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요 13:21-30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 13:21-30 /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다; 마 26:20-25, 막 14:17-21, 눅 22:21-23] 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께서는 몹시 괴로워하시며 `내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나를 배신할 사람이 앉아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23) 제자들 중 예수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한 제자가 바로 예수 옆에 앉아 있었는데 24)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으로 이 무서운 일을 할 자가 누구인지를 예수께 여쭈어 보라고 하였다. 25) 그래서 그 제자가 예수를 바라보며 `주님, 그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내가 이 떡을 적셔 주는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떡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떡을 받아먹자마자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빨리 네가 할 일을 하라.' 28) 식탁에 앉아 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였다. 29) 어떤 제자들은 예수께서 돈 관리하는 일을 맡은 유다에게 명절에 쓸 물건을 사오라고 하셨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좀 주라고 하시는 말씀인 줄로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곧 그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 밖은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제자도를 주제로 이어지던 이야기가 배신자를 주제로 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예수께서는 만찬 시작부터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 하셨는데(10, 11, 18) 이제 배신자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는 가룟 유다입니다(26). 그의 배신에 대해 제법 긴 기록이 이어집니다. 요한이 감추어도 좋았을 이 사건을 굳이 기록한 까닭은 발을 씻김으로 상징된 대속의 죽음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고자 한 예수께서 자발적인 선택이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셨으나 인간 구원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맞는 그 길을 의연하게 걸어가셨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 이미 일 년 전쯤에도 예수께서는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또 만찬 시작부터 한 사람의 배신(10, 11, 18)은 계속 언급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배신자의 존재를 언급하시며 괴로워하십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가룟 유다에게 느끼는 배신감,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는 연민의 감정이 섞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한은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는 예수의 모습으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를 증언합니다.
주여 누구니이까(22-25)예수께서는 괴로운 표정으로 다시 배신자에 관해 언급하시자 제자들이 술렁입니다. 제자들은 내가 배신자가 아닐지 불안해합니다(마 26:21-22; 막 14:18-19). 제자들은 배신자가 누군지 궁금합니다(눅 22:23; 요 13:24-25). 결국 사랑하는 자가 예수께 배신자가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6-30)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의 행동 두 가지가 나옵니다. 발을 씻김과 떡 한 조각을 포도주에 적셔 줌입니다. 둘 다 예수의 끝까지 사랑이 담긴 행동입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준 포도주에 적신 떡 한 조각은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와 찢길 살을 상징합니다. “나는 배신자를 알고 있다”는 여러 번에 걸친 언급은 예수께서 유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고 나갑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유다의 어둠도 더욱 짙어집니다.
적용: 당신은 예수께서 행하신 끝까지 사랑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까?
라틴어로 ‘사랑은 고뇌다’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고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고뇌는 갈보리언덕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로 인해 사랑은 고뇌입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그 고뇌가 바로 ‘사랑’입니다.
< 설 교 >
사랑의 향기
요 13:21-38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하리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을 배신하게 될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신 것입니다. 스승을 배신하는 것도 그 마음이 몹시 괴로울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도 심히 괴로우셨습니다. 제자 중 누가 배신하게 될 것인가를 밝히시지는 않으셨지만 가롯 유다는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고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회개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회개하지 않은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떠나 은 30을 받고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겼습니다. 그 가룟 유다는 그 후 스스로 목메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마27:5)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제자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스승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배신한 가롯 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인물입니다. 사랑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21:33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자들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21:33-41)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 농사를 짓고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수확 때가 되어 주인은 자기의 몫을 받으려고 농장으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돌로 쳐 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은 다시 더 많은 종들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도착하는 대로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의 아들을 직접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이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을 제자들에게 내리게 했습니다.
(마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마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사랑을 배반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멸망밖에 없으며, 그나마 소작 농지마저 빼앗기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농부들이 배척하고 돌을 던지고 살인한 것은 실제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인의 사랑에 대하여 돌멩이를 던진 것입니다. 사랑의 배신자들입니다. 주인은 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참고 또 참고 거듭 거듭 종들을 다시 보냈습니다. 두 번째 배반을 당하고서도 자기의 사랑을 대표하는 아들까지 보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주인의 사랑의 심장에다가 칼을 꽂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서 농부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없애버리려 했지만,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알고 따르고 있어 그 군중들이 무서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마21:45-46)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가장 사랑받은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반역한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그토록 자기를 배반한 아들이지만 다윗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여전하여 그의 죽음을 놓고 울부짖습니다.
(삼하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하였을지라도 아버지 다윗 왕은 그 아들을 미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가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이같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비록 자신은 배신당했을지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2.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요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했음에도 변함없이,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호세아 선지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사랑의 끈으로 맺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구약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결혼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정한 호세아의 신부는 품행이 불량하고 음란한 여인 고멜이었습니다. 고멜은 신부라기보다는 창녀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창녀와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낳자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까지 지어 주셨는데 그 세 자녀의 이름을 ‘이스르엘’과 ‘로루하마’, ‘로암미’였습니다. 이들 이름은 각각 ‘하나님께서 흩으시다’, ‘사랑을 받지 못하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이름들입니다. 호세아의 결혼은 한 마디로 비극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인지라 버릴 수도 없고, 사랑할래야 도저히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여인과의 결혼생활이 어찌 행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거룩한 선지자에게 뼈아프고 비극적인 결혼을 명령하셨겠습니까?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체험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네가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실감나게 네 백성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선지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온갖 우상숭배로 영적으로 음탕한 여인과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인류에게 호소하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 ‘아픈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또 명령하십니다.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고도 옛 생활을 끝내 버리지 못해 집을 뛰쳐나가 창기로 돌아간 고멜을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호3:1-5)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세아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합니다.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오라’는 것이 바로 인류의 죄 값을 치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값을 지불했다는 것은 그 죄를 없앴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순결한 처녀로 신부삼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호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기,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는 것은 허물 없는 순결한 처녀와의 혼인을 의미하는 것이지 가출하여 탕녀가 되어버린 아내를 다시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고멜과 같은 창녀를 백합화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로 삼아 결혼하여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불문하고 백합화같이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삼아 “새 언약”(혼인)으로 백년가약, 아니 영원한 가약을 맺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아가서 4:7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또한 아가서 2:2은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백합화는 아름다움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 고멜과 같이 더러워진 우리가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사랑을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신앙 안에 있기만 하면 제 아무리 고멜같은 사람일지라도 아름답고 순결한 백합화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과거의 모든 것은 온전히 잊어 버리고 오직 ‘새로운 혼인’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3. 호세아서는 결국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여인, 법으로서는 도저히 새롭게 할 수 없는 여인, 남편의 사랑을 깡그리 짓밟은 배신자, 그 고멜을 결국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의 배반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세함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하나님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자신의 비극적인 경험에서 하나님과 백성과의 사랑의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음란하고 자기를 버리고 다른 신을 향하여 도망갈 여인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결혼하셨고 사랑하셨고 또 부르셔서 다시 사랑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 그 고통과 연민, 그리고 사랑의 배반이 가져온 쓰라린 슬픔, 마침내 배반한 자를 찾아 나선 사랑의 승리의 기쁨 등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고멜의 죄와 같이 이스라엘의 죄는 사랑을 저버린 죄입니다. 사랑이 짓밟히고 은혜에 침밷어지고 호의가 무시를 당합니다. 단순히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짓밟는 일이요 거룩한 혼인의 언약을 모독하는 일이 자행됩니다. 이렇게 지극한 사랑을 베푼 자에게 배신을 당할 때 그 분노는 더욱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서는 사랑을 배반한 죄를 꾸짖고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보다, 인간의 배반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랑의 복음서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한 사랑을 배신한 고멜의 위치가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여 은 30냥에 팔것을 아시면서도 그 가롯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롯 유다가 사랑을 배반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여도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랑을 배반하고 우상 바알을 숭배하는 의식을 따라 모압 여인과 행음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을 염병으로 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는데 인간의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배반한 가정과 사회에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4:7-19)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세상이 우리를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의 사랑을 배반할지라도 사랑이 승리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사랑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4.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가롯 유다의 배신, 지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배신당하시면서도 그 아픈 마음, 그 아픈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호세아가 그의 비극적이고 고통스런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아픈 가슴, 아픈 사랑을 체험했듯이 아파해야만 합니다. 성도는 그 사랑의 고통을 통해 이 시대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아픈 가슴을 이해하고 그 아픈 가슴을 싸매며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 못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증명해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손과 발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은 여러분의 못박힌 손과 발,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달라고 소리 없이 절규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백합화같은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에게 그 백합화 향기를 날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4: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여기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에서 “북풍”은 찬바람을, “남풍”은 온화하고 따뜻한 바람을 말합니다. 북풍과 남풍, 찬바람과 따뜻한 바람이 교차로 불 때 동산의 나무가 성장하고 열매가 풍성히 맺는 것입니다. 성도의 보다 더 풍요로운 삶, 그리고 성숙된 삶을 위해서는,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남풍만이 아니라 북풍이 교대로 불어와야 되듯이 연단의 시련과 사랑의 은총이 교대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총으로 아름답고 순결한 백합화가 되어진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백합화 향기가 멀리 멀리 퍼져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북풍과 남풍입니다. 쓸모없고 오히려 해를 주는 가시나무 가운데서 핀 백합화가 그 가시에 찔려 찢기면서 불어오는 북풍과 남풍에 날려 향기가 멀리 멀리 퍼져 가는 것입니다. 백합화 같으신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찬바람, 북풍이 불어온다 해도, 그래서 가시나무에 찔려 그 꽃잎이 찢겨진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백합화 향기를 멀리 멀리 퍼트리게 하시는 이웃 사랑을 이룩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믿으시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백합화 향기는 그 꽃잎이 가시에 찔려 찢겨질 때 그 진한 향기가 진동하며, 때 마침 불어오는 북풍과 남풍에 실려 사방에 향기를 날려 보낼 수 있습니다.
작곡가 멘델스존의 가문에 전해 내려온 사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곱사등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짝사랑하였으나 워낙 미녀여서 자기 같은 곱사의 사랑을 수락할리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함부르그의 부유한 실업가의 딸이었으므로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이 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등을 곱사등으로 만든 것은 특별한 것들을 지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지금부터 평생 동안 당신의 한숨과 눈물과, 당신의 걱정과 고독과, 당신의 아픔과 가시를 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대신 짊어지겠다, 책임지겠다는 이 말에 처녀는 몹시 감동되어 몇 달 후에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그 손과 발의 못자국, 옆구리의 창자국에는 여러분의 한숨과 눈물, 걱정과 고독, 아픔과 가시를 예수께서 짊어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든 삶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시면 그 가시나무 대신에 잣나무가 나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숱한 가시덤불에 찔리고 찢어지며 짓밟혀 볼품없는 들꽃 인생일지라도 예수 믿음 안에 있으면 그를 백합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지금도 가시덤불 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삶의 향기를 잃어버리신 이웃들에게 백합화 향기, 사랑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시에 찔린 백합화가 되어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과 남풍에 향기를 실어 멀리 멀리 날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영국의 조지 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순찰하는 길목에 2개의 꽃병이 놓여있었습니다. 하나의 도자기는 보기에도 도자기답게 윤기가 흘렀습니다. 생동감이 넘쳤고 예술품으로서 그 자태가 출중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도자기는 우선 외모가 볼품이 없을 뿐 아니라 빛깔조차도 흐릿하고 가치가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조지 왕이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도자기는 왜 이렇게 윤기가 나는데 저 도자기는 왜 저렇게 볼품이 없는가?” 그 물음에 안내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윤기 나는 도자기는 불에 구워졌기 때문에 윤기가 나고 저 도자기는 아직 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윤기가 나질 않습니다.” 연단은 때로 물건이나 사람을 세련되게 만들고 윤기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실패를 주시고 연단을 주시고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사랑을 위해, 고귀한 사랑의 가치를 더 하기 위해 때로 불구덩이 가운데 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섭리를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데, 때로 가시같은 고통과 아픔, 불같은 연단이 따른다 해도,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증거하여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그 사랑의 향기를 널리 발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여 누구입니까?
김영규 목사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고난주간 마지막 목요일. 지상 생애 마지막 저녁. 그 중요한 자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 중요한 자리에서 주님이 계속 언급하신 내용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18)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는 것이라.”(19)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
발을 씻어 주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18-21) 이 말씀을 이런 뜻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택함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가 누구인지 나는 안다. 그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 예언의 성취다. 내가 미리 말하는 것은 이런 배신행위가 일어났을 때에 내가 메시아임을 너희가 깨달으라는 뜻이다. 정말 마음 아픈 일이지만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가룟 유다에게 대놓고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미리 배신행위가 있을 것을 예고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이 가룟 유다 얘기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가룟 유다가 누구인가? 그의 됨됨이, 생각, 행동 양식. 가룟 유다를 연구하자는 뜻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 있는 가룟 유다적인 모습을 깨닫자는 뜻입니다. 또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태도입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를 어떻게 대하셨을까? 그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만남의 초기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은 가룟 유다를 어떻게 품고 가셨는지, 어떻게 대하셨는지? 오늘 이 세상은 가룟 유다들로 가득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그 해답이 오늘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주여 배반자가 누구입니까?
첫 번째 주제는 배반자를 드러내는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배반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했고, 주님은 그 사실을 덮어두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21)고 하니까 제자들은 소동(騷動)합니다. 성미 급한 베드로는 궁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밥상머리에서 누구냐고 소리쳐 묻기도 그렇고,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면서 빨리 주님께 여쭤보라고 성화입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23-24) 대표로 요한이 주님께 묻습니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25) 이 질문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열두 명 중에 누가 범인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중에 배반자가 있다니 도대체 어떤 놈이냐, 알면 요절을 내겠다.”는 얘깁니다. 둘째로, ‘혹시 내가 배반자는 아닌가?’ 하는 걱정스런 질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강한 것 같아도 사실은 약한 법입니다. 예수를 배반할 마음은 전혀 없지만 혹시 압니까? 누가 와서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위협하면 부인하게 될는지? 사실 베드로도 죽는 게 두려워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심각하게 묻습니다. “주여 내니이까?”(마26:22)
제자들의 궁금증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범인을 공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범인이냐?’는데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누가 범인인지 공개하지 않으셨습니다. 비공개 원칙입니다. 가룟 유다가 돌아서서 나가는 순간까지 배반자가 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고 하시면서도 그것이 가룟 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 하시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 의미를 공개치 않으셨습니다. 왜 주님은 유다가 범인임을 드러내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이 모두에게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유다 자신의 유익입니다. 우선 유다는 예수님의 비공개 원칙 덕분에 안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유다가 배반자라는 사실이 일찍 공개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그는 공개 테러를 당했을 겁니다. 겟세마네에서 말고가 주님을 체포하려 할 때에 베드로는 주머니칼로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유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베드로가 알고 우뢰의 아들 요한이 알았더라면 귀가 문젭니까? 아마 심장이라도 찔렀을 겁니다. 주님이 감춰주신 덕분에 살았지요. 또한 그 덕분에 유다는 인격적인 대접을 받았고, 긴 시간 주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일찍 공개됐다면 그는 일찍 사도의 무리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배반자를 끝까지 드러내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죄인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인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다른 제자들의 유익입니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제자들은 각자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배반자적 기질이 없는가?’ 심각하게 자기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범인을 모른 덕분에 12명이 그런대로 화합하여 함께 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배반자, 혹은 범죄자를 드러내는 문제에 대해서 신중해야 합니다. 드러내는 것이 다수에게, 혹은 누구에게 유익한 일인지? 가룟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지만, 혹시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바른 사람이 된다면? 당사자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유익한 일인지? 그래서 주님은 우선 범죄자를 드러내지 않고 권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18:15) 범죄 한 형제를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배워야합니다. 우리는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우선 동네방네 선전부터 하고 봅니다. 오늘날 매스컴은 시시콜콜 범죄 행위를 들춰내는 데 열을 올립니다. 보고 듣는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 당사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상관치 않습니다. 그저 범죄를 흥미 위주로 다룹니다. 범죄 행위를 보는 순간 어른들 마음에는 걱정거리 생기고, 청소년은 범죄를 모방하고, 범죄자는 회개의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의 가라지를 뽑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놔두십니다. 신앙의 가라지, 인격의 가라지, 조직체의 가라지를 왜 놔두시겠습니까? 가라지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주자는 뜻이요, 알곡에게는 자기 성찰의 기회를 주자는 말입니다. 또한 가라지를 뽑아냄으로써 오는 공동체의 손상을 막자는 것입니다.
누가 배신자냐고 묻지 마세요. 먼저 주님이 하신 것처럼 먼저 배신자를 은밀하게 대하는 비법을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주는 자가 그니라
두 번째 주제는 배반자를 선대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은 배반자라고 푸대접하거나 학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서, 아주 감추신 것은 아닙니다. 결국 주님은 배신자가 가룟 유다라는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필경은 드러날 것이고, 제자들도 알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26) G. B. Eager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식사 때에 U자형 테이블 둘레에 모로 눕습니다. 아주 드러눕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모으고 다리를 반쯤 오므리고 모로 기댄 형태입니다. 대개 왼편으로 기대고 오른손으로 먹습니다. 식탁의 서열은 U자의 왼쪽 끝에 주빈이 앉고, 반시계 방향으로 서열이 정해집니다. 이 서열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두머리를 중심에 하고 좌우로 제2, 제3의 서열이 매겨진다고 합니다. 이 방식대로 한다면, 사도 요한이 주님의 가슴 쪽에 자리하고, 베드로는 그 다음, 가룟 유다는 주님의 다른 한편에 자리 잡았을 겁니다. 가룟 유다는 이 마지막 식탁에서도 상당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또한 그는 주님께로부터 음식을 친히 떼어 주시는 친절을 받았습니다. 식탁에서 음식을 떼어 주는 행동은 친밀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예수께서 배신자 유다에게 친절을 베푸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는 평소 미운 사람 대하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내게 조금이라도 반감을 품은 사람은 절대로 용납지 않습니다. 수첩에 새겨 놓고 두고두고 차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가룟 유다의 소행이나 성품을 아셨습니다. 스승을 팔아먹으려는 마음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과 차별 없이 대하셨습니다. 그에게 같은 권능을 주셔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게 하셨습니다.(마10:1) 돈을 훔쳐가는 것을 아시면서도 돈궤를 맡기셨습니다.(12:6) 배신할 마음을 보시면서도 그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13:12) 그리고 이제는 먹여 주기까지 하십니다.(26)
배반자에게 호의를 베푸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를 깨닫게 하자는 뜻입니다. 주님은 유다가 배반자라는 사실을 타인들에게는 숨기셨습니다. 범죄자를 감춘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범인 은닉죄만 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다는 것이지, 당사자인 유다 자신에게까지 눈감아 주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은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으시면서 유다 자신에게는 안팎으로 많은 자극을 줬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 채찍과 당근을 계속 사용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배반에 대해서 경고를 거듭하고, 한편으로는 뜨거운 친절과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유다에게는 채찍보다 오히려 당근이 더 많이 주어졌습니다. 배신자를 선대하고 호의를 베푸는 것은 양심을 자극하고, 회개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주님은 유다를 정죄하고 심판하시지 않고 친절을 베푸셨습니다. 오늘 내 곁에 배신자가 있습니까? 주님의 방법을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세 번째 주제는 배반자를 향한 최후통첩입니다. 범죄자를 마냥 덮어주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기다림과 인내가 끝나면 결국 죄는 처벌받습니다. 주님은 떡을 떼어 주면서 당사자인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7)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무슨 일을 빨리 하라는 것인지? 돈궤를 맡았으니 명절에 쓸 물건을 사라는 말씀인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말씀인지? 다른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28-29) 네 할 일을 속히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두 가지 입장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주님의 ‘포기 선언’입니다. “이제 회개할 기회는 다 지났다. 나는 너를 포기한다!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제자로 부르시던 날부터 이때까지 주님은 유다를 향하여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빛이니 빛이 있을 동안에 믿어야한다! (12:36) 너희가 깨끗하나 다 깨끗하지는 않다!(10) 네 발을 씻어 줄 테니 그 전에 목욕을 해야 된다.(8,10)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21) 그런데도 유다는 전혀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최후 선언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떠나야만 한다. 그러니 내가 너를 돌이키려는 노력도 이것으로 끝이다. 그러니 이제 네 갈 길로 가거라.”
우리는 때때로 죄를 지으면서 마음이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이 어찌 알겠느냐? 하나님이 아무리 높으신들 무슨 지식이 있겠느냐?”(시73:11)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 혹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다고 쉽사리 선언해버립니다.(시14:1) 여러분! 하나님이 무기력하셔서, 혹은 하나님이 안 계셔서, 못된 짓들을 놔둔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참고 견디면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그러나 때가 차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왜 배우십니까?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철저하신 심판의 발자취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배워야 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심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로마의 심판. 가까이는 인간 理性에 도취되어 마음껏 교만해 있던 20세기 초반의 인간들에게, 수억의 인구가 짐승처럼 어우러져서 무자비하게 죽고 죽이던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인간 역사를 심판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한 범죄자가 어떻게 처벌 받으며, 한 독재자가 어떻게 사라져 가며, 숨은 죄인들이 어떻게 고통 받는지를 무수히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29:1)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24:1,16) 아직 우리가 살아서 숨 쉬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기회입니다. 불현듯 숨을 거둘 때는 이미 늦습니다. 주님이 부지런히 부르시는 때에 돌이켜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가 지나면 주님도 포기해버리십니다.
둘째로, ‘네가 네 일을 해야 나도 내 일을 한다’ 말씀입니다. 이제는 유다에게 매달릴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시간입니다. 속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대신 져야만 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은 인류 구원입니다. 그 구원은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제 그 십자가를 향해 떠나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묘하게 가룟 유다의 일과 주님의 일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도록 만들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이니, 유다가 할 일을 속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유다가 악의 도구로 사용될 순간이 다가 왔습니다. 기구한 모습입니다. “내가 너를 돌이키려 했는데 결국 너는 악의 도구가 되는구나! 이제 너 할 일을 속히 하라.” 12제자가 같이 부름 받고, 같이 먹고 자고, 같은 교훈을 받았건만, 11제자가 선한 도구로 구원을 이루는 순간에, 유다는 악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악의 도구로 쓰임 받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번한 인생, 가룟 유다!
똑같은 햇빛이 얼음은 녹게 하고 진흙은 굳게 합니다. 햇빛은 같으나 받는 자의 마음이 문젭니다. 주님의 교훈은 같았는데 가룟 유다와 11제자의 마음이 달랐어요. 11제자가 주님께 마음을 열었다면 유다는 끝까지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자의 무리에 섞여 있었지만 결코 스승의 뜻을 따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를 믿으면 생수의 강이 흘러 난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지 않으면 심판아래 있는 자다. 그래도 그는 결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제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겨 주실 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발을 내밀고, 속으로는 스승을 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발의 먼지만 씻고 마음의 죄를 씻지 않는 위선자! 그 마음의 차이 때문에 유다는 악의 도구가 되고,11제자는 의의 도구가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두 가지 용도로 하나님께 사용됩니다. 의의 도구 아니면 악의 도구! 그것은 오직 마음에 달렸습니다. 마음을 바로 하세요. 의의 도구로 하나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되시기 바랍니다.
유다가 곧 나가니 밤이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 가룟 유다는 어둠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는 실로 어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12:5-6) 사람들 앞에서 자선가인척 하면서 이기심을 감춘 위선자요, 내세를 믿지 못한 현세 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남의 의견을 듣지 못하는 마음의 불구자요, 자기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양심의 파산자였습니다. 어둠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3:18-21) 유다의 마음은 사탄의 마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유다 속으로 사탄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27) 사탄이 유다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유다가 사탄을 환영했습니다.
유다가 어둠 속으로 달려간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안에는 예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 빛을 가장 가까이서 보면서도 빛을 배척했습니다. 예수 없는 세계는 암흑이며, 그 결국은 죽음뿐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등지고 나간 지 얼마 안돼서 스스로 삶을 포기했습니다.(마27:3,행1:18) 실로 그는 예수 없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줬습니다.
오늘 가룟 유다가 누굽니까? 예수 없는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이 유다입니다. 유다는 속죄를 거부하고 십자가를 거부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해 줘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유다의 마음은 뒤틀리고 비뚤어진 채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남의 진실한 사랑을 무감각하게 받아 넘겼습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줘도 고마움을 몰랐습니다. 친절과 호의를 받을수록 강퍅해졌습니다. 우리는 가끔 전과자들이 왜 교도소 안에서 개선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나빠져서 나오느냐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예수 없는 사람의 마음은 결국 그렇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곳은 어둡습니다. 예수 없는 마음, 예수 없는 가정,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사회. 그 모든 곳이 암흑입니다. 오늘날 세상 어둠은 점점 더해갑니다. 빛이 와서 전해도 듣지 않고 받지 않는 세상!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1:20-24) 예수 믿으세요! 곁에 계신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는 나의 생명, 예수는 나의 빛! 할렐루야!
죄를 계속 숨기면
이재철 목사
택시 요금을 낼 때 우리가 내고 싶은 만큼 내는 것은 아닙니다. 요금을 내는 것은 미터기에 기준하여 내야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 기준에 맞추 신앙생활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기준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21절 말씀에 보면 최후의 만찬 중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인지 알면서도 끝까지 감추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가르쳐 달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의 입에 떡 한 조각을 넣어 주면서 가르쳐주어도 가룟유다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예수님 옆에 앉아 있던 가룟유다는 바로 옆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도 끝까지 죄를 숨겼습니다.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죄를 지으면 오픈하기보다 순간적으로 숨기게 됩니다.
◈ 죄를 계속 숨기면 어떻게 됩니까?
① 기도 응답이 막힙니다.
가룟유다는 기도 응답 받았다는 기록이 한번도 없습니다.
죄를 품고 기도하면 기도에 힘이 없고 형식적인 기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기도가 막히면 우리 인생이 막힙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만 내가 지은 죄보다 용서해주려는 하나님의 욕망이 더 큽니다.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죄를 품으면 안됩니다.
또한 죄를 숨기면 영적으로 무감각해집니다. 그래서 죄를 숨기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② 마귀가 내게 와서 계속 참소합니다.
요한계시록 12:10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죄를 숨기고 나면 평안함이 없어집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와서 “너가 집사냐? 너가 목자냐? 웃기지 마라”라고 참소합니다.
사울왕을 보십시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 후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끝까지 감추었습니다. 한 번 숨기면 그것을 숨기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게 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울이 왕이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이미 사울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들어가서 교활하고 악해졌습니다. 결국 나중에 사울은 전쟁에서 패하고 자살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가룟유다도 철저히 감추고 있습니다.
27절 말씀에 보면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습니다. 마귀가 가룟유다를 참소하여 후에 목메어 자살하게 하였습니다.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내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십시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죄를 자백하면 죄를 반복하는 것에서부터 건져주십니다.
내 삶을 목장에서 오픈 하십시오. 죄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을 주십니다.
추석 명절이 다가옵니다.
성경에서도 체사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로마인, 그리고 기독 로마인 사이에서 돼지고기를 먹어도 되는가에 대한 논란이 생겼습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그 자체는 죄는 아니지만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의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걸림돌이 된다면 죄가 됩니다.
술,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장에서 오픈 하십시오.
돈 궤를 맡았으므로
요 13:21-30 / 안양준 목사
가룟 유다
만약 어떤 사람의 일생이 참 좋은 환경과 좋은 조건을 가졌었음에도 실패의 삶을 살았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사람이 영원히 혐오의 이름으로 불려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양’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큰 축복을 차지한 유다 지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태인’이라 부르는데 미국에서는 ‘주이시’라고 발음합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유다 지파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유다 지파에 속했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구약 중간사에 유대 민족을 구출한 위대한 한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마카비입니다. 그래서 요 10:을 강해할 때 수전절이라는 절기에 대해 잠깐 말씀드렸는데 이 절기는 마카비 일가가 이스라엘을 성전을 모독하는 시리아 왕 에피파네스의 손에서 해방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마카비의 정확한 이름은 유다 마카비우스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것보다 더 유다 마카비우스를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유다라는 이름이 많았고 그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뜻에서 부모가 붙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하면 모두가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욕이지요. 가룟 유다하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추악한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삼년 동안이나 함께 지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무리 좋은 이름과 좋은 조건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이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룟 유다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제가 심방다닐 때 만난 분들 중에 한국에 아주 유명한 목사님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많은 것을 자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그런 목사님들과 가까운 인척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분의 신앙을 보면 전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인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물론 그럴때 다른 이들보다는 신앙의 도전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많겠지만 꼭 남편의 신앙이 좋아지는 건 아닐 수 있습니다.
또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중에도 아무리 같이 차를 타고 교회를 다녀도 두 사람의 신앙은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가졌다고 모두가 좋은 신앙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마 24:40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와 비평」이라는 책을 쓴 고트발트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나와 가룟 유다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신은 성경을 잘못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도 될 수 있지만, 가룟 유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의 신앙을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판 이유
영원한 수수께끼기는 하지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라 왔는데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는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자 실망한 나머지 배신했다고 합니다. 설명을 드리면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인데 백성들이 원하는 이슈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빵의 문제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이 군중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증명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것이구요.
또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요구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이의 분쟁을 이용해 그 분쟁이 악화되면 결국 예수님은 저항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능력이면 과거의 다른 이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성공해내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관점에서 예수를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도 살리신 예수님이 너무나 허무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허무감을 이기지 못하고 가룟 유다도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겁니다.
또 어떤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로 가롯 유다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대세를 보니 제사장 편에 붙어야 목숨을 부지하게 생겼으니 예수를 팔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 이런 해석은 어떻습니까?
가룟 유다가 매일 밤마다 잠만 들면 뒤숭숭한 꿈을 꿉니다. 뭔가 시원스럽지 못한 뒤끝을 남기는 꿈. 그런 꿈처럼 현실에서도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악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남들보다 더 신앙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안좋은 쪽으로만 가는 겁니다. 그런 모습이 결국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게 한 것이라 설명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금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것이 장로교가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요 6:64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래서 가룟 유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가 아무리 신앙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소용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 즉 예수를 죽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 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중에도 예수를 잘 믿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자꾸만 신앙에서 멀어지고 나중에는 멸망의 길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이런 것을 하나님의 구속사로 이해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 관게상 더 깊이 들어갈 수 없기에 이 정도로만 마치겠습니다.
도대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사건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대야에 물을 떠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극구 사양합니다. 여러분들도 세족식을 해 보셨으니까 그 느낌이 어떠했습니까? 남이 나의 발을 씻겨준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당시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하인 중에도 제일 서열이 낮은 자가 하는 일이라고 햇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상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발을 씻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그럼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할 때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는 말씀읗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덧붙이기를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족식은 우리가 서로 봉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교훈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온 몸과 발 씻김입니다. 여기서 온 몸을 씻었다는 말씀은 ‘중생했다, 거듭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발을 씻기는 것은 중생한 성도라도 일상에서 짓는 죄를 씻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온전한 신앙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여전히 넘어지고, 자신도 모르는 죄악을 범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얻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다 깨끗한 자는 아니라는 겁니다. 다 거듭난 자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깨끗하지 않은 자 - 거듭나지 않은 자 - 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는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지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차원에서 가룟 유다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왜? 온 몸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의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체험이 무슨 엑스터시(환상)같은 현상입니까?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뜨겁게 기도하니까 성령이 오시는데 하늘로부터 바람같은 소리가 들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눈에 보이며 그래서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 성령 체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성령받은 사람들입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은 이미 거듭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기독교 역사를 이루기 위해 사도들이 능력있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주신 사건일 뿐이요, 이미 깨끗해졌습니다.
여러분 중에 내가 뜨겁게 체험하지 못했다고 “나는 거듭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미 내가 주님을 나의 주라고 믿고 시인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에 성령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성령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번도 예수를 자신의 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베푸시는 말씀과 기적 앞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그래서 그와 함께 다니기로 결심했지만 그 분을 나의 주로 고백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만 영접하지 않는 사람, 성령의 사람이 아닌 육체의 사람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사단의 지배
마 12:43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빈 집이란 우리의 육신을 의미합니다. 귀신은 영이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거처로 삼고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는 사람의 몸에는 귀신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형식만 가졌지 실제로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의 마음에 사단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종교적인 모습은 있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잘되었다 해서 일곱 귀신을 데려와 거기에 거하니 그 사람의 삶은 귀신이 지배하는대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 생각이 가롯 유다의 생각이지만 그 생각을 하게 주문한 것은 사단이 한 것입니다. 만약 가룟 유다에게 성령이 함께 하셨다면 만일 이런 생각이 들어왔다가도 당장 쫓겨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자주 듭니까? 하지만 성령의 사람들은 당장 그런 마음을 이겨내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사단이 주문하는대로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이 지배하는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삶이 불행한 삶이고, 비극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집어 넣습니다. 두려운 마음, 미움과 원망을 심집어 넣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들어올 틈만 주어지면 이런 생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옵니다. 하지만 성령은 긍정적인 생각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담대한 믿음, 미움 대신 사랑, 원망 대신 감사를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신앙의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같이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고 그 믿음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어간 무당들을 보면 그들의 삶이 건강하지 않습니다. 깨끗하지 않습니다. 결국 불행한 일생을 마치고 맙니다.
결국 12제자 중에 온 몸이 깨끗한 즉 성령으로 거듭난 제자들의 일생은 그들의 삶은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역사상 그들의 숭고한 믿음은 모든 이들에게 존경심을 가져다 주지만 사단의 지배를 받은 가룟 유다의 일생은 비참하게 마쳐지지 않았습니까?
사단이 가룟 유다를 어떻게 이용합니까?
27절에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여기서 말하는 조각은 떡조각이고, 최후의 만찬이 끝나는 시점이라 이 떡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예수님의 살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떡을 받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가롯 유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가룟 유다가 회개할 것이라 생각하고 주신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러나 가룟 유다의 입장에서는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도 주지 않고 멸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자연을 통해서도 계시하셨고, 성경을 통해 계시하셨고, 가족이나 친지를 통해서도 계시하셨고 결국 믿지 않음으로 멸망 당하는 것은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느니라’
창 4:7에 하나님이 아벨을 죽이려는 마음을 갖고 계획하는 가인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죄를 짓는 사람의 낯빛은 밝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찾아오게 마련이기에 죄를 지으려는 마음이 있을 때 그때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가인에게 분명히 기회를 주신 하나님이 가룟 유다에게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기회가 왔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고, 사단에 의해 조종받는 자의 영혼이 처음에는 생각을 넣는 수준에서 결국은 예수를 팔아버리는 행동으로까지 가게 만든 것입니다.
마 26:15에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은 삼십을 요구합니다. 그는 제자들 중 돈 궤를 맡은 자였습니다.
요 12:6절에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라”고 했습니다. 돈 관리는 그래도 똑똑한 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돈 궤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돈을 좋아하니까 결국 돈 때문에 죄를 짓고 무너진 것입니다.
딤전 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가룟 유다
류영모 목사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논바닥을 펄쩍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참 뛰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독수리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너무나 쉽게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지 않겠습니까? "독수리 선 생 어떻게 하면 나도 하늘을 날 수 있겠소?" 독수리가 하는 말 "날개를 달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자동적으로 날게 된다오." 개구리가 닭털 두 개를 주워 옆구리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15층 빌딩 꼭대기 향하여 펄쩍거리며 뛰어 올라 가더니 닭털을 허우적거리며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그 이후 이 개구리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선의 날개를 달아도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종교 의 날개를 가지고는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지식이나 철학의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시작되던 초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거듭나지 못했던 한 흉내 신자, 흉내 제자가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니코스카찬차스키의 "최후의 유혹"을 각색한 연극 마라나 타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맡은 배역이 가롯 유다였는데 저는 그 맡은 역을 멋지게 소화하려고 노력했고 제법 좋은 연기를 보여 주위의 칭찬을 들은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러나 그 가롯 유다의 역은 멋지게 소화를 하면 할수 록 예수님과는 멀어지고 관중들로부터는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영화든 이런 배역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세상 에서 이런 배역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의 삶을 멋지게 소화하면 할 수록 지옥에는 가까워지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이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비극적인 일이겠습니까?
일찍이 단테는 "신곡" 지옥 편에서 가롯 유다가 마왕 루시퍼와 함께 가장 낮은 층의 자리에 앉아 지옥에서 조차 금해진 혹독한 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위대한 성자가 될 기회를 가졌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애석한 사람은 아마도 가롯 유다 일 것입니다. 그는 성자가 될 기회를 악역으로 바꾼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난 이천년동안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의 이름을 가 롯 유다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을 읽어 내려갈 때 가롯 유다와 자기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아브라함을 공부하게 되지요.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입니 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모세를 공부하고 여호수아를 공부합니다. "여러분 모두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이 되십시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가 나와 서 "우리 모두가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아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성서와 비평이라는 위대한 책을 썼던 고트발트라는 신학자는 이 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언제나 나 자신이 가롯 유다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 아니겠 습니까? 그 가롯 유다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 다
유다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중 가장 영예로운 몫을 차지한 유다 지파에서 비 롯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찬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과 구약 의 중간 시대에 유대민족을 구출하기 위해 피흘리며 싸웠던 독립투사 가운데 유다 마카 비우스 가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그 훨씬 이상으로 저들은 유다 마카비우스를 존경했습니다. 이 만큼 이스라엘 민족들은 유 다라는 이름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엔 유다라는 이름 이 아주 흔했지요. 그런데 가롯 유다가 나타나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 았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이요 직분이었던 사도 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삼년동안이나 같이 살며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가 있습니다. 좋은 이름, 좋은 조건, 내세울게 없습니다. 내가 교 회의 한 구성원이 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가롯 유다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배 는 많은 곳이 부서져 바람부는 대로 떠다니게 되었지요. 여러 날이 지나 음식 과 물이 떨어져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목마름이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는 배 한척이 있 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물 한통만 건네주시구려. 그때 저쪽에서 들 려온 소리가 "배 밑에 있는 물을 떠서 마시세요. 여러분들은 이미 강 하구에 도달되어 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를 찾아 헤매다가 강 하구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바다에 떠 있는 줄 알고 저들은 목말라 신음하고 있었던 게지요. 물위 에 떠 있으면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바다에 떠 있어도 내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구원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은혜로운 공동체에 참여했다 할지라도 그 공동체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 구원의 영광이 나와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인 정하십니까?
예수를 판 이유: 왜? I
영원한 수수께끼이기는 합니다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돈궤를 메고 다니다가 돈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라 왔는데 예수께서 유다 나라 왕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시자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을 배신했다고 말합니다.
또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지만 상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제자들은 다 갈릴리 출 신인데 자기만 비갈릴리 가롯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방색의 갈등에서 오는 소외감이 다른 제자들을 향한 질투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마침내 스승까지 파는 범위까지 가 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자는 좀더 극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유다 민족을 독립시킬 아무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면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신비한 능력을 행하게 될 것이고 그 속에 있 는 애국심이 발동되어 민족을 구원하고 나라를 세우는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리든 그 예수께서 허무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허무감을 견딜 수 없어 목매달아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다음 설득력 있는 또 다른 한 주장이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영특한 사람인지라 세상 돌아가는 대세를 보니 제사장 편에 붙어야 목숨을 부지하게 생겼습니다. 예수가 죽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죽어도 자기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를 판 이유: 왜? II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는 이런 지협적이고 외적 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고도 내면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매일 밤 보자기를 쓴 사나이가 나타나더랍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면 악한 길로 끌고 다닙니다. 나는 멋지게 승리하고 싶은데 실패를 반복하도록 만든 단 말이예요. 그래서 화가 나서 보자기를 확 벗겼더니 보자기 속에서 나타난 얼굴이 바로 자기자신이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자기자신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롯 유다가 처음에는 예수를 잘 믿다가 나중에 타락했다고." 어떤 교단은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교단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 신학 가운데 여러 가지 고귀한 진리들이 있습니다만 "성도의 견인" 이라고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한번 내가 하나님의 자녀 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이 자녀 관계는 파괴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구세주로 영 접하면 예수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번씩 타락할 수 있고 교회를 떠날 수 있지만 극단적인 경우 죽음의 자리에서도 예수를 다시 믿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잘 믿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는 아예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앙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이 없으면서도 얼마든지 신앙인 행세를 하 면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영혼을 더듬어 보십시오. 정말 나의 신앙 생활 속에 신앙과 정직이 담겨져 있는가? 이 땅에 교회를 떠나고만 교인들이 얼마나 많 습니까? 그들은 배신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구세주로 만난 사건과 경험이 없는 비신자들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행여 오늘 아침에 참석했다고 하면 제로(O) 출발점부터 신 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6장 64절에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이 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느 니라."
이 말은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 또 가롯 유다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 백하게 지적하는 성경적인 증언 아니겠습니까? 제자 공동체에 몸을 담았으면서도 예수 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한 비극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종교적 환경에 동참했 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종교인과 신앙인은 다릅니다. 교인과 하나님의 자녀는 다릅니다. 한 소망공동체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천국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게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유명한 사건이 기록 된 장입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되는 말씀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 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귀한 봉사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봉사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잔혹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여기서 "씻는다"는 단어는 단순히 그런 의미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 우리 영혼이 적셔져서 우리 죄가 씻김 받는 사건, 흘리신 물과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고 거듭나고 중 생하는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전에 나와서 예수님의 보혈을 거절 하면 예수님 날 찾아온 구원과 중생의 사건을 내가 거절하면 예수와 나와는 아무런 상관 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가롯 유다는 구원받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종교적인 형식만 가졌지 그 내 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사탄이 침투하여 자리를 잡게되는 것입니다. 마치 빈 집에 일곱 귀신이 들어오듯이 말입니다. 소제해 두었어요. 품위가 있어요. 그러나 주인이 없습니다. 양복입고 그럴듯하게 예배드려요. 직분도 있어요. 그리고 착하다고 도 얘기해요. 때로는 칭찬도 들어요. 법없어도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 어요. 그런데 그 속에 예수가 아니계세요. 내 마음 중심 자리에 하나님이 아니계세요. 이런 사람들은 사탄이 침투하기가 좋은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이 사실을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2절 말씀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 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냥 지나치는 생각하나 이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생각 하나가 가롯 유다의 마음을 찾아왔습니다. 이 생각은 누 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요. 그러나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는 이 생각을 물리쳐 줄 예수 의 영이 아니계셨습니다. 오히려 이 사탄의 공격 앞에 자기 마음의 문을 계속 열고 있 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실패감을 불어넣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 줍니다. 두려운 마음을 심어줍니다. 미움과 갈등과 원망을 심어줍니다. 사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마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성령은 밝고 건강한 생각, 거룩한 마음, 사랑과 친절의 마음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시 는 것입니다. 성령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귀한 마음들이 우리를 찾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며 사십니까? 우리는 이 생각관리에 실패하기 시작할 때 사탄에게 내 존재 자체를 내어 줄 수 있다는 심각한 비극을 우리는 가롯 유다의 사건 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팔았는가? 첫째 그는 아예 불신자였기 때문에. 둘째 예수가 지배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사탄을 향하여 열려져 있었기 때문에.
하여 13장 2절의 말씀은 본문 27절로 연결이 됩니다.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 에 들어간지라" 이 떡을 받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떡을 가롯 유다에 게 떼어 주셨을 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절호의 찬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하는 가장 못된 일, 사역 가운데 하나가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탄을 향하여 내 심령이 내 영혼이 끌려가 기 시작하면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가 안되는 겁니다.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해 지고 마 는 것입니다.
이것보세요. 처음에는 "예수님을 팔아 버릴까"라는 생각 정도로 사탄은 생각만 집어 넣었습니다. 그 다음에 유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이 사탄의 생각을 수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나중에는 생각만 집어 넣은 것이 아니라 유다의 마음속에 사탄이 통째로 들어 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을 집어넣고 나중에는 사탄이 들어갑니다. 아예 그 마음속 에 사탄이 들어가서 가롯 유다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하는 비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 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를 팔 자는 비롯 가롯 유다 뿐만아니라 당시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모두들 가운데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자들은 서로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그랬습니다. 정말 보기 흉한 광경 이지요. 이럴 때 일수록 혹시 내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그런 비극적인 인물은 아닙니 까? 하나님 날 살려주십시오. 주님께 매달렸어야 옳았습니다. 정히 자신감이 있었다고 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런 놈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물었어야 옳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말씀 을 자신의 말씀으로 받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산상교훈을 비롯하여 매일같이 제자들에게 설교하셨고 교 훈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과 자기 자신을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는 데에 가롯 유다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줄 때 저기 불쌍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쳐다보고 있었던 게지 요. 아니요. 주님 내가 영적인 소경입니다. 신령한 세계가 안보입니다. 영안을 열어 주세요. 엎드려 기도했어야 옳았지요. 나병환자를 고쳐줄 때에 내 영혼을 썩어 문들어 지게 만드는 내 심령 속에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병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고백했어야 옳았어야 했지 않습니까? 주님 내 영혼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주님 나를 살려 주십시 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 병을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 저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 나는 무 엇을 깰까요. 내가 죽님을 위하여 깨야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님께 물었어야 옳았지요.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이완되어 축 늘어진 모 습을 바라보며 주여 내 손과 발목에 힘을 주시옵소서 기도했어야 옳았을 것 아니었습니 ?
한국교회에 전해오는 고전적인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자부는 열심히 예수를 믿었고 시어머니는 뒤늦게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더랍 니다. 그래서 자부가 시어머니에게 세례공부를 부지런히 시켰지요. 이것저것 가르치다가 "어머니, 목사님께서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물 으면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야돼요."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것저것 묻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물었더니 "아이고 그거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며느리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하더랍니다.
이 설교 우리 며느리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남편 들었으면 좋겠다가 아니고 여기 불려 지는 찬송가 가사 하나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셔야 됩니다. 이 강단에 서 선포되어지는 말씀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질 때 그 귀가 복받은 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그 말씀이 아이들에게만 주는 말씀으로 끝 나면 속고 있는 것입니다. 류목사가 지금 여기 설교하지만 우리 교인들에게나 설교하고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지 못한다고 하면 류목사는 지금 이 설교시간에 사탄에게 속고 있 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전에 먼저 자기자신에 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을 때에 승리하는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가 대들이 은혜를 끼쳐야지 멋있게 노래해야지 하면 이미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 버지 이 아름다운 찬양의 가사가 내 영혼을 지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을 때 하늘의 찬양대가 되는 것입니다.
왜 제자로 삼았나?
그러면 왜 우리 주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우리 주님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제자로 선택했을까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 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 면 좋을 뻔 하였도다" 이런 사람을 왜 제자로 부르셨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영원히 가롯 유다와 같은 비극적인 인물들이 존재할 것이다. 교회 속에서 가라지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함께 천국 문에 다다랐 을 때, 함께 신앙생활하는 동료들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뚝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말아라. 알이 차지 못한 겁데기 신앙인들은 언제나 있 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너희들 조금도 놀라지 말아라.
결론 : 결단촉구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가롯 유다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런 분이 있습 니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이 시간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바 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 다. 사탄이 당신을 지배하여 영원히 회개의 문을 닫아 버리기 전에 주님 앞에 돌아오시 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모두가 엄숙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가면을 벗고 우리 자신 에게 솔직해 지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앞에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올바로 발견하십시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 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정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신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에 게 정직하게 한번 물어 보십시다. 만약, 이 질문을 가롯 유다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했 더라면 그의 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한번이라도 마음 속에 예수가 아니계시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늘나라 생명 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분명히 확신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확인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경험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시간 예수님께서 피묻은 손으로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 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세상에 구원을 얻을 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 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던 모든 의지를 이 시간에 내려놓으시고 마음의 문을 진실하게 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심을 활짝 열어 제키고 주님 앞에 드러내었을 때에 예수가 그 안에 아니계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주권 앞에 여러분들이 항복한 경험 이 없다고 한다면 이 시간에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찾아 오시옵소서. 입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아멘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을 찾아가 다스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국에서 만든 「유다의 얼굴」이라는 T.V. 드라마가 있습니다. 내용은 누 가 가롯유다의 배역을 맡을 것인가? 수많은 배후들을 찾아다니며 가롯유다 배역을 찾는 얘기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극의 마지막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나와서 크게 한목소리로 외치면서 막이 내려지게 됩니다. 당신도 가 롯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너도 나도 가롯유다가 될 수 있다!"
말씀을 맺으며
오늘 본문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맺어 보십시다. 마지막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0절을 여러분 어떻게 기록하시겠습니까? 가롯 유다가 갔던 밤의 길, 멸망의 길, 실패 의 길, 영원한 영원한 지옥의 길을 여러분들이 걸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은 대낮보다 더 밝은 빛 천성을 향해 가는 길, 때로는 고난이 시련이 아픔이 내 앞을 가로 막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낮의 길 천성의 길을 걸어가시겠 습니까? 오늘 30절을 여러분이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생이 달라지고 영원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나가니 밤이러라
강문호 목사
나가니 밤이러라> 수년 전에 신학생 한 명이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부모가 믿음이 좋은 가정이었습니다. 성령 체험도 일찍 하였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어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야 겠다는 결단을 일찍 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오직 복음이었습니다. 오직 십자가였습니다. 세상에 좋은 직업을 다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치겠다는 각오도 대단하였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성경을 매일 읽으며 영성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신학생은 폐병에 들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 하여 치료비를 제대로 댈 수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점점 병이 심하여 갔습니다. 설상사상으로 결혼을 약속하였던 여자도 그 신학생을 버리고 떠나 버렸습니다. "당신 부모도 믿음이 좋고, 당신도 신학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부름받아 나선 몸인 데 어째서 하나님은 당신이 병들게 하고 그렇게 기도하여도 낫게 하지 않으냐?" 이것이 그 남자를 버린 이유였습니다. 이 신학생은 비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몸은 썩어가고 사랑하던 여인은 떠나 가버렸습니다. 무엇이나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쓴 일기장에 그의 심경의 변화가 보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 라는 의심이 사형당한 일기장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하나님은 죽었는가?>라는 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하나님은 자살하였다>라고 끝났습니다. 그런 그가 살인범으로 사형당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침묵을 지킨다면 내가 내가 내 병을 고쳐야지> <기여코 병을 고치고 나서 그 여자에게 복수하여야지>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지> 그는 부엌에 들어가 칼을 들었습니다. 부인이 혼자 사는 집을 물색하였습니다. 그 칼을 들고 그 집에 들어가 그 여자를 묶어 놓고 금품을 털었습니다. 그는 살인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다만 약값 정도만 훔쳐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데 그 여자가 "도둑이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엉겁결에 그 여자에게 달려 들어 입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몸부림치며 반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여자를 칼로 마구 찔러 댔습니다. 죽었습니다. 이틀 후 그 신학생은 체포되어 재판 결과는 사형이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부정한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나를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 날 밤이었습니다.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12명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제자중에 한 명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도무지 궁금하여 견디지 못 하는 베드라가 물었습니다. <그 말씀하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시고 떡 한 조각을 떼어 유다에게 주었더니 유다가 그 떡조각을 받았습니다. 그 때 유다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부끄러웠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나가니 밤이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가니 밤이었다는 말씀속에는 의미심장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가요? 1. 회개를 거절하면 밤입니다. 오늘 말씀중에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떡 한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26-27) 이 말씀은 깊이 상고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떡 조각을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 떡을 줄 때 유다는 "아! 예수님이 아셨구나. 안 되지" 하고 회개하고 받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아셨군요. 내가 예수님을 팔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취소합니다. 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돌아 서기를 예수님은 바리시면서 떡 조각을 주어 본 것이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알 건 말 건 내가 할 일을 내가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회개의 기회에 자기 결심을 굳히니까 그 순간에 사단이 유다에게 쏙 들어 간 것입니다. 회개의 문을 열어 놓았는 데, 회개의 기회를 주었는 데 나가 버리니까 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 가신 후 목매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체가 굴러 배창자가 튀어 나왔습니다.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회개하여야 할 때 회개하지 않으면 밤이 옵니다. 유다가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개에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2. 사명을 떠나면 밤입니다. 유다에게는 12 제자로서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12명의 제자와 예수님이 같이 앉아 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은 사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너무나 귀중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한 명만이 그 사명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밤이었습니다. 유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후 제자들이 모아서 한 명을 보충하였습니다. 맛디아와 요셉 두 명을 놓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그래서 유다 자리에 맛디아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나간 것은 사명을 떠난 것이고 그 후는 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을 떠나면 밤이 옵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떠나 다스려야 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사명을 떠나고 나니 밤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사망이 들어 왔습니다. 사명을 떠나면 밤입니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데살로니가에 가 있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신하 판사 몇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데오도시우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대량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그의 군사들은 7,000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였습니다. 황제가 밀라노로 돌아와 예배에 참석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대량학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데오도시우스를 못 들어오게 하면서 외쳤습니다. "그래, 무슨 염치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보려고 하십시나까? 하나님을 그렇게 노엽게 하고도 무슨 면목으로 들어오셨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많이 죽이고 그 피묻은 손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려 하십니까? 그토록 잔인무도하게 피를 마신 입으로 어떻게 그 분의 피를 마시려 하십니까? 물러가십시오. 하나의 사악함에 또 하나의 죄를 추가하지 마십시오. 나는 폐하가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얻을 때까지 출교를 선언합니다" 이런 책망을 받고 데오도시우스는 8개월간을 슬픔과 탄식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와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사명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사명을 떠나면 밤이 옵니다. 내가 하와이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돈도 있고, 시간적인 여유도 있는 여자를 온 교인들이 여선교 회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니님의 일을 하여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못 하겠다고 거절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시간도 없고, 돈의 여유도 없는 여자를 여선교 회장으로 추대하고 일을 맡겼습니다. 그 여자는 모든 면에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일이니까 하겠다고 말하면서 일년간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일년 후 거절한 여자는 남편의 사업도 어려워지고 가정 생활도 어려워져서 취직하여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정말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지만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한 여자의 남편 사업은 번성하여 일할 수 직장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고 돈도 넉넉하여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나가면 밤입니다. 사명을 거절하면 하나님은 밤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사명을 맡겨 주셨던지 거절하지 마십시오. 유다처럼 나가지 마십시오. 밤이 옵니다. 대제사장 복을 제일 먼저 입은 이는 아론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건강할 때 대제사장복을 벗자 말자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에 올라 아론의 옷(대제사장복)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을 좇아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산에 오르니라.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꼭대기에서 죽으니라>(민20;25-28) 사명에서 벗어나면 밤입니다. 3.예수님을 떠나면 밤입니다.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던 계획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머믈러 있어야 하는 데 그들을 떠났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떠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났더니 밤이 되었습니다. 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음을 의미하듯이 예수님을 떠나면 지옥을 의미합니다. 결국 유다는 구원받지 못 하였습니다. 밤 즉 지옥이었습니다. 요즈음은 컴퓨터 시대라 이렇게 주기도문이 바뀌었습니다. <하드 디스크에 계시는 우리 프로그램이여! 패스워드를 거룩하게 하옵시고 운영체계에 임하옵시며 명령이 모니터에서도 이루어진 것 같이 프린터에서도 이루어지게 할지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자료를 주시옵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에러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에러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바이러스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불시의 정전에서 구하옵소서. 엔터> 그러나 우리의 구주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 붙드는 이에게는 밤이 아니라 낮이 옵니다. 유명했던 죠 플레이져 선수는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권투선수 입니다. 그는 신앙이 좋은 크리스챤입니다. 그런데 당시 준결승에서 오른손 손가락이 하나 부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호텔에 돌아와 부러진 손가락을 잡고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아픈 손에 글러브를 끼고 열심히 싸워 KO 승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사는 이는 낮이요, 예수님을 떠나면 밤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방송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윷놀이가 벌어졌습니다. 두 팀을 나누어 노는 데 한 팀이 완승하게 되어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상대방이 던지고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이 나와도 승리입니다. 4개째 나는 것이고 상대방은 아직 3개도 달지 못 하였으니 일방적인 게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 기울어졌다고 여기고 마지막 던지는 데 그 사람이 자리를 뜨게 되었습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어린아이에게 어른들이 "네가 마지막으로 대신 하여라>라고 말했습니다. 자포자기속에서 그런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는 <잠간만이요!> 하더니 옆방으로 갔습니다. 좀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기다리다 못 하여 가보았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나 보고 하래요.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나 가능하다고 그러셨잖아요? 이기게 하여 주세요" 이런 기도였습니다. 어른 들은 하도 기특하여 어린아이가 기도하고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돌아 와서 윷을 던졌습니다, 한꺼번에 모가 6번이나 나오고 윷이 나와서 상대방은 하여 보지도 않고 윷놀이판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예수님만 의지하는 순수한 믿음에 하나님이 같이 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어느 성자와 제자들이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장글을 가다가 밤을 맞았습니다. 길을 잃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공포속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그 성자가 밤새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성자는 잔디위에 편안히 앉았습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오늘 너무나 많이 걸었습니다. 피곤하여 죽을 지경입니다. 주님이 맹수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실 줄 믿고 이 쟝글에서 편히 자렵니다. 주님만 믿기에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고는 눕더니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면서 잠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튿날 한숨도 자지 못 한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있었느냐고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그 성자는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에수님에게 부탁하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면 편안하지" 그렇습니다. 예수님안에 있으면 낮이고 나가면 밤입니다. 유다가 나가니 밤이었습니다. 1. 회개를 거절하면 밤입니다. 2. 사명을 떠나면 밤입니다. 3. 예수님을 떠나면 밤입니다.
그리스도의 새계명
요 13:21-35 / 박조준 목사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교훈을 주신 후에 말씀하신 것입니 다. 우리는 그날 만찬석상에서 된 일을 잘 압니다. 발을 씻긴다는 것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유 대지방은 길에 먼지가 많고 신발도 우리 나라의 짚신과 같은 것이므로, 집에 돌아오면 으례 더러 워진 발을 씻기 마련이므로 종이 대야에 물을 길어와서 주인의 발을 씻기는 법이 있다고 합니다. 발을 씻기는 것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의 제자 들은 선생님의 발을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서로 누가 크냐 하는 말다툼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 까 누가 먼저 씻을 것이냐 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친히 허리에 수건을 동이 시고 대야에 물을 길어와서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겨 나갔습니다. 선생님이신 주님 앞에 발 을 내어놓고 씻기움을 받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법이야 있던 말던, 체면이야 서든 어떻든 자기만 유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실리주의자들의 모 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번영하며 사는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사회악입니다.그런데 이렇게 무례한 제자들을 향하여 섭섭한 마음으로 왜 내 발을 씻겨 주지 않느냐? 고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주요 선생이 되 신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태도와는 정반 대의 의미에서 모순이요 역설입니다.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이와 같은 지나친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없이는 저런 사회악을 속량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 다. 예수님은 이 행동을 본을 삼아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고 교훈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그 리스도의 독특한 사랑에 감격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발을 씻기 신 교훈을 주신 후에 계속해서 새로운 계명을 하나 주셨습니다. 이것은 후대의 사람이 붙인 말이 아니고 주님께서 친히 이제 내가 새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에 영국에서 Usher 감독이 자기 교구에 루터퍼드(Rutherfurd)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놀라운 헌신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고 싶은 Usher 감독은 본인 에게 가서 직접 말해보고 싶었으나 본인은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 같아, 가난한 여행자로 변장을 하고 루터퍼드(Rutherfurd)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밤 늦게 그 집 문을 두드렸더니 그 의 부인이 맞아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께 제가 이처럼 길이 늦었는데 하루 저녁 쉬어 갈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기쁘게 승낙하고 낯선 손님을 맞아들여 저녁을 대접하였습니다. 그 날은 마침 토요일 저녁으로 루터퍼드의 부인이 그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하여야 할 일들을 가르치는 날인데, 이 가난한 여행자도 함께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루터퍼드 부인은 애들에게 계명에 대한 질문을 해내려 가다가 이 가난한 손님에게 계명이 몇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 낯선 손님은 열 하나죠!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이 여인은 아니 뭐요? 선생같은 연령에 가만히 보니 머리도 많이 센 것이 보이는데 아직도 계명 이 몇 인지도 모르신다니 말이 됩니까? 아 그거야 우리 교구에서 6살 이상의 아이들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요. 그러나 이 가난한 손님은 아무 대답도 않고는 자기 밥 그릇만 비우고 잠자리 에 들었습니다. Usher 감독은 한 잠을 자다가 밤중에 일어나 루터퍼드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Us her 감독은 그가 얼마나 경건하게 살고 있는 것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Usher 감독 은 좋은 옷을 루터퍼드에게서 빌려 입고, 그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루터퍼드 부인은 한 번 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는 오늘 본문을 읽고 설교하면서 이것이 바로 열 한번째 계명이라고 설명을 덧 붙였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열 한 번째 계명입니다. 이후에 누가 계명이 몇이나 물을 때 열 하나 라고 대답해도 틀린 것은 아닐 줄 압니다. 아마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십계명을 간추리면 무엇이냐는 율법사의 질문에 네 마 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고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새 계명입니까? 1. 사랑의 넓이가 새롭습니다.옛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데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 습니다. 물론 이 옛 계명도 위대한 계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솔직히 말해서 옛 계명도 그대로 실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이 옛 계명에서는 자기 사랑 을 부 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사랑이 이웃 사랑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심에 그 자신을 사랑하신 것보다 더 사랑하셨습니 다.
그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그 자신을 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새 계명 에 있어서는 그 표준이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사람을 사랑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기분여(分與) (self-imparting)의 사랑입니다. 2. 계명의 배경이 새롭습니다.옛 계명의 배경은 출애굽기 20장 2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 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을 순종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그 민족을 구속하셨기 때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 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명령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애굽의 종살이보다 더 무서운 죄악에서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고, 무수한 유월절의 양보다 더 값진 것으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사탄의 죄 멍에 밑에서부터 건져 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매임의 사슬을 깨뜨려 버 리셨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리를 추격하나 주님은 그들을 바다에 멸망시켜 버리고 말았습 니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가 장 강한 배경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3. 새 피조물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이므로 새롭습니다.보통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이웃을 사랑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려면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 새 피조물이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피로 하나가 되었고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 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피로 묶어진 것보다 더 강한 것은 은혜로 묶어진 것입니다. 즉, 우리 가 주 안에서 다시 났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됩니다. 그것은 혈통으로 된 형제보다 더 강 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왜요? 혈통의 형제 중에 믿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결국은 영 원한 이별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 자매된 우리는 이 땅 위에 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영원히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입은 온 식구는 믿음의 사랑으 로 함께 묶여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베드로 사도는 권면 하십니다. 우리가 그 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의 지체로써 서로 교제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내가 나 자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도 그렇습니다. 한 손가락이 자체를 도울 수 없습니다. 다른 손가락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그렇습니다.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새 계명을 어떻게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남의 발을 씻겨야 한다. 주님 자신이 발을 씻 기시고 우리더러 남의 발을 씻겨야 한다고 교훈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자신이 우리를 사 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범사에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랑에도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 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원수까지, 배반자까지 사랑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길 안내자나 진리의 교사, 생명의 부여자만이 아니십니다. 그리스 도 자신이 길이시요, 진리시요, 생명이십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그리 스도의 전 생애는 사랑이 그대로 넘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 영광의 보좌를 비어두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이 전부 희생이었 습니다.더구나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희생의 극치였습니다. 그의 사랑은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왜 새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 로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게 될 것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에는 우리가 형제 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 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증거하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내 개인의 심령이 구원받은 증거도 형제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그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사도 바울 의 말씀대로 방언을 한대도, 천사의 말을 한 대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언의 능력을 가졌다 해도, 모든 신비를 깨달았다 해도, 모든 지식을 가지고 산을 옮 길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모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밖에 사람, 믿지 않는 사람도 알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 알렉산드리아에 무서운 페스트가 전염되었습니다. 근처에만 가도 전염이 되고, 발 병하면 거의가 죽었습니다. 이렇게 전염병이 만연할 때 알렉산드리아 이교도들이 사는 곳에 거의 집집마다 전염이 되어 떼죽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장례 치르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전염될까 두려워서 누가 손을 댈 생각도 아니하였습니다.그러나 그때 그 리스도인들이 불신자는 가까이 올 생각도 못 하는데, 가정을 방문하여 병중에 있는 이를 위로하 고 세상 떠난 이들을 장례 치뤄 주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전염될 가능성이 다 있는 사람들이요, 병들면 죽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험 속에서도 어떻게나 세심하게 잘 돌보았던지 알렉산드리아 시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지만 시체 하나 굴러다니게 하지 않았다고 합 니다. 그들은 이 땅 위의 사람들을 사랑했고, 죽어도 영생하고 부활할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고 했는데 그들은 정말 그대로 살았 습니다. 저희들은 서로 알지 못하나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 사실을 본 이교도들이 서로 말했다고 합니다. 이게 웬 일이냐? 그 대답이 온 애굽에 퍼졌다고 합니다.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종교 다. 왜냐하면 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사랑한다 고.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처럼 이 세 상에서 웅변적인 설교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힘이 있을 때는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교회는 교리가 있어야 하고 조직이 있어야 하고 법대로 움직이는 정치가 있어 야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생명 잃은 송장과도 같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권면이 아니고 교훈도 아닙니다. 계명입니다. 계명이란 하여도 좋고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여야 하는 것이 계명입니다. 우리가 십계명 을 범하면 안될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흔히 잊어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 는 교리의 잘못이 있을 때 이단자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범할 때 별로 관 심이 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합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말씀은 최대의 계명이요, 교리입니다. 사랑 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어떻게 내가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믿음에서 옵니다.
먼 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뢰하면 그의 종들은 사랑하는 것을 곧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 거 하세요. 그러면 모든 구원받은 사람에게 사랑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결심이 아니라 생각이 아니라 노력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성령이 사랑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행복), 화평입니다. 사랑의 범위만큼 행복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화평이 있습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21-35 / 박조준 목사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17장 26절까지가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 씀은 그 한 부분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 자신이 당하시게 되실 고난과 십자가에 못박 혀 죽는 일이 금방 앞에 눈앞에 닥쳐왔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가진 평화 속에 서 어떻게 우리도 환난 가운데서 평안을 가질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자기 앞에 당도한 일을 눈치채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예고하시면서 마가복음 10장 33∼34절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 고 이방인들에게도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절에 보면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의 본직을 생생하게 예증하셨 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종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셨는데 이를 통해서 배반자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최후의 만찬 이란 성화를 보셨을 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중앙에 앉으시고 열두 제자가 양옆에 있는데 그 표정을 자세히 보세요. 모두가 놀라워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레오날드 다 빈치가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주님 의 제자들은 제각기 자기 자신의 마음을 한 번씩 두드려 보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그게 누굽니까? 주님, 저는 아니지요? 일단 자신을 의심해 보기도 했습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가? 그러나 머리를 흔들 며 부정합니다. 아니, 절대로 그럴 수 없지, 절대 그래서는 안되지 하며 자기 마음에 다짐했 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 주는 자가 그니라 고 말씀하시면서 떡을 가 룟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에 보면 가룟 유다가 랍비여, 저니이까? 라고 물을 때 예수님이 네가 말하였도다 라고 대답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가룟 유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를 향하여 칼을 뽑을 수 있었던 혈기의 사람 베드로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어 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까요? 사마리아 동네에서 예수님의 일행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하 늘에서 불을 내려 몽땅 살라 버리고 말자고 제안하던 야고보와 요한이 이때는 왜 가만히 앉 아 있었을까요? 그때 상황을 생각하면 열한 사도가 함께 일어나서 모두 매질이라도 하면서 가룟 유다에게 항복을 받아야 할 텐데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분명히 지적해서 말 씀했는데도 그들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이 이상스러울 정도입니다. 열한 제 자들의 의분이나 유다를 향한 어떤 행동을 마태가 그의 기사에서 뺐는지 아니면 제자들 자신 이 가만히 생각해 본 결과 자기 자신들도 가룟 유다보다 나은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서 너무 부끄러워 가만히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만찬석은 물을 뿌린 듯이 조용했 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주님, 저는 약합니다. 실수가 많습니다. 과거만 아니라 미래에 도 실수가 없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을 팔지는 않겠습니다. 아무리 세상 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해도 주님만이 나의 주님이요, 주님이 나의 전부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 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을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분은 요한복음을 세상에 보낸 하나님의 연애 편지 라고 불렀습니 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나 오늘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서 제자들을 향한 위대한 사랑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상기케 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용기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 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 에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없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기신 말씀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끼리는 서로가 시기하고 있었 습니다. 누가 가장 크냐 하는 것 때문에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떠나려 하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너희가 사랑할 대상은 정확히 말해서 너희 서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수직적인 사랑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수평적인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는 계명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보면 이 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말씀된 옛 계명인데 왜 예 수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계명을 새로운 차원, 새로운 의 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계명에서 새로운 대상 을 얻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의 말씀 이 유대인더러 자기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영적인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나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바로 그 사람 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계명에서 새로운 척도 를 발견합니다. 요한이 쓴 첫 번째 편지 4장 10절 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 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사랑의 척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발견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 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 하리라 했습니다. 주님이 가지고 오신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새로운 능력 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은 성령의 능력, 각 성도 안에 계신 주님의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 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저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 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 전에 본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에서 사랑 이란 말 대신에 예수 라는 말을 넣 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는 오래 참고 예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예수 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 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예수는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 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의 화 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예수님의 사랑하신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도 그런 식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대신 우리 이름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말 대신에 나 라는 말을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오래 참고 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 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읽으려면 스스로 겸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 주여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 을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 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지식 가운데서 자라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 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신 주님의 말씀보다 너희가 이제 나를 찾을 터이나 라고 하신 말 씀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성령께서 요한복음서 기자인 사도 요 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쓴 요한일서는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새 계명의 강해서라 고도 말할 수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신 말씀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부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마지막 떠나는 장면 에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 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저희가 기다리는 메시야인 줄 믿고 3년 동안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예수님이 너무도 맥없이 처참하게 십자가에 처형된다고 생각하니 그 충격 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신 말씀이 들리지도 않았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사람이 다급하게 되면 스승도 버릴 수 있고 믿음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정신적인 위기와 영적인 위기에서 무 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어려운 순간들을 꿋꿋이 버텨 나갈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밖에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우리 앞에도 사랑만이 우리를 붙들어 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 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 입니다. 변함없는 사랑,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은 어렵습 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사랑할 때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을 닮아야 합니다. 선생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러기 위해서 선생 되신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서 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창하게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 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옆에 있는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구태여 멀리 있는 사람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 지만 진짜 사랑은 손끝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치열한 전쟁터와 같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이 맥이 탁 풀려 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하는 무서운 생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다 보면 주눅이 들고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스트레스 가 연일 계속되다 보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짜증나겠습니까? 언제 구조 조정으로 인해 정리 해고될는지 모르는 직장 생활, 언제 부도가 날는지 알 수 없는 사업, 하루하루가 긴장과 불 안의 연속입니다. 이럴 때 집에 들어서는 남편에게 아내가 여보,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과히 어려움은 없었어요? 하면서 반가이 맞아 주면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봄동산의 눈 녹듯이 다 사라진다고 합니다. 위로의 말 한 마디가 이렇게 큰 힘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남편이 집에 들어서는데 아내가 얼굴이 시퍼래서 투덜거린다든지 이불 쓰고 누워 있어 보세 요. 이것 보는 남편은 죽고 싶지요. 헨리 나우웬은 위로란 외로운 사람과 함께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마음을 쓰며 돌보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입니다. 위로는 고통을 가져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함께 있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 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라는 의미의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참 으로 우리 모두는 위로를 주고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라는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 다. 위로란 영어로 comfort 라고 하는데 힘으로 함께한다 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함께 있는 것이 힘이 됩니다. 격려하는 말 한 마디가 힘이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현실적 으로 우리는 자꾸만 삶의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고 넘어집니다. 우리는 우리를 믿어 주는 사 람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힘을 줄 사람, 흩어진 조각을 모아서 다시 시작 할 수 있도록 일으켜 주는 사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의지를 북돋워 주는 사람이 필 요합니다. 이것이 격려입니다. 우리 가운데 위로와 격려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 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최상의 의무 중에 하나는 격려의 의무입니 다. 다른 사람의 정열에 찬물을 끼얹기는 쉽습니다. 다른 사람을 절망시키기는 더욱 쉽습니 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좌절시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격려해 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한 마디의 칭찬이나 감사나 상금이나 격려의 말로도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합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결혼 38주년을 지냈습니다. 지나온 38년의 목회 생활을 한 번 되돌아보 면서 감사와 감격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군부의 핍박으로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자리에 까지 이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서도 저에게 힘을 더해 주었습니다. 격려는 죽을 사람을 살려줍니다.위로와 격려는 좌절의 사막에 서 헤매는 사람의 유일한 오아시스가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멀리하고 거부하며 그의 인 격을 의심하지만 그에게 찾아가 삶의 소망과 의지를 불어넣어 줄 때 그는 소생할 수가 있습 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험한 세상 걸어가는 동안에 방황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기진맥진해서 이제는 더 이상 걸어가기 어려운 상태에 있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실패하여 넘어져 있는 사 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 버림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을 살릴 수 있는 길 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며 서로 격려하며 살 아야 할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옆에서 격려해 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소생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사람은 얼마나 기쁘고 보람됩니까? 우리 교회는 상 처받은 심령이 격려를 받아 새롭게 다시 소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격려받아 복되고 격려해서 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 악을 기억하지 않고 용서합니다. 용서는 공동체 생활의 접착제와 같 은 것입니다. 용서는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깨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묶어 주는 접착제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용서해 주어야 할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을 용서하는 것은 다 른 어떤 용서보다 더 중요합니다.마음의 상처는 보통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오기가 쉽습니다. 먼 데 있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용서는 자기를 해방시키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그에게 감정이 상했다는 정신적 부담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게 되면 자기의 감정을 상 하게 한 그 사람을 늘 마음에 품고 다녀야 하는 부담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면 내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이 살게 됩니다. 서로가 용서하고 끌어안을 때 우리는 어려운 위 기를 함께 웃으면서 대처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저는 고난 주간을 맞을 때마다 은혜 받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무지한 로 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양손과 다리에 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세우니까 몸무게에 의 해서 늘어지면서 피가 쏟아집니다. 한 강도는 제 죄 때문에 죽으면서도 발악을 하고 입에 담 지 못할 말로 욕하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조용히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예수님처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살기등등한 사울이 감동을 받았고, 나중에 주님의 사도가 되 었고, 우리에게 용서의 도를 가르쳤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은혜를 받으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묵상하며 감격할 줄 아는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 엇 주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