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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1027 / 골 3:1-11 / 위의 것을 찾는 삶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11.05|조회수1,146 목록 댓글 0

위의 것을 찾는 삶

골 3:1-11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1-11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여러분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예와 능력을 가지고 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ㄴ. 시110:1) 2) 하늘나라의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채우십시오.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3) 마치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참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4) 우리들의 참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빛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 그러므로 죄에 가득 찬 세속적 욕망을 버리십시오. 여러분 속에 파고드는 악한 욕망을 죽이십시오. 성적인 죄, 부정, 정욕, 수치스러운 욕망을 끊어 버리십시오. 이 세상의 금전과 쾌락을 흠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7) 여러분이 이 세상에 속해 있을 때는 여러분도 그런 생활을 해왔습니다. 8) 그러나 지금은 분노와 증오와 저주와 더러운 말과 같은 때묻은 옷을 벗어 버릴 때입니다. 9)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마십시오. 거짓말은 모든 악행만을 일삼던 여러분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10) 여러분은 완전히 새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새사람은 계속해서 옳은 일을 더욱더 배우려 하고 여러분 속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여 주신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11) 이 새 생명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국적이나 인종이나 교육이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 들일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본 장부터 골로새서의 실천편이 시작됩니다. 바른 믿음은 당연히 바른 생활로 이어지는데, 골로새서의 가르침처럼 바른 믿음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로 만족한 사람은 어떠한 삶에 도전하고 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1-4)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목표로 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만 만족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본성을 사도 바울은 위의 것을 찾으라는 권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관심사, 즉 삶의 방향을 말합니다. 위의 것은 영적인 것, 영원한 것,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것, 하늘에 속한 것,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 등 여러가지 차원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이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이는 다른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성이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의 것으로부터 안정감과 만족을 찾던 본성은 죽었기 때문에, 한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위의 것을 찾으며 사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벗어버리라(5-9) 지속해서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말에는 다른 한편으로 땅의 것을 찾고자하는 육적인 본성을 억제하고 죽여가야 한다는 이중적인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옛 행위를 벗어버리라"는 교훈은 단번에 내리는 결단을 말합니다. 질질 끌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차근차근 천천히 하겠다고 타협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죄의 속성과 본질을 너무 가볍게 보는 나태한 마음입니다. 바울은 본 단락에 등장하는 6가지 옛 사람의 악행을 탐심으로 귀결시켜 우상 숭배라고 규정합니다. 모두 자기 자신을 우상의 자리에 두고 다른 것을 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10-11)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옛 사람이 있었다는 것과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옷을 입고 벗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더러워서 벗어버린 옷과 깨끗하게 갈아입은 새 옷은 서로 관련이 없어야 합니다. 둘 다 함께 걸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변화는 혈통이나 민족, 신분이나 종교 전통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영적인 원리입니다.

 

적용: 아직 벗어버리지 못한 옛 사람의 습관이 남아있습니까? 무엇이 당신을 죄짓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합니까? 아주 벗어버리기 위해서 어떤 결단이 필요합니까?

 

사람은 각자 생각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양 육신의 소욕을 채우는 일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 ‘성도’ 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육신의 소욕에 충성된 삶이었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듯이, 예수와 같이 다시 살아난 우리들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 설 교 >

새사람을 입으라

골 3:1-17 / 김상복 목사

한 생물이 살기 위해서는 주변의 다른 무언가가 죽어야 합니다. 옥수수가 살려면 주변에 있는 잡초들이 다 죽어야 합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많은 동식물들이 죽어야 합니다. 소가 죽어야 소고기를 먹을 수 있고 돼지가 죽어야 삼겹살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이 왕성해질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너희는 새 사람이 되었는데, 새 사람이 되었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절). 죄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옛 사람이 아니고 새로운 영혼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새사람이 되어 저 높은 곳을 향해 날마다 전진하고 나아가는 새사람들입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1절). 이 말씀에는 “위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버리라”, “땅의 지체를 죽이라”, “옛 사람을 벗어라”, “나쁜 것을 제거하라” 이런 표현들이 계속 됩니다. 우리는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로 인해 죽었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아직도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잘못된 뿌리들을 하나씩 뽑아서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옛 유교풍습 중에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구실이 되는 일곱 가지 잘못을 말합니다. 1)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父母) 2) 아들이 없는 것(無子) 3) 음탕한 것(不貞) 4) 질투하는 것(嫉妬) 5) 나쁜 병이 있을 때(惡疾) 6) 말이 많은 것(多言) 7) 도둑질을 했을 때(竊盜). 물론 이런 풍습은 지금은 다 없어졌습니다. 당시로서는 아내들에게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신칠거지악(新七去之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편을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잘못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명절때 용돈을 시부모에게 30만원, 친정부모에게는 10만원을 주는 것, 2) 금쪽같은 딸을 낳았는데도 아들타령을 하는 것, 3) 아내가 사랑의 눈빛을 보내는데도 외면하는 것, 4) 아내가 직장 동료들과 함께 회식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전화하는 것, 5) 의처증이 있거나 아내를 구타하거나 알콜중독과 같은 몹쓸 병에 걸리는 것, 6) 밥을 차려주면 맛있게 먹지 않고 반찬 타령을 하는 것, 7) 아내 지갑 속의 비상금을 가져가고 시치미를 떼는 것. 공자 시대의 칠거지악은 남자 중심으로 여자들에게 해당하는 사항이고, 요즘 나온 신 칠거지악은 여자들의 관점에서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이런 식으로 재미있게 표현을 했습니다. 아내든 남편이든 없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칠거지악이 있습니다. 잠언 6장 17-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주 미워하는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1) 교만한 눈, 2) 거짓말 하는 입, 3) 피 흘리는데 빠른 손, 4) 악을 모의하는 마음, 5) 악으로 치닫는 발길, 6) 거짓말 하는 증언, 7) 형제간에 불화를 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있고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속히 판단해서 하나씩 제거시킴으로써 옛날 사람, 오래된 사람, 구습에 젖은 사람을 죽여야 새 사람,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도 반드시 제거해야 할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 탐욕, 나태, 교만, 욕정, 시기, 과음과 과식입니다. 사순절이 되면 이 일곱 가지를 하나씩 설교하는 습관이 교회에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에서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3절 사이에는 우리가 이제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옛 사람을 버리고 앞으로는 땅의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변화를 체험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변화하고 발전하여 우리의 잘못된 것들이 하나씩 제거되고 좋은 것들로 보완되는 삶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덮고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원하심입니다.

무엇을 벗어 버리고 무엇을 없애야 하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 탐심, 분냄, 악의, 해방, 입술의 더러운 말들, 거짓말을 다 없애버리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수많은 악과 죄를 지적합니다. 우리 속에 이런 경향이 있으면 찾아내고 나타나는 대로 죽이고 거룩한 새것들로 대치시키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새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12절)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귀가 열리고 눈이 떠지고 마음에 깨달음이 와서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우리에게 영생의 은총을 거저 주셨다는 좋은 소식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새 사람이 된 자들입니다.

우리를 또한 “거룩한 자”,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죄로 물들었던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아서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도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원 전 부터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값없이 은혜로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옛사람을 버리고 우리 속에 어떤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와 용납과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그리고 평강을 더하고 입술에 감사하는 자가 되라. 말씀이 풍성해서 지혜가 있고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옛 사람과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옛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이런 새 사람의 모습이 여러분 속에서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옛것을 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는 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성장하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새 옷을 입고 변화되며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과거에 참 가난한 백성들로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고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너무 감사하지요. 그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더 발전하고 더 일어나서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진 국가, 자랑스러운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는데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괴롭히는 몇 가지 구습이 있습니다. 죽어야 하는 것들이 아직도 살아 있어서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제가 6백 명의 어른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질문은 “한국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입니다. 한국인의 장단점을 찾아서 장점은 격려해 주고 단점은 제거시키면 한국 사람이 훨훨 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 분은 저와 대화를 하는 중에 한국 사람의 장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한국 사람은 부지런하답니다. 부지런하지요. 그리고 악착같답니다. 그것도 맞아요. 절대로 질 줄을 모른답니다. 일본 사람은 다른 사람과 싸워서 지면 “형님!”하고 엎드리는데 한국 사람은 떠나면서 “두고 보자!”라고 한답니다.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몰라도 이분이 얼마나 재미있게 표현하는지요.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 사람들의 장점을 모았더니 20가지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적극성(악착같다는 표현과 비슷하지요), 열심, 인내심, 좋은 두뇌, 정이 많음, 은혜를 앎, 독립심, 책임감 등 많이 있습니다. 이런 장점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가난을 딛고 불과 50년 만에 지금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이 있습니다. ‘협동심 부족’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이것 하나만 고쳐도 대단하겠죠. 우리가 협동심을 갖게 되는 날에는 대한민국을 감당할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협동심이 없는데도 이렇게 엄청난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 첫 번째 단점 하나만 국민들이 고쳐도 우리나라가 얼마나 날겠습니까?

이 협동심의 단점에 대해서 제가 대학원 학생 120명에게 설문조사를 해 봤습니다. 앞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협동심 부족이 1위였는데, 대학원생들은 2위로 지적했습니다. 1위든 2위든 협동심 없는 문제가 제일 큰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고등학생 150명도 역시 우리의 큰 단점을 협동심 부족이 1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국민의 제일 큰 문제입니다. 어른 600명 중 68%, 대학원생 120명 중 88%, 고등학생 150명 56% 등이 한국 사람들은 서로 협력을 안 한다는 동일한 지적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라면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하고 개선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가? 우리 한국 사람들이 옛 사람들의 잘못된 구습을 타파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협동심을 기를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을 하고 방법을 찾을 수는 없는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철저히 훈련할 수 없을까?

우리의 장점 때문에 잘해나가고 있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협동심의 부족’을 철저하게 뿌리를 뽑을 수 있는 운동이 교회로부터, 여러분으로부터 먼저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을 맞아 그동안 우리는 나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나라, 우리에게 주신 이 나라가 지금보다 더 높이 솟아올라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도록 이번 한 주 동안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한국 사람의 두 번째 단점으로 지적된 것은 ‘이기심’입니다. 어른 대상자 60%가 한국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의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학원생들은 98%가 이기심을 협동심 부족보다 제일 큰 문제로 지적했습니다. 이기적이니까 협력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고등학생 역시 68%가 이기심을 제일 큰 문제로 꼽았습니다.

협동심 부족과 이기심을 국민적, 국가적 문제로 인식을 하고 여러분 속에도 이런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 내 속에 있는 협력하지 않는 죄성과 이기심을 제거해 주시고 어디서든지 우리가 협력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는 이타심을 갖도록 도와주옵소서’ 이런 기도와 노력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정직성의 결여’입니다. 이 점은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문이나 TV를 보면 매일 속이고 사기 치는 일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직업의 고저를 막론하고 우리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나와 내 조상들이, 나와 우리 국민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우리와 우리 백성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느혜미아와 다니엘의 통회의 기도처럼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새로운 목표들을 갖고 협력하고 남을 위하고 정직할 때 우리 민족은 큰 민족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네 번째는 ‘극심한 비판성’입니다. 한국 사람은 너무 비판적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고, 자신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를 보면서 계속 다른 사람만 비판하는 단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악한 모습입니다. 반드시 고쳐야 할 것입니다.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밖에도 허영심 등등 여러 단점들이 있습니다.

이제 한국 사람들의 이러한 단점들을 놓고 내가 먼저 기도하고,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울 때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협력심, 이타심, 정직성, 격려심, 존종심 등 우리 백성에게 꼭 필요한 새로운 자질들을 개발하고 가르쳐서 우리의 잘못된 풍토들을 고쳐 우리나라가 일어나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나라가 되도록 함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누가 시작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찾고, 불의를 버리고 의를 찾고, 민족과 사회와 직장과 가문과 우리 자신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면서 새 사람을 입는 좋은 출발이 이번 고난주간 동안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나 개인과 내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이 새로워지는 축복이 부활주일을 계기로 살아나는 은총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나를 다스리는 힘

골 3:1-11 / 조용기 목사

우리 교회는 사회사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엘림복지회도 그 중 한 사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떳떳한 사랑을 온 세계에 나누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우리를 통해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라 그리하면 돌려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주리라 하셨으므로 여러분에게 사랑과 행복을 주십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사랑과 행복을 가지십시오. 인사하십시오. 한번 더 말씀하십시오. 주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할렐루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를 다스리는 힘”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 가보면 사람이 그렇게 일부러 하지도 않았는데 자연히 소나무 단지가 있는가하면 도토리나무 단지, 밤나무 단지 이렇게 나무들이 군거를 하고 있습니다. 떼를 지어서 끼리끼리 모여서 있습니다. 희안한 일입니다. 새들도 노는 것 가만히 보면 종류끼리 모여 놀아요.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까치는 까치끼리 참새는 참새끼리 모여요. 짐승 떼들도 무리지어 다니고 벌레들도 종류끼리 모입니다. 사람들도 인종을 따라 모여 삽니다.

미국 세계 인구시계(U.S. & World Population Clocks)에 의하면 2010년 6월 현재 세계 인구는 약 68억 5천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세계는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종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말레이, 오스트레일리아인 등 5대 인종으로 구분됩니다. 이것은 주로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유전적인 신체의 특징에 따라 나눈 것입니다. 유엔 보고에 의하면 현재 지구상에는 같은 인종이라 할지라도 언어와 관습 등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구분하여 1만여 종의 종족들이 서로 떼를 지어서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동물도 식물은 말할 것 없거니와 사람도 인종과 종족에 따라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삽니다. 자기하고 전혀 같지 않은 사람하고 모여 살지 않아요.

 

<본론>

1. 내게 이루어진 환경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될 것은 내 주위에 이루어지는 환경은 나와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은 합쳐서 살지 못합니다. 아 신문보면 정치도 한나라당은 한나라당끼리 모이고 민주당은 민주당끼리 모이고 서로 끼리끼리 모이지 않습니까? 취미가 같은 사람끼리, 사상이 같은 사람끼리 모입니다. 유유상종하여 같은 무리가 함께 모여서 함께 삽니다. 그런데 알아야 될 것은 나의 소원과 생각이 환경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소원과 생각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있는 소원과 생각이 우리 환경에 나타나서 우리 환경을 만들어 갑니다.

골로새서 3장 1절로 3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감추었으므로 위에 것을 생각하라.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것을 생각하라. 우리가 위에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밖의 나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먼저 내 마음의 생각에 무리 짓던 것이 몸 밖으로 현실화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항상 생각하던 그것이 나의 환경에 일어나는 거에요. 내 생각에 전혀 없던 것이 환경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아, 저 사람은 항상 악을 행하느냐. 수렁이 빠지느냐. 먼저 마음 속에 악이 있기 때문에 그 악이 무리지어서 그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은 항상 선한 일이 주위에 일어나고 선한 사람들과 함께 모인다. 왜 그러느냐. 그 마음 속에 있는 선이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로마서 8장 5절로 6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육신의 일이 나타나지 영적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늘 시원한 맥주나 한 글라스 마셔야 되겠다는 사람에게 성령충만이 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 맥주가 오지 성령이 오지 않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생각이 나의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외국에는 연말이 되면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망년 파티를 하는 경우, 그들은 다음해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소원을 종이쪽지에다가 적어요. 적어서 편지 봉투지에 넣어서 딱 봉하고 그래서 그 다음해에 다시 모일 때 그것을 뜯어 봅니다. 다음해 12월 31일에 다시 봉투를 열고 한 해 동안 소원하던 일이 얼만큼 이루어졌는가 봅니다. 어떤 사람은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봉투를 뜯어보니 그렇게 써놓았는데 진짜 그 말대로 더 행복해진 1년을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 집으로 이사가기를 바란다.”고 적었는데, 정말로 새 집에 이사를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봉투를 쓴 사람이 참석을 안 했습니다. 봉투를 뜯어 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습니다. “다음 해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해이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60세를 넘지 못했는데, 내년에 내가 60이 된다. 나 역시 내년을 넘기지 못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과연 그 다음 해에 죽고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꿈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과 생각이 환경을 더 좋게 만들기도 하고 더 나쁘게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마음에 생각과 소원이 중요합니다. 생각과 소원이 먼저 있고 난 다음에 그것이 무리지어 내 환경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이루어지는 환경은 바로 내가 마음과 생각에 만들어 놓은 것이 내 환경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얼토당토 안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느냐, 부정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인 말을 하느냐 하는 작은 차이가 우리 인생을 180도로 완전히 달리 만들어 놓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환경에 긍정적인 환경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것이 무리지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리의 법칙이에요. 모든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것은 무리의 법칙에 영향을 받습니다. 내 생각이 그 무리의 법칙에 따라서 똑같은 환경을 끌어 당기는 것입니다. 내 소원과 꿈이 그 소원과 꿈대로 환경을 끌어 당겨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보험회사 중의 하나를 설립한 클레멘트 스톤(W. Clement Stone)씨는 어릴 때 가정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려운 가정을 돌봐야 했지만 늘 긍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부유하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건강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부유하다. 실제로 그는 건강하게 열심히 일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음에 생각하던 것이 환경에 나타난 것입니다.

세계적인 호텔 사업가인 콘라드 힐튼(Conrad Hilton)은 항상 자신이 갖게 될 호텔을 머릿 속에 그렸다고 합니다. 앉으나 서나 장차 자기가 가질 호텔을 머릿속에 그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늘 상상하고 꿈꾸던 그 호텔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생각하고 그린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생각하고 마음 속에 그린다는 것은 바로 내 환경을 주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과 생각이 환경을 만들고 내가 생각한 것이 몸 밖의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눈에 안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도록 나타난 것입니다.

최근 간행된「꿈, 희망, 미래」는 가난을 극복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스티브 김, 김윤종 씨의 성공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는 한국 전쟁 직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희망을 굽히지 않고 꿈을 키우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1976년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단돈 2천 달러, 240만 원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처음에는 청소하고 차고를 지키는 일 등 숱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으로 야간대학원을 다니며 3년 만에 미국의 대기업에 입사했습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도전정신으로 중소기업의 세일즈맨을 자청하여 회사를 크게 키우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과 희망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친구 집 차고를 빌려 컴퓨터 네트워크 부품업체를 창업했습니다. 시작은 초라했으나 1년 여 만에 제품을 개발하여 NASA의 주문을 시작으로 회사는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기업을 창업하여 3년 만에 직원 1천 500명에 60여개의 해외지사를 둔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은 돈과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꿈과 희망과 미래가 있을 때 나에게 찾아온다.” 빈손들고 거지로 미국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눈에는 안보이지만 그 마음에는 꿈과 희망과 미래가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꿈과 미래와 희망이 그와 합쳐서 그런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 성품에 맞는 동인을 만들어서 살자. 내 마음에 있는 꿈과 희망과 미래가 그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마음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 보자. 그래서 운명적으로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한국을 떠난 지 20년 만에 아시아 최고의 억만장자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과 북한, 제3세계를 위해 연간 20억 원을 지원하는 자선사업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는 자신이 설립한 “꿈, 희망, 미래 재단”을 통해 그 동안 자신이 일군 성공을 아낌없이 나누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서 성공하고 싶다는 희망과 꿈을 갖고 떠난 그는 늘 자신의 꿈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열정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고 바라던 대로 거부가 되어 이제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광고를 듣다 보면 “생각대로”라는 말이 광고에 많이 나옵니다. 결국 내 마음 속의 소원과 생각대로 내가 삶의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 희한한 친구를 거느리고 삽니다. 마음 속에 꿈과 희망, 미래를 마음 속에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친구입니다. 이 친구들이 여러분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친구들이 여러분과 함께 그 꿈과 희망과 미래의 환경으로 여러분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별로 그것을 몰랐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까 앉으나 서나 나 혼자 있다고 생각이 안됩니다. 내 속에 꼭 여러명이 같이 있어요. 희한합니다. 그 여러명이 항상 내 마음 속에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의논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하고 의논한 결과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여러명이 누구냐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이십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마음속에 계셔서 이야기를 하고 의논을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나와 함께 의논해서 의견일치가 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요.

오랜 세월동안 저는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너의 교회가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된다. 온 천하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사회사업을 크게 하는 교회가 된다. 마음 속에서 자꾸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나도 나중에 맞아. 맞아. 세계 최대 교회가 될 것이고 선교사를 온 세계에 파견할 것이고 또 사회사업을 크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와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지금 내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에 이루어진다.

 

2. 교육이 환경을 만듦

둘째로, 또 생각하고 싶은 것은 교육이 눈에 보이는 환경을 이룹니다.

우리에게 교육을 시키면 그 교육이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불신의 사상과 교육은 큰 불행을 가져옵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무신론을 교육하는 나라는 그 백성들이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북한 보십시오. 하나님이 없다는데 그 때문에 그들 행실이 고약하고 부패하고 가증하고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계시면 뭐 거짓말해도 상관없어요. 불의나 불법을 행해도 누가 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되든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사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은 마음 속에 적어도 하나님이 계시므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이렇게 해도 괜찮은가. 하나님이 꾸중하지 않으실까. 그 한두번 생각하는 것이 그의 삶의 결단을 내리는데 중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9절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야훼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야훼의 말씀이니라”

무신론적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으면 그 결과는 악이 창일하게 되고 생활에 고통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신 것을 가르치고 경천사상을 가르치면 그것이 우리의 환경과 운명을 변화시키는 큰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4절로 7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훼는 오직 유일한 야훼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

그렇게 하면 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잠언 9장 9절에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그러므로 우리 교육이 하나님 계신 교육을 하느냐, 무신론의 교육을 하느냐가 우리 생활과 환경과 운명을 좌우하는데 굉장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서 1장 7절로 9장 10절에 보면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잠언서 14장 27절에 “야훼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다.

이사야 33장 6절에 “야훼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시편 103편 13절에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잠언서 22장 4절에 “겸손과 야훼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시편 115편 13절에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야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면 나이 늙을 때까지 그 신앙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교육을 꼭 시키십시오. 그러면 그 교육이 그 마음을 이끌어 가게 되고 그 마음에 생각이 그 환경과 운명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3. 자화상이 환경을 다스림

셋째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자화상과 삶의 환경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자화상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 아침이나 저녁이나 집에 가면 큰 거울 앞에 서서 보잖아요.

왜냐, 자기의 자화상을 마음 속에 그려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진 사람도 있고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벌써 출발부터 망했습니다.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출발부터 성공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보냈던 정탐꾼 열두명이 와서 보고를 합니다. 그 중에 열명은 말하기를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메뚜기 자화상. 우리가 가서 그들 비교해 보니 그들이 장대하고 커서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 어림도 없다. 우리 들어가면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 사로잡힐 것이고 우리는 칼날에 죽을 것이다. 애굽으로 도로 돌아가자! 완전히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졌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의 휩쓸렸습니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보다도 부정적인 것에 휩쓸립니다. 긍정적인 말은 좀처럼 안따라해도 부정적인 말은 쉽게 따라 합니다.

2년 전에 한국에 소고기 파동, 미국 소고기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 근거도 없습니다. 거짓말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원의 불길같이 퍼져 나가는 것 보십시오. 요원의 불길같이 퍼져 나갑니다. 사람들은 긍정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좋아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부정적인 자화상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갔다와서 보고하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 14:7~9)

승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먹이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우리는 능히 들어가서 점령할 수 있다. 우리 것이다. 가자. 그런데 군중들이 돌을 들어서 이 두 사람을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열 사람은 하나님의 형벌로 다 죽이고 그 사람들 따랐던 백성들은 다 죽을 때까지 40년을 광야에서 방황을 하게 되고 죽고 오직 광야를 살아서 남아서 후손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밖에 없었습니다.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진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자기를 볼 때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심이 없느니라. 나는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므로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시니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합동하여 선하게 만들어 주신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에 나는 무능하고 무력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았지만 이전 사람이 아니야. 나는 예수 사람이야. 나는 새것이 되었어.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새로운 자화상을 가져야 됩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에 입각한 자화상을 가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용서와 의의 자화상을 가지십시오. 용서받은 의인이다. 보혈로 말미암아 나는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으므로 병고침을 받았다. 치료받은 사람의 자화상을 가지십시오. 예수님이 나의 저주를 대신하시므로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부활과 영생천국의 자화상을 가지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된다는 자화상을 가지십시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1~5)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밝고 맑고 환한 자화상을 가지십시오. 거울 들여다 보고 메뚜기다. 메뚜기!

그러면 절단강산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진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밝고 맑고 환한 마음에 자화상을 가진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7절로 10절에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들을 벗어 버리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었다는 자화상을 마음에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씀이 자기 자화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내가 어떻게 변하느냐. 내가 생각을 변화시키고 꿈을 변화시키고 믿음을 변화시키고 말을 변화시키면 내 자화상을 달라지고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한다.

시편 81편 10절에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이 성경구절들을 통해서 보십시오. 생각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꿈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믿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말씀이 우리 자화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덴마크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에 막대한 배상금을 내고 덴마크는 바깥 곡창지대를 다 독일에게 뺏겨 버렸습니다. 국내 산악지대에 험하고 곡식을 지을 수 없는 땅만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전쟁에서 돌아와서 대낮부터 술주정뱅이가 되고 나라는 부패하고 삶은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완전히 버림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룬투비(Nikolaj Grundtvig) 목사가 일어나서 3회 운동을 외친 것입니다. 밖에서 잃은 국토 안에서 찾자! 밖에서 잃은 것 전쟁에서 찾을 힘이 없으니까 밖에서 잃은 국토 안에서 찾자!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내 가정을 사랑하자. “지옥문에서 돌아서자!” 그리고 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해서 국민고등학교의 교과 과정을 50% 이상 성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룬투비 목사님은 청소년을 바로잡고 나라의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고 믿고 3개의 모토로 국민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자. 둘째, 이웃을 사랑하자. 셋째, 흙을 사랑하자. 그 후, 덴마크는 놀랍게 변화되어 희망도 없고 절망뿐인 나라가 지상낙원이 되어 오늘날 세계적인 복지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들 생각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니까 덴마크의 운명이 달라진 것입니다. 환경이 달라지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생각을 바꿔 먹으십시오. 꿈을 바꿔 꾸십시오. 믿음을 바꿔 가지십시오. 말을 바꿔 하십시오. 그러면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룬투비 목사님을 통해 희망을 심자 덴마크는 절망의 땅에서 지상낙원으로 변한 것입니다. 생각과 꿈, 믿음, 말을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긍정적으로 가질 때, 우리는 희망찬 내일로 환경을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성공학자 혼다 켄(本田 健)은「부와 행복의 법칙」에서 1억 엔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자 965명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상속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전체 중 18%에 불과하고 백만장자 5명 중 4명이 빈 손으로 시작해서 거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혼다 켄은 “부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자는 만들어진다.”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부자를 연구하여 유명하게 된 토머스 스텐리(Thomas J. Stanley)는 그의 책「백만장자 마인드」에서 그들이 백만장자가 된 이유에 대해 심층 분석을 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 백만장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신다고 생각하고 나는 부자가 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생각한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잘살게 만들어 주신다. 믿습니다. 그 믿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세요.

빌립보서 4장 1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음 안에 거듭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에 입각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면 할 수 있다고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능력 주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지금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능력주시면 할 수 있잖아요.

저는 노래를 부를 줄 몰라도 하나님이 능력 주시면 노래 부를 수도 있어요. 하나님이 능력주시면 앞으로 노래를 좀 부를 줄 생각합니다.

 

<결론>

사차원의 영성이 삼차원의 환경을 지배하고 만들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눈에 안보이는 사차원 그 사차원은 생각과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현실에 나타납니다. 삼차원 세계 속에 나타나서 우리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쉰들러(Schindler) 박사는 행복이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즐거운 생각을 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환경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거의 대다수 시간에 마음이 즐거운 생각을 하고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데일 카네기는 언젠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평생 동안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을 세 문장으로 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생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우리의 생각이 지니는 엄청난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란 참 중요합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잠언 17장 2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우리 마음의 생각은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사차원의 영성이 삼차원의 삶인 육체와 환경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고 바라보며 그것을 말로 시인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만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생각을 갖게 되고 마음에 소원과 꿈을 갖게 되고 기적을 믿고 승리하는 삶의 말을 하십시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누가 말 못해요? 여기 강단 있다. 누구든지 말할 수 있어요. 강단이 없을 때 제가 여기 강단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믿음으로 말하는 말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것 이것이 사차원의 인간입니다. 삼차원 물질 속에 있는 삼차원의 인간은 있어야 생각하고 있어야 그것을 꿈꾸고 있어야 말합니다. 그 사람은 미래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와서 찬송하고 믿고 기도하는 것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생활 속에 꿈꾸고 믿고 말하던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에 항상 중요한 것이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 어떤 말을 하는가. 이것이 여러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어떤 것을 생각하고 계세요? 지금 여러분 어떤 것을 꿈꾸고 계세요? 어떤 것을 믿어요. 어떤 것을 말씀하세요? 크게 무슨 신비한 일이 일어나야 내 운명에 전환기가 다가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평범한 이 시간에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내가 무엇을 꿈꾸고 있느냐. 무엇을 믿고 있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 그것이 여러분을 사차원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운명을 다스리고 환경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것을 갖게 되는 위대한 기적이 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희망이 있습니다. 더 잘살게 됩니다. 더 승리하게 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왜,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꿈꿀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장밋빛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의 은혜

렘 15:16,20-21 골 3:1-4 / 이정익 목사

지난 주간에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중국 작가 루화난이 쓴 「마음을 다스리는 인생철학」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 나오는 주인공 두 사람이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몸에 종양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가면서 두 사람은 약속을 합니다. 검사 결과 자신의 종양이 암이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즉시 여행을 떠나자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굳게 약속하고 진단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 진단 결과가 나왔는데 A는 악성 암이었고 B는 단순한 혹이었습니다. 약속대로 A는 하던 일을 다 접고 인생을 품위 있게 마무리하기 위해 여행을 가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병원을 나서서 여행 계획표를 만들었습니다. 그에 반해 B는 치료받기 위해 입원을 했습니다. A는 다음과 같이 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티베트로 가서 구경을 하고, 그 다음에 양자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배를 타고 유람을 합니다. 그리고 해남으로 가서 해변을 즐기고 하얼빈으로 가서 겨울을 납니다. 대련에서 다시 배를 타고 바닷길로 남부로 가서 천안문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익스피어 작품을 읽습니다. A는 이렇게 계획을 세웠고 계획표대로 여행을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세운 계획을 모두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여행을 정리하면서 시도 쓰고 신문에 산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B가 신문을 보니까 함께 진찰받았던 친구의 산문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병세를 물으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A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암이 아니었더라면 나의 삶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을지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네. 암은 나를 일깨워줘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만들었고 꿈이 현실이 되게 하였네. 나는 이제야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었어. 그런데 자네도 잘 지내고 있는가?” 그러자 B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암이면 여행을 떠나겠다던 꿈을 암이 아니라는 말에 까맣게 잊게 되었네. 그리고 암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모든 것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네.” 저는 이 책을 읽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B는 누구인가? 나 자신이 아닌가. 그리고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소란하게 살고 각박하게 살고 바쁘게 살고 짜증내며 매일 걱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아주 고급스런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품위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생각 없이 살아가며 그 결과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채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눈에 띄는 글이 있었습니다. 61세 된 여성 작가 제인 로터가 말기 암에 걸려서 죽음에 임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사망했을 때 신문에 낼 부고를 스스로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에게, 내 인생에서 당신을 만나 것은 행운이었어요. 당신을 하늘만큼 사랑해요. 아들딸들에게, 너희들이 살아가다가 장애물을 만나기 마련인데 그때 너희는 그 장애물 자체가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는 신나는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휴가를 떠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수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얼마나 멋진 존재입니까? 사람이 이런 수준에 오르려면 필수적으로 깊이 생각하는 삶을 살고 음미하는 삶을 살아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위의 것을 찾아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의 것이고 무엇이 아래것입니까? 위의 것은 12-1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용납, 용서, 사랑 등입니다. 그리고 땅의 것은 5-7절에서 말씀하기를 음란, 부정, 사욕, 정욕, 탐심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 없이 살아가다가 보니까 위의 것과 땅의 것을 혼동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생각하는 삶이고 묵상하는 삶입니다.

 

생각하고 묵상하는 존재

 

사람은 생각하고 묵상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신비한 자료들을 내장시켜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묵상하는 자질입니다. 사람이 깊이 묵상하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갈 때 깨달음을 가지게 됩니다. 거기서 눈이 뜨이고 알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의 마음은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결코 진정한 안식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폰 발타자르는 “기도“라는 책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창조되었으며 그 말씀에 순응할 때 자신의 진정한 존엄성을 알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지정된 장소에서 건물에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지성소와 성소와 회막에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따로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 마음에 와 계십니다. 그래서 매일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묵상을 통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내 마음에 먼지를 털어내고 닦아내야 합니다. 땅에 것을 버리고 위의 것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내 자세가 모습이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고 깊은 묵상을 통해서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고 하나님 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말씀을 듣고 계시를 받고 길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묵상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 전체를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감동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책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이시고 대필자는 인간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고 이 말씀에 능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만나면 변화 받게 되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벤허의 저자 루이스 윌리스도 그랬습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무신론을 증명하려고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성경을 읽다가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장엄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그 하나님을 세상에 증명하려고 벤허라는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원로 가운데 채필근 목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한학자였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일이 생기니까 유교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성경의 유해함을 증명하려고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한학자가 가족들을 불러 모아놓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우리 집안은 모두가 기독교를 믿는다.” 그래서 온 집안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기독교에 문제가 있다면 말씀을 등한시 하고 자꾸만 기독교에 대한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 자꾸만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법이나 율법과 제도나 직분에 매이고 관심을 가지는 일 때문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에 관한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자꾸만 예수를 가르치지 않고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이 뭐냐, 아버지는 몇 살을 살고 죽었느냐, 그의 직업이 무엇이었느냐, 십자가의 길이는 얼마고 무게는 얼마냐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옆구리에 창을 찔렸는데 죽은 후에 찔렸느냐 살아 있을 때 찔렸느냐 이런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예수에 관한 것들입니다. 예수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아인 것을 몰라도 십자가의 무게나 길이를 몰라도 구원 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부수적인 것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지도 믿지도 말고 예수를 가르치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경 전체를 믿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 내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때 성경은 나에게 말씀과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묵상은 무엇입니까? 오늘 많은 사람들이 묵상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명상, 침묵, 선을 묵상인줄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명상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차원의 고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침묵은 내 마음에서 무슨 생각이든 다 지워버리고 텅 빈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선은 나의 존재를 아예 없애버리고 나로 하여금 무아지경으로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묵상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묵상은 절대로 그런 차원이나 의미가 아닙니다. 먼저 묵상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묵상의 대상이십니다. 성경을 묵상한다고 할 때도 성경의 글자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석양의 모습을 묵상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묵상한다면 그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아름다움을 창조하시고 허락하신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오묘함, 권위, 위대함을 묵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묵상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묵상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묵상입니다. 이 묵상은 인간에게만 주신 수단입니다.

 

자신 발견

 

묵상은 내면의 세계를 보고 듣고 발견하게 합니다. 거울을 보고 외적인 나의 모습을 발견하듯이 깊은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내면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의 추한 모습, 무능한 모습, 텅 빈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숨겨두었던 나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무릎꿇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묵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아들이 해외에 입양하게 되면 성장하면 반드시 고국을 찾아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와 근본을 확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부모는 누구인가, 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 이것이 묵상을 통해서 얻는 은혜입니다. 사람이 이것을 알면 더 이상 혼란이나 방황이나 회의나 불신이 없어집니다. 혼란이나 흔들림은 목적이나 정체성이 불분명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이 흔들리고 교회가 흔들리고 삶이 흔들리는 것은 목적이 불투명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흔들리는 것은 주체와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 성도들이 별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갈등하는 것을 보고 걱정을 했습니다. 고심 끝에 강단 앞에 관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관 뚜껑 앞을 조금 열어 놓고 한사람씩 나와서 들여다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한명씩 나와서 관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한결 같이 움찔하고 놀라면서 뒷걸음 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교회가 조용해 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관속에서 뭘 보았기에 그랬을까요? 관속에는 큰 거울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거울을 통해서 모두 자신의 얼굴을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 큐티를 자주 말하고 있습니다. 큐티는 자신을 정돈시키고 꾸준히 자신을 수정해 나가게 하는 묵상입니다. 대개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하루를 끝내고 큐티를 합니다. 그 시간에 자신의 하루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하루의 삶을 결산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 올바름과 정당함이 있었는가, 무엇이 부족하였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꾸준히 날마다 자신을 찾고 되돌아보고 수정시켜 나가면서 점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큐티의 의미입니다. 그 묵상의 시간에 성령은 꾸준히 나를 주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흠뻑 젖음

 

그때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은혜의 비로 흠뻑 적심을 받게 됩니다. 기도는 무엇인가 결과를 얻으려고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원래 기도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영감과 은혜입니다. 그때 주시는 영감과 은혜를 받아 스펀지처럼 나를 흠뻑 적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만입니다. 그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최상의 만족함과 행복함과 기쁨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나오는 고백이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시점이 가장 강해지는 때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언제나 어느 환경에서나 든든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46편의 시가 그런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한일전 축구가 열립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에게만큼은 꼭 이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반전에만 3:0으로 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속상해서 그만 TV를 끄고 잠을 잡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국이 4:3으로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재방송을 보게 됩니다. 전반전이 다시 진행되는데 3:0으로 지고 있습니다. 어제 같으면 속이 많이 상했을텐데 지금은 걱정이 없습니다. 마음 편안하게 간식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습니다. 왜 마음이 편안할까요?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든든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만만하고 두려움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협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삶을 살아가려면 묵상생활에 충실하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묵상생활에 충실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지금 내 마음에 땅의 것으로 충만해 있고 가득하고 골똘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묵상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다 내려놓고 내 마음을 비울 때 나는 비로소 묵상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는 이미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감취어 있느니라”는 말씀은 예수 안에서 얻은 생명의 효과는 재림 때까지 지속될 뿐만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취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골3:1-4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아주 놀라운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명령의 배후에는 놀라운 기독교의 기본진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명령만 하지 않고 그 이유를 자세히 밝혀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2000년 전 바울이 현재 터키 남부의 조그만 도시 골로새에 보낸 편지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을 바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 뒤 문맥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골로새 서 3장 1-4절은 골로새 서 전체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비록 4절 밖에 안 되는 짧은 구절이지만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부분입니다. 한 편으로는 지금껏 말해오던 교리부분을 마감하는 부분이요 다른 한 편으로는 주된 권면이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한 편으로는 거짓 사역자들의 말도 안 되는 이론을 반박하면서 거기에 대한 바른 대답을 제시하므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또 다른 편으로는 신자들의 삶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새롭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 5절, 12절 초두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뒤 따라 나오는 말들이 앞부분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읽은 부분 역시 2장 마지막까지 말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만을 상기시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즉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다시금 회상시킵니다.

그리스도인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고 명합니다. 그리하여 또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을 발할 준비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읽은 부분은 잘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2절 그리고 3, 4절로 말입니다. 첫 절은 세 짧은 절로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론적인 조건 절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주절이 “위의 것을 찾으라”는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절은 두 개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구절입니다. 2장 8절, 16절 그리고 17, 18절과는 달리 긍정적인 명령이 여기에는 먼저 나오고 부정적인 명령이 뒤따릅니다.

이 문단의 두 번째 부분 3, 4절은 “이는”이라는 접속사가 앞부분과 연결을 시키는 동시에 먼저 나온 권면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3절은 그 방향이 과거를 지향하는 동시에 현재를 가리키고 반면에 4절은 미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과거를 함께 하고 현재를 함께 하는 동시에 미래를 함께 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씩 우리가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왜 그리스도인은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까? 그 첫 째 이유는 1.우리는 과거를 그리스도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란 서론적인 조건 절속에 제시합니다. 사실 바울은 이 사실을 2장 12절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하지만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죽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 바울은 2장 20절에서 이 사실을 말한 바 있습니다. 거기서는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골2:20)이라고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함께 죽었을 뿐 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함께 장사까지 지냈다는 사실을 이미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2: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죽은 그 분과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그 분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장사지낸 그 분과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그 분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들은 모두 과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만약 그와 함께한 여러분의 죽음이 여러분을 얽맨 옛 질서로부터 단절시켰다면 그와 함께 한 여러분의 부활이 새로운 하늘 질서에 여러분을 편입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은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위의 것을 추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과는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옛 생명은 끝났고 주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주님 뜻대로 이제는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 주님이 관심사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생명 살리는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권면은 우리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관심을 위를 향해 쏟아야 합니다. 의지의 방향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 썩어질 것을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좀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의 방향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쪽을 향해 계속적으로 노력을 쏟아야 합니다. 거짓 사역자들은 눈에 보이는 경험을 추구했지만 사도 바울은 “위를 향해”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요구합니다.

거기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우리의 시선을 위를 향할 때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무덤에서부터 나와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보좌에 앉아서 지금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엄청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운명과는 필연적인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기에 여러분도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신 그 최고의 존경의 자리에 여러분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골로새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참여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그가 통치하시는 영역에 속한 것들에 여러분의 관심을 쏟기를 바랍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로서 이제 생각하십시오.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로서 관점을 회복하십시오. 여러분의 태도와 야망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같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은 사도들의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언제나 선포했습니다. 모든 원수를 굴복시키기까지 거기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실 때까지 군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고백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우편은 존경과 능력의 장소요 영광과 행운의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편에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역의 중심에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최고 위엄의 장소에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표현은 존귀해지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달리 말해 하늘은 우리를 함께 살리신 그리스도를 중심한 영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권능을 가지신 위치에 계시기에 그 어떤 정사나 권세도 우리로 하여금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을 결코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그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최고 권좌에 계신다는 사실을 두고 사도 바울은 다시금 권면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이 2절의 권면은 1절에 나타난 권면을 조금 표현을 달리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말 대신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여기 생각한다는 말은 강력한 의미의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끈질기게 집요하게 계속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결혼을 하기 전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았다고 칩시다. 길에서도 좋고 모임에서도 좋습니다. 하여간 처음 볼 때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면 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립니까? 그렇다면 인연은 끝납니다. 하지만 가슴 설레는 대상을 보고 나면 헤어져도 생각이 납니다. 돌아서서 오는 길에도 생각이 납니다. 집에 들어서도 생각이 납니다. 방문을 닫고 자리에 눕는다고 생각이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생각이 납니다. 집요하게 생각이 계속되는 것을 여러분은 경험해 보셨습니까?

아니 여러분의 삶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했다고요? 혹시 그렇다면 각박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 증권투자를 하신 분들은 없습니까? 그런 분들은 일반 뉴스만 듣지를 않습니다. 밤 9시 뉴스를 시청해도 끝까지 다 봅니다. 반드시 주식 등락에 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시청할 것입니다. 어찌 밤 9시 뉴스시간만이겠습니까? 눈뜨면 주식시세고 틈나면 알아보려고 할 것입니다. 계속 주식시세를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늘에 있는 것들을 계속 그렇게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땅에 있는 사소한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에 있는 중요한 사실들을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땅에 있는 지나가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에 있는 항존 하는 것들을 집념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 - 존귀와 능력의 좌소에 앉아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하늘 기쁨과 보화에 계속 마음을 주라고 권면합니다. 하늘이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우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땅 위에 자질구레한 것들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소모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어떤 삶을 사느냐를 결정합니다. 여러분이 염려하며 생각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늘에 속한 것들입니까? 아니면 땅에 있는 사소한 것들입니까? 여러분이 시간을 드려 걱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늘에 속한 것들입니까? 아니면 땅에 있는 지나가는 것들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즉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까? 그 두 번째 이유는 2. 우리는 현재를 그리스도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3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엄밀히 말해서 위의 것을 찾아야 할 이유를 여기서는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은 옛 질서에 대해서는 죽었기 때문이라고 다시금 설명합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새로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2장 20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그리고 2장 11, 12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이 사실 때문에 5절의 명령 수용이 가능합니다.

달리 말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죽음은 세상의 초보적인 원리나 영들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금욕적인 규정에 대해서 그리고 온갖 환상을 보았다는 것들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라 이제 우리는 새 생명의 영역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이는 . . .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또한 장차 주님 오실 때 만 천하에 나타날 생명이기도 합니다.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우리 생명이 그 만큼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함께 감추어져 있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해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우리의 생명을 해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안전과 복락은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그가 살아 계신 한 우리도 또한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생명은 아버지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주안에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즐거워하십시오. 주께서 여러분과 생명을 나누십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아무도 발견할 수도 없고 아무도 해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주는 소망을 붙잡기 바랍니다. 결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길에 수많은 대적들이 포진해 있고 여러분의 힘은 약할지라도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진 여러분의 생명은 아무도 해치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명은 하늘 장막 비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물론 한 날 “영광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의 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여러분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아니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을 아직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벵겔이 말한 것은 음미할 만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자신도 자신을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이중 성벽과도 같이 안전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기에 모두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왜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존재를 하나님 안에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들은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 안에 두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묵상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명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보호되고 있습니다. 다시금 말합니다만 그리스도를 해하지 않는 한 여러분의 생명을 결코 해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늘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은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은 말합니다. 그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있는 생명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한 존귀하게 되신 분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자들입니다. 거기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 관점을 상실하지 마십시오. 그 때 비로소 세상을 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세상의 실체를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정체를 바로 인식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의 관심이 ‘잠시 잠깐 후면 오실’ 그분께로 향할 것입니다.

어디서 사물을 보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릴 때 다녔던 초등학교 교정에 어른이 되어서 가보셨습니까? 갑자기 운동장이 좁게 느껴질 것입니다. 터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뛰놀던 동네를 어른이 되어서 가보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보이던 앞동산이 논 하나 거리로 가까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1 미터 높이에서 바라보던 동네와 1.6 미터 높이에서 바라보는 동네는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까? 그 세 번째 이유는 3 우리는 미래를 그리스도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4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여기서 바울은 놀랍고도 생생한 언어로 우리의 미래를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그 순간 우리도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생생한 소망을 확신 가운데 표현합니다. 그는 여기서 영광스런 미래, 미래의 극치의 순간을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네 번째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라는 말을 다시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임하시는 순간 마치 베일이 제거되고 지금껏 우리의 눈에 가려졌던 것이 빛 가운데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은 그리스도 자신이 임하시는 날이요 그의 백성들이 그와 함께 나타나는 최후의 날입니다. 지금은 감추어져 있지만 그날은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백성은 너무 밀접히 관련되어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맨 처음 우리의 눈을 위로 향할 때 거기서 우리는 다만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거기 있는 그리스도를 응시할 때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같은 보호 막 안에 있지만 여전히 독립된 두 개의 개체로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제 3의 장면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동일한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감추어져 있는, 더 이상 두 개의 개체로서가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너희 생명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이제 합일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눌 수 없는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소리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같은 고백은 결코 바울만의 고백일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연합한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그의 몸된 성도들 하나하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그에게 속한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6: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2).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우편에 있는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마지막 재림 때에 주님이 나타나시면 여러분도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그날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기 우리 본문은 “그와 함께”를 강조합니다. 동시에 “영광중에” 나타날 것을 강조합니다. 그의 나타남은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사건이요 동시에 여러분의 나타남도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사건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요일 3:2) 그날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을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왜 우리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응시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하늘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합니까? 오늘 우리 본문이 밝혀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 현재, 미래를 그리스도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옛 삶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끝장을 보고 새 삶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우리도 영광 가운데 그와 함께 나타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 장사, 부활이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안전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진 생명을 소유하십시오. 영광스런 미래를 가지길 원하십니까? 그리스도를 지금 영접하십시오. 우리 다함께 기도합시다.

 

 

 

 

다름이 주는 감동

골 3:1-11 / 옥한음 목사

미국에는 교회가 한 30~40만개가 될 정도로 많습니다. 알다시피 그 나라는 기독교를 믿는 나라이고, 기독교 사상이 뿌리가 되어서 발전한 국가입니다. 헌법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가치관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미국 기독교 중 대형 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감리교, 장로교, 회중교회 등과 같은 교단들이 6, 70년대부터 계속 쇠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놓고 로버트 핑크라는 학자는 왜 큰 교단들에서 계속 성도들이 빠져나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지 연구하여 책을 발간했습니다. 그 책을 읽다 보면 대답이 아주 간단합니다. 교인들에게 너무 적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큰 교단들이 쇠퇴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말입니다. 교회들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려 애를 썼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적게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많이 요구하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신자가 될 수 있는데, 적게 요구하므로 세상 사람과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교회 나름대로는, 그런 식으로 신사적인 이미지를 심으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느낀 나머지 교회를 찾아 나올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적게 요구해서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컬러가 비슷해지자, 성도들이 먼저 교회를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회중교회의 경우 1987년 한 해동안 170만 명이 그 교단에서 빠져 나가버렸습나다. 물론 지금도 계속 감소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반면에 90년대에 들어와 미국에서 아주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교회 500여 개를 조사한 결과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강하게 요구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컬라를 분명히 하며 살도록 교회가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거부반응을 일으킬지 모르지만, 성도답게 살도록 성도들을 바로 세우는데 온 교회가 힘을 집중했더니 교회가 강해진 것입니다. 달라진 성도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히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귀담아 들어야 될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냈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 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흐르는 모든 사상의 주제를 보면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라'는 말을 바꾸면 '다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빛과 어두움이 다르듯, 소금과 썩은 고기가 다르듯,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거나 세상과 같으면 그날로부터 교회는 죽음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성도의 삶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왜 세상 사람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는지 4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때 '아, 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분명 세상 사람이 아니야. 나는 달라.' 하는 의식이 항상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이 생각을 통제하고, 말을 지배하고, 행동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4가지를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로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4가지를 한 가지씩 검토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에는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을 보면 이것을 좀 더 보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을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역하던 우리의 옛 사람도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끝이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죽으면 끝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라도 죽으면 끝입니다. 처음에는 시체를 끌어안고 몸부림을 치며 울지만, 며칠 지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던 아기라도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 시간 예배 드리는 성도들 가운데서 아직도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그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주님의 십자가를 보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주님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던 내 자신과 함께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정과 육체의 욕심으로 살던 내 옛 자아, 옛 사람은 완전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그 자아가 살아서 내 안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사는 것이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짓는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은 옛사람이 살아있습니다. 그들은 옛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옛사람으로 숨쉬고 있습니다. 옛사람으로 한 생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과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우리가 이런 것을 행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좋아하던 내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장사를 지낸 지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면서 한 때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던 그 순간, 나의 모든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다 처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생활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과 다른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가 부활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던 내 자신이 새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어 내가 살아났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주님의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다음에 부활하겠지만, 우리의 영혼은 이미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런 모습이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주신 새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born again'(다시 태어나다)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우리와 같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천사가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를 안 믿는 남편과 사는 부인이 있다면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남편이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면 너무나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어떤 부인은 3일, 1주일 동안 금식하면서 남편이 교회에 나올 때까지 사생결단을 하고 투쟁하기도 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그 남편이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예수님의 새 생명을 간직하고 사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으니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가지고 다시 사는 우리들은 10절에 있는 말씀처럼 벌써 지향하는 목표가 다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어 이제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닮아 계속 주님처럼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경에서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해간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겉 사람은 후패하여 젊었을 때의 아름다웠던 얼굴이 변해가긴 하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계속 변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어떻게 세상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절) 이 구절은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이란 우주적인 권세를 가진 상징적인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다음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전능자, 만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는 권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그 우편에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는 그 시간에 우리도 함께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에베소서 2장 6절에 나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자, 살아서 부활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때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앉히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고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하늘에 앉아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제 머리 속에 떠오른 표현인데 참 멋진 말입니다. '하늘에 앉아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얼마나 멋있는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국적이 바뀐 것도 아니고 피부색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못난 얼굴이 잘 생겨졌다거나 못 살던 사람이 잘 살게 된 일도 없습니다. 믿기 전의 모습이나 믿은 후의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진짜 생명이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지금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약간만 보여질 뿐입니다. 띠라서 세상 사람이 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감추어진 생명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 위에 사랑을

골 3:1-2 / 이수영 목사

200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2004년의 교회표어를 이라고 정했습니다. 이 표어를 따온 말씀이 들어있는 골로새서 3장의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땅의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찾아야 함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될 땅의 것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사도 바울은 같은 골로새서 3장의 5-9에서 그것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입에 담기 부끄러운 말, 거짓말 같은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이들이 결연히 버려야 할 땅의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12절 상반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 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실 때에는 거룩하도록, 즉 구별되도록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자들임을 말합니다. 거룩하심과 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본성입니다. 그 거룩하신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이라 한 말은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2절 하반절에서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했습니다. 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가장 훌륭하게 드러난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덕목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서도 요구되는 덕목으로서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들입니다.

 

 

13절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불만이 있어도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할 줄 아는 것은 같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이들의 공동체가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반절에서는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처해질 일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용납하심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라면 우리 사이에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씨는 우리가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누리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14절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덕목들이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좋은 덕목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열거하기 시작한 사도 바울은 사랑을 말하며 그것을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속옷에서부터 겉옷에 이르기까지 걸치는 것이 여러 가지인데 마지막에 띠를 맴으로써 그 옷차림 전체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속이건 겉이건 아무리 비싸고 좋은 옷을 걸쳐도 바지에 허리띠가 없다면 나가다니며 자랑도 활동도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사랑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3:8-10에서도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말했고, 고전13:13에서도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또 갈5:4-6에서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일인데 참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갈라디아서 5장의 22절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며 사랑을 그 첫머리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윤리적 교훈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른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가치체계 속에서 모든 것 위에 있으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과 삶에 반드시 더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앞서고 그 후에 사랑이 추가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랑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과 삶의 동기요 근거요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2003년에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교회표어를 내걸고 한 해를 살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새해를 맞기 전 지난해에 과연 얼마나 진리를 추구하며 진실해지려고 힘썼고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았는지 돌이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로 거룩하게 살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랑입니다. 진리가 지식적 차원에 머물고 거룩함이 외형적 모습으로 그치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진리도 거룩함도 아닐 것입니다. 진리가 참 진리 되고 거룩함이 진정한 거룩함이 되기 위해서는 그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와 거룩함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진리 때문에 싸울 수도 있지만 진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거룩함 때문에 누구를 정죄해야 할 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거룩함이 진정 원하는 것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냉혹할 뿐이며, 사랑이 없는 거룩함은 무서울 따름입니다. 진리로 거룩하여지려는 바램과 노력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추구할 것은 맹목적인 진리나 형식적인 거룩함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2004년에는 우리 새문안교회의 표어를 “모든 것 위에 사랑을”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개인의 삶과 공동체적인 활동에 공히 적용되어야 할 표어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 이루어야 할 것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이 사랑이 없는 가운데 행해지고 이루어진다면 우리 교회는 그저 시시비비를 가리며 서로를 정죄하는 싸늘한 법정같이 되고 말 것이며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의 품 같은 교회”의 꿈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각 기관과 단체가 힘쓰고 이루는 모든 것 위에 사랑이 더해지고 자리 잡는다면 우리 교회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2004년에는 각 부서나 기관이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 때문에 하고 사랑을 위하여 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행사나 사업의 동기와 목적과 방법이 다 사랑이 될 때 우리 교회는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문안의 믿음의 가족 여러분, 주 안에서 사랑이 넘치는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복 많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로만 아니라 실제로 더 많이 더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함으로 복된 새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

골 3:1-11 / 피영민 목사

 

(서론)

오늘 본문인 골로새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 이단은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잘알지 못하는 최고의 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지주의자들은 최고의 신이 자꾸만 하위 신들을 유출하여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내려 보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신들에 의해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질계가 창조되었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살고 있는 영계는 선한 세계요,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물질계는 악한 세계라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지주의자들은 철저한 이원론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신봉하였던 이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님도 영계에 있는 수많은 신중에서 하나의 신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메시야가 아니라, 영계에 있는 허다한 신들 중에서 낮은 계층에 있는 하나의 신에 지니지 않는다고 하는 매우 잘못된 사상을 영지주의자들은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오늘 골로새서를 기록함으로써 자칫 영지주의에 의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성도들의 믿음의 뿌리를 바로 잡아주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하여서 바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그리스도관을 타파해버리고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시며, 그리스도가 만물의 주인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만물 중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심을 가르쳐 주는 데에 있습니다. 이처럼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높이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존귀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그분을 영원한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만 할까요? 여기에 대하여 본문 3장 1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남을 체험한 믿음의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이 땅의 것을 찾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하늘의 신령한 것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거듭남(중생)’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심을 알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이란 사람의 뜻과 방법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만 거듭남을 경험할 수 있다고 깨우쳐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물’이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울 때에는 물은 성령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씻어서 정결하게 하고 구원을 길로 인도할 때에는 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게 됩니다. 이때에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역사합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바로 ‘거듭남’(중생)을 체험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중생)’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게 됩니다.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는커녕 천국을 잠깐 관광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헌금을 많이 하고 예배를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한다고 할지라도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한 사람에게 있어서 거듭남의 경험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원리를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3장 1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2004년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도 “과연 나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먼저 갖기를 원합니다. 혹시라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서 아직까지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이 한해가 다가기 전에 거듭남의 확신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저에게 여러분 모두를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우리 모두를 중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가운데에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받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어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까요?

 

1. 위엣 것을 찾으라

 

여기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본문 1절에서는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였고, 2절에서는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위엣 것과 땅엣 것을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중생의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위엣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들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오, 만유보다 먼저 나셨고, 만유위에 능력과 영광으로 존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신성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사고는 오로지 땅엣 것만을 추구합니다. 하늘의 큰 영광을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의 만족과 즐거움과 쾌락만을 얻기 위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구들을 지금도 가끔씩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과의 만남은 항상 즐겁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화의 수준이 너무 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심의 초점이 땅엣 것만을 위해서 모아져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조금도 갈망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있는 사업과 물질과 권세와 자녀의 학교문제와 진로에 대해서만 자랑하거나 걱정만 할뿐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다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이가 어린 학생이나 연세가 많은 노인이나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땅엣 것만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큰 비전과 꿈을 품고 살아가야할 학생들이 오로지 좋은 대학교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공부만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옆에 있는 친구를 눌러서 이겨야만 하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온갖 좋은 것들을 드시고 계십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육신의 생명을 단 일분일초라도 연장을 시킬 수만 있다면 좋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요에도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백년 살고 싶네---

” 물론 이 노래는 남진이라는 가수가 부른 유행가지만 여기에도 참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는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땅엣 것만을 사모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땅엣 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앞에 있는 유행가 가사처럼 길어봤자 한 백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아무리 좋고 훌륭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땅엣 것은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을까요?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저 푸른 초원 위에다가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것이 무슨 큰 잘못입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훌륭한 직장에 취직해서 많은 돈을 정당하게 버는 것이 큰 죄일까요? 아닙니다. 이 땅의 것들도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밤잠을 설쳐가면서 한 가지 목표를 정해놓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 멋진 집을 짓는 것도 아주 좋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정당하게 사업을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무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이 땅엣 것이 좋다고 할지라도 위엣 것하고 비교를 하면 도저히 비교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바둑을 좋아는 하지만 잘 두지는 못합니다. 우리교회에도 바둑에 관한한 상당한 실력에 올라서 있는 분들이 몇분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들들 가리켜서 고수라고 부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은 고수하고 친선으로 바둑을 두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한 번 이겨보겠다는 심정으로 바둑알을 한 곳에다가 집중적으로 쌓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바둑의 고수는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아닌데 엉뚱한 곳에다가 듬성듬성 바둑알을 둡니다. 그럴수록 저는 더 신이 나서 열심히 바둑알을 한 곳에다가 집중적으로 모아둡니다. 그리고 남의 바둑알을 한 다섯 개 정도를 빼앗아 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섯 개의 바둑알을 빼앗는데에 정신을 집중하다가 보니까 결론적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큰 집을 다 잃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땅엣 것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삶의 원리입니다. 저 영원한 하늘위의 삶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땅에 것만을 쫓아가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는 정말로 소중한 것을 잃고 맙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큰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육신에 거하는 존재이기에 땅엣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땅엣 것들도 우리들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목적이 오로지 땅의 것만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한 축복받은 신령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만 우리의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시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시간이 저 하늘에 있다는 진리를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위엣 것을 추구하는 삶은 어떠한 삶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과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건강이 있다고 한다면 이 육신의 강건함을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가운데에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에게 물질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밝은 빛을 세상에 증거하는 귀한 선교의 사역에 쓰일 수 있도록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에게 찬양의 재능이 있다고 한다면 매 주일마다 성가대의 대원으로 봉사하는 가운데에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찬양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위엣 것을 추구하는 참으로 복된 인생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위엣 것을 찾으며 추구하는 삶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교회에도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의 역사가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날마다 불철주야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이 일은 우리 모든 성도가 전심으로 힘써 뜨겁게 기도할 때에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새벽마다 모여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서 부르짖고 간구할 때에 위로부터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틀림없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난 사람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땅엣 것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이 항상 위엣 것만을 찾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무리 땅엣 것이 좋다고 할지라도 위엣 것하고 비교를 하면 도저히 상대가 되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부귀영화가 제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신 천국의 찬란한 영광하고는 비교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의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주어진 기본구원의 바탕위에 어떻게 하면 하늘의 상급을 쌓아 갈 것인가 하는 건설구원을 힘과 생명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순간에 생명의 부활에 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동참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큰사람이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거듭난 자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천국의 영광, 영원한 천국의 보화, 영원한 천국의 존귀와 위엄만을 바라보는 가운데에 2004년도를 힘차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위엣 것을 추구할 세 가지 이유

 

그럼, 우리가 왜 위엣 것만을 추구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까요? 여기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본문 3절은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고 증거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영원한 하늘의 생명과 기쁨과 즐거움에 대하여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사람이 아니요,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말씀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자임을 자랑스럽게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자꾸만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땅엣 것을 추구하라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와 쾌락과 즐거움이 마치 영원한 것처럼 속이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담대히 외쳐야만 합니다. “마귀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썩 물러가거라! 나는 이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존재니라!” 이렇게 담대히 외치는 자들에게는 어둠의 권세가 신속하게 물러가는 하나님의 역사가 임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국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워치만 리’라고 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분의 신학은 약간 잘못이 있었습니다. 인간에 관하여 영, 혼, 육이라고 하는 삼분설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워치만 리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당시에 유행하였던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의 사상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치만 리는 삶에 있어서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관한 매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워치만 리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돈을 걸고 마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작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이 워치만 리를 바라보면서 “당신도 돈이 있으면 와서 함께 합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에 워치만 리가 아주 유명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옛날에 마작놀이를 하던 워치만 리는 이미 죽었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범하였던 못된 죄와 악습을 기억나게 함으로서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본분이요 사명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이 세상의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믿음의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도 워치만 리처럼 “과거에 살던 그 사람은 죽었소!”라고 담대히 외쳐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우리의 참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생한 성도의 생명의 기원이 하늘에 있고, 성도의 안전도 하늘에 보장되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작년에 우리교회에 도둑이 들어와서 금고에 보관되었던 돈을 훔쳐갔습니다. 그래서 거금 300만원을 투자해서 아주 튼튼한 금고를 새로 마련을 하였습니다. 이 금고는 얼마나 튼튼한지 최소한 6시간 이상을 노력해야 열수 있는 아주 좋은 장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교회에 들어 온 도둑은 적어도 6시간 이상의 노동의 대가를 치러야만 돈을 가져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금고를 튼튼한 것으로 바꾸자 이제는 도둑이 더 이상 교회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물질도 튼튼한 금고에 보관을 하니까 얼마나 안전합니까? 하물며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성도의 안전이 보장되어져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할렐루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한 사람은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약속의 말씀을 항상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땅엣 것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가 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영혼들이 구원을 얻게 되면 틀림없이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내려오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그 때에는 땅에 있는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억만금을 모으고 큰 회사의 회장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재림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권세자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재림시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대비하면서 하늘의 영광을 사모하고 하늘의 상급을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준비하는 믿음의 사람들에는 반드시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과 가치를 안겨 다 줄 것입니다. 자신의 종말이 언제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는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당하는 종말은 오늘이라도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이든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말미암아 지금 이 순간에도 최후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성도들도 항상 하늘의 영원한 삶을 바라보는 가운데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영원한 세계를 준비해야만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이 땅의 것들도 나름대로는 가치가 있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하고 비교를 할 때에는 땅의 것들을 존귀성과 영원성과 가치성에 있어서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영광이 그만큼 가치가 있고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들을 영원한 하늘의 생명을 잘 준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수단을 위해서 목적을 망각하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의 것들을 얻기 위해서 하늘의 것들을 포기하고 실로 안타까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은 오직 하늘의 영원한 생명과 찬란한 영광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잘 얻기 위해 땅의 것들을 수단으로만 사용하시는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위엣 것을 추구함에 있어서의 방해물 - 땅의 지체

 

그럼, 우리가 하늘의 것들이 매우 가치고 있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땅의 것들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땅의 지체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오늘 본문 5절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바로 땅에 있는 지체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성경은 과감히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성경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까지도 때로는 죽이라고 강조를 합니다. 본문 8-9절을 보시면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땅의 지체들에 대하여 본문의 말씀은 죽이고 벗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왜 이러한 땅의 지체를 죽이고 벗어버려야만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땅의 지체를 죽이지 아니하면 우리가 죽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는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땅의 지체를 죽이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에 사로잡혀서 사는 자들에게는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의 지체를 죽이고 벗어버려야만 합니다.

둘째는 땅의 지체를 따라 산 것은 이미 과거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본문 7절은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거듭나기 전에는 땅의 지체를 따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관하여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3절에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우리가 땅의 지체를 따라 산 것은 지난 과거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현재나 미래에도 땅의 지체를 따라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남을 체험한 하나님이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우리는 과거처럼 땅의 지체를 따라서 살아서는 안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선포되어진 말씀처럼 2004년도를 힘차게 출발함에 있어서 땅의 지체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땅의 것들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날마다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원합니다. 땅에 보화를 쌓아 두지 마시고 저 영원한 하늘위에다가 여러분의 보물을 차곡차곡 쌓아두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여러분의 보물을 훔쳐갈 도둑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좀과 동록이 여러분의 보화를 해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이 비추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 중에서 땅엣 것에 더 마음을 품고 삶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시는 분이 계시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것들은 아무리 좋고 값어치가 있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70년, 길어야 80년 밖에 안 되는 유한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는 저 천국의 삶은 영원한 시간과 생명이 있는 곳입니다. 썩어 없어질 이 땅의 것들을 얻기 위해서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영혼들이 되지 마시고, 여러분 모두에게 힘과 물질과 생명과 열정이 있는 동안에 최선을 다하여 신령한 하늘의 상급을 사모하는 위엣 것을 준비하는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아가

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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