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 앞에 서시다
요 18:33-40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요 18:33-40 / 빌라도는 관저 안으로 되돌아가 예수를 자기 앞에 불러다 놓고 `당신이 유대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34) 예수께서 되물으셨다. `지금 그 말이 네 생각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말이냐?' 35) 빌라도가 말하였다. `내가 유대인인 줄 아는가?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내게 넘긴 것이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일을 했는가?' 36)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내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붙잡혔을 때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대항하였을 것이다.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37) 빌라도가 물었다. `그러면 당신이 왕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네 말대로 왕이다. 나는 세상에 진리를 가지고 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내 제자들이다.' 38) 그러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사형선고를 받으시다; 마 27:15-31, 막 15:6-20, 눅 23:13-25]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에게로 나가서 말하였다. `그는 죄목을 씌울 만한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았소. 39) 그러니 해마다 유월절에 감옥에 있는 죄수 하나를 당신들의 요청에 따라 놓아 주는 관례대로 나는 `유대인의 왕'을 놓아 줄 생각인데 어떠시오?' 40) 그러나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안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하고 외쳤다. 바라바는 강도였다.
빌라도는 이미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결국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36)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자,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네가 하는 그 질문의 내용이 네 생각에서 나온 말이냐?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을 질문한 말이냐?”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에는 빌라도가 이 재판이 터무니없는 경우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나는 유대인이 아니며 나는 이 일에 이해관계가 없고, 다만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으니 당신이 한 일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소.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였다면, 내 종들이 싸웠을 것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지상 나라의 왕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왕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며, 이는 세상 나라와 견줄 수도 없으며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37-38a)36절의 '내 나라'라는 진술은 그것이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예수가 왕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라고 자신이 진리의 왕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도 그가 진리의 음성을 듣도록 계시하시고 천국 시민으로 초청합니다. 하지만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 곧 당신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고 거절했습니다(고후 13:8).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b-40) 빌라도는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는 없었지만 적어도 예수를 사형에 이르게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로마의 통치에 반하는 어떤 정치적 행동이나 선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를 바로 석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대인 군중의 환심을 얻거나 호의를 유지하고 싶어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해 주는 관습을 이용하는 대안을 내 놓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분명 ‘예수를 놓아 주라는 군중들의 소리’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종교지도자들에게 선동당해 분노에 찬 군중은 바라바를 놓아주라는 소리로 빌라도의 뜻을 꺾어버립니다. 안타깝게 빌라도는 지금까지도 사도신경에 예수를 죽인 역사의 대죄인으로 언급됩니다.
적용: 빌라도는 고소자들의 환심을 유지하고 예수를 놓아주고자 술수를 부렸으나 결국 그 술수가 그 개인과 역사에 어떤 결과를 낳았나요? 이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왜 진리를 알아가야하고 타협하지 말고 진리만을 따라가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자기 인생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능력의 왕이신 예수님을 경외하고 오직 예수 안에서 사랑과 평안을 누리는 백성이 되어야겠습니다.
< 설 교 >
우리가 속한 나라
김영봉 목사
Happy New Year! 이 인사말 그대로, 2013년도에는 교우 여러분의 삶에 새로움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새로움을 통해 신선한 행복감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 Being renewed again and again)의 은총이 성령의 능력으로 일년 내내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죄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특히 유명한데, 가룟 유다와 본디오 빌라도가 그렇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 지방을 통치한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황제가 총독을 보내어 우리 나라를 다스렸듯, 로마 황제는 점령한 나라마다에 총독을 보내어 통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황실에게는 아주 골치 아픈 민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람들은 그 유별난 민족을 잘 길들여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유대 총독의 자리는 승진을 위한 좋은 발판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복음서 외에도 몇 가지 역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Josephus)는 빌라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을 남겨 두었고, 필로(Philo)라는 유대 작가 역시 간단하지만 빌라도에 대한 기록을 남겨 두었습니다. 1961년에는 소위 '빌라도의 돌'(Pilate Stone)이라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로 인해 빌라도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고백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활동하고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셨으므로, 그분은 아무리 일러도 26년 이후에 활동하셨고 아무리 늦어도 36년 이전의 어느 때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는 초대 교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인물이며 따라서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모두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음모설'(conspiracy theory)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은 음모설에 쉽게 기웁니다. 어떤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고, 뭔가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음모설에 솔깃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이 원죄에 깊이 물들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종대왕이 꾸며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얼토당토 않은 말입니다.
2. 본디오 빌라도가 많은 문학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그가 맡은 역할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황실은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허락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자치 정부가 '공회' 혹은 원어로 '산헤드린'(Sanhedrin)입니다. 유대인들과 관련된 대부분의 일들은 이곳에서 처리하고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산헤드린이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형(capital punishment)을 집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사형 판결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사형을 집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로마 총독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게 한 궁극적인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빌라도에게 그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이 부당해 보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없었고,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로마의 통치에 전혀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핑계로든 그를 풀어주려 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끔 뉴스에 보면, 경찰들이 '관할 싸움'이라는 것을 했다는 보도를 접합니다. 영등포에 사는 사람이 강남에서 골치아픈 사건을 저지르면, 강남 경찰서에서 그 범인을 영등포 경찰서에 떠넘기려 합니다. 그러면 영등포 경찰서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강남이니 강남 경찰서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다시 돌려 보냅니다. 그와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누가의 기록입니다.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서 빌라도는 그 골치아픈 사건을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낸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 황제로부터 갈릴리를 분할받아 통치하고 있던 왕입니다. 하지만 헤롯은 유대 땅에서 일어난 문제이니 자기 소관이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그 즈음에 빌라도는 아내에게서, 지난 밤 꿈에서 예수로 인해 몹시 괴로움을 당했으니 관여하지 말라는 전갈을 받습니다(마 27:19).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계속하여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것입니다"(요 19:12)라고 협박합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황제에게 고발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총독으로서는 가장 공포스러운 협박입니다. 빌라도는 결국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마 27:24)
이렇게 보면, 빌라도는 할 만큼 한 것 같습니다. 예수를 죽게 한 책임은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교 권력자들에게 있지, 빌라도에게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빌라도는 피해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그의 이름을 '사도신경'에 올려, 세상 끝날까지 주일마다 세계 모든 교회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 정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동정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도 한 동안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동정론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요세푸스나 필로같은 사람들이 남겨놓은 글을 통해 빌라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더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로마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총독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관심은 출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폭도들을 잔인무도하게 진압했습니다. 황제에게 과잉 충성을 한 것입니다. 주후 36년에 폐위된 것도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너무 잔혹하게 다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고뇌하는 양심'이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그는 교활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둘째는 빌라도를 동정하는 제 마음의 내면을 보고 나서 그에 대한 동정론을 내려 놓았습니다. 빌라도의 선택을 두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두둔해 주려는 제 마음 안에는 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같은 핑게를 대고 싶은 흉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저지르는 죄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어. 이럴 수밖에 없어. 누구라도 이렇게 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행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그렇게 선택한 것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실와 정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달리 선택했을 것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진리를 따를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짓는 죄들도 모두 저의 욕심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때로 이런 저런 핑게를 대지만, 잘라 말하자면, 저는 손해 보기 싫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빌라도의 행동처럼 저의 행동에 대해서도 동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빌라도를 옹호하지 않고 있습니다.
3.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빌라도를 '사도신경'에 올려 정죄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을 죽게 한 장본인으로 정죄하기 위해 빌라도의 이름을 올렸다면,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오른 이유는 그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모양의 권력자를 상징합니다. 그 자리에 헤롯이라는 이름을 넣어도 좋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이름을 넣어도 좋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넣어도 좋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고백은 ”예수께서 세상 권력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고백하면서 "왜 빌라도지?"라고 질문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어, 왜 예수님이 세상 권력자들에게 고난을 받으셔야 했지?"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 아주 중요한 진실을 말해 줍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님을 정치 혁명가(revolutionary)로 그리려는 학자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가장 먼저 제자들이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분은 정치 권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갈릴리의 군중들이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도 그분은 미련없이 몸을 감추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분은 왕좌에 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올라 정치범으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적인 구원자'로만 그립니다. 그분은 오직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도 그렇게 믿어왔고 또한 생각해 온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 나라 그리고 개인의 영혼에만 관심을 두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교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치 권력을 탐하여 정치 혁명을 도모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해이지만, 그분이 오직 인간의 영혼에만 관심을 두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해입니다. 그분은 개인 개인의 영혼을 주목하셨지만 또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만나 그의 영혼을 들여다 보실 때 그분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계셨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는 '작은 사건'들이 모여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변화하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권력을 원하지 않으셨지만,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시기 원하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살아 이 세상에 온전한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 하셨습니다. 과거에 총과 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 나라'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꾸미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오직 섬김으로만, 오직 희생으로만 그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나라가 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왕이나 대통령같은 큰 권력을 가진 사람도 그렇고, 작은 권력을 가진 사람도 그렇습니다. 원죄의 굴레 속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대로 살기를 원하고, 그 수단으로서 권력을 얻으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 권력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만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권력자들은 예수를 불편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거하는 데 대제사장들과 헤롯과 빌라도가 손을 맞잡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개인에게서 시작하지만 결코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이지만 영적인 것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변화를 받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달라지고, 자녀들 혹은 부모와의 관계가 달라지며, 친구들과의 관계가 달라지며, 원수와의 관계까지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사는 사회가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려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은 아주 불편하고 거북스러운 것이 됩니다.
4.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신문 받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유대인 지도자들이 고발하는 것이 맞느냐고, 스스로 왕이라고 주장했느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36절)
이 구절의 첫 번째 문장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는 말은 "내 나라는 이 세상과 관계 없소. 내 나라는 다른 세상에 속한 것이오"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 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지만 또한 이 세상을 포함합니다. 이 세상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나라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아는 그런 나라와 종류와 성격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그려 넣을 수 있는 혹은 총과 칼로 지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빼앗고 지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힘을 빼고 자신을 열 때 임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지금 이곳에 임하지만 또한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나라에는 정의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나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던 빌라도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37절)
긴 말 하지 말고 딱 부러지게 대답해 달라는 뜻입니다. 나라는 하나의 종류 밖에 없고 왕은 모두 같은 왕이라고 생각했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그쳐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당신이 말한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37절)
뜻을 담아 이 말씀을 풀어 쓰자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왕이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오. 내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요. 내 왕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오. 내가 왕인 것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참된 진리를 알기 때문이고 진리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오. 당신이 나를 몰라보는 이유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내 말을 알아듣고, 내 나라의 시민이 된다오. 당신도 진리에 눈 뜨면 내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소. 그래 보지 않겠소?
그러자 빌라도가 다시 반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38절)
"이 대목에서 왜 갑자기 진리에 대해 말하시오? 나는 그런 것에 관심 없소"라는 뜻입니다. 실로, 요세푸스와 필로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의 유일한 관심사는 권력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로마 황제의 마음에 들어 로마 황실의 귀족으로 올라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나라가 충돌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빌라도의 나라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왕이 마주 선 것을 봅니다. 진리의 왕과 빌라도라는, 로마 황제를 대신해 왕 노릇하고 있는 사람이 마주 서 있습니다.
두 나라의 대결에서 인간의 나라가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총독 빌라도에게 진리의 왕 예수는 무력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 나라는 허튼 소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죽임 당하신 예수께서는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그의 나라는 국경을 넘어 누룩처럼 번져갔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예수를 왕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칼을 휘둘렀지만, 그럴수록 그 나라는 더 널리, 더 깊이 퍼져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신이라 불리기 원했던 황제 콘스탄틴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누가 진짜 왕인지, 어떤 나라가 참된 나라인지, 환히 드러난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왕으로 섬기는 분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참 신이요 참 인간으로 오신 그분을 주님으로 믿을 때, 그분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고 그분의 성령은 우리를 새로 지어 주십니다. 새로 지음받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죽어서 그 나라에 임할 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며, 그렇게 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 생각합니다. (빌 3:18-19)
이것이 2천 년 전에 쓰인 글이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는다"는 말은 육체적인 만족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산다는 뜻입니다.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다"는 말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죄를 자랑하고 선전한다는 뜻입니다. "땅의 것만 생각한다"는 말은 물질적인 것을 전부로 여기고 산다는 뜻입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 불리는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에 딱 맞는 말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이 세상 나라의 삶의 방법입니다. 빌라도의 삶의 방법이고, 가야바의 삶의 방법이며, 티베리우스 황제의 삶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참 신이시고 참 인간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영원한 나라, 참된 나라, 하나님 나라에 눈을 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나라의 기준을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잇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3:20-4: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빌라도의 나라와는 다른 사상으로 살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수치를 수치로 알고 죄를 죄로 알며,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오직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사랑 때문에 겪어야 하는 수고와 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나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죽어서 천당 가기 이전에 이미 이 땅에서 천국 시민이 되어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나라가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로, 자신의 권력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처럼 만들기 위해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더 이상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권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통해 누리던 것들을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진실하게 믿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사는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참된 믿음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예수님처럼 본디오 빌라도에게, 즉 세상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그분의 능력으로 축복받아 살다가 죽고 나서 천당 가는 것이 전부라고 아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아무런 위험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 관심 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골치거리가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혼자 축복받고 자기 혼자 천국 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믿음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우리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까? 우리가 이미 그 나라의 시민임을 믿고 있습니까? 그 나라의 시민다운 삶의 변화가 내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기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는 열정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를 영광으로 자랑하며, 오직 땅의 것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 땅의 빌라도, 이 땅의 헤롯, 이 땅의 가야바들이 과연 우리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저런 신자들이라면 그들로 인해 이 땅이 가득 채워진다 한들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주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땅의 권력자들이 우리로 인해 불편해 하고, 그래서 때로 박해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으면 빌라도에게 무시당할 뿐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빌라도의 자리에 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대제사장 가야바가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를 통해 확산되어 가고 있던 하나님 나라를 없애 버리려 했습니다. 까딱하면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할 때, 우리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말했듯이, 그것은 마치 가시 돋힌 채찍을 발길로 차는 것(행 26:14)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받은 부름을 잊지 마십시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삶에 결단하십시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을 거부하고 외면하고 박해하려는 빌라도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나의 이익과 욕망을 생각한다면 나도 빌라도의 친구가 되어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를 자랑하며 땅의 것만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가장 잘 사는 길처럼 보이지만 가장 희망 없는 삶입니다. 때로 손해를 당하고 때로 무시를 당하고 때로 박해를 당해도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공하는 길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 해를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적인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이신 주님, 저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주님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 마음에 주님 나라를 품고 이 땅을 살게 하소서.
빌라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주님처럼 살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 나라에 기억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진리와 권력
임덕순 목사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죄인으로 체포되어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실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19:10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자기에게 절대권세가 있으니까 네가 살고 싶다면 나한테 빌든지 사정을 하든지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살려달라고 말씀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왔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
빌라도는 자기가 가진 권력을 자랑하며 거만하게 말하는데, 주님은 진지하게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너 권력 있어?” 하는 말이고, 예수님은 “너 진리를 알고 싶으냐” 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사람들이 왜 그렇게 줄을 서고 난리를 칠까요? 권력을 가지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행정고시 사법고시에 합격하려고 그렇게 죽자 사자 애쓰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권력은 현실적인 힘입니다. 권력이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가지고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진리이신 예수님이 진리에 대하여 가르치고 선포하셨지만 예수님은 권력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권력은 힘이고 진리는 무기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권력과 진리의 속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요즈음 정치를 보면 정체성도 없는 당들이 많고, 사상과 이념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수시로 이합집산 하고 있고, 정의를 부르짖으며 기성정당을 욕하던 진보라는 당의 내막을 들여다보니 세상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정과 위선이 가득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국민들은 아무도 정치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정치인들만 그럴까요? 인간이 다 그런 거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세 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본문은 인간의 철저한 기만성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핑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죄였습니다. 사람인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그들이 보기에는 분명 신성모독죄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신성모독죄라는 것이 자기들의 종교문제이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로마인들에게는 살인이나 강도나 반역이 문제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거나 말거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꾀를 냈습니다. 그들 내부에서는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시키자고 결정하고 총독에게 고소할 때는 로마에 대한 반역을 꾀했다고 고소했습니다. 예수가 스스로를 왕이라고 했다는 죄목을 갖다 붙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한 번도 스스로를 왕이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정치적인 냄새가 짙은 메시아라는 표현도 자신에게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가 아니면 사형을 시키지 않을 테니까 로마 황제를 부인하고 자기가 왕이라고 했다는 반역죄목을 걸어 고소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가 가지는 기만성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기만성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늘 보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
유대인들이 반역죄로 고발하니까 빌라도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에게 물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4)
네 질문은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증거가 있어서 묻는 말이냐, 아니면 남들이 하는 말을 가지고 묻는 말이냐는 말씀입니다. 로마의 총독부는 유대인들의 행동에 대하여 늘 감시를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만약 예수님이 왕이 되어 로마에 반역하려는 일을 하고 있었다면 총독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총독이 시큰둥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5)
나는 유대인이 아니니까 너희 종교에 대한 것은 관심도 없지만, 너희 동족들이 너를 잡아서 고발했기 때문에 심문하는 것뿐이라는 대답입니다.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가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해서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 사람은 당신네 나라에 위험인물이니까 심문하고 죽이세요.”라고 해서 심문하는 것뿐이라는 대답입니다.
유대인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로마를 걱정해 주었습니까? 그리고 로마 총독은 언제부터 유대인들을 그렇게 고맙게 생각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 하나를 희생시켜서 자기의 유익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 넘김으로서 로마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빌라도는 그들의 청을 들어줌으로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하나만 죽이면 피차간에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자기에게 득이 되면 악한 일에도 힘을 합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선한 일에도 모두 외면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기만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둘째, 진리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전에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을 대할 때는 무섭게 책망하셨지만 빌라도에게는 진지하게 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진지하게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과 다르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내 나라가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종이라고 하는 이들은 천사들을 말합니다. 주님이 천사들을 동원하신다면 세상 전부를 한 순간에 심판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에게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조주이시고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38)
이 말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진리가 뭔데?” 하는 무시하는 말입니다. 그 진리가 내가 가진 권력만큼 힘이 있는 거냐? 나는 그런 거 관심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음에도 주님은 왜 대답을 해 주시지 않았을까요? 빌라도가 생각하는 진리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와 세상이 생각하는 진리는 부정될 수 없는 사실 즉, 1+1=2 라고 하는 사실을 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는 인간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뜻, 사람이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라도가 말하는 진리는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사실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는 우리가 터를 닦고 살아야 하는 반석 같은 것입니다. 사실적 진리는 우리에게 문제의 심각성과 절망을 주지만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우리를 넘어짐에서 일으켜주고 구원을 얻게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만 아니라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당장 자기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자기의 승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면 대단히 진지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건강의 비법을 말씀 하셨다고 해도 빌라도는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말씀하시니까 한 마디로 내쳐버렸습니다. “진리가 뭔데? 진리가 밥 먹여줘? 진리가 승진시켜줘?”그런 태도였습니다. 진리는 관심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이 예수를 잡아온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을까 에만 관심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서 그들과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진리에 대하여 외면할까요? 그들 속에 진리가 들어갈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 생각 밖에 들어갈 자리가 없고, 권력 지향적인 사람은 권력에 대한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들을 기회가 찾아와도 진리에 대하여 문을 열지도 못합니다. 빈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에게는 진리보다 지금 차지하고 있는 총독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뭔데 하고 묻기까지는 했지만 그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자리 유지를 위해서 나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불러내어 진리를 듣도록 눈과 마음을 열어주신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듣고 믿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 인간은 오로지 자기 이익을 추구할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를 사형시킬 수는 없다고 판단한 빌라도는 밖에 나가서 유대인들에게 협상을 시도합니다. 해마다 유월절에는 내가 사형수 한명을 특사로 석방시킨 전례가 있지 않으냐, 이번에도 그 특사를 시행하고 싶은데 예수를 특사로 풀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아우성치듯 대답합니다.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
바라바는 일반 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유대주의적 사상이 강해서 로마에 아부하는 부자들을 대상으로 돈을 빼앗기도 하고 테러를 행하기도 하는 강도였던 것 같습니다. 혹시 그는 로마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군의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강도짓을 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이 바라바를 택하고 예수를 버림으로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아니라, 로마의 세력을 몰아내고 자기들끼리 잘사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독립이고 자기들의 주권회복이었고, 그래야 자기들이 권력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는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 아니라, 강도짓을 해서라도 군자금을 모아서 독립에 힘을 보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바라바는 살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세금을 뜯기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임을 알았을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자기들의 뜻대로 권력을 부리며 살기 위해서 바라바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의 권력도 사람들의 힘 대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번 대선에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후보로 나왔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될까요? 우리 생각에는 표를 많이 모으고 힘이 센 사람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인간의 힘으로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시는 것이며, 그 권력을 부여받은 사람은 그 권력을 주신 분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정부가 없다면 사람들은 며칠도 못되어 서로 빼앗고 죽이는 지옥을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권력을 주어 질서가 유지되게 하시고 사사로운 보복하지 못하도록 공권력이라는 것을 세워 사회가 유지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가 가장 옳아서 그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맡긴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쓰면 안 되고, 권력을 주신 분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권력을 잘 못쓴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래서 권력을 잘못 사용한 사람의 말로는 항상 비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정치에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악한 자들이 일으킨 전쟁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패배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니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어떤 나라를 세워서 왕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어떤 나라나 정당을 지지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로마라고 무조건 배척하시지 않았고 이스라엘이라고 무조건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나라는 다 거기서 거기일 뿐입니다. 다만 주님은 세상 나라가 줄 수 없는 진리를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진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려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지은 죄는 미워하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을 길을 만드시고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희생해서 그 길을 만드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길을 알려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로 새로운 나라를 이루시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 외에 다른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고, 그 나라는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군대는 인간이 당할 수 없는 군대입니다. 구약에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러왔다가 천사 한명에 의해서 하룻밤에 185,000명이 죽은 기록이 있습니다.(사37:36) 왕하 6장에 보면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 성에 수많은 병거와 군사를 보냈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눈이 갑자기 멀게 해서 그들을 도리어 사로잡아 사마리아 성으로 끌고 가서 먹고 마시게 한 후에 풀어준 적도 있습니다. 주님의 군대는 사람들이 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 나라의 왕이신데, 그 힘으로 세상 나라를 점령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데려 가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하나님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어떻게 해야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데려가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참 진리를 알고 믿게 된 것은 참으로 큰 행운입니다.
주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은 이 세상 나라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태어나고 죽고 복을 누리고 고생하는 것, 인간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로마가 제가 천하를 쥔 줄로 생각하고 있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싫어서 예수를 죽이려고 하지만, 세상을 운영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고자 하시면 어떤 나라를 다시 세우실 수도 있고 어떤 나라가 당장에 망할 수 있고 세상 역사를 당장에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듣고 구원 받기 원하여 세상의 문을 닫는 심판 날을 연기하고 계신 것뿐입니다.
세상은 기만적이고 이기적이며 진리에 대하여는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오직 자기의 권력과 유익만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절대적인 줄로 알고 모든 사람이 권력에 줄을 대고 현실의 유익만 추구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알게 되고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세상의 허상에 속지 않고 진리를 따라 살게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진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세상 위에 있고, 진리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권력이 없다고 해서 주눅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돈이 없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살아계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살아왔고 그 명령을 무시하며 살아왔던 사실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정신이 듭니다.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겸손을 되찾게 되고, 죄를 죄인줄 모르고 짓던 사람들이 죄를 버리게 되고,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행세하던 세상의 허상이 드러나고 오직 하나님만 영원하시고 그분 말씀만 진리임이 드러납니다.
기만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만 진리로 알고 말씀을 따라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순종한 사람들은 주님이 왕이 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립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우리의 전도와 행위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고, 우리가 그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진리에 대해서 빌라도만큼이나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에만 관심이 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기만 하면 자기가 하나님인체 하면서 휘두릅니다. 약한 자들은 한없이 짓밟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가 하나님인체, 천년만년 그것을 누릴 것처럼 자만합니다.
서민이 대통령이 되면 서민들이 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줄까요? 선거 때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표를 주고, 본인도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딴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고, 딴 세상에 들어간 사람은 그 딴 세상의 입장에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고나면 그도 정의와 공평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리와 권력을 유지하는 길만 찾게 되고, 그래서 악의 일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권력을 갖거나 부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찾게 되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거짓과 죄 된 권력으로 배불렀던 사람들은 영원히 부끄럽게 하시고, 가난하고 짓밟히고 자기 권리도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남들만큼 가지지 못했다고 절망하지 말고, 권력에 목매지도 말고, 영원하신 주권자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삼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
요 18:33-38 / 이한규 목사
< 십자가의 희생은 헛되지 않다 >
A 교주가 있다. 그는 영혼의 때를 위해 이 땅의 것을 다 버리라고 교인들을 몰아댄다. 가난한 교인까지 탈탈 털어 바치게 하니까 교인은 점점 헐벗어지고 교회는 점점 화려해진다. 그런 교회는 앞날의 수순이 거의 예견된다. 그 교회는 A 교주 일가와 몇몇 핵심 그룹이 교회 재산권을 대부분 장악했거나 장악할 것이다. 영혼의 때를 위해 탈탈 털어 바치라면서 이 땅의 때를 위해 외형을 키우는 모순적인 교회이기에 대개 그 수순을 밟는다.
건축헌금을 여러 번 작정시키는 교주는 때가 되어도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어떻게 얻는 자리와 물질인데 쉽게 내놓겠는가? 안 내놓는다. 헌신을 강요하는 사람은 헌신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무섭게 추락한다. 거짓된 모습에 양심의 고통을 느끼던 누군가의 내부 고발로 영혼의 때를 위해 바치게 한 교주가 이 땅의 때를 위해 치밀하게 다 차지할 준비를 했음을 교인들이 알면서 상황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B 목사는 교회 이전이나 교회 공사를 할 때도 헌금 얘기를 안 한다. 대신 자신은 집을 월세로 가고 유산을 다 털어놓고 예금과 보험도 깨고 조용히 헌신하면서도 “저를 따라 성도님들도 희생하십시오.”라고 한 마디도 안 한다. 자발적인 헌신의 감동이 없으면 헌금을 안 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을 의지하거나 신세지는 느낌을 주기 않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자발적인 희생 제물만 받아서 심은 대로 갚으신다.
B 목사는 건축헌금 작정도 안 시킨다. 작정헌금 서원은 무서운 족쇄가 될 수 있다. 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기본이다. 하나님 앞에 한 약속은 더 지켜야 한다. 특히 하나님 앞에 한 헌금 약속은 구체적인 것이기에 강요된 헌금은 엄청난 족쇄다. 구약 성경을 보면 서원했다가 안 지키는 것은 물론 더디게 지켜도 죄라고 했다(신 23:21-23). 서원 안 하면 죄가 안 되는데 보통 교인은 건축헌금 서원을 시킬 때 외면하기가 쉽지 않기에 결국 서원시키면 상당한 재정을 확보하기 쉽다. 그래도 건축헌금 서원의 족쇄를 채우면 안 된다.
영혼의 때를 위하라면서 끊임없이 헌금 족쇄를 채우는 교회는 교인으로 있기가 너무 힘들다. 그언 식으로 교회가 커지면 그 교회 핵심 자리와 재산권은 교주 일가와 이너써클이 차지한다. 헌신적인 사람이 핵심 자리를 얻고 이너써클에 있는 것은 당연해도 계산적인 사람이 헌신을 강요해서 헌신의 결과물을 독차지하는 것은 불의다.
나중에 혹시 교회를 옮기게 될 때 자발적으로 헌신했으면 한이 맺히지 않지만 강요된 서원으로 집과 재산을 바친 사람은 한이 맺힌다.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라면 더 헌신해도 한이 안 되지만 잘못된 곳에 헌금했다는 생각은 한을 남긴다. 물론 하나님 앞에 헌금했지만 그때는 마치 영혼이 털린 기분이 든다. 목회자는 성도가 교회를 떠날 때 그런 한이 없이 은혜롭게 잘 떠나 새로운 교회에서 잘 헌신하도록 헌금을 강요하거나 구걸하면 안 된다.
사람 신세를 지면 사람에 얽매인다. 의를 세운다고 신세진 사람을 외면하면 배신이 된다. ‘의를 세우는 것’과 ‘배신하지 않는 것’은 둘 다 버릴 수 없는 가치다. 그런 난처한 상황에 아예 처하지 않도록 사람 신세를 최대한 지지 말라. 도움 받을 생각도 버리고 도움 받지 못했다고 섭섭해 하지도 말라. 도울 생각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돕는 사람을 신기하게 붙여주신다. 신세지지 않고 살려고 하면 이 땅에서도 기억되지만 천국에서의 영광과 보상은 더욱 찬란해진다. 십자가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다.
< 진리에 속한 사람 >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때 예수님이 의연하게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내 종들이 싸워서 나로 넘겨지지 않게 했을 것이다(36절).” 다시 빌라도가 물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왕이지만 세상 왕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 증거하러 세상에 온 왕이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37절).”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했다. 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인가?
1. 성령충만한 사람
어떤 사람은 집회 때 잘 넘어지는 것을 성령충만으로 오해한다. 집회 강사가 강단에서 소리치며 성도를 밀 때 넘어지지 않으면 자아가 살아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넘어진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다양하기에 그렇게도 성령을 받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넘어지게 하는 성령을 받았다고 영성을 마음껏 드러낸 후에도 마음과 생활이 이전과 똑같은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남들은 넘어지는 형태로 성령 받은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다. “저분은 넘어지게 하는 성령을 받았어. 뭔가 달라질 거야.” 그런데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이 여전히 이기적인 상태에서 걱정도 많고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이 넘치는 상태에서 십자가를 회피하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은 혼자 성령을 다 받은 것처럼 했으면서 왜 저래?” 그런 상황은 성령 받았다고 자랑할 상황이 아니라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상황이다.
어떤 능력 추구 세미나에서는 넘어뜨리는 법을 배운 후 서로 안수하면서 넘어뜨리는 임상실험을 한다. 하나님이 기가 막히실 것이다. 성령님은 신실한 믿음을 따라 역사를 나타내는 분이지 실험 도구가 아니다. 참된 성령충만은 삶의 열매를 보면 대개 안다. 성령충만은 생명충만과 사실상 같은 것이다. 성령충만의 기적은 돌이 떡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돌 같은 딱딱한 심령이 떡 같은 부드러운 심령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과시하지 않고 감추려고 해도 저절로 드러나서 딱딱한 세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 진리에 속한 사람이다.
2. 십자가를 지는 사람
십자가란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려주는 것이다. 진리의 핵심 요체는 ‘죽임’이 아닌 ‘살림’이다. 역사상 가장 살림을 잘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옛날에는 “여자는 살림을 잘해야 해.”라고 했지만 요즘은 남자도 살림을 잘해야 한다. 대통령은 나라 살림을 잘하고 기업가는 회사 살림을 잘하고 목회자는 교회 살림을 잘해야 한다. 살림을 잘하려면 남에게 십자가를 지라고만 하지 말고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에서 증인이란 헬라어로 ‘순교자’란 뜻이다. 성령이 임하면 순교자가 된다는 말씀이다. 성령충만이란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변화와 역사도 나타나고 문제 해결의 역사도 시작된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점차 자기가 없어진다. 복된 삶을 원하면 내게서 십자가의 삶이 나타나게 하라.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은 물론 직장생활에도 십자가를 앞세우고 사업할 때도 십자가를 앞세우라. 사업이 망해도 십자가의 정신만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망한 것이 아니라 잠시 힘든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내 안에 십자가만 있다면 어디서든지 최고 살림꾼이 될 수 있고 어떤 상황도 내 안의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3.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
아무리 타당한 논리를 내세워도 싸움을 조장하거나 일으키는 사람은 진리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내 주변의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는 사람에게 따뜻함을 전해주는 평화의 사자가 되라. 이 세상에 본질적인 악마는 없다. 사탄에게 농락당해 혼이 나간 사람이나 외로움에 지친 사람만 있다. 그에게 의를 바탕으로 내가 따뜻한 선물이 되어주라. 외로운 세상이기에 나 외에도 선물로 줄 것이 의외로 많다.
식사 대접, 따뜻한 미소, 조용한 친절,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힘들 때 내는 찬송과 휘파람 소리, 대신 설거지 해주고 쓰레기 버려주는 것, 허물은 감춰주고 장점은 칭찬해주는 것, 충고 대신 함께 있어주는 것, 썰렁한 유머에도 잘 웃어주는 것, 자신감 잃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친절히 설명해주면서 “답답해!”라고 말하지 않는 것, 예고 없는 깜짝 외출과 여행 등 줄 선물이 많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
어둔 세상에 따뜻한 선물로 살면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진리에 속한 사람이다. 아무리 변명해도 평화를 깨는 모습에는 진리가 없다. 평화를 깨는 것은 내 영혼의 손목을 칼로 긋는 것과 같다. 평화를 깨면 내 영혼과 마음과 양심이 흔들리면서 두려움과 불안도 커진다. 그때는 사랑이란 말과 미소도 어색해진다. 설교도 어색하게 들린다. 평화를 깨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영혼을 울리면 그 울음소리가 칼이 되어 내 영혼의 동맥을 끊고 나도 더 소외된다. 반면에 힘써 평화를 추구하면 친구도 얻고 행복도 얻고 사랑도 얻는다.
< 더불어 살기를 힘쓰라 >
한 연못에 황금색 비늘을 가진 ‘장금이’란 예쁜 물고기가 살았다. 다른 물고기들은 장금이를 선망했지만 너무 자세가 도도해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장금이는 자기 황금색 비늘이 다칠까봐 다른 물고기가 다니지 않는 길로 다녔고 연못 축제 때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늘 혼자였고 아무도 그녀의 외로움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느 날 다른 연못에서 ‘혜은이’란 물고기가 이사 와서 장금이에게 반해 말을 걸어왔다. 외로웠던 장금이는 그녀를 반갑게 맞았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우정이 깊어갈 때 어느 날 혜은이가 장금이에게 부탁했다. “장금아! 네 예쁜 황금색 비늘을 하나만 내게 줄래. 나도 갖고 싶어.” 장금이는 선뜻 자기 황금색 비늘 하나를 빼서 혜은이의 가슴에 꽂아주었고 둘은 흐뭇한 미소로 서로를 바라보며 기뻐했다.
다음 날 혜은이의 가슴에 꽂힌 황금색 비늘을 본 다른 물고기도 다 장금이를 찾아와 비늘 하나만 달라고 졸랐다. 자기 것을 나눌 때 사랑과 행복을 얻는 것을 체험한 장금이는 그들에게도 비늘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결국 자기 몸을 덮은 금장식이 다 사라져서 보통 물고기처럼 되었지만 친구가 많이 생겨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얼마 후 그 연못을 지나던 사람이 연못 전체가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연못 속 물고기들이 하나씩 지닌 황금색 비늘이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살려고 하지 말고 더불어 살기를 힘쓰라. 최대한 이웃과 평화를 누리며 살라. 힘써 어려운 자를 돕고 복음 선교에 힘쓰는 사역자를 위해서도 나의 소중한 비늘을 하나씩 뽑아주라. 가끔 선교사가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런 편지를 보내기가 쉽지 않다. 선교사가 기도제목을 내놓을 때는 대개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도제목을 읽을 때는 행간에 숨은 뜻을 잘 살펴서 읽고 기도하라.
요새 한국 경제도 어렵고 특히 한국 교회가 어려워지면서 선교 후원도 많이 줄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힘든 선교지에서 어렵게 사역하고 있다.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사역도 어렵다. 문서선교, 교정기관 선교, 군 선교의 뜻을 품고 <월새기> 사역에 바나바나 루디아 역할을 해줄 교회와 성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때에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를 위한 거룩한 일에 나의 소중한 비늘 하나를 뽑아주는 사람이 은혜를 알고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다.
인간의 진보와 하나님 나라
김영준 목사
오늘 드리는 말씀은 저의 일련의 신학적인 고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을 주가의 등락 때문에 고민하고 또 어떤 분들은 자녀의 성적 때문에 고민하지만 저는 신학적인 문제를 놓고 고민합니다. 천상 저는 목사가 될 팔자인 모양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목사님, 저도 고민이 많은데 목사님의 고민까지 들어야 됩니까? 저에게 고민을 말씀하시지 말고 해답을 주세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려고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를 고민하게 만든 것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무신론자들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스웨덴 같은 나라는 인구의 70% 이상이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저는 높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을 사실로 믿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핀란드입니다. 핀란드는 인구의 90% 이상이 진화론을 믿습니다. 그것은 인구의 60%가 믿는 미국과 비교가 되고 인구의 30%가 믿는 터키와 비교가 됩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아마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스칸디나비아를 찾아가서 물어보는 것일 것입니다. 왜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 그러나 차비도 없고 뭐 그런 걸 물으려고 거기까지 찾아가겠습니까. 그래서 멀리서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놀랍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스칸디나비아에 무신론자가 많다는 사실이 별로 놀랍지가 않아요. 충분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만한 조건을 갖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진보를 이룬 나라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일단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사회복지제도가 제일 잘 발달했고 사회 자체가 평화스럽고 인권이 가장 발달했고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습니다. 아주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준법정신이 강합니다. 범죄율이 낮습니다. 그리고 남에 대해서 별로 간섭을 하지 않아요. 미국이나 러시아 ․ 중국 ․ 일본 같은 나라는 야심이 많고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간섭하기를 좋아하지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일절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자기 일만 합니다. 그 말은 스스로 만족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충분히 진보를 이루게 되면 종교가 필요 없는 날이 오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부모를 의지하지만 어른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처럼 인류가 아직 미개한 상태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다가 충분히 자라나면 신앙으로부터 졸업을 하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인가? 마치 왕자가 어릴 때에는 가정교사로부터 배우지만 임금이 되면 더 이상 스승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인류도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룬 다음에는 종교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발전한 나라가 어디 스칸디나비아뿐입니까. 우리나라도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나 의식수준이나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은 우리가 더 많이 땁니다. 그들의 콧대를 꺾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보다 더 잘 살고 발전했지만 신앙이 부흥하는 나라가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미국 ․ 캐나다 ․ 호주 ․ 싱가포르 이런 나라들, 우리나라보다 더 많이 발전했지만 그럼에도 신앙이 부흥하고 있고 그리고 기독교는 아니지만 일본 같은 나라도 종교가 많고 대만, 대만의 경제적인 발전이 그들을 세속적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바이의 신화, 그것을 누가 흉내 낼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발전과 진보가 그들을 종교 없는 사회로 만들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봤을 때 국가의 발전이나 인간의 진보가 종교를 반드시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는 종교이고 발전은 발전입니다. 종교는 외적인 발전으로 채워줄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전깃불을 환하게 밝힌다고 해서 사람 마음속의 두려움까지 쫓아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또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산다고 해서 가족들이 더 화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준법정신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까지 이루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스칸디나비아 국가에는 무신론자들이 많으냐? 어떻게 보면 그들의 문제라고 그냥 내버려둘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뭔가 현대사회의 하나의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남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고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는 위험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왜 스칸디나비아에 무신론자들이 많으냐? 단순히 설명하면 첫 번째 이유는 교회가 부흥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국민들의 믿음을 지켜주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신본주의 국가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국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이 나라의 법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수시로 선지자들이 나오고 주의 종들이 나와서 백성들을 권면하고 독려하고 꾸짖고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우상과 죄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수시로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주시고 그들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늘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나라가 지금 교회가 많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가 기도의 열심이 식어버리고 말씀 전하는 자들이 잠잠해 지고 전도의 열정이 식어버리면 한 세대 안에 우리나라도 영적으로 쇠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냉담해지는 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한 세대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부지런히 서로 권면하고 기도하고 기도에 힘쓰고 모이기에 힘쓰고 말씀을 전하고 말씀의 검을 휘두르지 아니하면 어느 나라든, 어느 사회든 불신자들과 의심하는 자들과 이단과 세속주의와 탐욕과 음란과 거짓이 뿌리를 내리고 잡초처럼 자랄 수 있는 위험은 어디든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때문에 교회의 부흥이라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나라는 신앙이 부흥합니다. 교회가 쇠한 나라치고 기독교 신앙이 부흥하는 나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교회가 진보적인 신학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진보신학이 무엇이냐? 몇 가지 기준을 놓고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성경관입니다. 성경을 보는 관점, 성경말씀을 정말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흠이 없고 실수가 없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관입니다. 여기에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대해 확신이 없는 나라가 많아요. 성경에 확신이 없다면 무슨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전할 메시지가 없으면 무슨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사람들이 어디에서 믿음을 얻겠습니까. 들을 것이 없으니까 믿음이 생기지 못하고 믿음이 생기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에 ‘어리석은 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지라’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하지 않고 똑똑하다고 하지 않고 미련하다- the pool say in his heart "There is no God." 하나님이 없다고 마음에 생각하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것은 많습니다. 공기 ․ 산소 ․ 전기 ․ 전자파 ․ 사랑 ․ 행복 ․ 평강 ․ 지혜 이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 만드는 법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기를 사용해서 불을 키고 발전기를 돌리고 자동차를 만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고, 이런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기초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가 우리 눈에 보이고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에요. 국가의 지적인 수준이 높아진다고 해서 신앙이 반비례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파스칼 같은 사람은 당시 최고의 수학자였지만 또한 최고의 신앙이었습니다. 아이작 뉴튼 ․ 갈릴레오 다 최고의 학자이지만 그들은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인간의 지식이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할렐루야!
또한 진보신학의 기준이 되는 것은 구원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느냐?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만일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뭣 하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만일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뭣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십니까. 예수님 안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뭣 하러 예수님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뭣 하러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사람들이 뭣 하러 교회에 오겠습니까. 당연한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기준은 종말론입니다. 인간의 진보와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살기 좋아지고 범죄율이 낮아지고 또 병을 정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또 민주주의 사회가 되고 사람들이 살만한 그런 사회를 이루면 그 자체가 천국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 이것이 진보적인 생각이요 진보적인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천국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이 같은 생각을 극단적으로 한 사람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유물론자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천국을 믿지 않고 이 땅에 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칠십년을 실험을 통하여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인간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인간이 바뀌지 않더라, 환경을 바꿔도 인간이 바뀌지 않더라.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더라, 그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데 경제가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한다고 해서 이 세상이 낙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탐욕스럽고 거짓스럽고 인간은 여전히 구원받아야 될 존재에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오늘 본문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서 하나님에게 그것을 바치기 때문에.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정치를 하든가 독립운동을 하든가 무장봉기를 하든가 로마인과 맞서 싸우든가 임금이 되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에 의료상태를 개선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지만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셨지만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가 발전하고 경제가 발전하고 정치가 발전한다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인간은 죄인이고 거듭나야 되고 구원받아야 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게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라가 발전할 필요가 없고 발전을 위해 일할 필요도 없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노라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셔서 경제도 발전할 수 있고 더 잘살 수 있는 나라가 되고 그 모든 것은 덤으로 주시는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고 어떻게 임하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 이것은 또 다른 주제입니다마는 여기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 두 가지만 인용하면 첫째는 ‘이 천국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또 다른 말씀,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는 것이고 어둠의 권세를 내쫓음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육 수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의료혜택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귀신이 쫓겨 가고 어둠이 물러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백성으로 삼으시면 우리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아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