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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317 / 요 12:12-19 / 예루살렘 입성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3.16|조회수988 목록 댓글 0

예루살렘 입성

요 12:12-19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요 12:12-19 / [예루살렘 입성;마21:1-11,막11:1-11,눅19:28-40] 다음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이 온 성 안에 전해지자 유월절 축제에 왔던 수많은 군중들이 13)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길가에 나와 예수를 맞으며 `구세주여! 이스라엘의 왕께 복이 있으라. 하나님의 전권 대사여, 만세!' 하고 외쳤다. 14) 예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는데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15) ㄱ) `너 시온성아, 기뻐 뛰어라! 너희 예루살렘 시민들아, 환호성을 올려라! 보라, 네 왕께서 네게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의롭고 노련한 해방자이시다. 그런데도 겸비하여 나귀를 타고 오신다' 라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ㄱ. 사40:9,슥9:9) 16) 그러나 그 당시에는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그 예언이 그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17)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신 현장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다. 18) 그렇게 많은 군중이 예수를 환영하게 된 것도 예수께서 이 놀라운 이적을 보이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19)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볼멘소리로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다 그를 따라가고 있잖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를 보며 어떤 이는 환호하고 어떤 이는 탄식합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12-13)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초대 교회사에 의하면 네로 당시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은 약 270만 명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뛰어난 종교적 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많은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그들은 의인과 통치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그분을 환영하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외치며 '우리를 구원하소서 메시야여'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는 고백은 정치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지닌 왕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14-15)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슥 9:9)이 예언한 대로 한 어린 나귀를 찾아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는 낮음, 가난, 겸손의 표시입니다. 나귀는 말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고, 무겁게 무장을 갖출 수도 없습니다. 예수는 왕으로 오셨지만, 그들이 꿈꾸는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평화의 왕이셨습니다. 그는 전쟁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심으로 평화를 위해 오신 분임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16-19) 제자들조차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이 구약에서 선포된 평화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 성취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야 구약에서 예언한 나귀 사건의 성취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실에 대하여 계속하여 증언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 저를 따르는도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살리신 나사로의 부활을 본 사람들의 증거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쓸 당시 기독교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지역을 넘어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와 유프라테스 강 건너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적용: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겸손하게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은 계속 증거되었습니다. 당신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들이 기다리며 만나고 싶은 분은 복음의 주인공이신 유일한 구원자 예수십니다. 이 땅에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신랑과 같은 분으로 오십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찾아가서 신부를 데리러 오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거주할 천국으로 데리러 오십니다. 언제 오셔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부르실지 모르기에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설 교 >

예루살렘의 두 방문객

이필재 목사

오늘 성경말씀을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선교하시다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됩니다. 온 나라 안에 소문이 가득하게 퍼졌습니다. “갈릴리 선지자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온다.” 그러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유대인의 메시야관입니다. 그것은 메시야가 이 나라의 왕까지 하는 사역을 말합니다. 오늘 13절에 보세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었더라.” “당신이 왕이 되셔서 저 꼴도 보기 싫은 로마 사람들을 다 물리쳐버리고 우리 역사에 앗시리아, 페르시아, 바벨로니아, 로마로 연결되는 끝없는 역사적 수난을 이제 종지부를 찍고 우리를 식민지에서 해방하고 다윗, 솔로몬 시대의 찬란했던 아브라함 택한 백성의 영광을 회복하소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줄 알았는데 로마를 물리치기는커녕 로마 병정들에게 잡혀서 두드려 맞고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니 “이게 뭐야?” 그래서 제자들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도망가고 “틀렸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우리가 역사를 한번 살펴봅시다. BC 330년에 정치적 야망을 가진 20대 야심찬 정치인이 세계무대에 등장합니다. 알렉산더입니다. 그의 목표는 인간이 존재하는 지구상의 모든 땅을 정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알렉산더와 칭기즈칸 두 인물이 가장 넓은 땅을 점령했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가 차지한 땅을 전부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로 70군데나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도 하루아침에 다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아라비아 사막 원정 때 그는 열병이 들어서 죽었다고 역사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 33세입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났습니다. 알렉산더가 군졸들을 끌고 의기양양하게 올라가던 그 길을 지금 나사렛 예수가 가고 계신 겁니다. 두 사람을 비교하면 알렉산더는 세계에서 가장 값진 갑옷을 입고 번쩍거리며 예수는 갈릴리 시골 서민의 낡은 옷을 걸쳤고, 가장 우수한 준마를 탄 알렉산더에 비해 예수는 새끼 나귀를 탔다고 했습니다.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알렉산더가 간 그 길을 예수님은 지금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는 대왕의 이름을 걸고 나타났는데 예수는 종의 모습을 나타났습니다. 그는 정복하러 왔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는 정복자로 성공했으나 예수는 골고다에서 실패자로 죽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남의 피를 무수하게 흘렸습니다. 예수는 자기 피를 흘리고 쓰러졌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33세에 죽었습니다. 결과는 어떤가? 한 사람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침략자로 남의 피를 흘리게 했던 사람이 되고 말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에 평화와 사랑의 종으로 자신의 피를 흘려줌으로 말미암아 알렉산더가 점령했던 모든 땅을 사랑과 복음으로 점령하는 결과가 지금 나오지 않았습니까?

지금 우리들도 모양은 다르지만 다 예루살렘 그 길을 오르는 사람들인데 내가 알렉산더의 길에 관심이 있는가, 예수의 길에 관심이 있는가? 문제는 알렉산더의 길이 매우 화려해 보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생산되는 값싼 천에 몸을 두르고 아이들의 호산나를 받으면서 지금 나귀 새끼를 타고 보잘것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갈릴리 예수의 길에는 볼품도 없고 얻을 영광도 없습니다. 오히려 희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매력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섬기려 하고 도리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희생의 길을 따르라.”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길입니다.

지금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주님이 받으셨던 그 고난을 내가 지금 감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고난주간이 있는 겁니다. 내 마음에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피는 보호하고 내 피를 흘리기 위해서, 이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우리가 되새겨야 할 거룩한 진리의 길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고, 교회들마저 이기주의가 되어서, 절대로 희생을 거부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땅에 주기 위해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에 내 순교자적인 피 한 방울마저도 드릴 수만 있다면 다 드려야 합니다. 알렉산더가 아라비아 원정을 떠나서 온 세상을 정복하려 하다가 모래밭에 쓰러져 열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복음을 들고 아라비아 원정을 떠났다가 모래밭에 열병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복음을 들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땅 끝까지 찾아가는 열정이 식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인간 구원 역사는 완성됩니다. 이 사명을 오늘날 교회들이 잊어버릴 때 교회는 이기주의가 되고 상업주의 원리 문화로 떨어집니다. 여러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서 세상의 역사는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가시던 그 골고다의 길, 고난의 길을 바라보면서 일평생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교회와 교인이 되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길, 그 거룩한 떨림!

이준행 목사

서론

 

예수님께서 죽음 건너편에 있는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와라” 나사로가 살아서 무덤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생명과 부활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시오, 그리스도시오, 왕이시구나.” 이 놀라운 일을 경험한 사람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현재의 권력을 가진 기득권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알고 고발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사로가 살아난 표적은 믿어도,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 그리스도 우리 왕이라는 사실은 죽어도 믿지 않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도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은 믿지 못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이스라엘 최고의 정치적, 종교적인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회의 주제는 “이 사람(예수)을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이런 분위기로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 우리 왕으로 믿게 될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약해지고, 지금까지 누렸던 기득권이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을 설득할 표면적인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따르면 로마인들이 우리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왕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로마가 우리를 불쌍히 보고 계속 도와줄 것이다” 국가 안보가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백성들을 설득하고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이 의견을 제안합니다. “한 사람을 죽이자.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자.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예수님을 제거해야 자신들이 유리하게 기득권을 지킬 수 있습니다. 표면적인 설득용으로는 로마로부터 국가 안보를 지켜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안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는 머리를 맞대고 예수님을 죽일 방안을 모의했습니다. 유월절에는 분명히 예루살렘에 올라올 것입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포상금을 걸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왕이라고 하여 국가 안보를 위태하게 하고 있다. 예수를 신고하는 자에게 은 30냥의 포상금을 하사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으려고 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기적인 세상과 희생적인 교회의 차이점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교회는 결코 같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는 이기적이고 하나는 희생적인데 어떻게 합해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 나가십니다. 그 죽음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 죄를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유월절이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도 올라올 것이라고 직감하고 신고하여 포상금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길목마다 수색대를 배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마리아도 이 사실을 다 압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일 예루살렘에 올라가겠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저들의 음모 안으로 스스로 걸어가겠다.” 주님은 악한세상, 어둠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곳을 향하여 생명의 빛을 들고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겸손한 왕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입성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심장이 떨립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으러 가시는 길, 산헤드린 공회에서 공식적으로 포상금을 내걸고 죽이려고 하는 길, 그 길을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가슴을 쫙 열고 당당하게 걸어가시려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심장이 떨렸습니다. 말씀이 그 영혼을 떨게 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거룩한 떨림이 마리아에게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방으로 달려가 가장 소중한 향유옥합을 들고 와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실 그 발에 붓고, 그 발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주님 가시는 길, 저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분위기, 같은 말을 듣고도 가룟 유다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12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다음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즉시 예루살렘에 소문이 났습니다. 예수님을 신고하면 은 30냥입니다. 가문을 새롭게 일으킬만한 돈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군인들도 동원되었고, 수색대도 움직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눈을 피하여 조심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낮에 당당하게 큰 길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내가 예수다”

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백성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예수다.” 이렇게 오시는 예수님을 누가 신고하겠습니까? 신고하려던 사람, 체포하려던 사람들이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백성들이 종려나무를 들고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가득 메웠습니다. 자기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함성을 질렀습니다. “와~ 호산나. 우리 민족을 구원하실 위대한 왕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물론 이들의 함성은 생명이신 주님, 부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환영보다는 나사로를 살린 표적을 보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줄 민족의 지도자에 대한 기대를 가기고 환영하는 함성입니다. 이 상황을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의 심정이 1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9절,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서로 체념하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의 하는 짓이 다 쓸모없는 짓이 되었다. 포상금을 내걸어도, 군인들을 동원해도, 온 세상이 예수를 왕이라고 외쳐대며 따르니 어떻게 하겠느냐?” 체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감히 예수님을 건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고 하는 무리들이 음모를 꾸며 한밤중에 특공대를 파견하여 예수님을 체포했고, 새벽이 오기 전에 로마 권력의 도움을 받아냈고, 모든 법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악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14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대통령들이 움직일 때는 기관총이나 화학무기로 공격해도 끄떡없는 차를 탑니다. 10억 원이 넘는 차입니다. 거기에다가 겹겹으로 경호원들이 둘러싸고 움직입니다. 옛날 차가 없는 시절에 왕들이 움직일 때는 백마를 타고, 경호대가 에워싸는 가운데 움직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남을 죽일 수 있어도,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죽으려는 자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민족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려는 길입니다. 오히려 죽이려는 자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고, 죽으려는 예수님은 생명의 빛을 비추며 당당하고 위대한 길을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15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왕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십자가의 길은 이렇게 당당한 길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을 걸으며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외로움도, 미움의 시선도, 칼도,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떨리는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시는 길에 그 고삐를 잡고 함께 걷는 상상을 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민족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의 장엄하고 당당한 모습, 그 모습이 가슴 떨리는 감동으로 나의 마음을 울컥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십자가의 길을 당당하게 가셨는데 우리가 백마를 타려고 해서 되겠습니까? 처음 우리 교회에 왔을 때 박종균 원로 안수집사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 평양 산정현 교회를 섬겼던 조만식 장로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산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조만식 장로님은 자기의 제자인 주기철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섬기는 산정현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스팔트가 없어서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었는데, 교회 오면 아이들이 벗어놓은 신발에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배드리는 동안 조만식 장로님은 신발 하나하나를 들고 그 흙을 다 털어서 신발장에 정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조만식 장로님이 교회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 드린 후 박종균 원로안수집사님께 “이와 비슷한 일을 찾아서 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다음 주일 아침에 일찍 오셔서 현관 입구에서 주보를 들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때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백마 타고 으스대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셨다면 우리는 그 발에 향유옥합을 붓고, 그 고삐를 잡는 것으로 가슴 떨리는 감동을 느끼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결혼해야할 처녀들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백마 탄 왕자와 함께 살면서 그 뒷바라지 하려면 여러분들의 인생이 피곤할 것입니다. 총각들도 백설 공주 기다리지 마십시오. 백설 공주는 이 세상에 한 명 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 십자가의 길을 가는 길은 백마 탄 왕자가 되는 길이 아닙니다. 백설 공주가 되는 길이 아닙니다.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길입니다. 스스로 낮아져서 종이 되는 길입니다. 그 길을 당당하게 가는 것입니다. 가슴 떨리는 감동으로, 그 거룩한 헌신으로 가슴 쫙 피고 걷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번 주 심방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할 때의 고통스러운 이야기, 살아온 세월에 맺혀있는 고통들을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세월들을 살아오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비바람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너무 모진 바람이 불어와 앞길을 막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길입니다. 주님은 당당했고, 주님을 막으려는 세력이 오히려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주님 바라보면서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이런 담대한 행진에 동참하는 여러분이길 기도합니다.

 

 

 

호산나

김상복 목사

2000년 전 오늘,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은 처음 2년에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지만 3년째로 접어들자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경계하였습니다. 사사건건 흠을 잡았고 비판했으며, 심지어 죽이려고 사람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아직 십자가의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악한 손길이 벌써 예수님을 향해 달려들었으므로 위협을 느끼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고 그 대신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에서 주로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며 앞으로 다가올 십자가를 묵상하며 지내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으셨고, 어제 밤에는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베다니에는 '문둥이'라고 불렸던 시몬과 나사로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격리되어 많은 고통과 외로움을 겪던 문둥병자 시몬이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목숨을 걸고 좇아가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이 문둥병에서 고쳐주소서.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했더니 예수님이 고쳐주셨고 그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한편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만에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사람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두 집안이 총동원되어서 좋은 음식을 준비해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대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주무시고 다음 날 아침에 예루살렘을 향해서 출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벧바게라는 마을로 보내셔서 어린 나귀를 끌고 오게 하시고는 그것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는 유월절 축제일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모이는 때였습니다. 그들이 메시아인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나와 '호산나'를 외치며 영접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도 그 예루살렘 군중에 끼어서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언덕 꼭대기에 서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신 후 서서히 입성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첫째, 기적의 예수님입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내어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표적을 행하심을 들었음이라"(17절).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그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나사로가 천을 두른 채 걸어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시몬의 문둥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불치병인 문둥병은 죄를 상징합니다. 한 번 걸리면 가족과 동네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성밖에서 고통을 당하며 외로운 일생을 보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도 죄의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 2000년 전에 문둥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분이 오늘 이 자리에도 오십니다. 우리도 기쁨으로 그 군중 속에 뛰어 들어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그 분을 맞이합시다.

 

둘째, 예수님은 승리의 왕이십니다. 죄, 마귀, 지옥과의 전쟁에서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승리를 축하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서 흔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마귀와 죄성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자이십니다. 그 분은 모든 것을 능히 하실 수 있고 여러분과 제게 인생의 영원한 승리를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혹시 인생의 패배를 느끼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 아침에 예수님을 맞이하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인생의 모든 전쟁에서, 그리고 영원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와 외치되 호산나!" 하였습니다. '호산나'란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호산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 지옥, 세상, 악한 습관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그 분이 지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마음껏 맞이하시고 그 분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십시다!

 

넷째, 예수님은 영원한 찬양의 대상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찬양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 그 분께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돌려야 합니다. 사람은 찬송의 대상도, 예배의 대상도 아닙니다. 오직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시며, 죄의 문둥병을 고치시고, 영적인 죽음에서 영원히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찬양의 대상입니다. 그분에게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있을지어다!

 

다섯 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즉 성육신(聖育身)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모습을 뵐 수가 없지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의 찬송과 영광을 영원히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향하여 오고 계십니다. 육신을 입고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이 아침에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십시다!

 

여섯 째,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 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마음껏 그 분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분이 여러분의 가슴속 보좌에 앉으셔서 여러분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이나 언어나 태도나 감정이나 행동이나 습관이나 인격이나 삶의 목적이나, 모든 것에 있어서, 여러분이 저 천국에 이를 때까지 그 분을 모시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그 분을 순종하며 그 분의 지배를 받으며 온전히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있을지어다!

 

끝으로, 겸손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4-15절). 예수님은 전쟁을 상징하는 말을 타고 왕관을 쓰고 칼을 차고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겸손을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두 번 째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흰말을 타고 성령의 검을 들고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오실 때 기쁨으로 맞이하시고, 여러분 마음속의 보좌에 앉혀 드리고, 그 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백마를 타고 철장을 가지고 통치자와 심판자로 오실 때에도 기쁜 찬송을 부르며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를 향하여 오시는 기적의 주님, 승리의 주님,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육신하신 분, 우리의 왕, 처음에는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셨지만 언젠가 다시 백마를 타고 심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껏 맞이하면서, 2000년 전의 그 무리와 함께 호산나 찬양을 합시다.

 

 

 

너희 왕을 보았느냐?

박조준 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 님께서 갈릴리에 계시다가 여리고로 오셨고, 여리고에서 다시 험한 산골짜기 길을 거슬러 올라 가서 베다니 마을에 이르시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벳바게라고 하는 마을에 가시기 전에 에수님 은 두 제자들을 특별히 보내서 맞은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구하여 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 래서 이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입성하 신 것입니다. 그때는 바로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때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다 넘 으셔서 겟세마네 동산 기슭으로 내려가며 기드론 시내 쯤에 가게 된 때에는 무리의 수가 더욱 많아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시온 산 언덕으로 올라가시면서 그리고 예루살렘성 가까이 나아가시게 되었습 니다.그때 함께 가던 여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땅에 펴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어린 아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 시는 왕이여! 하며 대대적으로 환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행차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것을 구경하기 위하여 한 시간 이상 거리에 나가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대통령이나 어느 유명한 손님, 심지어 우주인이 온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듭니다. 굉장합니 다. 제가 몇 해 전에 영국 런던에 들렀을 때 그 날이 영국의 무슨 축제날인데, 엘리자벳 여왕이 자동차를 타지 않고, 여덟 필의 훈련된 말이 끌고가는 마차에 앉아서 런던 탑에서부터 웨스터민 스터 사원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닭털을 단 모자를 쓰고 붉은 옷 저고리에 까만 바지를 입 은 근위대가 수 백명 말을 타고 여왕을 호위하고 가는데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예루 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만왕의 예수님 행차는 그렇게 굉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매년 이 종려주일에는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곳에서부 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부르면서 감람산을 넘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예루살렘으 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가 있는 곳, 예수님의 시체를 두 었던 곳에 세운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거기까지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풍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는 대로 사복음서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승리적인 예루살렘 입 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2장 12절부터 19절까지는 간단하게 기록되었고, 마태복음 21장이나 마가복음 11장, 그리고 누가복음 19장은 이보다 좀더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 다. 누가복음 19장 35절에 보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 하였 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겉옷을 벗어 깔아 붉은 카펫을 대신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7절과 38절을 보면 예수님이 감람산 가까이 오실 때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 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였습니다. 이 광경 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그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고 대답하셨 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 다.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그 왕을 통해서 이 세상의 혼란과 인간의 병적 문제를 해결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우리의 왕은 오셨습니다. 오늘 뜻깊은 종려주일에 일어난 사건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주시 기 바랍니다. 1. 우리의 왕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하나님의 계획은 그 왕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애굽에서 나올 때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 분명한 약속 중에 하나가 민수기 24장 17절과 19절에 있습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 엘에게서 일어나며 ...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였 습니다. 여기 예언자가 한 홀 즉 왕, 주권자, 즉 왕에 대해서 분명하게 예언하였습니다. 세기를 통해 내려오는 동안에 이 약속은 반복되었고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이 왕이 오시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왕은 유대 사람만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이 방인들을 다 통치하십니다. 그는 이 땅에 오신 이래 이 세상에 평화와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누가 그 오시는 왕이십니까? 그 대답은 어린 나귀 타시고 봄 날 예루살렘으로 승리적으로 입성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왕에 대한 또 하나의 승리이 기도 합니다. 예수님 나시기 500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스 가랴 9장 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 울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하였습니다. 물론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 신 왕으로, 예언자로, 제사장으로 임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나셨습니다. 사실 그가 나신 곳은 마굿간 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그를 찾아온 박사들이 묻 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마 2:2)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설교하셨습니다. 니고데 모에게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고 경고하셨습니다(요 3:3). 그는 제 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왕으로 죽으셨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습니 다. 그때 예수님은 서슴지 않고 그렇다 고 대답하셨습니다(눅 23:3). 빌라도는 이것을 이해하였 습니다. 그래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명령할 때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게 유대인의 왕 예수 (마 27:37)라고 써 붙이게 지시하였습니다. 오늘 이 종려주일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날입니다.

2. 우리 왕은 다시 오십니다.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 리를 위해 고난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고난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 다.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40일 후 에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줄거리입니다. 이것은 또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몇 해 후에 사도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담대히 증거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가 장 지식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왕이 다시 오시고 그가 우리 를 심판하신다고 사도행전 17장 30-31절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 하라 하셨다고 하면서 그 까닭은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 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절정적 목적의 확증입니다. 그 목적은 그 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땅을 심판하고 다스리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듭거 듭 왕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2편의 주제도 왕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천사들을 통해 약속한 것도 왕이 다시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는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오겠다 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내 용을 보면 무려 300번이나 넘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 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우리의 왕을 만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왕 앞에 서 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우리의 왕, 우리의 구주 앞에 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우리의 심판자로 서실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솔직하게 경고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고 하였습니다(빌 2:10-11). 여러분! 우리 왕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이것을 꼭 믿습니까? 그러면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3. 우리의 왕은 이미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신약성경 전체에 125번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 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영광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몇 곳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벌써 우리 가운데 실재하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주님께서 바리새파 사 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 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 희 가운데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너무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생을 주님이 지배 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벌써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찬송가대로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래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하여 확장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골 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주를 믿는 사람은 어두움의 권세 밑에서 건짐을 받아 그 의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주님을 영접할 때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립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 하늘시민의 확증을 얻습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 거듭나고 새 마음, 새 뜻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빌 4:13) 능력과 신념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 그의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특별히 부르심을 받아 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루어집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면 여러분이 분명히 아실 것은 하 나님의 사랑에서 누구도, 그 어느 무엇도 여러분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왕이 오십니다. 아니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영접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 왕을 영접하였습니까? 이사야 9장 7절에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 라 고 하셨습니다. 첫 번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로 보지 못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왕을 보십니까? 그리고 그를 영접하십니까?

 

 

 

진정한 승리의 힘

조동천 목사

최근 잦아진 팔레스타인 무슬림의 테러범의 자살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 이스라엘 경찰이 새로운 아이디어의 ‘비밀 병기’로 돼지기름을 이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합니다. 이스라엘의 일간지 ‘마리브’는 2월 12일, 이스라엘 경찰은 자폭테러가 빈발하는 버스 정류장, 쇼핑센터, 학교, 공공건물에 돼지기름을 담은 통을 거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이슬람교에선 돼지를 만지면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테러범들이 폭탄 테러를 행하다가 걸려 있는 돼지기름이 몸에 묻게 되면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 자폭 테러를 삼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무슬림 테러범들은 테러를 일으키다 잡혀 죽게 되면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서 처녀 70명의 대접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테러하다 돼지기름이 몸에 묻게 된다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유대교에서도 불결한 동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스라엘 경찰은 최근 유대교 율법학자들에게 돼지기름 사용의 승인을 요청했답니다. 예루살렘 랍비법원의 율법학자인 엘리제 모세 피셔는&#43090;인명을 구할 목적으로, 돼지기름 통을 내거는 것을 막는 유대법은 없다며 사용을 허용했습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또 만약 경찰이 돼지기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수만 명의 정통 유대교인들이 돼지기름을 채운 장난감 물총을 테러 용의자에게 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의 ‘야코프 에드리’ 국방차관도 극단적인 테러를 막을 수 있다면, 돼지기름 사용에 대찬성&#43091;이라고 말했습니다. 돼지기름통이 효력을 발휘하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돼지기름을 담은 물총을 상시 휴대케 하여 호신 공격하는 주술작전을 확대할 것이라 합니다. 실제 러시아 보안군은 체첸 반군들의 자폭 테러를 막기 위해, 작년부터 반군들의 시체를 돼지가죽으로 싸서 매장하고 있으며, 실제억제예방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 되었다고 이스라엘 언론은 전하고 있습니다(2004.02.13 조선일보 참조)

 

사실 우리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 같은 것에 이런 엄청난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천대했던 돼지에게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테러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돼지고기를 부정하다고 설정해 놓은 구약성서의 이면에 이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정한 승리의 힘은 어떤 것일까요? 삶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과 전혀 다른 힘이 성경에는 존재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성패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진정한 힘이 어디 있는가! 또한 승리의 길은 과연 어디 있는가? 무엇을 보고 ‘우리가 할 만하다 또는 포기해야 하겠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세상의 시각과 충돌이 되지만 아주 독특한, 인생에서 있어서 진정한 힘과 영광과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기를 원하십니다.

 

1. 서민들이 추구하는 힘: 능력, 실력(12-13절)

 

이적만 보고 떠드는 무리들: 큰 무리들 “이스라엘의 왕"

첫번째, 큰 무리들이 바라보는 힘, 또 진정한 승리의 길은 독특하게도 아주 강력한 카리스마, 즉 이적과 기적같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힘(power) 즉 실력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12-13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명절에 온 큰 무리는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수 십 킬로미터 내의 사람들이 다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갔습니다. 이 큰 무리들이 지금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보고서 너무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이 종려나무가지는 승리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고대에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군이나 왕으로 등극한 왕에게 존경과 희열을 표현하며 환영하기위해 맞을 때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마카비 독립운동의 영웅 시므온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이렇게 환영했습니다(I Macc. 13:51). 마지막 때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어린 양을 찬양할 때도 종려나무로 환영합니다(계 7:9).

그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시 118:25).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구주로 보낸 다윗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언약의 왕이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모두 훌륭한 고백이었습니다. ‘호산나’를 통해서 구주로 고백하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통해서 메시야됨을 고백하고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면서 그분의 정권·권세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리들 즉 일반 서민들이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찬양을 하고 영광을 돌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힘 그리고 위대함, 왕으로서 구주로서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외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17-18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17-18절). 지금 ‘예수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그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하고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이 능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제적인 이 기적적인 힘 그리고 세상을 구원할 만한 권능, 실력 그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기적에 대해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고 듣고 따랐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적을 보았으니 그 능력에 어떤 사람이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은 이처럼 아주 강력한 능력과 기적... 이런 것들을 숭배합니다. 이것들을 구원의 길로 생각하고 거기에 승리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이나 일상적인 평범함 그리고 낮아지는 것! 이런 것들은 아주 무력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거기에는 구원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적어도 죽은 자를 살릴만한 강력한,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을 거스릴 수 있는 커다란 힘을 느낄 때야 ‘아! 구원의 길이 여기 있구나. 이제는 우리가 이기겠구나! 이제는 우리가 승리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엄청나게 거대한 물결을 막아서는 큰 방파제 같은 것, 또는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 이런 것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런 힘이 느껴질 때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다’ 그것에 몰두하고 그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2-23)”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표적, 눈에 보이는 힘을 지향하고 그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승리의 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기적들의 대표적인 것들을 기록한 후 요한 기자는 그 기적들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요 12:37). 결코 사람들은 상대편의 능력에 따라서 그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이권에 관계될 때만, 믿어주고 따릅니다. 기적이나 능력의 효과는 이처럼 금새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추구했던 능력이 순간적으로 버림을 받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됩니다.

 

2.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힘(19절): 인기

 

두 번째,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세상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의 개념이 나타나 있습니다. 19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바리새인들이 갑자기 풀이 죽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하는 모든 일이 더 이상 쓸 데 없다 헛일을 하고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들이 갑자기 예수에게 항복하는 듯한, 그리고 “그가 이겼다”라고 자기들의 실패를 인정하는 듯한, 이런 고백을 하는 강력한 힘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지금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까?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라는 말속에서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은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근거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호응도, 여론, 사람들의 칭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따르느냐에 따라서 일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인정해 주느냐, 얼마나 높이느냐, 얼마나 나를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바리새인들로 상징되는 지도급 사람들의 특징은 보이는 데, 또 사람들의 인기에, 사람들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승리는 무엇이냐? 영광은 무엇이냐? 인생의 성공은 무엇이냐?” 그것은 얼마나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내 이름을 들먹이고 또 나를 인정해 주느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의 모습에서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정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 백성들의 인정에 급급했습니다. 철저히 사름들의 평가에 의존해서 실패와 성공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고도 무서운 시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힘이 현대와 같은 대중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극에 달했고, 민주주의가 발달한 세상에서는 더욱 중요한 실제적인 파워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사람들의 인기의 가치를 세상이 얼마나 비중있게 두는지 알 수 있습니다.

2002. 4. 7일 일간지에는 "씹던 껌"이 경매에서 1만달러에 낙찰되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2001년 미프로야구 월드시리즈 7차전 결승타의 주인공 루이스 곤잘레스(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강타자)의 "씹던 껌"이 바로 그것이다. 곤잘레스가 스프링캠프 훈련 도중 안타를 치고 1루에 진루한 뒤 씹다 뱉은 5센트짜리 껌을 재이슨 가버트라라는 사람이 경호원에게 부탁해 건네받은 것이다. 미네소타주에서 스포츠 기념품가게를 하고 있는 가버트는 흙이 묻은 껌을 유리 상자 안에 진열하고 현지 라디오방송의 한 디스크자키와 함께 곤잘레스의 "씹던 껌"을 인터넷 경매에 올렸다. "씹던 껌"을 팔아 한 고등학교의 장학금으로 쓴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씹던 껌"이 인터넷 경매에 오르자 경매가는 20달러로 시작되었으나 순식간에 2,000달러까지 폭등하였고 드디어는 1만 달러라는 고가에 낙찰되었다. 낙찰 받은 사람은 ‘무엘러 스포츠약품사’의 사장인 커트였다. 그는 "곤잘레스가 "씹던 껌"은 여느 학교 책상 밑에 붙어있는 껌과 똑같다"고 증언했다. 그 껌이 정말 곤잘레스의 껌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어 결국 곤잘레스가 TV 카메라 앞에서 나가 다른 껌을 씹고 DNA검사를 위해 플라스틱병에 밀봉된 채 라디오방송국으로 보내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지난 89년 메이저리그 데뷔 첫해부터 11년간 텍사스에 몸담았던 곤잘레스는 96· 98년 AL MVP를 차지했고 지난해에도 35홈런을 포함해 타율 0.325에 140타점을 기록한 선수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곤잘레스가 이번 일에 대단한 만족을 표시하면서 "앞으로 이런 좋은 자선행위를 위해 부탁만하면 얼마든지 껌을 더 뱉어 줄 수 있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만약 제가 껌을 씹고 뱉었다가 흙을 묻혀 주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가치가 나가겠습니까? 아마 욕이나 잔뜩 먹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가치를 높이는 일이기에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거기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장나라’라는 가수이자 연기자인 작은 소녀와 같은 여자가 그렇게 엄청난 재력과 힘과 영향력을 끼치고 ‘한나라당’에서 자기 당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데 그것을 거절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어린 소녀가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기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다 그녀를 따르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고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힘입니까?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 주고 따르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승리, 영광의 길이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를 찍어주면 됩니다. 따르면 됩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힘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이고 칭송입니다. 이제는 신이 점지해 준, 신이 내린 사람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상실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아니면 진실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아무런 힘을 발휘 못하는 것 같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직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따르느냐 이것에 따라서 가치도, 성패도 결정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인기있는 직업이나 직장을 가지길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경험을 했겠지만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따르는 것은 너무 너무나 쉽게 변합니다. 진정한 힘이 아닙니다. 허상입니다. 가장 변덕이 많은 것이 군중의 마음입니다. 사실 불과 몇일 있다가 예수님께 호산나를 외쳤던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목청을 돋웁니다(요 19:12, 15). 최근 정치계에서나 사회에서 가장 신뢰했던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말로와 그들의 억울함을 우리는 보도를 통해 무수히 보기도 하고, 그 중에 한 명으로 친히 당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하는 수제자에게 부인을 받은바 되셨습니다(요 18:17, 25, 27).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고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서 역대 대통령들이 초기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얼마나 인기가 좋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다 등을 돌립니다. 작은 일에도. 사람들의 추종은 진정한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칭찬하고 그것이 옳다고 행하는 것이 반드시 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거기에는 진정한 승리, 항구적인 영향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파워! 기적같은 능력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할 것이 안되고, 여론의 호평, 사람들의 인기! 이것도 우리가 행동할 때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이 보시는 진정한 힘(14-16절): 겸손과 섬김(성경을 보고 실현하시는 예수)

 

그렇다면 진정한 힘이 무엇이냐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 힘인가 승리의 보장인가를 14-1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4-15절).

이 어린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섬기려고 오신, 그 섬김의 길을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나귀도 조그만데 거기다 어린 나귀를 탔다는 것은 더 작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비우는 겸비함,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이시여”하면서 그분을 최고의 권력으로 위대한 분으로 인정을 하는데 그분은 스스로 ‘나는 겸손하다 나는 연약하다 나는 초라한 사람이다’라고 고백하는 외치는 듯한... 온몸으로 그들의 칭송의 소리를 막아서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생각하는 진정한 힘은 어디 있느냐 승리의 길, 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인류 구원의 길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자기 비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겸손히 섬기고 낮아지는데 진정한 힘이 있다는 이것을 우리에게 지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고후 13:9)

 

 

그렇다면 이런 겸손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힘(power)! 이런 원리를 예수님은 어디에서 깨달았을까요? 어디에 근거해서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15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기록된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록된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즉 말씀의 시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생각하는 진정한 힘은 성서에 기록된바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그 말씀을 실현하는 삶이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그대로 자기 삶에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대로 그것이 비록 어린 나귀를 타는 초라하게 보이는 모습인 것 같지만 거기에 인류 구원의 힘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파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스가랴 9:9 에서 나귀가 겸손을 의미한다는 것을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겸손한 사람이 바로 왕이고 공의로운 분이며, 구원을 베풀 분이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어린 나귀를 타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높이는 것에 치중해 있는데 예수님은 이런 칭송의 소리를 들으시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 안에서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개인적인 영광과 출세의 사건으로 보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 안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호산나 소리를 들으시면서 주님은 어떤 행동을 취하셨습니까? 한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것은 큰 무리가 외치는 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외치는 말을 들었으면 전세를 내서라도 백마를 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왕의 승리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은 백마가 아닌 나귀새끼를 보고 타실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의 길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의 길이 진정한 구원의 길이고 구원의 힘이셨다는 것을 믿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스가랴 9:9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영광의 환호성 속에서 나귀를 볼 수 있는 눈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사로잡혀서 살았기 때문에 왕의 소리를 들으면서 겸손한 나귀를 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가 된다는 것이 예수 생애의 역설입니다.

스가랴 9:10절을 보시면 바로 이분이 온 땅을 구원할 구주인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이렇게 나귀를 타신 겸손한 분이 실상은 온 땅을 통치하실 왕이십니다. 겸손과 전세계의 통치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는 통치력, 그 힘은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겸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는 것에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이런 독특한 원리의 이유는 명백합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겸손함, 자기를 낮추는 것, 비우는 것은 놀랍게도 스가랴 9:11절을 보면 궁극적으로는 피흘려서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까지로 나아갑니다. 스가랴에서도 구원자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슥 9:11).

물 없는 구덩이 즉 아주 절망한 자리, 요셉이 던져졌던, 팔려 넘겨졌던 그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슥 9:11). 이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이유는 섬기려고 왔고, 섬기기 위해서 언약의 피를 흘릴 그런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서 요 12장으로 다시 넘어가면 14절에 예수님께서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고, 그 말씀이 규정하는 인류구원의 힘은 겸손에 있고 자기 비움에 있고, 그 왕의 모습은 무엇이냐면 백성들을 위해서 언약의 피를 흘려 죽음으로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그대로, 기록된 말씀대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갇힌 자를 구원하는 것이 언약의 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귀를 타심으로 예수님은 언약의 피로 구원할 것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돌아가실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32)”,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 19:28)”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환호 소리와 나귀를 합쳐서 언약의 피의 주인공이 당신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의 혈액에는 백혈구와 적혈구라는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그 중에서 적혈구는 아주 사랑이 넘치는 친구입니다. 우리 몸에 있어 산소란 건 정말 중요한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적혈구는 언제나 이리저리 다니다, 산소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그것을 내어 줘 버리는 겁니다. 자신의 것도 조금만 챙겨두면 좋을텐데 그러지 않고 적혈구는 100%다 줘버립니다. 그리고는 4일쯤 살아 있다가 몸의 어느 구석에선가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마는 겁니다. 원래 120일 정도를 살 수 있는 수명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적혈구는 계산적인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바로 이런 사랑을 행할 줄 아는 작은 생명들이 모여 이루어 졌습니다. 이 말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안에는 바로 이런 사랑을 행할 능력이 누구에게나 다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심장 속에 깊이 담겨있는 이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론적으로 진정한 힘이 어디 있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힘과 위대함, 구원하는 능력은 특권을 다 비워내는 데 있습니다. 이미 지니고 있는 왕의 권세를 마치 나귀처럼, 또는 하인이나 되는 것처럼 아니, 제물처럼 피를 흘려서 자기를 다 희생하는 데 거기에 진정한 왕의 힘, 구원하는 능력,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세상이 말하는 힘과 다른 진정한 힘입니다. (가정이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도 이 승리의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만심은 운명을 박차고 죽음을 비웃고 야망에 사로잡혀 지혜도 은혜도 두려움도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죄다”(섹스피어)

“교만은 덕 속에 나와서 덕의 모습을 가장하고 덕을 해하는 것이다. 마치나무 벌레가 나무에서 나서 나무를 해하는 것과 같다. 다른 악은 외부를 치는 것이나 교만은 영을 치는 것이다. 악은 한쪽만 치나 교만은 여러 면을 친다.”(성 어거스틴)

“대개의 큰 과오 밑에는 교만함이 있는 것이다.”(존 러스킨)

“교만은 어리석은 자에게 반드시 따르는 악덕이다.”

어떠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그 강력한 힘,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적인 힘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것을 기대할 것이고 또 여러분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생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론, 인기, 사람들의 인정, 이것이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는 분명히 여러분과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나귀를 타는 겸손함과 자기희생적인 사랑, 그것만이 세상을 구원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위대함이다’ 그렇게 성서가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어떠십니까? 믿어집니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정말 추구하고 바라보고 나아갈 것이 바로 이것인지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인류를 구원하는 바로 그 1주일간의 사역 속에서 주님이 세상에 보여주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명료하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결론: 섬김의 능력: 포기하는 바리새인들(17-19절)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기에 대단히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우리들의 추구하는 기도의 제목과 교회에서 봉사하는 모든 삶의 태도 속에서 세속적인 사람들, 큰 무리들이건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동일한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데 ‘정말 이 교회 행사나 교회가 잘 되는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생각할 때는 아주 큰 이적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큰일들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 같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이는 것처럼 대단히 큰일 즉, 눈에 띄는 일들이나 큰 행사들을 행하는 것이 그것이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다, 교회 본질이다, 내 보람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제목을 항상 내놓을 때도 큰일들을 이루어달라는 기도제목만 내놓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의 태도도 우리가 금방 취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내가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열심히 일하는 것, 19절 그대로 입니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19).”라고 낙심하는 경우는 무엇이냐면 아무도 내 수고를 알아주지 않을 때, 인정해 주지 않을 때는 내가 하는 것이 다 쓸데없다 이렇게 낙심합니다. 그리고 조금만 해도 누가 막 칭찬해 주고 알아주고 박수 쳐 주고 권사님들이, 장로님들이, 목사님이 알아줘야 내 하는 일이 비로소 한 보람을 느끼고 쓸 데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속적인 힘, 그것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왜 낙심합니까? 수고해놓고. 왜 힘들어합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박수 쳐 주지 않으니까. 그 바리새인들이 기대하는 그런 세속적인 힘과 성공의 여부를 그대로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이런 것들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냐면 전부 다 호산나! 왕이여! 외칠 찌라도 그것과 전혀 개의치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겸손하게 내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가며 남들이 왕이여 외칠 찌라도 ‘나는 섬기러 왔노라 나는 낮아지러 왔다 나는 피 흘리러 왔다... 나는 내가 섬기고 희생하고 내가 교회를 위해서 뼈가 빠지게 일하고 내 많은 것을 드리고’ 계속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칭찬하는 데 그것이 무슨 상관이야‘ 그러면서 계속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자기를 감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거기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이 위대함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파워라고 이 성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사실은 교회 안이건 교회 밖이건 이 세속적인 힘, 능력과 인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대함, 여기에 다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영광 돌리고 박수 쳐 주고 다 인정할 때 ’내가 성공했구나! 목회를‘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또는 손 얹고 기도한 즉시 병든 자가 일어나고 기적이 나타나고 큰 교회를 이루고 이래야만 ’내가 진정한 성공을 했구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구나!‘ 이렇게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섬기고 낮아지고 자기를 섬기는데 진정한 구원과 파워가 있다는 것! 그것을 여러분 믿으셔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어느 날 지극히 높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지금 왕으로서의 동등된 지위를 누릴 것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나귀의 형체를 가져 라는 말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5-1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비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의 형체를 갖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겸손히 모든 세상의 칭찬에 귀를 막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이것을 16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의미를 몰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이후에 즉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이후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나는 중소기업인 D주식회사 총무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들어온 지 2년에 주임이 되었고, 올해 연말쯤에는 대리로 진급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입사한 김주임은 나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별로 필요 없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사소한 일들로 시간을 보낸다. 무슨 잔정이 그리 많은지 후배들 뒤치다꺼리하기 일쑤였고, 아무도 손도 안 대는 서류함을 거의 날마다 정리하느라 퇴근 시간을 넘겼으며, 아침마다 다른 이들의 커피 심부름이나 하는 그가 내겐 너무도 무능해 보였다. 게다가 그는 남자다운 박력도 없었다. 어쩌다 상사에게 후배들 앞에서 이유 없는 질책을 당하게 되었을 때도 고개를 떨어뜨린 채 견디어냈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올 땐 어김없이 커다란 쟁반에 커피 여러 잔을 들고는 책상에 놓아주는 것이었다. 박력을 자랑하던 내겐 그런 그의 모습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그는 승진에서 누락될 것이 뻔하였고, 같은 동기로 들어온 나는 그런 그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휴직계를 낸 것은 그의 아내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박주임, 그동안 고마웠어요. 입사동기로서 끝까지 함께 있지 못해 정말 죄송하네요. 그래도 아내 병간호를 할 사람이 없으니 어쩌겠어요. 제가 몇 달은 아내 곁을 지켜 주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나는 자신했다. 이 기회에 상사에게 나의 활약상을 확실하게 보여 주리라...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가 남기고 간 빈자리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 큰 것이었다. 아침마다 마실 수 있었던 향긋한 커피는 기대할 수 없었고, 향기 나던 화장실은 들어가고 싶지 않을 만큼 더러워졌으며, 휴지통은 늘 휴지로 넘쳤고, 서류들은 어디 있는지 뒤죽박죽 섞여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부서 내 사람들은 점점 짜증난 얼굴로 변해갔고, 서로에게 화를 내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큰소리가 오가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가득했던 화평은 어느새 조금씩 떠나가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상사의 짜증을 다 받아내느라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문득 김주임이 끓여다 준 커피가 그리워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간 것은 그의 바보스럽게 웃던 미소를 잠깐이라도 느껴 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가 쓰던 책상 유리 속 조그만 메모지 안에 담겨진 글귀 한 줄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내가 편할 때 그 누군가가 불편함을 견디고 있으며, 내가 조금 불편할 때 누군가는 편안할 것이다.”(<낮은 울타리 10월호>의 글을 약간 줄여 놓은 것입니다.)

결국은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아! 이 사람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구나. 말씀에 능력이 있고 그럴 때 사람들이 이렇게 따를 수밖에 없었구나!‘ 이렇게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이 섬김의 길을 가시길 바라고 진정한 파워를 드러내는 주님의 겸손의 능력과 섬김의 힘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능력이나 실력을 추구합니다. 인기 있는 것에 몰두 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 섬김의 능력이 이 민족의 가장 위대한 가치관으로 바꾸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왜 환호하는가?

이수용 목사

수난주간의 첫날인 오늘을 교회에서는 보통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물론 본문 12-13절에서도 보듯이 사람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갔던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향해 환호했던 것입니다. 왜 환호했습니까? 본문 12-13절에는 명절, 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 외쳤다고 합니다. 마21:10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했다고 전합니다. 본문 17-19절은 이 사실을 더 흥미있게 전합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저 분은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고 열심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그렇게 반대하고 미워하던 바리새인들이 체념조로 말하기를 "당신들이 그렇게 열심히 선전하지 않아도, 보시오, 이미 온 세상이 그를 따르고 있지 않소?"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예수님을 향해 환호했던 것입니다. 왜 환호했습니까?

 

본문 12-13절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갔다고만 전하는데, 공관복음서들은 사람들이 옷도 벗어서 예수님이 타신 나귀 위와 길에 깔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밑에 옷을 까는 것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고 높이는 행위입니다(왕하9:13 참조). 이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문 13절에서 보는 대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환호했던 것입니다. 마21:9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군중들이 예수님을 이사야 11장 1절 이하에서 예언된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던 그 구원자, 이새의 뿌리 곧 다윗 왕가에서 나올 그 왕, 즉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그 메시아로 여겼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호산나"라고 외친 것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그를 따르며 환호했던 것은 이제 곧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만 불과 몇 일만에 맥없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열광하며 환호하던 "온 세상"은 다 어디 갔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고함지른 사람들이 바로 몇 일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요 우리의 메시아"라고 그토록 열광하며 환호하던 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시기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막15:10) 예수를 죽이자고 충동하자 그 무리들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는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라고 고발했습니다(눅23: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충동과 회유에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것이면서 이 무리들은 왜 그토록 환호했습니까?

 

이스라엘 군중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있던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자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질렀고, 빌라도가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어도 무작정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빌라도가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말하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자기는 책임이 없을 것임을 선언하자 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대답하기까지 했습니다(마27:24-25). 그렇게 눈에 핏발이 서서 예수님을 죽이고야 말겠다고 할 사람들이 왜 바로 그 전 날까지만 해도 그토록 열광하며 환호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라는 그들의 요구가 얼마나 격렬했으면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 민란이 일어날 것으로 빌라도가 우려할 정도였습니다(마27:24).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돌변입니까? 막14:1-2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무슨 말입니까? 처음에는 만일 누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면 민란을 일으킬 것 같았던 군중들이 하룻밤 사이에 이제는 예수를 안 죽이면 민란을 일으킬 집단으로 돌변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극렬한 대조를 보이며 태도를 바꿀 사람들이 왜 그토록 환호했습니까?

 

그들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예수님을 마1:21에서 고지된 바와 같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이"로 알지 못했다는 데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입성하실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며 곧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막11:10에 따르면 그들은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정치적 왕, 정치적 메시아로 보았으며, 그들이 기대하던 나라도 정치적인 것이었고 그들이 바라던 구원도 정치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왕이시고, 그가 이루실 구원은 무엇보다도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그가 세우실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정치적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바뀌고 뒤집힐 수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보세요. 이념상으로는 완전히 대치되는 정당들이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서 "공조"니 "연합"이니 잘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념적으로 도저히 같이할 수 없는 두 정당 사이에서 왔다갔다 얼마나 쉽게 당적을 바꾸며 심지어는 얼마나 간단히 의원을 꿔주고 빌리고 합니까? 또 그래야 장관자리도 하나 얻어앉지 않습니까? 진리를 알고 진리를 소유하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무엇이든 또 얼마든지 돌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를 바로 깨달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이해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쉽게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의 유혹에 넘어가고 주님을 배신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등을 돌리게 됩니다.

 

주님과 그의 가르침과 그의 하나님나라사역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다시 말하면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셨으며 큰 무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와 환호했는지 제자들도 몰랐고 예수님의 최측근의 하나였으며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요한 자신도 몰랐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조차 몰랐던 것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하시려는 죽음의 의미도 그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도 알지 못했습니다.

 

(동시통역하시는 분께: 성찬식 관계로 시간이 부족할 경우에는 아래 한 문단을 생략합니다)

 

오직 머리좋고 눈치와 계산이 빠른 가룟 유다만이 예수님이 곧 죽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재빨리 발을 뺐습니다. 그것도 그냥 발을 뺀 것이 아니라 그답게 챙길 건 다 챙기며 발을 뺐습니다.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가 얼마나 돈을 밝힌 사람인지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자에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줘야지 그렇게 허비하면 어떻게 하느냐 분개하며 "여자를 괴롭게 한"(마26:10) 자가 바로 가룟 유다였다고 오늘 본문과 같은 요한복음 12장의 3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 6절은 다음과 같은 설명까지 보태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그는 어차피 죽으실 예수님의 체포에 협력하면서 은 삼십을 챙기는 민첩함과 영리함을 발휘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렇다 치더라도 수제자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이상이 시간이 부족할 때 생략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그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하시려는 죽음의 의미와 그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처음으로 그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며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는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마16:21-22).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무지한 군중들이나 제자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책망하신 주님께서 곧 이어 하신 말씀이 바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였음은 얼마나 의미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도 이해할 수 없었고, 죽는 것은 사는 것이요 살리기 위한 것이며 죽음으로써 산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영적 싸움을 하시는 주님 앞에서 칼을 빼어 휘두르며 아무 의미없는 싸움을 싸워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주님을 버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3,35) 하며 비장한 결의를 보이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지나가는 여종아이의 말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말하던 다른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6:56장).

 

주님과, 주님의 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알지 못하면 주님을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예수님을 향한 환호는 오히려 그를 배신하고 하나님나라의 일에 거스르는 행동으로 돌변할 수 있음을 오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모여들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역사상 유례없이 급증했던 한국교회는 어느새 갑자기 주님을 배반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사탄의 역사의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 냉철히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기를 거부하고 십자가 지기를 회피함으로써 주님을 떠나지 않았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외면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이 사회로부터도 외면 당한 것이 아니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향해 환호했었는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이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의 요구에 대한 거부

김윤기 목사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십니다. 예루살렘 입성 시 환호한 무리들은 통치자들이나 위대한 종교인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 함을 듣고 어디 계신가를 찾는 무리들이었습니다(요 11:55, 56). 이들은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께 드릴 행운의 열쇠나 악대나 시위할 칼이나 창이 아닌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가지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118:25, 26의 인용인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를 연발하며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이 큰 무리는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고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들의 요구에 대한 에수님의 거부를 생각고저 합니다.

 

Ⅰ.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이스라엘의 왕 되기를 요구했습니다.

1) 왜 이들은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했을까요? 이 말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우리 주 예수에게 부여한 존경의 말이었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권은 상실되어 로마의 분봉왕 헤롯이 통치하던 때입니다. 이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나 저제나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가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을 보여주었습니다(요 12:1-11). 많은 사람들은 이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고 따랐습니다(11). 또한 부류는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18) 따르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에서 독립되고 그리고 성경이 약속된 황금시대가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이 황금시대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앞으로 대망하던 메시야가 오시면 이러한 세대가 열릴 것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① 풍요의 세대입니다. (사 51:3) 그 광야가 에덴 같고 그 사막은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② 우정의 세대입니다. (사 11:6-9)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장난하고

③ 죽음과 눈물이 없는 세대입니다.(사65:20)백세에 죽는 사람이 아이겠고

④ 평화의 세대입니다. (사 2:4) 전쟁의 연습이 없는 세대이기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듭니다.

예수님을 좇는 큰 무리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황금의 세대를 가져다주는 정치적인 왕으로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나라에서 해방시켜주는 구원자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종들은 예수에게 큰 기대를 갖고 이스라엘의 정치적 왕으로 모시고자 모였습니다.

그러나 황금의 세대인 풍요와 우정과 평화의 세대 그리고 죽음과 눈물이 없는 세대는 예수의 재림의 날에야 비로소 성취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천년왕국의 소망을 갖고 재림의 주를 대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무리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은 성경을 믿고 그 구약 예언의 성취의 때가 다가옴을 기뻐하고 환호했습니다. 즉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희 무리들의 세속적인 일에 속한 일입니다. 예수를 민족주의 지도자로 로마와 싸워 정치적 승리를 바라는 메시야로 옹립하려 했습니다.

2)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6:1-15에 나와 있는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있었던 오병이어사건입니다. 예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 주신 후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바구니를 남기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 후 즉시 요6:14,15에서 이스라엘의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라고 되어 있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표적을 맛본 큰 무리들은 예수를 잡아 억지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정치적 메시야, 민족 해방의 메시야로 세워 두고 이스라엘 민족의 빵의 문제와 로마 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군중의 심리를 아시고 예수는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를 믿습니까? 그리고 왜 따르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의 큰 무리들처럼 왜 우리들은 호산나 대신 할렐루야 아멘을 합니까?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성경을 믿고 메시야 재림 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메시야의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세속적인 생각에서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믿지만 이 메시야를 정확히 모르면 이스라엘의 큰 무리처럼 인간의 빵 문제, 가난문제, 병문제 등 세속적인 축복이나 해결만을 위하여 할렐루야 아멘을 연발하다가 예수를 배신하고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나는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은 정치적 왕에 대한 비정치적인 선언을 합니다.

1) 예수께서 나귀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이 예루살렘 입성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①공관복음에서는(막 11:1-10, 마 21:1-9, 눅 19:28-38)는 예수께서 이미 입성을 준비하고 제자들을 보내어서 나귀를 주께서 쓰시겠다(마 21:3, 막 11:3, 눅 19:31)는 말로 나귀 새끼를 구해서 타고 입성하실 때 호산나하고 예수의 예루살렘입성을 환영합니다.

②그러나 요한복음은 요 12:13b에서 “....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이스라엘의 큰 무리들이 자율적인 행동으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는 그 저의를 파악하신 예수는 항변의 표시로 의도적으로 큰 무리의 환호 뒤에 나귀의 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이 요한의 글을 문맥대로 해석하면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라는 정치적인 왕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리고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환성 후에 나귀 새끼로 예루살렘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과거에 이미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슥 9:9의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는 말씀을 응하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시민에게 군마를 타고 중무장을 갖춘 개선장군의 위풍당당한 입성이 아니라 평화와 겸손의 상징인 나귀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요12:16절에서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께서 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후 영광이 있은 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슥 9:9-10의 성취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2) 또 하나의 증거는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입니다(요 12:44).

본문 요 12:12-19의 병행구절로 12:44-50을 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인 예수의 정치적 메시야 왕됨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항의 표시로 본문 뒤에 12:23-36에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죽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4-50절에서 “예수는 진실로 주의 이름으로 오신 자”이시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가 보내신 특사라고 소리치십니다(15회).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는 “하늘 아버지가 보내신 특사”로서 세상의 심판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요 12:47, 3:17).

예수님은 본문에서 군중의 잘못된 메시야 이해를 교정하기 위하여 요 12:44-50에서 요약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바라는 정치적인 메시야,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고 성도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접한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축복만을 가져다주는 메시야, 질병을 고쳐만 주는 메시야가 아니라 평화와 겸손의 왕이요 그리고 영혼을 구원하시여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요 12:12-27 / 이재철 목사

예수님을 믿고 새가족이 되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삶이 바뀌고 생각이 바뀝니다. 그동안은 내맘, 내 욕심대로 살다가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되는 삶으로 변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잘 믿다가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먼저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며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래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 이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무리들이 열광하며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종려나무는 번영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나귀를 타고 오실 때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아주는 것은 왕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였습니다.

이들은 이 정도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자였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변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왕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유는, 나사로를 살리심을 듣고 예수가 우리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18절)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식민지 하에서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행하심을 보고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려 하자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헬라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제자들에게 간청을 합니다.

헬라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취급하는 민족입니다.

헬라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23-24절)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예루살렘으로 따라가는 제자들도 마음이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더 크냐,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고, 찾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제자들, 무리들, 헬라인의 마음과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변하였습니다. 본인에게 손해가 올 것 같을 때 배신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내 욕망을 채움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이 떨어져서 썪어야 합니다.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죽정이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예수님을 만들어 갑니다. 예수님을 내가 원하는 치유자, 권력가, 재력가로 만들어갑니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만 쓰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죽어야 합니다.

12장 31절 말씀에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세상 임금이란 마귀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아니라 무리들의 마음속을 장악하고 있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만든 예수님을 말합니다.

어떻게 쫓겨날 수 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야 쫓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한 주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① 예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으십시오.

진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이 어디에 주목하고 있는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해야 합니다.

② 기도해야 합니다. (27절)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을 알아주시면 됩니다.

새벽기도 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기도 하지 말고 내가 변화되길 원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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