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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331 /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2)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4.13|조회수353 목록 댓글 0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2)

예수님의 친구로 부름받은 사람들

성흥모 목사

오늘 본문에는 13절의 말씀이 가장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읽은 말씀들이 모두 다 귀한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가진 교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정직한 사람, 믿음이 좋은 친구, 성실한 사람을 친구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 나는 진정한 친구,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십니까? 이솝 우화 중에 "곰과 두 나그네"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곰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재빨리 나무로 올라가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숨겼습니다. 다른 한 명은 공격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땅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습니다. 곰은 다가와서 코로 그를 더듬으며 온몸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는 숨을 죽이고, 가능한 한 죽은 것처럼 보이도록 가장했습니다. 곰은 곧 그를 내버려두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곰은 죽은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곰이 꽤 멀리 가 버렸을 때에, 다른 여행자가 나무에서 내려와서, 그의 엎드려 있는 친구에게 곰이 다가와서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는지 익살스럽게 물었습니다. "곰은 내게 충고를 하나 해주었어."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 너를 내버리고 도망치는 친구하고는 함께 다니지 말아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친구란 재난이 닥쳐와 봐야 진실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재난은 친구의 성실성을 시험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고, 재물이 늘어가면 친구들이 끊어지지 않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부담을 주면 친구들이 다 떠나갑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은 참된 친구였습니다. 그들의 친밀한 우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20:17)

삼상18:1에도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생명같이 사랑하였다"는 말은 몇번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사랑하여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데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도다"(삼하1:26)라고 애가를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승하도다"라고 했는데, 개정판에서는 "더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라고 했습니다.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라고 했습니다.

본문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선택의 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몇 몇 사람들을 택하여 제자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심사숙고하신 끝에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은 예수님이 12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의미는 12제자들에게만 주신 것은 아니요, 12제자들이 대표하여 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서 따라다닌 것 같고, 예수님을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하여 주님을 따라나섰는데 알고 보니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으며,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감격이 있고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을 말할 때마다 반대의 이론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작정하시고 부르신다고 하면 인간은 자기의 행동에 책임질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은 자기의 행위에 대한 자유가 있으며,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가고 싶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니 내가 믿고, 내가 선택한 예수님이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주님이 먼저 나를 알아보셨고, 사랑하셨고,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감격이요, 은혜요, 충성만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친구라고 하신 분이 딱 한 분이 있습니다. 이사야 41:8에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이 "벗"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 "사랑하다"는 말 "아헤브"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다, 좋아하다, 사랑스러운"라는 말인데, 분사형으로 쓰일 때에 친구, 벗이라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어떤 문장에서는 "연인"이라는 말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 중에 한 사람 아브라함은 당신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약2:23에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벗"이라는 말은 헬라어 "필로스"라는 말로 아주 친밀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친구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하신 것은 하는 말이 아니고, 진정한 벗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건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워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주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오십 명에서, 45명으로 다시 40명으로, 5명씩 깍아 내리다가 언제 내려가겠습니까? 이제는 10명씩 내려갑니다. 30명으로 다시 20명으로 마침내 10명으로 내려갈 때까지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벗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모세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출33:11에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 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마치 친구간에 격의 없이 대화하는 것처럼 대면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친구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친구입니까? [E 하바드] 라는 분이 말하였는데, "친구란 당신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당신의 친구라고 했지만, 사실은 종이라고 하시면 더 마음이 편할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하셨지만, 친구로 불러주신 주님 앞에서 친구답게 행동하고 친구이신 주님의 얼굴을 빛나게 해야만 하는데, 어디 가서 친구라고 하지 말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대등한 관계에서 친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나,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은 무한자요, 우리는 유한자 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사실 친구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지만,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 비난받고 있던 세리들이나 창기들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누가복음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택하시면서 노예적인 복종을 원하지 않으시고 친구 같은 관계로 살아줄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의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과 친구의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은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종은 알지 못하고 시키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철저한 종의 의식도 있어야겠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면서 종이라고 해도 불평할 수 없는데, 주님은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친구로 살고 싶습니까? 예수님의 종으로 살고 싶습니까? 내가 먼저 주님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하면 말도 안되는 말이요, 종으로 살겠다고 하여도 부르신 분이 친구라고 하였으면 친구인 것입니다. 종보다는 친구가 훨씬 좋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13절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반드시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가장 숭고한 사랑은 한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위하여 그의 목숨까지도 버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가장 귀한 생명은 사랑과 바꿀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이요, 그를 위하여 희생하는데, 마지막 생명까지도 다 드리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랑이 있을 때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친구의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친구라고 하시면서 14절에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라고 하십니다. 이래 가지고 친구될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이런 조건을 내세우시면 친구 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15절에 보면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을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친구로 살게 하시려는 주님의 노력이 귀하게 보입니다. 주님은 좋은 말씀으로 격려하시면서 친구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명한 대로 다 행하여야 친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로 대하시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없지만, 주님이 친구라고 하시니 친구로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친구라고 하시므로 친구가 되고, 친구의 삶을 추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은혜요 소명인 것입니다.

16절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이제는 제자로서 사는 친구가 되어주라고 하십니다. 친구는 자발적인 헌신으로 친구의 얼굴을 빛내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친구 삼아주시고,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을 위하여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이라고 하면 잘 모르고 복종하는 관계이지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들을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들려주시는 친구로 부르시며 부탁하신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르고 일하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알고 헌신할 수 있는 친구로서, 우리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분의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최상위 클래스의 사람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사람들만 사귀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차상급의 클래스 즉 중소기업의 자녀들은 최상급의 자녀들과 사귀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합니다. 최상급의 자녀들과 학생 때에 끈끈하게 친구로 맺어지기만 하면 그것은 엄청난 혜택이 된다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도 공부 잘하는 아이, 잘 사는 아이, 운동 잘하고 사교성이 있는 아이들과 친구로 맺어주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 애하고 사귀지 말아" 품행이 좋고, 생각이 바르고, 잘 사는 그런 아이들과 사귈 수 있도록 주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생일잔치에 잘 사는 아이들만 초대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초대합니다.

일찍이 유대의 지혜자들은 친구의 소중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성경 잠언 가운데는 친구의 소중함을 말하는 글들이 많습니다.

잠언 17:17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잠언 18:24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잠27: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네 친구와 네 아버지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잠19:4에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라" 잠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유대인으로 랍비이신 마빈 토케이어는 탈무드를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하여 {몸을 굽히면 진리를 줍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개와 놀면 이가 옮는다]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을 요약해보면 "완전한 친구를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의 친구도 없다. 좋은 것은 오랜 친구와 오래된 술, 나는 거기에 늙은 아내와 늙은 개를 더하고 싶다. 좋은 친구를 가지면 자신도 저절로 발전한다. 오랜 친구 한 사람을 새로운 친구 열 사람보다 귀중하게 알라. 친구가 없는 사람은 한쪽 팔이 없는 인간과 같다. 철새와 같은 친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계절이 바뀌면 날아가 버린다. 개와 놀면 이가 옮는다."라고 했습니다. " 오랜 친구 한 사람을 새로운 친구 열 사람보다 귀중하게 알라. 친구가 없는 사람은 한쪽 팔이 없는 인간과 같다" 탈무드에는 주옥같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으로 많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사람이 죄인과 친구가 되면 죄인 취급받게 되어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려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고 보니, 죄인 취급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정욕의 노예로 살아갈 사람이었습니다. 타락하여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우리를 건져내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인이 지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친구로 살면서 몇 가지 해야 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친구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열매를 맺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으라고 친구로 부르셨습니다. 종의 의식을 가지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기에 친구정신으로 일하여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는 기도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과 우리 사이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고 하면 주인은 종의 말을 다 들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요, 참된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친구와 같은 교제여야 합니다. 우리는 다 같은 주님을 모셨고, 한 자리에 앉아 있으며, 우리는 다 죄인이었다는 점이 같습니다. 진정한 형제애를 가져야겠습니다.

여러분 산다는 것을 "Live"라고 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Love"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원은 같다고 합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가장 사랑할 대상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들 편에서 예수님을 친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친구라고 하신 것은 주님 편에서 하신 말씀이고, 우리는 그런 말을 듣는 것부터 감사와 감격일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물론 주님이지요. 친구라고 하면 정말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헌신하고, 가까이 할 때에 가서 친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의 말씀대로 다 행하는 사람이 친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절대로 종된 의식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친구에서 제자로 선택하여 주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자원하는 헌신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임직하시는 분들이나, 우리 교우들은 종의 의식에서 친구의 의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믿음과 헌신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시고, 친구를 위하여 결단코 십자가를 지시므로 구원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좀더 깊이 살펴보고,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친구 사이

박상훈 목사

옛날 어느 마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가만히 보니까 아들에게 친구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들에게 친구가 많은 것은 좋은데, 늘 친구들하고 함께 어울려 다니느라고 아들이 해야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걱정이 되어서 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너에게 친구가 정말 많은 것 같구나."

"예, 아버지. 저에게는 친구가 참 많습니다."

"그래. 그 많은 친구들 가운데 진정한 친구는 몇 명쯤 된다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 다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그래."

자신만만한 아들의 대답을 듣고서 아버지와 아들은 한 번 시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돼지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돼지를 큰 자루 속에 담아 지게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어두운 밤이 되었을 때 아들은 지게를 울러 메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자기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절친한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친구는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오늘 낮에 내가 그만 잘못해서 어린 아이 한 명을 죽였다네. 내가 지금 그 아이의 시체를 지게 위에 얹고서 가지고 왔는데 이 시체를 파묻기 위해서는 자네의 도움이 좀 필요하다네. 내가 들어가서 자세히 설명을 해줄 테니까 일단 좀 들어갈 수 있겠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갑게 맞아주었던 아들의 친구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도와줄 수가 없다고 박절하게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은 다른 친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일반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이 친구 저 친구를 찾아갔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만큼 많지는 않지만, 내게도 친구는 있으니까, 내 친구의 집으로 한 번 가보자."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 지게를 매었습니다. 아버지의 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친구를 깨웠습니다. 친구가 문밖으로 나왔을 때 아버지는 찾아온 목적을 밝혔습니다.

"여보게, 오늘 낮에 그만 잘못해서 어린 아이 한 명을 죽였다네. 이 시체를 파묻기 위해서는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는데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겠나? 밤새도록 다니다보니 새벽녘이 되어서 지금은 파묻기가 어려우니까, 밤이 될 때까지 낮 동안에 나를 좀 숨겨줄 수가 있겠나?"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는 주저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서 들어오게!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밤새도록 돌아다니느라고 얼마나 힘들고 지쳤겠나?"

그러면서 그들을 사랑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군불을 지폈습니다.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했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자기 친구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사실은 내 아들에게 진정한 친구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이 일을 꾸몄다네. 저기 지게 위에 있는 것은 어린 아이의 시체가 아니라 돼지를 잡은 것이라네. 자네가 내 아들에게 친구의 아름다운 본을 보여주어서 정말로 고맙네!"

그리고는 잡은 돼지를 가지고 잔치를 베풀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친구가 무엇입니까? 너를 위해서 내가 희생당하고, 너를 돕기 위해서 내가 손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친구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뒤면 예수님을 부인할 제자들이었습니다. 잠시 뒤면 예수님을 버려 두고 다 달아날 형편없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서슴없이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형편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이 시간 선언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속에서 친구에게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다섯 가지 모습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차례대로 한 가지씩 간단하게 살펴보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친구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해 주셨고,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서 우리도 서로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12∼14절 말씀까지 보십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넘어가서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는 예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서 우리도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형용사는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동사입니다. 친구의 사랑에 대해서 잘 표현한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읽을 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입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일러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내가 먼 길을 떠날 때, 안심하고 내 가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일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도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함께 낚시하기 위해서 배를 탔습니다. 사고로 배가 물에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구명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꺼이 그 구명대를 내게 주면서 '나 대신에 너만이라도 살아다오'라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런 희생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친구들끼리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을 기대하기에 앞서서, 내가 나의 친구들에게 그와 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도록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의 친구였고 우리의 동역자 되었던 한 분의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친구로서 사랑과 관심을 베풀기를 원합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사랑과 관심이 모아지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비밀이 없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루는 네 명의 중년부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모두 여고동창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또 여고시절의 이야기로 수다를 떨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의 한 사람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자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있잖아, 나는 해서는 안 될 사랑에 깊이 빠져버리고 말았어.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

모두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 듣고 난 뒤에 또 다른 한 여인이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남편 몰래 주식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빚을 지고 말았어.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큰일인데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

그 이야기가 끝나자 세번째 여인도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도박에 손을 대어서 남편 모르게 집문서까지 갖다 맡긴 상태야.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나를 쫓아내려고 할텐데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

이제 마지막 네번째 사람이 남았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친구가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말해, 괜찮아! 털어놓아. 그래야 속이 시원해 지는거야. 우리가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켜줄 테니까 말해."

그제야 마지막 여인이 입을 열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말이야. 무슨 말이든지 남에게서 들으면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꼭 털어놓고 말아. 나는 비밀을 지킬 수 없는 수다쟁이야. 내 입이 방정이어서 고치려고 해도 고칠 수가 없어."

그 소리를 들은 나머지 세 사람은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아무리 친해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모든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한 시라도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주권적으로 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 삼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16절 상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세상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택합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친구로 선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을 택해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비천한 직업의 세리들을 예수님은 택하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제자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권적으로 예수님께서 나를 택하여 친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한 번도 "나는 예수님의 친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자기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 친구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단테가 지옥구경을 합니다. 한 쪽에 갔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등에 큰 돌을 지고서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단테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 때 허리를 굽혀본 적이 없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너무 낮기 때문에 허리를 굽히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큰 돌을 허리에 울러 매고서 허리 굽히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연조가 깊어갈수록 더 겸손해야 합니다. 아무런 직분이 없을 때보다 집사가 되면 더 겸손해야 합니다. 집사일 때보다도 권사가 되고 장로의 직분을 받으면 더 허리를 굽힐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큰 직분을 받을수록 목이 뻣뻣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영원히 있을 과실을 맺으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16절 중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물론 세상 사람들도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열매입니다. 예수님과 친구된 우리들이 맺는 것만이 항상 있을 열매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의미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에게 자기가 정성스럽게 가꾼 정원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손님은 정원을 구경하면서 "야! 정말 좋다!"라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한 말을 들으면서 주인은 손님에게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정원을 좋게 보아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나 손님께서 아무리 감탄하셔도 내가 정원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만큼 손님은 누리지를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나는 저기 있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손수 심었기 때문입니다. 또 제가 정성을 다해서 그 나무들을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사랑과 관심이 있을 때 그만큼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다음에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누군가 뛰어나오면서 이런 말을 우리에게 해줄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내가 이렇게 구원받고 천국에 온 것은 순전히 당신 덕분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한 말을 우리가 듣게 되면 우리의 기쁨이 너무나도 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리십시다. 갈6:9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는 영원한 과실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항상 있을 열매, 영원한 과실을 맺으면서 살아가는 값진 존재들입니다.

 

다섯째로, 우리에게는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16절 끝부분 말씀을 보십시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친구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다 응답 받게 하십니다.

이따금씩 우리가 필요에 따라서 추천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통장의 추천서보다도 구청장의 추천서를 받으면 더 좋을 것입니다. 또 시장의 추천서를 받는 것보다 이왕이면 대통령의 추천서를 받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이름은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된 우리들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우리의 간구에만 응답해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20세기 초 미국에 마틴(Walter S. Martin, 1862∼1935)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한 번은 뉴욕에 있는 친구의 초청을 받아서 가족이 뉴욕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마틴 목사님의 사모님은 병에 들어있었습니다. 마틴 목사님은 도무지 갈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이미 약속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뉴욕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모님은 쓰러져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사모님의 병간호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뉴욕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마틴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저녁 예배때 꼭 좀 오셔서 설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틴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제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도무지 갈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그 때 마틴 목사님 아홉 살난 아들이 아버지가 전화를 하는 대화 내용을 듣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만일 아빠가 오늘 저녁에 하는 설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엄마를 지켜 주지 않으시겠어요?"

마틴 목사님은 아홉 살난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맡기고서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목사님의 사모님도 아들의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모님은 남편이 가서 설교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생각하면서 한 편의 시를 썼습니다.

마틴 목사님은 기쁨과 감격 가운데 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은 아내가 건네주는 그 시를 보며 역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때마침 옆에는 작은 올갠이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가서 아내가 쓴 시에 작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432장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어려워 낙심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들도 그 사랑을 받아서 서로서로 사랑해 갑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비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비밀을 우리에게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내가 잘나서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나를 주권적으로 택하여 주셔서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있을 과실을 맺으면서 살아가는 의미있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과 친구된 우리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을 원하십니까?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기를 원하십니까? 의미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항상 있을 열매를 맺으면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기도의 응답을 원하십니까? 주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십니다. 예수님의 그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예수님은 친구 사이입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속의 사랑

요 15:13 / 김홍도 목사

미국 남북전쟁 때 한 젊은이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 입대하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부모님과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어서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습니다. 마침 한 동네에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님도 안 계신 청년이 그 젊은이를 대신해서 군에 가겠다고 나서서 대신 입대하여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자기 대신 나가 싸우다가 전사한 그 청년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주고 거기에다 “그는 나를 위해 죽으시다”라고 썼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로 죽으실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앞두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을 받으시고 피 흘려 처참하게 죽으신 그 사랑은 너무나 큰 사건이어서 우리는 이해가 안 가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1. 대속의 사랑

 

전에 말씀드린 대로 “구속”(redemption)이란 말은 “값을 치러준다”라는 뜻이고 “대속” (atonement)이란 말은 “대신 죽으신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대신 고난 받으시고 우리 대신(in the place of others) 죄값을 치러주시고 우리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atonement)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대속의 제물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남북전쟁 때 대신 군대에 나가 전사한 것은 같은 인간끼리의 대신 죽어준 사건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인데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극도의 고통을 겪게 하는 십자가의 형틀에서 못 박혀 온몸이 찢기셔서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흘리며 죽으신 것입니다.

어느 큰 농장 집에 독신 목사님이 살고 있었는데 농장 주인을 예수님 믿게 하려고 아무리 전도해도 듣지 않고 믿지 않으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장 주인이 목사님의 방문을 두드리며 빨리 좀 나와 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따라가 보았더니 닭장에 큰 암탉이 족제비한테 목이 물려서 피를 다 쏟고 죽어 있더랍니다. 그 주인이 그 암탉을 툭 치니까 죽은 채 쓰러지는데 그 품에는 병아리 여러 마리가 삐약삐약 하고 살아서 뛰어나왔습니다. 그 어미닭은 뛰어 도망가면 얼마든지 살 수가 있었지만 자기 새끼들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앉아서 피 흘리고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많은 무리들이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할 수 없느냐” 하고 조롱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뛰어내려 살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고통을 참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사랑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말씀도 대속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의 딜레마(dilemma)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게 하지 않고는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할 수 없었을까? 하나님은 전능하신(omnipotent) 분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성품(nature)이 일치할 때만 무엇이나 할 수 있는 분이지 하나님의 본성, 성품과 배치될 때에는 전능하신 분이 못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justice)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무조건 용서하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전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비(mercy)의 성품 혹은 사랑의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을 모두 다 죄를 심판하셔서 멸망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딜레마(divine dilemma)에 빠지신 것입니다. 공의(justice)를 살리자니 하나님의 자비가 소리치고 하나님의 자비(mercy)를 살리자니 공의가 소리치기 때문에 공의와 자비가 절충(compromise)하지 않고는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인을 무조건 용서한다면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로우신(righteous) 분이 아니라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벌하시며 동시에 구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죄의 값을 치르시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신(substitution) 죄의 값을 치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가 죽어야 할 대신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대속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강도 한 사람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는 아무런 착한 일도, 의로운 일도 한 일이 없었지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바울이 잘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거나 공을 세우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속의 사업으로 완성해 놓으신 것을 믿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돈을 들여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놓은 것을 믿음으로 올라타고 원하는 층의 버튼만 누르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구원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은혜” (grace)나 “믿음”(faith)이나 “선물”(gift)은 모두 값을 내지 않고 거저 받는 것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이 유리도 깨고 기물을 많이 파괴하기 때문에 교장 선생님이 기물을 파괴하면 그 학생이 보상해야 된다는 규칙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학생이 큰 유리창을 깼는데 전혀 그 값을 물어낼 수가 없는 가난한 학생입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 자신이 그 값을 물어주고 그 학생을 용서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공의(justice)와 하나님의 자비(mercy)가 다 절충이 되었고 둘 다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3. 메시아 대속의 예언

 

이사야서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700여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13C 695-750)를 통해서 자세히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① 우리 대신 버림 받으심(53:1-3)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간고”는 “비애, 슬픔”을 의미합니다. “질고”는 “질병”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고난을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심을 의미합니다.

 

② 우리 대신 죄와 징벌을 받으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③ 우리 대신 죽으심(53:7-9)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곤욕과 괴로움을 당하시고 죽으셨고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낸 것까지 상세히 예언하였습니다.

12절에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 대신 생명을 버려 죄를 담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마치 그 사건을 본 것같이 예언한 것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며 그 받으신 고난 전부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악을 담당할 수도 없고 자신의 죄도 대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49편 7~8절에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고 시편 기자도 예언했습니다.

왜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대속할 수 있고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종종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기 때문에 죄 없는 피를 가지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의 피로만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가 아니고는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를 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죄 사함의 원칙은 피 흘림입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을 대표하고 반대로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죄 없는 피밖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아무 종교나 믿어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은 나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나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율법과 인간의 행위의 의에 대하여 터진 뇌성벽력 같은 반대이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비교할 수 없는 보화로 여길진대 네 모든 종교의식과 행위와 공로는 지옥으로 던져라. 그 이유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밖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어 화해시키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죄 사함과 영생의 길은 오직 우리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길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친구를 가졌는가

요 15:13-15 / 주승중 목사

 

1. 들어가는 말

언젠가 「런던 타임즈」가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현상 공모한 적이 있습니다. 「타임즈」는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가장 잘 표현한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공모를 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타임즈」는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 셋을 뽑았습니다. 친구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그때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 그 말 없는 말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다”였고,

세 번째는,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쁨이 배가 되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친구다”

오늘 여러분은 이런 친구를 가졌습니까?

지옥 같은 전쟁 속에서는 희생적인 우정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월남 전쟁 중에 있었던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한 마을에서 같이 자란 두 친구, 짐과 토니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목숨같이 사랑하는 그런 친구들이었습니다. 월남 전쟁이 터지자 그들은 함께 군대의 부름을 받았고, 함께 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함께 월남으로 파병되었고, 함께 정글 속에서 적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베트콩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토니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쓰러져 참호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호 건너편에서 부상당한 체 피를 흘리고 있었고, 베트콩의 집중 사격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참호 속에 숨어서 안타깝게 보고 있던 짐은 목숨을 걸고 토니를 참호로 데려올 것을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그의 하사관이 그를 참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너무 늦었어. 그는 내버려 둬. 나가면 너까지 죽어” 정말로 부상당한 토니를 향해 참호에서 뛰어나가는 것은 총알받이가 될 수 있는 무모한 시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짐은 하사관이 잠시 등을 돌리고 있는 사이, 친구를 향하여 집중 사격을 뚫고 달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몇 분 후 그 역시 총을 맞은 채 피를 흘리면서 이미 숨을 거둔 토니를 들쳐 업고 참호로 돌아왔습니다. 하사관은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뭐랬어! 그는 이미 죽었고, 너도 죽을 뻔 했잖아. 너는 아무런 소용없는 일을 한 거야”

그러나 자신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짐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사관님, 그러나 제가 제 친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난 네가 올 줄 알았어’”

그렇습니다. 참된 친구란 이렇게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그때 찾아와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친구를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란 당신의 모든 것을 내보일 수 있고,

항상 당신과 함께 하며 당신보다 더 당신을 사랑해 주는

그런 친구가 곁에 있는 것입니다”(『소중한 친구에게 주고 싶은 책』)

 

2. 그 사람을 가졌는가?

고 함 석헌 선생께서 이 친구와 관련하여 이런 시를 한 편 남겼습니다. 그 시를 소개합니다. 시의 제목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입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운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는/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 석헌 선생은 우리에게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우정과 신의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참된 친구가 있는지 물어보라고 요청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죽음마저 함께 나눌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께서 이 시간 저를 향해, 당신은 과연 그런 친구가 있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주저 없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바로 그 친구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과 함께 함 석헌 선생의 질문 6가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 함 석헌 선생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친구를 가졌습니까?

저는 20년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그 친구에게, 저희 집사람과 아이들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제가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와 저의 식구들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때까지 정말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먼 길 떠나면서 처자식을 마음 놓고 맡길 만한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2) 함석헌 선생은 두 번째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라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저는 그런 경험을 직접 하지는 못했지만, 제 큰 매형께서 언젠가 제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저희 매형께서는 컴퓨터 계통의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사장이었습니다. 대우에서 상무까지 하다가 자기 사업을 차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잘 나가던 회사가 그만 지난 IMF 때에 흑자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10억짜리 수표를 받았는데, 그것이 먼저 부도수표가 되면서 자신의 어음 5억을 막지 못해, 결국 100억대의 회사와 건물이 다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희 매형께서 하는 말이 주변에 참 많은 친구들이 있었는데, 회사가 부도가 나자, 그들은 더 이상 저희 매형 주변에 머물려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 같이 외면하고 피하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제 조카와 사귀던 아가씨의 집안에서도 그 아가씨가 제 조카와 사귀는 것을 못하게 했습니다. 제 매형께서 잘 나갈 때에는 제 조카를 집에 초대하고 양복까지 맞추어주던 사람들이 그렇게 변하는 것을 보고는 인간의 그 얄팍한 모습에 실망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라고 믿어지는 그런 친구를 가졌습니까?”

 

3) 함석헌 선생의 세 번째 질문입니다.

“탔던 배 꺼지는 순간/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타이타닉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주인공 남자가 사랑하는 애인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은 구명조끼를 포기한 체, 물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그 장면 말입니다.

여러분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자기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구명대도 포기한 체 “제발 너 만은 살아다오”라고 말해주는 그런 친구를 가졌습니까? 저는 가졌습니다. 제게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살리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친구입니다.

 

4) 함석헌 선생의 네 번째 질문입니다.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조롱하고, 욕해도, 그리고 심지어는 나를 죽이려고 할 때, “아니오, 그 사람만은 정말 소중한 사람이오. 우리 모두를 다 희생한다 해도 그만은 살려야 하오”라고 외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제게 있는 그 친구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저주하고, 공격하고, “너는 형편없는 놈이야” “너 같은 놈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라고 비난해도, “아니야”라고 외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제게 “너는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다. 너의 생명은 온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그런 귀한 것이다”라고 말해 주면서,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하여 불의의 사형장에서 죽임을 당한 그런 친구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이런 친구를 가졌습니까? 제게는 있습니다.

 

5) 함석헌 선생의 다섯 번째 질문입니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지고 있는가?

이 시간 저희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던 순간이 기억이 납니다. 저희 아버님은 19년 전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참 파란만장하고 고달픈 생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시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신 고 주기철 목사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굶었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월요일이 되면 학교에서 동방요배를 시키는데, 그것을 하면 큰일나는 것으로 교육을 받았기에 남들은 다 절을 하는데, 혼자서 굳굳이 서 있다가 계속해서 퇴학을 당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님이 순교하시고, 해방 후에 1년 반 만에 할머니마저도 암으로 돌아가신 후에는 저의 선친께서는 고아원에서 그리고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평생을 장로님으로 섬기시다가 가셨는데, 사실 그 분은 당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목회의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분의 마음속에 늘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유학을 가 있다가 선친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말을 듣고 잠시 귀국했을 때, 마지막 밤을 저와 함께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네 엄마를 잘 보살펴라” 그리고 “내가 하지 못한 몫까지 네가 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잠을 주무시듯이 참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수 없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우리 모두에게는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순간에 여러분들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을 “저 친구 있으니”라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제게는 있습니다.

 

6) 함석헌 선생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내가 세상적인 유혹에 넘어갈 때, 내가 돈 몇 푼을 더 벌기 위해 내 신앙양심을 팔려고 할 때, 옆에서 “아니야, 그 길은 바른 길이 아니야”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제게는 있습니다.

 

3. 참 좋은 친구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이제부터 제게 있는 그 참 좋은 친구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친구는 제가 정말 힘들 때마다 항상 저를 위로해 주고, 제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제가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비난하거나 야단치지 않고 항상 제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제가 그에게 항상 실망을 주어도 제게 한 번도 실망의 기색을 보인 적이 없는 그런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제가 실패하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 갈 때에도 결코 저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 때 일수록 제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너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너는 반드시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그런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제가 행한 실수로 인하여 제가 사람들에게 무시와 손가락질을 당해야 할 것을 제 대신 받은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제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하여 제가 받아야 할 형벌을 저를 대신하여 받은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저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저를 위하여 마침내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은 친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살리려 자신의 목숨까지 버렸습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거나 의로운 사람이 결코 아닌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제게 가장 소중한 이 친구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이미 여러분들께서는 이쯤 되면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그 분이 누구신지 아실 것입니다.

그 좋은 친구의 이름은 바로 예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잠시 후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과 원수의 세력들에 의해 체포되어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시고, 또한 온갖 멸시와 천대와 심한 매질과 채찍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릴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모든 죄를 담고 있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 손과 발에 못 박혀 처절한 고통 끝에 마침내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런 엄청난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너희는 이제 종이 아니라 나의 친구”라고 말입니다.

나는 너희의 가장 진실 된 친구이기에,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목숨을 내어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죄 없으신 그 분이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자는...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태 11:1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라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 되셨습니다.

몇 해 전에 해외토픽에 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인디아나 주 어느 시골 학교에 열다섯 살 된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뇌종양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는데, 내일이면 뇌종양을 앓던 그 학생이 등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내일이면 친구가 온단다. 그런데 친구의 머리가 다 빠졌기 때문에 너희들이 잘 위로해주면 좋겠다”라고 얘기 했습니다. 선생님이 나간 다음 급우들이 전부 둘러앉아서 “어떻게 친구를 위로할 것인가?”를 놓고 토의를 했습니다. 함께 의논하는 가운데 한 친구의 제안으로 전부다 머리를 깎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너도나도 그 반 학생들이 전부 머리를 깎고 등교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 제자를 위로할 것인가 밤새도록 생각하다가 결론을 얻지 못하던 차에, 교실에 들어가 보니 반 아이들이 모두 다 머리를 깎고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뇌종양으로 치료를 받고 등교한 학생도 친구들이 고마워서 울었습니다. 선생님도 학우들도, 모두가 다 친구가 돌아온 것을 함께 기뻐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참 좋으신 친구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머리를 깎으실 정도가 아니라, 즉 죄인의 친구라 불리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를 위하여 죄 없는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찬송가 487장은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 분은 대단한 가문이나 궁궐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고, 목수의 아들로 짐승의 여물통을 침대삼아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아마 이보다 더 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처럼 가장 낮고 비천하게 태어났기에, 이 세상에서 비천한 사람들을 가장 잘 이해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저 2천년 전에 척박한 땅 팔레스틴의 달동네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목숨처럼 사랑했던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는 쓰라림을 겪었기에,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인하여 눈물짓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아시고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가장 흉악하고 지독한 형벌인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셨기에,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는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면서도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죄인처럼 형벌을 받으셨기에, 죄를 짓고 죄의식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도와주시는 참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성경말씀은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나가는 말: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고민과 문제들로 인하여 잠 못 이루는 분들이 있습니까? 함께 살고 있는 내 남편도, 내 아내도, 우리의 아이들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내 이 아픔과 쓰라림을 알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는 분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참 좋으신 친구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아니 그 분은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의 그 상처를 그의 피묻은 오른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위기상담 전문가이신 정태기 교수님께서 쓰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에 보면, 정 교수님께서 한 때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당할 때에 소록도에 갔던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정 목사님은 기도가 목구멍으로 넘어오지 않고,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소록도에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그가 소록도에 도착하던 날은 마침 수요일이었고, 예배당에 가보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통성기도가 시작되었는데, 목사님은 아무리 애를 써도 기도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기도가 목사님의 귀를 파고 들었습니다. 그 기도소리는 머리를 치고 가슴속을 후벼 파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 큽니까? 주님, 어찌하면 제가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기도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이 큰 은혜에 제가 어찌하면 만 분의 일이라고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정 목사님은 그 기도소리를 듣다가 도대체 무슨 은혜를 그렇게도 많이 받았기에 저런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싶어,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60이 넘은 듯한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늙은 노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센병이 얼마나 심했던지 얼굴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머리, 떨어져 나가 움푹 패인 코, 짓무르다 못해 위아래가 붙어 버린 눈...그 눈으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목뿐인 손바닥으로 박수를 쳐가면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정목사님은 자신의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피처럼 붉은 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두 시간이나 정목사님은 그렇게 통곡을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뒤에 그 노인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정 목사님은 그 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마우세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크신 것입니까?”

그 때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세상도, 피붙이들도 다 나를 버렸어. 물론 친구들도 다 떠나버렸지. 그런데 말이야,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온 분이 계셨어. 그리고 내게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아, 할머니가 따라 오셨군요?”

“아니야, 할머니는....예수님이 따라 오신거야!” (침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날 버려도 참 좋은 친구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한 곳으로 떨어진다 해도, 주님께서는 거기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친구를 가지셨습니까?

(이 시간 혹시 교회에 처음 나온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 그 분들에게 참 좋은 친구 되시는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 바로 여러분들을 돕는 영원한 친구가 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와 계십니다.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친구로 맞아들이십시오. 예수님을 친구 삼아, 예수님과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십시오. 그 순간부터 그 분께서 여러분과 영원토록 동행하시고, 여러분의 생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우정과 신뢰를 가지고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해 주실 것이고, 여러분의 인생길은 전혀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친구 되기

요 15:13-15 / 빅기완 목사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는 여러 가지 다른 면이 있습니다.

많은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주인이 되신 주님 LORD, 구세주, 심판하시는 재판장, 왕, 아버지... 등등 그 외에도 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시89:26, 사47:4, 사33:22, 요일3:1, 요13:13, 시136:3, 시95:6).

하지만 가장 놀라운 사실은 전지전능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솝 우화에 '곰과 두 친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얘깁니다만, 어느 날 두 명의 친구가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숲에서 곰이 나타났습니다.

두 명의 친구들은 곰이 나타나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 중에 한 명의 친구가 길가에 있는 나무로 달려가 재빨리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는 가지 뒤에 몸을 숨겼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친구는 그 친구처럼 재빠르지 못했습니다. 도망도 가지 못하고... 얼른 땅바닥에 누워 죽은 척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곰이 다가와서 그의 주위를 맴 돌며 냄새를 맡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는 숨을 죽이고는 죽은체 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곰이라는 동물은 죽은 사람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곰은 그를 정말 시체로 생각하고는 그냥 가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곰은 사라지고... 이 친구는 식은 땀을 흘리며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나무 위에 숨었던 친구가 내려와서는 그 친구에게 묻습니다.

"내가 위에서 보니까 곰이 자네 귀에 대고 무슨 말을 속삭이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했는가?..."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 나를 버리는 친구와는 절대 사귀지 말라고 하더군!"

 

이와같이 친구와의 우정은 역경을 만났을 때 그 진실성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사귀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느 마을에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었는데... 한 청년이 그 딸에게 편지로 구혼을 청해 왔답니다.

처녀의 아버지는 며칠 뒤에 확답을 주겠다고 말하고는 그 청년을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약속한 날짜가 되어서 아버지는 그 청년에게 거부의 뜻을 전했습니다.

청년은 처녀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따졌습니다.

"아니 도대체 당사자도 만나 주지 않고 무엇 때문에 안된다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이 아버지는... "나는 며칠동안 자네의 친구들을 만나 보았네. 그런데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불량하거나 하나님을 알고 있지 못했어. 난 자네의 친구들을 통해서 이미 자네를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네!"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 성현들은 말하기를 "일생동안 참된 친구 세 명을 사귈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랬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마치 제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삼상18:1). 그런데 어떻게... 전능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완벽한 하나님이... 유한하고 죄 많은 사람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주종 관계로 이해하는 게 쉬울 것입니다. 아니면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 아니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친구로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어떤 의식이나 예식이 필요 없고, 종교도 필요 없이.... 그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죄의식이나 두려움의 방해도 없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였고, 하나님도 그들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이런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구약시대를 보면, 하나님을 만나기 조차도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단지 몇 명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과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브라함을 친구로 부르셨고,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1절 말씀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그랬습니다.

에녹이나 노아와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더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모든 걸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셨을 때 성소에 드리워졌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 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직접 나아 갈 수 있는 길이 열려졌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많은 시간동안 준비를 해야만 했던 구약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19-20절 말씀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져 있습니다.

제사장이나 신부를 통해서 대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4: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이제 다시 친구와의 관계로...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런던 타임즈'가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현상 모집했습니다.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가장 잘 표현한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겁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 셋을 뽑았습니다.

친구란 무엇인가? 그 첫 번째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그 때에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두 번째는 "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에 그 말없는 말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세 번째는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쁜 마음이 배가되고 더해지며 내가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친구이다" 그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친구에 대해서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5: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이 구절에서 '친구'라는 단어는 얼굴 정도 아는 사이가 아니고 아주 가깝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결혼식에서 신랑 들러리를 일컬을 때(요3:29), 그리고 왕의 가장 가깝고 신뢰하는 친구들의 모임을 일컬을 때 사용됩니다.

왕궁에서 종들은 왕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유지해야 하지만, 신뢰하는 친구들은 왕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고, 직접 만나며, 비밀스런 정보까지도 나눕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러한 친한 친구로... 그 모임의 일원으로 두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를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우정을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친구와의 우정을 잘 쌓는 것입니까?...

오늘은 하나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한 방법 두 가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 첫째로, 하나님의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것만으로... 혹은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과의 우정은 모든 삶의 경험을 하나님과 나눌 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물론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스케줄 한 부분만이 아닌 그 이상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 모든 시간, 모든 문제, 모든 생각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 전체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하나님과 끝이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일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쇼핑을 할 때나 운전을 할 때, 혹은 무슨 일을 하거나... 하루의 일과를 수행할 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면 무슨 산 속으로 가서 하나님과 단 둘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을 떠나서... 모든 일을 접어두고...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조용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활... 모든 삶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운전을 하면서도... 시장에 볼일을 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안보이지만 하나님이 바로 내 옆에 계속해서 같이 동행하신다고 생각하고... 그 분과 언제나 친밀한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한번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어떤 불교 신자로 보이는 사람이 염주를 돌리면서 뭔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똑같은 주문을 계속 외우는 건지도 모르죠....

좌우간 그때 생각하게 된 것은... "아하! 저 사람은 죽은 신을 향하여 저렇게도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얼마나 대화를 나누고 있나?" 그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항상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자면서도 의식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마치 매우 사랑하는 연인처럼 그렇게 늘... 주님을 생각하고 사모하며 바라야 합니다.

식사를 할 때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목욕을 하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더러운 몸이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나의 부정한 모든 죄도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 물로 씻어 주시든지 불로 태워주시든지... 흰눈보다 양털보다 더 희고 깨끗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목욕을 하면서도 그렇게 기도하며... 주님과 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운동할 때... 그렇게 기도합니다.

시민체육광장에서 조깅을 할 때... 인라인을 탈 때... 트랙을 돌면서...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예수 믿고 구원받을지어다!" 그러면서 트랙을 돌아요.

한바퀴를 돌면 한번 묶인 겁니다. 두 바퀴를 돌면 두 번 묶인 거예요.

운동장을 돌면 돌수록... 사람들은 기도로 묶여지는 겁니다. 그러고 숨을 "후우...!" 몰아쉬면서... "성령 받으라!" 속으로 외치면서 숨쉬기 운동을 하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마치 음악가들이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연습을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고 쪽지에 써서 여기 저기 붙여 놓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옛날 수도원에서는 매 시간마다 종을 울리므로 기도하는 시간을 알렸는데... 우리도 시계나 핸드폰의 알람 기능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리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한 시간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잠깐 기도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만나는 시간을 이벤트 만들지 말고... 우리의 모든 생활 전체...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묵상이란, 하루종일 그 분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묵상이란 조용하게 떠들지 않고 그 말씀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본래 묵상이라는 뜻은 크게 외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말씀을 크게 낭독했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라는 각오로서 크게 외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묵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크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그 말씀을 행함으로 옮겨 실천해야겠다는 굳은 결의와 다짐을 가지며... 그 말씀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고 이끌어 가시도록 계속해서 말씀을 생각하는 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게 강조하며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셨으며 그리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에 대해 묵상하라고 계속해서 권고하십니다.

시편 1:1-2절 말씀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랬습니다.

여호수아 1:8절 말씀에서도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그랬습니다.

 

그 분이 무슨 말을 하셨는지 모르고서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분을 알지 못하면 그 분을 사랑할 수 없고, 그분의 말씀을 모르면 그 분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종일 성경공부를 할 수는 없지만 읽거나 외운 구절을 하루종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그 구절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묵상을 어떤 수도승이나 신비주의자들이 하는 매우 어렵고 비밀스러운 의식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묵상은 단순히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배울 수 있고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을 걱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묵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방법을 안다면... 묵상하는 방법은 이미 터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걱정거리에서 성경구절로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의 걱정거리는 줄어듭니다.

욥과 다윗이 하나님의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고... 하루종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은 일용할 양식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히 여겼다고 고백했습니다(욥23:12).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그랬습니다(시119:97).

시편 77:12절 말씀에서도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그랬습니다.

 

친구는 매우 친밀한 관계입니다.

부모에게 말할 수 없는 것도... 친구는 합니다. 부부지간에 할 수 없는 얘기도 친구는 할 수 있어요.

그만큼 친구와의 관계는 특별납니다. 비밀도 함께 나눕니다.

이태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가 없는 사람은 메마른 몽둥이와 같다"

친구... 언제 들어도 참 좋은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좋은 친구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우리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릴 때가 있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가장 친한 친구의 거짓 증거로 득배를 마셨고, 로마황제 씨이저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진정한 친구란 이 세상에 없구나!" 그렇게 한탄하면서 죽어 갔습니다.

세상의 친구는 그토록 믿었던 친구였는데... 나를 도와 주어야 할 때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서 버리는 매정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도 마음속에 앙심을 품죠...

"두고봐라, 네가 날 무시하다니..."

그러면서 복수의 칼을 갈면서 증오심을 키워 나갑니다. 내가 당한 만큼 반드시 갚아 줘야 합니다. 그래서 복수하기 위해 공부하고, 복수하기 위해 돈을 법니다. 보란듯이 내가 출세하여 나를 무시한 그 친구의 인생을 보기 좋게 망가뜨려야 속이 후련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 아이가 풍선을 갖고 놀고 있습니다.

한참을 신나게 놀고 있는데... 그 중에 한 아이의 풍선이 그만 터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풍선이 터진 아이가 악을 쓰며 웁니다.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한참을 달래다가 안되니까 그 엄마가 다른 두 아이의 풍선을 모두 터뜨렸습니다.

그제서야 악을 쓰며 울던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놀이에 빠지더랍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나와 같은 위치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평안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성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진정한 친구는 누구입니까?...

세상의 친구는 아무리 좋은 우정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우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나를 도와 줄 수는 없습니다.

누가 나를 위해 울어 줍니까?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아파 줍니까?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없지만 나에게 그러한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십니다. 어떤 고통 중에 처해도, 설령 내가 죽음에 직면해 있다 할지라도 그분은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 죽음의 자리로 서슴없이 가 주실 분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 그 분이 나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요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친구라!"

이 얼마나 놀랍고도 영광스런 선언입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비밀을 나누셨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사람들이 너무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성을 멸망하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에 살거든요.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그러셨습니다(창18:17).

다니엘에게도 하나님은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니엘서 2:19절에 보면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 종일 생각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우리와도 나누실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혹은 설교 테이프를 들을 때 그냥 흘려 보내지 마십시오.

그 진리를 머릿속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습관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읽고 들은 말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고 넘어가는 비밀스런 것들을 이해하며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시편25: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일이나 다음 기회로 넘기지 말고.. 오늘 당장... 지금부터... 하나님과 계속 대화를 나누고, 그분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는 연습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이야기 할 수 있게 해주고... 묵상은 하나님이 내게 이야기 하실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기도와 묵상... 이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좋은 친구 되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그런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친구 되신 예수님

요 15:13-16 / 이필재 목사

아주 깊은 밤중에 잠이 들었는데도 전화를 받으면 반가운 목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친구입니다. 한밤중에 전화를 해도 언제나 반갑고 책망을 들어도 노엽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도 존칭어를 안 써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거친 소리를 해도 상관이 없고 어떤 때는 듣기 거북한 쌍스러운 소리를 해도 친구 간에는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사실 절대 존칭어를 사용해야 되고 목소리 조절해 가면서 대화해야 되는 관계는 편안한 관계가 아닙니다. 친한 사람끼리는 존칭어가 오히려 욕이 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인을 보고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게 좋은 인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그렇게 말하면 “말씀을 놓고 하시지요.” 이렇게 나올지 모릅니다. 시골 마을에 문화가 있습니다. 조상적부터 관계를 갖고 평생 함께 살아오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고 깨면 같이 보고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아주 재미있습니다. 만나면 못하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아주 친한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데도 행복해 합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데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식사하셨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처먹었냐?” 이렇게 말하지만 괜찮습니다. 좋게만 들립니다. 그렇게 할수록 행복을 느낍니다. 만나면 서로 어른이라고 합니다. 형님도 아닌데 “형님을 보면 인사를 해봐라, 이 싸가지 없는 놈아!” 이야기하지만 좋습니다.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온 동네 친구들이 다 달려들어서 그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끈끈한 정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 시골 농촌 문화입니다.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구를 잘 두는 사람은 삶이 풍성합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가깝게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애정은 변할 수 있는 확률이 많은데 비해서 우정은 오래 가고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애정 관계를 ‘에로스’라고 말하고 우정 관계를 ‘필리아’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옛날부터 들어온 소리가 있습니다. 생명을 같이할 수 있는 친구 한 사람이 있으면 임금님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은 뭔가? 그런 친구가 지금 하나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청하셔서 그 제자들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들의 친구다. 그런데 얼마큼 사랑하느냐 하면 내 목숨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주겠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세상에 없다. 나는 내 친구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주겠다.” 이런 친구가 지금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생각함으로 우리 삶이 아주 풍성해집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친구의 의미는 수평적 사랑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수직적 상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방적 관계의 사랑입니다. 위에서 주는 사랑을 내가 어쩔 수 없이 받기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권위주의적 사랑은 윗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아래 사람의 행복이 결정됩니다. 아버지 기분이 나쁘면 집안 식구가 다 같이 묵념을 해야지 아버지는 지금 기분이 나쁜데 엄마와 아이들이 깔깔 대고 웃으면 벼락이 떨어집니다. 사장이 기분이 좋아야 사원들도 행복합니다. 이렇게 수직적인 상하 관계는 사랑이지만 일방적입니다. 수평적 사랑의 관계는 피차가 똑같습니다. 그래서 주고받습니다. 이게 사실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사랑을 절대로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서 3번씩이나 심각하게 질문하셨지 않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그러셨습니까? 주님과 우리는 수평적 사랑의 관계라서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만큼 주님도 우리의 사랑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시면 절대로 외로워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수평적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우리들이 늘 경험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나이가 이제 19, 20살 된 아들, 딸과 시간을 보내려 하면 그 자녀들이 좋아합니까? 이제는 자기들의 세계가 완전히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와 노는 것을 아주 거북해 합니다. 밥 한번 함께 먹으려 해도 한 달 전에 약속을 해야 함께 먹거나 말거나 합니다. 그러나 자기들 친구를 만나면 밤이 가는 줄 모릅니다. 왜일까요? 수평적 사랑이 좋아서 그러는 겁니다. 제일 즐겁고 편안하게 사랑을 나누는 관계, 아주 부담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관계가 수평적 관계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친구들보다 아버지, 어머니가 저희들을 더 사랑하고 더 필요로 하고 더 좋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 상하의 관계의 사랑은 매우 어려움을 느낍니다. 제가 목사인데 나이가 이 정도 되었으니 세미나 강사로 많이 가지 않습니까? 많이 배우고 나도 가르칩니다. 그런데 결국 제목은 하나입니다. 목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 훌륭한 목회가 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영적이고도 일종의 어떤 때는 기술적인 내용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까? 나도 많이 말하고 많이 듣습니다. 목사는 교인들의 성격을 알아야 목회를 잘할 수 있습니다. 그 성격이란 뭐냐 하면 교인들은 목사와 공식적인 모임 외에는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제일 바보 같은 목사는 휴가철이 되어서 교인들, 집사님들끼리 놀러가려고 프로그램을 짰는데 나도 가겠다고 따라가겠다는 목사입니다. 초청이 없는데 따라가는 죄는 영원토록 사함이 없는 죄라고 합니다. 두고두고 말합니다. 그때 목사님이 따라와서 아주 재미없었다고 합니다. 제가 확실한 증거 하나를 대겠습니다. 저는 날마다 여러분 가정을 심방을 합니다. 자연히 식사를 함께 많이 하게 되지 않습니까? 식사 때마다 실랑이를 벌입니다. 제 앞에 정면이나 옆에는 아무도 안 오려고 합니다. 때마다 누가 앉는 게 힘듭니다. 왜 그러느냐고 평가를 해보면 편안히 밥 먹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또, 목사님 앞에 있으면 많이 못 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니까 실상은 먹을 것을 다 먹으면서 괜히들 그러십니다.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이 수평적 관계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교인의 요청이 있을 때 절대 거절하지 않고 심방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청도 안했는데 심방 간다고 불평하는 교인도 많습니다. 권사님 한 분이 과거 초신자 때 일어난 일을 간증한 기억납니다. 40대 적인데 옛날에 시골에 교인들에게 전화가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약속하고 가지 않고 목사님들이 지나가다가 별안간 예고 없이 들른 심방이 옛날에는 많았단 말입니다. 대문 밖에 목사님이 지나가다가 들렀단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대문 밖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자기는 얼마나 놀랐는지 장롱 속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러고 아이보고 “너 나가서 엄마 없다고 말해!” 아이들은 또 정직합니다. 나와서 엄마가 하라는 대로 다 했습니다. “엄마 있는데 없다고 말하래요.” “알았다.” 웃으면서 갔는데 그때 그 교인은 친구들과 집안에서 돈내기 화투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니 목사가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는 요청이 있을 때만 가야지 아무 때나 교인 찾아가면 큰 실례를 범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무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목사가 되시면 됩니다. 수평적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의 하나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늘나라 하나님 아들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이 되셔서 인간 세상에 오셔서 인간과 수평적 관계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수직관계로서는 사람이 안갑니다. 사랑의 관계가 안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이름을 가지시고 인간이 사는 나사렛 동네에 오셔서 인간들이 하는 노동을 하시면서 “자, 내게로 오라.” 이렇게 하신 거 아닙니까? 또, 왕족이나 재벌가로 오시면 다가오는 사람이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하의 낮은 자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다가오기에 부담이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관계성의 가장 편한 친구로 우리들에게 자신을 열어 주셨습니다. “나는 내 친구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릴 수 있다. 가장 최고의 사랑을 너에게 줄 수 있다.” 관계성의 깊이를 이렇게 오늘 선언하셨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을 우리가 살피면 예수님은 친구가 없는 사람들에게 친구로 다가가셨습니다. 문둥병 환자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격리 수용합니다. 우리나라도 소록도가 있지 않습니까? 유대 나라는 특히 이 병이 아주 많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병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신학적 이유를 댔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의 친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강제 퇴거 명령합니다. 그들끼리 모여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세요. 열 문둥이가 함께 있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더 자존심 상하는 것은 새끼줄을 쳐 놓아야 합니다. 이 새끼줄에서 한 발자국도 넘어오면 안 됩니다. 어쩌다 다른 사람들이 거기 문둥병 환자들이 있는 것을 모르고 다가갈 때는 그 사람들이 소리를 쳐야 합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칠 것이요” 구약에 있습니다. 말 안하면 큰일 납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병나서 이렇게 격리 수용 당하고 이렇게 사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사람들이 올 때 “여기 문둥병 환자가 있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시오.”라는 표시로 소리를 질러 주어서 가까이 못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친구가 없는 자에게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죄인의 집이라고 아무도 들어가지 아니하는 삭개오의 집을 일부러 찾아가서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찾아가셨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이 비난했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우리들도 들어가지 아니하는 저런 죄인, 세리장의 집을 예수님, 선지자가 들어가다니” 예수님은 들어가셨습니다. 그런 자신을 친구로 삼아 들어와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에 너무나도 감격해서 삭개오가 뭐라고 합니까? 자기 소유의 절반인 50퍼센트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겠다는 파격적 선언을 그 자리에서 했습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했던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소문난 창녀가 직업이었습니다. 함께 즐기던 남자들조차도 만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장 가까이 그를 두시고 하나님의 사역에 그를 쓰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자기 비하의 결단을 내리셨기 때문에, 우리와 수평적 관계의 사랑을 맺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구원의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수평적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 다음에 좋은 친구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형편과 분위기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친구는 친구가 아닙니다. 그는 상대적인 관계만 있을 뿐 친구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좋은 친구를 얻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왜 좋은 친구인가? 나의 가장 어두운 면을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좋은 친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모든 비밀스러운 마음을 다 나누었는데 관계가 나빠져서 지금은 서로 원수가 될 때 ‘그와 친구한 것이 지금은 후회스럽다.’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거 아닙니까? 조셉 크리버는 시인이었습니다. 20대에 시인이 되었습니다. 1840년 20세에 약혼녀와 물놀이를 갔다가 약혼녀가 익사를 했습니다. 그 충격을 잊을 길이 없었는데 더 큰 충격은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시던 어머니가 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내 삶을 가장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주변에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피차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런 길이라고 판단을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를 많이 사귀면 사귈수록 자기의 삶은 더욱 외로워지고 더 힘들어지고 관계성이 더 나빠지고 고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바꾸고 생활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오직 나의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 삼아 주님만이 절대 변함이 없으신 나의 영원한 친구라고 영적 깊이에서 자신의 삶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자기에게 영감이 떠올라서 찬송가를 하나 내고 온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 바로 그 찬송입니다. “♬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 그분이 나의 진정한 친구로서 이 세상에 어떤 친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러한 모든 일을 다 해결해 주시는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나의 친구 예수 “♪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 내가 반주도 없이 이렇게 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진실한 친구의 사랑을 나눈 아름다운 스토리 하나가 구약의 스토리 하나를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장남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왕이 됩니다. 그런데 거절하고 자기의 친구 다윗이 이 나라의 왕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다윗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많은 계획을 하고 모략을 하고 노력을 하는데 요나단 때문에 다윗이 살아납니다. 아버지의 계획을 날마다 비밀스럽게 가르쳐주어서 피난시켜 준 것이 요나단입니다. 이 요나단은 가만히만 있으면 자기가 왕이 되는데 다 친구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다윗을 살리고 왕으로 세우는데 성공을 합니다. 세월이 흘러서 사울과 요나단이 다 죽고 다윗은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국가 건설을 이루는데 다윗은 그때 친구 요나단을 생각하면서 신하들을 시켜서 “요나단의 후손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없느냐?” “있습니다. 하나 있는데 므비보셋인데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데려와라.” 그를 데려다가 평생토록 임금이 먹는 상에서 음식을 대우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에로스’의 사랑은 매우 뜨겁게 타오르다가 끝나면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매우 많고, ‘필리아’ 이 친구간의 사랑은 아주 영원하게 좋은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날 시골에는 글방 선생이라고 훈장 선생이라고 있었습니다. 한문을 가르치는데 저도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삼강오륜을 굉장히 강조하지 않습니까? “天地之間 萬物之衆(천지지간 만물지중)에 惟人(유인)이 最貴(최귀)하니 所貴乎人者(소귀호인자)는 以其有五倫也(이기유오륜야)라 是故(시고)로 孟子曰(맹자왈) 父子有親(부자유친)하며君臣有義(군신유의)하며 夫婦有別(부부유별)하며 長幼有序(장유유서)하며 朋友有信(붕우유신)이라” 하는데 이 “붕우유신”대목에서 반드시 글방 선생이 한마디를 강조합니다. “친구 간에는 믿음이 있어야 친구인데 친구를 많이 사귀지 말라. 한 사람만 잘 사귀어라.”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자신감 있게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서 이것보다 더 큰 세상에 없는 사랑을 주겠다.”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15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니 이 주는 뜻은 너희가 선언하는 모든 일이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려 하심이라. 친구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 내가 할 사명이라. 친구가 영생을 얻는 구원자가 되고 아버지가 소원하는 모든 비밀스러운 것들이 이 땅에서 다 이루어지는 그것을 위해서 내가 일하노라.” 그래서 친구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친구는 믿었는데 실망을 주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로마의 시저는 자기 곁에 가장 가깝게 있던 친구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의 거짓 증언으로 사약을 받고 죽을 때 뭐라고 그랬느냐? “내가 죽는 이 자체보다 친구를 잃음이 더 슬프다.” 그러고 죽었습니다. 시저는 친구인 부르터스의 칼을 맞으며 쓰러지면서 “내가 보호를 받을 줄 알았던 친구의 칼이 오히려 나를 죽게 하는구나. 이후로 누구든지 이 땅에 있는 친구를 믿지 마시오.” 그러면서 마지막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비해서 우리 친구 되신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까지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친구 선언을 지금 하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 참되신 친구가 내 곁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수평적 관계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주님을 사랑해야 되는 수평적 관계입니다. 이 부분은 많이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삽니다. 주님을 위해서 몸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때로는 물질을 바치고 헌신하는 뜻은 그가 먼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그 당시에 얼마나 친구로 사랑하셨는지 바리새인들이 별명 하나를 예수님에게 붙였지요? “저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저는 열흘 전에 미국 장로교 총회 강사로 강의를 하고 왔습니다. 그 총회는 교단의 대표들이 각기 자기가 맡은 부서의 1년 동안의 결과를 보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그 총회에 와서 재단 보고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그 보고에서 들은 소리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면 여러분도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장로교 재단의 재정 책임자입니다. 돈이 나가고 들어가는 것을 관리하는 에드먼드 바스콧이라는 재단 책임자인데 이렇게 나와서 보고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미국 장로교 PCUSA 교인 가운데 4만4천명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께로 갔습니다.” 교인 세상 떠난 것도 총회에서 다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4만4천명이 하늘나라로 갔는데 그 중에서 1천명을 제외한 4만3천명이 자신들의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자기의 출석하는 교회에 바쳤음이 보고되었는데 그 금액이 6천9백만 달러가 들어와 있습니다.” 놀라지도 않으시네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굉장히 수준이 높아졌고 굉장히 성장했고 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은 절대 미국 교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나는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46년 목회를 했는데 그런 교인은 한 명도 못 만났습니다. 그런데 미국 교인들은 4만4천 명 중에서 4만3천명이 자기의 재산을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20세기의 그런 교인들 때문에 미국이 거의 완벽하게 세계 선교를 이룩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아펜젤러, 언더우드 그 사람들이 헌금 가져와서 이 나라에서 학교 세우고, 교회 세우고 다 해주어서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그래서 미국이 세계 선교의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교인들이 그렇게 살아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원하십니까? 나도 수평적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게 기독교의 사랑의 진리입니다. 신앙의 초기 단계는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의 관심입니다. ‘무엇을 받을까?’ 성숙 단계는 ‘무엇을 드릴까?’ 입니다. 순교자들은 왜 순교 당합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까 나도 수평적 사랑의 관계를 이루어 똑같이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당연하지.’ 이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주님께!’ 이것이 순교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들은 내 친구야. 나는 이 친구의 사명을 위해서 내 목숨까지 준 거야.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세상에 없을 거야.”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친 구

문기태 목사

금년에 극장가에서 최고의 히트를 친 작품이 친구라는 영화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참으로 우려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너무 잔인한 장면이 많아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심각하지 않을까? 하는 점과 조폭을 소재로 하여 조폭을 미화 또는 정당화함으로 청소년중에 조폭이 되는 꿈을 가진 아이들이 늘어간다는데 상당한 영향을 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히트를 친 요소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면에 가라앉았던 어떤 정서적인 갈망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정서적 공감대의 정체는 한마디로 말하면 그 순수한 친구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서는 종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너희들은 내 친구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내 친구라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거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비교될 수 있는 문화속에서 갑자기 친구라니, 스승으로부터 갑자기 '이제부터 그대들은 나의 친구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얼마나 놀라게 되었을까요?

도대체 친구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갑자기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어떻게 다가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정말 친구로 여겨도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우리를 향해 친구로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정말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셨습니다.(16)

우정은 선택으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다 우리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몇 사람만이 그 중에 나의 친구가 됩니다. 우리가 친구로 선택된 사람만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선택된 친구들은 우리 인생의 길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그 속담처럼 전해지는 명언가운데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를 원한다면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로부터 받는 영향을 거부하며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합니다. 배우자의 선택, 일생을 함께 하는 아내를 선택하고 남편을 선택하는 선택처럼 중요한 선택은 없을 것입니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선택은 아마도 친구의 선택일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이 뜻밖에 그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 친구야!”이렇게 말씀 하시면서 16절에서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16절에 보시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친구가 된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친구가 내 인생 속에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친구란 어느날 갑자기 인생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함으로써 친구가 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친구로 선택하심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우리의 삶속에 다가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자 다가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12제자를 친구로 선택하신 어떤 동기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로 가서, 그 다음에 뭘 맺게 할려고? “과실을 맺게 할려고” 또 그 과실이 항상 있게 할려고,

자,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를 자기의 제자로, 그리고 친구로 선택하신 그 중요한 의도는 어디에 있느냐?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그들의 삶이 열매로 풍성하도록, 그리고 그 열매가 항상 있는 삶을 보고파서 예수께서 그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열매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빛좋은 개살구처럼 무가치한 인생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친구를 자청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친구로 선택함으로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친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얻기 위해서만 친구를 선택한다면 그 우정은 이기심에 근거한 상대방을 이용하고 조작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선택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선택이 순수한 우정으로 발전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상대방의 삶 속에 그분이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그래서 상대방의 삶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들로 풍성한 것을 보기위해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삶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한 선택,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을 접근해서 우정을 형성하려고 할 때 주님에게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우정의 선택의 모습이 아닌가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덕을 보기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의 인생 속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정신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

유명한 하바드와 예일의 교수였던“헨리 나우웬”이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의 데이브레이크라는 작은 공동체의 장애인들과 더불어 그 속에 살기위해서 갈 때 그들을 자기의 친구로 삼기 위해서, 그들의 인생 속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선택한 그 길은 얼마나 의미 있는 우정의 선택이 였을까요? 우리가 이런 동기로 나선다면 우리들의 우정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참된 우정, 그것은 선택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을 주님께서는 친구로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영원한 친구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람들을 진실한 친구로 선택하여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밀이 없습니다. (15)

친구는 선택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나눔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친구를 한번 만나고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싶다 라는 선언, 혹은 우리 친구가 됩시다 라는 어떤 약속 만으로 그것이 순수한 우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났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단 한번의 만남으로 그 다음엔 별 의미 없이 우리의 기억 저 너머로 사라진 관계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우리의 만남이 진솔한 우정으로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눔이라는 하나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비밀을 나눌 수 있는 나눔 이여야 합니다. 이 비밀을 나누지 않고 우정은 깊이 있는 우정으로 발전해 갈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에 아주 굉장히 크다란 기독교적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 폴 투리니에는 그 비밀에 인간 성숙의 발달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었어요.

첫 단계는 뭐냐하면 어린이의 삶의 단계, 그 아이들에게는 비밀을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특성입니다. 비밀을 절대로 간직할 수가 없어요. 아빠 이건 비밀이야! 해놓고 그 다음에 금새 그 비밀을 말해 버립니다. 어린아이들은 비밀을 간직하거나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린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틴에이져의 그 단계가 되면은 달라져요. 소위 비밀을 갖기 시작합니다. 사춘기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비밀을 갖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부모에게 얘기 안하고 비밀이 생겨요.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발전 단계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사춘기에 들어선 청소년들은 비밀을 간직하면서 그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때 좋은 친구를 갖게 되면 건강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또 그렇지 못하면 매우 불안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거죠.

자, 그 단계를 넘어서면 세 번째, 성인이 됩니다. 이 성숙한 성인의 단계에 있어서는 자기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돼요. 내 약점도 나누고 아픔도 나누고 좌절도 나누고 실패도 나눌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부부관계가 아닙니까? 특별한 친구죠.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이런 이성 배우자 만으로 우리의 마음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동성관계의 건강한 친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통해서, 또 우리는 그 배우자와 함께 건강한 배우자와 함께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인격의 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말하는 이 시점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의 15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오늘 이 말씀이 “이제부터는” 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것을 주목해 보세요.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로 삼겠다. 또 그 이유는 내가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한 그 직후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위 비밀을 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이땅에 오신 이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 인자가 되어 이땅에 오신 성육신의 비밀들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생애에 거의 마지막 끝자리 단계에 와서 비로소 가장 중요한 비밀인 십자가의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있으면 그분이 죽으러 간다고,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십자가의 엄청난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정말 깊은 친구는 피상적인 친구가 아니라 깊이 있게 삶을 나누는 친구는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친구잖아요. 예수님은 지금 그 비밀을 말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비밀을 말할 수가 있다라는 것은 중요한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뭡니까? 신뢰에요.

신뢰의 관계가 없이는 아무도 비밀을 말하지 않죠. 비밀을 말했다가는 큰일 나잖아요. 그런데 신뢰 할만하다! 라는 어떤 수준에 도달하면 우리는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진짜 친구가 되는 거에요. 나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약점, 내 인생의 실패, 내가 숨기고 있는 내 인생의 갈등, 이런 속 깊은 자기의 내면을 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되는 것이에요.

우리 교회가 금년부터 굉장히 중요한 목표를 삼고있는 가정교회 운동이 있습니다. 목장입니다. 소그룹 모임에 들어가게 되면, 비로소 그 작은 그룹 안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 수가 있잖아요. 그것도 쉽게 열지는 않지요.

믿을 만하다, 그러면 그 시점부터 열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속에 있는 것을 내어 놓아도 내가 비판되지 않고 오히려 이해 될 수 있다, 이것을 확신할 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비밀한 것들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친구가 되는 거에요. 그때 치유가 일어나요. 우리 안에. 건강한 삶이 형성됩니다.

교회 나와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나눔의 마당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 교회에서, 만약 여러분이 그냥 주일날 예배만 왔다 갔다 하고 목장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스스로 왕따를 만드는 것이고 영적으로도 크게 손해를 볼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변화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눔이 없이는 안돼요. 이런 나눔이 없이는. 우리가 자기의 마음을 열지 못할 때 사람은 더 외로워지고 더 깊은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불행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가 아닐까요.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이는 그런 참극의 주인공이 였던 아돌프 히틀러. 그런데 한 히틀러의 전기 작가는 그의 불행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불행은 친구가 없었던 불행 이였다” 한 전기 작가가 그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났어요. 히틀러의 친구 될만한 사람이 있느냐? 꼭 한 사람을 발견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아주 가까이 지내던 사람, 그래서 히틀러는 이 사람을 매우 중용했습니다. 군수물자의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 인터뷰하고 얘기를 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런 얘기를 나중에 남기게 됩니다.

“그에게 즉 히틀러 에게 단 한명의 친구가 있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 히틀러는 환상가였고 자신의 카리스마에만 몰두했을 뿐 이였다. 그는 우정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그는 본성적으로 우정을 거부하였고, 매사에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그는 피했다. 심지어 그는 우리와 더불어 함께 체리 열매를 먹으며 즐거워 하는 것 조차도, 그는 거부했다. 우리 모두는 단지 그의 거대한 에고의 투사체에 불과했다. 이 우정을 거부했던 사람, 이것이 바로 히틀러 의 불행 이였다” 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나눔이 정말 건강한 우정으로 발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기 시작해야 됩니다. 우리 속을 열기 시작해야 돼요. 이러한 비밀을 나누는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의 우정은 깊은 의미의 우정으로 피상적인 우정이 아니라, 정말 깊은 우정으로 자라갈수가 있다. 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비밀을 너희들과 나누겠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 친구이기 때문이야.

여러분은 영적 세계의 비밀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감추지 않고 다 알려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면서 진정한 우정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을 믿어 주는 그래서 말씀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예수님을 진실한 친구로 여기십니까? 그리고 여러분도 예수님께 여러분의 비밀을 남김없이 이야기 해 드립니까?

 

3.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13)

1920년대 후반 세계 정상급의 테니스 선수였던 르네 라코스트는 선수 생활 동안 윔블던과 전미국 오픈 시합과 프랑스 오픈 시합 등에서 여러 번의 우승을 포함해 주요 단식경기에서 일곱 차례의 우승을 했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악어'라고 불렀는데 이는 코트에서의 그의 집요한 경기 태도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라코스트는 이 별명을 받아들였고 그의 테니스복 상의에 작은 악어를 수놓아 입었습니다. 그가 디자인한 셔츠 상품에 악어를 붙이자 이 무늬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전세계 수많은 이들이 라코스트 상표의'악어 셔츠'를 입었지만 이 상징은 그 유래와 뜻을 알고 있던 라코스트의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친구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이는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인내에 찬 결심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요한복음 15:15)고 이르신 말씀 속에 포함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라코스트의 친구가 누군가의 셔츠에 붙은 작은 악어를 보면서 '난 저 무늬의 내막을 알고 있지. 라코스트는 내 친구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친구가 십자가를 보며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정은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들의 우정을 마침내 아가페적 사랑의 단계까지 승화 시킬 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 얘기를 하고있지 않습니까? 본문이 시작되는 1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리고 본문이 마지막은 어떤 말씀으로 끝납니까? 17절“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크다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으로만 한 것이 아니지요? 난 너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가 있다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 이 말씀을 한 시점이 어떤 시점 이에요?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친구들을 위한 죽음을 각오 해 놓으시고 지금 주님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 이에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크다란 사랑이 없다”

모든 우정은 그 우정을 시험 받는 어떤 테스트의 시기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구체적으로 인생에서 어떤 고난을 만나게 될 때 그때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십시요. 고난을 만났을 때 내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은 친구가 아니지요. 그런 친구들은 벌써 떠나보내 주어야 했을 친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 고난의 순간 그리고 고독의 순간 내가 정말 방황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 내 곁에 끝까지 머물러 있을 수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위한 가장 작은 희생이라도 진지한 희생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친구들, 이런 친구들이 인생의 길에 얼마나 우리들의 커다란 힘이 될까요? 그래서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순경(順境)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은 우정을 시험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난 속에 있을 때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들을 여러분은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세계 제 1차 대전 중에 있었던 실화라고 그럽니다. 미국에 어떤 같은 마을에서 자라났던 두 친구가 같은 때에 이 전쟁에 징집이 되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친구는 같은 부대에 배치되었고 또 같은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그 전선 순찰을 나갔다가 갑자기 아군에서부터 격리 되었어요. 포탄이 날기 시작했고 그리고 이 친구는 날라온 파편에 부상을 입어 피 흘리고 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참호 속에서 바라보고 있던 친구가 견딜 수가 없어서 참호를 빠져 나와 친구에게 달려 갈려고 그랬더니 주변에 있었던 부대원들이 그를 막습니다. 분대장이 그를 막습니다. “가면 안돼. 이미 때는 늦었어, 너까지 죽어!” 그러나 분대장이 잠시 한눈을 팔고 있는 그 순간 다시 그는 참호를 빠져 나와 그 친구가 쓰러져 있는 그곳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들쳐 업고 다시 자기 참호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친구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요. 분대장이 화를 내면서, 그것 보라고, 내가 늦었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너까지 죽을 번했다고.

그때 이 사람은 자기 분대장을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분대장님 그렇지만 제가 이 친구에게 다가갔을 때 이 친구는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내 친구가 저에게 무어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내 친구는 헐떡이면서 이렇게 말 하더라구요. 친구야 나는 네가 나한테 올 줄 알았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친구로 삼으시고 하늘의 보좌를 포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써 지위를 포기하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전적으로 친구를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로인해 여러분은 죄에서 사함받고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관계를 청산하고 화목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4.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들에게 순종을 기대하십니다.

우리를 친구로 삼으려고 선택하시고 비밀을 들려 주시며 희생해주신 예수님께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친구인 우리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이라고 본문은 가르칩니다. 우리가 서로를 신뢰할 수가 있다면 서로를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신뢰하는데 안 따라갈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상대방을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순종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오늘 14절에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현대 선교에 매우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가운데 한 사람은 중국내지 선교회에 소속해 있던 아마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가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파견된 다음 몇 년이 지난 후에 그의 생애 가운데 아주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갈림길이 찾아왔습니다. 이분은 의욕적인 선교사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개척적인 선교의 프로젝트들을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빨리 가다가 보니까 선교 본부와 이견이 생겼어요. 이견이 충돌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선교 본부에서 드디어 경고장 하나가 날라 왔습니다.

선교 본부를 탈퇴하던가 아니면 지금까지 하던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순종하던가 선택하라!

그래서 그 통지를 받고 허드슨 테일러는 아주 깊은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거의 같은 때에 허드슨 테일러는 또 편지 한 장을 받습니다. 그 편지는 뭐냐하면 영국에 있던 자기 애인으로부터 날아온 편지에요.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가 너무나 모험적인 라이프 스타일의 삶을 살기 때문에 이런 사람과 내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있을까 불안해 졌어요. 그래서 우리 교제 그만하자고, 절교하는 편지가 날라 왔어요.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가 아주 깊은 낙심과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그는 선교를 포기하고 싶었고 심지어는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까지 그때 받았다고 술회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허드슨 테일러를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위기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곁에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놀랍게도 나이가 20살이나 많은 사람 이였어요. 선교사 였는데 스코트랜드 출신에 윌리암 번스라는 20살 많은 그런 선교사가 그 분 곁에 있었습니다. 이분은 허드슨 테일러를 가만히 보니까 허드슨 테일러가 굉장히 아주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를 좋아했고,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지만 허드슨 테일러를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이 윌리암 번스가 이 절망과 낙담 속에 빠진 허드슨 테일러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아주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나와 같이 여행을 떠나자!” 그래서 여행을 떠나요. 무려 7개월 간의 중국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의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쉬기도 하고 또 같이 사역하기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면서 허드슨 테일러는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윌리엄 번스라는 이 20살이나 많은 친구를 자처했던 이 사람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그 여행하는 기간동안에 7개월간 계속해서 말한 것이 두 가지 말이 였다고 그래요. 하나는 뭐냐하면 “나는 자네를 믿네” 또 하나는 “나는 말이야 자네를 따라 갈거야” 나는 당신을 믿소! 그리고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네. 이 두 마디 말이 허드슨 테일러를 회복시키는 길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허드슨 테일러 에게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그는 결정적인 인생의 위기를 결코 극복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그분에게 전적인 신뢰와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때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나친 헌신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위험한 곳으로 내 모는 것 같은 느낌도 받습니다.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오히려 시대를 거스리는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자칫 주님을 따라가다가는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될 것 같은 위기를 느끼게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친구야, 내를 믿나? 그라믄 암말 말고 따라 오그레이.."

 

저는 여러분이 인생의 길을 살아가면서 진실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진실한 친구들과 더불어가는 인생 길은 얼마나 보람 있는 인생의 길이 되겠어요.

'나는 어쩐지 친구가 없다. 인생이 외롭다,'고 느끼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여러분은 정말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기를 기뻐하시면서 다가오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 이시요 그리고 나의 주님이시여 그러나 또 하나의 명칭으로 그 예수님을 부를 수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묻고싶어요.“나의 진실하신 친구여.”

우리가 찬송가의 가사에서 부른 데로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그 분은 내가 그를 선택하기 앞서서 나를 선택해놓고 내게 다가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를 붙드는 순간 하늘나라의 비밀을 나에게 쏟아놓으시면서 나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기꺼이 나의 죄와 고난을 짊어지고 나를 대신해서 죽음을 대신 죽어 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내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면서 다가오시는 바로 그 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은 친구로 정말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나는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당신의 말슴에 순종하겠습니다.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따르겠습니다.' 라고 고백해 보셨습니까?

그 친구를 만나셨다면 이 위대한 친구 앞에 또 이렇게 요청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에게 저의 친구이신 주님을 함께 섬길 수 있는 이 놀라우신 주님을 함께 전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좋은 친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런 친구들과 더불어 우리의 위대한 친구이신 주님을 섬기는 그 놀라운 행복, 그리고 그 놀라운 감격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싶습니다.

고 함석헌 선생의 시 가운데 최대의 걸작 시인 [그 사람을 가졌는가] 라는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에 예 보다도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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