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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301 /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2)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3.11|조회수739 목록 댓글 0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2)

< 설 교 >

맹인과 예수

요 9:1-7 / 문기태 목사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빛을 전혀 볼 수 없었던 사람이니 얼마나 갑갑하였을까요?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은듯합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가 듣고 있는데서 아주 심한 말을 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때문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그의 부모의 죄입니까?" 빛을 보지 못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서러운데 본인이 듣는데서 듣고 있는 맹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가?는 개의치않고 마구 떠들어댑니다. 오직 자기의 호기심을 푸는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쩌면 맹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나 자신들은 좋은 시력으로 만물을 볼 수 잇다는 사실로 인해 우쭐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40절에 보면 '내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슴을 듣던 바리새인중에 우리도 맹인인가? 하고 빈정거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불행한 맹인이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영적인 소경이 되어 자신이 무엇을 보지 못하고 사는지 모르고 잇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영적 세계를 부정하고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닮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참 많습니다. 바로 영적 소경들입니다. 평생 맹인으로 살며 큰 족적을 남긴 헬렌 켈러 여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육체의 눈을 잃어 버림보다 더 큰 비극은 마음의 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고침받은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그것이니이다(2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고백하며 절을 합니다. 그는 육체의 눈을 뜨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는 새사람이 되어 확신에 차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그는 은혜를 입고 행복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맹인으로 살다 눈을 뜬 이 사람처럼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고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신에 넘쳐서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고 믿음으로 충만하여져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맹인을 만나 그를 변화시키시는 예수님께 촛점을 맞추어 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십니다.(3)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만날 때 "왜?'라는 질문을 종종 던집니다.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왔을까? 나보다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따라다닐까?' 악과 고난에 대하여는 신학자들도 쉽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고통에 대한 편견이 많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편견은 고통의 원인을 자신의 죄나 부모 혹은 조상의 죄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그런 편협하고 그릇된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때문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둘 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물론 죄가 질병이나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경우도 있다고 성경은 말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겪게 되는 많은 고통들이 오늘 본문의 맹인처럼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어 축복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성숙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까십거리로 삼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고통을 만날 때 사람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숙명처럼 받아 들이고 살아서도 안됩니다. 지나치게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단에게 속아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슴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유심히 살피며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겪는 고통에 대해 주변의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어가며 판단하고 정죄하며 상처를 입힐때에도 맞서서 다투거나 변명하려고 하지 말고 나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크고 놀라운 일을 기대하며 소망을 품고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이 불쌍한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입히며 고통을 더해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하물며 우리도 고통당할 때 위로받기를 기대했던 교인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사람에게 촛점을 맞추지 말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친히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슴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예수님은 불쌍한 맹인을 보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마치 그 사람을 위해 일하고자 세상에 오신분 처럼 그를 위해 일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맹인을 위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맹인이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아무도 그에게 그리고 그의 고통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다가온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수치를 씻어주는 말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불쌍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의 손으로 터치하십니다.(6)

뉴저지주에 소련 소년합창단이 순회공연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민박을 하였는데 그중 한 차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여 한 아이가 식물인간이 되어 파시파니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소련에서 부모가 도착하였고 그의 어머니가 빰을 부비고 얼굴을 만져주며 귀에다 소근 소근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보니까 그 순간 식물인간이 된 소년의 심장이 크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 검사기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일간지 [더 레코드]는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는 없으나 사랑의 터치가 일으키는 반응이며 분명히 그 엄마는 식물인간된 아이와 교통한 것이다.'라고 보도했습니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터치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손으로 만져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 성문앞에서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오는데 그는 그 어미의 독자요, 그 어미는 혼자된 불쌍한 과부였습니다. 주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울지 말라'고 하시며 죽은 자가 누어있는 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는 "청년아! 일어나라."하고 말슴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터치로 인해 죽은 자를 살려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가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셨습니다. 그러자 열병이 떠나가고 건강해졌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도 두 소경이 따라오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함을 쳤습니다. 발걸음을 멈춘 예수님은 저희 눈을 직접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눈들이 밝아졌습니다. 사랑의 터치가 무서운 병을 몰아내고 건강하게 해 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안수는 곧 손을 얹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터치로 어린 아이들에게 관심과 용납을 보여주시며 꿈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18년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여인에게도 안수하심으로 병에서 놓여나게 하셨습니다. 고름이 줄줄 흐르는 더러운 나병환자도 손을 내밀어 만져주셨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은 청각장애인도 만지며 안수해 주셨습니다. 사랑의 터치로 귀신을 쫓아내주고 소외된 외로움과 마음의 상처까지 어루만져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맹인에게도 다가가 당신의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며 그의 눈을 친히 어루만지십니다. 사랑의 손으로 터치하십니다. 그의 눈과 함께 마음의 모든 상처까지 함께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마치 '나는 너를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저주받은 자라고 간주하여 외면하지 않는다.'하는 사인이 담겨 있는 손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의 터치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찬양을 부를때마다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 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

여러분 고통스러울 때 예수님께 나아가 만져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아픈 몸을, 그리고 마음의 아픈 상처를, 고통스런 영혼까지 함께 만져달라고 내어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어루만져 치유해 주십니다. 그 사랑의 손길을 경험하고 새로와지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하여 보게 하십니다.(7)

예수님은 이제 소경에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그리고 그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왜 하필이면 실로암 못이었을까요? 과연 실로암 못이 이 소경을 치료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본문 7절은 실로암의 뜻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그런데 이미 4절에서 예수께서는 그가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실로암이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보냄 받아 오신 예수께서 치유하신 것입니다. 이 소경이 한일은 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더니 눈이 열린 것입니다. 새 하늘 새 땅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새 인생이 보인 것입니다.

그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갔을까요? 그가 다시 구걸했을까요? 결코 그럴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간증하는자가 되었습니다. 빛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당장 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찬양하는자가 되었고 증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의 이런 모습이 못마땅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그러자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한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내가 맹인이었는데 지금 새 세상을 보게 된 그것입니다."하며 예수님을 끝까지 옹호합니다. 그리고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맹인은 육체의 눈과 함께 영의 눈까지 치료된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비록 육안이 열려 빛을 보지는 못했으나 예수님을 만나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의 눈이 열린 순간 그녀는 모든것은 감사로 변했고 찬양으로 변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에 보면 어느날 설리반 선생이 헬렌의 손을 펌프꼭지에 갖다 대고 차거운 물을 퍼올려 손에 물을 느끼게 해주면서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물이라고 써 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의 촉감과 함께 갑자기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일깨우는 영혼의 전율이 임하면서 그녀의 마음속에는 빛과 희망 그리고 기쁨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단어만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순간이래로 그녀는 다시는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맹인의 눈이 실로암의 물에 적셔지는 순간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눈이 생명의 물을 느끼고 어둠에 익숙했던 그의 눈에 처음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 놀라운 감동이 밀려왔고 그의 인생은 감사로 변한 것입니다.

헬렌 켈러의 '내게 만일 3일만 볼수 있다면' 수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내게 만일 3일만 볼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첫째 날. 나는 나에게 친절과 따뜻함, 그리고 우정을 을 통해 나의 인생의 가치를 일개워 준 사람들을 보고 싶다. 누구보다 먼저 나에게 이 세상을 보게해 준 나의 스승 앤 설리번의 얼굴을 오래 지켜 보고 싶다고.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 아기의 순결한 얼굴도 보고 싶다고. 그리고 오후가 되면 숲속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고. 그리고 저녁이 되면 불타는 저녁노을을 기도하며 지켜보고 싶다고. 그리고 둘째 날, 새벽 여명과 함께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며 지구가 깨어나는 그 경이로움을 지켜 보고 싶다고. 나는 이날 인류 역사의 과거 현재가 숨쉬는 뉴욕 자연 박물관을 꼭 방문할 것이라고. 그곳에서 선사시대의 공룡들과 인류의 찬란한 유적을 보고. 그리고 다음은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을 나는 꼭 방문할 것이다. 유명한 화가들이 그려놓은 아름다운 그림, 조각품들--나의 손의 촉감으로 다 헤아려 알수 없었던 그 신비한 색갈의 하모니를 감상하고 싶다고. 그리고 저녁이 되면 극장에도 가고 영화도 보고 싶다고--마지막 셋째 날. 다시 나는 일찍 일어나 동트는 아침을 지켜보며 이날의 새로운 계시를 체험하고 싶다고. 이날 나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고, 거리의 풍경, 강이 흐르는 모습, 보트가 떠내려 가는 모습도 높이 솟은 탑 엠파이어 빌딩의 모습도 보고 싶다고. 5번가에서 시작하여 슬럼가도 그리고 외국문물이 숨쉬는 곳들도 보면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끼고 싶다고. 마지막으로 밤중이 깊어가 나의 마지막 밤이 문을 닫을때 나는 나는 이 사흘간 보았던 모든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감사할 것이라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평생을 산 여인이 이토록 행복에 젖어 눈물겨운 감사를 품고 살았는데 오늘 여러분과 저의 감사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으로 감사와 감격과 감동으로 가득찬 행복에 새 삶을 누리고 있다면 여러분도 본문의 맹인처럼 영적 눈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풍족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영적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일을 힘입어,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을 힘입어 치유되고 영적인 눈이 열려서 언제나 행복한 감동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눈 뜬 자의 신앙성장

요 9:1-7 / 박기완 목사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뭔가를 잘 줍는 사람이 있어요. 남들은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을 눈이 보배인 사람은 남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합니다.

어떤 산삼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등산로 곁에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이 보배인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고 크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보배로운 눈은...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 영적인 차원...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얼굴 중에서... 눈, 코, 귀, 입, 이마가 있으면 100점 만점 가운데 눈의 점수는 50점이라고 합니다. 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여러 가지 모습입니다.

그 사람 앞에서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 정죄하는 사람이 있고, 토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사람이 살던 동네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이후에 그를 마을에서 완전히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소경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고... 우리 주님이 그냥 지나치실 리가 없습니다. 아무런 이유나 보상도 없이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면 어떤 문제라도... 문제가 해결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소경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말씀하시기를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 하셨고 그 말씀대로 하니까 그의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세상을 지금 바라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눈이 떠지게 되니까 얼마나 신기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말로만 듣고 손으로 만져보았던 것들이 자기의 눈으로 실제 보게 되니 얼마나 신기하고 기쁜지.... 참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한참동안 혼자서 기뻐하다가 문득... "아니지,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예수님께 가서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지...." 그래서 예수님이 계시던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디로 가셨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눈을 뜬 사람이 마을로 돌아오니까, 마을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람을 환영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축하 파티가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된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놀라와서 모여든 것도 아닙니다.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소동이 벌어진 것은 단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하여... 눈을 뜨게된 이 사람은 마을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요9:35).

소경이 눈을 떴으면 놀라워하고 기뻐하고 축하해 주어야 할텐데.... 오히려 쫓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세요... 참 어이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영적인 소경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원래 눈이 어두운 자들이었습니다. 진리를 보지 못했던 눈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인 신령한 세계를 알지 못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빛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셨고,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살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겐 엄청난 기쁨이요 감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소경이 볼 때...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본래부터 소경이라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동네 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고서도 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뜨고도 주님을 몰라보는 인생!.... 그것은 소경보다도 더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분명 앞을 못 보는 진짜 소경이요 불쌍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바리새인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익히 알던 자들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훤히 아는 사람들, 이론에 밝은 사람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는 박사들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요, 유대교에 대해서 박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눈은 떳으나 진짜 소경인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눈 뜬 자들을 박해합니다. 정죄하고 고소하는 일에 앞장 선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나의 구세주요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이 오셨으나 아무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10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랬습니다.

어두움의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12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알아보고 그분을 나의 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귀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앞을 보지 못해서 고통 당하던 사람이... 지금 눈을 떠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축하해 줘야죠.... 잔치를 열고 기뻐하며 축하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축하해 주는 마음은커녕... 오히려 그를 붙잡아 문책하며 그로 하여금 어려움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에 이들이 목소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눈을 뜨게 되면... 즉, 예수를 믿게 되면 가장 먼저 고난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핍박이 옵니다. 어려움들이 찾아옵니다.

교회를 다니면 어려운 일들이 물러가고 잘되는 일만 있어야 할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 사단의 자녀로 있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사단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들이 생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믿음으로 이겨내야만 합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살았을 때는 비록 구걸을 하면서 살았지만 그 사회의 사람들로부터 그런 핍박과 환란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나니까... 밝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 순간... 이제 내 인생이 달라졌구나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면서 온갖 환란과 핍박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영적인 신령한 세계를 보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어려움과 고난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세상의 동료로부터 그렇게 조롱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와 불화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았다면 제사 문제로 고민하면서 일가친척들과 등을 돌리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주일날 직장의 동료들과 어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세상의 흐름속에 함께 쓸려가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이 뜨여지고 나니, 우리는 이제 그런 자리에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조롱과 비웃음과 핍박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눈 뜬 자가 당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6:33절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랬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환난을 당하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아야 합니다.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2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는 소경으로 있다가 본다는 이 사실 하나 때문에... 그는 자기를 향하여 쏟아지는 핍박과 고통을 지금 참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떴다는 이 엄청난 사건으로 인하여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쏟아지는 환난과 핍박과 그 문책을 넉넉히 이겨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그 힘의 원동력은 '내가 구원받았다' 라는 이 구원의 확신, 이 감격이 능력이요 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도... 구원의 확신과 천국의 소망...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과 감격이... 여러분의 삶의 자산으로 삼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소경이 눈을 뜨고서 어떻게 그의 신앙이 성장해 갔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예수라 하는 사람'(세상적인 눈)

첫째로, 그는 세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소경이 눈을 떠서 오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이 그 사람이 맞는가?" 하면서... 한쪽에서는 "아니다!" 그러고, 한쪽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그 사람이 맞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의 관심은 '네 눈이 어떻게 뜨여졌느냐?'에 집중이 되었습니다. 그때 눈 뜬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9:11절입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네... 이 사람이 에수님을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라 하는 사람이.." 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예수를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사회가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처럼 이 눈 뜬 사람도 똑같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게 된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이해해서 그 예수를 붙들어 간청하여 눈을 뜬 것이 아닙니다. 눈이 멀어 예수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께 나아가지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눈을 떴습니까?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셔서 눈을 떴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눈을 떴으나... 그의 첫 번째 대답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직까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2. '선지자'(종교적인 눈)

두 번째로, 그는 종교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7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그를 불러 다시 문책합니다.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두 번째로 고백한 것은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당시에 유대사회의 영적인 지도자를 말합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라 하는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했다고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선지자'라 하는 그 사람이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적인 눈에서 종교적인 눈으로 한 단계 올라갔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그저 왔다갔다 교회 문턱만 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위대한 지도자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불렀습니까?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적인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할 때에... "예수님은 종교적인 지도자요 위대한 영적 지도자입니다 특별한 사람입니다. 우리와 다른 차원의 사람입니다" 하는 그 관점에서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도자나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청산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소경이 눈을 뜨고 나서.. 그래도 신앙의 모습이 성장한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단계 올라가서 종교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많이 열려지고 있는가 하면 31절에서 바리새인들이 계속 문책하며 그를 몰아세우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내가 안다'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그 무리 속으로 자기 자신을 집어넣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눈뜬 자의 변화되어 가는 믿음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예수를 믿으면 어떻습니까? 교회에 처음 나오게 되면... 설교를 들으면서도 뭐가 뭔지를 잘 모릅니다.

말씀의 내용이나 예배의 본질보다는... "목사님 말 잘하더라, 목소리가 좋더라... 성가대 노래 듣기 좋더라..." 세상적인 눈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바뀌어집니다.

옛날에는 예수쟁이들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그러면서 판단하고 그랬는데... 다른 사람들이 교회를 뭐라고 하면... "교회를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 교회 안가보고... 모르고 그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서서히 교회를 편들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옹호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눈뜬 소경이 그래요. "우리가 아나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무리 속에 자기를 슬쩍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27절을 보세요.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여기서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하는 말은 비웃는 말입니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했다고 말했는데 왜 자꾸 묻느냐?"는 것입니다. 이만큼 이 사람은 이제... 예수 쪽에 와서 서 있습니다.

 

3. '주'(신앙적인 눈)

셋째로, 그는 예수님을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38절에 보면 그는 드디어 고백을 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자, 여기 이 사람의 믿음이 더욱 성숙되어서.... 세 번째 단계에서는 신앙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사람'에서 '선지자'로.. 그리고 이제는 '선지자'에서 '주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뜬 자는... 당연히, 반드시... 이 사람과 같은 믿음 성장의 과정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성장해야만 믿음입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듯이... 예수로 말미암아 눈을 뜬 자는 이렇게 믿음이 성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을 뜬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고백은 쉽지 않은 고백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쫓겨났느냐 하면 34절에 보니까....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 사람을 좇아냈습니까? 쫓아내었다는 것은 그 사회로부터 완전히 출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22절을 보세요.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그랬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이 사회로부터 내어쫓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쫓겨났습니다.

자녀들이 학교를 다닐 수도 없고, 직장에 취직할 수도 없습니다. 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지도 못하고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지 못합니다. 완전히 사람들이나 사회로부터 왕따가 되어 살 수 없습니다.

출교라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유대사회는 하나의 신앙 공동체입니다. 신앙의 국가인데 그곳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눈을 뜨게 한 그 사람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36절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처음에는 소경이라서 주님을 보지 못했고... 눈을 뜨고 와서 지금 그는 주님을 처음 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앞에 있는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분을 믿고 싶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럴 때에 주님께서 37절 말씀에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말씀합니다.

내가 바로 그라고 하실 때... 그는 즉시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주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할렐루야!

36절에서 '주'라고 하는 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고, 뒤에서 말한 '주'는 '주인이시여!' 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의 신앙을 보세요... 신앙이 아주 급성장하는 것을 봅니다. 눈 뜬 자에게는 당연히 이런 믿음의 성장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의 눈에서 종교적인 눈으로... 종교적인 눈에서 신앙적인 눈으로... 점점점... 신앙이 성장해 나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절하는지라'(경배)

넷째로, 그는 예수님을 경배하는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38절을 보세요.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절한다는 의미는 신적인 경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면서 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눈뜬 자의 믿음이... 단번에 예수님을 경배하는 단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성숙한 믿음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 것,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경배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 이것은 믿음의 참된 성장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산본성광의 모든 믿음의 권속들이.... 예수님을 진실로 경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그 지식, 그 신앙의 연륜...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논쟁이나 하고 남을 비판하고, 바리새인들처럼 고소하고, 바리새인들처럼 정죄하고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는 것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만 그것이 바른 믿음의 사람이요 그것이 옳게 가고 있는 신앙의 경로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대해서는 박사요 모르는게 없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그분께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지식은 있고 아는 것은 많지만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죽은 믿음이요 죽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목회자 'Aw. 토저'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알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경배할 수 없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알면...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눈 먼 자들에게서 눈 뜬 자들로 우리들의 모습, 우리들의 신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눈을 뜬 자는 세상에서 핍박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세상과 함께 휩쓸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눈 뜬 자는 반드시 신앙이 성장해 가야 합니다.

사람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분을 확실히 알았다면 온전히 주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주의 권속들은... 주님을 진실로 경배하는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 나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을 하여야 하리라

요 9:1-7 / 엄기호 목사

사람은 일을 해야 합니다. 나이 많아 기운이 쇠진할 때까지 각자의 위치에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일을 할 때 생의 보람을 얻게 되고, 행복과 건강, 인간성장과 자아실현도 함께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쫓는 무리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요 6:27)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저희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하시니,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셨습니다.

직장, 사업 다 그만두고 신학공부하여 ‘전도사’하고 ‘목사’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최고의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그 다음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서 늘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또 현재의 위치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특히 교회의 뜻에 순응하여 ‘모이기에 힘쓰고’, ‘전도하기 힘쓰고’, ‘봉사하기 힘쓰는’ 일을 하는 것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어 보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고 이론만 가지고 따졌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였다고 문제를 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소경이 된 원인이 부모의 죄도, 본인의 죄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후 특수한 방법으로 그를 고치셨는데,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므로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우리도 일할 거리를 찾아야 할 것이며 또 일거리가 있으면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여야 하고 교회의 일을 하여야 하고 교구의 일을 해야 하며 지역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 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첫째, 일하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따질 여유가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이 가지고 있는 허물만을 보며 들추어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허물이 아닌 것까지 만들어서 평하고 다닙니다. 이런 사람은 할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진실로 열심을 다해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은 남을 넘겨다보며,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낼 시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은 믿음의 선조들을 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믿음으로 달려나간 반면에, 인간적인 약점과 허물 또한, 적나라하게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 엘리야, 다윗, 아브라함, 야곱, 솔로몬, 예수님의 12제자 등 하나같이 많은 허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 앞에 깊은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큰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추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가운데 자신들의 연약한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입을 수 있었고, 그 은혜로 더욱 온전해지고 거룩해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허물을 가지고 있고 또 많은 실수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 허물과 실수를 통해서 자신들의 연약한 모습을 발견하고 슬퍼하고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는 심령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입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허물을 보고 들추어 상처주지 말고 타인의 허물을 가려줄 방법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허물을 탓하지 말고 오히려 격려하고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됩시다.

둘째, 일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합니다. 교회 사랑은 몸과 마음을 기울여 실천해야 합니다. 말뿐인 사랑과 헌신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도 우리교회의 각 기관장들과 부서장들이, 부디 지체들을 잘 섬기고, 교회를 위해 봉사를 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최대를 원하지 않으시고 최선을 원하십니다.

셋째, 일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책임을 다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얼마나 돈을 벌 것인가를 보는’ 이기적인 사람, ‘이 일이 왜 일어났는가 하고 잘못을 따지는’ 무책임한 사람,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무엇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가 생각하는’ 책임있는 사람 등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로 11절에서는 직분맡은 자의 책임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사랑하고 협력하여 봉사하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 말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봉사하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말세론적 입장에서 심판대 앞에 서는 기분으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전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직분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일을 하여야 할까요?

 

첫째, 사람을 존중하며 함께 아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인간의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적 행위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보다 앞설 수 없고, 어떤 전통이나 규칙도 사람의 존엄을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소자 하나를 중히 여기는 신앙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우리도 나 자신이 아닌 우리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설’을 생각하면 부모님이 사주신 새 옷과 신발을 신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세배를 다녔던 기억과 함께 설음식을 이웃들과 서로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날 더 쓸쓸해하고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많습니다. 직장을 잃고, 삶의 무의미 속에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실업자들, 가족과 떨어져 최저 생활비로 근근히 살아가는 독거노인들, 불편한 몸으로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병든 자들, 부모님을 일찍 잃어 어린 나이임에도 가정을 이끌어가는 소년 소녀가장들, 또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좀더 이러한 우리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귀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교권자들이 나면서 소경이었던 자에게 누가 고쳤느냐고 시비조로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황홀하였고, 그의 가슴은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계속되어진 그의 고백은 “이 사람은 예수라 하는 사람이다”(9:11), “그는 선지자이다”(9:17),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다”(9:30), “이상하다, 어떻게 내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당신들이 모를 수가 있느냐”(9:30),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는다”(9:33), “하나님의 아들로 인자인 것을 확실히 믿는다”(9:36)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는 것에 집중한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뜬 것에 대해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신기해하는 무리들에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이었고, 그분께만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시켰습니다. 유명한 설교가인 노만 빈센트 필 목사가 후두염에 걸렸습니다. 의사를 찾아갔더니 “혹시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계속적인 걱정은 설교 때문입니다. 주일설교, 수요예배 설교, 초청설교 등 무슨 내용을 준비할지 1년 내내 걱정이 끊이질 않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때 의사가 목사에게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착하십시오.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모든 신앙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에게 문제가 있어도,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문제가 있어도, 부부간에 문제가 있어도, 질병과 실패로 고통스러워도 예수님께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셋째, 일을 했으면 일을 한 성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기독교는 듣는 종교가 아니라 보는 종교요, 가만히 앉아서 도만 닦는 종교가 아니라 행하는 종교이며, 말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생명의 종교요, 기적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했으면 성과가 있고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주님을 보여주고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성도의 행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통하여 생의 의욕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과 건강과 형통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진실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의 표적을 보여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아직은 낮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밤이 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밤은 일할 수 없는 시기입니다. 일할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후회 없이 일하는 사람이 됩시다. 일하는 가정, 일하는 지역과 구역, 일하는 교회, 일하는 국가가 되도록 우리 모두 힘씁시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그러면 주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고 큰 상급으로 보상받을 날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고전 15:58).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요 9:1-4 / 조상호 목사

거의 한 달 동안 진행되던 2006 독일 월드컵은 내일 새벽 6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결승전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축구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번 월드컵 축구대회는, 지난 2002 한일 월드컵에 비해, 브라질 같은 강팀이 8강전에서 탈락한 것, 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강팀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성적을 거둔 팀들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강팀들의 특징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독일과 4강전에서 맞선 이탈리아 팀은 수비는 잘 할지 모르지만, 독일 팀에 비해 특출 난 공격수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당일 경기에서도 독일에 비해 볼 점유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팀은 마지막 3분여를 남겨 놓은 상황에서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1골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허둥대던 독일 선수들의 허점을 이용하여, 다시 한 점을 넣어 2대0으로 승리하여 결승에 올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연장전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탈리아 팀은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프랑스 팀은 예선에서 우리 한국 팀과 1대1로 비긴 팀인데, 경기를 하면 할수록 좋아진 팀입니다. 4강전에서 포르투갈의 젊은 선수들을 맞이하여 어려운 경기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가 1대0으로 승리를 거두고 결승전에 진출했습니다. 그 이유는 프랑스 팀이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반 33분 페널티 킥을 성공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강팀의 특징은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잘 활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류선수들의 특징도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팀의 박지성 선수를 훌륭한 선수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박지성 선수는 다른 공격수들에 비해 골문을 향해 슛을 그렇게 많이 하는 선수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선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넣는 선수로 유명합니다. 2002 한일월드컵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골을 넣어 한국팀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또 박지성 선수는 지난달 13일 토고 팀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먹고 끌려가고 있을 때, 페널티 에리어 안으로 드리블하면서 파울을 유도하여 대역전극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19일 슈퍼스타 지네딘 지단과 티에리 앙리가 버티고 있는 ‘골리앗’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한국 팀은 전반 9분 만에 골을 빼앗기는 바람에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후반 36분 설기현 선수의 오른쪽 크로스를 이어받은 조재진 선수가 헤딩으로 문전 앞에 떨어트려 준 공을 침착하게 골문으로 연결해 천금같은 동점골을 넣었습니다. 전반전과 후반전 내내 프랑스에게 계속해서 밀리는 경기를 하는 가운데, 박지성 선수는 어렵게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골로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결승전에 오른 강팀 프랑스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필드골을 넣은 선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일류 축구선수들을 보면 기회를 좀처럼 놓치지 않습니다. 일류선수들은 주어진 찬스를 잘 살려 어시스트를 한다든지, 결정적인 골을 넣는다든지, 결승홈런을 친다든지, 버디를 잡는다든지 합니다. 그러나 보통 선수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찬스에서 헛발질을 한다든지, 골대 위로 멀리 날려 보낸다든지, 헛스윙 삼진을 당한다든지, OB를 범한다든지 합니다. 일류선수와 보통 선수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붙들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리고에 살던 소경 바디매오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더욱 심히 소리 질렀습니다(막10:48). 결국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해서 눈을 뜨게 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또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왔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안 그래도 계속해서 흐르는 피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진 밖으로 쫓겨나서 살 수밖에 없었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사람들 근처에 가지 못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계신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가복음 5장 27절과 28절을 보면,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던 그녀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잘 붙들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병을 고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들 틈에 끼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혈루 근원이 마르고 12년 동안 고치지 못하던 혈루병을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들을 좋아하시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는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가 아닌, 항상 ‘현재’를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을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지금’ 은혜 받아야 하고, ‘지금’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고, 구원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전도서 12장 1절에서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나이 들어 육신이 약해지기 전 젊었을 때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세월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몸소 보여 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병은 ‘죄’ 때문에 생긴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병’에 걸린 사람은 그 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는 이중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일까,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일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일까’라는 것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래도 결론이 나지 않자,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가 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뭔가를 나타내기 위한 이유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사람을 나면서부터 소경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계속 질문을 하며 서로 논쟁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명한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4절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아마도 이 때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촉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논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사람을 통해서 행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다.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지 않니? 어두워지면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 없단다.” 그렇습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항상 나를 기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더러워진 교회버스를 세차하기 위해 Moorehouse Ave와 Selwyn St 사이에 있는 ‘Self Car Wash’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동안 주유소에 있는 ‘자동 세차기’를 이용해서 교회버스를 세차했는데, 11불씩을 내는데도 구석구석 닦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 돈도 절약할 겸, 꼼꼼하게 세차하기 위해 Self Car Wash에 간 것입니다. 전에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Ezy Car Wash, from $2'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봤었기 때문에 자동 세차기에 비해 훨씬 경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습니다. 처음 도착해서 처음에는 2불짜리 동전 두 개면 충분하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2불짜리 동전 2개를 투입하고 바삐 손을 놀려 물을 뿌린 다음, 세척액이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시간이 다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2불짜리 동전을 넣고 세척액을 뿌린 다음, 자동차를 닦은 다음 깨끗한 물로 린스를 하려고 하는데, 또 기계가 멈추었습니다. 또 2불짜리 동전을 넣고 린스를 하는데, 또 중간에 기계가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냥 그만 두고 싶었는데, 자동차에 거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또 동전을 집어넣었습니다. 여러분, 세차를 끝낼 때까지 제가 2불짜리 동전 몇 개를 넣은 줄 아십니까? 마지막 바람으로 물기를 다 날려 보내어 자동차를 건조할 때까지 정확하게 6개, 즉 12불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자동 세차기에서 세차할 때보다 1불이 더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동 세차에 비해 깨끗하게 닦여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동 세차기로 닦았을 때나 Self Car Wash로 닦았을 때나 그게 그거였습니다. 그리고 세차를 하면서 더러운 물이 구두와 양복 여기저기에 튀었고, 머리에 비누 거품을 뒤집어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때 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앞으로 자동 세차기를 이용하면 이용했지, Self Car Wash를 다시는 이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제가 그 사업장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그 Self Car Wash를 많이 이용하세요. 그러나 저는 더 이상 그곳을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정말 시간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시간이 돈이다’는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진리를 Car Wash하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전에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다면 그 때에는 가슴으로 꺠달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은 돈입니다. 아니 시간은 생명입니다. 시간은 돈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열심히 일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다시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한 번 흘러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건강, 명예, 권력, 지식, 돈 등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시간은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5절과 16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며, 시간 사용에 대해서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월”은 헬라어로 “카이로스”라는 말인데,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기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할당받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하고 싶은 것을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또 “아끼라”는 말은 헬라어로 “엑사고라조”라는 말인데, “무엇 무엇으로부터 도로 사오다”라는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 5장 15절과 16절을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돈을 주고라도 시간을 산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시간을 아끼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재태크 뿐 아니라, 시태크도 잘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태크를 잘 할 수 있을까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월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1) 최선을 다하라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에게,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에게, 많이 배운 자나 적게 배운 자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24시간을 똑같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데 반해, 어떤 사람은 그 시간을 낭비합니다. 유대인들은 13세가 되는 성인식 때 손목시계를 선물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잘 쓰라는 의미입니다. 미국 ‘헌팅턴 프레스’라는 신문사 건물 입구에는 3개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는데,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고, 다른 하나는 지구본 위에 사람이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 밑에 깔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문사 측은 이 세 동상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구본은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있는 동상은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고, 지구본 위에 거만하게 서있는 모습은 시간의 귀중함을 비웃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지구본 밑에 깔려 있는 모습은 시간을 무시하다가 실패의 나락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 신문사는 항상 흐르는 시간 속에서 최후의 신문을 만들고자 이 동상을 세운 것이다.” 여러분,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2) 우선순위를 정하라

둘째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앞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고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살면서도 얼마든지 낭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유명한 스티븐 코비 박사가 ‘성공하는 사람들과 실패하는 사람들’이 각각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조사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실패하는 사람들은 대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TV 보는 시간이 너무 깁니다. 인터넷하는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쓸데없는 일을 참견하는데 보내는 시간이 굉장히 많습니다. 전화 통화하는 시간이 너무 깁니다. 1시간 동안이나 통화하고 난 다음, 뭐라고 하고 끊습니까? “얘, 안 되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반면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가치 있고 중요한 일들에 관심과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에 관심을 쏟고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가치 있고 중요한 일들에 관심과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우선순위대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령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내 뜻대로 살지 못했다"고 하신다면 우리는 잘 못 산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급한 일 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가치 있는 일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일의 순서를 망각한 채 허둥대기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두 번째 방법입니다.

 

3) 미루지 마라

셋째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한 번 기회를 놓쳐버리면 다시는 그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7월 달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2006년도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기회는 그 때 붙잡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에 가면 “날 새면 집 지으리”라는 이름도 희한한 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집이 없이 평생을 사는 새입니다. 이 새는 놀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햇빛이 비취는 낮에는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놀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찬바람이 불고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그러면 이 새는 나뭇가지에 웅크리고 앉아서 애절하게 울기 시작합니다. "날 새면 집 지으리~" "날 새면 집 지으리~" 그러다가 날이 새고 햇빛이 비치면, 또 노래하고 춤추고 다른 새들하고 놉니다.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면 찬바람 몰아치며 기온이 뚝 떨어지면 날개를 펴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웅크리고 앉아서 또 울부짖습니다. "날 새면 집 지으리~" 평생토록 집 한 채 갖지 못하고 얼어 죽는 새가 바로 ”날 새면 집 지으리”라는 새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이 새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리미리 방학숙제를 끝내 놓으면 좋을 텐데 계속해서 미루다가, 개학날이 되면 그제 서야 난리법석을 벌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 공부를 하면 좋으련만 미루다가, 시험기간이 되면 밤샌다고 라면 끓여먹고 북새통을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미리 말씀 준비를 해놓으면 좋으련만 미루다가, 금요집회가 닥치면, 주일예배가 닥치면 그제 서야 말씀 준비한다고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들도 ”날 새면 집 지으리”라는 새와 같은 사람들은 아닙니까? 서양속담에 “Make hay while the sun shines”(해가 비추는 동안, 건초를 말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우리 말 속담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 속담이 나온 배경이 있습니다. 쇠뿔을 불로 지지면 그 밑의 피가 녹아 쉽게 빠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번에 쇠뿔을 빼지 못해 때를 놓쳐 버리면, 뿔 밑에 있는 피가 굳어 살과 같이 응고되면, 쉽게 뿔이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루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해가 비출 때 미루지 말고 건초를 말리라는 것입니다. 쇠뿔도 뜨겁게 달구어 졌을 때, 단숨에 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이 쓰신 “지금 하십시오”라는 글이 있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이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다면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NCEA 시험공부입니까? 아니면 개학하면 제출해야 할 Assignment입니까? 아니면 처리해야 할 집안일입니까? 미루지 말고 당장 집에 가서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세 번째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2006 독일 월드컵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며 말씀을 시작했는데, 다시 2006 독일 월드컵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달 19일, 예선 2차전인 프랑스전을 앞두고 딕 아드보카트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23명의 한국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경기를 하게 되는 젠트랄 슈타디온에 수많은 원정 응원단이 와 있다. 또 한국에선 더욱 많은 팬들이 잠을 안자고 TV를 통해 여러분들을 응원할 것이다. 프랑스를 상대로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라고 하며 선수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프랑스와의 경기를 해보니 시작부터 밀리기 시작하여 한 골을 먹으면서 1대0으로 전반전을 마쳤습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하프타임 때, 선수들을 향해 "후반전에는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합니다. 또 곁에 있던 홍명보 코치 역시 "너희들 모두 한번씩 실수를 했다. 실수를 하더라도 동료들을 격려하고 화이팅을 해줘라"며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결국 한국 선수들은 후반 중반 이후 느슨한 경기를 펼치는 프랑스를 압박하여 단 한 번 주어진 기회를 살려 동점골을 터뜨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릅니다. "너희들이 이제까지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마라.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라.“ 여러분, 지금까지 시간을 낭비하며 세월을 아끼지 못하며 살았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심판이 호각을 부를 때까지는 경기가 계속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후반전이 아직도 남아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일할 수 있는 낮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밤이 올 것입니다.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급한 일 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함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할 일을 미루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불행과 행복 이야기

요 9:1-3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 설교는 보석과 같은 설교입니다. 제 설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제가 설교하려는 내용이 보석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 은혜의 천사, 찬송의 천사, 사랑의 천사, 기쁨의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많은 찬송시를 쓴 패니 크로스비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를 듣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듣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제가 부르는 찬송가들 중에서 제가 가장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는 찬송가들은 패니 크로스비 여사가 작사한 찬송가들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 보다 귀하다”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패니 크로스비가 작사한 찬송가가 우리 찬송가에 23개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고 찬송은 영혼의 춤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려면 호흡도 필요하고 춤도 필요합니다. 오늘 아침에서 “찬송가 작사자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의 불행과 행복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패니 크로스비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1820년 3월 24일 미국 뉴욕 주의 작은 마을 푸트남에서 태어났는데 생후 6주부터 맹인이 되었습니다.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 치료로 패니 크로스비는 생후 6주부터 95세까지 맹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불행했습니다. 패니의 엄마 머시 크로스비는 어린 딸이 맹인이 된 사실을 알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패니가 돌팔이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된 사실을 알고 교회와 동네 사람들은 그 돌팔이 의사를 찾아가 그를 처벌하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마을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눈이 멀게 된 이후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패니가 한 살 되었을 때 그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버지 존 크로스비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패니가 11살 되었을 때 패니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패니의 할머니 유니스 크로스비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패니는 가난과 슬픔에 버려진 불행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패니 크로스비는 성장해서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던 맹인 교수 밴 앨스틴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38세 되던 해인 1858년 3월 8일이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깊은 헌신과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은 두 사람에게 그윽한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도시를 떠나 시골에 와서 자연을 즐기며 조용히 살았는데 시골의 공기는 그녀의 영혼을 더욱 아름답게 소생시켰고 그윽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결혼 후 곧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고 귀여운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곧 아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일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1859년에 일어났습니다. 패니 크로시비는 몇 달 동안을 아기를 잃은 슬픔에 잠겨 힘들게 보냈습니다. 이웃들로부터 받는 위로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아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내려와서 우리의 아기를 데리고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기를 하나님과 그 분의 왕좌에 맡겼습니다.” 패니와 밴 부부는 다시 뉴욕의 맨하튼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다시 모든 열정을 다 쏟아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패니에게 찬송시를 써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습니다. 패니는 일 주일에 6,7편의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곡에 붙일 가사를 그녀에게 부탁했습니다. 패니와 밴은 부부이자 서로를 돕는 배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패니와 밴은 많은 일을 했지만 허름한 집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불평하거나 서로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주신 것에 항상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를 떠나 먼저 하늘로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한 평생 수 많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거듭해서 경험한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둘째, 패니 크로스비는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부흥 집회에 참석해서 간증을 많이 하곤 했는데 어느 부흥 집회에서 어느 목사님이 패니 크로스비를 동정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렇게도 많은 선물들을 주셨는데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선물로 주시지 않은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패니는 즉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었다면 저는 맹인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왜 그렇습니까?” 라고 패니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이 제일 먼저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얼굴이 나의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Because when I get to heaven, the first face that shall ever gladden my sight will be that of my Savior!"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미국 메사츄세츠주 노스필드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디 엘 무디가 패니 크로스비 여사에게 개인적인 간증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좀 주저하다가 조용히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작사한 찬송가들 중에 아직 발표하지 않은 찬송가가 하나 있습니다. 저 스스로 부르는 찬송이지요. 저는 그 찬송을 제 ‘영혼의 찬송시’라고 부릅니다. 이제 제 ‘영혼의 찬송시’를 여러분들에게 발표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시를 한 구절 한 구절 읽었다고 합니다. 그 찬송시는 우리 찬송가 295장에 수록되어 있는 찬송시였습니다.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 없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후일에 장막 같은 몸 무너질 때는 모르나 정녕히 내가 알기는 주 예비하신 집 있네 후일에 석양 가까워 서산에 해가 질 때에 주께서 쉬라 하실 때 영원한 안식 얻겠네 그 날을 늘 기다리고 내 등불 밝게 켰다나 주께서 문을 여실 때 이 영혼 들어가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패니 크로스비가 자기 ‘영혼의 찬송시’를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내려갈 때마다 무디 목사님을 비롯한 수 많은 청중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디 엘 무디 목사를 비롯한 수 많은 청중들이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한 사람은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 이후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디 목사는 후에도 미국 교회들이 천국 신앙을 버리고 세상에 파묻히는 영적인 캄캄함에 빠져 있을 때 혼자 올간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 '후일에 생명 그칠 때'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합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한 평생을 살면서 수 많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경험했지만 그는 거의 한 번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증오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85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한 순간도 어느 사람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를 품은 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좋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를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를 성별 시켜서 그 분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베푸신 그 많은 축복을 기억할 때 내가 어떻게 감히 불평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불행한 환경 중에서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증오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한 평생을 산 사람은 분명히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패니는 어렸을 때 이미 자기가 맹인 된 것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도록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패니가 9살 났을 때 이런 시를 썼습니다. “오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내가 비록 세상을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세상에서 만족하면서 살기로 다짐했다오.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나는 얼마나 많이 누리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한숨도 짓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라오.” Oh, what a happy soul I am. Although I cannot see! I am resolved that in this world, Contented I will be. How many blessings I enjoy, That other people don't I. To weep and sigh I cannot and I won't, because I'm blind." 패니 크로스비가 92회 생일을 맞았을 때 그의 생일을 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데려오세요. 그 사람과 악수하고 싶어요.” 가장 행복하게 느끼면서 세상을 산 사람, 그는 분명히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주님과 천국을 이 세상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가장 순수하고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사모하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9천여 개의 찬송시를 썼는데 그가 쓴 찬송시들이 지금 세계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시들이 되었습니다. 어떤 작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살던 시대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비엔나에서 왈츠의 왕으로 군림했고 존 필립 수사가 와싱톤에서 행진곡의 왕으로 군림했을 때 패니 크로스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뉴욕에서 찬송가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패니 크로스비는 '찬송가의 여왕'으로만 군림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간증자와 전도자와 설교자로서도 군림했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 그녀의 메시지는 창송가처럼 흘러 넘쳐 청중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곤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청중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을 가슴으로 느꼈고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청중을 향해서 가슴으로 은혜와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설교를 듣기 이해 먼 곳으로부터 와서 길게 줄을 서 있기도 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한 두 시간씩 빗속에서 또는 추위에 떨면서도 그녀의 설교를 듣곤 했다고 합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축복과 인생의 구원과 기쁨에 대해서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설교할 때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중한 마음에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있게 되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는데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과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전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시력을 앗아 가셨을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 그 대신 끝 없는 에너지와 열정을 부어주셨습니다. 60세가 넘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려고 했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더 많은 찬송시를 썼고 새로운 일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에너지와 열정이 그녀의 심장을 끊임없이 고동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작가가 패니 크로스비의 삶의 특징 다섯 가지를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녀는 매우 부지런했습니다. 둘째 그녀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그녀는 이타적인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넷째 그녀는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에게 태양빛과 같은 기쁨을 주었습니다. 다섯째 그녀에게는 항상 놀라운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삶의 특징들을 살펴볼 때 그녀만큼 행복한 사람도 이 세상에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90세가 되었을 때 영적인 삶에 있어서 최고의 해였다고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포도주가 넘치는 풍부한 시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 많은 청중들이 교회당을 꽉 메웠습니다. 그녀는 장미꽃이 가득한 작은 탁자에 서서 그 꽃들을 만지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삶의 마지막 때에 당신들을 만나게 되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도 나는 황혼이 아닌 영원한 일출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망의 별들이 지난 50년 보다 더 선명하게 지금 내가 가는 밤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시든 꽃이 아니며 오히려 부유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소망은 항상 내 노래와 함께 있어왔는데 그 소망의 빛은 오늘 밤에도 여전히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은 나의 삶의 아침을 밝혔고 낮의 왕성한 활동을 뿜어내게 했으며 어두운 저녁 시간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동안 나는 어렵고 힘든 인생을 위해서 변함 없이 소망의 시를 써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하늘 도성에 들어갈 때까지 소망의 사역을 수행할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패니 크로스비의 간증 설교를 들으며 깊은 영감에 사로잡히고 있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간증 설교는 물 흐르듯 흘러갔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나이와 함께 발전해갔습니다. 큰 호수의 일몰이나 큰 파도의 출렁임은 나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오늘 밤 여기 달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장미꽃 향기는 깊은 감동을 줍니다. 가볍게 부는 바다 바람은 내 마음에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도시나 농촌에서 예술가들과 만나는 일은 항상 즐거웠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나의 방은 성탄절용 나무와 가지가 있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에는 백합과, 장미와 함께 지냈을 것입니다. 사실 나는 두려움보다 사랑하고 감사할 것이 많았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많은 슬픔들이 내 인생의 여정을 가로질러왔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 너머에서 들리는 천사의 목소리가 영원한 빛의 땅인 감람산에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나는 50년 전보다 지금 더 어린이들을 사랑합니다. 이 녀석들이 아주 편해요. 그래서 오늘 이곳의 많은 어린이들을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 나는 항상 말합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세요. 패니 아주머니는 어린이들을 위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라고요.”

“나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내 시에 대한 대가로 첫 번째 수표를 받았을 때 나는 도울 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넓게 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90년 동안 나는 사례를 위해 봉사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재정적인 결과에 구애 받지 않고 하루 종일 일하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그저 사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돈은 합당한 자리에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것은 땅에 강하게 쳐 박히는 가시 면류관으로 변합니다. 사람이 없는 돈보다 돈 없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내가 ‘신뢰와 복종’의 교훈을 배우고 난 후, 그분은 오랜 세월 동안 실패하지 않게 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진실한 목자셨습니다. 주님이 보내주신 두 천사, 자비와 진실은 오랜 삶 가운데서도 결코 부족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나는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조차 아시는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나는 항상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15년 2월 12일 금요일 아침에 금세기의 가장 뛰어난 찬송가 작사가인 패니 크로스비는 95세를 일기로 조용히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인 목요일 오후 9시에 슬픔을 당한 한 여인에게 위로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딸을 잃고 슬퍼하는 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나의 친한 친구에게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딸을 잃은 것에 대해 내 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는 지금 너의 집에 흰 옷을 입은 천사와 너 혼자만이 쓸쓸하게 남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네 귓가에 속삭이고 있는 모든 것에 영적인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하나도 슬픈 것이 아니란다.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조금 있으면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소중한 딸 롯이 예수의 품에서 평안하게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패니 크로스비는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평화롭게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패니가 살았던 브리지포트의 작은 마을에서 열린 장례식은 브리지포트 역사 이래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에워 쌓고 옛 친구와 동역자들이 마지막 사랑과 존경을 표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애도의 편지가 원근 각지에서 쇄도했습니다. 장례식 날 패니와 교류 했던 많은 사람들은 제비꽃 침대에서 자는 것처럼 관속에 누워 있는 그녀 옆에 조용하게 다가섰습니다. 패니는 꽃을 좋아했는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들은 교회 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장례식에서 주례자는 디모데후서 4:7-8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의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주실 것이니.”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지금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패니를 생각하면서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패니는 지금 하늘에서 처음으로 눈을 뜨고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던 그녀의 구속주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늘 사랑하며 섬겼던 분이었고 그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피조물’로 만든 분이기도 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모두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 불행한 사람들을 부지런히 도우면서 행복하게 사세요.”

패니 크로스비는 미국 동부 커넷티컷 주의 브리지포트란 도시에 묻혔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패니 아주머니”란 간단한 이름과 다음과 같은 그의 찬송시가 적혀 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하늘의 영광 누리로다”

 

셋째, 패니 크로스비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행복의 조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 근본적인 조건은 생후 6주 후에 맹인이 된 불행한 사건이었고 그 불행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그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 도우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조상은 영국의 청교도들이었습니다. 1635년 런던에서 메사츄세츠로 이주해 온 청교도 신앙의 가문에서 패니는 태어났습니다. 신앙과 가문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돌팔이 의사의 실수로 패니가 생후 6주 때 맹인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그 돌팔이 의사를 잡아서 처벌을 하여야 하다고 아우성을 쳤을 때 패니의 아버지 존 크로스비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면서도 돌팔이 의사에 대해서 분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슬퍼서 우는 아내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듯이라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길러야 하지 않겠소.”이와 같은 신앙적 감화를 어린 아기 패니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맹인이 된 어린 아이 패니에게 가장 깊은 신앙적 감화를 끼친 사람은 패니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부었던 패니의 할머니 유니스 크로스비였습니다. 패니의 어머니 머시 크로스비가 아기가 맹인이 되고 남편이 일찍 죽은 이중적인 슬픔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때 패니의 할머니는 패니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위로를 했습니다. “애야, 나도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란다. 그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좋고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 분명해. 그러니 그분께 더 가까이 가며 신뢰하자.” 패니의 엄마는 가정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엄마 대신 어린 패니를 안고 키우면서 패니의 눈과 손과 발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패니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색깔의 아름다움과 숲 속 새들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과 사랑을 패니의 가슴과 영혼에 곱게곱게 심어주곤 했습니다. 패니는 자라면서 청각과 미각과 후각과 촉각이 예민하게 발달했고 손 재주가 좋았고 영리하고 똑똑했습니다. 패니의 할머니는 무엇보다 성경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패니는 할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지니고 할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을 매일 읽어주었지만 나를 성경으로 깊이 인도해주신 분은 할머니였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할머니의 입술에서 나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고 바로 그곳에 큰 뿌리를 내렸습니다." “할머니는 경건과 기도의 여인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주 아주 오래된 흔들 의자로 나를 오게 한 다음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쏟아 부은 사랑을 패니는 평생 가슴에 담고 기억하며 용기와 희망과 행복을 느끼곤 했습니다. 패니의 할머니는 패니가 11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패니를 꼭 안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패니야 내가 하늘 나라에 가기 전에 너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패니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할머니 뭔데요?" "저 높은 곳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할머니와 다시 곡 만나겠다고 말해주겠니?" 패니는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곡 그렇게 할게요." 할머니는 "오 주님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를 마친 후 하늘로 가셨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이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패니의 엄마도 패니에게 신앙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곤 했습니다. “패니야, 이제 너는 아름다운 세상의 만물들을 볼 수 없단다. 그러나 위대한 두 시인 호머와 밀턴도 맹인이었어. 때로는 주님께서 선하신 섭리 가운데서 영적인 통찰력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신체에서 무엇인가를 가져가신단다.” 그리고 나서 엄마는 어린 패니에게 밀턴의 시를 감명 깊게 읽어주곤 했습니다. 디모데가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던 것처럼 패니도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신앙과 사랑을 물려받았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에게 위로와 격려와 용기와 사랑을 불어넣어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23년 동안 학생으로 또는 선생으로 머물고 있던 뉴욕의 맹아 학교는 패니에게 위로와 격려와 용기와 사랑을 불어넣어준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성경을 배웠고 천로역정과 문학 작품들을 배웠고 역사와 철학과 과학을 배웠고 노래와 올간과 기타와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두 권의 시집을 지어서 출판했습니다.

1850년 11월 어느 감리교 부흥 집회에서 하나님께 항복하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때 너무 기뻐서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쳤다고 합니다. 1858년에는 밴 앨스틴과 결혼을 했는데 그는 패니에게 큰 위로와 격려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패니를 위해서 작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패니는 남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성실한 신자였습니다. 친절한 행동과 즐거운 말을 지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취미는 꼭 같았습니다. 그는 내 찬송시에 작곡을 했습니다. 그는 뉴욕에 있는 교회에서 올간니스트로 봉사했고 성악과 기악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오랜 동안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패니 크로스비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 분은 그의 삶을 사랑의 손길로 섭리하신 하나님 자신이었고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로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204).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219).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300).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446). “주 예수 넓은 품에 나 편히 안겨서 그 크신 사랑 안에 나 편히 쉬겠네.”(476).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찬송시를 써서 가장 많은 성도들에게 가장 깊은 영감을 끼친 찬송의 천사 은혜의 천사 패니 크로스비에 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더 이상 추가할 말이 필요 없습니다.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들에게 패니 크로스비는 지금 하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아마 감사하고 기뻐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말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부지런하게 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패니 크로스비에게 주셨던 놀라운 은혜의 일부라도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Why Me?

요 9:1-3 / 김흥규 목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산에 올라가다가 음침한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은 체험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이 아득한 골짜기를 걸어간다는 것은 분명히 무서운 일입니다. 탁월한 시인이었던 다윗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중병에 걸립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무너집니다. 행복했던 가정이 갑자기 기울어집니다. 사기꾼을 잘못 만나 전 재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됩니다. 우리 인생에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분명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골짜기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 길을 잘못 들어 그럴 때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누구를 탓할 수가 없습니다. 순전히 내 잘못으로 인해 골짜기를 선택했기 때문이지요.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을 잘못 따라 갔다가 함께 골짜기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못된 사람이 우리를 억지로 골짜기로 밀어 넣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골짜기로 떨어지면 누구나 다 당황합니다. 세상이 두렵고 미래가 암담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 했다고 하필이면 이러한 가혹한 일을 저에게 내리신단 말입니까?"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하다보면 아예 하나님을 부인하고 신앙을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시편 23: 4절에서 다윗이 노래한 그대로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는 질병이라는 골짜기를 지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설령 의사 선생님이 불치라는 진단을 내렸다고 할지라도 살고 죽는 것이 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으십시오. 경제적인 골짜기를 힘들게 지나가는 분들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는 까닭에 언젠가 하나님이 골짜기를 다 지나도록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인간관계의 갈등과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는 분이 계십니까? 사실 멀리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인 김정일 씨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힘들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모질게 대할 때가 많습니다. 욥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게 되었을 때 가장 욥을 아껴주어야 할 욥의 아내가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속된 말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뒈지라는 극언이지요.

제가 극동 방송에서 하는 '소망의 기도'에 나가서 생방송으로 기도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져 근 십년 동안 거동을 못하는데 남편이 도와주기는커녕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말을 자주한다며 오열을 터뜨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골짜기 중에서 가장 험한 골짜기는 사람 관계에서부터 오는 골짜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의 골짜기를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잘 참고 기다립시오. 때가 되면 이러한 갈등의 골짜기를 통과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심을 믿고 힘을 내십시오!

 

<"Why Me?"에서 "Why Me?"로>

 

방사능을 함유한 라듐을 발견해서 여성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리 퀴리 부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는 어려서부터 늘 그늘진 인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철이 들 때까지 친어머니가 한 번도 키스를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늘 엄마의 사랑을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엄마가 친엄마라고 한다면 왜 한 번도 키스를 해주지 않는 걸까?" 어머니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마리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어머니가 죽은 다음이었습니다. 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생 동안 폐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사랑하는 딸에게 폐병을 옮길까봐 키스를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마리의 어머니가 마리에게 키스를 주지 않은 것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험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나의 아픔이나 상처에 전혀 아랑곳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로마서 8: 38-3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때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가혹한 시련을 당할 때 우리는 "Why Me"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란 말입니까?" 하면서 울부짖을 수 있습니다. 재미 교포로서 알래스카 주립대학의 교수로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 김춘근 교수가 쓴 "Why Me?-왜 하필이면 저란 말입니까?" 라는 책이 있습니다. 김춘근 교수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단돈 2백 불을 들고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서는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던 김춘근 교수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976년 한창 잘 나가던 37세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와 간염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불치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김 교수는 "Why Me?-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저란 말입니까?" "제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 했기에 이렇게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그래도 윤리적으로 살려고 애썼고 교회에서는 주일 학교 교사, 성가대원, 청년회 회장으로 봉사했고 35세의 나이로 장로까지 된 사람이 아닙니까? 미국에 와서는 학교와 도서관, 교회, 가정 밖에 모르고 정말 성실하게 살아온 저에게 이렇게 사형 선고를 내리시면 어떡합니까?"

이렇게 울부짖던 김춘근 교수는 사방을 둘러봐도 하나님 한 분 밖에는 믿을 이가 없다고 생각하고서는 LA 근처에 있는 빅 베어 마운틴이라는 산에 올라가 기도나 하다가 죽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육일 째 되는 날 한 번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가 네 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육체적으로 죽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 네가 영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모르느냐"는 하나님의 일갈이었습니다. 그 순간 비교적 신앙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왔다는 자부심과 교만이 일시에 무너졌습니다. 김춘근 교수는 그 때까지 37년 동안 지어온 모든 죄악들 하나 하나가 TV스크린과 같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회개 기도가 터졌고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다가 동이 틀 무렵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하얀 옷을 입은 분의 가슴에 그의 얼굴이 파묻혀 있었고, 그 분이 김 교수를 꼭 껴안고 등을 세 번씩이나 두드려 주면서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용서 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 완치되었습니다. 김춘근 장로님은 자기를 살려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춘근 교수는 이렇게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한 뒤 또 한 번 "Why Me?"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저 같은 죄인이 과연 무슨 자격이 있다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까?" 첫 번째의 "Why Me?"가 사형선고를 받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면 두 번째 "Why Me?"는 "왜 하나님 저 같은 죄인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푸셔서 살려주시는 겁니까?"라는 감사의 질문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들은 첫 번째 "Why Me?"에서 두 번째 "Why Me?"로 넘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사람이 암과 같은 불치병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될 때 "Why Me?"로 시작되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부인입니다. 강렬한 충격을 받은 뒤 "아니야. 이건 뭔가 잘못 된 거야" 하면서 현실을 부인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분노입니다. 필사적으로 부인해도 현실을 되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되면 "왜 나만 이와 같이 가혹한 시련을 당해야만 하는가?" 하면서 자기가 믿는 신이나 세상을 향하여 분노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거래입니다. 자기가 믿는 신과 일종의 협상을 하는 것이지요. "제가 잘못한 것을 다 회개하고 변화될 터이니까 우리 아이가 결혼할 때까지만 살게 해주세요." 네 번째는 억울함의 시기로 들어갑니다. 깊은 슬픔에 잠기도 낙심하고 결국은 모든 것을 체념하는 단계이지요. 그러다가 이 억울함의 단계를 잘 넘기면 마지막으로 수용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분노나 억울함이 사라지고 죽음의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평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꼭 불치병과 같은 사형선고뿐만 아니고 우리가 인생의 어떤 시련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습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외아들을 잃은 뒤 쓴 일기 형식의 소설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위로 딸만 넷을 낳다가 마지막으로 외아들을 얻었으니 얼마나 귀여웠겠습니까. 하는 짓마다 기특했는데 머리도 좋아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26의 한창 나이로 교통사고로 죽고 맙니다.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고 천붕(天崩)과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한 것이지요. 박완서 씨는 그 때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미친 사람처럼 통곡하며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박 씨는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항의도 해보고 불평도 해보고 별짓을 다합니다.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지내던 박 씨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이 때 박완서 씨는 자기의 외아들을 데려간 하나님과 맞대결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리하여 방안을 데굴데굴 구르며 덤비고 쥐어뜯고 하면서 "왜 내 아들을 그토록 일찍 데려가셨는지 한 말씀만 해보시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나님은 한 말씀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박 씨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 가신단 말입니까?" 하는 생각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고의 전환이 박완서 씨에게는 하나의 구원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박완서 씨는 외아들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의 표현 그대로 한다면 "에미의 자랑은 기고만장 정도가 아니라 서슬 푸른 교만"이었습니다. 외아들에게 시집가서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자식들 모두 한결같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한 번도 속 썩이지 않고 일류 대학에 척척 들어가고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이 술술 풀렸습니다. 그러다보니 공부 못하고, 방탕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남의 자식을 은근히 깔보고, 뇌성마비로 태어난 남의 자식을 보고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걸 하는 모진 생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외동아들에 대해서 거의 신앙수준의 자랑과 사랑을 품어 왔으니 그 아들을 잃은 슬픔은 비길 데가 없었겠지요. 그러니 "Why Me?"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제 아들을 데려가신단 말입니까?" 울부짖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전환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고난에 대한 과거의 원인에서 미래의 영광으로>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과응보적인 사고를 가졌기에 누군가 시련을 당하면 반드시 자신이나 조상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기의 죄나 조상의 죄로 인해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세상 사람들은 큰 고통과 시련을 당할 때 과거를 돌아보며 원인과 이유를 찾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현재의 고통과 시련이 가져올 미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를 잘 믿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도 큰 시련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보다 죄가 많아서 불치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하고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과 시련에 반응하는 자세입니다. 과거를 탓하고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 속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고 믿고 이 고통과 시련이 가져올 미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가혹한 시련 앞에서도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의연한 태도가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음'을 세상에 입증할 것입니다.

지난 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학살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 육백만 명을 무참히 학살했을 때 만들어진 유대인의 기도문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로서는 이와 같은 대학살극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있는 것으로 믿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무엇보다도 "Why Me?- 하나님, 왜 하필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단 말입니까?"에서, "Why Me?-하나님, 왜 하필이면 저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신단 말입니까?"로 질문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해의 한계와 믿음의 역사

최종천 목사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자비를 구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물론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쳐 나올 수 없는 극한의 순간에 절대자의 힘과 은혜를 구하여 그 자비를 힘입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인생의 이해의 한계와 인간의 이해와 능력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순간을 당하여서 하나님에 대하여 무한하심을 깨달을 때 역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한계와 주님의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이 우리의 눈과 손앞에서 느껴지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설명 드리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간단히 요약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나가다가 한 맹인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당시에 맹인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맹인은 그가 죄를 많이 타고났든지 아니면 그 부모 조상이 죄를 많이 지었든지 해서 맹인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저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저 사람이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그 부모가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그 둘 다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십니다.

제자들은 납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전승에 의하면 사람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 부모의 죄가 많다거나 본인의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은 물론 그 말씀의 뜻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말씀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 맹인은 이 황당한 내용과 말씀에 대하여 도무지 마음속에 어떤 형용키 어려운 마음의 생각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가서 씻고 눈이 밝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표현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결과 그 눈을 뜨게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는 가운데서 그는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증언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본문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와 은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우리 삶은 우리가 잘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내가 다 이해할 수 있고 내 논리 속에 포함되고 내가 모든 것을 납득하여 내 논리 속에 다 정리할 수 있어야만 내게 열려지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 내 논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들, 그리고 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은 도무지 인간의 짧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이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다 이해하고 내가 마음먹고 행동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이해와 그리고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논리에 대한 그릇된 생각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만남을 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만남 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이루어집니까? 제자들이 맹인의 맹인 된 근거를 물을 때에 이것은 제자들의 이해의 한계와 오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세계관,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생각해 볼 때 누가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본인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2,000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죠.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이해, 논리, 모든 것은 변합니다. 절대적 진리가 없죠.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렇게 생각해도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그릇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큰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의 삶에 아픔과 눈물과 고통과 삶의 괴로움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도구가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에요. 당시에 그 수많은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지요. 이해의 범주를 벗어났던 일입니다. 당시의 평범한 생각으로는 맹인은 부모나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평범과 일반적인 상식의 한계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리석을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통념이었고 진리였고 이해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현재 내가 이해하고 맞다 틀리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만고의 진리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깨닫게 되는 첫걸음은 인간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과 겸손입니다. 내가 무지하구나! 내가 부족하구나! 내가 아는 것이 이와 같이 한계가 있구나! 나의 이해력에 이와 같은 한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그 하나님이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자연만물과 인생에 대한 은혜를 추구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그 인생에 대해서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인생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신 뜻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의미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저라는 목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라는 목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니까 우리 목사님은 이런 분이야, 우리 목사님은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을 보니까 우리 목사님은 이런 분이야.’ 라고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아시죠?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생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고 그 인생들을 존중한 것이 그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대하여 지극한 존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을 하대하는 이는 하나님을 하대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매우 존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존중사상은 곧 하나님을 존중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는 인생을 고귀하게 여기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더 높게 여기라는 것이죠. 주님이 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장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은혜의 방법과 순서를 보게 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려면 이전에는 “네 눈이 떠져라” 라고 말씀하시든지 “네 믿음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시든지 아니면 눈에다 손을 대고 기도를 해주시든지 해야 되는데 오늘은 전혀 다르단 말이에요. 이게 예수님이니까 우리가 이해를 하지 침 뱉어서 진흙에 이겨서 눈에 바르면 그거 괜찮습니까?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더러운 것은 더럽잖아요. 이해가 잘 안된단 말이죠. 때로는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법과 순서가 우리의 이해와는 다를 때가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조차 몰랐어요. 제자들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다 라는 것을 전혀 생각 못했어요. 제자들은 벌써 한계가 있는 거죠. 그런데 주님이 그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어요. 이것을 보면 인생은 벌써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 다음 주님이 그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실 때에 기대했다면 그 눈에 손을 대고 기도하시던 명하시던 어떤 방법이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예상 가능했던 방법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침을 땅에 뱉어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눈이 떠지라든가 그런 얘기한 것도 없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행동이셨죠. 여기에 대한 설명과 평가는 하지 않겠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모습이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주님께서 하신 일이 인간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상 밖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내가 이해 못해도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내 마음에 안 들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진행됩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리에게 기적과 능력도 역사도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게 아니에요. 여러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할 때 어떻게 표현합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 속에서 표현해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의 한계 속에서 표현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예를 들면 내가 가진 한계 속에서 가지는 믿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제자들이 잘못됐다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못됐다라는 것은 이런 한계가 있구나 라는 것을 표현한 우리의 표현일 뿐이죠.

그래요. 그래서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역사라는 것은 보통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논리와 내 이해와 내 납득으로는 도저히 가능치 않고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고 기대할 수 없는 일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은혜를 주시는 것이죠. 우리 인생들은 보통 200년 이상을 상상할 수 없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근거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200년 후에는 대부분 이루어진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상상도 그 인생의 영력과 범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시편 121편>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결국 우리의 진정한 도움은 우리가 생각도 못했던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거죠. 그러니까 시인은 참 시적인 표현을 하잖아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그러니까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허공을 향하여 눈을 들게 되죠. 그 때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냐 하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는 거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에서 올 줄로 믿습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올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응답이 어디서 오던가요?

생각하고 기도했던 사람으로부터 오던가요?

때때로 기대했던 사람은 실망시키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게서 우리에게 도움이 오기도하고 전혀 예측치 못했던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하시기도 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진정한 은혜와 능력이 역사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이해를 넘어선,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부터 옴을 노래하고 있죠. 믿음이란 내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서 내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그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요즘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요. 우리 성도들이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 같아요.

도대체 믿음이 뭘까?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행동의 모습들을 보면서 도대체 믿음이 뭘까?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도대체 믿음이 뭘까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죠.

믿음이란 내 이해의 한계를 벗어나서 내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믿음이란 결국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한계와 부족을 인식하고 더 넓은 마음으로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입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이에요.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풍랑이는 바다에서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시고 있는데 배가 뒤집힐 것 같으니까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잖아요.

 

“예수님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라고 꾸짖지 않습니까?

믿음이 적다라는 것은 무엇이죠?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이 크다라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풍랑이 일어서 우리가 죽게 되는구나! 그런데 또 한 편 생각해보니까 예수님이 계시는데 우리가 죽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믿음이라는 말이에요. 내 이해와 논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라, 정말 내 마음속에서 도저히 이해 안 되고 납득되지 않는 것을 내가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부분까지도 내마음속에서 수용할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죠.

믿음이 좋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같이 뜨겁게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천천히 생각할지라도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해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민첩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인다는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겁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내 생각에 허락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믿음이 좋은 거예요. 내가 판단해서 모든 것을 다 쳐버린다면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내 믿음의 한계를 의미하고 있는 거죠.

한계를 넓히는 것 이해되어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을 때 이게 한계점이다 생각하고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갖은 노력과 그 노력으로도 안 될 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결심, 이런 의지와 결단력을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오늘 행한 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자체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해석하는 거예요. 왜 더럽게 침을 뱉었을까, 왜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했을까,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인간들에게 아주 스마트한 방법으로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각종 비평을 하고 더 좋은 방법으로 예수님도 이걸 개선했으면 좋겠는데... 예수님한테 개선하라고 말이에요. 그건 믿음이 아니잖아요.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옳다고 생각하고 거기서부터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판단이전에 이해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서는 것이 큰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지요.

 

우리 한 가지 더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믿음의 순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가서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 맹인과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행동은 매우 이례적이었어요. 또한 받아들이기 힘든 헤프닝일 수도 있어요. 저는 도대체 이 고귀하신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난감한 방법을 선택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생각돼요. 예수님은 가끔 우리에게 매우 난감하실 때가 있어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할 때 우리가 얼마나 숙연해져요.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내가 자식에게 줄 것을 개에게 주지 않는다. 너는 개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난감합니까? 자신에게 은혜를 구하는 여인에게 너는 개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너에게는 은혜를 베풀 수 없어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침을 뱉어서 진흙에 이겨서 눈에 바르라고 하신 것은 도저히 비상식적이란 말이죠. 이것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역시 이해의 관점인가 비판과 평가의 관점인가를 결정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맞다라고 생각하는 그 관점에서 우리는 모든 일을 시작해요. 그러나 아니다 생각하고 주님의 모습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평가와 판단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달라지지요. 왜 하필 그 방법밖에 없을까, 왜 더 나은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까 하고 밤새도록 토론하고 해석해요. 그리고 예수님의 개선해야 될 점 등에 대해서 논문발표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이 옹졸했다라든가, 아니면 예수님은 매너가 비문화적이라든가, 예수님은 목수출신이고 시골 나사렛 출신이라서 배운 것이 그것밖에 안되어서 예수님은 그 수준에서 역시 문화적 삶을 산다라고 생각하는 인문비평-문화비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판단과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을 때 어떤 뜻이 있었을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믿음의 자세이지요. 주님이 하신일의 의미와 그 뜻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맹종이나 맹신이 아니라 믿음을 대하는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정말 수로보니게의 여인처럼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자만이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합니다. 수로보니게의 여인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수욕을 넘어서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절대적인 신뢰와 기대입니다. 이 수로보니게의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를 비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 예수님이 내 믿음의 무게를 달아보시는구나!

“예수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 나는 그와 같이 처연한 자입니다. 나는 지금 이것저것 가릴 수 없는 너무나 빈천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지 이 여인은 주님이 나를 비하한다거나 나를 무시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주님께 대해서 자존심 상하지 않았단 말이죠. 그래요. 오늘 본문처럼 전혀 뜻밖의 사건과 상황을 접해도 그 가운데 주님을 확신하고 순종함으로 따를 때 믿음은 진정한 실제의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가르쳐 주심이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생각이 깊고 그 한 가지 행동과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까? 주님은 한 가지 가지고 한 가지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에요. 주님은 언제나 한 가지를 통해서 열 가지를 가르치시고 우리에게 근본적인 생명의 능력을 부여하시는 분이란 말이죠. 주님은 절대진리다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과 주님은 상대진리다 생각하고 해석하고 비판하고 주님께 대한 개선점을 내놓으며 도전하고 비양하고 폄하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에도 주님의 뜻이 실행되는 삶의 장면을 믿음의 장면으로 보고 그 하나님의 선한 뜻이 결국 우리에게 축복임을 생각하고 나간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시험대신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때문에 시험당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판단이전에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믿음은 순종이라는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생활의 실제로 진행되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받아들이죠. 그러나 우리 인생은 아니죠. 우리 인생은 주님이 아니니까.

아니에요. 주님의 믿음의 대상으로 본다면 주님이 역사하시는 그 인생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신뢰를 가지고 기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결국 주님의 뜻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맹인의 심정이 기술되지는 않았어요. 아마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단편소설을 장편소설로 좀 풀어서 쓴다면 이런 식이겠죠. 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생각을 서술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아니 왜 침을 뱉으셔.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너무 감격하고 예수님의 영적권세에 눌려서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냥 뛰어갔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적을 이 사람이 들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저는 더 마음에 확신이 가기는 이 사람은 여러 가지 의심이 들기 전에 너무나 감격스럽고 예수님의 영적인 권세에 눌려서 그냥 갔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가나안 혼인잔치 사건에서도 예수님이 그 종에게 아귀까지 물을 채우라고 할 때 그 종들이 아귀까지 물을 채웠단 말이에요. 여러 가지 것들보다 저는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영적권세를 감이 인간들이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권위가 그들에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하튼 나타나는 모양은 간절함이 온전한 순종의 모습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삶이란 결국 마음에 일어나는 의심을 버리고 신뢰 속에 주님을 믿고, 믿었던 대로 끝까지 나아갈 때 주님의 은혜와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한 단순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고 그에게도 하나님의 역사가 작동하신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한 인생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정말 한 인생 인생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저는 요즘 믿음의 힘, 신뢰의 힘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기대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기대하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거예요. 그것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이 믿음의 대상인 주님을 믿기에 그 주님이 운행하고 섭리하는 사람들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죠.

믿어주는 것은 뭐죠? 더 큰 마음이잖아요. 제가 이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여러분, 학교 다닐 때 부모님한테 책값 두 번 받은 적 없어요?

책값 조금 더 붙여서 받은 적 없습니까?

그러면 부모가 그거 모르겠습니까?

너 전에 책값 받아갔잖아. 그런데 또 달래니? 하면서 다 알 수 있어도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거예요. 왜 넘어갑니까?

‘얘가 돈이 필요한데 나에게 말하기가 좀 안타까운가보지.’ 라고 생각해서 믿어주는 거예요.

여러분, 책값 두 번 받은 사람이 다 범죄자 됐습니까?

우리 인생에는 그저 믿어주고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얘가 다른 방법으로 얘기하기가 어려워서 나에게 이렇게 하겠지.’ 하고 또 생각해봤어요.

‘얘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나에게 구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구했으면 어떻게 할 뻔 했겠어?’ 라고 생각하면서 책값 두 번달라면 오히려 더 줄 수 있는 여유가 우리 마음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범죄에 대한 방조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너그러움이죠. 우리 옆에 있는 사람과 인사한 번 해 봅시다.

“좀 더 너그럽게 인생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 편해져요. 밤새도록 ‘저놈이 왜 나한테 책값을 두 번 받아갔을까’ 하고 잠 못 이루지 말고 ‘뭔가 필요한 게 있나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애들은 저러면서 크는 거야’ 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보다 더 아이들에게 편안한 부모가 될 수 있어요.

그래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믿어주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겁니다.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믿어주고 기대하고 기다려주는 겁니다.”

어찌 생각하면 인간에 대한 실망은 내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나에 대한 실망일수가 있어요. 왜죠? 내 인내의 한계가 이거구나! 라고 실망하는 거예요. 내가 저 사람에 대해서 내가 못 참아 주는 거예요. 내 인내의 한계라는 거란 말이죠. 내 신뢰의 공력이, 내 신뢰의 능력과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하는 자탄이죠.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 우리자신을 추슬러 다시 마음먹고 위대한 힘을 가지고 인생들을 대해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은 결국 내 앞의 사람이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내 앞에 누려진 행복을 누리는 거예요.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는 것은 내 앞에 행복의 요소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행복을 내가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어렸을 때 읽은 동화 중에 이런 게 있잖아요. 게으른 사람.

게으른 남편, 하도 게을러서 밥도 아내가 다 떠먹여 줘야 하는데 이 아내가 친정에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굶어 죽을까봐 걱정이 돼서 인절미를 실에다 꿰어서 목에다가 매줬어요. 하나씩 떼어먹고 살라고. 그런데 친정 갔다 왔더니 이 남편이 굶어죽었어요. 왜냐하면 인절미가 다 말라있어요. 이거 자기 손으로 넣어서 먹기 괴로워서.

우리 목에 걸려있는 인절미 목걸이처럼 행복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널려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삐삐 말라진 인절미처럼, 그것도 먹지 않고 굶어죽은 동화속의 남편처럼, 우리는 우리 삶에 있어서 행복이 널려있는데도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우리 주님을 한 번 바라보십시다.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내 앞에 사람들을 바라봅시다.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겠어요. 내 앞에 있는 형제자매를 통해서 주님을 보는 것 아닙니까? 저는 병원심방 갈 때마다 보니까 복도에 10m, 20m... 써놓은 것을 봐요. 그게 뭡니까? 환자들이 걷는 거예요.

내가 오늘은 10m 를 걸을 수 있었어. 내가 오늘은 20m 를 걸을 수 있었어.

제가 보니까 40m까지 그려져 있더라고요. 테이프로 쭉 붙여놨어요.

내가 오늘은 40m를 걸을 수 있었어. 이제 나는 재활이 다 되나보다. 이런 거 아닙니까?

우리 행복해도 돼죠?

우리 행복해도 돼요. 우리 행복하게 살아야 됩니다.

아무래도 내 앞에 사람이 침 뱉어서 내 눈에는 안 발랐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럼 그 사람 괜찮게 생각할 필요 있어요.

왜 주님은 이렇게 순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까요? 주님은 교육방법이 상당히 뛰어나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후에 있을 수많은 시험과 고통과 흔들림을 생각할 때 주님은 이 사람에게 반드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축복해주어야 될 필요가 있으셨어요. 주님은 어떤 한 가지 자비를 그냥 주시지 않고 그 한 번을 통해서 다음에 진행되는 인생까지도 바꾸시는 것을 봐요. 그러니까 주님은 먼저 믿음의 선결, 영혼의 후결이에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믿음의 선결, 삶의 문제의 후결이에요. 언제나.

주님은 우리에게 표피적 역사를 주지 않고 근본적인 역사를 베푸십니다. 혈루병 걸렸던 여인, 백부장, 문둥병 환자,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맹인,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 걸인, 모두다 주님의 역사는 우리들에게 그것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역사를 주시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오늘 이 사람에게도 눈이 떠지는 것을 넘어서는 더 큰 것을 위해 주님께 대한 믿음의 확신은 반드시 과정이 필요했던 거죠. 바로 마지막으로 나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내용은 무엇이냐 하면 믿음으로 인한 진정한 은혜를 체험한 이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게 돼요. 믿음의 체험은 언제나 그것이 흔들리는 시험을 맞이하고 그것을 이겨냄으로 더욱 더 견고해지고 더욱 더 큰 축복의 자리로 갑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나와요. 뭐라고 얘기 하냐면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 저사람 앞을 못 보던 사람인데 어떻게 앞을 보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아니야, 그럴 리가 있어? 그가 아니라 비슷한 사람이야.” 이렇게 얘길 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생생히 증언을 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그가 맞습니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셨어요.”

그런데 그 뒤에 더 충격적인 사실이 나와요.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듣고 분기가 팽천했어요. 예수님이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 예수님에게 사람의 관심이 가니까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얼마나 밉겠어요. 그래서 그 부모를 데려다가 문초하게 됩니다.

“정말 예수님이 네 아들의 눈을 뜨게 했느냐?” 그랬더니 이 사람이 무서워 벌벌 떠는 거예요. 잘못하면 출교당하겠어요. 그 당시에 출교당하면 그것은 그의 모든 생명의 공민권을 다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라고 얘기하죠? 아버지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아들도 장성한 사람인데 그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자기는 빠져나가는 겁니다.

이게 뭐냐면 은혜를 체험한 사람과 은혜를 구경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아무리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해도 은혜를 체험한 사람과 구경한 사람의 차이예요. 은혜를 구경한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빠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달라요. 그 아들이 뭐라고 한 지 압니까? 나중에 읽을 <요한복음 9장 25절>이하를 보면 뭐라고 얘기했냐면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난 잘 몰라요. 그런데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해 준 것이에요.”

그래서 나가서 뭐라고 한 줄 압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십니까?”아들은 달랐어요. 아들은 달랐단 말입니다.

여러분, 은혜 구경하는 것과 은혜 체험하는 것은 달라요. 이 아들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아들에게는 확실한 마음속에 확신과 뜻이 있었던 것이죠.

시간이 가며 사건이 일어날수록 이 사람은 더욱 더 강해집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진 분명한 체험을 가졌고 과정 속에서 그는 더욱 더 선명히 보았기 때문이죠.

간혹 주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런 과정을 생략하시고 금방 은혜를 주시면 좋은데...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어요.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우리 고등학교 3학년이 대학에 탁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어요. 그 사람하고, 어렵게 어렵게 해서 삼수에서 합격한 사람하고 누가 더 하나님께 감사할 것 같아요?

안 해봐서 잘 모르시죠? 제가 보기에 고등학교 3학년 다니고 바로 입학한 사람은 “하나님, 너무 너무 감사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굉장히 감사할 거예요. 삼수한 사람은 “하나님, 왜 절 합격시키실 바에야 이렇게 3년이나 고생시키고 합격시켰습니까? 쟤는 금방 합격되었는데...” 이렇게 기도하지 않아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감사할 거예요.

우리 인생은 고난을 겪고 기쁨을 얻을 때 더 감사해요. 제가 여러분께 한 번 여쭤 볼께요.

하루 기도해서 은혜 받았어요. 그 사람이 믿음이 더 좋을까요, 그냥 애간장을 짜고 짜며 40일 기도하고 은혜 받은 사람이 더 믿음이 좋아질까요?

하나님은 한번만 기도해도 내게 은혜 주셔. 그러니까 믿음이 확실해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아니에요. 그 사람은 잊어버리는 것도 곧 잊어버려요. 하루 만에 은혜 받으니까 하루 만에 잊어버려요. 그런데 40일 동안 기도하면서 어렵게 은혜 받은 사람은 그거 잊어버리는 것도 40일은 걸릴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때로는 고통을 통해서 은혜를 주세요. 그 고통 속에 은혜를 받았던 만큼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도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거죠.

그래요. 가룟 유다가 기적을 못 봐서 마음이 변했습니까? 그 안에 사단이 역사하면 누구든지 달라져요. 그러니 우리는 주님이 명하신 훈련의 과정과 아픔의 과정을 감사해야 돼요. 한 덩이의 떡이 아니라 그 떡을 먹음으로 우리 삶의 지속적인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각양의 다양한 은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과정을 은혜로 순종하여 우리가 그의 백성으로 만들어져 가는 겁니다.

믿음의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맙시다.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습득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까, 나는 어디까지 가야하나, 이것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이룰까를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백성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쓰면서 굉장히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감사했고 더욱이 제가 적어 내려가는 이유가 우리 성도들에게 드릴 말씀 즉, 설교말씀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감사했어요. 왜냐하면 그 말씀을 기다리는 성도가 있다는 것 자체가 목사에게는 큰 행복이었습니다.

받아줄 성도가 있고 그리고 목사는 그 성도들에게 어떤 기쁨을 드릴까,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드릴 수 있을까, 이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마음에 도전이 되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세상에서 힘 있게 살아갈까 생각을 하니까 저는 이런 기쁨과 기대의 구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성도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목사가 설교 해주셔서 감사하잖아요.

저는 우리 성도들 중에 목사가 정상적인 예배가운데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기도한 것이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는구나! 라고 감격해 할 성도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수고한 만큼 감격도 있고 수고한 만큼 기쁜 것도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바른 구조와 과정을 거쳐서 바른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이 내 손과 발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믿음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 많아요. 그러나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에 나타나는 상황이 전부인 것 같아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 이해 내 납득 내 생각에 맞추지 말고 믿음대로 살아라, 사랑하며 살아라, 용서하며 살아라, 상대를 더욱 더 배려하고 살아라, 베풀며 살아라, 섬기며 살아라 라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순종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올해의 표어인 더욱 낮아짐으로 더욱 넓어지는 마음, 주변을 돌아보며 더욱 깊은 배려의 심정, 주님의 뜻에 대한 겸손한 순종을 이루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가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임덕순 목사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한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그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회복지라는 것은 개념도 없던 시절인지라, 먹고 살 길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8). 당시는 질병은 많고 약은 없는 시절인지라 장애인이 많았습니다. 덥고 먼지가 많은 지역에서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걸린 눈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냥 놔두면 결국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사회는 모든 병을 죄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병을 얻거나 장애인이 되면 고생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장애인을 미워했으면 했지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환자 자신도 질병은 자기 죄에 대한 업보라고 믿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기가 고생하는 것은 조상 탓이라며 운명론에 빠져서 자포자기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질병을 무조건 자기 죄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정리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같은 경우입니다. 태어난 후에 소경이 되었다면 당연히 그 자신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태어나기 전부터 소경이 되었으니 그게 문제였습니다. 만약에 자신의 죄 때문이라면, 자라서 자기가 죄를 지은 뒤에 소경이 되었어야 마땅한데, 나기 전부터 소경이 되었으니 그의 죄는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부모의 죄 때문일까? 그렇다면 죄 지은 부모가 소경이 되어야지 왜 죄없는 자식에게 벌을 주실까? 그래서 이 문제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바로 그런 사람을 만났고, 그 문제에 궁금증을 갖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르쳐 주셨으며, 사람의 외모 보다 중심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귀가 따갑도록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길가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자마자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배워도 어려서부터 세뇌된 선입견을 벗어나기는 힘드나 봅니다. 요즘 전도폭발 팀이 전도하려고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들려주면,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아 죽으셨으며, 그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알려주면, 내가 지은 죄는 내가 갚아야지 어떻게 제 3자가 갚아준단 말이냐고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답니다. 한국 사람은 누구나 어려서부터 불교적 사상의 영향을 받았는데,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의 선행으로 죄를 갚아야하고, 공덕을 쌓아야 좋은데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착한 일을 해서 자기 죄값을 갚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기 행동으로 자기 죄값을 갚아 낸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내 죄를 다 갚았다. 이제는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을 행하겠다는 결심은 하지만 실행은 하나도 하기 전에 또 다른 악을 저지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짠물이 나오는 샘에서 단 물이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니까, 자기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하나님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니까, 남이 어떻게 내 죄 값을 갚아 주느냐고 따지는 어리석고 교만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배운 제자들의 생각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의 책임이다’라고 하시거나,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타고난다고 하시지 않고, 아주 긍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었을까요?

모든 고난과 질병은 그 사람의 죄 때문일까요? 아니면, 모든 질병과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까요? 사람이 감기에 걸린 것도 죄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걸리게 하신 것일까요? 둘 다 정답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병은 죄 때문에 생긴 것은 맞습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는 질병도 재난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질병이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경건하게 산다면, 이 세상의 질병 중에 상당수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에 걸리면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하고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회를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죄와 관련 없는 질병이나 고난도 얼마든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는 고난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주변에 병균이 가득하고 위생상태가 좋지 않은 땅에서, 약한 몸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언제든지 발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벗어나기 어려운 고난을 당했을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그를 치료하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삼아주십니다. 이것은 특별한 은혜 즉 특혜이지만 고난중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특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 고난 때문에 주님을 찾아 나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전파하는 진리의 사람, 새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문하고 토론을 하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4-5)

아마 그 때가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때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날 하루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보다는 “우리가 이렇게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왔고, 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논쟁에 허비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서둘러서 일하자.” 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누구의 책임이냐 하는 무익한 토론이나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도움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소경을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이 소경된 이유가 뭐래, 부모일까, 자신일까”하는 말만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의 일행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또다시 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대단히 실망했을 것입니다. “어휴, 저 지겨운 소리를 또 듣는구나. 예수도 소용없구나.”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생전 처음으로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전에는 설마 자기처럼 천한 죄인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보니 가슴이 뛰었습니다.

“나 같은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 하신다구? 하나님이 대체 나 같은 것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실까? 내가 무슨 하나님의 일을 드러낼 수가 있을까?”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소경인데, 소경의 눈 위에 진흙덩어리를 붙여 놓았으니, 모두가 이상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침에 약효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 사람이 말로만 해서는 잘 안 믿을 것 같으니까, 그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게 하심으로서 믿음을 일으키려고 하셨을까? 그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말로만 기도하는 것 보다 손을 얹어 안수해 주면 더 믿음이 생기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를 지금 실로암 못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인 줄을 다 압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눈에 진흙까지 이겨 바르고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아니 저 사람 지금 뭐하는 짓이야” 하고 모두가 구경거리로 삼았을 것이고, 많은 아이들이 그 뒤를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소경인 사람이, 눈에 진흙을 잔뜩 발랐습니다. 진흙을 눈에 바른 것은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표시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채로 실로암 못으로 갔는데, 7절 중반에 보면, 괄호 안에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딴 짓을 하지 않고 오직 보냄을 받은 곳으로 갔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진흙덩이를 눈에 바르고 실로암으로 가는 소경이 다른 것을 생각했을까요? 실로암은 너무 멀다고 다른 가까운 곳으로 방향을 돌렸나요? 눈두덩이에 붙인 진흙덩이가 창피하고 가렵다고 가다가 떨어버렸나요? 그가 실로암을 향하여 가다가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고 멈추어 서서 구걸하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진흙을 붙인 그대로 보냄을 받은 곳으로 가서 씻었습니다. 비록 소경으로 태어나서 온갖 설음과 무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주님을 만나서 너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발라주신 진흙을 그대로 두고, 보냄을 받은 실로암 못을 찾아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눈이 나아서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밝은 눈으로 돌아왔고, 자비와 능력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는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두덩이에 진흙을 바른 채로 실로암 못으로 가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남들에게 ‘나는 소경이야’라고 공개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뿐일까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41절에 힌트가 있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너희가 소경인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느냐, 보지도 못하면서 모든 것을 다 보는 체하기 때문에 너희 죄가 사하여지지 않고 너희 문제가 해결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이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른 채 실로암으로 가게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에 진흙을 덧붙임으로서 드러내라, 나는 소경이라는 것을 인정해라.”그런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만을 위해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주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당신에게 배우는 제자들을 위해서 하신 행위입니다. 너희가 소경이면서 소경이 아닌 것처럼 하지 말아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다 보는 것처럼 폼 잡지 말아라. 네 약점, 네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낸 채로 하나님앞에 나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자기가 소경이면 눈에 흙을 발라서 자기가 소경인 것을 드러내고, 입이 더러운 사람이면 입에 먹물을 칠해서 입이 더러운 사람임을 드러내고,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가슴에 붉은 잉크를 칠해서 표시를 하고, 돈에 약한 사람은 이마에 돈을 붙여서 매사를 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표시를 해라. 자기의 약점을 숨기려고 하지 말고 드러내고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만 하면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은 빛이신 주님이 일하시는 낮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주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는 때이고, 아직은 무능하고 연약한 죄인이라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때입니다. 고후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해는 곧 넘어가고 깜깜한 밤이 오듯이, 회개를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날이 오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도 바닥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통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지금은 저녁때이긴 하지만 아직은 구원이 가능한 낮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기가 영적인 소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진리에 대하여 소경이라는 사실을 이 소경처럼 인정하고 고백하였더라면, 그들에게도 진리의 빛이 비추었을 것인데,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기 때문에 여전히 무지와 고난 속에서 산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경제가 어려워서 먹고 살기가 힘드는 것입니까? 집이 없어서 노숙을 해야 할 처지입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진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아닙니까? 천안함 사건을 놓고도 정 반대의 주장과 비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기가 진실을 다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 영적 소경들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 중에 단 한 개도 갚을 수 없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죄를 갚아야지 남이 어떻게 내 죄를 갚아주겠느냐고, 주님의 부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영적 소경인데, 그들이 아는 체하며 진리를 비웃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발하고 있어서, 주님을 답답하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이런 부분이 없을까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 진짜 소경이 아닐까요? 여러분 안에는 어느 부분이 병들어 있습니까? 돈에 약합니까? 이성에 약합니까? 용서 못하는 분노가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의심하는 성격입니까? 정욕이 통제되지 않아서 자기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습니까? 설교가 항상 지루하기만 하고 진리가 이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것들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자기 속에 이런 것들이 가득한데, 자기는 신앙이 좋은 것처럼, 자기는 흠이 없는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폼이나 잡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진흙을 바르고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 소경이 실로암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오직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진리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 그것을 인정하며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보냄을 받은 곳은 어디일까요? 진리의 전당이요,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단체이고, 또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주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시는 곳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소경입니다. 나는 추한 사람입니다. 하고 진흙을 붙이듯이 자기의 약점을 드러내고 이곳으로 오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붙어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떼어내 주시고,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8-9절을 읽어봅시다.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하니,”

단순히 그가 눈을 떴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만이 아닙니다. 그는 눈을 뜬 것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감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용서하셨고 나를 사용하신다는 자신감이 그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남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운명론에 빠져서 팔자타령하며 조상 탓이나 묘 자리를 탓하면서 사는 동안에는 얼마나 자신을 자학하며 살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랬던 사람이라도 자신의 부족과 문제를 감추지 않고, 눈에 진흙을 바른 소경처럼 드러낸 채로 주님께 가져가면,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시고 고치시고 사용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고 힘이 넘치는 새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보냄을 받은 곳으로 갔을 때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우리도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으로 갑시다. 다 아는 체, 완전한 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가득 차 있는 불신과 정욕과 고집과 의심을 이마에 써 붙이고 주님의 존전으로 갑시다. 나는 진리에 까막눈이라고 우리 입으로 고백합시다. 그러면 그동안 겪었던 고통과 갈등을 훨씬 능가하는 주님의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소경을 보면서 저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 책임이냐고 질문을 했을 때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일할 수 없느니라.”였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다. 서둘러 일을 해야 할 시간이다.” 잔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낮의 길이가 상당히 길어져서 15시간이나 됩니다. 그래도 역시 밤은 찾아옵니다.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밤이 되면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밤이 곧 찾아온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 모든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보내십니다. 교회에 와서 죄를 씻고, 영원한 형벌을 사함 받으며, 진리의 사람, 기쁨과 평안의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는 나가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여, 그들도 교회로 불러들이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교회로 보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내 동네에서만 그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땅 끝까지 가서 그 일을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사함 받고 진리의 사람 평안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을 선교라고 합니다. 오늘은 한가람 선교주일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뜻입니까?

나 자신도 아직은 돌이킬 시간이 있으니, 안 보이는 눈과 죄 가득한 가슴에 진흙을 붙이고 주님께로 달려가서 씻고 밝은 눈, 밝은 마음으로 새 사람의 삶을 살라는 재촉입니다.

우리교회에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 온 세상에 선교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보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교회가 받은 선교의 사명입니다.

 

보냄 받은 사람들의 단체인 교회는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았고, 가서 사람들을 찾아 교회로 보내는 일을 사명으로 맡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까지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질지 모릅니다. 한국의 사회 안정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릅니다. 한국의 경제상황이 언제까지 선교할 여력을 갖게 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까지 중동이나 러시아 주변의 모슬렘 권에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언제까지 한국교회에 선교인력이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신학교에 지원자가 넘쳐서 시험을 봐서 겨우 들어가고, 선교사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제발 나를 보내어 달라고 하고 있지만, 상황은 곧 바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신학교를 잘 지어놓았지만 지망생이 없어서 학교가 텅텅 비어있고, 돈이 있어도 선교사로 갈 사람이 없어서 보내지 못하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이미 밤이 왔기 때문입니다. 일 할 수 있는 낮이었던 때를 허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한국교회는 아직 낮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한가람교회는 아직 낮입니다. 감사하게도 아직 우리 개인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내고 회개하고 주님의 교회안에서 진리를 배우며 새롭게 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는 저물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에게 건강을 주실지 모르며, 내게 맡기신 재물은 언제까지 내 곁에 있을지 모르며, 내 생명은 언제 부르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의 해가 넘어가기 전에 다시 힘을 내서 정직하게 진흙을 바르고 주님께로 돌아가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러 온 세계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우리는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사명을 성실히 잘 감당하여 칭찬을 받고,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살아가는 한가람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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