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전의 의미와 물두멍의 규례
출 30:11-21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들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13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14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15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 30:11-21 / [인구 조사] 여호와께서 이어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2) `네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를 세어 인구 조사를 할 때 사람마다 자기 목숨값을 나 여호와에게 바치라고 일러라. 그래야 인구조사를 하여도 전염병이 돌지 않아 아무 일이 없으리라. 13) 인구 조사를 할 때에 등록되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에서 쓰는 세겔로 반 세겔, 곧 20게라를 여호와께 바치는 예물로 내야 한다. 14) 인구 조사를 할 때에 스무 살 이상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등록을 해야 하고 등록된 사람은 반드시 여호와 앞에 반 세겔씩 예물을 꼭 바쳐야 한다. 15) 너희 목숨값으로 반세겔을 여호와 앞에 바칠 때에는 부자라고 해서 반 세겔 그 이상을 드릴 필요가 없으며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세겔 이하로 드려서는 안 된다. 16)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모두 목숨값을 받아 만남의 장막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여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목숨값 내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을 잊지 않고 내내 지켜 주리라.' 17) [놋쇠 물두멍]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또 다시 이르셨다. 18) `몸을 씻을 물두멍을 놋쇠로 만들고 물두멍 받침도 놋쇠로 만들어 만남의 장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물두멍 속에는 물을 담아두어라. 19)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에게 그 물로 손과 발을 씻으라고 일러라. 20) 그들이 만남의 장막으로 들어갈 때에 그 물로 손과 발을 씻어야 죽지 않으리라. 또한 그들이 여호와에게 제물을 불로 태워 바치기 전에도 손과 발을 물로 씻어야 한다. 21)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물로 손과 발을 씻고 들어가야 죽지 않는다는 말을 명심하여라. 아론과 그 후손들은 이 규정을 대대로 끊이지 않고 지켜야 하리라.'
본문은 속전과 물두멍의 용도에 대해서 기술합니다.
속전의 명분(11-12) 이스라엘 남자들은 반드시 속전(히. 코페르, 목숨 값이란 뜻)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속전을 낸 사람들만 이스라엘 총회에 계수되었습니다. 생명의 속전은 죄로 인해 생명이 몰수되었음을 전제합니다. 백성이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자신이 죄로 인해 죽었고 이제 사는 것이 여호와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속전은 매년 드리는 세금이 아니라 단 한 번 드리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훗날 매년 드리는 성전세로 발전; 참고, 마 17:24-27). 이러한 생명의 속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우리의 죄 값을 갚으신 구속의 사건을 예표 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총회에 계수되며,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빌 4:3; 계 21:27). 속전을 낸 백성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전염병과 같은 질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속전의 액수, 대상, 용도(13-16) 백성은 누구나 동일한 액수 곧 반 세겔을 속전으로 드렸습니다. 한 세겔은 무게 단위로 곡식 낟알 220개의 무게이며, 게라는 4, 5개의 콩 무게에 해당합니다. 은 반 세겔은 적은 액수이며 가난한 자들도 다 낼 수 있는 정도입니다. 백성은 능력의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동일하게 반 세겔을 내었습니다. 이는 부자의 영혼이나 가난한 자의 영혼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롬 3:23). 속전을 내야하는 대상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거둔 속전으로 성막 건축과 기구 제작과 제사 행위의 회막 봉사에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은혜로 구속받은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협조해야 합니다.
물두멍의 규례(17-21) 놋으로 제작된 물두멍은 성막 입구에 있던 번제단과 회막 사이에 위치했고, 그 속에 물을 채웠습니다. 제사장들은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물두멍의 물로 자신을 씻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섬길 수 있는 첫 번째 요건은 힘도 아니요 지혜도 아니요 정결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수족을 씻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손은 행위의 도구요 발은 걸음의 도구이며, 손과 발은 매일의 삶을 상징합니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목욕하였지만 매일의 삶에서 묻은 세속의 때를 그리스도의 피의 물두멍에서 날마다 씻어야 합니다(요 13:10; 슥 13:1; 계 7:14).
적용: 속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한 사람이 요한 웨슬레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밤 열 두 시에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오늘 하루 동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웨슬레는 대답했습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설교준비와 심방을 하겠소. 그리고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겠소.” 하나님 앞에서의 제물은 마지막 순간까지 꾸준하고, 죽음을 30분 당겨 맞이할 수 있는 자신감을 늘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향과 등불
출 30:10 / 피영민 목사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년 일차씩 대대로 속죄할찌니라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서론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계시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십계명’이고 두 번째는 ‘시민법’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성막건축에 관한 계시’입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31장까지는 모두 성막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성막은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성막을 잘 알기 위해서는 별도의 세미나와 같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막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용서하시고 만나주시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에 믿는 성도라면 꼭 공부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은혜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구약의 외형적인 성막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성막에 거하지 않으시고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막은 성도들의 마음이요 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막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것이고, 오늘날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성막이라면, 우리가 구약시대에 성막을 꼭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네, 성막은 모형으로서 대단히 많은 영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꼭 알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막(첨부 그림 참조)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계시로 받은 것입니다. 동서쪽으로는 기둥이 열 개가 있고, 남북으로는 스무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문은 동쪽에 한개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나누어 있는데 왜 문은 하나밖에 두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구원받을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예수님만이 오직 우리의 구원의 문이 되신다. 구원의 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면 맨 처음 만나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은 죄인 대신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서 번제로 제사를 드려 죄를 용서하는 곳입니다. 번제단에서 번제로 드려지는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성막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번제단에서 제물을 잡고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습니다.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는데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서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성소와 지성소는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지성소는 약 6평정도 되고 성소는 12평정도 됩니다. 즉, 성막은 18평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성막의 건축비를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사백억 정도 든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천으로 덮여 있고 허술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평당 건축비가 20억 정도 드는 값비싼 건조물이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 지성소에는 법궤가 놓여져 있고 속죄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을 만나 주십니다. 지성소는 속죄일, 유대인 월력으로 7월 15일에 딱 한번 들어가서 일년에 한차례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 드리는 곳입니다. 일년에 한차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지성소인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는 떡상이 있습니다. 이 떡상에는 12개의 떡이 두 줄로 놓여 있습니다. 한 줄에 떡이 여섯개씩 놓입니다. 이 12개의 떡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서 우선 이 떡을 새것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 떡은 안식일에 한 번씩 바꿔 놓습니다. 이 떡은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우리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왼쪽에는 등대가 있습니다. 등대는 금촛대라고도 하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오른쪽 왼쪽으로 가지가 각각 세 개가 나와 있고 가운데 하나가 나와 있습니다. 가지가 일곱 개가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금촛대는 그 밑에 감람유, 올리브기름을 넣고 그것을 태워서 불을 냅니다. 제사장들은 촛대를 아침에 끄고 밤에는 켭니다. 그리고 기름을 갈아 넣는 일을 합니다. 거기서 좀 지나가면 분향단이 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가로막고 있고 지성소의 가장 가까운 곳에 분향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한 것이 출애굽기 30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장이 1규빗, 광이 1규빗으로 네모반듯하게 하고 고는 2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 1규빗은 50cm이기 때문에 이 분향단은 가로가 50cm, 세로가 50cm로 네모반듯하고 높이는 1m 정도 되는 단입니다. 이 단에는 네 군데 뿔이 나와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명하신 재료를 가지고 향을 만들어서 아침저녁으로 그곳에서 그 향불을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이 하는 일을 볼 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년에 한 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 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서 7월 15일에 속죄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것은 떡상에 떡을 갈아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매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들어가서 분향단에 향을 피우는 일입니다. 이 분향단의 향은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분향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금촛대의 촛불은 저녁에는 켜고 아침에는 꺼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사장이 매일하는 두 가지 일, 향을 피우는 일과 금촛대에 등불을 켜는 일이 어떻게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으며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영적인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중보기도 사역과 성령님의 진리조명 사역은 연결되어 있다.
첫째로 이것은 ‘예수님의 중보기도 사역과 성령님의 진리를 가르치시는 사역이 서로연결되어 있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향단의 향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중보기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친히 중보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서도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지금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러므로 분향단의 향이 끊임없이 아침저녁으로 피워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중보기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촛대에 감람유를 태워서 등불을 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진리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조명사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고 열흘 만에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 마음속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도대체 나를 위해 해주시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부정적인 질문을 할 수 있을 수 있지만, 첫째는 하나님 우편에서 예수님이 지금도 나를 위해 중보기도 하고 계시다는 것, 두 번째로는 성령님이 내 마음에 계셔서 나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시시때때로 받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중 사역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이중사역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면에서 확실한 승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도는 구원의 영원성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한번 예수 믿고 구원받고 영생 얻은 성도들은 그것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고도 자꾸 구원의 확신을 읽고 방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같은 죄에 자꾸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아래에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지옥형벌로 다루십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지옥형벌로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지옥형벌은 예수님이 대신해서 먼저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이중사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변하십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인데 약해서 또 죄에 넘어졌습니다.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십자가에서 피흘린 것을 보시고 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요한일서 2장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러므로 우리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은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예수님이 대신 간구해 주시고 또한 성령님은 우리가죄를 깨닫고 죄를 이기고 벗어나서 성화된 삶을 살도록 우리 안에서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사단이 아무리 밀을 까부르듯이 성도를 청구해도 하나님께서는 빼앗기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중보하시고 성령님이 안에서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한번 구원받아 영생 얻어 천국 갈 자녀가 된 사람은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은 대단히 불분명하고 불투명하고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칼빈신학은 이런 점에서 분명합니다.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잃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즉 향의 사역과 성령의 등불의 사역이 함께 보장해주고 지켜주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성도들의 기도생활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때로 ‘하나님이 내 기도에 신경쓰실까, 과연 이 기도는 효험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이중사역을 넘어서서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가 삼중으로 사역하는 현장이 됩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여 주심으로 우리의 기도를 강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또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셔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에 기도를 인도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마땅히 빌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친히 대신 간구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관여하고 도와주시는 것이 우리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실패하는 일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교회도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국가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향은 제대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의 향을 올리고 계십니까? 또 여러분 성령의 등불은 지금 부지런히 감람유를 태워서 빛을 내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오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김정일이 핵을 가지고 있습니다. 50년 동안 백성을 굶기고 죽이고 하면서 만든 것이 핵무기 입니다. 핵무기만 가지면 세계를 장악하고 미국도 호령할 수 있으리라 해서 만든 것이 핵무기 입니다. 그는 핵무기를 가지고 대한민국은 아예 우습게 한 수 아래로 보고 미국까지도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여 이제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핵전쟁이 나면 우리도 함께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김정일이 회개하고 자유를 선언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어려움이 있고 사업에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향이 꺼졌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기도하면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돕기 때문에 승리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교회 선교사역은 반드시 승리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를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음부의 권세가 힘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나가면 지옥의 권세, 마귀의 권세가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기도 하시고 성령님이 선교를 주관하시고 능력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도의 기도와 진리지식은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로 향과 등불은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진리에 대한 지식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향단의 향은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 성도들이 올리는 기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 시편 141편 2절에도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향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향을 아침저녁으로 피워 하나님 보좌에 올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분향단의 향은 반드시 하나님이 만드신 재료로 만든 향을 피워야 합니다.
다른 재료로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분향단에 향을 피울 때는 반드시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피워야 됩니다. 다른 불로 피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냥불도 안 되는 것이고 라이터불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 만이 분향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불이 되는 것입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이 명령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불로 향을 피우다가 그 불이 나와서 나답과 아비후를 삼켜버렸다고 레위기 10장 2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기도라고 해서 다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성령의 가르치시는 진리와 결합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은 기독교가 아닌 종교인들도 다 기도하러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원도 가고 절에도 갑니다. 기도라고 하는 용어를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기도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도 진리와 결함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드리는 향은 그 불이 자기를 삼키는 도리어 자기를 삼키는 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리와 결합되지 않은 기도는 자기를 삼킬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라야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우상에게 드리는 기도, 예수 이름으로 드리지 않는 기도는 열납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자기를 망하게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분향단의 향은 반드시 금촛대에 등불과 결합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따라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 떠난 기도는 신비주의요 귀신놀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표기도를 해도 이 진리를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언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성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도 성경을 알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진리를 따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진리를 배우게 되면 그것이 기도와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배웠는데 기도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배웠으면 죄를 가진 사람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알았으면 “하나님이여 전능하신 능력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치료하시는 여호와라파 하나님이시라 하면 자신의 약한 것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기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향과 등불은 아침저녁으로 연결되어 제사장이 행해야 되는 두 가지 사명인 것입니다.
3. 교회는 기도사역과 말씀연구가 연결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향과 등불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도 향을 피우는 기도사역 즉, 영성의 사역과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사역은 같이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만 공부하고 기도 안하면 영성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힘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맨날 기도만 하고 성경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하면 영성은 강하되 진리성이 약해서 자꾸 이단시비에 휘말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 공부하는 진리성과 기도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는 영성이 같이 가야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하늘에서 말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연구와 묵상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면 말씀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연구와 기도사역이 함께 어우러져야 참된 한편의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
교회의 향과 등불은 같이 피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할 일이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향을 피워 여호와 앞에 절대로 꺼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람유에 기름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할 일이요 교회가 할 일일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중으로 우리를 도와주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모든 면에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사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속전과 물두멍
출 30:11-21
본문의 생명의 속전은 온역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온역이 돌면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온역을 면한다는 의미는 죽음을 면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생명의 속전은 출애굽기 13장 13-15절에 나타난 대속의 원리와 같은 맥락이다. 계수에 포함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신령한 특권은 그러나 먼저 생명의 속전을 지불하고 나서야 누릴 수 있는 것이다(고전 11:27-29).
생명의 속전은 누구나 막론하고 반 세겔이었다. 부자도 반 세겔, 가난한 자도 반 세겔이었다. 모두가 같은 값의 속전을 치른다는 것은 만민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는데 평등하다는 것을 말한다. 생명의 무게나 생명의 가치는 다 동일하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뚱뚱한 사람이든, 깡마른 사람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생명의 무게나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다 동일하다.
세겔은 금은의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로써 성소 세겔, 왕실 세겔, 일반 세겔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성소 세겔은 일반 세겔보다 적게 나가고 왕실 세겔은 일반 세겔의 두 배에 해당되었다. 왕실에서 쓰는 세겔의 저울추가 일반이나 성소에서보다 더 무거운 것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일반 세겔의 중량은 대략 11.4그램이었고, 성소 세겔은 이보다 가벼운 9.7그램, 왕실 세겔은 일반 세겔의 두 배 무게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소 세겔이 일반 세겔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겔의 중량을 가볍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쳐진 반 세겔 4.85그램은 은이었을 것이다. 바쳐진 반 세겔 은은 성막건축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이것은 매년 바치는 성전세로 발전되었다(마 17:24-27). 이스라엘에서 반 세겔은 노동자 이틀 치 품삯에 해당되었다. 예수님께서 은 30개에 팔리신 것은 120데나리온에 팔리신 것이고, 120일 노동자 품삯에 해당되는 가격이었다. 노예의 몸값이 이 정도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님 당시 로마당국은 유대인에게만 있는 성전세를 허용하였다. 그래서 유대인 남성들은 어디에서 살든, 살고 있는 나라에 상관없이 성전세를 예루살렘에 내야했다. 예수님 당시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의 인구가 대략 45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 5분의 1만 성전세 납부자로 본다 해도 일 년이면 45만 세겔이 걷히는 셈이다. 은 4365킬로그램에 해당된다.
광야에서의 인구조사에서는 여자와 아이와 노인을 뺀 나머지 20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을 계수했다. 인구조사의 목적은, 먼저 군사적인 목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민 1:2,46, 26:2-51, 삼하 24장, 대상 21장)를 세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로 제의적인 목적으로 레위인들이 20세에 성막에 들어가 봉사하는 법을 배우고, 25-50세까지 성막에서 봉사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인구조사의 목적은 성막건축에 필요한 비용을 징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6절, 민 1:2).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죄의 속박에서 풀어내기 위해서 몸값을 지불하신 생명의 속전이었다. 마땅히 우리 자신들이 치러야할 값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치르신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친히 그 값을 치르신 것이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살고 영생할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속전은 우리 예수님의 구속을 위한 영원한 속전의 예표요 모형이었던 것이다.
놋으로 만든 물두멍은 성소의 뜰, 곧 성소 바깥마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놓였다.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들 자신을 위해서 이곳에서 수족을 씻어야 했고,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하나님 앞에 사를 때에도 수족을 씻어야 했다(20절).
이 명령은 성막 내의 다른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씻음은 단지 의식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위생에도 아주 중요했다. 광야는 사막이다. 먼지가 많은 곳이다. 또 제단에서 발생하는 도살로 인해서 손발이 짐승의 피나 기름으로 더러워져 있었을 것이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먼지나 피와 같은 더러움을 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결의식인 것을 알 수 있다. 마찬 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먼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다.
성막에 쓰인 놋은 그것이 기둥을 받치는데 쓰인 놋이든, 놋그릇이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그리고 물은 침례나 세례를 예표한다. 따라서 놋으로 만든 물두멍의 물로 수족을 씻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와 침례 또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씻고 사함을 받은 후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소에 나아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또 제단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예배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물두멍의 물로 씻어 죽음을 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침례나 세례를 행위로 간주하여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물을 말씀으로 해석한다. 물두멍의 물이 인류의 죄를 속하기에 넉넉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결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표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긴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보혈로 씻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물두멍에 자신을 비춰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을 말씀으로 해석할만한 나름의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절하고 타당하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행위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목적을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행위를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고 바르게살기를 원하신다.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 받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로 말이다.
침례나 세례를 행위로 볼 필요가 없다. 침례나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의 서약이요 고백인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백과 서약이 없이는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없다. 혼인식에서 서약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서약이 없이는 성혼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은 시내산에서 맺은 서약 때문이었다. 침례식이나 세례식이 갖는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기 위한 서약식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침례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맺은 서약이 없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제단과 성소에 나아갈 자격을 얻지 못한다. 시내산언약을 ‘구약’이라고 말하고 침례식과 세례식 때의 언약을 ‘신약’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격을 얻게 된 것이 바로 침례나 세례인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침례식 때의 설교, 곧 침례식 때의 서약을 상기시키는 말씀으로 알려져 있다. 고난을 받아 믿음을 버릴 수도 있는 성도들에게 처음 믿고 침례 받을 때의 감격을 회상시키는 말씀인 것이다. 베드로는 3장 21절에서 침례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신구약성서 모두에서 예언자들과 주의 종들이 펼친 활동은 회개운동과 회복운동 두 가지였다. 이 두 운동의 정점이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의 출현은 초림으로써 이스라엘과 성전예배의 문자적 회복의 시점이고,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의 출현은 재림으로써 몸의 부활과 우주회복의 시점이다. 따라서 유대교이든 기독교이든 선교는 이 두 가지 운동 곧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이고, 선교의 완성은 만유회복(apokatastasis panton, 고전 15:27-28)이다.
그리스도교 회복운동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영혼부활이고, 둘째는 육체부활이다. 영혼부활은 성도 개개인의 구원과 교회회복을 말하고, 육체부활은 성도 개개인의 몸의 회복과 우주회복을 말한다. 영혼회복과 교회회복은 회개에서 비롯되고, 몸의 회복과 우주회복은 주의 재림으로 성취된다.
그리스도교 선교는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강조하는 다섯 손가락 실천(Five Fingers Exercise), 곧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가족의 식구가 되며, 천국에 들어가 시민권을 받고 월계관을 받아쓰기까지 성령님의 인침과 보증과 인도함을 받는다는 주장도 회개와 회복이 핵심내용이다. 믿음과 신앙고백이 같고, 회개와 침례가 같다. 신앙고백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증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이고, 침례는 마음으로 회개한 것을 증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회개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같은 행위의 최종적 목적은 회복에 있다.
생명의 속전(贖錢)
출애굽기 30:11-16
오늘부터 한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한 주간이라도 특별한 행사를 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특별 새벽기도회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고, 문화금식도 합니다. 문화금식이란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 등을 한 주간 보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보다 그들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상담에 어느 분이 정사예배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도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못 정(釘)자에 죽을 사(死)자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심을 기념하며 고난주간 금요일 저녁에 촛불을 들고 특별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제가 답변하기를 예수님의 고난을 일회용 행사로 마치려고 한다면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제삿날처럼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그림자입니다. 이제 실체가 완성이 된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1:25-26절입니다.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 년에 몇 번만 성찬식을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몇 번만 기억하면 된다는 말입니까? 그 말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는 날마다 모였습니다. 날마다 떡을 뗐습니다. 식사와 성찬이 구별이 없을 정도로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날마다 성찬식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가톨릭은 미사 때마다 성찬식을 합니다. 그런데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력, 그 살과 피의 효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모든 예배 때 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도 예수님의 죽으심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생명의 속전을 내라고 합니다.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돈을 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 때는 돈을 은의 무게로 사용하였기에 반 세겔을 내라고 합니다. 반 세겔이 오늘 시세로 얼마인지 모르지만 반 세겔이 이십 게라라고 하는데 이십 게라는 12그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한 사람당 6그램의 은을 속전으로 드립니다. 이번 주 은 시세가 3.75그램에 6,518원인데 6그램이면 약 만 원 정도 됩니다. 그런데 이 정도 금액으로 어떻게 생명을 속하여 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시편 49:6-8절입니다.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에 보면 사람이 돈으로 생명의 속전을 바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나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돈으로 생명을 속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생명의 속전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미 생명의 속전이 지불되었다는 것을 확인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애굽에서 나올 때에 어린 양의 피로 대속을 받아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대신에 누가 희생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장자를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장자만이 아니라 짐승의 처음 태어난 수컷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출13:13). 사람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말은 성전봉사를 위하여 바쳐집니다. 나중에 장자대신에 레위지파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장자를 대신합니다(민3:12).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장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출4:22).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하여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다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을 내게 하는데 이 속전은 부자라고 많이 내고 가난하다고 적게 내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입니다. 사람의 목숨 값이 세상에서는 달리 취급받습니다.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입거나 사망을 당하면 그 사람의 직업과 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금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번에 노회에 가니 임시목사의 호칭문제가 나왔습니다. 조직교회가 아니면 목사의 호칭이 임시목사인데 어느 사람이 사고가 나서 임시목사라고 적었더니 임시직이라고 해서 보험회사에서 아주 작은 보상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부자냐 가난하냐에 따라 목숨 값이 다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똑 같은 생명의 속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속전은 어디에 쓰입니까? 16절입니다. 회막 봉사에 쓰도록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반 세겔이 생명을 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생명의 속전을 동일하게 내도록 하는 것은 모든 백성이 똑 같은 생명의 속함의 혜택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미성년자와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포함이 됩니다. 이것이 대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 세겔이 성전봉사에 사용하는데 일 년에 한번 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반 세겔로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면 제사장들이 아침과 저녁에 상번제와 분향을 합니다. 이런 제사와 분향을 통하여 자신들의 생명은 대신 희생으로 속함으로 받고 산다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 반 세겔이 제대로 드려졌을까요? 드려진 때도 있고 드려지지 않은 때도 있지만 제대로 드려지지 아니한 때가 훨씬 많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면 반 세겔이 드려진 것이지만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 세겔이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른 십일조와 헌물을 따로 드립니다. 그런데 성전 봉사에 쓰일 반 세겔이 제대로 드려지지 않음으로 성전이 퇴락하고 율법 책도 성전 창고의 먼지 속에 묻혀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때에 우상숭배가 얼마나 심하였는지 성전 마당에 일월성신을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니 성전은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므낫세의 죄로 인하여 남 유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멸망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를 통하여 신앙의 부흥을 일으키십니다. 열왕기 하 22:3-6절입니다. “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4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5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서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6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성전에 드린 은으로 성전을 수리하게 합니다. 수리 중에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그 율법의 저주가 그대로 임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서 회개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합니다. 온갖 우상을 다 부수어버리고 다른 왕들이 손을 대지 못한 산당들마저 다 부수어버립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유월절을 지키는데 요시야만큼 유월절을 지킨 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개혁에도 불구하고 므낫세가 저지른 그 범죄를 만회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결국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며 멸망이 되고 성전조차 불타 버립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의 속전을 제대로 드리지 않아 성전의 기능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의 재건입니다. 그러나 기초만 놓고서 또 약 15년이나 지체하고 나서 성전을 재건하는데 그 성전이 스룹바벨성전입니다.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한 운동들이 일어납니다. 그 운동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전하고 가르치는 관리직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생활 속에 실천하려는 평신도운동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운동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성전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습니다. 이때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증축을 계속하여 아주 화려하고 멋있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온갖 율법에 따른 제물을 성전에 바칩니다. 당연히 성전을 위한 생명의 속전인 반 세겔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성전에 속한 사람들이 온갖 이권을 챙기는 도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7:24-27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왜 내지 않느냐고 합니다. 베드로가 낸다고 하고서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물은 이유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적용이 그들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내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성전보다 크시다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어떻게 말할지를 보고자 물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의 아들이 세를 내느냐고 합니다. 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전 세를 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로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전 세를 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낚시 하여 처음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열어보면 한 세겔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돈으로 베드로와 예수님의 성전 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이 기적을 통하여 천하의 주인이 예수님임을 베드로만 알게 하십니다. 바다의 물고기가 동전을 물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 것도 예수님이시고 그 물고기가 어느 어부의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한 세겔을 물어야 하는 것도 다 예수님이 천하의 주인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아직 자신의 메시아임을 십자가 지기까지 숨기십니다.
생명의 속전을 통하여 자신들의 생명이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을 통하여 속함을 받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생명의 속전이 드려지는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3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처형하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건물로 된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의 제사가 자기 자신임을 자기 몸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대속이 예수님의 살과 피에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자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2:13-22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전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의 속함을 받는 것은 어떤 희생물을 바치거나 생명의 속전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값을 주고 샀기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롬8:15, 갈3:26). 아들은 외인처럼 세를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1:13-25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생명의 속전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속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고 합니다. 지금 받은 은혜가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속함을 받은 것은 이제 장차 나타날 참된 생명 안에 누릴 삶이 있습니다. 그 참된 생명을 우리가 부분적으로 맛을 보고 청동거울을 보듯이 지금은 희미하게 맛을 봅니다. 이런 자들은 없어질 금이나 은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기에 이런 사람은 지금 형제를 사랑하며 영원한 복음을 받고 전하며 살게 됩니다.
속전과 회막 봉사
출30:11-16
지혜로운 아들은 부모의 말씀 한마디만 들어도, 얼굴 표정만 봐서도 부모님의 의향, 요구가 무엇인지를 금방 알아차려서 부모님의 요구에 응하는 행동으로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 잘 되는 축복된 삶을 누린다. 나타난 말과 숨은 속 뜻이 서로 다른 경우가 왕왕 있다. 지도자는 나타난 말과 진심을 바로 헤아리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심방 오지 마세요’ 라는 말이 도리어 심방을 원하는 경우도 있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에는 숨은 하나님의 뜻, 진정한 요구를 헤아리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특히 구약에서는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교훈을 찾도록 하여야 한다 (요 2:13-22.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십자가의 죽음과 3일 만에 부활). 본문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 제조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 중에 주신 중간 계시로서 속전 규례이다.
1. 속전이란 무엇인가?
속전(贖錢)은 속죄할 속(贖)과 돈 전(錢)으로서 국어 사전에는 ‘죄를 벗어 나려고 바치는 돈. 속금(贖金) ransom’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어로 ‘코페르’으로서 ‘덮다. 매수하다. 흔적을 없애다. 보상하다’에서 온 말로서 ‘몸값을 치르고 석방시키다’인데 ‘덮음과 속함’을 뜻한다. 헬라어로 ‘뤼트론 λυτρον’인데 ‘한 개인이나 집단에 대하여 해를 입었다고 하는 주장을 덮거나 기각시키기 위하여 주어지는 어떤 것, 해를 입은 상대로부터 구해 내는 대가’이다 (욥 33:24, 36:18. 시 49:7-9. 잠 6:35. 렘 31:11). 소가 사람을 받는 버릇이 있어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이면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지만 소의 임자는 속죄금을 명하면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贖)으로 낼 것이라고 하였다 (출 21:29-30. 사 43:3). 이스라엘 민족이 인구조사할 때에 계수함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반세겔씩 내어 여호와께 드리도록 되었는데 이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속전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 들어가는 대속의 진리를 교훈한다. 이는 곧 죄인된 인생을 구속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화목제물이 되심을 예표한다 (요일 4:10).
2. 회막의 봉사는 무엇인가?
(본문 16절) 속전을 회막의 봉사에만 사용하도록 함은 단순히 돈의 사용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속전이 생명의 속(贖)이기에 구속함을 받은 사람의 삶을 뜻한다.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회막에서 봉사하는 삶이어야 한다. 회막(會幕)은 성막의 또 다른 명칭인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간의 모임을 위하여 봉사를 의미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지체로서의 봉사를 교훈한다 (롬 12:3-13. 20% 정도만 교회 봉사). 또한 회막은 계시의 장소 (증거막. 오헬 모헤드)로서 전도와 선교, 교육의 사명을 부여한다 (출 33:7. 민 11:16, 12:4. 신 31:14). 대속적 구원의 목적은 선교에 있다 (출 19:6. 벧전 2:9).
3. 속전과 회막의 봉사는 무엇을 교훈하는가?
(박윤선 박사의 주석) 속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만 속죄함을 받게 될 것을 예표한다 (벧전 1:18-19. 딤전 2:5-6). 똑같이 반세겔씩을 바치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의 가치가 모두 동일하다는 것과 다같이 죄인인 사실을 밝혀주고, 20세이상의 남자만의 인구 조사는 군인의 숫자를 파악함인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건설하고 파수하는 십자가의 정병이 되어야함을 뜻한다 (딤후 2:1-4). 대속의 은혜에 교회의 봉사, 전도와 선교에 힘쓰야 한다.
결 론 : 속전과 회막의 봉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예표적 교훈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구원의 은총은 대속의 구원이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의 수효에 계수된 하나님의 백성은 회막에서의 봉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보여준다. 구약의 속전과 회막 봉사의 의미를 깨달은 자로서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크게 돌리고, 복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