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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224 / 요 8:12- 20 / 나는 세상의 빛이니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3.06|조회수1,028 목록 댓글 0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 8:12-20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8:12-20 /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러므로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에 빠져 들지 않는다. 생명의 빛이 너희 길을 비추기 때문이다.' 13) 바리새파 사람들이 소리 질렀다. `당신은 스스로 옳다고 하니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소!' 1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 자신에 대한 말일지라도 이 말은 참되다. 그것은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15) 너희들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16) 나의 판단은 정확하고 공평하다. 그것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17) 너희 율법에도 어떤 사건에 대해서 두 사람이 같은 증언을 하면 그 증언은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18) 내가 한 사람의 증인이고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께서 또 한분의 증인이 되신다.' 19)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계십니까?' 하고 그들이 묻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니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20)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성전의 헌금궤가 있는 곳에서 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를 잡아가지 않았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난하며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자신이 세상의 어두운 죄악을 밝히는 구원의 참 빛이시라고 선포하십니다.

 

생명의 빛을 얻으라(12-13) 예수께서는 7장에서 자신을 생명수로 비유하셨고(37), 본문에서는 생명의 빛으로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장막절에 성전 앞에서 횃불을 밝히는 관습이 있는데, 이 횃불은 성전뿐만 아니라 그 주변까지 밝게 비추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참 빛’이시고 세상에 와서 비추이는 빛이시기 때문에(1:4, 9),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빛의 자녀가 되어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마 5:14).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은 참되지 않다’라고 지적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자신이 세상의 빛인 동시에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참 되신 예수의 증언(14-18) 예수께서는 자신의 증거가 무효라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의 증거가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에는 두 사람의 증거가 있어야 오류가 없다(신 17:6; 19:15)고 했는데, 예수께서 증거하는 것을 혼자 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과 하나님 이렇게 두 분이 증인이 되기 때문에 율법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올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의 판단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바리새인들의 판단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19-20) 어거스틴은 유대인들이 묻고 있는 이 ‘아버지’를 인간적인 증인, 즉 이미 죽은 육신의 아버지 요셉으로 생각을 하고 자신을 증거 해 줄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도 알 것이다”(요 1:18; 14:9)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이러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예수도 모르는 바리새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자를 바르게 아는 것은 곧 성부를 아는 것입니다(요 14:7; 16:3).

 

적용: 어두움이 오면 빛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오면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 가운데 거하십시오. 자연스럽게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바르게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위험합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 설 교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신 때는, 간음하다 붙잡혀 끌려온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어 살리신 직후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건수를 찾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 예수님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들이 언제나 예수님의 흠을 잡아 보려고 애쓰는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시는 일들로 인해 나타는 능력과 이적 등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가르치심에 자신들의 권위가 손상을 입고, 나타나는 능력과 이적 등으로 날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자신들의 지위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기 위해 고발할 건수(件數)를 찾아 트집을 잡으려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 온 것이었습니다. 이들 유대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들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인 예수를 어떻게 해서든지 체포할 충분한 증거를 얻고자 올무를 놓았습니다. 만약 간음한 여인에게 죽음을 선고한다면, 예수께서 그간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가르치고 전해왔는데, 그 사랑의 메시지를 포기하게 만들어 당시 따르던 군중들을 혼란에 빠뜨려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자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만약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총독의 권한 침해라는 구실로 로마 당국에 고발할 심산이었습니다. 이렇듯 모든 죄인들에게 한없으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힘쓰신 예수님이시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갖은 음모와 계책을 감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법대로 하자면 간음한 여인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하며, 또한 사형을 선고하게 되면 로마법을 침해하게 되어 고발당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그 여인을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하면 유대의 율법을 위배하는 것이며 예수의 사랑의 정신을 무력하게 만들어 궁지에 몰아넣어 이래저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율법과 로마법을 끌어다가 간음한 여인을 죽이고,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이고자 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과 그 여인의 마음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두움’입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몰려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했던 군중들 마음 역시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죄없는 자가 돌로 쳐죽이라”는 말씀으로, 들었던 돌들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그들 모두를 그 자리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그 여인의 삶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생명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여인의 어두움이 빛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른바 “생명의 빛”이 함께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용서’와 ‘사랑’과 그리고 ‘생명’ 등은 “빛”이고, ‘죄’와 ‘미움’, 그리고 ‘두려움’과 ‘죽음’ 등은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사람은 ‘생명의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모세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하기 위해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라고 바로 왕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터무니없는 소리말라며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 재앙, 나일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여 물을 도무지 마실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로 왕은 완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지 않습니다. 이어 하나님께서 개구리 재앙, 가축들 죽음의 재앙, 악성 종기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등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여러 재앙들을 통해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바로 왕은 완악하게 거절합니다. 그래서 아홉 번째로 내린 재앙이 ‘흑암의 재앙’이었습니다. 온 땅에 3일 동안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어둠의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전혀 흑암의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출10:21-23)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빛’이 아니라, ‘흑암’, 어두움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없이 어두움이 계속된다면 꽃은 피어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얻지 못하고 시들어 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생물들은 빛을 받아야만 향기나는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아름답고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울(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비취는 체험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향기나는 삶을 살며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았습니다(행9:3). 인간은 생명의 빛이신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16)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처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빛 가운데 보게 될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Luther)가 빛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을 때,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빛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을 때, 미국에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요한 낙스(John Knox)가 빛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을 때, 스코틀랜드가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존 웨슬레(John Wesley)가 빛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을 때, 영국이 부흥하였고 세계가 그의 교구가 되어 변화되어 갔습니다. 누가 이 생명의 빛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생명의 빛을 받아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다 영적으로 어두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만이 죄사함을 받아 생명의 빛을 받아야 하나님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빛과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마음에 영접하여 삶이 어두움이 전혀 없는 빛과 생명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예수께서 “(31)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만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종노릇하다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을 받지 못하면 모두가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자유란 스스로 싸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위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참 자유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노력하고 투쟁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란 먼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칭 예수의 제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고백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만 참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거한다’는 말은 집안에 거하는 것처럼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 말씀 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말씀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말씀에서 힘을 얻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생명의 말씀으로 믿을 때 참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첫째, 예수의 말씀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 때까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다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한 번 듣는다든가 한 번 읽는 것으로서 그 완전한 뜻을 알고 있다든가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직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일에 대해서, 그 뜻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묵상하며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끊임없이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16-22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죄로부터 의롭게 되어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만, 불순종하게 되면 죄의 종이 되어 결국에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전에 죄의 종이었던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므로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의 몸을 의의 종으로 드려 거룩하게 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알고 믿고 순종하므로 성도 여러분이 참된 제자가 되어 진정한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고 거룩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삶의 마지막은 곧 영생이라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로 삶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마침내 영생에 이르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진리가 가져다주는 자유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시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B.C.872년경, 여호사밧은 왕에 등극하자, 우상을 철저히 타파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행하며, 그 말씀대로 행하여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여호사밧 왕의 통치를 기뻐하시며 그 나라를 견고하고 강하게 축복하시고 그 부귀 영화를 크게 떨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더욱 더 큰 축복은 주변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도록 하여 여호사밧 왕을 감히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라의 평화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대하17:1-10) (1)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어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어하되 (2)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또 유다 땅과 그의 아버지 아사가 정복한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더라 (3)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4)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 (6)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7)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8) 또 그들과 함께 레위 사람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도비야와 도바도니야 등 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9)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10) 여호와께서 유다 사방의 모든 나라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매

또한 진리가 임하게 되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회개의 영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통해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야곱이 20년 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며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야곱의 인생 여정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벨엘로 올라가자는 말입니다. 20년 전, 형 에서를 기만하여 장자권을 받아내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일로 형 에서는 야곱을 죽여 한을 풀고자 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수 천리 떨어진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으로 야곱을 도피시킵니다.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허겁지겁 걸음을 재촉하지만 두렵고 외로운 밤을 피할 수 없어 돌 하나를 베개 삼아 노곤한 몸을 뉘어봅니다. 이내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사닥다리가 하늘에까지 닿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리는데 “(창28:13-15)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하여 두렵고 고독한 길에 자기 홀로인 줄 알았는데 이내 말로만 듣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 그리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이 자신에게 계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 야곱은 잠이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며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며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서원합니다.

(창28:20-22)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그리고 마침내 외삼촌 집에 가서 20년 세월을 보내며 하나님의 은혜로 두 아내와 12명의 자녀들을 두고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창31:3)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을 약대에 태우고 자신의 모든 짐승과 소유물을 이끌고 고향으로 출발합니다. 고향 가는 길에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성 여자들을 구경나갔다가 그만 그 성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이 사태 해결을 위해 추장의 아비 하몰이 야곱을 찾아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디나를 자기 아들과 결혼시키고 자기 땅에서 계속해서 생활하는 게 어떠냐며 협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여동생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는 못하겠다.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누이를 줄 수 없다. 그러나 허락할 수 있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너희 족속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는 것이다.” 며 협상 조건을 제시합니다. 하몰과 그 아들 세겜 추장이 협상 조건을 좋게 받아드리고 돌아가 일제히 할례(circumcision)를 시행합니다. 할례를 행한 후 삼일 째 되는 날, 가장 고통스러울 때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을 급습하여 할례로 인해 꼼짝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세겜 족 모든 남자들을 몰살하고 하몰과 그 아들 세겜까지 죽여버리고 누이 디나를 데려옵니다. 게다가 그 성의 모든 재물들을 약탈하고, 그 자녀들과 아내들까지 사로잡아오게 됩니다. 거룩한 할례 의식을 악용하여 세겜 족을 속이고 학살한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이 놀라 두려워하며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34:30) 너희가 내 입장을 난처하게 하였다. 이 땅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냄새를 맡고 나를 증오할 것이다. 우리는 수가 얼마 되지 않는데 만일 그들이 합세하여 공격해 온다면 우리 집안은 망하고 말 것이다.

고향 떠나 파란만장한 20여년 고생 끝에 대가족을 이루고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사랑하는 딸이 강간을 당하고, 이 사건으로 학살극이 벌어져 주변 가나안 동맹 족속들이 분개하여 합세 공격을 해온다면, 그간 이룩한 20년 세월의 모든 축복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되는 처지가 되고 말 처지가 되어,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창35:1)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하여 두렵고 외로운 밤을 홀로 보낼 때 나타나셔서 항상 함께 하여 어디로 가든지 지키며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곳,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것과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대가족을 이루고 거부가 되어 평안히 돌아오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자신이 약속한대로 고향에 돌아와 제일 먼저 벧엘로 올라가서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어야 마땅했습니다. 야곱이 당하게 된 환난과 위기는 바로 벧엘을 잊어버린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참다운 성도가 되는 길은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그 말씀을 얼마나 많이 진실하게 실천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20년 전 바로 그 때를 기억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약속한대로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드리며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잊을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고 살아가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하실 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벧엘의 서원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곧장 전 식솔을 모아놓고 말합니다.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창35:2-3) 환난 날에 함께 하시며 외삼촌 집에 가서 숱하게 사기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대가족이 되게 하시며 거부되어 평안히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잊어버린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외삼촌 집에서 나올 때 가져 온 모든 우상을 땅에 묻어버리고 철저히 회개하며 새 옷으로 갈아입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고생 끝에 대가족이 되어 모든 외로움이 사라지고 나니까 외롭고 두려울 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보다 딸 디나와 자녀들이 더욱 더 귀하고 사랑스러웠던 것을 회개한 것입니다. 거부되어 금의환향하다보니, 10번이나 사기 당해 품삯 중 한 푼도 받지 못하는 형편에 모든 것을 찾게 해서 거부되게 하신 하나님보다 재산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을 회개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십일조를 잊어버리고 지내온 것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 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면 모두 과감하게 버리시기 바랍니다. 딸 디나가 강간으로 몸을 더럽혔다고 해서 이방인에게 그냥 넘겨주거나 할례 등의 조건으로 협상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거룩한 할례 의식을 악용하여 보복 학살한 행위는 아주 불경하고 잔악한 행위입니다. 이를 철저히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야곱은 형 에서와의 원수된 관계를 많은 물질로 해결하려한 행위, 하나님께서 평안히 돌아오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했던 수단과 방법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1:15-16)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 타협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려고 했던 모든 행위를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장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 땅과 밭을 사들이고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살고자 했던 것은 그곳이 가축을 키우기에 좋아보였고, 장사하기에도 아주 편리해서 여러 가지로 유익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눈앞의 이익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뜻)를 구하기보다 이방인처럼 먼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는 가치관을 회개하고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마6:31-33)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단을 쌓으라”는 말씀은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으라, 잊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라, 식어버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다시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은 야곱이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약속을 저버렸지만 그래도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을 이루어 주기 위해 잃어버린 은혜와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야곱이 배은망덕하여 당하게 된 최대의 환난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대로 야곱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뒤늦게나마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대로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꿔 입고, 벧엘로 올라가 참회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와 십일조를 받으시고 야곱을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35:5)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세겜 주변의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야곱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삶에 평안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간 잊고 지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찾아 새 옷으로 바꿔 입고 하나님 앞에 나와 참회의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하신 것, 서원하신 것들을 기억하고 찾아서 회개하고 반드시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모두 받아 누리시기바랍니다. 생명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영접하고 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삶의 어두움이 전혀 없는 생명과 빛, 그리고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김영규 목사

어둠의 세상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12) 주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입니다. 빛을 비추는 장소가 바로 이 세상입니다. 요한은 세상이란 말(kovsmo")을 주로 세상 사람들, 특히 타락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인간 세상에 빛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 세상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빛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어두운 곳입니다.

첫째로, 이 세상은 영적으로 어둡습니다. 영적으로 어둡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몰라요.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를 모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처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물론, 무신론, 불가지론, 우상 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영적 무지는 지적 무지로 이어집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은 원천적인 질문에 대해서 답하지 못합니다. 우주의 근원은 무엇인가? 어떻게 물질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했는가? 모든 물리적인 힘의 출발은 무엇인가? 생명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근원은 무엇인가? 우주의 종말, 지구의 운명은 무엇인가? 내 자신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허망하게 살다가 불현듯 죽음이 다가 오면 허무하게 끝장납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인생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1-)

둘째로, 이 세상은 도덕적으로 어둡습니다. 영적인 어두움은 모든 범죄의 원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으로써 만 가지 죄악이 발생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28-32) 이 도덕적인 어두움이 한 개인을 불행하게 만들고, 가정과 사회 전체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은 어둡습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도덕적으로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을 갈망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두운 세상에 유일한 빛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εγω ειμι το φωσ του κοσμου ; I am the light of the world) 이 귀절에서 ‘나’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 자신이 바로 ‘유일한’ 세상의 빛입니다. 다른 광원은 없습니다. 온 지구를 밝히는 빛은 태양 하나로 족합니다. 밤하늘의 천체들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오직 태양 하나만이 지구를 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첫째로, 예수님만이 영혼의 빛입니다. 본문은 영혼의 빛을 생명의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두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영혼의 생명이고 둘째는 육신의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영혼이 떠나가면 죽습니다.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죽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사망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과 육의 생명이십니다.

어떤 인간도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직후에 다락방에 놓인 백부장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죽어서 장례식을 거행하던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그 시신을 길에서 붙들고 살리셨습니다. 무덤에 장사 된지 사흘이 지나 냄새나는 나사로의 시신을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질병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병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곧 생명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셔서 생명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생명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생명의 본질은 영혼에 있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그 영혼에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영혼은 죽은 영혼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혼은 살아있는 여혼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빛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모시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보세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19)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을 영접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에서 구원 받습니다. 영생을 얻고 천국을 얻습니다. 인생 행로를 알고 바른 삶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인생이 가야할 고향, 영원한 처소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가끔 임종을 지켜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 자신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 있는 가족들을 염려합니다. 자신들의 처소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품이 보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소망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영혼의 빛이십니다. 이세상의 누구도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영생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둘째로, 예수님만이 유일한 양심의 빛 도덕의 빛이십니다. 우리는 곧잘 양심을 들먹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이란 모두가 온전하지 못한 양심입니다. 세상의 도덕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도덕률은 시대 상황에 따라서 늘 변합니다. 어제의 죄가 오늘은 정의가 됩니다. 편견과 오류가 지배하는 것이 세상 양심이요 도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적인 도덕의 빛이십니다. 제아무리 역사가 바뀌고 환경이 변해도 불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예수님의 별명을 ‘아멘’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 말로 진리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양심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거짓이 사라집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가 세워집니다. 예수가 가는 곳에 자유, 평등, 박애, 인권 존중의 사회가 실현됐습니다. 권리장전의 정신, 불란서 혁명의 정신, 미국의 노예 해방의 정신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오늘날 모든 민주 국가의 기본법인 천부 인권의 사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질 때에 로마의 잔인한 격투기는 없어지고, 축첩이 사라지고, 유아 학살이 없어졌습니다. 예수가 전해질 때에 남녀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되고, 노예 제도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전해지는 곳에 도덕적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썩은 구습이 없어지고 새 윤리가 탄생됐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개조되고, 사상이 변화됩니다. 죽어버린 양심과 도덕이 살아납니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이 되면 한 주간 동안 타오르던 횃불 행렬이 사라집니다. 성전의 횃불이 꺼집니다. 성전 뜰은 적막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등불이 사라진 곳에 예수님은 서 계셨습니다. 의미심장합니다. 밤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이나 네온사인이 얼마나 휘황찬란합니까? 그러나 낮에 켜놓은 네온사인은 흐리멍텅하고 누추해 보입니다. 태양빛이 너무나 강렬하여 모든 빛이 필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에는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이 다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모든 것들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죽음을 비추는 생명의 빛입니다. 죄악 세상을 밝히는 도덕의 빛입니다. 우리의 마음 마음을 밝히는 양심의 빛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밝히는 영원한 빛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빛만 필요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 아멘 !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한 가지 특권을 주십니다.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 특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주님을 모신 사람들은 헤매지 않고 어둠 속을 환히 보면서 걸어갑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전혀 자리잡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빛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어둡다고 원망하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이신 주님을 모시고 있으면 됩니다. 빛의 능력을 사용하세요. 빛으로 어둠을 이기세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첫째로, 죽음의 어두움에 다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장 큰 어둠은 바로 죽음입니다. 모든 인생들은 죽음의 노예입니다. 죽음이 전 생애를 지배합니다. 죽음의 두려움 속에 살면서, 죽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주님은 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적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은 육체적 죽음보다 천만 배 더 무서운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면 영적으로 사망자가 됩니다. 영적 사망자가 되면 무지와 온갖 두려움 속에 불행한 삶을 살다가 결국은 지옥에 떨어집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두 가지입니다. 영혼의 생명과 육체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합니다.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축복의 특권을 누립니다. 또한, 육신적으로 사망을 이깁니다. 죽지 않는 몸, 영원한 몸, 신령한 몸, 강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어둠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모신 우리는 세상에서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살려내는 특권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베드로는 미문가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켰습니다. 죽은 애니야를 살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쳤습니다.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자를 고쳤습니다. 밀레도에서 삼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생명의 구원자들입니다. 영적으로, 혹은 육신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병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지런히 병든 이웃을 찾아다니세요. 부모 형제, 친척들이나 친구들, 먼 이웃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돌아보세요. 우리가 소유한 예수의 빛이 사람들을 살릴 것입니다. 육신을 살리는 것도 큰 소득이지만, 영혼을 살리는 것은 더 큰 소득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죽음을 제압하는 사도들입니다. 생명의 전파자들이 되세요.

둘째로, 죄악의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양심과 도덕의 빛이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진정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은 양심이 회복됩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1-24) 우리는 정의의 빛입니다. 진리의 빛입니다. 거룩의 빛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암5:24)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썩었어도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공무원은 공무를 정당히 집행하고, 공권력을 정당히 사용합니다. 예수 믿는 사업가는 사업가로 정당한 경영을 하고 거래를 합니다. 예수 믿는 정치인은 바른 정치를 함으로써 빛을 내고, 언론 출판을 하는 사람들은 바른 말과 글로써 빛을 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양심의 유일한 빛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십니다. 당연히 우리는 양심의 등불입니다. 정죄하고 심판하는 등불이 아닙니다. 바른 삶을 보여주는 등불입니다. 말로만 떠벌이는 정의가 아닙니다. 삶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정의입니다.

셋째로, 심령의 낙심과 절망의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낙심과 좌절을 밥 먹듯이 합니다. 정치적 어두움, 경제적 어두움 속에서 좌절합니다. 가족 관계, 환경 파괴, 인간성 상실, 각양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좌절합니다. 이렇게 소망이 끊어진 곳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등불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바람을 멎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줌의 양식으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다 낙심해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소망을 전파합니다.

우리는 민족에게 소망의 등불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 민족에게 소망의 환상을 보여줬습니다. 장차 들어갈 성전의 환상을 보고, 마른 뼈들이 다시 일어나는 환상을 보고 이스라엘의 부흥을 외쳤습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간 바빌론 땅에서 민족의 회복을 전파했습니다. 학개, 스가랴 선지자는 파괴된 성전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성전을 다시 세우실 것을 바라보고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는 작은 빛입니다. ‘작은 빛’은 크지 않습니다. 매우 微力합니다. 저는 때때로 無力感을 느낍니다. 거대한 상업주의, 돈에 지배당하는 사회, 윤리성을 잃고 동물이 되어가는 인간들, 깨어지는 인간관계, 쓰나미 같은 시대 사조, 멸망하든지 말든지 갈 데까지 가보는 집단적 파괴성. 과연 내가 이런 트렌드를 이길 수 있을까? 衆寡不敵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주님의 빛은 강렬합니다. 주님은 혼자서 전 인류를 비추셨습니다. 태양은 홀로 지구를 밝히고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 하나의 등불만 켜져도 모든 상황이 달라집니다. 둘 셋이 없어도 됩니다. 나 하나의 등불이 제대로 켜진다면 내가 속한 주변은 밝아집니다. 나 하나로 온 가정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나 하나로 직장이 밝아지고, 마을이 밝아지고, 교회가 밝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하나’의 빛을 밝히세요. 양심의 빛을 비추세요. 도덕의 빛을 비추세요. 영혼의 빛을 비추시고, 생명의 빛을 비추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바요, 우리의 할 일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빛을 많이 받아서 많이 비추는 빛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만을 반사하라

 

인간 세상에 빛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뿐입니다. 구약에 보면 빛의 기록이 몇 군데 나옵니다. 첫째는 창세 때에 나타난 빛입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빛은 무질서를 바로잡고, 만물을 생존케 하는 질서와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둘째는 광야 시절에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불기둥입니다. 그 불기둥은 밤중에 이스라엘의 길을 안내하는 인도자요, 추위를 막아주는 에너지요, 바로와 같은 원수를 방어하는 목자적인 빛이었습니다. 셋째는 성전시대에 성소에 켜 놓던 황금등대입니다. 이 등대에는 일곱 개의 등불이 켜져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길을 밝혔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입니다. 창조 때의 빛은 생명의 빛이요 질서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광야의 불기둥은 인생의 갈 길을 인도하고, 재앙을 막고, 악한 자들을 막아주는 목자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거룩한 성소를 비취던 황금등대는 바로 세상 죄로 어두워진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빛의 총체는 바로 메시야로 대표되는 빛입니다. 인류에게 유일무이의 빛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만을 정확히 반사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의 포커스를 정확히 예수님께 맞추어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정확히 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빛을 정확히 반사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 대드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본문 13절에서 20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세상의 빛이냐? 우리는 인정하지 못하겠다! 바리새인들은 자칭 가장 잘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 그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13) 그들은 예수님께 빛의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행동으로 보여주신 거부할 수 없는 빛의 모습을 외면하고, 논리적인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14-18) 모세 율법에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했다.(신17:6,민35:30) 나는 내 자신의 증거와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내세우겠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를 법정 증인으로 내세운다면 인정받기 곤란합니다. 두 가지 원인 때문입니다. 첫째로, 거짓말과 위증의 우려입니다. 둘째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실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잘 아십니다. 어디서 와서 어떻게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지 자세히 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을 능히 증인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증거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적에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시고, 증거 하신 빛이십니다. 인간 세상에 유일무이의 빛이십니다. 오직 예수만을 충실히 반사하세요. 예수님께 삶의 포커스를 정확히 맞추는 것만이 진정한 세상의 빛이 되고, 세상의 어둠 속을 당당히 활보하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나는 세상의 빛이니

최응희 목사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일곱 번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6:51),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목자(10:11), 부활이요 생명(11:25), 길,진리,생명(14:6), 참 포도나무(15:5)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생명, 구원과 관계된 말씀들입니다.

 

1. 영혼의 빛

그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주이시며 생명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빛으로 삽니다. 빛이 없이는 어떤 생명체도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의 빛이시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의 생명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이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빛의 창조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이 빛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도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빛이 사람들에게 비추었지만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였다고 하였습니다(3:19). 그러나 이 빛을 사랑하고 이 빛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혼의 구원의 빛이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1:9-13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세상을 밝혀주거나 인도해주시는 분이라는 역할로서의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없이 믿음 없고, 예수 없이 구원 없고, 예수 없이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빛이십니다. 생명의 근원이시요, 구원의 근원이시라는 뜻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8:12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2. 삶의 빛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빛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푯대요, 인도자가 되십니다.

오늘날 대명천지같은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어두움을 경험하며 삽니다. 옛날에는 정말 빛이 없어서 어둡고, 아는 것이 없어서 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밤을 대낮처럼 밝히고 살고 있지만, 그 대낮같은 밤은 영혼의 어두움을 만들어내는 타락과 쾌락의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대낮같이 밝은 밤이 칠흙같은 어두움의 삶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식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지식이 부족하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서 어둡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야말로 앉아서 수만리를 보고 있는 시대이지만, 그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서 어떤 정보가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두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이 빛입니다. 이 어둠의 시대에 우리 삶을 밝혀주고, 우리 분별을 온전케 하고, 우리 영혼을 비추어줄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옛 시인이 고백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119:105

말씀이 빛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내 인생길의 푯대라는 뜻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어 세상을 선명하게 보게 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어디가 위험한 길이요, 가야할 길인지를 분간 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을 때 어느 곳이 가야할 길인지, 가지 말아야 할 길인지를 알고 분별하고 분명하게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분주해도 성경말씀을 우리의 삶의 중심에 갖다 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삶 한 가운데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빛이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버티고(vertigo)현상’이라고 합니다. ‘버티고 현상’이란 깜깜한 밤이나 구름 속에서 전투기가 뒤집혀 날아가는지 정상적으로 날아가는지 혼동이 일어나는 '공간정위상실현상(空間正位喪失現狀)’을 말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종종 인체 평형관이 잘못된 인지를 하게 되고 종종 대형 사고를 내게 됩니다. 특히 해상을 비행할 때나 야간 비행 시에는 항공기의 위치를 참고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 없어 비행시 별빛과 해상의 선박 불빛이 동일하게 보이는 비행 착각도 발생하기 쉽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행착각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의 느낌을 의존하지 않고 철저하게 계기판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때때로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버티고 현상’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잘 판단이 되지 않습니다. 가치관이 혼돈되어 그냥 사람들을 따라갈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우리 삶을 견고히 붙들어 줄 계기판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을 이끌어주는 등대와 같은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인생의 안내자가 말씀이요, 그 말씀이 인생길을 밝히는 빛이라는 말씀인 것을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119:105

 

3. 세상의 빛

이렇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향하여 너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5:14-16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빛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오늘 날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시원치 못하다고 하여도, 아무리 교회가 제 역할을 잘 못한다고 하여도,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에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 빛을 보고 바른 삶의 길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남은 자들이 있어서 세상에 빛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남이야 알던 말던

착한 일 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남이야 알던 말던 주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있기에 아직도 세상이 밝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 빛 된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을 바로잡고, 마음을 씻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그 착한 일하는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우리 안디옥 교인들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여러분들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제 신문에서 기자가 길거리에 나가서 4시간 동안 거지 체험을 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여자 기자가 노숙인 모습으로 신촌역 7번 출구에서 ‘돈도 없고 희망도 없다’는 글씨를 써서 앞에 놓고 쭈그리고 앉아있었습니다. 30분 만에 어떤 60세가 넘은 분이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학생, 점심은 먹었어? 젊은 사람이 왜 그러고 있어. 내가 점심 한 끼 사줄테니까 여기서 이렇게 있지 말고 일어나자.’ 한 시간 만에 어떤 여자분이 와서 1000원을 주고 가더니 가던 길을 돌이켜 다시 왔습니다. 이임숙이라는 여자 목사님이었는데 이 거지 주변을 계속 맴돌다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다른 여자 한 분도 와서 같이 옆에 앉더니 여자 거지의 손을 어러만지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딸아, 여기 왜 이러고 있니, 널 이렇게 힘들게 한 게 뭐니. 네가 이렇게 나온 용기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해결방법을 찾자.” 그 분의 눈물이 거지의 운동화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이임숙 목사님은 이 거지 기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올려주며 말했습니다. “넌 보석 같은 존재야, 우리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으면서 얘기하자. 우리는 너를 이렇게 내버려주고 갈 수 없어”라고 했습니다. 부축하여 짜장면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다시 되돌아와서 거지 행세를 하고 앉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10,000원을 주고 가면서 ‘힘내!’라고 말하고 가는 사람, 젊은 놈이 할 짓이 없어서 이러고 있냐고 핀잔을 주는 할아버지, 20대 여성 둘은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나도 죽고 싶을 때가 있었다. 우리는 대학생 선교회인데 예배드리러 꼭 왔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기도 하고, 근처 교회 두 곳을 알려주는 아저씨도 있었습니다. 손을 꼭 잡아주며 교회 다니라고 권해주는 20대 남자 청년도 있었습니다. 놀리거나 욕을 사람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 따뜻했습니다. 그날 이 기자는 거지행세를 해서 3만 6000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시울이 좀 붉어졌습니다. 특히 교인들이 그렇게 여럿이 이 사람에게 관심을 보여주었고, 교회를 소개하기도 하고, 한 여자 목사님은 아예 곁에 앉아서 울다가 짜장면도 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다는 것에 감동되고 감사했습니다. 기독교 신문이 아니라 조선일보에 난 기사입니다(2010.5.29. 토일섹션 Why?). 그래도 빛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에 큰 기쁨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빛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감사했습니다.

 

빛은 아무리 작아도 그 빛만큼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무리 짙고 깊어도 어둠이 빛을 이기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빛도 그 만큼 어둠을 이기고 자신의 주변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도 빛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바라기’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해바라기에서 전용한 말입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중심으로 돌듯이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주바라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빛을 닮아 비록 작은 빛이라도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빛인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있는 그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 밝고, 맑고, 헌신적인 삶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주변을 밝히는 주님의 빛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영적인 일조권을 중시하라!

조상호 목사

1605년 11월5일 당시 영국의 제임스 1세가 왕으로 재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제임스 1세 왕은 영어 성경 중에 가장 권위 있는 "King James Bible"로 유명한 왕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을 때, 폭파 음모사건(Gunpowder Plot)이 일어났습니다. 카톨릭의 구교도들 가운데 가이도 폭스(Guido Fawkes)와 다른 동조자들은 런던의 국회의사당을 폭파시키기 위해 수많은 양의 폭약을 국회 의사당 지하에 반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당 곳곳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들은 카톨릭 박해를 방지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제임스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완벽하게 꾸몄습니다. 그들은 제임스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임스 왕이 도착하면 폭약을 터뜨려 보기 좋게 국회의사당과 함께 왕을 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음모단원 중 몇 사람이 그를 배반하고 왕에게 가서 모든 계획을 알려준 것입니다. 결국 제임스 왕이 파견한 왕궁 경비대에 그는 체포됨으로 그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어 결국에는 국회의사당의 폭파와 제임스 왕이 살해되는 아찔한 순간을 피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후에 교수형에 처해져 사형 당하고 그의 시체는 마차 뒤에 매달린 채, 런던 시내를 순회한 후, 네 토막으로 잘려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영국 정부에서는 매년 11월5일을 Guy Fawkes Night로 정하고 불꽃놀이를 성대하게 하며, 국회의사당이 폭파되는 것과 왕이 살해되는 비극을 방지한 날을 기념합니다. 현재에는 영국 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영연방 국가에서 매년 11월5일에 불꽃놀이를 성대하게 합니다. 물론 이 불꽃놀이 때문에 매년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고 신체에 화상을 입는 등, 크고 작은 불상사가 발생하고 있지만, 영연방 국가들은 이 불꽃놀이 자체가 매우 의미가 있는 행사이기 때문에, 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불꽃놀이를 제재하지 않습니다.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도 지난 화요일에 New Brighton 해변 가에서 성대하게 폭죽을 터뜨리며 불꽃놀이를 하려고 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예년과 달리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만, 예년에 보면 굉장합니다. 동네마다 폭죽을 터트리며 굉장한 폭음을 울리며 불꽃놀이를 하다보니 시 전체가 떠들썩합니다. 이러한 불꽃놀이는 비단 영연방국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도 있습니다. 매년 7월4일 독립기념일이 되면 전국이 동시에 폭죽을 터트리면서 밤을 대낮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때에 미국 사람들은 나라가 독립된 것을 기념하며 즐거워합니다. 이러한 행사는 과거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소위 ‘초막절‘이라고 하는 절기에 이것이 행해졌습니다. 1년의 모든 추수를 끝낸 후, 집 앞에 초막을 지어놓고 거기에서 7일 동안 기거하였습니다. 초막절 첫날 저녁이 되면 이 축제가 시작되는데, 이 때에는 밤마다 큰 등불을 성전 뜰 안에 밝혀 놓습니다. 그런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은지 예루살렘 온 도시가 환해지고 여인들은 불빛 아래에서 뜨개질을 할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앞 광장 한복판에 여러 개의 봉화대를 만들어 놓고 불을 밝힘으로써 예루살렘 시내 구석구석까지 밝게 비춥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밤새도록 춤을 추며 노래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과거 자기 민족이 애굽에서 수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불기둥으로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 이 행사를 합니다. 그러다가 초막절 마지막 날인 7일째가 되면 등불이 서서히 꺼지게 되는데, 그 동안 즐겁게 춤을 추며 노래하는 소리도 멈추면서 예루살렘 도시의 밤은 또 다시 어두워집니다. 그 때 갑자기 군중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이 선언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1주일 내내 밝혀진 세상의 불은 시간이 지나면 꺼져 결국에는 또 다시 깜깜한 어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빛은 불완전한 세상의 불이나 세상의 빛과 다릅니다. 한번 켜지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빛, 세상 구석구석을 비추는 참된 빛으로 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는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이 2,000년 전,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과 10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미 창조 전부터 참 빛으로 계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워진 이 세상을 비추시려고 직접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5절과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인 세상은 밝은 세상이 되는 반면,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세상은 아직도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수년 전 한겨레신문에 “패스트에도 아랑곳 않는 쥐 숭배“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인도에서는 쥐를 숭배하는 힌두교 풍습 때문에 28년 만에 발생한 패스트병을 퇴치하려는 노력이 헛수고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이 쥐를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는지 쥐 때문에 여객기가 세편이나 결항 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의 승무원조차 기내에 있는 쥐를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캘커타 시에서는 아직도 힌두교도들이 공원에서 쥐들에게 먹이를 준다고 합니다. 인도 전체 국민들이 3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인 인도 곡물 생산량의 1/4를 해마다 쥐들이 먹어 치우는데도,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쥐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겨우 쥐를 처리한다는 것이 날이 밝으면 쥐덫에 잡힌 쥐들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서 풀어 주는 정도입니다. 쥐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패스트 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도, 인도 사람들은 여전히 쥐를 귀하게 여깁니다. 인도사람 절반가량이 거지일정도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있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쥐를 숭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도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종교적인 어두움이 이렇게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그들이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둠 가운데 처하게 되자,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어리석일인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도 보면 어리석은 일만 골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녀의 대학 합격을 위해 무당 불러다가 대낮부터 굿판을 벌였지만, 자녀가 대학에 낙방하고 재수, 삼수해도 대학은 커녕, 전문대학도 들어가지 못하고 돈만 날리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 구상을 위해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그 점쟁이가 철을 가까이 하라고 해서 그 말 믿고 사업을 벌였다가 쫄딱 망한 사람도 있습니다. 부적을 차고 다니면 감기도 안 걸리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돌팔이 철학관장의 말을 믿고 비싼 돈 들여 부적 사서 달고 다녔지만 아무 효험도 없자, 그 돌팔이 찾아가 행패부리다가 영업방해죄로 경찰에 입건된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까? 왜 이렇게 사람들이 어리석은 짓을 행합니까? 그들이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 가운데 예수님의 참 빛이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어리석은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빛이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모르는 가정, 모르는 사회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전인 1700년대 유럽 역사를 보면, 프랑스와 영국은 극히 대조적인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혁명이 계속되고 또 그 혁명에 대한 반대혁명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처럼 사라져 갔습니다. 하루도 사회가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프랑스에는 계속해서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영국은 달랐습니다. 부패하기는 프랑스나 영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 이상으로 영국에도 부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랐습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19세기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영국을 프랑스와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영국을 다르게 만든 것은 바로 존 웨슬리나 조지 휘필드 같은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영국에 복음이 들어가고 그리스도 빛이 비추이자, 영국이 변화된 것입니다. 부패한 영국이 영적으로 부흥되었습니다. 혼돈의 사회가 건강한 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빛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복음의 빛에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곳마다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구체적으로 빛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빛은 풍성한 생명을 준다

제가 학교 다닐 때, 미생물을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조건(factor)을 달리해서 효모라는 미생물을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똑같은 조건의 인큐베이터 두개를 준비한 후에, 한쪽 인큐베이터에는 빛을 완전히 차단하여 암흑상태를 유지하게 하고, 또 다른 한쪽의 인큐베이터에는 24 시간 내내 불을 켜서 빛을 쪼여 주었습니다. 그러한 상태로 며칠 동안 키운 후, 발효력을 체크해보니 차이가 많았습니다. 암흑상태에서 키운 미생물보다 24시간 내내 빛을 쪼인 미생물이 훨씬 발효력이 우수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빛은 미생물을 성장시키는 필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동물이나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독 속에 쥐를 넣고 빛을 완전히 차단한 상태에서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방치했더니 3분 이내로 죽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깊은 독 속에 쥐를 넣고 빛을 비쳐주었더니, 먹을 것을 주지 않아도 36시간 동안 생존했다고 합니다. 단순한 실험 같지만 의미 있는 실험입니다. 빛은 쥐를 살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녹색식물은 빛에너지를 이용하여 광합성 작용을 함으로 건강하게 자라갑니다. 모든 생물은 빛을 통해서 생명을 얻습니다. 빛이 없으면 미생물이나 식물이나 동물들은 모든 활동이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생명활동은 빛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빛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빛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만드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빛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세상‘에 가장 먼저 빛을 만드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만드셨을까요? 빛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가장 먼저 빛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을 해서 만약 빛을 만드시지 않은 상태에서 각종 식물이나 물고기, 그리고 동물들을 창조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깜깜한 상태에서 광합성작용을 하지 못해 식물들은 자라지 못하고 곧바로 죽어버렸을 것입니다. 물고기들은 빛이 없어 플랑크톤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려 죽든지, 깜깜한 물 속에서 헤엄을 치다가 다른 물고기들과 충돌하여 뇌진탕으로 죽어 가는 녀석들이 수도 많이 생겼을 것입니다. 각종 들짐승들은 앞이 도무지 보이지 않아 먹이도 찾지 못한 채 그들 역시 영양실조에 걸려 다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혼란한 상태가 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빛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모든 생물이 자라는데 필수요소입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세상의 참 빛 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생명을 얻습니다. 반면에 참 빛 되신 예수님을 떠나면 죽습니다.

 

영국의 계관시인인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이 한번은 친구와 함께 정원을 거닐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테니슨에게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시인이었던 테니슨은 말없이 한참을 걷다가 아름다운 꽃 앞에 서서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이 꽃과 저 태양과의 관계와 같다네. 이 꽃은 태양빛이 없으면 시들시들 죽고 말 것이네. 태양의 빛과 태양의 따스함이 없다면 이 꽃은 살 수도 없고, 꽃을 피울 수도 없는 것처럼, 나는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없으면 영원히 죽고 말 것일세.”

 

그렇습니다.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정죄와 심판 대신에 사랑과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의의 태양이십니다. 그리고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참 생명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의의 태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도 바울처럼 새롭고도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빛은 바른 길로 인도한다

밤에 비행기가 착륙할 때 보면, 공항 활주로에 유도등이 쫙 켜져 있습니다. 깜깜한 밤에 공중에서 유도등을 보면 정말 장관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 유도등이 무슨 용도로 쓰입니까? 승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비싼 돈 들여 유도등을 활주로에 설치 해 놓았습니까? 아닙니다.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키기 위해 설치해 놓았습니다. 기장은 비행기를 착륙하려고 할 때, 그 유도등을 따라 방향을 잡습니다. 그리고 표시된 지점에 착륙을 합니다. 여기에서 빛이 무슨 역할을 합니까? 승객들을 안전한 여행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우리 인생길을 유도합니다. 복된 길로 인도합니다.

 

한국 최초 맹인 박사가 된 강영우 박사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원래 그 분은 어렸을 때에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이 떨어져 나가 앞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입원하며 눈을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현대의학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실명 선고를 받았을 때, 어린 강영우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맹인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나 되고 인간 구실도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데 격으로 가정은 매우 가난하여 고픈 배를 움켜지며 캄캄하고 지루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며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서울맹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한 후, 문과대학 전체 차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참 빛으로 인도하신 주님은 이것 뿐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결혼을 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로 정규 유학생이 되어 미국에 도착 한 후,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 대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 조지 부시 대통령(George W. Bush)의 종교 및 사회봉사 분야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또 실명과 언어의 이중 장애에도 불구하고 미국 12만 명 중 1명꼴로 오르는 미국명사 인명사전(Who's who in America)은 물론 세계명사사전(Who's who in the world)에도 약력이 수록된 저명인사가 되었습니다. 1983년에 출간한 “빛은 내 가슴에“라는 그분의 책은 일본어, 스페인어 등의 여섯 개 나라 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 지도자 중 한분이시며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널리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강영우박사의 “빛은 내 가슴에“라는 책을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박사, 당신의 생애를 알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산증인입니다.“ 이렇게 참 빛 되신 주님께서는 장님이 된 어린 강영우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출애굽기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 곁에 항상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그들은 항상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백성들의 진위에 멈추면 그들은 그들의 행군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몇 날이 지나든지, 몇 달이 지나든지 그냥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움직이면 그들도 전진했습니다. 성경에는 이 장면을 (출13:21,22)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기에 우리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 40년 광야생활을 한 것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인생 여행의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항상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느 대학에 들어가야 할지, 어느 회사에 들어가야 할지, 누구하고 결혼해야 할지, 무슨 사업을 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르지만,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의 주권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참 빛 되신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3) 빛은 진정한 기쁨을 준다

한국에서는 남향집이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향집이 실제로 부동산으로써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햇볕이 잘 들기 때문입니다. 햇볕이 잘 들면 곰팡이도 생기지 않고 환풍도 잘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북향집을 선호합니다. 제가 오클랜드에서 만난 어느 분은 집을 구입하려고 돌아다닐 때, 항상 나침판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보았습니다. 햇빛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보니까 햇빛을 많이 보지 못하면, 의학적으로 우리 몸 속 호르몬 중에 멜라톤이라는 호르몬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멜라톤 호르몬이 몸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사람이 가라앉게 되고, 자꾸 잠만 자고 싶어 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우울증 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의 특징은 어떻게 하든지 집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방안에 커튼을 다 쳐놓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울증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햇빛을 가급적 많이 쬐이게 하면 됩니다. 방안의 창문을 활짝 열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게 하고, 커튼을 활짝 제쳐놓아 방안에 밝은 빛이 들어오게 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빛을 많이 쬐도록 하면 몸속에 멜라톤 호르몬이 많이 생성되어 우울증이 어느 정도까지는 치료된다고 합니다.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햇빛 되시는 예수님을 떠나면 영적인 우울증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내면이 치유됩니다. 심령이 치유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 처음 오신 새가족들을 보면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오셔서 주일예배에 참석했을 때 완전히 뭔가에 눌려서 얼굴이 펴지지 못하던 분이 주일마다 예배를 계속 드리면서, 새가족모임을 참석하면서, 샘모임에 참석하면서, 금요집회에 참석하면서, 얼굴이 환하게 피면서 기쁨과 평강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기쁨과 평강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 영혼에 햇빛 되시는 주님의 빛을 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의 특징은 얼굴이 밝다는 것입니다. 정말 부러울 만큼 기쁨이 넘치며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데도 아직까지 얼굴이 펴지지 않은 채, 불안한 상태로 계신 분들은 영적인 상태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아직까지 진정한 햇빛 되시는 주님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번 옆에 게신 분들의 얼굴을 보겠습니다. 만약 옆에 계신 분이 얼굴이 환하고 기쁜 얼굴을 하고 계시면 이렇게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빛을 많이 받으셨군요?” 그러나 아직까지 얼굴이 펴지지 못한 채로 계시면 이렇게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빛을 많이 받으세요”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 옆집의 일조권을 침해하면 절대로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설계도면을 바꾸어야 건축허가가 나옵니다. 이 정도로 우리 생활에서 일조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육적인 일조권은 중요하게 여기면서 영적인 일조권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육적인 일조권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조권도 중요하게 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곰팡이가 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빛을 받지 못하면 우리 영혼에 곰팡이가 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일조권이 좋은 곳이 어디 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주일예배, 이 자리가 바로 영적인 일조권이 좋은 곳입니다. 새벽기도회도 영적인 일조권이 뛰어난 곳입니다. 샘모임, 금요집회, 각종 성경공부 하는 곳도 영적인 일조권이 좋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각종 예배나 모임, 성경공부 등에 참여하셔서 우리 영혼의 햇빛 되시는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듬뿍 받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과 가까이 하면할수록 우리 안에서 기쁨이 솟아오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엘리자 에드먼즈 히윗(E. E. Hewitt)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녀는 미국의 저명한 여류작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37세 되던 겨울, 불의의 사고로 척추를 다쳐서 수개월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소망을 잃은 채 병상에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양 아래에서 만물이 소생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후, 그녀에게도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소망이 생겼다는 것에 감격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가 바로 찬송가 488장입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 이 세상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주의 영광 빛난 그 빛,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4절에서 그녀는 더 감격에 겨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에 희락이 있고 큰 소망 넘치네. 주 예수 복을 주시고 또 내려 주시네. 주의 영광 빛난 그 빛,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빛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빛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주님의 빛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빛 되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풍성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모든 삶의 주권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참 빛 되신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빛 되신 주님과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진정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얻으라

임덕순 목사

우리는 잘나가는 젊은이를 보고 ‘전도가 양양하다’고 표현합니다. 장래가 훤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앞길은 밝고 탁 트여 있습니까? 아니면 암담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성전 마당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반박했습니다. ‘너 혼자서 네가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하니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겠느냐’는 거였습니다. 네가 말하는 그 빛이란 것이 무엇이냐고 빛의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네가 세상의 빛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믿겠느냐고 만 물었습니다.

 

율법에는 어떤 주장이 신빙성이 있으려면, 두 사람 이상이 그 말이 옳다고 증언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증인도 없이 자기혼자서 자기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두세 증인이 증명하지 않는 당신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 빛이 무엇인지는 다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빛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네 주장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빛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된다’고 하십니다.

 

당시 팔레스틴 사람들은 밤에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낮에는 너무 더워서 다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밤의 여행은 위험도 많았습니다. 맹수도 있고, 뱀이나 전갈도 있고, 또 어두워서 길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길로 갈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같이 내비게이션이 달린 차가 있거나, 가로등불이 환하게 켜 있거나,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을 갖고 있다면 어두운 밤길을 갈지라도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빛은 가장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길이 없는 광야를 지나는 동안 길을 잃지 않은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지도자인 모세가 있다 할지라도 만약 불기둥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광야여행을 잘 해냈고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의 박사들도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그들이 그 험난한 길을 무사하게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큰 별이 그들을 인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한 때 이 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왕이라면 왕궁에 나셨겠지 하고 헤롯 왕궁을 찾아갔지만 거기는 새로 태어난 아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있을 때, 다시 큰 별이 나타나 그들을 베들레헴 예수님 나신 집 앞에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니까 박사들이 그 별을 보고 심히 기뻐하고 기뻐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예수님 때의 유대인들은 길이 없는 광야에서 방황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천년도 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로마의 치하에 눌려 있긴 하였지만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 상태 때문에 불만이 아주 많았습니다. 여전히 로마의 속국이었고, 로마가 지명해 보낸 총독이 실권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 나라는 하나님께서 뽑으신 다윗의 자손이 왕이 되어 다스려야 하는데, 현실은 암담했고 장래를 가름할 수도 없어서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자신들의 상황을 어두움 가운데 방황하고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고 어디론가로 향하여 나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행복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지 길을 알 수가 없었고 제대로 이끌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에는 네 개의 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그리고 에세네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하여 사두개파는 현실안주형이었고, 열심당은 요즘 알카에다처럼 과격한 혁명투사들이었고, 에세네파는 세상을 등지고 사막에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각기 자기들이 가는 길이 옳다고 자기를 따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어느 길, 누구의 가르침을 따라야 참되고 바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며 굴복하는 생활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론가 가기는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따라 가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바리새파가 비교적 성경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두개파는 현실적이어서 로마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싫었고, 열심당은 너무나 과격했기 때문에 걱정되었으며, 에세네파는 지나치게 세상을 외면하고 종말만 기다리는 신비주의였기 때문에,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이 가장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속마음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드러나는 행위만 따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위선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열심당원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독립이 왔느냐 하면 반대로 멸망이 왔습니다. 로마의 진압군이 들이닥쳐서 수 백 만명의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습니다. 열심당원의 가르침은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그랬습니다.

 

그런 시대상황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빛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가르침’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바로 그 빛, 즉 ‘바른 가르침’, 혹은 ‘바른 안내자’라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을 따르면 어디가 길인지 몰라서 어두운 가운데서 헤매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 그래서 빛을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에 계십니까? 지금의 자신의 상태, 지금의 자신의 자리가 가장 이상적인 자리, 이상적인 상태입니까? 오늘 현재의 상황에 만족을 느끼십니까? 아마 어느 누구도 현재 자신의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가시적인 목표를 성취한 분들은 그것 때문에 만족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시 합격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해왔는데 드디어 고시에 합격을 했다거나, 유학 가서 학위를 받고 와서 교수 자리를 얻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것을 이루었다거나, 너무나 가난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제 부자가 되었다거나 해서 나름대로 만족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 자체가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고하고 노력하여 겨우 소원하던 것을 얻기는 얻었는데, 그것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미래는 무조건 과거보다 낫다는 환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경험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그런 환상을 깨뜨렸습니다. 세월이 바뀌면 경제적인 상황도 나아진다는 생각도 환상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한국은 해마다 경제가 발전하는 경험을 하지만 가까운 일본만 해도 89년 이후로 20년 넘게 경제가 후퇴하고 있고, 100년 전에 부강했던 남미의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의 나라는 그때보다 훨씬 가난해졌습니다. 미래는 과거보다 훨씬 나을 거라는 희망은 현실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웃에게 무관심하면 나의 생명까지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운전을 아무리 잘 해도 남이 와서 받아버리면 교통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듯이, 내가 자녀를 아무리 예쁘게 잘 길러놓아도 누가 납치해서 나쁜 짓을 하면 갑자기 불행이 내 것이 됩니다. 그동안은 우리가 열심히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고 열심히 수출하면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어 놓고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남한을 불바다 만들겠다고 합니다. 금강산 개방하고 구경하러 오라면서 돈 챙겨가더니, 관광객을 총으로 쏴서 죽여 놓고는, 다시는 그런 일 재발하지 않도록 보장을 하라고 하니까 그것은 하지 않고서, 당장에 관광객을 보내지 않으면 그동안 남한 기업이 북한에 투자한 부동산 몰수를 하겠다고 생떼를 씁니다. 답답한 현실입니다.

 

나라 안의 상황은 희망적입니까? 대통령이 단 한 가지도 잘 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야당은 단 한 가지도 반대 안하는 것이 없습니다. 야당이 해야 하는 일은, 우리같으면 이렇게 하겠다고 대안을 제시해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국민이 선택할 대안세력이 없는 것입니다. 야당만 그렇습니까? 같은 당 안에서도 사사건건 싸웁니다. 세종시를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등불도 없이 깜깜한 밤길을 걷는 사람처럼 답답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밝은 빛입니다. 바른 가르침과 바른 안내자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은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고,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빛을 넣어주셔서 그 생명의 빛이 그 사람 안에서 빛나서, 누구에게 길을 물을 필요가 없이,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명의 길을 가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빛을 받으면, 그 얼굴이 밝아지고 그 마음이 밝아지고, 그의 장래가 밝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빛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안에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바리새인들이 거센 반발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13) 이 말은 ‘당신은 빛이 아니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증언은 형식상 문제가 있소’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던 사두개파 바리새파 등은 이미 수백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 파벌도 없습니다. 겨우 열 두명이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어떤 기반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내가 바른 진리의 안내자다. 내가 너희들의 길을 이끌겠다.”고 하시니, 법적인 구성요건도 갖추지 못한 당신의 주장을 누가 믿고, 누가 지지하고 따르겠느냐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세 가지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4)

 

예수님은 자신이 땅에서 난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오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진리는 세상에서 배우거나 연구해낸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설이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줄수록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계시는 누가 인정해 준다고 해서 진리가 되고,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궤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기 때문에 누가 증언을 서주지 않아도 내 말은 진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설명하셨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 신이가 함께 하심이라.” (15-16)

 

당시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자기들이 누구보다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사람의 중심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이미 다 아시기 때문에 굳이 판단할 필요조차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도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다 아시기 때문이고, 또 심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어떤 개인을 정죄하지는 않으실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죄를 정죄하십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 속에는 “이 세상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이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우리의 죄를 폭로하고 심판하시지 않아도, 그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되고 죄를 고백하게 되는 것은 그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하신 말씀 자체가 진리임을 증명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증인도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7-18)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그 진리에 대한 증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이 또 한명의 증인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증인의 수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는 표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들은 사람의 삶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말씀이 바른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복음을 제대로 들으면 우선 믿는 대상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지 않고 우상을 치워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무언가 공로를 세워보겠다고 하지 않고,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생명의 빛이 들어가서 작용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는 증인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세상의 빛이어서 자기를 따르는 자가 어두운 생활을 하지 않게 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에 대한 약속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이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그들에게는 나아가야 할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그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도 바르고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물질의 풍성도 명예나 지위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입니다. 요10:10에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풍성하다는 말은 물질이 아주 많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누군가가 지금 나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은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먹을 쌀과 가스비기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 사람은 우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 것이 더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돈이나 학문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관계가 된 것을 해결하고 하나님이 풍성함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그것을 채워주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고, 주님은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하여 당신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둘째, 믿는 자에게 생명의 빛인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을 당신의 빛을 비춰주기만 하지 않고 믿는 사람 안에 생명의 빛을 주십니다. 그 생명의 빛은 성령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안타깝고 초조하고 갈팡질팡하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이 넉넉하고 평안하고 감사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영접하면, 그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나를 따르는 자에게 생명의 빛을 주겠다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의 지각을 밝혀주십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지를 알아차리는 분별력을 주십니다. 죄를 싫어하게 하고, 악한 것을 기뻐하지 않게 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게 합니다. 생명의 빛이신 성령께서 마음을 밝게 비추시는 작용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에 반응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사모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바른 지각과 바른 감정을 주십니다. 그리고 무조건 더 많이 가지거나 쌓아놓거나 자기만 위해서 쓰는 것이 무익함을 알게 하시고, 이미 주신 지식이나 재물을 감사하면서 바로 사용하는 분별력을 주십니다. 나누게 하십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더 이상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더 나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스스로, 무엇이 옳으며, 어떻게 하는 것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길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이 없으면 평안도 넉넉함도 없고 어두움 가운데 헤매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가장 큰 선물은 생명의 빛이신 성령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무엇이 안타깝지도 않고 아쉽지도 않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초조해 하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지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명의 빛의 인도를 받아서 풍성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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