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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519 / 그리스도의 죽음과 세례의 의미(2)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5.31|조회수757 목록 댓글 0

그리스도의 죽음과 세례의 의미(2)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로마서 6:1-11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플로리다의 감리교 목사인 빌리 류터(Billy Lewter)는 다락방이라는 기도서에 아버지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에다 도박꾼이었습니다. 그의 식구들은 대공황이 왔을 때 교회에서 주는 급식으로 연명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류터가 6살 되었을 때 가출해 버렸습니다. 후에 그는 도박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도둑이 되었고 경찰서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살하려고 하는 찰라 그의 어머니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함께 교회에 나갈 것을 간곡히 애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못된 아버지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쓰레기 같던 사람이 자기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국민학교 2학년 중퇴인 무학이었으나 성경말씀 500절을 암송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유치장, 교도서, 병원 등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미국의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류터 목사는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기적이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도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입니다. 세상에 대하여도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신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 시대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롬5:20)는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이것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죄를 더 많이 깨닫게 되면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더 많이 지으면 더 많이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이 말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죄 가운데 더 살리요."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 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는 '합하여', '연합한', '함께'라는 말들이 9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마귀에게 속하여 죄에 종노릇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성도들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부활에 동참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만일 우리 성도들이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십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아멘.

그리고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했다는 또 다른 의미는 옛사람 육은 죽고 새 생명 가운데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의 표로서 세례를 받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랄프 윈트라는 신학자는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세례를 줄 때에 물로 하는 것보다 관을 갖다 놓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물은 조금 찍어 바르니까 죽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차라리 사람을 관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면 더욱 실감이 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어떤 세미나에서는 이런 의식을 갖는다고 합니다. 땅을 파고 또 관이 들어갈 만큼 파고 그 속에 한번씩 들어가 누웠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사람의 죽음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세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옛날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는 세 가지 절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희생의 제사요, 둘째는 할례이교, 셋째는 세례였습니다. 그리고 세례식은 다음과 같이 거행되었습니다. 먼저 세례 받을 사람이 머리와 손톱을 깎습니다. 그 다음에는 옷을 벗습니다. 다음에는 물 속에 전신을 담습니다. 그리고 물 속에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례를 받으면 한 살 짜리 어린아이로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그가 어른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나이는 접어두고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우유까지 먹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례를 완전히 새로운 탄생으로 보았습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는 의식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1-2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믿습니까?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레오 톨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5년 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변했습니다. 이전에 욕망 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새로운 것들을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이 좋지 않게 변했습니다. 이전에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이 중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행운의 무지개를 찾아다니며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으며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새 인생을 출발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들임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마귀에게 속하여 죄를 짓던 옛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이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대신 죽은 것만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만 생각하면 반쪽 짜리 신앙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나의 모습도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 지내는 제물에 안수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물이 나를 대신하여 죽지만 곧 내가 죽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제물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대신 죽이고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들의 대신 죽음을 통하여 나의 죽음을 체험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죄의 실체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뿌리가 남아 있으며 유혹과 시험을 받습니다. 죄는 성도가 거듭난 후에도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계속 역사 합니다. 죄의 실체가 싹없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죄의 실체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실체로부터 자유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죄를 범하려는 고의적인 의도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으라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5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러면 우리가 본받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죽음의 성격은 자발적입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회개나 세례는 옛사람의 자발적인 죽음입니다. 남에게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비판합니다. 빼앗기는 것과 주는 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옛사람을 죽일 때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이 무서워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법이 무서워서 죽이는 것도 아닙니다. 체면 때문에 죽어지내는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마지못해서 죽은 척 하고 있습니다. 목사 체면 때문에, 장로 권사 체면 때문에, 집사 체면 때문에 죽은 척 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다가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옛사람이 다 살아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억지로 마지못해서 죽은 척 하지 맙시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옛사람을 죽입시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라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1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6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죄에 종노릇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죽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야 합니다. 살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죽는 것만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만 강조하고 행함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옛사람이 죽고 구원을 받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개신교의 약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다가 행함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죽는 것만 이야기하고 사는 것은 경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루터에게도 나타났었습니다. 하루는 루터의 아내가 한마디했습니다. "여보, 루터 박사님, 왜 우리는 왜 지금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했던 때보다 기도나 신앙훈련을 등한히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개신교 전체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웨슬리의 성결의 신학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결, 즉 성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에 개신교의 살 길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흉보면서도 바리새인들의 도덕적 수준을 넘지 못한다면 문제가 아닙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람들이 율법주의자들의 도덕 수준을 넘지 못하면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개신교의 약점을 웨슬리의 성결의 신학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길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6장 13절의 말씀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자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아멘.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 귀히 쓰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럴 수는 없느니라

로마서 6:1-11 / 백장흠 목사

우리 주변에서 복권을 사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대박이 터질 것을 기대하고 삽니다. 그러나 다 당첨이 되어 몇 억을 받게 되던가요? 복권을 사는 사람마다 대박이 터진다면 누가 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몇 백만 분지 1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하고 사 보지만 헛일입니다.

자동자를 소유하신 분들 보험 드셨지요? 왜 보험에 듭니까? 사고 나면 처리해 달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보험에 들었다고 자동차 사고 나면 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로마5:20을 보아야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더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죄 가운데 있어야 하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 봅니다. 모태 신앙이었고 거기에다가 제 성품은 내성적입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 일은 있어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하고 순수하게 자랐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많은 상이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이 예수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부흥강사가 되어 집회 인도하는 중에 팔 하나는 쭉 뽑아 걸어놓고 “나는 전에 주먹세계에서 놀았고 군에서 몸을 상한 상이용사인데 지금은 부흥강사가 되었다”고 하면서 지난날을 간증하는데 스릴도 있고 대단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혼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도 한번쯤 세상에서 마음껏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목회하여 볼까? 그러면 나도 저런 인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범죄하지 않고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여 목회자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할렐루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1.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1절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더라도 죄에 거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기에 은행을 털어서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면 잘 한 겁니까?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있다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잘 되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한다’는 말은 죄와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전혀 투쟁하지 아니하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인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세상과는 이미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할 수는 없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가면 성결하게 살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평소에 건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병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벌써 병원에 초만원을 이루고 있답니다. 왜? 감기 예방접종 하느라고 그런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려면 항상 죄에 대하여 알아야 조심하여야 합니다. 모르면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답니다.

 

첫째가, 공부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경험도 중요하지만 먼저는 공부입니다. 바둑을 두는데 바둑3단을 두는 친구가 바둑 잘 못 두는 친구를 구박합니다. 바둑도 잘 두지 못하는 게 나하고 무슨 친구를 하겠느냐는 식입니다. 그 말을 듣던 친구가 아주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였답니다. 친구는 바둑 둔 지가 10년도 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격적으로 공부합니다. 책을 보고 연구하고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답니다. 1년 만에 바둑 잘 두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공부한 이를 당해내지 못하더랍니다. 배워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성결되게 살 수 있습니다.

 

다음은, 실천해야 합니다.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이론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어느 집에서 고부간에 같이 사는데 며느리는 빨래를 하여도 시어머니만큼 깨끗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가 한 빨래는 눈이 부시도록 깨끗합니다. 며느리가 그렇게 문질러도 그만큼 깨끗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가 빨래하는 모습을 보아도 자기와 차이가 없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어머니 빨래는 내가 한 것 보다 더 깨끗하냐고 물었더니 다음에 가르쳐 준다고 미룹니다. 어느날 시어머니가 몸이 쇠약하여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며느리가 물었습니다. 다급하게 “어머니, 빨래”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마지막 하는 말, “꼬옥 짜거라.” 

며느리의 빨래보다 깨끗했던 이유는 바로 꼭 짜는 것의 차이였습니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끝까지 견디는 인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감정대로 살 수도 없고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기다리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사는데 편리하고 좋게 해 주겠다면서 유혹합니다. 그때 “그럴 수는 없다”라는 단호한 거절이 있어야 합니다.

나이야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떠내려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얼음덩어리 위에 양 한 마리가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때 하늘을 나르던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발톱을 양털 깊숙이 박고 고기를 뜯어 먹기 시작합니다. 독수리는 폭포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순간 폭포소리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그때에 신속하게 날아오르려고 날개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털 깊이 박힌 발톱이 이미 얼음에 얼어붙은 것입니다. 결국 독수리는 양의 사체와 함께 폭포 속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풍성한 물질적인 혜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죄 속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는 죄와 투쟁하여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살지 아니하는 것은 소극적인 성결 운동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 인들은 오직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멸하면서 죄와 더불어 싸우는데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음을 지적합니다(히12:1-4). 운동 경기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격은 최대의 방어’라는 말입니다. 소극적으로 죄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방법은 죄를 멀리하는 겁니다. 내가 비록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가까이 있으면 자연히 닮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화를 입게 됩니다. 잠언5:7-9을 보면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두렵건데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면 네 수 한이 잔포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죄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죄 짓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설득하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정당하게 살아가라 나는 그리스도 인이다’라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확인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불란서 파리를 여행하던 미국 사람이 파리시내의 장신구점에서 중고품 호박목걸이를 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공항에서 너무 많은 세금을 부과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은 그것을 들고 보석 상에 가서 감정의뢰를 하였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그것을 2만5천불에 사겠답니다. 다른 보석상에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3만5천불을 주겠다고 합니다. 깜작 놀란 주인이 “아니, 이게 고물인데 왜 이렇게 값이 나갑니까?” 권위 있는 보석감정사는 현미경 앞으로 인도하고 “자, 이것을 보세요.” 그 현미경을 들여다 보자 그 사람의 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프롬 나폴레옹 바나파트 투 조세핀” 

나폴레옹 황제가 그 애인 조세핀에게 준 선물의 목걸이였습니다. “그 이름 때문에 가치가 나가는 겁니다”라고 말해 주더랍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산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아무렇게나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값 있게 살아야 합니다. 내게 육신적으로 아무리 큰 유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의 가치관과 같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느니라’입니다.

 

2. 그럴 수는 없느니라. 죄의 종 노릇은 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에 종입니다.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종 노릇할 수 있습니까? 종은 무엇합니까? 일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합니다. 우리가 왜 자꾸 범죄하게 됩니까? ‘내가 이러한 죄를 져야 하겠다’라고 다짐하면서 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 번씩이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면서 다시 범죄하게 되는 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종이 되면 벗어나기가 쉽지 아니합니다.

술의 종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사람이 퍽 좋습니다. 자상하고 정다운데 술에 취하기만 하면 그렇게 못될 수가 없습니다. 술이 깬 다음에 무어라고 말합니까? ‘그까짓 술 다시는 하지 않는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다시 술에 취하여 큰 실수를 범합니다. 이보다 더 심한 게 마약이라고 합니다. 마약 중독자들은 이것 없이는 견디지 못합니다. 이것 안하면 미칩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게 있는데 놀음이라고 합니다. 놀음 좋아하는 사람을 보세요. 기차 안에서도 합니다. 적은 자동차 안에서도 합니다. 심지어 비행기 안에서도 합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 네 가지 즉 여자, 술, 마약, 그리고 놀음 중에서 제일은 도박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아내의 머리를 잘라 팔아서도 도박을 했답니다. 어떤 이는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 왜 그것을 못 끊어?”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끊을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게 쉽게 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죄의 종 노릇을 하였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종이라도 죽으면 종이 아닙니다. 종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해결됩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빚은 갚지 않을 수 없는데 채무자가 죽었습니다. 빚을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활동 중지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불화가 생겼습니다. 답답한 사람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지” 이 말이 맞는 말입니다. 죽으면 됩니다. 기분이 좋지 않다, 화가 난다,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해결됩니다. 죽기가 어렵지요. 내 성질이 죽으면 화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인데 원망하고 비난합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면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진찰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자 그녀가 말합니다. “자꾸 시도 때도 없이 가스가 나옵니다. 그런데 소리도 없고 전혀 냄새가 안 나거든요.” 잠시동안 진찰을 한 후 의사는 ‘하루에 한 알씩 이 약을 복용하라’고 처방하여 주면서 몇일 후에 다시 오도록 하였습니다. 몇일 후 그 여성이 다시 의사에게로 왔습니다. 그 때 의사가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처방하여 주었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내게서 나오는 가스는 너무 냄새가 지독하거든요.” 그때 의사는 말하기를 “그 약은 당신의 코를 치료하는 약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근본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김익두’라는 깡패가 예수 믿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마침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게 되었는데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기차는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었습니다. 앞의 노인이 담뱃대를 김익두 앞에 대고 피웁니다. 피하면 따라가서 피웁니다. 연기를 코에 대고 훅하고 내 품습니다. 화가 난 김익두 부흥강사가 담뱃대를 낚아 체고 분질러 버렸습니다. 그 노인이 껄껄 웃으면서 “그러면 그렇지 김익두가 죽었나 했더니 역시 살아 있구먼” 그럽니다. 가슴이 아찔하게 느꼈던 김익두는 다음 역에서 내려 산으로 갔습니다. “하나님 아직도 김익두가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를 죽여주시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 역사해 주십시오” 하며 눈물로 기도하는데 누가 등을 두드립니다. 아까 그 노인입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저는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는 교회 영수입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그 김익두가 그 때 죽었습니다.

여러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성질하나 죽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죄의 종 노릇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언제 죽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롬6:3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세례란 연합으로 설명합니다. 극기가 아닙니다. 망각상태에 들어 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와 함께 세례 받은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라고 한다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나오신지가 오랜 시간이 되신 분에게 “세례 받으셔야지요” 그러면 “아는 게 있어야 세례 받지요” 그럽니다. 세례는 알아서 받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 있다는 싸인입니다.

젊은 남녀가 결혼 합니다. 사랑하려고 결혼하는 겁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겁니까? 결혼식을 하여야 부부입니까? 같이 살면 부부입니까? 두 사람이 사랑하고 같이 살기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는 게 결혼식입니다.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같이 살고 있으면 부부입니다. 세례는 “이미 나는 주님과 일치되어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라고 선포 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여자가 옛날 애인을 생각합니다. 그를 그리워 합니다. 남편 모르게 자꾸 만납니다. 이건 잘못된 결혼입니다. 결혼식과 함께 예전 것은 잊어야 합니다. 생각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례란 ‘바로 예전 것은 지나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죄의 종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3. 사망의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9절

우리가 예수와 연합하여 죽었다고 한다면 사망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세례에 대하여 말해 봅니다. 세례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요단 강에 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십니다. 세례를 주는 요한도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3:13-15)” 예수께서 세례받는 게,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시려고 하면 인간들과 같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과 같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즉, 물속으로 들어갈 때에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물속에 잠길 때에 나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물에서 올라올 때에 다시 살았습니다. 죽음과 부활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로마6:8을 보세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죽음이 있어야 부활도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는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다시 산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세요.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 할 줄을 앎이로라’ 죽었다는 말은 영적으로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아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죽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두움의 삶은 죽은 겁니다. 빛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숯 장수 집 곁으로 세탁소가 이사 왔습니다. 이제까지 혼자 외롭게 살던 숯 장수는 이웃에 세탁소가 온 것에 대하여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같이 친구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때 세탁소 주인은 무어라 하였는가 하면, “자네의 호의는 알겠지만 생각해 보게. 나는 검은 것을 희게 하는 일을 하는데 자네는 흰 것도 검게 하는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나?”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사람입니다. 어두움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 되는 것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 가계 죽었어” 그럽니다. 이 말은 그 사업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살아야 합니다. 사업이 살아야 합니다. 건강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셨습니다. 죽음 가운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생명 있는 삶이란 빛 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말입니다. 직장에서 혼자만이 예수 믿는데 외로움을 느끼던 자매의 간증입니다. 그녀는 믿음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마음이 좁다는 비난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의욕을 상실하여 그 직장을 그만 두려고 목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에게 “사람들은 등불을 어디에 두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두운 곳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자매의 직장은 빛이 필요한 어두운 곳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매는 직장에 계속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얼마되지 않아 사원 중에 13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만들었답니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 같이 있어 어두운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가 풍성하다고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사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의 종 노릇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죄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관계없이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죽었으나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성도입니다. 이제는 생명 있는 삶을 사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수와 합하여

로마서 6:1-11 / 신성종 목사

바울은 5: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이 말해 줍니다. 왜냐하면 큰 죄는 기억하기가 쉽고 구체적으로 회개하기가 쉽지만 작은 죄는 기억하기도 어렵고, 회개하기도 기억이 안 나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은혜 반대론자들이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러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는 죄를 더 지어야 한다고. 1절을 봅시다. 그 반박이 1절에 나옵니다.[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이것은 바울의 은혜의 원리를 반박하는 자들의 질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왜 그럴 수 없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간단하게 말합니다.[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렇습니다. 죽으면 아무런 영향을 못 줍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죽은 김일성이가 지배하는 세계에 유래 없는 나라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면서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의로울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까? 그것은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실 행위로 의롭게 될 사람이 세상에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롬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전가 받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그리고 그런 성도는 의롭게 사는 것이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먼저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수정하여 줍니다. 3절 이하는 세례를 예로 들어서 왜 우리가 죄 가운데 머무를 수 없음을 설명합니다.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지만 일단 죄에 대하여 죽은 뒤에는 죄는 우리를 지배할 권리도 없고 또 우리가 죄를 섬길 의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그것은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세례란 주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내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는 순간에 과거의 나는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세례 받을 때에 우리가 문답을 하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외에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그러면서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고 고백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 세례를 한 번 밖에 안 받습니다. 육신도 한 번밖엔 안 죽듯이 영적으로도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예 화 / 논산훈련소에서 한 번에 4,200명의 세례를 주었다. 이 때 세례를 다섯 번째 받는 군 세례자(야 이놈아 많이 받을수록 좋지 않냐하고).

우리가 잘 알듯이 죽으면 다시 살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일회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절에 [예수와 합하여], 오늘의 설교제목인 이 단어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과 합하고 연결되고,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옛 사람,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이제 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장례식이 바로 세례식입니다. 우리가 장례식을 지내고 나서도 그 사람이 호적이 있다면, 살아있는 것처럼 의식을 행한다면 이것은 미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미친 짓을 지금 계속하고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전은 죄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물론 세례식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 죽는다고 실제적인 죄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지고 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를 받기 전에는 죄가 독재를 했습니다. 하는 일마다 죄였습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뒤부터는 나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선도 행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이것은 차이점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직도 죄를 짓고 있다면 이것은 내 의지입니다. 죄의 지배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단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기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의 지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핑계 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밖에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례는 에수님과 십자가에서 죽는 장례식만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의 시작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습니까? 이제 중요한 것은 5절의 말씀입니다. 다 같이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우리는 옛사람은 죽고 지금 사는 것은 주님과 함께 부활한 새 사람입니다.그러므로 옛 사람의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옛 사람의 습관도 청산해야 합니다.

예 화 / 목욕하고 나서 땀내 나는 헌옷을 입지 않는 것과 같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것은 마치 임금을 받지 않고 옛날의 직장에 다시 가서 계속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는 새 직장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아직도 옛날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정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입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7절은 지금의 우리의 신분을 말씀해줍니다. 크게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믿습니까? 그러면 다 같이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우리들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8절과 9절은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는 주님의 부활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함께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나의 죄 됨을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였다면 우리는 지금 다 주님의 부활에 동참한 자입니다. 다 의인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첫째로 사망이 주관하지 못합니다. 9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2)둘째로 10-11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일, 즉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은 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세례는 승리의 삶의 시작입니다

로마서 6:1-11 / 임현수 목사

오늘 세례 받고 간증하시는 분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주

님께 돌아왔다고 하는 것처럼 기쁜 일이 있겠습니까? 정말 마음을 다하여 축복하고 축하

할 일 이라고 생각 합니다. Happy easter!

세례받는 분들이 교육도 받고 문답도 받습니다. 옛날에는 문답이 힘들어 세례를 받지 않

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전도해서 세례까지 받게 되었

습니다. 내일 모레가 문답인데, 이 어머니를 앉혀놓고 공부를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런

데, 잘 안되는 것이 내 죄 때문에 돌아 가셨다가 안되는 것입니다. 자꾸 외우게 했습니

다. 세례 받던날, 목사님이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돌아가셨는가를 묻자, 이 시어머니

는 그래도 생각을 많이 해서 "내 며느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

다.

물론 세례보다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각각 예수 그

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예식입니다.

세례가 무엇일까요?

 

1.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 입니다.

 

먼저 본문에 보시면“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그와 함께”“연합한”이라는 표현이 적

어도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을 알지 못하느뇨 /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

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

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

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

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

심을 얻었음이라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

니” (5-8절)했습니다. 이로 볼 때 세례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을 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이란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

울은 오늘 본문 3절에서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

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또 뒤따르는 4절 상반절에서는“우

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장사”되었다고 한 것은 세례에서의 우리의 죽음이 완전하고 결정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 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세례는 물 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완전히 죽어 장사되

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와 함께 장사 된다는 것은 또 실제적으

로 무슨 뜻이겠습니까?

6절 말씀이 그 대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

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라고 한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옛사람이 죽

는 것이고, 죄의 몸이 죽는 것입니다. 또 본문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듯이 우리도 그와 함께“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에서의 죽음은 목적이 있는 죽음입니다. 그 목적은 부활이요 새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부활로 이어졌듯이, 죄에 대한 우리의 죽음도 은혜와 의를

향해 다시 살아나기 위한 것입니다.

세례시 물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세례

는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옛 삶의 양식에 대하여 죽고 새 삶의 양식을

향하여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옛사람이 죽고 완전히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었습니

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장사될 뿐만 아니라, 또

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음과 함께 그의 부활과 그의 영광

과 그의 나라와 그의 유업을 나누는 것입니다

 

2. 세례 받은 자는 이겨놓은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이겨논 영적 싸움입니다. 여러분 이런 싸움 한번 해볼만 하지 않습니

까?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1서 5장 4절 말씀입니다.

세계대전이 끝난지 수십년이 지난 1998년 독일의 한 천주교 신자가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신부님 세계대전 때에 돈 많은 유대인 한 명을 숨겨주었습니다.”“그것은 오히려 잘

한 일 같은데요. 죄라고 할 수 없는데요.” “그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선행입니다.”“제가 하숙비를 비싸게 받았거든요.”“그

렇게 잘 한 일은 아니지만 고해성사를 할 만큼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신부님 그러

면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말해줘야 하나요?”…..

전쟁이 끝난지 몇십년이 지났는데…

실제로 요꼬이라는 일본 병사는 2차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수십년동안 하와이 동굴속

에서 숨어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니

까 밤에는 나와서 음식을 구해서 들어가고 낮에는 동굴 깊은 곳에 숨어서 살았다는 것입니

다.

여러분 이미 싸움은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분명 의인입니다.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하나

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왜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일까요? 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게도 여전히 지긋지긋한 존재입니다.

롬 7:17절 이하에 보면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

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면 죄에 대해 강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전에 죄를 먹고 마셨습니다.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처세술

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고 나면 죄를 아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내 속사람, 진정한 내가 아파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이 슬퍼하시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무슨 뜻입니까? 죄를 지어놓고, 내 책임 아니다. 책임회피 한다는 뜻입니까? 무서운 죄를

범해놓고 내가 한 것 아니다.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사단에게로 책임

을 전가해야 된다는 얘기입니까?

사도 바울의 얘기는, 로마서의 교훈은 내 본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여전히 거룩한 존재요 성자요 의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내려 가다 보면,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악이 내 안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악이 나 자

신은 아닙니다. 구원 얻은 내 본질, 내 신분, 본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놓고 구원문제를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런 걸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주의해서 아파트 문단속을 잘못했습니다.

도둑이 떼거지로 들어왔습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다 약탈해 갔습니다. 통장과 도

장을 가지고 가서 돈을 다 찾아갔습니다. 뿐만 아니고 땅 문서, 집 문서까지 가지고 가서

우리 땅과 우리 집을 모두 처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진 것이 없습니다. 도둑을 붙들

고 가장이 얘기합니다.“우리 집에 아이들 당신이 다 책임지시오.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

오. 이제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내 아내를 당신에게 양도할테니 당신의 아내로 삼아주

시오.”이런 멍청한 가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재물을 약탈당했지만 아버지로서의 신분, 남편으로서의 신분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 얘기입니다. 내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구원 얻은 영광스러움을 잃

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신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로운 영광

스러운 이 신분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얻은 이 본질을 포기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성도들, 하나님의 자녀들도 - 분명히 죄를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려고 안달하지는 않습니다. 죄를 지으려는 소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은 없습니다. 죄를 짓고 싶은 열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선

을 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가끔 죄를 선택합니다. 그 선택은 그 죄는 내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죄를 지어놓고, 그러면 그것을 당연히 생각해도 좋다는

얘기일까요? 죄를 물 먹듯이 마시고도 이제는 내가 아니니까 나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좋

다는 얘기일까요? 아니지만 생각 할 것이 있습니다

 

3.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를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에겐 죄를 이기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으

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교훈입니다.

로마서 6:1-11에 보면 “죄에 대해 죽었다”는 표현이 무려 10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

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습니다. 죄와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죄 가운데 살겠는가 하는 것 입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라고 하니까 나는 그럼 더 죄 속에 살아야 겠다라고 하

는 사람도 있다는 것 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려서 몸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몸이 아프니까 부모님의 태도가 확

달라집니다. 공부해라...뭐해라 잔소리도 안 하시고, 무엇이 먹고 싶냐..부터 물어 보십니

다. 어렸을 때에는 파인애플 깡통이 그렇게 맛있었는데, 파인애플하면 파인애플 주시고,

바나나 하면 바나나 주시고, 아픈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계속 아프면

좋을까요?

계속 파인애플 먹고 바나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

각입니까? 그까짓 파인애플과 바나나를 먹겠다고 계속 누워있겠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입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이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럴수 없느니라…

자동자를 소유하신 분들 보험 드셨지요? 왜 보험에 듭니까? 사고 나면 처리해 달라고 들었

습니다. 그러면 보험에 들었다고 자동차 사고 나면 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

럴 수 없느니라.

어떤 부흥사가 감옥에 50번 갔다왔다고 하면서 옛날에 수없이 죄를 지었던 간증을 하니까

수 많은 사람들이 은혜 받고 …인기가 한없이 올라 갑니다. 그래서 생각 하길 나도 죄나

실컷 짓다가 다시 회개하고 부흥사가 될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 입니다. 그럴수 없느

니라…

어거스틴이 회심하고 나서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사람이 된 후에 거리에 나섰습니다. 그랬

더니 전에 함께 놀던 여인이 다시 유혹을 합니다. 어거스틴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옵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요. “너는 너로되 나는 내가 아니로다.” 너는 이

전의 너나 지금의 너나 똑같은 너지만, 지금의 나는 네가 이전에 알던 그 어거스틴이 아니

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에 훌륭한 목사님가운데 김익두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거듭났습니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한 일이 부고장을 보내는

일입니다. 그를 아는 모든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김익두 사망! 이전에 깡패 두목이었던 김

익두는 죽었습니다. 나는 새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서 예수 안에

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선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

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존재들입니다.

이제 죄는 우리를 지배할 어떤 권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

이라는 생각? 내 본성이 죄인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를 짓는다는 느낌, 그것은 사단의 속

임수입니다. 한번 두 번 실수했다고 ‘내 본질이 죄인이야.

넌 이제 망하게 생겼어. 넌 하나님 사랑을 받지 못 할거야. 너는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라고 사단이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 느낌, 감정, 그 생각 사단의 속임수

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죄에 대해 십자가에서 이

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담대히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의 본질은 의인이다. 성자다. 거룩하다.」말씀합니다.

사단의 올무에 걸려들어서 지속적으로 괴로움을 당하던 그 시대는 끝이 난 것입니다. 새로

운 시대, 은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영광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승리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축복, 이 영광, 이 승리를 여러분의 것으로 누

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구원 얻은 특권, 축복, 승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죄에 집중하면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 말아야지 결심한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율법에 집중하면 집중할 수록 더욱 더 율법은 나를 올가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율법을 하나 만들어 볼까요?

이 시간 절대로 신 것을 먹거나, 신 것을 상상하거나, 신 것을 상상함으로 말미암아 절대

로 입에 침이 고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신 사과는 먹지 마십시오. 여러분 절대로

레몬을 질근질근 씹는 그런 일을 상상해서는 안됩니다. 입에다 구연산을 넣고 식초를 한

수저 퍼 마시면서 입에 침이 고이는 그런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침이 고인분들이 계십

니까? 이게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원수를 용서해야지 하면서 원수

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결심하면 결심할수록, 그 원수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에 분

노가 더 치밀어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상처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

야지 결심하더라도 용서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쉼을 누리면 승리는 저

절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받아 누리면 되는 것

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

님께 감사합니다”

로마서 8장 37절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

니라”

여러분 왕자가 된 거지 이야기를 아시지요. 당분간 다시 거지처럼 살아도 왕자는 왕자입니

다. 다시 거지의 옷을 입고 있어도 왕자는 왕자입니다. 거지의 밥을 먹어도 왕자는 왕자입

니다. 다리 난간 밑에 돌베개를 하고 잠을 자도 왕자는 왕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성자

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속에는 왕자의 인격과 왕자의 행

동과 품위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꽃피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왕자는 왕자입니다. 의인은 의인입니다.

성자는 성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신부입니다. 곧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영광스러

움이 그 찬란함이 부요함이 그 넉넉함이 그 풍성함이 드러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억하

십시오. “이겨놓고 싸운다. 왕자는 왕자다!”

 

말씀을 맺습니다.

죄란 놈은 참으로 끈질긴 놈입니다. 중력의 법칙처럼 가만히만 있어도

나를 끌어당기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죄의 세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CN 타워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온몸이 박살

이 날 것입니다. 왜요? 중력의 법칙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죄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CN 타워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조금도 다치지 않고 사뿐히 내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행글라이더를 타고 내리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행글라이더 안에 있으면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 쉼

을 누리면 예수 안에 들어가 안식을 누리게 되면 죄의 능력이 죄의 영향력이 내게 그 영향

력을 미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6장 7장 반복적으로 고민하다가 마지막 8장에 가서 선포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느니라!

여러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신분의 존재인지, 내가 구

원 얻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신분에 집중하십시오.

내 값어치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지 내 값어치에 집중하십시오.

영광스런 신분에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

에 소중한 성자입니다. 의인입니다. 영광스런 교회의 지체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

입니다. 그 멋진 승리에 집중하십시오. 이미 이겼습니다. 이겨놓고 싸우는 것입니다. 예

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집중하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이기었노라. We shall overcome!

우리의 싸움은 싸워서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승리는 확정

되었습니다. 그 승리를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영광스런 신분으로, 영광스

런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권능인 것 입니다. 세례는 이제 이런 승리의 삶의 시작인 것 입니다. 부활

의 능력이 일평생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

로마서 6:1-11 / 김홍도 목사

신앙 생활을 잘 해보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고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또 부흥회 같은 데서는 큰 은혜도 받고 체험도 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리라고 굳은 결심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다시 죄를 짓게 되고 따라서 낙심도 되고 회의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지난 주간에 부흥성회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지금 말씀드린대로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혈기를 내지 아니하고 불평, 불만도 하지 아니하고 죄와 멀리하고 잘 살아 보리라 마음 먹었으나 또 다시 죄를 짓고 쓰러져서 안타까워 하는 분들이 여기에 많이 계실 줄 압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토록 죄를 지은 다음에 자복하게 하고 또 눈물 흘리며 회개하면 용서를 해주는, 그러한 일만 되풀이하게 하시고 근본적으로 죄와는 상관하지 않도록,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방법과 능력을 안 주시느냐는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많이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얼마든지 죄를 안 질 수도 있게 하셨지만 우리가 그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말씀 로마서 6장 6절에 보면 "우리도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한다면 우리가 사는 동안에 때로는 불안하고, 불쾌하고, 시기 질투가 일어나고, 교만해지는 옛 사람은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생각하면 그에게는 더 없는 마음의 기쁨과 평안함이 생겨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6장 11절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거듭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옛 성품과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고 죄의 본질이 나타나려 할 때마다 우리는 다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는 의식을 철저히 갖게 될 때에, 그리고 마음만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게 될 때 그 죄의 문제는 사라지고 또 그 죄에 대하여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는 어떤 조그마한 악의 세력도 항거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깨닫고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나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십자가를 의지하게 되면, 우리 속에 일어나는 어떠한 죄성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받는 것까지는 아는데, 죄를 안 짓고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십자가에 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6장 11절 끝부분에 보면 "…여길지어다"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그렇게 인정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옆에 놓고 아무리 욕을 하고 때린다 하더라도 그 죽은 사람이 뭐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었다는 의식만 철저히 갖고 인정만 한다면 그 누구가 욕을 하고, 무시를 하더라도, 하나도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너그럽게 이해하고 관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 각자가 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인정하며 살아나갈 때 어떤 죄성의 문제라도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중에 하나는 아담 안에서 태어난 옛 사람은 죽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살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내용 가운데 중요한 교훈은 "사람이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이미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를 들어서, 사과나무가 있다면 그 사과 나무가 사과 열매를 맺기 때문에 사과 나무가 아니고, 사과 나무이기 때문에 사과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같이 나도 그 안에서 다시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행하는 죄"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죄는 그것이 살인죄이든, 간음죄이든 상관없이 내가 죄인인 것만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면 그 순간 다 씻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행위의 문제는 예수의 피로써 쉽게 해결될 수 있지만 우리의 근본 존재가 죄를 짓는 사람으로 태어난 옛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으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행하는 죄를 해결해 주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죄를 이기며, 어떤 죄성과도 대결하여 승리하며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믿으며, 오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고 그에게 맡기게 될 때에 쉽게 이길 수 있게 된 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좀더 쉬운 예를 든다면, 작은 고염 나무가 더 큰 감나무 열매를 맺으려고 하면 그 나무를 잘라서 감나무와 접을 붙히게 될 때에 바라는 큰 감을 열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염 나무와 같이 죄의 종으로 아담 안에서 태어났지만, 믿음으로 제 2의 아담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나도 그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인정하고 맡기게 될 때에 우리의 죄성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로 다시 살았다고 하는 사실을 철저히 알게 될 때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과 같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리 좋은 라디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이알을 맞추고 스윗치를 올려야 되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죄의 몸을 멸하여 의롭게 살도록 해주셨어도 그 사실을 믿음으로 내 마음 속에 영접하며 나는 죄에 대하여 죽고 다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셨다는 사실을 믿고 맡기지 아니하면 그 능력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 나가는 동안에 어떤 때는 화가 나고, 불안해지기도 하고, 따라서 죄를 짓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 XX는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고 인정하고 맡기게 될 때에 십자가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서 어떤 죄의 유혹도 이길 수 있음을 믿고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6장 3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했고, 계속해서 11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 모든 사실에 대하여 알고, 믿고, 인정하며 나가야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믿고 인정하는 것만 가지고서는 안 되고 우리가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 마음대로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죄를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의 전폭을 맡기게 될 때에 그 가운데서 희한한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2절에서 14절까지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순종치 말고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드리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의의 병기로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죄를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 이 말씀을 듣고도 죄를 다시 짓는다고 하면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맡기지 않기 때문에 죄성이 나타나는 것이지, 이 사실을 믿고, 인정하고, 맡기게 되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6장 10절에도 보면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은 과거입니다. 앞으로 죽게 된다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미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한국 초대 교회사에 보면 능력있고 유명한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는 황해도 안악 산골에서 유명한 불량배요 깡패였습니다. 어느 하루도 술 안 마시는 날이 없었고 사람들과 안 싸우는 날이 없고 또 그에게 괴로움을 안 당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는 그 일대에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속의 진리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과거의 죄를 참회하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김익두는 쫛월 쫛일 쫛시에 죽어서 장사를 지냅니다"하고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그때에 그 부고장을 받아든 사람은 모두 기뻐하고 시원해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이 청년 김익두는 과거의 김익두가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믿는 그 순간부터 완전히 과거 옛 사람은 벗어지고 새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세례받는 날이 되어 그는 교회에 갔다 오는데 동네 사람들은 김익두라는 사람이 정말 죽은 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죽기는 커녕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다녀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물어 보았습니다. "김익두씨 당신이 세상을 떠났다고 부고가 왔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묻게 될 때에 그는 "예, 옛날 불량배요 깡패였던 김익두는 오늘 장사지내고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 김익두가 아닙니다"고 대답을 하고, 사실만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받아 중생의 체험을 하고 능력있는 부흥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한다고 해서 한 번도 실수가 없느냐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기만 하면 그 순간만은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 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화가 날 때에도 "나는 이미 죽었다"고 외쳐 보십시요. 그 외에 억울한 일을 당하여 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험한 죄의 물결이 노도같이 밀려 오더라도 "아무리 나를 건드려 봐라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움직이지도 않는다" 하게 될 때에 그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자 어거스틴은 원래 방탕아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변화받은 다음부터는 그 전에 짓던 죄를 생각하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참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옛날에 같이 지내던 창녀를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을 보자 따라오면서 "여보세요! 당신이 어거스틴이 아닙니까? 왜 요사이는 놀러 오지 않습니까?"하며 물을 때, 그는 뒤돌아 보지도 아니하고 "네가 전에 부르던 그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다"고 대답을 했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 종노릇하지 아니함이니…"라는 말씀과 11절의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는 말씀을 깊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심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먼저 이 모든 진리를 머리로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십자가의 능력이 내 죄에서 역사하여 체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① 알아야 하고, ② 믿고 인정해야 되고, ③ 맡기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죄성을 이기고 승리하는 신앙 생활의 비결은 "나는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자요 내가 지금 산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는 의식 속에 살 때에 그런 사람은 승리할 수 있는 것임을 믿고 실천해 나가시는 성도가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신앙인으로서의 나

로마서 6:1-11 / 김철현목사

미국의 16대 대통령[아브라함 링컨]하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흑인 노예 해방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업적에 못지않게 먼저 그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 주목해야합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자기 구두를 손수 닦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자연스럽게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날마다 자기 구두를 닦는 모습을 보고 어느 날 보좌관이 넌지시 직언을 했습니다. “각하, 대 미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구두를 손수 닦으십니까?”하면서 말려 보려고 했습니다. 그때 [링컨]은 능청맞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아니, 그럼 미국 대통령이 남의 구두를 닦아 줍니까?”라는 대답으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하는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농담 속에서 링컨의 겸손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대통령이 된 후에도 늘 겸손했습니다.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거만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격 속에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심이 깊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진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겸손한 게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기본의식에서부터 모든 인격이 하나하나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내가 알려면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아는 건 아는 거고 모르는 건 모르는 겁니다. 체면불구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거짓과 위선이 있어서는 안 되고 순수하고 순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알려면 좀 더 나아가서 끝없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무엇이 되어야 하겠다. 더 가져야 하겠다는 마음으로는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즉, 시기나 질투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고 깨끗한 마음이 되어져야 비로소 나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직하게 욕심을 버리고 깨끗하게 나를 보고 내가 알려고 노력해도 나 혼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도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비추어 볼 때만이 나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이“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 한 지식이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면 나를 모릅니다. 흔히 살아가다가 허무한 일을 만나거나 그런 사람들을 볼 때“인생무상”이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의미에 동조하십니까?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합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없이 세상을 볼 때나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을 보면 무상이 맞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라면 충분히 이러한 탄식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니“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교만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그럴 수밖에요. 불쌍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목적도 없고 목표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생, 그야말로 무상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인생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나는 누구입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신앙인으로서의 나라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죽은 나>와<살아 있는 나>로 설명을 합니다. 그 결론적인 말씀이 11절의 말씀입니다.“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자, 그럼 보십시다.

먼저 죽은 나에 대해서 밝힙니다. 그 사실을 본문은 십자가에 못 박은 옛사람으로서의 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을 기준으로 해서 옛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의 나는 누구였습니까? 죄와 사망과 정욕과 진노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이 옛 사람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되었던 것을 잊어버렸을 때 은혜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정말 하찮은 존재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우리가 실수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 옛사람의 생각에 마냥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여기에서 판가름 납니다. 신앙의 사람은 옛사람의 모습에서 겸손으로 결과를 맺지만 신앙적이지 못한 사람은 옛사람의 모습에서 교만의 조건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내가 지금 뭘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전직이 무엇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전직 회장, 전직 사장, 전직 교수, 전직 장관...이렇게 말합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러니 어쩌란 얘깁니까? 오늘 나를 소개하면서 전직엔 내가 이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에 의해서 나를 평가해 달라는 속셈이거든요. 여러분, 과거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하는 것처럼 비참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잘 됐던 못 됐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옛 사람에 무슨 미련이 이렇게도 남아 있습니까? 이것에서 깨끗이 떠나야 교만하지도 않고 은혜를 잊지도 않습니다.

[A.W. 토저]라는 신학자가<내 자아를 버려라(WHO PUT JESUS ON THE CROSS)>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첫 번째 챕터에서<자기를 사랑하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라고 하는 우상의 틀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면서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옛 자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자아라는 옛 생명에 헝겊조각을 붙여서 수선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구원 받은 자로 불사조의 생명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느냐는 것이 문제해결의 열쇠인데 그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이해가 가십니까?

옛날 어릴 때 제가 자랐던 시골에는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제 또래의 아이들이 새 옷을 한 벌 얻어 입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날이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설날이라든가 추석, 아니면 소풍가는 날 내지는 수학여행 가는 날이나 되어야 새 옷 한 벌 얻어 입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이 형님들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서 입습니다. 다행히 형님이 적으면 그나마 새 옷 같은 옷을 입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보통 아이들을 생기는 대로 나았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그 옷이 얼마나 질겨서 몇 사람씩 입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옷은 얼마입지 않으면 구멍이 나고 맙니다. 그러면 특히 무릎이나 팔꿈치에 어머님이 헝겊을 대고 기워줍니다. 그러면 그 옷을 좋다고 또 며칠을 거뜬하게 입고 돌아다녔던 또래들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헝겊조각을 대고 기워도 그것은 헌 옷일 뿐입니다. 새 옷하고는 여러 가지에서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금방 헐어져버릴 옷이지만 임시방편으로 그럴싸하게 기워 입히시던 어머니들의 손길이 생각나곤 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딴 동네이야기로 알아듣지 자기네 엄마 아빠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하여간 옛 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헝겊조각을 대고 적당히 기워 입는 정도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분명한 이야기를 [A.W. 토저]가 그 책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모습이란 완전히 죽어져 없어져야 함을 이야기함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나라는 정체의 또 하나는 현재의 모습입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살아 있는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직 은혜 안에 있는 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자유인이요, 은혜 안에서 사명을 받은 나라는 사실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 자신이 볼 때는 쓸모없지만 하나님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런 할 일도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나를 하시고자 하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내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에게 현재라는 시간은 기회이자 사명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현실에 감사하며 살기 위해서는 옛사람인 나 자신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빠져 나와야 됩니다. 내 과거, 내 신분, 내 업적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해체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냐 하는 것과 정말 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까? 그게 힘이 듭니다. 내가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워요. 그래서 오늘 성경이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바로“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입니다. 8절에 보십시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율법을 향하여 죽었고, 죄를 향하여 죽었고, 정욕을 향하여 죽었고, 나의 증오와 시기 욕심 다 십자가 밑에 묻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 답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는 더블 이미지(Double Image)가 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쳐다 볼 때마다 두 가지를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나 자신의 죄인 됨을 계시해 줍니다. 내 죄는 십자가에 죽을 만큼 큰 죄요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겁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의 엄청난 값을 지불해서 구원할 만한 존재라는 겁니다. 나는 아니라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가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이러한 정체감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정말 귀한 고백으로 들려줍니다. 고전15:10절을 기억하십니까?“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이것이 십자가 밑에서 신앙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한 자의 고백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9장에 보면 다윗 왕이 사울의 괴롭힘을 당하다가 사울이 죽고 각고 끝에 나라를 평정한 다음에 정말 어려움을 겪을 때 비록 자기를 괴롭힌 사울의 아들이지만 자기의 곁에서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요나단을 생각하고는 그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핏줄이 없나 살펴보았더니[므비보셋]이라는 절름발이 하나가 붙들려왔습니다. 족보를 따지면 자기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손자이니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의 손자로서가 아니라 요나단의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는 왕자처럼 궁궐에서 함께 살고 먹게 해주었습니다. 그때에 [므비보셋]이 한 말이 정말 가슴을 파헤칩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자기 할아버지 사울이 다윗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개만도 못하게 취급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입장은 친구인 요나단을 보고 요나단의 아들이니까 곧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감입니다. 사울을 향한 마음은 옛 사람으로 이미 죽어버렸고 요나단을 향하여는 은혜의 마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복수의 마음은 죽어 없어지고 은혜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어떤 모습입니까? 죽어야 할 것에 마땅히 죽어지고 살아야 할 것에 마땅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죽어지지 못한 것이 있고 나 스스로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법을 택하시고 살아나야 할 것이 아직도 살아나지 못하여 삶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서 은혜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인으로서의 나 된 모습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

로마서 6:1-11 / 성흥모 목사

서방교회의 교회력에는 1. 6일을 주현절(Epiphany)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교회들, 과거 동로마에 속한 교회들은 1월 6일을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동유럽의 많은 교회들,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정교회, 또는 이집트 정교회들은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킵니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은 12.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는 서방교회의 전통이 있고, 1. 6을 크리스마스로 지키는 동방교회의 전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가 지키는 성탄절은 하나가 아니라, 본래부터 두 가지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서방교회와 동방 교회가 사용한 달력이 달랐고, 신학적인 배경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는 통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전통을 그대로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 서방교회에서 지켜오는 주현절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날로, 즉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으신 날로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현절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참 모습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드러내 보이신 날로 보아야 합니다. 동방 교회들은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한 날을 함께 지키고 있었습니다. 서방교회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로 12월 25일을 지키고, 1월 6일의 주현절은 예수님이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으셔서 이방인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세례 받으신 날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들은 서방교회의 전통과 동방교회의 전통을 잘 살리면서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주님의 수세 주일"로 지키면서 예수님이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신 것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구교, 로마 카톨릭교회는 7가지의 성례전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개신교회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성례전(聖禮典)이 있는데, 그것은 세례와 성찬입니다. 성례전이라고 하면 기독교를 지탱해주고, 기독교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거룩한 예배의식을 말합니다. 기독교회에서 세례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교리 중에 구원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예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례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것을 언제나 확인하면서 주님 예수와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이 두 가지 성례는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과 연합 곧 하나되어진다는 것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이 예배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말씀과 성례라는 개신교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말씀 중심의 교회로만 나가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기록된 말씀 성경과, 전파되는 말씀, 설교와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주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례전(聖禮典이)이란 라틴어로 "Sacramentum"라고 하고, 이것을 다시 영어로 말할 때에는 "sacraments"라고 합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감독은 3세기의 터튤리안(Tertullian)이란 교부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한 후에 세례를 받고, 성만찬식에 참여하는 그 예배를 가리켜 성례전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래 이 싸크라멘툼이란 의식은 로마의 청년들이 로마의 황제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입대하는 입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위하여, 로마 제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기로 서약하면서 군에 입대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싸크라멘툼이라는 그동안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사람이었고, 지금까지는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기로 결단하고 예수님을 그의 주로 고백하고, 거룩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건 결단입니다.

로마의 시민들은 로마 황제를 만나면 그를 "나의 주"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황제 폐하여,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감히 로마 황제 앞에서 "당신은 나의 주가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는 그가 신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렇게 평안하게 예수 믿는 중에 하는 당연한 말이 아니라, 당시 로마황제를 향하여 당신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때에, 오직 나의 주님은 예수님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피스티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신뢰, 확신, 확실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신뢰성, 신실성, 충성이란 뜻으로 함께 쓰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 신뢰한다는 말은 그에게 생명을 드리고 충성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의 사역이나, 그의 생애나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는 나를 구원한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그를 위하여 생명을 다하여 충성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말과 충성이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다"는 말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믿었습니다. 여러분이 목사를 믿는다고 하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생각보다는 좀더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70% 혹 80% 정도 신뢰한다고 해도 그것은 정말 높은 수치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도 있고, 세상의 유혹이 따르기에 100% 신뢰하기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나도 나 자신을 100% 신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를 100% 신뢰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신뢰하느냐, 마느냐를 결단할 때에는 100%가 아니면 신뢰한 것이 아니요, 99%라고 하여도 신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신뢰한다고 하면 그 분을 위하여 역시 100%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는 "믿는다"라는 말을 보여주고, 확증할 수 있는 상징으로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할 때에, 세례 받은 사람은 그의 사람이 되는 것이요, 그를 위하여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100% 믿는 것입니다. 거기에 1%라도 그의 공로가 들어가지 않고, 오직 100% 전부요, 자기의 생명을 다하여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오직 그만을 위하여 100% 충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지마는 한 가지만 아시기를 바라는 것은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연합이란 말은 "함께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한 자리에서 떠날 수 없는 필연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3절 말씀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합하여", "합하여", "예수와 합하여"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합쳐졌다고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한 것입니다.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했습니다. "합하여"라고 하다가 "연합한"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와 합하여",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의 부활과의 연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님이 죽은 자리에서 함께 죽었고, 이제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의롭다 함을 받은 그것으로 그친다고 하면 그의 믿음이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요, 죽음 믿음일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이제는 아예 죄의식을 가지지 말고 죄를 짓자고 할 것입니까? 그러면 주님은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계속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주님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합하여 죽었으며, 우리는 그의 부활과 합하여 살아났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주님의 수세주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므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세례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요,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위대한 결단이 세례 받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가서 세례받은 것은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 무엇 때문에, 요한에게 나가서 머리를 숙이고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면 세례요한에게 나가서 세례받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수세는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신 사건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서에 기록하기를 세례 받으러 나오는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요한은 이런 말을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요1:31)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을 나타내시는 의식이요, 공적인 생애를 살아가신다는 등단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수세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수세는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시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질 때에 비로소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알고 증언하였습니다.

 

3) 예수님의 수세는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가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중요한 순서였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러 나오신 예수님에게 세례요한이 말씀드립니다. "나는 당신에게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당신이 내게로 나아오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주고 싶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허락하시고 요한이 순종하므로 이루어진 세례인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죄인을 동일시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는 것은 죄가 없으신 주님이 죄 많은 인간과 동일시하는 사건입니다. 죄가 없으신 우리 주님이 죄지은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이요, 그런 인간의 심정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인류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 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과 동일시하시고, 우리의 대표자가 되어 나아가셨습니다.

요한 칼빈 선생님은 세례를 설명하면서 "세례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신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으로써 새로운 출발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 칼빈의 세례에 대한 정의는 아주 고전적입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세례 받으신 성도들은 거룩하게 인침을 받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었고,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1절 말씀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분명히 하라고 하십니다. 죽은 사람이냐,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냐 물어보라고 하십니다.

 

저는 죽은 사람을 많이 보았고, 만져본 사람입니다. 제가 직접 입관하여 장례를 지낸 분들도 아주 많습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에 모시고 있던 담임 목사님께서 저에게 장의사 면허를 주신다고 농담할 정도로 수의를 잘 입혔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의식이 없습니다. 말이 없습니다. 감정이 없습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온기가 없고, 싸늘하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에 이끌려 살아가시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죄에 이끌리고 욕심에 이끌려 살기를 바라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욕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면 아직도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바랄 것도 없고, 욕망도 없고, 미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싶은 마음에서 더 살기를 원하지 나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더 살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다가 욕을 먹으면 영광이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갈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탐심도 못박아야 합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했습니다. 죽는 척하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그 은혜에 감사하여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였고, 주님의 부활에 연합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1절)여기서 "여길지어다"라는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긴다는 말은 "로기제스데"라고 하는데 "로기조마이"라는 말은 간주한다. 결론짓다,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한번도 죽어본 적이 없이 예수 믿으시는 분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시는 분들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결정짓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합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죄 짓는 나는 죽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결단해야 합니다.

고훈 목사님이 낸 [그 날 같은 하루를 날마다 살고 싶다]라는 시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집에는 "그 날 같은 하루를 날마다 살고 싶다"는 시가 있습니다. 전문을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야곱과 요셉이 상봉한 날, 그 날 같은 하루,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다가 복을 받은 그 날,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와서 아들이 된 그 날,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주님을 만난 그 날 같은, 나사로가 살아난 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가 죽게 되었지만 주님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며 용서해주시던 그 날 같은 하루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만 있는 그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날, 우리 주님을 만난 그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날, 주님을 처음 만난 그 날 같은 하루를 날마다 살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있어 중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생을 이기심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속적인 관심 속에 살지 말고, 거룩한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사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죽는 이유도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사는 이유가 되시고, 우리의 죽는 이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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