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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703 / 출 2:1-10 / 모세의 출생과 양육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7.02|조회수2,385 목록 댓글 0

모세의 출생과 양육

출 2:1-10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출 2:1-10 / [모세의 출생] 이즈음에 레위 지파 사람 중 어떤 남자가 레위 지파 여자에게 장가들었다. 2) 그 여자가 아이를 가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아주 잘생겨 석 달 동안 숨겨서 키웠다. 3)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왕골 상자에 역청과 송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강가 갈대 수풀 사이에 놓아두었다. 4) 그 아이의 누이는 자기 동생이 어떻게 될까 걱정스러워서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 보고 있었다. 5)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강가에 내려오고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바로의 딸이 갈대 수풀 사이에 상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시녀들에게 그 상자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6) 상자를 열어 보니 웬 아이가 울고 있지 않은가! 바로의 딸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아이구, 히브리 사내 아이로구먼' 하고 중얼거렸다. 7) 이때 그 아이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다가가서 `내가 가서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 유모를 데려올까요?' 하고 말하자 8) 바로의 딸이 `그렇게 하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 소녀가 아이의 어머니를 데리고 오자 9) 바로의 딸은 그 생모에게 `이 아이에게 내 대신 젖을 먹여 주시오. 내가 그 삯을 드리지요' 하고 말하였다. 생모가 아이를 데리고 가 젖을 먹여 키웠다. 10) 그 아이가 자라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그 아이를 물에서 건져내었다고 하여 이름을 모세라고 지어 주었다.

 

모세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드라마 같은 내용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어 (1-6) 본문에는 하나님의 이름은 커녕 기사와 이적과 같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역설과 반전이 거듭되는 사건 하나가 소개됩니다. 바로가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선포한 후에 레위인의 한 가정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기를 석 달 동안 숨기다가 결국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놓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나일 강은 생명의 젖줄로 숭배하던 숭고한 곳이었지만, 이 아기에게는 죽음으로 둘러싸인 무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역청과 나무진으로 칠한 갈대 상자 속에 있던 이 아이는 바로의 딸에 의해 건져집니다. 히브리 민족의 남자 신생아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한 바로와 달리, 그의 딸은 모세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7-10) 바로의 딸에 의해 구원을 받은 히브리 사람의 아기는 그녀의 도움으로 친모의 젖을 먹으며 자랍니다. 적진의 심장부에서의 양육 과정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상황이었지만, 은밀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이스라엘의 운명과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만큼 크고 위대합니다. 바로의 딸은 물에서 건져냈다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모세라 했고, 그를 아들로 삼아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그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머물고 있는 왕궁에서 애굽의 유명인사로 성장하고 자기 동족의 지도자로 필요한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의 섭리, 그분의 역사하심, 그분의 은혜, 그것만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소망이 됩니다. 모든 상황을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의 지각과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기꺼이 맡겨야 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의 상식과 이성, 생각지도 못한 환경을 사용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 앞에 당신은 순복하고, 매순간 주님을 인정하는지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이 행복해야합니다. 남과 상관없는 나만의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행복하게 하면 내가 행복하고 내가 행복하면 남도 행복합니다. 자식이 행복하면 부모가 행복하고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이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행복의 향기가 내게로 올 것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유대인의 격언입니다.

 

< 설 교 >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출애굽기 2장 1~10절 / 김철환 목사

고센에 사는 히브리 민족이 점점 많아졌다. 70명으로 시작된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자식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장정 60만 명이 되었다. 여기에 어린이와 여자들을 포함한다면 대략 200만 명이 될 것이다. 그래서 본토 애굽 인들이 400년간 불어난 히브리 사람으로 인해 근심하게 되어(출1:12) 중노동을 시키고 히브리 사람의 인구 제한 안을 놓고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애굽 왕 파라오는 산파술을 동원하여 남자 아이를 출산 때부터 제거하도록 지시를 하고 딸은 살려주도록 하였다.(출1:16) 그런 정책도 신앙을 가진 히브리 산파들의 행동들로 인해 무산이 되고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애굽 왕은 새롭게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아들이 태어나거든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면 살려두라는 명령인데 그의 모든 백성에게 지시하였다. (출1:22)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애굽 백성들의 마음 먹기에 따라 죽고 사는 문제가 되었기에 히브리 아들들은 생명을 부지할 길이 없었다. 히브리의 아이를 출산한 가정에는 깊은 삶의 먹구름이 밀려왔다. 아니 죽음의 먹구름이었다. 아이를 죽음의 먹구름에 빼앗길 수 없는 어미들은 통곡을 해도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박한 가정의 일상사와 상관없이 나일 문명의 중추국인 애굽은 그 찬란한 문명 대국의 힘을 가지고 약소 국가, 아니 이제 겨우 히브리 종족으로 세워져 가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제거하려 하였다. 세상은 강자의 문화다. 힘으로써 약자를 제압하고 조종하고 원하는대로 주무르려 한다. 바로의 명령대로 되어지면 야곱의 12지파들은 모든 출생하는 아들을 잃고 종족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모세가 태어났다. 물론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어떻게 이름이 불리워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소용돌이치는 학살 명령 앞에 이름을 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부모가 신생아 아들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는 애굽의 백성들로부터 아들을 지켜내는 일에 씨름을 한다.

 

1. 숨겨서 키우는 어머니

 

출2:1~2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라고 하였다.

여기서 레위 가문의 아버지 이름은 고핫의 아들 아므람이다. 출6:20을 보면 모세의 어머니의 이름은 요게벳이다. 그러니까 정통 레위 가문에서 모세를 낳은 것인데 다행스러운 것은 모세의 형,아론이 3살 되었을 때 학살 명령이 내렸다는 것이다. 이제 막 태어난 모세는 애굽 사람의 눈에 띄면 나일 강에 던져지는 갓난 아기의 운명이었기에 요게벳은 모세를 숨긴다. 잘 생긴 아들의 모습을 보고 숨겨서 키워야 하는 요게벳을 생각해보라.

어머니들은 생명 싸개다. 죽음의 먹구름이 어떤 모양으로 달려들어 오든지 어머니들은 그 죽음의 공격으로부터 아이를 싸서 숨겨야 한다. 아이의 키가 작고 울음 소리가 작고 하루 종일 잠을 자는 신생아의 기간 동안 어머니는 아이를 품고 생명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생명 싸개다. 어머니들이 생명을 싸서 보호하고 죽음의 공격에서 숨겨두는 일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노략질 당한다. 이 세상의 죽음의 먹구름은 정치적 바로의 권세만이 아니고 다양한 것으로 밀려온다. 경제적으로, 보건학적으로, 환경적으로 다가온다. 그때 어미의 날개로 싸맬 수 없다고 죽음 앞에 내던지는 이들이 있다. 경건한 어머니들은 그래서는 안된다. 어찌됐든 어미가 생명 싸개다. 숨길 수 있는 기간 동안은 보호하라. 철저히 싸서 생명을 키우고 철저히 보호하여 지켜라.

 

2. 갈대 상자를 준비하여 지키는 어머니

 

출2:3을 보라.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라고 쓰여 있다. 자식을 출산한 어머니들은 어머니가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일을 어머니 몸으로 담당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가 장성하고 울음 소리가 커졌다.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움직이고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더 이상 애굽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숨겨서 생명을 지켜내기가 불가능하다. 결국 어머니가 한 일은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작업을 한 것이다.

갈대 상자는 약하기 그지 없다. 물에 젖는 갈대 상자는 쉽게 망가지기 쉽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그 속에 아기를 두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것 같지만 한 시간이라도, 며칠만이라도 아이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어머니의 방법들이 엿보인다. 그래서 갈대 상자 속으로 침투하여 밀고 들어올 나일 강물을 막는 방법을 사용한다.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는 것이다. 초라한 나무 상자가 아이를 오랫동안 보호하도록 준비하는 어머니의 손을 보게 된다. 역청과 나무 진을 바르는 이 일은 방수 작업이다. 갈대 상자가 물에 의해 부서지지 않고 상자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하려는 고육지책이다.

여기서 일하는 요게벳의 손이 기도하는 손이라고 생각해본다. 역청을 칠하면서 아이가 물에 닿지 않기를 염원하는 기도가 올려지는 손이라고 느껴진다. 여기서 나무 진을 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의 소망이 담겨져 모세의 생존을 기대하는 손이라고 느껴진다. 갈대 상자는 보잘 것 없어도 요게벳이 꿈꾸는 모세를 위한 방주다. 노아의 방주에는 비할 수 없지만 물에서 구원해 내기 위한 방주 만들기다.

창6:14을 보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였다.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을 때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와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각기 암수별로 보존하여 생명을 지키려는 작업이었다. 어찌 작은 갈대 상자에 역청을 칠하는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위해 어리석은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는가? 갈대 상자를 준비하여 죽음으로부터, 어둠으로부터, 파라오의 학살로부터 자식을 지키는 어머니가 되려고 더 많이 역청과 나무 진을 사용하였다.

우리 어머니들은 죄악의 물결 앞에 속수무책으로 있으면 안된다. 갈대 상자란 방주를 만들라. 보잘 것 없어보여도 기도의 역청을 바름으로써 사랑과 소망의 나무 진을 바름으로써 죄악의 물결이 아기에게 침투해 들어오지 않도록 방주를 만드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나는 어머니들이 새벽 기도를 하고 어머니들이 일천번제 예물을 드리고 어머니들이 몸을 드려 자신의 마음과 제단을 섬기는 것을 본다. 그때마다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여 방수 기능이 뛰어나게 만드는 갈대 상자를 준비하는 요게벳의 모습을 상상한다. 어머니들의 할 일, 아버지들의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기도의 손으로, 사랑의 손으로 갈대 상자를 준비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역청을 칠할 때 역청을 누가 준비해 주었을까? 또 나무 진은 누가 준비해 주었을까? 모세를 지키려 아므람의 도움을 받는 어머니를 상상할 수 있다.

 

3.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어머니

 

출2:3下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출2: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이제 요게벳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석 달을 숨겨서 생명 싸개 역할을 했다. 갈대 상자에 역청을 칠하여 아기를 보호하려는 역할을 다했다. 이제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이를 담은 상자가 나일 강에 떠내려가든, 갈대 사이에서 버려진 갈대 상자로 맴돌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제 어머니 요게벳은 하나님께 모세의 생과 사를 맡겨버린다. 갈대 상자에 담아 아기의 운명을 강으로 내어 던진다.

우리는 아기를 키우고 생명을 키울 때 나의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손에 죽고 사는 것을 맡기는 믿음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괴롭고 하늘이 무심한 것 같아서 뒹굴고 싶은 심정이어도 맡겨야 한다. 아기를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긴 결과가 무엇인가?

①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게 되는 일상이 회복되다.

출2:5이하를 보면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에 왔다. 나일 강은 애굽 인에게 다산의 상징이었다. 나일 강에서의 목욕이란 많은 아기를 낳게 되는 미신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주와 시녀들이 나일 강가에서 모세의 갈대 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이때 우는 히브리 아이를 보고 긍휼이 여기는 공주에게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이 달려가 유모를 데려올까 요청을 하게 된다. 그래서 허락을 받은 미리암이 자기 동생을 위해 어머니를 유모로 불러온다. 결국 어머니 요게벳은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다. 사람의 방법이 끝이 났을 때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리는 믿음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당당히 아이를 안고 어머니가 젖을 물리는 일상의 기쁨이 회복된다.

 

② 두려움이 물러가다.

모세의 가정은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게 되었다. 마음껏 젖을 물려 먹이게 되었으니 죽음의 먹구름이 다 떠나갔다. 안전함과 평안함이 들어왔다. 사망을 걱정하고 애굽 사람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다 떠나갔다. 오히려 애굽 백성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맡기는 믿음이 기적을 부른다.

 

③ 돈을 받고 아기 젖을 먹이게 되다.

출2:9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이 세상에 어미가 자기 자녀에게 젖을 먹인다고 삯을 받는 이가 어디 있는가?환난의 위기를 맞서 싸우고 하나님께 맡겨 드렸더니 그 역사가 너무도 놀랍다. 내 아기를 기르는 어미가 젖을 물리고 바로의 공주로부터 월급을 받는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의 품에서 장성하였다. 그 이름이 모세가 된 것은 출2:10을 보면 물에서 건져 내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조차 지어서 부를 시간이 없던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요게벳의 경건한 삶의 태도는 아들을 구원해 냈고 자기 동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민족의 지도자를 키워냈다.

우리는 생명 싸개 역할을 잘해야 한다.

갈대 상자를 준비하는 어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으로 나아가라.

그러면 자식이 사는 역사, 사람을 살리는 역사, 나라 없는 족속을 나라 있는 백성이 되게 하는 역사를 만들게 된다. 어머니는 사명자다. 그 곁에 있는 아버지도 사명자다.

 

 

 

 

내 인생의 주관자

이정익 목사

지난 주일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모세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모습을 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모세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이 지금 나의 삶에 대해서도 지배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주전 1805년에 애굽에서 요셉이 110세를 살고 죽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요셉은 애굽이 위기에 처했을 때 총리로서 백성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때 요셉은 명 총리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들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한때 하나님은 요셉을 들어서 애굽의 총리를 삼으시고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의 시대가 지나니까 이번에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과 그 시대에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필요한 사람들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발굴되어 사용 받는 것도 복된 삶입니다. 요셉이 1805년에 사망하고 279년이 흘러 기원전 1526년에 18대 왕조가 세워지고 18대 왕조의 3대 황제인 투트모세 1세(주전 1526-1512)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비열하고 사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요셉 때 야곱이 자손 70명을 이끌고 애굽에 갔는데 지금 279년이 흐른 오늘은 장정만 60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렇게 많이 불어나니까 애굽왕이 두려워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노동을 시키고 억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하면 할수록 더 왕성하게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마침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 아이는 살리라는 어명이 떨어졌습니다.

 

 

 

모세의 출생

 

 

 

그런 위기의 시대에 모세가 태어납니다. 레위족속 아무람과 아내 요게벳 사이에서 둘째아들 모세가 태어납니다. 형은 아론이고 누이는 미리암입니다. 무서운 박해 속에서 태어난 모세(1526-1406)는 어머니와 누이의 지혜로 살아납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황제의 명을 어기고 숨어서 모세를 기르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 역청인 송진으로 방수하여 나일강에 띠웁니다. 아들의 운명과 장래와 살고 죽는 일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강물에 띄워 보낸 것입니다. 살다보면 절박한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운명의 주인이신 주께 맡기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도 주께로부터 왔고 나의 미래도 그분이 주관하시기 때입니다. 그 분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 신앙이 있어야 절박한 순간에 결단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런 사람이 큰일을 하게 되고 중책을 맡아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런 믿음이 없으면 위기 시에 우유부단하게 됩니다. 그러면 중대사를 앞에 놓고 우물쭈물하고 할까 말까 주저주저하게 되어 마침내 내 운명은 아주 불확실한 상태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큰 오점을 남기게 되고 대역죄를 짓게 되거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그 시대의 여걸이었고 출중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중요한 순간에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겨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핏덩어리 모세를 갈대상자에 넣어 강물에 과감하게 띄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누군가에 의해 건짐 받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요게벳이라는 여인은 여걸입니다. 신앙의 위인입니다.

 

누가 여성을 약한 자라고 했습니까. 여기 모세의 어머니를 보십시오. 얼마나 결단력 있고 무서운 믿음을 발휘합니까. 여기 본문에 보면 모세의 아버지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위기의 순간에 신앙으로 결단하고 판단하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신앙의 흐름은 모계를 통해서 흐릅니다. 어느 시대나 믿음의 흐름은 여성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씀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믿음은 사업이 잘되고 형통하고 건강하고 잘사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적어도 내 운명과 미래와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 차원입니다. 그 고백이 있어야 내 전 존재를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는 그 믿음으로 아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던 것입니다.

 

 

 

왕궁으로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은 벌써 액션을 취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아들을 강물에 던졌을 때 하나님은 그때 나일 강 하류에 이집트 공주인 하셉투스 18대왕조의 2대 황제인 아멘호텝 1세의 딸을 배치해 두셨습니다. 그때 공주가 강 하루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절묘하지 않습니까. 그때 공주는 떠내려 오는 상자를 주었습니다. 상자 속에서 어린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아이는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순간 공주의 마음에 측은지심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주는 아기를 안고 당황해 하였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발견하였으니 얼마나 당황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고 순간 당황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숨어서 바라보고 있던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이 뛰어가 “내가 아이의 유모를 대 주랴”하고 말하고 이미 준비된 자기 어머니를 데려다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아이의 유모가 되어 자기 아들 모세를 마음 놓고 양육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주는 그 모세를 자기아들로 입양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절묘합니다.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마디마디에서도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그 섭리에 의해서 지금 여러분들이 여기까지 살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추어 사람들과 연결시키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삶은 이 하나님의 섭리에 편입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은 모세를 왕궁으로 보내시려고 그러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요셉을 장차 이방세계에까지 구원사를 펼치시기 위해서 애굽의 총리로 보내시기로 계획하셔서 보디발 집으로 보내신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를 통해서 그 시대에 이방 세계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살아계심을 선포하고 백성을 해방시켜야 하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를 왕궁으로 들여보내 훈련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모세가 왕궁으로 들어가 왕자로 자랍니다. 하나님은 지금 80년 후 모세를 통해서 백성을 출애굽 시킬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자라서 철이 들고 경험을 쌓았고 문물을 많이 익혔습니다. 이제 그 모세가 성장해서 나이 40세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동족이 중노동하는 노동현장에 갔습니다. 동족이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 모세는 자기 동족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무자비하게 자기 백성을 탄압하는 이집트인 감독을 볼 때 속에서 의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죽였습니다.

 

 

 

연단생활

 

 

 

여기서 두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모세의 의분이나 감독의 살해는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은 민족해방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 폭력이 난무하고 힘으로 뭘 해 보겠다고 하는데 주님은 이것은 방법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왕이 되어주기를 요구하였지만 예수님은 대꾸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사 모든 방법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지른 모세의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오히려 동족들 앞에서 우쭐하였을 것이고 동족이 동조해 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족 누구도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지지세력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네가 우리의 심판관이 되려느냐고 대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이 고발되고 바로의 체포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모세는 기겁을 하고 이집트와 가나안의 중간지역인 미디안 광야로 긴급히 도주하여 망명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해가 기원전 1486년입니다.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모세는 미디안 종교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의 집에 들어가 충실한 머슴 생활을 합니다. 그곳에서 인정받아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알 것은 “만사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때가 있습니다. 경륜이 차야 합니다.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의분만 가지고 살면 안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더욱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중요합니다. 모세는 아직 때가 안 되었는데 의분과 혈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부작용만 일으켰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특출해도 때가 아닌데 액션을 취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김옥균의 난을 보면 모두가 원하는 행동이었지만 그런데 아직 때가 덜 익었을 때에 행동을 개시하여 결국 김옥균의 난은 3일 천하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개구리는 겨울잠을 푹 자고 경칩이 지난 후에 깨어나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급하게 경칩 이전에 깨어 나오면 얼어 죽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모세는 이 혈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혈기는 미숙자가 자주 표출하는 것입니다. 혈기는 덜 익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이 혈기는 뿌리가 깊습니다. 좀처럼 뽑히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시내산에서 40일간 금식기도 하고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하는데도 그런데도 그 혈기가 뽑히지 않았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하고 야단할 때 그 모습을 본 모세는 혈기가 불을 뿜듯 터져 나와 하나님이 주신 돌비를 던져 박살을 내고 백성들을 호령하였습니다. 던지려면 돌비는 내려놓고 다른 돌을 집어 던져야지 그 돌이 어떤 돌인데 집어 던져서 박살을 냅니까. 이 혈기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모세는 결국 그 혈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중에 죽었습니다. 참 불행입니다. 그런 혈기 때문에 모세는 살인을 하고 미디안 광야로 가서 40년 동안 연마하고 훈련받았으니 얼마나 고된 고뇌의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입니다. 왕궁에서 40년을 살아왔는데 그때 모세의 자존심과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충격이 컷을 것입니다. 왕자에서 어느 날 살인자가 되었고 전과자가 되어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왕궁에서 호화롭게 살며 불가능이 없다고 자기도취에 빠져 살던 모세가 오늘은 가장 낮은 자리로 전락하였으니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하고 고뇌가 컸겠습니까. 3성장군이 전역하는 날은 아파트 3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2성장군은 2층에서 떨어지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병장은 전역하는 날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일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을 것입니다. 충격이 컷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모세된 것은 그 광야에서 40년 동안 모질게 밑바닥을 경험한 경험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모세를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높았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드셨고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자존심을 부숴버리셨습니다. 하면 다 된다고 믿던 교만을 꺾어 버리셨습니다.

 

 

소명

 

 

 

그러다가 때가 되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모세 나이 80이 되던 해입니다. 그때 어느 날 모세는 양떼를 몰고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호렙산은 시내산 아래 부분을 말하고 윗부분을 시내산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모세는 골짜기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분명 불이 떨기나무에 붙어 타고 있는데 나무는 타지 않고 그냥 있습니다. 더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그때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신을 벗으라, 여기는 거룩한 곳이다” 모세가 신발을 벗고 다가갔습니다. 황홀했을 것입니다. 여전히 불은 타고 있는데 나무는 타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때 또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제 애굽에 가서 고통 받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소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때 왕은 주전 1450-1425년 사이에 재임하였던 아멘호텝 2세였습니다. 그 왕은 아주 독종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왕이 두려워 싸울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못 간다고 버텼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으로 가라고 하셨고 모세는 못 간다고 버텼습니다. 모세는 차라리 말 잘하는 아론을 보내라고 버텼고 하나님은 그래도 네가 가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말 잘하는 아론을 데리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묘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있는 사람을 보내소서” 하면 하나님은 굳이 “네가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능력이 있습니다”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할 수 없이 말 잘하는 아론을 대동하고 애굽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일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보기에는 좋은데 심리학적으로 보면 지조가 약하고 대가 약하다고 합니다. 어느 작가가 서울의 어느 큰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시간이 늦어 본당으로 가지 못하고 별관에서 비디오로 설교를 듣는데 비디오에 비친 목사의 설교가 너무 잘하였습니다. 말을 너무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잘하는 말에 감동이 된 것이 아니고 나중에는 그 입이 그렇게 밉게 보이더라고 합니다. 말을 너무 잘하니까 그 설교에 신뢰감이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말은 좀 느리고 어눌해도 그것이 훨씬 더 신뢰감이 가는 법입니다. 말이 적은 사람이 뚝심이 있고 중심이 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뒤에서 말을 많이 합니다. 뒤에서 하는 말들은 대부분 옳은 말이 아닙니다. 옳은 여론을 이끄는 말이 아닙니다. 대부분 불평이고 불만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말 잘하는 사람은 크게 사용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론은 말은 잘하기로 하나님도 아셨지만 결정적인 시간에 금을 거둬 송아지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모세가 마침내 애굽으로 갔습니다. 가서 바로에게 백성의 해방을 요구하였습니다.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면 노동에 차질이 되니까 해방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때부터 모세는 10가지 재앙을 내리게 하여 마침내 이집트 왕을 굴복시킵니다. 그 결과 BC 1446년 아빕월 15일에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시키려고 모세를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왕궁생활을 하게 하여 문물을 배우게 하셨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켜 강하게 만들어 지도자의 자질을 겸비하게 하신 후 오늘 모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세는 그동안 모진 훈련을 받고 나이 80에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함께 하신 발자취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뿐 아니고 요셉뿐이 아니고 지금 나의 인생에도 이렇게 섭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인생에도 그렇게 개입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시고 계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요셉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사를 펼치시고 이루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나를 통해서도 그렇게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예하고 응답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자를 예비하신 하나님

피영민 목사

서론

 

출애굽기 2장의 내용은 주일학교 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모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장이 갖는 중요성을 간과하기 쉬운데, 출애굽기 1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이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면, 출애굽기 2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를 예비하시는 모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장을 읽을 때 “하나님이 구원자를 어떻게 살려주시고, 어떻게 훈련하시고, 어떻게 구원할 백성을 예비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Ⅰ. 구원자의 기원(Origin of Savior)

 

1절에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6장 16~20절을 보면 레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레위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게르손이고, 둘째가 고핫이고, 셋째가 므라리였습니다. 이 중 레위의 둘째 아들인 고핫이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아므람이었습니다. 또 출애굽기 6장 20절에 “아므람이 그 아비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취하였고 그가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수는 일백삼십칠 세이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므람이 고모인 요게벳과 결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므람이 요게벳과 결혼해서 아론과 모세를 낳았는데, 그 전에 딸도 한 명 낳았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부모였던 아므람과 요게벳은 딸을 하나 낳고 아들을 둘 낳았던 것입니다. 그 딸의 이름이 미리암이었습니다. 우리말 어감으로 봐서도 뭔가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이름부터가 ‘미리암’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0절에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리암은 선견지명이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나일강에 떠내려가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지켜보고 있다가 바로의 공주에게 가서 “유모를 소개해 주리이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므람의 자식들 가운데 미리암이 첫째고, 둘째가 아론이고, 셋째가 모세입니다. 그러면 모세와 아론은 몇 살 터울일까요? 출애굽기 7장 7절의 기록에 따르면 출애굽 할 당시 모세의 나이가 80세였고, 아론이 83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 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미리암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모세가 나일강물에 떠내려갈 때 이미 바로의 공주에게 가서 어머니인 요게벳을 유모로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분별력과 지혜를 가진 소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문헌에 따르면 미리암은 광야 방황 39년째, 그녀의 나이 127세가 되었을 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40년째였기 때문에 미리암이 죽지 않았다면 128세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의 나이가 120세였음을 감안할 때, 모세와 미리암의 나이 차이는 8살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절에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게벳이 막내아들을 낳고 보니 참으로 인물이 준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대 사명을 수행할 지도력을 가질 정도의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외모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고 하지만, 사람은 외모를 보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될 사람은 대통령이 될 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외모를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가 남자아이를 낳으면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요게벳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의 명을 어기고 집안에서 모세를 길렀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자 울음소리도 커지고 워낙 우렁차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석 달 동안 아들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냥 한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믿음으로 이 아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석 달 동안 키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성질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 지파의 조상인 레위는 아버지 야곱과 세겜에 있을 때, 세겜 추장 아들이 자기 누이 디나를 겁탈한 것을 보고 시므온과 함께 세겜에 살고 있는 남자를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레위는 성질이 불과 같아서 야곱이 창세기 49장에 아들들을 축복할 때도 “이스라엘 중에 흩을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온 땅에 흩어진 제사장 지파가 된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한 성질 하는 지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도 분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직접 써주신 두 돌비를 받고 내려오는 길에 그것을 던져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향해 우상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두 돌비를 던져버렸습니다. 보통 성격이 아닙니다. 모세는 인물도 좋고, 성격도 까칠하니까 모세의 어머니가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다” 싶어서 석 달 동안 길렀지만 어쩔 수 없이 나일강에 띄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구원자를 특별한 섭리로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Ⅱ. 구원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호(Providential Protection)

 

모세가 태어난 해는 BC 1526년입니다. 출애굽 연대가 BC 1446년이고 당시 모세의 나이가 80세였음을 감안해 볼 때, 모세는 BC 1526년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는 애굽 18대 왕조의 세 번째 왕인 투트모세 1세였습니다. 투트모세 1세는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이방족속에게 강력한 탄압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전 셈족 중심의 힉소스 왕조는 이방족속들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나 함족 왕조인 애굽의 18대 왕조는 다른 민족을 핍박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장 22절에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아이는 다 강물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사람이 투트모세 1세였습니다. 그러나 투트모세 1세의 딸은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딸의 이름이 ‘하쳅수트’(Hatshepsut)입니다. 모세를 나일강에서 건져준 공주가 바로 하쳅수트입니다. 그는 자비심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모세를 더 이상 숨기며 키우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나일강에서 많이 나오는 갈대를 엮어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역청과 나무 진을 발라 방수작업을 한 후,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고 나일강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왜 갈대 사이에다 두었을까요? 그것은 상자를 천천히 흘려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야 누가 건져도 쉽게 건져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갈대상자 속에 들어가 나일강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쳅수트라는 바로의 공주가 모세를 건져내었습니다.

‘하쳅수트’의 이름의 의미는 ‘여인들 가운데 으뜸인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쳅수트는 투트모세 1세가 죽고 투트모세 2세와 결혼을 하였지만 투트모세 2세는 병약하여 왕이 된 지 십 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쳅수트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투트모세 2세는 조카를 양자로 들였습니다. 그 양자가 바로 투트모세 3세입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가 어리니까 대왕대비인 하쳅수트가 섭정통치를 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양모인 하쳅수트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섭정자가 되었습니다. 하쳅수트는 애굽의 실질적인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쳅수트라는 여자 밑에는 왕으로서 정통성을 가진 투트모세 3세와 자기 양아들인 모세가 함께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둘 사이에 왕권을 놓고 치열한 갈등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애굽 사람 한 명을 죽였습니다. 왕족이 일반 백성 한 명을 쳐 죽였다고 해서 왕가에서 큰일 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2:15) 그 때 바로가 투트모세 3세였는데,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이러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갈등이 표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딸 하셉수트는 모세가 갈대상자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불쌍히 여겨 건져주었습니다. 그 당시 8세였던 미리암이 그것을 보고 쫓아갑니다. 그리고 바로의 공주에게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라고 현명한 제안을 하였습니다. 하쳅수트가 그 어린 소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미리암은 얼른 가서 어머니 요게벳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게벳은 자기가 낳은 아들을 자기 모유로 키울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돈을 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공주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양수겸장(兩手兼將),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고 하는 것이죠. 제 자식을 제 손으로 키우고 더불어 돈도 받게 되는 전화위복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출애굽기 2장 10절에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게벳이 모세를 모유로 키워서 그가 세 살 내지 네 살이 되었을 때, 하쳅수트가 그를 불러 양자로 삼는 법적인 절차를 밟았습니다.

이름을 모세라고 한 이유는 ‘모세’가 ‘태어났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의 이름의 뜻은 ‘물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인데, ‘모세’라는 단어 앞에 ‘물에서’라는 의미의 단어가 붙으면 혹시 나일강에서 건진 자식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살까봐 그냥 ‘모세’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와 출애굽 때에 갈등했던 바로는 누구입니까? ‘투트모세’입니다. ‘투트’는 ‘신’이라는 의미이고, ‘모세’는 ‘태어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신이 태어났다!”라는 뜻의 ‘투트모세’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신으로 태어난 존재와 물에서 태어난 존재가 맞붙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왜 나일강에서 건짐을 받았습니까? 다른 아이들은 모두 죽는데, 모세는 왜 살아났겠습니까? 바로의 딸은 왜 어린 여자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습니까? 어떻게 해서 모세는 자기 어머니 요게벳의 모유를 먹으면서 자라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에게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행전 7장 20~21절에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 설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행 7:20~21). 모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사람 보기에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모세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이십니까? 우리 스스로를 보면 아름다운 존재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다운 존재로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여 주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부활의 생명과 영생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름답게 보시지 않고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헵시바’라고 부르셨습니다(사 62:4). ‘헵시바’는 영어로 “My delight is in you”(나의 즐거움이 네게 있도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름답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서 구원자를 준비하시고 이 구원자를 특별한 섭리로 보호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Ⅲ. 구원자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Training of Savior)

 

출애굽기에는 모세의 교육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 20~37절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의 설교 가운데 모세가 받은 교육과 훈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모세는 크게 세 가지 방면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첫째, 지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말을 잘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모세는 겸손했기 때문에 스스로 말이 어눌하다고 표현한 것이지,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진실로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말과 행동이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은 잘하는데 행동을 잘 하지 못하고, 행동은 잘 하는데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설교하면서 “모세는 말과 행사가 모두 능한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40세가 될 때까지 애굽 사람들의 학술을 다 배워서 지적인 훈련을 충분히 감당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세오경을 기록하기에 충분한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기에 제일 중요한 요소가 지적인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 후보생들은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충분한 지적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훈련을 한답시고 구멍을 메우는 식의 성경공부와 같은 활동은 성도를 지적으로 마비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짓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자훈련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모세오경을 써야 될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식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지적인 훈련을 충분히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영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이 애굽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천국에서 하나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이 훨씬 유익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에게서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 모든 지식은 어머니 요게벳에게 배웠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애굽 백성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네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애굽의 신은 가짜다!” “애굽의 신을 따르게 되면 너는 멸망한다!” “인간에게는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 하늘의 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늘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1살때는 잘 몰라도 3,4살이 되면 익숙해져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영적인 훈련을 잘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세라면 ‘공주 아들’로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도망 다니며 ‘광야 목자’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자연적 본성을 따르자면 공주 아들로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게다가 공주인 어머니는 최근에 섭정통치를 하여 왕 노릇까지 하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놀고 싶은 만큼 놀고, 예쁜 여자 친구도 얼마든지 사귈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자연적인 본성으로 육신적인 욕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육신적인 욕구를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본성의 유혹을 이겨낸 것입니다. 그만큼 모세는 영적으로 훈련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실질적인 목양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방인의 영접을 받으면서 40년 동안 목자로 훈련받았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목자로서의 훈련을 철저하게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나이 40세 때, 내 백성을 돌아봐야겠다고 밖에 나가보니 애굽 사람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억울하게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파묻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를 갚아 주었습니다. 모세는 정의감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다음날 나와서 보니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왜 같은 동족끼리 싸우느냐며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간섭하니까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 하느냐?”며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살인한 사실이 들통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기에 했던 일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똑같습니다(요 1:11). 모세는 그 당시 바로였던 투트모세 3세와 갈등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애굽 사람을 살해했다는 것을 빌미로 바로가 자기를 죽이리라 생각하고 광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로 도망가 우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그 때 우물가로 여자 목자들이 양을 끌고 와서 양떼에 물을 먹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들이 이 여자들을 희롱하며 양에게 물을 먹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모세가 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 남자들을 물리쳐주었고, 여자 목자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모세가 궁중에서 격투기도 배운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모세가 도와준 이 여자 목자들은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이드로)의 딸들이었습니다. 이드로는 일곱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들이 오늘 우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드로의 집으로 초대되어 공궤함을 받고, 일곱 명의 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십보라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십보라는 모세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게르솜이고, 둘째가 엘리에셀이었습니다. 이 두 아들의 이름을 보면 모세의 처한 형편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첫째 게르솜은 “여기서 내가 나그네가 되었다”는 의미이고, 둘째 엘리에셀은 “나의 하나님은 도움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방에서 객이 되었지만, 나의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 되셨다”는 의미를 아들들의 이름 속에 남겨둔 것입니다. 모세 아들들의 이름은 모세 자신의 현실적인 처지를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여인과 결혼하지 아니하고 미디안 여자와 결혼하였을까요? 그것은 도망자의 신세였기도 하고,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이 십보라가 앞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줄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40년동안 방황할 때 다른 유목민족들과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미디안 출신인 제사장의 딸 십보라는 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불필요한 전쟁을 막아주는 역할을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담당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여인입니다.

또 십보라는 자신의 두 아들인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모세의 후계자로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십보라가 남편인 모세에게 바가지를 긁으며 “여보! 당신이 이 백성을 이끌고 나온 지도자인데, 당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면 여호수아와 게르솜이 허구한 날 싸우다가 성경은 출애굽기 3장에서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십보라는 비록 이방여인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여자였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있어도 그들은 모세의 후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애당초 달리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십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모세의 광야생활은 양무리를 치는 목자로서 받은 훈련이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를 다니면서 그곳의 지리를 익혔고,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200만 명을 이끌고 가도 어느 누구도 감히 모세의 지도력에 대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만큼 광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실 때에도 지적인 훈련, 영적인 훈련, 나아가 실질적인 훈련을 병행하셔서 당신의 종으로 만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훈련하고 예비하시는데 철저한 분이십니다.

 

Ⅳ. 구원하실 백성의 준비

 

출애굽기 2장 23~25절에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투트모세 1세, 2세, 3세로 계속해서 왕이 바뀌고 있는데도 핍박정책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에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출애굽하기 바로 직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괴로우니 살려주십시오! 구원자를 보내주십시오!” 기도로 준비한 것입니다.

여기 23~25절에 중요한 네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는 부르짖었다(Cried out to God). 둘째는 들으셨다(Heard). 셋째는 기억하셨다(Remembered). 넷째는 권념(방문)하셨다(Visited). 하나님은 구원자도 준비해 주셨고, 구원하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도로 준비시키셨고, 이제 행동하실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부터는 하나님의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결론

 

애굽의 18대 왕조는 아흐모세로부터 시작해서 투트모세 1,2,3세로 이어지다가 하쳅수트가 잠시 섭정을 했던 왕조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애굽의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했던 사람이 바로 출애굽 때의 바로였던 투트모세 3세입니다. 그래서 20세의 역사가들은 이 투트모세 3세를 두고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투트모세 3세와 갈등관계 속에 있었고, 이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모세는 광야로 쫓겨나, 양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현세적인 안목으로 보면 투트모세 3세는 성공자요, 모세는 실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트모세 3세는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이고, 모세는 광야의 보잘것없는 목자였습니다. 투트모세 3세는 현세적으로 성공자였고, 모세는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안목은 세상의 안목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투트모세 1,2,3세 어느 누구하나 아름답게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아름다운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오직 모세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호하시고, 훈련시키시고, 그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모든 안목이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28세에 입대하여 4년간 공군장교로 복무하고 32세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동기들이 그 때 “너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느냐?”며 불쌍하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친구들의 눈에는 독일어 단과반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는 내가 실패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안목으로 성공자인지 실패자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안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 이것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성도들을 실패자로 볼지라도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으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구원하신 자기 백성을 향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백성, 내가 아름답게 보는 백성, 하나님은 이들을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유명하지 못하고 실패자로 보일지라도 우리가 진정한 승리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까스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자입니다. 모세처럼 하늘의 상이 많은 우리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관자 하나님

임덕순 목사

오늘 본문에서는 불행한 시대에 아이로 태어나 살아남기도 불가능했던 모세라는 사람을 도리어 불행에 짓눌린 한 민족을 구원하는 해방자로 키워내기 위하여 완벽하게 관리하시는 하나님, 역사와 만사의 주관자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이스라엘은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그때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가장 좋은 땅을 분양 받아서 아무 걱정 없이 살며 번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지나 요셉이 죽고 왕조도 바뀌고 이스라엘이 너무 많이 번성하자, 애굽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이스라엘을 박해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 박해는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이스라엘 사람이 아들을 낳을 경우, 예외 없이 아이를 나일 강에 던져야만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은 최대의 위기를 만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대로, 번성할 만큼 번성했기 때문에 이제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도록 내보내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가나안땅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하는 이스라엘이, 애굽 땅이 좋다고 눌러앉으려고 하니까, 그들에게 애굽에 대한 정을 떼고, 나갈 준비를 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패가 없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작정에는 변경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이 조성하셨고,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번성케 하셨고 이끌고 계셨지만, 사람들은 아직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애굽의 고역에 견딜 수 없어서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애굽에 정이 떨어지기 시작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과 눈물과 힘든 여정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과정이었고, 그들을 구원하여 더 큰 사역을 시키고 더 큰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만약 그들 중에 누가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의 방향을 아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아마 그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모든 유대인은 애굽사람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고, 등에 채찍을 맞으며 노역에 동원되었고, 그들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위로해줄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에게는 아들을 낳으면 무조건 강에 버리라는 남아 살해 령이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아주 준수했지만 유대인의 아이이기 때문에 강물에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왕명대로 나일 강에 버려졌고, 그 아이는 물속에 가라앉아 악어의 밥이 되고 말았어야 할 아이인데, 그가 애굽의 왕궁에 들어가서 왕자로 자라게 됩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만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당신이 세상의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주관하시는 일에는 분명하고 선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세상을 주관하시는 그 손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히브리인의 가정에서 출생 시켰습니다.

레위족속의 가정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아이입니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당장 나일강물에 던지라는 바로의 명령이 시퍼런데,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어린 아이로 태어나게 하셨다니, 그가 어떻게 살아남으며, 그가 살아남는다 하여도 언제 자라서 시급한 이스라엘을 구원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모세의 출생은 이스라엘의 해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건처럼 보였고, 그 아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거라는 희망은 아무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망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보면, 무모하게 보이고 우리의 상황에는 도대체 맞지 않아 보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선을 이루셔서 당신이 선택한 방법이 최선이었음을 입증시키십니다.

 

레위족인 아므람과 요게벳 이라는 사람의 가정에 한 남자 아이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민 26:59) 어린아이 모세는 매우 준수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버릴 수는 없어서 들키더라도 숨겨서 키워보자 하고 석 달을 숨겨 길렀습니다. 그러나 준수한 그 아이의 울음소리는 보통 아이보다도 컸을 것이고, 아무리 문을 닫고 키워도 아이의 울음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석 달을 숨겨 기르던 그의 부모는 결국 모세를 포기하기로 작정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대로 아이를 나일 강에 버리되 갈 상자에 넣어 띄우기로 하였습니다.

인간의 한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그냥 물에 던지지 않고 갈대 상자에 담아 띄우는 것은, 혹시나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주실 수도 있지 않으냐는 믿음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갈대로 상자를 만들고, 나무진으로 발라서 물이 새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상자에 모세를 담아 나일 강 갈대숲 물에 띄우고, 눈물이 앞을 가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길을 돌아옵니다. 인간의 방법은 여기까지 밖에 더 할 길이 없습니다. 그들로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한계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큰일에 참여하던지, 큰 인물을 기르려면 먼저 인간의 한계를 체험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체험하고 자기의 나약함을 알수록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는 법입니다. 반면에 자기의 한계를 모르고 덤비는 사람은, 언젠가는 큰 코를 다치고 철저하게 패망하는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만났다는 것이 실패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므람과 요게벳이 모세를 장성하도록 키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아시면서, 그리로 인간의 능력으로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줄을 아시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라고 하십니다. 끝까지 이룰 힘이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 하고, 그 다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을 만났던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하는 것과, 그다음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성공의 비결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의 왕실에서 자라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성공시키시는 그 과정은 입이 딱 벌어지는 섭리의 연속입니다. 그 과정의 일부를 우선 관찰 해 보십시다. 그의 부모는 한계에 부딪쳐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 강에 내다버린 아이를, 하나님은 그 다음순간부터 어떻게 관리하셨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바로 알고 깨달으면 우리가 한계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수 있는 담대함과 지혜가 생깁니다. 인간의 한계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모세가 갈 상자에 담겨 갈대밭 사이를 떠내려가고 있을 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목욕을 하려고 시녀들과 함께 나일 강 가로 나왔습니다. 강가를 걷던 공주의 눈에, 갈대밭 사이에서 떠내려가는 작은 상자가 발견 되었습니다. 공주는 시녀들에게 저 상자를 건져오라고 명령 하였고, 시녀들이 상자를 건져다가 공주의 앞에서 열어보니 탐스런 남자아이가 앵 하고 웁니다. 그것을 보는 공주의 마음속에 문득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아버지 바로의 가혹한 명령 때문에, 히브리인의 자식들이 산채로 강물에 버려지고 있다는 생생한 현장을 목격한 공주는 너무 가슴이 아팠고, 그 아이가 한없이 불쌍했습니다.

공주는 그 아이가 왕명에 따라서 강에 버려진 히브리인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녀들에게 자기가 아이를 강에서 건진 것을 비밀로 하도록 명하고, 그 아이를 궁으로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때 그 현장에서 엿보고 있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달려가서, 애기를 잘 키울 줄 알고 젖이 풍부한 유모를 구해드렸으면 좋겠다고 제의하자, 공주는 급하게 유모가 필요했는지라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미리암은 얼른 모세의 생모인 자기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친모가 공주의 명으로 유모가 되어, 모세를 집으로 데려다가 월급을 받으며 젖을 먹여 기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귀부인이 자식을 기르기 위해서 유모를 채용하면 유모가 자기 집으로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뗄 때 까지 4년 정도를 길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마도 네 살 정도가 되기까지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라다가 젖을 떼자 왕궁 공주의 품으로 갔을 것입니다.

“너는 유대인이지 애굽 왕가의 자식이 아니야, 너는 자라서 고난 받는 네 백성을 구원해야 한다. 너는 애굽의 왕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이스라엘 구원자 되어야 해.” 이것이 모세를 젖먹이는 짧은 기간 동안, 어머니가 그의 영혼에 심은 사명감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가슴속에는 이 교훈이 잘 박힌 못처럼 깊이 박혀 있었고, 그 결과, 그가 모든 것을 배우고 일할 나이가 되었을 때, 자기 동족을 위해 왕궁을 나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진 과정의 하나하나가,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주관자 하나님의 섭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시 세상만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환경은 제 몸으로 낳은 사랑하는 아들을 강에 내다 버려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절망에도 상관없이 당신의 일을 진행하십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시작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이 기막힌 타이밍을 보십시오.

모세가 강에 버려지는 그날에, 바로의 딸인 공주가 목욕하려고 나일 강에 나왔습니다. 날짜만 같은 날이 아닙니다. 시간이 중요합니다. 나일 강 갈대숲에는 악어가 득실거립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갈대 사이에 띄우고 간 뒤에, 여러 시간이 흘렀다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고, 어디서 악어가 삼킬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모세가 갈대사이에 버려진 바로 그 시각에, 시간차 없이,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나왔다가, 그 순간 공주의 눈에 상자에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시나리오를 쓰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앞에서 시간을 맞추어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당신이 명하신대로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공간의 주관자이십니다.

나일 강은 길이가 수 천 킬로미터나 되는 아주 긴 강입니다. 만약 모세가 버려진 장소와,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온 장소가 몇 백 미터만 차이가 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모세는 건짐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공주는 왕궁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궁중에 공주를 위한 목욕시설이 없겠습니까? 그 물이 강물보다 깨끗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궁내에서 목욕하지 않고 강가로 나와서 목욕을 했고, 그 자리가 바로 모세가 버려진 자리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연출하신 것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큰 얼개입니다. 행 17장에 보면, 하나님이 각 사람의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마음의 주관자이십니다.

시간과 공간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서 바로의 공주가 모세의 갈 상자를 보았고, 시녀에게 명하여 저것을 건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건져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갖난 아이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순간 공주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보통의 경우라면, 괘씸한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자기 아버지인 애굽 왕 바로가 엄히 명하여 히브리인이 남자아이를 낳을 경우에는 다 죽이라고 했거늘, 출생하자마자 죽이지 않고 이만큼이나 감추어 기른 아이의 부모는 국법을 어긴 사람입니다. 그러니, 바로의 딸인 공주의 마음에 괘씸한 놈들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분노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공주가 분노하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면 그 상자를 그냥 강물에 엎어버리고, 아이를 석달 동안 숨겨 기른 부모를 색출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상자를 여는 순간, 아이가 앵~! 하고 울었습니다. 우는 아이를 보는 순간, 공주는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문득 밀려왔습니다. 세상에 이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히브리인에게 태어났다고 해서 이렇게 크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구나 하는, 참으로 불쌍한 생각이 막 밀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주는 아이를 얼른 건져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남아있었을 히브리인의 흔적을 없애버리고 자기의 아들로 삼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괘씸함과 긍휼의 차이를 아십니까? 같은 사건인데도, 어떤 사람을 볼 때는 불쌍한 마음이 들고, 어떤 사람을 볼때는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기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고 남의 마음은 더더욱 다스릴 수가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법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림으로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과 생명을 맡기고 따라갈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만남의 주관자이십니다.

부모를 따라서 동생 모세를 버리는 장소에 따라왔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부모가 떠나간 뒤에도 갈대숲 사이에 머물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주가 목욕하러 오더니 아이를 건져내는 것이 아닙니까? 미리암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공주는 아이를 보자마자 불쌍하게 여겨 자기의 품에 안는 것이었습니다. 미리암은 즉시 공주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공주님, 그 아이를 기르시려면 젖이 필요할 텐데, 젖 잘나고 마음착한 유모를 소개시켜드릴까요?” 미리암은 공주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용기를 주셔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미리암의 말을 들은 공주는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네가 정말 그런 사람을 아냐? 그럼 우리 아이를 맡을 아줌마를 내게 데리고 오너라.” 그래서 미리암과 공주의 만남은 모세와 어머니 요게벳과의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와 연출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 이 장면만 하나님이 주관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모든 만남은 하나님이 주선하신 만남입니다. 부부간의 만남, 부모 자식 간의 만남, 한 부모 아래서 형제로 태어난 형제간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할 것 없이 모든 만남은 우리가 계획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만사 만물의 주관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고 서로를 위해서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주관아래서 모세는 궁중에 들어갔고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게 됩니다. 그는 그렇게해서 우선 생명을 건졌고, 당대 세계최고의 문명국가인 애굽에서 왕재들이 받는 최고학문을 수학하며 장래를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고, 아무도 그 일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지 한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기 위한 일회성 사건이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갖고 계셨고 알리셨던 큰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데,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놓는 일을 위해 한 민족을 세우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계의 중심으로 옮기시는 사역의 일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 세계의 배꼽인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모든 민족에게 보여주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세계선교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결국 이스라엘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고, 오늘 그 소식이 온 세상에 퍼져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세계선교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 그의 후손으로 한 민족을 만드시는 일, 그들을 광야에서 기르신 일, 그들이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신 일, 수많은 선지자를 일으켜 그들로 예언하게 하신 일, 드디어 그리스도를 보내신 일, 그가 모든 예언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게 한일이 모든 민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일이고 그게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역을 위해서 모세라는 사람을 출생시키고 지키고 기르신 것입니다. 세계선교는 인간의 타락 후부터 계시하신 오래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 가문을 특별히 번성케 하시고 복 주신 이유는 세계선교를 위해서입니다. 한 민족이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공하는 비결도 세계선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선교사역에 순종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올려놓아진 삶이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삶에는 두려워 할 일도 없고 실패할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만 가지신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을 가지신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절망을 얼마든지 희망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한 사람을 필요적절한 때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에게 위기를 주셨지만 그 위기의 시간과 공간과 마음과 만남을 주장하여 도무지 들어갈 수 없는 왕궁에 들여보내시고, 왕궁에 들어간 아이에게 친모를 유모로 붙여주어 히브리 혼을 주입하게 하시고, 그 아이를 키워 완벽하게 준비를 하게 하신 뒤에 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보내시는 일군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거대한 과정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고 결말을 맺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선하신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 계획아래서 지금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세계선교의 사명을 주사 선교에 헌신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우리에게 보람도 주시고 만민도 구원하시고 선교한 우리와 선교 받은 사람들이 함께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 선교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의 뜻을 분별하고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은 비록 짧은 생애를 살지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천지와 만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섬기며 그 뜻을 받드는 일에 더욱 열심을 냅시다. 세계선교는 세상만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온 세계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선하신 명령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힘써 순종합시다. 만사 만물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아버지를 더욱 신뢰하며 겁 없이, 담대하게 살아가는 그의 자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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