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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0901 / 출 24:1-11 / 시내 산에서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9.10|조회수1,032 목록 댓글 0

시내 산에서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출 24:1-11

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2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 24:1-11 /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을 데리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먼 발치에서 엎드려 있게 하여라. 2) 너 모세만 나 여호와에게로 가까이 나아오고 너와 같이 온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 못한다. 백성들은 아예 여기까지도 올라오지 못한다.' 3) 모세가 돌아와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과 모든 법규를 백성에게 자세히 설명하자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다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모세는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모두 기록한 다음,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표시하는 기둥 12개를 세웠다. 5) 그러고나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 젊은이들을 뽑아 여호와께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를 올리게 하고 송아지를 잡아 화목제를 드리게 하였다. 6)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반은 항아리에 담아두고 나머지 반은 제단 위에 뿌리고나서 7) 계약책을 들고 나와 백성 앞에서 읽어 주자 그들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다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 또 모세가 피를 가져다가 그들에게 뿌리면서 `이 피는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하시려고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맺은 계약의 피이다.' 하고 선언하였다.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명은 함께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뵈었다. 그분이 발을 딛고 계신 곳은 마치 사파이어를 깔아 놓은 듯하여 그 맑기가 새파란 하늘과 같았다. 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힌 이 사람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고 이들은 하나님을 뵈오며 먹고 마셨다.

 

출애굽기 20-23장까지는 언약의 내용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공식적으로 언약이 체결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1-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사장 아론과 그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칠십 명의 장로들과 함께 시내 산으로 올라오되 멀리서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 말고 모세만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백성의 대표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딤전 2:5;히 3:1-6). 그래서 예수께서도 자신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요 14:6).

 

순종 서약 및 제사의 집행(3-8)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모든 말씀을 문서로 기록하고, 아침 일찍 산 아래에서 제단을 쌓고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우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짐하며 드리는 것이고, 화목제는 언약 체결 후 감사와 찬양을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기록한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들에게 읽어줄 때, 백성들은 그 말씀을 다 준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제물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리며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피를 마시거나 뿌리는 행위는 언약을 준수하지 않으면 피로써 갚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뿌린 언약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예표입니다(히 10:3-14).

 

친교의 식사를 통한 언약 체결식 종결(9-11)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때 백성들이 그 말씀을 준수하겠다고 응답하며 제사를 드리고, 언약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모세와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 발아래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계약 체결 후 계약 당사자가 함께 식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다는 것은 특별한 교제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는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주의 성만찬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 26:26-28).

 

적용: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보자로 삼으신 것처럼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매 순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물고기는 물에 빠져 죽지 않는다. 새는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신의 창조물들은 각기 자신의 참된 본성대로 살아가야 한다.’<막데부르그의 성녀 메히틸드> 물고기나 새 모두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압니다. 인간이 신이 주신 진정한 본성을 발견해야함은 축복인 동시에 도전입니다. 말씀을 준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모세 언약 체결에 나타난 복음

출 24:1-11 / 피영민 목사

서 론

 

출애굽기(Exodus)는 하나님이 중보자 모세를 통해 택하신 백성을 바로의 지배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을 예표합니다. 하나님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택하신 백성을 마귀의 지배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복음이 바로 그 실체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200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고 시내산에서 1년 동안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1년이란 시간 동안 십계명을 음성으로 들려주셨고, ‘언약의 서’(The Book of Covenant)라고 불리는 출애굽기 21~23장의 내용을 일러주셨습니다. ‘언약의 서’는 십계명을 어떻게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 볼 출애굽기 2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시내산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시내산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는 1장부터 23장까지 출애굽 사건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2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으며, 25장 이후에는 언약을 체결한 백성이 성막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지, 성막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성막의 건설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4장이 출애굽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관건이자 축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는 성경 전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숨겨져 있는데, 그 열쇠는 바로 ‘복음’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는 복음의 모든 요소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범할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1~2절에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셨는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오늘 가족의 권유로 이 예배당에 나왔든, 친구의 권유로 나왔든, 직장동료의 권유로 나왔든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셨기 때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범할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합니다.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출 24:1~2). 하나님은 백성의 중보자인 모세 이외에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간격을 범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도 백성들에게 이 간격을 말씀하셨고,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2절에도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간격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침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침범하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주 무서운 간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간격을 범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인간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격은 한 마디로 ‘죄의 간격’입니다. 이 간격이 생겨나게 된 이유가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 간격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지음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59장 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과 하나님은 직접 소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스스로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넓은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이며, 하나님의 원수이고,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원수는 아무리 키 크고 잘 생겼어도 원수이고,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도 원수입니다. 또한 미국 사람, 한국 사람 할 것 없이 국적을 불문하고 원수는 원수입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이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직접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언약의 중보자로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모세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 20:19).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것이 실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다른 많은 종교에도 창시자가 있고, 탁월한 지식과 수완으로 종교를 만들었지만, 그들이 아무리 머리가 좋고 훌륭해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4장은 우리에게 첫 번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분리된 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살기로 고집하겠습니까? 그렇게 계속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살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기를 고집하겠습니까? 아니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과 화목하여 살겠습니까? 출애굽기 24장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첫 번째 질문이 이것입니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Ⅱ. 하나님은 중보자를 통해 택한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침묵하는 분이 아니시고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대한민국 정치와 미국 정치가 서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미국은 국가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해 직접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견해를 듣기가 좀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인 것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중보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3절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보자 모세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율례를 백성에게 고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말씀은 ‘십계명’을 의미하고, 모든 율례는 출애굽기 21~23장까지 ‘언약의 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낭독합니다.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 하나님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설명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본문을 낭독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증거하신 말씀을 설명하게 하고 낭독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4장 4절은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구약학자들은 구약성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펼칩니다. 그 가운데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그 당시 학자들이 한 데 모아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꽤 많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세는 단순히 ‘구전’(Oral Tradition)만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결코 말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지 않고 이 모든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명하셨고, 그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선지자들도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이지, 구전으로 남긴 것이 아닙니다. 말이라는 것은 한 두 사람을 거치면 내용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할아버지 100세’라고 말했는데, 10번째 사람에게 전달이 되었을 때 “우리 할아버지 70세‘가 되어 있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구전은 정확도가 엄청나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든 말씀을 기록하게 해서 남겨 둘 것을 명하셨습니다.

고대 중동지방에서는 한 나라의 왕이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할 때 언약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 언약의 내용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언약이 체결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중보자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예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너희는 죄인이고 나와는 아주 큰 간격이 있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힘으로는 내게 올 수 없지만 중보자 예수를 세웠으니 내가 세운 중보자 예수를 믿고 내게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결코 흐릿하거나 희미하지 않습니다. 명확하고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을 보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Ⅲ.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그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적인 반응을 보인다

 

3절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이처럼 신속하게 준행하겠다는 순종적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 앞에 꼼짝없이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은 바로를 이긴 분이시다!”,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200만 명을 건너게 하신 분이시다!”,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신 분이시다!”, “매일 만나를 주시는 분이시다!”, “반석을 쳐 생수를 공급하신 분이시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지 불과 한 두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경험으로 알게 되었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거부할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합니다. “예수님만 중보자가 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 “다른 종교도 다 좋은 의도 아니냐?”는 식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아니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있습니까?”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사람은 절대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솔로몬 왕이 했던 말입니다. 나이가 많아 90세가 넘고 심지어 100세가 넘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 살 짜리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식의 근본이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되고 경험하게 되어 높은 지식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거부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문기사는 같지 않습니다. 신문기사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기자가 자기 생각을 바탕으로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자 중에는 말도 안 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자가 쓴 글들을 액면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비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거부하면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이고, 믿고 받아들이면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Ⅳ. 하나님은 희생제물의 흘려진 피로 인해 택한 백성들의 죄를 사하신다

 

출애굽기 24장에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4~5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언약을 체결할 때 단을 쌓았습니다. 단은 희생제물을 잡아서 불로 태워 제사를 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단을 쌓은 이유는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해 쌓은 것입니다.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돌을 쌓아 그 위에 제물을 태워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웠습니다. 기둥이라는 것은 흔적의 증거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명소에 왔다가며 꼭 바위 같은 것에 낙서를 해 두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흔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둥을 세워 이 일에 참여했다는 증거를 삼았습니다.

열두 지파가 기둥을 세워 증거로 삼은 후에 청년들을 보내어 소를 잡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청년들을 보냈을까요? 이때는 아직 제사장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이 제사장이 된다는 원리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을 때였기에 청년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소를 잡아 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6절에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청년들이 잡아온 제물의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그릇에 담고 반은 단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8절에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Blood of the Covenant)니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모세는 희생제사의 피를 두 개로 나누어 하나는 단에 뿌리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단에 뿌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뿌렸다는 의미이고, 백성들에게 뿌린 것은 사람에게 뿌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단에 뿌린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목적입니다. 또 백성들에게 뿌린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백성들이 지은 죄를 사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대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치하시는 대 원리가 히브리서 9장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준행하겠다고 했어도 그들 속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그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모두 다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십계명을 다 준수하셨습니까? 아니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저주를 희생제물의 피로써 제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희생제물의 피는 예표에 불과합니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삼으시고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그 피를 단에 뿌리시고 백성들에게도 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제거해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진리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아무리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 “난 예수가 내 죄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예수는 그냥 훌륭한 선생님일 뿐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마음에 피 뿌림이 없는 사람이고 죄 사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고 천국에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이것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흘리심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의 죄 때문인 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Ⅴ. 하나님은 죄 사함을 받은 백성들과 교제하기를 기뻐하신다

 

11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 뿌림을 받은 이후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백성들을 손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게 되었고, 먹고 마시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주의 만찬을 행함으로 늘 기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신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성도가 죽어 육신을 떠난 후에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에서 혼인잔치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례를 많이 하다 보니 혼인예식이 기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신랑 내지 신부를 사위와 며느리로 삼는 부모님의 경우 혼인이 꼭 기쁜 것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는 언제나 기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부모님이 반대한 결혼이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부부로 공포되는 이 날을 그들은 엄청나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천국의 기쁨도 혼인잔치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된 성도들이 혼인잔치를 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고 죽으면 천국에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천국에서 복을 누린다는 것은 단순히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복’(Blessing)을 조금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복’(Bliss), 즉 말로 다할 수 없이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살아도 복되고, 죽으면 더 복이 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살아도 비참하고 죽으면 더 비참한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2~18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시내산 정상에 오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왜 오셨다가 다시 가시고, 또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실까요? 요한복음 14장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우리가 갈 자리를 다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처소에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신이 아니고 피조물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자식은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참으로 신묘막측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사람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 죄 사함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분과 동행하게 되고, 죽어도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워놓으신 구원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 몸을 찢으시고 모든 피를 흘리시고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부르셔서 “너희는 내가 세워놓은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단 한 분도 예수님을 믿지 못해 멸망 받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내산의 언약 - 이스라엘의 하나님

출애굽기 24:1-11 / 이상호 목사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애굽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십니다.(출 19장) 그래서 한 나라를 조직하여 세우시고, 그 나라의 법으로 십계명을 주십니다.(출 20장) 그 십계명을 세세하게 풀어서 그 백성들에게 주시면서(출 21장-23장) 언약을 맺는 내용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출 24장)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식을 행하는 장면이 마치 결혼식을 하는 장면과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언약의 말씀을 낭독하게 하시는데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 나서 일제히 "우리가 준행하리이다"하며 온 마음으로 응답한 감동적인 장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화답을 하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그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자발적인 성도의 헌신입니다. 한 나라의 선진도를 측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자원봉사자들의 비율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10% 이상은 되어야 선진 국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은 주님의 일을 언제나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겸손한 모습의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은 열정을 가진 성도입니다. 공부에 집중력이 없어서 산만한 아이들은 도서관에 보내면 효과가 있습니다. 도서관에 가면 적어도 2-3시간은 끄떡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변에 공부하는 분위기가 그 아이로 하여금 동참하게 만드는 거예요.

 

교회도 분위기가 중요해요. 모이면 그저 남 얘기하는 분위기의 교회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분위기가 좋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면 기도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따라가게 됩니다. 전도에 관심이 많은 분위기의 선교회라면 전도하는 분위기로 나아가게 됩니다. 가정의 분위기도 중요합니다.

 

심방할 때 중요한 것은 "이 가정은 영적인 분위기인가? 아니면 세속적인 분위기인가?"입니다. 그것은 좀 신경 써주시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예수님 사진으로 도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위기는 어떤 분위기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열정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그 열정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선포하시는데 어느 한 사람 거부하지 않습니다. 거절하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압적이고 강요된 분위기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모두가 공부하는 그 분위기 속에서 평소 한시간도 못하던 내가 3시간을 하고 나왔다고 해서 공부를 강요당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사랑과 관심과 그 열심이 얼마나 뜨거운지 어느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어요.

 

백성들이 3절과 7절에서 "우리 모두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신 말씀을 지키겠습니다"라는 감동적인 약속을 하자 모세는 세 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4절 전반에 보면 모세는 새벽 일찍이 제단을 쌓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아래 단을 쌓고" 모세가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는 네 그룹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모세, 또 하나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장로 70인, 마지막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소를 잡아서 화목제와 번제를 드렸습니다. 화목제라고 하는 것은 속죄제와 속건제와 더불어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 받는 제사입니다. 번제라고 하는 것은 소제와 함께 우리의 삶의 감사의 조건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언약의 말씀을 선포한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감사와 회개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모세가 한 일은 4절 후반에 보면 "12지파의 수 대로 기둥을 제단에 세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를 보시면 좌우에 두 기둥이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들어오시면서 이 두 기둥을 볼 때마다 야긴과 보아스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가 세우셨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의미의 기둥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제단이라는 확신을 보아야 합니다.

 

제단에 12기둥이 있다는 것은 교회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이렇게 교단이 많습니까? 감리교도 있고, 성결교도 있고, 장로교도 있고.... 하나로 만들면 좋을텐데 왜 그렇게 교단이 많습니까?" 교단이 하나가 된 적도 있었어요. 일제시대에 일본이 강압적으로 모든 교단을 하나로 만들고 거기에 응하지 않는 교단은 아예 폐지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로 모세가 한 일은 6절과 8절에 보면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피를 뿌린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엄숙한 언약의 모습입니다. 소를 잡아 그 피의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백성들에게 뿌렸다고 했어요. 어디에 뿌렸겠습니까? 머리에 피를 뿌렸습니다. 원래는 머리에 피를 뿌리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내가 너를 통해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암소와 염소 그리고 양을 제물로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제물의 절반을 쪼개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때 제단의 제물은 모두 각을 떠서 드리는 것인데 그때의 하나님의 요구는 달랐습니다. 소의 절반을 쪼갰습니다. 양의 절반을 쪼갰습니다. 염소의 절반을 쪼갰습니다. 새만 쪼개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짐승을 쪼개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속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칠 거예요.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쪼개어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라" 그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네가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이 쪼개어진 짐승처럼 되리라"

 

언약은 피의 언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약속한다는 것은 바로 짐승을 쪼개어 놓고 피가 흐르는 그 가운데로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그래서 중요해요. 그러므로 주님은 뭐라고 그럽니까? "나와의 약속은 손해가 날지라도 반드시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언약하는 이 장면에는 이스라엘의 수백만 백성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다 쪼개어진 짐승 사이로 지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단에 절반의 피를 뿌리고, 나머지 피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뿌립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피의 언약 사건을 기억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마지막 만찬에 불러주신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고 하십니다. 식사 후 잔을 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포도주를 따라 주시면서 당신이 그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의 새 언약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매달 첫째 주일에 이 피의 언약을 성만찬을 통해 체험하고 있습니다. 피를 마시는 우리의 모습, 그것은 곧 아브라함이 짐승을 갈라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만찬을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피의 언약을 생명을 다해 지키겠다는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성만찬을 할 때 최소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어야 한다는 자격 지침을 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의 소중함을 알아야 그 언약을 지킬 수 있다고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신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말씀뿐만 아니라 몸으로 몸소 행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흘리시는 피의 언약의 사건입니다. 아브라함과 피의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이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피의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십자가의 사건으로 피의 언약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십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의 영혼들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는 구체적인 우리의 모습들이 해외 선교로, 이웃을 향한 봉사와 섬김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다른 민족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 그리고 우리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 오늘 그 사랑이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에 대한 분명한 사랑의 응답으로 자리매김 되고, 그 사랑의 표현이 넘치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시 결혼식을 연상하면서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시내산에 서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마주 대하고 서는데, 맨 앞에 모세가 서고, 그리고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70인 장로들 마지막으로 온 백성들이 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말씀을 모세가 백성들에게 낭독을 합니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을 모아서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약속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12지파의 수효대로 기둥을 세우고 하나님께 제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제물의 피를 큰 양푼에 담아서 반은 여호와의 단에 뿌리고 다시 언약서를 낭독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맹세를 합니다. 그런 후에 여호와의 단에 뿌리고 남은 피를 백성들에게 뿌리면서 모세가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렇게 해서 결혼 언약식이 끝났습니다. 이제 신부가 신랑의 얼굴을 봅니다. 9절과 10절이 그 내용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백성들의 대표들이 하나님을 봅니다. 이는 구약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피로연을 합니다. 11절 말씀에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피로연이 끝난 다음에 신랑과 신부가 한 집에서 살림을 차려야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자신의 성막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후에 2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의 내용이 성막을 세우는 내용입니다. 먼저 이 본문을 결혼식과 관련하여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전체적인 한 가족의 시각으로 보십시오. 하나님은 건실한 한 남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는 그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이는 제가 억지로 같다 붙인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렘 31:32에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면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질책할 때에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질책을 합니다. 어디를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느냐 면, 바로 우리의 본문인 이 내용을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인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는 그 나라가 눈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출생하였습니다. 그 출생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육신의 자손이 아니라 약속의 자손들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삭에게 속합니다. 이삭의 출생이 곧 모든 이스라엘의 출생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이스라엘이 점점 자라기 시작합니다. 야곱에게서 그 나라의 이름이 결정되고, 그의 12 아들들에게서 그 기초가 세워집니다. 그럴지라도 그 나라의 백성들이 7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어린 소녀 같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그 70명을 애굽의 좋은 환경에서 430년 동안 양육하십니다. 풍성한 곡식, 푸른 초장, 그리고 화려한 문화와 국방을 든든히 지키는 군사, 안정된 정치 이런 좋은 환경에서 430년을 양육 받고 보니, 이제 이스라엘의 수효가 장정만 603,550이 되었습니다. 한 나라를 세우기에 합당한 수효가 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시집갈 수 있을 정도의 성숙한 처녀가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과 결혼식을 올리려고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를 방해하는 바로와 그 군대를 하나님은 용서치 않으시고 10가지 재앙으로 그리고 홍해에 수장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처녀의 손을 붙잡고 애굽에서 이끌고 나와서 시내산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이 결혼식 후에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성막을 지으시고 교제하면서 동행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새집을 지으시고 더욱 풍성한 교제를 이루시면서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으로서 신부 된 이스라엘을 향해서 마땅히 베풀어주어야 할 책임,그리고 신부 된 이스라엘은 남편에게 마땅히 지켜야할 본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거 할 집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먹여 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거처로 이미 준비하셨고, 광야 동안은 만나로 자기 아내를 먹였고, 가나안 땅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도록 풍성한 복을 주셨습니다. 또 이방의 모든 대적들로부터 지켜주셨고,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남편으로서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로 사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 사람이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 인생의 영광이듯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교제하는 그 삶이 곧 구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남편 하나님께서 신부에게 명합니다. 나 외에 신을 섬기지 말고, 그 모양도 만들지 말지니라. 즉 다른 남자 사귀지 말고, 그 사진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 말을 잘 듣고 행하면 내가 지금 보다 더 좋은 것으로 풍족하게 채워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남자를 사모하고 따라가면 너희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몰수해 버리고 이 거룩한 땅에서 쫓겨날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좋은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이곳저곳에서 굴러다니다가 온 이방의 우상을 사모하고 따라갔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이방의 우상은 눈에 보이도록 크게 만들어 세워놨거든요? 그래서 따라간 것입니다. 바람이 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남편이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외간 남자와 놀아나고 있는데, 그것도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수 십 번을 그렇게 하였는데, 함께 좋다고 살겠습니까? 처음에는 한 두 번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면서 그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말로 하다가 안되니까? 용돈을 줄이셨습니다. 그랬더니 정부에게 용돈을 얻으려고 더 쫓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하여 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바람난 사람의 특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는 멸망의 증거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매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게 속 넓으신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이방의 나라로 쫓아 내버립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넘겨버립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자신의 가정을 완전히 깨뜨려 버리지 않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간 남 유다를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하셔서 다시 가나안에서 살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이렇게 해서 구약 성경이 끝이 납니다.

 

옛 시대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지만, 지금의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이 이스라엘의 구원이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교회와 함께 함이 우리들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피로 맺은 언약 체결식

출 24:1-11 / 박덕기 목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 시내 산에서 도덕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 외에,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시민법과 율례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출 20-23장에서 선포된 율법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선민 언약을 공식 체결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언약 체결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명실 공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고, 한편 모세가 언약 체결을 위해 뿌린 희생 제물의 피는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하며, 언약 체결을 기념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공동 식사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기념하는 성찬예식을 예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에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그 앞에 나아가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구약 시대 성소의 휘장은 스스로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생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중재자 곧 제사장을 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사람들과는 달리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며 깊고 내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담당하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죄의 장벽을 제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장벽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어떤 인간 중재자의 도움 없이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과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은혜 중에 참으로 귀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아론 및 그의 두 아들과 이스라엘 70인의 장로들과 함께 올라와 경배하도록 지시하신 기사에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의 위치가 각기 달랐다는 것입니다. 즉 모세는 산꼭대기까지 올라 하나님께 가까이 경배했지만, 모세와 동행했던 수행원들은 산 중턱에서, 그리고 나머지 백성들은 그냥 진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의 신앙의 깊이에 따라 경배의 깊이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보면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잘 경배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사람마다 신앙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는 것은 신앙의 깊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즉 우리가 신앙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만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고, 그로 인한 은혜의 깊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더욱더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앙의 깊이를 깊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더욱 충만히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절을 보면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목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선포한 하나님의 율례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모세가 언약서를 낭독할 때 다시 한번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거듭된 순종의 고백은, 비록 이후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당시로서는 진실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신앙적 결단은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결단을 듣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인생들의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어떠한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실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에 대해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고백이 없었다면,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언약은 체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단 한 마디의 반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목소리로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라고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을 들은 자들의 바른 태도입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현실에 따라 어떤 때는 순종하고, 어떤 때는 순종하지 않는 태도는 온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머뭇거리려서는 안됩니다. 순종의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영구히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범죄하기를 수없이 거듭했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기록된 말씀을 갖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들의 마음 판에는 새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문서로 보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 판에 새겼다면, 그들은 언제까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간직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범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문서 자체로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그 말씀이 그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그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불순종하고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문서로만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판에 새기지 않는다면, 결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라고 강력하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판에 새기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행위의 준거로 삼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삽시다. 그럴 때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능력이 되며,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할 것입니다.

 

5-8절을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마침내 선민 언약이 체결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먼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희생 제물에서 받은 피를 양푼에 담아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이렇게 희생 제물의 피가 제단과 백성들에게 뿌려짐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언약이 맺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모든 언약은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처럼 짐승의 피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을 맺게 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새 언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 석상에서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화목 제물이 되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 주심으로, 그 피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도록 하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우리는,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비교도 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은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도,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없이하지 못하는 반면,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죄를 온전히 제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복된 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친히 피흘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 언약을 맺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우리의 영원한 찬송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9-11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오직 모세만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고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은 다만 멀리서 경배하게 하셨던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이처럼 언약을 맺기 전에는 모세 외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막으셨던 하나님께서, 언약 체결 후에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접근을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시게 하신 것은, 언약 체결 후에 언약 당사자 간에 공동 식사를 하였던 당시 근동의 언약 체결 관습에 따른 것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교제가 회복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선민 언약을 체결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범죄 하기 이전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 체결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과 자유롭게 나아가지 못했으며,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사장과 같은 중재자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 안에서도, 특별히 세워진 대제사장 이외에는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사건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본문의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 사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된 성도들이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분과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론 및 그의 두 아들과 이스라엘 장로 70명을 데리고 하나님께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출 33:20을 보면 하나님을 본 자는 누구든지 즉시로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대로라면 모세와 그의 수행원 73명도 즉시로 죽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1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죽어야만 할 그들을 죽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라는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면서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을 죽이는 대신 도리어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은, 이스라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오히려 기쁨의 향연을 그 앞에서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언약 백성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만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욱 복된 것은 그러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은 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기쁨의 향연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 것만도 지극한 은총인데,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영원한 기쁨의 잔치를 예비해 두셨다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된 우리들이 그런 축복을 누릴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피를 흘려 나를 언약 백성 삼아 주신 것을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약 백성 된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축복을 항상 소망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약속은 철저한 이행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국가간의 조약은 이해관계에 따라 어제의 혈맹이 오늘의 적으로 돌변하게도 합니다. 또한 정치인들의 선거 전 공약(公約)은 일단 당선이 되면 공약(空約)으로 바뀌는 것이 대부분의 현실입니다. 개인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사귄 친구라 해도 신경을 쓰며 빠짐없이 살펴보아야 손해나 사기를 당하지 않을 만큼 불신이 가득찬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은 다릅니다. 이 약속에는 담보도 필요 없고, 손해나 계약의 불이행을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귀한 아들이 그의 흘린 피로 맺어진, 도저히 파기할 수 없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의 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그의 언약 백성이 된 것과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의 언약은 영원토록 불변한 것입니다. &#9835;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 하시네/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 주님만 따라 가리&#9835;

 

이 세상의 모든 것은/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헛되고 헛된 것이다./사람의 목숨이나 한 떨기 꽃송이도 때가 되면 다 시들어/그 아름답던 모습 사라지고/젊음은 가고 육체는 늙어서/어느 날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그날/우리들의 영혼은 몸을 떠나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한 개의 외로운 별똥이 되어 이 지구를 유랑하는 것일까/그 넋은 서러워 한이 되어/차마 떠나지 못하고 우리 주위를 맴도는 것일까/우리가 당신께 감사하는 것은/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이 세상 모든 것 허망하고 허망해도/내가 오늘 살아갈 수 있는 것은/그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이 세상 모든 것 어느 날 자취없이 스러져도/당신의 언약은 영원하리/영원한 생명 속에서 살아가리! 할렐루야 아멘!

 

전 미국의 예일대 총장이었던 티모디 드와이트 박사는 총장 재직시 설교를 통해 예일대에 큰 영적 부흥을 일으킨 분인데, 그는 이렇게 찬송하였습니다.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생활과 구주와 맺은 언약을 늘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피 뿌림의 의미

출 24:1-11 / 임덕순 목사

절기를 제외한 평소 주일에는 우리가 출애굽기를 배우는 중입니다. 출애굽기 20-23장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법칙들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에 그때 주셨던 법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얼마나 정확한 지침이 되는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25장부터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쓰일 도구와 성막을 만드는 방법과 모양, 자재 등 그들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을 주시는데, 그 내용도 깊이 연구해보면 당시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제도화하는 내용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24장은 그 중간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이미 주신 말씀들을 백성들에게 다시 들려주어서 자기들이 어떤 명령을 받았는가를 재확인하는 기회를 주신 것이고, 앞으로 계속해서 받을 말씀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각 사람의 위치

본문 1-2절을 보면, 각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자기 위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장로 70인은 모세를 따라 산에 올라가 대기해야 했고, 모세는 산 정상까지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씀을 받아야 했으나, 일반 백성들은 산 아래에 있어야 했고, 조금도 산에 접근하거나 침범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각 사람이 서야 하는 자리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성전을 지은 후에는 더욱 분명해 지지만, 지성소에는 오로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가 있었고, 성소에는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성전의 안 뜰에는 일반 백성들이 들어갈 수 있었고, 이방인들 또한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나아갈 수가 있지만, 그러나 각자 자기가 나아갈 수 있는데 까지만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을 차별하신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알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자리를 구분하셨을까요? 산 정상, 하나님 앞에 올라간 모세만 구원받았고, 산 중턱에 대기 중인 아론과 장로들은 구원에 가깝고, 산 아래 있는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구분하는 목적이 사실은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분수를 모르고 아무나 하나님께 접근하다가 망할까봐서 자리를 정해준 것입니다. 좀 더 가까이 나아가는 모세와 아론과 장로들은 더 잘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돕기 위해서 세움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말씀을 받아다 백성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자기들의 위치가 낮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므로 위험을 면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사가 되어야 신앙생활 제대로 한다고 생각하거나, 기어이 장로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사실 그 자리는 도리어 훨씬 위험한 자리입니다. 평신도보다 훨씬 더 많이 봉사해야 하고, 훨씬 더 바르게 살아야 하고, 훨씬 더 책임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직분만 가지고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무서운 책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자리를 사랑하고 현재의 위치에서 순종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신 말씀에 대한 감사

백성들에게 자리를 정해준 모세는, 이미 받은 율법을 읽어주었습니다.

모세는 다시 산에 올라가서 그들이 지켜야 하는 세세한 신앙과 삶의 규칙을 받아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에 앞서서 이미 받은 말씀에 대하여 그들의 반응을 요구하셨습니다.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미 받은 말씀을 읽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제단 앞에서 백성들에게 받은 율법을 읽어주고 다짐하도록 했습니다.

 

우선 모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보내어 제물을 가져오게 하여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는 자기들에게 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법을 받게 되면 그것 때문에 우리의 행동과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사회생활 하기에 힘드는 면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계명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자기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는 것, 자기들을 특별취급 해 주신다는 것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려고 하면 당장은 남들처럼 행동할 수 없어 힘이 듭니다. 주일에 상거래를 할 수가 없고 꼬박꼬박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려야 하고 물질을 벌면 맘대로 쓸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먼저 거기에 써야 합니다. 신자로서 산다는 것은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대통령이 길거리 노숙자처럼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해서 불평하고 대통령 안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길거리의 노숙자처럼 아무데나 소변보고 아무데나 누워 자는 것을 자유라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백성다운 행동을 해야 하고 그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천국을 상속 받을 사람으로서의 특권이며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기억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기를 힘쓰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자식한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잔소리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니까 차 조심해라. 나쁜 친구 사귀지 말라. 집에 일찍 돌아오라고 잔소리하며 간섭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가 보기에는 자기 부모에게 간섭을 받는 아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친 아버지가 되셔서 세세한 법을 주시고 지켜보시며 감독하시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자랑할 특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래서 나는 매 주일 하나님 앞에 나가서 말씀을 받아야 하고, 힘들고 제약이 많지만 그래도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라면서 말씀 받는 자체,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의무를 가진 것을 감사하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에게 제물의 피를 뿌림

모세가 제물의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렸습니다.

그 피는 제단에서 제물 되어 죽은 짐승의 피 입니다. 모세는 그 피를 앞에 둔 채로 언약서를 읽었고, 백성들은 모두가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한 조항 한 조항 읽어 내려갈 때 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라고 모두가 거듭 거듭 대답하였습니다(3,7). 그들은 하나님 앞에 아주 정중한 모습으로 명령을 순종할 것을 재 삼 다짐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 일을 마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백성들에게 산 아래 자기의 자리에서 그대로 머물도록 다시 주의를 주고, 제사장 아론과 장로들을 대동하고 산에 올라가서, 그들은 중턱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모세만 다시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뵙고 계속해서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때 의외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읽어 준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맹세하는 그들을 향하여, 양푼에 담아두었던 나머지 반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다짐하고 대답하고 맹세하는 사람들에게 피를 뿌리라고 하십니다. 참 이상하지요?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피를 뿌린 이유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읽은 언약서는 출20장에 23장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그들이 이미 받은 십계명 등 율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그 명령을 명령서라고 하지 않으시고 언약서 라고 하셨습니다. 7절 8절에도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언약이라는 말은 “디아데케”라는 단어와 “순데케”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순데케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맺는 약속을 말하여, 쌍방간의 계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디아데케는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약속을 일컬을 때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나, 모세가 백성에게 선포한 하님의 말씀은 일방적으로 선포한 약속이지 쌍방간의 계약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약속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받고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살리시면 살아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죽어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지 하나님과 대등하게 “당신이 이렇게 하신다면 나도 이렇게 하겠소.” 하면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인 호의로 우리를 당신의 백성을 삼아주셨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고, 당신의 능력으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우리가 준행하겠다고 두 번 씩이나 다짐 했는데도, 모세는 왜 그들의 머리에 피를 뿌렸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할 것을 요구하시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다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각자 가까이 나와서 도장을 찍으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모세를 시켜서 제물 된 짐승의 피를 언약을 맺는 그들의 머리에 뿌리게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너희와 맺는 약속은 언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너희의 성실성으로 지켜질 것이 아니라. 이 피의 주인공의 공로로 지켜지리라.”는 예고였습니다. 그들이 말로는 지금 우리가 언약을 지키겠다고 용기 있게 다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모두 어기고 말 사람들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들의 약속 지키는 행위를 보아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너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한 그 피의 공로를 내가 보고, 너희를 나의 자녀 삼고 계속 보호해 주고 인도해 주마” 하시는 뜻으로 제물의 피를 말씀을 들은 그들에게 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다짐하지만, 나는 너희가 그것을 지지키 못할 것을 다 안다. 너희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배약을 해서 나를 실망케 할지 나는 안다. 그럼에도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내 백성을 삼고 내 언약을 지켜 보호해주는 이유는, 너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너희 대신 순종한 내 아들의 피 값 때문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모든 피는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나, 매일 제단에 드려지는 짐승들의 피나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날마다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도 다 교육용이었지 하나님이 짐승 고기를 좋아 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1:11-12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였습니다.

 

미가 6장 6-8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셨고,

요5:24에는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밝히셨습니다.

 

롬12:1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산제사 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물의 피가 아니라, 장차 피를 흘리며 죽어서 너희들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바라보고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교육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다 믿고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죄만 지으니,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해 주고 나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상대를 자비와 사랑으로 대하여 사랑이 가득한 사회를 이루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만족하시는데, 그것을 삶의 제사 즉 산제사로 여기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장담은 팔뚝같이 하지만, 한 번도 똑바로 행동하여 보인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이미 전적으로 부패 하였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데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나갈 힘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이 언약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지금 장담은 잘 한다마는 내가 너희의 행동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낼 너희구주의 희생을 보고 내가 너희에게 준 일방적인 약속을 지켜줄 것이고 너희를 대신하는 중보자 예수를 보고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언약의 피가 성취되기 까지 많은 준비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먼저 해 주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워있는 구유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처음 창세기부터 마지막 말라기까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5:39에서 예수님은 친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의 피가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때마다 역설하시면서, 그 그림자를 시대마다 계속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에는 여인의 후손, 혹은 아담의 몸을 덮어준 가죽 옷으로, 출애굽기는 유월절의 양이나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나, 하늘에서 내려와 백성들을 날마다 살게 한 만나, 혹은 제사 때마다 드리는 제물 된 짐승과 그 피로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여주셨고, 민수기에서는 뱀에 물린 자들을 살리기 위해 높이 달린 놋 뱀으로, 여호수아는 기생 라합의 집에 매달게 한 붉은 줄 등으로 끊임 없이 우리를 구원할 구주의 그림자를 보여주셨습니다.

 

셋째, 때가 되어 그분이 직접 오셨고, 그분이 우리대신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9:11에 “그리스도께서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인류의 죄를 단 한 번에 사하고 구원하는 완전한 제사였습니다.

 

넷째,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고 그림자로 보여주시며 약속하신대로, 그리스도는 때맞추어 오셔서 우리 대신 처형을 당하셨고 피를 흘려주셨지만, 그것이 오늘 나에게 주관적인 사건으로 믿지 아니하면 나와 그리스도의 피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저 옛날에 일어난 남의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어 우리의 눈을 뜨고 귀를 열어주셔서 구약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기 위함임을 깨닫고 믿게 하시어 구원을 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모세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장로 70인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산의 중턱까지 올라간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한 하나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홉 제자를 산 아래 두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 산에 올라갔다가 변화하신 예수님의 용채를 뵙던 장면을 연상시키는 상황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그 발아래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였다”고,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은 비록 백성 중에서 뽑힌 사람이었고, 일반 백성들보다 경건한 사람들이었기에 백성들에게는 존귀한자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죄인이어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접근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사야6장에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고는 반가워 한 것이 아니라 절망하였는데, 죄인이 하나님을 뵈올 경우에 즉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손을 대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로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먹고 마실 때가 올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땅위에 사는 성도가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면서 사랑을 누리며 살 것을 의미하고, 장차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동거할 것을 보여주는데, 그런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신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개인의 행위나 경건함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혈공로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피 뿌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뵙고도 즉사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특혜를 누렸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피 공로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언제나 명심할 것은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우리를 보호할 것도 없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할 것도 없으며, 우리를 사단과 죄의 세력에서 승리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피, 그 피의 주인공이신 우리주님을 사랑하며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그분께서 주신 말씀을 순종하려고 애쓰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이스라엘 자손의 존귀한 자들

출애굽기24:1-11 / 성홍모 목사

오늘은 2002년 신년주일이며, 성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여러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회헌신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10여 명의 목사님들이 모인 것 같았는데, 당회 헌신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당회원 수련회는 교회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것 같은데, 당회 헌신예배는 별로 드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데, 당회원들이 먼저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헌신하는 것이 모든 성도님들에게 본이 되고, 성별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회원으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여러 부서와 기관들을 책임지고 나아갈 때 진정으로 헌신하지 않으면 교회의 성장과 화합을 가져올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당회원의 신앙은 곧 그 교회의 신앙이요, 당회원들의 가진 교회에 대한 비전은 곧 그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본 교단의 헌법에 따르면 우리 교회는 3개의 치리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당회이며, 영주교회의 당회는 영주교회라는 지교회를 치리합니다. 치리한다고 하니, 이상한 말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통치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통치하고 관리하고, 통솔하고 선하게 이끌어간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 사전에는 "치리한다"는 말은 기독교의 고유한 언어가 되었다고 하면서 교인들이 교리에 불복하고 불법한 일을 한다면 당회에서 이들의 증거를 수집하고 심사하여 책벌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평양노회에 속하여 있습니다. 지 교회의 상회이며, 두 번째 치리회로 노회가 있습니다. 노회는 소속한 여러 교회들을 치리합니다. 그리고 평양노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총회에 속하여 있습니다. 장로교회의 최종 치리회는 총회입니다. 총회는 소속한 모든 노회를 치리하고 있습니다.

노회 안에 상설 재판국이 조직되어 있습니다. 재판국이 조직되어 있어도 한번도 모이지 않으며, 모일 일이 없으면 참으로 좋은 일인데, 매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도 많다보니, 재정 사고도 나고, 불미스러운 건덕 상의 문제도 발생하고, 치리권한을 발동하여 권장하고, 징계할 것은 징계하여야 합니다.

모든 치리회는 목사와 장로로 조직하며 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목사만의 치리회가 아니며, 장로들만의 치리회도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이 서로 협력하여 치리하는 것입니다. 각급 치리회는 각각 고유한 권한이 있지만, 순차대로 상급 치리회의 지도 감독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치리회는 교회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며 행정과 권징을 장악하고 치리합니다. 모든 치리회는 성경의 교훈대로 교회의 성결과 평화를 위하여 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당회는 지 교회에서 시무하는 목사, 부목사, 장로로 조직합니다. 당회의 조직은 세례교인30명 이상이 있어야 하며, 최초의 세례 교인 30명 이상일 때 2인의 장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당회라고 하면 목사와 장로 2인 이상이 있어야 당회라고 합니다. 장로를 증원할 때는 세례교인 30명에 한 명의 장로를 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장로는 무흠 세례교인으로 7년이 경과되어야 하며, 나이가 40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는 말 그대로 나이가 연장자이며 노숙해야 하기 때문에 40세 이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회는 목사와 장로 2인 이상이 있어야 조직할 수 있습니다. 교세가 약해져서 목사님이 안 계시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장로가 세상을 떠나므로 폐당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무장로가 1명도 없으면 폐당회가 됩니다. 목사님 한 분만으로는 당회가 될 수 없습니다. 장로님이 한 분 계신다고 해도 장로님이 충원되어야 하는데, 2명 미달되거나, 세례교인 30명의 미달로 2년을 경과하면 당회가 폐지되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장로님 한 분으로 2년 동안은 준당회라고 합니다.

이러한 헌법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으면 우리 교단 총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총회헌법이라는 내용을 참고하면 자세히 전문이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헌법 책을 따로 살 것이 없고, 컴퓨터가 수십만 권의 책이요, 수천 수만의 도서관이라는 점입니다. 참으로 좋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장로님들의 기원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장로라는 용어가 처음 성경에 나타난 것은 나이가 많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창24:2의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늙은 종"에서 "늙었다"는 말 히브리어로 '자켄'이라는 말인데, 나이가 많은 사람, 노인이라는 말인데, 노인이지만 존경받는 노인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노인이란 당시 사회에서 노인이란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진다는 것은 달관의 지혜가 축적된다는 말로 이해하였습니다. 결코 지식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생을 도통하는 달관의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어떤 가문에서든지 그 가문의 어른들을 존경하였으며, 높이 받들었습니다.

애굽에는 바로의 궁전에 원로들이 있었고, 애굽 땅에는 많은 원로들이 있었습니다. 창50:7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장례 지낼 때 애굽의 많은 원로들이 참석하였는데, 애굽이란 나라에서 가지고 있었던 제도가 바로 원로, 장로제도였습니다. (창50:7)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개정판에는 "원로"라고 했지만, 개역 성경에는 "장로"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할 때에도 애굽의 제도를 본받아 장로를 두었습니다. 70명의 장로들을 선출하였는데 민11:16에 나와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데리고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1. 장로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모세는 백성의 장로로서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한 마디라도 한다면 일반 백성들이 따라하고, 순종할 수 있는 위치에 서고, 백성들을 이끌어갈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능력을 주시어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한 사람 모세에게만 지우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백성의 장로라고 하여 무조건 나이 순서대로 끊어서 70명을 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을 이끌고 가며, 모세를 도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하여 70명을 구성한 것입니다. 이 장로의 직분은 백성의 유사요, 지도자였습니다. 모세가 져야 하는 짐을 나누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장로님들은 목사님들이 져야 하는 짐을 나누어지고, 신령상의 문제로 교인들을 돌아보고, 가르쳐야 하는 분들입니다. 교회에서 감독을 세우고, 장로를 세울 때에는 여러 가지 자격을 말씀하는 중에 가르치기를 잘 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장로님들은 상당한 식견과 통솔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의 자격 중에 총회가 직영하는 신학대학을 나와야 합니다. 장로님들은 신문도 잘 읽어야 하고, 전문 분야에서 연구하고 교회에서는 어느 분야에 그 책임을 맡겨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대로 말하면 장군이 되어서, 장군이 되면 어느 특정한 분야가 아니더라도 어느 병과를 가리지 않고,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군대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요,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2. 장로들은 언약의 당사자들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들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 70명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산 시내산에 올라가서 언약을 체결합니다. 이것인 구약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제사에 관한 제사법, 종에 대한 법, 폭행과 같은 형사법, 경제상의 배상에 대한 법, 도덕에 대한 법, 안식일을 비롯한 종교적인 법률을 듣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다 듣고 준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숫자대로 12기둥을 세우고,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제단 앞에 12기둥을 세웠는데 제단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요, 12기둥은 이스라엘 12지파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제단과 기둥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제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제단과 기둥 사이에서 언약 즉 계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은 기둥 곁에 서고,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제단 앞에 서 있었습니다.

모세는 청년들을 보내어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6절입니다.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언약서를 가져다가 읽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말씀이었습니다. 모세는 참으로 진지하게 율법서를 낭독하였습니다. 이제 이 언약을 맺어야 합니다. 이 때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모세는 남은 피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소의 피를 내어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절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리고 언약서를 읽고 준행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왜 짐승을 잡아서 피를 내었습니까? 이 언약이 깨어질 때는 체결할 때처럼 피흘림이 따른다는 무서운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언약을 체결하는데,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일반 백성을 대표하는 당사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언약의 당사자요, 증인들이요, 후손 대대로 그 신앙을 이어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어느 수도원에 수도사를 자원하는 한 남자가 찾아와서 수도원장과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 지원자에게 "우리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은 복종"이라고 말하면서 어떤 명령이라도 복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지원자가 무슨 명령이라도 다 따르겠다고 다짐하자 수도원장은 다 말라버린 버드나무 막대기를 땅에 꽂으며 막대기에서 잎이 날 때까지 물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명령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수도원은 물이 귀하기 때문에 3km 나 떨어져 있는 나일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막대기에 물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도사 지망생은 묵묵히 그 먼 곳에서 지게로 물을 길어다 그 막대기에 물을 주었습니다. 1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는 이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수도원장의 말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1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그 일을 쉬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3년 째 접어들었지만 그는 막대기에 물을 주기 위하여 먼길을 여전히 왕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막대기에서 싹이 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의 절대적인 순종과 성실한 생활이 기적을 낳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 수도사는 나중에 그 수도원장의 후계자가 되어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연구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내가 실천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람 모세나 아론이나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백성의 70 장로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나아갔습니다. 여기 본문에는 오직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경건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경건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엄숙한 경외심을 가지고 겸손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질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는 계약할 수 없습니다. 먼저 들어야 하는 사람은 제사장들이었고, 나아가 백성의 장로들이었고, 일반 백성들까지 정확하게 알아야 했습니다.

8절입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으로 언약은 체결되었고, 언약의 후속 조치인 식사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3. 장로들은 신령한 교제에 힘써야 합니다.

 

모세는 아론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아론의 큰아들 나답과 작은 아들 이비후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원로들인 70명의 장로들은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발 아래는 마치 청옥을 편 듯하며, 하늘 같이 청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모여 앉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먹고 마셨습니다. 여기에 아주 귀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이스라엘에서 존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일꾼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신령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세대의 후손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때라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사람은 죽어야 했습니다.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손대지 아니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하여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이번의 식사는 계약의 식사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밥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먼저는 번제를 드려 모든 제물을 하나님에게 드렸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를 드리고는 제사장과 제사들 드리러 온 사람들이 함께 앉아 고기를 나누며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감사제사인데,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주인으로 이스라엘의 식탁에 참여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화목이라는 말은 완전, 조화, 안녕을 나타내는 말에서 나온 말인데, 화목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고, 공동체의 안녕과 조화와 완전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화목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조화와 사귐, 그리고 제사장과의 사귐, 그리고 백성들 간의 사귐이 이루어져야 하였습니다. 장로님들은 하나님과의 사귐, 신령한 교제에 힘쓰고, 교인들간의 화목과 완전과 안녕을 가져오려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거룩한 식탁의 교제, 성찬 예식은 화목제의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나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백성의 70명의 장로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존귀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원래부터 존귀한 자들이었습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뵈옵고 신령한 교제를 하였으며, 백성들을 대표하며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였고,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믿음의 좋은 본을 보이고 좋은 전통을 넘겨주려고 힘쓰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존귀한 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보신 분들이어서 존귀한 분들입니다. 선택함을 받았으며, 분리되었고, 보존하시는 사람입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교인들 중에서 존귀한 사람으로 끝까지 인정받으려면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감당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순종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국민일보에 실렸던 글이었습니다. 영국의 [윌리엄 부스]의 구세군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세계 도처의 남녀들이 구세군에 입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때는 주교가 되려고 꿈꾸었던 한 남자가 구세군에 입대하기 위해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무엘 브렝글'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스 사령관은 처음에 그의 입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부스는 그에게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보스로 군림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브렝글'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른 훈련병들의 군화를 닦는 일을 시켰습니다. 이에 실망한 브렝글은 "내가 기껏 군화나 닦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환상 중에 거칠고 무식한 어부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려고 엎드리고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그들의 발을 씻기셨군요. 그렇다면 이제 나는 저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그 후 브렝글은 즐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더러운 군화를 닦았으며, 청지기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고 충성스럽게 섬김의 도를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후에 미국 구세군 최초의 감독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고 넘겨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언약의 체결

출 24:1-8 / 윤태성 목사

들어가는 말

 

프랑스에 가시면 베르사이유 궁전이 있습니다. 그 궁전은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한 루이 14세에 의해서 건설이 됩니다. 당대 최고의 기술진과 재료가 동원이 되어 유럽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궁전을 건설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거울의 방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길이 75m, 넓은 방을 17개의 벽면으로 나누어 578개의 거울로 장식합니다. 이곳은 주로 궁정 축제와 주로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어떤 방문객이든 다섯 걸음 마다 한 번씩 허리를 굽혀서 왕에게 절하면서 왕에게 알현을 합니다. 75m되는 거리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왕을 향해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굉장한 권세입니다. 그런데 외국의 사절들마저 할 수 없이 왕의 환심을 사기위해서 내국인과 동일하게 알현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병자호란 때 인조 왕이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절을 하며 군신 관계를 맺은 치욕의 역사와 비슷합니다. 이처럼 나라와 나라사이의 조약은 힘과 강압으로 맺어지기 때문에 불평등일때 가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하나님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이 추인하는 형태의 약속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Covenant라고 하는데 이것은 짐승을 잡아서 맹세하는 영속적이고 변개함 없는 언약을 상징합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 백성이 되는 언약이 됩니다. 이러한 언약을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스라엘과 맺으시는 언약의 의미와 역할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시내산 언약의 중요성

 

먼저 언약은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장소적 배경이 되는 시내산은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내산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모세를 만나주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 실 때 “내가 너희 조상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너희 이스라엘의 고역을 들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말씀이 “그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 모세를 부르신 이유와 목표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도 성경을 읽다가 한동안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우리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가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가나안땅으로 가라인데, 모세는 광야에 제사 드리러 간다고 합니다. 모세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까? 자! 여기서 사흘 길의 광야는 어디를 말합니까? 이 거리는 이스라엘의 거주지인 고센에서 시내 산에 이르는 거리를 말합니다. 분명히 가나안 땅인데 모세는 왜 그 백성을 시내산으로 인도하는가? 모세의 생각은 이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역사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필요하지 않지만 만약에 광야를 거치지 않고 가나안으로 직접 갔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이스라엘의 커다란 비극이였을 것 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종의 습관을 못 벗고 그대로 가나안에 가서 애굽의 신을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주어진 자유가 방종이 되어서 가나안은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우상의 소굴로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자유보다도 언약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언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내산의 언약은 우리 교회를 이야기 합니다. 교회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 교회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내적인 외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구원을 받으면 되지 구태여 교회에 얽매여 살 필요가 있는가? 그냥 교회에 얽매이지 않고 혼자서 신앙생활하면 좋겠다 말씀 좋은 곳만 찾아 다닙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광야를 거치지 않고 가나안땅에 직접가야겠다는 생각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 각자에게 교회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과 훈련을 받고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의 신앙을 점검 받게 하시고, 관계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나에게도 시내산이 필요하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꿈이 있는 교회가 나의 시내산 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교회를 사랑하시고 훈련을 기쁘게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을 준행 하리이다.

 

이제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와 아론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제사장이 되는 나답과 아비후과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 70인을 하나님의 산 시내산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올라오라고 하시고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주셨는데 그 중요한 내용은 10계명의 말씀입니다. ①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②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③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지 말라 ④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모세를 통하여 그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약속의 내용은 정확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바로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분은 자기의 의지대로 일을 하며 그것은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기도도 하고,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이 합니다. 여러분 사역 가운데 내 생각으로는 좋은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ex) 모세를 보시면 그는 애국심이 넘치던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애국이라는 좋은 마음도 하나님 뜻이 아니라 혈기로 움직였을 때 그는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와는 그녀가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탐스러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봅니다. 좋을 것 같아 먹었지만 선을 추구하였지만 그 속에 악이 있음을 깨닫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선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와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의 문화들이 선한 것처럼 보입니다. 기분을 좋게 하고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술과 오락 유흥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문화는 저는 “영화 007”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007은 모든 남성들의 로망입니다. 숀 코넬리, 로져무어, 피어슨 브룬손 영국의 미남 배우들 멋있죠! 싸움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시고 마지막 장면은 멋진 여인과 함께 행복해 보이죠! 그런데 그 사람 이후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007제임스 본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분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50대에 에이즈와 폐암으로 걸려서 죽었다.

세상 문화는 결과를 말해주시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약속을 정확하게 말씀해주시고 그것을 지켰을 때와 지키지 않았을 때를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신명기 28장 축복과 저주의 기록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을 말씀해주시고 그것을 지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 대적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미치리라” 들어와 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신앙은 늘 결단을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처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노라” 하나님께서 이제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하시는 모든 언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준행 하리이다” 말씀에 대한 응답을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들은 우리도 이러한 결단과 응답이 필요합니다. 바른 결단이 있을 때 유혹의 세상가운데 말씀으로 승리할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런 은혜가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언약식의 거행

 

여러분 제가 문제 하나드리겠습니까?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수갑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결혼식 반지라고 합니다. 결혼을 하고 반지를 낍니다. 그런데 반지는 언제끼게 되나요? 순서는 성혼이 선포되고 서로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반지를 낍니다. 이제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그 말씀을 준행 하리다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언약식을 거행합니다. 이른 아침에 제단을 쌓습니다. 제단위에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하는 12돌을 세웁니다. 그리고 화목제와 번제를 드리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제사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피 뿌림 입니다. 모세는 제단에 피를 뿌리고 백성에게 낭독한 후에 백성에게 피를 뿌립니다. 그 피는 여호와와 그의 백성을 연합을 이이야기 하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었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은 먼저 조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우리 죄 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약의 제물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언약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가 긍휼하심을 얻고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것이라”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이 이루어지고 이제 언약한 당사자 간의 약속이 지켜져야 합니다. 이제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 가운데 삭개오의 이야기를 보시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말씀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먼저 자신의 죄를 사함을 받은 후 이제까지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변화의 역사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토색한 것의 4배나 갑겠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구원이 이 사람의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다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의 잃은 자, 언약의 회복과 공동체의 회복을 이야기 합니다. 언약의 회복은 공동체의 회복이고, 이때 회복은 자신의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위한 헌신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헌신이 있을 때 그 믿음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나오는 말

 

최근에 출간된 “내가 틀렸었다” I was wrong 짐 베커 목사 아픈 참회의 이야기 입니다.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미국 기독교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레이건, 아버지 부시에 이르기까지 미국 대통령들의 친구이기도 했다. 짐 베커가 던진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를 믿으면 성공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하고도 다이내믹한 그의 설교는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가가 최고조에 달했던 87년 자신의 비서와의 성추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그는 한꺼번에 존경과 명성, 가족을 다 잃어버리게 잃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89년에는 헤리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공금 유용 혐의로 4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나이 50에 쇠고랑을 차는 신세가 됐다. 세상과 단절된 어두운 공간에서 그는 성경의 말씀을 다시 읽게 됩니다. 그가 감옥에서 읽는 말씀은 이전의 메시지와 확연히 달랐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사업이나 큰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고도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경을 읽던 그는 마침내 그는 "내가 틀렸었다"고 외치면서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결국 자신이 성경의 진정한 메시지를 몰랐다고 고백을 합니다. ’내가 틀렸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을 신념으로 생각했다. 짐 베커 목사는 나중에 공금 유용 혐의를 벗고 무죄를 선고 받았다. 4년6개월간 복역하고 출소한 짐 베커는 소외 계층을 위해 봉사활동을 벌이며 5명의 아이를 입양하며 새로운 복음 사역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모세와 이스라엘의 언약 체결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내 생각으로, 내 판단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의 목표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외적으로 드러난 사역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를 보시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자리에 함께 있었고 그도 그런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과는 주님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사로 잡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사역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언약의 의미 그 언약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언약은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친밀함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다니엘 11:32절 말씀처럼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약속의 땅에 곧 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내산과 같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언약을 지키며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언약을 아는 친밀한 관계, 이런 복된 발걸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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