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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826 / 출 22:1-15 / 배상에 관한 법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8.30|조회수1,211 목록 댓글 0

배상에 관한 법

출 22:1-15

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2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4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7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 집에서 도둑을 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8 도둑이 잡히지 아니하면 그 집 주인이 재판장 앞에 가서 자기가 그 이웃의 물품에 손 댄 여부의 조사를 받을 것이며

9 어떤 잃은 물건 즉 소나 나귀나 양이나 의복이나 또는 다른 잃은 물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이것이 그것이라 하면 양편이 재판장 앞에 나아갈 것이요 재판장이 죄 있다고 하는 자가 그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10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11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12 만일 자기에게서 도둑 맞았으면 그 임자에게 배상할 것이며

13 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언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14 만일 이웃에게 빌려온 것이 그 임자가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 상하거나 죽으면 반드시 배상하려니와

15 그 임자가 그것과 함께 있었으면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만일 세 낸 것이면 세로 족하니라

출 22:1-15 / [가축을 도둑질한 경우] 어떤 사람이 남의 집 소나 양을 훔쳐다가 잡아먹었거나 팔았을 경우에 소는 한 마리에 다섯 마리로 배상해 주어야 하고 양은 한 마리에 네 마리로 배상해 주어야 한다. 20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도둑을 때려 죽였으면 그를 죽인 죄가 없다. 3) 하지만 날이 밝은 뒤에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죽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도둑질한 것은 반드시 다 갚아야만 한다. 도둑질한 자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 자기 몸을 팔아서라도 갚아야 한다. 4) 만일 훔친 것이 소나 나귀나 양이거나간에 산 채로 그의 집에서 발견되는 경우에는 그 갑절로 갚아야 한다. 5) [농작물에 피해를 입힌 경우] 누구든지 가축을 놓아 기르다가 남의 남새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 뜯어먹게 하였을 경우에 가축 주인은 자기 남새밭에서 나는 것 중 가장 좋은 것, 자기 포도원에서 나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으로 그 손해를 배상해 주어야 한다. 6) 누구든지 밭에 불을 놓다가 불이 번져서 남의 밭에 있는 곡식이나 낟가리를 태웠을 경우에 불을 놓은 사람은 그것을 모두 배상해야 한다. 7) [맡긴 것을 잃어버렸을 경우] 돈이나 물건을 이웃에게 맡겨 두었는데 그 이웃집에 도둑이 들어 그 돈이나 물건을 잃어버렸을 경우에 도둑이 잡히면 주인은 그에게서 갑절로 배상을 받을 수 있다. 8) 하지만 도둑이 잡히지 않았을 경우에는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가서 자기가 그 돈이나 물건에 손댄 일이 없는지 조사를 받아야한다. 9) 소나 나귀나 양이나 옷가지나 어떤 것이든 잃어버린 물건에 대하여 소유권 시비가 생기면 그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거라. 그리고 하나님이 죄가 있다고 판정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갑절로 물어주어야 한다. 10) 어떤 사람이 소나 나귀나 양이나간에 어떤 가축을 이웃에게 맡겨 지켜 달라고 하였는데 그 가축이 죽었거나 사지가 부러졌거나 보는 사람이 없는 사이에 끌려갔을 경우에 11) 가축을 맡았던 사람은 가축을 맡긴 사람과 이웃 앞에서 맡은 가축에 손을 댄 일이 없다고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야 한다. 그러면 가축 주인은 그 이웃의 말을 믿어야하며 그 이웃은 물어주지 않아도 된다. 12) 하지만 도둑 맞은 것이 확실하면 가축을 맡았던 이웃이 가축 임자에게 물어주어야 한다. 13) 만일 가축이 맹수에게 찢겨 죽었으면 그 주인에게 증거물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 찢겨 죽은 가축에 대해서는 물어 줄 필요가 없다. 14) 이웃에게 가축을 빌려 왔는데 그 가축주인이 없는 사이에 사지가 부러졌거나 죽었을 경우에는 빌려 온 사람이 물어주어야 한다. 15) 하지만 가축 주인이 같이 있었다면 물어줄 필요가 없다. 그것이 세를 내 온 가축이라면 이미 셋돈을 물었으므로 배상할 책임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생하는 도둑(1-4), 곡식 피해(5-6), 보관 사고(7-15)와 관련한 율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도둑질에 관한 법(1-4)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다가 잡히면, 소는 다섯 배, 양은 네 배로 배상합니다(1). 만일 도둑이 훔친 짐승을 산 채로 가지고 있다면 두 배로 배상해야 합니다(4). 만일 도둑이 배상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자기 몸을 노예로 팔아서라도 배상하도록 명령합니다(3). 그만큼 율법은 정당한 노동이 아닌 도둑질을 통한 이익 추구를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도둑이라도 생명에 대해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밤에 도둑질하다 집 주인에게 죽임을 당할 경우, 주인은 정당방어로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지만, 날이 밝은 상황에서 도둑질하다가 걸린 도둑을 죽이면 과잉방어로 인정되어 주인에게는 살인죄가 적용됩니다.

 

곡식 피해에 관한 법(5-6) 자신의 가축에 의해서나 예측할 수 없는 불로 타인의 곡식에 피해를 입혔을 경우 책임자는 반드시 배상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율법은 가해자의 의도와 부주의, 또는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 구분해서 책임의 무게를 달리합니다.

 

보관 사고에 관한 법(7-15) 율법은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바른 판단을 위한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남의 물건을 보관하던 사람이 그 물건을 도둑맞았을 때, 도둑이 잡힐 경우에는 그 도둑이 두 배로 배상해야 하지만 도둑이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보관하던 사람이 법정에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합니다(7-8). 한 물건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경우 재판을 받아야 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피해자에게 두 배로 배상해야 합니다. 보관한 가축에 이상이 생기면 세 가지 경우에 따라 대응이 달라집니다. 첫째, 피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발생했다면 보관자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이 경우 보관자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청하고, 신적 정의를 따르겠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맹세하여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해야 합니다. 둘째, 피해가 도둑에 의한 것이라면, 보관자는 맡긴 사람에게 배상해야 합니다. 셋째, 가축이 맹수에게 피해를 입었다면, 주인에게 증거를 제시하고 배상은 하지 않습니다. 빌려온 짐승이 죽거나 다쳤을 때, 빌려준 사람이 함께 하지 않았을 때 피해를 입었다면 빌려온 사람이 배상하지만 함께 할 때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무죄합니다. 대신 빌려온 삯만 지불하면 됩니다.

 

적용: 동일한 사건을 해석하는데 다양한 조건을 고려하는 것은 그만큼 판단이 신중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당신의 판단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먹지 말라 한 선악과를 먹은 자로 하여금 하나님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소산물로써 살아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본인 땀을 흘리지 않고 타인이 힘써 얻은 재산을 쉽게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은 그 자체가 범죄입니다.

 

< 설 교 >

재산 중에 관한 법

출 22:1-15 / 피영민 목사

서론

 

하나님의 법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법대를 졸업한 사람들에게는 설령 법조항들을 다 잊어버려도 사건들을 볼 때 법적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힘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것을 ‘Legal mind’(법적 사고)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을 공부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에 따른 ‘Legal mind’(법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성도들의 삶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적절한 논리를 가지고 자기주장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몰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여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의 돈을 떼먹고도 “예수님도 용서하라고 하셨으니까 날 좀 용서를 해달라”고 말을 합니다. ‘법적 사고’가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선 떼먹은 돈을 돌려주고 나서 용서를 이야기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한 대 때리고 “예수님이 용서하라고 하셨으니 날 용서하라”고 이야기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법적 사고’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불러 시내 산꼭대기에서 자세한 법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표면적으로는 소, 양, 나귀와 같은 짐승에 대한 말씀이지만, 사실은 짐승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재산권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의나 죄로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 경우들을 자세히 살펴볼 때 ‘법적 사고’를 훈련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계명을 일상생활 가운데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공산주의국가는 물질의 소유주가 국가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개인이 소유주라고 말씀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남의 재산을 탈취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에 국가의 것을 국민이 좀 가져갔기로서니 무엇이 죄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것을 빼앗아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든지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남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는 자가 많아지게 됩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지배를 받게 되면 남에게 공갈을 치거나 빼앗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사유재산은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미국처럼 연방제 국가를 이루어 두 개의 주를 가진 연방 국가로 나아가 적당한 시기에 통일을 이루자는 이론입니다. 딱히 반대할 명분도 없이 그럴 듯한 이론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정권이 장악하고 있고, 남한도 좌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될 때 연방 주를 합쳐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낮은 단계 연방제’라고 쓰여 있는 것은 ‘공산주의 통일제’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사유재산을 보호받을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국가가 운영되는 체제도 하나님의 말씀에 상반되는 운영체제가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회는 보호받을 수 없게 되고, 개인의 사유권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공산주의를 절대적으로 반대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는 성경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하시고 도적질을 금하는 분이십니다. 성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이웃의 재산을 존중해야 하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이웃의 생명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보호해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Ⅰ. 단순 절도사건(1~4절)

 

하나님은 단순 절도를 설명하시기 위해 소, 양, 나귀를 언급하셨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소, 양, 나귀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유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재산의 종류도 많아졌기 때문에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1절에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적이 소나 양을 훔쳤는데, 그것을 잡았거나 팔아서 현재 없다면 소는 다섯 배로, 양은 네 배로 물어내야 한다는 법입니다. 소는 왜 더 내야 할까요? 그것은 소가 양보다 효용가치가 놓기 때문입니다. 소는 고기를 먹을 뿐 아니라 농사를 짓고, 짐을 나르는데도 쓰이는 짐승이기 때문에 양보다 더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적이 소나 양을 훔쳐서 가지고 있는 경우, 도적이 잡히면 “이는 원래 당신의 것이니 도로 가져가라”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도적이 가지고 있는 경우 갑절을 배상해야 합니다. 훔친 것을 돌려줘야 할 뿐만 아니라 두 배로 배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2~3절에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에 도적이 들어오면 주인이 그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밤에 들어오는 도적은 칼을 든 강도인지, 단순 절도범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밤에 들어오는 도적은 재물만 원하는 것인지 사람도 죽이려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죽여도 정당방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낮에 도적이 들어왔을 경우, 주인이 그를 죽이면 죄가 됩니다. 낮에 들어오는 도적은 손에 칼이 있는지 없는지 보일 뿐만 아니라 설령 도적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생명은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일단 재물만 훔치려는 것이었지 사람을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판단하였음에도 그를 죽이면 과잉방위가 되어 죽인 사람에게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대단히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밤에 들어오는 도적과 낮에 들어오는 도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 후반에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적이 장물을 팔았거나 다 먹어버린 경우, 배상할 돈이 없을 때 그는 몸을 팔아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몸을 팔고 받은 돈으로 배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적은 반드시 재물로 배상을 해야 한다는 명확한 원리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 절도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도적이 국가에 배상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입은 개인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남을 가난하게 만들어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 반대가 되는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하면 남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훔친 것으로 자기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대로 만들어 주십니다. 도적은 더 가난하게 만들고 도적질을 당한 사람은 부요케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뇌물도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정권을 잡으면 뇌물을 받아 부자가 되고, 정권이 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데,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뇌물을 받은 것은 모두 갑절로 물어내야 하고 뇌물을 준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하며 감옥에 가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나라에 도적이나 뇌물이 사라지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 같아도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 같아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반찬을 만들면 이웃에게 나눠줄 줄 알고, 어려운 개척교회를 돕기도 하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적질은 매우 손해를 보는 장사입니다. 하나를 얻으면 다섯 배를 물어야 하는 것인데 이 얼마나 밑지는 장사입니까? 도적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단 시간 내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장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후손들의 인생을 통해 훔친 것의 다섯 배로 반드시 물게 하십니다. 결국 도적이 손해를 보는 일입니다.

 

Ⅱ. 게으르고 부주의하여 남의 재산에 피해를 준 경우(5~6절)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나옵니다. 첫째는 짐승을 방목했는데, 그 짐승이 남의 밭에 들어가서 경작해 놓은 곡식을 뜯어 먹고 온 경우입니다. 짐승의 주인이 “네 발 달린 짐승이 한 짓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주인이 남의 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배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물어야 할까요? 피해를 입은 분량을 똑같이 물어주되 자기 밭에서 거둔 최상품, 극상품으로 물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량을 똑같이 하되 피해를 당한 이웃에게 물질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정신적인 피해까지 배상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6절에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미쳐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전원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밭의 불이 번져서 밭의 경계가 되는 가시나무도 태우고 이웃의 밭에 있는 농작물까지 다 태워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을 붙인 사람이 반드시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이 남의 밭으로 번져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주인이 게으르고 부주의하여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남의 밭에 피해를 줄 의도가 없었다 할지라도 면책되지 않습니다. 짐승을 방목하는 사람이나 밭을 관리하는 사람은 최선의 주의를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의 짐승이나 재물이나 명예까지도 다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당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니 나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입니다. 인터넷 악성 댓글로 상대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러세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면 개인적으로는 용서해 줄 수 있지만, 감옥은 가도록 해야 합니다. 국가가 그 사람에게 확실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을 안 하는 것입니다. 남의 명예를 함부로 침해했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입니다. 개인적인 용서와 국가적인 차원의 용서는 다른 것임을 알려줘야 합니다.

 

Ⅲ. 위탁받은 물건이나 짐승이 피해를 본 경우(7~13절)

 

출애굽기 22장 7~13절까지는 이웃이 잠시 맡겨놓은 물건에 피해가 생긴 경우입니다. 위탁자가 있고, 위탁받은 사람이 있고, 위탁 물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탁받은 사람이 위탁받은 물건을 봉적(逢賊), 즉 도적을 맞은 경우 도적이 잡히면 그 도적은 갑절로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잡지 못한 경우에는 위탁받은 사람이 ‘나는 이 물건에 손대지 않았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합니다. 맹세를 한 경우 위탁자는 그 말을 믿고 배상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는 언제일까요? 아무런 증거와 목격자도 없는 경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믿어줘야 합니다. 거짓 맹세를 했다가는 하나님의 징벌이 즉각적으로 나타나기에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위탁받은 사람이 분명히 그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의 집에서 똑같은 물건을 보았다면 위탁자는 그 증거를 가지고 위탁받은 사람에게 도적맞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탁자가 재판장에게 고소를 하고 두 재판장이 경우를 다 살펴보고 판결을 내려서 위탁자가 승소하게 되면 맡긴 물건이나 짐승의 두 배를 받는 것이고, 패소하게 되면 억울한 사람을 무고하게 고소했기에 두 배를 물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도적질 한 것도 나쁜 짓이고, 도적질을 하지 않았지만 했다고 주장한 것도 똑같이 나쁜 죄라는 것입니다. 형량이 같습니다. 도적질도 나쁘거니와 남을 근거 없이 의심하고 비난하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누군가로부터 짐승을 위탁받았는데 도적을 당해 짐승이 죽었거나 맹수가 물어간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적이 왔으면 짐승을 맡은 사람은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도적이 와서 도적질을 하는데도 가만히 있으면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적과 짐승을 위탁받은 사람 사이에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갔을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적이 온 경우, 소리를 질러야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수가 와서 짐승을 찢었다면 어느 누가 맹수와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경우에는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결국 이웃의 재물에 대해 그것이 위탁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내 것처럼 간수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남의 생명뿐만 아니라 남의 재물도 귀중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사기 왕국입니다. 사기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대뜸 이자를 많이 주겠다고 며칠 동안만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100% 사기입니다. 절대로 빌려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사기꾼이 많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재물에 대해서도 존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기치고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다섯 배를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가난해지고 도적이나 사기를 당한 사람은 부유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Ⅳ. 임대한 물건이나 짐승이 피해를 본 경우(14~15절)

 

14~15절은 임대한 물건이나 짐승이 상하거나 죽은 경우에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돈을 주고 빌려온 경우에는 임대한 사람에게 책임이 없습니다. 돈을 주고 빌려온 것은 잃어버릴 것에 대한 보험금을 낸 것이기에 책임이 없지만, 돈을 내지 않고 빌려온 것은 주인이 없을 때 피해를 입은 부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동차도 빌릴 때는 렌트카 회사에 가서 돈을 내고 빌리는 것이 좋습니다. 돈을 내고 빌려온 것은 보험금까지 낸 것이기에 렌트카 회사에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복잡한 여러 가지 경우들을 설명해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도 이런 법을 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가 없이 사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런 법들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아 범죄하게 되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부터 인류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이 죄를 막기 위해서 법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복잡한 법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난 이후에 인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끼리도 서로 손해를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에 들어온 죄 때문에 법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법은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여러분, 간통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간통은 분명히 죄임에도 불구하고 폐지시켰습니다.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상황이나 법관들의 성향이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멀어지고 인본주의 화되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사기 왕국을 넘어 제비 왕국이 될 지도 모릅니다. 간통도 처벌할 수 없는 사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하면 인간이 ‘성적인 자기 결정권’을 갖는다는 논리 때문입니다. 성적인 상대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은 성윤리의 붕괴입니다. 성경에 간통은 민사사건이 아니라 형사사건입니다. 간통을 저지르면 이혼을 당하고 벌금도 많이 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간통을 형사사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절대로 벌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가 간통을 저질렀다면 그것이 벌금으로 해결이 됩니까? 돈으로 처리가 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처녀 총각이 연애해서 임신을 한 경우는 책임을 지면 됩니다. 그러나 이미 결혼을 해서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있는 사람이 간통을 저지르는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경의 형벌은 사형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성적인 자기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것이 간통죄를 폐지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법이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법은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나 법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법이 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역할을 하지만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줄 수는 없습니다. 간통죄가 있다고 해서 간통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법이 그것을 막아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19장에 세리장 삭개오에 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성에 살고 있었고, 유대인이었지만 로마의 종이 되어 동족의 세금을 무차별 뜯어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커져 세리장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동족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을는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리고 성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죄인이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애들이 올라가면 용감하다고 하겠지만, 어른이 올라가니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5).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오겠다고 하시니 그가 기쁘게 영접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대접하는 삭개오에게 위대한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고 오늘 이 사람이 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삭개오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눅 19:8).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남의 것을 빼앗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에 대한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재산의 절반을 내어 놓고, 빼앗은 것의 네 배를 물어주겠다고 할 정도로 의롭게 살 능력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법은 죄와 의를 분명히 보여주지만 의롭게 살 능력을 공급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용한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살아갈 능력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살고 싶다면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 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길 이외에는 사람이 의인이 될 수도 없고 의롭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

박덕기 목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시내 산 언약에서 도덕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 외에,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시민법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21장에 이어 계속되는 시민법 중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에 보면 “사람이 소난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소 한 마리를 도적하였을 경우 소 다섯 마리를 갚도록 했습니다. 즉 일대 오의 배상 원칙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도적질 한 짐승이 양인 경우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일대 일 배상 원칙의 ‘동해 보복법의’의 기준에서 볼 때는 상당히 무겁고 혹독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거운 배상 원칙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훔치는 도적질을 하나님께서는 큰 죄로 보시며 엄중히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적질 한 자에게 자기 몸을 팔아서라도 배상을 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자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웃의 재산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리고 불로 소득을 노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사람은 항상 정당한 대가를 치른 노동을 통해 재물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위를 살펴보면 자신은 땀 흘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땀 흘려 이루어 놓은 것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하거나 강탈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을 속여 재물을 가로채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땀 흘려서 일하고 물질을 모을 때, 자신은 부동산 투기나 고리 대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착취하는 것 또한 도적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박이나 불법적인 사업을 통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쉽고 편하게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성실히 일하고 땀 흘린 대가로 물질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땀 흘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을 뺏는 사람에게 몇 갑절로 배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땀 흘리지 않고 모은 재물은 금방 바람과 같이 사라질 뿐 아니라, 자신을 불행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을 때, 언젠가는 재물도 사라지고 자신에게도 홀연히 멸망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 보스턴에 유명한 보석털이 전문범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서 베리(Arthur Berry)였습니다. 그는 주로 상류층의 보석을 훔쳤습니다. 머리가 좋은 도둑은 한 번도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범인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서 베리는 평소 친분이 있는 어느 가정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발각되었습니다. 결국 경찰이 쏜 세 발의 총을 맞고 창문에서 떨어진 그는 20년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출소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순(耳順), 인생의 황혼기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보석을 훔쳤습니까?” 백발의 아서 베리는 눈물을 떨구며 말했습니다. “내가 훔친 것은 아서 베리였습니다. 나는 손재주가 좋아 기계를 잘 다뤘습니다. 피아노 연주도 잘했습니다. 언변이 좋아 친구가 많았고, 몸이 민첩해 운동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재능을 도둑질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내가 훔친 것은 나 자신이었습니다." 성경은 도적질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5절을 보면 사람이 짐승을 놓아먹이다가 그 짐승이 남의 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게 되면, 자신의 밭과 포도원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밭을 일구기 위해 불을 놓았는데, 그 불이 다른 사람의 곡식이나 밭을 태운 경우 반드시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이 두 경우 모두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체적 형벌은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타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책임을 지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든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않고 분명하게 책임을 져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어떤 일을 할 때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 놓고, 막상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행동이 다 좋은 결과만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느냐 지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양과 소를 살려 전리품으로 취한 사울 왕이, 이를 책망하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잘못을 인정치 않고 변명을 늘어놓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사실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 줍니다.

7-9절에 보면 물건을 맡겼던 자가 물건을 보관했던 자의 재산 중에서 일부를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경우에 대한 해결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이 함께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을 받게 되는데, 만일 정말 물건을 맡았던 자가 물건을 착복한 경우는 도적질한 것이기 때문에, 규례에 따라 두 배의 배상을 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물건을 맡았던 자의 소유가 확실한 경우는, 물건을 맡긴 자가 두 배의 배상을 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이웃에 대해 무고한 경우도 도적질한 것과 같은 중한 벌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해 무고하는 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죄 없는 이웃을 무고하는 것은 도적질 하는 것과 같은 큰 죄악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적질은 큰 죄로 알면서도, 이웃에 대해 무고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일반적 현상입니다. 그리하여 이웃에 대해 전혀 밝혀지지 않은 헛소문이나 거짓 소문을 퍼뜨려, 이웃으로 하여금 억울한 누명을 쓰게 하고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경우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같은 성도들을 시기하고 모함하여 그 성도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림으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죄가 도적질하는 것과 같은 벌을 받을 만큼 심각한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해 또는 성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대를 모함할 수 있다면, 그 즉시 멈추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의 말과 행동은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 또한 하나님의 엄중한 벌을 받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진정 여러분은 모든 말과 행동에 주의하고 이웃을 모함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엄중한 징계를 피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11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소나 양이나 짐승을 맡겨 지키게 하다가, 죽거나 상하였을 때 또는 도둑을 맞았을 때 이를 본 사람이 없으면, 짐승을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대지 않았음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주인은 이를 믿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즉 짐승의 주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이웃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 짐승을 맡은 자가 나쁜 마음을 품고 거짓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의심이 가도 절대 의심을 제기하여 재판을 청구할 수 없게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것은 바로 상호간의 신뢰입니다. 만일 맹세한 이웃에 대해 의심이 간다고 의문을 제기하고 재판을 청구할 수 있게 했다면, 그런 경우를 염려해서 다음부터는 이웃이 급한 경우에 짐승을 돌보는 것을 부탁할지라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이웃간에 불신이 생기고 서로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 공동체는 서로를 믿을 수도 안심하고 살 수도 없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결백을 주장하는 이웃의 맹세에 대해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회가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결코 물질적으로 풍요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과학이 발전하여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십시오. 밤에는 물론이고 낮에도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살아갑니다. 밤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경계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모두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그런 풍조 속에서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두고 어떻게 물질은 비록 부족했지만 이웃끼리 서로 믿고 문을 열어 놓고 살던 옛날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들이 먼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불신과 의심의 마음을 버리도록 합시다. 이웃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집시다. 점점 신뢰가 사라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솔선하여 가정과 교회와 이웃 안에서 남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서로 믿고 사는 아름다운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합시다.

12-13절을 보면 이웃이 맡긴 짐승을 자기 집에서 도둑맞았을 때는, 맡은 사람이 임자에게 배상하게 하고, 만일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에게 찢겼을 경우에는, 그 찢긴 것을 갖고 와서 증거 하면 배상의 책임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이웃의 짐승을 맡은 자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집에서 도둑을 당한 것은, 맡은 자가 최선을 다하여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였으므로 배상의 책임을 지게 하셨습니다. 반면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에게 찢긴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막기 힘든 어쩔 수 없는 일로써, 맡은 자는 그 찢겨진 것을 가지고 옴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증거하고, 또 그로 인해 배상의 책임을 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자신의 소유가 아니지만, 이웃의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자신이 맡은 임무를 다하고 돌보는 것은, 공동체를 사는 사람들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한편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도 이웃의 것을 맡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속한 직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물건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고, 건물을 짓는 사람은 자신의 이웃이 거주할 곳이기에 최선을 다해서 안전하게 지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이웃이 손해를 보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이웃의 손해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일이냐 남의 일이냐에 따라 그 일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것이 누구의 일이든 간에 맡은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이웃에게서 어떤 것을 빌려왔는데, 임자가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 상하거나 죽으면 반드시 배상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규례 또한 단순히 타인에게 끼친 손해에 대한 배상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이웃에게 어떤 것을 빌려 왔다는 것은 돈을 주고 빌려 온 것이 아니라, 이웃의 호의에 의해 무료로 빌려 온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임자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은 임자가 자신의 물건이나 짐승을 상대방을 믿고 완전히 맡긴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임자는 전적인 호의로 상대방을 믿고, 자신의 소유를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빌려 준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을 빌려 간 사람이 그것을 상하게 하거나 죽게 하고서도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전히 호의로 그것을 빌려 준 사람은 상대방에게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까지 불신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도 다시는 도와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이웃의 호의에 대해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 사회에는 커다란 불신이 생기고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모습들이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가 바르게 제대로 움직여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보답하느냐 또한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처럼 삭막한 사회가 된 원인 중의 하나는 감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이 베푸는 친절과 호의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가 호의를 베풀기를 꺼려하고, 결국 이로 인해 서로 사랑을 나누는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삭막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호의와 친절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웃의 친절과 호의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것이야말로, 서로 신뢰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회를 만드는 출발점입니다. 진정 여러분은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이웃의 친절과 호의에 먼저 감사를 표하고 보답함으로, 서로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주역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시민법 중 도적에 관한 배상법이나 무고에 관한 규정 등이 모두 정직과 진실에 관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절도 잘하기로 유명한 남자와, 소매치기 잘하는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산모가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기가 손을 꼭 움켜쥐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손을 펴보니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 간호원의 반지를 훔쳐 쥐고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꾸민 이야기이지만 세상이 얼마나 험한가를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사기, 횡령, 착복, 도적질이 난무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정직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시 15:1-2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생활과 대인 관계에서도 정직해야 하지만, 신앙생활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전병욱 목사는 ‘식어진 가슴에 불을’이란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십일조란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똑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많은 생명실과를 만들어 놓고 난 뒤에 그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하나 두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은 다 먹되 선악과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손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선악과로 주신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에 손을 대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물질의 십일조에 손대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이고, 십일조 생활을 안 하는 그 자체는 하나님이 나의 왕이요 나의 주인이심을 부인하는 행위가 됩니다.>

<“너희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받을 것이니라'가 아니라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제까지 5년 동안 십일조 생활을 안 했는데 이제 와서 십일조 생활을 하려고 하면 과거 5년 동안의 모든 것을 갚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갚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갚지 못한다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이미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이 축복의 말씀을 뒤집어 놓으면 저주의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함으로 말미암아 황충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황충은 곡식 가운데 날아다니는 누런 메뚜기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은 것만큼 황충이 와서 재산을 다 갉아 먹습니다.

그리고 토지의 소산이 없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아무리 뿌려도 뿌린 만큼 다 거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사람은 도둑놈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것을 통해서 거두어 가십니다. 과실이 기한 전에 다 떨어집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중간에 다 망칩니다.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외침입니다.>

유명한 설교자였던 스펄젼은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고 내가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요,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도 도둑질하는 것이요, 주일 지키지 않는 것은 주일 도둑놈이요, 예배시간에 예배드리지 않는 것은 예배 도둑놈이요,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도둑놈이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손해배상에 관한 법

출 22:1-15 / 임덕순 목사

사람들은 하나님은 기독교인의 신이고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경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가장 바른 관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세상이 가장 바르게 돌아가도록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이 교회 잘 다닌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 잘 다니는 것은 기본이고, 세상에서 이웃가운데서 살아가면서 철저하게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해서 이 세상이 공의롭고, 정겹고, 맛나고, 행복하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만이 아닙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과 영생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배우는 하나님의 법은 성도들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듣고 순종해야 하는 법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 기독교인에게만 해당한 말씀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체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각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하며,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는 그것이 장차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를 분별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책임 있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답게 살려면 그래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도 그들은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했습니다. 오늘성도들이 이웃과 함께 살면서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행동해서 이웃에게 폐를 끼치고 욕을 먹는 다면, 신자는 고사하고 성숙한 시민도 못됩니다.

사람이 이웃 속에서 함께 살다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발생할 수 있는 사례별로 하나하나 법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본문의 손해배상에 관한 법은 21장 33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나 세밀하고 공평하고 선한 법인지 살펴봅시다.

 

첫째, 과실에 대한 책임배상에 관한 법입니다. (21:33-34)

예를 들어 한사람이 구덩이를 파서 사용했을 경우, 그것을 사용한 후 뚜껑을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나 짐승이 빠진다면 구덩이의 주인이 구덩이를 잘 관리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므로 죽은 짐승의 임자에게 짐승 값을 쳐주고 죽은 짐승은 구덩이의 주인이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거기 빠져서 다쳤을 경우에는 완전히 치료 될 때까지 치료비를 전담할 것이며 사업이나 금전에 손해를 끼쳤을 경우에는 사업과 금전을 보상하고, 정신적 가정적인 손해까지도 보상하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공평하고 확실하지요?

 

둘째, 짐승들끼리 싸워서 일어난 문제에 대한 판결법입니다. (21:35-36)

두 집의 소가 서로 싸워서 하나가 죽었을 경우에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아주 공정한 판단을 하십니다. 산소는 팔아서 반분하고 죽은 것도 반분하여 서로 나누어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다른 소를 받아 죽인 소가 본래 사나워서 받는 버릇이 있었는데도 주인이 단속하지 않아서 싸움이 벌어져 남의 집 소를 죽였을 경우, 산소를 죽은 소 임자에게 주고, 죽은 소는 받은 소의 임자가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분명하고 현명한 판단인지 모릅니다. 여기에 누가 토를 달고 억울하다고 하겠습니까?

 

셋째, 사람이 남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을 경우에 대한 법입니다.

사람이 고의적으로 남의 재산에 손을 대었다면, 그것은 도둑질입니다. 그 벌은 이러합니다. “만약 남의 소를 훔쳐갔다가 잡혔다면 한 마리를 훔쳐갔으면 다섯 마리로 갚으라. 양 한 마리를 훔쳐갔다면 네 마리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여기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훔친 물건이 큰 것이면 배상의 규모도 커야 하고, 작은 물건이면 배상의 규모도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큰 죄와 작은 죄가 형량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유괴하여 팔거나 살인했을 경우는 어떨까요? 지난 주일에 말씀했지만 사람의 생명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자기의 생명 외에 다른 것으로는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괴한 아이가 살아있더라도 유괴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것을 탐하는 사람이나 그 탐심이 행동화 되어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손해를 보는 지를 보여주십니다. 모두가 자기의 재산처럼 남의 재산을 지켜주는 사회가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보이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이 분명한 뜻을 받들어 남의 물건을 내 물건처럼 지켜주는 사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8계명에 도적질 하지 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도적질을 하면, 피차에 손해를 봅니다. 신용이 무너진 사회가 온다면 누가 유익할까요? 내가 아무리 땀을 흘려 모아놓아도 누가 언제 가져갈지 모르는 사회가 된다면, 누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려고 할 것이며, 누가 내일을 기약하고 열심히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 사회가 되면 모두가 다 망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남의 소유권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누구라도 남의 소유권을 침해하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넷째, 정당방위와 정신적 보상에 관한 법입니다.

도둑을 방비하는 법에 대하여서도 현명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만일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도둑을 물리치기 위해서 싸웠는데 그때 잘못해서 도둑이 맞아 죽었다고 합시다. 그때가 밤이라면 집주인이 도둑을 막다가 도둑이 죽었을지라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정당방위라는 것이 이때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해가 돋은 뒤라면, 낮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강도를 막다가 강도가 죽었을지라도, 그것은 살인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대낮이기 때문에 그가 누군지를 다 알 수가 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소리를 질러 쫓아낼 수도 있는 형편인데 그를 쳐 죽였으니 이는 과잉방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낮에 들어온 도둑을 쳐 죽이면 그것은 살인죄로 주인이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탁월한 법입니다. 과잉방어도 이 때 하나님이 주신 법입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 하다가 붙잡힌 사람은, 반드시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했는데, 훔친 것을 팔아먹거나 잡아먹거나 하여 없어진 경우에는 훔친 것의 4.5배를 배상해야 하고, 만일 도적질한 물건이 남아있을경우, 즉 훔쳐간 양이 도둑의 손에 아직 살아있을 경우는 그것을 돌려주고 두 배를 더 갚아야 했습니다. 이유는 양의 주인이 양은 비록 돌려받았지만 주인이 입은 정신적인 피해를 보상 하라는 것입니다. 정신적 피해보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요즈음에 실시되기 시작하였지만, 하나님은 이때 벌써 명문화 하여 주셨습니다.

 

도둑이 도둑질한 것을 이미 팔아서 다 썼기 때문에 배상할 돈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경우는 자기를 팔아서 자기가 노예가 되어 배상해야 했습니다. 빚을 진 사람만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 하고 다섯 배로 쳐서 갚을 것이 없을 경우에도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7년째인 안식년에는 해방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책임은 분명히 물으시나 영원히 종이 되어 인간의 존엄을 잃지는 않게 하신 탁월한 법입니다. 도적질 하다가 잡혀서 종이 되느니, 차라리 가난한 자유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누구든지 이 법을 지켜 살면, 존귀하고 복되게 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이 이렇게 탁월한 줄을 모르고 성경의 말씀은 다만 하나님 잘 섬기라는 종교적인 내용이겠지 하고 고개를 돌리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철저하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자유하시는 분이고, 선하신 자기의 의지대로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당신의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이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한 일을 오늘 이 세상에서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책임을 져야합니다. 계21:에 보면,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 앞에 두 권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책이고 하나는 행위의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행위의 책에는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들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책임을 추궁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다섯째, 관리 소홀이나 무책임에 대한 손해보상에 관한 법입니다. (5)

사람이 자기 집 짐승에게 풀을 뜯기다가 그 짐승의 끈을 풀어 놓았는데, 그 짐승의 남의 배추 밭에 들어가서 배추를 뜯어먹었을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겠습니까? 자기소가 뜯어먹은 곳이 그 밭에서 가장 농사가 잘 되지 않은 부분일 지라도, 면적을 따져서 가장 잘 된 부분의 면적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손해를 끼친 사람이 겨우 손해를 끼친 정도만을 변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본 사람이 이익이 될 만큼 충분하게 보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다시는 짐승을 함부로 관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농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가 애써 농사한 곡식을 남의 짐승이 와서 뜯어 먹어버리면, 그것을 변상 받는다 할지라도 마음이 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고전10:31-33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이 되나 하는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내가 하는 행동 때문에 이웃들이 기뻐하겠는가, 이것을 생각하고 행동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행동 원리입니다. 나의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이웃에게 유익이 되겠느냐,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겠느냐, 이 세 가지가 성도의 행동에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섯째, 실화에 관한 법입니다. (6)

사람이 자기 밭에 불을 놓아서 가시를 태우다가 남의 곡식낫가리나 밭이나 전원으로 번져가서 태웠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밭둑을 태우다가 남의 밭의 곡식을 태웠으면 당연히 변상해야 하는데, 바람이 불면 불이 번져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위험한 불을 다루면서 그만큼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에게 해가 되지 않게 살라는 정도가 아니라 도움이 되게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에도 똑 같습니다.

이층에서 살면서 아이가 쿵쿵 뛰게 놔두면 안 됩니다. 바닥에 무엇을 깔든지 해서 자기 집 소음이 아랫집에 피해를 주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사람이 함부로 아이를 키워서 아랫집과 늘 싸웁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뻔뻔하고 미안한 기색도 안보이며 삽니다. 그래서 위 아랫집이 마음의 담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총동원주일이라고 전도해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가만히 생각하니까 요즘은 아래층에서 항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가보다 하고, 아래층에 가서 교회가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삶을 보인 것도 아니고, 그냥 아쉬우니까, 전도한명 해야 하니까, 같이 교회가자고 했습니다. 따라올까요? “너나 잘 믿어라. 너 같은 사람들이 그 교회에 가득할 텐데, 내가 거기 왜 가냐, 너 하나만으로도 나는 벅차다.”그러지 않겠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들은 우리 시대에 우리에게도 정확히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일곱째, 물품손실에 관한 법입니다. (7-9)

누가 내게 돈이나 물건을 맡겨 놓았는데, 내 집이 도적이 들어와서 그것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남의 물건을 맡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의 책임입니까? 천만 다행으로 도둑놈이 잡혔다면 도둑이 그것을 물건 주인에게 법대로 배상하여 갚으면 됩니다. 그러나 도적이 잡히지 않았을 경우가 문제입니다. 그럴 때는, 물건을 맡은 사람이 재판장에게 가서 자기가 그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고, 그것을 조사한 재판장이 판결하기를 ‘물건을 맡았던 사람이 책임이 있다’고 하면, 맡았던 사람이 배상을 해야 합니다. 남의 물건을 맡은 것은 안전하게 지켜줄 책임을 맡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경우가 너무 다양할 것이기 때문에 사례별로 사정을 파악해서 어떻게 하라고 판정을 해 주고, 너희는 재판장의 판결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재판장의 판결을 따르는 것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나 진위를 판단하는 사람들을 세우시고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분들을 권위자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권위자입니다. 어린 형제가 다투면 아버지가 판결을 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부모의 권위아래 두어 보호하게 하신 것처럼, 백성들 역시 권위아래 두어 보호를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는 부모, 스승, 행정적 지도자, 국가의 법 등이고, 교회에서는 당회입니다. 이 모든 권위의 근원은 부모와 권위자를 주신 하나님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권위자에게 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경찰에 의뢰하고, 재판을 청구해서 판단을 받아 판결대로 따라야 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법보다 훨씬 뛰어난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있는 당회에 의뢰하여 판결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시민이 최고심 결과에 불복한다거나, 성도가 당회의 판결을 불신한다면, 모든 권위의 원천인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사람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롬13:)

 

여덟째, 위탁 목양에 관한 법입니다. (11-13)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양이나 소나 짐승을 맡겼는데, 그 양이 죽거나 짐승에게 물려간 경우입니다. 어느 날 그 양이 없어졌는데 늑대에게 물려가는 것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맡은 사람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럴 경우, 양을 맡은 사람이 나는 결백하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주인은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밤에 도둑놈이 와서 양을 가져갔다면,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니 맡은 사람이 배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이 짐승에게 물려가 죽은 것이라면, 맡은 사람은 찢겨 죽은 짐승의 잔해를 가져다가 증거로 제시해야 하고, 그럴 경우에는 양의 주인이 배상을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밤에 짐승이 와서 가져간 것은 맡은 사람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얼마나 분명한지 모릅니다.

 

누가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에서, 혹은 이웃집에 가서 놀다가 자기가 잃어버린 그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그럴 때 아무 말도 없이 “이건 내 것이야” 하고 가져갈 수 있느냐? 그러면 싸움이 벌어지겠지요? 만약, "이것이 내 물건이다." 라고 잃어버린 사람이 말을 했다면, 잃어버린 사람과 가지고 있는 사람 둘이 재판장에게 가야하고,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무죄가 되든지 혹은 배상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재판장이라는 권위자를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홉째, 빌려온 짐승의 관리에 관한 법입니다. (14-15)

남의 집에서 빌려온 소가 죽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그 소가 임자와 함께 있을 때 죽었다면 빌려간 사람이 죽이지 않고 제가 죽은 것이 분명하므로 빌려간 사람이 갚아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과 함께 있지 아니 할 때에 죽게 되는 경우입니다. 남의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하루만 빌려달라고 하고 데려왔는데 내 집에 와서 그날 죽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빌린 사람이 변상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큰 교훈을 받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만큼 책임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세세한 삶의 구석까지 성도다운 삶의 방법을 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의 주인이십니다. 내 삶의 모든 분야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잘 다니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의 전부가 아니라,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바벨론의 함므라비법전 같은 이방 나라의 법에도 이렇게 정확하고 정의롭지는 못하지만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성경이 당시의 이방의 법에서 베껴온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을 주입했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교류하는 영혼과 언어가 있고, 선악을 분별하는 도덕과 양심이 있으며,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는 지성이 있고, 도구를 만들고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짐승에게는 없는 것으로 하나님만 가지신 특성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것을 주입하여 당신을 닮게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라도 본성적으로 죄를 알고 죄에 대한 벌을 아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정의를 사모하고 공평을 추구하는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이방나라에 존재했던 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런 일반은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오늘 정부가 국민을 위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국법도 하나님이 주신 일반계시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롬13장에서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권위자를 주셨다고 말씀했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하시면서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림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인에게는 일반계시를 주시고 국가를 통하여 다스리시지만, 당신을 믿는 당신의 백성에게는 특별계시를 주시어 더욱 확실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법이 세상의 법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상의 법은 형벌이나 벌금이 무서워서 그것을 지키게 되지만, 하나님의 법은 나의 창조주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니 하나님을 존경해서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을 다 포괄하지만, 세상 법은 하나님의 법을 포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은 세상의 법은 자동적으로 다 지킵니다. 그러나 세상 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법이 다 지켜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법을 기준 삼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기준삼아서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살아가다가 무슨 문제를 만나면, 세상 법에 의지해서 고발하고 호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판단하고 당회의 판단을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산다면 세상 법에 고발당하고 재판할 일이 없습니다.

고전6장에 보면 장차 성도가 세상을 심판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살아가면서 이웃과 풀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돌아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해줄 당회에 호소해야 합니다. 당회는 교회 안에서 생긴 종교적인 일만 아니라 세상살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판결하여 성도를 말씀대로 살게 하는 기관입니다. 이 중요한 일을 맡은 장로들을 존경하고 그들이 가진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법, 덕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성도는 세상의 법도 모범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세상 법에 저촉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에게 덕을 세워서 영혼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재산권 침해에 관한 규례

출애굽기 22:1-15 / 손재호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재산권 침해에 관한 규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제와 적용할 상황이 각각 다른 일곱 가지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보상에 관한 규례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런 규례를 주신 의미가 무엇인지 배우고,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4절 말씀은 도적에 관한 규례입니다. 1절을 보면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았다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소는 다섯 배로 갚으라고 하고, 양은 네 배로 갚으라고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그 이유를 본문에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는 견해는 소는 노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도적질한 것이 아직 살아서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두 배로 보상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때는 왜 두 배로 보상을 하라고 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도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다시 돌려받을 주인에게 짐승이 이미 처분된 상황보다는 적은 피해를 준 것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3절을 보면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에 도적이 오는 것을 보고 쳐 죽였을 경우에는 그것이 정당방위가 되어서 피 흘린 죄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해가 돋은 후에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과잉대응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보호해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자신의 재산을 보호해야 할 권한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과도하게 그 힘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b절에 보면 만일 도적이 보상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몸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배상을 하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도적들에 대해서 엄정하게 그 보상을 규정함으로써 원천적으로 도적질을 봉쇄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법을 주셨을까요? 단지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과 손해 배상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일까요? 시내산 언약에서 언약법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지키며 살아가야 할 규범들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종살이 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런 그들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여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바탕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차지하게 될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법을 통해서 자신의 소유를 더 늘이기 위해 도적질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도적질하여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애굽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함을 받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소유의 넉넉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도적질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잘 알아야 하고, 이 율법의 수종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6절 말씀은 곡식 피해에 관한 규례입니다.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먹이다가 그 짐승을 놓아서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제일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할찌니라.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미쳐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전원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찌니라”고 했습니다(5-6). 곡식 피해에 관한 이 규례에는 두 가지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축에 의해 곡식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와 불에 의해 곡식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입니다.

 

첫 번째 경우를 보겠습니다.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그 짐승을 놓아서 남의 밭에 들어가 먹게 하여서 피해를 입혔으면 자기 밭에서 제일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을 하라고 합니다. 이 경우는 주인이 가축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과실로 인해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밭에서 가장 좋은 소출로 보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를 보겠습니다.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미쳐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전원을 태웠으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을 하라고 합니다. 이 경우는 사고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상은 하되 자신의 가장 좋은 소출로 보상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고로 인한 불이 아니라 일부러 불을 놓아서 이웃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이 기준은 적용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하여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원리는 신약의 모든 하나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야 합니다.

 

7-15절 말씀은 보관 사고에 관한 규례입니다. 이 단락에서는 돈이나 물품이나 짐승을 맡겼다가 분실하였을 경우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체로 보관에 대한 대가가 커질수록 분실에 대한 보상과 책임이 커집니다. 7-8절에 보면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의 집에서 봉적하였는데 그 도적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도적이 잡히지 아니하면 그 집 주인이 재판장 앞에 가서 자기가 그 이웃의 물품에 손 댄 여부의 조사를 받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돈이나 물건을 이웃에게 맡겼다가 도적을 맞았을 경우에 그 도적이 잡히면 두 배로 보상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적이 잡히지 않았을 경우에는 보관하던 사람이 제사장 앞에 가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면 그 사람에게 보상의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관을 맡은 자는 그 물건을 자신의 소유와 함께 집안에 보관하기 때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할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같은 물건을 두고 두 사람이 서로 소유권을 주장할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떠한 과실에든지 소에든지 나귀에든지 양에든지 의복에든지 또는 아무 잃은 물건에든지 그것에 대하여 혹이 이르기를 이것이 그것이라 하면 두 편이 재판장 앞에 나아갈 것이요, 재판장이 죄 있다고 하는 자가 그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할찌니라”(9). 이 말씀에 보면 서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때 그 두 편은 재판장 앞에 나가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재판장이 재판을 통해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두 배로 물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것이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인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경우 진짜 주인도 심리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기 마련인데 이 율법은 이와 같은 심리적인 피해에 대해서도 보상을 하도록 규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규례는 남의 물건을 가지고 자기 것이라고 억지를 쓰는 경우에 적용이 됩니다. 자기 것이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곧 탐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고 나온 하나님의 백성에게서는 나와서는 안 되는 죄악된 것입니다.

 

10-13절 말씀은 보관하는 물건이 가축일 경우에 관한 규례입니다.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몰려 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로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만일 자기에게서 봉적하였으면 그 임자에게 배상할 것이며, 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거 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않을찌니라”고 했습니다(10-13). 보관하는 물건이 가축인 경우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일 보관 중이던 짐승에게 이상이 생기면 적절한 대응이나 보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로, 보관자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짐승이 죽거나 다치거나 사라진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보관자는 어떤 보상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본 사람이 없으면 곧 증인이 없으면 그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대지 않았다고 여호와로 맹세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곧 본인의 무죄와 무과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임자는 그것을 믿어야 하고, 그 짐승을 맡은 자는 배상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손실이 도적에 의해 발생한 경우입니다. 만일 짐승을 맡은 자가 도둑을 맞았다면 보관자의 과실이 인정이 되기 때문에 주인에게 적절한 부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만일 자기에게서 봉적하였으면 그 임자에게 배상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봉적(逢賊)’이라는 말이 도적을 맞아 물품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보관 중이던 짐승이 맹수에게 찢겨서 죽게 된 경우입니다. 이때 보관자는 맹수에게 찢긴 그 짐승을 주인에게 증거로 제시를 해야 하며, 이 경우에는 보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13).

이상에서 볼 때 짐승을 보관한 자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 그 죄와 무과실을 자신이 증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14-15절 말씀은 짐승을 이웃에게서 빌려온 경우에 대한 규례입니다. “만일 이웃에게 빌어온 것이 그 임자가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 상하거나 죽으면 반드시 배상하려니와 그 임자가 그것과 함께 하였으면 배상하지 않을찌며 세 낸 것도 세를 위하여 왔은즉 배상하지 않을찌니라”(14-15). 빌려온 짐승이 죽거나 다칠 경우는 두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인이 함께 하지 않은 경우 짐승이 죽거나 다친 경우입니다. 이때는 빌려온 사람이 반드시 물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주인이 보고 있는 상태에서 짐승이 죽거나 다친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빌린 사람이 물어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빌려온 삯만 지불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같은 결과를 두고도 모든 정황을 고려하여 융통성을 발휘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모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가 아니라 이방 나라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5:30-31절을 보면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세워진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이방 나라면 이해가 되는데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무엘하 12:1-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는 밧세바를 범하는 것과 같은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전쟁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자 왕궁에 머물러 있다가 안일에 빠져 밧세바를 보고 간음하고 임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덮기 위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충직한 우리아를 불러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밀령을 내려 전쟁의 맨 앞에 내세워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애곡기간이 끝나자마자 밧세바를 아내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이었습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비유로 다윗 왕의 죄를 지적합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자고 한 사람은 가난합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고 가난한 사람은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마리 뿐이었습니다. 그 양은 자식과 함께 자라며 함께 저의 먹는 것을 먹고 저의 잔을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인이 부자 집에 왔는데 그 부자는 자기 집의 양과 소가 아까워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한마리 뿐인 양 새끼를 빼앗아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이 노하여 말합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5).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죽이지는 않습니다. 몇 배로 갚아야 합니까? 양이기에 네 배로 갚게 합니다(출 22:1). 다윗은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을 훔친 정도가 아니라 남의 아내를 간음하고 임신하자 그의 남편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기 잘못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이방의 왕이 된 모습입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하며 책망합니다. 그 책망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여호와께 범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단이 여호와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대신 네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칼이 그 집에서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다윗의 아내들이 백주에 아들에게 욕을 보며, 아들들의 반역이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왜 이방 나라와 같이 되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잃어버릴 때 그 개인이나 나라는 이방인과 같이 되고 이방나라와 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잃어 버렸지 않습니까? 이방인과 같이 곧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 유익을 좇아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된 우리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아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날마다 더 깊이 덧입어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날마다 그 은혜 위에 굳게 섬으로써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 가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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