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요 15:18-27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요 15:18-27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데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면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19) 만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해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느냐? 그들이 나를 박해하였다면 자연히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 반대로 만일 그들이 내 말을 들었다면 너희 말도 들을 것이다. 21) 너희가 내게 속하였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은 너희를 박해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2) 만일 내가 와서 그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변명할 여지가 없다. 23) 누구든지 나를 미워하면 내 아버지도 미워하는 것이다. 24) 만일 내가 그들 앞에서 아무도 행하지 못하였던 놀라운 일들을 행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와 내 아버지를 미워하였다. 25) 이것은 ㄱ) `그들이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예언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ㄱ. 시69:4) 26) 그러나 나는 돕는 자, 곧 진리의 원천이신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오셔서 나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나를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부르심은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의 부르심으로, 거기에는 세상과의 충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은 제자들이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18-21) 예수께서 제자들이 세상에서 핍박 받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를 싫어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지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행적이 주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의 관심이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을 때, 그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주인이 겪는 일을 종이 겪는 것처럼 예수께서 겪으신 일을 제자들이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세상이 예수를 핍박했던 것과 같은 성질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22-25) 예수를 핍박한 이들이 핑계할 수 없는 분명한 죄가 있는 것은 이들이 본 것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의 표적(요 2:1-11; 4:2-9; 6:4-13; 6:16-21; 9:1-7; 11:1-44)이 나옵니다. 이 표적은 예수께서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는 특징적인 사건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들을 직접 경험했거나 들어서 알았습니다. 표적들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배척하고 핍박했습니다. 이들의 죄악된 행위는 그들의 악함과 불신앙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26-2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실 것입니다. 이 증언은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기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과 가르침을 적대적인 세상을 향해 선포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하나님을 위해 맺는 삶의 열매입니다.
적용: 성령의 능력은 핍박하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삶을 살게 합니다. 당신은 세상을 향해 어떤 형태로 증인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박해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삶을 사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언제나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
김태환 목사
오늘 읽은 말씀은 “포도나무의 비밀”의 후속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intimate relationship)을 맺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오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대충 잡아서 약 50% 정도의 크리스천들은 믿음생활에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찬송가 302장 2절에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 보나”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3절에는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후렴에는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바다에 뛰어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발 목에 물만 적시고 얕은 물 가에서 큰 파도를 보고 마음만 졸인다는 것입니다. 왜 언덕을 떠나서 하나님의 넓은 은혜의 바다에 배를 띄우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선교학에서는 이런 부류의 크리스천들을 “명목상의 크리스천 (nominal Christians)”이라고 합니다. 이름만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선교학에서는 이런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데 동원할 수 없는 사람들로 분류합니다.
목회 경험상 전체 크리스천 중에 약 25% 정도가 믿음 성장의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성경공부에도 참가하고, 기도 모임에도 나가고, 선교활동에도 관심이 있고, 세상에서도 크리스천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속해 있나요? 명목상의 크리스천에 속해 있나요? 아니면,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25%에 속해 있나요? 아니면, 그 중간에 속해 있나요?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말씀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18, 19절) “(세상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이런 식으로 대할 것이다.” (21절)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25절) “(너희는 세상에서) 나를 증언해야 할 것이다.” (27절) 포도나무의 비밀을 말씀해 주신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제 너희가 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나에게 속해 있으면 세상은 너희를 이렇게 취급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미움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 아닙니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노래 싫어하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한 2002년쯤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에 가서 탈북자들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뉴스를 보고 우리가 원해서 그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가서 그들을 만나 보니까 이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고요. 그들의 조국에 먹을 것이 없어서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넘어오기 전에 사전에 정보를 가지고 오겠지요? 조선족이 사는 연변은 잡힐 위험이 많다는 정보를 들은 사람들은 흑룡성 같은 내륙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거기는 벌목을 많이 하니까 그런 곳으로 숨어들어가면 잡힐 염려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 생활이 얼마나 험한지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전혀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은 정말 좋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우리를 미워하는 그런 상황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이라고 어디 가서 차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1세기의 크리스천들은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피난을 가지 않고 유대에 남아 있던 크리스천들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상상을 해 보십시오. 단순히 불이익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죽거나 아니면 그 사회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교당한다고 하지요? 요한복음에 이 단어가 한번 나옵니다. 요한복음 9:22에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put out of the synagogue” “to be expelled or excluded from the synagogue” 라고 했으니까 synagogue에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예배드릴 자격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런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유가 우리가 사는 시대적인 상황이 훨씬 1세기 때보다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정말 씁씁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국의 카이스트 (KAIST)에 공격적인 기독교 동아리들이 극성을 부려서 무신론자 동아리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KAIST를 접수하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극성스럽게 캠퍼스 전도를 했던 동아리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전도를 해서 몇 사람을 전도했는지 모르지만, 무신론자 동아리들이 생겨나고, 이 무신론자 동아리들이 캠퍼스마다 서로 연대를 결성했다고 합니다. 무신론자 동아리들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학교는 학교이다. 신성한 학교를 교회로 착각하지 마라!” 이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주장에 어떤 명분으로 맞설 수가 있겠습니까?
공격적인 동아리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들을 그렇게 가르친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크게 보면 한국교회의 잘못입니다. 그동안 믿음만 강조했고, 전도만 강조했지, 어떻게 이 세상에 나가서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크리스천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연구가 없었습니다. 좋은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만 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빛으로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소금으로 사는 것인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연구가 없었고,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카이스트의 경우와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지금 카이스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정말 성경의 메시지는 세상 사람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입니까? 어디서든지 우리 크리스천은 공격적인 자세로 그 땅을 점령해야 하는 것입니까? 몇 사람 전도하자고 반 기독교 동아리, 무신론자 동아리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그들이 서로 연대하게 만드는 것이, 정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이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복음을 제시해서 그리스도를 믿게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가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하는 건전한 전도나 선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제시하는 우리의 태도와 방법의 문제입니다. “공격적 (aggressive)”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나요? 지금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어떤 선교 단체의 대표는 “공격적이지 않은 선교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면서 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이 공격적이라는 말이 어울립니까? 예수님에게 공격적이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면 우리에게도 맞지 않는 옷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아라.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이라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선택하였으므로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18-19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세상의 근본적인 관계를 드러내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탄의 관계입니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 화해하고 공생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하나님과 사탄은 대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적수가 되지 않습니다. 가만 내 버려뒀다가 결정적으로 하나님은 사탄의 세력을 소탕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때는 사탄이 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교회가 큰 피해 (damage)를 입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사탄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사탄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처럼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므로,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이런 식으로 대할 것이다 (21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섣부른 공격은 오히려 상대방을 더 결속시킵니다. 반기독교 내지는 무종교 단체들을 더 많이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전략적인 실수입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해야 할 것이다 (27절)”라고 하니까 자꾸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전의(戰意)를 불태우는 크리스천들이나 선교단체들이 많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선교 전략은 크리스천의 삶 자체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왜 저를 선택하셨나요? 제가 주님께 꼭 필요한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들은 대답은 “암, 있었지!” 하는 주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주님은 힘이 없어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마태복음 26:53)?”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크리스천의 삶을 보여 줄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보여줘서 세상에 감동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작고 보잘 것 없는 한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신약에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소유로 선택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크리스천의 삶을 보여 주려고 하십니다. 지금 세상은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은 개인 밖에 없는, 공동체가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지 드러내야 합니다. 성 프랜시스 (St. Francis, 1182-1226)의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소서.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나로 하여금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가 먼저 용서할 때 나도 용서를 받고,
내가 먼저 줄 때 나도 받을 수 있고,
내가 죽을 때 영원히 살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흠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문제투성이의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공부를 이미 잘 하는 사람들은 더 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 못한 사람들은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결과가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같은 문제투성이들을 선택하신 모양입니다.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가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를 지난 금요일 성경공부에서 들으셨지요? “나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와는 너무 다른 삶을 살더군요 (Oh, I don't reject Christ. I love Christ. It's just that so many of you Christians are so unlike Christ).” 이 말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So many of you Christians are so like Christ.”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가는 것이 상대방에게 사영리를 들이대고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강력합니다. 더 powerful합니다. 그리고 이런 선교 전략은 사탄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세상에서 택하신 우리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에 있는 요15:8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즉 제자도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 9-10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시고 12-14절에서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하시며 17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도 또는 그리스도인 됨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사랑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 관해 말씀하신 주님께서 곧바로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대립시켜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마디 말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문 21절을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가 행하신 일들을 믿지 않음으로써 죄인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을 지칭하여 세상이라 하신 것입니다. 22절을 봅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또 24절을 봅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이 행하신 모든 일을 보며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고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자들을 통칭하여 세상이라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실천해야 할 도리의 핵심이 사랑인데 반해 당신을 부인하는 세상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가 “미움”임을 밝히셨습니다. 극명하기 이를 데 없는 대비입니다. 본문 18-25절 사이에서 미워한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는지를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세상의 이 미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아무 정당한 이유 없는 미움입니다. 본문 25절을 봅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유가 있다면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자기에게 속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9절 하반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리고 이 미움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세상의 무지는 하나님에 관해 듣지 못하고 그가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함에서 오는 무지가 아닙니다. 그들의 무지는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며 순종치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또 봅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4절도 다시 봅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를 배척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배척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를 미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자들은 또한 그를 보내신 하나님도 미워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도 미워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미리 주의시키신 말씀이고 요한이 전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미움은 예수님께서도 이미 받으신 미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본문 18절) 이미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미움은 하나님께서도 받으시는 믿음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본문 23절)
이 미움은 그저 마음속의 미움으로 그치지 않고 박해라는 행동으로 표출되는 미움입니다. 본문 20절을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하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박해한 세상이라면 예수님의 제자이며 종인 우리들까지 박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을 수치와 고통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받으신 미움을 우리도 받는다면 서러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이 대립관계는 어떻게 하면 해소될 수 있겠습니까? 본문 20절 하반절 말씀은 그 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말을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느냐 아니면 그의 말씀을 지키느냐 하는 데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의 열쇄이신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세상과 우리 사이의 적대관계는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우리 사이의 적대관계의 원인은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뭔가 잘못 해서 세상이 우리에게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하기 때문에 적대적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윤리적으로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해서 비난과 미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별로 잘못한 것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준에서 보면 온전하지 못해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요구하지 않을 덕목과 완성도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요구합니다. 자기들은 행하지 않는 일들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에서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닙니다. 세상이 정말 싫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리스도인다움입니다. 악한 세상은 우리가 잘 하면 잘 할수록 더 우리를 미워하고 적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하고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의해 이 세상에서 택하심을 받고 그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영문 모를 반감과 비난은 이미 예수님 때부터 예고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세상으로부터의 비난의 여지를 없애려고 힘써야 하지만 잘 하면 잘 할수록 더 거세지는 세상의 본능적 배척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압박에 굴복하거나 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주님께 속하기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타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할 것이며 결국에는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려 할 것입니다. 주의 제자이기를 포기하면 세상의 종이 되는 것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세상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야겠지만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하여 주신 가르침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사람들로 가르치셨습니까? 먼저 본문 19절 하반절을 봅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는 주님에 의해 이 세상에서 택하심을 받아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우리가 당신을 증언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을 봅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주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고 그에게 속하여 그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받아들이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은 그를 따르며 그와 함께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첫째가는 본분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해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 가운데 아주 귀한 것 하나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고 미워하며 배척하고 그에 속한 백성을 박해하기까지 하는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사람의 힘이나 지혜나 언변이나 논리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셨습니다. 곧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그 어떤 비난과 미움과 배척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하며 또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은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적일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원래 세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일 때 하도록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쓸 당시는 예수님은 이미 적어도 반세기 전부터 안 계시고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시작된 지도 오랜 때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었고 로마 제국 전역에서 순교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때였습니다. 증오와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주신 그 말씀을 통해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사회는 날이 갈수록 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며 교회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가 이를 두려워하며 위축되어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따라 더욱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입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저앉지 맙시다.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우리 모두 적그리스도와 악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 됩시다. 그것이 또한 미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사랑이 넘치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김영규 목사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앞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미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미움이 있습니다. 미움을 다룰 줄 모르면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가정법으로 시작하십니다. “(만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18) 제자들은 세상에서 곧 미움에 직면할 것입니다. 불신자들을 홀대하거나, 미워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내가 남을 사랑하든지 사랑하지 않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냥 미움을 당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시35:7)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시69:4)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를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59:3)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109:2-4)
그러나 실상 우리가 미움당하는 것은 놀랄 일도, 낙심할 일도 아닙니다. 이미 주님이 먼저 당하셨고 제자들이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20절 말씀에 보세요!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인 되신 예수께서 먼저 세상에서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욕먹고, 배척당하고, 붙잡혀 매를 맞고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俗人의 법정에서 심문을 당하고 강도처럼 정죄를 당했습니다. 가시관에 찔리고 사지에 못질을 당하셨습니다. 주인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하물며 종들이야 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도 똑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공갈 협박을 당했습니다.(행4:18), 투옥 당하고(5:18), 매 맞고(5:40),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행12:1) 돌에 맞아 죽고(행7:58-60), 도살장의 짐승 취급을 당했습니다.(롬8:36) 그러니 오늘 우리가 미움을 당하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정면에서 미움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미움 받는다고 분노하기에 앞서서, 미움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처신해야 될는지, 주님의 말씀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왜 미워하는가?
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할까요? 물론 미움 받을 짓을 하니까 미움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 밉습니다. 할 일 없이 남의 험담만 하는 사람들, 예의 없이, 남 욕하고 비난하고 설쳐대는 사람, 별것도 없는 사람이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밉습니다. 툭 하면 오해 잘하고 삐치기 잘하는 사람, 편 가르기 잘하고 남을 시샘하는 사람들이 밉습니다. 남의 돈 떼어먹고 미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밉습니다. 하나님도 미워하시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상 숭배를 미워하고(신16:22), 악인의 제사를 미워하고(잠15:8), 행악과 패역을 미워하고(잠6:17,3:22), 교만한 마음을 미워하고(잠6:17), 그릇된 판결과 학대를 일삼는 자와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교만한 눈, 거짓 된 혀, 악으로 달려가는 발, 망령된 증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잠6:16-19)
그러나 이렇게 미운 짓을 해서 미움 받는 경우도 많지만, 까닭 없이 미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팥쥐 모녀가 콩쥐를 미워하는 것, 신데렐라의 계모가 미워하고, 놀부가 동생을 미워하는 데 합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음부 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잠1:11-12) “까닭 없이!” 그러나 정말 이유가 없을까요?
미움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인간의 죄악 된 본성입니다. 인간 본성은 사랑이 아닌 미움입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은 남편 다윗을 경멸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미워했습니다. 사울은 신하 다윗을 미워했습니다. 친 가족끼리 서로 미워합니다. 요즘도 갑자기 연락두절 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온다간다 말 없이 떠나버립니다. 우리는 남의 성공보다는 실패를 보면서 안심(?)합니다. 허물을 덮는 것보다는 들추어서 비판합니다. 남들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기쁨보다 시샘으로 바라봅니다. 죄악 된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내 맘속에 미움이 생기거든 남에게서 원인을 찾지 말고 먼저 내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제자들이 미움 받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합니다. 즉,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미워합니다. 그 원인을 주님은 몇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께 택함을 받고, 예수께 소속된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에 속해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 세상은 예수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옹호하고 선전하고 따라갑니다. 미움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21) 세 번째 이유는 죄를 지적한 것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7:7) 세상 사람들은 자기 죄를 지적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셨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것은 참 종교의 사명입니다. 종교는 단순히 인간의 종교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복을 빌고 복을 받고, 마음에 다소간의 위안을 주는 것이 참 종교가 아닙니다. 참 신앙이라면 영혼을 살려야합니다. 당연히 죄를 지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 죄인들입니다. 가장 원천적인 죄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불신하는 죄입니다.(시14:1,롬3:11-12) 이 죄 때문에 사망이 왔고,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죄 때문에 불행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10:7) 세례 요한도, 사도들도 역시 회개가 제일의 메시지였습니다.(마3:2,행3:19)
죄를 지적한 것! 회개하라고 한 것! 그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죄인더러 죄를 회개하라고 한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지적당하는 순간부터 노발대발 대들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19-21) 일찍이 선지자들도 이런 미움을 당했습니다. “선견하지 말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正路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사30:10-11)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은 곧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본문 23절) 세상이 근본적으로 미워하고 대항하는 상대는 하나님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쓸 데 없는 간섭자로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독선적이다. 하나님은 불의하다. 하나님은 지나친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교훈도 싫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도 싫고, 하나님 자신도 싫어합니다. 하나님도 싫고 메시야도 싫은데 하물며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환영을 받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사람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셨던 가치관과 사상과 행동을 모방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과 우리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대조합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으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19-21) 세상은 자신들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사는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미움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당연히 여겨야 합니다.
미워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러면 미움을 받을 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성경은 몇 가지 대책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미움 받는 것을 하나님 뜻으로 알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9-21)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3:17)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靈 곧 하나님의 靈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4:13-19)
둘째로, 모든 사람과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사람들과 평화하라고 부탁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셋째로, 미움을 갚으려면 오직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된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38-48)
그러면 이렇게 미움을 참고, 마냥 견디고, 사랑으로 갚으면 무슨 결과가 있을까요? 나만 불이익을 당하지 않나요? 나만 손해 보고 끝나는 것 아닙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미움에 대하여 결코 노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대응해도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적당하게 보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이미 보응의 증거를 수집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세 가지로 자신을 증거 하셨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 자신의 증언입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22) 둘째로, 성령의 증거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26) 셋째로, 제자들의 증거입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27) 이 모든 증언들은 충분한 보응의 근거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세상의 까닭 없는 미움을 명백히 보응하십니다. 다만 그 보응의 때를 정하고 기다리실 뿐입니다.
우리는 미움 당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미움을 무감각하게 당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를 미워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할 일은 오직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때때로 사랑이 미움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바로 그 미움에 우리는 흥분하거나 분노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견뎌야 합니다. 나아가서 복수가 아닌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마음의 아픔 중에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미움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이 아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변함없이 사랑만 합시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깁시다. 그것이 내 영혼을 치유하는 길이며, 승리하는 길이며, 상대를 이기는 길입니다. 주님도 그 방법으로 이기셨습니다. 할렐루야!
신자로 세상 살기
임덕순 목사
채선당 사건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채선당이라는 샤브샤브 체인점이 있다는데, 지난 2012년 2월17일 채선당 천안지점에서 어떤 임산부가 종업원에게 여러 차례 발로 배를 차였다고 그 임산부가 트위터에 글을 올린 사건입니다.
그 내용이 트위터에 올라오자 전국의 네티즌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채선당과 직원을 욕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나서서 CCTV를 확인하며 조사를 해보니 "서로 다툼이 있었지만 종업원이 임산부의 배를 발로 차지 않은 사실이 인정됐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임산부에 대하여 거짓말쟁이라고 모두가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화해해서 사건은 끝이 났다고 합니다.
해프닝으로 끝났을 일이 온 사회를 들끓게 하는 이슈로 만든 것이 SNS의 힘이자 폐해입니다. 사건은 일단락되었어도 사이버 여론이 휘두른 칼날에 임신부도 음식점도 큰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졸지에 ‘나쁜 음식점’으로 낙인찍힌 업체는 매출 감소와 심대한 이미지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거짓말쟁이로 몰린 임신부는 쏟아지는 비난 화살에 실제 발로 배를 차인 것 이상의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루머나 괴담이 SNS를 통해 사실인 양 퍼져나가는 해프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이비 언론들이 또 그것을 사실인양 보도해서 확대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사실 확인도 하기 전에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돌팔매부터 하고 보는 세상이 점점 두려워집니다.
요즘 안티기독교세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나 목회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생기면 그것을 기화로 별의별 욕을 다해댑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기독교 장로라는 것 때문에 일부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무조건 미워하면서 지난 몇 년 동안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미운물건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안티기독교세력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티기독교 세력은 요즘 생긴 게 아닙니다. 역사가 2.000년이 넘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안티기독교세력만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너희가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초기 300여 년 동안의 역사는 복음이 세계 곳곳에 퍼져나간 ‘복음 확장의 역사’였는데, 그 복음 확장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였고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박해의 이유는 ‘황제 숭배’를 거절했다는 것과, 근친상간을 한다는 것과, 영아를 살해해서 인육을 먹는다는 것이었는데, 성도끼리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근친상간이라고 매도했고, 성찬식에서 ‘이것은 내 살이니 먹으라’ ‘이것은 내피니 마시라’는 말을 가지고 인육을 먹는 집단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주후 64년에 시작된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303년의 디오클레시안 황제에 이르기까지 300여년 동안, 교인들을 잡아 죽이고 예배당을 파괴하고 성경을 불태우고 기독교인들의 지위와 명예를 박탈했습니다. “동물 가죽에 말려 사자에게 찢기기도 했고,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왕성하게 성장했고 결국 324년에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합니다.
역사가들은 이 천년 역사 중에서 교회가 가장 교회다웠던 때는 처음 그 300여년이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박해를 당할 때 오히려 본질이 찬란하게 빛나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진짜 신자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고난이 따른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진짜 신앙이 자라고 꽃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세상은 기독교인을 욕하고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될까요? 물론 요즈음에는 일부 교회나 신자들이 안 믿는 사람만도 못한 행동을 해서 욕을 먹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때는 교회가 정말로 순수하고 세상에 대하여 헌신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환영과 존경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혹독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잘 하나 잘못하나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남의 나라에 가면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서만 아니라 기득권 때문입니다.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 들어온 사람을 자기의 권리를 빼앗아갈지도 모를 잠정적인 적으로 생각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세상에서의 입장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세상을 돕는 일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합니다. 구제나 봉사나 헌혈이나 장기기증이나 이런 일이 기독교인들을 빼면 누가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자기들의 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기독교인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을 다 알지만, 삶의 동기와 목적이 자기들과 다르고 예수쟁이들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인들이 미워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이나, 본문에서 세상이 나를 미워하였기 때문에 너희도 미워하리라는 말씀은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 그게 사회집단이 되는데, 어느 사회나 그들이 해오던 관습이나 정신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해오던 관습이나 정신에 맞지 않는 사람이 새로 들어오면, 저 사람이 우리사회에 이익을 끼치겠나 손해를 끼치겠나를 판단합니다. 판단의 기준은 자기사회의 속성을 잘 따를 것이냐는 것입니다. 새로온 사람이 자기네 사회의 관습이나 가치관과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면, 저 사람은 우리사회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판단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게다가 어느 사회든지 물건이나 자리는 부족한데,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경쟁해서 누구는 부자가 되고 누구는 존경을 받는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어렵게 얻은 그 지위를 지키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자기 자리를 흔들 위험이 있다면 당연히 그를 적대시하고 몰아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 사회가 가진 가치관과 관습과 행동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면,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따질 필요 없이 자기사회에 해로운 사람으로 취급하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적응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언제나 이방인취급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신앙이 이 세상의 가치관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먼저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세상에 주님을 미워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이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되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만물과 인간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만드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한 줌의 흙일뿐이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재산이 다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애써서 모은 재산과 싸워서 올라간 지위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재산과 기득권을 지켜줄 메시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줄 생각이 없으셨고 도리어 그들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자기네 메시아로 삼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사상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제자들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가진 재산을 다 내놓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부정하게 모은 돈을 토해 내야 한다는 것이고,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큰돈을 모을 수도 없고, 뇌물을 써서 승진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며, 정직하게 번 돈이라 할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쓸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싫어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한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두가 맞는 말씀이지만 자기들의 이익과 충돌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님의 제자인 신자로 사는 것도 똑같은 원리이고, 우리가 신자로 살고자 한다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나오고 나머지는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나의 생명의 주인,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복종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내 것이랄 것이 없어지고 맙니다. 돈도, 시간도, 명예도, 생각도, 모두 없어지고 나는 단지 하나님의 것으로만 살게 됩니다. 이 말씀 앞에서는 개인도 없어지고 사회의 이익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미워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노릇을 하기를 원하고, 자기 욕심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잘난 사람, 성공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까지 모든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주인이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은 누가 자기에게 속하였고 누가 예수에게 속하였는지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또 세상에서 그만큼 대가를 받습니다.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한다는 말은 세상의 가치관을 위해서 일한 사람을 인정해주고 그만큼 지위를 보장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과 생각과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보장과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누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이 목적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그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그는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기는 하지만 세상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위하여 일을 합니다. 군대도 다녀오고 직장도 다니고 친구도 사귑니다. 그러나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굳이 세상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세상이 자기편이라고 인정하고 보상해 주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자아성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 고시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는 것, 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공부도 하고 정치도 하지만, 어떤 지위에 오르고 어떤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은 약이 오르고 열등감이 생깁니다.
자기들이 피 흘리며 쌓아올린 물질과 명예를 그리스도인들은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들을 존경하지도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을 보면 꺼뻑 죽으며 아부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자기들 앞에서 아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 앞에만 서면 열등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힌다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열매들을 맺으실 것이라고 믿고, 하루하루 순종하여 살면 되는 것이지 세상성공을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요즈음 우리사회에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는데 노후문제입니다. 요즘은 30이 넘도록 준비하여 겨우 20여년 일하고 50대에 은퇴하고 나면 나머지 30년을 가난하고 외롭게 보내야 할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게다가 점점 수명이 늘어가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보다 더 중하고 긴 내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90세가 넘은 노인도 인생은 짧다고 말하듯이, 사람이 100년을 산다 해도 이 세상은 잠간일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육신의 삶이 끝난 다음인데, 그 때는 20년, 혹 30년을 좀 외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옥에서 살든지 영원히 천국에서 살든지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잘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가 더 문제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더 많이 갖고 어떻게 하든 높은데 올라가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에서 생명을 얻어 사는 동안에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고 산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의 은혜로 영생의 천국에 갈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이 세상의 시민노릇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아직은 이 세상에서 살도록 파견 근무하는 사람들입니다. 파견 근무하는 사람은 항상 두 소속의 필요를 다 채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서 일정기간 있으면서 일하라고 보냈는데, 내가 잘못해서 얼마 있지 못하고 쫓겨난다면 그것은 본사에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파견한 본사의 명령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이지만, 그 본사가 나를 여기에 파견 보낸 이상, 현재 이곳의 일에도 충실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모범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시민이 되어야 하고 국방과 납세의 의무도 바로 감당해야 하며, 어느 모로 보나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른 성도의 삶은 이 세상을 망하지 않게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인이 없는 세상은 파기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신앙의 자유가 있는 때에는 믿는 사람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여러 분야에 뛰어들어 좋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세상 곳곳에 있는 소외되고 어두운 곳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요즘 기독교가 미움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신앙의 자유가 박탈당한 것은 아니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바르게 살고 착한 일을 하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결국 세상과의 갈등은 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가면서 부정을 저지르는 데 함께 참여할 수 없고,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에는 이 세상의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시대에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시간과 정신을 다 쏟아서 공부도 하고 장사도 하고 정치도 하는데, 우리는 시간을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하고, 장사나 정치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면서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보다 배나 더 힘이 들고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믿음 말고, 오늘 내가 세상 사람과 경쟁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내 머리와 내 힘으로 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고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필요한데 쓰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그들이 하는 방법으로 머리를 싸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도록 맡기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이 세상 사람들과는 영 다른 가치관과 목적을 가지고 사는 별종의 삶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예쁘게 볼 리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은 진짜 신자답게 생활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교회가 변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 길이 진흙길이면 진흙이 집안으로 묻어 들어오고, 바깥 길이 모래 길이면 모래가 집안으로 묻어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한 주간 살다가 주일날 한번 모여오기 때문에 한 주간 세상에서 묻은 생각과 언어와 습관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묻혀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온전히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가 흔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경영학적 방법으로 교회를 운영하면 교회가 더 잘 될 것같이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늘고 있고,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이끌고 들어와서 교회에서 존경과 인정을 받으려는 교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중요한 원리를 잊어버리고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점령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내 신앙의 중심을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무엇에 대한 신앙입니까?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된다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좀 더 앞당겨보려고 하나님의 힘을 빌리러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삶에 배어있는 세상의 원리를 씻어내고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다시 고백하고, 영생을 목표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힘을 얻으러 모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유는 안정된 생활이나 자아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없으면 일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능하고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요셉처럼,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간 다니엘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고 양보하며 희생하며 도우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환영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타향에서 목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동기들의 중심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차량을 제공하고, 장소를 제공하고 식사를 제공하고, 공부하는 모임을 준비하고 이끌었습니다. 제 아내가 그 모임 때문에 고생 깨나 했습니다. 나 없이는 그 모임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도 해마다 회장을 뽑으면서 나는 한 번도 뽑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임에 기여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세상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취급하든지 맡은 일만 바로 하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하나님 한분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삽시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이고 영원한 영광의 상을 주실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잊지 말고 올바른 성도로 세상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주권
임덕순 목사
우리민족은 본래 하나님을 잘 모르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독히도 고생하는 우리를 도와줄 어떤 신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분이 누구인지, 어디 계신지를 잘 몰라서 별의 별 것을 다 섬겨온 민족입니다. 산에 산신령이 있을까 하고 산신령도 섬겼고 바다에 용왕님이 있을까 해서 섬사람들은 용왕님도 섬겼고, 방죽, 집, 뒷간, 그 어디엔가 나를 도와줄 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별의 별 신들을 상상해서 섬긴 민족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잘 아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잘 알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신가를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온 세상에 알리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이 대하셨고, 남편이 아내를 대하듯이 사랑으로 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느 민족들보다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고 인격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든 우상들과 달리 말씀하고 대화하시는 분이며, 사람 속에 있는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신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은 대단히 자비로우시지만 또한 대단히 정의로우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며, 지은 죄는 절대로 그냥 용서하지는 않는 분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남들보다 먼저 알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망하게 되는데, 그들이 망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네 이스라엘만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들과 역사 까지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바벨론의 왕을 세우기도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며 그들을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꼭 알아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온 세상에 대하여 무엇을 원하시는 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쉽게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우리만 사랑하시는 분이며 그래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이스라엘이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민족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우수하고 똑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들만 복 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였고, 이런 오해가 다른 민족들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만들었고, 가장 비참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되게 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스라엘보다 더 비참한 역사를 경험한 민족은 없습니다. 그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당한 고난은 말로 할 수가 없으며, 나치 독일에 당한 고난도 역사상에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자기의 사명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앞부분에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너희들도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21절을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주님을 미워했고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모른다거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일들을 통해서도 저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저런 말씀과 저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막12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는데, 수확 철이 되어 세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보내었더니 농부들은 주인의 종에게 세를 주지는 않고 오히려 종들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들을 다시 보냈더니 이번에는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더러는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의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이니까 존경하리라고 생각했더니, 농부들은 이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은 우리 것이 되니까 죽이자고 모의하고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성실한 사람에게 맡겼다는 말씀입니다.
주인이 종들을 보낸 것은 마땅히 바칠 세를 바치라는 것이었고, 아들을 보낸 것은 그 포도원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도리어 소유권자를 죽이면 자기들의 것이 되리라고 착각하고 아들을 죽였다가 진멸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그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선지자들을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지만, 아들을 직접 보내신 이유는 온 세상에 대한 당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니 내게 돌리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너희가 주인 노릇하던 것들을 이제는 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부인하고 모두가 인간들의 것인 양 제 마음대로 쓰고 사는 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제는 내 아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들 앞에 복종하고 자기의 모든 권리나 재산이나 명예나 모든 것을 넘겨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아들의 십자가의 공로를 주어 그 사람이 지은 죄를 씻어 주실 것이고, 아들과 동일한 하늘의 상속자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복종하지도 않고, 자기가 가졌던 것들의 소유권을 아들에게 넘겨드리지도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정도를 인정하고, 그분에게 예의를 표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이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까 내가 당신께 인사드립니다. 하고 인사 한번 하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내가 주인노릇 했던 것들을 모두 다 그분에게 드리고, 그분 뜻에 맞게 살기 시작하겠다는 행동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께 복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막 12장의 농부들처럼, 도리어 예수님 하나만 죽여 없애면 모든 것을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않으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서 권리를 주장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사용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공짜로 누리게 하셨음에도 그동안 주인에게 꼬박꼬박 세를 내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은 자연히 생겨나서 진화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고 싶어서 하는 짓입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이런 못된 관리자들을 그대로 놔두실 수가 있겠습니까?
둘째는, 인간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아가게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의존한다는 말은, 로봇처럼 생각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조종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며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아야 행복하고 풍성하게 살도록 만들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달은 지구에 끌리며 지구 주위를 돌면서 존재하도록 만들어졌고, 지구는 태양의 영향아래서 태양에 끌리며 태양주위를 돌면서 존재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달이 지구를 벗어나면 폭발하게 되고, 지구가 태양을 벗어나면 생명체가 죽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궤도를 벗어난 네 삶을 고치고 돌아오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모든 식물들은 태양을 바라보며 의지하여 잘 살고 있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겠다고 발버둥칩니다. 이런 상태로는 바른 삶도 살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고 영생을 누릴 수도 없는데도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서 이 잘못된 관계와 잘못된 삶을 고쳐주려고 아들을 보내셔서, 아버지의 주권을 인정하고 돌아오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돌아와 복종하면 그동안에 지은 모든 죄도 한꺼번에 없애주려고 아들을 십자가의 제물로 주셨습니다. ‘주인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려고 저렇게 희생까지 당하셨구나’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돌아오면, 과거의 죄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하나님과의 사이가 부자사이로 회복되게 하려고 아들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살았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불신과 미움이 사라지고 질병과 저주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행복이 다시 채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욕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에게 복종하기를 싫어합니다. 여전히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 방식대로 살고 싶어서 하나님께 돌아오지도 않고, 예수님께 굴복하기도 싫어하고, 예수님의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들마저 미워하는 것입니다.
요1:10-11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만물의 주인의 아들이요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에게 복종하느냐, 아니면 영접하지 않고 자기가 계속해서 주인노릇을 하기를 원하느냐에 따라서 구원과 멸망이 갈리고, 사단의 종으로 사느냐 하나님의 자녀로 사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오해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보려고 교회에 나옵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잘 해 왔지만, 교회에 다니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셔서 모든 것이 더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이게 일반적인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나와 내 모든 것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이름 앞에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반란군이 정부군의 장군 앞에 자기들의 모든 무기와 주장들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는 것처럼, 그동안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앞에, 그동안 주장했던 주장과 생각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야 그게 신앙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삶, 나의 미래, 나의 삶과 죽음 까지도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크게 쓰실 수도 있고, 낮은 상태에 머무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오랫동안 살게 하실 수도 있고, 금방 죽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실은 주님의 주권을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도 모든 것은 그분의 주권아래 있었습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다고 해서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고, 오래 살고 싶다고 해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권리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도, 우리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 속에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직하게, 자기가 주인이 아님을 고백하고 참 주인에게 복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 관한 당신의 주권을 언제부터 주장하셨습니까? 언제부터 내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까? 복음이 내 귀에 들리기 시작한 그때부터입니다. 22절과 2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도, 제가 주인인체 하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산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죄를 죄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인이 누구신가를 알려주고, 소유권을 내놓으라고 하신 뒤에도 복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죄는 말로 할 수 없이 큽니다. 복음을 듣지 못해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못하는 사람과, 복음을 듣고도 자기가 여전히 주인이 되고 싶어서 욕심대로 사는 사람의 죄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기도 하셨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율법으로 제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는 말씀이 다른 선지자들과 영 달랐고, 그분이 하시는 일들에서 하나님의 권세가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셨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이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미워하는 로마의 권력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려 주시고 그들을 더 부자가 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더라면, 그들은 쌍수를 들어 영접하고 메시아로 추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열매 맺지 않는 나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유대인들에게 기대하신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므로 그분을 섬기고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알려주는 모델이 되라고 하신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마저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되었기에, 주님은 그들을 여지없이 책망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일제히 예수님을 거부했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정직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진짜 주인에게 굴복하고, 그분께 맡기고 살아야 성경이 말씀하는 신자입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그렇게 사시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그게 속편한 생활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게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내가 더 행복해지고 유용해지는 길입니다. 오늘부터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바르게 들은 사람은 바르게 반응해야 합니다. 바른 반응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돈을 쓰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고, 시간도 하나님의 것이니까 시간을 쓰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시간을 활용합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 목적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살려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내게도 훨씬 더 유익하고 행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실패나 심판이 없고 영원한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서도 이전처럼 거짓 주인노릇을 포기하지 못해서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사람은 실패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신앙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좋아해서 순종하든지, 싫다고 거부하든지 해야 합니다. 복음을 들었으면,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모두 다 청산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시작하든지, 아니면 이런 미친 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다시는 이런 말을 듣지도 않겠다고 반박하고 벌떡 일어나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교회도 정직하지 못한 교회들도 많습니다. 복음을 듣고서도 동의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 안에 그대로 붙잡아두기 위해서 복음을 희석시키고 중립지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금 당장에 순종하지 않아도 교회에만 다니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말로 사람들을 붙들어 놓고, 하나님의 주권만 인정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정직하게 가르치는 대신에, 교회만 다니면 하나님이 네 모든 일이 잘 되게 도와주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많고 교인도 많지만 욕을 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결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으니 둘 중에서 네가 택하라’고 하셨지, 네가 나를 인정하지도 복종하지도 않더라도 출석만 하고 헌금만 내면 네게 복을 주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시키려고 오신 분이라는 사실은 유대인들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일을 자기 사명으로 알고 시작하면 성령님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26-27절의 말씀입니다.
참된 성도는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굴복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잠시 맡기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은 아무나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주인이고 싶은 우리의 죄 된 본성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좋은 율법도 주셨고 좋은 가나안땅도 주셨지만, 그들의 교만은 고쳐지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내 욕심과 고집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고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도 성령이 찾아오시면 마음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부족하면 성령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남을 삶을 살아가는 정직한 청지지가 되시어 복을 누리고, 이웃들에게도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날에 우리도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증거의 영이신 성령
김남수 목사
부활절을 지나고 나면 오순절을 맞게 됩니다. 오순절은 성령께서 이 땅에 임하신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교회의 절기 입니다. 성령은 누구신가? 계속해서 우리가 공부하면서 성령은 중생의 영이시다. 구원의 영이시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 영혼의 문을 열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도와 주시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중생의 영이시고, 구원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구원 받은 성도들 속에 오셔서 내주, 내재하셔서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신자들 속에 항상 같이 계시고, 떠나지 아니 하시며, 우리 안에 날마다 생각 나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책망 해 주시면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씩 인도 해 주시며 우리를 도우시려 오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는 인격적인 분임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그 분을 모셔 드리고, 그 분과 함께 생활하면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는 확실한 증거와 놀라운 그리스도 인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성령은 증거의 영이시며, 선교의 영 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 해 주고 계십니다. 책마다 중요한 이슈가 있습니다. 이 요한 복음은 성령에 관한 자세한 가르침을 사도 요한이 주님을 가장 가깝게, 가장 오래, 가장 친밀하게 주님과 대화를 통해서 자기가 경험하고, 듣고, 배운 성령의 사역을 자세하게 우리에게 설명 해 주는 성령에 관한 교리가 담겨 있는 책이 요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 복음을 통해 성령의 하시는 일들을 지금 우리가 찾아 가고 있으며, 또 배워 가면서, 성령은 어떠한 영이신가 하는 것이 계속해서 말씀 드리는 주제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증거의 영이시고, 선교의 영이시고,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 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구원 받은 이 후에 구원 받지 않은 다른 사람의 영혼의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도와 주시도록 일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우리가 구원 받고 내재 하신 다음에 성령이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이 증거의 성령이 일하시는 것을 동역하고, 순종하고 따라 갈 때에 우리 안에는 기쁨과 능력을 경험 할 수 있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 생활 해 가면서 방향을 잃어 버립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감격이 있는데, 얼마 있다 보면, 그 구원의 감격이 식어 지고, 열심히 봉사 하지만, 마침내 낙심과 좌절에 빠지게 되고, 별거 아닌 일 때문에 시험 받아서 마음 상하고, 신앙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기 시작합니다.
목회하는 많은 분들을 만나 보면, 목사님들 속에서도 목회의 열정과 꿈을 잊어 버리고, 이런 확신과 자신감을 잊어 버린 많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의 성령을 보내 셔서, 성령께서 같이 계시는데 왜 낙심하며, 좌절하며, 한계를 느끼며, 왜 절망하게 되는가? 이것이 우리가 생각 해야 할 중대한 원인 분석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이나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교훈에 의하면, 내가 구원 받은 후에 신령한 영적 세계가 열리고, 내가 구원 받은 감격과 기쁨이 있는 거처럼, 이제는 구원 받지 않은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을 두고 저들을 생각하며 성령과 함께 역사 해서 그 분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이 증거의 영이신 성령과 동역하지 아니하고, 그 분은 그 분대로 놓아 두고 나는 나 좋아 하는 것만 찾아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별거 아닌 교회 안의 인간 관계, 이 세상의 잠시 있다 없어 질 물질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 나는 감정 문제, 이런 저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쏟게 되고, 정말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현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관심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 땅에 관심을 두고 우리가 중요하지 않은 데 관심을 두고 우리가 좇아 가다 보면 그것이 영혼의 만족과 심령의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생식을 파는 데도 신바람 생식이라고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신바람이 나지 않는 이유는 성령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릴 생각을 안하고, 다른데 관심이 있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두 가지를 요청 했는데, 머물라는 것입니다. Stay! 그리고 머물러서 오래 있지 말고, 성령 충만하고 구원 받아서 배우고 나가라는 Go! 이런 명령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도 오래 고여 있으면 썩듯이 사람이 오래 가면 침체가 되는 것입니다. 가라는 말씀도 있고, 머물라는 말씀도 있는데, 가기는 두렵고, 문 닫아 걸고, 머무르는 것을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침체요, 한계 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심각하게 조심 해야 할 영적 병이고, 우리가 발견 해야 할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성도들이 구원 받자 마자 나가서 선교하기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2장 3절, 4절에는 (히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성령이 저들과 함께 증거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시고, 일하실 때에는 반드시 선교의 뜨거운 열정과 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부분 주일 저녁에 전화 오는 것은 대단히 심상치 않은 전화들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속상하게 하던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주일 저녁에는 생각다 못해 저에게 전화를 해 목사님! 목회가 힘이 듭니다 라고 합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습니다. 제가 목회자니까 이해를 합니다.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느 분이 전화를 해,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길래 이유를 물어 보니 교인들이 자꾸 교회를 떠난다고 합니다. 교인들에게 떠나는 이유를 물어 보았느냐고 하니 이 교회에는 꿈과 비전이 없어 장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사실 교회가 성령이 원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증거의 영으로 성령과 함께 증거하는 일과, 선교하는 일과 영혼을 관심 있게 돌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교회든 큰 교회던 작은 교회이던 머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절망에 빠지거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개인이나 교회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영으로서 이제 구원시킨 다음에는 우리로 하여금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관심을 두길 원하시고, 그 일을 우리를 통해 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곳에는 관심이 없고, 결국 관심이 땅의 것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내가 클까? 네가 클까? 이런 것 때문에 우리의 관심이 다른 곳에 있는 동안에 성령은 성령대로 고민하시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피곤하고, 목마르고, 실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서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물론 사람들 생각에 선교하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제시합니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나는 아직 믿음이 적다, 그 정도가 안되어 있다, 나는 초 신자이다, 나는 경제적으로 약하다, 나도 힘이 들어 내 자신도 주체를 못하는데 남을 어떻게 보살핀다는 말이냐,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은혜 받는 것이다라고 움직이지 않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처음에는 대부분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흥이 일어 날 때 그들은 밖의 이방인들, 안디옥이나, 저 사마리아나, 바다 건너 에배소 교회나 마케도니아 지방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루살렘, 이스라엘, 오직 유대인, 우리 동네, 우리 교회에 관심이 모아 졌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으므로 물리적인 현상이 일어 나서 핍박으로 온 교회가 거의 폭발되다시피 전 세계로 흩어 져서 가는 곳마다 저들이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역사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증거의 영 이시라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8장 25,26절을 보면 빌립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성령께서 빌립을 사막으로 몰아 내셨습니다. 왜 몰아 내는지 몰랐습니다.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지, 가야 되는 그런 강력한 충동을 느끼고, 그가 사람을 등지고, 도시를 등지고 달려 갔습니다. 어느 만큼 갔는데, 여행하는 한 그룹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성령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저들에게 가서 읽는 말씀을 설명하라.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라는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을 증거하고, 물이 있어 내려서 간다게에게 세례를 베푸는 증거의 성령이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는 우리가 혼드라스의 학교를 개교합니다. 그 동안 여러분께서 많이 수고 해 주시고, 기도 해주시고, 또 여러 가지로 애써주셔서 학교를 내일부터 정식으로 개교하게 됩니다. 여러분들 정말 많이 수고 해 주셨고, 여러분들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지금 서있는 위치, 지난 날과 앞으로 우리가 과거를 생각 해 보고, 과거에서 교훈을 받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 가는데 도움을 주어야 역사와 미래가 연결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잊어 버리고, 역사를 무시하면, 결국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꿈을 주시고, 그가 원하시는 일을 해 드릴 때에 우리에게 기쁨이 오고, 축복이 오는데, 우리 자신이 오늘 어디 있었는지, 우리의 과거가 무엇이고, 미래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최초의 한국 선교사,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는 Henry G. Appenzeller 와 Horace Grant Underwood, 이 두 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항에 이 배가 도착을 하고 이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 두 분이 그 배에서 내리는 첫 번째 발을 딛는 그 순간, 거기에서 한국의 역사와 오랜 전통과 문화는 완전히 바뀌고, 새로운 여명의 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처음의 그 분들이 왔을 때, 한국은 이런 상태였다는 것을 Underwood 의 편지에서 지금까지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얽매어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얼마나 깜깜하고 앞 길이 답답했고, 참담했으면, 선교사가 가서 이런 편지와 글을 썼겠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 손으로 서 있는 거 같사오나, 지금은 서양 귀신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와 영혼이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아마 그 분은 여기 우리를 볼 수 있을 시기가 아니 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예배 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오직 주여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렇게 쓴 기도문이 아직도 우리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1859년 런던에서 태어나 10살 때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그 후에 미국으로 건너 왔습니다. Jersey City에 있는 Hasbrook Seminary of boys 에 입학을 했고, 17세에 NYU 에 입학을 해 1881년에 졸업을 하고, 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신학교 졸업반에 NJ의 Pomton의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1882년 어느 날, 동경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Altmans 라는 선교사가 와서 이웃 나라 조선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갑신 정변이 일어 나서 사회가 혼란하고, 그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그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언더우드는 그 때부터 기도를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는 일본에 가서, 이 수정이라는 기독교 조선인에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1885년 부활절 아침에 배를 타고 한국으로 건너 오게 됩니다. 그 배에는 놀랍게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너 가정이 같이 출발 하였는데, 아펜젤러 선교사님도 같은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아펜젤러는 갓 결혼한 신혼 부부였습니다. 그리고, Mary F. Scranton 부인이라고, 40세에 남편을 잃고, 자식들과 편안하게 살다가 이렇게 무의미한 인생을 살 것인가 고민을 하다, 감리교의 파송을 받고, 53세의 나이에 미망인 혼자서 선교를 떠나게 됩니다. 의사였던 그 아들과 며느리 William B. Scranton 부부가 동행을 하여, 2월3일에 떠나, 4월 5일에 도착을 했으니, 2달 가까이 배로 여행 을하고 한국에 도착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 분들이 한국의 영혼을 보고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펜젤러 부인이 출산을 하게 됩니다. 스크랜턴 부인이 출산을 도왔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후 이불에 싸서 방에 눕히려고 하니, 방이 너무 추워, 할 수 없이 밤새도록 아기를 안고 지새우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이, 한국의 여성들이 이 추위에 아이를 낳고, 이 사회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여자들은 남자의 노리개 정도, 집안의 일하는 것 밖에는 인정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이 드는 일인데, 추위와 가난에 떠는 이 사람들을 위해 여성이 깨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그 밤에 아이들을 키울 여성 교육 기관을 꿈꾸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배나무가 많은 배 밭골에 자그마한 주택이 있었는데, 그 주택에 몇 개의 방에 아이들을 데려다 교육을 시키려고 했지만, 1,2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서양 귀신이라고 하여 어른들이 아이들을 그 근처에도 못 가게 하였습니다. 결국 가난하고 병든 아이들을 하나, 둘 데려다가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학교가 되어서, 한국의 여성 교육의 산 실이 되었는데, 2002년 통계를 보니 이화 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만13만8천771명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병들고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 다가 키운 이 스크랜턴 부인이 그런 꿈, 비전을 가졌을 리는 만무할 것 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 그 길로 갔을 겁니다. 아마, 그런 꿈은 있었겠지만,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 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성령께서만 하시는 겁니다. 저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영혼의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김 활란 박사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나왔고, 최초의 여의사 박 에스더와 같은 사람들이 배출 되었고, 민족 운동, 해방 운동, 문맹 퇴치, 우상 퇴치, 그리고, 언어와 문화를 개혁하고, 한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 벌써 은혜를 받자 마자, 선교의 불이 붙기 시작해서, 1907년에 한국에서 최초로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 했는데, 그 해외는 제주도였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이라 하여 한국에 속해 있지 않았었습니다. 이 기풍 선교사를 파송 했는데, 지금도 제주도에는 이 기풍 선교사의 기념관이 있고, 그 때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회가 여러 개가 있습니다. 선교의 열정이 시작되어서 1908년에 소련 연해주, 1909년 동경에 한 석진 목사, 19010년에 북간도에 김 원재 목사, 손 종도를 중국에. 1911년에는 일본에 박 영일을 파송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숭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그 어려운 중에도 학비를 절약하고 모아, 손 종도를 평양에서 중국으로 파송하였다는 겁니다. 그 숭실 학교 역시 선교사가 세운 학교인데, 거기서 한 경직, 박 형룡, 강 신명 등 거목 목사님들이 배출되었고, 그 학교에서 안 익태, 박 태준, 현 제명, 김 동진 같은 음악가를 배출 해 창 밖에 모르던 우리에게 현대 음악, 서양 음악을 전파 한 것입니다. 1897년에 북 장로계 W.M Baird 는 선교사가 평양에서 사랑방 교실이라고 13명의 학생들을 데려 다 좋고 가르친 것이 숭실 학교의 시작인 것입니다. 거기서 을사 조약 반대, 105인 사건, 조선 공민회 사건, 3.1운동 .광주 학생 사건, 신사 참배 운동, 민족 운동, 조 만식 장로님 배 민수, 박 희도, 김 창준, 차 희석등 독립 운동의 주역들이 이 학교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 교회가 이런 역사를 이런 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에 온 것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관심이 없었던지, 누가 말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1902년 6월11일, 그는 선교 때문에 목포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몇 사람의 동역자들과 일본 배를 타고 선교 여행을 하다, 안개가 짙어 배가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나 배가 침몰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18년 만에 그의 나이 44세 였습니다. 같은 배에 탔던 동역자들과 선교의 장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44세에 수장이 된 것입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그의 뒤를 이어서, 연세 대학교, 이화 여자 대학교의 학장을 지내고, 손자들도 그 일을 했지만, 그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의 죽어 가는 사람들을 건지려고, 그 곳에 가서 그의 생애를 마쳤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서, 수영을 못해 죽어 가는데, 어떤 청년이 힘든 급류에 뛰어 들어 그 사람의 머리채를 잡고 나와 그 사람은 살리고 자신은 병이 들어 죽었다. 살아 나온 사람이 자기를 살려 준 사람은 생각지도 아니하고, 그 때 왜 내 머리를 잡았을까, 옷을 잡아 건져 주지 않고, 너무 아팠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용서 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시고, 그들이 우리를 위해 젊은 나이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5년에서 10년 사이에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불결하고 위생 시설이 전혀 없던 곳에서 선교를 하다 죽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묻히고, 또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선교를 하다 또 죽어갔습니다. 지금 선교사 묘지에 많은 선교사들이 그 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한국 교회가 잊어 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뭐가 답답하고, 이래 저래 싸우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지난 과거의 이런 역사를 기억하고, 1885년에 이화 학당 1886년에 배재 학당을 세우고, 경신 학교, 광신 학교, 숭덕 학교, 1904년 정신 학교, 숭실 학교등 서울, 평양, 원산 등에 장로교, 감리교가 나눠서 전주, 목포, 해주, 마산, 광주, 개성, 공주 등 계속해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대부분 그 분들을 학교를 위해 생명을 쏟았다는 겁니다.
1904년 선교 보고에 의하면 전주, 군산, 목포 3곳에 남녀 중학교 하나씩 학교를 세웠는데, 학생 수는 126명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후에 1907년에 인가 받은 학교 44개, 학생 수는 997명이었습니다. 1910년 64개로 학교가 늘어 나고, 학생 수는 1740명이 되었습니다. 1910년에 정부 인가 받은 사립학교가 2,250개나 늘어 났습니다. 학교를 하나 세우고, 계속 학교를 세워 장로교 계통의 500개, 감리교 150, 카톨릭 계 137, 이렇게 늘어 나기 시작해서
2,250개의 학교가 새워 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런 역사를 잊지 말고,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이 제가 가 본 곳이 그런 곳인데, 바로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돌보고, 그들이 자라서 훌륭한 안 창호 선생같이 민족을 위해 일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오고, 조 만식 장로님 같은 위대한 인물같이 국가와 만족을 위해 일할 지도자를 키워서 그 사회가 변화 되어야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자꾸 낙심하게 됩니까? 힘이 없습니까? 성령 충만 하다고 하면서 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크신 하나님이라 말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라 찬양하면서 왜 우리의 삶은 위축되고, 절망하고 좌절 하는 것입니까?
영혼의 가치를 인정하고, 거기에 성령의 관심이 있으며, 증거의 영이신 그 분과 우리가 같이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쓰다 만 컴퓨터라도, 우리가 절약할 수 있는 작은 것이라도 절약해서 혼드라스의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고, 내가 힘이 없고 은혜를 받아야겠다, 뜨거운 열정과 생각이 안 드는 분은 저와 같이 혼드라스에 같이 가셔서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영혼에 관한 새로운 은혜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사명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증거의 영 이시라는 것을 증거하고, 그 분이 원하시는 일을 순종하고 따라 가면, 신이 나고 여러분의 욕구를 따라 가다 보면 절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어느 권사님 한 분이 선교지를 방문 하시고 난 뒤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생각하다 자녀들이 운영하는 봉제 공장에서 조각 천을 모아 작은 책 가방과 신발 가방을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조작 천으로 모아 만드셔서 여러 가지의 컬러지만, 재봉하셔서 1,200개나 만드셨습니다.
연필 케이스 500개도 만드셨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방문할 때에 전달하였습니다. 제가 너무 귀해서 저도 하나 제 연필 케이스로 얻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 정말 나는 영혼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위해 시간과 관심을 쏟고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중요한 저의 질문 인 것입니다. 목포 앞 바다에서 젊은 생애를 이 백성들을 살리려고, 그의 생애를 마친 선교사의 삶을, 그가 우리 민족이 개화되고 오늘이 있기까지, 이런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국 교회가 이걸 잊어 버리면 방향을 잊어 버립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삶을 주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성령님 증거의 영이신데, 내가 구원 받고 난 후에는 다른 사람이 구원 받는 기쁨을 인하여 우리를 사용하시길 원합니다. 그 영혼 구원하시는데 우리를 사용하시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불필요한 낭비는 쓸데 없는 것에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 할 수 있도록 축복 해 주시옵소서. 새 결심을 갖습니다. 새 각오를 갖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