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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705모세를 부르신 하나님(1)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7.04|조회수2,073 목록 댓글 0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출 3:1-12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 3:1-12 / [빈들에서 불붙는 떨기나무]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이끌고 빈들 서쪽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산인 호렙에 다다랐다. 2) 그때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떨기나무에 붙는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났다. 그가 바라보니 불꽃은 활활 타오르나 나무가 불타 없어지지는 않았다. 3) 모세는 하도 이상해서 `내가 가까이 가서 이 엄청난 광경을 자세히 보아야겠다. 어째서 나무가 타지 않을까!'하고 중얼거렸다. 4) 여호와께서 그가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5)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네 신발을 벗어라. 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웠다. 7)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애굽에서 내 백성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았다. 또 강제노동을 시키는 자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도 다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뼛속 깊이 사무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리라. 내가 내 백성을 애굽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빼내리라.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곧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리라. 9)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고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개취급하듯 다루는 모습도 내가 보았다. 10) 그래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다니요!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주님.' 12)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분명히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너희의 하나님인 나를 섬기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내는 표징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며 양치기를 하던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1)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소유의 양떼를 치고 있던 모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치다’라는 말은 ‘능동적으로 계속하여 치다’라는 뜻으로 모세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양을 돌보는 일에 성실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통해 광야와 양에 대하여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할 때, 그들을 인도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미리 갖출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나타나시니라(2-6) 모세는 호렙 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오는 불꽃과 그 안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와,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가 떨기나무에 가까이 갔을 때 자신을 부르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자신을 소개하기도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아시고 그를 부르시며, 그곳은 거룩하기에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내 산은 아름다운 숲이나 멋있는 경관이 있는 곳이 아니며, 화강암과 잡목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별로 볼품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곳에 오시자 그곳은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나 물건, 절기와 제물 등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7-12)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근심을 아셨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보시고, 들으시고, 아셨다’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실 계획을 모세에게 알려주시며, 그 일을 위하여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에게 그럴 능력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있으리라’는 언약을 주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호렙 산에서 자신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것이 바로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과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하신 후 호렙 산으로 찾아와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만났던 은혜를 함께 나누어 봅시다.

 

매일 날씨가 좋으면 사막이 되고 맙니다. 비바람은 거세고, 귀찮은 것이지만 그로 인해 새싹이 돋습니다. 나의 소임이 무엇인가를 되뇌이면서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은 반드시 옵니다. -전대련 전 YMCA 회장의 퇴임사 중.

 

바로의 눈을 피해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모세가 애굽 공주의 아들 자격으로 권세가 있어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의 모세를 찾아오셨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기에 부족하다 여기시나요? 하나님은 우리가 적합하다고 하십니다.

 

< 설 교 >

호렙산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출 3:1-12 / 박한응 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듣는 순간, 생기의 바람이 역사 하셔서 지친 심령들이 소생함을 얻고, 세상에서 상하고 찢긴 심령은 싸매 주시는 은총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또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요6:35-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오늘도 분명히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이 강단에 임하고 생기의 바람이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사명을 받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내용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쫓겨 도망을 나와서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치기가 된지 어언 40년이 지나 모세의 나이 80이 되어 그의 머리는 백발이 되고 그의 얼굴은 몰라보리만큼 늙고 변했습니다.

일개 양치기가 된 모세를 하나님은 왜 부르셨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서 사명을 주고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옥 같은 애굽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 호렙산 떨기나무에 불꽃의 모습으로 강림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80이 넘어 백발의 노인이 된 모세를 불러 사명을 맡기신 것처럼 오늘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계획이 있고 사명이 있는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오늘도 여러분들이 내 발로 교회에 나왔지만 하나님이 부르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교회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계셔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다 같이 한 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도 모세처럼 쓰임 받게 하소서

주여! 나도 이 시대에 모세가 되게 하소서 <아 멘!>

 

1. 모세가 부름 받을 당시의 형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모세의 지금 형편은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입니다.

모세는 애굽 나라의 공주의 양아들로서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정치 경제 문화 군사학에 통달하여 애굽 나라의 차기 왕으로써 지목 받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세상 사람들은 모세의 존재에 대하여 까맣게 잊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아무도 모릅니다. 그는 목동으로 변신하여 숨어 지내는 은둔자요 실패자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왕의 궁전에 있을 때에는 누구나 그를 존경하고 우러러보았고 그의 말은 곧 왕의 어명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지도자가 되면 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리라는 포부와 욕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여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이고 나서 자기가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우쭐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신앙도 없이 하나님 없이 누구를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 자칫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도 있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런 모세는 지금 살인자요 도망자요 양치기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그렇게 일생을 마무리하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그대로 두시지 않고 호렙산 기슭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모세를 하나님은 찾아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발견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빌3:8)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도행전13:22절 말씀에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기를 이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포기하고 낙심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과 사라도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 90세 때에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였을 때에 이삭을 낳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신약의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간신히 탈출하여 달려왔는데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기병대가 추격을 해 오고 있는데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낙심하고 좌절할 때에 하나님은 홍해를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에야 구원의 손길을 펼쳐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3.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기에 형편없는 인물도 크게 쓰시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전혀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은 크게 쓰시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21: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사도 바울은 (고전1:27-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것들을 폐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스라엘의 왕을 세워 기름을 부으려고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갔을 때에 이새는 그의 아들 일곱 명을 사무엘 앞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막내 다윗은 들에서 양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사무엘은 그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고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군이 되었습니다.

 

2. 모세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호렙산은 처음 온 곳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그곳을 양을 몰고 지나치며 양을 치는 곳입니다. 모세가 일상적으로 다니는 곳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닙니다. 다만 자기의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2: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메시야 구세주가 탄생하심을 알려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목자들도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열심히 하는 중에 메시아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여러분의 가정생활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도 일상적인 생활처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교회, 이 제단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호렙산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신앙생활이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믿음의 생활이 일상화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은 임재 하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기도의 생활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루에 세끼 식사는 완전히 생활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지 않고 출타 중에라도 때가 되면 식당에 가서라도 식사를 하고, 여행 중에는 차안에서라도 먹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기도 생활도 완전히 생활화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모세는 늘 다니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나오는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여러분들이 날마다 교회를 오고 가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렘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3.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1.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겸손을 나타냅니다. 엎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열왕기상 18:42절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든 제물을 살랐고, 3년 반 동안 오지 않던 비가 내렸습니다.

엎드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이 보입니다.

엎드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엎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마가복음 5:25절 이하의 말씀에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그의 혈루가 고침 받은 기적의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로 다가가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사람들에게 밀려서 도무지 다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열두 해를 앓던 여인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밀려서 엎어지니까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예수님의 옷자락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얼른 손을 내 밀어 그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옹위 하면서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스쳤으나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은 오직 이 여인이 엎드려 옷을 만졌을 때에 예수님의 능력이 역사 하신 것입니다.

 

2.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발에서 신을 벗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에게만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전에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 나타나서 신을 벗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풍속에 아버지가 죽으면 장자가 그 재산을 상속받는데 이 때 작은 아들이 가난하여 살기가 어려우면 그 장자가 자기의 재산상속을 동생이 받도록 권리를 포기할 때 신발을 벗어 던지는 풍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최대한으로 낮추는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또 신을 벗는 것은 고통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에 밤에 신을 신지 못하고 울면서 피난을 갔다고 하였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유산이나 배경이나 환경을 버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습니다. 그 잘난 자존심이나 명예를 다 버릴 때 주님의 영광의 옷자락이 보이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사도 바울은 빌3:8절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버리고 나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크게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주님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멘>

 

4.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것처럼 오늘의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바로 모세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 시대에 여러분을 이 교회를 통하여 부르신 것은 여러분만이 감당할 수 있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모세에게는 애굽에서 고통 중에 있는 동족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사명을 받았습니까? 바로 가족을 구원해야 할 사명입니다. 언제까지 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이제는 때가 임박하였습니다.

다 같이 찬송 500장 1절을 부르겠습니다.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 줄 누구가 던지려나

생명줄 던져 생명 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 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그 사명 의식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또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여 많은 영적 열매를 맺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하나님은 모세에게 함께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2절 말씀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는 아무도 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세와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이 지금까지도 나와 함께하여 주셨기에, 오늘의 여러분과 내가 있을 수 있고 또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 멘>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하나님은 뜻과 섭리와 계획이 계셔서 그 하나님의 Program속에 여러분을 포함시켜 계속하여 역사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성도 여러분!! 모세만이 위대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모세가 위대하였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 21세기에는 여러분도 모세와 같이, 어쩌면 모세보다 더욱 위대하고 하나님 손에 붙들려 더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이 시대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소명 받은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할렐루야!!!!!!

믿는 자에게 축복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꿈을 가진 사람의 그 꿈을 축복하십니다. 요셉은 어려서 꿈을 꾸고 그 꿈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을 때에 하나님은 그 요셉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가진 사람의 믿음을 축복해 주십니다. 아 멘.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모세가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잠들어 있을 때 침체되어 있는 동안 우리 주변의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 이사야와 같이 “나를 보내소서”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출 3:1-6 / 피영민 목사

서 론

 

출애굽기 3장에는 80세 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120세를 살았는데, 인생이 40년씩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그래서 혹자는 모세의 초기 40년을 영어로 ‘Somebody’라고 해서 남들이 알아주고, 뭔가 잘 되고, 잘 나가는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기 40년은 ‘Nobody’라고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으며,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거기 얹혀 먹고 사는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후기 40년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Nobody’였던 사람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 지를 볼 수 있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세월’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경험을 통해 모세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모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분명한 소명이 있어야 하고, 교회에서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내적인 소명감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부르셨다는 교회의 외적인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아무리 자부해도 교회에서 “네가 무슨 소명을 받았느냐?”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적인 소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서 교회에 유익을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않았고, 소명도 주시지 않았는데,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예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3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유다 백성은 죄로 말미암아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 세월을 고생해야만 한다!”고 말했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2년만 있으면 돌아올 것이라”고 거짓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은 내가 부른 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소명장’인 출애굽기 3장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신가?”에 대한 계시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와 관련된 계시였습니다. 오늘은 먼저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신가?”에 대한 본문 6절의 계시를 중심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이 말씀을 하신 주체는 누구인가?

 

본문 6절에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주체는 누구일까요? 2절에 보니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6절에 말씀을 하신 주체는 ‘여호와의 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직역을 하면 ‘여호와의 천사’가 되는데, 여기서 ‘Angel’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서의 천사’를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를 보내신 걸까요? 4절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가 보내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셨는데, 그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5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은 “존경과 순종을 보여 예배하라”는 분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여호와의 사자는 지금 모세에게 예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자이지만, 이 분 역시 여호와이시고, 예배를 요구할 수 있는 분이심을 볼 때, 이런 존재는 성경과 인류 역사 속에서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보내신 여호와와 같은 존재란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6절의 말씀을 하시는 주체는 ‘성육신하시기 전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확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년 전 베들레헴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지만, 그 전에도 존재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Preexistence)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계시던 분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인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본인이 그 의미를 가장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Ⅱ. 6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1~32절에 그 의미를 이렇게 해석해 놓으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 22:31~32).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3절 이하에는 예수님이 그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인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하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아주 무식한 자들이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무식합니다. 이들은 천사와 귀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또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부활의 교리를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신명기 25장 5~10절에 기록되어 있는 모세가 제정한 ‘계대결혼’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부활교리를 조롱하였습니다. 계대결혼이라는 것은 형님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으면 아우가 형수와 결혼해서 형님의 이름으로 대를 이어주는 일종의 사회복지적인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를 모세가 제정한 것은 아니고, 그 전부터 내려오던 관습을 율법으로 제도화시켜 하나님의 뜻으로 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두개인들이 이 제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마 22:25~28).

이들의 조롱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다. 내세는 현세와 같지 않다. 내세에 이르면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자식을 낳는 일도 없으며, 그 때에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 내세는 현세보다 훨씬 좋은데, 너희는 어찌하여 내세를 현세와 비교하려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너희들은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산 자의 일을 말할 자격도 없다”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2장 31~32절에 예수님이 자신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의 근거로 제시한 구절이 바로 출애굽기 3장 6절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영어와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현재시제로 쓰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εγο ειμι(에고 에이미)라고 읽는데, “나는 지금도 살아있는 그들의 현재적인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살아있고, 하나님도 역시 살아계신 현재적인 분이심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동사의 시제 하나를 엄청나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장 6절의 동사 시제 하나에 부활의 교리가 온통 다 달려 있는 것처럼 비중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6절과 마태복음 22장 31~32절의 주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이 정확한 말씀인 것입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구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모두 다 형제다”(Fatherhood of God, brotherhood of Man)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고, 모두를 천국에 보낼 것이라는 만인구원설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영혼 구원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해방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해방신학, 민중신학, 교황의 신학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산 자만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시고, 또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일면 타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관점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구속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오직 산 자들만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애굽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Ⅲ. ‘산 자’(The Living)는 누구인가?

 

기독교는 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곳이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곳입니다. 그러면 누가 산 자입니까?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3장의 배경(Context)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전후문맥이 중요한데,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이끌고 광야 서편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호렙산이 시내산과 같은 산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하나님의 산 호렙과 시내산은 같은 산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장 1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출애굽기 19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호렙산은 시내산입니다.

지난 1월 성지순례를 통해 호렙산에 가봤습니다만 있는 것이라고는 모래와 돌뿐이고, 식물이라곤 떨기나무밖에 없는 아주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땅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니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척박한 인생이라도 거룩한 인생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줍니다.

그 곳에 있는 떨기나무는 여름에 뜨거운 빛이 비취게 되면 스스로 불이 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금세 타고 재만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지나가는 길에 본 떨기나무 한 그루가 이상하게 타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불이 붙었는데 재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일단 지나갔다가 이상하다싶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야, 모세야”하시며 두 번 부르시더니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불붙는 떨기나무’(Burning bush)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학자들은 여기에 네 가지 상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불태워 없애보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 성경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6장에 유다 왕 여호야김이 여호와의 말씀을 칼로 잘라 불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지금까지도 남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24장 35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불로 태워 없애버리려는 사람은 사라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해석이긴 합니다만 출애굽기 3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둘째로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8~49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옥은 밑에서 불이 올라오고 위에서는 소금이 치는 곳입니다. 거기다 구더기가 죽지 않는 곳, 고통스러우면서도 죽을 수 없는 곳이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이 타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출애굽기 3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셋째로 불붙는 떨기나무는 교회에 임한 성령의 능력을 상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불이 붙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좋은 해석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교단에서는 이 불붙는 떨기나무를 교단로고로 삼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출애굽기 3장 본문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불이 붙어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넷째로 어려운 시험을 상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불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보통 어려운 시험을 의미합니다. 불화살과 불은 어려운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불이 붙어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어려운 시련, 고통, 핍박을 당하면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백성, 교회를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하고 핍박과 고난을 당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핍박 중에도 죽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Burning bush’(불붙는 떨기나무)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는 세상 속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해도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걸까요? 유명한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교회사』(Ecclesiatical history)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교회를 핍박한 로마 황제는 다 제 명에 죽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핍박한 자들은 다 망하고 말았더라는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교회는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죽이려고 핍박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불 속에 계시고, 불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 불붙는 떨기나무는 여호와의 사자와 완전히 연합된 존재인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광야에 외로이 홀로 서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이 바로 불붙는 떨기나무입니다.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는 그들이 바로 ‘산 자’(The Living)인 것입니다. 산 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호흡이 붙어 있다고 산 자가 아닙니다. 성경 원문은 육신의 생명(βιο&#962;)과 영원한 생명(ζωη)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을 ‘산 자’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침례를 받는 이유는 예수와 연합되어 죽고, 예수와 연합되어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가 중요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 육신이 이미 수천 년 전에 죽어 마므레 동산에서 흙먼지로 돌아갔어도,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 천국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지금 살아 있습니까? 모세가 살아있습니까? 엘리야가 살아 있습니까? 그들의 영혼은 천국에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 나타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가리켜 ‘산 자의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영생을 얻어 지금도 천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의 살아 있는 영혼은 육신과 재결합하게 됩니다. 이것을 ‘생명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자녀를 출산할 필요가 없고, 늙고 병드는 것도 없습니다. 영생하는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없는 것이 있는데, 병원이 없고, 노화가 없고, 결혼식장이 없습니다.

산 자의 특징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살아 있어도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성도를 핍박하고 생명을 빼앗아 육신을 죽이고 순교자를 만들어도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생명은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은 지옥에서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주는 일꾼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이끌려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울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행 9:4). 예수님은 사울을 부르실 때도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시면서 사명을 주시고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시고 교회를 위해서 일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결론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죽은 자입니까? 산 자입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죽은 자들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대표가 애굽의 바로 아닙니까? 모세와 아론이 찾아가서 “내 백성을 풀어달라”고 했을 때, 그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출 5:2).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도 믿지 않고, 예수님도 믿지 않고 성경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죽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와 같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산 자가 된 사람은 값을 지불하시고 나를 사신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내 생명의 주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고, 권위자이십니다.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를 100%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산 자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 이외에 다른 살 도리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8장 11절에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와서 함께 앉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도 그 때 그 곳에 앉지 못하는 분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산 자로 살아가시는 성도들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만보다 더 무서운 것

출 3:1-14 / 노경모 목사

우리 모두는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교만하다가 하나님의 징계와 버림을 받은 자들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말아야지..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절대로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야고보서 4장 6절의 말씀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는 베드로전서 5장 5절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처음에 겸손했을 때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지만 나중에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쓰지 않고 버린 경우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사울 왕은 처음에 이스라엘 왕이 될 때는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자기는 왕을 될 자격이 없다는 마음에서 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서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도 안 듣고, 사무엘 선지자의 말도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왕의 자리에서 버렸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고.

그런데요. 교만이라는 것은 남과 비교하여 자기가 더 낫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든지, 학벌이 높다든지, 권력이 있다든지, 자기의 배경이 아주 좋다든지.. 이런 것들을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자랑합니다. 자기가 최고다 생각하면서 남을 우섭게 여기고 무시합니다.

그러니 남보다 내가 더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는 거지요. 내가 남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만하다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지요. 더 나은 것이 없는데 뭘 가지고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 남보다 더 낫다고 자랑할 만한 분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남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좀 이상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교만할 근거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남보다 나은 것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은 교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별로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만하지 않도록 몸부림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로 있을 때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그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해오고 난 뒤 350년이 지나서 모세가 애굽에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너무나 많아져서, 애굽 왕이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딸을 낳으면 살려주고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산파들이 모세를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몰래 키우다가 더 이상 몰래 키울 수가 없어 모세를 갈대상자 속에 넣어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냅니다. 그때 바로의 딸 공주가 목욕하다고 애기를 발견하고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로 키웁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서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좋은 음식을 먹습니다. 수준 있는 교육과 왕자로서의 필요한 훈련을 받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자랑할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나이가 40세 되던 해, 자기의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다가 너무나 화가 나서 애굽 사람을 쳐 죽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합니다. 그는 거기서 양을 치는 목자로서 일을 하면서 늙어 갑니다. 40년의 세월이 흘러 모세가 80의 나이가 됩니다.

애굽에서 왕자로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교육과 훈련을 받았지만 40년이 지난 모세는 이제 양을 치는 시골 할아버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머리는 희어져서 바람에 휘날리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고 그의 허리는 굽어지고 그의 얼굴을 햇볕에 그을러졌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제 양을 치는 늙은 목자에 불과합니다. 그는 왕궁에서 생활하던 모든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가 교육받았던 것, 그가 왕자로서 훈련받은 것도 다 잊어 버렸습니다. 그는 지식도 없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권력도 없습니다.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자랑이란 말 자체도 잊어 먹고 살았습니다. 그는 단지 40년 동안 양을 치는 일만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만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이제는 교만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뭐가 있어야지요?

80세가 된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는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는 이제 나이가 많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힘도 없는 시골의 양치는 목자인 자기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 내라고 말씀하시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라면 가야 되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다섯 번이나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10절을 봅시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이 하나님의 명령에 거절을 합니다. 11절,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나는 이제 왕자도 아니고 힘도 없고 지식도 없고 권력도 없고, 돈도 없고, 내가 애굽 바로의 왕궁에서 도망 나온 지가 40년이나 되는데, 이제 늙어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제가 감히 바로 왕한테 갈 수 있으며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낼 수 있겠느냐고, 갈 수 없다고 거절을 합니다. 이게 첫 번째 거절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로 보냈다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또 모세가 또 거절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를 보내신 분의 이름이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느냐고 거절을 합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을테니깐 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두 번째 거절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를 보낸 자에 대해서 물으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로 보냈다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또 거절을 합니다 정말로 모세가 안 좋은 쪽으로 대단합니다.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은지 세 번째 거절을 합니다. 바로 4장 1절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래도 내 말을 믿지 않고 내 말을 듣지 않고 거짓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네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떡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이 다시 모세의 지팡이가 되고, 모세의 손이 문둥병자의 손이 되고 그 손이 다시 깨끗해지는 기적을 보여 주면서 그들에게 이 기적을 보여주면 모세 너를 믿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되면 모세가 가야되는 데, 또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네 번째의 거절입니다. 자기는 말도 잘 못하기 때문에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걱정하지 말고 가라 네가 네게 할 말을 가르쳐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4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그런데 또 모세가 거절합니다. 몇 번째이지요? 네, 다섯 번째 거절입니다. 모세가 거절하는 내용을 봅시다. 4장 13절을 말씀을 읽어 볼까요?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보낼만한 자를 보내라는 것이 나는 도저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을 잘하는 네 형 아론을 네게 붙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4장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모세가 교만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다섯 번이나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교만할 만한 건덕지가 없습니다. 건덕지라는 말을 아시지요? 일의 근거를 일컫는 경상도 사투리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교만한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세가 교만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다섯 번이나 거절했습니까? 바로 고집입니다.

교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고집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고집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 그리 고집이 센지. 우리는 지금 교만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조심하는 것보다 고집피우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고집을 버리는 것에 올인해야 합니다.

고집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고집을 다른 사람을 자신을 망치고 다른 사람까지 망칩니다. 고집은 그 길이 실패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임을 알고도 그 길로 가게 만듭니다. 고집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지 못하게 만듭니다. 고집은 하나님의 버림을 당하게 만듭니다.

영적으로 깊은 단계에 있고,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가르치고 인도하고 있고, 하루에도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살고 있는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들고 제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연세도 많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 저를 지금 까지 연단시키고 계신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저의 고집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제 고집을 꺽으시기 위해서 갖은 연단과 징계를 주시지만 제가 아직 까지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싸움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바로 고집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입니다.

고집이 얼마나 고약하고 무서운 것인지 다른 사람을 말을 도저히 듣지 않도록 만듭니다. 모세는 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말도 안들었는데, 고집이 사람의 말을 듣도록 만들겠습니까? 목사님의 말을 듣게 만들겠습니까? 주변의 믿음의 선배들의 말을 듣게 만들겠습니까?

내가 고집이 있나 없나 점검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다른 사람의 말을 귀 담아 잘 듣고 있나?

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사울 왕에게 사무엘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19절,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들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말도 안들었습니다. 사울 왕의 고집이 사울 왕을 망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도저히 듣지 않는 배경에는 자기의 생각이 모든 결정의 기준이고, 자기의 생각이 정확하며, 자기의 생각이 최고라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던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러 갔을 때, 엘리사가 높으신 분이 오셨다고, 맨발로 뛰어나와 정중이 영접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해 줄을 알았는데, 얼굴 낯짝도 보이지 않고 요단강물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니 여간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가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되는데 왜 기분이 상했습니까? 자기의 생각 때문에 그랬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정확하고 최고인데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일을 시키니깐 그것을 듣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고집이지요. 그래서 열왕기하 5장 10절에서 12절에는 그는 자기의 생각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사울 왕도 자기의 생각을 내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아말렉을 쳐서 모든 것을 죽이고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짐승을 죽이지 않고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책망하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뭐라고 자기의 생각을 내 세우고 있습니까?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내달라고 요청한 모세의 말을 안들은 애굽의 바로 왕, 정말로 고집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아홉 가지의 무서운 재앙을 당하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내지 않으려고 했던 바로 왕은 모든 짐승과 사람의 초태생, 즉 장자가 죽는 무섭고 끔찍한 재앙을 당합니다. 그렇게 무서운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기 위해서 군대를 보냅니다. 결과 어떠했나요? 홍해에 다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고집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는 자는 의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내세우고 고집을 피우면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죽을 수가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교만보다는 고집을 꺽어야 합니다. 고집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고집을 회개해야 합니다. 고집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습니다. 로마서 2장 5절 말씀,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싶습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싶습니까? 앞 길이 열리기를 원하십니까? 치유받고 회복되기를 원하십니까? 고집을 내려 놓읍시다. 이미 우리는 우리의 자와 고집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준원 목사

[들어가는 말]

 

지난주 카리브(Caribbean) 해 지역에서 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초강력 허리케인 샌디(Sandy)가 미국 동부 해안에 내일 밤이나 화요일 오전에 상륙할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시속 75마일의 강풍을 지닌 샌디는 동부 해안에 접근하면서 두 개의 차가운 강풍을 흡수해 파괴력이 더 커졌습니다. 샌디의 영향으로 미국 3억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6,000만 명이 긴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뉴욕, 코네티컷,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버지니아 주가 일제히 비상사태를 선언했습니다.

지난주 콜럼버스 신문을 비롯한 미국 언론들은 샌디를 가리켜 “프랑켄스톰(Frankenstorm)”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괴물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과 스톰(storm)의 합성어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샌디가 폭우와 강풍을 뿌릴 미국 동부 해안 800마일이 지옥 같이 변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번 사태가 굉장히 심각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플로리다나 텍사스 같은 데나 허리케인이 오지, 무슨 뉴욕이나 코네티컷 같은 북쪽에 허리케인이 오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을 깨는 일들이 요즘 굉장히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상입니다. 지금 동부 지역의 주민들이 느끼고 있을 두려움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곳에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분들도 계실 텐데,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안한 세상에서 하루라도 걱정 없이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소명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소명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소명자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님의 소원이란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입니다.

결국 소명자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예배, 교제, 훈련, 섬김, 선교에 균형을 맞추며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가정에서도, 생업에서도, 교회에서도 살아나가는 것이 소명자의 삶입니다. 그렇게 소명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주시는 것이 바로 소명(사명)입니다.

 

1. 왕궁에서 광야로

 

성경에 이러한 소명자의 삶을 산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모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히브리 사람이면서도 이집트 공주의 양자로 들어가 40세까지 이집트의 왕자로서 궁중의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힘으로 동족 히브리 사람들을 구해야겠다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하루는 히브리인을 짐승처럼 다루며 채찍질하는 애굽 사람을 보고 분노하여 그를 쳐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미디안 광야는 애굽 왕궁과는 완전히 다른 곳입니다. 모래와 자갈이 섞인 척박한 땅이기 때문에 너무나 불편한 곳입니다. 먹을 음식이나 마실 물도 없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를 피할 그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살인자로 지명 수배된 모세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도망을 칩니다. 모세는 사막을 지나다 우물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했다고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첫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는데, 그 이름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이니까 그의 당시 마음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또 과거 40년간 살았던 이집트 왕궁의 그 화려한 삶을 얼마나 그리워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 젊을 때의 나날들을 잊지 못합니다. 제 아버지께서 올해 87세이신데, 생신을 맞으실 때마다 “내가 지금 나이가 이렇게 많지만 마음은 항상 20대야.”라고 하십니다. 저도 가만 보면 살면서 항상 옛날을 생각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자로 40년을 살면서 모세에게 참 기쁨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지 못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나의 삶은 끝나나보다 체념하며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그런 식으로 ‘내가 이 콜럼버스 구석에서 이렇게 끝나나보다.’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닙니까?

그렇게 4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모세의 나이 80세가 되었습니다. 온몸의 기력도 쇠해지고 열정도 사라졌습니다. 아무 비전도 꿈도 없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이집트의 모든 학문과 지식과 무술과 운동을 배우면서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이빨 빠진 사자처럼 아무 소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1절)

모세는 40년 동안 장인 이드로의 집에 살면서 아직 자기 양도 없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자신의 조상 야곱은 장인의 집에 살면서 재산에 대한 욕심을 품고 자기 양을 늘리는 꾀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무 욕심도 없고 재산을 모으겠다는 열정도 없습니다. 그저 생명만 유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마 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살인자이고 도망자입니다. 삶에 지쳤습니다. 외로움에 지쳤습니다. 사막의 지루한 삶에서 생애를 마감하려고 기다리는 무기력한 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모세가 어떻게 한 민족을 이끄는 리더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2. 하나님의 부르심

 

모세는 어느 날 호렙 산에 도착했습니다. ‘호렙’이라는 말은 ‘황폐하고 버려진 땅, 건조한 땅, 황무지, 불모지’라는 의미입니다. 산으로서 그리 큰 가치가 없는 형편없는 산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런 호렙 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부릅니다.

왜 이런 황폐하고 버려진 땅이 하나님의 산입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소망이 사라진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자기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버려진 인생을 살아왔는데, 호렙산에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곳에서 황폐한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람이 가장 힘들 때는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을 때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앞으로 괜찮아질 것이라는 소망이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소망이 안 보일 때 정말 힘이 듭니다. 모세가 앞으로 미디안 광야에서 10년, 20년, 30년, 40년, 아니 몇 십 년을 더 산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지난 40년의 세월은 그의 꿈을 파괴했고, 꿈이 사라졌다는 것은 인생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꿈이 사라지면 인생은 시들어집니다. 나이 80세에 품을 수 있는 꿈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망도 가질 수 없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2절)

여기 나오는 떨기나무는 아카시아과에 속하는 가시나무입니다. 그런데 사막에서 떨기나무를 보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또 사막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 역시 흔한 일이지 특별한 경우가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는 무엇에 주목했습니까?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3절)

많은 분들이 성경을 대강 보고서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신기해서 다가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자세히 보시면, 모세는 떨기나무에 단지 불이 붙었다고 간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보기 위해 간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에 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가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아무 꿈도 없이 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도 타지 않는 것을 보는 민감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평소에 양을 치면서도 뭔가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산 것이 아닙니다. 별 소망 없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뭔가를 향한 갈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앞이 안 보이고 아무리 소망이 없어 보이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늘 민감함을 가지고 주변을 살피며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른 목자나 목동들도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이런 현상을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에 매일 똑같은 것 같고, 감사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도, 이러한 민감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제목이 반드시 보입니다. 뭔가가 일어납니다. 목장에서 감사의 제목을 나누자고 하면 뭐라고 하십니까? “뭐, 매주 똑같아요.” “별로 감사할 게 없어요.”라고 하십니까? 사실은 감사할 제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적으로 둔해서 그것을 못 보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잘 보면 분명히 감사할 게 쌓여 있는데도 내가 영적으로 둔감해서 못 보는 게 아닌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4절)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지루함에 파묻혀 사는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붙은 떨기나무의 모습으로 나타나 모세를 부르십니다. 황폐할 대로 황폐한 호렙에서 절망 속에 황폐한 인생을 살던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십니다. 깊이 낙심하여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재정이 다 고갈되고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모세의 인생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지금 황폐한 광야에 있더라도, 아무 꿈도 소망도 없는 인생을 살고 있더라도,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더라도,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포기한 인생을 살던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도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황폐한 광야의 한가운데가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곳이 됩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한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질 때, 거기서 참 회복이 시작됩니다. 아무리 황폐하고 척박한 광야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 성탄절이나 부활절 때 많이 부르는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Georg Friedrich Handel)은 음악의 신동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서 천재성을 발휘하여 17세에 고향 할레에 있는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1년 뒤에는 함부르크에 있는 카이저 오페라 하우스의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 연주자가 되었으며, 21세에는 건반 악기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그 후 작곡으로 방향을 바꾸어 곧 명성을 얻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노버 선제후(후에 영국 왕 조지 1세)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영국으로 이주한 다음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갔고,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헨델은 그의 재능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역경을 만났습니다. 영국 작곡가들의 경쟁은 치열했고, 청중들은 변덕스러워서 때로는 그의 연주에 모여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주 그 당시의 변화하는 정치 상황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몇 번이나 한 푼도 없는 파산 지경까지 이르곤 했습니다. 게다가 건강을 잃으면서 그는 뇌졸중 발작 증세를 일으켜 오른팔과 오른손 네 개의 손가락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연주도 못하게 된 겁니다. 후에 회복되었을 때도 그는 낙담하여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1741년, 겨우 56세였던 헨델은 은퇴할 때라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는 용기를 잃었고 상심했으며, 빚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해 4월 8일, 헨델은 결국 고별연주회를 가지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8월의 어느 날 인적 없는 길을 걷다가 어느 교회 앞에 이르렀고 그 안에 들어가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다가 결국 사람들이 저를 버리게 만드셨습니까?” 그는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유한 친구 찰스 제닝스(Charles Jennings)가 헨델을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토대로 한 가극대본을 준 것입니다. “주는 사람에게 멸시와 버림을 당하였으나... 그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도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도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음부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할렐루야, 전능의 주님 다스리시네. 왕의 왕, 또 주의 주!” 헨델은 그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에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놀라운 멜로디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는 황급히 펜을 들어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4일 동안 먹지도 쉬지도 않으면서 무섭게 작곡에 매달렸고, 그렇게 하여 장장 260페이지의 원본을 완성했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헨델의 <메시아>입니다. 그 안에 그 유명한 할렐루야 코러스도 있습니다. 헨델은 성령의 힘으로 불후의 명작 <메시야>를 작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0년 동안 모세의 이름을 불러준 존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불꽃으로 자기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생의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이제부터 모세는 하나님께 이끌리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삶에 깊이 들어오길 원하셨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깊이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모세의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이름도 아십니다. 모세의 절망을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절망도 아십니다. 모세의 답답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답답함도 아십니다. 살인자이며 도망자였던 모세를 부르시고 회복시키신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회복시키십니다.

 

3.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

 

하나님께서 부르시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4)라고 반응합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5-6절)

당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종이 된 순간 위대한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7-10절)

하나님이 엄청난 비전을 보여주시자 모세는 부정적인 반응부터 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1절)

모세에게는 비전도 열정도 없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몸이 쇠약해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으로 가득한 자신에게 엄청난 일을 명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뭔가를 찾으며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자신의 삶이 바뀌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신의 삶이 바뀌면 좋겠다는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한 것이었는데, 이제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모세처럼 우리도 원하는 것이 그저 나 자신의 삶이 좀 편해지고 잘되는 정도일지 모릅니다. 그냥 내가 좋은 직장을 잡아서 어느 정도 돈 벌어 편하게 살고, 먹고 살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사업이 그런대로 잘되고, 내 자녀가 좋은 학교 나와서 어느 정도 성공하고, 교회에서도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봉사해서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뭐 그런 정도를 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 엄청난 뜻을 품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을 향해 진짜로 엄청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기력과 절망으로 가득 찬 인생을 찾아와 기적을 이루십니다. 그저 평범하게 적당히 살려고 하는 인생을 찾아와 엄청난 일을 이루십니다. 바로 그 일에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우리에게 “아니다, 너는 엄청난 일을 이룰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비전을 주셨지만 모세는 못한다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는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해야 하는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은 착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자신을 바라보고 주저하며 머뭇거립니다.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머뭇거리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2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만한 자신이 없었습니다. 본문 이후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보면 모세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를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제가 하나님이었으면 ‘야, 그럼 관둬라. 뭐 너 밖에 사람이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하면서 내칠 텐데, 하나님은 모세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모세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르신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모세 자신도 알고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거부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약속하십니다. 오직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 좀 할 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면 부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할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은 “가서 제자 삼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가라고만 하면서 억지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 힘으로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이 아니다. 너희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은 내가 해주어야 하는 일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나아가라!”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을 자기가 알아서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바로가 막을 때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열 번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홍해가 가로막을 때 하나님과 함께하여 바다를 갈라 마른 땅이 나오게 합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 하나님과 함께하여 바위에서 물을 냅니다. 백성들이 자신을 공격할 때 하나님과 함께하여 물리칩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하나님과 함께하여 승리합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은 후로는 전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자기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질 때마다 ‘아, 이건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모두 다 하나님이 해주신 거야.’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며 나아가니까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인생도 딱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으며 내가 주인으로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그분의 종으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매순간 이 선택 앞에 결단을 해야 합니다. 나의 삶은 지금 어느 쪽입니까?

 

[나가는 말]

 

79세의 모세와 80세의 모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딱 하나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 그것 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80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국 순종하기로 다짐하며 나가게 되었을 때, 그가 이전에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호렙 같은 황폐한 곳도 하나님의 산으로 바꾸는 분이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분이십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상처와 고통으로 가득한 곳에서도 치유를 이루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고난의 눈물을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바꾸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런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 소명자의 삶, 그분의 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1-10 / 김양인 목사

모세는 본디 히브리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애굽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 사연은 출애굽기 1장과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즈음에, 바로는 히브리 민족이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리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아기가 너무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자 갈대상자에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에 담아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두고 모세의 누이로 하여금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게 했습니다.

 

얼마쯤 후에,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왔다가 갈대 사이에 떠있는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오게 하여 열어보았더니 아기가 울었습니다. 공주는 아기를 불쌍히 여기고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 것을 알면서도 살렸습니다. 그때 모세의 누이가 공주에게 말하기를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하니, 공주가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가서 자기 어머니를 불러왔습니다. 공주가 말하기를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모세는 소년이 될 때까지 친어머니의 품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공주는 모세를 왕궁으로 데려갔고, 그 때부터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갖추어야 할 법도와 애굽의 모든 학문을 익혀 출중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공주의 양아들이지만 아들과 똑같은 자격과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애굽의 고대사에는 최초로 여자의 몸으로 바로가 되어 애굽을 통치한 합셉슈트 여왕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이 여성을 모세의 양어머니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애굽의 바로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동족인 히브리인들이 애굽인들의 종이 되어 고통당하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마흔 살 쯤 되었을 때, 모세는 히브리인들이 노역하는 현장을 보러 나갔다가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동포에 대한 연민을 참지 못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었습니다.

 

이튿날 다시 그곳에 나갔더니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소?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일 셈이오?” 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모세는 바로가 이 일을 알고서 그를 죽이려고 찾는 줄을 알고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서 머물러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큰딸과 결혼하였고,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장인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서 호화롭게 살던 모세가 황량한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가 되다니…. 동족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려던 위대한 계획은 한갓 허망한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양떼를 이끌고 목초를 찾아서 광야 이곳저곳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어느덧 모세의 나이 팔십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양 떼를 이끌고 광야 서편으로,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갔습니다. 호렙 산이 본디부터 하나님의 산이라고 알려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후에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산’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호렙 산에 이른 것은 다만 양 떼를 먹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자기 백성을 위한 해방자로 세우실 작정을 하셨습니다.

 

모세가 보니 산에 있는 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떨기나무는 키가 작은 관목으로 덤불로 되어 있으므로 불이 붙으면 금방 타서 재가 되어야 하는데, 불이 활활 타는데 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모세는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며 그리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모세가 가까이 다가가니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뵙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9)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섭리가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모세는 40년 전 한창 나이일 때, 히브리 민족을 위해 거사를 시도했으나 무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뜻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줄로 여겼던 동족의 배신으로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살인자요 반역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주했습니다. 목자가 되어 광야를 떠돈 지 40년이 되었고, 그는 팔십 난 노인이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팔십은 고령에 속합니다. 편안히 여생을 보내기를 바라지 새롭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투신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젊고 원기 왕성하던 때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팔순의 노인이 된 모세를 부르셔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자로 삼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젊고,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 출신 배경이 좋고, 재력이 있고, 막강한 지지기반을 가진 사람이 리더로 추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정반대로 일하십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서 권력과 명예와 부를 갖고 있었던 젊고 수완이 탁월하던 때의 모세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지혜와 강함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잘남과 능력을 내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히브리 민족의 해방자로 세우시기에 앞서 그를 광야로 보내셔서 40년이란 긴 세월을 통하여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연단을 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에게 있던 교만과 자기 자랑과 아집이 다 깨어지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처분을 구하는 사람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 원칙은 하나님께서 큰 일군을 세우실 때 뿐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실 때에도 적용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은 자기에게 내세울만한 것이 있으면 교만해 져서 자기를 자랑하며 제 고집대로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말해 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잘난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완고하게 거부합니다. 그러나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마음이 겸손하므로 복음을 듣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고집이 센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모세의 경우처럼,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기까지 시련을 가하여 그 사람을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려고 가까이 다가오는 모세의 이름을 불러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때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아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일컬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우리를 아시고 택하여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셔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은 우리를 통하여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전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이요 전령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습니다.

 

 

한편, 모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 그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을까요? 모세가 선 그 땅이 본래부터 거룩한 땅이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땅이 거룩한 까닭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신 말씀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신을 벗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1. 신은 인간이 가진 속된 것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신을 신고 더러운 곳도 밟고 이곳저곳 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 만큼 신발은 더럽고 속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속된 상태로는 그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 11:45)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으려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룩해 질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세속적인 욕망과 습관과 삶의 방식을 내버리고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2. 신발은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신발을 고쳐 신습니다. 농부가 밭일을 하러 갈 때에는 장화를 신습니다. 그래야 사고를 미연에 예방할 수 있고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군인은 훈련을 하든, 전투를 하든, 튼튼한 군화를 신습니다. 군화가 튼튼하고 가볍고 편해야 훈련도 잘 받을 수 있고, 전투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누구나 신발을 신지 않고 바깥출입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신발을 벗고 다닌다면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려면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을 버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일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과 세상일은 차원이 다릅니다. 전자는 영적이고, 후자는 육적입니다. 전자는 거룩하고, 후자는 속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감당할 때에도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사용하면 절대로 은혜로운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다툼이 생기고 시험에 들게 되고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자기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심으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히브리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는데 아무 쓸 데 없음을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무엇을 하든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법을 따라 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스룹바벨에게 이르시기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3. 신을 벗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른이나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모자를 벗듯이, 신을 벗는 것은 존경과 겸손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마음을 낮추고 그 말씀을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의 생각을 기꺼이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겸손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이르기를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비천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겸손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드셨기에 우리가 그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 신분이었을 적에는 자기 능력을 믿고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실패하고 미디안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40년 연단을 통과한 후에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묵히 복종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하거든 겸손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를 밝히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친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가 누구신지를 말씀하시기까지는 하나님께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눅 10:22)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지금 우리 각 사람이 새롭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신구약 성경 66권속에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조상의 하나님’이란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상의 하나님’이란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미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밝히셨을 때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대면할 때 인간이 갖게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소돔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티끌과 같은 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는 말씀을 해석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까마득한 옛날에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살아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서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성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천국에 살아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는 마르다에게 이르시기를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고 하셨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 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보살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킬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고 하셨습니다. 마흔 살 때 모세는 자기 능력을 믿고 히브리 민족을 구해 내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그가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히브리 민족을 구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하나님의 때에 행하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적임자를 세워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보다 앞서려 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모세를 연단하셔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 후에,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는 사명을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셔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자로 세우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며, 이제도 자기 백성인 성도들을 부르시어 하나님의 일을 맡기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신 대로, 모든 속된 것을 버리고 구별된 삶을 추구하고,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마음을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맡기시든 작은 일을 맡기시든 모세처럼 복종해야 합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함께 하셨으므로 그는 팔십 고령에도 불구하고 바로의 항복을 받고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켰습니다. 모세와 함께 하셨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께서 성도님들과도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사용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와서 보라

출 3:1-4, 요 1:43-46 / 이성희 목사

미국의 신학자 브슈넬은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선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교과과정과 교육방법이 탁월하여 다른 어떤 스승인 랍비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생의 수준과 과정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은 다르게 마련입니다.

유치원생에게 대학원 박사생처럼 가르치면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잘 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좋은 스승은 학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칩니다.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가르칩니다. 이것이 좋은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에 제자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자말자 어려운 논리나 진리나 영생이나 십자가나, 부활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장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단순한 그 말씀이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란 말씀은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것이므로 제자들에게 그냥 오라고, 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선포이며 가르침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39에는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께 와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만 하십니다. 1:46에는 이튿날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만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의심합니다. 이 때 빌립은 긴 말을 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만 합니다. 4:29에는 수가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몇 해 전 루게릭이라고 불리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을 앓고 있는 스티븐 호킹박사가 의문의 폭행을 당했습니다. 손목이 부러지고, 몸이 칼에 베이고, 입술이 터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때 신문에는 ‘먼초전 신드롬 바이 프록시’(Munchausen Syndrome by Proxy)라는 것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이나 중환자를 돌보는 부모나 간병인이 주변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해 돌보고 있는 어린이나 환자 등에게 상처를 입히는 희귀한 정신질환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별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걸 하지 않아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십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습니다. 기적을 베푸시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헤롯도 그 동안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는 것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앞에서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내려와 보라”고 하였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기적도 다 희귀하지만 헤프지 않았습니다.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한마디의 매력이 있습니다. “와서 보라”. 이 한마디에 많은 사람이 따라갔습니다.

“보라”는 성경에 약 400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실증적 증언을 기록한 책입니다. 확실한 역사적 증거들로 가득 찬 책입니다. 확실한 증거들이기에 와서 보라고 합니다. 언제 누가 와서 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39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고 합니다. “오라 그리고 보라”는 말씀은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에 가능합니다. 가장 좋은 일이기에 설득하는 말입니다. “와서 보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고 이 말이 우리 모두의 선포가 되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입니다.

 

요한복음 1:45에는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와서 보라”는 말씀은 확실한 자기 증명입니다. 제자들의 “와서 보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니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 와서 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와서 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확신이 없으면 “와서 보라”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절대적 확신과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말입니다. 오면 그리고 보면 다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상대방이 의심합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설명해도 안 믿을 때는 정말 답답하지요? 가슴을 열어 보여줄 수 있다면 열어보여 주고 싶을 때가 있지요? 아무리 와서 보라고 해도 보여줄 수 가 없으면 더 답답할 것입니다. 와서 보게 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설명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지만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일본의 전설적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떡장수의 집에 낭인과 낭인의 어린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떡 한 접시가 없어졌습니다. 떡장수는 낭인의 아들을 의심하였습니다. 낭인은 사무라이의 아들인 자기 아들이 절대 훔칠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떡장수는 계속해서 떡값을 내라고 다그칩니다. 사무라이인 낭인은 칼로 자기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을 먹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이고 떡장수를 죽입니다. 그리고 자기마저 할복 자결해 버립니다.

아들이 죄가 없다는 확신도 없이 아들의 배를 가르겠습니까? 만일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배에서 떡이 나오면 모두 헛것입니다. 괜히 아들만 죽인 것이 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감이 아들을 죽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예수님께 대한 신뢰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확신입니다.

요한복음 4:29에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이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한 다음에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훤히 아시는 분, 이 분을 그리스도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아시는 분, 이 분은 미래도 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도 맡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분을 따라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분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그리스도 대한 신앙고백을 보세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난 다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기 전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지키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다시 만난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고백이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영국성공회와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사용하는 신앙 고백서입니다. 동방정교회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12사도들이 사도신경을 작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초기 세례예비자용 문답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지금의 사도신경의 최종 형식은 6세기말 프랑스 남서부지방에서 확립된 것입니다. 12세기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사도신경을 공식적 신앙 진술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성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고 간단하게 한 마디로 성령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은 길고 내용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심을 고백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을 고백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고백합니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을 고백합니다.” 성부와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은 짧은 대신 성자에 대한 고백은 깁니다. 신앙고백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매일 새벽기도마다 우리교회는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함으로 시작합니다. 주일 예배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 신앙의 확신이 있습니까? 이 확신이 있으면 이제 “와서 보라”라는 말로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반대자에 대한 설득입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장 반대하고 격하하던 제자가 나다나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취하실 때에 가장 극찬한 제자가 나다나엘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가장 낮춘 사람을 가장 높여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대성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반대자에 대한 관용이 예수님의 인간관계의 탁월성입니다. 예수님의 인사관리의 핵심기술입니다. 이런 반대자에 대한 관용이 반대자로부터 위대한 신앙고백을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리더십에는 이런 이론이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이든 25%는 지도자에 대한 찬성자인데 이 추종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찬성하는 자들입니다. 25%는 찬성하지만 어떤 일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반대자로 변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25%는 반대자인데 잘 설득만 하면 언제든지 찬성자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 25%는 반대자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반대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다고 보십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75%는 찬성자가 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 75%만 찬성하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반대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위대한 리더십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배우는 리더십입니다. 예수님도 가룟유다는 못 돌려놓으셨습니다. 최후의 성만찬 때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은 이루었지만 그에게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는 출생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 중에는 누구도 이 역할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성경의 진리, 구원의 확신을 알 수는 없습니다. 성수주일이나 십일조를 그대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하던 술이나 담배문제도 모두 해결하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그냥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고 믿음이 자라게 되면 나쁜 습관을 끊고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젖을 빠는 아기가 왜 빨아야 하는지 이해하고 빠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빠는지 배워서 빠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저런 것을 따지지 않고 그냥 빱니다. 아이들이 크면서 젖을 빨고 먹어야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밥을 먹으면 어떤 소화기능을 통하여 살이 되고 피가 되는지 모두 알고 먹는 것이 아닙니다. 소화과정에서 간이나 췌장이나 소장이나 대장의 기능을 따지지 않고 그냥 먹습니다. 먹어 보면 건강해지고, 먹다 보면 유익하게 됩니다. 인간이 확실하게 다 알고 하는 것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냥 와보고 따라 해보고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선친이 목회하실 때에 어느 스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사찰의 총무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깊은 진리를 깨우치고 싶어서 사찰에 딸린 작은 암자에서 백일동안 생식을 하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일 후에 자신이 얻은 것은 배고픈 것과 허기가 져서 눈에 이상한 환상이 보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문에 대구의 아무개 목사님이 불교에 대하여 많이 알고 계시다고 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아버님과 한참이나 서로 얘기를 주고받더니 어머님께 아버지 양복 한 벌과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가지고 오게 하시더니 그 자리에서 승복을 벗도 양복으로 갈아입고 아버지 구두를 신고 가셨습니다. 그 때 저의 사택이 교회 안 뒤뜰에 있을 때입니다. 스님이 교회에 들어오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나가시고 나서 아버지께 물어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불교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설명해 드리고 나서 결단하고 한번 와서 예배를 드려보라고 권하였더니 그 분이 당장에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답니다. 후에 그 분은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셨는데 주로 하시던 일이 승려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교리적 설명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와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심 많고 반대하고, 거부하던 사람들에게 보게 하십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보고, 만져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만져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모여 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8:17에는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합니다. 이런 의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예수님은 “나는 예수다”라고 자신을 보이십니다. 다메섹에 들어간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9:22에는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고 합니다. 반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와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이 병이 들자 예수님께 와서 간청합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집에 가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까지 안 가셔도 고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병도 멀리서 원격조종(remote control)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시지 않고도 다 아시고 하시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와야 합니다. 그리고 보아야 합니다. “오라 그리고 보라”는 말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와서 보는 것은 반대자를 설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확신이 없는 자나 반대자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그냥 한 번 와서 보라”.

‘X광선’을 발견한 렌트겐은 의학상 큰 공적을 남겨 노벨 의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그 광선을 발견했을 때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실험만 했습니다.” 실험만 하다보니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른 생각 없이 예수님께 와서 보기만 해도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안티 기독교가 극성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대자가 너무 많습니다. 적극적 반대자도 있고, 소극적 반대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반대자는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합니다. 악의에 찬 반대를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안티 기독교를 보세요. 그리스도를 반대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안티 기독교가 그리스도인을 반대합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답지 못한가를 지적합니다. 구체적이고, 악의적이고, 적극적이고, 영적인 반대자가 많습니다. 이런 안티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와서 보라고 할 만큼 우리가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모범적이고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와서 보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삶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기독교인은 우리의 삶을 누구에게나 언제나 공개할 수 있을 만큼 자신 있게 살아야 합니다.

약한 ‘아니오’(No)라면 아직 설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득 방법이 잘못되면 단단하게 입을 다문 조개처럼 강한 ‘아니오’로 바뀌어버립니다. 설득이 역효과를 내어 상대가 강한 ‘아니오’의 태도로 돌변하는 것을 ‘부메랑 효과’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세일즈맨이 차를 팔러 갔습니다. 어느 주부가 파란 차를 원합니다. 그런데 “흰 차로 사세요. 흰색은 가장 싫증나지 않는 색입니다”라고 강요하게 되면 주부의 감정을 상합니다. 그리고 “차 필요 없어요”라고 반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반대자를 잘 설득하는 것도 기술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기술은 내가 가진 확신을 와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결 론

 

성배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은 충성스런 기사 영 퍼시발은 왕이 거룩한 홀에서 베푼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잔치가 끝나자 왕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지난밤에 성배가 세 번씩이나 자네 앞을 지나갔지만 자네는 그 것을 알아보지 못했어.” 코앞의 보물을 알아채지 못한 무관심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만나지 못한데 대한 죄는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없었다고 누구도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벌을 주기 전에 전하지 않은 우리의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로마서 10:14에는 말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반대자에 대한 설득은 자신의 확신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내가 확신해야 하고, 내가 전해야 합니다. “와서 보라”.

믿지 않는 이웃에게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보고 알고 있는 바를 바르게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네 신을 벗으라

출 3:1-10 / 이정익 목사

위대한 인물이나 위대한 신앙인의 인생에는 공통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두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깨는 경험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아가 더 강한 사람일 수록 더 철저하게 깨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큰 일들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고 참되려고 할 때는 그냥 어느 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부수고 깨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조차 없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그는 왕족출신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식견이 있는 웅변가였으며 장래가 촉망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교만했겠습니까? 그가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갔다가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황홀한 신비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이사야는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 사람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사야는 불결한 내가 하나님을 보았다고 느끼게 되어 두려운 마음으로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죽겠구나’ 하고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불젓가락을 가지고 와서 그의 입술을 지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귀에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주저하지 않고 “주여 나를 보내소서”하고 응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그를 깨끗하게 씻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출신성분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바리새인이었으며 로마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래서 자아가 강하였고 교만하였습니다. 그는 내 생각과 뜻에 반대되는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메섹에서 찬란한 빛을 동반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찬란한 빛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보고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아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왕궁에서 왕자로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왕실에서 교육을 받고 남들보다 우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교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었고 모세는 그 길로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때부터 모세는 40년간 초라한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왕궁의 왕자가 아니라 이제 살인자로 도망자로 무일푼의 방랑자가 된 것입니다. 어제까지 가지고 있던 온갖 충천했던 꿈들은 한순간에 깨지고 부서지고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생각하면 본인도 미쳐버릴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환경이 바뀌고 상황이 달라졌지만 자기 자아는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고민이 많은 이유는 내가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등하고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렇게 광야에서 아주 초라하게 뭍혀서 40년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양떼를 몰고 호렙산 기슭으로 갔습니다. 그 양은 자기 것도 아닙니다. 장인의 것입니다. 지금 모세의 나이가 80세인데 내 양도 아닌 장인의 양이나 치고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천하의 모세가 이렇게 초라하게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호렙산 가까이 이르자 그는 멀리 가시덤불에 불이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 보니까 분명 불은 타고 있는데 나뭇가지는 타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 불길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너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발을 벗으라니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 몇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 우리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내게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네 허상을 버리라

 

모세는 지금 망명생활 중입니다. 모세의 생각 속에는 자나 깨나 내가 빨리 애굽세력을 꺾고 이스라엘을 이 굴욕에서 건져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모세는 지금 마음속에 이 마음이 불타고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그때까지도 내가 가서 이렇게 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아직도 “내가”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실은 내 생각과 뜻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모세의 고민이 큰 것입니다. 그 때 모세가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에 붙은 불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나는 살인자요 전과자요 도망자 입니다. 애굽의 내 민족 어쩌구 하지만 모세의 현재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지금 “내가 백성을 구원하리라” 하며 “내가”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망상이고 허구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가”가 크면 하나님은 나에게 가까이 오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 때 불꽃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발에서 신발을 벗으라.” 그 말은 네 그 허상, 네 그 허구,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 이 “내가”를 벗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가끔 우리들이 “내가 뭔가 하리라” 하고 장담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청년 때에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청년의 때는 세상에 겁나는 것이 없을 때입니다. 또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때 입니다. 그래서 청년 때는 자신을 너무 과신하고 오버하다가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나이는 들었어도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장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개혁을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 말대로 이 세상은 혁명하고 개혁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혁명과 개혁으로 변화된다면 이미 공산주의는 성공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공산주의가 소멸해 가는 것은 이 혁명이나 개혁으로는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이 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세처럼 자꾸만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내가”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애굽의 왕자라는 교만의 뿌리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네 신발을 벗으란 말은 “그 교만을 버리라” 그 말입니다. 모세가 백성의 인도자가 되려면 그 왕자의 신발을 그대로 신고는 불가능합니다. 모세가 고난 받는 백성을 위로하려면 그 왕자의식, 자만, 체면의 신발을 그대로 신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세가 백성의 위로자가 되고 지도자가 되고 진정한 해방자가 되려면 이 왕자의 신분, 속에 남아있는 이 껍데기를 벗어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껍데기를 벗는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와서 구원의 도리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그만큼 영생이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찾아온 것은 대낮이 아니라 한 밤중이었습니다. 한 밤중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진 시간입니다. 그러면 니고데모가 사람들이 왕래가 끊어진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 자존심이 말하자면 껍데기입니다. 이것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양반들이 처음 복음을 접하고 믿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가 보니까 교회 안에는 이미 상놈들이 먼저 들어와서 모두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은 이제 처음 교회에 와서 새신자인데 천하게 여기는 상놈들이 교회에서 중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양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이 껍데기 벗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를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신발을 벗으라.” 그 말은 모세가 지금까지도 걸치고 있던 애굽에서의 껍데기, 자존심, 체면을 다 벗으란 말이었습니다. 그 껍데기를 입고 있는 한 모세는 백성 앞에 나서서 나를 따르라고 할 수가 없었던 습니다.

 

성질도 부숴뜨리라

 

또 “네 신발을 벗으라”는 말은 “네 성질도 부숴트리라”는 말입니다. 신발은 성격대로 신습니다. 신발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부인이 신는 구두는 편안하고 무난한 구두입니다. 그래서 부인화라고 합니다. 처녀는 처녀가 신는 구두가 있습니다. 처녀는 대개 앞이 뾰쪽하고 뒷굽이 높은 구두를 신습니다. 처녀 중에서도 더 튀는 처녀는 뒷굽 높이가 더 높습니다. 옷도 개성대로 입습니다. 헐렁한 옷을 입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부분 젊은이들이 그렇게 입습니다. 나이 많아도 개성이 강한 사람은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무던한 사람은 넓은 바지를 입습니다. 편안한 게 좋다는 것입니다. 젊은이 중에도 바지가 넓은 옷을 입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젊었어도 사람들이 아저씨라고 부릅니다. “네 신을 벗으라”는 말은 지금 네 성격을 고치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혈기는 버려야 할 성격입니다. 그 성질 가지고는 절대로 지도자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성질을 가지고 지금 애굽에서 고난받는 백성들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까 목회자는 설교도 잘해야 하고 기도도 많이 해야 하지만 또 중요한 것은 성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아들 출신 목회자들은 목회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회의 하다가 조그만 의견만 틀려도 버럭 화를 냅니다. 혈기 때문입니다. 부잣집 아들 출신 목회자는 목회하다가 조금 어려운 일만 있으면 나 그만두겠다고 말합니다. 이 성질이 문제입니다. 다 바꾸어야 합니다. 바꾸지 않으면 목회하기가 힘듭니다. 군대생활을 오래한 분이 목회를 하면 제대후에도 군인의식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상담하고 싶다고 하면 신청서부터 내라고 말합니다. 상담하는 일에 무슨 신청서 낼 일이 있습니까? 모세에게는 아직도 왕궁에서 왕자로서 살았던 40년의 생활 의식이 몸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왕자다”라는 이 생각이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천대받는 백성들에게 위로자가 될 수 있고 억압받는 그들을 이끌고 어떻게 출애굽의 대업을 이룰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네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네 성질도 부숴트리라는 말입니다.

이 성격을 부숴트리는 일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있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기록한 돌비를 받아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내려오다 보니까 백성들이 금을 거두어서 그것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하고 춤추며 야단이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늦는다고 모세가 죽은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모세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들고 내려온 십계명 돌비를 집어 던져 박살을 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그 돌비가 어떤 돌비입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계명을 적어주신 돌비인데 어떻게 그것을 집어 던져 박살을 낼 수가 있습니까? 모세는 아직도 예전의 그 버릇을 못 고친 것입니다. 이것은 혈기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하다가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그런 백성들의 요구에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을 때 반석을 두 번이나 힘껏 내려쳤습니다. 그것도 혈기였습니다. 모세는 끝내 그 혈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중하차 하게 되었습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신발을 벗어 던져야 하는데 이것이 잘 안된 것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은 자신의 좋지 않은 성질까지 부서뜨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단방법도 버리라

 

사람에게 신발이 필요합니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시발을 신어야 자갈밭 길도 가시밭 길도 다닐 수 있습니다. 신발은 자기를 보호하는 수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어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네가 지금까지 믿고 신뢰하고 있는 수단과 방법들을 다 벗어 던지라는 말입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어떻게 하면 애굽을 무너트릴까 정복할까 무슨 방법을 쓸까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 갑자기 “네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계략이나 수단이나 술수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수단으로 세상에서 섭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수단과 방법을 다 벗어 던지고 맨발로 나오란 말씀입니다. 완전히 손을 들고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단과 방법을 너무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내 자식이 지금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 때 부모는 자식을 살릴 수단 방법을 모두 찾아 나서게 됩니다.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하면 무차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방법 때문에 병세가 더 안좋아지기도 합니다. 한계에 부딪혀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네가 지금 쓰고 있는 수단이나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맨발로 나오란 말입니다. 손들고 내게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성소에서 깨졌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깨졌습니다. 야곱은 얍복강변에서 깨졌습니다. 베드로는 새벽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졌습니다. 저는 1972년 5월 20일 새벽에 기도원에서 깨졌습니다. 그 깨진 자리가 내가 신발을 벗은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깨진 자리에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빨리 깨질 수록 내가 편한 것입니다. 내 삶이 내 영혼이 내 인생이 편안해집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깨졌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40년 사는 동안 가졌던 자존심 체면 우월감 왕자의식이 다 깨졌습니다. 그것들이 깨지는데 40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이렇게 깨지지 않은 채 살아가면 내 자신이 힘들어집니다. 매사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깎이고 인생이 피곤해지고 영혼도 곤비해 집니다. 놓아야 평안이 오는데 놓지 않으니까 매사가 눈에 거슬리게 보이는 것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신발을 벗을 때 모세는 자유해 졌습니다. 그의 영혼도 자유해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애굽으로 보내 민족의 지도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실패자가 열등자가 살인자가 마침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대업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잘 음미해 보십시오. 할 수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하루 빨리 내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도맡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작아지는 모세

출 3:1-12 / 이정익 목사

몇주간 계속 역설의 진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셋 있다고 합니다. 그 중 1위가 다윗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융성기를 이룩한 왕이고 통일왕국을 이룩한 왕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꿈이 바로 그 시대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가장 선호합니다. 그 다음 2위는 아브라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긍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이슬람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위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가장 화려했던 역사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의 바로를 이기고 출애굽을 이끈 사람으로서 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모세의 인생을 보면 참 극적이고 전설적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위해서 이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이 모세의 인생이 120년인데 그 120년을 3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기 왕궁생활 40년

 

모세는 애굽으로부터 압제받을 때 태어났습니다. 모세가 태어나자 부모는 한동안 그를 숨겨 키웠습니다. 그러다 결국 모세를 강에 흘려보내게 되었습니다. 갈대상자에 넣어 그를 강에 띄워 보냈는데 마침 강에 나왔던 바로의 공주가 모세를 발견하여 데려다 양자를 삼아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왕궁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왕궁에서 생활한 40년의 인생은 모세에게 한마디로 기고만장의 때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 때는 불가능은 없다고 외치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교만했고 자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변방에서 이민족이 침입이라도 해오면 모세가 혼자 나가 싸워 물리쳤습니다. 그러니 그 시대에 얼마나 기세가 등등했겠습니까? 그 때에는 거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다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용기는 좋으나 너무 교만하고 자만하기 때문에 경솔합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뜁니다.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고 무슨 큰 일을 하겠습니까? 그 때에는 실수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부숴지고 깨져야 큰 일을 할 수 있고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느 날 공사장에 갔다가 애굽인과 유대인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절제하지 못해서 결국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모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이 들통이 나자 바로가 체포령을 내렸고 모세는 그 길로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모세의 1기 인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반기 광야생활 40년

 

사람을 죽인 후 모세는 광야생활 40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는 왕궁생활을 하고 천국생활을 했는데 오늘은 갑자기 광야로 내몰려 지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풍족했던 삶이 빈곤의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내일이 안보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그는 충격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세의 앞으로의 인생을 위하여 다행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이 경험을 해야 합니다.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그동안 가졌던 교만과 자만과 기고만장함을 다 부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가능은 없다고 외치던 건방진 마음이 다 부서지고 수정되었습니다. 실패는 때로 이런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렇게 모세는 비로소 광야생활 40년 만에 무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모세는 호렙산에 가게 됩니다. 그는 기도하러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분명 나무가 불에 타기는 타는데 실제로 타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모세는 그 불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모세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 나약한 모습, 왜소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외적인 초라함도 보았겠지만 자신의 내면의 초라한 모습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이 참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알지도 못하고 날뛰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순간 할 말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한없이 왜소해지는 모습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모세가 불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듯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해지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의 교만을 접게 됩니다. 그 불빛은 모세로 하여금 자신도 몰랐던 교만하던 모습과 날뛰던 모습을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할 말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이 지점에서 성숙하게 됩니다. 눈을 뜨게 되고 겸손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번 쯤 이 광야에 가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추구하던 길이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가야할 새 길을 되찾았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 길을 되찾았습니다. 베드로는 모닥불 앞에서 자신의 빈약한 신앙과 신학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새 길을 되찾았습니다.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빛 아래에서 불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동안 된 줄 알고 큰소리 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재수 없이 살인을 해서 그 좋은 환경과 기득권을 잃게 되었다고 불평하고 분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는 불찰과 부주의로 40년의 평안한 모든 것을 잃게 된 자신을 원망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불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불찰이 아니고 재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자만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 된 줄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 불빛 아래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할 말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때 불꽃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신을 벗으라. 이제 너는 애굽으로 가서 고난 받고 있는 내 백성을 이끌어내라.” 모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는 나를 부끄럽게만 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새 소명이 주어지는 자리였습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얍복강에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도 모닥불 앞에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에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도 그 자리에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너는 이제 애굽으로 가서 고난받는 내 백성을 구해내라.” 그런데 그 명령을 받고 모세가 한말이 무엇입니까? 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 앞에 가서 내 백성을 구해내리이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염려 마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먼저 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누구관대 애굽에 가리이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모세가 이제 철이 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남은 3기 인생 40년을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향하게 하는 일에 봉헌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역설의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나는 작아진다

 

노래 중에 애모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 중에는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말 존경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그 앞에 서면 작아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별 볼일 없는 그대라면 그 앞에서 선들 왜 내가 작아지겠습니까? 오히려 내가 더 커 보일 것입니다. 오늘 대통령에게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대통령이 여자이기 때문에 무시하는 마음이 그 기초에 깔려 있어서 나오는 말 같이 들립니다. 이런 말들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줄지 참 걱정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이들이 위아래 없이 부모에게나 스승에게는 어른들에게나 막말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막말하는 정치인들은 내가 대통령에게 막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기 과시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참 지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어설픈 지식인은 용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용을 부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설픈 신학자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무신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1960년대 미국의 윌리엄 해밀턴이라는 신학자가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10대 때 친구 둘이 공사장에서 놀다가 폭발사고로 한 친구가 죽는 사고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친구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살아남은 친구는 불신자였습니다. 더구나 살아남은 친구는 상처 하나 없이 말짱했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셨다면 어찌 그 믿는 친구만 죽게 내버려두셨는가? 그래서 그는 결국 신은 죽었다는 괴변을 말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깊은 신앙인이라면 그리고 깊은 지식을 가진 신학자라면 그런 표현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설픈 사람이 막말을 하고 어설픈 학자들이 말이 많은 법입니다.

 

어느 농부가 밭에 나갔습니다. 그는 일을 하닥 담쟁이를 타고 올라가는 가느다란 호박 넝쿨에서 큰 호박이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는 호박 넝쿨은 그 큰 호박을 붙잡고 있느라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안쓰러울 정도였습니다. 뭔가 맞지 않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하늘을 쳐다보며 한마디를 했습니다. “하나님, 세상을 당신이 다 창조했다면서 이 호박을 만들 때 생각을 하고 만들었소, 생각 없이 만들었소? 줄기는 가늘게 만들어 놓고 거기에다 저렇게 큰 열매가 맺히게 하면 어쩌자는 거요?” 그리고 끌끌 혀를 찼습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농부는 마당에 있는 호두나무 그늘 밑에 멍석을 깔고 눕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위를 쳐다보니까 이 호두나무도 뭔가 맞지 않는 그림이었습니다. 호두나무는 커다란데 열매는 아주 작았습니다. 꼭 호박 넝쿨과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것도 당신이 만들었겠지. 이것 만들 때 생각을 좀 하고 만드셨소? 호박과는 정반대로 나무는 큰데 열매가 이게 뭐요?” 하고 또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그는 호두나무 아래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그때 뭔가 이마를 때렸습니다. 보니까 호두나무 위에서 호두가 떨어져 농부의 이마를 때린 것입니다.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조금 후에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호도가 작았으니 망정이지 떨어져 이마를 때린 그 호두 알이 호박만 했더라면 그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농부가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하나님, 참 잘 하셨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설픈 지식인이 용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든 하는 것입니다. 무신론을 주장하기도 하고 신은 죽었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진정 깊은 사람은 이런 말이나 글이나 언행을 하지 않습니다. 어설픈 사람들이나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그 앞에서 나는 작아지는 법입니다.

 

모세가 그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형편없는 몰골을 보게 되었습니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말이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내 백성을 인도해 내리이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불꽃을 보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버림받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 불꽃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참 좋았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던 그 자리, 그 자리가 유다가 보았어야 할 불꽃의 자리입니다.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는 그 말씀은 유다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의 은밀한 심장 폐부까지 찔러 보고 계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지금 나의 일을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또 그 말은 그 불빛으로 나의 모든 모습을 속 깊은 곳까지 다 보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유다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고백했어야 합니다.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불빛 아래에서도 자신의 전략이 실패한 것만 보았습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과 폐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끝내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버림받고 자살해서 죽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내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이치는 내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강해져야 내가 이길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강해지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면 다 이기고 성공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내가 약해져야 강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고후 11:30) 성경의 이론은 정반대입니다. 내가 약해져야 그때부터 내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벽을 향하여 통곡하던 히스기야의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어느 장애인은 “나는 내가 장애인임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능력 없음을 자랑하고 싶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내가 강할 때에 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도 사라집니다. 내가 배부를 때 그리고 아무 아쉬움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조금만 잘 나가면 하나님을 버리게 되고 생각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을 찾게 됩니까? 바로 내가 한없이 약해질 때, 배가 고플 때, 그리고 내가 실존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느끼게 되고 찾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작아져야 한다는 말이고 약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고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는 신부들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강해지면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그 앞에 약해져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참회를 하는 것이고 전적으로 의지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가 강하거나 큰 체하면 절대로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강하다고 느끼고 스스로 자만할 때에는 그의 근처에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광야 40년을 거치는 동안 모세는 비로소 작아졌습니다. 낮아지고 작아지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답이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리이까”였습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모세가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깊이 아시길 바랍니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깊이 알아야 내가 작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해야 내가 그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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