이 되었고 결국 퇴보 문화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 생명의 영원성을 보장해주기 위함인데 그러한 일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실 때만 가능하다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설교했더니 유대인들의 오해가 또 생겼습니다.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겠느냐?” 마치 식인종을 연상하는 오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의 불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을 때입니다. 속죄의 살을 먹고 피를 뿌리는 일은 이미 유대인들의 제사 문화 속에 뿌리 깊이 전해져 내려온 사실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속죄하기 위한 속죄제를 여러 가지 형태로 드렸는데 제일 많이 드린 것이 양을 끌고 와서 제사장이 그 양의 머리에 안수를 해서 인간의 죄를 끄집어내서 그 양에게 뒤집어씌우고 운명적으로 죄가 많아진 그 양을 잡는 것입니다. “너는 죄가 많아졌으니까 죽어라.” 그리고 그 양을 잡아서 순서를 다 하고 양의 고기를 함께 나누어 먹는 순서가 있는데 이렇게 함께 나누어 먹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영혼의 임재가 자기들의 영혼에 오시는 영적 만족감을 가져오고 자기들의 속죄를 믿으면서 영혼의 기쁨을 가져오는 제사 의식입니다. 다 그렇게 했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그 제사가 무효가 됩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의 말씀이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무효라는 말입니다. 이 제사 음식을 반드시 먹어야 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살과 피도 반드시 먹고 마셔야 됩니다. 안 먹고 안 마셔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반드시 먹고 마셔야 예수님의 생명의 결부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 성찬식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이것을 기념하면서 나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를 상징화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관계를 생각할 수가 있는데 인간의 수없이 많은 관계성 중에서 가장 깊은 관계 설명을 두 가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관계의 남녀가 사랑의 최고의 표현을 결혼이라는 예식과 아울러서 하는데 이것은 “부부가 한 몸이 될지라.” 그래서 피차 살을 나누는 의식 속에 영혼의 대화를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는 1대1의 인격 승화의 결합체로서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깊은 관계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둘이 한 몸이 될지라.” 이렇게 혼합체를 말씀했습니다. 이 관계의 내용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둘만의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회는 이 관계를 아주 신성시하고 존경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는다는 의미는 바로 그러한 하나가 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주님과 나를 승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살을 나누는 관계보다 더 진한 관계가 있습니다. 피를 나누는 관계입니다. 그것이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자녀의 관계는 영원히 뗄 수가 없습니다.
나의 분신이기 때문에 피를 나누었기 때문에 도저히 떼려 해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의미는 그런 관계의 결합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래서 주님과 나는 위대한 생명의 결부가 이루어져서 떼려야 뗄 수 없고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고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진액이 교환되어 버려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살과 피를 물려받은 아버지의 자녀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관계의 고백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이냐?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고 이 관계를 설명할 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주님과 더불어 한 몸이 된 사람을 만약에 어떤 사람이 칼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데 그 중앙을 칼로 치며 “너희들을 갈라놓았다.” 그러면 그게 갈라지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관계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어떤 것도 주님과 나를 갈라놓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이 하나가 되고 피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상징화해서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 시대 제사용 양은 흠 없고 점 없는 일 년 된 어린 양을 사용했기 때문에 쓴 말입니다. 왜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 양이 죽어야 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양의 피를 대속의 피로 정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은혜의 제도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린양 되신 예수님은 바로 구약 시대의 제사와 똑같이 십자가에서 자기 피를 흘려서 오고 오는 세대에는 양 잡아서 제사드릴 필요 없이 단번에 인류 전체 구원을 마지막으로 이루시며 속죄 완성을 예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대속죄일에 온 국민이 모여서 어린 양 하나를 데려다가 대제사장이 거기다 안수하는 것은 온 백성의 죄를 네가 뒤집어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너는 이렇게 죄의 덩어리가 되었으므로 살려둘 수가 없다.” 그래서 죗값으로 그를 죽이고 인간들의 죄는 속죄함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제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이 대신 지셨으므로 어쩔 수 없이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 속죄가 됩니다. 단번에 제사를 드려주신 것이 바로 기독교인데 왜 내가 죄를 짓고 예수님이 죽으셔야 하느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은혜의 종교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의 피의 속죄 능력을 믿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은혜의 길을 믿으면 되는 간단한 원리의 기독교 종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내게로 오라. 다른 데 가서 구원을 찾지 말라. 내게로 오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 뭐가 쉽고 가볍습니까? 믿으면 됩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미 예수께서 다 치러주신 속죄의 능력 가운데 그래서 내가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가지면 아주 쉽고 가볍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장점이란 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어느 종교는 무거운 짐을 지어서 인간을 더 못살게 구는 종교가 세상에 흔하게 많습니다. 이 십자가 종교는 우리를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부터 자유하게 했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재판관이 “너는 죄가 없다.”라고 선언하면 끝났습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현장에서 그냥 걸어서 바깥으로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가 어떻든지 아담 때부터 원죄를 받았든지 말았든지 상관없이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순간,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순간 내 죄는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장점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죽는 것입니다. 예수의 구원은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영생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에 “사망으로부터의 자유함” 이런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모든 두려움과 공포에서 자유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살면 양심의 고통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내가 큰 죄를 지었다.’ 그런데 그 죄를 가지고 있지 말고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를 해버리면 다시는 기억치 않는다는 양심의 고통으로부터의 자유함, 자유의 인간됨을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교가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명을 놓고 “이것은 내가 마셔야 할 잔”이라고 결단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고 결단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1절에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 속죄의 길을 내가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자신이 치러야 할 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고난의 잔을 마셨고 고난의 길을 떠났으며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고자 이 성찬을 이렇게 배찬 하였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까? ‘나도 주님을 위하는 일에는 살을 떼는 아픔과 피를 흘리는 결단의 마음으로!’ 이렇게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후로 이 세상의 모든 나의 자녀들 가운데 나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자들에 의하여 세상은 구원의 길이 넓어질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사명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런 사명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성찬과 이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뉴멕시코주 알버버지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장로교가 운영하는 요양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요양원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한 대학생이 어떤 처녀를 사랑했는데 아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정말 좋지 못했습니다. 이 청년은 대학을 졸업한 후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건강이 계속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는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그 청년을 물리칠 수 없고, 또 이 세상에서 나에게 대한 지극한 관심을 저렇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어 우리 결혼하자고 결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점점 나빠집니다. 그가 다니던 신학교와 관계가 있는 요양원이기 때문에 뉴멕시코주 알버버지 요양원에 가서 건강 회복을 위해서 요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녀의 부모들은 딸에게 날마다 그 청년을 단념하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의 건강이 결혼 생활을 절대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결혼해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처녀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사랑의 감동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뉴멕시코주에 있는 이 요양원으로 가니까 자기는 버지니아에 사는데 거리가 멀어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알버버지에 있는 이 요양원을 찾아왔습니다. 원장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내가 이 요양원에서 뭐든지 시키면 열심히 일할 테니 여기 있게만 해주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서 요양을 하고 있는데 그는 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랬더니 그 원장이 “그러면 여기서 나의 비서를 하십시오.” “그러겠습니다.” 그래서 원장의 비서 일을 보면서 그 월급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치료비를 대신해주면서 옆에서 돌보며 지극한 사랑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건강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의사의 진단이 일주일 밖에 살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길어야 일주일이라는 시간입니다. 그랬더니 이 처녀는 그곳에서 일하는 목사에게 찾아가서 빨리 이 사람이 죽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누구도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일주일 밖에 살수가 없는데 왜 결혼식을 하려고 하느냐?” 그랬더니 “살아있을 때 결혼식을 올리면 내가 그의 이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의 흔적을 내가 영원히 가지고 살고 싶어서 그럽니다.” 미국에서는 결혼하면 남자의 성을 따릅니다.
그러니까 “Last Name을 가져 호적에 올리고 그의 이름을 갖고 내가 평생을 살겠습니다.” 그렇게 간청을 해서 할 수 없이 환자를 놓고 결혼식을 올려주었습니다. 정말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식에서 그 부인이 조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이제 나의 사명이 이 요양원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아내가 되어 주리라. 그리고 어머니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남편과 사랑을 나누던 그 요양원을 90세까지 떠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으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면서 용기를 주었던 분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요양원의 원장이 되어서 책임자로 90세까지 일을 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우리나라 한경직 목사님도 그 요양원에 가서 2년 동안이나 그분의 지극한 정성을 받으면서 건강 회복이 되신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돌아가시면서 이름 하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앞으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 이름으로 살고 내 이름을 위해서 살고 죽으라.”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지금 평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 살과 피를 마시면서 먹으면서 나를 기념하라.” 이렇게 하셔서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그의 이름을 우리가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하는 마음의 결단을 가지고 이 성찬에 참여하고, 세상이 다소 고난스러워도 내가 주님이 된 그런 마음으로 그런 믿음의 고백으로 세상을 담대하게 이겨가는 힘과 능력의 영적 샘이 되기 위한 피와 떡입니다. 그런 의미로 이 성찬의 떡과 잔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떡
요 6:47-51 / 이규왕 목사
죽음을 전제로 하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본성 중에 하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와 같은 인간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을 육신의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먹는 것은 배부른 자들의 여유나 유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생존을 위해 필연적인 것입니다.
때로는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고, 음식을 먹을 기분이 않을지라도, 심지어 병상에 누워 있을지라도 억지로도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끼니를 거르지 않고 열심히 먹지만 그 때문에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을 먹는 것은 일시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은 될 수 있을지라도 인간이 근본 문제인 죽음을 해결하는 최선책은 되지 못함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사람들이 육신의 양식은 입에 맞고,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전국 일주를 하고, 심지어 해외 여행까지 하면 많은 값을 지불하지만, 정작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을 구하고자 하는 열심이나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세상에 없는 것일까요? 만일 생명의 양식을 구할 수 있다면 어디에 가서, 어떻게 구하여 먹을 수 있는지 그 답을 오늘 성경 말씀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1. 하늘에서 내린 만나
예수께서 디베랴 광야에서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바친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의 기도를 하신 후 굶주린 오천 명의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그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서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베푸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베푸신 그와 같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조상 대대로 가난을 대물림하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마치 요즈음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인 로또 복권 만큼이나 열광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입 소문을 통해 그 사실이 널리 퍼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성적으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요 6: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만일 그 같은 기적이 우리 주변에 일어났다면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 당시 사람들처럼 열심히 예수님을 따르지 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처럼 잘못된 동기에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진정으로 구해야 할 참된 양식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출애굽 시에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상기시키면서 과연 참된 양식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머물렀던 광야는 도처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황량한 벌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광야에서 자그만 치 40년 동안 경과하면서 또 60만 명의 자녀들을 생산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 생존 비결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새벽마다 하늘에서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출 16: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출 16:35)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만일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 주시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모지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살수 있었던 힘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와 같은 만나를 먹으면서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사는 것은 땅에서 농사를 지은 곡식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양식을 먹음으로 살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도 결국은 다 죽고 만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사건이 바로 에덴 동산에서 생명과일을 따먹던 아담과 하와의 죽음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생명 과일을 먹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을 때 결국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고 결국은 죽게 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의 궁극적인 원인이 땅에서 난 양식이나 만나나 생명과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죄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아무리 에덴 동산의 생명 과일을 따먹고,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배불리 먹고, 산삼 녹용 불노초를 구하여 먹는다고 할지라도 죽음의 근본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요, 죽음의 본질인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며, 땅에서 나는 곡식이나,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 달리 한번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양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2. 하늘에서 내린 생명양식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영생하게 지으셨으며, 그 인간에게 생명 과일 먹고 영생을 누리게 하셨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죄로 인해 죽음이 왔기 때문에 아무리 생명과일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오래 사는 것만큼 수고와 슬픔만을 더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식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부모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육신의 양식과 만나 만을 준비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인간을 위해 또 다른 생명의 양식을 하늘에서 내려 주셨는데 그 생명의 양식이 바로 인간의 죽음의 근원인 죄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주리셨을 때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에게 돌이 변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하였을 때 예수님이 거절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땅에서 난 곡식으로 만든 떡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지 못하며,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것은 그러한 떡이 아니라 영원한 떡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으면서 막상 그 기적의 떡을 맛본 무리들이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을 달가와 하시지 않은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오병이어가 근본 목적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바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문제를 해결하고 영생을 주시는 영원한 떡이심을 믿게 하기 위한 본질 문제보다는 오병이어라는 비본질적인 기적에만 집착을 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전제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생명의 양식은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을 임을 오늘 성경에서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요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사람들이 몸에 좋다는 음식이나 보약을 먹기 위해서 많은 돈을 지불하고 먼 나를 여행을 하지만 세상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와 같은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세상에 내려 보내주신 것은 영생의 떡이 만나나 보약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육신의 양식이나 만나는 입으로 먹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믿고 받아드리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3. 두 가지 반응
예수님만이 죽음을 전제로 하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며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너무나 쉽고 단순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었을까요?
1) 부정적인 반응의 사람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을 체험한 수 많은 무리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이 본질적인 생명의 떡을 주시고자 하였을 때 수 많은 무리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요 6: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외모가 자기들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지 못한 것은 신령한 말씀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잣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헤아리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육신의 떡과 같이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하신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마치 식인종처럼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예수님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은 많지만 왜 중도에 탈락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일까요? 그것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처럼 육신의 기복에만 목적으로 두고 교회를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오늘 설교와 같이 복음적이고 본질적인 말씀을 들을 때에는 딴생각을 하고 지루해하고 결국은 재미가 없어서 교회를 못다니겠다는 소리를 하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2) 긍정적인 반응의 사람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시면서 섭섭해하신 대신 주님을 떠나지 않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려는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그 제자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그들을 향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심을 듣고 따른 이후 삼년 동안 주님을 계속적으로 따르고 있는 열두 제자들이었습니다.
(마 4: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막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삼년 동안이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세상적으로 부자가되었거나 출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만 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무리들처럼 예수님을 버리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무리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무리들은 육신적인 오병이어의 기적 때문이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 때문이었습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그렇다면 무리들이나 제자들이나 다 똑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떠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차이를 사람들의 성격이나, 지식이나, 열심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떠난 무리들보다 떠나지 않고 있는 제자들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차이를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가 아닌가의 차이임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설령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르는 제자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주님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지만, 정말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넘어질 수 는 있지만 결코 떠나지는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인 것입니다.
(요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는 언제부터 주님을 따랐으며, 왜 아직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성경에 무리들처럼 어떤 기적이나 요행을 바라는 기복적인 목적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말씀의 맛을 알고 복음의 가치를 알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았기 때문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먼저 교회를 나왔다가 지금은 등을 돌리고 세상으로 내려 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성품이 더 선하고 선행을 즐겨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잘알고 있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를 믿고 나니 만사가 형통하기 때문입니까? 어느 때는 더 고난이 많고 더 많이 참아야 되는 때가 있는데도 아직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이처럼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까?
결코 아닙니다. 성격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그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나같은 죄인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주일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먹게하시고 영생을 얻게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인 것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결국 늙고 병들어 죽어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택하시고 부르신 은혜로 이 같은 축복을 받은 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무슨 말씀이든지 순종하며, 세상으로 내려 가지말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그 말씀에 늘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갈지라도 때로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럴지라도 주님을 버리고 떠나가지 말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더욱 감사하고 더욱 사모하고 더욱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까닭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해가될 수 없고 죽음조차도 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떡 예수
요 6:47-52 / 박덕기 목사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푸름이 약동하는 5월은 과연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비가 개이고 난 후 산천은 더욱 푸르고 아름다운 것 같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이 좀더 오래 계속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러나 곧 여름이 돌아오고 가을이 돌아오고 그리고 겨울이 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일생도 계절에다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해서 사랑을 속삭일 때는, 인생의 봄에 해당될 것입니다. 감미로운 사랑이 있고, 행복한 웃음이 있고, 가슴 벅찬 꿈이 있습니다. 세상사는 재미가 있을 때 그 때는 과연 인생의 봄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신혼의 단꿈에 취해서 살수만은 없지 않아요? 피땀 흘리며 애쓰고 고생해서 집도 마련하고, 논밭도 사고, 자녀들 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이러할 때의 인생의 계절은 퍽이나 힘들고 고단한 여름날입니다. 그러나 애쓰고 고생한 보람으로 살림이 늘어나고 의젓하게 자라난 장성한 자녀들을 바라볼 때는, 풍성한 수확의 꿈에 가슴 부풀어 있는 인생의 가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젊음도 사라지고, 기력도 쇠잔해지고, 눈과 같은 흰머리, 앙상한 나무와 같이 뼈만 남은 노후는, 인생의 겨울에다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던 아내, 혹은 남편도 이 세상을 떠나고, 정다웠던 벗들도 먼저 가고, 홀로 남아 있는 노인들의 생활은, 참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인생의 겨울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봄은 겨울이 지나면 다시 새봄이 돌아오지만, 인생의 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 중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뒷동산 소나무 날이 갈수록/파르르 파르르 파래 가는데/꼬부랑 영감님 턱밑에 수염/나날이 갈수록 희어만 가네.♬ 인생의 계절은 결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서서히 인생의 겨울인 죽음이 닥쳐옵니다. 그리고 죽음에는 남녀노소가 없습니다. 언제 우리 앞에 죽음이 닥쳐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인생이 기껏해야 7. 80년인데 그 년 수의 자랑이란 대부분 수고와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수고와 슬픔이 대부분인 인생마저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신속히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모두 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초교파 외국 선교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하루 동안 32만 명이 출생하고 16만 명이 사망을 한다고 합니다. 한 시간에 7000명, 1분에 120명, 1초에 2명씩 사망을 합니다. 그 속에 언제 저와 여러분이 포함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죽음을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여깁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아주 늦게, 실제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곳에서 ‘15분’이라는 연극을 하였는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성공의 길로 매진하던 젊은 청년이 장래의 행복을 꿈꾸며 무대에 나타나서 즐거워했습니다. 이때 유명한 의학박사가 그 청년을 진찰한 후에 ‘허 참, 지식 많고 훌륭한 청년이지만 목숨이 15분밖에 남지 않았네.’하며 동정하였습니다. 이 말에 의기양양하던 청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였습니다. 이때에 우편배달부가 그에게 철학박사 학위증을 전달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또 배달부가 편지를 가져 왔는데, 그것은 청년에게 100억을 상속하라는 통지서였습니다. 박사는 ‘이제 자네는 백만장자가 되었네. 그러나 자네의 생명은 5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무슨 소용 있나?’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배달부가 편지를 가져 왔는데, 그것은 청년이 몹시 사랑하던 연인으로부터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결혼 승낙서였습니다. 의학박사는 ‘자 이제는 자네가 원하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었네. 그러나 생명은 이제 1분밖에 안 남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극도로 고민하다가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죽게 되면 박사 학위도 소용없고, 억만금도 소용없고, 사랑도 다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두고 가야 합니다. 집도, 재산도, 보석도, 적금통장도, 사랑하는 가족들도 다 두고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니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하고 내세를 준비하며 살 것을 교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오직 이 땅에서의 먹고 마시는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밥을 먹고 삽니다. 밥은 생명입니다. 밥을 먹으면 살고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산 자만이 밥을 먹고 죽은 자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 밥을 먹지만, 밥을 먹고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그 밥을 먹고 다 죽었습니다. 인생이 날마다 밥을 먹고 산다 말하지만, 밥 먹다가 마지막에는 죽기 때문에 결국은 그 밥을 사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밥을 먹고 영원히 산 사람이 없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고서 죽지 않는 음식은 없을까 하여, 진나라의 ‘시’ 황제처럼 불로초나 영생 불사약을 찾아보았지만, 아직 인류는 그런 음식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니 인생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양식은 영원히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자연 현상이 절대로 아니고, 죄지은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로 먹고 죽지 않게 하는 음식이나 불사약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양식은 썩는 양식이요, 죽는 양식입니다. 그 밥을 먹고 내가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시들어 가고 무덤 속에 썩는 존재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빵이 사람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밀이 부서지고 깨져서 가루가 되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식탁에 앉아 먹는 양식도 전부 자기 죽음으로 된 것입니다. 쌀, 생선, 야채, 고기 모두 죽어서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인간에게 생명의 떡, 생명의 밥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로라”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처럼 부서지고 깨져서, 생명의 떡이 되고 생명의 빵이 되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셔야만 생명을 얻고 영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똑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고,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먹는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같은 말인 것입니다.
음식은 내가 직접 먹어야 합니다. 먹는 것은 나 외에 아무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먹어야 내가 삽니다. 내가 먹으므로 내 속에 들어와 내 생명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반드시 내가 먹어야 됩니다. 곧 내가 믿어야 합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믿어야 내가 영원히 삽니다.
사람들이 먹을 때는 다 좋아합니다. 안 좋아하는 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밥맛이 나면 살맛이 납니다. 그런데 밥맛이 없으면 죽을 맛입니다. 마치 우리가 배가 고프면 아무런 재미가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인생에겐 예수가 없으면 살맛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은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예수님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목말라 인생의 갈증을 느끼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 없이 사는 인생은 이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려도 만족이 없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먹은 사람처럼 갈증에 허덕입니다. 이 땅의 어떤 것을 가져도 공허합니다. 돈을 벌어도 공허하고, 출세해도 공허합니다. 광주 대학교 총장을 보십시오. 많은 재산도 있고, 국회의원도 해보았고, 대학교의 총장으로 있는 사람이 왜 자살을 합니까? 그런 것만 가지고는 결코 인간의 허무를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커다란 공간을 두셨다. 그 공간에 예수님을 모실 때까지 인간은 만족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실 때만 참된 만족을 맛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인간은 밥 곧 떡을 먹어야 삽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밥에 달려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두 가지 양식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 육신이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먹는 빵이든지, 동양 사람들이 먹는 밥이든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야만 우리가 먹고 살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는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토록 부지런히 일했으나 하루 세끼 밥도 먹지 못하고 굶주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왜 우리가 이토록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까? 불교 믿고 유교 믿어서 잘 살게 되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불교 믿고 유교 믿을 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뱅이 나라였습니까? 우리나라는 불교 믿고 유교 믿다가 망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위대한 정치가를 만나서 이만큼 잘 살게 되었습니까? 결코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 해서 우리가 이토록 잘 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계 지도를 펴 놓고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예수 믿는 나라 잘 사는 나라, 예수 믿지 않는 나라 못 사는 나라로 쫙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이 복을 받고 살려면 예수를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또 다른 양식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떡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죽지 않으려고 하루 세 끼 꼬박 꼬박 밥을 챙겨 먹지만, 결국에는 먹다가 죽고 마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으로만 끝나면 다행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예수 믿지 않고 죄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은 훨훨 타는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과 저주를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운명의 인생을 차마 그대로 볼 수가 없어서, 인간이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생명의 떡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생명의 떡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모든 음식은 아무리 먹어도 다 죽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슬람교를 믿던 터키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교사들에게 들켜서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문하는 교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게 질문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인데?’ ‘일전에 내가 어디를 가다 길을 잃었는데 옆을 보니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두 명이 있었습니다. 내가 길을 물어 본다면 어떤 사람에게 물어봐야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지.’ ‘그런 줄 알면서 왜 당신은 죽은 사람에게 길을 물어 보라고 하십니까?’ ‘아니 이 사람, 누가 죽은 사람보고 길을 물으라고 했나?’ ‘당신들이 믿으라고 하는 마호메트는 죽은 사람이요,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예수는 산 예수입니다. 길 되신 예수를 따라야 할 것이 뻔한 노릇인데 인도자를 찾아가는 나를 왜 괴롭히십니까?’ 그러자 이슬람교 교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한참 후에 ‘네 마음대로 하라.’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다 죽은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절대로 우리를 생명 길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만이 인생의 진정한 안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러시아의 어떤 귀족 집에 종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종은 너무 어석어서 주인이 항상 조소하며 놀렸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종에게 지팡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이 지팡이를 그 사람에게 주어라.’ 그 어리석은 종은 자기보다 어리석은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쉬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인이 갑자기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종이 주인의 방에 가서 병문안을 했습니다. 주인은 힘없이 그를 맞았습니다. ‘나는 이제 병으로 가네. 내가 가는 길은 아주 먼 길일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야.’ 그 말을 듣고 종이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그렇게 먼 길을 떠나시는데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네.’ 그러자 그 종이 지팡이를 내놓으며 말했습니다. ‘하룻길을 여행하더라도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데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먼 나라로 떠나신다고 하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하셨다니,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습니까? 이 지팡이는 바로 주인님이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천국! 그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도박이다.’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유명한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잘 해보았을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살았던 나에게 별로 손해 볼 것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한다면, 준비만 했으면 갈 수 있었던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린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그렇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죽어서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으면 그 때 손해 볼 일이 사실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았다가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으면 정말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오신 새 가족 여러분! 한국의 봄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이 아름다운 봄에 죽음 이야기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계절의 봄도 잠시이고 이팔청춘도 금방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떠한 인생의 계절에 살고 있습니까? 자연의 겨울은 우리가 그 시기를 미리 알고 대비할 수도 있고, 여름에는 눈이 오지 않을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계절엔 봄에도 여름에도 갑자기 겨울이 들이닥치고 죽음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에는 누구나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순서로 오지만, 갈 때는 그 순서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친구 홍 00의 죽음, 3대 독자, 여고 교사, 33세의 나이에 교육을 받다가 죽음) 이처럼 인생의 계절은 아무도 예측을 못합니다.
계절의 겨울이건, 인생의 겨울이건, 겨울은 멀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겨울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여름엔 무엇을 했느냐고?’
성경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개미는 여름 동안 부지런히 땀 흘려 저축해서 한 겨울을 편안히 나지만, 여름내 노래나 부르고 놀아대던 베짱이는 겨울이 오면 굶어 죽습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은 아직 봄이나 여름과 같은 인생의 계절에 살고 있어도, 인생의 겨울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갑자기 죽음이 들이닥치고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영원히 막혀 버리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때를 놓치고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때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번만 먹으면 영원히 암에 걸리지 않는다는 약이 있다면 여러분 모두 그 약을 먹지 않겠어요? 하물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기회가 있고 인생의 조종 소리가 울리기 전에 어서 속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한 분도 빠짐없이 눈물이 없는 곳, 근심과 걱정이 없는 곳, 가난도 없고, 질병도 없고, 죽음도 없고, 사랑과 기쁨 평화와 행복만이 충만한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시기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 살과 피를 먹으라
김영규 목사
주님의 살과 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살과 피를 먹으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 피를 먹는 것은 율법에 금한 것이요, 유대인들에게는 최대의 금기 사항입니다. 살과 피를 먹으라니? 식인종이 되란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공개적으로 다투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왜 자신의 살과 피를 언급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 문제를 말씀하시다가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살과 피는 육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영으로만 존재하지 앉으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살”(savrx)이란 말은 육신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별다른 몸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셨습니다. 아프고 병들고 피곤을 느끼는 육체입니다. 배고픔을 느끼고, 연약성을 지닌 육체입니다. “피”라는 말도 육체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피를 절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창9:4, 레17:11,14, 신12:23) 우리는 본성적으로 피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피는 생명에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온 몸에 산소를 운반합니다. 영양소를 운반하고 노폐물을 운반합니다. 그리고 각종 병균과 싸워서 건강을 유지시킵니다. 피가 부족하면 죽습니다. 피는 체중의 8%에 불과하지만 생명 유지에는 절대적인 성분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인간의 피를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피와 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거기에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속죄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 희생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형은 나무틀 위에 사지를 못 박아 매다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법정 심문에서 무죄가 확인되었으나, 유대인들의 요구 때문에, 법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판단으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형 집행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집행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고,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채찍으로 때리면서 온갖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싫컷 조롱한 후에 매달릴 십자가를 예수님이 직접 지고 가도록 강요했습니다.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바로 우리 죄를 인해서!
예수님의 죽음은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 스스로 택하신 자원적 죽음입니다. 유대인들이 강요하고 빌라도가 사형 선고를 내려서 죽으신 게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로마 군대가 체포했기 때문에 죽으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스스로 죽음을 면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재판장이시오, 창조주십니다. 누가 원한다고 죽으실 주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강요받은 죽음이 아닙니다. 자원하신 죽음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 아래서 조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스스로 자기 목숨을 구해 보라!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얼마든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원수에게 칼을 뽑았을 때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26:53-54)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대신 버리셨습니다. 인류의 죄, 바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살인강도와 함께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마치 강도들과 동급의 죄인인양 강도들 사이에서 죽으셨습니다. 중죄인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결코 살인한 적도 강도짓을 한 적도 없으십니다.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죄 없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류 역사에서 성경 말씀대로 죄 없이 완벽하게 사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지켜 본 사도들이 예수님의 무죄성을 증거 했습니다.(벧전1:19,2:22, 요일3:5) 예수님을 재판한 원수들도 예수님의 무죄를 고백했습니다.(요18:38,19:4,6) 그렇게 순결하신 주님이 강도와 함께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바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단순한 피와 살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대신한 속죄의 피와 살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내 살과 피를 먹으라
이제 주님은 이러한 자신의 피와 살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반드시 먹어야만 됩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절대 의무입니다. 먹으라는 말은 유대인이 생각한 것처럼 식인종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께 내 인생을 다 맡기고, 예수님과 사귀고 교제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내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그겁니다.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셔 들이세요. 그래야만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그래야만 축복의 삶을 살 게 됩니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 마음속에 거처를 정해도 좋겠느냐? 그렇다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 이 먹는다는 말은 56절 말씀에서 뜻이 분명해집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요6: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즉,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삶, 주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오늘 이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믿고 영접할 때에, 성경에 보면 세 가지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첫째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 받습니다. 예수님은 속죄 제물입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10:43) 죄 용서 받는 것이 첫째입니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바로 죄 용서 받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만 하나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기왕에 나오신 분들도 이 질문에 답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당장 죽는다면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임종을 앞둔 불신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영적으로 두려워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어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야 됩니다. 그 때에 죄를 용서 받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집니다. 자기 잘났다고 교만하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용서받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즉시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는 자기가 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안 됩니다. 종교적 노력, 자선 행위, 고행, 다 소용 없습니다. 세상 종교는 자기 죄는 자기가 씻어야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죄를 스스로 씻을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 진리를 이런 비유로 표현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흑인이 백인이 될 수 있다면, 표범이 얼룩 있는 가죽을 바꿀 수 있다면 인간도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자기 죄를 스스로 벗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용서도 필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죄악 된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전 사람들은 인간 범죄의 원인을 인간의 죄악성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의 범죄 원인을 개인의 죄악성에서 찾지 않고 사회적 원인에서 찾습니다. 청소년 탈선, 학교 폭력 그건 다 사회 때문이야! 절도, 강도, 그것도 다 사회 때문이야! 살인, 강간, 그것도 다 사회가 원인이야! 모든 범죄가 사회 때문이면, 사회는 뭡니까? 사회는 개인이 모여서 된 것 아닙니까? 개인에게 범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면 사회가 책임을 집니까? 지금까지 사회가 범죄의 책임을 진 일이 없습니다. 요즘 좀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온갖 이유를 붙여서 개인을 처벌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성경은 인간의 본성이야말로 모든 범죄의 원인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인간의 죄악성은 치유 불능입니다. 점점 악화되어 갑니다. 세상을 보세요. 범죄의 내용이 점점 포악해집니다.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죽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핀란드에서 일어난 집단 학살, 미국의 총기 사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벌써 20년 전에 미국의 전체 고등학생 중에 20%가 권총을 가지고 학교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인류 사회의 범죄 때문에 어느 시점엔가는 자멸하고 말 겁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죄의 해결책은 오직 속죄와 용서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셨습니다. 이 속죄를 믿는 자마다 용서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과거의 죄만 용서받는 게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어떤 처벌도 면제됩니다. 완전히 의인으로 간주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고 정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혼이 살고, 영원히 사세요.
둘째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화목 제물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었습니다. 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사59:1)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죄 할 때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품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창세기3장)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육체적 죽음은 영혼과 육체가 나뉘는 것이고, 영적 죽음은 영혼이 하나님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 인류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과 원수 된 데서 옵니다. 하늘 아래 사는 사람 중에 하나님과 원수 되고도 잘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뜻을 거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6-10)
이렇게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소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완전히 화해하십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신분이 회복됩니다. 모든 원수 관계가 청산되고, 자녀로서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회복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되시기 바랍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28:3-6,12-13)
셋째로, 생명 회복, 영생을 얻습니다. 속죄와 화해는 곧 생명 회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피와 살의 대가가 곧 생명 회복임을 선언합니다. 생명(53),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살린다(54),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56), 나로 인하여 산다(57), 영원히 살리라(58). 오늘 말씀에 나오는 단어들 중 중요한 단어들을 나열하면 “생명, 영생, 살린다, 산다, 살리라”와 같은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이 우리를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과 영생을 누리게 합니다. 오늘 각자 빠짐없이 주님을 믿고 영생을 얻으세요.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8) 만나를 먹은 “조상들”은 복수형입니다. 예수님의 떡을 “먹는 자”는 단수형입니다. 구약의 만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없이 집단적으로 얻어먹은 양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식은 집단 급식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일대 일의 인격적 연합과 교류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개별적인 만남이 없이는 결코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각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영혼의 생명뿐만 아니라 육체의 생명, 부활의 생명도 얻으세요. 영혼과 육체가 함께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지옥 갈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생명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고쳐주셨습니까? 각색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중풍병, 간질병, 열병, 걷지 못하는 병, 말 못하는 병, 앞 못 보는 병, 나병, 혈루병, 온갖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까지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오늘 우리를 모든 죽음에서 건지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모든 병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생명 회복을 이루세요.
예수님의 피와 살을 믿을 때에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첫째로, 모든 죄를 용서 받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셋째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회복합니다. 오늘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용서 받으세요. 하나님과 화해하세요.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세요.
피와 살을 먹고 살아나세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의 피와 살은 우리를 살리는 양식입니다. 영혼을 살리고 육체를 살립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를 믿으세요. 그래서 모든 것을 회복하세요.
첫째로, 모든 죄를 용서받으세요. 아무리 노력해도 씻을 수 없는 내 죄를 주님이 속죄하셨습니다. 믿기만 하세요. 그러면 어떤 죄라도 다 용서 받습니다. 죄로 고민하지 마세요. 정죄에서 벗어나세요. 십자가 앞에서 믿고 회개하세요. 그래서 죄에서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화해하세요. 한 사람과 사이가 나빠도 평생 불행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과 원수 되고 축복을 누릴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세요. 그러면 하나님과 화해됩니다. 하나님과 교제의 길이 열립니다.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살핌을 받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하나님과 화해하세요.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으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납니다. 영생을 소유합니다. 영원한 천국 시민이 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육체까지 부활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온전하게 영생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이 영생을 소유하세요. 영생을 가진 자로 살아가세요.
과거 광야 시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단 한 번 먹음으로써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주님의 피와 살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 속에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비한 연합
임덕순 목사
지난주일 설교 제목은 “수군거리지 말라.”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수군거렸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 의아한 말씀을 추가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인데, 사람들이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만 산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떡이라는 말을 들으면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생각나는데, 문제는 이 떡이 쌀로 만든 먹음직스러운 떡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먹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한다는 말이냐.”
그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섬짓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은 한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4-55)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시니 이보다 더 소름끼치는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굉장히 잔인하고 섬짓하게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어떻게 사람의 피가 참된 음료수가 될 수 있고,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살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자기 추종자들은 죽은 사람을 둘러앉아서 그 살을 뜯어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집단처럼 보일 수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네로시절 로마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취급하고 사형시켰는데 성찬식을 하면서 이는 내 피요 내 살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오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의 사람들도 이 말씀을 듣고 하나 둘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가버리고 다시는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 살과 피에 관한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실제로 무시무시한 종교입니다. 성경 속에는 아름답고 은혜스러운 내용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라 무시무시한 것들도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에는 천지 창조와 아름다운 에덴에 관한 말씀도 있지만, 인간들이 저지른 수많은 살인과 시기와 간음과 전쟁과 패륜에 대한 내용들도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고, 그들이 받은 무서운 형벌과 심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말씀과 부드러운 위로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만 교회의 문지방에서부터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옛날 애굽사람의 장남이 죽임을 당하던 심판의 밤에, 유대인들은 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에 발라서 바깥에서 피가 보이게 했고, 피가 보이는 가정의 장남은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그게 유월절입니다. 피를 바르고 살아남은 집들이 바로 오늘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문에 발랐던 어린 양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이고, 그들이 그 밤에 구워먹었던 양고기는 그리스도의 살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피와 살의 종교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보면 무시무시한 종교라고 생각하고 떠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난 이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좋은 말씀을 듣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건전하고 도덕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바르게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선생이고, 그들에게 부족한 정치적인 힘을 보강해주는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주님이 그들에게 살과 피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 않고 죄를 꾸짖고 바르게 살라고 도덕과 율법을 가르쳐 주었다면,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고 평생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절대로 선하게 될 수 없는 불가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살리는 길은 자신이 죽는 수밖에 없고, 그들은 주님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주님이 죽는 것뿐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의 살이나 뜯어 먹고 주님의 피나 마시는 것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잔인하고 모욕적이고 그들을 무시하는 말씀입니까?
자기들을 그렇게 무시하시는데 누가 주님 곁에 붙어 있겠습니까? 그래서 떠났습니다. 자기들은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는 죄인이고 절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가 자기들을 위해서 죽어야 하고, 자기들은 그 덕으로만 살아날 수 있다고 하니 모욕감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구제불능의 죄인이고, 그들을 구원할 방법은 구주가 대신 형벌을 받아주는 것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인간들 대신에 형벌을 받고 죽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흉악한지,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흉악한 처형을 당했어야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꽤나 도덕적이고 교양이 있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상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미 지은 죄상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끓어오르는 죄성을 아십니다. 우리는 부패한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아시며, 그래서 아무리 착한 사람도 자기의 죄성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끌려 다니는 존재라는 것을 아시며,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훌륭한 가르침이 아니라 대신 벌을 받아주어서 형벌에서 풀어줄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아들 하나님이 인간의 저주를 대신 받으러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기독교는 끔찍한 종교라고 투덜대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 때문에 영원히 형벌 받을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 하나님이 살이 찢기고 피를 다 쏟으며 대신 죽으셨고, 멸망할 자들은 그 주위에 몰려들어 그의 피를 마시고 그의 살을 먹어야만 살아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어떤 면에서 매우 끔찍한 소식입니다. 누구라도 구원을 받고 싶으면 구주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고 모욕적인 내용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현실이 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자기 이름으로 합니다. 거래도 개인의 이름으로 하고, 계약도 개인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개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부족이든 족장이 결정하는 것이 온 부족의 결정이었는데, 족장은 그 부족의 대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표자인 족장이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면 부족들은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에 참가해야만 했습니다.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최초의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맨 처음으로 만드신 아담입니다. 이 땅에 모든 인간은 그 아담과 하와의 자손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은 우리의 대표자요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대표자인 아담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잘 순종하면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처럼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게 하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조상이요 대표자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죽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깨뜨렸고 그와 그에게 속한 후손들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영향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지은 죄에 대하여 져야 할 책임과, 죄 때문에 삐뚤어지고 악해진 성품, 즉 죄성을 물려받았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누구나 형벌아래 있고 날마다 죄만 누적하여 짓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경험하며 고민하는 현실입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도 약간씩 차이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물이 빼어나고 어떤 사람은 신체가 아주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남보다 조금 도덕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근본이 다 똑같고 그만그만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 누구라도 죄 없이 순수한 사람은 없고, 죄를 이기고 선을 이루며 산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인류는 멸망으로 달려가는 열차 안에 있으면서 서로 잘났다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와서 이 죽음으로 향하는 열차를 멈추게 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와서 아무리 앞을 막는다 해도 열차가 멈출 리 없듯이, 인간이 인간의 멸망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결심을 하셨습니다. 아들이 내려가서 자기 몸을 던져 멸망의 열차를 멈추고 자기는 치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 하나님의 희생의 대가로 사람들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이 우리의 새 대표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이 우리의 대표자가 되어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이 자기 대신 죽었다고 믿는 사람의 죄는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계약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악 때문에 죽으셨다고 믿되, 마치 죽은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듯이, 그 사실을 자기 마음속에 깊이 믿는 사람은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내용이 새 계약의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아다닙니다. 맛있는 음식도 사먹고, 아름다운 음악도 들으며 눈물을 흘리며 감동도 합니다. 멋진 사람을 보면 멋진 사랑을 나누고 싶어지기도 하고, 가을이 낙엽을 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행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뭔가 행복을 손에 잡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 전체를 태운 역사의 열차가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죽음을 향해, 영원한 형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가 낭떠러지로 달려가는데 그 안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위안을 삼으려고 한들 위로가 되겠습니까?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잠깐이고, 부부의 행복도 잠깐이고, 세상의 성공도 명예도 잠깐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때마침 뛰어 오셔서 자기 몸으로 철길을 가로막으신 것입니다. 자기 몸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죽음의 열차를 멈추신 것입니다. 그의 살이 찢기고 그의 피가 튀면서 사람들을 살려냈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내용이 피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기에 대하여 인간이 반응을 내놓아야 합니다. 자기는 정말 멸망하고 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붙잡을 것이고, 자기는 문제가 없고 자기의 노력으로도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이 기분 나쁜 소리한다고 불쾌해 할 것입니다.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독교가 공연히 사람을 죄인취급해서 기분 나쁘고 불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한번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꽤 성공적으로 살아왔다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기독교는 괜히 불안감을 주는 종교일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은 실패한 삶이고, 특히 도덕적으로 파산했으며, 지금까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가 나를 살리려고 오셔서 대신 죽으셨다는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도덕적으로 파산한 사람입니다. 제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속은 썩을 대로 썩어 있습니다. 제 속에서 미친 욕망이 날뛸 때면 도무지 멈출 방법을 찾지 못했고 항상 죄에게 끌려 다녀야 했습니다. 주님 저는 도무지 저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발 저를 구원해주시고 저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주님께 자기 자신을 부탁할 것입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까지는 음식과 내가 따로 이지만 음식을 먹는 순간 음식은 내 몸 안으로 들어옵니다. 위치만 접시 위해서 내 위장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음식 안에 들어있던 영양분이 내 몸 안에 흡수되어 여러 곳으로 배달되어 살이 되기도 하고 뼈가 되기도 하고 힘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음식과 나는 분리될 수가 없고 하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를 인하여 산다고 하신 말씀은, ‘네가 나를 믿으면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신비한 연합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15:5에서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바 있습니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믿는 자의 신비한 연합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소화효소의 작용으로 음식물이 분해되고 성분별로 분류되어 인체의 각 부분으로 옮겨가서 기능대로 작용하듯이, 예수를 내가 믿으면 예수님의 영이 믿는 사람 안에서 작용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도와주시며, 그 결과로 우리의 생각과 삶을 이전과 달라지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믿는 사람 안에서 작용하시는 첫 번째 작용은 과거의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롬 6:11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기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믿는 사람에게, 주님의 죽으심은 죄지은 나를 대신한 죽음이었으니까 실상은 내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믿은 후에 다시 유혹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하면서 돌아서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롬6:2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를 위하여 살도록 새 힘주십니다.
본문 57절을 보면,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믿는 사람의 안에 계시면서 새 삶의 동기와 힘을 제공해 주시기 때문에 새 삶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갈2:20에서 바울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힘으로 삽니다. 사는 목적도 예수님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음식에서 힘이 나와서 그 힘으로 사는 것처럼, 예수를 마음 안에 모시면 예수님이 내 안에서 힘을 제공해 주시고 삶의 목적도 제공해 주시는데, 이것이 세상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연합입니다.
58절을 보면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하셨는데,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서 먹은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적의 음식이긴 했지만, 육신에게만 힘이 되는 육신의 양식에 불과했습니다. 만나를 먹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아니었고, 만나를 먹은 사람이 영생을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왔을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참된 양식이며 영원히 살게 하는 영의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이 되어주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살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늘 역사하십니다. 내가 침체되어 가면 그 상황에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해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내가 지쳐 있으면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전화를 해 오거나 찾아와서 놀라운 위로와 힘을 주게 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중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을 통하여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기도 하십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갈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령의 감동을 마음에 채워주어서 알 수 없는 희망과 기쁨이 넘치게도 해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이 도우시는 역사인데, 오늘의 나에게 힘을 주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과 일을 가능하게 하심으로 주님과 평생을 동거하게 하시고 그렇게 영원한 천국까지 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영은 믿는 사람 안에서 생명의 떡으로 역사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 때문에 하나님은 너무도 잔인하신 분이고, 기독교는 너무 섬듯한 종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은 꽤 젊잖은 사람이고, 정의감에 넘치고 인간미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분이라면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그런 자기만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빠른 시간 안에 깨닫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실망하셨습니까? 인간의 지저분함과 죄악의 강력함을 맛보셨습니까? 자기 안에 있는 더러운 본성 때문에 절망해 보셨습니까? 자기는 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육정과 습관을 따라 사는 과거의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이제 나는 다시는 살아나서는 안 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주도하는 내 인생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 대하여 묻거든, 아는 이미 죽어서 묻어 버렸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날부터 주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위로하시고, 새 기준과 새 길을 주시며, 새 힘을 주시어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여러분이 하고는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바른 일과 행복한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본성이나 이 세상의 것으로는 우리가 바르게 살지도 못하고 평안히 살지도 못하고 영원히 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믿되, 마치 음식을 먹듯이 마음 안에 깊이 모시면, 바른 삶, 평안하고 능력 있는 삶, 영원한 삶이 시작됩니다. 그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힘이 있고, 남들이 기뻐할 밝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먹은 사람의 영생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먹고 마셔서, 주님이 나를 채우시고 힘주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로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사는 예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마셔야 할 또 다른 잔
노경모 목사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 두 광주리를 남기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5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생명의 떡인 나를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서로 다툽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를 살을 주어 먹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살, 즉 생명의 떡이 무엇인가를 잘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떡은 십자가에서 찢기시는 살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상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지 아니 하시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찢기신 그 살, 흘리신 그 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죽으시기 위해서 찢기신 그 살과 그 피를 믿어야 합니다.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 살과 그 피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셔야만 즉 그 살과 그 피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의 은총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 53-54절을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또한 예수님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예수님과 연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56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주님께서도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찬식을 주님 재림하실 때 까지 계속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 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식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참여해야 할까요?
첫째,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살을 찢기시고 파를 흘리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죄가운데 있지는 않는지? 생각으로 죄짓고, 말로 죄짓고, 행동으로 죄짓고.. 주님의 구속의 은총을 체험한 우리로서 죄를 미워하고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하는데 죄와 타혐과 죄짓는 것을 예사롭게 생각하고, 나쁜 죄악된 습관과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시간 회개합시다.
참된 회개로 성찬식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성찬에 바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가 없이 성찬에 참여하게 되면 또 다시 죄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됩니다. 고린도전도 11:27의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둘째,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일수록 구속에 대한 은총에 더욱 더 감사해야 하는데 도리의 우리의 마음이 냉냉하게 식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위해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가 자다가도 일어나서 감사해야 할 사실입니다. 오늘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뜨거운 감사와 감격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깊이에서 우리나오는 감사를 주님께 드립시다.
셋째, 결단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신 주님께 ‘이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하면서 고백합시다. 또한 주님께 ‘이제는 내가 하기 싫고 귀찮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드리겠습니다.’라고 결단합시다. 우리에게 이러한 결단과 결심이 없이 성찬을 받는다면 그것은 형식적인 성찬이 되고 말 것입니다.
넷째, 또 따른 잔을 받아야 합니다.
나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의 피의 잔을 받는 것으로만 끝나면 성찬식의 의미가 없습니다. 성찬식을 맞이할 때 마다 우리는 또 다른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 또 다른 잔은 무엇일까요?
먼저 마태복음 20:20-22을 읽읍시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와 요한의 어미가 아들 둘을 데리고 예수님께 찾아서 절을 하고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원하시고 왕으로 등극하게 되면 자기 두 아들을 높은 자리에 앉혀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잔 이야기를 하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잔은 승리와 성공을 자축하는 축배의 잔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 고난의 잔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신 고통을 잔을 말합니다. 너희들이 내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처럼 너희들도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공의 잔, 출세의 잔. 축복의 잔, 행복의 잔을 마시기를 원하지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의 잔을 마시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를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흘리신 그 보배로우신 피의 잔을 우리가 받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는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 잔을 마시지만 실을 그 피의 잔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피의 잔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고, 죽음으로부터 승리와 부활을 가져다 주었고 영생을 가져다 주었고 주님과 연합할 수 있는 은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잔이지요. 그래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매일 성찬식을 가졌고 이 잔을 마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놀라운 은총의 잔을 마십니다. 이 잔을 마시면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잔을 하나 더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나도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기쁘게 받겠다는 고난의 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난의 잔입니다. 좁은 길로 가겠다는 고난의 잔입니다. 이 잔을 같이 마실 때 주님은 우리가 드리게 되는 성찬식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괸 성찬식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고 천국가라고만 구원을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목적을 반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나머지 반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잔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9을 봅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찬식은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상에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셔서 우리에게 주신 그 구원의 은총을 다시 한번 맛보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진심으로 내어놓고 회개합시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바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결단합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잔 고난의 잔을 기쁘게 마십시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의미있는 성찬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산 사람
이중표 목사
사람은 일생동안 밥을 먹고 삽니다. 밥은 생명입니다. 밥을 먹으면 살고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산 자만이 밥을 먹고 죽은 자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 밥을 먹지만 밥을 먹고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그 밥을 먹고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우리가 먹는 모든 양식은 썩는 양식이요, 죽는 양식입니다. 그 밥을 먹고 내가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는 후패해가고 하나의 무덤 속에 썩는 존재로 들어갑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 6:27)
어떻게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서 일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가난한 시절에는 일꾼들이 하루종일 일하면 겨우 하루살이 양식 구해서 들어갔습니다.
이와같이 유대땅도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살이 인생이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일했습니다. 결국은 살지 못하고 죽는 양식이었지만 그것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빵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주식이 밥이기 때문에 빵 대신 밥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밥으로 표현하기가 죄송해서 떡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참 생명의 양식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빵이 사람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밀이 부서지고 깨져서 가루가 되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식탁에 앉아 먹는 양식도 전부 자기 죽음으로 된 것입니다. 쌀, 생선, 야채, 고기 모두 죽어서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생명이었지만 우리의 밥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켰습니다. 하늘 생명이 한 알의 밀알로 마리아의 몸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고, 십자가에 죽고 가루가 되고 성령의 불로 익혀져 우리의 밥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떡과 표도즙이 아니라 희생의 은혜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여기 ‘살’은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요,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자기의 살과 피를 주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알의 밀알로 부서지고 깨져서 빵이 되어 우리 속에 생명의 양식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됩니까? 그것은 자신을 희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을 내 살과 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51절)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4-55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예수님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요? 이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40절)
먹는 것과 믿는 것은 같은 행위입니다. 먹으므로 생명을 얻듯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모든 종교는 철학적이고, 이론적이고, 의식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믿음은 먹는 양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 배만 채우면 육성을 채우는 것이요, 그 밥 속에 담아진 희생을 알고 먹으면 영성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을 때마다 그것을 주신 분의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선교사는 후원자의 마음을 먹고, 목사는 교인들의 사랑을 먹어 그것으로 가슴을 채우고, 하늘을 채우고, 은혜를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내가 이 밥을 먹고 살 듯이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양식으로 살게 하옵소서.’라는 마음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밥상에 앉을 때마다 밥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 속에서 밥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밥은 성찬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밥으로 먹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베들레헴 떡집에서 나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떡이 되므로 우리를 떡집이 되게 하십니다.
둘째, 그 양식을 먹으므로 나도 살고 떡도 살게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인들이 식탁에서 필수적으로 먹는 빵으로 표현했습니다. 고기나 야채는 식탁에서 가끔 빠질 수 있고, 또 자기 식성에 따라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빵은 식성에 따라 먹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영적인 생명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누구나 먹어야 할 참 양식입니다. 이것은 하루만 먹으면 끝나는 양식이 아니라 매일 매일 먹어야 하는 양식입니다.
양식은 내 손으로 직접 먹어야 합니다. 먹는 것은 단순하고 개인적인 행위입니다. 먹는 것은 나 외에 아무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먹어야 내 것이 됩니다. 먹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먹은 만큼 남습니다. 내 속에서 소화된 것은 나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양식은 반드시 내가 믿고 먹어야 됩니다. 내가 먹으므로 내 속에 들어와 내 생명이 됩니다. 내 속에 들어온 것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돈이나 보석은 빼앗아갈 수 있지만 내 속에 들어온 것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산 자만이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삼고 성찬을 먹습니다. 예수님과 기도함으로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셋째, 하나님과 교제가 일어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절)
여기 거한다는 말은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양식이 내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예수님과 교제하고 그 힘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자의 행복은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없이 못산다. 예수는 내 안에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별세의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난날 기독교는 예수 따로 나 따로 믿는 신앙을 강조해 왔습니다. 예수 믿고 살다 죽으면 천당 가는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십자가 신앙을 굉장한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별세 신앙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신앙입니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부터 천당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 교제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와 완전한 친교 속에 사는 자는 그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은 자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생명의 양식을 먹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먹음으로 만족을 얻습니다. 모든 만족을 예수 안에서 얻습니다. 예수로 만족하면 행복합니다.
말씀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설교가 은혜가 되고, 찬송이 은혜가 되면 살맛이 납니다. 예수님에게서 살맛을 못얻으면 인생이 공허해집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양식은 살맛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을 때는 다 좋아합니다. 안좋아하는 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비싼 것 안먹어도 괜찮습니다. 먹을 때는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밥맛이 나면 살맛이 납니다. 그런데 밥맛이 없으면 죽을 맛입니다. 마치 우리가 배가 고프면 아무런 재미가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속에 예수가 없으면 살맛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은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예수로 만족합니다. 예수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안에 사는 자가 아닙니다. 믿기는 믿지만 생명의 양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말라 인생의 갈증을 느끼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예수 없이 사는 사람은 이 세상 부귀 영화를 다 누려도 만족이 없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먹은 사람처럼 갈증에 허덕입니다. 이 땅의 어떤 것을 가져도 공허합니다. 돈을 벌어도 공허하고, 출세해도 공허합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은 사람 중심에 한 공백을 두었다. 이 공백에 예수님이 좌정할 때까지 인간은 만족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만족해야 합니다.
넷째, 생명의 양식을 먹은 사람은 그 은혜로 삽니다.
사람은 먹는 먹는 음식에 따라 체질이 형성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우리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먹고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이 체질이 바꾸어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그리스도처럼 살게 됩니다. 예수 믿고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그 마음을 품고 그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어렸을 때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은 잘 먹어서 키도 크고 피부도 깨끗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집에서 자란 사람은 잘 못먹어서 키도 작고 피부도 별로 안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어서 은혜 살이 낀 사람은 얼굴이 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지 않는 사람은 못된 살이 끼어서 얼굴이 어둡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밥으로 먹은 사람들입니다. 사는 방법이 예수요, 사는 목적이 예수입니다. 삶의 가치도 예수요, 행복도 예수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우리는 내 뜻대로 살 수 없는 몸입니다. 살려주는 힘이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살고 있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57절)
생명의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이 나에게 힘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이런 은혜로 살게 됩니다.
예수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었으면 예수 힘이 나야 합니다.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요 사나 죽으나 예수 힘이 솟아 올라야 합니다. 지난날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가 힘이 되었기에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을 불렀고 죽으면서도 얼굴이 빛났습니다.
다섯째, 세상에 들어가 생명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밥이 되어 우리를 살려주셨기에 나도 밥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살려내야 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로 갈 때 “어디 갑시다.” 그러면 “거기 뭐 먹을 것 있나” 그럽니다. “아무개 만나러 갑시다.” 그러면 “그 사람한테 뭐 나올 것 있나” 그럽니다.
예수님을 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까 먹을 것이 있으니까 따랐습니다. 가난한 자는 빵을 먹었습니다. 외로운 자는 위로를 먹었습니다. 낙심된 자는 용기를 먹었습니다. 병든 자는 건강을 먹었습니다. 죽은 자는 생명을 먹었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이 ‘야, 그 사람 가는 곳에는 먹을 것이 있어’ 하면서 따라갑니까 어떤 권사님은 인심이 후하기 때문에 그 분 뒤에는 꼭 사람이 따릅니다. 이 권사님 남편이 항상 여유돈을 주면서 “여보 인생 짧은데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면서 살아” 그러니까 이 권사님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심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런 남편은 보통 남편이 아닙니다. 예수같은 남편입니다.
내가 들어가는 곳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 자만이 밥이 되어 나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포로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죽인다는 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탈출을 했습니다. 그의 동료 포로 10명이 보복으로 죽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특별히 만들어진 콘크리트 벙커 속에 산채로 감금되어 긴 시간동안 서서히 굶주림으로 죽어가야 합니다. 사령관이 수천명의 포로들을 모아놓고 지나가면서 한 사람씩 골라내는데 한 남자를 가리켰을 때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내 불쌍한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어찌 죽는고...” 그때 한 남자가 줄 밖으로 나와 모자를 벗고는 사령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나는 카톨릭 신부입니다. 저 사람을 대신하여 죽고 싶습니다. 나는 늙었고 아내도, 자식도 없습니다.” “좋다, 그렇게 해라” 이렇게 해서 아홉 명의 남자와 신부가 벙커 안으로 들어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신부는 4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1982년 10월 10일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는 그 신부의 장례식이 장엄하게 치러졌고 거기에 참석한 150999명 가운데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남자와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 신부의 죽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증오와 경멸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주는 밥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예수의 생명의 밥을 먹었기에 자신을 생명의 밥으로 내놓아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에게 밥이 되어줄 자를 찾고 계십니다. 자신을 밥으로 나누어 줄 수 있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된 음료 참된 양식
요한복음 6:53∼59 / 차남식 목사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먹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진리에 비추어 볼 때에 먹는다고 하여 영원히 살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역사이래 영원히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나할 것없이 모두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먹어야만 영생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요6: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하셨고
(요6:58)에서「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로다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이 말씀을 듣던 수많은 군중들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요6:52)에는「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하였고 제자들도(요6:60)「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생명 떡으로 세상에 오셔서 살이 찢기고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려서 죄 값을 치렀는데 그것을 믿는 자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빵이나 떡을 먹은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백년미만의 삶을 살고 모두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요6:55)에서「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말씀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유월절 만찬을 드시게 됩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께서 떡을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막14:22)「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하시며 이것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하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드신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요6:53)에서「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먹음으로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진리에 있어 죽음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먹음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 다가가는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먹음으로 살게되는 은총의 식탁을 마련하시고 참된 음료와 양식을 먹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단순하고 개인적인 행위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 개인이 먹어야 사는 것이지 대신 먹어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 개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믿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각자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속에 들어와 거하여야 구원받고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 믿음의 씨앗, 영원불변의 예수님이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범죄하고 타락하여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의 떡이 되기 위하여 베들레헴 땅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떡과 생명의 음료로 오신 예수님을 먹지 않고는 영원히 살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요6:56)에서「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 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삽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고 믿고 잠들었던 자도 영원히 삽니다.
살려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마4:4)「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예수님께(마4:3)「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며 유혹한 것은 세상적 가치의 떡을 만들어서 굶주린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먹여서 살게 하라고 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세상의 떡을 먹으면 죽을 수밖에 없으나 생명의 떡 곧 영의 양식을 먹어야 산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땅에서 살아가면서 무슨 힘으로 살아가십니까?
돈의 힘입니까? 어떤 사람의 힘입니까?
성도는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의 힘입니다.
낙심하여 좌절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순종할 때에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밥 만 먹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밥을 먹으면 육체적인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적인 일을 해 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먹는 양식은 썩어질 양식이라고 하였습니다.
해 아래서 하는 일은 영원히 남을 것이 없습니다. 세상 떠나는 날 다 놓고 가야할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는 영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빌2:5)에는「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되고 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먹은 자들입니다.
이제 사는 목적이 달라져야 합니다.
사는 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삶의 행복의 가치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가 원하는 곳에 이 몸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16:24)「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길 곧 남을 위하여 자신이 생명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생명의 떡이 되셔서 그것을 먹는 자마다 영원히 사는 길을 다 이루어 놓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크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받은 만큼 세상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갈등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가난한 자들에게는 천국의 부요함으로 넉넉히 채워주셨습니다.
또 죽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중생에게 생명의 떡이 되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자신만 살겠다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나누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사람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예수가 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누어주는 삶을 사셨던 것처럼 나눔의 삶을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나누어주신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내가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이제는 사는 것이 내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었던 삶처럼 나도 주기 위해서 사는 삶으로 바뀌어져야합니다.
이것이 고난 주간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어 엄청나게 부를 쌓고 원하였던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지만 정작 죽을 맛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세상 것으로는 살맛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은 사람들은 살맛이 난다고 말합니다.
가난하여도 살맛이 납니다.
버림을 받아도 살맛이 납니다.
이토록 놀랍게 살맛 나게 하는 비결이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이 들어간 사람마다 살맛이 납니다.
사는 목적을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가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그 사실을 믿는 자마다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니 진정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독일의 히틀러 치하에서 죽음과 기아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사형장으로 가면서 찬송을 불렀고 순교의 노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죽음 앞에서도 구주를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비참한 절망을 잊어버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습니다.
행복한 것처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삶 자체가 감사로 이어졌기 때문에 죽으면서도 웃으면서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살맛이 나고 성령 충만하여 그 능력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 주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모두 승리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살맛을 주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
요 6:53-55 / 안양준 목사
<우리는 먹기 위해서 삽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실제로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먹지만, 사실은 먹어도 죽는다. 아무리 먹어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 6장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을 먹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교훈하시고자 하신 의도는 그저 사람들이 시장하니까 기적을 일으켜서 배고픔을 없애려는 1차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사건을 경험했던 무리들이나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들이 그 이튿날 아침부터 썩어질 양식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 몰려 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온 것은 예수께 영적인 것을 얻고자 온 것이 아니라 당장 먹고 배부를 것을 구하기 위해 몰려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먹고, 일하고, 자는 것을 생각없이 반복하며 사는 동안, 그것을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영원히 죽게 됩니다.
출 16:을 보면 신기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의 길을 걷는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신 과정을 보면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광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평을 털어 놓는 백성들을 향해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아침에 이슬이 이스라엘의 진 사면에 있더니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매일 한 사람이 한 오멜씩 가져다가 식량을 삼으니 이상하게도 남음도 모자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나를 식량으로 사용할 때는 두가지 지켜야 할 사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나를 가져가된 다음 날까지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어기고 두 오멜을 가져다가 다음날 그것을 먹으려 하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 6일에는 각 사람이 평일의 갑절 즉 두 오멜씩 가져가도록 하고 제 7일에는 거두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시같으면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길텐데 6일째 두 곱으로 가져간 만나는 그 다음날이 되어도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7일에는 거두지 말라고 했음에도 혹시 구할 수 있을까 나오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기적적으로 하늘로부터 직접 양식을 내려 주심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받지 않고, 인간의 방법으로 더 거두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나의 이야기가 본문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온 양식이란 점에서 만나는 예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나와 예수님이 다른 점이 있다면 만나는 사람들이 먹어도 죽었지만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소유한 자들은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면서 55절에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되 음료로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무리들이 옛날 자기 조상들에게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게 해준 모세같은 선지자로 예수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만나를 얘기하면서 광야의 만나는 먹어도 사람들이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인 자신을 먹으면 죽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사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리들을 향해 구원의 도리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그처럼 어려운 진리의 문제에 대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본장을 읽어보면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고 수군거리다가 결국 많은 이들이 예수에게서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적으로 살아가는 자만이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나를 주셨을 때도 오직 육신을 배불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자기의 조상들처럼 지금 예수 앞에 모여든 무리들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예수님을 육적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내린 만나를 보았으면 영적인 세계를 깨달았어야만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날 때 영적인 깨달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롬 8:5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51절은 떡의 대한 결론입니다. "나의 줄 떡은 곧 내 살이다" "너희는 디베랴 광야에서 먹었던 떡을 달라고 원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줄 떡은 바로 내 살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먹으라는 것입니까? 내 살을 먹으라는 것은 예수와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나의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다른 이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 놓으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육을 살찌우기 위해 육의 양식을 위해 찾아나온 무리들은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입니까?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를 만나는 체험적인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의 살을 찢으셨고 온 몸의 피를 흘리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의 찢겨진 살의 아픔을 모르고 고통을 모르고 우리가 어찌 예수의 살을 먹은 자라고 하겠습니까?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육을 위해서 하루에도 많은 음식과 물을 섭취하고 삽니다. 먹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간은 먹는 것에 많은 시간과 투자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육을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왜 중요한 영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믿는 자들조차도 영혼보다는 육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바라보고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는 참된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 불평하던 자들, 하루라도 더 자신들의 식물을 연장시키려 하던 자들, 먹을 것을 얻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얻기 위하여 나서는 어리석은 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생이 음식 먹는 것과 잠자고 일하는 것은 사는 것이라기 보다 실상은 죽어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는 영원한 삶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런 엄청난 설명에 대해 예수님 시대에 직접 목격하며 뒤따르던 제자들도 “이 말씀은 참 어렵다”고 수군거리며 떠나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자들은 육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육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고 영적인 일에 매달리는 자들입니다.
신 8:3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이신 정확한 이유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