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궤와 속제소와 진설병
출 37:1-16
1 브살렐이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반, 너비가 한 규빗 반, 높이가 한 규빗 반이며
2 순금으로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만들었으며
3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네 발에 달았으니 곧 이쪽에 두 고리요 저쪽에 두 고리이며
4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5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 궤를 메게 하였으며
6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반, 너비가 한 규빗 반이며
7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양쪽에 쳐서 만들었으되
8 한 그룹은 이쪽 끝에, 한 그룹은 저쪽 끝에 곧 속죄소와 한 덩이로 그 양쪽에 만들었으니
9 그룹들이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으며 그 얼굴은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였더라
10 그가 또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너비가 한 규빗, 높이가 한 규빗 반이며
11 순금으로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둘렀으며
12 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었고
13 상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았으니
14 그 고리가 턱 곁에 있어서 상을 메는 채를 꿰게 하였으며
15 또 조각목으로 상 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쌌으며
16 상 위의 기구 곧 대접과 숟가락과 잔과 따르는 병을 순금으로 만들었더라
출 37:1-16 / [계약궤를 만들다] 브사렐은 아카시아나무로 길이 113센티미터, 나비 68센티미터, 높이 68센티미터가 되는 궤를 만들었다. 2) 그리고 궤의 안팎을 순금으로 싸고 그 둘레를 돌아가며 금 테두리를 둘렀다. 3) 거푸집에 금을 부어 금고리 네 개를 만들어 궤의 네 발에 이쪽에 두 개, 저쪽에 두 개씩 각각 달았다. 4) 또 아카시아나무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그 채를 쌌다. 5) 그리고 금으로 싼 그 채를 계약궤 양쪽 옆면에 붙인 고리에 꿰어 계약궤를 들어 멜 수 있게 하였다. 6) 또 순금으로 길이 113센티미터, 나비 68센티미터 되는 속죄판을 만들었다. 7) 그런 다음 금 한덩어리를 두드려 펴서 그룹 둘을 만들어 속죄판 양쪽 끝에 달았다. 8) 그룹 하나는 속죄판의 이쪽 끝에, 다른 하나는 저쪽 끝에 속죄판과 한덩어리가 되게 말들어 달았다. 9) 그런 뒤 그룹들의 날개를 위쪽으로 높이 펼쳐서 그 날개가 속죄판을 덮게 하였고 속죄판 쪽으로 얼굴을 마주 보게 하였다. 10) [상을 만들다] 또 아카시아나무로 길이 90센티미터, 나비 45센티미터, 높이 68센티미터 되는 상을 만들었다. 11) 이 상도 계약궤와 똑같이 순금으로 입히고 위쪽 둘레에 돌아가며 금 테두리를 둘렀다. 12) 그리고 손바닥 넓이만한 가름장을 만들어 상을 돌아가며 둘렀으며 이 가름장에도 금테를 만들어 붙였다. 13) 또 거푸집에 금을 부어 만든 금고리 네 개를 상 네 모퉁이에 있는 네 다리에 붙였다. 14) 이 금고리는 가름장 곁에 붙여, 상을 들어 멜 때 사용하는 채를 꿸 수 있게 하였다. 15) 상을 들어 메는 궤는 아카시아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금을 입혔다. 16) 이 밖에도 상 위에 올려놓을 여러 기구들, 곧 대접과 숟가락과 술병과 술잔 등을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 바쳤다.
브살렐은 성막 중 가장 중요시되는 법궤와 속죄소를 만들었습니다.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었으니(1-5) 본 단락의 궤란 법궤를 지칭합니다. 법궤는 권능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고 동행하신다는 상징물입니다. 브살렐은 조각목으로 법궤를 만들고 그 궤를 안팎으로 순금으로 도금하였습니다. 조각목이란 광야에서 자라나는 아카시아 나무로서 재질이 단단하여 각종 건축 자재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순금은 법궤가 상징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변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하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금고리 넷은 법궤 운반용 막대를 끼워 두기 위한 것이며, 채는 고리에 끼워진 긴 막대기로서 순금으로 제작 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생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이처럼 순금과 같이 존귀와 영광을 입게 됩니다. 법궤는 평상시에도 채가 끼워져 있는 상태로 보관되었습니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었으니(6-9) 속죄소란 법궤를 덮는 뚜껑으로서 죄를 용서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법궤의 뚜껑을 가리킬 때만 사용되었습니다. 법궤의 뚜껑을 덮는 것은 법궤 안에 있는 율법의 잣대로 심판하지 않고 은혜로 죄를 용서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뜻을 보여줍니다. 속죄소는 정금으로만 만들어졌습니다. 속죄소 위에 그룹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속죄소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이스라엘과 만나주시는 직접적인 장소라는 중요성 때문입니다(25:22). 그러므로 속죄소를 시은좌(propitiatory)라고 하였고,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오셔서 죄를 덮어 주는 은혜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속죄판과 그룹은 속죄판의 금을 망치로 늘인 후 그것으로 그룹을 조형하였습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장하는 천사입니다.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얼굴을 속죄소를 향하였더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속죄소를 늘 주시하시며 지키고 계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가 또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었으되(10-16) 떡 상은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떡이 상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금고리 넷은 채를 넣어 떡상을 운반하기 위한 이동용 고리입니다. 이 고리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성막의 기구들을 완성시키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된 우리도 교회 전체를 이루는 지체로서의 사역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속죄소는 대속일에 피를 뿌리는 장소(레 16:14-17)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골 1:20). 죄인을 받아 주시고 용서의 은총을 부어주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속죄의 은총을 어떻게 누리고 있는지요?
알마비바 백작, 바르톨로 박사, 로시나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다룬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는 반전의 역사를 이룬 오페라로 전해집니다. 세비야의 이발사는 '조아키노 로시니'가 작곡한 곡으로 꾸며졌는데 이 작품이 처음 공연됐을 때 관중은 공연 내내 야유를 할 정도로 참혹한 실패를 거뒀습니다. 이러한 냉담한 관객의 반응에 좌절한 채 연출가가 로시니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는 무심하게도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렇게 편하게 잠잘 때가 아닙니다. 우리의 작품은 완전히 실패했어요." 그러자 그는 이 말과 함께 두 번째 공연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하늘이 무너졌나요? 다음 기회에 더 좋은 곡을 쓰면 되잖소. 오늘은 자고 내일 의논합시다." 그 결과 초연 이후 사람들의 넘치는 환호를 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북미에서 5번째로 많이 상연되는 유명한 작품이 됐습니다.
< 설 교 >
성전 기구의 제작
출 37:1-28 / 임덕순 목사
봄가을엔 결혼하는 커플들이 많습니다. 저는 “목사님 저희가 결혼하니까 목사님께서 주례해 주세요.”하며 인사 오는 사람들을 만나 진지한 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고 신접살림은 어디서 차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아주 행복한 얼굴로 어디로 신혼여행을 가고 어디서 신접살림을 차린다고 대답해줍니다. 그들에게 신혼여행지와 신접살림 집은 행복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금년으로 결혼한 지 만 30년입니다. 30년 전 저희가 살림을 시작한 집은 단간 월세방 이었습니다. 한번 찾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고 있을 때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과 설계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광야에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가나안땅에 들어간 뒤에 지었더라면 훨씬 더 잘 지을 수가 있을 텐데 왜 고달픈 여행자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셨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이 거처할 집이 급하게 필요하거나 그들에게 대접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광야생활 내내 그들과 동행하시며 돕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그들로 눈으로 보고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이스라엘을 내 아내라고 하시면서 그들과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신방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시는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신혼여행과도 같았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풍성하심을 체험하면서 행복해 하고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부요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성전, 즉 텐트로 만든 성전인 성막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성막 안에는 기둥이 없었습니다. 대신 삥 둘러 친 판자들이 기둥 노릇을 했고 지붕을 덮어 공간이 넓습니다. 이 성전의 판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이 모이면 어디서나 성전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널빤지를 세우고 그 위에 천막을 입히면 성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할 때에는 다시 널빤지를 하나씩 메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성전은 판자 하나하나를 조립해서 세웠고 오늘에는 믿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성전의 판자는 쉬띰나무 판자에 금을 입힌 것인데, 쉬띰나무는 나무질이 좋지 않고 뒤틀린 가시나무입니다. 이것을 조각목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우리는 원래 조각목처럼 질이 좋지 않고 뒤틀린 사람들입니다. 생각이나 행실이 반듯한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금을 입혀주셔서 성도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 성전의 기구들은 무엇을 말해줄까요?
출37장과 38장에는 이 성전 안에 비치해야 하는 기구들을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다는 기록입니다. 성전은 형벌 받을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곳인데, 성전의 기구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전은 맨 안쪽의 지성소와 그 바깥인 성소, 그리고 성전의 뜰로 구분됩니다. 지성소는 가장 거룩한 곳이고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보좌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지성소는 가장 거룩한 곳이며 여기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고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에 단 한번 피를 담은 양푼을 들고서야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법궤라는 기구 하나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 법궤 안에는 하나님이 친히 율법을 새겨주신 돌판 두 개가 들어있었고 나중에는 아론이 가졌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도 보관하였습니다. 그 세 가지를 담고 덮개를 덮은 상자가 바로 법궤요 지성소 안에 있었습니다. 이 지성소는 성소와 붙어있었지만 위에서 아래까지 둘러 쳐진 휘장 때문에 아무나 들어올 수도 볼 수도 없었습니다.
다음은 성소인데, 성소에는 세 가지 기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순금을 쳐서 일곱 가지를 뻗게 만든 등대이고, 또 하나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떡 상이라 불렀고 그 위에는 곡식을 곱게 빻아서 만든 떡을 열 두덩이로 나누어 진열해 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앙 안쪽에는 기구 중에서 높이가 가장 높게 만든 향단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날마다 이 성소에 들어와서 정해진 일을 했는데, 등에 불을 켜는 일과 떡을 새로 진열해 올려놓는 일과 향을 피우는 일을 날마다 했습니다.
그리고 성막 바깥에는 뜰이 있었는데 이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번제단은 짐승을 죽여서 불로 태우는 곳으로서, 놋으로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이 여기서 짐승을 잡고 각을 뜨고 불에 태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소에 떡을 진설하고 향을 피우러 들어갈 때에 피 묻은 손을 씻기 위해서 물두멍이 있었는데, 그것도 놋쇠로 만들었습니다.
위치에 따라서 기구의 재료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성소나 지성소에 있는 기구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었거나 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쌌지만, 뜰에 있는 기구들은 놋으로 만들었거나 나무로 만들고 놋으로 쌌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위치와 상관없이 성전의 기구를 만든 목재는 모두 조각목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아카시아 나무인데 질이 좋지 않고 뒤틀린 나무 결을 가진 하찮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난 나무를 다듬어 판자를 만들어 그것으로 법궤나 떡상이나 향단이나 번제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 금이나 놋을 입혀 성전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을 말합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좋은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가시와 공이가 많고 뒤틀린 존재입니다. 험한 세상을 힘겹게 살다보니 죄가 많고 말과 행실이 거칠어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다듬어서 지성소와 성소에 쓸 기구로 만드시고, 밖을 금으로 입혀서 존귀한 도구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들 속에는 아직도 가시나무 조각목 같은 거친 기질이 숨어있지만 우리를 감싼 금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된 사명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고, 성전 안팎에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성도가 된 것을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됩시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개신교 예배당은 아주 단출했습니다. 예배당 안에 예수님 그림이나 십자가 모양이나 어떤 화상도 두지 않았으며 오직 말씀을 선포하는 강단만 우뚝 솟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었던 휘장이 찢어져서 이제는 짐승 제물이나 다른 어떤 행위가 필요 없게 되었고, 오직 말씀을 직접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말씀만 귀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요즘에는 다시 예배당의 구조가 점점 변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면서 설교자의 강단을 옆으로 비켜 놓고, 가운데 제단 비슷한 것을 만들어두고 거기에 성경책을 펼쳐놓거나 대형 십자가를 걸고 후광이 빛나게 하는데, 그렇게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감성적으로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할지는 모르나 말씀의 중요성을 잊은 것입니다. 결국 말씀을 벗어난 형식적이고 감성적인 종교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성전 안에 있는 기구는 단출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성소 안에는 오직 법궤만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해 주셨다는 것을 시대가 바뀌어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전 안팎에 있는 기구들은 우리가 어떤 과정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은 먼저 선택하시고 그 다음엔 전도를 통해서 불러내시고, 그 다음에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믿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말씀 따라 믿음이 성장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화로 인도하여 영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역할을 해 주실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이것을 장소별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바깥뜰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두 개의 기반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들을 대신하여 죽어주신 객관적인 사실이고, 둘째는 그 사실을 나 자신이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고 진실하게 믿는 나의 믿음입니다. 객관적인 사실인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고, 그것을 내가 듣고 믿음으로 구원이 나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내가 믿지 않으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십자가의 사건, 즉 복음을 믿으려면 누군가가 이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주는 일을 전도라고 하는데, 성전 바깥뜰에 둘러쳐진 휘장은 바로 복음전도를 상징합니다. 성전 뜰을 둘러친 휘장은 아름다운 색실로 수를 놓아 만든 것으로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성전의 휘장을 바라보면 누구라도 ‘저 안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성전 본체는 우중충한 물개 가죽을 둘러 씌워서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바깥뜰에 친 휘장은 휘황찬란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복음의 손짓을 상징합니다.
처음 복음을 전할 때에는 말씀만 전하지 않습니다. 선교사님들 중에 어떤 사람은 병원을 세워서 환자를 치료하고 학교를 세워서 가르칩니다. 물론 기독교학교에 다녔다고 해서 다예수를 믿거나, 교회가 세운 병원에서 치료받았다고 해서 구원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병이 치료되고 교육의 혜택을 받음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어른들 중에는 어렸을 때 성탄절에 교회 가서 과자 얻어먹은 기억이 있다는 분들이 많고,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녔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휘장과 같은 역할입니다. 하나님은 치료와 착한 행실과 은혜의 경험들로 사람들을 당신께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주며 열심히 전도하는 전도자들을 세우십니다. 우리교회에 이런 일을 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헌신적으로 수고하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사람이 이런 분들에게 순종하여 따라오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 화려한 뜰의 휘장을 쳐들고 들어오면 그 안에는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은 짐승을 잡아 피를 받아 뿌리고 내장을 꺼내고 다리는 잘라내고 몸통째로 단위에 올려놓고 태워서 제사를 드리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여기서 일하는 제사장은 마치 백정과 같은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산 짐승을 잡아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짐승 고기를 즐겨 잡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는 이렇게 누군가가 대신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무거운 형벌이 있다는 것과 우리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대신 죽어 제물이 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느라고 험한 일을 하는 제사장은 인류의 제사장 되시는 주님을 상징하고, 여기서 타죽는 짐승도 장차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처참한 죽임을 당하실 주님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번제단은 죄값은 사망이며, 나를 대신하여 대신 죽으신 분이 있으니 그를 의지하고 믿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앞에 나아가려면 누구라도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자기가 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고, 나 대신에 죽은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사람이 하나님께로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죽을 때 까지 자기의 죄가 들통 나지 않고 사는 것을 큰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행이 아니라 엄청난 불행입니다. 차라리 폭로되고 용서받는 것이 다행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려면 자기의 죄를 폭로하고 자신이 지은 죄는 죽어야 마땅한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나대신 십자가라는 번제단에서 죽어주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번제단 안쪽에는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제사드리느라고 손과 발에 피를 묻힌 제사장이 제사를 마치고 성소 안에 들어가려면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 곳입니다. 이 물두멍은 이미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자신의 행실이 부정함을 인정하고 사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지금도 날마다 생활 속에서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그동안 다시 지은 죄를 인정하고, 깨끗하게 되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에서 자신이 세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세례 받은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물두멍은 유일하게 치수를 정해주시지 않은 기구입니다. 한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한 것입니다.
둘째는 성소입니다.
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평민은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제사장도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도록 휘장이 막혀있었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시는 순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서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도 없어지고, 어떤 사람이라도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신자인 우리는 누구나 왕 같은 제사장 대우를 받고 있고, 제사장의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도는 날마다 성소에 들어가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제사장적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럼 성소 안에는 어떤 기구가 있었습니까?
맨 먼저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있었습니다. 이 등대는 금으로 쳐서 만든 것인데 한 개의 등대에 일곱 가지가 위로 뻗어 있고, 그 위에는 살구꽃 모양의 등잔이 있어서 거기에 감람유를 붓고 심지를 담가서 불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등대에 불을 밝히면 마치 살구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대로 성소 안은 금판자와 네 겹 텐트로 봉해져 있기 때문에 깜깜합니다. 그 안을 비취는 빛은 오직 이 등대에서만 나옵니다.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내게 오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앞길을 비치는 빛은 오직 예수에게서만 나온다. 예수님만 세상의 유일한 빛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오면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다음으로 떡상이 있었습니다. 떡상은 조각목으로 짜고 금으로 입힌 길쭉한 상인데, 그 위에 만나를 요리해서 만든 떡 12 덩이를 두 줄로 진열해 놓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는 자기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빻은 가루로 떡을 만들어 여기에 올려놓게 하였는데, 이 떡은 하나님이 잡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떡을 잡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떡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떡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 만나로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라고 하시어 성소의 떡상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해답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떡을 먹어야 사는 존재인데, 그 떡은 우리의 수단과 방법으로 만들어 먹는 물질이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양식이신 예수님입니다. 누구든지 주님께로 나아오면 거기에는 풍성한 생명의 양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떡은 곡식이 빻아져서 가루가 되고 불에 삶아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해서 인류를 살리는 생명의 떡이 될 것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향단이 있는데 이 향단은 성소의 가장 중앙에, 지성소에 바짝 붙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날마다 향을 가져다가 불살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향단은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시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프랑스산 고급 향이 아니라 성도의 기도를 향으로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는 누가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히9:24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라고 하였고, 롬8:34에서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중보기도가 우리를 구원받게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유지되게 하는 유일한 요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도 향으로 받아 주십니다.
셋째는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성소와 한 건물 안에 있지만 휘장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 안에는 오직 하나의 기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법궤입니다. 법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상자였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이 친히 새겨주신 율법이 기록된 돌 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 돌 판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판에 새겨진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려주신 약속이요 조약인데, 이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책임져 주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궤를 법궤라 하기도 했지만 언약궤라고도 불렀습니다.
오늘은 성전의 기구들을 만드는 장면을 읽었는데, 성전의 기구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는가.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전에서 가장 귀한 것은 지성소에 보관한 법궤였고,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는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이고, 법궤 안에 있는 말씀은 오늘 우리가 듣는 설교입니다. 우리가 마음껏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지성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휘장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에 접근도 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고, 우상을 섬기며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돈과 허망한 사상에 매여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던 우리가 이스라엘도 들어가지 못했던 성막의 지성소보다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말씀을 듣고 약속을 받으며 가르침과 인도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하거나 시시하게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고귀한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하나님 앞에 다가와 그 말씀을 듣고 경배하며 그분의 말씀을 밖에 나가서 전해주어야 한다면, 우리가 그 일을 사명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하나님은 수양의 제사보다 말씀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께 가깝게 가기 위함이고, 가깝게 가려는 것은 그분을 만나 말씀을 듣고 어루만짐과 인도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어루만짐을 받는 것이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보다 백배 낫지 않습니까? 언제나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나아가서 항상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평생을 말씀대로 살아서 세상의 빛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약궤와 진설병 상
출 37:1-16 / 진광교회
☞ 자기 부인하고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인간들
요즘은 어른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 중딩, 고딩들까지도 남의 말을 참 안 듣는 것 같다. 자신의 생각에 이해가 안 되면 누구의 말도 잘 안 듣고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서 서글플 때가 많다. 물론 틀린 말에는 동조하거나 따르면 안 된다. 하지만 옳은 권면과 인도는 자기 생각에 안 맞아도 따르는 것이 정상이요, 복 있는 행동이며, 지혜로운 삶이다. 그럼에도 요즘 이런 분별을 잘 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참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다고 할까...??
☞ 브살렐의 순종의 모범(模範)
본문에서 성령충만의 은혜로 지혜와 지식, 총명이 뛰어난 브살렐은 성막의 각 기구들을 만들 때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지 않고 철저히, 꼼꼼하게 하나님의 지시 해 준 명령대로 차곡차곡 만들어 가고 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건조된 곳에 임재하시면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불순종의 죄가 있는 곳에는 임재하실 수 없다. 오히려 임재하게 되면 순식간에 죄인들을 진멸해야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살렐의 청종의 믿음, 충성된 믿음을 성경에 기록해 주신 것은 이 말씀을 묵상하는 나와 우리 진광교회 지체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매순간, 매일, 남은 생애를 살아가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도 많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알고도 순종치도, 인내로 계속 순종하지 못했던 것을 온전히 회개하는 주인공이 되길 소망한다.
아울러 브살렐처럼 온전한 순종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나를 통해서 이뤄지고, 하나님이 늘 동행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며, 보호 해 줄 수 있는 주인공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래서 나의 생을 마감했을 때 나의 생애에 대한 평가를 받을 때 “너는 출애굽기 37:1-16을 묵상한 이후로는 내 마음에 쏙 드는 생활을 했다. 그래서 너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 기쁘고 행복했다. 이제 여기서 영원한 쉼과 복을 누려라.”라는 평가를 받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할렐루야!!
법궤와 속죄소와 진설병
출 37:1-16
성경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의 깊게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전하여 “그대로 되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늘 어떤 사건과 상황을 분석하고 해석하여 의미부여를 하려는 습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하기 보다 어떤 의도와 의미를 따지면서 나의 감정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게 되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는 삶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는 삶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막’을 살펴보면서 ‘나’라는 "이동하는 교회"와 ‘구성교회’라는 "고정된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은혜와 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그냥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연단과 훈련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브살렐이 언약궤와 속죄소와 떡 상을 만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법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다음 금으로 둘러쌌습니다.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어졌고요. 속죄소는 언약궤의 뚜껑을 뜻하는데, 속죄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위해 속죄의 피가 속죄소에 뿌려졌기 때문에 속죄일의 피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떡 상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빵이 올라가는 상을 의미합니다. 떡 상은 순결함을 의미함으로 이스라엘 12지파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거룩해야 했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저는 속죄소와 떡 상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인 ‘조각목’과 ‘금’을 주목했습니다. 먼저 ‘조각목’은 ‘싯딤나무’를 뜻합니다. 싯딤나무는 무겁고, 단단하며, 벌레가 없고, 썩지 않고, 건조해도 뒤틀리지 않는 좋은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건축물의 재료로 사용되는데, 학자들은 모세의 지팡이가 바로 이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싯딤 나무는 광야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나무의 뿌리는 50~60m 정도고, 어떤 나무는 2km까지 뻗어 있다고 합니다. 이 나무의 모습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본다면, “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믿음 뿌리 내리고, 주의 뜻대로 주의 뜻대로 항상 살리라”라는 찬양을 부르며, 말씀을 향한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금’입니다. ‘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욥기 23장 10절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 구절에서 ‘금’을 이야기하기 전에 살펴야 할 단어는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데레크’는 ‘삶의 방향’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방향은 주가 아십니다. 그럼 우리가 정금과 같이 나아갈 길의 끝은 어디일까요? 창세기 3장 24절에는 ‘생명 나무의 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막혀 있었던 생명 나무를 향한 길이 구약에서는 ‘속죄소’로,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도마가 “그 길을 어찌 앏니까?”라는 질문에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삶의 여러 상황 속에서 믿음의 뿌리를 내려 생명을 향한 길을 향해 한 걸음씩 걷는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순금과 같은 모습으로 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칼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칼빈은 속죄소에 있는 두 그룹의 형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관해 언급합니다. 첫째, 두 그룹이 날개를 높이 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든 언제라도 그대로 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둘째, 두 그룹이 서로 연결되어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우리가 서로 연합하며 조화를 이뤄야 함을 보여줍니다. 셋째, 두 그룹의 얼굴이 십계명의 돌판을 향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갖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너무 큰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금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랄프 탈리버의 책 제목이자, 중국 북경 대학 총장을 지낸 ‘호적’의 명언입니다. 하나님은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 금을 필요로 하십니다. 연단과 훈련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루는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나와 가정과 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의 확실함을 가지고 출애굽의 과정을 지나, 큰 영광과 기쁨을 얻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공동체는 동역으로, 개개인은 충성으로
출 37:1-16
1-9절과 평행 본문은 25장 10-12절을 비교할 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성막은 한 사람이 아닌 다수의 동역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37-38장은 25-31장과 짝을 이룹니다. 차이 나는 점은 37-38장에는 브살렐이 성막 기물들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1절). 그러나 실상은 브살렐 혼자 이것들을 만들었다기보다 제작을 지휘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31:1-11). 하나님은 그에게 특별한 재능을 가진 동료 오홀리합과 여러 기술자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각종 기술자가 브살렐의 지휘를 받아 하나님의 명령대로(25:10-22) 증거궤를 만들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 각자가 브살렐의 지휘 아래 맡은 일을 잘 감당함으로써 성막이 순조롭게 건설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동역과 충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에 선한 마음으로 동역하는 사람인가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그말은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다른 존재의 도움도 필요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며 친밀하게 교제할 대상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려주시고 그 일에 동참하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선한 마음으로 동역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초청하여 참여하게 하시는 일이 얼마나 선한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에 우리를 동참케 하셔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10-16절은 25장 23-30절과 비교할 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본문은 진설병 상의 제작을 다룹니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순금으로 싸고, 금테를 두르는 등 기본적인 내용은 25장 23-30절과 거의 상응합니다. 차이점은 첫째, 제작자가 브살렐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1절).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의 지휘 아래 여러 기술자가 협력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둘째, 제작과 관련된 요소에만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25장 23-30절의 내용중에서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25:30)라는 문구는 생략합니다.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하나님 몫이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최종 지휘자이신 하나님 명령에만 충성하면 됩니다.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기에 감당할 일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의 삶이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버지집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구체적인 장소나 일정에 대해서 전혀 모른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는 순종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앞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다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여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 지금 당장 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지금 내 앞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비참한 죄와 죽음과 사탄의 노예생활에서 속량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사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욱 알고 구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