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우리 비유(2)
선한 목자
최병남 목사
하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는 특이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는 완전하고 영원하고 신비롭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갈수록 약해지기도 하고 또 문제가 일어나기도 하고 또 타성화 되고 습관화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갈수록 새롭고 갈수록 희망이 넘치고 갈수록 더 좋은 것으로 소유되는 아름다운 미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목자와 양의 관계는 전적으로 의존의 관계이고 또 목자는 양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관계입니다. 양은 어떠한 자기 자신을 보호할만한 도구가 없는 무방비상태이고 또 어리석어서 한번 갔던 길도 못 찾는 무지한 양입니다. 그런고로 전적으로 목자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목자이십니까?
1.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는 목자입니다.(3절)
오늘 본문 3절을 보니 "각각 그 이름을 불러내어서 인도해준다"고 그랬습니다. 자, 이스라엘 나라에는 당시에 많은 양들이 있었고 양을 치는 사람들이 보통 서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 자기 우리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다섯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 어떤 분은 서른 마리 이렇게 있지만 우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우리에다가 자기 양들을 다 몰아 둡니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이 되면 다 그 공동 우리 속에 몰아두고 그리고 거기에 문지기가 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이제 목자들이 자기 양을 찾으러 옵니다. 그래서 문지기에게 확인을 받은 다음에 그 많은 양들, 내 양이 어떤 것인지 다 모르지 않습니까? 똑같은 양들이니까. 그런데 소리를 내면 희한하게도 그 목자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이 목자를 따라 나옵니다. 다음 목자가 또 자기 양을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그 목자의 양들이 또 쫓아나온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름을 부르면 따라나오고 그대로 인도해 준다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면 이것은 중대한 몇 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1)주님의 세심한 개인적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주님은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 양을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부르고 불러내는 것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이름을 부르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요즘은 무관심 시대인 것 같습니다. 핵가족 제도가 되고 이렇게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성장하기 때문에 여러분 한 아파트 한 동, 한 라인에 산다면 거리적으로 얼마나 가깝습니까? 그러나 그들과 전혀 대화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무관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인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름을 불러냈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인정했다고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아무나 불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만 불러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 죽었던 우리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왜요? 만 세 전에 택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불러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을 특별히 인정해주시고 여러분을 사랑해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자유를 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불러낸다는 것은 무슨 뜻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밤새 양의 우리에 갇혀 있던 양들, 서로 잘 모르는 양들끼리 모였지만 아침에 목자가 와서 다 불러냅니다. 이제 자유입니다. 그 우리에 갇혀 있던 양들이 마음껏 나가서 넓은 세상에 다닙니다. 즐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 세 전에 다 택해주시고 이 죄많은 세상에서 여러분들을 불러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망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주었습니다.
4)목자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불러냈다는 말은 주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자, 목자와 밤새 동안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니 목자가 다시 찾아와서 그들을 불러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부터 목자와 더불어 교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지만 예수그리스도 선한 목자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마음껏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불러서 이곳에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개인개인 이름을 불러서 이 곳에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했습니다.
2. 앞서가는 목자입니다.(4절)
본문 4절을 보니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앞서 가셨다" 그랬습니다.
1)장애물을 제거해주십니다.
앞서 가셨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이것은 곧 장애물을 제거시켜주는 것을 가르칩니다. 만약에 장애물이 있으면 그것을 다 제거시켜주시고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길에 살다보면 장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장애물 앞에 무릎 꿇고 낙담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주님께서 앞서 행해주십니다. (사45:1-2)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 그랬습니다. 고레스왕이 가는 곳마다 승리한 대왕이 되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앞서 가주셨고 하나님께서 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2)인도해주십니다.
오늘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앞서 가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앞서 가셔서 여러분의 가는 길을 인도하되 환난에 놋 문을 쳐서 부수어줍니다. 성문을 꺾어줍니다. 쇠빗장을 꺾어주고 부수어뜨려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언제나 절대 승리자가 됩니다. (렘1:18-19)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늘 선한 목자 되신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3)보호해주십니다.
여러분,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앞서 가신다는 말은 우리 목자 되신 주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여러분을 인도해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을 혼자 걸어가는 것 아닙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앞서서 여러분을 인도해주십니다. 어디로 인도해주십니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히 있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인도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양들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무지한 동물이지만 그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이 있는 꼴이 풍성한 곳으로 인도해 주는 것처럼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4)의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기에 앞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인도해주십니까? 어디로 인도해주십니까? 바로 쉴만한 물가로, 안식의 동산으로, 평화의 동산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렘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강 중에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그런고로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항상 평화의 동산으로, 안식의 동산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바른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의의 길로, 의의 동산으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입니다.(11절)
여러분,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11절을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랬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신 목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를 위해 죽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형제가, 내 친구가, 내 이웃이, 아니 내 부모가 나 때문에 혹시 죽어줬다고 하면 그것도 우리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감격이요 기쁨일텐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정말 보잘 것 없는 벌레 같은 우리들 위하여 이 땅위에 오셔서 숱한 고난을 당하시고 머리에 가시관, 손발에 못, 옆구리에 창을 찔려 피와 땀과 진액을 다 쏟아 생명보로 죽어주시고 우리를 사망가운데 건져 주셨으니 그 은혜,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가 말입니다. 자신 아들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냐 생각해보십시오. 아들을 우리에게 죽어주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에 무엉ㅅ을 주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위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약해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에 이 세상에 의지할 곳 없어서 홀로 눈물지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을 때에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에 사로잡혔을 때에 그러나 여러분 낙심해서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생명보로 죽어주신 선한 목자의 사랑이 여러분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생길이 답답하고 힘이 들어도 때로는 낙심하여 넘어질 때가 많아도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기억하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 깊이 파묻혀 봅시다. 그 사랑이 여러분을 위로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을 붙잡아줄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에게 새로운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주실 것입니다.
4. 양을 아시는 목자입니다.(14절)
오늘 본문 14절을 보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고 그랬습니다. 우리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감당할 수 없는 문제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병상에 누웠을 때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우리 마음 속에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때그때마다 찾아오시고 말씀을 통하여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여러분의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그곳에 참 안전이 있습니다. 그곳에 평강이 있습니다. 그곳에 풍요가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우리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앞서 인도해 주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는 선한 목자입니다. 금년 한 해에도 여러분 일생 다 가도록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뒤를 따라 순종의 삶, 또 사랑의 삶,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복음증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지도자를 따르라
요 10:1-18 / 조상호 목사
1913년 8월3일 스테판슨(Stefansson)이 이끄는 캐나다 탐험대는 얼어붙은 북극 지방을 최초로 육로 횡단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탄 탐험선 칼럭(Karluk)호는 얼마 있지 않아 북극의 단단한 빙벽에 막혀 부서져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배안에 갇혀 있는 캐나다 탐험대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거짓말하고 속이고 도둑질 하는 사람들로 변하더니 급기야는 11명의 탐험대원 모두가 북극의 얼음 같은 불모지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북극 탐험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정확히 1년 뒤 똑같은 상황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났습니다. 1914년 12월5일, 투지에 불타는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새클턴(Earnest Shackleton)이 이끄는 27명의 남극 탐험대가 남빙양에 있는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기세 좋게 닻을 올리고 출발했습니다. 그것은 남극을 최초로 탐험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들이 탄 배 역시 스테판슨이 이끄는 북극탐험대의 배처럼, 남극의 얼음덩어리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절박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추위 속에 떨어야했고 식량과 보급품 부족이라는 절대 절명의 위기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테판슨이 이끄는 북극탐험대와 달랐습니다. 2년 동안 그들은 펭귄을 잡아 배고픔을 해결하고, 얼어붙은 웨들해 얼음위에서 생활하며 지붕도 없는 조그마한 보트로 험난한 남빙양을 두 번이나 건너는 위험천만한 항해를 감행한 끝에, 얼리펀트 섬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새클톤 대장의 리더쉽 때문이었습니다. 새클톤 대장의 리더쉽 때문에 북극 탐험대원들과 달리, 남극 탐험대원들이 몰살당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처절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새클턴 대장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원들에게 계속적으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대원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헐뜯고 다투기 보다는 서로 격려를 하고 아껴주는 팀웍이 형성되어 결국에는 27명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지도자의 중요성입니다. Leadership의 중요성입니다. 지도자에 따라, 리더쉽에 따라 팀원들이 달라지고, 속한 공동체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이처럼 리더쉽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요즈음 전 세계적으로 리더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더쉽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는 대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오는 19일은 21세기 들어 처음 맞는 대통령 선거일로서 대한민국은 현재 선거열풍 가운데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TV 토론회와 연설, 후보에 대한 광고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중계되고 있습니다. 또한 요즘 들어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 대통령 후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대법관 출신의 모 대통령 후보는 “부패정권, 무능환 정권을 심판해서 나라의 기강을 세우겠다”고 외치면서 자기를 찍어 달라고 합니다. 또 상고를 졸업한 모 후보는 “학벌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를 하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 국민에게 희망을 주겠다“고 외치며 자기를 찍어달라고 합니다. 또 노동자 운동을 하고 있는 모 후보는 ”못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펴서 노동자 농민들도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외치며 자기를 찍어달라고 합니다. 일반 국민들이 들으면 다 훌륭한 지도자들인 것 같습니다. 후보들의 공약들을 들어보면 정말 나라를 위하고 국민들을 위하는 참된 지도자처럼 보입니다. 후보들을 위해 열심히 선거운동에 뛰어 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지도자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대통령 후보로 나온 그 분들이 진정한 지도자들입니까? 그들을 참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이 자리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의 자질과 인격을 논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한국을 떠나온 지 16년째 되다보니 한국 정치에 대해 별로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대통령 후보들을 비교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 후보로 나온 그 분들이 참된 지도자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19일이 지나면 많은 후보들 중에 한 후보는 분명히 대통령에 당선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국민들은 당선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가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선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참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할지라도 이 땅에 있는 사람은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어느 누구도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된 지도자를 만날 수 없습니까?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된 지도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참된 지도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지도자가 되십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없지만, 예수님만이 참된 지도자가 되십니다. 11절 상반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원래 ‘선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두 단어가 있습니다. <아가소스>라는 말과 <칼로스>라는 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가소스>라는 말은 그저 ‘법적인 의무와 책임을 완수한 사람’,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반해, <칼로스>라는 말은 본성적인 선함을 말합니다. 어떤 의무와 책임을 완수했다는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착한 성품을 가졌다‘, ‘원래부터 품성이 좋다‘라고 할 때 이 <칼로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이 칼로스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스스로 ”나는 칼로스하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본래부터 선하다’라는 의미의 <칼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있는 어느 누구도 선하지 않지만 주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는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대하십니까?
1. 구원자(To Save)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목숨 걸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과거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곳 뉴질랜드와는 달리, 사나운 짐승들이나 맹수들이 양들을 공격해서 해치곤 했습니다. 또 강도들이나 도둑들이 나타나서 남의 집 양들을 훔쳐 가기도 했습니다. 그 때 목자는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이나 강도들로부터 양들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했습니다. 진짜 목자들은 목숨 걸고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반면에 돈을 목적으로 고용된 삯꾼 목자들은 달랐습니다. 삯꾼 목자들은 목숨을 걸고 양들을 돌보기는 커녕, 위기가 닥치면 자기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도망을 치곤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시의 이러한 상황들을 그리면서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참된 지도자이신 주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한번만 말씀하시지 않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7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절도 보겠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나 양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번이나 반복하며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목자라고 해서 다 참된 목자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걸고 생명 살리는 데 힘쓰는 목자가 참된 목자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목숨 걸고 양들을 돌보고 양들을 살리는 목자인가? 아니면 직업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삯꾼 목자는 아닌가’를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먹고 살기 위해서 뛰는 삯꾼 목자가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삯이 아닌, 생명을 위해서 뛰는 선한 목자, 참된 목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이 마음 변치 않고 충성하기를 소원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네 번이나 반복하며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말씀하신 대로 선한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마20:28).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1942년 10월 맥아더 장군의 중요한 연락책이었던 리켄배커 대위는 임무 수행 중에 바다에서 조난 사고를 당했습니다. 리켄배커 대위는 7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작은 고무보트를 탄 채, 거친 파도와 싸우며 바다를 표류했습니다. 매일 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그 날도 리켄베커 대위는 다른 7명의 부하들과 함께 배고픔에 지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날아 왔는지 한 마리의 갈매기가 대위의 모자 위에 내려 앉았습니다. 대위는 거의 반사적으로 갈매기를 낚아채 잡았습니다. 그들은 잡은 갈매기로 배고픔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망망대해 절망의 한복판에서 표류하던 대위와 부하들은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조금씩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남은 갈매기 살을 물고기 낚는 미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구조대에게 발견되어 결국에는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은 후로 리켄배커 대위의 마음속에는 늘 한 마리의 갈매기가 살아 있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리켄배커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플로리다 해안 동쪽 기슭의 어느 바닷가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리고 해질 무렵이면 양동이에 생선을 가득 담아 가지고 나가 갈매기들에게 나눠 주곤 했습니다. 갈매기들은 가끔 노인의 모자위에 앉을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었고 이 아름다운 광경은 그가 죽은 후에 그 바닷가에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첫째로 생각나는 것은 갈매기 한 마리의 거룩한 희생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갈매기는 앉을 자리를 잘못 택하였다가 재수 없이 잡혀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리켄베커 대위와 다른 7명의 입장에서 보면 그 갈매기는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희생제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미물이지만, 갈매기의 희생적 죽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모두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죄악의 바다에서 좌초된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 마리의 갈매기처럼 내려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정치적으로 희생되셨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대속물 되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대속물 되어 주신 주님으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든지>와 <말미암아>라는 두 단어입니다. 누구든지 참된 목자 되신 예수님,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되는 줄로 믿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통해서만 멸망치 않고 구원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세상과 달리, 차별도 없습니다. 아무런 제한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신 주님만이 선한목자, 참된 지도자 인줄로 믿습니다.
2. 보호자(To Safe)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짐승들이 양을 해치고 도둑들이 양을 훔쳐가기 때문에 목자들은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 노력 중에 하나가 들판 한 복판에 돌담을 쌓아 우리를 만들어 놓고 밤이 되면 그 안에 양들을 가두어 놓습니다. 그런데 들판에 만든 이 양 우리는 단순히 돌담을 쌓아 만든 우리이기 때문에 사실상 문이 없습니다. 동네에서 양을 키울 때야 울타리도 있고 문도 있지만, 들판에서는 돌담을 쌓아 임시로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문이 따로 없습니다. 그 대신 밤이 되면 양들을 돌담 우리에 다 집어넣고 목자는 돌문 입구에 가로질러 누워 자기 몸으로 문을 삼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목자를 통과하지 않고는 양 우리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자의 몸 자체가 양들을 위한 방어벽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스라엘 목자들은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저녁에 우리로 데리고 들어올 때는 한 마리씩 이름을 부르면서 들여보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목자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마다 David, Peter, Moses, John, Paul, James 뭐 이러한 이름을 각각 붙여주고 저녁이 되어 들판에서 우리에 들어오면 “어이, Peter! 오늘 풀 좀 많이 뜯어 먹었니? 아, John이구나! 오늘은 어땠니? 어려운 일 없었니?”라고 말하며 우리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또 아침이 되면 돌담으로 만든 우리에서 양들을 들판으로 인도하는데, 저녁때와 똑같습니다. “James, 풀 많이 뜯어 먹어라! Paul, 어제는 위험한 곳으로 갔지만, 오늘은 위험한 곳으로 가면 안 된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밖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다보니 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자기의 목자를 알았습니다(14절). 목자가 이처럼 양들을 돌보아 주고 각각의 이름을 불러가며 안전하게 인도하는 그림이 그려집니까? 목자는 양들을 보호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목자, 참된 지도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사랑의 손길로 보호해 주십니다.
국민일보의 <모퉁이 돌> 코너에 매우 충격적인 글이 실려 있어서 소개합니다. 유명한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번 사정권에 들어온 동물은 놓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총을 들고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여 물체를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 산을 올랐으나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했습니다. 사냥꾼이 안개를 헤치고 개울가로 왔을 때, 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냥꾼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커다란 곰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정확히 조준한 후 그 물체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분명히 정확하게 조준을 해서 방아쇠를 당겼는데도 동물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냥꾼은 거듭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래도 물체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사냥꾼은 살금살금 기어 물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간 사냥꾼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커다란 어미 곰은 바위를 든 채 죽어 있었고, 그 곰이 들고 있는 바위 밑에서는 아기 곰들이 물고기를 잡으며 한가로이 놀고 있었습니다. 어미 곰은 아기 곰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위를 든 채 죽은 것입니다. 어미 곰은 총을 맞자마자 본능적으로 새끼들을 보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참된 지도자이십니다(마8:17). 자기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사랑의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40장 11절에서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두 팔로 품어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참된 목자 되신 주님은 우리를 가슴으로 품어주시고 사랑으로 보호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두려움과 걱정이 있습니까? 고민 속에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까? 보호하시는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신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선한목자 되신 주님께서 받아 주실 것입니다.
3. 공급자(To Satisfy)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들을 보호하실 뿐 아니라,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공급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분들이 ‘축복’을 말하면 저속하다고 생각합니다. ‘축복‘에 대한 설교를 하면 수준이 낮다고 말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것을 경건한 생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축복을 사모하는 기독교 신앙을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가난하고 고통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든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아울러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그들의 식물로 풍성히 주셨습니다(창1:29).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저주받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 함으로 저주받은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십자가위에서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청산하고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헤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강조하면서 부요하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결과적으로 저주와 가난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요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축복된 사람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스라엘 목자들은 아침이 되면 양을 위해 문을 열어 주어 넓은 들판에 나가 풍성한 꼴을 먹도록 합니다. 양들은 하루 종일 들판을 다니면서 맛있는 풀들을 뜯어 먹다가 밤에 우리에 들어오는데 우리에 들어오면 목자가 가져다 놓은 맛있는 풀을 또 배부르게 먹습니다. 목자는 항상 양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양을 훔치려는 도적은 어떻게 합니까? 양을 위해 맛있는 꼴을 가져다 줍니까? 아닙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이 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슨 목적을 가지고 도적이 옵니까? 도적질하기 위해서 옵니다. 죽이기 위해서 옵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마귀, 흑암의 세력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양인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놓고 ‘나 몰라라’하시는 분이 아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생명만 건져 주시고 그냥 내 방치시키는 분이 아님을 분명히 믿습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한 부흥 강사목사님이 어떤 교회의 집회에 앞서서 그 교회로부터 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교회 사무직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는데 설교 제목과 본문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본문이 시편 23편이고,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무직원은 제목이 이상하게 들렸는지 “그것이 전부입니까?”라고 다시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맞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사무직원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전부입니까?”라고 되묻는 것입니다. 사무직원의 물음에 목사님이 하도 답답하셔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면 다 됐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하고 크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우리의 인생에 목자가 되신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구원을 주시며 구원받은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필요한 것으로 풍성케 공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 참된 지도자 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음성을 듣는 법
요 10:1-5 / Leland D. Paris 목사(예수전도단 총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한복음 10:1-5.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의 집에서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은 큰 영적 감동이 되는군요. 여러분은 이 땅에서 찬양을 즐기셔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늘 찬양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렇게 예배드리게 된 것을 큰 특권으로 생각하며, 초대해주신 김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조금 전 강단에 올라올 때 다리를 조금 저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49년 전에 미식축구를 하면서 다리를 다친 적이 있는데 2개월 전에 그 부상이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치료를 받고 있는데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대단히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이 제가 하려는 이야기를 이미 경험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회”에 대한 것입니다. 저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저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양으로 비유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믿는 사람을 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농장 일을 해보셨거나 양을 관찰해본 적이 있다면 양이 가축들 가운데서 가장 영리한 동물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양을 예로 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목자를 잘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양처럼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고 그 목소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장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와 다른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7절). 그 말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38절). 빌라도가 그 질문을 얼마나 진지하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한복음 5장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조롱하는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37-38절). 즉 “너희들은 그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개념입니다.
사실 진리는 대단히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매우 쉽게 설명하셨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도 듣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언제나 A B C처럼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자유를 누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탄이 얼마나 우리를 잘 속이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때때로 우리가 진리를 알고자 할 때 사탄은 혼동을 일으켜 잘 알지 못하게 합니다. 사탄은 늘 우리를 속이려 합니다. 사탄은 아담과 이브 이래로 오랫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을 속여 왔습니다.
최근에 저는 여러분의 목사님인 김상복 목사님이 쓴 “마가복음 우선설”(the Priority of Mark)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거기 보니 마귀가 어떻게 사람들을 속이려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거기 보니 약 200년 전에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이라는 학설이 유럽에서 나왔는데,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퍼지더니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중에 18세기에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디이즘(Deism)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디이즘이란 이신론(理神論)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후에 어디론지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학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한 이래로 다시 나타나지 않고 우리와 아무 대화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게는 그런 사상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19세기에 니체(Nietzsche: 1844-1900)라는 사람이 나타나 그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하나님이 하도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죽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지요. 제가 김목사님과 사귀면서 우리에게 공통점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1960년대 중반에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살았더군요. 거기에 템플대학이 있는데 한 번은 제가 그 앞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길옆에 건축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무로 벽을 쌓고 보행자용 길을 만들었습니다. 지나가다 보니 그 대학의 학생들이 그날 배운 것을 스프레이 페인트로 벽에 써놓았습니다. 제 상상으로는 그 글을 쓴 학생이 아마 그 날 철학을 공부했던 것 같아요. "God is dead. Nietzsche." 즉 “하나님은 죽었다. 니체 씀”이라는 뜻이지요. 그걸 읽으니 별로 격려가 안 되더군요. 계속 걸어가다 보니 또 낙서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마 기독교인이 쓴 것 같았어요. 앞의 그 말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던지 이렇게 썼어요. “Nietzsche is dead. God." 즉 “니체는 죽었다. 하나님 씀.” 하나님이 언제나 마지막 말씀을 하시는 분이지요? 사람은 자꾸 뭔가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사람보다 위대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 몇 명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30:21을 봅시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라.” 그런데 하나님은 ‘네 할머니 귀가 듣는다, 네 목사의 귀가 듣는다, 교회 장로의 귀가 듣는다, 이 교회 어느 그룹 사람들만 듣는다’ 하시지 않고, ‘네가 듣는다’ 즉 아주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일대일로 말씀하시기 원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신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저 우주의 위대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주와 그 속의 무수한 별들을 만드신 그분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오셔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음 문을 열어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 제한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게 말씀하시지만 또한 우리의 마음에 조용히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운전하는 도중에 우리 마음에 강력한 음성을 주셔서 그 음성을 듣고 행동하도록 하십니다. 조용한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매우 감동적인 한 구절이나 한두 개 단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예배 중의 찬양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가사 한 구절이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친구들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조금 신중해야 합니다. 제 친구들도 저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많은 조언을 해줍니다. 저는 물론 친구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만 조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친구의 말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직접 확인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에게도 말씀하시지만 교회와 국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 범주에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굳건히 서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 말씀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사역을 하면서 겪은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25년 전에 저는 선교사 훈련센터 부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시아를 여행하고 돌아오니 데이빗 위커슨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분은 1960년대에 문제 청소년들을 계도하기 위해 “Teens’ Challenge”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어 뉴욕에서 성공적으로 사역을 하고 계셨으며, 전국을 다니며 큰 집회를 인도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당시 그 목사님의 사역본부가 텍사스 동부지역에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황량한 사막이 텍사스의 전부인 줄 알고 있지만 텍사스의 동부지역은 산과 들과 호수가 있는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위커슨 목사님은 “선교훈련센터 부지를 찾고 계시다고요?”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며칠 전날 밤에 제가 저희 캠퍼스 뒤뜰을 산책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데이빗, 이제 이 땅은 더 이상 너의 소유가 아니라 예수전도단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목사님께서 이 땅을 쓰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저는 당장 “예!” 하고 싶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고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그런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위커슨 목사님, 며칠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곳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인지 제가 기도로 확인한 후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며칠 후에 만났을 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캠퍼스를 우리가 쓰겠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곳을 구입해 쓰다가 언젠가 당신처럼 캠퍼스 뒤뜰을 거닐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이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니라고 하시면 언제라도 내놓을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생애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수많은 실례들 중의 작은 예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렇게 마련한 텍사스의 캠퍼스에서 지난 25년 동안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훈련을 받고 전 세계에 파송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전 세계 56개 선교기지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동부 텍사스의 예수전도단 캠퍼스를 방문하시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잘 훈련하여 전 세계에 선교사로 보내고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되도록 여러분을 독려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저 가볍게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이 여러분과 함께 있음을 믿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대단히 민감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이 세계 각 곳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국은 오랜 세월동안 어려운 역사적 과정을 겪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9백번이 넘는 외국의 침략을 받았고 가장 최근에는 40년 가까운 세월을 외국의 지배 아래 있었지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에 제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한국은 무척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동안 여러 방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했습니다.
1907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영적 부흥운동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역사적으로 큰 고통에 처해있는 시기였습니다. 그 고통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씨 에스루이스(C. S. Lewis)는 “평화로울 때는 하나님께서 속삭이시지만 위기에는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조상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크게 발전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137개국을 방문하게 하셨는데 제가 방문한 나라마다 이미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선교사들을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13개가 한국에 있습니다. 한국은 국토가 큰 나라가 아닙니다. 인구도 4천5백만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은 세계 10위입니다. 이것은 작은 성취가 아닙니다. 교육적인 면을 보더라도 한국처럼 박사학위 소지자가 많은 나라도 없습니다. 이런 것으로 교만해지기보다 하나님께서 한국을 사용하시기 위해 적절히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략의 대가이십니다. 한국을 준비시키셔서 이와 같은 때에 한국을 부르십니다.
지금까지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파송되었지만 그것은 앞으로 쓰일 선교사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활동이 가장 활발한 기독교 국가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이웃국가 중에는 15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지금 기독교가 왕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수천 명의 한국선교사들이 이미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곳에 진출할 수많은 선교사들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수천 명은 고작 물 한 양동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국인들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마세요. 한국은 지금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앞으로 미칠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986년에 제가 몽고를 처음 방문했을 때 몽고에는 기독교인이 두 명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는 더 많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만난 사람은 둘 뿐이었습니다. 소련 연방이 망한 후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몽고에 들어가 지금은 큰 수확을 걷고 있습니다. 현재 몽고에는 2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가장 가까운 북한은 어떻습니까? 북한을 위해 여러분 보다 더 기도하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전 세계를 둘러보았지만 한국처럼 기도원에서든 산에서든 기도를 많이 하는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제가 언젠가 어느 분의 설교를 들었는데 요점은 기도가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며 기도란 단지 심리적 위안을 위해 혼잣말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생각을 거부합니다. 내 하나님은 나와 대화하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적을 향해 나아가게 하십니다. 전 세계로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역을 계속 충성스럽게 행하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가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주의하여 들으십시오. 그럼으로써 여러분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요 10:1-6 / 이재철 목사
요한복음 10:1-6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한 곳이 많습니다.
시편 23편이 그렇고, 오늘 본문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양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 구체적으로 인도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왜 우리를 양으로 비유했을까요?
양은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덩치는 크지만 방어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쉽게 곁길로 빠지고 맹수에게 물려가도 소리만 지릅니다.
양은 방어능력이 없지만 어떤 동물보다 보호받고 건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목자의 인도함을 받을 때 보호받고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함과 보호함을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목자는 다른 양과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 양의 귀에 표시를 해놓습니다.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자기 양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양입니다. (3절)
주님의 양은 주님께서 부르실 때 알아 듣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합니다.(5절)
양은 10m 앞을 보지 못하는 심한 약시입니다. 대신 청각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양이면 주님의 음성을 알아 듣습니다. 그러면서 인도함을 받습니다.
주님의 양은 발목에다 표시합니다.
4절 말씀에 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은 다음에는 목자를 따라갑니다.
주님은 자신의 양들에게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발로 주님을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저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바리새인을 말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양이 아닙니다.
왜 이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할까요? 이들은 담 넘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1절) 강도는 몰래 훔쳐가기 위해 들어옵니다.
▶ 목자들은 특성이 있습니다.
☞ 첫째,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3절)
목자들은 목장 식구들을 위해, 그 가족과 자녀들을 위해 매일 기도합니다.
☞ 둘째, 앞서가서 본을 보여줍니다. 앞서가면 양들이 따라옵니다.(4절)
삯꾼 목자는 양들을 앞에 내세우고 뒤에 갑니다.
목자가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목장 식구들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흉내 낸다고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진심으로 축복하고, 기도하고, 섬기면 양은 잘 따라옵니다.
양이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따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삼손과 같이 됩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본인 뜻대로 살았기 때문에 두 눈이 뽑히고, 머리털은 깎이고, 힘을 잃고 맷돌 돌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두 가지를 책임지십니다.
☞ 우리를 최선의 것으로 이끄십니다.
☞ 끝까지 우리 생명을 보호하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십니다.(시편 23:4)
목자의 구부러진 지팡이는 양이 곁길로 갈 때 가지 못하도록 이끌어주고, 웅덩이에 빠졌을 때 목을 걸어 건져냅니다.
막대기는 맹수가 나타났을 때 맹수의 머리를 내려칩니다.
멀리 있는 양이 맹수에게 당할 때는 물매를 던져서 양을 보호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내어서 우리를 살려주신 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한 마리 잃은 양에 대해 나옵니다.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는 것은 경제원리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한 마리를 찾기 위해 힘을 씁니다.
왜 한 마리 양을 찾기에 힘을 씁니까? 내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잃어버린 자녀를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습니다.
양은 반드시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인도함, 보호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음성으로는 잘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 어떻게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를 사모하십시오. 부흥사경회를 사모하고 참여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내 자녀, 내 가정은 우리가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집에 오시자 주님 발아래 앉아 말씀에 집중하였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한 음성을 들읍시다
요한복음 10:1-6, 욥기 37:1-5 / 안효관 목사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소리들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자는 순간까지 온갖 소리들이 우리 귀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 소리들 가운데는 듣기 좋은 것도 있고, 듣기에 짜증이 나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유익한 소리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전혀 무익한 것도 있습니다. 어쩌면 조용하다는 것이 이제는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들려오는 자동자의 엔진 소리와 경적 소리, 교회당 옆을 지나가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종알대는 소리, 이제 우리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 되어버린 텔레비전에서 들어오는 소리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고함치며 싸우는 소리, 심지어는 깊은 밤 조용하게 잠들려는 순간 짜증나게 들려오는 폭주족의 오토바이 굉음소리까지. 우리는 온갖 소리들 속에 파묻혀 산다고 표현해도 절대로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모든 소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우리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아름다운 소리들도 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틀어놓은 조용한 찬송가 경음악 소리,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시골에서나 들을 수 있는 새벽녘의 닭울음소리, 자연의 향긋함을 준해주는 여름의 매미나 풀벌레들의 소리, 서로 이해하고 품어주며 미소지으며 건네는 넉넉한 웃음소리, 가끔씩 바닷가에 나가서 듣는 파도소리. 그런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소리들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소리들은 자주 자주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더 중요한 소리가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음성, 거룩한 음성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해야할 가장 시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함으로 많은 혼란과 시행착오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 - 거룩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오늘 신약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절) 양들은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자기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가지 않습니다. 만일 자기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요한복음 10: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당하게 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 양은 목자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한 곳에 방치되어 굶주림과 목마름고 야수의 위협에 직면하여 죽게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다른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우리도 삯군을 따라간 양처럼 우리의 생명을 도적질 당하고 죽임 당하고 멸망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리에는 생명의 꼴이 없습니다.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원수 사단 마귀가 우리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 바른 신앙인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 귀를 하나님께로 향해 열어놓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분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누리게(10:10)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찰스 스탠리(Charles Stanley) 박사가 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란 책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4가지 방법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물론 스탠리 박사가 제시한 그 4가지 방법 말로도 굉장히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조이 도우슨(Joy Dawson) 여사는 하나님께서는 24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두 가지 방법으로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으로 스탠리 박사가 제시한 네 가지 방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첫 번째 방법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또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실 때, 그리고 성경을 통해 들려지는 설교를 들을 때에 여러분의 영혼 깊숙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신앙인은 그 어떤 것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과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글씨를 읽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거룩한 음성으로 우리 귀에 들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게 안되면 신앙생활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두 번째 방법은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신앙인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의 귀에 대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속삭이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욥바라는 성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베드로더러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서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행 10장)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얼굴 한번 본적이 없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교회의 일꾼들 가운데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보내라고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나바와 바울을 최초의 선교사로 소아시아에 파송합니다.
그 성령께서 오늘은 우리 속에서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그 성령은 오늘도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기보다 인간적인 욕심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려지기 위해서는 욕체의 욕심의 소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세 번째 방법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해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사용하여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 다윗이 범죄했을 때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 죄악으로 가득찬 니느웨를 회개시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도 가기 싫어하던 요나를 보내어 '회개하라'는 말씀을 외치게 하셨습니다.
-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눈에 비늘이 씌워진 상태로 기도하고 있던 청년 사울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아나니아라는 선지자를 보내어 안수하게 하셨습니다.
아모스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심판을 하더라도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을 외치게 한 다음에 심판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때로 나에게 선지자와 같은 존재임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내가 만난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네 번째 방법은 환경을 통해서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자연적인 현상과 같은 것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잘 풀리던 사업이 갑자기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평생 동안 병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그는 그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바울은 자신의 병든 약한 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귀한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그 약한 몸 때문에 자고하지 않게(교만하지 않게)된다'는 하나님의 뜻(음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병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상황(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내 자리,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을 조용히 묵상하면 우리는 그 속에서 거룩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음성과 마귀가 우리 들려 들려주는 유혹의 소리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하와에게 뱀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하와에게 이런 말을 해 줍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너희가 선악과를 따 먹어도 죽지 않을 거야. 오히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거야."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하와는 뱀의 그 유혹하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선악과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선악과를 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절대로 넘보아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의 소리를 듣고 난 다음 쳐다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죄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마귀가 우리 귀에 들려주는 음성이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유혹하는 음성이요 죽음으로 인도하는 음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절도요 강도"가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부르는 음성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마귀의 유혹하는 음성을 구별해낼 수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으면 마귀의 음성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뭔가 엄청난 것을 줄 것처럼 말하면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하와를 생각해 보세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말입니까? 사단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돌덩이로 떡을 만들어라. 그러면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들이 너를 최고로 여길 것 아니냐?' 그렇게 유혹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발가락 하나 상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느냐? 그러면 너는 대단한 영웅이 될 거야?' '나게 딱 한번만 절해봐. 네가 갖고 싶은 것 다 줄 수 있어.'
여러분, 참으로 달콤한 유혹 아닙니까? 우리는 너무 자주 그 달콤한 유혹에 정신을 빼앗기고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사단의 음성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음성을 듣는 결과는 언제나 멸망이요 실패요 불행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는 거룩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지 않으셔요. 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지요?"
여러분, 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리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데,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우리 영적인 귀에 들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파수와 우리의 주파수가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채널에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라디오를 듣기 위해서는 그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포항 극동방송 FM 방송을 듣기 위해서는 90.3MHZ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주파수를 가지고는 절대로 그 방송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긴 들었지만 예수님과 주파수가 맞지 않아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내 육신의 음성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내 생각의 소리, 내 욕심의 소리, 내 정욕의 소리, 내 절망의 소리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깨끗한 마음에 들려옵니다. 내 욕심의 소리와 정욕의 소리로 더럽혀진 마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따라오라고 부르고는 앞장서서 갑니다. 그런데 양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목자를 따라서 그리로 가는 것보다 저쪽으로 가면 훨씬 더 좋은 풀이 있는데' 그러면서 목자 따라가기를 거부하면, 그 양은 이리나 늑대의 밥이 되기 십상입니다. 양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무조건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고 내가 먼저 판단해 버립니다. 그런 마음에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내 생각이나 내 사정에 대한 불안한 마음, 내 욕심대로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런 것들을 먼저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해야 합니다. 비워져 있는 곳에 말씀과 하나님의 음성이 채워집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음성을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께서 즐겨 들으시던 라디오가 한 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안 계실 때면 종종 그 라디오가 내 차지가 됩니다. 그러면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우리가 좋아하는 어린이 프로를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해서 텔레비전이 들어왔습니다. 저희 동네에서 가장 먼저 저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기 때문에 저녁만 되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밤 늦게까지 보고 가곤 했습니다. 텔레비전이 들어온 이후에는 라디오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라디오와 멀어지면서 한 가지 잃어버린 게 있습니다. 상상력입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는 온갖 상상력에 풍부했습니다.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기 때문에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맞게 상상력을 동원하여 상황을 설정하고 내 나름대로 그 세계를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모든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에 상상력이 필요 없습니다.
텔레비전 시대를 사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 이유도 그런 영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귀로 듣는 훈련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뭔가 눈에 보여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고 꿈에 보여지는 것을 더 의존하게 됩니다. 뭔가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을 보아야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도 혹 그렇지 않나 생각해 봅시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음성인데 우리는 우레와 같은 음성을 들으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엘리야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온 땅을 뒤집어엎는 지진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고, 모든 것을 삼킬 것같은 맹렬한 불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중요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있는 고요한 자리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세미한 음성을 들을 만한 고요한 자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하나님과 나만이 만나는 고요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도를 할 때도 내 이야기만 쏟아놓고, 내 요구만 쏟아놓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틈도 주지 않고 뒤돌아 가버리는 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기도할 때도 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고요한 중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거룩한 음성을 듣기 위한 시간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은 '위엄을 울리는 음성이요, 그 음성을 들을 때에 번개 빛이 발하는 것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은 세미한 음성이지만, 그 음성이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순간 그것은 우레와 같은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귀에는 세미한 음성이지만, 그 음성이 우리 마음에 들어간 후에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음성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음성, 우레와 같은 음성을 들으려 합니다. 그러니 그 음성이 들려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거룩한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음성이 우리를 영적인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이 기갈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리와 늑대에 의해서 유린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신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앙가족 모든 식구들은 늘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들으며 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영적인 감각에 민감하라
요 10:1-6 / 박찬길 목사
타이거 우즈라는 분을 잘 아실 겁니다. 골프 황제라고 하지요. 현재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14번 우승했고, 각종 대회에서 65번 우승했다고 하니까 대단한 분입니다. 우즈가 대회에 나온다고 하기만 해도 그 대회는 성공했다고 할만큼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 분입니다. 이 우즈가 지난해 무릎 수술을 했습니다. 그래 한동안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다가 지난달에 필드에 복귀했는데 팬들에게 실망을 주었습니다. 2등 3등을 한 것도 아니고 32강 전에서 탈락했습니다. 오늘도 PGA 투어 마지막 날인 모양인데 우승권에서 멀어진 것 같습니다.
골프의 역사를 새로 쓴다는 타이거 우즈가 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느냐 하면 감각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릎 수술을 하느라고 8개월 넘게 휴식기를 갖다가 보니까 감각이 떨어졌어요. 우리 나라의 이승엽 선수도 감각이 떨어져서 제 실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감각이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감각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감각이 있지요? 영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통하는 영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려면 영적인 코드가 맞아야 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은혜를 받게 되고,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예배를 잘 드리게 되고,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사람을 잘 만나게 되고, 자녀들도 잘 키우게 되고, 일도 잘하게 되고, 사업도 잘 하게 되는 겁니다.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신앙이 병들지 않게 되고,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영적인 감각은 얼마나 중요하고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합니다. 시편 23편이 대표적인 본문이고,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0장이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을 가만히 보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문지기가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불러서 이끌고 나가는데 양들은 목자를 따라갑니다. 그 이상하지요. 양은 10m 앞을 보지 못하는데 목자를 따라갑니다. 이유는 하나예요. 목자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감각이 발달되어 있어요. 양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듣는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목자의 음성을 잘 들을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실력을 높일 수가 있을까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는 성도는 여기에 관심이 많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주신 몇 가지 영감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말씀하시는 자리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하지만,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예배이지요.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참석해서 예배를 잘 드리면 누구든지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기만 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으니까 말씀을 자꾸만 들으면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믿음이 생기면 영적인 감각이 생기게 되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목회하면서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배에도 자리에 따라서 영적인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음악회에 가보셨어요? 음악회에 가면 자리에 따라서 S석, A석, B석, C석이 있지요. 차이가 뭘까요? 좌석에 따라서 감상하는 질이 다릅니다. S석에서는 무대가 제일 잘 보이기도 하고 음향도 제일 잘 들리기 때문에 감상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C석은 무대에서 제일 멀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고 들리는 것도 차이가 납니다.
예배당에도 영적인 S석, A석, B석, C석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여러분이 앉으시는 자리에 따라서 영적인 감각이 다르다는 것도 아십니까? S석이나 A석과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영적인 감각이 탁월해집니다. B석이나 C석과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영적인 감각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느냐에 따라서 은혜의 정도가 달라지고 영적인 성장의 속도가 달라지고 영적인 감각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지난달에 한국의 기도원에 갔을 때에 함께 가신 목사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 목사님은 한국에서 목회하실 때에 목회자 사모 영적 세미나에 종종 참석하셨다는 거예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 제가 여쭈었지요. 예전에 참석하셨을 때와 이번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떠시냐고 했더니 다르다는 거예요. 이번에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거예요. 제가 궁금해서 다시 물었어요. "목사님, 이번 영적 세미나가 지난번과 다른 것인가요?" 똑같답니다. 이상하잖아요. 영적 세미나는 똑같은데, 은혜는 다르니 무엇인가 원인이 있지 않겠어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간단하게 대답하셨어요. 자리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아무 자리나 앉았다는 거예요. 목회자들이 4~ 5천명이 모이는데, 이번에는 4,500명이 모였어요. 그 많은 목회자들이 서로들 앞에 앉으려고 30분씩 일찍 와요. 어떤 분들은 아예 그 자리에서 이부자리를 펴놓고 자요. 그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그 자리에서 자고..., 그러니 누군들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있나요. 지정 좌석인데..., 그래 이 목사님이 중간에 앉기도 하고 뒤에 앉기도 하고 어떤 때는 2층에 앉기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주최측에서 앞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지 못하게 했어요. 방바닥에다 이렇게 써 놓았어요. "여기에는 앉지 마세요. 북가주지역 목회자 자리" 맨 앞에다가 이렇게 써 놓아서 다른 목사님들이 앉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 여기서 간 목회자들이 그 자리에 앉았지요. 맨 앞자리에 앉으니까 얼마나 은혜를 충만히 받았는지 모릅니다. 매 시간 시간마다 은혜를 받는데, 은혜가 충만했다. 성령이 충만했다는 표현을 그대로 경험했어요. 자리에 따라서 은혜가 다르고, 자리에 따라서 영적인 감각이 달랐습니다. 자리가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앞으로 우리 좋은교회 교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주일예배, 찬양예배 속회예배, 금요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세요. 예배라는 소리만 들으면 부지런히 참석하세요. 영적인 S석, A석에 앉는 데에 욕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열심을 내서 예배에 자꾸만 참석하면 저절로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꾸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지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꾸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운동 선수도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영적인 감각에 민감해지려면 꾸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들쑥날쑥해서도 안 됩니다. 오랫동안 쉬셔도 안 됩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꾸준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어제 교우들과 테니스를 했는데, 다들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조나단 형제, 한정현 형제가 우리교회 코치인데, 어쩌면 그렇게 잘 합니까? 기가 막힙니다. 저는 이제껏 테니스를 했지만 그렇게 잘하는 사람과 경기를 하기는 처음입니다. 에거시와 경기한 것 같아요. 다음에는 써브를 어떻게 받아야 되는지 고민이 돼요. 그런데 조나단 형제도 처음에는 실수를 하더라구요. 오랜만에 하는 것 같았어요. 감각이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아마 모르긴 해도 일하느라고 그 동안 들쑥날쑥한 것 같아요. 그 틈을 타서 우리팀이 1세트에서 이겼지요. 나중에는 그 형제가 감각을 회복해서 우리팀은 6:1로 졌습니다. 남은 경기에서도 모두 졌어요. 감각이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감각에 민감해지려면 꾸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특별한 비법이 없습니다. 꾸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루빈스타인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요. 이 분이 참으로 의미있는 말을 했어요. "하루 연습을 쉬면 내가 그것을 알고, 이틀을 쉬면 내 친구가 알아내고, 삼일을 쉬면 대중이 알아냅니다"
우리는 꾸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쉬지말고 기도하라.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했으니까 언제 어디서나 꾸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기도해야 하고, 집에서도 기도해야 하고, 직장에서도 기도해야 하고 비행기를 탈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갈 때에도 기도해야 하고, 일어날 때에도 기도해야 하고, 잠잘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이 움직일 때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꾸준하게 기도할 때에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쉬어도 안 됩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깨어있다고 해도,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도, 기도를 쉬면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는 거예요. 각종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기도를 쉬면 영적인 능력이 없어서 영적인 감각이 없어지는 거예요. 마음으로는 되고, 머리로도 되고, 말로도 돼요. 은혜를 받았고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모두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능력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영적인 감각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나에게서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예요. 한국에서 목회할 때에..., 15년 전쯤 되는 것 같아요. 지방회 목사님들이 성지순례를 갔어요. 로마, 이집트, 이스라엘, 영국, 영국에 가면 감리교회의 죤 웨슬리가 회심했던 올더스케잇 거리가 있어요. 모처럼 해외를 나갔는데, 한 3주를 간 것 같아요. 주일은 두 번이 속해 있었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성지순례이니 얼마나 은혜가 있었겠어요. 모든 일정을 마치고 교회 와서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 기도가 안 되는 거예요. 기도가 안 되니 설교도 안 되지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아요? 성지순례를 다녀온 목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의 길을 걸었는데 왜 기도가 안 되고 설교가 안 되나요?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은 아실 거예요. 요즘은 좀 다르겠지만 예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여행계획을 세우면 얼마나 많이 세우는지 몰라요. 일정이 얼마나 빠듯한지 몰라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오전에는 어디에 가고 오후에는 어디에 가고..., 그 일정을 모두 소화하려면 보통의 체력 가지고는 안 됩니다.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예요. 모처럼 성지순례 계획을 세웠으니, 예수님 발자취를 얼마나 많이 가고 싶었겠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밤까지..., 시내산에 올라갈 때는 저녁 먹고 밤에 올라가야 합니다. 시내산 정상에 놀라가서 예배를 드리고 조금 있으면 해가 뜹니다. 그것을 보고 사진 한 장 찍고 덥기 전에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니 아주 강행군입니다.
일정이 빠듯해도 목사님들이기 때문에 처음 몇 일간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몸이 피곤하고 지치고 힘드니까 호텔에 들어와서 잠부터 자는 겁니다. 잠을 자야 다음날 또다시 떠나잖아요.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야 성지순례 기간인데..., 이런 마음을 가진 것 같아요. 여행 중에 교회에서처럼 30분 1시간 하는 시간이 없다보니 자연히 기도를 쉬게 되고..., 그렇게 20일을 하고 나니까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영적인 감각이 무뎌져서 설교가 안 되더라는 겁니다. 교인들에게 미안했어요.
여러분, 성도는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기도를 쉬면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1장 17절에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으니까 교회에 나와서 꾸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모임에 꾸준하게 참석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요즘 금요기도회가 얼마나 뜨거운지 모릅니다. 간절히 부르짖고 사모하면서 부르짖고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데, 우리가 이렇게 기도한 적이 기도원에서 밖에 없었어요. 무릎꿇고 손들고 일어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역사하시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릅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나면 영적으로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기도회에 참석한 교우들을 보면 은혜가 충만한 스데반의 얼굴이에요.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금요기도회에 각종 은사와 이적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기대하시고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지는 비결은 꾸준하게 기도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성도가 언제 어디서나 꾸준하게 기도하면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질 때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는 이런 은혜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영적인 감각이 민감하지 않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나 여건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영적인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것은 나와 친한 사람 때문이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아서, 가정 여건이 좋지 않아서, 목사 때문에, 교인 때문에, 교인에게 상처를 받아서 영적인 감각이 민감하지 않다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적인 감각이 민감하지 않는 이유는 나 자신 때문입니다. 내 신앙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는 내 안에 보이지 않는 자아 때문입니다.
보세요. 영적인 감각이 민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꾸준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외부의 환경 때문입니까? 내가 믿음이 없어서입니까? 오늘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은 환경이나 여건이 좋아서 나오셨나요? 믿음이 있어서 나온 거지요. 기도하지 않는 것이 게으르거나 바쁘기 때문입니까? 내가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서입니까? 금요기도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한가해서 나온 거지요? 은혜를 사모해서 나온 거예요.
신앙생활의 적은 내 자신이에요. 내 자신 안에 있는 자아. 내 자신 안에 있는 무지, 완고함, 시기, 질투, 자기 확신..., 바쁘게 만드는 자아가 내 신앙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마귀가 심어준 게으름, 불신, 비판, 비교의식, 똑똑함..., 똑똑한 사람일수록 변명이 장황하다는 거 아시지요. 말이 많아요. 똑똑한 사람일수록 이유가 많아요. 뭔 사연이 그렇게 복잡한지, 똑똑하니까 말이 많은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 안에 형성된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견고하게 자아의 둑을 만들어 놓았는지 모릅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이중 삼중 사중으로 견고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여리고 성보다 더 크고 더 높이 건설해 놓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밖으로 철책을 설치해서 교인들이 옆에 가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찬바람이 생생 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오늘 이 시간에 이 모든 것을 무너트리기를 바랍니다. 박살내기를 바랍니다. 폭파 시켜버리기를 바랍니다. 그거 제거해야 되는 거예요. 영적인 감각을 가로막는 자아를 제거해야 영적으로 민감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바쁜 것이 나의 영적인 감각을 민감하지 못하게 방해한다면 바쁜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제거해야 합니다. 바쁘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에요. 공부하느라고 바쁘세요. 일하느라고 바쁘세요. 돈 버느라고 바쁘세요. 자녀 교육하느라고 바쁘세요. 다 좋은 것이 아니에요. 바쁜 것은 무조건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니에요. 바빠서 내 영적인 감각이 민감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마귀가 여러분의 영적인 감각을 둔하게 만들려는 속임수입니다.
욕심이 영적인 감각을 민감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라면 욕심을 내 마음에서 뽑아버려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했으니까 욕심을 뽑아 버려야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아야 영적으로 죽지 않는 겁니다. 우리 마음 안에 영적인 감각을 민감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 어떠한 욕심은 이 시간에 다 뽑아버리기를 바랍니다. 제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베이에다가 모두 던져버리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영적인 감각이 둔해지면 영적인 문둥병자입니다. 문둥병이 뭔가요? 눈이 썩어 들어가고 코가 썩어 들어가고 손발이 짓물러서 썩어도 감각이 없는 거 아닙니까? 구약성경에서 문둥병은 저주받은 병인데, 요즘도 영적인 감각이 없으면 저주받은 사람이 되는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감각은 너무나 중요하고 중요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싸인을 보내실 때마다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려고 할 때에 빨리 깨닫고 달려가면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감각에 민감하셔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 믿으면서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지기를 원합니다. 예배드리는 데에 열심히 참여하고 꾸준하게 기도함으로, 내 안에 가로막는 것을 모두 제거함으로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지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양과 목자
임덕순 목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동물은 양입니다. 그들은 양과 함께 살아온 유목민족이라서 양에 대해서라면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누가 양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금방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옛날부터 소를 키웠고 강아지를 키웠지 양은 길러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양과 염소도 구분할 줄 모릅니다. 만약 주님이 강아지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인데, 양에 대하여 말씀하시니까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혹시 양이라는 것 때문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분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라고 생각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인과 짐승과의 관계를 비유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짐승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특성이 무엇이냐 하면, 주인은 자기의 소나 개를 알아보고, 또 그 소나 개도 자기 주인을 잘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주인 놔두고 낯선 사람을 따라가는 개는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양은 더욱 특별하답니다. 양은 자기 주인의 음성을 정확히 알아들으며 절대로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 일이 없답니다. 이상한 데로 가다가도 주인이 부르기만 하면 금방 달려오는 것이 양이랍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성될 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에서 40년 목자생활을 했던 모세를 세워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길이 열렸고 먹을 것이 생겼고 마실 물이 주어졌습니다. 가야할 시간과 길을 하나님이 정하셨고 그들은 순종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을 섬기다가 침략을 당하고, 나라가 망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등 모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살 수 있다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에 빠져 있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당장에 가던 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은 알아듣는 훈련이 되어있었습니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율법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에게서 발견하신 사실은, 그들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오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메시아가 오시면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먹은 이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마5:11)고 예고하신 기적들을 행하셨고 놀라운 교훈들을 가르쳤지만 직접 듣고서도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만 청종하고 따라갔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표적으로 보여주고 말씀으로 가르치고 책망하셔도 돌아서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타까우셨습니다. 자기 주인의 음성을 들었으면 돌아와야 하는데 돌아서지 않습니다. 끝까지 고집대로만 갑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그래서 주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양을 본 적이 있느냐, 그 목자의 양이 아닐 경우에만 그렇다. 그러니까 내 음성을 들을 줄 모르는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책임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 어린이 유괴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느 엄마가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며칠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는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정신이 온통 아이한테만 쏠려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아이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낯선 사람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엄마는 미친 듯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가는데, 아이는 대답이 없습니다. 정신없이 달려가 아이를 보니 자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비슷하게는 생겼는데 자기 아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엄마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 엄마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그처럼 속 타는 심정을 가진 분이 또 한분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잃은 자를 찾는 일이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내가 잃어버린 그 사람이구나’ 하고 달려가며 이름을 부르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그를 끌고 가는 사람을 알아보니 강도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좋아라고 따라가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주님은 답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양을 치면서 사는데, 풀이 많을 때는 집 주변에서도 먹일 수 있지만 건조한 시기가 되면 집에서 아주 먼 곳까지 이동해서 양을 먹여야 합니다. 그곳은 너무나 멀기 때문에 매일 집에서 양을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서, 들판에 공동으로 양 우리를 짓고 밤에는 거기에 모아놓고 문지기에게 맡긴 후 쉬러간답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양을 훔치려는 도둑들이 문지기가 있는 곳에서 먼 쪽의 담을 넘어 들어가서 양을 훔쳐가는 일이 있답니다.
아침이 되어 목자가 왔습니다. 목자는 담을 넘어 들어가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양을 잡으러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문에 서서 자기의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하나씩 우리에서 나와 목자 곁으로 모입니다. 그러면 목자는 앞서 다시 초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공동으로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다른 사람의 양도 섞여 있지만, 이 목자의 양만 이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를 따르지 않고 남아있는 양은 그 사람의 양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고 도리어 영혼의 도둑과 강도들인 거짓선생을 따라가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과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의 음성만 들어도 압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하나씩 잡으려고 쫓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만 부르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오는 양만이 목자의 양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엄청난 기적을 보고, 그의 놀라운 가르침을 듣고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이 부르면 부를수록 더 멀리 가버리는 그들이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게 분명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두 부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당시 유대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양의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해서 다 목자가 아닙니다. 그중에는 우리의 담을 타고 넘어가서 남의 양을 훔쳐가려는 도둑도 있습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다 도둑입니다. 도둑은 정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
예수님께서 “진실로진실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내가 분명히 말 하건데,”라는 강조의 의미입니다. 당시의 랍비들, 선지자들, 제사장들,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지 않고 자기들의 물질과 권력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가 아닌데도 목자인체 하고 양들을 착취하고 있으니 그들은 양의 문을 통하여 들어간 것이 아닌 담을 타고 넘어간 자들이요 강도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영혼의 도둑들을 향하여 너희는 도둑놈이야 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주님은 자기백성을 구원하려고 오셨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영혼까지 책임지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최소한 주님의 양이라면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느냐 하면, 목자의 음성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따라가다가도 목자가 부르면 가던 길을 돌이켜 목자에게로 달려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라면, 너희가 하나님의 백서이라면, 내 말을 알아듣고 따라와야지 거짓으로 유혹해서 너희 영혼을 착취하는 거짓선생만 따라가서 되겠느냐? 그런 사람은 내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목자가 아니라 자기의 인기와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들로 결국은 사람들의 영혼을 갉아먹는 도적이었습니다. 그에 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격적인 헌신을 하셨고, 제자들에게도 인격적인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과 입는 것까지 생활 전체를 주님께 의탁하는 신뢰를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얼마나 계산적이고, 나다나엘이 얼마나 정직한 사람인지 다 알고 계셨고, 그들의 약한 부분을 하나씩 고쳐주셨고 세워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랍비들의 달콤한 위로에 비하여 삶을 바꾸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듣기에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왜 당시의 사람들은 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따르지 않았을까요? 사실은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못들은 체 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대로만 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답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모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을 좋아했고 즐겁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진리야,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야 이론으로서는 완벽하지만 그렇게 살면 곤란한일이 굉장히 많아질테니까, 못들은 것으로 하지 뭐,”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는 아닌가요?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설교는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이론으로 치부해 버리려 합니다.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이것은 하나의 이론이고 원리일 뿐이야,”
이렇게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재해석해 버리고, 주님의 가르침을 등지고 처세에 능한 랍비들의 가르침을 따라 가버렸습니다. 일단 세상에서 살기에는 랍비들이 가르치는 처세술이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존경과 이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므로 사람들이 쉽게 따라올 수 있는 것,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가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기 욕심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를 만들어 주었고, 사람들은 그런 가짜 진리를 만들어주는 거짓 선생들을 좋아하며 따랐습니다.
요즘 유명한 이단이 한국교회에 나타나서 가르치기를 “한번 용서받은 후에는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다시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꼬인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 이단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잠깐의 편의를 위해서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을 주저하고 거짓 선생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양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결국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의 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양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하고 미련하고 길을 잘 잃어버립니다. 주님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하고 인도가 필요한 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양으로 태어났으면서 제가 사자인줄로 착각하면 망합니다.
다윗이 원수에게 쫓기면서도 편안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사자인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는 한 마리의 양인데 자기에게는 보호하고 인도해 주는 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자기스스로 살려고 할 때에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한 마리의 양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손안에 자신을 맡길 때 그는 편안하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양 같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고 복잡한지, 따지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다 해석하고 평가하려고 하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잘난체 해도 결국은 양이고, 여호와만 우리의 목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상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지팡이와 막대기 아래 있는 양일 때 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내 운명의 책임자가 아니라,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맡기기만 하면,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나의 길을 인도하시고 나의 필요를 세세한 부분까지 채워주십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형편과 처지가 똑같은 사람은 없고 모두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각 사람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아시고 필요한 것을 채우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참 목자이신 주님께 의지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분별해 듣고 돌이키기를 요구하십니다.
내가 생각할 때 아무리 이 길이 완전하고 많은 유익이 있어 보여도, 목자가 그길로 가지 말라고 하면, 당장에 돌아서야 하는 것이 양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목사의 직분을 받았다는 한상렬이라는 사람이 북한에 밀입북해서 “이명박이야 말로 천안함 살인 원흉”이라고 제 나라 대통령을 모독했고, "남북관계를 파탄시킨 이명박 정권의 반통일적 책동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목숨 걸고 왔다" "이명박이 남조선 동포를 속이고 반민주·독재, 반자주·예속화, 반자연·환경파괴를 일삼고 있다"고 비난한 반면에, "북녘 조국은 진정으로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이번에도 전쟁 위기감 속에서 평화 의지가 분명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녘 동포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답니다.
그 사람은 통일에 대해서도 “이명박은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떠들어댔다. 한마디로 흡수 통일하자는 셈"이라며,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은 악한 것이고 공산주의로의 통일이 선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목사라고 사람을 가르친답니다.
이렇게 무수한 선생들이 제각기 다른 소리로 양들을 부르고 있다면, 양들은 도대체 어떤 소리가 맞는 줄 알고 따라가야 합니까? 여러분,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 안에는 기본적인 분별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그러나 잘못된 소리는 정욕을 부추기고 분노를 부추깁니다. 그 소리는 정신을 흐리게 만들어서 혼란에 빠뜨립니다. 우리는 모든 진리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입력된 것이 있어서 무엇이 바른 것인지 아닌지는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요일 2:20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은 어느 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구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양은 제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제 목자의 기분도 알아차립니다. 타인의 음성에 속아서 따라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음성을 들으면 도망칩니다. 누군가가 뭐라고 이야기할 때, 뭔가 아닌 것 같기는 한데 확실히 모르겠을 때는, 이미 받은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정욕을 부추기며 유혹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닌데도 당장에 돌아서지 못하고 미련을 가지고 머뭇거리면 결국 영혼을 도둑맞게 됩니다.
넷째로, 주님은 제 발로 주님을 따라올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4)
목자는 양을 초장으로 안고 가서 양의 입에 풀을 넣어주지는 않습니다. 목자는 양을 불러낸 다음에 앞서갑니다. 그러면 양이 스스로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과 주님이 친히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금방 따라가는 양도 있고 늑장을 부리다가 따라가는 양도 있겠지만 양들은 다 목자를 따라갑니다. 만약 목자를 따라가지 않는 양이 있다면, 그는 이 목자의 양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양이라면, 스스로 앞서가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양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눈앞에서 직접 뵙고, 그 놀라운 가르침을 귀로 듣고,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끝내 주님을 따르지 않은 수많은 유대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요6장39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200회 이상 “남은 자”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남은 자가 누군가 하면,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무리를 말합니다.
앞으로 교회가 더 타락하고 부패하더라도 진짜 주님의 백성은 건재할 것입니다. 시대가 혼란스러워서 주님의 양이 아닌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자기 취향대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마치 교회가 다 부패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런 혼탁한 시대에도 주님의 양은 오직 주님의 말씀만 따르며 순결하게 신앙생활 하게 되어있고,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남은자라고 했으며, 그런 혼란한 시대에도 주님은 자기 양은 하나도 잃지 않고 책임져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계획이나 사역은 실패가 없습니다. 구원할 자는 구원하시고 버릴 자는 버리십니다. 여러분이 주의 양이 맞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따르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이익 손해 따지지 말고 따르십시오. 그러면 풍성한 삶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 좀 더 알아보자고 똑똑한 체 하지 마십시오. 양들은 그런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양들은 목소리가 이상하면 바로 도망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니거든 도망치십시오. 이단에는 누가 빠지는지 아십니까? 지적인 호기심이 지나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자기 머리로 하나님을 다 알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들, 택하신 사람들은 처음부터 말씀에 진지하며 혼탁한 시대에도 변함없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따르는 주님의 양들로서, 주님이 책임지시는 은혜와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당당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
임덕순 목사
지난 주일과 같은 본문을 다시 한 번 상고하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더라.” 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양이라는 너희가 어찌하여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느냐는 의미로 예수님이 양과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실 메시야를 대대로 믿고 기다려왔으면서도, 메시야가 오시면 하신다는 기적을 행하고 들어보지 못한 교훈으로 가르치시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들어서 쉽게 말씀하지만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인지를 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즘 아이들은 여러 개의 학원에 다니는데 학교와 학원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학교의 선생님은 학생들이 바른 인격자가 되게 하려고 성적과 관계없는 도덕과 윤리도 가르치고, 잘 못하는 학생에게는 회초리도 때리면서 생활을 지도합니다. 그러나 학원은 인격을 기르는 곳이 아니라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얼마의 대가를 주고 과목을 배우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학원의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는 사제의 관계보다는 거래관계가 됩니다. 아이들은 수입 때문에 자기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지만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선생님은 두려워합니다. 선생님의 매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기대하고 계신 선생님이 실망하시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까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에는 학교에서도 이런 관계가 사라지고 있다니 안타깝습니다. 잘못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무조건 체벌을 못하게 하고 아이들에게도 데모할 수 있게 허락하는 등, 아직 분별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자유만 주자고 하는데, 이럴 때는 부모들이 내 자식 망치려고 그러느냐고 항의해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인격적인 스승이 없어지면 그런 스승에 대한 기대도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을 가르친 랍비들은 대가 때문에 가르치는 품꾼이었지 인격을 바로 인도하는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잘못되었을 때에는 책망도 하는 참된 목자를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즘 정부와 기관에서 비리척결을 하자고 하지만, 비리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뇌물을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뇌물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뇌물을 주고 쉽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원칙대로 일을 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바른 방식으로 기업을 경영하려고 하지만, 뇌물로 쉽게 해결해본 경험이 쌓이면 아예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길이 들면,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 원칙주의자들을 거북하게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두 어버이 같고 목자 같은 스승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촌지를 주고받는 거래에 익숙해지면, 인격적인 선생을 상대하기가 훨씬 어렵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제 간에도 거래관계가 익숙해지면 가짜선생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이미 이런 방식에 익숙했고 또 이런 방식을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은 사람의 중심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일단 형식만 갖추면 아무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해진 제사날짜에 규격에 맞는 제물만 사다가 바치면 되었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모양만 갖추면 되었고, 한주에 두 번씩 금식에 참여만 하면 되었고, 대문에 성경구절 적어 말아 넣은 상자를 붙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건 안 믿건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믿는 형식만 갖추면 더 이상 아무도 문제 삼지 않고 훌륭한 신앙인으로 취급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예루살렘의 모습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런 종교생활에 아주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이 아니라 중심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물이 아니라 인격이 변해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하시며, 그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에는 썩은 것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좋을리 없었습니다.
그동안 랍비들은 자기들을 훌륭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해 주었는데, 예수님은 자기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던 공회원 니고데모에게도 ‘네가 선생이면서도 이것도 모르느냐, 너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너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존재로 취급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갖춘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하시니, 너무나 기분 나쁘고 싫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라도, 우리를 조금도 인정해 주지 않으면서 당신만 따라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시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동안 자기들의 형식만 가르치며 인정해주었던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을 몰아세우는 예수님보다 훨씬 더 편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익숙했고, 그런 생활에 굳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겪는 이론과 실제의 괴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실이 옳고 거짓말은 나쁘다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있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목자 같은 선생님을 원합니다. 그러나 막상 목자 같은 선생님을 만나면 너무나 부담스러워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적당히 믿는 흉내만 내고, 적당히 흉내만 내도 인정해 주는 타협을 원하는데, 참된 선생은 타협이 통하지 않고 너무나 원칙대로만 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딤후 4:3-4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왜 신자가 이렇게 됩니까? 이미 세상의 영향으로 그런 생활에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원칙대로 마음과 생활을 다 바쳐서 사는 신앙생활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도 대단하고 나도 대단한 존재니까, 우리끼리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며 즐겁게 사는 법을 배우자”고 하는 목사가 좋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일마다 성경만 가르치며 양심에 가책을 주는 목사가 좋습니까? 우리 한가람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자고 설교 시간마다 다그치는 목사를 잘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 같아서 감사합니다.
어제 우리교회가 개척한 도대리 교회를 안수집사님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여기서 거기까지는 60여 킬로가 되니까 시속 60킬로로 가도 한 시간 거리입니다. 그런데 어제 길이 너무 막혀서 네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서울 시민들이 한꺼번에 휴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교회도 결석자가 많을까 하고 염려했는데 1,2부는 전혀 차이가 없어 보이고 3부는 더 많이 나오셨습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에 기대하는 것이 진리보다는 위로와 격려를 더 원하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참된 목회자가 드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오늘날 교회에 참된 교인이 드물다는 말입니다. 바른 교인들이 엉터리 목사를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엉터리 교인들은 참된 목사를 참지 못합니다. 엉터리는 엉터리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 교인들은 거짓 목사를 찾고, 거짓 목사는 다시 교회를 황폐화하여 거짓 교인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목자의 음성을 들으려고 힘쓰고 잘 분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바른 목자와 바른 양의 관계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양이 목자를 믿어야 합니다. 바른 삶은 바른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많이 배운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어야 배워집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성도들을 억지로 거기 들어가서 공부하게 한다고 해서 진리가 깨달아지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음이 있어야만 깨달아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 목사님이 나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지금 저렇게 열심히 말씀하고 있구나,’ 하는 목사에 대한 믿음으로 설교를 듣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게 되지만, ‘저 목사가 자기주장을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절대 진리가 깨달아지지 않는 법입니다.
믿음을 갖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원인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정말 교만합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저렇게 살려면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못난 사람은 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쟁이 들입니다. 얼굴이 조금 잘났다고, 직장이 조금 좋다고, 자기가 사는 집이 조금 비싸다고, 자기가 나온 학교가 조금 좋은 학교라고, 돈이 조금 많다고 얼마나 남을 무시하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세상도 그러한데, 일부 종교들도 이 교만에 불을 댕깁니다.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냐, 인간이 바로 신이야, 내 안에도 신이 있고 네 안에도 신이 있어, 너 자신을 잘 격려하고 잘 계발하면, 네가 곧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지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라고 교만을 부추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보지도 못한 예수를 어떻게 나의 구주로 믿습니까? 예수가 누군데 나의 죄를 해결해 준다는 말입니까?”라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전하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자기가 정말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기 싫은 교만이고, 자기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자기가 지은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누군가 나를 도와줄 분이 계셔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교만입니다.
그러던 그런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음성을 주십니다. “네가 지금까지 한 것이라고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마치 제가 신이나 되는 것처럼 교만하게 산 것 밖에는 없다. 너는 영원히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이야. 그러나 내 아들이 너희들의 죄를 대신 책임지고 십자가에 죽어주었으니 네가 만약 그를 믿으면 용서받을 수 있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만 듣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영영 멸망합니다.
여러분은 이 음성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개야 너는 죄인이야. 네가 아무리 기독교를 오래 믿었고 모태신앙인이라고 해도 너는 하나님 앞에 무서운 반역자이다. 네가 얼마나 교만하고 기고만장했는지 알겠니? 네가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노릇을 했는지 아니?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너를 대신하여 죽은 예수를 믿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귀로 설교를 들은 것 말고, 여러분의 마음에 이 말씀이 진지하게 들려온 적이 있습니까? 설교 때 늘 듣던 말씀인데도 유달리 마음에 와 닿은 적은 있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런 말씀을 할 분이 없습니다. 마귀가 그 말을 하겠습니까? 돌아가신 조상이 그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 외에는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통해서 들었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고, 믿음으로 말씀을 들으며 순종하면, 진리가 깨달아지고 행할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말씀을 이해한다는 뜻일까요? 우선 이해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라고 할지라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알아듣는다.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따른다’는 뜻입니다. ‘저 아이는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라고 하는 말은, 선생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귀가 안 들리는 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왜 선생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도 잘 순종하지 않아서 말 안 듣는 아이가 될까요? 그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선생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좋다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이 핑계, 저 핑계와 수많은 변명거리를 만들어서 그것을 이유로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보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옳고 유익하다는 생각을 해야만 비로소 아이가 선생님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처럼, 성도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설교를 이해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조명에 의해서 철저하게 부패한 자기의 본성을 보고, 더 이상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목자의 음성을 따라 살겠다는 작정을 하는 것을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옳다는 것이야 다 알지만 그 말씀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이고, 말씀을 안 듣는 사람은 말씀 따라 살기 싫은 사람, 그 말씀이 가져올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어서 자기의 힘과 판단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만한 마음을 가진 채,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머리로 평가하면서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게 교만하게 살던 사람들에게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자부하던 사람이 도덕적인 실패를 해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되거나, 잘 나가던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패를 겪는 일등입니다. 그것은 빨리 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라, 주님의 말씀을 이제는 듣고 따르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위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제는 네 인생의 주도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위기를 당하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라고 판단하고 심각한 침체를 겪습니다. 또 자기 힘으로 헤쳐 나와 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자의 음성을 거역하는 것이지 듣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이러한 위기상황은 하나님이 아직도 그를 부르시는 음성이며, 그에게 어떤 일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릎을 꿇고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며, 그동안 들었으나 거부했던 말씀을 이제는 듣는 것, 즉 자기 고집을 버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일까요? 물론 자식이 좋은 회사 취직하거나, 손자를 낳거나, 돈이 잘 벌리는 등 세상 일이 잘 될 때이겠지요? 그러나 믿는 사람이 가장 기쁠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입니다. 내가 어려움에 빠져 방황하고 있을 때, 너무나도 필요하고 적절한 말씀, 내 영혼을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음성을 들을 때보다 더 기쁜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 깨달아지는 순간, 당한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마음에 평안이 가득차고, 두 주먹에 불끈 힘이 주어지며, 용기와 자신감이 솟아오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챙기신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과 근심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고통스런 일을 만나서 헤매던 중에 말씀을 듣다가 “아, 그랬구나.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시는구나,”하고 깨달아지고, 그 말씀 앞에서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의 기쁨과 힘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그 순간 우리 영혼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마음속에 가득했던 어둡고 더러운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축 처졌던 어깨에는 새 힘이 솟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 “아,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었구나. 아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간섭하시고 도우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영육에 양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신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먹을 것이 있고 살 집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지금도 챙겨주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진짜 왕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당신의 양을 잠시 맡겨서 임시 목자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다윗은 한 시라도 자기가 목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목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항상 한 마리의 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고백하고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목사도 그렇습니다. 목사는 주님의 양을 잠깐 맡은 일꾼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앞에서는 목사도 다른 성도와 똑같이 한 마리의 양입니다. 목사에게는 주님의 음성과 인도하심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는 내용 중에 거의 절반은 제게 말씀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게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그때 얼마나 신나고 힘이 나는지 아십니까? 말씀을 받고 나면 “저에게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그렇게 살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그때 가장 기쁘고 가장 힘이 느껴집니다. 그때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직분을 맡았던지 주님 앞에서는 한 마리의 양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참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능력, 순종하여 따라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은 타락으로 인해서 이미 지혜도 분별력도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을 가져야 합니다.
설교 시간은 목사의 설교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어느 때, 어느 환경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설교를 듣는 시간입니다. 겸손하게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단은 설교시간만 되면 별의 별 잡념이 다 생기게 합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말씀을 못 듣게 하는 방법은, 목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까 목사에 대한 온갖 오해와 반감도 들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이 시키는 짓이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결코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잡념과 유혹을 물리치고 목사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순종하는 양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목사가 아니라 참 목자이신 주님이 여러분을 직접 인도하시고 돌보시며 평강과 생명의길, 영원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에 의해서 평강과 영생으로 인도를 받는 착한 양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