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새벽공과와 설교

20210312 / 요 11:17-27 / 마르다와의 대화(1)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3.12|조회수415 목록 댓글 0

마르다와의 대화(1)

요 11:17-2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17-27 /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제자들과 베다니에 도착한 예수는 나사로가 이미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다는 말을 들으셨다. 18) 예루살렘에서 5리밖에 안되는 베다니에는 19) 많은 유대인들이 문상을 하러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을 위로하고 있었다. 20) 예수께서 오신다는 기별을 듣고 마르다가 마중을 나왔다. 마리아는 집에 있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지금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이 구하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제 오빠를 다시 살리실 줄 압니다.' 23)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24) 마르다는 `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죽은 자를 일으키고 그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는 자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죽는다 하여도 다시 살 것이다.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마르다야, 네가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다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이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이미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있은 지 4일이나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자신의 정체, 즉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 되심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의 신앙을 요구하실 때 마르다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미 나흘이라(17-19)예수께서 오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후였습니다. 무덤에 있은 지 4일이나 되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더욱더 확실케 해줍니다. 많은 유대인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기 위해 그곳에 왔습니다. 그들은 이제 잠시 후면 그 집이 그들의 위로가 필요한 슬픈 집이 아니라 큰 기쁨의 집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드러나며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야말로 주님이 일하실 때임을 믿으십시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20-22) 마르다는 예수께서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녀는 오직 예수께서 몸으로 가까이 계실 때에만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마르다의 믿음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실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예수께서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3-27)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믿음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기 위해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는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수 있습니다. 미래뿐 아니라 현재에도 죽은 자가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부활하여, 영원한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을 보여줍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정오의 햇빛처럼 빛났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적용: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을 요구받은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는다고 말합니다. 마르다가 이 고백을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후가 아니라 그 전에 했다는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예수를 향한 우리의 신앙고백은 대개 언제 이루어집니까? 응답 전입니까? 응답 후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내가 현실적으로 이해할 만한 것만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믿음의 좁은 시야로 예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부활의 능력을 믿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나사로 집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이필재 목사

예루살렘 동쪽으로 4km가 채 안 되는 거리에 베다니 마을이 붙어있습니다. 지금은 예루살렘 시가지가 되었습니다. 이 동네에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3남매가 살았는데 성경대로 보면 부모님은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이 집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로 매우 친숙한 관계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많이 찾아가신 집이 성경에 이 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이 집에 들르셨을 때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이나 나가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다고 성경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처녀 마리아가 머리를 풀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 발을 씻겼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도 힘든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부흥회를 하셨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였느냐 하면 남자만 5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합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유대 나라 문화는 여자들을 숫자에 넣지 않는 문화였기 때문에 여자들을 세지 않은 것뿐이지 여자들이 항상 더 많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 역사는 남자보다는 여신도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40년 이상 설교를 하러 다녔는데 어디를 가나 여신도가 많았지 남자 신도가 더 많은 곳은 군인교회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 남자만 5천명이라고 한다면 여자까지 합치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의 군중집회가 되는 겁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교인이 많이 오면 신이 납니다. 예수님도 아주 신이 나셔서 설교를 하시는데 하루 종일 하셨습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약간 짜증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제 그만 돌려보내소서. 해가 저물어 가나이다. 배도 고프고 갈 길도 먼데 설교만 계속 하시면 됩니까?” 예수님이 “그러면 너희가 먹을 것을 좀 줘라.” “이곳은 빈들입니다. 어느 음식점에 가서 이 많은 사람이 먹을 식량을 구해올 수가 있습니까? 돈도 없습니다. 이 많은 사람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많은 돈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말을 제자들이 하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상식적 계산이 나옵니다. ‘아! 200데나리온이면 1만 명의 한 끼 식사 가격이로구나.’ 그러면 우리 계산으로 여기서 예배 마치고 나가서 점심식사를 한다고 합시다. 이 사회에서 가장 간단한 자장면, 설렁탕, 햄버거 등을 사먹으려면 최소한 5천원은 가져야 간단한 식품을 우리가 사 먹을 수가 있잖아요? 그러면 1만 명이 5천원씩이면 얼마입니까? 5천만원 정도를 200데나리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부은 향유는 300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재산입니까? 무슨 그런 향유가 있었느냐? 이것은 마리아가 자기가 쓰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재산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유향과 몰약을 발라드렸잖아요? 또 요셉이 죽었을 때 이 향의 재료는 이스라엘 문화입니다. 그래서 비싼 향유는 가지고 있을수록 더 값이 올라가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이 금덩어리 사 둔 것처럼 보관하는 겁니다. 그래서 300데나리온이 나가는 이 값진 향유를 예수님 발을 씻는데다가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 마음을 짐작할 수 있잖아요? 여러분, 여러분의 발을 누가 씻겨주셨습니까? 저는 아무리 기억 해봐도 어렸을 때 엄마가 내 발을 씻겨주었지 누구도 내 발을 씻긴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예수님과 이 가정이 친숙했는가 하는 것을 단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지금 큰 불행이 생겼습니다. 오빠가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청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동생 마리아와 마르다는 “이것을 어떡하느냐? 예수님을 빨리 불러보자.”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위급한 상황을 예수님께 전달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봐요.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헌신하는 집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부자도 되고 건강하고 좋은 일만 있어야지 남들도 안 걸리는 죽을병이 들어서 청년 시절에 저렇게 죽게 되니까 ‘예수님과 친해봤자 얻는 것이 뭐냐?’ 이런 생각들을 주변에서 하게 됩니다. 또, 위급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가 너무 긴 성경 구절을 중간에서부터 읽었는데 6절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 집에 그렇게 위급한 일이 생겼다면 황급히 달려가셔서 위로하고 문제 해결을 돕는 성의를 보여주셔야 당연한 일이라고 보는데 절대 그렇게 안하시고 이틀을 더 있다가, 그리고 그때부터 가기 시작해서 일주일이 더 걸린 겁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어서 장례식이 끝난 상태입니다. 21절에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불평하는 겁니다. “오빠가 죽어가고 있다는데 무슨 바쁜 일이 계시다고 좀 와보실 것이지 이제야 장사 다 지내고 끝난 다음에 오셔서 뭘 합니까?” 그러니 ‘이때 예수님도 다소 썰렁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때보다도 더 당당하시고 더 위엄 있는 말씀을 오늘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관심이 뭔가? 성경에 그대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들으셨을 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괜찮다.” 다른 말로 하면 “잘 된 일이다.” 젊은 사람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데, 벌써 죽었는데 그게 뭐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단 말입니까? 바로 예수님과 우리들의 생각 차이가 여기서 생기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평생 설교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사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에게 하라니 그 사람이 잘 해내겠습니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니까 그런 일을 잘 해내셨지, 나 같은 사람은 자연 인간 이필재에 불과합니다. 약하고 무능하고 소심하고 낙심 잘하는 이런 자연인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시니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최소한 목회를 잘하려면 예수님과 같은 영적 권위가 나타날 때 멋있어 보이고 우러러 보이고 전도도 잘 될 터인데 그런 예수님이 가졌던 권위적 일을 주시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니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나? 사람의 일 하기도 힘든데….’ 그러니까 괴로운 때가 많다고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어떤 때는 마르다 같이 불평스러운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여!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주님만 보고 살았습니다. 주님이 나더러 하라고 하시는 일을 절대 불평한 일이 없고, 주시는 사역에 내 인생을 다 불태웠다고 내가 말할 수 있는데 내가 좀 곤란하고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왜 나를 모른 체하고 빨리 와서 내 소원대로 나를 도와주셔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바로 이 불평에 주님의 대답은 이겁니다. “네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위함이다. 고난은 잘된 일이다.” 이것이 신앙적 갈등이란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시려는 것과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으려는 것의 차이 때문에 항상 우리는 고민합니다. 주님의 사역 종반전에 들어섰을 때 제자들은 저마다 주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질 어떤 선물의 기대감을 계산했습니다. “이야! 틀림없이 주님은 이제 영광스러운, 있어야 될 회복을 선언하실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것이 뭐냐?” “이 보기 싫은 로마 놈들을 우리나라에서 다 내어 쫓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주권 회복을 예수님이 하시고, 예수님은 예언하신대로 이 나라의 왕이 되시며 그 다음에 우리들에게 이 나라의 국정을 맡기실 것이다.” 이런 영광스러운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을 때 “이제는 그 때가 가까웠으므로 누가 예수님 다음으로 2인자가 되고 3인자가 되느냐?” 온갖 추잡스러운 일을 벌일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누가 그런 자리를 차지하느냐고? 좌우편? 나는 죽을 것인데….” “뭐라고요? 죽다니요?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죽어야 됩니까?” “당연하지!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야! 내가 너희들에게 지금까지 가르친 게 그거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십자가에서 죽을 거야. 너희들도 나를 따라야 돼!” 그 후부터 제자들은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가끔 영성이란 단어를 교회에서 씁니다. 영성훈련 프로그램을 합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목사가 될 500명 목사 후보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1박 2일 동안 영성훈련 세미나 강사로 다녀왔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지성이라는 것이 있고 감성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지성 훈련을 잘하면 높은 학문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고 감성 훈련을 잘하면 예술가가 되잖아요? 따라서 영성 훈련은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영에 접근할 때 내 영과 하나님의 영의 만남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영성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나타납니다. 나사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그러면 나사로에게 가봐야지!” 제자들은 “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8절에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러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거기 보면 예수님과 동네 사람들의 몸싸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렇게 혼이 나시고 이제 또 그 자리를 돌아가시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나사로 하나쯤 희생되는 것은 뭐가 잘못됐습니까? 병들어 죽는 건데 그냥 두십시오. 가지 마십시다.”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 집에 늦게 도착한 것은 제자들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이틀 동안이나 설득하느라고 시간이 걸렸습니다. 만약 이때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좋다. 너희들 그만 둬라. 나 혼자 가겠다.” 하고 뛰어가셨다면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 곁을 떠났을지 모릅니다. “나사로나 데리고 일하시오!” 이랬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설득이 길게 나타나면서 맨 마지막에 제자 중 도마가 말하잖아요? 오늘 17절부터 읽었지만 16절에 디두모라 하는 제자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가 설득하는 바람에 제자들이 어쩔 수 없이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다 데리고 나사로 집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계속 읽어 내려가면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려내시는 것으로 아름답게 종결이 되는데 유대인의 무덤 문화는 납골당 문화입니다. 땅 속에다 묻어서 안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을 만들어서 노천에다 노출시켜 놓습니다. 감람산에 가보세요. 수천 개의 관이 노출되어서 옛날에는 움막 같은 것을 짓고 거기에 수십 명을 함께 놓습니다. 그래서 관 뚜껑만 열면 시체가 보일 수 있는 무덤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실 때 그 나사로란 이름이 조금 큰 활자로 인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이 말을 그렇게 크게 인쇄를 했는가? 강조점을 두신 대목입니다. 성경에도 큰 소리로 예수님이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글자도 크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냥 나오라고 하면 다 나올까봐 나사로만 나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제 상황은 순간적으로 정반대 상황으로 바뀌어졌잖아요? 절대 슬픔에서 절대 기쁨으로 돌아오게 됐는데 베다니의 마을은 흥분의 도가니입니다. 이만하면 예수님의 영적 권위는 회복이 됐잖아요? 핍박하던 무리들에게 놀라움이 “이게 뭐야?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다니?” 깜짝 놀라며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됐고 안 따라오려 하던 제자들도 이 사건 앞에 깜짝 놀라 “이야! 이게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냐?”, 이 엄청난 초자연적 체험 하나로 거기 있는 사람이 다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뜻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부활과 영생의 진리를 알리는데 목적이 있어서 마르다, 마리아에게 25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겠고” 부활의 진리를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합니까?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영생 진리 전파에 예수님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사로는 이때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또 얼마 있다가 또 병들어 죽었습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다 얼마 있다가 죽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잠깐 주어지는 제한적 진리라면 그런 것은 의사들도 넉넉히 합니다. 의사들도 죽을 사람의 병을 고쳐서 얼마동안 더 살게 하는 것은 의사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이 세상 누구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믿지 않는 자연 법칙인데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죽음 후에 반드시 부활하는 진리가 있음을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 온 세상에 선포해야 되는 기회이기 때문에 “이것은 잘된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가 무덤에 와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스라엘은 아열대 기후라서 시체가 일찍 부패합니다. 아마 이 나사로가 살아난 일이 마르다, 마리아, 예수님 세 사람만이 있는 자리에서 되어진 일이라면 성경 반박론자들이 “이것은 셋이서 짜고 친 고스톱이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간이 늦어도 12제자를 설득해서 다 데리고 왔고 그렇게 몸싸움을 하면서 핍박하던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이 일을 했기 때문에 “보라! 내가 전하는 진리는 제한성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초월한, 죽은 사람이 다시 부활해서 영생을 얻는 진리! 나는 이것을 위해서 온 거야.” 여러분, 그때부터 지금까지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 가장 신뢰를 갖는 사건이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야. 이 일은 잘 된 거야. 괜찮아. 마르다야, 울지 마라.”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세상에 얼마동안 더 살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사로를 통해 부활과 영생의 진리를 오고 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네가 그 초점에 있는 사람이 된 거야.” 이렇게 나사로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도 세상에서 병 들 수가 있고, 일찍 죽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로 하는 생애의 목적은 바로 부활과 영생이므로 “네게 주어지는 인간적 슬픔이나 고난들 앞에 절대 절망감을 갖지 말라. 죽었다고 인생이 다 절망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이렇게 죽었어도 영원히 사는 진리가 주어진 것이다. 그 약속의 진리를 믿고 슬픔을 이기고 힘차게 주의 뜻을 이루고, 이것이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 너희가 할 일이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는 이 진리를 전하기위해서 온 것이다. 우리 모두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살아 부활하는 진리는 나밖에는 줄 자가 없지 않느냐?”

최진실 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판단됩니다. 객관적으로 한번 생각해 봐요. 제 생각에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소녀들은 그 사람같이 되고 싶어 했고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소녀들이 갖고 싶어 하는 행복과 꿈의 자리를 이미 성취하여 수십 년 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살합니까? 인간은 영적 존재라서 영적으로 내면적 만족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 껍데기는 아무 소용없이 공허해 지는 겁니다. 저는 아쉬움이 죽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 저녁에 그도 교회 나간 경험이 있다고 신문에 났는데 ‘소주를 마시고 매니저와 상담할 것이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 그렇게 죽고 싶은 인생의 문제를 목사를 찾아갔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상담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서울 시청 앞 청소년 광장 집회에 제가 대회장을 맡았잖아요? “연예인 한 사람을 초대하자.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인순이로 하자.” 나는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인순이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아줌마가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래서 인순이에 대한 이야기를 저에게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그 아줌마도 흑인 병사와 결혼해서 인순이 같은 혼혈아 딸을 키우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목사님, 인순이는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 자라는 모습은 그렇게 멸시적이고 차별적인 대우, 참으로 소녀가 견디기 어려운 그런 어려움 속에서 그가 성장했습니다. 말도 못하게 고통당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나는 똑같은 딸을 낳았지만 바로 미국으로 와서 흑인들과 함께 우리 딸이 성장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순이는 혼혈아로 한국 사회에서 성장하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내가 옆집 아줌마로 다 봤습니다.” 실제로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인종 차별적 행동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를 세우라고 했느냐? “수만 명의 크리스천 청소년들 앞에 그를 세운 것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순이를 보라. 어렸을 때 환경이 인순이보다 더 불행했던 환경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를 보고 희망의 빛을 가지라.” 그가 부르는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그것은 청소년들의 꿈이 될 것이다. 그를 세워라.” 그를 세웠습니다.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 마지막에는 그가 “Amazing grace”를 불렸습니다. 자기의 살아있는 간증적 노래를 부르면서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 그 노래를 마칠 때 5만 명의 청소년들이 부둥켜 앉고 울었잖아요? “성공이다! 거위의 꿈을 부르면서 우리 모두 순례자의 길을 가자. 청소년들이여!”

부모 없이 3남매가 살아가는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 그들에게 닥친 험악한 고난의 사건은 지구상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부활의 진리의 증언자 역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잘 됐어!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일이야. 마르다, 마리야! 울지 마! 내가 이 일을 보여줄게.” 이렇게 됐잖아요? 오늘 우리 모두다 불행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지금도 “울지 마! 괜찮아! 내가 네 손을 잡고 이 길을 갈 거야. 우리 삶의 끝에서 모두 다 웃을 거야. 가자!” 여러분, 모두 주님의 손을 잡고 찬송을 부르며 순례자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사로 집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주님이 그 집에 선물하고자 했던 것은 어떤 것인가? 그 사건은 왜 성경에 이렇게 기록으로 남았는가? 우리가 다 영성 훈련이 되어 영적으로 그 말씀을 생각하고 우리 앞에 닥쳐진 이 죽을 것 같은 고난스러운 모든 일을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겨가는 영적 능력이 주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죽음이라는 병

조용기 목사

<서론>

“죽음이라는 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란 병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죽고, 또 병들어서 죽고 전쟁에 나가서 죽고 여러 가지 사고를 당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덧없이 짧은 인생과 죽음에 대해 사색하며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 90:3~6)

아침에 피어 저녁에 시드는 풀처럼 인생의 밤이 되면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처럼 덧없이 짧은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고, 죽음의 절망을 사색하며, 그 바탕 위에서 현실에 임하는 사람이 오늘날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나는 반드시 죽는다고 그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없이 떠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절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본론>

1. 큰 고통을 가져오는 죽음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저는 5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 장례식을 참석해서 그 마지막 설교를 해오곤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당한 초상집에 갈 때마다 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낍니다. 나이가 많아서 살 때로 충분히 살고 가면 덜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청춘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볼 때는 굉장히 마음이 아픕니다. 더구나 어린 자녀들을 많이 둔 어머니가 세상을 뜰 때 그 자녀들의 통곡과 부르짖음은 영혼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또 나하고 굉장히 친한 주의 종이 갑자기 병들어서 떠나갈 때 굉장히 마음에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 고통 없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고 집이나 전토나 지위나 명예를 뒤로 하고 자기가 모르는 미래의 세계로 가니 얼마나 겁나고 슬프고 괴로운지 말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일생에 살면서 한두 번 왕래하게 해 주시면 좋겠는데 전부 초행길이라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가는 길을 모릅니다. 오직 다가오는 것은 두려움만 가슴에 다가올 따름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로 14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실상은 그런데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천년 만년 살 것 같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다리 밑에 거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거지가 우리 학교 영어 담임선생님보다 영어를 더 잘해요. 그래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면 앞을 다투어서 다리 밑에 내려가서 거지에게 영어를 배웁니다. 사람이 참 착하고 좋았어요. 그런데 그는 마음이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마음에 슬픔을 가슴에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은 병들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영어는 기가 막히게 잘 가르쳐요. 이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그에게 영어를 배운다고 쪼그리고 그 다리 밑에 같이 앉아있는데 우리가 아무리 그가 왜 다리 밑에 거지가 되어 쪼그려 앉아 있느냐 물어도 씽긋 웃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거지가 되기 전에 선원이었는데 세계 일주까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부모도 잃어버리고, 처자도 잃어버리고 하나가 되어 직장도 놓치고 몸도 병들어서 고향으로 돌아와 거지가 되어 다리 밑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것이 그 정도 영어를 잘했으면 그때 미군부대 통역관으로 들어가도 돈을 꽤 많이 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하고 다리 밑에서 그렇게 빌어먹고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회의가 듭니다.

거지 나사로도 어쩌면 처음부터 이사람 같은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거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거지가 되어 태어나는 사람도 혹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지 나사라도 어쩌면 처음부터 거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병든 몸이 되어 부자의 대문간에 버려진 바 되어서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를 먹고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추정해 보면 이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입니다. 부잣집 대문에 병들어서 드러누워 있어도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지 나사로를 사랑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부자는 굉장한 부자인가 봅니다.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은 관리가 입습니다. 보통 사람은 붉은색 옷을 입지 않습니다. 이 부자는 붉은 옷에 또 흰옷을 입었습니다. 아주 흰옷을 입은 사람은 돈이 많고 생활이 부유한 사람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붉은색 옷에 흰옷을 입고 아주 호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호화로운 삶을 산다고 안 죽나요? 부자도 죽어요.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가 부자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2.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2~24)

거지도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고 아브라함은 낙원에 들어갔는데 낙원에 좌장으로 있어서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도 죽어서 가장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고 난 다음에 그가 떨어진 곳은 지옥이었습니다. 지옥은 음부라고도 하고 지옥이라고도 하는데 지옥에 들어가서 얼마나 괴로운지 지옥에서 낙원을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영적세계는 시간과 거리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가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여, 내가 이 불꽃 가운데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물 한 방울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주십시오. 물 한 컵도 아닙니다.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주십시오. 굉장히 괴로운 곳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 기도에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너는 세상에 있을 때 얼마나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지 않았느냐. 그러면서도 하나님 섬기고 살지 않았는데 이 거지 나사로는 살아있을 동안에 너희 대문가에서 얻어먹고 살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했는데 이제 운명이 달라졌지 않느냐 이 생애에서 고생했으나 지금 낙원에 들어와서 상상할 수 없는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고 너는 그 불꽃 가운데 떨어져서 고생을 하는구나. 여기에서 낙원과 음부가 어떤 곳인가를 성경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음부는 일단 떨어지면 거기는 기도응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응답이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하지 죽고 난 다음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음부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구더기라는 것은 여러분 추하고 더러운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 추하고 더러운 것은 음부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꽃같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인간의 언어로써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음부요 지옥인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한다. 우리가 어릴 때는 해산물을 시골에서는 잘 먹지 못합니다. 여름철에는 도랑에 가서 미꾸라지를 잡아서 그래서 반도를 대고 밟으면 그 미꾸라지들이 그 그물에 걸려서 들어와요. 그러면 그 미꾸라지들을 바구니에 담으면 거품을 내고 하는데 그것이 눈에 선해요. 그런데 그 미꾸라지를 어떻게 하는지 압니까? 소금을 팍 칩니다. 그리고 난 다음 호박잎을 가지고 싹싹 문댑니다. 그 비늘 떨어지라고... 그러면 미꾸라지가 사생결단으로 뜁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지만 불쌍하더라구요. 꼭 저렇게 안 해도 먹을 수 있을 것인데 저렇게 가혹하게 껍질을 벗겨서 먹느냐. 그러나 그 미꾸라지를 가지고 시래기를 좀 넣고 미꾸라지국을 끓여 놓으면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어요. 아주 맛있습니다. 그러니 지옥이라는 것이 미꾸라지에게 호박잎으로 문지르는 것과 같이 괴롭고 그 다음 불로써 지지는 것 같이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모든 것을 느껴보는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서 얼마나 고통당할 것을 우리는 생각하고 지옥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낙원은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대로 믿으면 가는 곳입니다. 믿으면 가요. 그 험상궂은 죄인이 살인하고 방화하고 파괴했던 그가 회개할 여가도 없고 수양을 할 여가도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주여, 주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 기억하시옵소서. 그 말 한마디에 예수님의 대답은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에서 오늘 제가 하는 이 설교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몰라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생명과일을 따먹고 타락했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과를 먹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음부와 지옥이요, 예수 믿는 것이 낙원입니다. 믿음 그 하나가 우리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은혜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나의 일생의 죄악을 다 책임지고 그는 육체의 고통과 심령의 고통과 괴로움을 다 겪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내가 서면 예수님이 나를 끌어 안아주시고 예수님이 우리 귀에 대고 해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나의 죄와 불의, 추악, 저주와 절망과 죽음을 다 이루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서 살게 되니 이 웬 기쁨이요, 이 웬 즐거움인 것입니까?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하나 이르면 무엇이 유익하냐고 했는데 예수님께 나가면 목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아무리 영화롭고 부하게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버림받은 사람이에요. 거지 나사로는 거지로 살았지만 마음에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3. 예수님과 천국

 

이 땅에 천국을 가르쳐 주신 이는 유일하게 한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늘 나라에서 사람의 몸을 쓰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천국이 어떠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절로 2절에 보면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바래시인은 아주 보수적인 유대인들이요, 모세의 율법을 조금도 어김없이 지키는 자인 것입니다. 그 중에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의 유대교 신자 중에 높은 지위를 가진 분입니다. 그는 훌륭한 선생의 제자로서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된 근본 동기도 이 바리새교인 사람들의 충동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밤에 사람이 안 볼 때 그림자를 따라서 이 니고데모는 예수님 계신 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하는 질문이 예수님,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도 하나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고야 이런 기적을 행할 수가 있습니까? 이 니고데모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영이 죽은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거역하고 그 영이 죽었을 때 그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영이 모든 죽은 사람으로 3차원적 사람입니다. 천당인 4차원의 세계는 모릅니다. 차원이 달라요. 그러므로 3차원에 있는 그가 4차원의 세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는데 예수님께서 친히 말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육으로 사는 사람이 하늘나라 일을 말해도 모른다. 알아듣지 못한다. 거듭나야 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늘나라 일을 말해도 모른다고 말하니까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이 늙은 사람이 어떻게 거듭납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러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나도 들려야 한다.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불뱀에 물려 떼를 지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아 높이 들어라. 그를 보고 믿는 자마다 살겠다 해서 모세가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사람들마다 죽어가면서 쳐다보라니 쳐다보고 믿는 자마다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기를 내가 그와 같다. 이 세상에 마귀에게 물려서 죽음의 병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면 나을 수 있도록 내가 세상 모든 죄악의 해독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영이 살아나고 하늘나라 일을 말할 때 알아듣지 거듭나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알 수가 없느니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가르침도 모르겠거니와 예수님이 행하는 권능도 세상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시는 일마다 우리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역사를 하신 것입니다. 압박과 설움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시고 원수 마귀에게 묶여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예수 믿는 사람의 특권이 그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어도 해방과 자유를 주님은 누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냐, 예수님이 보여주신 나라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냐, 귀신을 쫓아내시고, 온갖 병을 다 고치시고 인간생활에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필요하면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도 하시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도 열 두 바구니 남게도 하시고 베드로의 고기잡이를 도와주시고 배에 가득히 고기를 잡게도 하시고 베드로가 물 위로 걷게도 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생명을 얻되 넘치도록 얻고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예수님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인생의 모든 고난에서 주님이 건지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너희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참새도 자기 집이 있고 들어갈 곳이 있는데 나는 아무 의지할 곳이 없으니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너희들의 삶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꺾어져가는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기름이 다 되어가지고서 팔랑팔랑 불꽃이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신다. 끝까지 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서 갈대가 꺾어져서 손 만 대면 부러져 나올 것인데 예수님이 안 꺾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은 좋은 하나님이신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절대로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동굴에 들어가서 올데갈데 없이 절망에 처할 때도 예수 믿으면 예수님은 그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 밖으로 나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좋으시고 좋고 모든 것에 합동하여 좋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좋은 목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수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권능, 4차원의 영성을 주십니다. 거듭나면 그 영혼은 4차원의 세계의 영혼인 것입니다. 3차원은 물질적인 세계는 3차원이고 우리 영적인 세계는 4차원인 것입니다. 4차원은 물질적인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예로써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영이 살아나서 4차원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런 권세가 주어져 있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시지요? 여러분은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여러분은 권세가 있습니다. 명령하는 권세가 있다구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얻은 권세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영이 살아나면 하늘나라 영, 4차원의 영은 3차원에 속한 모든 흑암의 권세를 이기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모르면 못씁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직 거지같이 하나님의 권세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예수 믿고 거듭나서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원이 높습니다. 세상 차원보다 높은 차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체가 4차원입니다. 잘나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남보다 기도 많이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은 모두다 4차원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 환경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러분은 자연히 믿는 자는 그런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앉아 있어 나는 권세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앉아 있어요. 권세가 있어요. 만일 여러분 모두다 여러분 자신의 권세를 알고 나가서 당당하게 그 권세를 행사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천하에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 강단에 서 있는 조용기는 예수 믿을 때부터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교회 와서 예수 믿자마자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알아야 돼요. 모르면 주신 것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천국의 권능을 보여 주셨으니 3차원인 세계 유물론적 세계를 변화시켜 주시고 그 다음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너도 내가 가지고 있는 권세의 한 부분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영이 살아나고 성령이 너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속만 했을 뿐 아니라 죽었다 부활하심으로 거듭난 사람의 미래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셔서 사역할 동안에 죄를 사하시고, 허물을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저주를 제하시고, 가난을 저하시고 희망을 주셨으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영생복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며 생명을 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4.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처처에 나타나셨습니다. 한번 제자들이 함께 문을 꽁꽁 닫고 방에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래서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는데 도마가 그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는 어디 갔든지 제자들 모임에 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도마를 보고 우리 예수님 만났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다고 하니까 도마가 하하, 참 무식하다 무식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난다 말이야.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나타나셨다면 여러분 모두다 정신 돈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해서 오셨다면 내 손을 가지고 못자국난 손을 비벼 넣어 보고 예수님 창을 맞은 옆구리 창자국을 손을 넣어서 붙잡아 봐야 예수님을 믿겠다. 참 무자비한 제자입니다. 그래 설명할 수가 없어요. 여드레가 지나고 난 다음에 도마도 함께 제자들과 방 안에 있는데 문을 꽁꽁 닫아놓고 있는데 휙 하더니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도마 앞에 서서 도마야, 그 손가락 내밀어서 내 손에 못자국난 곳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옆구리를 만져 보아라. 도마가 얼마나 놀랐든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내 주님, 내 하나님 내가 믿나이다. 야 이사람아 보니까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많다. 예수님은 육으로 죽었다가 육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육으로 부활하면 4차원의 영성이 들어오면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없이 부활했기 때문에 육신으로 천리, 만리도 갈 수 있고 과거, 미래도 갈 수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3차원의 세계 하고는 틀립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 있고 오감각을 따라서 살고 영적인 4차원의 생활은 못합니다. 그러나 4차원은 시간도 공간도 뛰어 넘습니다. 예수님 변화산상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대화를 했습니다. 수백년, 수천년 전에 죽었던 사람이 조금도 변함없이 찾아와서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4차원의 세계는 죽음이 없습니다. 거리의 멀고 가까움이 없습니다. 아주 기막힌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여러분, 예수님이 육신으로 죽어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여러분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으나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세상을 뜰 때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주님이 그 사람의 영혼을 데리고 낙원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이상 더 확실한 보증을 어떻게 하겠습니다. 예수님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나와 같이 살게 된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늘 마음에 섭섭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나타나 주시면 좋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꾸 나타나면 안 됩니다. 안 보는데서 믿어야지 내가 눈으로 다 보고 믿어지나요?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안 보이는 중에 믿음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대책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내가 너희 보혜사 아니냐. 나는 가되 나와 똑같으나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신 것처럼 다른 보혜사도 여러분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 해방과 자유가 없이 속박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면 벗어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믿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와 죄악과 세상의 속박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어야 될 것은 예수님은 자기와 똑같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 다른 보혜사 성령은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 믿으면서 하늘나라 고아가 되어서는 안돼요.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꼭 그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3년 반 동안 따라다닌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한평생을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다른 예수인 것입니다. 첫째 예수, 둘째 예수. 첫째 예수는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요, 둘째 예수는 여러분 곁에 와 계시고 여러분 속에 와 들어계신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을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예수님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 그러므로 다른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예수 성령께서 우리 속에 와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여러분 진리를 알고 담대하게 나가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니까 부활하는 그날 우리 오라버니가 살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인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믿느냐. 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 구주이신 것을 믿습니다.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안 믿어지니까. 무덤가에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나사로의 무덤 문을 옮겨 놓아라. 거부했습니다. 주님이여,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돌문을 열어 놓아 어떻게 창피를 당하려고 합니까? 인정을 안 합니다 예수님을... 살아있는 오라버니는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지만 죽은 오라버니는 예수님의 말을 못 듣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화를 내셨습니다. 마르다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내가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똑같이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여러분이 시련과 환난에 묶여서 꼼짝 못하면 믿으라. 나를 믿으라. 아이고 주님, 예수를 종교적으로 믿고 종교적으로 행사를 하지만 이런 고난에서 어떻게 내가 나옵니까?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믿어라!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내게 맡겨라. 그러면 내가 도와주마.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 여러분, 참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 기도하고 맡기십시오. 떨어지면 낙동강 할 때까지 맡기십시오. 그러다가 주님이 안 도와주면 그냥 죽을 각오하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맡기지 아니하고 모든 요구를 다하고 난 다음 일어날 때는 다 주워 담아가지고 주님이 그것 내려놓고 가라. 내가 책임질테니 내려놓아라. 다음에 올 때 또 우리가 내려놓겠습니다. 가져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기도했으면 그 기도를 도로 가져오고 도로 가져오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맡긴다는 것은 맡겨 놓고 난 다음에 안 돌봐 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는 말은 맡긴다는 말하고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믿는다는 것은 맡긴다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 큰일 났습니다. 모를 때는 그때는 믿음이 적었어요. 변명을 하는데 이제는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조목사가 믿는 것은 무엇이라고 하느냐? 맡긴다고 합니다. 왜 안 맡기느냐? 맡겼다가 주님이 안 돌봐 주면 나만 손해에요. 그러니까 네가 안 믿는 것 아니냐. 적은 일부터 맡겨 보세요. 그러면 점점 큰일도 맡기게 되고 여러분이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서 다른 예수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다른 예수님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계셔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천국에서 오셔서 사람으로 33년을 사신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영생한다는 이 진리를 마음속에 믿고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몰라요. 여러분과 같이 계신 주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어떻게 함께 하느냐. 다른 예수 성령을 통해서 함께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예수요, 예수님이 성령이요. 둘이 똑같은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두 아들이 어머니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큰 아들을 안고서 “Good bye! Good bye!”여러분 Good bye 라는 것은 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아들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하고 영원히 헤어진다. “Good bye!” 그리고 그 동생 막내는 예수님을 잘 믿는데 그 어머니가 품에 안으면서 “See you again!” 다시 보자는 것입니다. See you again. 똑같은 어머니의 자식이라도 임종에 왔을 때 맏아들은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니까 잘 있으라. 그러나 둘째 아들은 다시 보자. See you again. 얼마나 형편과 사정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죽음은 모두에게 다가오지만, 다시 만날 약속이 있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금방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님 재림 전에 죽은 자기 가족이 천국에 갔을까 확신이 없어 불안해하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써서 다시 만날 소망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 4:13~14)

죽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계시다가 주님 재림하실 때 같이 데리고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고함과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하늘로써 재림하십니다. 재림하실 때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 모두다 살아 일어나서 부활의 몸을 얻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영으로 낙원에 가 있지만 부활해서 예수님을 영접할 때는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부활의 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먼저 살아납니다. 그 다음에 살아남은 자가 변화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어떤 마을에 꽃을 파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낡은 옷을 입고 혼자서 살면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손이 아주 뼈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늘 웃어요. 사람들이 그 할머니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우리가 보기에는 좋아할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좋아서 늘 그렇게 웃습니까?” 그러니까 “나라고해서 슬픈 일이 없을 수 없죠. 그러나 예수님 믿고 주 안에서 구원받은 기쁨이 마음에 있는데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는 나보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사흘 동안 무덤에 있다가 부활하셨다. 사흘만 기다리자! 내게 어려움이 있을 때 사흘만 기다리자고 말하고 사흘이 되면 문제가 다 달라지게 보인다. 사흘만 기다리자!” 여러분도 사흘만 기다리십시오. 어려운 일을 당해서 밥그릇을 내 던지고 싶었지만 사흘 후에 내던지자!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고 사흘 지나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 다 같이 말해볼까요? 사흘만 지나서 보자! 아멘!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게 위해서 우리도 항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절망으로 다가오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부활이 소망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사흘만 참으면 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소망이 있고 소망이 있으면 꿈이 있습니다. 꿈이 있으면 믿음이 생겨나고 믿음이 있으면 담대하게 긍정적으로 말하게 되고 긍정적으로 말하게 되면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기도할 때 알고서 기도해야 될 것은 여러분은 중생한 사람이요, 영이 살아난 사람이요, 그 영이 4차원의 세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원하나, 원치 않으나 알거나 모르거나 존재적으로 주어진 권세가 있습니다. 4차원의 권세가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으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러분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어요 4차원으로... 여러분은 그러므로 흑암의 세계에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서서 종의 멍에는 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해방되었습니다. 자유를 가졌습니다. 속박된 사람을 위해서 명령을 내리십시오. 기도를 해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귀신아 물러가라! 질병은 사라져라! 저주는 물러가라! 실패는 사라져라! 여러분은 그런 명령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화상을 분명히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아멘.

 

 

 

너무 늦지 않으시는 예수님

요 11:17-24 / 손상률 목사

 

1. 들어가는 말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체험하는가 하다가도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하심을 겪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45:15).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은 이사야만이 아니었습니다. 욥(욥23:8,9), 다윗 (시13:1, 42:9 88:3-5), 예수님도 겪으신 경험이었습니다 (마26:46). 우리 역시 '숨어 계시는 하나님', '마음의 사하라 사막' (리차드 포스터), '영혼의 어두운 밤' (후안 데 예페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주님의 도우심을 가장 절실히 요청되어지는 상황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에 잘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너무나 멀리 계시는 것 같으며 우리의 사정은 하나님에게서 숨겨졌으며, 수리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사40:27).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꼭꼭 숨으시며 숨바꼭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숨으심, 지체하심을 경험하는지... 그러다가, 뒤늦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면....',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면 .....' 라고 원망 섞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자조적인 믿음의 모습 속에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에게는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예수님은 제 때에 오실 것이며, 너무 늦지 않게 오실 것이라는 핑크빛 생각입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이렇게 자기에게 좋게 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삶의 절박함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위기와 곤경에 빠지는 일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은 육적 영적 고통을 보여 줍니다.

 

가. 육체적 고통

 

베다니의 '예수님의 사랑하는 자' (3절)요, '예수님의 친구' (11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었으며(2절, 참고. 요12:3),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을 좋아한 여인입니다 (눅10:40, 요12:3). 이 가정은 예수님이 자주 찾아가시던 가정입니다 (요12:1, 마21:17).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됨으로 이 가정은 위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랑받는 본인도 육체적 어려움을 겪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의 가족들, 이웃들조차도 육체적 어려움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맙시다. 예수님의 사랑에 호소하면서 예수님을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나. 예수님의 부재 (영적고통)

 

그런데, 우리의 육적 문제와 고통보다도 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좌절하게 하며, 실망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재요 침묵, 늦어지심과 늦추심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랑받는 우리가 겪는 또 다른 고통은 우리가 주님을 찾고 주님의 도움을 요청할 때에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애타게 하고 실망감과 슬픔을 겪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기뻐하는 것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떠나시고 숨으시고 침묵하심이 고통스런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주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적합한 시간보다는 너무 늦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 부재, 숨어계심을 긍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파스칼).

 

(1) 늦게 오신 예수님

 

(가) 너무 늦게 오신 예수님

 

주님은 너무 늦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야 나타나셨습니다 (17절). 오리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예수님은 무려 나흘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사로는 죽어 버렸고, 장례는 이미 마친 상태입니다. 얼마든지 오셔서 치료하여 주심으로 죽지 않게 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6, 37절)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보기에도, 위문 온 유대인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야속하게 늦게 오신 것이었습니다.

 

(나) 일부러 늦추신 예수님

 

주님의 늦으심은 바빠서 (왕상18:27) 혹은 부득이한 형편 때문도, 능력이 없어서 피하고 싶은 일이라서 늦추신 것도, 유대인이 두려워서도(8절) 아니었습니다. 사실을 알면 더욱 실망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일부러 늦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 도전받는 믿음

 

예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정이 너무나 절박하고 주님의 도움이 요청되는 순간임에도 도움과 해결을 미루심으로 낙심케 하고, 절망과 슬픔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늦게 나타나심은 예수님이 고쳐 주시리라고 생각한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을 흔들어 버렸고, 굳게 믿었던 소망을 엎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나사로만 장례치룬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믿음과 소망조차도 장례치루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제 때에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영적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2) 늦추심을 기쁘게 행하시는 주님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일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15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와 실망감을 주시면서 자신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태도라면 이런 예수님을 누가 변호할 수 있겠습니까 ? 주님은 결코 무자비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가지고 장난을 즐기시지 않습니다. 이 일을 기쁘게 하실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예수님 또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4절). 우리가 고통과 실망, 슬픔에 빠져 있게 되는 시간이 주님에게는 영광을 얻으시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요9:3, 35-36). 하나님과 주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우리의 육체적, 영적 고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영광을 위하여 침묵하시고, 숨으시고, 늦추시기도 하십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일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을 영광을 받으실 만하면 주님은 나흘이 아니라 더 늦추시기도 하십니다. 현재의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은 우리에게 영적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그 고통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롬8:18).

 

(나)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15절)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시간을 늦추시고, 마르다와 마리아로 하여금 슬픔을 겪게 하신 것은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며, 원망받게 되는 자충수로 행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것조차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 믿음' 이 목적이었습니다. 올바른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희망적인 상황, 가능성 자체에 마음을 집중하고 믿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깨어지면 실망하고 낙심하고 슬퍼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희망적인 분위기, 가능성 그 자체를 붙잡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들에게는 분위기와 가능성 자체가 아니라 이미 늦어버린 불가능한 것이 가능케 되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게 되는 유익을 위함이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예방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건을 겪게 하시고 더욱 치료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부분적 치료보다 전체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사로의 부활로 말미암아 비난하고 조롱하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요11:45, 12:11). 주님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응답을 늦추심으로 우리에게 유익케 하는 것이 많습니다.

영적 고통을 외면하면 도리어 잃을 것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분노에 찬 부르짖음이 하나님에게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이시여, 고통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어둡게 하는 그림자, 마음을 질식시키는 총총히 감은 사슬, 하늘높이 치솟아 올라가는 날개를 무겁게 누르는 짐, 주님이시여, 당신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고통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면 이 세상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그러자 하나님은 이 세상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고통을 거두어 갈 때에 고통으로 단련된 영혼의 인내력도 함께 가져가도 좋으냐?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고 고귀한 희생을 하게 하는 연민도 가져가도 좋으냐? 불 속에서 흰 눈썹을 하늘로 치켜든 너희들의 모든 영웅들을 잃어버려도 좋으냐? 값을 치르고 구속하며 손실에도 미소짓는 사랑을 가져가도 좋으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로 올라갈 너희 생명을 제외시키랴 ?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온전히 믿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여 은총을 거두어 가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하나님이 빛을 거두어 가실 때에는 빛보다 더 좋은 것 - 믿음 -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상황보다 주님의 응답이 늦을 때에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더욱 믿음을 얻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늦추심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유익을 경험합시다.

 

(3) 예수님의 임재

 

(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마르다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면 (과거)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21절). 그리고, 마지막 부활에는(미래) 다시 살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24절).

마르다는 이틀 전 즉 나사로가 죽기 전, 상황이 끝나기 전 (과거)이나 혹은 죽은 모든 사람이 부활하는 재림의 날에만(미래) 나사로가 살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은혜는 과거나 미래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인격, 능력을 믿으나 현 상황, 자기 안에서 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은 적었습니다(22절). 믿음은 시공간에 제한되지 않아야 합니다.

 

(나) ' 지금 '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항상' 응답하시고, '들으심'을 확신하고 계셨습니다(42절). 주님은 늦었다고 생각되는 '지금'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늦은 시간이란 없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희망과 기대가 남아 있지 않는 상황에서 주님은 드디어 오셨고 일하셨습니다. 슬픔과 눈물, 원망 외에는 남아 있지 않는 '지금' 이 주님의 시작 시간인 것입니다. 슬픔과 낙심, 비난 외에는 남아 있지 않는 '지금' 이라도 주님은 일하시고, 하나님은 들으시며 응답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이 가장 적합한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다) 끝난 사건이라고는 없으신 예수님

 

그는 영원히 멀리 계시지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오십니다. '그에게로 가자'(15절, 7, 1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사로는 부활하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일이 주님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기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끝난 사건이 없습니다. 더구나 늦었다고 생각되는 시간은 더더욱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끝난 시간 그 과거로 얼마든지 되돌아가 그 과거를 조정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늦었다고 생각한 그 일을 완성하셔야 끝이 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끝은 재림의 날인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40절), 너무 늦지 않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역사 하실 수 있습니다(왕상17:17-24, 왕하4:32-37).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도 결코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3. 마무리

 

사람들은 성급하게 축배를 드는가하면, 너무 일찍 실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소망이 역경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시간, 하나님의 뜻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을 요청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이미 늦어버렸다고 실망하며 슬픔 가운데서 땅 속에 파묻어 버린 것이 있습니까? 서둘러 실망하고 슬퍼하며 낙심하지 맙시다. 주님은 민망히 여기시고 통분히 여기십니다(요11:33). 이미 끝이 난 사건이라도 하나님이 이 일을 가지고 어떻게 일하실 것인지 바라봅시다. 우리가 파묻어 버린 우리의 비젼과 희망, 소원인 '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시는 주님을 기대합시다.

"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암흑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의지할지어다 "(사50:10).

 

 

 

부활 생명

장경동 목사

본문에 한사람 나사로는 그냥 죽은 사람입니다. 시체입니다. 누이 마르다가 볼 때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안타까운 죽은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그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될 부활의 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나 주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가 되는 건 너무나 당연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부활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원한 부활을 하신 몸이고 나사로는 다시 죽을 육체의 부활을 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요나를 통해서도 나사로를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장차 우리의 영원한 부활은 분명 사실이라고 하는 본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1.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요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 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 들 었나이다 하니” 주님이 사랑하는 자도 병들 수 있습니다. 생각을 창조적이고 긍정적으로 하십시오. 주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은 주님께 기억 된 자요 주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맺어진 자라는 말입니다. 요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주님과의 사랑도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눅19:1이하의 삭개오와 같은 관계, 주님도 삭개오를 사랑하고 삭개오도 주님을 사랑하는 관계, 이것은 나사로와 같은 관계입니다. 둘째, 눅16:19이하의 부자와의 관계, 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치 않은 관계입니다.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부자관원을 주님이 사랑했으나 자신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관계요. 셋째는 롬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는 관계입니다.

 

2) 예수님께 대하여 주여! 의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3) 그들은 예수님을 청할 수 있는, 그러면 주님이 오시는 관계입니다.

요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 나이다 하니” 계3:20 “볼 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4) 향유를 주께 부어드릴 수 있는 관계입니다.

요11: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마리아는 본질적 사랑으로 살겠다는 대단한 신앙입니다. 그러한 숭고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믿음이 있기에 부활을 이뤄내는 겁니다. 깊은 신앙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인격의 문제가 있을 때 일수 있습니다.

 

2. 그들이 가진 부활의 신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창6:1이하 노아는 홍수의 개념도 없을 때 믿고 순종하여 방주를 지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믿음이 100세에 아기를 낳듯 지금 마르다의 가족은 부활의 개념이 전혀 없을 때 부활을 믿은 겁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을 때 부활을 믿는 사람은 무엇이며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살아나셨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입니까? 고전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부활의 신앙이 부활을 맞이합니다.

 

3.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생명 속에서 증거 되어지는 것은, 무죄입니다.

1) 예수님은 무죄합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 이니라” 부활로 죄 없으심을 증명하셨습니다.

2) 죄 없으신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죄 때문에 죽으신 대속의 죽음이십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3) 우리가 무죄하다는 것이 부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짊어 지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옵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다는 것이 부활이요

선이 악보다 강하다는 것이 부활이요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이 부활이요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아멘.

 

 

 

아는 것과 믿는 것

김이봉 목사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스스로 절제생활을 하면서 지내는 기간이 바로 이 사순절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의미에서 보면,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도록 함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가 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믿음으로 응답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사순절의 근본 목적이라고 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것>과 <믿는 것>에 대한 분명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부분은 많지만, 그가 <나의 구세주>임을 믿는다고 확신하는 고백은 아직도 분명치 못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준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1.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며칠을 더 지체하여 그가 죽은 후에 갔습니다.

즉 즉시 달려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식구들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특히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진하게 영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내려갈 때 마다 그 집에 들려 쉬어갔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나사로가 그만 병이 심한데, 빨리 와서 고쳐주었으련만, 죽은 후에야 그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요11:4) 고 하였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였고,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얼른 보면 잘 이해가 안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대로 나사로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게 하도록 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신 역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주님은 며칠 후에 마르다와 마리아 집으로 오셨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보고 체념과 아쉬움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요11:22)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안다는 것> 때문에 아직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에 관하여 안다는 것,

교회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성경의 관하여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바로 그 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 말에 주님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다시 뭐라고 했습니까?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요11:24)

 

역시 여기서도 다시 <알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마르다는 계속 안다고만 하였습니다.

이 말에 주님은 다시 현재적으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했는데, 마르다는 ‘부활의 날에는 우리 오라비도 다시 살줄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요즘 지성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우리도 장차 변화된 몸으로 다시 살 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부활의 날에는 나도 다시 살아날 줄 압니다’라는, 알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줄 압니다.

마르다의 이 ‘내가 안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믿는 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어줄 것 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오늘 현대 크리스천들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 구하면 들어준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 부활도 성경지식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런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영적 성장이 둔화되어 앉은뱅이 신앙생활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2. 주님을 알고 있는 지식에서 그를 믿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알고 있다는 것과, 내가 그를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에 대한 정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행위에 속한 문제입니다.

알고 있는 단계에서는 그와 함께 하는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젊은 남녀의 교제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상대방에 관하여 만날 때마다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고, 알게 됩니다.

음식은 무엇을 좋아하며, 취미는 무엇이며, 그가 좋아하는 꽃은 무엇이며, 그의 생일은 언제이며 하는 것은 모두 <아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아는 단계에서 그를 믿게 되면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그와 함께 하려는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그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고,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란 말이 옳습니다.

내가 그를 믿기에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를 따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예수님에 관하여 알 수는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다 압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저에 대하여 두 부류로 나누일 것입니다. 저에 대하여 알고 있는 분들이 있고, 믿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30대의 목회 중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잴잴 설교는 잘 한다’고.... 여기 잴잴이란 평안도 사투리입니다. 설교는 그럴듯하게 잘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저를 믿고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게 대하여 알고는 있었습니다.

설교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많은 지식도 가진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믿고 따르지는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 신앙생활이 결실하지 못하고 탈락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대하여 잘 알고는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나타난 주님의 교훈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께 전적으로 나를 맡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주님 따로> <나 따로> 논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런 결과가 없습니다.

주님은 알고 있다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비로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요11:27)

 

우리도 주님께 대한 고백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습니다’고.... 주님은 나의 부활이요 생명임을 이제 나는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라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요11:40)

 

3. 지식적 신앙에서 고백의 신앙이 되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럴 때 마다 ‘네가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네 알고 있는 지식이 너를 구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 싸구려 믿음의 정보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믿음으로 내 모든 행위를 따라 행하고 있느냐? 에 있습니다.

만일 죽을 병이라고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이 주님은 무슨 병이라도 고쳤다고 아무리 알고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적은 인간의 지적인 영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죽은지 나흘이 된 부패해 냄새나는 송장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지금도 그런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난주일 우리교회에서 간증을 한 박상설 집사님을 여러분 보았습니다. 그가 방속국 PD 로 있을 때, 기적이란 것에 대하여 늘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를 만들면서 사이비 기도원이나 이단들에 관하여 그들의 내부적 부정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는 모태신앙이었기에 성경 지식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네가 다시 살리라’고 하는 부활신앙에 대하여는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자기의 놀라운 죽음의 체험을 통하여 확실하게 하나님 살아계심을 보았기에 이제는 전적 그 분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행한다는 간증을 다 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중생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의 랍비였지만, 주님의 거듭나야한다는 말의 뜻을 몰라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배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라는 우답(愚答)을 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선생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느냐?’하면서‘육으로 난 자는 육이요, 성령으로 난 자라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끝이지 말고,

그를 믿고 그와 함께 동행 하는 믿음의 삶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