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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329 /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4.04|조회수1,319 목록 댓글 0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

보혜사 성령님

요 14:25-26 / 조용기 목사

<서론>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보혜사 성령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제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마치 공기 없이 우리가 살 수 없지만 눈에 안 보이니까 무관심하고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을 안쉬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공기는 눈에 안보입니다. 공기 없이 살 수 없는 것 같이 성령이 없이는 영적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성령과 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었습니다. 우리가 작정하고 숨 호흡을 하면 폐 깊숙이 공기를 마실 수가 있습니다. 한번 숨 호흡을 해봅시다. 휴~ 공기가 눈에 안보이지만 우리 속에 들어왔다가 나갔습니다. 성령님도 한가지입니다. 성령님도 공기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숨 호흡을 해서 모셔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드립니다. 의지합니다. 들어오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성령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부흥사였던 무디(Dwight Lyman Moody) 목사님은 초등학교만 나와서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다가 주의 부르심을 받아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을 양손에 쥐고 흔드는 주의 종입니다. 하루는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나오자 여성도가 “목사님! 목사님!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하는데 나는 한시간 내내 졸고 앉았다가 갑니다. 목사님 말씀은 잘하시는데 은혜가 없어요. 지금부터 목사님 은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고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까? “왜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인가?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은혜가 없는 것은 자기가 못받아서 그렇지 내가 은혜가 없느냐.”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목사님 성령으로 충만하세요.”하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잘 못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잘 모르면서도 “하나님이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시옵소서.”하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나이 34살 때 어느 11월에 뉴욕 거리를 걸어가면서 “하나님이여 제게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졌습니다. 길거리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지니까 키가 큰 디엘 무디 목사님인데 그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되어서 빨리 친구집을 찾아서 친구집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방을 하나 빌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성령의 불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나중에는 감당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여! 손을 떼 주시옵소서. 그대로 있으면 나 죽겠습니다. 그만 부어 주시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때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난 다음에 말씀으로 미국과 영국을 뒤흔드는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어 수천만명을 주께로 이끌어 들이는 위대한 종이 된 것입니다.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을 졸게 만드는 목사였는데, 성령을 받자마자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성령 없이는 영적으로 태어나지도, 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능력 있는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전도도, 설교도, 부흥회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님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뚜렷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격을 가지려면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즉 지, 정, 의를 가지고 있어야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조용기가 여기 서 있을 때는 인격자지만 제가 죽어서 쓰러져 버리면 그 다음에는 시체지 인격자가 아닌 것입니다. 지성도 감성도 의지도 떠나가 버리니까 인격자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의 구성요소를 다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무생물로 취급을 하면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지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7절에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

성령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여러분,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이 우리 생각과 양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내 마음속에 성령이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성령은 인격중에 지성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성령은 다 통달하고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전지하신 지성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

마음에 사랑이 부음바 되는 것도 성령이 마음에 넘치면 모든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이 넘쳐 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성령의 사랑이 마음 속에 부어지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같은 열매도 성령이 와서 맺어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가슴을 치면서 우리 위해서 기도하신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데서 방황을 합니다. 성령이 이것 위해서 기도하라는데 이것이 뭔지 모르고 저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탄식을 하면서 ‘에라 가만히 있어라. 내가 기도하마.’ 우리 입술과 혀를 빼앗아서 방언으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그냥 기도할 때 기도가 안나오고 답답하다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가 잘 나올 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실 때인 것입니다. 우리가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은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모를 때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우리 권사님 한분 지역장으로써 구역회를 인도하러 가다가 종로 네거리에서 가슴에 기도가 솟아오르는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왔다갔다 하고 기도할 자리도 없는데 가로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만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얼마나 큰소리로 방언으로 기도했던지 나중에 정신차려 보니까 사람이 인산인해로 둘러싸여서 구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친여자라고.. 그런데 가슴은 시원해요. 그래서 구역예배를 잘 인도하고 집에 들어가니까 도둑놈이 들어와서 온 마당에 옷을 다 갖다 널어놓고 서랍을 다 뽑아서 흩어 놓았어요. 그런데 현찰을 서랍 속에 좀 넣어 놓았는데 만일 그 현찰이 도둑 맞았으면 그날 그 남편에게 맞아 죽을 지경입니다. 그 남편이 경찰관입니다. 그래서 ‘아이구 하나님 나는 이제 죽었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으로 뛰어 들어가서 서랍을 들춰보니까 다른 서랍은 전부 다 들춰놓고 난 다음 돈있는 서랍은 옷을 덮어 놓은채 손을 안댔어요. 하나님이 도둑놈 눈을 막아 버렸습니다. “야! 이것은 보지마라! 이것은 너 볼 것 아니다.” 그래서 살아났습니다. 만일 기도 안했더라면 도둑놈이 그 돈 가져 갔었으면 살아남겠습니까? 남편에게 얼마나 구박을 당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성령은 근심, 걱정을 하는 감정을 가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결의한 의지를 가지십니다. 성령이 결정하면 우리가 성령의 마음을 변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로 7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선생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니까 성령이 못하게 하고 비두니아는 못 가게 한 것입니다. 성령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을 갖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이 은사를 주실 때도 우리가 원하는대로 주시는 것 아닙니다. 성령이 보아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지, 정, 의를 가진 성령으로써 우리에게는 보혜사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보혜사 영어로는 콘포터.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란 무엇이냐, 보혜사란 곤고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부름을 받아 와서 곁에서 도와주는 자입니다. 어렵고 곤고한 사람을 도와주는 변호사로써 곁에 와서 도움을 베푸는 분이 보혜사인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을 위해 변호하고 권고하며 위로하므로 그 사람을 굳세게 하는 것입니다.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 위로 받으라.” 힘을 주는 것이 보혜사인 것입니다. 또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가져다주는 협력자가 보혜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와 싸울 때 우리에게 힘을 보태어서 함께 싸워 주셔서 이기게 만들어 주는 것이 보혜사입니다. 보혜사의 역할은 돕는 자며, 교사며, 위로자며, 대언자며, 상담자인 것입니다. 인격을 가진 성령께서 놀러 와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나에게 보혜사로 와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혜사 성령인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에는 다른 보혜사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보혜사는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로써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가르치고 위로하고 대언하시고 상담해 주시고 대속해 주셨지만 예수님이 가시고 난 다음에 온 분은 똑같은 보혜사인데 다른 보혜사입니다. 다르다는 헬라어는 알로스. 똑같은데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데 예수님 몸을 가지고 오시고 보혜사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것 다른 보혜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을 모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하지 예수님을 떠나서는 죽어도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제 삼위로써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성령님의 역사

 

모든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체가 되어 일하시나 그 특성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가 일하시나 그러나 그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만물을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좇아 그 만물을 만드시고 구속하시고 성령님은 만물을 유지하시고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지만 맡은 직분은 다르면서 또 함께 계시고 함께 계시면서 다릅니다. 아버지 안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와 성령님이 계시고 성령님 안에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는 아버지 하나님시대로써 예수님과 성령님은 아버지 안에 있었습니다. 신약초기 예수님 시대에는 아버지와 성령님이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지금은 성령시대니까 아버지와 예수님이 성령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절대로 서로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사역을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이 말에 주의하십시오. 한달 동안 함께 같이 있으리니 1년 동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토록 시도 끝도 없이 너와 같이 하겠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성령이 계시고 여러분 속에 지금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령이 우리 마음문을 열어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에게 성경 펼쳐 놓아 보세요. 전혀 모릅니다.

제가 불광동에 있을 때 대학교 교수님 한분이 부인은 열심히 예수를 잘 믿는데 본인은 안 믿어요. 안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글자가 하나도 안보여요. 그래서 부인이 나를 집으로 직접 오라고 해서 따라 가니까 한번 실제로 보라고... 자기 남편을 신문 읽으라니까 줄줄 잘 읽어요. 성경을 펼쳐 주니까 한마디도 못 읽어요. 그것 왜그러냐니까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어른 거려서 눈에 안보여요. 그 다음 회개하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신문은 잘 못읽어도 성경은 그렇게 잘 읽더라구요.

요한복음 14장 25절로 26절에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이 계셔야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만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 진리도 다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가르켜주는 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나게 해주세요. 여러분 나이 먹으면 제일 걱정 되는 것이 치매 걸릴까 싶어 제일 걱정이 됩니다. 나이 먹으면 자꾸 잊어 버려요. 제일 잘 잊어 버리는 것이 이름입니다. 금새 했는데 금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야~ 나 이러다가 치매에 걸리지 않겠느냐.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계시면 치매에 안걸립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붙들어서 기억나게 해주시기 때문에 여러분 뇌세포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성령이 기억나게 하시는 능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기적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면 여러분 세상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세상 마귀를 꾸짖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로 8절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이 오시면 꾸짖으러 오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예수 안믿는 것이 죄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모든 죄도 다 많지만 예수를 믿으면 그 피로써 다 씻음을 받고 청산을 받습니다. 우리가 지옥 가는 것은 우리 죄로 말미암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안믿어서 지옥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다 갚아 놓았는데 안 믿기 때문에 불신앙으로 지옥갑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라면 저가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면 너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할터이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왜냐하면 우리는 부처님의 무덤도 가볼 수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무덤에도 가볼 수 있습니다. 마호메트 무덤에도 가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는 가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안계십니다. 부활해서 승천해 버렸습니다. 무덤이란 뭐냐, 죄의 감옥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 죄를 못갚은 이상은 감옥살이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종신징역, 영원징역형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가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인류의 모든 죄를 다 갚았으므로 감옥에 있을 필요가 없이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 증거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사 아버지께로 가버렸으니 너희가 날 찾아와도 무덤에 와도 나를 못볼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성령이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심판에 대하여라면 이 세상 마귀가 심판을 받은 것이라. 아담과 하와를 꾀던 원수마귀는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마귀의 모든 주권을 해제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께서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장님에게는 안내하는 사람이나 안내개가 꼭 있어야 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도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르는 장님입니다. 성령이 우리 눈을 밝혀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2절로 14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의 진리도 가르쳐 주시고 세상의 진리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하면 세상 공부도 잘하게 돼요. 하나님 머리도 좋게 만들어요. 그래서 세상에도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장래 일을 가르켜 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미국 선교를 시작하면서 저는 미국에 많은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주의 종을 다 데리고 올려니까 그때는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신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양성하면 좋겠다는 마음에 생각이 기도할 때마다 떠올라요. 그래서 미국에 있던 박여호수아 목사님와 그 사모님, 권사님과 함께 LA 안에서 조금 떨어진 섬에 가서 하루 종일 금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성령이여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입니까? 내 생각입니까? 나는 돈이 없으니까 여기에서 학교를 시작할 수도 없는데 마음 속에 자꾸 신학교를 시작해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이게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하루종일 기도했는데 생각은 안바뀌어지고 배만 고팠습니다. 도저히 배가 고파서 오후가 되니까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섬 밖으로 나와서 그날 저녁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내가 그 간증을 했습니다. 돈은 한푼도 없는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학교를 세우라고 하니까 기가막힐 노력이에요. 땅팔 노릇이다. 그 설교를 하고 나오니까 한 젊은 사업가가 오더니만 자기가 안쓰고 비워 놓은 집이 한 채 있는데 학교 세울 때까지 내 집을 쓰세요. 그러더랍니다. 그것 진짜냐고 하니까 진짜라구.. 조그마한 한칸집 아니니까... 큰집이라고 그래요. 가보니까 큰집이에요. 방이 여러개 있는 큰 집이에요. 그래서 왠 떡이냐. 그냥 받아서 거기에서 신학교를 시작한 것이 배데스다대학교의 시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서 성령의 생각을 우리 마음 속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생각지 않게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일어나고 생각이 자꾸 그리를 통해 나오며 양심에 거리낌없이 생각이 나오면 성령이 여러분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 마음에 소원과 생각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느냐. 대게 마음에 뜨거운 소원과 생각을 통해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뜨거운 소원과 생각이 내 양심을 통해 걸러나올 때 부끄러움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한다고 우리가 작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뭐 특별히 환상을 보고 계시를 볼 수 있으면 참 좋겠지요. 또, 귀에 음성이 들려오면 더 좋겠고... 그러나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고급적인 것은 오지 않고 그저 생각이 자꾸 계속해서 머리에 남고 마음에 소원이 줄기차게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줄 알고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결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부패한 자식들인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부패한 심신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함과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거룩하신 분으로써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이 들어와서 우리 속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우리도 거룩하고 깨끗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이 우리는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성령님에 의지하고 성령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래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는 또한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굉장히 능숙하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전도도 잘 못해요. 말씀 증거는 더 힘듭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늘 묻습니다.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 그래서 내가 한평생 걸립니다. 뭐 엎드려서 연필 들고 종이 위에 적으면 설교가 나오는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일평생을 살아온 과거를 말씀 속에 현재 비춰보고서 주의 성령께 인도해 달라고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한다는 것은 혼신을 다하여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요, 뼈에 기름을 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대로 만담하는 식으로 해가지고 하나님의 영혼을 어떻게 인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고 한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따라 말씀하세요. 성령은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 우리 스스로가 못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도와주는 분이 옆에 와 계신데도 불구하고 그 도와주는 분을 무시해 버리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자기 혼자 발버둥 치다가 실패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팔자입니다. 그러나 도와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내게 힘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부탁할 때 성령이 우리에게 도우심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의 임재

 

여러분 성령이 함께 하시면 얼마나 우리 마음속에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인생은 혼자 살기에는 정말 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난 다음 그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혼자 있으니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에덴 동산이 조그마한 여의도 같은 동산이 아니었습니다. 큰 동산이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동산인데 뭐 자동차가 있어야 타고 돌아다니지 자전거도 없는데... 걸어서 돌아다닐 수 없어서 아담이 볼 수 있는 것은 조그마한 것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기 혼자 있으니까 외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궁궐이라도 임금혼자 살라고 하면 감옥입니다. 초가삼간이라도 함께 있으면 궁궐보다 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 인생을 살 수 없을 때 마음 속에 위로하는 성령이 함께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너희와 함께 계신 분이 계신다. 너는 온전히 혼자 있지 아니하다. 성령이 함께 계신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라. 성령이 와서 도와주신다. 많은 사람이 괴로우면 자살하지 않습니까? 사는 것이 별 볼일 없다. 살아도 효과가 없다. 더 살아서 무슨 재미가 있겠나. 그만 죽어 버리자. 마귀는 와서 죽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아니 재밌어. 재밌어.. 나는 어떻게 하고, 내가 너와 함께 있는데.. 나에게 구하라 내가 생명의 역사를 주겠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와 교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있어도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늘 함께 와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 먹고 나면은 속이 늘 쓰리잖아요. 잘먹고 나면 속이 시원하잖아요. 마귀가 들어와 있으면 속이 삐뚫어지지만 성령이 들어와 있으면 속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도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지금도 여러분 속에 성령이 계십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지금 내 속에 성령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전이 되어 계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분이 기도하면 속에 계신 성령이 여러분 위에 임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곁에 계시고 안에 계시고 위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 곁에 있고 믿는 사람은 속에 중생의 영으로 와 있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성령이 임하시는 체험을 하는 것은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되고 그 결과로 방언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방언을 안하고 천당갈 수 있느냐. 묻는 사람이 있는데 물론 천당가지요. 천국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거듭나게 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어서 천국 갑니다. 그러나 권세와 능력을 받으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증거로써 우리가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저는 정말 성령충만을 받는 체험을 하지 못해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다 성령받고 방언을 말하는데 나는 방언을 흉내내 봐도 따라하지도 못하겠어요. 그래서 친구들은 영어를 못하니까 친구 들어오면 내가 방언하는 체 한다고 영어를 빨리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야~ 너 방언 말하는구나.” 그러나 친구들을 속인만큼 마음에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진짜 기도가 안나와요. 거짓말했기 때문에.. 그래서 회개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안되겠어요. 기어코 성령을 받고야 말겠다고 친구들하고 삼각산에 올라가서 제일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니까 못 내려오겠어요. 캄캄해서... 그런데 옛날에 삼각산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겁이 나서 또 눈을 감고 기도를 못하겠어요. 돌맹이를 잔뜩 갖다 모아놓고 돌을 손에 들고서 양사방을 살피면서 성령 태워주시옵소서. 하니까 마음에 집중을 할 수가 있어야지. 목적은 성령받는데 집중적으로 기도해야 되는데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중에 밤중이 넘어서는 안되겠다. 죽더라도 성령 받고 죽어야 되겠다. 돌도 다 놓고 나무를 끌어안고 전력을 기울여서 성령충만을 달라고 기도하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더라구요. 그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부터는 늘 성령이 내 위에 임하여 계신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기쁨이 늘 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어린 소년과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들이 예수님을 믿고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어떻게 제가 한 번도 못 본 성령님을 믿으라고 합니까?” 그러자 전기공이던 아버지는“내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마”하고 아들을 데리고 발전소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전기가 나오는 동력기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우리에게 빛을 주고 우리의 집을 따뜻하게 해주는 힘이 나오는 곳이 바로 이 기계란다. 우리는 전기를 직접 볼 수 없지만 그 힘이 기계 속에서 나온단다.” 그러자 발전소와 동력기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들이 “아~ 전기가 있다는 것을 이제 믿을 수 있어요.”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믿을 수 있지. 네가 전기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전기를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전기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전기가 있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자신들의 삶 속에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성령이 와 계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성도 속에 거하시면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이 초자연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면 우리 마음에 비정상적으로 불안, 고통, 좌절, 분노 등이 생기지만,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 마음에 기쁨, 평안, 믿음, 소망, 사랑 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귀와 성령의 다른 점은 마귀가 오면 마음에 비정상적으로 불안, 공포, 좌절, 분노 등 부정적인 생각이 생깁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심한 스트레스로 혈압이 오르고 심장이 뛰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다가옵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로 16절에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그리고 귀신, 마귀가 우리에게 와서 이와 같은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쁨과 평안과 믿음, 소망,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마귀는 지옥의 고통을 가져오고 성령님은 천국의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을 자격이 있고 마땅히 인도를 받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 생각을 통해서 생각하시기 때문에 내 생각을 하는지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내 생각 속에 성령이 성전삼고 와 계시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기도할 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일으키는가를 조심스럽게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알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저의 경험으로는 성령의 기적은 조금이라도 내 마음 속에 부어지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조금 들어와도 기도가 달라지고 설교가 달라지고 분위기가 은혜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성령께서 와 계시는지 안계시는지 주여, 주의 사역을 해보는 사람은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함을 치고 모로뛰고 치로 뛰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시끄럽고 귀찮습니다. 그래 요란스러워도 성도들은 잠을 잡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부음이 오시면 정신이 바짝 차려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끌어 당깁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는 사람도 깜짝 놀랄 만큼 설교가 잘 나오고 진리가 마음에 떠오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뿐 아닙니다. 집안일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유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같이 있는 개인은 없는 사람보다 유능하며 성령이 같이 있는 나라는 성령없는 나라보다 위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21세기는 어느 나라가 예수를 가장 많이 믿고 성령이 충만한가 그것이 그 나라가 선진국에 들어 가느냐 안들어가느냐를 결정하게 될 것인 것입니다. 우리가 빨리 전도하고 우리 민족이 과반수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는다면 우리나라는 눈부시게 성장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온 천하에 복음을 증거하는 위대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성령님을 매일같이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성령께 의지해서 사십시오. 여러분보다 초인적인 능력을 구사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보다 초인적으로 살도록 하나님이 같이 계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하여 오늘도 하늘나라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근심도 두려움도 없이

요 14:25-31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 맨 끝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어나라.” 하신 것은 이제 하실 말씀을 다 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를 떠나자.” 하신 것은 이제는 가르침과 설명의 자리에서 행동과 실천의 자리로 옮겨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첫 말씀은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5-26절)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가까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때까지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동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많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이제 곧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시고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그를 대신하시게 될 것이라는 예고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언급하시며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 하신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가리키시며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요5:43) 하심으로써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강조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을 말씀하심으로써 당신과 성령 사이의 하나이심을 또한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어느 정도 하나이신가 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 외의 다른 어떤 새로운 계시를 가져오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뿐일 정도로 하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뜻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두지도 못하던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의 깊은 의미와 그 가르침의 참 뜻을 비로소 깨달아 알고 기억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리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대신하실 것임을 알리신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하실 수 없을 것임에서 오는 제자들의 불안을 달래주시기 위한 말씀일 수도 있으나 그 안에는 그 이상의 크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새 질서를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시대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선포된 시대였습니다. 즉 로마제국이 무력으로 지배하며 유지하는 외형적 평화의 시대였습니다. 감히 로마제국의 군사력에 대항할 힘이 있는 나라가 없음에서 오는 전쟁의 중단 혹은 종식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권위에 도전하고 불복하면 무자비한 응징을 당할 것이 두려워 굴종함으로써 누리는 평화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평화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심령에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보장해줄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당대의 절대권력인 로마제국이 제공하는 평화(Pax Romana)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구가하고 있던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과 그 진리의 깨달음과 거기서 오는 기쁨과 내적인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속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새로운 평화, 진정한 평화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평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이 세상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평화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의 길을 통해 다시 아버지께로 가셔야만 우리에게 올 수 있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 받은 데서 오는 기쁨과 평안, 그래서 마음에 정죄와 형벌에 대한 아무런 근심도 두려움도 없는 상태가 주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제 그 평화를 만드시기 위해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그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신 것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을 대신하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은 일단 제자들에게는 기쁨보다는 근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정 당신을 사랑하였더라면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을 기뻐해야 할 것임을 다시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첫째,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래의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이라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고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하신 말씀은 교회의 역사에서 크게 논란을 불러일으킨 말씀입니다. 특히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이 구절을 많이 들먹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께서 가장 크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성경적인 정통신앙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그 신성과 영원성과 권능에 있어서 동일하시고 동등하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하신 말씀은 빌2:6-8의 빛 아래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신 말씀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고 십자가를 지시고 세상 죄를 다 해결하시기 위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자발적으로 자기를 종처럼 낮추시고 철저하게 아버지께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하신 말씀은 그런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본래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왔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아무도 믿을 수 없을,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들릴 것이기에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반복해서 단단히 일러두지 않으면 안 될 사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믿을 수 없는 일을 믿게 하시려고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9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우리도 믿어야 합니다. 누구나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만이 살 수 있습니다.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이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곧 벌어질 당신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대사건을 믿어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더 하실 말씀이, 아니 말씀하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아시고 마무리 발언을 하셨습니다. 30-3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신 것입니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하신 것은 곧 붙잡히셔서 제자들과 말씀을 나눌 수 없을 때가 임박했음을 다시 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임금”은 마귀를 말합니다. 그는 벌써 왔습니다. 요13:2에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또 13:26-27에서 예수님께서 떡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자 그가 그 떡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고 이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음도 이미 보았습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것이었습니다. 그 마귀의 도구로 팔려간 가룟인 유다는 그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일 것이었고, 마귀의 지상적 대리자인 로마 총독 빌라도 또한 그 뜻을 따라 그의 몫을 잘 수행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실 것이었습니다. 그와 별도로 마귀는 또 열심히 예수님의 죽음을 진척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말씀을 하실 시간이 많지 않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실 중요한 말씀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란 바로 “이 세상의 임금”인 마귀입니다. 이 말씀은 마귀가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런 권세도 갖지 못했고 그의 지상의 대리자인 로마의 권력도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며 유다의 더러운 배신도 예수님께서 가실 길에 이용되는 것 외에 아무 소용없을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그 흉계도 단 사흘 만에 헛된 일임이 드러날 것이었습니다. 오직 명백히 밝혀질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명령대로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빌라도 앞에 서심으로써 세상의 임금과 맞서셨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오히려 온 세상 위에 참 왕으로 올라서신 것이며, 거기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모든 악과 거짓과 사망권세에 대하여 승리하신 것임이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뒤따라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31절입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의 “아버지께로 가심”의 의미를 설명하실 만큼 다 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이 아직 못 알아들었다면 이제는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그 모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에게 가르치실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 남은 것은 십자가 지실 길을 가기 시작하시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인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신 것은 그래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어나셔서 가신 곳은 바로 기드론 시내 건너편의 겟세마네 동산이었으며(요18:1), 거기에서 만난 자가 바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온 가룟인 유다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요18:3).

 

본문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무런 근심도 두려움도 없이 사는 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수동적으로 이기적으로 근심과 두려움 없이 사는 소극적 삶을 권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다 설명해주신 후 하신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인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신 그 말씀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기를 빕니다.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세상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려는 마귀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세력과 그들이 펼치는 중상과 모략과 비난과 음해와 죽음의 공격 앞에서 근심과 두려움에 싸여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며 그에 맞서 당당히 싸우러 나가라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는 악한 세력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주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적대하기에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가룟인 유다처럼 교회 안에서 세상과 야합하는 배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앞에서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저앉아 있지 맙시다. 일어나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이미 우리 안에 와계시고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역사하신 보혜사 성령을 의지합시다. 마귀와 그의 세력들은 영원히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발악을 해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승리는 더욱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동안 숨어 암약하던 악의 세력들이 그 정체를 다 드러내고 있는 때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악한 세력들을 이 땅에서 청소하시고 이 나라와 민족을 더 정결하게 하셔서 이 시대에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데 귀하게 쓰시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늘 기쁨으로 응답하며 근심도 두려움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간구합니다.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

요 14:25-26 / 박찬길 목사

앨빈 토플러라는 미래학자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이지요. 30년 전에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을 써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분입니다. 이 분이 인류 역사를 세 가지 물결로 설명하였습니다. 인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물결이 세 가지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제1의 물결은 농업혁명이라고 했습니다. 농업이 경제를 이끌던 시대지요. 제2의 물결은 산업혁명이라고 했습니다. 300년 전에 기계 발명과 기술 혁신으로 변화되던 시기를 말하는데, 기계·화학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이 사회를 이끌었습니다. 제3의 물결은 정보혁명이라고 했습니다. 30년 전부터 반도체나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산업이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제4의 물결이라고 해서 어떤 이는 지혜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생물학과 우주의 결합을 말하기도 하는데, 대체로 학자들은 바이오, 생명공학을 제4의 물결이라고 말합니다. 앞으로는 대체 에너지가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겁니다. 요즘 기업이나 나라들은 이 분야에서 선점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세상을 폭넓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는데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습니까?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자유롭게 얻습니다. 그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잖아요. 지금 여러분이 들으시는 설교도 인터넷으로 그대로 올라가고, 집에서 방송으로도 보실 수가 있어요. 앞으로는 생명공학이 발달해서 우리 생활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지금이 영적으로 어떤 시대인지를 알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지, 세계 경영을 누가 하는지를 알면 신앙생활이 반듯해집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에 맞게 주시는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시대를 셋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시대는 성부시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며 이끄시던 시대를 말하지요.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아브라함에게도 말씀하시지요.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모세를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를 바로에게 보내서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 내게 하겠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때로는 선지자나 예언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시며 일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성자시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말씀하시던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말씀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이끄십니다. 사도행전 이후로부터 지금까지를 성령시대라고 말합니다. 요즘 우리는 성령시대, 성령이 이끄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성령이 이끄시고, 성령이 교회를 이끄시고, 성령이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일하신다면 성령은 어떠한 일을 하실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령은 '보혜사'이기 때문에 우리를 돕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증인되게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3절에서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고, 세상의 증인되게 하고, 깨우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두 가지를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가르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26절 중간에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요..." 성령은 한두 가지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세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는 겁니다.

 

자동차에 네비게이션이 있지요. 내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어제 농구대회를 했는데, 짐(Gym)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주소를 입력했더니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해 줍니다. 몇 야드 가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고 몇 야드 가서 왼쪽으로 가라고 해서 갔더니 짐이 나왔어요. 내가 초행길이라고 해도 네비게이션에서 가라고 하는 대로 갔더니 틀림없었습니다.

 

성령께서도 우리를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이 복잡해서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에 성령께서 가르쳐주십니다. 공부할 때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세요. 공부는 이렇게 해라. 직장 생활이 얼마나 힘들어요. 그 때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세요. 직장생활은 이렇게 해라. 돈 벌기는 얼마나 어려워요. 성령께서 가르쳐 주세요. 돈은 이렇게 벌어라. 아이들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어요. 성령께서 가르쳐 주세요. 아이들은 이렇게 키워라.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와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성령은 생각나게도 하십니다. 오늘 26절 후반부에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몰라서 고생하는 때도 있지만 생각나지 않아서 고생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학교 다닐 때에 한번 이상은 경험하셨을 거예요 시험 볼 때에 몰라서 쓰지 못할 때가 많나요, 생각나지 않아서 답하지 못할 때가 많나요? 생각나지 않아서 쓰지 못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배우긴 배웠는데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언제 생각납니까?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시험장 밖으로 나가면 그때서 생각이 납니다. '아 그건데, 아 그건데..., 내가 실수했네. 틀렸구나' 대부분은 생각나지 않아서 쓰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럴 때에 성령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흐리한 문제가 선명해지고, 모르는 문제는 생각나게 되고... 저는 학교 다닐 때에 이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이것을 알려 주셨어요. 시험 볼 때마다 기도했어요. 하나님, 모르는 것은 알게 해 주시고, 흐리한 것은 정확하게 해 주시고, 불분명한 것은 확실하게 생각나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이렇게 근사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역사하시면 여러분의 실력보다도 월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겁니다. 지금 깨달아서 안타깝지요. 이 비밀을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성적도 더 좋게 나오고, 사업도 지금보다 훨씬 잘 되고..., 아쉽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성령을 받으면 여러분에게도 생각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성령께서 기가 막힌 일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26절 후반부를 읽어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는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님이지요. '모든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서의 모든 말씀이지요.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성경 66권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성경 말씀이 생각나는 거예요.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차이가 무엇이지요? 성령을 받기 전과 성령을 받은 이후의 차이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기 전에...,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닐 때에는 자기 생각대로 말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니까 베드로는 나는 감옥이나 죽는 자리라고 해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를 않았어요. 자기 말이니까 그런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신 후에는 달라집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강림한 후에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게 됩니다.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 나라 말로 방언하지요. 이 모습을 보고는 사람들이 놀랍니다. 모두 갈릴리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합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내가 내 영을 사람들에게 부어줄 것입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는 요엘서의 말씀이 생각나서 외치게 된 겁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으니까 돈 떼먹은 사람이 생각난답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생각난다고 하는데..., 성령 받은 것이 아니지요. 마귀의 영향을 받은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이 생각나고, 미운 것이 생각나고, 욕심이 앞서고, 남을 가르쳐주려고 한다면... 아직도 먼 겁니다.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회개하라"(막1:15)는 말씀이 생각나서 나에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초대교회의 베드로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서 회개하는 것처럼 내 심령에서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막11:17)이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기도하는 거예요. 성령에 이끌려서 기도의 제단을 쌓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섬기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교회와 성도들을 열심히 섬기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충성하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서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고 돌보며 사랑하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속회에서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고 권하는데,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주님의 말씀이 생각난다고 했으니까 성경을 읽어야 생각날 것이 아니겠어요. 성경을 읽어서 내 마음에 성경 말씀으로 채워야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요. 성경을 읽지 않아서 마음에 말씀이 없으니 생각날 것이 없잖아요. 마음에 성경 말씀이 없는데 생각나는 것은 자기 신념입니다. 자기 의지예요. 성경을 읽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신념을 믿고 살아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때로는 성경을 외워야 합니다.

 

최권능 목사님이라는 믿음의 선배가 계셨어요. 일제 시대에 붙잡혀가서 고문을 받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고문 받는 거예요. 많은 매를 맞는데, 수사관이 때릴 때마다 "예수!" 때릴 때마다 "천당!" 하는 겁니다. 그래 수사관이 듣기 싫으니까 조용히 하라고, 예수 천당 소리는 그만 하라고 말합니다. 이 때에 최권능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여보시오, 수사관 양반, 내 마음에는 예수 천당으로 가득차 있어서 때리기만 하면 예수 천당이 튀어나오는 거요. 이 소리 듣기 싫으면 나를 때리지 마시오" 그래 그 이후로는 때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보석 같은 믿음의 선배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하시는 일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서 말씀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복을 얻게 되시기 바랍니다.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더 깊게 생각하면 성령은 말씀으로 이끄신다는 겁니다. 성령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만 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주님의 말씀이 나를 부단히 이끌도록 역사 합니다.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은 말씀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10대에는 과자에 이끌리고, 20대에는 이성이 이끌리고, 30대에는 일에 이끌리고, 4-50대에는 출세에 이끌리고, 60대에는 명예에 이끌린다고 했는데, 성도는 말씀에 이끌려야 합니다.

 

성도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왜 실패하는지 아세요? 말씀에 이끌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말씀에 이끌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으로 채워져 있거든요. 성도가 말씀에 이끌리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던 오늘 처음으로 나왔던 상관없이 말씀에 이끌리는 사람은 틀림없이 흥하고 부하고 형통하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갈릴리 어부잖아요.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어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빈 그물이었잖아요.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즉시 응답합니다.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지만 말씀을 따라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말씀을 따라서 그물을 내리겠다는 말은 말씀에 이끌려서 그물을 내리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두 배에 가득 찼다고 했잖아요. 말씀에 이끌리면 이런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어떤 집사님이 사업하다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 고민하다가 사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을 만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야 31장을 읽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31장 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들은 군마를 의지하고, 많은 병거를 믿고 기마병의 막강한 힘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께 구하지도 않는다."

 

이 집사님이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말씀에 이끌리기 시작합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렇지. 내가 지금 어렵다고 애굽을 찾아서 가는구나.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고 돈 있다고 생각하는 애굽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구나" 그래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그 시간부터 무릎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사업이 어렵다고 애굽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게 해주셔서 사업의 어려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사람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당해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의 증인으로 세움 받는다는 것은 영광입니다. 말씀의 증인은 하나님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나를 증인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5장에 가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박해를 받습니다.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밤에 천사가 감옥 문을 열어주면서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일러줍니다. 사도들은 새벽부터 성전으로 달려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들이 다시 붙잡힙니다. 대제사장이 심문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왜 퍼트리느냐? 이 때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담대하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는 성령께서 하신 일의 증인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성령은 우리를 말씀의 증인으로 세워주는 복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저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말씀의 증인으로 세움 받는 복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교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할 때에 순종하고 갔어요. 나중에는 복의 근원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삽니다. 그 사람은 창세기 12장의 증인입니다.

 

어떤 교인은 홍해와 같은 큰 어려움을 만났어요. 여리고 성과 같은 난공불락의 성을 만났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믿음으로 나아갔더니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어요. 그 사람은 출애굽기 14장, 여호수아 6장의 증인입니다.

 

어떤 교인은 마귀에게 시험을 당했는데 예수님이 하신 것이 생각나서 성경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했어요. 그 사람은 마태복음 4장의 증인입니다. 어떤 교인은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꿋꿋하게 주의 길을 갔어요. 나중에는 십자가가 고난이 아니라 축복인 것을 깨달았어요. 이 사람은 십자가의 증인입니다.

 

어떤 교인은 물질적으로 어려움에도 오병이어의 말씀이 생각나서 먼저 하나님께 드렸어요. 십일조의 말씀이 생각나서 정직하게 십일조를 드렸어요. 나중에 물질의 복을 받았어요. 이 사람은 말라기 3장의 증인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씀의 증인으로 세움 받는다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무제한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MS사의 빌게이츠를 잘 아시지요? 이 분은 1년에 두 번씩 Think Week, 생각주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습니다. 단지 음식을 넣어주는 관리인만 만납니다. 빌게이츠는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면서 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읽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 10년 뒤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다는 거예요.

 

우리는 특별한 주간을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서 성령을 받으시면 됩니다. 매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면 됩니다. 그 순간 순간마다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실 겁니다.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각으로 여러분이 맡으신 사역을 감당하게 되실 겁니다. 하나님이 생각나게 하시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을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돕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을 생각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선한 길로,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의 증인으로 세움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이 시간 성령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성령이 이끄시는 시대입니다.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신다고 했으니 성령을 받을 때마다 마음속에 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서 성령의 증인으로 온전히 세움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 평안

요 14:25-27 / 문기태 목사

미국 국립정신보건원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8.7∼18.1%가 포비아(phobia)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포비아'는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두려움, 공포, 불안감을 심하게 가지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고소공포증, 비행공포증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총탄에 죽은 사람보다 전쟁이 몰고 오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는 공포와 불안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모두 온갖 두려움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버림 받음에 대한 두려움 등 수많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 평안해야 쉼도 있고 행복도 있습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높은 지위와 큰 권세를 누려도 마음 속에 평안이 없으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부귀로 평안을 얻지 못하고 영화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지쳐 있습니다.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두려움과 걱정에 눌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세상에는 참 평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참 평안이 있습니까? 참 평안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참 평안을 받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참 평안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참된 평안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

 

1.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

 

오늘 말씀에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평안입니다.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도 있는데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그런 평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평안 또는 평화라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팍스(pax)와 샬롬(shalom)이 그것입니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 등을 의미했습니다. 로마는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넓은 땅을 정복했고 지배했습니다. 로마는 강력한 군사적인 힘을 길렀고 강하고 안정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그렇게 정복하고 다스리며 그들은 팍스 로마나를 부르짖었습니다. 완전한 평화라는 의미입니다. 군사적으로 온 세상을 지배하고 경제적으로도 호경기를 누리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게 통치하는 완벽한 세상입니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평화를 자신들의 힘으로 구축하였다고 자랑한 것입니다. 그것을 흉내 내어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나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경제력과 군사력, 정치력으로 세계가 미국의 주도권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평화 또는 평안이 힘에 의해 주어집니까? 안 주어집니까? 우리는 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힘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힘이 없이 평화가 지켜질 수 없습니다. 국력이 약한데 어떻게 나라가 외국에 짓밟히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나라의 경제가 엉망인데 국민들이 평화롭게 잘 살 수 있습니까? 외교력,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 등을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나 서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보세요. 저들은 스스로 평화롭다고 말할지 모르나 객관적으로 그 나라가 살기 좋다고 평생 살고 싶어서 거기로 이민 가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국민들이 기아와 전쟁 그리고 질병과 폭력에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다가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개인이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없이는 평안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불행한 삶에 시달리기 쉽습니다. 돈이 없으면 아파도 병원에도 못 갑니다. 셋집도 못 얻어서 설움을 받습니다. 힘이 없으면 무시당하고 더 손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학생은 실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실력이 있어야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인정을 받고 승진도 하고 계속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집니다. 무능하면 직장에서도 퇴출당합니다. 가정을 지켜 가는 데에도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으면 위기를 맞고 극복하지 못하고 불행해지기 쉽습니다.

 

여러분 힘을 나쁘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힘이 필요 없다고 부정하면 안됩니다. 힘이 없이 평화를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강력한 힘을 길러야 전쟁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더 부강해져야 합니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우뚝 서고, 세계에서 알아주는 브랜드가 더 많아져야 합니다. 힘없는데 떠들어봐야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인물들을 배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힘을 길러야 합니다. 실력도 기르고 능력도 길러야 합니다. 체력도 기르고 건강해야 합니다. 재력도 있어야 하고 할 수 있다면 권력의 핵심부에도 들어가야 합니다. 좋은 영향을 세상에 확산시키려면 고지를 선점해야 합니다. 밑바닥에서 아무리 소리 질러봐야 듣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힘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세상의 힘도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그것이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화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팍스 로마나를 부르짖고 자랑했지만 로마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로마는 심하게 부패하였습니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였을지 모르나 그 속에도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고 두려움에 눌려 있었으며 많은 문제 속에서 불행의 그림자를 떨쳐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부르짖습니다. 전세계가 미국의 주도권 하에 들어가고 미국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지만 완전합니까? 반미의 물결을 점점 더 크게 파도 치지 않습니까? 미국이 가장 안전하고 살기 좋다고 여겼는데 그들이 가장 자랑하는 뉴욕의 맨하탄 세계 무역 센터 100층이 넘는 쌍둥이 빌딩이 한 순간 무너져 내리고 수 천명이 죽지 않았습니까? 미국에 도전하는 세력을 손본다고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 얼마나 홍역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은 네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짧고 순간적인 것입니다. 둘째는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입니다. 셋째는 외형적인 것입니다. 넷째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진짜 평안, 진짜 평화가 아닙니다.

 

2.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이에 반해 살롬이 의미하는 평화는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입니다. 로마 식민백성인 히브리 민족이 주로 사용한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건강한 자나 성공한 자는 물론 병든 자나 실패한 자들과도 만나면 '살롬'이라는 인사를 기꺼이 주고 받았습니다. 이 평화는 위로부터 덧입는 고귀한 평안을 뜻합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은 팍스의 평화도 추구해야 하나 그보다 더 살롬의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살롬의 평화가 여러분의 삶 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위험과 함정, 사고와 질병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불안하지 않습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스트레스와 좌절, 불면증과 우울증이 위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위협 속에서 어떻게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다가오는 죽음과 제자들이 배반하게 될 것과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모두 주님을 버리고 흩어지게 될 것을 다 아시면서 예수님은 어떻게 평안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 안에는 참 평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진정한 평안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사람들처럼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누리시는 그 평안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당시에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붙잡혀 가서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흔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히고 쇠사슬에 묶여 다음날이면 사형이 집행될 상황에서도 누워 깊이 잠들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강심장이 그런 상황에서 깊이 잘 수 있겠습니까? 천사가 나타나 감옥 문이 열리고 감옥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떨고 있는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잠이 깨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천사가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이 평안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누릴 수 있도록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어떤 주님의 선물을 받았는지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힘입으려고만 하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주님의 평안이 충만하게 역사하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끼치시는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나의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평안으로 네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 순간적이지 않고 영원한 평안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좋을 때 생기고 나쁠 때 사라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둘째, 영적 평안입니다. 영혼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누리게 됩니다.

셋째, 내면적 평안입니다. 외적인 요인에 좌우되지 않고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납니다.

넷째, 완전한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끼치시는 '나의 평안'은 영원하고 영적이며 내면적이고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안을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인생에 위기가 닥쳐도 주님의 평안을 유지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미국의 선교사로 대서양을 건널 때 엄청난 파도를 만나게 됩니다. 웨슬리는 그때 극심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함께 승선했던 26명의 모라비안 신자들은 하나님을 찬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가 찬양을 부르는 모라비안 신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두려움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평안했습니다. 웨슬리는 그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선교사로 헌신하여 가면서도 두려움에 쩔쩔매고 있는데 저들은 자신에게 없는 그 무엇이 있기에 저토록 평안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사건이 웨슬리에게 아주 큰 도전이 되었고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후에 웨슬리는 모라비안 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구원에 대한 확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구나! 구원의 확신과 하늘 소망을 분명히 갖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형태의 공포도 담대히 극복하고 평안을 누리며 승리할 수 있구나!'하고 깨닫고 놀랍게 변화된 모습으로 사역하며 존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된 삶입니다. 무기 없이, 힘 없이도 가장 힘있게 살아가는 이 평화가 충만한 삶입니다. 세상은 평화가 군사적인 힘으로 핵무기나 주먹의 힘으로 평화가 주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힘 때문에 깨어집니다. 부부간에 서로 잘났다고 힘을 과시하려다가 싸움이 발생하고 교만함 때문에 평화가 깨어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어집니다. 가정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으로 참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예수님의 평안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붙잡고 살아야 참 평화가 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살 때 평안이 넘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평안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보혜사

요 14:25-26 / 장경동 목사

사람의 육신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성경은 여러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벧전1: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시90:10“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 고후4:7“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 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안개요, 풀이요, 질그릇 같은 그 안에 보배가 담겼습니다. 그 보배가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배를 담은 우리를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로 보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후로의 삶은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깝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14: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6:7“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20:22“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 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행1:4-5“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 보혜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행2:1이하에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그 성령님이 오셨어요.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보혜사 (파라 클레토스) : 중재자, 곁에서 돕는자

 

1. 보혜사는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요14: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그 가르침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요일2:20“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7절“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계2:29“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고전2: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느니라” 고전2:12-15“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 하느니라” 성령의 가르침대로 하니 완벽하여 누가 판단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영은 어떻게 말하는가? 생각과 마음(감동)으로 말합니다. 요13:2“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잠4:23“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요10: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쫓아가십시오.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가득 차셔서 성령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실 때 그 인도하심에 따라 갑시다.

 

2. 보혜사는 예수님을 증거 하십니다.

요15:26“내가 아버지께 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 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마10:8“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암3:7“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말씀하시고 증거 하십니다.

 

3. 보혜사는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요16: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라” 선지자가 되어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세상에 대한 책망이 없다면 도적이 들어오는데 짖지 못하는 개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성령의 외침이 없습니다. 영의 사람이 육의 사람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본질의 사람이 현상의 사람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의 세속화라고 합니다.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전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육은 무익하고 영은 영원하건만 사람들은, 오늘날의 목회가 자꾸 육화 되어가고 있으니 세상과 구분이 안 되고 거룩이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4. 보혜사는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모든 삶의 중심에 보혜사가 계시고 그 보혜사가 우리 모든 삶의 중심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안을 누리는 비결

요 14:25-27 / 양인순 목사

오늘은 교회 절기상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50일이 지난 주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님을 선물로 보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성령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일이 돼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죄와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무력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작은 시련과 고통 앞에서 쉽게 넘어지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의 유행과 풍조에 휩쓸릴 때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며 격려하고 살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쉽게 말씀드리면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with us). 인성을 지닌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리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네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3차원의 삶을 사는 자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동시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어떤 상황, 어떤 곳에서도 동시에 함께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teach us).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해가 되고, 감동이 되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깨우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지식으로 많이 알아도 성령님께서 감화 감동시켜주시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help us). 원래 ‘보혜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이 말은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 이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다가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이 은혜가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분들에게 최고로 악한 말이 뭘까요? ‘성령 받지 못하고 예수 믿어라’ 라는 말이랍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유명한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간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기독교인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업신여겨도 그는 세상을 이길 힘이 없으며, 깨끗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그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

 

성령님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맛있는 고급정식 요리에서 애피타이저(appetizer)만 먹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메인 요리는 뒤에 나오는데 앞에서 실컷 입맛 돋우는 음식만 먹고, 이 요리는 별로라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이 좀 답답하고, 따분하고, 뭔가 2%가 부족하다고 느끼시면 바로 성령 충만을 사모하라는 주님의 사인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먼저 사모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간절히 찾고 부르짖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가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간절히 약속하신 성령님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사모하며 기다리며 기도할 때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유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주님은 지금도 사모하며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할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님은 이름 그대로 거룩한 영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의 쓰레기로 채워져 있고, 악취가 나면 성령님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날마다 씻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할 때 성령님을 부어주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행5:32).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성령님의 능력은 충만하게 임합니다.

또한 우리가 뜨겁게 찬양할 때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찬양은 기도입니다. 찬양 속에 임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전심으로 찬양할 때 성령님은 감화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가슴을 만져주시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 가운데도 성령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진리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 여러분의 질병이 떠납니다. 문제가 응답됩니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많은 능력을 행한 분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특별한 자가 아닙니다. 원래부터 우리와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분도 아닙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분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약5:17).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850대 1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와 대결을 벌여서 승리했습니까? 그가 어떻게 3년 반이나 비가 오지 않던 땅에 비를 내리게 했습니까? 엘리야는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하늘에서 주의 성령의 불이 임하기를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는 금식을 하며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또한 믿음으로 매달렸습니다. 그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가뭄으로 갈라진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도하면 성령님의 역사는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믿습니까? 성령님은 우리의 메마르고 갈급한 심령을 은혜의 단비로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삶의 곤고함과 목마름을 생수의 강물로 채워주십니다. 세상의 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남편을 다섯 번이 바꾼 여인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얼마나 몸부림친 여인입니까? 그 여인이 우물가에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그녀의 삶이 새롭게 변화됐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집어 던지고 동네로 달려가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아직도 내 안에 목마름이 있고, 삶의 염려와 근심이 있습니까? 지금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곳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병든 자가 치유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우리 성지교회 가운데도 성령님의 역사가 지금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간증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듣다가, 기도하다가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알파 성령 수양회에서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주로 초신자와 불신자들이 참여했기에 준비과정에서부터 조심스러웠습니다. 혹시 지나치게 뜨겁게 기도하면 광신자 집단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서 이번에는 기도를 조용히 했습니다. 도우미들에게 방언기도도 가급적 자제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님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가슴 쪽에 연골염증으로 통증을 느끼시던 분이 계셨습니다. 기도회 마지막 부분에서 제가 게스트들만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더니 통증이 사라졌답니다. 할렐루야!

 

성령님은 살아계셔서 오늘 우리 가운데도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셔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여러분 가운데 날마다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특별히 평안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다같이 27절 말씀을 읽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 평강, 평화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히브리어로 평안을 ‘샬롬(shalom)’ 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인사가 ‘샬롬’입니다. 샬롬은 다양한 의미로 번역됩니다. 온전한 상태, 건강한 상태, 평화로운 상태, 행복한 상태 등 다양합니다.

한 마디로 샬롬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온전함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왜 우리들은 평강을 누리지 못할까요?

 

첫째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이 온전하게 보전된 곳이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샬롬의 동산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샬롬을 깨뜨립니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게 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깨져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고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하심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결국 진정한 이 땅의 평화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주로 모시고 살 때만 가능합니다.

 

둘째로,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평강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지나친 욕심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면 원망과 불평이 앞섭니다. 그리고 욕심이 극대화됩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더 가지고, 더 많이 쌓아두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결국 평안을 빼앗습니다.

 

셋째로, 삶의 목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강의 상대적인 개념은 ‘염려와 근심’입니다. 염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림나조(mrimnazo)’인데 ‘마음이 나누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염려와 불안이 생깁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헷갈릴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뜻을 확실히 정하고 나면 마음에 평강이 임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6:34)

오늘을 하나님이 지켜주셨다면 내일도 역시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미리 가불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이 주신 안식과 평강을 누리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삶 가운데 평강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지으시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심을 믿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편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바로 임마누엘,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주님의 능력의 지팡이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모든 상황에서 위로해 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베풀어 주시고, 언제나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시는 영원한 목자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부족함이 없다(I shall not be want)’ 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이 고백을 할 때는 모든 삶이 풍족한 샬롬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 인생의 말년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다윗은 신발도 신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도망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며 원망합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다윗은 너무나 평화스럽고 목가적인 시편 23편을 썼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바로 영원한 목자가 되셔서 여전히 함께 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많은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는 삶의 결핍으로 인한 아픔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와 상황을 보면 우리는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그 속에 다가오시는 평강의 주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다윗처럼 믿음의 눈을 열어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내 삶의 모든 아픔과 문제를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입니다. 문제 해결의 근원자이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평강의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순간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우리 가운데 불안과 염려가 찾아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생명줄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호흡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들이 한 순간이라도 호흡을 멈추지 않아야 살 수 있듯이 영적인 생명은 기도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스스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산소마스크를 쓰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라도 산소 마스크를 벗기면 그 생명은 끝납니다. 영적인 무호흡증처럼 무서운 병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강조합니다. 아무리 많은 봉사와 섬김을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중환자실에서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는 영적 환자입니다. 하나님과의 긴밀함의 대화 채널이 연결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거장들은 모두 기도로 문제를 돌파한 자들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십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불의 세력을 정복했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다물게 했고, 무질서를 평온으로 이끌었습니다. 전쟁을 그치게 했고, 악한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 죽음의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하늘의 문을 열게 했습니다. 기도는 질병을 물리치고, 멸망의 상황에서 나라를 건져내며, 태양을 머물게 했습니다. 기도는 수많은 축복의 뿌리요 근원이요 어머니입니다." 아멘! 기도의 능력을 가진 자는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립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하지 말고 먼저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 가운데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평강의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앞에 깨어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염려와 근심을 물리치고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습니다. 상황 따라 환경 따라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아픔도 고통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서 ‘도우신다’는 표현이 ‘순안티람바노마이(sun-anti-lambanomai)’입니다.

여기에서 <순>이란 ‘곁에 다정하게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티>는 ‘반대편’ 혹은 ‘건너편’이라는 의미로서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람바노마이>란 ‘번쩍 들어서 옮겨준다’는 뜻입니다. 즉 ‘도우신다’는 말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건너편에서,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도무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거대한 바위에 가로막혀 한걸음도 앞으로 움직일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그 때 어느 힘 있는 분이 나타나서 거대한 바위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순안티람바노마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골리앗과 같은 인적 장애물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까?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처럼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습니까? 내 힘으로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라도 성령님을 의지하면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 다가 오셔서 순안티람바노마이 해주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 성령님의 능력을 믿고 따라가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강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극복하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세상의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궤계를 멸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슬픈 탄식을 새 노래로 바꿀 수 있습니다. 멸망 길로 달려가는 영혼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황무한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 성령님을 인정하십시오.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성령 충만함을 간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성령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을 통하여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꾸는 놀라운 역사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가르쳐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내가 낙심하여 기도하지 못할 때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고,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십니다. 우리가 웃을 때 함께 웃으시고 춤을 추십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참된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평화를 만드는 Peace-maker 삼으셔서 세상으로 파송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 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성령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평강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리고 있는 평강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평강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내 안에 있는 평강의 은혜를 옆에 계신 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

요 14:25-31 / 김필곤 목사

오늘 오후에 우리 나라 월드컵 축구팀과 현재 세계에서 축구를 제일 잘한다는 프랑스와 평가전이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대와 설레임이 있을 것입니다. 11시에 축구 시합이 있다면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그 경기를 볼만큼 열광적인 축구팬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권투를 하도 좋아했는데 저녁에 있어서 저녁 예배 시간을 옮겨서까지 권투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낚시를 참 좋아했는데 어느날 낚시 도구를 챙겨 나가는데 길에서 만난 교회 집사님이 "어데 가세요"라고 그러드래요. 그래서 "보시다 시피 낚시갑니다."라고 하였더니 그 집사님이 "목사님 오늘 주일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오후 6시에 검찰에서 출두하라면 지금 어떤 기분이 들까요? 설레임과 기대가 있을까요? 불안할 것입니다. 오늘 오후 6시에 암 수술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더 불안할 것입니다. "혹시 수술 도중에 죽지는 않을까?" "마취에서 깨어나지는 않을까?" "의사가 실수하지 않을까?" "수술을 하였는데 이미 치료 불가능이라는 판정은 내리지 않을까?" 아주 불안할 것입니다. 결코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밥먹는 맛이 나지 않을 것이고 예배를 드려도 불안과 초조, 긴장으로 드릴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할 때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죽음 앞에 서 계시는 분이 놀라운 평안을 가지고 계신 것을 봅니다. 예수님입니다. 이제 몇시간 있으면 십자가에서 처형됩니다. 로마 군병들에 잡히고 갖은 고문을 당하시고 그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 형을 당하여야 만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이 하셔야 할 일을 하시면 제자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제자들에게 작별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이며(요한복음 13:38참조), 제자 중 한 사람은 자신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요한복음13:21~24참조)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살기는 제자들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 넣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주님께서 주시는 이 평안은 어떤 평안일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님이 누리고 있는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평안을 가지고 일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여도 이 평안을 잃지 않고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이 평안은 우리 삶에 있어서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의 소설,「마음의 평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청년이 어느 노인을 찾아가 자기 소원을 부탁하였습니다. 노인은 무엇을 갖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고, 넷째는 재능이며,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있던 노인은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그러나 평안이 없이는 아무것도 즐길 수 없다네." 이 모든 것이 있다하여도 평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도 평안이 있을 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쌓여진 명예도, 재물도, 성공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84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 답니다.그는 건강비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적당한 운동, 적당한 음식, 신선한 공기 그리고 마음의 평화인데 그중에 제일은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와 파키스탄 사이에 있는 훈자라는 곳의 사람들은 120세를 넘겨 산다고 합니다. 병원도 없지만 죽을 때도 그 날의 밭일을 다 하고 저녁먹고 잠들고 아침에 가보니 조용히 죽어있음을 발견할 정도로 건강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들의 장수 비결은 마음의 평안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평안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가정에도, 교회에도, 나라에도, 직장에도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불확실한 생활을 매일매일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불행과 위험과 재난이 우리를 엄습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투명한 미래 가운데도 예수님처럼 어떻게 이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1. 은혜로 이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

우리가 평안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도, 우리가 가정 생활하는 것도 다 은혜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다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근본적인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5월 23일 자 시사저널을 보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건강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신장이상설’'중병설' 등이 나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통령의 일정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국무총리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인의 나이에 아들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형 선고도 받았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도 넘긴 분일지라도 마음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가진 자 일지라도 아들이 감옥에 가 있고 앞으로 어떤 판결이 나올지 모르는데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문제가 걸리면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하여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평안할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약을 퍼마시고 아무리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허무만 남고 불안만 남습니다. 방탕한 인생을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온 어거스틴은, "제가 주님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정직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1)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평안입니다. 이런 저런 조건이 있으므로 평안한 평안입니다. 그 조건이 있으면 평안하지만 그 조건이 사라지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있을 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지면 불안해 집니다.

2)세상이 주는 평안은 자신을 비워서 이루어지는 평안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불교의 수도나, 마음의 수양 등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면 없어지는 평안입니다.

3)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런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안에서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바울과 실라는 이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 감옥의 고통에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평안은 참 평안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4)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은혜로 주시는 평안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시면서 평안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끼친다는 것요" 다른 하나는 "주노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것은 전자는 화해의 상태를 뜻하는 평안이요, 후자는 고요의 상태를 뜻하는 평안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죄용서함으로 오는 평안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가졌다하여도 죄가 있으면 결코 이 평안을 맛볼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평안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죄사함 가운데 주시는 구원의 평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참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하여도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가있는 사람이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평안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죄사함을 주시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 맨 처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 평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 20:26)"

이 평안은 은혜를 받을 자가 누릴 수 있습니다.

"(눅 1: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단 10:19)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2. 성령 충만으로 이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면 평안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녁에 아이가 아무 이야기 없이 12시까지 들어오지 않아 보십시오. 불안합니다. 평안이 없어집니다. 우리의 감정은 아무리 훈련이 되어도 막상 상황을 만나면 그렇게 잘 조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란 단순이 감정 조절이나 적극적인 사고 훈련이나 명상, 마인드 컨트롤, 요가, 최면요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은 육체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령의 문제입니다. 아파트 문에 보조키 세 개를 단다고 찾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쫓아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요한복음 20:22). 우리의 내면 세계의 평정은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사울왕을 보십시오 성령이 떠나니까 그 순간부터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됩니까? 심리적 불안으로 미친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한 다윗을 보십시오. 그 위기 가운데서도 시를 짓고 찬양을 드립니다. 더욱 담대해지도 평안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제자들을 보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으니까 얼마나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됩니까? 감옥에 가서도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처럼 평안하고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구합니다.

1) 성령충만하면 확신을 가지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26, 28)

성령이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어디까지나 불안한 것입니다. 잘 모르니까 두렵고 겁이 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난다니까 그 내막을 모르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바로 알게 되면 두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것을 알게 하고 성령이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궁극적인 결과를 알게 됨으로 가지는 평안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28).

내가 간다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죽은 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온다는 말은 결과적인 것으로서 부활할 것이고, 하늘에 오르셨다가 다시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였으리라는 것입니다. 과정은 좀 복잡하고, 고난스러우나, 그 결과가 확실하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성령 충만을 받으면 확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생하고 환난을 당하여도 우리는 마지막 약속들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는 평안을 가지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복음찬양 666)

환란과 고난이 면제된 평안이 아닙니다. 환난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고난의 물결이 출렁이고, 전개될 미래는 암울한 폭풍우가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가질 수 있는 평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구름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구름 낀 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이깁니다. 극복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해도 성령님께서 넉넉히 그 문제에 의해 절망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있는 평안이야말로, 모든 근심과 고난을 소화해 내는 평안이요, 모든 환란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가질 수 있는 참된 평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실 때 큰 폭풍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 떨었으나, 그 가운데서 주님은 깊은 잠을 주무실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평안입니다. 파도 일렁인다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다니엘의 친구들이 사자굴에 들어가고 풀무불에 들어갈지라도 불안하지 않고 평안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감옥에서도 평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초대 교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보십시오. 불안한 미래입니다. 죽음이 앞에 있는 미래입니다.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평안을 가집니다.

2)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홀로 밤길을 가면 두렵습니다. 불안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손을 잡고 가면 평안합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은 보혜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 옆에서 돕고 말씀하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요14:16-17을 보십시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영이십니다. 재벌과 함께해도 문제를 해결해주고, 권력자와 함께해도 문제를 해결해 주어 안심하고 어두운 밤에 아버지와만 함께 걸어가도 두렵지 않는데 우리 성령님과 함께하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3. 기도로 이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문제(일어난 문제, 일어날 문제)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은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어느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친정 어머니 위암으로 앓고 있는데 자주 문병을 가지 못했답니다. 집안일과 자녀 일로 바쁘다 보니 가보지 못해 늘 죄송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오목가슴이 쓰리고 소화가 안되는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인은 겁이 덜컥 났습니다. [나도 어머니처럼 위암이..?] 불안해서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병원에도 못갔답니다. 부인의 마음속에서는 아직 진찰도 받아보기 전에 이미 자신이 위암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마음에 암이 걸린 것입니다. 위암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절망과 공포에 빠져버렸습니다. 자식의 잠든 얼굴을 보며 하염없이 울기도 했고, [나 죽으면 저 어린것의 고생이 얼마나 클까...]걱정이 태산같습니다. 문여는 소리, 그릇 부딪치는 소리, 전화벨 소리,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 등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쓸데없는 공상과 잡념으로 머리속은 더욱 혼란하다. 초조감이 밀려오면 [이러다가 내가 미쳐서 길거리로 뛰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불안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때때로 뜻하지 않는 위협이 다가옵니다. 갈등이 몰려 옵니다. 어떤 사건으로 두려움에 싸이게 됩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불안해합니다. 평안이 없어집니다. 이미 일어난 문제로 불안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예측되는 위협 앞에서 어떻게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로부터 이미 주님께서 주신 평안을 잃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문제로 인해서입니다. 과거 일어난 문제 때문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래 일어날 문제로 인해 염려하면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1) 문제가 있을 때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방법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하여도 마음의 평안은 빼앗기기 않습니다.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 하면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옵니다.

문제가 있을 때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면 그 문제 때문에 평안을 잃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풀릴 수도 있고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그 문제 때문에 불안해 하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면 먼저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자신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며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고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든 주를 의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2)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를 풀어 주심으로 평안을 줍니다. 기도하여 응답받은 한나를 보십시오. "(삼상 1: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불안합니다. 그 때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기도하고 찬미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옥문이 열렸습니다. 간수장의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미국의 생명수 교회의 사모님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병원에 가 검사해 보니 태아가 중증 장애아로 태어날 확률이 90% 이상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중증 장애인을 낳고 기르겠습니까? 아니면 제하겠습니까?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불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모님이기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매달렸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중증 장애인을 나에게 주면 그것을 하나님이 내 평생 지라는 십자가로 알고 저는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어찌 내 생명을 내가 죽이겠습니까? 죽일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았느데 낳자마자 그 아이는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갔습니다. 일주일동안 그 어머니는 아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울면서 어머니는 기도했습니다. 그 아이를 가져와서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답니다. 어린아이의 눈과 어머니의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에 어린아이의 눈에 안개처럼 희미한 것이 덮여 있는데 이 아이 눈에서 갑자기 안개 같은 것이 벗겨져 맑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면서 벙긋벙긋 두 번 웃더랍니다. 너무 기뻐서 그 아이를 가슴에 안고 울었는데 그 날 이후로 그 어린아이에게는 장애증상이 다 사라지고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는지, 체육도 잘 하고 음악도 잘 하고, 믿음이 좋아서 새벽마다 엄마, 아빠 따라 나가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가장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었던 아이가 가장 큰 기쁨을 주고 있다"고 간증을 쓰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되어 불안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 올 줄 믿습니다.

열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을 보십시오. 의원을 찾아 다니며 돈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의원에게 괴로움만 당했습니다. 효험이 없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 옷에 손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이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 우리 예수님께 나오면 우리가 기도하면 이런 역사가 이루워질줄 믿습니다. 문제 앞에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 기도로 문제를 해결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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