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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604 / 로마서 12:1-2 / 이윤재목사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6.19|조회수778 목록 댓글 0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롬 12:1-8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롬 12:1-8 /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실 일을 생각할 때 이것이 무리한 요구이겠습니까? 2)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딴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인가를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3)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십시오. 4-5)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에도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모두가 한데 모일 때 하나의 완전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 각 사람이 서로 다른 지체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각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어떤 일이든 한 가지씩은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 예언하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 있거든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을 하십시오. 7) 만일 남을 섬기는 은사를 받았거든 성의를 다해 남을 섬기고, 남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거든 훌륭하게 가르치십시오. 8) 설교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열과 성을 다해 남에게 도움을 주는 설교를 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셨거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행정 능력을 주어 다른 사람들의 일을 감독하게 하셨거든 성실하게 그 책임을 다하십시오. 슬픈 자를 위로해야 하는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위로하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 곧 복음의 원리를 설명하던 바울은 이제 복음의 적용과 실천을 다룹니다. 기독교 윤리에 관한 언급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개인의 자세로부터 출발하여 차츰 교회, 사회, 국가로 범위를 넓혀갑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깃든 삶의 구조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다룹니다. 복음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영역은 삶의 자리입니다. 참으로 영적인 일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본 단락에서의 예배는 기독교적 삶의 다른 표현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2) 바울은 기독교 윤리를 제사 개념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실천과 기독교 윤리를 산 제물, 영적 예배로 제시합니다.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은 인간의 높은 도덕성이 아닙니다.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자비이고, 자비로운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분을 향한 태도입니다. 여기서 기독교 윤리와 세상의 윤리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성도는 윤리를 실천하지 않고, 자기 존재 전부를 드려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최고의 윤리를 실천합니다.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 복음으로 변화된 삶, 일상에서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는 삶이 영적 예배입니다.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3-5) 하나님과의 개인 관계는 이제 우리의 관계로 초점이 바뀝니다. 바울은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는 첫 번째 영역이자 가장 중요한 장(場)인 교회 안에서 성도가 지녀야 할 자세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 의식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입니다(엡 1:23). 성도는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독특하면서도 작은 기능을 할 뿐인데, 전체로서 존재하고 크게 움직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몸이 됩니다. 공동체 의식을 가진 지체로 기능하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12:3; 빌 2:2-4). 나보다 나은 사람 없고, 나보다 못한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룩한 한 몸과 지체가 있을 뿐입니다.

 

은사가 각각 다르니(6-8)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가 획일성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양성을 뜻합니다. 다양한 은사는 분열의 요인이 아니라 일치의 근거입니다(고전 12:8-10, 28; 엡 4:11). 자기도취나 교만, 열등감 없는 활발한 은사사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갑니다.

 

적용: 당신은 당신의 존재 전부를 산 제물로 드리고 있습니까? 당신의 삶은 영적 예배가 되고 있습니까?

 

18세기 중엽 미국의 장로교 목사인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계시하시기 전에 자신들의 죄책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지옥에 가기에 마땅한 죄인임을 느끼기 전에는 자기의 죄책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기술한다면, 사람은 먼저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과 지옥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께서 그에게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계시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느끼고 날마다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 설 교 >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2 / 피종진 목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선민(選民) 즉, 구별된 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평생에 이어져야 할 일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사’, ‘경배’, ‘예배’ 이러한 호칭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의 예배의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된다는 것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산 제사’라는 말은 원문에 보면 ‘생동하는 제사, 살아서 움직이는 제사. 살아 있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드릴 때 흠 없는 양이나 송아지, 염소, 비둘기 등 산 제물을 드렸습니다. ‘거룩한 산 제사’란

 

첫째, 몸으로 제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여기서 ‘몸’이란 단순히 살과 뼈로 이루어진 육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일상의 구체적인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때 이것이 곧 영적 예배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몸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우리의 손과 발이 움직일 수 있을 때 봉사하고,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때 전도하고 찬양하며, 선을 베풀 수 있을 때 선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제사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롬 12:2a) 여기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거나 모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는 마귀가 공중 권세를 잡고 왕노릇하고 있습니다(엡 2:2).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쾌락과 거짓과 우상 숭배가 난무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장 15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과거 죄의 종노릇하던 때에 우리의 성품은 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 모든 면에서 다 악하였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려면 먼저 우리의 성품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와 같이 변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는 힘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성령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완악한 성품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분히 이르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b) 우리는 예배드릴 때 자기중심으로 드리면 안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시고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비록 지금 우리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펼쳐져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넷째, 주신 은사대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고, 개성이 다른 만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해 다른 성도를 돕고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엡 4:12). 그러므로 우리는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몸으로 제물을 드리고,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신 은사대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섬김의 태도

김상복 목사

우리는 몇 주에 걸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최고의 인물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는 누구나 최고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섬기며 누가 섬기는지는 이미 살펴보았고, 오늘은 어떤 태도로 섬겨야 할 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여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주님께 드립니다. 사용해주십시오.” 이렇게 온전히 자신을 바칠 때 비로소 잘 섬길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결론부분인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로마서 1~6장은 구원에 관한 말씀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고 값없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7~11장은 변화에 대한 말씀으로, 거듭난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변화, 성화되어 의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날마다 나를 변화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니, 12~16장에서는 “그러므로 이제 잘 섬기는 사람이 되자”고 합니다.

 

잘 섬기려면 살아있을 때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씻고 잘 다듬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목적을 위해 써주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12:1). 여러분이 죽은 후에 여러분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도 막 숨졌을 때는 끌어안고 슬퍼하지만 하루만 지나도 죽은 몸을 만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을 때 필요하고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지금,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깨끗하지 않고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께 드리면 깨끗하게 변화시켜 사용해 주십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저는 29살까지 저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젊은 날의 야망과 목적이 있어서 갈 길이 바빠 급하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저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저를 마음대로 사용해주세요. 하나님 손에 저를 드립니다.” 아,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든지! 그전에는 뭔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속상하고 화가 났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하나님의 뜻대로 되면 되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고전 10:31). “하나님, 저를 주님께 드립니다. 저를 받아서 마음대로 사용하시고 영광 받으소서.”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일생에 한 번 헌신으로는 부족합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합니다. 저도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아침 저를 깨우시고 건강과 기회를 주셨는데 오늘 이 하루도 주님께 드립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고 그들을 섬기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귀하고 존귀하게 쓰시고,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나를 제물로 드려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면 허송세월이요, 하나님께 영광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도 못되고, 내 속에는 갈등 투성으로 진정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마음속에 성령이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날마다 성령님께 물어봅니다. “이것을 할까요, 말까요? 언제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어떤 방법으로 할까요?”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생각의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찾아갈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 판단력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가치 있고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습니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일일이 물어보면서 주의 뜻을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다닐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자세히 연구하다가 ‘그 사람들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름기둥이 뜨면 장막을 전부 분해하고 싸서 둘러메고 구름 기둥이 가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한참 가다가 구름기둥이 서면 그 밑에 장막을 칩니다. 구름기둥이 또 움직이면 다시 따라가야 됩니다. 그런데 구름기둥이 언제 뜨고 멈추는지, 정해진 기한이 없습니다. 어느 때는 구름기둥이 움직이지 않아서 ‘여기 그냥 있으려나 보다’하면 또 뜹니다. 항상 구름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저 같으면 속이 상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떠나라면 떠나고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고 자라면 자고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는 것이구나!’ 내 인생 전체를 하나님이 인도하시도록 맡기고, 그분의 때를 분별하면서 그의 뜻을 이루며 사는 인생이 가장 유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인생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서 살아갈 때만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자기 은사를 알고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지는 것이 아니니”(3,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독특하게 만드시고 각각 다른 영적 은사를 주셨습니다. 비슷하기는 해도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쓰임 받지 못하거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열 손가락 가운데 어느 손가락이 가장 귀합니까? 작은 손가락 하나만 아파도 불편하지요. 발가락 하나만 없어도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아무리 작은 지체도 다 소중하고,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만들었는데 여러분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도록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은사에 관한 책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20년 전에 제가 쓴 ‘당신은 확실히 섬기고 있습니까’라는 책은 26가지의 은사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분별해서 그 은사를 따라 섬겨야 할 것입니다. 미국인 35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5명 가운데 4명이 자기의 능력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흔히 학력과 경력을 보고 사람을 뽑지만 결국은 그 사람의 적성과 은사가 중요합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며 살면 재미가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미식축구는, 잘 모르고 볼 때는 재미가 없지만 경기를 알고 보면 참 재미있어요. 고구마 같이 생긴 공을 붙잡고 뛰는데, 골라인에 공을 데면 7점을 받습니다. 몸집이 큰 선수들이 방어할 때는 마치 탱크처럼 밀어젖힙니다. 경기를 하다 보면 어깨도 부러지고 여러 곳을 다치지요. 그런데도 경기를 마친 후에 선수들이 인터뷰하는 것을 들으면 모두들 너무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잘 하는 것을 즐겁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아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살면 인생이 즐겁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과 유익을 줍니다. 유익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은사대로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은사를 존중합니다. 나에게는 A라는 은사가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B라는 은사가 있습니다. 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서로의 은사를 인정하면 나와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내게 없는 것이 그분에게 있으니까 겸손하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사를 모르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작은 본분을 다 할 때 교회는 강해지고 서로에게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은사는 요구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주권적 선물입니다. 은사는 다 다릅니다. 작년에 케냐에 회의가 있어서 갔더니 한국 선교사님들이 잠깐 구경시켜줄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넓은 들판에 들소와 기린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기린은 긴 목을 쭉 뻗어 나무에 있는 잎만 따 먹습니다. 들소는 머리가 무거워서 고개를 숙이고 땅의 풀을 먹고 살아요. 하나는 고개를 들고, 하나는 고개를 숙이고 살아요. 하나님의 창조는 엄청납니다. 종류도 능력도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독특하고 존귀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가치가, 우리 몸의 지체처럼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존재입니다. 각자 역할을 은사대로 감당하면 반드시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은사도 종류가 많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언, 봉사, 가르침, 격려, 주기, 리더십, 자선의 은사 등 7가지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제가 가진 은사 가운데 두 번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성경을 다 찾아보면 모두 26가지의 은사가 있는데, 기도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기도하면 척척 응답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기도를 2시간 하지 않으면 몸이 아파요. 어떤 사람은 10분만해도 몸이 아픈데. 그 분들은 기도를 잘 하고 응답이 되니까 자꾸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받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어떤 것이든 은사가 한 가지씩 있습니다.

 

섬기는 은사는 봉사하는 것입니다. 섬김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제가 할렐루야교회에 부임하여 첫 번째 제직수련회를 했습니다. 7시 시작이어서 2분 전에 도착하니 6명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그 중에 3명은 의자를 정리하면서 바쁘게 움직이는데 3명은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요. 그 분들에게는 땀 흘리고 일손 모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필요가 보이질 않아요. 제가 그분들을 보긴 했지만 이 교회에 막 온 때라서 지금 그분들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만약 기억하면 어쩔 뻔했습니까!

 

제가 종종 다른 곳의 집회에 가면, 제 목소리가 좀 탁하니까 조금 듣다가 어느 부인이 벌떡 일어나서 나갑니다. 그리고 음료를 들고 와서 조심스럽게 강대상에 놓고 허리를 굽히고 나갑니다. 그럴 때 그 분이 섬김의 은사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많은 청중들 가운데서 그 분에게 목이 쉰 목사가 보이는 것은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특별한 것입니다. 평준화 된 은사들 가운데 개개인에게 특별한 것 한두 가지씩이 있습니다.

 

저의 은사 중에는 가르치는 은사가 첫 번째 은사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교 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미리 열심히 준비를 했습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3살에 미국에서 신학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거의 20여 년 걸렸습니다. 왜 그것이 하고 싶은가? 내 속에 가르치는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가 된 후 강의 첫날 교실에서 학생들이 얼마나 좋고 귀하고 사랑스러운지요. 왜?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니까요. 제가 그 교수직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 자리에 있던 교수가 지식의 은사만 있을 뿐 가르치는 은사가 없어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첫 시간부터 학생들도 너무나 좋아하고 저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즐겁던지!

 

그 당시 저는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학교에서 저를 오라고 하면서 월급은 믿음으로 준대요. 믿음으로 준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있으면 주고 없으면 안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받던 월급의 3분의 1을 믿음으로 준대요. 그래도 기회만 준다면 가르치고 싶더라고요. 왜? 은사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 월급으로는 우리 다섯 식구가 굶어 죽을 것 같아요. “하나님, 저렇게 나를 오라고 하는데 갈까요, 말까요? 가면 우리 식구가 굶어 죽을 것 같고, 제 아내가 반대하면 어떻게 하지요?” 한 달 동안 열심히 기도한 후에 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신학대학교에서 나를 오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제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자고 합니다. 아, 얼마나 예뻐 보이던지!

 

여러분이 받은 은사를 활용하면 인생이 즐겁습니다. 여러분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요, 여러분이 즐겁고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니까요. 여러분 때문에 어떤 공동체든지 부흥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격려의 은사가 있으면 한 마디라도 격려하십시오. 여러분의 격려로 슬픔을 당한 자,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를 찾아 철저하게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은사 가운데는 주는 은사가 있습니다. 물건도 주고, 웃음도 주고, 돈도 주고, 악수도 주고, 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지요. 어느 엄마가 가족들을 위해 이런 글을 써서 냉장고에 붙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을 요구하기 보다는 사랑을 주는 사람, 남이 손을 내밀어 주길 바라기보다는 남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친구를 갖기 원하기 보다는 친구가 되어 주는 사람, 마음의 고마운 표현을 기다리기 보다는 고마움을 표현해주는 사람,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기 보다는 남의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람,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저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해 주는 사람, 남의 실수보다는 좋은 점을 생각해 주는 사람, 선행을 하면서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 결국 주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드려서 그분을 통해 쓰임 받고 내 주위에 아낌없이 베풀며 섬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며칠 전에 구정을 지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주부들은 밥하고 가족들 시중드느라 힘든 기간이었다고 하더군요. 온 가족이 서로 도왔으면 주부 혼자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섬기는 사람은 하나고 남은 식구들은 앉아서 섬김을 받고만 있으니까 명절이 힘든 시간이 된 것이지요. 제가 중국에 다녀온 뒤로 어느 분이 전화를 하셨어요. 얼마 전에 몸이 아팠는데 퇴원을 하고 집에 오니 남편이 얼마나 잘 해주는지, 가끔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래요. 김장도 도와줬다는 것입니다. 남편 연세가 72세랍니다. 72년 만에 섬기는 사람이 되셨어요. 우리 교인도 아니요, 강원도 사는 분이 너무 행복해서 전화를 하셨어요.

 

섬김은 기쁨을 주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내 은사가 무엇인지 찾아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은사대로 잘 섬겨 일생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

로마서 12:1 / 박찬길 목사

어느 교회에 예배 시간마다 꾸벅꾸벅 조는 교인이 있었답니다. 목사님이 보니까 자기 아버지인 겁니다. 교인들 보기에 얼마나 민망해요. 견딜 수가 없어서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목사님이 주일 아침에 어린 아들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얘야 네가 할아버지 옆에 앉아서 예배 드리다가 할아버지가 조시면 쿡쿡 찔러서 깨워드려라. 그러면 아빠가 1달러를 주마." 목사님의 아들은 할아버지가 졸 때마다 열심히 깨워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목사님은 아들에게 잘했다며 1달러를 주었습니다.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 날도 할아버지는 변함없이 예배 시간에 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아들은 할아버지를 깨우지 않는 겁니다. 목사님이 이상하다 싶어서 예배가 끝나자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왜 할아버지를 깨우지 않았니?" 아이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할아버지가 안 깨우면 2달러 준다고 하셨거든요!"

우리는 매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예배는 신앙 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예배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주 들으셨지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만나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얻습니다. 그 능력을 얻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성도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로마서를 공부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잖아요. 1장부터 11장까지와 12장부터 16장까지로 나눕니다. 처음 부분은 구원론에 대한 내용입니다. 교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나중 부분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한 내용입니다. 실천적인 부분, 윤리적인 부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실천적인 부분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첫 번째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신 특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는 아무나 드리는 것이 아니거든요.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만이 드리는 것이니까 축복이지요. 오늘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은 이 예배의 특권과 축복을 매 주일마다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예배를 이렇게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개역성경으로 읽으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은 예배를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어느 정도 다녔던 분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지요.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갔을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마음에 있어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몸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의 몸은 단순한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예배드리는 사람의 인격과 지식과 정성과 정신까지 포함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마음을 드릴 때에 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지요? 마음을 초음파나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음은 그 사람의 몸, 행동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면 몸이 따라 가고, 몸이 가면 마음이 함께 갑니다. 마음 따로 몸 따로가 아니지요. 죽은 사람은 몰라도 살아있는 사람은 마음과 몸이 함께 움직입니다.

간혹 보면 몸은 예배당에 와 있는데 마음은 집에 가 있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몸은 마음이 포함된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으로 예배 드린다는 말씀은 손과 발과 시간과 물질과 마음,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최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희생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몸을 드려 예배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예배를 이야기하면서 구약의 제사를 언급합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가는 통로였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를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잖아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됨을 나타내는 의식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대신에 제물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제물이 없으면 그 제사는 소용이 없습니다.

제물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흠과 티가 없는 깨끗한 짐승을 끌고 와서 피 흘려 죽여야 합니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나오는데, 제물을 죽여서 피를 흘립니다. 가죽을 벗깁니다. 살에 각을 뜹니다. 각을 뜬 동물을 단 위에 올려놓고 불로 태웁니다. 한번도 아니라 몇 번이나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야 한다는 말씀합니다. 완벽한 죽음을 말씀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제물이 완벽하게 죽을 때에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시며 이러한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제사를 드리듯이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와 오늘의 예배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동물을 죽여서 드렸지만 신약의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겁니다.

여러분, 산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은 예배를 어떻게 드리라는 것일까요? 희생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찬양을 어떻게 부르고, 옷을 어떤 것을 입고, 설교를 어떻게 하고 이게 아니에요. 제물인 동물에 칼을 대서 피를 흘리고 각을 뜨고 가죽을 벗기고 불로 태우듯이, 내 자신을 죽여서 희생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생각, 가치관, 지식,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죽여야 희생하면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날, 여우, 원숭이, 토끼가 하나님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됨됨이를 자랑했답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배가 고프다고 하시는 거예요. 여우는 재빨리 나가서 잉어와 새를 물어왔습니다. 원숭이는 도토리를 가져왔어요. 그런데 토끼는 빈손인 겁니다. 여우와 원숭이는 토끼의 빈손을 나무랍니다. "야, 너는 하나님이 배고프다고 하시는데 왜 모른 척 하냐?" 하나님도 토끼에게 한 말씀하셨습니다. "모두들 나에게 좋은 것을 가져왔는데 너는 왜 빈손이냐?"

그 때에 토끼는 얼굴을 붉히면서 모닥불을 지폈습니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자 토끼는 갑자기 불 속으로 뛰어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내 고기가 익거든 잡수세요" 그러고는 죽어갔다는 거예요. 토끼의 마음을 알게 된 하나님은 그의 됨됨이를 높이 평가해서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보라고 달에다가 옮겨놓았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달 속에 토끼가 살고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희생적인 제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럴 때에 산 제사, 영적 예배가 되는 겁니다. 앞으로 이러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신경을 많이 쓰세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땀을 흘리세요. 피를 흘리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세요. 관념적으로 생각적으로 습관적으로 말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죽여서 내 자아를 다 불에 태우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는 부족함이 없는 예배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으로 참여하여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교회는 주일 오후 1시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께 약속하였습니다. 이 시간은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시간을 잘 지켜야 합니다.

간혹 반쪽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는데 오늘로 졸업하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보다 늦게 오거나, 예배 중간에 들락거리게 되면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점심 봉사자들도 1부 예배 시간에는 음식을 준비하고 2부 예배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는 것이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겁니다.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1부 예배 중간에 들어왔다가 설교만 듣고 미리 빠져나가면 반쪽 예배를 드린 겁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설교만 들은 것이지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설교 듣는 것을 예배드렸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예배는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몸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서가 은혜가 있거든요. 찬양할 때는 찬양의 은혜가 있고, 기도할 때는 기도의 은혜가 있고, 설교할 때는 설교의 은혜가 있어요. 헌금할 때는 드림의 은혜가 있고, 축도할 때는 복을 받는 은혜가 있어요. 모든 순서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어요. 온전히 예배를 드릴 때에 이 모든 은혜를 풍족하게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사역자들도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힘쓰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맡은 분야에만 신경을 쓰다가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사역하는 모든 분들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힘쓰세요. 정신 차리지 않으면 온전한 예배를 놓치게 됩니다. 사역자는 물론 모든 교우들이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앞서지 마세요. 먼저는 온전한 예배입니다.

여러분,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습관입니다. 보세요. 일찍 오는 분들은 늘 일찍 옵니다. 늦게 오는 분들은 늘 늦게 오지요. 썸머 타임이 해제 될 때에 보면 나타납니다. 1시간이 뒤로 늦추어졌는데도 그 때도 변함없이 늦습니다. 습관이에요. 습관. 혹 여러분 중에 예배 시간보다 늦게 오는 것이 본인도 모르게 습관 된 분이 있다면 다음주일부터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고치지 않으면 늦는 것은 습관을 넘어서 유산이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여러분을 닮아서 평생 늦을 겁니다. 아주 좋지 않은 유산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일찍 오세요. 공부하는 학생은 지각하지 않는 것이 본문입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늦지 않는 것이 회사원의 본분입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인정받는 록펠러는 30분 일찍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고 예배 드렸답니다. 록펠러는 돈 버는 일에 한시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듯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도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예배 시간에 일찍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거리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학교 다닐 때에도 보면 거리가 먼 사람은 일찍 오는데 가까이 있는 학생들은 늦어요. 우리 교우들은 거리와는 상관없이 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할 때부터 축도할 때까지 온전하게 참여하셔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에 힘을 쓰셔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몸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셨지만 준비된 사람이 드리는 예배와 준비 없이 드리는 예배는 다르잖아요. 우리 교회는 주일예배 대표기도를 팀장들이 돌아가면서 하는데 얼마나 잘합니까? 입술로 하는 기도가 아니잖아요. 얼마나 마음이 뜨겁고 은혜가 있어요. 왜 그럴까요? 준비해 오거든요. 팀장들이 집에서 기도는 기도로 열심히 준비해옵니다. 그뿐인가요? 찬양팀과 찬양대도 열심히 준비해 오니까 얼마나 은혜가 있어요. 사역자들이 준비해오니까 모든 교우들이 은혜를 받잖아요. 우리 모두는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몸으로 준비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안식일 정신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말하지요. 유대 사람들은 안식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는지 모릅니다. 십여 년 전에 성지순례를 갔었는데 상점이 문을 닫아서 고생을 한 적이 있어요. 금요일 오후에 모든 일정을 마치고 기념품을 사려고 나갔는데 문을 닫은 거예요. 안식일이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는데 그 때에 우리가 이 정신을 배워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도 주일이 되면 토요일 저녁부터 준비하는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젊은 친구들은 야행성 체질을 가진 분들이 많아서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습니다. 더욱이 토요일이면 더하지요. 어떤 분들은 토요일 늦게까지 다른 것 하다가, 어떤 분들은 지나쳐서 주일 새벽까지 하다가...,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토요일에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보니까 저녁에는 비디오를 많이 보게 되고, 젊은 분들은 인터넷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잖아요. 그렇게 무리하면 주일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데에 지장을 줍니다.

어느 분이 주일 예배 기도 담당인데, 토요일 저녁에 사극 보는 재미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답니다. 요즘에 우리 나라 사극이 인기라고 하잖아요. 한국에 있을 때는 한편보고 나면 다음 '이 시간에 또'.... 해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되지만, 여기서는 박스로 갔다가 놓고 보잖아요. 하나 보고 또 보고... 계속해서 보니까 밤새도록 볼 수가 있어요. 이 분이 사극에 취해서 토요일에 늦게까지 비디오를 봤어요. 그리고 주일예배에 대표기도를 하는데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하나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여러분,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토요일에 외출했다가도 이왕이면 좀 일찍 돌아와서 쉬었다가 예배를 드리면 좋겠지요. 아이들이 입고 갈 옷도 미리 찾아놓고, 헌금도 집에서 미리 준비하면 좋겠지요. 주일 아침에는 부부간에도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하면 좋겠지요.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토요일 오후부터 준비한다면 주일 예배가 근사할 거예요. 은혜가 넘칠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줄로 믿습니다.

준비 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찬양을 들으면서 교회에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형제가 실험을 했다지요. 운전하고 오면서 가요를 듣기도 하고 찬양을 들으면서 왔는데, 가요를 듣고 와서 예배를 드릴 때는 은혜가 덜 했답니다. 그런데 찬양을 듣고 오면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은혜가 넘치더라는 겁니다. 앞으로 우리 교우들은 예배드리러 오실 때에도 찬양을 들으면서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초대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어린 유년 시절에 교회학교에서 헌금할 시간이면 헌금은 안하고 눈을 감고 기도했습니다. 한번은 교회학교 선생님이 기도하는 언더우드에게 물었어요. "너는 왜 헌금시간이면 헌금을 드리지 않고 기도하느냐?" 언더우드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선생님, 저는 헌금 드릴 돈이 없어서 저의 몸을 드리곤 합니다." 그 후에 이 소년은 성장해서 목사가 되어 가지고 한국의 초대 선교사로 사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서 돌아가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음만 십자가에 못 박았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음으로만 우리를 사랑했더라면 우리에게는 큰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만이 아니라 몸까지 다 드리는 희생적인 사랑이었기에 우리 모두에게 눈물과 감동과 은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시간과 인격과 정신과 정성을 다해서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매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시고 은혜와 감격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시는 의도를 깨닫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 살아있는 예배로 드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헌신과 섬김의 삶

 

롬 12:1, 막 10:45 / 김명혁 목사

제가 9년 전에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지난 9년 4개월 동안 매 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며 설교하고 있는데 오늘 일산 화정 목양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춘봉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담임 목사님들에게 무슨 제목으로 설교하면 좋겠냐고 묻곤 합니다. 이춘봉 목사님이 “헌신”에 대한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헌신과 섬김의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헌신”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만큼 귀중하고 축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과 물질과 생명을 드리는 “헌신”보다 귀중하고 축복되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드림”과 “헌신”의 종교입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창4:4).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무 기뻐하시면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22:16,17).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평생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 받으시면서 다윗과 그의 후손을 크게 축복하셨는데 그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태어나게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시89:35-3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한나가 어린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한나와 사무엘을 축복하셨고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삼상 1:28). 어린 소년 하나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렸을 때 예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축사하시므로 5천여 명을 배 불리 먹이셨고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나타내 보이시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드림을 기뻐 받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14:9).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10:10,12).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헌신”과 제물 되심의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리들도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바리는 “헌신”의 삶을 살고 “헌신”의 죽음을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예수님의 “드림”과 “헌신”의 제사를 본 받아 스데반 집사가 자기 몸을 “헌신”의 제물로 드리는 순교의 죽음을 죽었는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7:55,56).

사도 바울은 롬12:1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들의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은 우리 죄인들이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일이 바로 자기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로 드리는 “헌신”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다”(롬12: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그리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라는 권면의 말씀도 했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몸과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순교”의 제물이 되라는 권면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이 권면의 말씀을 따라 몸과 마음과 정성과 생명을 하나님께 드린 “헌신”과 “순교”의 제물이 된 사람들이 토마스 선교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드림”과 “헌신”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드림”과 “헌신”을 기뻐 받으시면서 우리들과 우리 주변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들이 양을 잡아서 드리든지, 자녀를 키워서 드리든지, 눈물을 드리든지, 오병 이어를 드리든지, 향유를 드리든지, 시간을 드리든지, 물질을 드리든지, 몸과 생명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것들을 인해서 우리들과 우리 주변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들이 매일 매일 평생 힘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과 소유와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나의 음성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평생토록 주 위해 봉사하게 합소서.” 우리들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과 소유와 생명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것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가는 보석으로 바뀌어집니다. 저는 부족한 죄인이지만 어릴 때 저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크게 축복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섬김”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헌신”과 함께 “섬김”만큼 귀중하고 축복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섬김”의 삶을 사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축복되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헌신”과 함께 “섬김”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님이 예수님의 삶을 가장 잘 요약해서 묘사하는 성경 말씀이 막10:45 말씀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러 왔노라” 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섬김”의 삶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 받은 문둥병자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섬기셨고,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각색 병자들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치시면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을 섬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그리고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4-27).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신자들은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데 제일 많은 정성을 쏟아바쳤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예루살렘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가장 길고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해서 “섬김”과 “봉사”의 삶과 사역을 힘썼다고 사도행전 4장이 기록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2-37). 예루살렘 교회는 시작할 때뿐 아니라 계속해서 “섬김”과 “봉사”와 “구제” 사역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섬김”과 “봉사”와 “구제” 사역을 전담할 모범적인 사람 일곱을 선출하여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6:1-6).

예루살렘 교회와 신자들이 “섬김”과 “봉사”와 “구제”에 전력을 다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회개”와 “금식”과 “찬미”의 제사와 함께 가난하고 주리고 병든 자들에게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구제”의 손길을 펴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히브리서 13장도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사도 바울은 “사랑”과 “섬김”을 지니지 않을 때 사람의 방언도 천사의 말도 예언하는 능력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모두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하게 지적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1,2).

 

욥바 복음화의 주역이 된 도르가도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데 제일 많은 정성을 쏟아바쳤습니다. 사실 이방 전도와 선교에 필요한 것은 유창한 설교나 전도 보다는 따뜻한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펴는 일인데 도르가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섬김”과 “봉사”와 “선행”과 “구제”의 손길을 편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사도행전 9장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9:36-42). 도르가의 “섬김”과 “봉사”와 “선행”과 “구제”를 통해서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로 하는 전도가 별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가이사랴 복음화의 주역이 된 고넬료도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구제”의 삶을 사는데 제일 많은 정성을 쏟아바쳤습니다. 이방인 벡부장 고넬료는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는데 그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제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그에게 보내어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행10:1-6). 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베드로로 하여금 가이사랴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 집에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을 때 놀라운 하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목격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착한” 사람의 “경건”과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구제”의 제사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면서 힘써서 행하신 것도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펴신 “착한” 일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착함”에 대한 베드로의 관점이 달라졌고 인종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눈도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안디옥 복음화의 주역이 된 예루살렘에서 온 피난민들과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바나바야말로 무엇보다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 전도와 선교에 필요한 것은 유창한 설교나 멋진 전도 프로그램보다는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따뜻한 손길을 펴는 “착한” 일인데 예루살렘에서 온 피난민들과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바나바는 안디옥 이방인들에게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따뜻한 손길을 편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19-24).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부분의 전도는 전도 프로그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착함”의 삶과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가 제일 먼저 힘써서 한 일도 세게 선교 이전에 “섬김”과 “구제”의 따뜻한 손길을 펴는 “착한” 일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

그 다음 빌립보 복음화의 주역이 된 루디아도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따뜻한 손길을 편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르가는 마음을 열어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렸고 손과 지갑과 집을 열어 사도 바울의 일행을 받아드린 열린 사람이었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4,15). 결국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가 넘치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고 사도 바울이 가장 기뻐하고 가장 사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기쁨과 고마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1-3).

끝으로 사도 바울의 “섬김”의 삶과 “섬김”의 사역과 “섬김”의 죽음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교만과 위선과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극치로 달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낮아짐과 착해짐과 “섬김”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고 사람들을 섬기는 “섬김”의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1:9).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15:25). “착함”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착함”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 그리고 자기 자신을 높이면서 주인이라고 부르는 대신 낮추면서 “종”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빌1:1). 사도 바울은 주님의 종이 된 이후 자기의 의지와 계획과 기질과 취미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고 주님의 의지와 계획과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면 마게도냐로 갔고 로마로 가라고 하면 로마로 갔습니다.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라고 하면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방의 교회들을 위해서 매를 맞으라고 하면 매를 맞았고 풍랑의 위험을 당하라고 하면 풍랑의 위험을 당했고 순교의 죽음을 죽으라고 하면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것이 “섬김”을 몸에 지닌 사도 바울의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이방인 교회를 “섬기면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섬기면” “섬길수록” 원망과 불평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생기고 기쁨이 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12:10). 사도 바울은 진정한 기쁨이 소유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섬김”과 성도들 “섬김”과 사람들 “섬김”에서 오는 것을 발견하며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넉 에서 “기쁨”이란말을 17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오늘 “회개”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하고 “말씀”도 중요하고 “예배”도 중요하지만 “헌신”과 함께 “섬김”의 삶이 너무너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헌신”과 함께 “섬김”의 삶이 따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소용이 없게 될 수도 있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힘써 하여야 할 일은 물론 “회개”와 “기도”이지만 동시에 “헌신”과 “섬김”의 순수하고 따뜻한 손길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들은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의인 의식을 지닌 사람들은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과 권위를 버리시고 친히 낮아지셨고 착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착해지심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신데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8:3). 그리고 착해지셨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착한” 일 즉 “헌신”과 “섬김”의 일을 행하려면 낮아져야 하고 죄인의 모양을 지니고 두루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던 한 여인에게 “착한” 일 즉 “섬김”의 일을 행하시기 위해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는데 수가성 여인과 비슷한 피곤하고 목 마른 죄인의 모습을 취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4:6,7). 그리고 마지막에는 강도를 구원하시기 이해서 강도와 같은 죄인의 모습을 지니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헌신”과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헌신”과 “섬김”의 삶과 “헌신”과 “섬김”의 사역과 “헌신”과 “섬김”의 죽음이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사역과 죽음도 “헌신”과 “섬김”의 삶과 “헌신”과 “섬김”의 사역과 “헌신”과 “섬김”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고 “헌신”과 “섬김”의 삶다가 “헌신”과 “섬김”의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다시금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뜻 알기

로마서 12:1-2 / 조용기 목사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축복해 주십시오. 항상 우리 마음에 밝은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불행한 일이 다가올 것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불행한 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내 마음은 내일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된다고 기대하고 있어야 됩니다. 부정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부정한 것을 주십니다. 저는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 안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모든 것을 극복하고 종국에는 승리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서론>

오늘 저는 “하나님의 뜻 알기”를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가졌다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죽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좋던지 그 독생자를 보내어서 몸 찢고 피 흘려 그 값 주고 여러분을 샀으니까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참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범사에 시험과 낭패를 당하여 패배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본론>

1. 성경은 하나님의 뜻 사전

우리가 첫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면은 이 하나님의 말씀과 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사전입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공부할 때 그 내용을 모르면 사전을 찾습니다. 저는 영어를 공부할 때 그때는 6.25사변 당시니까 선생도 없고 돈이 없어서 학교도 갈수도 없고 영어는 공부해야 되겠고 영어사전을 가지고 얼마나 사전을 찾았던지 사전이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손 자국이 파헤쳐졌습니다. 그렇게 사전을 보지 않으면 영어를 공부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영어공부하려면 사전 찾아야지요. 요사이는 세월이 좋아서 컴퓨터를 가지고 쉽게 할 수 있지만 우리 자라던 시대는 꿈도 못 꿨습니다. 그런데 그 사전을 많이 찾으면 찾을수록 많이 외우게 돼요. 그래서 요사이 이정도 영어하지 않습니까? 사전 안 찾았으면 안 되었지요.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성경을 많이 찾아야 돼요. 성경읽지 않고서 하나님 뜻을 알려면 안돼요. 성경을 자꾸 찾고 읽으면 그 속에서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나 한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 선하신 뜻이 있는가하면 기뻐하시는 뜻이 있고 온전하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못살겠으면 기뻐하는 정도라도 살아라. 그래도 못살겠거든 하나님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정도 살아야 돼요.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읽고 묵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읽고 난 다음에 그 내용을 머릿속에 깊이 묵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 보면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야! 이것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내 길이 평탄하게 되며 내가 형통하게 되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제가 50년 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전하고 살아와 보니까 내 길이 평탄하며 형통하게 됩디다. 제가 오늘 가만히 저기 앉아서 예배 시간이 다가오도록 기다리면서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이 생기냐면 ‘야! 니 경상도 촌놈이 서울에 빈 손 들고 52년 전에 올라와 가지고서 이정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으니 되었잖느냐.’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어디 가서 잠을 잘지 어디에서 밥을 얻어먹을지 천하가 나하고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최자실 목사님을 만나게 해주셨는지... 인생이란 사람을 만남으로 되는 거에요. 내 혼자 힘으로 안되는 거에요. 끌어 당겨주고 사람을 만나야 돼요.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발에 등이 되고 빛이 되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 성경말씀과 가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어떤 사람이 이미 폐광이 된 광산을 시찰하기 위해 등불을 들고 땅속 깊이 들어갔는데, 깊이 들어가서 등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폐광된 갱도에 깊이 들어가서 등불이 꺼졌으니, 사방이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나 갈 길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절망하며, 가만히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데 마음에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광산 갱도니까 어딘가 화차가 들락날락하던 철길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서 발끝으로 갱도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광물을 캐낼 때는 화차에 실어서 캐냈으니까 철길이 분명히 있을 것이거든요. 잠시 후에, 발에 철길이 닿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지만, 발끝이 닿는 대로 철길을 따라 더듬어서 나오니까 광명천지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캄캄한 동굴 속에 갇혔을지라도 우리 삶을 인도하는 철길인 말씀을 의지하며 믿고 나가면 문제는 해결되고 승리의 길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백성을 축복해 줍니다. 65년 전에 우리가 일본에 36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해방되었는데 그때 우리 한국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 100만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 사람 한사람 1년 GNP 수입이 미화로 68달러였습니다. 68달러면 거지요. 그런데 65년이 지난 오늘날에 우리 한국에 예수 믿는 사람이 1,200만입니다. 그리고 GNP가 2만불이 넘습니다.

성경 시편 91편에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환난 때 내가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 손해난 개인이나 국가가 없습니다. 한나라와 민족이 잘살려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결사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막지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천당만 가는 것이 우리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세상에 사는 동안에 물질적인 삶, 환경적인 삶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이 영혼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환경에도 구원이 미치고 우리 육신의 건강조차도 구원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이 약삭빠르지 않습니다. 아주 풍성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뿐 아니라 목사님이나 지도자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 말씀을 잘 모를 때는 하나님 말씀을 잘아는 목사님이나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구역장님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지 않습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구역장님들이 굉장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구약장님들이 앞서 갔으니까 하나님 뜻을 알려 주시거든요.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으니까 말씀을 우리가 선배들에게 들으면 믿음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주의 종들이 말씀을 전하면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해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습니다.

 

2. 성령님의 인도

그리고 둘째로, 우리의 생활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를 끊임없이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공기가 눈에 안보이지요. 그렇다고해서 공기가 없다는 사람 없습니다. 숨쉬는데 공기가 있지요. 성령은 영으로 눈에 안보이지요. 우리 생활 속에 늘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령께서는 삶의전반적인 과정을 통하여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우리 인생을 사는 것하고 구체적인 특별한 문제에 부딪혀서 하나님 뜻을 알아야 될 것이라고 대개 두 개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 내가 특별히 부딪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삶의 전반적인 과정을 통하여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1잘에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을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께서 전반적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며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영국의 죠지 뮬러(George Mueller)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성령의 뜻을 구합니다. 성령과 말씀은 결합되어야 합니다. 말씀 없이 성령님만 바라보면 미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어긋난 것은 성령님의 인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삶의 전반적인 과정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항상 성령님의 인도는 성경 말씀에 일치됩니다.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은 절대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를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언제나 우리에게 의와 진리와 거룩함과 믿음, 소망, 사랑, 선이 이 방향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늘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절망적이 되지 않습니다.

특별한 사건에 관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특별한 사건, 다시 말하면 내가 이 사업을 할까 말까요? 내가 휴가를 갈까 말까요? 내가 이 집을 살까요? 말까요? 아주 구체적인 것, 이런 것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알려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가 서로 대화하듯이 음성으로 말해줄 때가 있습니다. 기도 중 마음에 들리는 음성으로 혹은 고요하고 잠잠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해줄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절로 6절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사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사도바울 선생이 그 이름이 사울일 때 예수 믿는 사람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나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로 2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우리가 하나님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려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음성으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여러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음성이 들려오는데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가 없어요. 눈을 뜨고 살펴보면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분명히 마음 속에 음성이 들려오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도 있고 꿈이나 환상으로 하나님이 말씀할 때가 참 많습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로 21절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어린 아기를 가졌을 때 그 약혼자 요셉이 마리아를 점잖게 이혼해 버리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꿈과 환상으로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마태복음 2장 12절에 보면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 세사람 헤롯에 가지 말라고 해서 다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절로 6절에 보면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이와 같이 우리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으로 말씀한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꼭 필요하면 성령이 꿈과 환상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꼭 필요할 때 그런 인도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주어서 마음에 깨달아져요. 마음이 놀랍게 깨달아져요.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보다 굉장한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로 11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 일에 대한 것을 깨달아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마음에 소원을 일으켜서 행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하간 우리 예수를 믿고 성령을 모신 사람은 인생을 외롭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돕기 위해서 성령이 와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고 기도하면 어떤 방법으로도 음성으로든지 환상으로든 계시든지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시든지 이를 통해서 성령이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이자 기도의 용사인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선교사는, 어느 날 서재에서 이리저리 살피면서 책을 보는데 한 책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 책을 빼서 보니「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 제목을 보는 순간,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머리가 갑자기 맑아지면서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으니, 주님께서 다 이룬 일을 내가 또 하려고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할 일은 주님이 이루어 놓은 것을 전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성령님께서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주셔서 그는 중국인 외지 선교사로 가서 중국을 복음화하는 위대한 선구자가 되고, 말씀 증거 하는 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지혜와 총명과 모략으로 마음에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예수쟁이 말 잘한다 하지 않습니까? 예수쟁이가 왜 말 잘하느냐. 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환경을 통하여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주위 환경이 내가 생각한 이외로 다른 길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여의도에 교회를 짓고 온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셨는데 서대문에 있을 때 우리가 너무 교인이 많아가지고서 도저히 서대문 일대 교통이 마비가 되버리고 서울시 교통과가 와서 제발 떠나가라고.. 그런데 사람은 인산인해인데 돈이 별로 없어요. 믿은지 5년 이상쯤 되어야 돈이 생기기 시작해요. 우리 서대문에 온지 얼마 안 되니까 돈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 장로님들이 현저동, 아현동 산꼭대기에 판자촌을 사서 들어가자고 해요. 그것 도저히 안됩니다. 벌써 우리 교인이 몇 만 명인데 몇 만 명이 판자촌을 사서 어떻게 들어갑니까? 그리고 서울시내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서 기도를 하는데 음성도 안 들려오고 꿈도 환상도 없고 묵시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도 갑자기 서울시에서 여의도를 개발한다. 신문에 났어요. 여의도 이 모레벌판을 개발하는데 반대를 많이 하지요. 사람들은 다 처음에 반대하고 달라드는데 청계천 개발할 때 반대안한 사람 누가 있어요? 해놓으니 지금 얼마나 좋아요? 그때 여의도 개발할 때 모두 다 반대했습니다. 신문에서도 반대하고... 그러나 나는 기도를 하니까 성령께서 ‘너를 위해서 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장로님들에게 여의도 개발하는데 여의도로 하자고 하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아라. 그 길을 어떻게 가느냐. 안된다. 돈도 없거니와 여의도에 길도 없고 자동차도 가지 아니하고 거기가면 망한다’고... 그런데 또 제가 기도를 하니까 또 성령께서 ‘그 말 듣지 마라. 내가 시키는 데로 하라. 가라!’ 그래서 내가 김현옥 시장을 찾아갔습니다. 김현옥 시장을 만나가지고서 그 여의도 개발하는데 우리 교회가 가도 되냐니까 활짝 뛰면서 좋아해요. 왜냐, 아무도 안오니까 이 교회가 와줘야 사람들이 들어올 테니까. 그러면서 “1O만평 가져 10만평!” 그때 10만평 그대로 받았으면 요사이 와서 와따입니다. 그런데 간이 작아가지고서 “3천평만 달라”니까 그 안믿는 양반이 날보고 “쯧쯧쯧. 하나님 믿는 것이 왜그리 간이 작노? 3천평이 뭐냐. 3만평, 3만평!” 못 팔아먹어서 안달이 났어요. 그런데 나는 겁이 나서 못 먹은 것이 정직하고 성실하고 근면하고 충성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사기꾼 비슷한 사람 같으면 10만평도 샀지요. 사놓고 돈 못 낼까 싶어 겁이 나서 시에 빚질까 싶어서 내 돈 낼 정도만 정직하게 샀어요. 그런데 다 반대했습니다. 우리교회 여기 나오는데 동의한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정말 하나님 뜻 아닙니까? 이것... 이 좁은 땅에 80만 명이 주일날 왔다 갔다 하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여의도를 그때 다 샀으면 좋을 뻔 했어요. 하나님이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는 기도해 보고 하나님이 환경적으로 길을 열면 담대하게 그 길로 나가야 돼요. 머뭇거리면 안돼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을 지금 환경적으로 굉장히 축복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서 할렐루야 하고 앞으로 전진하고 나가야 돼요. 우리 한국이 반드시 앞으로 1,2년 내에 선진국에 진입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기세와 기상으로 선진국에 진입해야 우리 후손들이 선진국 자녀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안 후

셋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는 우리가 하나님 뜻을 감사하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 뜻을 알았으면 감사하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25장 1절에 “야훼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셨으면 감사하고 찬양하여 하나님 뜻을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계산하지 말아야 돼요.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 뜻을 받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 뜻을 받아들이면 언제나 결과가 좋습니다.

시편 37편 5절로 6절에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하나님이 맡겨 주시면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고 대외적으로 사람들 앞에 체면 세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을 강하고 담대하게 실천해야 돼요.

여호수아 1장 9절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이 뜻대로 행하면 어느 곳에 가나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하고 담대해야 돼요. 어디가도 반대하는 사람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사람 있습니다.

제가 50년간 목회를 하면서 지구를 115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사업을 유럽에서도 했고 미국에서도 했고 남미에서도 했고 아프리카에서도 했고 많이 했습니다. 해보니까 어디든지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망한다. 어디가도 안 된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또 내 충성스런 사람도 있어요. 어디가도 내가 죽으면 같이 죽겠다고 주님 이름으로 함께 일한 충성스러운 사람도 있어요. 여기도 많이 앉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셨기 때문에 정말 감사해요. 하나님 뜻이면 그 충성스러운 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같이 짐을 짊어져 줘요. 그러므로 하나님 사업을 50년 넘도록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뜻을 우리가 알면 주님은 우리 모두가 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만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 아닙니다. 이 땅에도 하나님 사는 동안에 잘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50년 동안 체험해 보았습니다. 진짜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고 나가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모든 일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면서 주의 손을 잡고 나가면 우리 인생은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몸으로 죽고 몸으로 살고

로마서 12:1-2 / 이윤재 목사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입니다. 이 뜻깊은 날에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예식을 갖으려고 합니다. 성찬은 몸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몸으로 먹고 마심으로 우리 몸이 사는 영적 예식입니다. 성찬의 키워드는 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캇 맥나이트라는 사람이 사람들이 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해 보니까 크게 네 가지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몸에 지나치게 신경쓰는 사람들입니다. 몸 가꾸고 치장하는 데 힘쓰고 미용, 미장, 네일아트, 문신, 바디 페인팅, 다이어트, 바디 빌딩, 몸 그림, 사진, 조각이 다 이런 데서 나옵니다. 나르시스트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는 몸을 즐거움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식도락, 육체적 쾌락, 미식가, 최고급 레스토랑, 맛있는 데라면 지구의 끝까지 가는 사람들,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세 번째는 정 반대로 몸을 다스려야 할 악의 소굴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옛날 수도원에서 이런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몸에서 죄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에 죄질 생각이 나면 채찍으로 때리고 금식을 밥먹듯 하고 아무 데서나 잡니다. 소위 금욕주의자들입니다. 마지막은 몸에 대한 별 생각없이 하루 하루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프면 병원가고 피곤하면 사우나가고 평소에 몸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지 않고 사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중에 어디에 속합니까?

어떤 경우든지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몸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영혼이 중요해서 영혼이 몸을 데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몸안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더 중요합니다. 죽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떠나고 몸만 있는 상태, 그것을 우리는 시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떠나가고 몸만 남으면 시신이라도 있지만 몸이 없으면 아예 영혼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한 여자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온몸이 다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어요”. 의사가 말했습니다. “아픈 데를 눌러 보세요”. 여자가 팔을 누르더니 “앗, 여기가 아파요” 합니다. 또 다리를 만지더니 “여기도 아파요”합니다. 또 목을 만지더니 “여기도 아파요” 합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잠시 손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손을 보니까 손가락이 부러져 있습니다. 부러진 손가락으로 눌렀더니 누른 데마다 아픈 것입니다. 한 군데가 아프면 다 아픕니다. 그것이 몸입니다. 그리고 몸이 아프면 영혼도 아픕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성찬주일에 성경이 말하는 몸의 신비를 깨닫기 원합니까?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이 만나는 영적 축복을 경험하기 원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몸의 세 가지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몸을 주셨습니다.

 

성경 최고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셨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룰 “성”자, “육신을 이루었다“, 몸을 입었다. 그래서 성육신입니다. 이 성육신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구원도 성화도 없고 모든 기독교 신학도 무너집니다. 우리가 믿는 모든 신앙의 기초에는 ”하나님이 몸을 입고 우리가운데 오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요1:14을 아십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이 토론된 주제였습니다.

 

 

특히 3세기에 이 논쟁이 치열했습니다. 대표적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리우스라는 사람과 아다나시우스라는 사람입니다.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순수한 영으로 계신 분이 더러운 인간의 육을 입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늘에 계신 분이 땅에 내려올 수 있을까? 절대적 초월성과 영원성을 가진 분이 어떻게 한계를 지닌 약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반면에 아다나시우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인간이 인간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될 수 없다고 하는 데 초월적인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누구인가? 그리고 성경이 수없이 말하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되게 하려 함이다”. 결국 아다나시우스가 이겼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일생은 몸으로 사신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태어나고 몸으로 33년을 사시다가 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후 40일간 몸으로 사시다가 감람산에서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몸으로 재림하십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몸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몸을 주신 것입니다. 해마다 이때쯤 되면 이스라엘 사마리아에서 양을 잡은 예식이 재현됩니다(이하 사진). 이 예식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룩한 산이라고 믿는 그리심산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식은 해가 지기 전 야외에서 거행됩니다. 먼저 흰 세마포 예복을 입은 남자들이 입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질서정연하게 서서 남쪽을 바라 보며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12장이 낭송되고 신명기와 시편을 교독합니다. 집례자는 초록색 예복을 곱게 차려 입은 사마리아 대제사장입니다. 성경이 낭송되는 동안 식장 밖에 예비되었던 양들은 청년들에 의해 하나씩 식장안으로 옮겨집니다. 끌려가는 양들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알기라도 하듯이 온 몸을 떨며 소리를 지릅니다. 대제사장의 기도가 끝나면 사람들은 해머가 양들의 머리를 칩니다. 양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사람들은 흐르는 피를 찍어 각자 자기 이마에 바릅니다.

양의 죽음을 확인한 사람들은 양의 가죽을 벗깁니다. 배는 가르고 창자와 내장은 밖으로 내 버려집니다. 그리고 양을 긴 장대 막대기에 매답니다. 머리를 밑으로 하고 꼬리를 위로 한 채 양들이 매달리면 그 입에서 피가 쏟아집니다. 더 이상 한 방울의 피도 남지 않을 때까지 피는 남김없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죽임당한 어린 양은 장대위에 매달려 있습니다. 제가 그 양을 보면 깨달았습니다. “아, 저것이 십자가구나. 십자가에 높히 달린 예수님, 예수님이 저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셨구나”.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갈2:20,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 사는 것이라”. 다같이 “자기 몸을 버리신”. 사53:12절입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중 하나로 여김을 받았슴이라”. “자기 영혼을 버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예수님은 다른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억지로 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셨습니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몸으로 삽니다.

 

성경이 말하는 몸의 두 번째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몸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 몸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갈2:20절 중간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갈2:20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우리가 영적으로 누구인가를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뒷 부분은 우리가 사는 목적을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 사는 것이라”. 그 한 가운데 “내가 육체가운데 산다”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때 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실 때 우리 몸안에 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우리 몸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몸이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도 몸안에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는 것도 몸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도 몸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몸은 예수님이 우리안에 거하는 공간이요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는 통로입니다. 몸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여러분은 몸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육체의 한계안에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흙은 약합니다. 잘 부서집니다. 흙은 그 자체로 힘이 없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흙”도 아닙니다. 흙에 있는 먼지입니다. 우리는 다 먼지입니다. 며칠전에 우리 교인이 돌아가셔서 화장터를 다녀왔습니다. 하얀 연기가 모락 모락 올라갑니다. 그 연기와 함께 이 땅에서 평생을 살았던 한 사람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먼지요 재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습니다. 죽음이 임박하자 자기 몸을 흙위에 뉘어달라고 부탁하더니 그 위에 재를 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재다. 모든 것이 재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육체가운데 산다는 말입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가운데 산다는 말은 비록 우리 몸이 흙이요 먼지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창1장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늘이 있으라.바다여, 있을지어다”. 그러나 사람을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습니다. 손수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지은 것은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몸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이 몸을 끝까지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즘 자살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한 해에15,000명 가량 죽고 있습니다. 인기 연예인들의 자살로 자살이 유행이 되고 미화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유가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육체와 함께 살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를 버리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탈무드에 “세상을 창조한 자만이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 했습니다. 우리에게 육체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취할 때까지는 우리는 육체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육체를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가운데 우리 몸을 함부로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2천년 교회사에는 거룩하게 살기 위해 자기 몸을 괴롭게 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금욕주의라고 합니다. 골2:21절에 금욕주의의 세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골2:21,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 말라”. 첫째 붙잡지 말라. 세상을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악된 곳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맛보지 말라. 음식을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식이 죄악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셋째 만지지 말라. 남녀관계를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거룩한 성도들은 “출산을 위해서만 남녀관계를 맺었습니다. 모든 죄가 남녀관계에서 온다고 믿었습니다. 성이 곧 모든 악의 뿌리요 원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그렇게 나쁜 것이면 왜 하나님이 사람에게 성을 주셨겠습니까? 남자나 여자가 그렇게 위험하면 남자나 여자중 한 사람만 만들지 왜 둘을 만들었겠습니까? 그렇게 성이 나쁜 것이라면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겠습니까? 영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도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육체가운데 산다는 말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몸으로 예배하고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롬12:1을 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1의 “그러므로”는 로마서에서 중요한 “그러므로”입니다. 1장에서 11장까지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모두가 죄인이다. 죄인으로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피를 흘려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 결과 롬5장,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롬6장, 그 결과 예수님과 우리는 연합되었다. 그가 함께 죽었으니 그와 함께 산다. 롬7장, 그로 인해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 여전히 우리에게 죄가 있지만 은혜가 더욱 강하다. 롬8장, 최고의 은혜는 성령을 주신 은혜다. 성령은 우리안에 거하면서 기도하게 하시고, 죄를 이기게 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최후 승리하게 하신다. 롬9-11장, 이 구원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심지어 믿지 유대인들도 언젠가 믿어 이 구원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가 없다. 믿는 모든 사람이 결국 구원받을 것이다”. 그리고 롬12장으로 오면 “그러므로”입니다. 롬1장에서 11장까지 이어온 모든 구원과 모든 교리의 최종적인 목표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이 “그러므로”를 로이드 죤스는 “위대한 그러므로”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믿음과 모든 교리를 다 마친 다음에 바울이 “그러므로” 무엇을 하라고 말했을까? 놀랍게도 예배입니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의 몸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예배하라 하면 “마음으로 예배하라”, “영으로 예배하라“, ”마음과 뜻을 다해 예배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몸으로 예배하라“라고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결국 예배까지 오려고 길게 말했던 것입니다. 롬1장에서 11장까지의 그 긴 장정의 끝에 예배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다“. 죄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기독론,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신다”. 성령론, 롬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론도 결국 한 가지 위대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예배”입니다. 모든 신학과 교리와 믿음는 결국 이 한 목표를 향해 움직입니다. “예배”입니다. 그나마 “몸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산 제사”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배합니까? 예배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최고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교리, 신학, 예전, 관습, 조직, 직분, 다 해서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예배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런데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입니까? 몸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몸이 안 따라가는 데 나는 마음으로 드렸다 말하지 마십시오. 예배의 타락은 몸은 안오는 데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입니다. 현대의 예배가 그렇습니다. 교회나와 몸으로 드리지 않으면서 집에서 CTS, CBS 보고 예배드리고 헌금은 수표로 드립니다.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몸으로 드립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감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께끗한 옷을 입고 걸어서 교회로 옵니다. 교회 들어오면서 “주님, 제가 왔습니다. 저를 받아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예배할 때 몸으로 예배합니다. 귀로는 듣고 입으로는 찬양하고 물질은 드리고 일어나고 앉는 것도 귀찮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몸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예배했습니다. 오랫동안 블레셋에게 뺏겼던 법궤를 찾아오면서 너무 좋아서 온 몸으로 춤을 췄습니다. 삼하6:14-15,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그때 창밖으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미갈이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16절입니다. 삼하6:16,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온 몸을 다해 예배하는 다윗과 그것을 업신여긴 미갈, 오늘날도 두 종류의 예배자가 있습니다. 결국 미갈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신6:5을 아십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다같이 “힘을 다하여”.

 

성찬은 무엇입니까? 몸으로 오신 예수님을 몸으로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이 내 몸이 되고 주님의 피가 내 피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는 순간, 영원으로 계신 하나님이 오늘의 순간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지금 여기 임하시는 것입니다. 영으로 계신 하나님이 물질이 되어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재현입니다. 단지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 오신 예수님이 내 몸에 물질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신성으로 계신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 우리 몸속에 영원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영원이 순간에 머물고 우주가 손바닥에 머물고 영이 물질이 되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우리 몸이 받아 영원한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구원받은 여러분, 평생 예배하며 살겠습니까? 몸으로 예배하며 살겠습니까?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몸으로 살지만 그 몸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큰 한계가 우리 몸은 정결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몸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안에 있는 몸입니다. 눈에 보이는 몸을 우리는 body 라고 부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몸, 육체를 flesh라고 합니다. 원어로도 다릅니다. 눈에 조이는 몸을 “소마”라고 부르고 눈에 보이지 않은 몸을 “싸르크”라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안에 있는 몸입니다. 이 몸이 문제입니다. 이 몸을 성경은 “육체, 육신, 지체, 죄의 소욕”이라고 부릅니다. 죄를 일으키고 악을 만들어 내는 근원지입니다. 바울이 롬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했던 그 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 위해 날마다 이 육체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가장 큰 육체의 소욕이 성입니다. 요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적인 유혹에 넘어지는지. 여러분은 이런 통계를 아십니까? 미국의 경우입니다만, 미국 포르노시장의 규모가 약 15조 원에 이르러 프로축구와 프로농구, 프로야구의 매출을 다 합친 것보다 많답니다. 할리우드가 매년 쏟아내는 성인물만 해도 대략 만 천편 정도로 다른 영화사의 20배에 이른답니다. 최근 500명이 넘는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0퍼센트가 넘는 응답자들이 습관적으로 성욕, 포르노, 또는 성적인 환상이 삶에 깊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 하나님과 단절된 느낌을 너무 자주 받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정욕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물질욕과 함께 우리안에서 끊임없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우리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한 10대 소년이 80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예쁜 여학생만 보면 정신을 못차리겠는 데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랬는 데 80세가 지나면서 조금 덜하는 것 같아”.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라 조금 덜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을 부추키는 것이 술입니다.최근 발표에 따르면 한국교회 남성들의 1/4가량이 정기적으로 술을 마시고 1/4가량이 부정기적으로 술을 마신답니다. 10% 정도는 지난 한 달 사이에 최소한 한 번 이상 폭음한 경험이 있답니다. 남신도 20명당 1명은 술고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술 한 잔 하는 것이 뭐 어떠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술은 모든 종류의 악을 가져옵니다. 술로 인해 교회 출석 못합니다. 술로 인해 기도생활 못합니다. 술로 인해 성적인 범죄에 빠집니다. 술로 인해 가정 불화가 생깁니다. 술 때문에 손찌검한 가정이 늘고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술 때문에 죄짓고 죄지으면 예배자로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2절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교회안에서 주일 낮 11시에 드리는 예배만 예배가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몸이 항상 죄속에 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런 에배가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몸이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집이 아닙니까? 거룩을 위해서는 먼저 죄의 현장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입니다.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집니다.

이를 위해 좋은 것이 금식입니다. 금식은 음식을 절제함으로써 우리 몸을 다스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기도하고 금식하며 보내는 기간입니다. 이 전통은 교회사에서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4세기 초 스페인에 살았던 경건한 한 여자성도의 일기가 있습니다. “이게리아의 일기”라고 합니다. 당시 이게리아는 고국을 떠나 이스라엘, 이집트등지로 성지순례를 다니는 중이었는 데 그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쓴 보고가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머물던 기간은 마침 사순절 기간으로 4세기 초 성도들의 사순절 영적 활동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기간의 예루살렘 성도들은 매일 예수님의 무덤(부활)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순절 40일 기간 매일 한 끼를 금식하였습니다. 또 이 기간 동안 성도들은 매주 금요일에 교회에 모여 철야하면서 함께 성경을 읽었으며 기도는 토요일 새벽 성찬예배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또 이들은 이 기간에 경건하게 살기 위해 빵이나 기름을 먹지 않았고 심지어 과일도 먹지 않았답니다. 고기는 아픈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체 입에 대지 않았고 얼굴에 화장이나 기름을 바르지도 않았고, 포도주를 마시거나 화려한 옷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고난주간에는 모든 성도가 금식했고 성금요일에는 예루살렘 전체가 텅 빌 정도로 모두 교회에 모여 금식했다고 합니다.

금식은 다만 굶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에 대하여 존 파이퍼 목사님이 가장 좋은 정의를 했습니다. “금식이란 온 몸으로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는 것이다”. 굶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입니다. 평소에 음식으로 굶주림을 표현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굶주림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루 세 끼 다 안 먹는 완전금식이 있고 하루 한끼 혹은 간식을 안 먹거나 후식, 외식, 걸게 먹지 않은 부분금식이 있습니다. 형편대로 하면 됩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한번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4.12 헌금해 주면 북한 어린이 국수 보내는 데 도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마음으로 굶주리기 위해 음식뿐 아니라 평소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행, 오락, 늦은 귀가, 자제 하십시오.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 많은 말, 다투는 것, 논쟁, 좋지 않습니다. 미디어도 절제해야 합니다. T.V, 핸드폰, 스마트폰, 특히 스마트폰을 멀리 합시다. 이스라엘 회당이나 가정에 가면 입구에 바구니가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갈 때 지갑, 핸드폰, 자동차 키, 현금, 다 내 놓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방해되는 것은 다 넣습니다. 그리고 예배끝나면 가져갑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없을까요? 우리는 거의 핸드폰에 중독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하철을 타 보세요. 거의 100% 핸드폰 보고 있습니다. 없으면 못사는 것은 하나님 한 분이 됩니다. 중독은 현대판 우상입니다. 하나님 대용품은 다 우상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이 중독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까요? 우리 몸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사순절, 고난주간에 예수님, 몸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도 몸으로 삽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거룩한 몸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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