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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0423 / 요 21:1-7 /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심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5.01|조회수880 목록 댓글 0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심

요 21:1-7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 21:1-7 /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그후 예수께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2) 그때 그곳에는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 곧 시몬 베드로, 쌍둥이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제자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가겠소' 하고 나서자 `좋습니다. 같이 갑시다' 하고 모두들 따라 나섰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4) 새벽녘에 그들은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5) `이 사람들아, 무얼 좀 잡았나?' 하고 그가 소리쳤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6) 그가 말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게. 그러면 많이 잡힐 테니.' 그래서 그들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조차 없었다. 7) 그 순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물속에 뛰어들어 바닷가 언덕까지 헤엄쳐 갔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에 있는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계속해서 제자들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제자들(1-3) 그 후에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를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두 번 등 몇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에 있었던 것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제자들은 과거 예수를 만나기 전처럼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삶의 터전이었고, 생존의 현장이었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갔겠노라”라는 베드로의 말은 예전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 제자들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전에 어부였기 때문에 익숙한 옷을 입듯이 습관적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4-6) 어둑하여 사물을 분간하기 힘든 이른 새벽,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물고기에만 집착하고 있었던지, 민망스럽게도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으나 제자들은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이 물고기 잡는 일에 집중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 우리의 시선과 중심을 빼앗길 때 우리는 주님을 볼 수도 없고 음성을 들을 수도 없게 됩니다. 부활하시고 찾아오신 주님께 몰입할 때에 우리의 삶은 부활의 기쁨과 풍성한 생명, 그리로 회복이 있게 됩니다.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7) 어두움과 빛이 섞여 알아볼 수 없었던 그때, 어디선가 베드로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한 마디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주님이시라”, “주님이 여기 계신다” 베드로는 영혼을 깨우는 이 소리를 듣고 급하게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예수를 향해 수영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가 자랑하는 최대의 진리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좋은 소식이 아니라 진리의 좋은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재림 때 성도의 부활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은 부활의 주님을 외쳐야 하고, 부활의 주님께 능동적으로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물고기를 잡는 일에 집중 되어 주님을 몰라봤던 아둔한 모습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로 주님의 다가오심, 주님의 은혜를 놓치며 살고 있지는 않나요?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시고 생존하게 해주는 사랑을 통해서 상세하고도 깊게 인식하고 이해하며, 상호의존적인 창조 공동체의 구성원인 것을 알게 된다. 이 사랑은 인간의 잠재력뿐만 아니라 한계도, 선을 행할 능력뿐만 아니라 악을 저지를 가능성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공동체를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집요한 이기심도 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그것을 빌미로 인간을 제한하거나 조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에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 자신을 인식하고 용납하게 해서 마침내 마음껏 더 큰 사랑을 살아내게 한다. – 파커 J. 파머《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 설 교 >

실패와 성공

피종진 목사

이 세상에 실패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듯이, 성공한 삶을 원치 않는 사람 또한 없을 것입니다. 실패란 헬라어(헤테마)에 보면 ‘어떤 기준에서 미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고자 디베랴 바다에 나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한마디로 실패자가 성공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실패한 원인이 무엇이고, 실패자가 성공자가 된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제자들이 실패한 원인

①절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힘 있게 말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당하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막 14:31, 68~72).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절망과 좌절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인생은 약할 때도 있고, 강할 때도 있습니다. 가난할 때도 있고, 부유할 때도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도 있고, 건강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습니다. 약하고, 가난하고, 질병으로 고통을 당한다고, 실패했다고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절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 중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와 위로해주셨습니다(요 20:19).

②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3)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사명을 붙잡은 손으로, 버렸던 그물을 다시 잡은 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린 행위입니다.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렸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갔을 때 홍해와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③예수님이 곁에 와 계셨는데도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요 21:4)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관심이 온통 고기 잡는 일에 쏠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수고했어도 얻은 게 없었으므로 그들은 다른 데 눈길을 둘 여유가 도무지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주께서 찾아오실 때에 자신의 일에 너무 바쁜 나머지 그분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분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인 사람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며 자신의 일에만 바쁜 법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알고 주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롬 14:8).

 

2. 실패자가 성공자가 된 비결

①예수님께서 함께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요 21:5)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명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고(요 21:15~17), 그 일을 위해서는 그들이 항상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예수와 함께 하지 않을 때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제자들이 그분의 명령을 따라 그물을 던질 때에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을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했고,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공자가 되려면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②실패한 원인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셨는데도, 고기 잡는 일에만 분주한 나머지 예수님이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시편 49편 20절을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 1:5). 시편 기자는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라고 기도했습니다. 실패한 원인을 깨달을 때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③주의 말씀을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 21:6)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제자들이 ‘153마리’라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시자 존 뉴톤(J. Newton) 목사님은 예수를 믿기 전까지는 도저히 구제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형편없이 타락한 젊은이였습니다. 흑인들을 잡아다가 파는 노예 매매업자로 악명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 그는 회개하고 변화되어 사랑과 눈물의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가정환경이 좋지 않다고 인생을 실패하는 것이 아니며,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 다 원하는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나를 주관하던 삶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를 굴복시키는 삶으로 바뀌기만 하면, 그의 삶에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권모술수와 같은 세상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패했던 원인을 깨달아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리지 말고,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며,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되어 신앙의 성공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면 얻으리라

요 21:1-14 / 이필재 목사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신 것이 성경의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타나신 장소는 디베랴 바다라고 했는데 이 디베랴는 갈릴리바다 서쪽 바로 곁에 붙어있는 조그만 타운입니다. 그 디베랴 타운에 연결되어 있는 갈릴리 해변가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1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그러니까 지난번에 나타나고 또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가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고 확실하게 기록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가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와서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하고 손과 발의 못자국을 감각적으로 확인한 다음에 믿겠다.” 그리고 헤어졌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여드레를 지나 제자들과 도마가 함께 있을 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어 내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 그렇게 감각적 확인을 시켜주시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고 나서 오늘 말씀에 또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다소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그런 분위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11명의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했다면 그들이 이렇게 했어야 했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과거에 제자들의 모든 행동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갑니다. 예를 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좀 같이 하자고 했는데 제자들이 너무 몸이 피곤해서 졸다가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사실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거룩한 일도 하기가 힘들다고 이해가 됩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그 당시 그 분위기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자리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렇게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을 것이다.’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날 자리다툼을 해가면서 저마다 높은 자리를 꿈꿨던 것도 인간의 당연한 욕구가 아니겠는가? ‘나도 아마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도저히 상식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확실하게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지금 세 번씩이나 자신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못 박힌 손을 만져서 확인하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시각적으로 확인해 주셨으며 서로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만져보라. 감각적으로 확인해라. 영은 살과 뼈가 없다. 그러나 나는 있느니라.”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하신 몸을 만졌습니다. 가끔 우리가 너무 좋은 일이 생길 때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서 살을 꼬집어서 확인하는 감각 작업을 합니다. 그렇게 다 해봤습니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영은 세상의 음식을 먹지 않지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더 이상은 부활을 확인시켜줄 것이 없습니다. 완벽하게 해주셨습니다. 그쯤 되었다면 제자들의 반응은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기뻐서 펄펄 뛰며 잠도 자지 않고 그 예수님을 놓칠세라 따라다녀야 되고 예수께서 자기를 부르신 본래 목적을 위해서 힘 있게 순교자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3일 만에 살아나신다고 하시더니 과연 이렇게 살아나셨구나! 이는 정말 인류의 구세주요 예언의 성취로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메시야로다.” 유대인의 메시야관이 확실해지고 더군다나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이 초자연 사건 앞에 제자들이 흥분해야 합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서 확인하고 천사의 증언을 듣고 현실적으로 만나서 시각적으로, 언어적으로 감각적으로 만져본 사람들이 일은 전혀 다르게 벌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에는 일곱 명의 제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 세베대의 두 아들이라고 나왔는데 이들은 야고보와 요한을 말합니다. 또 다른 제자 두 사람 이렇게 일곱 명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모여서 이 사건을 확인하고 무엇을 했는가? 그런데 이 장면을 가만히 살피면 우리 인간 관계성의 묘한 율법이 하나 들어있음이 확인이 됩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서 늘 친하게 만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늘 만나서 관계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피차를 연결하는 마음의 율법이 생겨지게 마련입니다. 그 만남에서 무슨 회식을 만난 것도 아닙니다. 어떤 약속을 하며 지키자고 그런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늘 만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나도 그 만남에 묶여있어서 함부로 그 만남을 탈피하지 못하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이 됩니다. 학교도 아닌데 어디 가기 때문에 못 보게 되면 내가 며칠 동안 없다고 보고해야 되고, 또 갔다 와서는 갔다 왔다고 말해야 되고, 만약 그렇게 안하면 “아니, 그렇게 가면서 말도 안했느냐?” 이렇게 율법이 생겨버립니다. 어디 여행 떠나려면 괜히 미안하고 또 이 그룹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 하면 이 그룹이 싫어할까봐 신경이 써지고 심하게 되면 내 마음에 자유함이 없어지고 그 만남이라는 공동체의 가는 길에 노예가 되어 버리는 그런 분위기가 우리 인간관계에서 생겨납니다. 또, 그 만남에는 그 만남을 이끌어가는 리더가 은연중에 정해집니다. 투표를 해서 뽑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임명장을 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리더가 생깁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분위기를 거역하기 힘들고 또 다른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힘들고 그런 관계가 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 사이에는 3년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까 그런 분위기로 아주 묶여있습니다. 이 모임의 리더는 베드로로 아주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 마음을 판단하고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방향 제시를 그들이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벌써 세 번째 나타나시고 많은 토론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리더답게 먼저 말을 꺼내서 방향 제시를 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결정했습니다. 고기 잡으러 떠나자는 결정을 리더가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여섯 명의 제자들이 그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지금 갈릴리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가는 시간은 밤입니다. 밤고기 잡으러 떠났습니다.

이 대목을 해석하는 주석가들은 베드로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사실 가기 싫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본래 직업이 어부입니다. 어부가 아닌 사람들도 거기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남이 고기 잡는 게 재미있을 리 없잖아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나도 어떨 때 보면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호숫가에 가서 그렇게 추운데도 뒤집어쓰고 그게 뭐가 재미있다고 밤새도록 앉아 있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그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게 없다는 겁니다. 어떤 때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재미있는 게 어디 있느냐? 같이 가자!” 말하지만 자기 아내는 절대로 안갑니다. “당신은 그게 재미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옆에서 가서 앉아있는 게 뭐가 재미있느냐?” 이런 분위기가 형성이 됩니다. 가기는 싫었지만 리더가 가니까 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이 그룹에서 내가 왕따를 당할지도 모른다.’ 이런 인간적 계산을 한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게 형성된 마음의 율법이 자기 마음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끌려가는 그런 인간관계가 세상에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만나는 사람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공연히 남의 소리 잘못 듣고 이단에 빠져서 고생하는 그런 교인도 많이 생기고 좋은 모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만나다 보면 시험이 생겨서 평화가 흔들리고 공연히 불후한 감정이 생기고 내키지 않는 일에 동조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마귀의 어떤 유혹에까지 빠지게 되는 그런 그룹의 만남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신앙생활에 손해가 날 듯 한 그룹은 끊어버립니다. 끊어버린다고 내 생애에 손해가 납니까? 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이 마을에서 다 다녔지만 이렇게 와서 5년 정도 있으니까 고향 친구들이 더러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러면 반갑다고 하면서 “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정말 왔구나!” 동기생들이니 얼마나 반갑습니까? “그러면 우리 동기생들 모이자!” “그러자! 그런데 모여서 뭐하냐?” 그랬더니 옛날 시골에 있을 때 분위기가 그대로 있는 겁니다. 한명은 “목사는 월급이 얼마야? 고스톱 치러 와! 누구네 집에서 모이니까 그곳으로 와! 거기가 항상 모이는 장소야.” 그럽니다. 그리고 사우나탕에 가서 사우나도 한다고 합니다. 나는 그 친구들과 어울려봤자 내 목표하는데 도움이 하나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일체 안갑니다. “그러면 너희들끼리 가라.” 나는 그런 분위기의 생활은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줄 알고 친구가 이런 일 하는 것만 피차 고맙게 생각하면서 절대로 안갑니다. 괜히 자꾸 만나서 어울리다 보면 내 신앙생활에 자유함이 없고 괜히 괴로움 당하고 시험당할 일만 생기고 친구들 마음 상하게 할 수가 있고 내가 상하기도 하기 때문에 일체 만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꼬마 대장같이 졸병들을 거느리고 밤고기 잡으러 리더 역할을 하면서 데리고 왔습니다. 갈 마음이 없는 친구들이 의리 때문에 함께 따라와 주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느냐?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의롭지 못한 결정과 그 협조에 실패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밤이 샐 때까지 그 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만은 자신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조상 때부터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어느 계절에 어디에 어떻게 그물을 던져야 무슨 고기가 어느 정도 잡힌다는 계산까지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눈 감고도 고기 잡는 일은 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베드로의 실력은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밤에 다른 친구들에게 면목이 없어졌고 리더의 체면이 그만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계획한 대로 그 밤에 고기나 많이 잡혔다면 다른 친구들도 덜 심심하고 “과연 베드로는 솜씨 있는 어부로다!” 그래도 쑥스러움은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그물이 영어 성경에 보면 “캐스팅 네트(casting net)”라고 집어던지는 투망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얼마나 많은 횟수의 그물을 던졌겠는가? 그때마다 빈 그물을 끌어올리며 무안해하는 베드로의 얼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고기나 잡히면 그 재미에 피곤을 잊었겠는데 밤새도록 헛손질을 하고 나니까 마음과 몸이 지칠 데로 지쳤습니다. 만선의 노래로 아침 해를 맞을 줄 알았는데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빈 배로 이 디베랴 타운을 향해서 힘없이 뱃머리를 돌렸을 때 그만 날이 샜습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이 거기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육지에서 배는 오십 간쯤 떨어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약 100미터입니다. 그러니까 소리가 들릴 것 아닙니까?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그러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일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물에 잡힌 고기가 153마리라고 밝혔습니다. 여기 보니까 큰 고기라고, 상품 가치가 있는 고기라고 밝혔습니다. 아마 베드로 평생 어부 생활 가운데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갈릴리 바다 역사에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 예수님은 그 바다에 들어가셔서 고기를 잡은 일이 한 번도 없으신 분입니다. 어부의 실력을 따진다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한 마리도 못 잡았느냐? 예수님이 “그리하면 얻으리라.” 여기에 우리 하나님의 백성의 살아갈 방향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제 목회 경험으로 봐서 교인들 가운데 바보 같은 사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똑똑하고 일가견 있는 말을 하는지 교인들을 시시하게 봤다가는 목사는 큰 망신당합니다. 얼마나 오랜 신앙생활에 지식들도 많아지고 다들 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바보 같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요즘에 국회의원 출마한 사람들 보세요. 얼마나 말을 잘하고 얼마나 훌륭한지 나는 거기 나온 사람 다 찍어주고 싶습니다. 얼마나 똑똑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생각대로 안 되잖아요? 의롭지 못한 계획에는 협조자가 있을지라도 안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면 “그리하면 얻으리라.” 아마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일가견 있는 자기 논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야? 아니, 당신이 뭘 안다고 나를 가르치려 하오? 나는 이 바다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요. 내가 이렇게 밤고기를 잡으러 온 것은 지금 계절에는 밤이라야 고기가 잡히는 시기이고 이 디베랴 근처에 배를 띄운 것은 이 바다의 물의 흐름이 지금은 고기가 디베랴 쪽으로 몰려올 시기가 되었단 말이오. 배 오른편에 던지라니 밤새도록 내가 그쪽으로 수백 번 던졌는데…. 아마도 잡히지 않은 것은 이상 기온으로 너무 추워서 고기들이 깊숙이 숨은 것 같소. 당신 누구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이 잡힌 고기를 보면서도 베드로는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왜? 고기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먼저 알아봅니까?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이것은 요한을 말합니다. 요한은 지금 고기잡이에 관심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가자는 바람에 제일 나이 어린 제자로서 리더의 말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별안간 상황이 바뀌니까 예수님을 금방 제일 먼저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합니까? 리더에게 보고를 합니다.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예수님은 생전에 누구에게 식사 대접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해변에 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 식탁을 마련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해변가에 마련하신 그 식탁에 둘러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했습니다. 그 잠깐 동안에 되어진 그 일 속에 교훈이 무엇이며 지금 나타나신 이 분이 누구인가 확실히 알기 때문에 민망스러워서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3년 전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너희로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니 나를 따르라.” 그래서 따랐고 지나간 3년 동안 예수님이 영적 훈련을 시켰으며 예수님이 예언하신 내용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다 잊어버리고 옛날 그 자리로 다 돌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처음 만나 자리에서 마지막 만남을 마련하십니다. “다시 너희가 밤고기 잡는 어부가 된다면 지나간 3년 동안에 나와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사실 제자들은 이때부터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몸 바치기로 방향 제시가 되었습니다. “내 말대로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러면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이렇게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시는 것인가? 빌라도 앞에 나타나서 “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내가 이렇게 살아났다.”고 큰 소리 좀 치시고 대제사장이나 예루살렘 광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조롱하던 그 많은 무리 앞에 나타나셔서 위엄 있게 설교 하시며 “보라! 내가 살아난다고 말하지 아니했느냐? 너희가 죽인 내가 이렇게 살아났다.” 고 한번 큰 소리를 발하시며 광장 집회를 하실 것이지 왜 숨어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인가? 그런 집회는 이미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무리가 성경에 남자만해도 5천명으로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날마다 따라다니면서 안 해주신 게 뭐가 있습니까? 초능력의 영적 힘을 발휘해서 모두 병 고쳐주셨잖아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다 먹었잖아요? 그 이상의 무엇을 보기 위해서? 이런 군중집회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절대로 도움이 안 됩니다. 그것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떠돌아다니는 군중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소수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몸과 마음을 정말 바칠 수 있는 정예부대, 영적인 정예부대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만남의 리더 역할을 잘못한 베드로는 어부 실력까지 무시당한 채 쑥스러워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인 채 조반을 먹었습니다. 오늘 말씀 15절 이하를 계속 읽어 내려가면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집중적으로 베드로를 상대해서 1대 1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아시나이다.” 반복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십니다. “네가 왜 다른 사람들까지 이쪽으로 끌고 왔느냐?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곳으로 네가 인도했어야지? 이 일은 네가 잘못했느니라.” 이제 해가 떠오르는 디베랴 해변가 잘못 가는 역사를 바로잡는 예수 그리스도! 그들은 그 자리에서부터 몸을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며 신앙생활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주일 예배를 드리잖아요? 창세기 1장에 보세요. “안식일은 하나님이 복 주시는 날이다. 지키라.” 그렇다면 그런 줄 믿으십시오. 북한 공산당은 노동력의 극대화 추진 작업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주일날 일하지 않고 예배당에 와서 노래 부르며 놀면 누가 일해서 경제 발전 시킬 거야? 어휴! 천문학적인 숫자! 안 돼! 교회 문 닫아버려!” 그래서 주일날 일을 더 많이 시켰지요? 주일 예배 드리지 않고 없애버리는 것이 먹는 문제 해결이라고 노동의 극대화를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는 오늘 5만개의 교회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드리고 노래 부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일 안하고 노래 부르고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면 그 노동력의 손해가 어떻게 됩니까?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대한민국의 세계 경제 10위권 진입, GNP 2만 불 시대! 북한은 꼴찌에서 10번째, GNP 960불입니다. 어떻게 된 나라가 날마다 굶어죽는 사람만 계속됩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너희 계산으로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 성경에 십일조는 물질 축복이라고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아십시오. “그 이상 네 머리로 계산하지 말라.” 지금 저희 교회가 선교를 많이 합니다. 조금은 힘에 겨울 만큼 선교 프로젝트를 늘여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관심이 뭡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러면 역사는 어떻게 말해주는가? 세계 모든 국가들이 가장 많은 선교금을 외국으로 보냈을 때 그 나라가 가장 부강했습니다. 여러분, 나와 따져보세요. 그러지 않았습니까? “너희 실력대로 하지 말고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밤새도록 해봤습니다.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잔소리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오늘 이 말씀이 뜻하는 영적인 교훈을 저희들이 잘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것이 뭔가를 알아서 훌륭한 신앙생활을 함으로 오늘 말씀대로 “그리하면 얻으리라.” 이 말씀이 각 개인에게 성취되는 힘 있는 영적 말씀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치유와 회복

요 21:1-25 / 노경모 목사

전쟁에 나간 군인이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면 즉시 병원으로 보내집니다. 빨리 치료를 받아야 회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상을 당한 몸으로 계속 싸운다면 그 사람은 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병들었을 때는 빨리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병든 상태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치료받지 않으면 병이 악화되어 죽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병들었다는 것을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검진을 하는 것입니다. 건강검진을 통해서 내가 어느 부분이 약하고 어느 부분이 병들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병이 들었든지, 마음의 병이든, 정신적인 병이든, 영적인 병이 들었든지 간에 긴급한 치료가 필요합니다. 치료를 통해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치료와 회복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입니다. 그는 성격은 급했지만 늘 정의롭고 용기가 있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컸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곳에 갈 때는 베드로를 데리고 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을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자신도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놀라운 일들을 행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엄청난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자기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고, 자기는 누구 보다도 예수님을 끝까지 좇아갈 것이라고 장담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자그마한 여자 아이에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았는가? 나 같은 놈이 무슨 제자란 말인가?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되, 아무 쓸모없는 놈이야. 베드로는 연약한 자기 자신을 통해서 엄청난 상처를 받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회복하기가 정말 어려운 상처입니다.

이제 내가 무슨 예수님의 제자야,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거야 하면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옛날의 베드로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예수님의 만나기 전의 베드로로 돌아갑니다. 얼마나 베드로의 상처가 큰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자기는 이제 물고기 잡는 과거의 어부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옛날에 물고기를 잡던 배에 올라타서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이었다는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지우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상처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주는 상처보다도 내 자신이 나에게 주는 상처가 더 크고 무섭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상처는 자기 자신을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밀어 넣습니다.

‘나는 이제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는 말은 그냥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상처가 심각할 정도로 컸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처를 그냥 두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상처들을 우리가 치유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치유 받고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가장 최우선의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나중에 가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고 난 뒤에야 깨닫는데 안타까운 일이지요.

내 속에서 있는 상처들이 치유되지 않고 회복되지 않으면 그 상처를 통해서 마귀가 틈을 탑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의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상처내는 거친 사람으로 점점 변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인 상처 못지않게 우리의 마음의 상처와 영적인 상처들은 속히 치유받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상처가 속히 치유받고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지요?

바로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상처를 고쳐 달라거나 하나님께 내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베드로의 상처는 깊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은 날이 새기 전에 아니 그 전날 밤부터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베드로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상처의 치유와 회복은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될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이 상처 입은 사람으로 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찾아가심으로 회복을 향한 치료가 시작이 됩니다.

베드로를 제자 삼기 위해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나를 따라오라 네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이제 그 베드로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상처를 보고 계시고 우리들의 작은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주님이 우리 곁에 이 시간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 코넬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환자들의 회복기’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똑같은 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두 환자가 있었습니다. 한 환자는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쓸쓸하게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다른 한 환자는 친구, 친지, 가족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편의 환자가 더 빨리 회복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제 일어나야지요. 건강해야지요. 할 일도 많은데 힘내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고 위로를 많이 받은 사람은 빨리 회복하는데,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나에게는 찾아와 위로하는 사람도 없다. 인생은 본래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다.’ 하고 낙심하는 사람은 치료도 더디고 병도 오래 가더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지 중에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서 위로를 해 주어야 합니다. 위로를 받은 사람은 빨리 회복되지만,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은 병이 오래 갑니다.

 

주님이 우리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찾아 오셨다는 사실 앞에서 감사하면서 겸손히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입시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시다. ‘주님, 나는 치유 받고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주님의 필요합니다.’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손길을 참 놀랍습니다.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다가 갑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5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집니다.

이 상황은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상황과도 너무나 비슷합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의 상황입니다.

누가복음 5장 1절에서 10절까지를 보면 예수님이 처음 베드로를 만날 때의 상황이 나옵니다.

상처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도 너무나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던집니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고기가 많이 잡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상처받고 과거로 돌아간 베드로,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로 다시 회복됩니다.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환자에게 의사는 처방을 합니다. 약을 빠뜨림 없이 꼭 하루에 세 번 드세요. 슬 담배를 절대로 하지 마세요. 언제 언제 병원에 오세요. 이 의사의 말은 아무리 제멋대로 하고 권력이 있고 돈이 많고 고집에 센 사람이라 할지라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그 의사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의 불순종을 회개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큰 권력과 명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여종을 통해서 엘리야의 소식을 듣습니다. 치유와 회복 소망을 갖고 값비싼 예물을 갖고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러 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엄청난 예물을 갖고 온 나아만을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 밖에 세워 두었습니다. 사환을 시켜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어라’고만 지시했습니다. 나아만은 이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을 무너뜨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의 군대 장관을 푸대접한다는 것이 잘 납득이 안 됐을 것입니다. 치료법 또한 그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을 것입니다. 더구나 요단강은 아람 나라에 흐르는 아바나와 마르발 강에 비해 더럽고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몸을 씻게 하시고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진정한 신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하십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습니다. 요단강에 여섯 번째 들어갈 때까지 나아만의 몸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갈 때마다 상처에 물이 들어가고, 힘껏 문질렀으니 상처는 더 심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실망과 분노와 의심이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아만은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어리석어 보여도 자존심이 상해도 마지막까지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썩어가던 몸이 어린이의 살과 같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회복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밤새도록 고기 잡느라고 수고하고 허기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숯불에 떡도 구우셨고 생선도 구워 놓았습니다. 9절을 봅시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2절과 1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이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손길입니다.

마치 깊은 상처와 절망감 속에서 죽겠다고 로뎀나무 아래서 누워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엘리야를 위해서 떡과 물을 준비하고 두 번씩이나 깨워서 먹이셨던 하나님의 손길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가 그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작은 상처와 아픔과 까지 놓치지 않는 주님의 섬세하신 치유와 회복의 손길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회복됩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단순히 물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그래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할 것 까지 말씀하십니다. 세 번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얼마나 큰 가를 보여 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중에서 상처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곁에 찾아 오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이 내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도록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 드립시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회복되고 치유되는 놀라운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실패와 실망을 통한 성장과 성숙

요한복음 21:1-7 / 노경모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게 한 노인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위대한 성공을 이룬 비결은 무엇입니까?” 링컨은 “누구보다도 실패를 많이 한 것이 성공을 이룬 비결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된 링컨은 사업에 몇 번 실패하였으며, 신경쇠약증으로 병원 생활을 하였고, 선거에도 여러 번 낙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실패와 실망에 굴하지 않고 1860년 마침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그가 고백한 대로 실패와 실망을 통해 성장과 성숙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실패와 실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 없이 실패와 실망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실패와 실망으로 그 인생을 마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실패와 실망을 통해 성장과 성숙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실패와 실망을 겪으면서 때로는 낙심하고 낙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와 실망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게 되었습니다. 실패와 실망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신앙과 인격에 훈련과 연단을 쌓았으며, 결국 성장과 성숙을 이룬 성공적인 제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주님의 고난을 기피하면 사명을 포기하게 됩니다.

세상에 누가 고난을 달가워 하겠습니까, 실은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의 잔을 받아 들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고난을 기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엉거주춤 사명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실패와 실망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그 동료 제자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도마와 나다나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 두 명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피한 제자들은 사명을 포기한 채 옛 생활로 되돌아갔지만 밤새도록 헛수고만 하였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피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실패와 실망을 통해 성장과 성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피하면 사명을 포기하고 옛 생활로 돌아가 실패와 실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을 기피하지 않으면 사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며 실패와 실망을 반복하지도 않게 될 줄 믿습니다.

1944년 4월 21일 주기철(1897~1944) 목사님이 순교하신 후, 오정모(1903~1947) 사모님이 평양산정현교회교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 목사님은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 남을 수 없어서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속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을 기피하지 않는 사람은 사명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결코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도 않고 실패와 실망을 반복하지도 않게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기피하지 않음으로써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고 실패와 실망을 반복하지 않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행운을 체험하게 됩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없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이 밤새 헛수고 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새벽에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도와주시려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오른편’(뎈시오스)이란 말의 이차적인 의미는 ‘행운’을 뜻합니다.

시몬 베드로와 동료들은 그 날 밤에 이미 오른편으로도 그물을 수 없이 던졌습니다. 그 날 밤은 고기잡이에 가장 좋은 때였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어갈 때는 고기잡이에 가장 안 좋은 때였습니다. 그 날 밤에도 못 잡은 물고기를 날이 샐 무렵에 잡으리라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명령을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그렇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행운을 체험하지 못할 것이고 실패와 실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행운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실패와 실망을 반복하지도 않게 될 줄 믿습니다.

호텔 중개업자인 오르브 크리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워싱턴 주 스포케인 시에 매물로 나온 한 부동산에 관한 전화를 받았을 때 흥분했습니다. 그 매물은 공항에서 몇 분 거리에 있으며 시를 내려다보는 전나무 숲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할러데이 인 호텔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매물로 내놓는 대신 자기가 직접 매입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달 평균 1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호텔바의 운영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이 바를 운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호텔 지배인은 만일 바를 운영하지 않으면 손님들이 곧장 다른 데로 갈 것이라고 주장하며 호텔의 수지를 맞출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호텔 로비를 개조하고 바 대신 커피샾을 경영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5년 만에 음식 매상은 20%가 더 늘고, 객실 매상도 30%나 더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오르브 크리거, 그는 자신의 신앙과 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그 신앙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그 신앙대로 살아야 가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가치 있고 행운과 축복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28:1~2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의 길을 걷는 자 곧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마다 복이 있습니다. 그는 그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며 복되고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할지라도 하나님의 길을 걷지 않는 자 곧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실패와 실망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와 실망을 통해 성장과 성숙을 이룬 사람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행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밤새도록 헛 그물질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써 행운을 체험하며 실패와 실망을 반복하지 않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면 충정을 회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곧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 하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남 달리 제일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베드로에게 말해 준 것은 베드로의 리더십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의 말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하신 주님과 주님의 기적을 체험한 적이 있었으며 이번에 다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요한의 말을 듣자마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던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것은 주님께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추운 날씨의 새벽 바다로 몸을 던져 뛰어들었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그의 충정과 열정을 행동으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헤엄쳐 가야 했던 거리는 약 오십칸 쯤 즉 약 90m(공동번역은 100m로 번역함)에 이릅니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베드로 외에 물로 뛰어든 다른 제자는 없었습니다. 그물에 잡힌 그 많은 물고기를 끌고 가야 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고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의 충정은 가히 감동적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신한 결과였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않으면 충정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고 추운 새벽 바다에 뛰어 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면 충정을 회복하게 될 것이며 실패와 실망을 반복하지도 않게 될 줄 믿습니다.

지구촌교회 이동원 원로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가정교사로 남의 집살이를 했습니다. 머리가 명석한 그는 성공을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가족까지 부양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으며 아무 희망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의 권유로 영어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암흑과 같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한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그 후 그는 4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간증이 끝났을 때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와 “형제의 간증은 이상하게 놀라운 감동이 있어, 만약 형제가 주님께 삶을 드린다면 주님은 형제를 놀랍게 쓰실 것 같은데 왜 전도자로 헌신하지 않소?”라며 격려와 권면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말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계속 듣게 되자, 그는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날 그가 겪은 일은 그의 인생을 180도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에서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그의 삶을 바꾸었고, 찬송은 그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찾은 후 그가 즐겨 부르게 된 찬송 가사가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내 인생의 미래를 바꿀 수 있네.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모든 공포는 사라졌네.그분이 내 인생의 미래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멘!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3~4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간직한 유업을 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충정을 회복하게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확신함으로써 충정을 회복하시고 실패와 실망을 반복하지 않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어에 “인간의 실망은 하나님의 임명이다”(Man's disappointment is God's appointment.)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실망이 도리어 하나님의 임명을 받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와 실망은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명을 받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실패와 실망을 통해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피하면 사명을 포기하게 됩니다.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행운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면 충정을 회복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를 성공의 비결로 삼았던 링컨처럼 실패와 실망을 비관적으로 당하지 말고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이시라

요 21;1-14 / 박원석 목사

◈ 들어가는 말

예수님은 눅9:22에서“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하신 이후 두 번이나 더 자신의 사역의 완성을 말씀하십니다.

고전15:13에서“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 하시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즉 죽은 자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지 못하셨다는 사실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에 확신이 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왔습니다.

아마도 제자들 몇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마음에만 두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갈릴리로 와 버렸고 옛날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늘 일어납니다. 함께 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다 정리합니다. 그리고 또 각자의 길을 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바로 제자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주님으로 모셨던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주님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자기를 나타내셨으니(1-6)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세 번이나 부활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잡히시기 전에 분명하게 마26:32에서“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마28:7을 보시면“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하셨습니다.

상황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28:10에서도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심 것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요21:1에서“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신 후 일입니다.

이는 바로 요20장의 사건들 즉 제자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있는 장소에서 나타나시고 또 도마 앞에 나타나셔서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고 보고 믿는 것보다는 믿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 있다고 하신 후입니다.

요21:2을 보시면 7명의 제자가 함께 갈릴리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가 연고지였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로 왔습니다. 가족이 있고 집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갈릴리로 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갈릴리로 왔습니까? 갈릴리에 온 제자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제자들이 갈릴리로 온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 유대인들의 박해가 두려워서 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갈릴리에서 은둔하고 있던 제자들이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을 전할 수 있었던 상태가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요21:3에서“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 합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전직을 회복하였습니다. 전에 고기 잡던 일을 다시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이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 하여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던졌으나 그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눅5장의 사건을 생각하게 합니다.

눅5:5에서“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였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요21:4에서“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고 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현장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고기 잡는 일에만 전념하게 된다면 이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세상의 방법만 의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육으로 사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순간 제자들은 자기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순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생각지 못하는 연약함에 빠졌습니다. 우리들 역시 이러한 연약함에 처할 수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세상의 일이나 나 자신의 중요한 일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세상의 방법을 더 신뢰합니다. 예수님을 생각은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요21:5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라고 질문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리고 제시하십니다. 요21:6에서“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라는 생각없이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말에 그물을 던졌고 그래서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새벽에 제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7-14)

제자들은 잡은 고기에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어리석게 당장 눈앞에 이익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때에 한 제자가 요21:7에서“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는 현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가 있었습니다. 요21:7에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 하고 외쳤다고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누구입니까?

일반적으로 이 제자는 사도요한으로 나타납니다. 요한 사도에 의하여 “주님이시라”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주님이시라”는 소리는 물고기에 취하여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순간 자신들이 지금 무엇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해야 할 일과 살아야할 삶을 제시하여 주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사람의 앞으로 살아야 할 일과 자신의 존재이유를 확실하게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가 살아야할 길과 삶이 이유를 제시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 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요21:8-9에서“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와서 준비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숯불이 피워있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으며 떡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니 당연히 피곤하고 그 피곤은 허기진 배에서 먼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신 뒤에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여전히 지금도 나의 필요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고기를 잡아도 그물이 찟어질 정도로 잡게 하십니다. 그물에 고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요21:10-11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달라하십니다. 베드로는 올라가서 그물에 가득한 고기를 확인합니다. 이렇게 풍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고 고기는 무려 백쉰세 마리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0:10에서“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가 바로 생명이심을 알고 그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무엇이든 필요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고기가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풍성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풍성을 물질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풍성은 영으로 주십니다.

생명의 풍성함은 바로 만족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후3:5에서“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하십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모든 것은 바로 만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우리의 풍성이며 참 만족되심을 알게 하십니다.

요21:12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자들이 바로 자신들 앞에 서신이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누구냐고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21:13에서“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고 하여 떡과 생선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제자들과 또 믿는 자들에게 여전히 떡을 주시고 생선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살과 피를 주시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자신의 생명까지 주셔서 우리들에게 생명이 있게 하셨습니다. 요20:31에서 나타내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요21:14에서“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하여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더 이상 예수 부활이 그냥 소문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 나오는 말

예수님은 생전에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앞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요21:7에서“주님이시라”고 외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는 틀림없이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다른 제자들에 대하여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요13:23에 의하면“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고 한 제자입니다. 함께 하였던 제자들이지만 늘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 아침에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늘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 분명하여집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시라면 알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영으로 되어집니다.

사람의 힘이 아니라 영으로 하나 되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바로 자신의 전부가 되어집니다. 오늘 나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통해서 예수님과 관계가 분명하여 집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과 그리스도이시고 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십니다. 빛이시고 선한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알아지는 것이 영으로 되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어디서나 자신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교제합니다. 모든 주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날마다 “주님이시라”를 경험합니다.

 

 

 

 

153의 기적

요 21:1-14 / 양인순 목사

1963년 5월 1일, 우리나라 문구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제품이 나왔습니다. 바로 <모나미 153 볼펜>입니다. 모나미는 Mon Ami ‘나의 친구’라는 불어입니다. 이 회사를 창립한 송삼석 회장은 사업을 시작했지만 회사가 점점 어려워지고, 부도 위기에 몰렸답니다. 마음에 각오를 하고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3가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은 것, 십일조를 떼어 먹은 것, 그리고 새벽기도를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눈물로 회개를 하고, 이제부터는 반드시 이 세 가지를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기도 후에 성경을 읽는데 마침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펴게 됐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기 위해 수고했지만 허탕을 친 베드로가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그물을 던졌을 때 153마리의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송 사장은 이곳에서 큰 충격을 받고, 하나님께서 사업을 다시 시작하라는 사인으로 알고 기도원을 내려왔습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볼펜이 없었습니다. 전시회에 갔다가 일본 사람이 볼펜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볼펜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잉크가 줄줄이 세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모나미 153 볼펜’입니다. 처음 당시에 가격은 15원 이었는데 신문 1부 가격, 시내버스 가격과 동일했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은 얼마일까요? 300원입니다.

이 볼펜을 만들고 송 사장은 하나님께 이런 비전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주님!, 전 세계인의 손에 이 볼펜이 들려지기 소망합니다. 50억 자루가 팔리게 하소서.”

그 믿음의 비전대로 올 해 50주년을 맞이한 모나미 153 볼펜은 지금까지 36억 자루를 생산했습니다. 지구를 12바퀴 돌 수 있는 숫자입니다. 모나미 153볼펜은 현재 이슬람권인 터키와 동구권의 폴란드에서 판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국민 볼펜이 됐습니다.

송삼석 사장은 회사의 부도직전 상황에서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볼펜의 이름처럼 예수님을 나의 친구로 삼아 믿음으로 달려갈 때 153의 기적이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153의 기적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바로 <153의 기적>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장면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눈으로 보았고, 음성도 들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에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해서 예고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갈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의심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깨닫고, 알면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고 깨달은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손과 발을 통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낙하산을 타는 것을 예를 들어봅니다. 낙하산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설령 주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보조 낙하산을 펴면 살 수 있습니다. 낙하산을 믿고 뛰어 내리면 저절로 4초가 지나면 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론상으로는 믿고 뛰면 되는데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이 한 번의 점프를 위해서 무려 한 달 동안 지옥 같은 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낙하산을 짊어지고 하늘에 오르면 생각이 싹 바뀝니다. 무려 한 달 동안이나 거의 짐승처럼 훈련을 받았는데도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혹시 내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자신 있게 창공을 향해 멋지게 뛰어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뛰어내리는 것이지 기쁜 마음으로 낙하산에게 생명을 맡기고 뛰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알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어려움이요 한계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저합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고, 머뭇거립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 번째로 다시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다시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주님을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손과 발에 박힌 못 자국을 보면서도 믿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과연 주님은 나와 함께 하고 있느냐고 원망 불평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 이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갑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자기가 생각하고, 좋아 보이는 길로 갑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본문 3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본래 그는 갈릴리에서 고기잡던 어부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음성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던 베드로입니다. 그는 지난 3년간 주님의 수제자로서 사랑받던 자입니다. 실수와 허물도 있었지만 신앙고백을 통해 칭찬을 받았던 자입니다. 십자가를 앞둔 주님에게 세 번씩이나 맹세를 했던 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함께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주님만 따라가면 뭔가 출세와 성공의 길이 열릴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맛보지 못한 베드로는 철저하게 실패한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실의와 낙망 속에 이제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나 잡아먹고 살아야 겠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른 제자들이 함께 가겠다고 동조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실의와 좌절 속에 그들은 배를 타고 그물을 던집니다. 이상하게도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합니다. 아무리 지난 3년 동안 고기를 잡지 않았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오늘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은 없는지요?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는데 결승선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아득함 속에 낙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제는 ‘될 되로 데라’는 심정으로 다시 옛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153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7명의 제자들은 밤새 헛수고를 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입니다. 날이 밝아올 때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을 거십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들의 대답은 “없습니다.”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명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21:6)

그들이 순종했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물고기가 백 쉰 세 마리였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153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머리의 생각이나 계산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내 경험이나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기적은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 일어납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기적의 초점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2장의 가나 혼인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참으로 낭패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명합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명하시던지 그대로 순종하라.’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나서가 문젭니다. 자기들이 금방 항아리에 부은 맹물을 손님들에게 떠서 갖다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인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맹물을 떠다가 손님들에게 줍니다. 그런데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지금까지 먹었던 포도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 났기 때문입니다. 언제 맹물이 포도주로 바뀌었을까요? 하인들이 믿음으로 항아리에서 물을 뜨는 순간이었을까요? 아니면 손님들에게 부어주는 순간이었을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하인들이 주님의 능력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순간 물이 포도주가 된 줄로 믿습니다.

내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 떨어졌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믿고 순종할 때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임합니다.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불가능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너희 가운데 떡이 몇 개나 있는지 알아보라’ 명하십니다. 그때 어린 소년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도시락을 보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축사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서 나눠주라고 명하십니다. 그랬더니 오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를 거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 소년이 자기 도시락을 내어 놓는 순종을 통해 일어납니다. 솔직히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소년만 도시락이 있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께 이 도시락을 드린 것입니다.

오늘도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갈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임합니다. 자기 머리로 계산해 보고, 손해 날 것 같으면 모른 척하면 자기 것은 지킬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은 맛볼 수 없습니다.

불가능을 넘어 가능케 하시는 주님의 기적은 바로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한 베드로는 놀라운 기적을 확인합니다. 그 순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을 지칭합니다. 요한은 지금 눈앞에서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명하신 분이 ‘주님’ 이시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거리는 오십 칸쯤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약 100미터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왜 베드로가 주님이시다는 말에 물로 뛰어들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베드로의 열정과 순수함을 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주님이시라는 요한의 말에 앞뒤 가릴 것 없이 주님을 향해 물로 뛰어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심정을 헤아려봅니다.

실의 좌절에 빠져 고기나 잡아야겠다고 고향에 돌아가 그물질을 하고 있던 상태입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누군지 몰랐지만 그 분 말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가득차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저 분이 누구일까? 베드로가 얼마나 궁금했을까요?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자신이 배신했던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뇨? 이 짧은 순간은 베드로에게 초심을 다시 불러 일으킵니다. 주님을 다시 눈 앞에서 보는 순간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 담긴 고기가 아니라 주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최고로 빠른 속도로 수영을 해서 주님 앞에 갔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베드로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순간만큼은 베드로는 순수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 했던 것도 안중에 없습니다. 고기나 잡아먹고 살아야겠다고 고향으로 돌아온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도 안중에 없습니다. 오직 베드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려갑니다. 그 달려감의 순간이 바로 지나온 모든 과거의 허물과 잘못을 새롭게 용서받는 축복의 시간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베드로의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들에 매이지 마십시오. 우리의 행위대로 라면 주님은 우리와 철천지 원수가 같은 사이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시지도 않습니다. 늘 곁에 다가오셔서 부르십니다. 나와 함께 가자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주님은 과거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십니다. 나쁘고, 불쾌하고, 마음 상했던 모든 것까지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밤새 허기져 지쳐있는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워놓고 조반을 준비하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에게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기적의 주인공으로 삼으십니다.

주님 앞에 다시 달려온 베드로! 주님은 다시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하늘의 능력을 덧입습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를 걷게 하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산헤드린의 서슬퍼런 권력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합니다. 그에게 그림자라도 덮이면 병이 낫을 기대를 가지고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도로 거듭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일으키는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던 베드로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아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이 시간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결핍을 만선의 기쁨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에게 잃어버린 사명을 다시 한번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 비결은 바로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다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때 부활의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준비하시고, 더 풍성한 만찬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153의 기적을 일으켜주십니다.

금번 2013년 예수 생명잔치는 ‘1(한) 사람이 50일 동안 기도하여 3(세명)의 VIP를 초대하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핵심은 바로 먼저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 예수생명잔치 선포식과 함께 모든 성지가족이 일만 시간 기도 대행진을 펼칠 것입니다. 교역자들로부터 당회원, 중직, 제직들이 각자의 정한 기도의 분량을 채워야 합니다. 구역장, 권찰, 교구장이 이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153의 기적의 핵심은 모든 성지가족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교회학교도 정한 분량만큼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153기도 운동을 하면 5가지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을 <오기>라고 부르겠습니다. 첫째, 생명을 살리는 기적입니다. 둘째, 잃어버린 양을 찾는 기적입니다. 셋째, 질병이 치유되는 기적입니다. 넷째, 자녀들이 형통케 되는 기적입니다. 다섯째, 범사가 잘 되는 기적입니다. 기대하고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세상 일도 오기를 가지고 하면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물며 주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오기를 부리면 틀림없이 153의 기적이 임할 줄 믿습니다.

다음 주 부터는 성지교회 안에 영적 비상사태를 선포합니다. 가을 부흥회를 앞두고 특새를 진행합니다. 예수생명잔치를 위해 5가지 기적을 꿈꾸며 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이번 50일 동인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이뤄야 할 5가지 기적의 제목을 기록해 보십시오. 내가 초대할 VIP, 내가 다시 찾아야 할 잃은 양, 그리고 치료받아야 할 질병을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목숨 걸고 기도해 보십시오. 반드시 치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자녀들을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하십시오. 내 자녀를 누가 키워줍니까? 내가 주님 앞에 기도로 키워야 합니다. 진학과 취업과 결혼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일터와 사업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손이 수고한 대로 형통케 하시는 기적이 임하도록 간구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대학연합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형민 목사의 간증입니다. 청소년 시절 광명시에 있는 달동네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 공부를 하고 싶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투자좀 해주세요. 그러면 평생 하나님 나라 공무원으로 살게요.” 새벽에 달동네 공원에 나와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마침 그곳으로 아침 운동을 나왔던 외국인이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물었습니다. “Why are you crying?” 그 아이는 영어로 말은 못하고 단지 “School, School”을 외쳤답니다. 그 외국인이 그 말을 알아듣고 자기 사무실로 와보라고 해서 가봤더니 대학의 총장이더랍니다. 그 분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모든 조치와 4년 동안의 모든 비용을 주셨답니다. 할렐루야! 이 사건을 통해 김 목사는 모든 것은 기도를 통해 온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갖고 계신 주님께 구하면 이루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주어 동사 없이 school 만 외쳐도 뜻이 통하게 하시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대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하기를 실력과 스펙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충만하면 성령님께 도와주신다는 것을 선포한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기도하지 않고 내가 일하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153의 기적을 일으키는 비결입니다. 앞으로 50일 동안 우리 성지교회 안에 수많은 기도응답의 간증이 쏟아질 줄 믿습니다. 앞으로 50일 동안 믿음으로 주의 말씀 붙잡고 기도합시다. 질병이 떠나가고, 묶인 것이 풀려지고, 자녀들이 형통케 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하는 일들이 지금 보다 더 잘 될 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50일 동안 이루실 주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오기로 기도해 봅시다. 우리 안에 놀라운 153의 기적이 임할 줄 믿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에게 기적이 임합니다. 기도 외에 이런 역사를 일으킬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50일 동안의 기도운동에 참여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자녀의 문이 열리고, 직장과 사업이 열리는 기적이 임할 줄 믿습니다.

다같이 주신 말씀 생각하며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찬양드립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예수님

요 21:1-7 / 박상훈 목사

사도 요한은 그가 기록한 복음서인 요한복음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요21:25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들 가운데서 독특하면서도 대표적인 여덟 가지 표적들만 골라서 그의 복음서에 담았습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표적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요20:31 말씀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여덟 가지 표적들 중에서 이미 일곱 가지 표적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표적들은 이와 같습니다.

첫째,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입니다. 2장에 나옵니다. 둘째,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입니다.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째,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입니다. 5장에 등장합니다. 넷째,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입니다. 6장에 나타납니다. 다섯째, 바다 위를 걸으신 표적입니다. 6장에 나옵니다. 여섯째, 맹인을 보게 하신 표적입니다. 9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일곱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입니다. 그 내용은 11장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여덟 가지 표적들 중 마지막 여덟 번째 표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요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오늘 본문 1절에는 “나타내셨다”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육의 몸에서 신령한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부터는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셔야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서 계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동산지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자신을 마리아에게 나타내셨을 때, 마리아는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내내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에는, 반드시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셔야만 사람들이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 앞 장인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자신을 세 번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때에는 도마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한 번 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때에는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장소적으로 보면, 이 세 번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갈릴리로 자리를 옮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지 않고 갈릴리로 옮겨왔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마28:10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리로 가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왔습니다.

이어서 마28:16 말씀입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는 갈릴리에 있는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더니 그 중 일곱 명의 제자들이 그만 바다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요21:2 (1) 시몬 베드로와 (2)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3)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4) + (5) 세베대의 아들들과 (6) + (7)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여기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나다나엘의 친구 빌립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이들 일곱 명은 모두 본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잡는 일에 경험도 있었고, 기술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도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이들 일곱 명의 제자들만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함께 가보았자, 물고기를 잡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에 있는 어떤 산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갈릴리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일곱 명은 산에 머물지를 않고 바다로 갔습니다. 이는 분명 예수님의 명을 불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요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의 명에 따라서, 열한 제자들은 일단 예수님이 지시하신 산으로 모두 갔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한동안 예수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얼른 오시지를 않자, 급기야 성미 급한 베드로가 나서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았다가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는 기도하지 않고서 성급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또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말에 함께 있던 제자들도 동조를 했습니다. “우리도 함께 가겠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들 일곱 명 이외에 다른 제자들도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에 올라 밤새워 물고기를 잡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 어부 출신들이라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일곱 제자들만 함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바다로 가서 배에 올랐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삼으신 것은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도로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일곱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바다로 갔습니다. 행여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뜻을 따라서 산이 아닌 바다로 가 있지는 않습니까?

요15:5 말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무를 떠난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듯,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예수님 밖에서 행해지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의 삶에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 밖에서 행한 제자들의 수고는 헛될 뿐이었습니다.

 

요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오늘 본문 3절 끝 부분입니다.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일곱 명의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바다의 어부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는 기술을 알고 있었고, 경험도 풍부했습니다. 그들은 장비도 갖추었고, 여러 명이 협력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밤새워 그물을 던지면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날 밤에 단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이는 이미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곱 명의 제자들은 자기들 힘으로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듯이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은 그 날 밤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셔서, 갈릴리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을 제자들이 탄 배로부터 멀리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요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날이 새어갈 때였습니다. 밝은 아침이 된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8절 말씀처럼,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오십 칸쯤 되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200 규빗입니다. 이는 90m 정도의 거리에 불과합니다. 먼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까닭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서 인간적으로 노력을 하다가,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신 호칭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얘들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 보시는 듯이 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단 한 번도 그렇게 부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컨대 요13:33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작은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애정이 듬뿍 담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얘들아”라고 낯설게 부르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는 예수님이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없다는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원문의 뜻을 살려서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없지, 안 그래?” 제자들은 사실대로 “없나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얻지를 못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만 멀어졌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도 지금 예수님 밖에서 헛되이 수고하며, 실패의 길을 힘들게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예수님 밖에 있으면 그 결과는 비극적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돌이킵시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며, 예수님 안에서 노력합시다. 그 길에는 풍성한 열매가 있습니다. 성공이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 안에 수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요21: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명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만히 있게 하시고, 갈릴리 바다의 수많은 물고기들을 명하셔서 제자들이 탄 배 안으로 뛰어들어서 그 배 안을 물고기들로 가득 채우실 수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표적을 낭비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언제나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단지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만 표적을 행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어떻게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제자들이 계속해서 왼편에만 그물을 던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른편에도 이미 여러 번 그물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번번이 허탕만 쳤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결과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에 제자들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와 동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수고는 예수님 안에서의 수고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본문 6절 끝에 나옵니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님 안에서의 수고는 그들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었습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밤새워 수고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수고하니까, 한 순간에 그 동안의 모든 실패를 보상하고도 남는 큰 성공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밖에서 수고할 때,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셔서 갈릴리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을 먼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노력할 때, 예수님은 다시금 표적을 행하셔서 갈릴리 바다의 많은 물고기들을 배 오른편으로 몰아주셨습니다.

요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울러 이제 그들은 예수님과의 교제도 다시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았더라면,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닷가에 서있는 저 사람은 물고기 떼가 움직이는 방향을 잘 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나가서 사례를 해야지.”

그러나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곧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사실을 얼른 베드로에게 알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성미가 급한 베드로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 즉시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얼른 가서 예수님을 뵈옵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미가 급했기에, 그만큼 실수하는 일에 빨랐습니다. 반면에 그는 자신의 실수를 회복하는 일에도 그만큼 빨랐습니다. 누구에게나 실수는 다 있습니다. 비록 잘못을 행하고 실수를 했을지라도, 베드로처럼 재빨리 회복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그물을 던질 때는 벗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일하는 동안에 베드로는 속옷만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보다 용이하게 일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보통은 겉옷을 입고 있다가도, 수영을 하려면 그것을 벗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그렇게 급하게 바다로 뛰어들면서, 자기가 벗어놓았던 겉옷을 다시금 자기 몸에 둘렀을까요? 이는 예수님에게 기본적인 예를 갖추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禮拜)는 말 그대로 “예(禮)를 다해서 경배(敬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언제나 예를 다해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들은 모든 실패를 회복하고도 남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교제도 회복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주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밝히 나타내시며, 우리가 하는 일을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회복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다로 뛰어 내리라

요 21:1-7 / 이정익 목사

오늘은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노년에는 종말이 불안합니다. 조사에 의하면 80세에서 85세 정도만 살고 싶다고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각종 질병으로 불안해서 그 이상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년에는 언제 직장에서 퇴출될지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직장에 목숨을 걸고 일을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들보다 고민이 더 많습니다. 등록금도 문제이지만 졸업 후에는 직장 때문에 걱정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대학 5, 6학년생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은 막 뛰어다니며 미래에 취해 살아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위축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괴테는 젊은이라는 말만 들어도 취한다고 했는데 오늘의 젊은이들은 그런 기백을 잃고 살아갑니다.

 

오늘은 기백 있는 젊은이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는 인생 초반에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벌어서 살아가던 어부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무식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이 변하였습니다. 얼마나 변하였는가 하면 “예수다”라는 말 한마디에 바다로 뛰어 들어갈 만큼 기백 있는 제자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젊은이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기백이 예수를 좇는 제자의 삶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고향으로 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 와서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고기를 못 잡아서 시름에 젖어 있던 제자들은 누군가가 오른편에 한 번 더 던져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던져보았더니 고기가 많이 잡힌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고기가 그물 가득히 잡히는 것이 제자가 되기 전 예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한 번 더 던져보라는 말씀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순간 누군가 “저기 주님이 계시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믿음 방정식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진면목입니다. 제자에게는 이런 기백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제자로서의 그런 기백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는 몇 가지 남다른 자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자질입니다.

 

담백한 결단력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 자리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라나섰습니다. 이는 아주 담백하고 순수한 결단의 모습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사전에 어느 정도 예수가 누구인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세례요한의 제자로 장차 예수께서 부르면 따라 나서라는 지침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서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막상 결단의 시간이 오면 다시 재어보고 계산하며 망설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즉시 따라 나섰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마음과 영혼 그리고 생각이 아주 맑았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삶의 자세와 모습이 참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나약하고 무력하며 주저함이 많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너무 많고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어가도 쉼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5월에 교회봉헌예배 행사를 끝내고 유럽에 15일간 여행을 갔었습니다. 보통 여행 때는 일거리를 한 짐 가득 가지고 떠났었는데 이번에는 빈손으로 떠났습니다. 머리를 비운채로 아무 생각 없이 여행만 하겠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보름동안 계속해서 잠이 쏟아졌습니다. 또한 밥맛도 좋고 소화도 잘되었습니다. 또한 시간 가는 것에 전혀 염려가 없었고 모든 시간이 그렇게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일터를 떠나보고 때로 안식년을 갖는 것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계산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삶이 피곤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아주 단순하고 담백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하시니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과 생각이 그만큼 담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결한 순종

 

베드로 일행이 고기 잡는 곳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고기를 잡았느냐?”하고 묻자 베드로 일행은 “못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른편에 한 번 더 던져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 일행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서 지쳐있을 때입니다. 이제는 고기가 잡힌다 해도 귀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물을 또 던졌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 깊은 데로 가서 한 번 더 던져보라고 하셨을 때에도 베드로는 “말씀하시니 다시 한 번 던지리이다.”하고 그물을 또 던졌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다 해 봤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던졌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면모입니다. 그런 때에 대부분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합니다. “다 해 보았습니다.” “소용없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목회의 현장에서도 “전도하라”고 하면 “이만하면 됐지 또 전도합니까?”라고 반응합니다. 이는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수준이 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길가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오늘 이 시대에 저렇게 해서 누가 믿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전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힘 빠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분들 대부분이 전도 해본 일이 없는 분들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오른편 왼편 안 던졌겠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또 던졌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신앙의 자질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장점이고 이것이 베드로로 하여금 수제자가 되게 한 요인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거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함의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거기에 담백한 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나아만이 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시대는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였는데 아람왕의 신하이자 국방장관이었던 나아만이 나병에 걸려서 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오면서 엘리사가 친절하게 자신을 맞아주면서 병을 고쳐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내다보지도 않고 사람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7번 몸을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병을 고치는데 절차가 굉장히 복잡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희귀한 나병이 단지 요단강에 가서 7번 씻음으로 낫는다니 너무 간단해서 의심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갈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대로 믿고 가서 씻었더니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가서 씻으라.” “씻으면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체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만 믿으면 완전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단순한 신앙체계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 얼마나 간단합니까? 가서 씻으면 됩니다. 그런데 “왜 꼭 거기를 가야 하느냐?” “왜 꼭 일곱 번이냐?”하며 이유를 붙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단순한 세계입니다. 그 단순한 신앙이 그대로 표현되고 발로되고 이루어지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적은 모두 그 단순함의 순종에서 나타납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베드로는 “이제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다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면모입니다.

 

천진한 믿음

 

예수께서 “나는 이제 죽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극구 만류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2절을 보면 항변해서 극구 만류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순간 정색을 하시며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바로 엊그제는 천국의 열쇠를 주시더니 오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주님은 마땅히 죽으셔야 합니다. 아멘.”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그가 아주 순박한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산에서도 베드로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화하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서로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황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침묵을 깨고 말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우리 모두 함께 삽시다.” 베드로는 그 순간 마음에 느끼는 대로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순박한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언제나 화제를 주도했고 공동체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전승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베드로의 면모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며 돌 하나씩을 들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디에 사용할 것이라는 용도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대로 돌 하나씩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주 작은 돌 하나 들고 앞장서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큰 돌을 하나를 들고 땀을 흘리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산위에 먼저 올라간 유다는 땀을 흘리며 올라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생긴 대로 논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요령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베드로의 모습은 분명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자 예수께서 모두를 자리에 앉게 하시더니 들고 온 돌을 들고 “이 돌들이 모두 떡이 되게 하소서”하고 축사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수제자가 된 것입니다. 매사 계산이 빠르고 뺀질거리고 땀 흘리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큰 인물이 못 됩니다. 그런 사람은 당장은 이익을 볼 수 있으나 복을 못 받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늘 부 반주자로 수고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언제나 스페어 피아니스트로 땜질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학생은 정반주자가 나오지 못하는 새벽예배, 밤 예배 때의 반주를 도맡아 하였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그 여학생의 수고를 알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이 가정형편도 어려운데 아무 대책 없이 유학을 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학비를 조금 마련해 주고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도와주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봉투를 하나씩 주는데 비행기 값, 1년 생활비, 1년 학비가 다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순박할 정도로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함은 나 자신에게도 행복함을 주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행복을 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기회를 만들고 마침내는 기적을 일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 계산하고 이해타산적으로 요령껏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복을 받을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려서 고향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오신 부흥강사님이 방언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이 아이들과 중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어른들은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마음이 맑고 생각이 순수합니다. 기도하면 주신다니까 그대로 믿고 기도한 결과 아이들이 방언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기도하면서도 생각이 복잡합니다. “기도하면 정말 주어질까, 방언은 별로 안 좋다고 하는데, 과연 주어질까?” 속으로 생각이 복잡합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은 읽으면서도 생각이 많습니다. “무슨 만화 같은 이야기만 기록해 놓았느냐” 하고 의심도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기는 많이 읽는데 크게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어린 아이가 식사하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아버지가 불쌍해서 그런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선생님이 예수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셨는데 우리 집에서 지옥 갈 사람이 아버지 밖에 없잖느냐”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그 영혼이 맑고 깨끗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칭찬을 하시고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해타산에 민감하지 않은 것이 복입니다. 따지지 않음이 복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그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베드로는 실수도 많이 했으면서도 수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영혼이 맑고 깨끗하고 믿음이 순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장점입니다.

 

오직 예수사랑

 

베드로의 관심 속에는 오직 예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는 실수도 많이 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특출했습니다. 마침내 베드로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냥 십자가를 져도 영광이지만 나는 십자가를 거꾸로 지겠다고 우겼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그냥 질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을 때 자신은 도망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제자로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예수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처럼 닭이 울었습니다. 그 후로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만 들으면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그냥 죽을 수 없고 십자가를 거꾸로 지겠다고 자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일찌감치 수제자로 인정하셨고 천국 열쇠도 주셨고 중요한 자리에는 반드시 베드로를 동행시키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삶입니다. 믿음의 길에는 이런 자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너무 생각이 많고 이해타산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이 깊어지지 못하고 무게를 잃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너무 생각이 많고 주저하게 되면 영적 샘이 자꾸 얕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워야합니다. 그리고 단순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베드로의 일생을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줄 메시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담백한 결단력과 순결한 순종의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또한 천진한 믿음의 세계를 갖고 있었고 예수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실수하고 도망치는 경솔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금방 회개하고 실수를 인정하여 자세를 바로잡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믿음 방정식입니다. 번지점프에 3가지 요령이 있습니다. 첫째 계산하지 말고, 둘째 아래를 보지 말고, 셋째 생명줄을 믿고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믿음 방정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다”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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