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화평을 누리자(3)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의 축복
로마서 5:1-11 / 조상호 목사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있었던 김길복집사님 초청 특별집회를 통해, 우리는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실은 이번 집회는 급작스럽게 시행된 관계로 집회를 준비할 시간이 없어, 제대로 광고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집사님의 간증을 통해 함께 웃기도, 함께 울기도, 또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대충 네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아버지로부터 두 무릎에 칼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김집사님의 순교정신입니다. 둘째로 주위에 불신자가 있으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증거하려는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입니다. 세째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모든 자존심도 버리고, 시간과 물질 등 모든 것을 드리는 김집사님의 헌신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전도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가 전도하면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번의 집회를 통해 참으로 귀한 깨달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한 계속적인 집회로 말미암아 목도 많이 상하고 몸도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해주신 집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집사님의 간증을 통해 도전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도 나아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누구에게 화가 미친다고 했습니까? '나에게 화가 미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면 나에게 뭐가 내립니까? '축복이 임합니다.' 할렐루야! 전하시기 바랍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로마서5장1절로부터 11절까지의 본문을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의 축복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들의 죄와 유대인들의 죄,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3장19절에 와서 그러한 인간들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즉 아브라함과 다윗이 의롭게 된 것은 그들이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삶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EX) 제가 한번은 제 친구에게 전도. 큰맘먹고 "야, 예수 믿어야 돼, 너 죽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라고 예수님 믿기를 권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그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아 천국을 가게 되지만, 난 지금 당장 그런거 관심이 없어. 실컷 즐기다가, 내가 죽으려고 할 때, 아니, 죽기 바로 직전에 그 때 예수 믿으면 되잖아. 힘들고 어렵게 지금부터 믿을 필요가 있나?
안그래? 어차피 구원만 받으면 되잖아?" 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 질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이 땅에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됩니까? 예수님 믿으면 우리가 죽어 천국에 들어가는 축복만 받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요.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만 가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미래의 구원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구원은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또한 동시에 현재적인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예수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들은 이 땅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의 축복이 무엇일까요?
1. 화평 즉,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즈음 주위에 보면 많은 사람들은 빵의 문제, 즉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평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빵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평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오히려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증, 당뇨병, 동맥경화 등의 병으로 야단법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빵보다 자유가 있어야 평안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유가 없던 동구권의 나라들이 자유를 얻고 나서 '행복하다, 평안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는 찾았지만, 오히려 더 많은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참된 평안을 얻기 위하여 취미 생활도 해보고, 카지노에 가서 도박도 하고, 마약도 맞아 보고, 스포츠에 미쳐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어떠한 방법을 다 동원해도 인간은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가 있다>라고 확실하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Good News 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에 들어가면 평안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관계 회복이 될 때 가능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 (물론 다투면 되지 않습니다만) 한 집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심하게 다투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런데 심하게 다툰 집안에 평안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도, 집 안에 고상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아도, 집안이 살벌합니다. 냉냉합니다. 차가운 기운이 감돕니다. 왜? 아버지와 아들이 냉전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아니하면, 그 집안은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아니하면 참된 평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면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원수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고 우리가 평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10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이 평안은 진정한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주님께서 (요14:27)에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찬양이 있잖습니까?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이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오늘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일이 보장된 삶은 축복의 삶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으면, 오늘의 삶이 엉겅퀴와 가시덤불과 같은 광야 생활이라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힘들어도 장차 올 영광이 너무너무 크기 때문에 능히 견딜 수 있고 또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안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교회에 비해서 우리 교회의 분위기는 훨씬 밝습니다만, 그래도 기쁜 표정, 즐거운 표정들이 많이 부족합니다. 아마 찬송가 가사처럼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것 같아" 그것이 고민이 되어 기쁨이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 한국의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목사님이 외국 선교사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사님! 왜 한국 교회 교인들은 교회 밖에서는 명랑하게 이야기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는데 교회당 안에만 들어오면,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고 우울해집니까? 이 질문을 받은 목사님은 얼른 변명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 "선교사님! 한국 교인들은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웃으시면서 "그래요. 그러면 그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은 잊어 버렸나요?"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교회를 둘러보면 다시 사신 주님을 통해서 누려야 할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민족의 성품이 얌전하고 조용하여 표현을 잘 못하는 것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도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쁨의 이유를 받았음에도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EX) 제가 어렸을 때, 특별히 두 개의 별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상파>, 또 다른 하나는 <제비족>이라는 별명입니다. 상상할 수 있습니까? 어린 저는 항상 인상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어린 꼬마 녀석이 무슨 고민이 있다고 그렇게 인상을 쓰고 다니니?"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인상파인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 얼굴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시작하자, <인상파>가 <스마일파>로 바뀌었습니다. 할렐루야!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자, 범사가 해결되었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항상 웃고 다녔더니, 한 친구가 "너는 누굴 그렇게 꼬드기려고 웃고 다니냐? 제비족 짓 그만 하라"고 하고 말하는 바람에 제 스스로 조금은 웃음을 절제하려고 하였습니다만, <인상파>보다는 <스마일파>가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김길복집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목사님! 얼굴이 참 밝으시네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그 말씀이 감사한지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목사 인상이 사기꾼이나 도둑놈의 인상과 같다면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김집사님에게 "집사님!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기뻐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었습니다. 평생동안 인상 쓰고 살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 믿고, 주의 일을 시작하자, 주님께서 기쁨을 주셔서 얼굴이 바뀌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기쁨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근심 중에 희락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한번 옆에 계신 분의 얼굴을 한 번 보시면서 "기쁘십니까?"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아직도 인상 박박 쓰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기뻐하세요"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즉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즐거워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됨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소망 중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의 삶에 소망이 사라졌다고 한다면 살맛 나겠습니까? 소망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을 공급합니다. '나는 커서 의사가 되겠다. 나는 커서 엔지니어가 되겠다. 나는 커서 선생님이 되겠다. 나는 기업가가 되겠다'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힘이 들어도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또한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가 금메달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에, 뼈를 깎는 고통과 같은 훈련도 달게 받습니다. 또한 우리 2세들이 앞으로 성장하여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귀하게 쓰임 받으며 살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힘든 이민 생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꿈과 희망과 소망의 힘입니다.
EX) 어느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똑같은 증상의 두 환자가 있었습니다. 의사가 한 중환자에게 "선생님! 죄송.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드시고 죽음을 준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환자는 소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살아갈 의욕을 상실한 채 얼마 있지 않아 죽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증상의 또 다른 환자에게 "선생님! 병세는 심각하지만, 제가 드리는 약을 꼬박꼬박 잘 드시면 나을 수 있다.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하면서, 의사는 환자의 병에 아무 효험도 없는 소화제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번째 환자는 그 이후로 수년동안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소망의 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어떠한 어려움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환난이 몰려와도 두려움을 결코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타인들로부터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증상 모략을 받는다 할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소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치 용광로를 통과한 돌덩어리가 정금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나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한 연단임을 믿으시고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능히 통과할 수 있다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부은 바 되었다'는 말의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바가지로 물을 붓듯이 우리에게 이미 쏟아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또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세상의 샘물은 가물게 되면, 고갈되어 바닥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고갈되지 않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샘물과 같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6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우리에게.....", 또 8절에 의하면 "죄인인 우리들을 위하여....", 10절에 의하면 "하나님과 원수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을 자격을 아무리 보아도, 찾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 주신 그 사랑은 우리가 평생동안 사용해도 다 사용할 수 없는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사람은 변하여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우리가 아까 찬양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와 똑같이 고통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이 찬양이 우리의 평생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신학적 용어로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은 이제 이 땅을 떠나면, 분명히 슬픔도 없고 애곡도 없고 질병도 없고 죽음도 없는 천국에 가는 축복을 누립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또한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현세적인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다운 평안과, 환경을 초월하여 누리는 놀라운 기쁨과, 참 소망과 참 사랑을 경험하며 살수 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면 이와 같은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축복을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수년 전에 미국에서 백만장자인 노인네가 영양실조에 걸려 죽은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인네는 한국 돈으로 환산하여 8억원이 넘는 돈을 은행에 넣어 두었던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영양 실조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돈이 은행에 가득하면 뭐합니까? 빌딩이 많으면 뭐합니까? 냉장고에 먹을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그것을 보고만 있으면 저절로 배가 부릅니까? 아닙니다. 먹어야 합니다. 은행에 넣어둔 돈을 활용하지 않고 쓰지 않으면 거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롭다 인정받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누리지 않으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누리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소망과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의 축복을, 믿음으로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의 즐거움
로마서 5:1-11 / 김창인 목사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에 많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가난하여 먹을 것도 없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다닐 때에는 너무나 속이 상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인 해 즐겁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짓눌려 억울한 일을 당하고만 살다가 벼슬이라도 한 자리하게 되면 그 자리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가 기적같이 살아나게 되면 다시 얻은 건강으로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또 외롭게 살다가 아내를 맞이하고 가정을 꾸미게 되면 그 가정으로 인해 즐거워 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많은 즐거움이 있는데 우리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이런 즐거움과 다른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것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즐거워 할 수 있는 즐거움 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즐거워 할 수 없는 즐거움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즐거워 해야 합니다.
I. 믿음의 즐거움 (1-4절)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그 믿음을 즐거워 하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즐거워 하지도 않습니다. 즐거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을 즐거워 하지 않는다면 성도라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믿음을 왜 즐거워 합니까? 먼저는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① 칭의의 믿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얼마나 귀엽고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그 아이는 죄라는 것도 모르지만 성경은 누구든지 죄인이라고 합니다. 인류의 조상이 되는 아담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즉 하나님과 인연이 끊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다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받은 이 언약을 아담이 파기했습니다.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 한 사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까지 책임을 지고 계약을 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죄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행이 모든 사람의 불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인간의 행동으로는 이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이럴 때에 그 사실을 믿으면 죄의 자리에서 우리를 옮겨 놓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여전히 죄인의 줄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어떤 공로나 무엇을 드려서도 아닙니다. 믿음 하나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한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② 영광의 믿음
"또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절)
이 은혜에 들어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진노의 줄에, 멸망의 줄에 서 있을 때에 우리를 의인의 자리에 옮겨 놓으셨습니다. 이 자리 바꿈이 바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은혜를 주신 방법은 값없이 주신 것이지 돈 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혜의 자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의인의 자리에 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인의 자리에 서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에 충만하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까, 만져 보았습니까? 그저 나와 함께 계시는 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그 나라를 직접 보게 됩니다. 만져 봅니다. 듣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대로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보입니까. 그러나 의인의 자리에 섰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영광이 충만한 그 나라에 가서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즐거움은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을 통한 영광의 즐거움 입니다.
③ 깨달음의 믿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절)
안다고 하는 말은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깨닫는 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가정을 꾸민지 한 달도 채 안되는 신혼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육군 대위로, 나이는 서른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자신이 성실하게 살면 만사가 다 형통한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한번은 꿈을 꾸는데, 자신은 차 운전도 못하면서 차를 의젓이 몰고 가더랍니다. 즐겁게 달리고 있었는데, 앞에서 커다란 괴물 같은 것이 나와 차와 부딪히는 바람에 소리를 지르며 깼습니다. 꿈이 너무 선명하여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니까 그의 아내도 몸부림을 치면서 깼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니까 그 아내도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괴물같은 황소가 남편의 허리를 물고늘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치고 있는데, 그 때 남편이 깨워서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차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전수에게 여러 번 조심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 날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뒤에서 버스를 들이받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까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중상이었습니다. 그 후에 치료를 받고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양구로 전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옆집에 사는 권사님이 교회에 가자고 권하였습니다. 건강 때문에 불안과 공포, 좌절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예수를 믿어 보자고 하니까 무엇이든지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두말하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그 후 사단장이 새로 왔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단장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매주일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듣게 되고, 듣다 보니까 깨달음이 오고,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말씀을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령까지 있다가 제대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얼마 안 되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도 다섯 번이나 사고를 당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때마다 진단하고 기회를 주었는데도 깨닫지 못하다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닥치거든 깨달으십시오. 이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믿음이 있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깨우쳐 준 것입니다. 깨달음 때문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II. 사랑의 즐거움 (5-8절)
① 성령을 통한 사랑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됨이니"(5절)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처음 환난을 당할 때는 당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참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낳고 참아가는 중에 최선의 노력을 하다가 보면 연단이 쌓여 갑니다. 연단의 훈련이 끝나면 희망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환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이 소망을 낳는 줄 깨닫는 것이 중요하며,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영, 성령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간에 말할 수 없는 큰 수해를 입었습니다. 잃은 것이 많았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 어려움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잃어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손해를 계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는 것이 낫지, 돈을 더 좋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과 같습니다. 성령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수재를 당하였어도 우리 속에 성령이 들어와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때요, 믿는 사람이 환난을 당할 때는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관심이 있을 때입니다. 그만큼 도움의 손길이 더 있는 때입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자식보다는 병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는 자식을 더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바 되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② 예수님의 사랑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의인을 위해서도 죽기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죽어 주셨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위해 죽는 일은 많지만, 강자가 약자를 위해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이 종을 위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즉,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연약하고 보잘 것없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약대로, 즉 하나님의 약속대로 죽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누르며 뱀은 여자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기약을 정해 놓고 죽을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소망이 없는 자, 아주 몹쓸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위해 죽어 줄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인간은 죽을 때가 가장 외롭습니다.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죽을 때 같이 죽자고 해보면 뿌리치고 도망갑니다. 절대로 같이 죽을 수 없습니다. 혼자서 죽어야 하니까 외로운 것입니다. 다른 일은 그 일을 같이 하거나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대신하지 못합니다. 이런 죽음을 나를 대신하여 죽어 주셨습니다. 도대체 세상에서 나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내 아들 딸이 죽겠습니까, 내 아내가 죽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즐거움이 넘칩니다.
③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절)
구약에 재미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다윗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그 아들 중에 압살롬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왕위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멀리 가서 군사들을 훈련시킨 다음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서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다윗은 밤중에 도망하였습니다. 도망 가면서 그를 쫓아온 군인들을 다 모아서 정비한 다음 다시 반격을 하였습니다. 아비새와 잇다와 요압 등 세 대장에게 군사를 맡기면서 부탁하는 말이, 그렇게 못된 내 아들이지만 잘 선대하여 주어라, 즉 죽이지 말아라 그 말입니다. 싸우다 보니까 압살롬의 군대가 지고, 반격하는 다윗의 군대가 이겼습니다. 압살롬이 나귀를 타고 도망 가다가 그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여지없이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쫓아가 그의 목을 잘라 버렸습니다. 다윗에게 가서 승전을 알렸을 때, 다윗이 아들의 죽은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십니까? 사무엘하 18장 33절에 보면,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에 있는 다락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습니다. 세상에 굉장히 고약한 아들인데도 이런 아들이 죽었다고, 차라리 내가 죽고 네가 왕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뻔 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런 못된 아들에게도 베푸는 아버지의 사랑은 이렇게 지극합니다. 아들의 죽음을 그렇게 슬퍼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의 외아들, 순종밖에 모르는 그 아들을 아예 이 세상의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이 본문과 비한다면, 즉 다윗의 심정과 비한다면 아마 하늘에서 울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픔과 사랑, 하나님이 하늘에서 울고 있을 그 사랑은 우리가 이 땅에서 생각만 해도 즐거워 해야 할 일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사랑의 즐거움 입니다.
III. 영생의 즐거움 (9-11절)
① 구원의 영생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절)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토록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천당에서만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가서도 죽지 않습니다. 천국 가서도 오래 살고, 지옥에서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천국 가서는 구원 얻은 사람, 즉 하나님의 진노의 줄에 서 있던 사람들 중에, 믿습니다 하고 의인의 자리로 옮겨져서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하며 구원을 얻은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도 다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온갖 고난, 불행과 고통과 좌절뿐입니다. 이곳이 지옥입니다. 그런고로 영생을 왜 즐거워 할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같이 하는 구원 때문에 지옥의 진노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까닭에 즐거워 할 수밖에 없는 즐거움이라고 믿습니다.
② 화목의 영생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였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절)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천국에 살면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원수지간으로 지내면 어떻게 합니까? 차라리 지옥에 가는 것이 낳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아내와 크게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결혼한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하는 말이, "너 결혼하게 되면 한 번은 싸울 거다. 그 첫 싸움에서 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싸움부터 져 줘 버릇하면 계속 져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싸움에서이기면 계속 이기니까, 하여튼 지지 말라는 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결혼한 지 3,4년이 지나니까 짜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갔다가 늦게 오면 왜 늦게 오느냐, 어디 가면 어디로 간다고 말해라, 자기한테 보고하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어떻게 다 보고하고 다닐 수가 있습니까? 참다못해 싸움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동안 쌓였던 불평 불만을 다 말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목사의 집안에서 농짝을 부수겠어요, 고함을 치겠어요. 그래서 언제까지든지 말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며칠 지나면 항복하겠지 했더니, 항복을 해주어야 어떻게 하지요. 3일이 지나니까 급한 사람은 저였습니다. 밥을 해 놓고 먹으란 말을 안 합니다. 밥을 해서 애들에게만 먹으라 합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빨래를 안 해 주니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애들 있는 데서는 싸우지 않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래서 애들을 시켜 와이셔츠를 달래 오고 빨아서는 아이들을 통해서 보내고... 지옥 지옥해도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렇게 다정하던 부부가 불화가 생기고 대화가 끊기니까 바로 지옥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죽어도 싸움을 안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대화가 활발하고 화목한 가정은 천국입니다. 대화가 끊어지고 불화 한 가정은 지옥입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산다는 것, 즉 영생의 즐거움이 여기 있는 줄로 압니다.
③ 체험의 영생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5절)
바울이 한 말입니다. 바울이 그 전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예수를 안 믿어도 자기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때는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를 안 믿었으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잘못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의 뼈아픈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즐거움을 선생한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보며, 만지며, 체험하며,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부터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이나 지식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론을 지어 성도의 즐거움을 말씀드리면, 믿음의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자체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면 이미 성도는 아닙니다. 다음으로는 사랑의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생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영생은 성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상의 즐거움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사람의 세가지 축복
로마서 5:1-11 / 박조준 목사
영국의 유명한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로마서를 강해한 로이드 존스 박사는 로마서 5장을 스물 여 섯 시간 강해했고, 그것 하나로 책을 한 권 출판했습니다. 그분도 강조했지만 로마서 5장 1∼11절 까지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전체를 바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박사 는 5장 1∼11절을 14시간에 걸쳐서 자세하게 강해했습니다.
한 구절을 가지고 한 시간 이상씩 강해 한 셈입니다. 이는 이 부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고 했습니다(1절). 믿는 사람의 첫째 복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 세상은 화평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화평을 찾으나 화평 없이 불안과 초조, 그리고 공포 속에 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이 마음 의 평화를 위해서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약을 먹어보기도 하고, 육신의 쾌락에 빠져보기도 하며, 심지어 이단적인 집단에 끌려 다니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모두가 평화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렇게 안타깝게 평화를 찾고 계신데 그것이 사실 여러분의 제일되는 필요는 아닙니다. 정말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입 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 피조물이 조물주 되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때, 더구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과 원수가 되었을 때 그 마음에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범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말미암 아 사람의 마음속에서 평화도 기쁨도 만족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이 하나님과 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마음의 평화를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평화를 가지기 원한다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 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 화는 사람들이 어떤 어려운 문제와 고통과 시련으로 에워쌈을 당했을 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시련이나 고통, 환난과 역경을 어떻게 버티고 서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화를 얻기 전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기 전에 하나님의 평화를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까? 그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수렁에 십자가로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의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이 죄의 담이 가로막혀 있어서 미움과 싸움의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과거의 그 모든 적대 관계는 사라지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의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 니까? 이러한 축복을 받으면 전에는 미워했으나 이제는 사랑하게 됩니다. 전에는 싸웠으나 이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전에는 불안했으나 이제는 담대하게 됩니다. 화평이란 필연적으로 두 인격에 관계됩니다. 어느 한 편에서 화평하기를 원한다고 해서 화평이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 간이 여기에 응하지 아니하고 각기 제 길로 갔었습니다.그러니까 자연히 인간 세상은 혼란과 공포, 그리고 불안한 분위기로 휩쓸려 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범한 인간, 하나님과 원수 가 된 인간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가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평 화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공로를 힘입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고 했습니다. 원어상의 말은 부정과거형 입니다. 단번에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단번에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 이 누리는 첫째 복입니다. 이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쩌,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 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2절). 하나님과의 평화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즉시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계속적으로 누리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의 진행 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매일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 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은 하나의 진행 과정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은혜와 지식 가운데서 날마다 자 라 가는 것입니다. 저더러 목회하면서 가장 보람되고 즐거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예수 믿는 심령이 은혜와 지 식에서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점점 자라는 모습을 볼 때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은 이 렇게 점점 성화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은혜 밖에 있었지만 이제 는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에 들어감 이란 말은 신약 성경에 세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성경학자들은 소개한다 는 말로 해석합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개장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 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소개하는 일 을 하십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심령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우리를 데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 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이 은혜입니다. 값없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 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깊이 생각하면 역시 의미 깊은 구절입 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리에 인도해 들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전에 받을 수 없었던, 하나님께 로부터 나오는 은사들과 축복들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하자면 우리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왔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분 앞에서 전혀 새 로운 방식으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십니다. 우리를 받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받아들이기를, 기뻐하기를, 우리를 축복하기를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신분이 이처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집 밖에서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에 들어 올 수 있는 특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배설되는 놀라운 잔치에 참예하는 영광을 누 리게 된 것입니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2. 큰 죄악에서 건 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우리는 이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서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 었고,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가는 것을 기 뻐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영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준비하시고, 우리 위에 축복을 쏟아 부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서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할 것이라.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바친 바 있는 허드슨 테일러가 새 용기와 힘을 얻고 일생에 큰 변혁을 일으킨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서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로 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 있는 것 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확고하고 견고하게 자리잡고 그 안에 튼튼히 서 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허락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굳 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 는 은혜의 자리에 있다는 것과 그 안에서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안전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놀랍고 더 귀한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따지고 덤벼드는 그리스 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긍지를 가지고 은혜 안에 서 있다는 사실을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이 없습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큰 은혜, 큰 축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2절). 믿는 사람이 받는 첫째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 누리는 것입니다. 화평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둘째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누리는 계속적인 축복입니다. 날마다 담대히 하나님께 나 아갈 수가 있습니다. 은혜 안에 삽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받는 셋째 축복은 궁극적인 축복입니 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한다 는 말은 자랑으로 여긴다 는 뜻입 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했는데 여기 쓰인 말과 정확하게 같은 말입니다. 즐거워하는 것 이상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하지 않고 즐거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즐거워한다 는 말은 자축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성공했거나 무엇을 받았을 때 기쁨을 스스로 축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축을 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자랑하 고 뽐내고 영예롭게 생각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말씀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는 말씀에서 바울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이 그렇게 벅찰 수 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자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고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스데 반뿐만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도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영광스런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복스러운 비전이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 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생 각해 보셨습니까?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면 그 영화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면 그 결과 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은혜 안에 서 있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고, 그 영광을 바라 보고 기뻐하며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칭의의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사실을 기뻐해야 하고, 자랑해야 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확신 이 없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다면 그 사실 자체가 전도가 될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나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그것을 보고, 그것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공을 바라볼 때 돌에 맞 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변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살기등 등한 사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지금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길을 잃고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모르고 삽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 믿는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떻게 저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수술 경험이 없어 손을 비비며 당황하는 의사에게 시험삼아 한 번 수술해 보십시오 하면서 그 몸을 내맡 길 환자가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확신에 차고, 우리의 삶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볼 때 세상 사람들 은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역경과 질고가 저희를 둘러 싸고 있는데도 그 삶과 성품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세요 하면서 우리에게 끌리게 되고, 우리에게 서 삶의 비결을 알아보려 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바울의 처방을 보십시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 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 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현재 당하는 환난보다 저 멀리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의 구름만 본 것이 아니라 구름 위의 태양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날마 다 은혜 안에 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어떤 환경에서도 즐거워 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다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로마서 5:1-11 / 김삼환 목사
우리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생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자녀가 부모를 잃어버릴 때 오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슬픔도 걱정도 염려도 아버지를 떠나서 온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고통 하는 모든 원인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버림받음으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국가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어떤 것도 우리 인간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에 보면 하나님을 떠나서 얻은 물은 터진 웅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이 고인 것 같아도 하루가 지나면 그 물은 점점 줄어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느냐? 기독교는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의 품안에 안기면 창조주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이십니다. 그에게 나아갈 때 살 수 있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 아들 하나목사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서양사를 전공 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계속해서 교회사를 전공하고 지금 박사과정도 교회사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미국의 역사를 전공해 보니까 미국의 역사가 짧은 역사 속에 이 엄청난 번영과 발전은 어려울 때마다, 발전할 때마다, 새로운 새 시대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적 부흥이 일어나면 그 땅이 살아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살아나는 것이 미국의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제1차 대 각성운동은 죠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는 유명한 온 미국에 성경공부 바람을 일으키고, 기도의 바람을 일으키고 회개와 경건의 바람을 일으키면서 미국은 드디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놀라운 축복이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제2차 대 각성운동인 1800년도 초반은 미국 전역에 복음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이후에 남북통일이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부흥운동은 디엘 무디나 빌리 선데이같은 이런 분들이 일으켜서 미국이 오늘날 세계 앞에 엄청난 이런 능력 있는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삽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 다른 부흥은 오히려 인류역사에 보면 위기가 오고, 타락이 오고, 도덕적인 위기가 오며 사회의 모든 균형이 오히려 정신적으로 황폐해서 더 큰 문제가 주어지게 됩니다. 영적 문제가 인간의 문제를 바로 해결하고 영적 부흥이 다른 부흥을 가져올 때 이것은 정상적이고 아무 부작용이 없는, 모두가 다같이 누리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은혜 받고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문제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전에 저희들이 시계를 찼다가 고장이 나면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도무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계방에 가져다주면, 시계방 주인이 눈에 뭘 가져다 끼고 보면 간단합니다. 먼지 툭툭 털고 간단하게 해가지고 8천원 금방 받습니다. 그리고 시계는 잘 돌아갑니다.
여러분, 우리의 고장 난 우리 마음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본인은 그걸 모릅니다. 평생 모르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게으릅니다. 게으름을 잘 모릅니다. 본인은 모릅니다. 남의 말을 하고 계속 다니지만 본인은 그걸 잘 모릅니다.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그걸 잘 모릅니다. 늘 가정불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걸 모릅니다. 문제가 본인에게 있는데 자꾸 주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일생을 그렇게 고생합니다. 우리 마을에도 어떤 사람은 평생 도박을 하는데 문제가 본인에게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주님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버지 품 안에 갈 때 나를 알게 되고 또 나를 고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올 때 우리가 비뚤어졌던, 부정적인, 아버지를 떠나서 생긴 상처들이 모두 치료가 되고 싸매어지고 해결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의 품안 에 안길 때 그가 주시는 은혜로 우리는 모든 것이 소생할 수 있습니다. 봄이 되어서 만물이 소생합니다. 일어납니다. 만물의 소생은 땅속에서 따뜻한 열기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보내는 모든 물들이 전부 나무를 살리고 만물을 소생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아, 온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일어나면 이 땅에 새로운 땅으로부터 우리의 얼어붙었던 이 모든 사회, 냉랭한 이 사회, 병든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따뜻한 열기가 예수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져서 이 나라를 살리고 우리의 황폐한 모든 사회를 치료하고 병든 우리의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새로운 기적으로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고쳐주실 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에게로 가야합니다. “너희는 브엘세바로도 가지 말고 벧엘로도 가지 말라 나를 찾으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주님에게로 가야, 주님으로부터 길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도 어떤 절망도 아무리 어려운 것도 주님에게로 나아가면 문제가 보이고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국가의 모든 산재한 어려운 일들, 우리 주 목소릴 한 번 발하시면 오늘 성가대에서 찬양했잖아요? ♬신기하고 놀라와라♬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는 확실하게 알아야 할 정의, 성경이 가르쳐주는 확실한 주제가 있습니다. 나 믿으면 살고 나 떠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반드시 안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너희가 나를 떠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겁니다. 뭐 그런 일이 있겠느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 주님을 떠난 이 지상에 수백 개의 나라가 다 쓴잔을 마셨습니다. 쓴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 나라 전체가 아무리 힘써도 애써도 안 되는 것을 우리는 러시아나 폴란드나 헝가리나 동독, 경계를 하나에 두고 서독은 이 지상에 두 번째 나라인데 동독은 지상에 헤어져서 저주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남, 북한이 똑같이 분리되어서 우리는 이렇게 살고 북한은 저렇게 전 세계에 제일 비극의 땅이 되었습니다. 북한에 지금 개성공단도 세우고 뭐 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쏟아 부어 주어도 그 영혼이 죽었는데, 하나님을 떠났는데,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도 인생이 불행해지는데 하나님을 떠나면 천 가지, 억 천 가지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북한에도 교회의 문이 열려야 됩니다. 새벽기도의 문이 열려야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영적으로 저 민족이 나올 때에 대동강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임할 겁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님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나를 떠나면 안 된다 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7장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성경은 끊임없이 이것 하나입니다. 나 떠나면 안 된다, 저주 받는다, 멸망당한다는 겁니다. 에이 천만의 말씀, 그렇지만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걱정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생수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얻는 행복은 터진 웅덩이라고 했습니다. 잠깐은 행복해요. 저는 서울 와서 목회만 40년을 했습니다. 1970년에 왔으니까 만 38년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국가의 흥망을 많이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이번에도 새로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이제 취임식이 끝났습니다. 대통령을 만든 힘 있는 좌정승, 우정승이 있습니다. 박대통령에게도 있고 그 다음 분에게도 있고 다 있었습니다. 그 분을 고락을 같이하고 감옥에도 같이 다니고 정말 충성하는 좌정승, 우정승이 있어서 그 분들은 대통령이 되고나서 최고의 막강한 힘을 휘둘렀습니다. 그 분을 터치만 해도 장관이 바로 되었습니다. 국회의원이 바로 되었습니다. 참모총장 바로 되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수십 명입니다. 놀라운 것은 잠깐입니다. 잠깐. 그 분들은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죽은 분도 많고 반 이상이 감옥에 갔습니다. 천하에 누구이고 간에 다 가는 겁니다. 똑같이 가는 겁니다. 오늘날까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습니다. 어마어마한 수많은 재벌들이 모두 줄서고, 권력자가 모두 줄을 섰어도 지금은 한 사람도 그를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권력을 가져도, 정치를 해도 주님을 꼭 잡고 권력이나 재물을 잡아야지 이 분, 대통령만 꼭 잡으면 봉하에 갈 때 어떻게 할 겁니다.? 따라갈 겁니까? 혼자 살기도 어려운데 어디로 갈 겁니까? 여러분이 사업을 잡는 것 좋습니다. 물질을 잡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잡고 물질을 잡아야지 주님을 떠나서 이것만 잡고 있다가 돈이 막 돌아버리면 뭐를 어떻게 할 겁니까? 사랑하는 것 좋습니다. 남편을 의지하는 것 좋습니다. 아내 사랑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잡고 잡아야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는 나의 힘이십니다. 우리는 잘 사는 것도 주 안에서, 평안도 주 안에서,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끝까지 잘 갈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못 가면 그건 못 가는 겁니다.. 끝까지 은혜 못 받으면 그건 못 받는 겁니다.. 끝까지 행복해야 그게 행복이지 중간에 끊어지는 것은 모든 것이 참된 길이 아닌 겁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나의 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번영의 길로 인도하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어려움에도 그는 나를 지키고 버리지 않습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
오늘 우리 사회의 이 모든 갈등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수습하고자 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라크 자이툰 부대에 지난해에 다녀왔지 않습니까? 벌써 2년이 되었네요. 정말 힘들게 다녀왔습니다. 여기서 우리 국방부에서 내준 비행기를 타고 쿠웨이트에 가서 거기서 군사작전용 비행기를 타고 이라크로 갔습니다. 참모총장 하신 분과 내 옆에 전부 군대 장군 출신들이 앉고 완전무장해서 그 비행기 안의 온도가 40도가 훨씬 넘는데 완전무장을 하고 다 쓰고 있으니까 땀이 비 오듯 합니다. 이라크에 다 가서 30분을 앞두고 밑에서 미사일을 쏘면, 총을 쏘면 안 맞도록 하기 위해서 전술비행을 한다고 막 비행기를 돌리는데 옆에 있는 분들이 전부 다 흔들리고 걷잡을 수 없이 어려웠습니다. 모두 벌벌 떨고 언제 총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리고 조종사가 자꾸 더 위협을 하는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모두 얼굴 색깔이 모두 달라지는 겁니다. 여러 가지 행사를 많이 했는데,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은 자이툰 부대가 완전히 쿠르드족만 있는 지역에 가서 그 마을에 집중적으로 봉사하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 가서 초등학교를 세우고, 공부라고는 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하나 하나 기술도 가르치고 봉사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길도 다 닦아주는 겁니다. 제가 가니까 쿠르드 도지사도 오고 그 지역의 유지가 전부 왔어요. 그래서 사단장인 우리 집사님하고 가서 행사에 참여를 했는데, 너무 놀라운 것은 이 마을이 천년이 되도록 마을 청소를 해 본 일이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전부 담을 집집마다 쌓고, 집 안에는 꽃이 있고 하지만 모든 쓰레기는 담 너머로 갖다가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네에 있는 쓰레기가 이 담 위까지 올라오는 겁니다. 천년동안 이걸 해 본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네에 들어가면 악취가 말할 수 없고, 거기서 비에 젖어 물들이 병을 가져다주고 흉악한데도 그 사람들의 생각은 이것은 남의 것이지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 집만 깨끗하면 됐지 그래서는 금방 청소해서 넘기고 밖으로 모두 넘기는 겁니다. 집집마다 담을 쌓아가지고 넘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자이툰 부대에서 가서 포그레인으로 천년이 넘은 쓰레기를 치우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눈으로 어떻게 보면 간단하지만 저들은 몰랐습니다. 백 년 전에 우리도 선교사들이 왔을 때에 모두 이랬지만 우리도 그걸 몰랐습니다. 복음의 빛이 비취지 않으면 알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할 때 내 문제도 깨닫게 되고 자녀의 문제도 깨닫게 되고, 사회의 곪아터진 이 문제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의 영이 함께하시고 주의 복음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면 살고 생명이 일어납니다. 기쁨의 소식입니다. 모두 교회에 나와서 새 생명을 얻고 영적 부흥을 가져다주면서 우리 모두에게 부흥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 우리교회에 취재하러 방송국마다 많이 오셨습니다. 우리나라 큰 방송국에 취재 본부장 하신 분이 저하고 만나서 그러는 겁니다. 잠깐 기자회견 해 달라고 해서 했는데 참 좋은 이야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목사님, 제 밑에는 기자만 130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는 뉴스를 전해도, 취재를 해도 복된 소식은 취재를 못합니다. 이 세상 험하게 돌아가는 복잡한 것은 알고 그걸 찾아낼 뿐이지 오늘 교회에 와서 우리 영혼이 소생하고 치료받고 희망을 갖고 우리를 고치고 사회를 고치고 가정을 고치고 우리 모두가 사는 생명의 복음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야! 말을 바로 하더라고요. 정말 놀라운 소식이지요. 오늘 교회에 나올 때만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만이 우리는 복음의 소식을 듣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는, 우리 모두가 은혜 받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되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서 그의 주시는 은혜로 우리 모두가 사는 이 엄청난 축복이 오늘도 앞으로도 자손만대에 여러분과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나아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우리입니다. 우리를 잃어버리신 하나님 아버지가 찾으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우리를 찾으려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고난과 저주를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함을 받고, 그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 모든 죄의 사유함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 품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 누구라도 본인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영원히 없습니다. 그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용서함을 받고 그의 의로 말미암아 내가 의로워지고 그의 사랑으로 내가 용서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놀라워라, 놀라워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지휘자가 곡을 참 잘 선택했습니다. ♬신기하고 놀라워라 나의 노래 끝없네 신기하고 놀라워라 나를 위한 그 사랑♬ 놀라운 사랑입니다. 주님의 큰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와 함께 하므로 그 안에서는 누구도 절망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주의 품안에 안기면 누구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미국에 우리 한국 사람으로 가서 지금 성공한 이승복 박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1973년에 미국으로 초등학교 때 이민을 갔습니다. 1983년 고등학교 다닐 때 체조 연습을 하다가, 이 사람은 세계적인 체조선수가 되는 게 꿈이어서 국가대표가 되어서 올림픽에 나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공중회전 하다가, 540도를 막 돌리다가 떨어졌는데 머리가 먼저 떨어져서 완전히 신경이 다 끊어졌습니다. 이 절망, 이 위기 가운데 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움직이지 못하는 이 어려운 가운데 자기 눈앞에 글자가 하나 보이는 겁니다.. 환한 글자가 비쳐지는데 그 글자가 "G O D" 놀랍습니다! 그 글자를 보면서 한 순간에 힘을 얻은 겁니다. 그렇게 억누르던 절망도 다 지나가고, 스스로 말하기를 벽돌이 한 집과 같이 억누르는 그 모든 것이 다 물러가고 기쁨이 찾아온 겁니다.. 소망이 찾아온 겁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3장 16절에 울고 은혜를 받아서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다시 공부를 했습니다.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보건 학 석사를 했습니다. 컬럼비아대학도 일류대학입니다. 다두머스 의대라고 하는 미국의 최고 명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최우수로 졸업을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하버드대로 옮겨져서 최우수 인턴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존즈 홉킨스라고 하는 세계적인 병원에서 재활분야를 담당하는 의사가 되어서 간증하러 한국에 왔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마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떤 환난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절망도 절망이 되지 않습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걸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스스로 서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건강에 기대고, 인기에 기대고, 자기 외모에 기대하고, 부모를 기대하며 권력을 너무 기댑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대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홀로 설 수 있습니다. 도와주어도 좋고 안 도와주어도 좋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예수 안에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당선되신 우리 이명박 장로님을 보세요.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가난합니다. 먹을 것 없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시장에 가시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얼마나 어렵습니까? 겨우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도 어렵게 공부하고 고등학교는 완전히 포기하고 어머니하고 같이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는 겁니다. 국화빵도 팔고 호떡도 팔고 떡볶이도 팔고 오뎅도 팔고 어머니하고 같이 앉아서 포항 시장에 있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더랍니다. ‘야, 우리가 같은 장사를 둘이 앉아서 하면 수입이 똑같으니까 너는 너대로 해라’ 하시더랍니다. 그렇지요. 손님이 연달아 오는 것도 아니고 둘이 앉아가지고 할 필요가 뭐 있냐? 나누어서 하자고 하시더래요. 그래서 자기에게 어머니가 뻥튀기하는 걸 하나 사 주시더랍니다. 밑에 불을 넣어서 돌리다가 잡아당기면 팍 하고 튀겨지는 그걸 사주어서 포항여고 앞에서, 여학생들 앞에서 그거 하는 것이 너무 창피해가지고 큰 모자를 덮어 쓰고 여학생을 안 보려고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 때는 여학생이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 때잖아요? 죽어도 여학생한테 잘 보이려고 얼마나 온갖 노력을 다해도 쳐다보지도 않지만 하여튼 얼마나 신경 씁니까? 그래서 거기서 뻥튀기를 하는데 하루는 누가 와가지고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더랍니다. 그래서 머리를 드니까 어머니더랍니다. 어머니가 ‘야, 장사를 하려면 장사꾼이 돼야지, 장사는 손님하고 얼굴을 봐야 그게 고객이 되고 또 오고하는데 쳐다보지도 않는데 누가 오겠느냐?’ 하면서 모자를 확 가지고 가 버렸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4시면 어머니가 모두 깨워서 온 남매들을 불러서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낙심하지 않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좋아서 낙심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교인들은 어려워도 주님을 믿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몇 십 년 기도해도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또 데모하다가 구속당해서 6개월간을 감옥에 있으니까 어머니가 늘 면회 오고, 대학에서도 고생하고 전국에 그 때 일본하고 한일관계 정상화 한다고 데모하느라고 고려대학교 학생회장을 하면서 전국 데모를 이끌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또 종로 국회의원을 하다가 벌금형을 받고 국회의원도 2년 밖에 못하고 또 떨어지는 겁니다. 내가 죽 보면서 이렇게 안 되고, 될 만하면 안 되고, 또 될 만하면 안 되고 그러나 낙심하지 않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생활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절대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잠깐 안 되어도 이것을 쉬는 기간으로 생각하고 더 기도하고 책도 많이 보고 연구해가지고 더 앞으로 나갈 생각을 해야지 안 되니까 죽어야 되겠다. 하고 내려다보고 그러면 안돼요. 이건 커피 타임이다, 쉬는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휴식 시간이다. 이건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기회를 주시기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이 세상에 성공한 모든 사람은 안 될 때 낙심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의지하고.. 할렐루야!
저는 이 지역에서, 사실 제가 하일동에서 목회를 10년을 했기 때문에 자전거로 이 지역을 많이 다녔습니다. 광나루까지 제가 신학대학 다닐 때도 3년을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습니다. 항상 자전거를 탔습니다. 제 아들 하나 목사는 앞에 앉게 하고, 그 다음에는 주나는 내가 등에 업고 크게 의자를 만들어서 집사람을 앉히고 솔사모를 태우고, 늘 다섯 명을 태우고 가다보면 하나 목사가 자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떨어지면 또 갖다가 올리고 그러면서 안 다니는 데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차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늘 그렇게 다녔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전거를 잘 탑니다. 천호시장을 늘 다녀도 핸들을 거의 안 잡습니다. 자전거를 잘 탑니다. 한 발로도 타고 별의별 묘기를 다 부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어려움에 대한 적응을 잘해야 합니다. 꼭 차를 타고 교회에 나와야 나중에 잘 되는 게 아닙니다. 자전거에 온 식구 다 태워가지고 나와도 나중에 얼마든지 큰일을 할 수 있는 걸 믿어야 합니다. 조금만 없으면 침울해지고 조금만 안 되면 낙심하고 그러면 안됩니다. 창세기 15장 1절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연약해질 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너는 낙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지금 사는 것 주님의 크신 은혜요 주를 믿게 된 것은 더욱 크신 은혜라 넘치는 주의 사랑 놀라운 주의 은혜 날마다 경험하며 주께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 고초 많으나 이길 힘을 주시니 더욱 크신 은혜라 답답할 때 기도로 쓰러질 때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니 진정 감사합니다♬
영적 부흥을, 심령의 부흥을 일으키십시다. 성령의 봄바람이 불게 하십시다. 여러분의 가정에 어두움의 세력을 다 몰아내고 여러분의 심령에 차갑고 냉랭한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다 몰아내고 ‘안 된다’ ‘할 수 없다’ ‘이까짓 거 살아봐야 그런 거 뭐’ 이런 짜증스런 생각들, 다 성령으로 불태워서 여러분의 앞날, 이 나라의 앞날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누리며 삽시다
로마서 5:1-4 / 조상호 목사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어느 목사님이 삼일교회에 오셔서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미국에는 팔로스 버디스(Palos Verdes)라는 부자 동네가 있는데, 어떤 교민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 동네에 수영장까지 있는 넓은 집을 사놓았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 바쁜 나머지 정작 본인은 그 좋은 집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작 그 집은 누가 누리고 있는가? 그 집의 가정부가 아침에 출근해서 청소 한 시간 하고 빨래 걸어놓고 난 다음에 사운드 좋은 오디오로 한 시간 동안 음악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시간쯤 누워 잔 다음에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주스 마시고 나서 5시에 퇴근한다고 한다. 반면에 집주인은 힘들게 일하다가 밤늦게 퇴근하니까 수영도 즐기지 못하고 텔레비전에서 한국 드라마나 보다가, 그 넓은 침대 다 놔두고 소파에서 잠이 든다고 한다. 그러다가 새벽같이 일어나 또 장사하러 나간다는 것이다. 다음 날, 가정부는 또 출근해서 어제 미처 다 못 들렀던 시디의 음악을 듣고 또 수영하고 그 집을 즐긴다. 그러면 그 집은 누구를 위한 집인가? 내가 만약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면 그 동네에서 가정부를 하고 싶다. 청소하고 나서 수영하고 즐길 것이다. 그 집이 지겨워지면 옆집으로 옮겨 가서 일할 것이다. 결국은 누리는 것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저는 지난주 주중에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 “결국은 누리는 것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는 이 부분에 공감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Clear Water 골프장 근처의 view가 끝내주는 값비싼 집에 산다 할지라도, 그 집에서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면, Addington 근처의 낡은 Flat에서 사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50인치 이상 되는 LCD 평면 TV를 설치했다 할지라도, 그 TV가 아깝다고 틀지않고 바라만 보고 있다면 20년도 넘은 13인치짜리 낡아빠진 TV보다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렇게 살아갑니다.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리지 못하고 못한 채 살아갑니다. 어떤 분들은 값비싼 본차이나 그릇 세트를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해 놓고는 아깝다고 10년 이상을 진열장에 고이 모셔놓고 식사 때는 중국산 플라스틱 그릇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선물로 받은 Montblanc 펜이 아깝다고 책상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한 채 2~300원 짜리 싸구려 모나미 볼펜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결혼반지는 보석함 속에 고이 간직한 채, 남대문 시장에서 2~3,000원에 파는 싸구려 반지를 끼고 다니다가 정작 결혼반지는 도선생에게 Donation하기도 합니다. 점퍼만 입고 다니다 보니 큰 맘 먹고 구입한 양복은 옷장 속에서 곰팡이가 피어 나중에는 입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좋은 집, 좋은 가구,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핸드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쓰지 않으면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용할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식장에 진열해놓은 본차이나 그릇을 꺼내 쓰시기 바랍니다. 보석함에 보관하고 있는 결혼반지도 끼시고, 양복도 옷장에 보관만 하지 마시고 교회에 올 때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든지, 예배드리기에 부적합한 소매가 없는 옷이라든지, 너무 짧은 미니스커트라든지, 속이 훤히 비쳐서 남들을 시험 들게 하는 옷이 아니라면, 옷장 속에 고이 간직만 하지 말고 주일에 입고 오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장롱 속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던 옷들에게 햇빛을 보게 하시기 바랍니다. 전병욱목사님이 주장한 것처럼, 누릴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리며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복들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두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매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OO하지 말라’ ‘OO하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만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며 아담을 얽매이게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 말씀보다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데, 이보다 앞에 있는 창세기 1장 27절부터 2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얽매이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며 아담과 하와에게 매이게 하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을 누리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 마음입니다. 또 에베소서 1장 3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말 성경으로 보면 시제를 잘 알 수 없지만, 영어 성경에 보면 ‘blessed us' 과거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복들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복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책 102쪽에 보면,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오래 전에 대서양 항공편이 흔하지 않았을 때, 한 남자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여행하고 싶었다. 이 남자는 열심히 일한 돈을 모두 모아서 마침내 순항함 승선권을 살 수 있었다. 당시 배로 대서양을 횡단하려면 2~3주가 걸렸다. 그래서 그는 여행 가방을 사서 치즈와 비스킷으로 가득 채웠고 돈은 바닥났다. 배에 오르자 모든 승객은 크고 화려한 식당에 모여 맛난 음식을 먹는데, 그 혼자만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자신이 싸 온 치즈와 비스킷을 먹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는 식당에서 풍겨 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부러워해야 했다.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배를 쓰다듬으면서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말을 할 때마다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도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밤에 자리에 누워도, 식당 안에서 배불리 먹는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 샌가 잠은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행해가 끝나갈 무렵에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식사 시간마다 저기에서 치즈와 비스킷을 드시던데 이유가 뭡니까? 왜 연회장에 들어와서 우리랑 같이 드시지 않습니까?” 이 말에 남자는 얼굴이 빨개졌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승선권도 겨우 샀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을 여유가 안 됩니다.” 그러자 상대편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래졌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선생님, 승선권에 음식 값까지 포함된 것을 정말 모르십니까? 음식 값은 이미 다 지불되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이 순진한 여행객과 같은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쪽 구석에서 자신이 싸 온 치즈와 비스킷을 먹었던 이 사람처럼,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 가운데, 이 순진한 여행객과 같이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주님께서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양, 즉 주님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더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보너스로 이전보다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좌우에 계신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누리며 삽시다!” 다시 한 번 인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삽시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에서 누려야 할 복은 무슨 복일까요? 우리가 무슨 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많은 복을 누릴 수 있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믿고 의롭게 된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두 가지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화평을 누릴 수
첫째로,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관계에 따라 화평을 누릴 수 있고 화평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관계가 나쁜 사람과 만나면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을 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다 할지라도, 관계가 나쁜 사람을 만나면 먹을 때는 모래알 씹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 할지라도 날마다 부딪히는 사람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아무리 안락한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아 있어도 부담스러운 사람이 옆자리에 앉아있으면 즐거운 여행도 지겹게 느껴집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에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져 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화평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불안과 염려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옮겨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다같이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화가가 자녀들을 데리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림을 그릴 테니 너희들은 잘 봐라. 오늘 그림의 주제는 평화다.” 아버지는 붓을 들어 바다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 거센 파도가 일렁거리는 험난한 바다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화가의 어린 딸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묻습니다. “아빠, 그거 평화가 아니잖아?” 아빠는 잠시 기다려보라고 한 뒤, 다시 배 한 척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무서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역시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그러자 또 딸이 묻습니다. “아빠, 배도 불안하잖아?” 아빠는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다시 붓을 들어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기울어진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을 모습을 그렸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아주 평화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자 딸이 또 묻습니다. “아빠, 파도가 세게 일고 배도 기울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평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봐!” 이제 화가는 배의 앞부분에 위치한 선장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선장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딸이 갑자기 소리칩니다. “알았다. 알았어! 저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렇게 평안할 수 있었던 건 예수님이 키를 잡고 계시기 때문이지?”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 삶에 파도가 출렁거린다 할지라도, 주님을 우리 인생의 선장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화평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세 번째 열매입니다. 따라서 평안을 주시는 성령님과 날마다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키를 성령님께 맡기고 성령께서 주시는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기쁨을 누릴 수
둘째로,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현대에 가장 팔리는 의약품 중의 하나는 신경 안정제 계통의 약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이 너무나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회사 중 앨리 릴리(Eli Lilly)라는 제약회사는 슬픔과 불안을 완화시키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한 약을 개발했는데, 그 약을 ‘해피 메이커(Happy Maker)' 즉 ‘행복을 만드는 약’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약이 바로 ‘프로작(Prozac)’이라는 약입니다. 인간의 정서를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닉을 조절하는 이 약은 슬픈 기능을 약화시키고 우울증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약은 시판된 1997~1998년 한 해에 27억 달러에 달하는 경이적인 매출액을 기록했고, 최근까지 2,5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약을 복용했다고 합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의 아내 티퍼 고어여사가 이 약을 복용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작(Prozac)’이라는 약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약을 복용할 때는 어느 정도 우울증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약효가 떨어지면 또 다시 우울해집니다. 우리의 영혼에 기쁨이 회복되지 않으면, 아무리 효능이 좋은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굴이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비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나게 되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바라 볼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예수 믿고 의롭게 된 성도는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하여 인내를 배울 수 있고, 인내를 하다보면 연단이 됩니다. 여기 ‘연단’이란 힘들고 고된 과정을 거쳐 새롭게 된 사람의 인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성숙한 인격으로 빗어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에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진희 목사님이 쓰신 <아침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목사가 나이가 지긋한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목회가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골짜기를 지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목사님은 그 젊은 목사를 포옹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기뻐하게나. 하나님께 감사할 일일세. 골짜기는 바로 백합화가 피는 곳이 아닌가?”
사실 골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골짜기는 사망의 골짜기요, 눈물의 골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골짜기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눈물의 골짜기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고난의 골짜기에서 아름다운 백합화가 피어나게 하십니다. 혹시 이 자리에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고난 속에서 낙심하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난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 연단 받은 후, 정금같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성숙한 모습으로 빗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11절 하반절에서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비록 눈앞의 현실은 힘들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고난을 통해 정금과 같은 모습으로 성숙될 것을 믿기에, 장차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날을 믿기에, 비록 현재의 고난이 고통스럽지만 그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는 신문기사에 보니까 김희선이란 탤랜트는 <가을 동화>라는 드라마에 여주인공 역을 제안 받았지만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송혜교라는 배우가 대신 출연하였는데, 그 드라마가 40%이상 시청률를 기록하였고, 송혜교라는 탤랜트는 <가을동화>를 통해 최고의 배우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김희선이라는 탤랜트는 <겨울 연가>라는 드라마의 여주인공 역을 제안 받았지만, 역시 거절했습니다. 결국 최지우라는 여자 탤랜트가 대신 출연하였는데, 이 드라마가 빅 히트를 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인기 배우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일본에서 <겨울 연가>가 한류열풍을 몰고 왔고, 그녀 또한 남자 주인공인 배용준과 함께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김희선이라는 탤랜트는 <파리의 연인>에도 캐스팅 되었지만, 거절하는 바람에 김정은이란 여자 탤랜트가 대신 출연하였습니다. 결국 <파리의 여인>이 60%의 시청률과 흥행을 이루었고, 김정은이라는 여자 탤랜트는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김희선이란 탤랜트가 캐스팅 되었던 작품을 거절하지 않고 출연했더라면, 지금도 인기가 있는 배우이지만 아마 동남아시아에서 최고의 한류스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희선이라는 탤랜트를 향해 굴러온 복을 차버렸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사는 한 할머니의 아들이 발에 병이 걸렸지만, 돈이 없어 수술을 하지 못해 발을 절단하는 바람에 평생 동안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도 날마다 묽은 죽으로 연명하고 살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죽은 후에 통장 하나가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통장에는 무려 1억불이라는 거액이 저금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억불이면 한국 돈으로 1,300억원 정도나 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바로 이 할머니가 히피 그린이란 사람으로서, 미국 최고의 구두쇠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읽으면서 전도서 6장 2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여기 ‘누리다'를 영어 성경에서는 ’to enjoy‘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enjoy하라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이 주셨는데, 자칫 잘못하면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누릴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그 복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는데, 팥죽 한 그릇에 이 장자의 특권을 팔아버렸습니다. 축복을 지키지도 못하고 차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복을 놓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신 복까지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탄은 진리를 오해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미 기쁨과 평강을 얻었음에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천국백성이 되게 하고, 이 땅에서도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2,000년 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정말 여러분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평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며, 더 나아가 받은 복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 속의 희망
로마 5:1-5; 마가 10:32-45 / 이병일 목사
한 신문사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에 대한 정의를 독자로부터 모집한 내용에 게재되었는데 1위부터 4위까지를 차지한 행복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위-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아이, 2위- 아기의 목욕을 다 시키고 난 어머니, 3위- 세밀한 공예품 장을 다 짜고 휘파람을 부는 목공, 4위- 어려운 수술을 성공하고 막 한 생명을 구한 의사. 이 결과를 보면서 과연 누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현재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수고를 통해 맺어지는 열매를 보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지난주일에는 “시련이 내게 오면”이라는 화두로 ‘하늘뜻펴기’를 통해서 함께 생각했습니다. 시련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여 더욱 성숙하게 만들기 위해 놓여 있는 징검다리(사닥다리)입니다. 시련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굳게 세워주고, 강하게 하며 기초를 튼튼하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내게 시련이 오면, 흐름을 타면서 쉼과 명상의 기회, 하느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시련을 견디면서 아픔과 고통을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 이러한 상황이나 현실은 우리의 삶에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상태만 계속해서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의 어느 순간에는 행복했다가도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사람은 기쁘고, 어떤 사람은 슬픔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즐거움으로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고통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실은 그 사람의 근기(마음)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됩니다.
고통, 슬픔, 불행 등은 우리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많은 방편을 찾습니다. 그러한 방편으로 쉽게 선택하는 것에는 약물이나 알코올, 멜로드라마를 보거나 따라하기, 쇼핑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방편으로 삼아 현실을 벗어나려는 것은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에 더욱 심하게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피하고 싶은 현실 즉, 고통, 슬픔, 불행 등을 시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련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몸부림(노력)이 들어 있습니다. 시련(試鍊)이라는 말이 “겪기 어려운 단련이나 고비”, “의지나 사람됨을 시험하여 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려운 일이 닥칠 때, 그것을 시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그 일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시련이 오면 그 시련을 기회로 삼는 사람은 자기에게 닥친 어려운 일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무작정 떨쳐버리려고 하지 않고, 그 일을 장작처럼 사용하여 불을 지피는 사람은 그 불을 이용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불은 열과 빛을 냅니다. 자기의 고통을 불태움으로써 승화된 그 빛과 열로 주위의 이웃을 따뜻함과 기쁨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닥친 어려운 일들을 시련으로 받아들여서 고난을 승화시키는 길입니다. 그 길의 시작은 ‘내게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끌어안고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평화를 누릴 때뿐만이 아니라 고난을 당할 때에도 희망을 품고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은 인내(견딤)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다.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한다(실망시키지 않는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닥친 고난을 견딤으로써 다가오는 희망은 그 반대로 고난을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그 시련을 승화시키는 힘을 줍니다.
고난 속의 희망이 품고 있는 그 힘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서술과 당위>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① 고난은 우리가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사회적입니다. 모두가 함께 아파하고 나누어야 하는 고난을 개인화시키려는 노력들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지속되었습니다. 고난을 감추려는 종교와 문화의 끊임없는 시도는 신앙이나 영성을 개인화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고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추동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강한 체험은 항상 사랑을 인식하고 자라게 하는 수련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한 번이라도 깊이 고난을 겪었을 때,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의 연대는 더욱 끈끈할 수밖에 없습니다.
② 고난은 우리가 기쁨을 이해하고 동시에 비판하도록 도와줍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깊은 사람으로 다듬어 나가고, 진정한 기쁨의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쁨이나 고난의 가식적인 껍데기를 벗겨줍니다. 고난은 허위적인 기쁨이나 힘에 의한 평화의 환상을 철저하게 깨뜨립니다.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힘의 횡포를 깨뜨릴 수 있는 또 다른 힘은 고난 속에서 함께 연대하는 힘입니다. 고난을 시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삶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것은 모두가 함께 고유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감각은 탈자동화(deautomatization)를 통해서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건과 사물에 대하여 자동적으로 반응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떤 사물의 모양과 색깔에, 어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나름대로의 선입견으로 쉽게 판단합니다. 우리는 기쁨에 대하여, 삶의 귀중함에 대하여 감각을 상실한 채로 살아갑니다. 날마다 마주하는 존재들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전혀 원하지 않았던 고난이 때때로 삶에 대한 사랑을 깊이 생각하게 하고 되돌려 줍니다. 게다가 고난을 통해서 얻은 사랑은 자동화된 기쁨과 행복을 비판하고 바로 볼 수 있게 합니다.
③ 고난은 우리를 강인하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시험하여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했던 시련을 감당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금욕주의처럼 열정을 통제하는 노력이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우러나오는 힘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시련과 연단을 통해서 얻은 희망이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또한 그 희망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맺어줍니다.
진정한 사회적 운동과 조직은 고난에서, 자기 자신의 고난에 매몰된 상태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고난에서 시작됩니다. 개인의 고난은 한 개인을 강하게 하고, 그 고난을 매개로 연대할 때에는 더 강하게 됩니다. 해방(구원)은 고난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거기에서 고난을 나눌 수 있고, 또 나눌 수 있는 곳에서 그 고난을 해결하고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함으로써 고난을 미화하거나 고난에 집착하거나 매몰되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에 대하여 그렇게 성찰하는 것은 고난을 받아들이는 길이 아니라, 고난의 종이 되는 길입니다. 그것은 가학과 피학의 노예가 되는 길입니다. 지나친 금욕주의처럼 고난에 집착하거나 매몰되거나 고난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받아들이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고난을 떨쳐버리려는 데에 있습니다. 고난을 끌어안음으로써 “고난 속의 희망”을 보기 위함입니다.
사순절의 상징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Violet)을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파랑과 빨강, 곧 신의 예지와 자애를 하나로 향한 것으로 해석되어,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몸을 희생한 ‘수난(受難)의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파랑과 빨강의 조화는 하늘(하느님)과 인간(피)의 조화를 나타내고 신성과 고귀함을 상징합니다. 이 보라색이 바로 고난 속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받은 유혹과 시련의 기간을 상징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기의 삶과 신앙을 점검하고 돌아보는 절기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3일 정도 축제를 합니다. 그 축제를 ‘사육제’(canival)라고 하는데, 이는 ‘고기이여’(carni), ‘안녕’(val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금식과 기도로 이 기간을 보냈던 로마 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나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나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면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어떤 고난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아픔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 미래를 위한 시련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그 시련을 승화시킴으로써 무엇을 깨닫고 얻고 있습니까? 나에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인내와 연단으로 이기고 희망이 솟아나기를 빕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고난이 지금 나와 같이 고난 받는 모든 생명들과의 연대를 강하게 하고, 온 생명의 해방을 부르는 운동의 시작임을 기억합시다. 사순절 하루하루를 살면서 고난 속의 희망을 발견하고 나누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망의 등대
로마서 5:1-5 / 조용기 목사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소망의 등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뉴잉글랜드 동부연안의 한 작은 어촌이 있었는데 그 동네 남자들이 고기 잡이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큰 폭풍우가 다가와서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저녁때 돌아와야 될 어부들이 한사람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온 어촌의 아낙네들이 모래사장에 모여서 통곡을 하며 울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남정네들이 돌아오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한 밤중이 되어도 소식은 없고 폭풍우는 점점 거셌는데 설상가상으로 동리에 불이 났습니다. 남자들이 없는 동리에 불이 나니까 이집에서 저집으로 화염이 충천하여 온 천지가 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아낙네들은 땅을 치고 울며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버리십니까? 폭풍우를 통해서 남자들은 다 바다에서 죽고 우리가 살고있는 삶의 터전인 집들은 다 불타 버렸으니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울며 아침을 맞으니 어느새 폭풍은 가라 앉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기 잡으러 나갔던 그 남정네들이 배를 타고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항구에서 내려서 기다리는 부인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었다.”고 고함을 쳤습니다. 폭풍우를 만나고 천지는 어두워져서 갈길 잃어 버리고 망망대해에 표류할 때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어디로 갈지 알수가 없습니다. 날은 어둡고 방향은 잃었으니 이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갈길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부르짖는데 마침 해안에서 불기둥 같은 화염충천한 광채가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동리에 불이난 것입니다. 그 불길을 바라보고 방향을 잡고 결사적으로 항해를 계속해서 그들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게 된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이 붙어 동리가 다 불탄 것이 엄청난 손실인줄 알고 절망하고 좌절했지만 하나님은 동리에 불을 나게 하셔서 그 불기둥을 통해서 소망의 등대를 삼아 난파당한 어선들이 돌아올 수 있게 비춰준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겠는데 소망의 등대를 가리는 비바람, 안개구름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1. 소망을 가리는 비바람과 안개구름
첫째로, 소망을 가리는 비바람과 안개구름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 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늘 일어나는 크고 작은 미움이 우리의 소망을 가리는 안개구름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이 들어오면 격랑이 일어나고 이성을 잃어 버리고 절망의 물보라가 마음을 때립니다.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갈곳을 알지 못하나니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함이라”고 요한일서 2장 11절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미워하면 마음에 어두움이 들어오고 눈이 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울뱀은 코너에 몰려서 그 마음속에 미움이 꽉들어 차면 자기 몸을 물어 뜯습니다. 미워하면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하기 전에 자기의 마음을 물어 뜯게 되고 자기의 삶을 물어 뜯게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상대보다도 자기에게 큰 손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5월 26일 새벽에 남편이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부인이 집에 불을 질러서 14살난 딸을 불에 타 숨지게 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결국 미움이 살인을 한 것입니다. 미움이란 것은 소망을 가리는 비바람과 안개구름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는 분노의 바람이 소망을 없애 버립니다. 여러분 분노는 파괴적이고 종말적인 감정입니다. 잠언서 15장 18절에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킨다고 말했고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분을 내면 파괴적이고, 종말적인 감정이 일어나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가 전쟁에 망한 근본 이유는 그의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머리가 명석하고 관찰력이 깊고 예리한 판단력과 비상한 통치력을 갖고 있었지만 어찌나 화를 잘내는지 자기의 비위를 조금만 거슬려도 미움과 분노가 충천하므로 그의 부하들은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등 자유진영과 힘겨운 전쟁을 하면서도 일시적인 분노로 말미암아 주력부대를 빼돌려 소련을 침공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그의 일생일대의 돌이킬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을 감행하였을 때 소련쪽으로 향하던 기갑사단만 그쪽으로 돌린다며 상륙을 저지할 수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낮잠이 든 히틀러를 겁이 나서 깨우지를 못했습니다. 깨웠다가는 벼락이 떨어질테니까. 항상 히틀러는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히틀러가 한참 잠을자고 일어 났을때 이미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완전히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한 뒤였고 이로 인해 독일은 패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분노가 결국 독일제국을 패망에 이르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안과 공포는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불안과 공포가 일어나면 삶의 활력을 빼앗고 암담하게 됩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공포에 눌리는데 무슨 활력이 생깁니까? 그저 암담한 따름인 것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4장 18절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말했습니다. 암을 두려워 하면 암이 형벌로 오고, 가난을 두려워 하면 가난이 형벌로 오고, 전쟁을 두려워 하면 전쟁이 형벌로 다가온 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슬픔. 이것도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슬픔은 여름 장마비처럼 가슴을 적시며 흘러 내리는 것입니다. 슬픔이 마음에 가득하면 삶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희망을 빼앗아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슬픔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겉으로 웃으면서도 가슴속에는 슬픔이 그 가슴속에 빗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슬픔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일을 당하고 마음에 꺽이고 좌절하지 않습니까? 이 좌절은 삶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억센 인생의 고난을 당했어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는 길밖에 다른길은 없습니다. 누가 좌절에서 일으켜 줄수가 있습니까?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 났다고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생애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요,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바하는 10살도 되기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결혼한지 13년째 되던해에 죽었고 다시 재혼했습니다. 자녀 한명은 정신박약자였습니다. 그는 노년에 앞을 보지 못해 눈이 어두워졌고 또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작곡을 했습니다. 수많은 그의 작품은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로서 불후의 명작들이 되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는 항상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희망과 놀라운 영감으로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것입니다. 좌절은 위 희망을 꺽어 버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좌절속에 하나님을 바라고 희망의 불길을 태우면 그 좌절이 오히려 위대하고 상상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인생을 살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악의 파도가 처오고 세속의 홍수가 넘쳐오고 질병과 생활고가 다가오면 소망은 어두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죄악과 세속의 홍수와 질병과 생활고속에 발버둥치고 그곳에 무엇을 얻었다 하나 모두다 물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안개 구름같이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 우리는 소망을 이룰수가 있습니다.
또한 불안한 정치, 국제 정세, 사회적인 갈등등이 삶의 소망을 어둡게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테러가 일어나고, 종교적인 갈등이 있고,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환경의 파괴 등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소망을 잃어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한 외국인의 63.3%가 한국 정부는 부패했다고 최근에 응답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문을 펼쳐보면 늘 매일같이 유괴, 납치, 살인, 폭행, 사회 전반이 불안심리가 꽉들어차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소망을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을 절망의 안개구름으로 덮어 놓습니다. 소망이 깨어짐은 삶을 포기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유명한 소설가였던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20세기 대표적인 작가중의 하나로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써 평생동안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분이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어 그를 믿음으로 키우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그러나 헤밍웨이는 성장하여 신앙에서 벗어 났으며 급기야 하나님없이 마음대로 살다가 자살로 끝났습니다. 그는 ‘무기야 잘있거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불후의 명작을 썼으며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으로 1954년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명예와 인기도 있었으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아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네 번째 결혼을 했으며 아프리카 여행중 두 번이나 비행기 추락사고로 부상해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재치있고 쾌활한 반면 성미가 급하고 호탕하고 이기적이고 개방적이고 쾌락적이며 술을 많이 마시고 복잡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원에서 전기쇼크치료까지 두 번 받았으나 1961년 옆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을 했습니다. 생의 마지막 무렵에 남긴 글에 보면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의 공허함속에 살고 있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빈 전구처럼 공허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부귀와 영화와 공명과 쾌락을 다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 쾌락은 바닷물과 같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출렁이는 바닷물이 많아서 마시면 시원할 것 같으나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소금기가 목에 붙어 더 목이 타서 나중에는 바닷물을 마셔서 배가 터져 죽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갈증을 채워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채워주지 못해요.
세상을 추구한 모든 사람들의 종국은 좌절과 절망과 자살인 것입니다. 마음에 허무와 무의미를 채울수가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과연 내게 관심이 있으신가?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절망속에 부르짖는 외침은 ‘하나님 과연 나에게 관심이 계신가요? 나는 이렇게 삶이 절망적인데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옵나이까? 내게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외칩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9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베소에서 그는 잡혀서 원형 운동장에서 수많은 사람 보는 가운데서 생사를 걸고 짐승과 격투를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미트리오가 일어나서 폭동을 일으켜서 바울을 처치하려고 해서 그 고난중에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여러번 파선을 경험하고 중병이 걸리고 또 육체의 가시등이 있어서 극도로 절망한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 같았으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경건하고 신령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고난이 안다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하고 신령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다가오지만은 고난중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고난을 밥으로 삼고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고난에 짓밟혀서 파멸하고 말지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을 이길수 있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크게 복받은 사람이나 그의 인생노정을 보면은 평탄한 노정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과 함께 항상 고난은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75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고향 산천을 떠나 아내와 롯을 데리고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에 왔으나 가나안에 오니까 처참한 기근입니다. 마실물이 없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불탑니다. 살아갈수가 없습니다. 같이 따라온 종들과 친척들은 다 뿔뿔이 헤어져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수없이 그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애굽 바로에게 그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수치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중첩된 고난입니까? 기근에다가 또한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아내조차 빼앗겼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 하고 번창케 함이라고 약속을 받은 사람이 이러한 험한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과 금을 많이 주었으며 많은 짐승과 노비를 받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터전을 잡고서 살기 시작했는데 얼마있지 아니하여 골육상쟁이 났습니다. 조카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짐승떼가 많아지고 조카의 짐승떼가 많아지니까 그 땅에 목초지가 많지 않고 우물이 많지 아니하므로 물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목동과 조카 롯의 목동이 싸우고 그리고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싸우게 되었습니다. 골육상쟁입니다. 말할수 없는 고통입니다. 안믿는 주위의 수많은 사람 앞에서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싸운다운 소문이 팽배하게 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를 불렀습니다. “조카야! 우리는 골육인데 서로 이렇게 싸워서는 안되고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나쁜 인상을 주느냐? 그러므로 우리 헤어지자. 네가 동으로 하면 내가 서로 하고 네가 저 앞으로 나가면 내가 뒤로 나갈 테니까 그렇게 하자.” 아브라함은 아마 기대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삼촌이고 그는 조카인데 “아이고 삼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삼촌이 먼저 택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택하지요.”’ 그게 인생의 도리 아닙니까? 그런데 조카는 고개 딱들고서 “예~ 내가 먼저 택하지요.” 저 요단뜰에 물이 흐르고 목초지가 좋은데 나 저리 가겠습니다.“ 아마 삼촌 아브라함이 ”이 고약하고 괴씸한 놈. 그래 아제비(?)가 먼저 택해야지 지가 먼저 택하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조카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카가 먼저 택하고 아브라함은 풀도 많지 않고 물도 없는 그러한 황막한 사막과 같은 곳에 남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이 있으므로 그 가운데서도 번창하고 잘 되었습니다만 나중에 조카 롯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시적으로는 번창하고 부자가 되어 잘 따랐으나 외국의 침략을 받아서 재산 다 뺏앗기고 포로로 잡혀 갔다가 아브라함에 의해서 겨우 구출되고 그 다음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할 때 사위들 다 죽고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딸과 함께 도망을 쳐서 집도 없는 산에 토굴을 파고 들어 앉아 살 수밖에 없게 된것입니다.
인생에 무례하게 행하는 사람은 끝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해를 보더라도 공의롭게 사는 사람은 끝이 좋습니다. 조카 롯은 토굴로 들어갔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승승장구하고 창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85세 그는 아들이 없어서 그 아내 사라의 권고를 통해서 여종 하갈을 첩으로 받아 들여서 이스마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로 가정에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사라하고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하고의 싸움속에 아브라함은 그 사이에 끼어서 아예 정신을 차릴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 쫓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결단코 그는 개인 생활에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100살이 되어서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을 낳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모리아산에 재물로 바치라고 그랬습니다. 자기의 100살에 낳은 아들을 각을 떠서 장작불로 태워서 재물로 드리라고 하니 여러분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갈갈이 찢어지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아들을 데리고 사흘길을 가서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장작불을 피워 놓고 아들을 잡으려고 목을 밣고 칼을 들었을 때 하늘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칼대지 말아라. 네가 이렇게 내게 순종하였으므로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하고 번창케 하리라”고 했는데 종국적으로 보십시오. 오늘날 이스라엘이 바로 그 촌부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온 한 민족이 된것입니다.
반드시 여러분 우리가 믿고 하나님을 따라 가므로 모든 일이 평탄하고 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춘하추동과 같고 변화무쌍한 기상과 같습니다. 봄이 왔는가 하면 봄을 잡아 놓을수 없어. 여름이 되고. 여름을 붙잡아 놓고자 해도 언간 가을이 오고 가을에 매달리고 있어도 언간 또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립니다. 어떻게 똑같은 것을 사람이 취할수 있습니까? 하루에도 기상이 변합니다. 아침에 날이 맑더니 낮에는 구름이 끼고 오후에는 소낙비가 쏟아지고 우울합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기상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 인생은 살아갈 동안에 내 운명을 내가 좌우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희노애락과 시련과 고통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내가 어떻게 좌우할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마치 춘하추동과 같고 기상의 변화 같아 우리의 힘으로 변화시킬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잠언서 27장 1절에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로 25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 매사는 인간의 힘으로 할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가 의지할 수 없습니다. 변화무쌍한 환경을 바라고 웃고, 울고, 발버둥을 치면 나중에 파탄에 이르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운명과 환경은 내가 변화시킬수 없지만은 그 가운데 내 마음의 자세와 태도는 내가 붙잡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붙잡을까요? 내 마음 나도 못붙잡습니다. 내 마음을 붙잡을 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께 의지하는 길밖에는 소망의 처소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 북방 국경 근처에 한 노인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노인이 기르는 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고 동정하자 노인은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른지 누가 아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몇 달후에 뜻밖에도 도망간 암말이 오랑캐족의 좋은 숫말 한필을 데리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와서 축하를 했습니다. 노인은 그 축하를 듣고 “그것이 또 무슨 화가 될는지 누가 아오?” 그런데 그집 아들이 좋은 말이 생기자 타고 달리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져서 장애자가 되고 말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자 노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또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혹시 복이 될지 누가 아오?” 그런지 1년후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이 마을 장정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서 전쟁에 이겼지만 거의 전사했는데 노인 아들만 다리를 다쳐서 전쟁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무사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 아들이 장애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맙고 전쟁 안나가서 살았으니 얼마나 좋소이까?” 그러니까 “또 장차 어떻게 될지 누가 아오?” 그 이야기는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여러분 전도서 7장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도 다가오고 곤고한 날도 다가온다. 항상 형통하지 않고 항상 곤고하지 않고 날이 맑았는가 하면 먹장 구름이 끼고 비 오는날이요, 캄캄한 밤인가 하면 아침도 다가오고, 험한 길인가 하면 평탄한 길도 다가오고 인생이란 형통과 곤고가 서로 섞여서 다가오니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환경을 따라 울고 웃다가는 좌절과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서 3장 1절로 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이렇게 인생이 긍정과 부정, 축복과 고난, 슬픔과 기쁨이 뒤범벅이 되어서 다가옵니다. 여러분 가정에 부부싸움이 나서 온 가정이 날라갈 것 같은때 어떻게 합니까? 싸움할때가 있으면 또 사랑할때도 다가 오느니라. 가정에 염려 근심이 생겨서 이젠 파멸 되었다고 생각할 때 폭풍우가 불어 오지만 또 잠잠한 날도 오느니라. 부부간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미워해서 이제는 헤어지자고 하는 캄캄한 밤이 다가올때는 기다리면 또 아침도 오느니라. 인생이란 여러분 우리가 삶의 한가운데서 마음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끝까지 꿈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그 길 밖에는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울고 웃으면 끝이 없는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3. 소망을 등대를 늘 바라보라
그럼 셋째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과 운명의 변화를 따라 울고 웃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탄 호화로운 요트가 바다를 항해하고 그래서 영국의 해안을 향해서 캄캄한 밤에 돌아 오는데 저 앞에 환한 불빛이 비취거든. 그래서 여왕이 탄 요트이기 때문에 그 권위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 앞에 누구냐? 불을 켜고 오는 배는 항로를 비켜라.” 그러니까 그 등대에서 대답이 왔습니다. “우리는 항로를 비킬수 없으니 너희가 비켜라.” 그다음 여왕을 태운 요트의 선장이 말했습니다. “이놈아! 무슨 말을 하는거냐? 우리배는 영국 여왕이 탄 요트다. 대형제국의 여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항로를 비켜라” 그런데 그 불빛에서 방송이 왔습니다. “우리는 수백년 전부터 이 자리에 서있는 영국의 해안등대다. 여왕이 탄 요트라도 우리를 향해서 들어와서 부딪히면 산산 조각이 난다.” 그러자 선장은 불이나케 요트를 돌려서 항로를 바꿨습니다. 등대를 잃어 버리면 어떤 배도 침몰합니다. 등대를 빛을 보고 나가야지 등대를 비키라고 하면 안됩니다.
빅토 프랭크 박사는 그가 쓴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라는 책에 나치하에 6백만 유대인이 포로 수용소에서 죽어갈 때 독일의 죄악상과 유대인 생존자를 연구한 결론에 ‘마음에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심신이 최악이다.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살아 남았다. 나아가 절망하는 동료들에게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은 모진 고문에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여 생존해 나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소망을 잃으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도 그 마음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아무리 환경이 고통스럽고 괴롭고 슬퍼도 살아 남습니다. 이겨 나갈수가 있어요.
디모데전서 1장 1절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등대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등대는 십자가의 등대, 십자가 위에 우리 위해서 몸찢고 피흘리고 달리신 예수 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인간이 되어 오셔서 나와 같은 인생, 고난, 역정을 다 겪었습니다. 배고프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집없이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풍찬노숙을 하고, 칭찬도 받았는가 하면 욕도 얻어 먹고, 사랑도 받았냐면 미움도 받고... 그런 모든 인생고를 다 겪고 나중에는 처참하게 발가벗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의 등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쳐다 봅니다. 우리가 찢기고 좌절되고 피곤하고 절망에 처하고 누더기 같은 인생이 되어도 우리 소망의 등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의와 영광의 빛이 비춰 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놀라운 은총의 등대불이 비춰 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치료와 건강의 등대불이 비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통과 축복의 등대불이 비춰 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소망의 등불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다 봄으로 말미암아 캄캄한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찬란한 소망의 등불을 얻을수가 있습니다. 삶에 방향을 잡을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당한다 해도 환경에 배반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분다 할지라도 소망의 등대를 우리가 힘차게 바라볼 때 그곳에 힘없이 매달려 찢어져 죽으신 그 예수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망의 빛을 비춰 주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의로움을 얻으라. 거룩함 받고 성령을 받으라. 치료받고 건강을 얻으라. 축복을 받고 형통을 받으라. 부활을 얻고 영생천국에 들어오너라. 내가 너를 바로 구출하는 소망의 손길이요 등불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얻어진 새로운 신분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중에 하나님이 좋아 하셔서 나를 택해 주셨다. 내가 자격도 없는데 나같은 비참한 인생을 왜 택했는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그 주권으로서 나를 택하여 주신다는 택하신 족속이요. 주님이 나를 왕이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거하시면서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그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 주신다. 온 세상 사람 가운데 나를 소유된 백성을 삼아 주신다. 그 가운데 우리는 울면서라도 소망에 영광이 가슴을 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9절에 말씀대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왜냐하면 소망의 등대를 가슴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에 회의를 느끼고 버림받은 심정, 고독감, 좌절감, 절망을 느낄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너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울고 있지만 속으로는 다 눈물이 그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오늘까지 인생을 살아온 모든 사람들은 이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예외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이 크면 클수록 마음에 갈증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한무제가 배를 양자강에 띄우고 밤새도록 노래를 듣고 무희들의 춤을 보고 술을 마시고 난 다음 아침에 안개가 뿌옇할 때 나룻터에 배를 대면서 그가 한말이 있습니다. ‘희락극해요 애정다로다’ 너무나 기쁨을 극하게 느끼고 난 다음에 다가오는 슬픔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은 일시적인 아편과 같아서 환상 가운데 기쁜 것 같지만 기쁨이 있은 그 다음에는 그보다 더 깊은 나락의 슬픔이 가슴속에 파헤쳐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솔로몬의 탄식과 같이 세상은 소망 없습니다. 그러나 이럴때마다 우리가 항상 바라보아야 될 것은 우리의 소망의 등대인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라.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인바 됨이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소망의 등불로 받아 들이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부으셔서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위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울면서 웃을수 있고 넘어지면서 일어날 수 있고 상처 입으면서 치료 받을수 있고 패배하면서 극복하여 천당길을 향해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 세상엔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이 있는줄 알고 붙잡아 보면 물거품입니다.
얻었다고 하면 꿈에서 깬것같이 사라집니다.
이 세상 소망은 구름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장마비 창문에 흘러 내리듯
가슴에 슬픔의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의 소망은 우리처럼 와서 고통당하고, 탄식하고,
외로움도 당하고, 배반도 당하고,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 우리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함께 삶을 나눌자가 우주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그 불빛을 마음에 받아서 우리는 어두운 가운데서
빛을 찾아 나가는 인생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