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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828 / 출 23:1-9 / 공평에 관한 법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9.01|조회수1,050 목록 댓글 0

공평에 관한 법

출 23:1-9

1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7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 23:1-9 / [재판은 올곧게] 너희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지 말아라. 못된 일만 꾸미는 자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편드는 증인이 되지 말아라. 2) 다수가 편을 든다고 하여도 올바르지 못한 의견에는 따라가지 말아라. 마찬가지로 재판정에서 증언할 때 대중을 편들어 비뚤어진 증언을 하여서는 안 된다. 3) 가난한 이의 일이라고 하여서 더 봐주어서도 안 된다. 4) [원수를 도와주어라] 네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을 보거든 그 임자에게 끌어다 주어라. 5)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지고 가다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거든 그냥 지나가지 말고 그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거들어 주어라. 6) [정직하게 재판하여라] 가난한 사람의 소송 사건이 있을 경우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의 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7) 너희는 허위 고발을 받아들이지 말아라. 아무런 죄도 없고 올바로 살아가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ㄴ) 못된 일을 저지른 자에게 무죄를 선고해서도 안 된다. (ㄴ. 히. 70인역(BC 3세기의 역본)을 따라 읽은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은 `나의 못된 일을 저지른 자를 올바른 사람이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라는 뜻이다) 8) 너희는 뇌물을 받지 말아라.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올바로 살아가는 사람의 진술을 묵살하게 한다. 9)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나 뜨내기를 짓누르지 말아라. 너희도 한때 애굽 땅에서 몸붙여 살아 보았으니 몸붙여 사는 이들의 심정을 잘 헤아릴 수 있지 않느냐?

 

본문은 한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서로 간에 가지고 있어야 할 사회적 책임과 배려를 보여줍니다.

 

거짓된 풍설을 퍼트리지 말며(1-3)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 단락의 금지 사항들을 지켜서 법정의 정의를 순수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특히 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서 하는 공적행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법정에서는 소문이나 근거 없는 말을 금지할 뿐 아니라, 증거로 채택할 수 없습니다(1). 상대방을 해하기 위해 공모하는 행위를 당연히 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행실이 악한 사람이 아니라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뜻하는 법적 용어입니다.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마땅한 사람과 한통속이 되어 공의가 왜곡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법정이 진실을 밝히는 곳이 되어야 그 사회가 소망이 있습니다. 민주주의 기본적인 원리는 대다수의 여론을 수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대다수의 결정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문제는 다수의 의견이 잘못된 것이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법정에서 가난한 자들을 특별히 배려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의를 왜곡시키면서까지 그들을 두둔해서는 안된다고 선을 그어주십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누군가를 선처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원수(4-5)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수일지라도 친구를 대하듯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원수의 짐승이 길을 잃었을 때 구해주라고, 짐의 허덕일 때 도와주라 하십니다. 이는 원수를 다시 친구로 되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6-9)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동정하여 유리한 판결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난하기에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하는 것도 나쁜 일입니다(6).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판결의 과정에서 기억할 구체적인 지침들을 주십니다. ① 가난한 자들에게 부당한 판결을 하지 말 것 ② 거짓 고발을 멀리할 것 ③ 죄 없는 사람이나 의로운 사람을 죽이지 말 것 ④ 뇌물을 받지 말 것 ⑤ 이스라엘에 살기 위하여 온 이방인들을 억압하지 말 것 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라도 사람을 자비와 긍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살아날 것입니다.

 

적용: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공정한 판단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개인적인 감정이 타인과 혹 다른 영역까지 확대되지는 않습니까?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통해 물려받은 전통이나 일반적인 상식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진위를 가려야 합니다. 혹여 다른 이들에게 비난의 소리를 듣더라도 말입니다.

 

< 설 교 >

풍설을 퍼뜨리지 말라

출애굽기 23:1-3(P.115),누가복음 3:12-14(P.92) / 이성희 목사

 

서론

 

어느 날 소크라테스와 마주친 어느 친지가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방금 나의 제자 한 사람에게서 들었는데 그거 알고 있소?” “그 소문이 틀림없는지 확인했어요?” “아니요. 그저 들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좋은 이야기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나에게 유익이 되는 이야기인가요?” “아닌데요.” “진실도 아니고,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내게 유익한 이야기도 아니라면 굳이 내게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아내를 구타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뜬소문은 사람을 혼란케 하고, 공동체를 갈등구조로 몰고 가게 합니다. 풍설은 절대 믿지 말아야 합니다. 풍설을 사실로 믿다가 오히려 자신이 우스운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공통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절, 부담함, 뜬소문, 빈정거림, 더한 고통, 오해, 굴욕, 치욕 등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예수님을 괴롭게 했던 것은 뜬소문입니다. 사실이 아닌 소문으로 예수님을 고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군중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군중은 “유대인의 왕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백성을 소란하게 했습니다”라고 하였지만 이 모든 것이 다 풍설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뜬소문들이었습니다. 지금도 헛된 소문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쏠림 현상’이란 뜻의 영어표현입니다.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 악대차를 선두에 세우고 역마차들이 금광을 찾아 나섰다는 소문을 믿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쫓아간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서부만 가면 금을 얻어 ‘일확천금’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소문을 듣고 따라 나섰다가 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에는 뜸하지만 오래 전에는 야바위꾼들이 길거리에 많았습니다. 야바위꾼들 가운데는 반드시 ‘바람잡이’가 있습니다. 뒤에서 소문을 내고 바람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헛소문을 내고 사람들을 현혹케 하는 사람 때문에 돈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기담항설’(奇談巷說)이란 말이 있습니다. 길거리에 떠도는 헛된 소문이란 뜻입니다. 사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를 말합니다. 사람을 현혹하게하고, 정신을 혼란케 하는 말을 일컫습니다. 이런 헛소문이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풍설’의 비슷한 말은 ‘풍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을 말합니다.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말이 있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말이 있습니다. 풍설에 귀를 기울이면 심령에 손해를 봅니다. 영성이 파괴됩니다. 풍설은 덕이 될 것은 전혀 없고 손해될 것만 있습니다. 풍설은 드라마 같은 소리만 늘어놓습니다.

영성가 토마스 아 켐피스는 “진기한 소문을 퍼트리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은 가까이 할 사람이 못됩니다. 확인되지 않은 말을 사실처럼 전하는 사람은 신빙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속칭 ‘카더라 통신’이 있습니다. 사실 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마치 사실인양 전달되는 얘기들을 말합니다. 이런 말들은 사라져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출애급기 23장은 출애급기 20장의 ‘십계명’을 보충 설명하는 장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충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풍설을 퍼트리지 말고, 위증하지 말고,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진실만을 말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십계명을 받는 출애급한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첫째,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마십시오.

 

출애급기 23:1에는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라고 합니다. “거짓된 풍설”의 히브리어의 뜻은 ‘근거 없는 소문’이란 말입니다. 타인에 대한 비방은 사회적 신뢰를 잃게 하는 행위입니다.

‘유언비어’(流言蜚語)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언(流言)이란 흘러 다니는 말을 가리키며, 비어(蜚語)란 비어(飛語)와 같은 뜻으로 날아다니는 말이란 뜻입니다. 비(蜚)는 냄새가 고약한 바퀴벌레인데 날아다니는 고약한 말을 뜻합니다. 이런 말을 만드는 사람들이 바퀴벌레처럼 고약한 사람들입니다.

미국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렸다, 천암함은 미군 잠수함과 충돌하여 침몰했다, 세월호는 미군 잠수함의 어뢰를 맞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에서 잡히는 생선은 핵 덩어리이다, 우리나라 동해에서 잡히는 생선이나 해조류들도 핵에 오염이 되어 먹으면 안 된다 등 우리 주위에도 유언비어, 풍설들이 많습니다.

“위증하는 증인”이란 개역성경에는 “모함하는 증인”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남을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하는 거짓 증인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런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출애급기 20:16에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구약에, 십계명에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옛날부터 거짓증거는 많았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신명기 19:18에는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이라고 합니다. 19절에는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고 합니다. 거짓 증거한 자에게는 그대로 그에게 갚아주라고 합니다. 거짓 증거하고 위증한 자에게는 엄한 벌로 다스리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엄하게 말씀합니까? 타인을 함정에 몰아넣어 억울하게 하고, 옳고 그름을 바뀌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은 성경에서 가장 악한 왕과 왕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 왕궁 가까이에 나봇이란 사람의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그 포도밭이 탐이 났습니다. 그 포도밭을 빼앗아 채소밭으로 꾸미고 싶었습니다. 나봇에게 그 밭을 팔라고 했지만 나봇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므로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합이 근심하고 있을 때 이세벨이 왕에게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수척합니까?” 왕의 말을 들은 이세벨은 “당신이 이 나라의 왕이 아닙니까? 내가 그 포도밭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두 사람의 위증자를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소문을 내게 해서 돌로 쳐 죽이고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그 남편에 그 아내라는 말의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이 있는데 이세벨은 남편보다 더 한 아내입니다. 아합은 전형적인 악한 왕인데 거짓증인을 세우는 일은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래 전 넓게 유행하던 ‘마녀사냥’이 있습니다. 중세 중기부터 근대초기까지 유럽,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마녀의 마법행위를 금하였습니다. 마녀들을 체포해 재판하고, 형벌을 가하는 것을 ‘마녀사냥’ 혹은 ‘마녀재판’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마녀는 사악하지 않았고 주술적 기능을 수행하는 집단이었는데 졸지에 악마와 놀아난다는 소문이 두루 퍼졌습니다. ‘마녀사냥’으로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 약 50만 명이 처형되었습니다. 마법을 행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한 것으로 ‘백년 전쟁’ 후에 본격화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도 ‘마녀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마녀사냥’은 가톨릭 도미니코 수도회가 주도하였는데 죄 없는 시민을 마녀라는 이름을 뒤집어 씌워 처형하였다고 합니다.

풍설이나 위증을 통하여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마녀사냥’식 재판으로 희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이러한 풍설이나 위증은 인간사에 허다합니다. 없는 말을 꾸며내어 사람을 매장시키고 죽이는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임은 증언이지 변명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에게 위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증언은 언제나 진실이 기초 돼야 합니다. 사실이 아닌 일을 그럴 듯하게 꾸며 어지럽게 하는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요즘 돌아다니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이 차기 UN 사무총장이 되고, 힐러리가 미국 대통령이 되고,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차기 한국대통령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세계를 꿈꾸는 집단이 이미 이런 각본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돈과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이미 동의를 하였답니다. 그래서 세계를 적그리스도가 지배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이런 유의 풍설이 풍성합니다.

하나님은 소문을 싫어하십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기도제목이라는 이름하에 전해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기도제목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일을 소문으로 흘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말입니다.

잠언 26:20에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을 바꾸고, 말을 만드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말에 신실하시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식언하지 않으시고, 말을 하고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처럼 말에 신실해야 합니다.

 

둘째, 다수에 따라 악을 행하거나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마십시오.

 

출애급기 23:2에는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다수에 휩쓸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따라”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호레’인데 ‘...뒤에’, ‘...을 좇아서’라는 뜻입니다. 군중을 뒤 따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군중심리’(群衆心理)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행위의 주체가 개인인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수의 결정을 뜻 없이 추종하는 삶이 아닙니다. 혼자서 담대히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용기이며 삶의 모범입니다.

‘닻 효과’(anchoring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처음 몇 사람이 어느 한 곳에 닻을 내리면 거기에 배들이 정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닻 효과는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길에 한 사람이 차를 주차하면 얼마 후에는 그곳이 주차장이 됩니다. 한 사람이 어느 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얼마 후에는 그 곳이 쓰레기 투기장이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마누라를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중국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느 중국 군대의 사단장이 마누라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자기만 그런지 아니면 모두가 그런지 실험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부하들을 모두 연병장에 집합시켰습니다. 그리고 마누라가 무서운 사람은 왼쪽, 안 무서운 사람은 오른쪽으로 서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왼쪽에 섰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오른쪽에 서 있었습니다. 사단장은 그 한 사람에게 “자네 정말 존경하네. 어떻게 마누라가 무섭지 않은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하는 “내 마누라가 사람 많은 데는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이 사람이 진짜 상남자이지요? 성경은 다수에 편승해 살지 말라고 합니다. 다수는 허수일 때가 많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마지막 버티기에 실패하였습니다. 마누라의 말을 안 들어 큰일을 저질렀습니다. 다수의 말을 듣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는 군중의 소리에 위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잘못된 판결을 내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니라.” 가장 어리석은 판결이었습니다. 다수를 따라 판결한 것입니다. 흔히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반대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수가 반드시 의는 아닙니다.

소수, 하나, 사소한 것, 작은 것이 때로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골리앗 대신 다윗을, 수만 명의 미디안 군대 대신 기드온과 300 명의 용사를, 450명의 바알 선지자 대신 엘리야를, 아흔아홉 마리의 양 대신 양 한 마리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해 보이는 것, 다수, 무리가 아니라 작은 사람, 적은 무리, 사소한 일, 작은 행동을 활용하십니다.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선지자와 갈멜산 전투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였지만 이세벨이 죽이려고 한다고 하여 스스로 죽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나 혼자만 살아 남았습니다”라고 하나님께 투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셨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자,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리고 숨은 7천명도 함께 주십니다.

사사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는 대략 13만 5천명이나 되는 적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승리의 확률은 낮을지 모르지만 승리의 기적을 일으킬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군중심리에 끌려 다니는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소수를 도우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7:13-14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다니는 길을 가거나, 넓은 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멸망이 다가옵니다. 죽음이 눈앞에 있습니다. 다수의 생각에 편승해서 따라 가면 자신도 모르게 악을 행하게 되는 법입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발전을 지속한다”고 했습니다.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이는 다수가 아니라 창조적 의지를 가진 소수가 역사의 주역이 됩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한 오해도 받았고, 엉뚱한 헛된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을 일일이 신경 쓰고 쫓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소문에 대하여 변명할 필요도 그다지 느끼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3:14에는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한 결 같이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라고 합니다. 위증을 절대 엄금하고 있습니다.

 

결 론

 

1983년 미국 조지아 클레이턴 카운티의 재판에 캘빈 존슨이란 흑인이 백인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 날의 배심원 전체가 백인이었습니다. 캘빈 존슨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제시하였고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주장하였지만 그의 말은 무시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하나님이 내 증인입니다. 나는 잘 못 기소되었습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감옥에서 나의 억울함을 벗겨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DNA검사가 발달하여 캘빈 존슨은 16년 만에 진범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오랜 감옥생활 끝에 무죄로 석방된 것입니다. 감옥에서 나오는 그의 손에는 성경책이 꼭 쥐어져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당신을 16년간 감옥에 있게 한 판사와 배심원들을 증오하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덤덤하게 “내가 만약 그 원한을 풀지 않고 증오했다면 나는 벌써 감옥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의 분노와 증오를 이 성경이 다 해소해 주었고 나를 살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잘못된 소문과 위증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태복음 5:11에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거짓으로 악한 말을 하여 어려움에 처하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흔한 일입니다. 지금도 풍설이나 위증은 다수의 폭력으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나 사회, 공동체에 이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증거를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개인적 책임과 공동체적 책임

출 23:1-19 / 피영민 목사

서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정통치국가라는 독특한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놀라운 능력으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시내산에서 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법에 다스림을 받는 법치국가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신정통치국가로 만드셨을까요?

그 당시 이스라엘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이 한 나라만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정통치국가로 삼아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나라 민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악으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신정통치국가로 삼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21세기에는 신정통치국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이스라엘도 신정통치국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 보여주어야 할 책임은 정치적인 어떤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 영적인 하나님의 신정통치국가인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치적인 왕국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나라는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나라로서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책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로서의 개인적인 책임과 교회로서의 공동체적인 책임입니다.

 

Ⅰ. 성도의 ‘개인적인 책임’(1~9절)

 

하나님은 성도들이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것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3장 1~9절에는 성도들이 의롭고 자비로운, 이 두 가지 성품을 겸비한 사람이 되어야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전반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허망한 풍설’이라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헛된 소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은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닙니다. 또는 사람의 앞뒤 말을 다 자르고 중간의 내용만 가지고 자기의 목적에 맞도록 조작한 말, 또 실제 사실이라 할지라도 앞뒤 정황을 고려하지 않은 소문 등 허망한 풍설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 모세를 부르셔서 “네가 나 여호와를 세상에 나타내려면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첫째가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지하철 안에서 마구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닙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 아이의 부모를 욕하는 것입니다. “저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저런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느냐?”, “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길래 저렇게 아이를 방치하느냐?”며 수군댑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지하철 한편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이의 엄마가 오늘 아침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앞뒤 정황을 알지 못하면 허망한 풍설을 전하고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허망한 풍설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나 세상 정치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 중 절반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성도들은 허망한 풍설에 귀 기울이지도 마시고 전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잠언 16장 28절에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잠언 18장 8절에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 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잠언 26장 20절에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첫 번째로 원하시는 것은 “허망한 풍설을 전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1절 후반에는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인과 연합하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무함하는 것도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는 것’은 ‘악의를 가지고 증언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합의 아내는 이세벨이었습니다. 아합은 우상숭배를 많이 했던 악한 왕이었는데, 그는 나봇이 소유한 포도원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신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기 때문에 왕이라도 함부로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합이 나봇에게 가서 땅을 팔라고 해도 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궁으로 돌아온 아합이 포도원을 사지 못해 투정을 부리고 있었는데, 아내 이세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왕상 21:7). 그러더니 비류를 동원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나봇을 붙잡아 성 밖으로 데리고 가 돌로 쳐 죽였고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왕상 21:19). “네가 나봇을 억울하게 죽여 개가 나봇의 피를 핥게 한 그 곳에 너와 네 아내도 죽어 개들이 그 피를 핥을 것이라”고 하셨고, 이 예언은 열왕기하 9장 8절 이하에 등장하는 예후에 의해 그대로 실현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악인과 연합하지도 말고 거짓으로 증언하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출애굽기 23장 7절에도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연합하여 거짓 증거하는 모든 자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2절에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따릅니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수가 그릇될 때도 있습니다. 소수가 옳고 다수가 그릇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다수의 편에 서지 말고 소수의 편에 서라는 것입니다. 다수라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중도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가 한쪽에 사람이 몰리면 그 쪽으로 갑니다. 그런 사람을 기회주의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진리의 사람, 의의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역대하 18장에는 유다의 네 번째 왕 여호사밧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주 의로운 왕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부유해지고 명예도 얻게 되자 한 가지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북쪽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사돈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아들 여호람과 이스라엘 왕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정략결혼을 한 것이죠. 그리고 여호사밧은 쓸데없이 하지 않아도 될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스스로 북쪽에 올라가서 아합과 정상회담을 하는 중에 요단 동편 땅 길르앗 라못을 함께 탈환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뜻을 묻기 위해 선지자들을 찾았고, 아합은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올라가기만 하면 승리할 전쟁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보기에 믿음직스럽지 못했는지 다른 선지자를 찾아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해서 아합은 항상 자기에게 불리하게 예언하는 선지자 미가야를 데려오게 합니다. 미가야는 400대 1의 상황에서 “아합은 이 전쟁을 통해 죽을 것이고,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를 붙잡아 고생의 떡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합은 400명 거짓 예언자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갔다가 죽고 개들이 피를 핥게 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며,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다수라고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라 할지라도 진리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절에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6절에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이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3절은 재판할 때에 가난한 자라고 무조건 편을 들어주지 말라는 의미이고, 6절은 가난한 자라고 해서 억울하게 대우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재판할 때는 가난한 자든 부자든 관계없이 무조건 공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재판에 편파, 편벽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편파성은 인간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다!” 남과 자신에 대해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편파성이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절에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에 성경의 이 한 구절만 제대로 지켜졌어도 엄청나게 깨끗한 정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뇌물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꽤 많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 사람 개인의 윤리 도덕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다 저렇구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절대로 뇌물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2장에는 브올의 아들 선지자 발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명을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을 움직여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재차 권유하는 뇌물을 받고 저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발람은 세 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는 거짓 선지자요, 불의의 삯을 사랑한 선지자요, 어그러진 길로 간 선지자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발람은 타고 가던 당나귀에게도 야단을 맞고 천사에게도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뇌물 때문에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공의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공의로운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4~5절에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돌아다니고 있으면 설령 원수의 것이라도 주인에게 데려다 주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나귀가 주저앉아 버렸으면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짐을 나눠지고 계속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21~22절에도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0~21절에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수가 악을 행한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니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원수라도 자비를 베풀고 살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의로울 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나타내려면 공의로워야 하고 자비로워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 살아갈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예수 향기가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Ⅱ. 성도의 ‘공동체적인 책임’(10~19절)

 

10~13절에는 안식년과 안식일의 원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을 적용한 것입니다. “너는 육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제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 (출 23:10~13).

농사를 짓더라도 계속해서 짓지 말고 6년은 짓고 1년은 그냥 내버려 두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는 동안 자생하여 맺히는 열매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도 먹고 배부르면 남은 것들을 들짐승들로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7년 째 되는 해는 경작하지 않으니 토지의 산성화를 막을 수 있고 생산력도 높일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심지어 들짐승까지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자비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12절은 안식일의 원리입니다.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 23:12). 쉬는 동안 다시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 종, 짐승도 6일 동안 열심히 일했으면 하루를 쉬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삶의 리듬은 6:1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애굽에는 이런 안식일이나 안식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일하다가 병들면 버리는 삶의 싸이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애굽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6일을 일했으면 하루는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약 4일을 일하고 거의 3일을 쉽니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쉬면서 4:3의 삶의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산력을 비교해 보았을 때, 3일을 쉬는 것보다 하루를 쉬는 것이 훨씬 좋다고 합니다. 성경적이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삶의 리듬이 바로 6:1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원리입니다.

또 14~19절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3대 절기(무교절, 맥추절, 장막절)를 지켜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리듬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릅니다. 이방 나라 민족들은 7일을 계속 일합니다. 일 년 내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6일 일하고 하루 쉬고, 또 일 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에 다녀오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살아가는 삶의 리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 삶의 리듬이 다릅니다. 물론 밤 열시에 출근해서 아침 다섯 시에 퇴근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밤에는 조금 일찍 자는 리듬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삶의 리듬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하루를 쉬는 것이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고 이후 시간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했던 기도를 드리고, 읽지 못했던 성경을 보고,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안식의 의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삶의 리듬, 즉 6:1의 리듬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교회는 예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개개인의 책임이 있고 교회 공동체로서의 책임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의 중요성을 깨닫고 항상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의 복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출 23:1-13 / 임덕순 목사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하여 매우 관심이 깊으십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을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닮은 모습으로 사는 것을 보셨을 때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잃어버린 채로 서로 미워하며 인간답지 못한 모습으로 사는 것을 보시며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뒤에,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세상과 만물의 관리를 맡기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받은 사명에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찾아와서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심었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고 싶은 욕망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하나님을 등지고 이웃을 의심하고 미워하는 채로 제각기 악한 길을 가면서 불행에 빠져버렸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말은 곧 지으신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배려하며 사는 것이 곧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을 요즈음말로 복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복지에 대하여 매우 깊이 관여하십니다.

근년의 우리사회의 이슈는 복지 문제이고, 열린 정부는 분배우선, 복지우선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지국가, 즉 서로 배려하고 보살피는 사회가 되려면 정부가 강제로 법을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이 지으실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해집니다.

스웨덴이나 영국 등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그동안 지급하던 복지혜택들을 축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고 제도만 바뀐 복지는 결국 바닥을 드러낸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실까요?

 

첫째, 언어의 정의를 이루라.

본문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라고 하셨습니다.

허망한 풍설이란 유언비어, 거짓말, 악한 말, 허망한 말, 파괴적인 언어 등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말은 자연의 소리와는 다릅니다. 바람소리나 천둥소리나 새 소리 등은 어떤 현상을 나타내는 소리일 뿐이지 그것에 어떤 명령이나 무엇을 만드는 능력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은 곧 창조의 능력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우주에 빛이 생겼고, “땅은 식물을 내라.” 하시자 땅에서 각종 식물이 돋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지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언어를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신 사람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만들어 그 말을 남기고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말에도 권세가 있습니다. 사람이 말로 욕을 하면 상대방이 주먹으로 얻어맞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아픕니다. 상대가 사랑을 고백하면 듣는 사람의 가슴이 따스해지고 힘이 납니다. 사람의 말은 소리가 아니라 의미이고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복지, 즉 서로 잘 사는 사회가 되게 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다듬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 없이 쏘아댄 말이나 생각 없이 쏟아낸 남 이야기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누구를 실컷 욕하고 비난해서 그의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있는데, 그에게 물질로 무엇을 도와준다고 도움이 되겠습니까? 복지의 첫 걸음은 말로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고, 따스한 말로 남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헛된 소문을 만들어서 퍼뜨리는 일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넘어뜨리는 악한 행위입니다. 나쁜 소문, 근거 없는 비난을 퍼뜨리는 것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일보다 더 악합니다. 한 나라의 복지가 공중보건위생을 철저하게 해서 전염병을 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낙심시키는 나쁜 소문을 막는 일은 전염병을 막는 일보다 더 급한 일입니다.

거짓말이나 유언비어가 횡행하게 되면 당한 사람의 마음만 상하고 맙니까? 그것은 나라 전체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상대당의 후보를 거짓말로 중상모략 하는 것은, 자격 있는 사람을 당선되지 못하게 하고, 자격 없고 악한 사람을 당선되게 만들어서 나라를 통째로 망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지’ 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세금을 덜 내게 해주고, 부자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서 대중교통비 싸게 해주고, 치료비 덜 들어가게 하는 정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업수당을 많이 주어 일을 하지 않아도 생활 할 수 있게 하는 일을 복지라는 이름으로 확대해 왔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에 빠지게 하여 나라의 경제를 적자투성이로 만듭니다. 그러니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복지는 사람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허망한 풍설, 거짓말, 남에 대한 비난을 제거하지 않으면 어떤 사회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없고, 어떤 나라도 복지국가가 될 수가 없습니다.

 

90년대에 서울대학교에서 “모든 질서와 주어지는 것은 거부하자, 거꾸로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가 다시 판단하자” 는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이혼이 왜 나쁘냐? 동성연애가 왜 비정상이냐? 간음이 왜 죄가 되느냐? 도적질이 왜 나쁘냐? 살인이 왜 죄냐?’ 라고 반문하면서, 모든 것을 뒤집어 보고 우리가 다시 판단하자고 했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을 거부하고 각자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자기 판단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들으면 멋진말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 악의 기준을 없애고, 하나님의 명령을 묵살해 버리고 우리가 주인 되어 살자는 것으로, 사람다운 삶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사상입니다. 그렇게 사는 곳에는 참된 복지가 없습니다.

완벽한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시작한 공산주의 국가에 복지가 있습니까? 북한 땅에는 복지가 이루어졌습니까?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기본질서를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복지의 기초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아무리 멋진 아이디어를 내도 진정한 복지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복지는 거짓 공약입니다. 그런 말로 현혹하는 정치인들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1) 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복지정책이 잘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회에 거짓말과 헛소문과 위증이 난무한다면, 그 사회가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복지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고, 어느 정당이 복지를 내세우고 있는데 그것이 진정인가를 알아보려면, 그들이 집권하려는 목적으로 상대방을 모략하고 거짓말 하는 사람들인가 아닌가를 보면 압니다. 말로 정의를 이루지 못하고, 말로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행동으로 남을 배려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허망한 풍설을 전하지 말라.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지 말라는 말씀들은

우선 그런 악한 언어들을 근절해야 인간다운 사회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진정한 복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허망한 풍설과 거짓을 철저하게 멀리 해야 합니다.

 

둘째, 정당한 판결로 사회 정의를 이루라.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다 보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도 생기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그래서 재판관을 두어 잘잘못을 가리고 억울함을 풀어주게 되는데, 문제는 그 재판관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재판관이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뇌물을 먹고 불의한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자가 나쁜 짓을 했을 것이라는 편견으로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어서 판결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다수의 압력을 느껴서 소수가 잘못했다고 판단해 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경우가 다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며, 그런 재판관 아래서는 복지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2절의 말씀입니다. 수가 많다고 수에 눌려서 판결을 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재판관이라도 다수의 위세에 눌려서 옳은 판결을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난번에 헌법재판관들은 대통령 탄핵사건을 판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헌법재판관들은 다수의 민심이 두려워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 나라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원인중 하나입니다.

아합 왕 때에는 모든 선지자가 아합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왕이 원하는 예언만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가야 라는 선지자는 모두가 두려워서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때 혼자서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전하다가 학대를 받고 투옥되었습니다(왕상22:1-53). 예수님도 다수의 아우성에 굴복한 빌라도가 내린 판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다수에게 굴복하는 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다수편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왜곡된 생각은, 가난한 사람은 다 의인이고, 부자는 다 악인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의로운 판단이 아닙니다. 3절에서 “가난한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고 하셨고, 6절에서 “가난한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라고 하셨습니다. 레19:15에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재판할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민주세력이라는 사람들은, 부자는 다 불의한 사람들이고 가난한자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불의한 사람이 부자가 될 기회가 많았음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가난뱅이도 있고, 착한 부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경은 부자도 불의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편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 그것이 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동자와 농민은 의롭다는 것은 성경과 반대되는 사상입니다. 나쁜 부자에게 빼앗겨서 가난하게 된 것은 동정할 일이지만,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것은 사실은 악한 것으로,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자가 된 사람은 악이지만,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된 사람을 악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멸시하거나 반대로 가난하다고 무조건 편드는 것은 정의가 아니고 그런 편견으로는 진정한 복지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재판관이 어느 한편에 치우쳐서 판결을 하거나, 혹은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판결 하는 것은 불의함입니다. 선과 악을 바르게 분별하여 밝힘으로 악이 심판받고 의가 드러나게 하는 공정한 재판관이 있어야 그런 사회가 복지사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8절에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뇌물을 받으면 눈이 어두워져서 판단이 굽어지게 마련이고, 그러면 정의는 사라지고 맙니다. 뇌물로 승리한 사람은 앞으로도 세상을 그렇게 살게 만드니, 그 사람을 망친 것이고, 뇌물 먹은 재판관 때문에 패배한 사람은 가슴 아파 하면서 나중에 그 사람도 뇌물로 상대를 이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진리와 정의가 사라질 것이니, 사람들 전체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께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며, 그렇게 정의롭지 못한 세상은 당연히 망하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 때문에 편견을 받는 사회가 아니라, 돈과 지위에 상관없이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데, 그것이 복지사회입니다.

 

셋째, 휴식과 재충전을 가지라.

완전한 복지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까지 배려하는 것입니다. 10절에는 안식년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레25: 3-7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논이나 밭에 농사할 때, 육 년 동안은 땅을 갈아서 곡식을 심어 거두고, 7년째 되는 해는 곡식을 심지 말고 놔두어서 땅도 힘을 회복하게 하고, 그 땅에서 자연적으로 돋아난 곡식은 이방인과 나그네와 짐승들이 거두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땅을 배려하는 말씀이 아니라 농사하는 사람과 나그네를 배려하는 복지차원의 말씀입니다. 네가 아무리 땅 주인이라 할지라도 6년 동안 농사 지어 먹었으면 감사하면서 한해는 묵혀 두어라.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가 네 땅에서 난 곡식을 먹게 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지입니다.

 

땅도 해마다 연속해서 곡식을 심으면 산성화가 되어 소출이 줄고 병이 생깁니다. 나중에는 농사 못하는 땅이 됩니다. 그러므로 7년째는 그대로 묵혀 두어서 땅이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농부도 한 해 동안 쉴 기회를 주고, 땅도 힘을 다음해에는 더 많은 소출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런 제도가 없다면 농사짓는 농부는 평생 쉴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목사에게 주는 안식년도 이와 같습니다. 계속해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성도들의 문제로 고민하고 걱정하며 살다보면, 목사도 속이 텅텅 비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고, 누군가에게 배워야 할 필요가 절실해집니다. 신학교 겨우 몇 년 동안 공부한 것을 가지고 수십년을 우려먹으며 재충전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일만 시키면, 그 목사님에게서 무슨 새로운 것이나 깊이 있고 은혜스러운 말씀을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들에게 안식년을 드리고 휴가를 드리는 것은 성도 자신들을 위해서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 교회는 목사님들에게 일 년에 4 주간은 어김없이 휴가를 준답니다. 안식년은 아예 1년 동안 쉬게 하고, 보통 해도에 4주간은 휴가를 갖게 합니다. 이스터 할리데이라고 해서 부활절 지나서 한 주간을 쉬게 하고, 여름에 두 주간 휴가를 드리고, 성탄절에 또 한 주간 휴가를 드립니다.

한국의 목사님들에게는 너무나 부러운 이야기입니다. 저야 여러분이 배려해 주셔서 안식년 대신에 해마다 한 달을 쉬며 충전하지만, 한국교회에는 그런 휴가를 전혀 갖지 못하는 목사님들이 95%가 넘습니다. 하나님은 땅에게도 일 년의 휴가를 주라고 하시는데, 성도들이 자기 목사님에게 평생에 한 번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 않는 것은 무지한 일입니다.

 

12절에는 안식일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육일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 쉬라. 그러면 소와 나귀가 숨을 돌리고 종과 그 자식들도 숨을 돌리리라.” 이 말씀 역시 인간의 복지를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처방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처방은 인간이 낼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동안 눈코 뜰새 없이 일했습니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죽어라고 일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쉬면 먹을 것을 얻을 수가 없으니 쉴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나라가 최단시간에 최빈국에서 세계 경제 10위권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죽도록 일만 하며 살다 보니 한국 사람들은 휴가라는 개념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군대 간 아들이 일 년에 한 번 휴가를 왔기 때문에, 휴가는 군인이 집에 오는 것으로 인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던 때부터 일주일에 하루는 꼭꼭 쉬는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엿새는 열심히 일을 하고, 일곱째 되는 날은 일을 멈추고 숨을 돌리며 쉬라. 네 집에서 부리는 종들도 주일날에는 일에서 쉬게 해주라. 이게 복지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쉬면 피곤이 풀립니까? 가슴이 채워집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날에 하나님 앞에 모이라고 하십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하면서 한주간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영육의 힘을 충전 받는 것이 몸과 마음이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1/7 휴식제도입니다.

 

그런데 쉬는 시간이 너무 많으면 또 문제가 됩니다. 일주일에 하루만 쉬라고 분명하게 정해 주셨는데, 요즘에는 주 5일 근무제라는 것이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일 오후부터 이틀 반을 꼬박 쉬는 제도입니다. T. G. I Friday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Thank's God, I'ts Friday”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이 금요일입니다.”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들어보니까 굉장히 믿음 있는 사람들의 말 같지요? 천만에요, 사실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의미는 없고, ‘진탕 술 마시고 노는 날이 돌아왔으니 신난다.’는 말입니다.

이 제도를 일찍 시행한 유럽을 보면, 젊은이들은 그 이틀반 동안에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술을 진탕 퍼 마시고 광란의 춤을 추며 놀다가 월요일 아침에는 파김치가 되어서 직장에 나옵니다. 이틀 동안 심신을 푹 쉬고 온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며 술을 퍼 마시다가 오니 몸은 지쳐있고, 이틀 반이나 일을 하지 않았으니 손과 마음이 굳어서 월요일에는 일이 더 안 되고 피곤하기만 한 월요병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생산성도 너무나 떨어집니다.

왜 이런 부작용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본래 설계하신 1/7휴식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변형시킨 2.5/7 을 쉬려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복지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직장을 잃은 사람에게 실직수당을 줍니다. 그런데 그 실직수당이 시시한 직장 다니며 월급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가끔씩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체만 하면서, 실제는 전혀 일하지 않고 실직수당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일하기 싫은 사람이 늘어납니다. 그러면 결국은 사회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지의 기본은 성경에 다 있습니다. 거짓말, 허망한 풍설을 말하지 말고 정직한 생활을 하는 것,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어 부자를 구박하는 정책을 펴지 않고 공정한 판단을 하고 빈 부 모두를 위해 정책을 펴는 것, 엿새 동안은 아주 열심히 일하게 하고 일곱째 날은 쉬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 경배함으로 영육을 충전시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복지입니다. 이것에 위반되는 모든 복지는 결국 복지가 아닙니다.

 

결론으로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들리게도 말라.” 이 말씀들은 인간이 만든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법입니다.

 

그런데 왜 이 법을 말씀하다가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면, 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을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자기들 생각으로 복지 법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복지를 한답시고 사람을 망가뜨리는 정책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 창조자요, 하나님만 인간을 제대로 아시기 때문에 진정한 복지사회를 건설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으면,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배려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의 복지에 관하여 얼마나 관심이 많으신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사용설명서입니다. 이 말씀을 모르는 채 정치를 하니 나라가 엉망이고 말씀을 모르면서 사람을 가르치니 교육이 도리어 사람을 망치고 이 말씀을 모르면서 결혼하니 가정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인간답게 살아서 자신과 남을 배려하는 사람 됩시다.

 

 

 

 

공정한 그리스도인

출 23:1-9 / 박덕기 목사

지난 주간 국내의 최대 뉴스는 현대 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구속사건이었을 것입니다. 1200억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우리나라 제 2의 재벌 총수가 구속된 사건은 분명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검찰은 정회장 구속을 앞두고 여러 가지 고심을 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혹시라도 어려운 국가 경제가 더욱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재벌 총수를 구속하는데 신중을 기하다가, 재벌 봐주기라는 국민들의 또 다른 여론을 의식해서 급기야는 정회장 구속이라는 결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과 사법부의 공정성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시민법 중 오늘의 본문은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규례들입니다. 본문은 특별히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죄악들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법정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재판 관련 규례 중간에 원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드는 힘이 바로 사랑의 실천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보면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함께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허망한 풍설’이란 ‘헛된 소문’ 또는 ‘거짓된 소문’을 말합니다. 즉 일종의 유언비어로서 특정한 사람을 비방하고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거짓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풍설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 헤어나기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해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사람에 대하여 악의에 찬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허망한 풍설을 특히 선거철에 많이 듣게 됩니다. 선거철만 되면 상대방을 무함하기 위해 조작된 무슨 북풍이니 총풍이니 병풍이니 하는 풍설들을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허망한 풍설은 단지 어느 개인만을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풍설은 사회 전반에 걸쳐 불신 풍조를 유발시켜 그 사회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허망한 풍설은 사회적으로 볼 때 어떤 총칼이나 폭력보다 무섭고 사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진실만을 말하게 될 때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앞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거짓말로 결국은 자신을 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하여 무함하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터 대제는 자기 앞에서 남을 비방하는 신하가 있으면 그의 입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에게 좋은 점은 없는가? 경이 그 사람에게서 발견한 뛰어난 점이 있거든 들려주시오. 나에게 진흙을 튀기긴 싫소. 짐은 그러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옷에 묻은 진흙을 깨끗이 터는 일을 도와주고 싶소.”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남을 무함하는 말로 그 인격에 먹칠을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점을 찾아서 그 인격에 묻은 진흙을 깨끗이 털어주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절에 보면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런 규례를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다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다수의 여론에 따라 악을 행한 예는 허다합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 군중들의 소리 앞에 굴복했던 빌라도의 판결은 가장 유명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행하기 때문에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부지중에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악인 줄 알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하지 않으면 자신이 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하여 함께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많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사회 속에서 살다가 보면 이런 일들을 아마도 자주 접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다수가 행동하면 따라 하고, 손해를 입는 것이 두려워 잘못인 줄 알면서도 악을 행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기준은 ‘다수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수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지 않은가?’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행동 기준은 오직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인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행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하며,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불이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의 올바른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가난한 자’란 물질적으로 빈핍한 사람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나 소외된 자들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편벽되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관심 때문에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재판관이 재판할 때 가난한 자이며 사회의 약자라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즉 법정에서는 빈부에 관계없이 반드시 공의가 실현되어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재판관은 자신이 동정심이 많고 선량한 자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들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며, 항상 그 시선을 정의와 진실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 역시 덮어놓고 부자의 편을 들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을 들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에 따라, 가난한 자이든 부자이든 가리지 말고 오직 공정하게 대해야 할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원수에 대해서 사랑을 베풀라는 가르침으로 성경 전체에 걸쳐 자주 나타나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런 규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한 사회를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원수나 평소에 미워하는 사람이 곤경에 빠진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면 상대가 어떤 마음을 품겠습니까? 아마도 자신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상대에 대해 또 다른 미움과 복수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복수할 기회를 노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원수나 미워하는 사람이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준다면, 상대도 잘잘못을 떠나 결국 서로 관계가 개선되어 다시금 좋은 사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한 사회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은 강압적인 힘이나 무서운 법과 형벌이 아닌 오직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에는 잘 발달된 법이 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형벌이 집행됩니다. 그런데도 갈수록 범죄가 늘어갈 뿐 아니라 사람들은 더욱 흉폭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이 만든 법과 형벌로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거 해줍니다. 이 세상을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의 실천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고 감싸 준다면, 그는 반드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철천지원수이고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을 베풀 때에는 그 마음속에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유럽 대륙을 제패한 바 있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평생을 걸쳐 총과 칼과 대포로 이루지 못한 세상 정복을 예수 그리스도는 단 삼일 만에 이루어냈다. 바로 그의 사랑의 힘으로!” 그렇습니다. 사랑이야말로 불신과 다툼, 미움과 복수심을 정복하고, 이 세상을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구속의 은총을 입은 우리가 먼저 사랑을 실천함으로 세상이 보다 살맛이 나는 세상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6절에 보면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이는 3절의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가난한 자를 동정하여 부당하게 편들지 말라는 말씀과 반대로,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고 부당한 판결을 내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이란 그의 경제적인 능력이나 사회적인 지위, 또는 외적인 능력과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진 채 대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물론 오늘날 세상의 법률도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 속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차별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민주적이라는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갈등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요인은 사회가 백인과 흑인을 차별 대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보아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지방 출신인가? 또는 어떤 학교 출신인가에 따라서 차별 대우하는 것입니다. 또한 배운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을 무시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자기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무시하고, 힘 있고 잘난 사람들은 약하고 못난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난한 자이건 부자이건, 배웠건 배우지 못하였건, 아무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시며 존귀한 하나님의 창조물로 여기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외적인 조건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차별하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를 공평하게 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말고, 나와 똑같은 존재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재판관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밝은 자’란 날카롭게 사리를 판단하는 자란 뜻이며, 이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잘잘못을 가리는 명석한 재판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의로운 자’란 부당한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시정을 촉구할 만큼 깨어 있는 양심과 용기를 겸비한 법관을 말합니다. 그런데 뇌물이란 이 양자를 모두 망하게 합니다. 즉 뇌물을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무흠하게 행하기를 힘썼던 자들이, 뇌물을 받고부터 진실을 제대로 인정치 않고 그릇된 판단과 비뚤어진 재판을 일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뇌물은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고, 명철한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어서 결국에는 그를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뇌물을 절대로 받지 말라’고 명함으로써 뇌물의 유혹은 처음부터 아예 멀리해야 하고 또 단호히 물리쳐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뇌물 공화국이라는 부끄러운 말도 있습니다. 가장 공정해야할 법정에서까지 ‘유전 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뇌물이 성행합니다. 실제로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함으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들이 뇌물을 받고 특정한 사람에게 특혜를 줌으로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 중에서도,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도 뇌물이 성행하고, 그로 인해 군인과 교사들이 불의한 일을 저지름으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직장에서 뇌물을 받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일들이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뇌물은 처음에는 '선물'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접근해옵니다. 그래서 선물인지 뇌물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뇌물과 선물은 엄연히 다릅니다. 선물이 ‘선’뜻 주는 것이라면 뇌물은 '뇌'를 굴리며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어떤 기대 효과를 바라고 미리 주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뇌물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뇌물에 경고가 많습니다. 욥 15:34에 보면 “사곡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어떤 일이 있어도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누구입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 보여야 할 사명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 우리가 뇌물을 받고 불의한 일을 저지른다면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은밀하게 뇌물을 주고받음으로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더럽고 부정한 손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절대로 뇌물을 받지 말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공의롭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공정한 재판에 관한 교훈들입니다. 즉 재판의 과정에서 송사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또한 부자이거나 가난한 자이거나를 막론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공정한 재판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조선 세종 때 문신 정갑손은 곧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일찍부터 임금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습니다. 왕에게 강직함을 인정받아 좌승지로 발탁된 뒤 예조참판, 이조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중종 때는 청백리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는 나라 일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식솔들을 단속했으며,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사로 임명되어 함경도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임금이 그를 불러 한양에 다녀오느라 잠시 관헌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보고서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보고서를 보자마자 책임자를 불러다 야단을 쳤습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고을 관리를 뽑는 시험이 있었는데, 합격자 명단에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하는 자신의 아들 이름이 올라와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의 아들을 낙방시킬 수 없었던 시험관들은 눈치를 보며 정갑손의 아들을 합격시킨 것입니다. 정갑손은 시험관을 문책했습니다. "평소 우리 아이가 학업에 충실하지 않음을 내가 잘 아는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과 백성들을 속일 수 있겠는가? 자네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것은 직무를 태만히 한 것이다." 결국 그는 시험이 공정하지 못한 것을 지적해 아들의 합격을 취소시켰습니다. 그리고 부당하게 채점을 한 시험관에게 관리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내쫓고 말았다고 합니다.

 

중국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진나라 기해가 나이 많아 수상자리에서 물러날 때 진왕 도공이 그에게 후임 수상을 천거하도록 했습니다. 그 때 기해는 평소 자신의 정적이었던 해호를 추천했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해호는 그대의 원수가 아닌가. 어찌 그를 후임 수상으로 추천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기해는 “왕께서 신에게 물은 것은 이 나라의 수상될 재목이 누구냐는 것이요, 신의 원수 되는 이가 누구냐를 물은 것이 아니므로, 신은 왕께서 물으신 뜻에 합당한 자를 추천한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해호 이외의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기해는 “그 다음은 오가 적임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이유는 오는 해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해호의 아들 오는 당대 최고의 재상감이었습니다. 왕은 기해의 공평무사에 탄복하고 기해의 조언과 충언을 훗날에도 수용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던 사람들 중에도 이렇듯 공정하고 공평무사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며, 주님의 교회를 받들어 섬길 때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판단하는 것이 항상 공정한 것이 되기를 바라고, 그리고 교회의 일을 할 때에도 치우치지 않고 깨끗하고 공정한 마음의 자세로 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한 규례

출애굽기 23:1-9 / 손재호 목사

오늘도 우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주신 언약법전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공정한 재판을 위한 규례입니다. 이 규례에는 다섯 가지 금지 사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허망할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재판의 고귀함에 대한 규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금지 사항들을 준수함으로써 법정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이며, 재판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 받아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재판에 대해서 금지하는 사항들의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허망한 풍설’이란 ‘헛된 소문’, ‘거짓된 소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근거가 없는 헛된 소문을 퍼뜨려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에서 잘못된 평판이 퍼뜨려지게 되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잘못된 증언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억울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악인과 연합하지 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보면 ‘악한 자에게 너희 손을 건내지 말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는 말은 없는 사실을 꾸며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 보면 이 말씀을 의역을 해서 “죄 있는 편에 합세하여 권세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 말아라”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악인의 근거 없는 헛소문만을 듣고 그 소문에 동조하여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권세 잡은 자들과 손을 잡고 법정에서 거짓 증거를 하는 경우와 악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로인해서 억울한 피해를 입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근거 없는 거짓고소를 당하는 핍박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헛소문이나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평판에 대하여 분별없이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위하여 억울한 비방이나 비난을 받는 것은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며,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1-12절을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2:20-21절을 보면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참으며, 오직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본을 보여 주신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다 악한 일을 한다고 해서 너희도 악한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릅니다. 그러나 다수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맹점이요, 한계입니다. 언약공동체는 다수결의 원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리 다수라고 하더라도 악을 행하면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다수를 따르지 않고 소신대로 소수의 무리에 남는 것은 큰 결단이 요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를 위해서는 이런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고 해서 악한 길을 걸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하는 일에 고라 자손과 다단과 아비람이 당을 만들어 일어났습니다. 사사기 19장-21장에 보면 사사시대에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풍조는 심각한 비극을 초래하였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멸문지화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 당시 압살롬이 반역의 세력을 결집하여 많은 백성들이 동조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수의 의견에 대해서 말씀으로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수가 행하는 악과 불의에 동참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일에 인생들 모두가 따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악한 일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 길이 멸망의 길입니다.

또한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다 거짓 증언을 한다고 해서 너희 자신도 함께 거짓 증언을 하여 공정한 재판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증언을 할 때 군중 심리에 휩쓸려 거짓 증거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백성들은 다수를 따라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이때도 다수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비난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찌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정에서 거짓 증언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명까지 잃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 이스라엘 왕국 아합 왕 때 나봇이 여러 무리들의 거짓 증언으로 인해 돌에 맞아 죽은 경우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나서 그것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열조의 유업을 다른 사람에 팔지 말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아합이 속이 상하여 밥도 먹지 않고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이에 그의 아내 이세벨이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나봇이 아합 왕을 저주하였다고 모함하였습니다. 이에 무리들이 나봇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는 말은 편파적으로 두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곧 재판을 할 때 무조건 가난한 사람을 편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을 금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정에서는 빈부에 관계없이 반드시 공의가 실현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를 베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공적 법을 수행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가난하다고 하여 무조건 편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빈부를 떠나 공의가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난한 자의 송사에 대하여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해서 멸시하여 공평치 않게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6절을 보면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규례는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이 불공정한 재판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공동체로서 가난한 이웃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 뿐만 아니라 정직함과 의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모든 방면에 참여하여 복음의 지혜로 행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4-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원수란 법정에서의 소송 상대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규례는 비록 원수일지라도 그들이 곤궁에 처했을 때에는 도와주는 것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려주라고 합니다. 또한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려주고 나귀를 일으켜 세워 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백성들로서 원수와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들의 길 잃은 소나 나귀와 짐을 못 이겨 쓰러진 나귀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랍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3-44).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써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날 때 그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원수나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면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재판관의 공정한 재판을 명시한 규례입니다. 즉 재판관은 돈과 권력에 결탁하여 거짓 재판을 하지 말며, 실수하여 무고한 자를 죽이지 않도록 지혜롭게 판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은 이웃에 대하여 악한 것을 도모하며 거짓으로 모함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기 19:16절을 보면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판에서 공의로 판단하지 못하므로 무고한 생명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35절에서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랴가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면 그 피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고소로 악한 일을 꾸미며, 바른 법집행을 하지 않으므로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그런 악한 일을 결코 의롭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8절을 보면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적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에게 재판을 할 때에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뇌물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정직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선물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이 법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선물의 의미가 아니고 뇌물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도서 7:7절을 보면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탐학’이란 부정한 소득을 말하는 것으로 뇌물을 의미합니다. 뇌물은 지혜자를 우매하게 만들고 사람의 명철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늘 목격하고 있습니다. 많은 고위 공직자들과 정치인들이 뇌물을 받고 우매하게 된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뇌물로 인해 그 인생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사회에서 매장되는 많은 지도층 인사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뇌물은 그 위력을 맛본 자에게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만드는 요술방망이 같습니다(잠 17:8). 뇌물의 생리에 익숙한 자는 하나님조차 자기편으로 매수하려고 뇌물을 씁니다. 사도행전 8:18-20절을 보면 시몬이 성령을 돈으로 사고자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헌금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의 불의를 눈감아 주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뇌물을 받지 않으시며(대하 19:7), 뇌물 받는 자를 저주하시는 분이십니다(신 27:25). 그러므로 언약 백성은 뇌물 받는 일을 두렵게 여겨야 합니다. 보이는 뇌물에 현혹되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법과 관련을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것이 뇌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적 직무를 수행하는 재판관이 세상에서 공의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것에서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뇌물로 인한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도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정치와 법에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은 수가 아닐 것입니다. 국회의원들 중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언약의 백성들이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재판이나 법에 관여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의를 수행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그리스도의 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인 정치인과 법에 참여하는 자들이 뇌물을 받고 불의를 행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사회는 더욱 불의가 만연하게 될 것입니다.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이렇게 될 때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모스 5:24절에 보면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로 하여금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언약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공법이 물 같이 흐르고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언약 공동체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벨렉스 총독에게 가서 심문을 받게 되었을 때 벨릭스는 바울 사도를 자주 불러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영적 소원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울로부터 돈을 받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24-26절을 보면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벨릭스의 이런 의도에 결코 따르지 않고 의를 행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어떤 희생이 따른다고 할찌라도 의를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방 나그네란 히브리 사회에 거주하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에 나그네의 마음을 너희가 잘 알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2:21절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방 나그네를 압제 하지 말라는 말은 포괄적인 규정이라면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재판과 관련하여 법정에서 이방인에게 일방적으로 부당한 판결을 내림으로 학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재판에서 이방인에 대한 압제와 학대를 엄격히 금지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살던 자들을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사백년이 넘도록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나그네의 부당한 대우와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9절에서 ‘나그네의 정경’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그네의 감정’이라는 뜻으로 나그네가 타국이나 타향에서 겪는 서러움과 외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보다도 나그네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은혜에 기초해서 이방 나그네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그네로 살다가 구원함을 받은 언약 백성으로써의 마땅함인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위에 굳게 서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써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히 증거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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