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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611 / 로마서 11:13-24 /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6.19|조회수1,007 목록 댓글 0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

로마서 11:13-24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롬 11:13-24 /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인 여러분을 도울 사도로 임명해 주셨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가능한 한 자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14)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방인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게 하여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5)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의 그 놀라운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리심으로써 세상의 다른 민족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때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6)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의 자손도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거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 가령 올리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가지 얼마를 잘라 내고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들을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는 올리브나무 뿌리에서 양분을 공급받지 않겠습니까?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는 여러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함께 받고 있는 것입니다. 18) 그러나 여러분은 잘려져 나간 가지 대신에 접붙임을 받았다 해서 자만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귀중한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나무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가지에 불과할 뿐 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19)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내게 접붙일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저 가지들이 잘려져 나갔으니 나야말로 선한 사람이 분명하군.' 20)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 올리브나무 가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여러분이 접붙여진 것은 다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니 자랑하기보다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 감사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21) 하나님께서는 원가지들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니 여러분을 아까워하실 리 없습니다. 22)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동시에 매우 준엄하신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준엄하실지라도 꾸준히 자신만을 사랑하고 믿는 여러분에게는 큰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여러분도 잘려져 나가고 23)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시 접붙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능력을 지내고 계십니다. 24)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에 불과한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여 좋은 나무에 접붙여 주셨는데 하물며 원가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온다면 언제든지 다시 접붙일 준비를 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돌감람나무로 불리는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믿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믿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근신할 것을 권고합니다.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13-16)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분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골육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큰 애정을 품고 있으며 그들이 이방인의 구원을 보고 시기하여서라도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세상의 화목 즉, 이방인과의 화목을 위해 한시적으로 버리지만, 그들을 다시 받아들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하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6절에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을 가리키며 떡덩이와 가지는 유대민족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믿음의 자취를 이어받아 은혜 안에 들어올 것을 말합니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17-22) 참감람나무 원가지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참감람나무에서 꺾여지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 함께 그 뿌리의 진액을 받아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원가지인 유대인들이 믿지 않아 심판을 받은 것처럼 접붙임 받은 이방인인 로마 성도들도 믿음에 머무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유대인을 향하여 자랑하기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근신하여 하나님의 인자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을 권고합니다.

 

원 가지도 접붙일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23-24) 하나님의 능력은 본성이 다른 돌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하는 것이 가능하십니다. 그렇기에 원가지인 유대인들을 다시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일 능력 또한 하나님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신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당신을 크신 능력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임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십니까? 혹시 주변에 비신자 가운데 그리스도께로 접붙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보화는 길거리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고 깊은 광맥을 찾아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보화도 깊은 곳에 있는데 그 깊은 곳이 바로 ‘고난’입니다. 역사의 진리와 교훈이 발견된 때도 민족이 고난을 당한 때였습니다. 영국의 저술가 C.S.루이스는 말했습니다. “평안할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속삭이시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보내시는 것이다. 고난은 ‘인간의 잠든 감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큰소리’이다.”

 

< 설 교 >

자긍치 말아야 할 이방인

로마서 11:13-18 / 민병석 목사

서 론 :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분에 대하여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갈2:8).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골육의 형제들인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에 대하여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견딜 수 없이 마음에 분함을 안겨준 것은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의 자긍이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방인 교회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불신적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교만하고 자긍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구원의 뿌리를 밝히면서 자긍치 말아야 할 것을 경종 했습니다. 이 같은 경종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 교회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 할 수 있게 한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버림당함으로써 세상이 화목된 복음

 

바울은 15절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복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의 구약적인 섭리의 구분을 의미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I)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있어서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모든 육적인 자손이 구원의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9:6-8). 물론 이 약속의 자녀가 신약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인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지만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기 이전까지는 이 약속의 자녀가 이스라엘 중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저희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구원의 은혜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구약시대에 이미 그 수를 채우셨습니다. 이제는 그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미쳐야 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바울은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만의 선택이나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일차적인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갈 것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참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정된 모든 백성들에게 적용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복음으로 나타나는 사실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읽을 때 모세의 얼굴에 씌운 수건을 벗기지 않은 채 읽었기 때문에 율법에 숨겨져 있는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3) 바울은 이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져온 것입니다(엡2:16-18.)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으로 언제나 공평하시며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받아드림으로 소생하는 역사

 

바울은 이스라엘의 버림당함과 함께 그들이 다시 받아드려질 일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 드리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은 영원히 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장차 회복될 일에 대하여 19절 이하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바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두 가지 모습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하나는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의 구원”입니다.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이 버림당한 것 같은 이제도 “그런즉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1:5). 바울의 뜨거운 염원은 바로 이 같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키게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롬11:14).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의 시기입니다. 바울은 이 시기가 반드시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은 받아 드려질 때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25절에서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와야 그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바로 예수님의 지림 때이며 이때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마지막 추수의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슥12:10).

 

3. 자긍하지 말라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공평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방인중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의 택한 모든 백성들을 한 명도 상실함이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일과 그 순서에 있어서 이방인보다 이스라엘을 우위에 두었습니다.

 

(1)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적용한 이 말은 처음 익은 곡식가루의 떡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제물을 드림으로 그들이 수확한 곡식 전체를 드린 것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신15:17-21). 제사하는 처음 곡식가루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처음 선택한 아브라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식이나 야곱 등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다분히 처음 익은 곡식 가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이방인에게 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우위를 둘 수 있습니다.

 

(2) 이방인은 꺾여진 가지에 접부침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꺾여졌다는 것은 그들의 불신을 말합니다. 사실인즉 유대인의 불신이 이방인에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접부치기 위하여 그 가지를 꺾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은 그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된 것입니다.

 

결 론

 

바울의 이 같은 경종은 바울이 자신의 골육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울분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복될 날이 올 것임을 바라보고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를 접붙이신 하나님의 은혜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은 본문 첫 절에서 말한 대로 비록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며 자기의 그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대한 관심 또한 지극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마음을 이미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숨김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 9:1-3에서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10:1-3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했으며 10:16 상반절에서도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계속되는 11장에서는 이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실족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사도 바울의 생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서 이스라엘이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버림받은 것인가?” 하는 물음을 먼저 던집니다. 물론 바울이 준비하고 있었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에서 그는 쓰기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전하시고 가르치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통째로 모두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보라 합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1:1)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의 사도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열심히 전하며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알고 계시던 자신의 택하신 백성을 통째로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통째로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한 사도 바울은 또 다른 예로서 선지자 엘리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듭니다. 11:2-5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왕상19:10)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왕상19:18)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 남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의미를 설명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11:6을 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행위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일 행위를 보시고 선택하셨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 뒤에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제시하신 “오직 믿음에 의한 의”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을 거부하고 끝까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그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한 데 반해, 남은 자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신 이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이 선택받은 남은 자들 외의 모든 유대인들은 우둔하여져서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1:7-10을 봅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사29:10; 신29:4)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시69:22 이하) 하였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신분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보장해주는 것인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구원은 사람의 의지적 선택에 달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달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11:1에서 던졌던 물음과 같은 뜻의 물음을 다시 한 번 던집니다. 그리고 그 답 또한 여전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1 상반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비록 많은 유대인이 실족하기는 했지만 모든 유대인이 완전히 다 넘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일부 유대인은 남겨놓으시며 다른 자들은 실족하게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 신학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1:11 하반절)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졌습니다. 즉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사도들로 하여금, 특히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열렬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는 사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이스라엘도 결국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완전히 버림받은 백성이 되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실족한 것이지 전적이고 결정적으로 넘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자기의 숨은 믿음을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내심 이스라엘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고 믿는 바울은 다시 묻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12절입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이 거부함으로써 복음이 이방인들에게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면, 만일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충만해진다면 얼마나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는 이방인을 유대인이 시기하게 해서 결국은 자기 동족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 자기가 열심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유대인이 실족하게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렇게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의 실족의 긍정적 의미를 제시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이 다른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받는 결과 즉 하나님과 화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에 매달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다 죽은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시게 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의 뜻은, 복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기쁜 일이 생겼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만큼이나 더 큰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뜻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 즉 부활의 때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때가 주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이 되리라고 믿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회복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언급한 사도 바울은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민15:20-21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떡을 만들 때 떡반죽에서 일부를 떼내어 과자를 만들어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와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받은 족장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떡덩이”와 “가지”는 누구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현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많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거룩한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 속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을 일방적으로 멸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권고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그들 스스로 이룬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고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교만해지면 바로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것과 꼭 같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도 예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관심이 자기 동족으로부터 다시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로 갑자기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본문 17절 이하를 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22절에서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이라 한 것은 “너희가 만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면”이란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을 갖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접붙임을 받은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잊지 않고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면 하나님께서 항상 은혜로 함께하시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본래 돌감람나무에 붙은 가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나무에 접붙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전히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찍혀지고 버려질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감람나무에 접붙여주신 하나님에 은혜에 겸손함과 신실함과 충성됨으로 응답하는 한국교회가 되어 하나님나라의 건강하고 튼튼한 가지로 영원히 남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 기도하며 날마다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접붙임

로마서 11:29-24 / 민병석 목사

서 론 :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차이점을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와의 경우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구원의 나무는 참 감람나무뿐입니다. 돌 감람나무는 구원의 여망이 전혀 없습니다.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입니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 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참 감람나무의 얼마간의 가지를 꺾으시고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을 그 꺾이운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음을 명심하라고 바울은 모든 교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원가지가 꺾인 이유

 

원가지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꺾이운 이유는 그들의 불 신앙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믿음으로 참 감람나タ?접붙임 받으므로 원 가지와 같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원 가지가 꺾이운 것은 이방인으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예를 들어 버림받은 유대인과 구원을 얻게된 이방인의 경우를 비교하는 논리를 펴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바울의 논리를 들은 로마교회 교인들은 자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 아니냐? 유대인은 불 신앙으로 꺾인바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꺾인바 된 것인가? 물론 그들의 불 신앙이 이유이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영원한 구원섭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꺾이운 것은 이방인으로 하여금 그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리에 질문할 로마교회 교인들의 물음을 스스로 질문하면서 또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2) 그러면 참 감람나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이 비유로 들고 있는 참 감람나무란 하나님의 구원의 줄기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참 감람나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한 언약으로 비로소 세상에 그 비밀을 들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의 뿌리는 아브라함으로 그 뿌리로부터 줄기가 뻗어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이 나무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은 이 나무에 전혀 관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방인중에도 혹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겠지만 여기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그같은 개인적인 구원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포괄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참 감람나무의 뿌리가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로 그 줄기로 하신 일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실로 이방인들도 그 나무에 접붙이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약속은 그의 혈통적인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요, 땅의 모든 족속과 연관된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 라”고 말했습니다(롬4:16).

 

(3) 열매를 맺는 나무는 오직 참 감람나무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사역을 때를 따라 역사 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기점으로 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과 이방인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아브라함과 이어지게 되었으며 아브라함의 약속이 전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9).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때가 세례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그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심에 참 감람나무의 원가지를 꺾으시고 그곳에 돌 감람나무 가지들을 접붙이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2.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에게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이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잠정적으로 버리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우리들도 그들처럼 불신 중에 처하면 버린바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버리고 인간의 지식으로 의를 얻고자 하면 꺾이운 바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를 버리시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처럼 아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일은 우리는 돌 감람나무의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참 감람나무의 뿌리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가지들도 아니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돌 감람나무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아무짝에도 쓰지 못할 돌 감람나무 열매를 맺어온 가지였습니다. 이 가지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바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에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전에 그 원 가지였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긍하며 높은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3)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에게는 엄위가 있으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나 사랑에는 언제나 공의가 있으며 엄위가 그것을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 넘어지는 자에게는 사랑과 긍휼 대신에 엄위가 그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얻으려면 죄를 멀리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철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의 경우에 비취어 참 감람나무 가지였던 이스라엘이 불신에서 돌이킬 때 그들의 접붙임이 얼마나 확실하겠느냐고 강조하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소망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24절에서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실인즉 우리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 감람나무에서 찍으시고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하물며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겨 온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날, 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시는 일이야 하나님께 얼마나 쉬운 일이며 당연한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돌 감람나무에 속한 가지들로 하나님의 구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무 쓸모 없는 이 같은 존재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심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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