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녀인 아내를 데려오다
호 3:1-5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3:1-5 / [정조 없는 아내의 속전과 정화]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아내를 다시 데려오너라. 비록 그녀가 음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더라도 다시 데리고 와서 사랑하여라.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온갖 좋은 선물들을 갖다 바쳐도, 나 여호와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다.' 2) 그래서 나는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노예 신세로 전락한 그녀를 다시 사왔다. 3) 그리고 이렇게 타일렀다. `당신은 한동안 혼자 지내야만 하오. 다른 사내들과 어울려 밖으로 나돌아다녀서도 안 되고, 창녀짓을 해서도 안되오. 그동안에는 나도 당신에게 가까이 가지 않겠소.' 4) 이는 곧 이스라엘에 오랫동안 왕이나 섭정자도 없고, 제단과 성전과 제사장들도 없으며, 심지어는 우상들도 없게 되리라는 것을 비유한다. 5)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와 자기들의 왕이신 메시야에게 돌아와 마침내는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분의 온갖 좋은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미래에 회복될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예표하기 위해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1)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부정한 고멜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 숭배를 할지라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그의 삶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증거해야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이방신들을 위한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처럼 호세아도 고멜을 사랑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멜은 집을 나간 후 과거의 습관처럼 다시 창녀가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기 위해 다시 고멜을 집으로 데려와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2-3) 순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호세아는 힘을 다해 순종합니다. 호세아는 돈과 곡식을 가지고 가서 고멜의 몸 값을 지불하고 고멜을 집으로 데려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내는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호세아는 고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삶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고멜이 자신의 타락한 삶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 호세아를 생각한다면 그녀의 삶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4-5) 많은 날 동안 근신한 고멜처럼, 이스라엘도 많은 날 동안 회개와 변화의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 있던 고난의 시간들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어려움의 때입니다. 이 고통의 시간을 거친 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회복의 때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이 회복의 때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과 한 왕인 메시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적용: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성도가 전하는 메시지의 능력은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당신의 삶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일본 화가가 그린 <바보 예수>란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보는 그런 예수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그림에 대해 전문가이신 이연호 목사님의 해설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에 나타난 예수의 눈은, 사람들을 너무 불쌍히 여겨서 눈물에 찌들려 한쪽 눈이 찌그러졌고 입술은 메말라 터져 있으며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사랑한 나머지 가장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그린 것입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
호 3:1-5 / 피영민 목사
서 론
호세아 3장은 호세아가 아내를 사랑해서 노예 된 아내를 다시 사온다는 연속극의 한 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시라 이런 연속극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큰 교리를 가르치십니다. 호세아 3장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는 “구속”(Redemption)입니다. 저는 성경을 처음 읽을 때나 지금이나 구속이라는 단어가 좀 불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하면 꼭 경찰서에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서 구속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불편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3장을 통해서 구속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고멜이라는 여자는 호세아의 아내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우상숭배를 하고 영적으로 타락했는가를 상징하는 여인입니다. 고멜은 2남 1녀를 낳고서도 바람이 났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따라간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을 하는 것입니다. 고멜이라는 여자가 바람이 난 이유는 호세아 3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 3:1) 그냥 쌀로 만든 찐 떡은 별로 맛이 없지만, 건포도가 들어가면 떡을 씹을 때 건포도가 같이 씹혀서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고멜이 우상숭배에 빠진 이유는 바로 이 건포도 떡 얻어먹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 큰아버님이 소천하셨을 때 절에 모셨는데, 절에 따라가 보면 밥을 줍니다. 고사리도 주고 튀각을 주는데 저는 지금도 절에서 먹은 튀각의 끝 맛이 얼마나 고소하고 상큼한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절에 가자 그러면 밥 얻어먹으려고 따라갔습니다. 절에서 주는 밥이 좋아서 절에 가는 사람처럼 고멜도 건포도 떡이 좋아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입니다.
고멜은 결국 이 남자, 저 남자 따라다니다가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거지가 되었고 노예 시장에 팔려나온 신세가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고멜의 남편이자 선지자인 호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집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서 수동적으로 고멜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는 구원을 행동으로 보이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겠다고 말만 하지 않으시고 실제 행동으로 보이십니다.
호세아서 3장 1절을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나와 있지 않지만, 영어 성경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향해서 하는 말에 명령형으로 동사가 먼저 나옵니다. “Go, show your love to your wife again” 너의 아내에 대한 너의 사랑을 가서 다시 보여주라는 명령에 따라 호세아는 방에 앉아 있지 않고 노예 시장에 팔려 나온 아내를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가 만약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면 고멜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결국, 노예로 팔려가서 짐승취급을 받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먼저 찾아오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아무 소망도 없이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물으시고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주권적인 사랑이요, 주도적인 사랑이요, 능동적인 사랑이요, 행동적인 사랑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멜을 향한 호세아의 사랑으로 예표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I. 하나님의 사랑은 “구속적인 사랑”이다.
구속이라고 하는 말은 사람을 감옥에 구속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속전의 ‘속’과 구원의 ‘구’가 합쳐져서 구속이 된 것입니다. 영어로 Redemption은 ‘re’는 ‘다시’라는 말이고 ‘demption’은 ‘사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자기 것이었는데도 다시 사들이는 것이 구속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이유는 대체로 3가지입니다. 첫째,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된 경우입니다. 쇠사슬로 다 묶어서 끌고 와 노예 시장에서 파는 겁니다. 둘째, 부모가 노예이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 본인이 방탕해서 빚을 지고 이 빚을 갚을 수가 없어서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멜의 경우는 세 번째입니다. 방탕해서 빚을 지게 되고 빚을 갚을 수 없으니까 노예가 된 것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이 본래 자기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내 아내니까 데려가겠다고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멜이 빚을 졌기 때문에 당신이 남편이라도 돈을 내고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에,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고멜을 삽니다. 호세아는 본래 고멜이 자기 아내이지만 돈을 주고 다시 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Redemption)인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구속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신 사건의 드라마틱한 예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택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성경에서 자기 백성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유되었던 백성인 우리가 죄에 팔려 버렸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노예 된 우리를 사기 위해 종교도 내어놓고 갖가지 교육도 내어 놓고 철학도 내어 놓고 사상도 내어 놓았지만, 죄와 마귀의 손아귀에서 그런 것 가지고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의 생명과 피 값을 내놓겠다고 하니까는 더 이상 나서는 자가 없어서 우리는 예수님께 낙찰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노예 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자신의 생명 값을 치르고 다시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를 사기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 값만큼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공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치르신 값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금으로도 안 되고 은으로도 안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값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신약 성서를 보게 되면 “구속”, “속전”, “대속물”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대속물은 노예를 사기 위해서 치르는 속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이 땅에 오신 것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는 말만 하고 가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속전으로 치르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택하신 많은 사람들을 다시 사들이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대속물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죗값을 다 갚았다고 그러는데,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전 그것은 신학이 잘못된 거짓말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택하신 사람들의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영혼들의 죗값을 치르고 그들을 사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저는 알미니안 주의는 바른 신학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캘빈 신학이 압도적인 진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성령께서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확신을 제 영혼에 확실히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 진리를 증거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마태복음 20장 28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2:14)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왜 주셨냐면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자신의 값을 치러 불법에 매여 있는 우리를 해방하시고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이 말씀은 구속에 대한 더 확실한 말씀입니다. 호세아가 가짜 은과 보리를 가지고 고멜을 산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은과 보리로 속전을 치르고 고멜을 다시 사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진짜 피를 주시고 죄와 불법과 망령된 행실에 빠져서 영원한 형벌 받기 위해 지옥에 가는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사랑은 “명령적인 사랑”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바로 살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전에는 호세아가 고멜에게 구애를 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호세아가 매달리지 않고 명령을 합니다. 호세아가 왜 명령을 하냐면 고멜을 노예시장에서 샀기 때문입니다. 돈 주고 샀기 때문에 이제는 고멜의 법적 주인이 된 것입니다. 명령할 수 있는 주인이 된 것입니다.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 3:3) 호세아가 고멜을 향해서 한 명령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다른 우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명령권을 가지는 분입니다. 물론 창조하셨기 때문에 명령권을 가지시지만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명령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우리의 합법적인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서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명령하느냐 나는 명령받기 싫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2) 우리는 광야에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애굽에서 바로 왕의 노예 생활을 하고 거기서 중노동하고 사는 것보다는 비록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쫓아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신을 우리 앞에 두고 살 수 없습니다. 내 생명의 주인은 자신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내 생명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자신 생명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면 영원히 살지 왜 죽습니까? 결국, 내 생명을 찾아가는 분이 계시니까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생명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는 것이 싫다면 그 사람의 주인은 딴 존재입니다. 마귀 악령이라 불리는 마귀가 주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종노릇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나를 사셔서 주인이 되었으니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여기에 명백히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명령하실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항상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될 의무가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Ⅲ. 하나님의 사랑은 “보상적인 사랑”이다.
호세아는 고멜에게 명령만 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3장 3절 후반을 보면 "나도 내게 그리하리라" 이것이 짧지만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정절을 요구하지만 나도 너에게 정절을 지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도 남편으로서 너에 대한 정절의 의무를 다하고 너를 사랑하고 너와 교제하고 너를 떠나지 않고 너만 사랑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고멜은 참 망신스런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수치와 죄악과 노예 시장에 팔려나가는 그런 비참한 신세로 전락 되었지만 그런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죄짓지 않은 아내처럼 대우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하니까 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다시 사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진실임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그대로 증명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요약한 말씀이 호세아 3장 4-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3:4-5) 이스라엘 백성이 고멜처럼 우상숭배해서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은 B. C. 721년에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남 왕국 유다는 B. C. 587년에 바벨로의 포로가 됩니다. 포로 되어 살다 보니까 왕도 없고 궁도 없고 그리고 제사도 없고 에봇(제사장이 입는 조끼)도 없고 드라빔(우상)도 없었습니다. 우상숭배도 못 하고 하나님도 제대로 섬길 수 없는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멜이 노예 시장에 나온 것처럼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B. C. 539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게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고레스 칙령을 발표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또한, 호세아 3장 5절에 보면 “말일에는”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신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들이 여호와를 구하고 그 왕 다윗을 구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말일에 신약시대의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 것입니다. 처음 복음을 전해준 열두 사도들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처음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와 선지자들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고 복음을 세계에 증거하는 복음의 핵심 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머지 택함 받지 못한 유대인들은 불신앙을 했지만 택함 받은 유대인들은 기독교회에 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호세아 3장 4-5절을 그리스도 재림얘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초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초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실현되었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적인 사랑이 아니고 이스라엘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 론
5절을 보게 되면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경외와 은총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무서워하거나 존경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존경하면서도 사랑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가까이하는 것이 경외입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혜의 근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물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시오?”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경외만 받으시고 내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냐?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면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선하시다’, ‘좋으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온갖 선하심을 베풀어주십니다. 너희가 죄가 있으니 내가 죄를 용서해 주겠다는 사죄의 은총과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의가 없으니 내가 너희를 의의 옷을 입혀주겠다는 칭의. 그리고 전에는 내가 너희하고 원수가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너희와 화목해서 내가 너희와 동행하겠다는 화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선한 것을 주셨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사는 삶은 비참한 삶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으면 비참해지는 줄 압니다. 하지만, 예수 안 믿고 마귀 종 되서 사는 것이 비참하지 예수 믿고 사는 삶은 비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선하심을 체험하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요즘 왜 이렇게 불평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은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2011년을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 대한민국 역사 가운데 지금처럼 잘 사는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셨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 선하심을 더욱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 북한이 아무리 우리를 위협해도 악은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이생에서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떠나 죽어서도 영원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축복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보시죠. “나는 하나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겠습니다.” 항상 이 두 가지가 여러분 입술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
호 3:1-5 / 이삼규 목사
■ 옛날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지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재판의 판결을 맡은 판사는 다름 아닌 어릴 적 초등학교 같은 반의 친구였습니다. 그 재판은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증인이 나와서 죄에 대해서 증언도 했습니다. 법정에 있는 사람들은 판사가 어떻게 판결을 내릴 것인가 하고 초조해 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판사가 중벌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가벼운 벌을 내릴 것인가 궁금하여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조용히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판사가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가 선고한 판결은 법이 정한 가장 중한 판결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죄수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아주 많은 벌금이었습니다. 이제 그 벌금을 내든지 아니면 감옥에 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청중들은 그 선고가 너무 가혹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친구에게 저렇게 모질게 할 수 있을까?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하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판사는 말없이 일어서더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내려와서 죄수가 서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죄인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여 내가 그 벌금을 자네 대신 물어 주겠네.” 그 죄인은 친구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친구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음녀 고멜과 호세아의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 가정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기이한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한결 같은 사랑
호 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우상을 섬기고 우상에게 바치는 건포도 과자 같은 것을 즐길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여기에 대한 비유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타인의 사랑을 받는 음녀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 공감토크라는 TV 프로그램에서 패널들이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4명은 ‘못 참는다.’라는 팻말을 들었고 나머지는 ‘참는다.’라는 팻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참는다.’라는 패널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못 참는다.’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 만큼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통 바람도 아닌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라’고 하신 이전 명령(1:2)과 매우 유사합니다.
음녀인 고멜은 호세아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지만, 호세아의 전적인 선택에 의해 새로운 사랑, 결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만남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고멜은 남편 호세아와 세 명의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다른 우상에게 정신을 팔고 세상적인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패역한 백성일지라도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행하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모욕과 망령과 음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왜 기이합니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의인되어서가 아닙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기이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을 계속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심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 한 장로님이 교회에서 한 가지 일로 심한 상처를 받아 5년간이나 교회를 떠나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점을 치던 점쟁이가 소리쳤습니다. “여기 예수 믿는 사람 있습니까? 제발 나가 주세요! 점괘가 안 나옵니다.” 사람들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허허, 술집에 무슨 예수쟁이가 있겠나?” 그러나 점쟁이는 계속 말했습니다. “아니오. 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는 영이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어서 나가 주세요.” 점쟁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장로님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은 너무나 민망한 나머지 서둘러 술집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는 큰 나무를 붙들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떠난 지 5년이나 되었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아직도 제게서 성령님을 거두어가지 않으셨군요.” 장로님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믿음생활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고멜은 신실한 선지자인 호세아의 아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情夫)를 따랐습니다. 그런 아내를 다시 찾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참으로 가혹하기까지 합니다. 조건이나 자격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정절이라도 지켜야 결혼 생활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배신을 했습니다. ‘건포도 과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에게 바친 제물이었습니다. 일찍이 다윗은 이것을 여호와께 드리기도 했습니다.
대상 16:3 이스라엘 무리 중 남녀를 막론하고 각 사람에게 떡 한 덩이와 야자열매로 만든 과자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더라
건포도 과자를 즐기는 자들로 명명된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것을 즐거워했음을 암시합니다.
고멜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고멜과 이스라엘을 닮지 않았나요? 우리는 과분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 다른 욕망에 한눈파는 고멜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인한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의 음행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른 호세아
호 3: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호 3: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는 다른 남자를 따라간 고멜을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해 속전을 주고 되 샀습니다. 그 몸값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었습니다. 이것은 여종 한 사람의 몸값인데, 종 취급을 당하는 신분으로 선지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값을 치르고 아내를 다시 사왔습니다.
요즘에도 윤락 여성들을 보면 대부분 몸값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줍니다. 그것이 빚이 되어 그것을 다 갚기까지 그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 힘듭니다. 그런데 그 구조가 절대로 거기에서 벗어나올 수 없는 그런 구조입니다. 계속해서 빚을 지게 만들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니 이리 저리 팔려 다니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몸값을 치르고 아내를 다시 사온 호세아는 아내에게 부탁합니다. 어떤 부탁을 합니까?
⓵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자.
⓶ 음행하지 말라.
⓷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고멜은 많은 날 동안 회개하고 음행을 그치며 선지자의 아내에 걸 맞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연단 받아야 했습니다. 고멜은 우상에 팔린, 우상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종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우상이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야 하는 종과 같은 미천한 신세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우상의 명령을 듣는 사람은 우상의 종일뿐입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람은 우상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누구의 말을 듣는가?’ 라는 질문은 바로 ‘누구의 종인가?’라는 질문의 다른 표현입니다. 우상의 말을 듣고 우상을 섬기고 우상에게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상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
호 3: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지속적인 음란,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정치 종교적으로 황폐해졌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왕과 지도자도 없고, 제사와 주상, 에봇과 드라빔 같은 종교 용품도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우상 숭배의 죄 값은 혹독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은 많은 날 동안 정치 종교적인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이 기간은 징계의 기간이면서 연단의 기간이고,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려 주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야 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더 좋고 더 많은 행복을 찾아 떠나 보지만,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을 잃었을 때, ‘오직 한분’하나님을 떠났을 때 겪는 고통은 쓰고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호세아의 예언은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왕이나 지도자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왕정이 끝날 것임을 예고하는 일종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사가 없다는 것도 예배의 종말을 고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예언은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주전 722년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함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의 예복 중 일부였습니다(출28:28-30). 그런데 사사시대에는 우상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어 오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삿 8: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삿 17:5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삿 18:14 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
주상 역시 우상 숭배와 결부되어 정죄됩니다(레26:1; 신 16:22). 특히 바알 숭배와 관련됩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이 주상을 파괴하겠다고 선포하시는데 주상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두 마음을 품게 하기 때문입니다.
호 10:2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드라빔은 흔히 조상 숭배나 점술을 위해 만들어진 조각상입니다. 4절에서 나열한 제사, 주상, 에봇, 드라빔은 이스라엘 안의 신앙적 혼돈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순결하게 변화된 고멜처럼 만약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아내로서 순결을 지킨다면,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분에게 나아가는 ‘마지막 날’을 마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많은 날이 지난 후에야 이스라엘은 돌아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호 3: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택했던 사람들이 그때 다시 하나님을 찾을 것이고, 다윗의 집안을 배반하고 분열하여 북 왕국을 따로 세웠던 이스라엘이 그때 다시 ‘다윗’으로 상징되는 한 통치자를 찾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한 선물,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 음녀 고멜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다른 남자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조롱당한 뒤에 버려져 세상 누구 하나 거들떠 보이 않을 만큼 무가치한 폐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이처럼 얼마나 많은 고생을 오랫동안 겪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더 많은’ 사랑과 ‘더 좋은’ 행복을 찾아 떠나 보지만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방종할 때 겪는 고통은 얼마나 쓴지 모릅니다.
■ 결혼을 약속한 한 쌍의 연인이 있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남자는 아파트 한 채를 미리 사 두었고, 여자는 아파트 규모에 맞을 만한 가구와 가전제품을 점찍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하루아침에 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여자의 아버지는 쓰러져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한 달여 앞 둔 날, 남자가 여자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혜원씨, 사실 아파트는 내 것이 아니에요.” 그러자 여자도 “괜찮아요. 전 이제 그 집에 채울 살림살이를 하나도 준비할 수 없는 걸요.”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단칸 전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일 년이 지난 뒤 여자의 아버지는 다행히 건강이 회복되었고 다시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조금씩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크고 좋은 가구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남자에게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결혼 전에 남자가 자기를 속였던 사실이 떠올랐고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여자는 친정어머니에게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사실은 김 서방이 아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 털어 놓아야 하겠구나. 니 남편이 아파트를 팔아 장인의 빚을 갚았고 일부는 병원비로 썼단다.” 이 말은 들은 여자는 남편의 깊은 사랑에 큰 감동을 받고 행복감을 멈출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골짜기가 깊으면 산도 높듯이, 죄의 쓴 맛을 경험했던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은 또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부어주시는 감당할 수 없는 그 은혜에 감사하십니까?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에 감격하십니까?
공로 없이 죄만 가득한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기이할 정도로 큽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날마다 감사의 제단을 쌓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를 사랑하여라
호 3:1-5 / 권오서 목사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이 화두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변화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주는 짧은 우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우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거대한 창고를 가득 채운 치즈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누가 그 치즈를 가져갔을까? 치즈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할까?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나야 할까? 저 밖 미로 어딘가에 새 치즈 창고가 있는 걸까?
저자는 사라진 옛 것을 아쉬워하고 옛 영화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대신 미지의 것을 향해 용감하게 떠나라고 조언합니다. 치즈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조금씩 먹어치운 것입니다. 애써 무시했을 뿐 변화는 수만 가지 형태로 자신에게 예고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이상만, 교회를 살리는 10가지 전도습관, 51)
‘급변함과 다원화’는 21세기의 주된 특징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변화에 대한 적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정체성의 정립, 즉 신분과 소속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본업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분명히 자리 잡고 있을 때 우리는 표류하지 않고 사명중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의 본업은 무엇입니까? 세계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자 침례교 목사인 조지 포먼은 말했습니다. “나에게 복싱은 바울의 텐트 만드는 일과 같은 부업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소명은 복음 증거이다. 사도 바울은 부업으로 천막 짓는 일을 하였지만, 그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복음 전도였던 것이다.”(이상만, 교회를 살리는 10가지 전도습관, 73)
10월 22일은 춘천중앙교회 새생명 축제 주일입니다. 그간 우리는 태신자를 작정하고 매월 마지막 주를 태신자 등록주일로 정하고 열심히 전도를 해왔습니다. 이제 10월 22일을 새생명축제일로 선포한만큼, 그간에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전도하고자 했던 태신자들을 초청하여 천국잔치를 열고자 합니다. 전도를 해서 교회에 나오긴 했었는데 지금은 안 나오고 있는 사람들, 작정한 태신자들이 주님 앞에 나아와, 위로와 소망과 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성도의 본업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 문
성도의 본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1.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시는데,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상 앞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세상에 헛된 것들로 안위를 받고, 거짓된 교훈을 좇아 잘못된 평안을 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은 옛날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지 2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영혼들이 보이십니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나십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관심”이라는 적입니다. 무관심만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아이가 투정을 부립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타이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부모는 모른 척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큰 소리를 내면서 웁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들도 무관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무관심만큼 큰 적이 없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1장 37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그 책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그들의 무관심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한다.”며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살펴보세요.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까? 그것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한다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이겠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예배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전도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는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반쪽 사랑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반쪽 사랑이 아닌 온전한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관심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없는 나의 삶은 무의미합니다. 샤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을 때, 피에르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로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성도 여러분, 영혼을 사랑할 때 천국의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고, 전도하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가 지옥입니다.
누가 복음을 들어야 할지를 찾아보세요. 누가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인지 찾아보세요. 요즘 이사철이잖아요. 주변에 이사 오는 분들 많을 텐데 그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안하고 있는지 확인하세요. 만약 안 한다면, 전도하세요. 이사짐 푸는 것도 도와드리고, 시원한 음료수도 사다드리고, 이사한 날은 밥도 하기 귀찮은데, ‘이웃이 되어주셔서 고맙다’며 간단하게 요깃거리라도 가져다주세요. 그것이 전도입니다. 또 본격적으로 입시철이 되어가는데, 주변에 수험생을 둔 부모가 있다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주세요. 그러면 전도가 됩니다. 그리고 학부모 모임에도 나가셔서 전도할 대상들을 찾아보세요. 가사 일 때문에 바쁘신 분들은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서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신문배달하는 분들 있잖아요. 그분들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우편배달원에게도 전도할 수 있구요, 우리 아이에게 과외해주는 선생님에게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대상자는 반드시 찾아지게 됩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교회를 다녀요!’ 정말 그렇습니까? 다 다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들 중에도, 이웃 중에도 신앙생활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춘천시민 중에 약 80%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붙여주십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전도할 영혼을 만나는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참된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값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부된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자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2절 말씀.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호세아는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은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값을 지불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이 여인에게 지불된 값입니다. 얼마가 지불되었습니까?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당시 보리 한 호멜은 은 열다섯 개였습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음부된 여인을 되 사오는데 든 비용은 도합 은 삼십 세겔이었습니다. 은 삼십 세겔이라 하면, 당시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이는 음부된 이 여인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신세로 전락했음을 뜻합니다. 남편을 저버리지만 않았어도 노예와 같은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을, 남편을 저버림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음부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은 삼십 세겔을 들여 되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 바람이 났다고 가정해보세요. 과연 그런 사람을 용서하고, 또 그런 사람과 살고 싶은 마음이 드십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비록 은 삼십 세겔이 많은 액수의 돈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상처를 둔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액수에 상관없이 큰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구원을 하기 위해서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필요합니다. 호세아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돌로 쳐 죽일 여인을 오히려 값을 주고 되찾아오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습니다.
영혼 구원을 구원하는 일에는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함에는 틀림없지만, 시간과 물질의 희생도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아시죠? 공수래공수거라는 말도 아시죠? 이 세상 떠날 때에 바리바리 쌓아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렌트(Rent)받은 것들이에요. 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아시죠? 나무는 날마다 소년을 기다립니다. 소년이 오면 시원한 그늘과 맛있는 과일 등, 나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며 소년과 함께 노는 시간을 더없이 좋아했습니다. 소년이 성인이 되어 집을 짓기 위한 목재가 필요했을 때, 나무는 자신의 몸을 목재로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이 노인이 되어 나무를 찾아왔을 때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밑동조차 소년이 앉는 자리로 내어놓았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전 존재를 소년에게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베푸는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행복했습니다.(이상만, 교회를 살리는 10가지 전도 습관, 128)
성도 여러분, 영혼 구원을 위해서 사용되는 시간과 물질을 아까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쓰면 쓸수록 행복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하는 시간과 물질로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힘들었을 때 힘이 되었던 찬양이 있다면 찬양테이프를 사다주세요.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신앙서적이 있으면 그것도 사다주세요. 그냥 주지 말고,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이 담긴 메모와 함께 전해주세요. 그뿐이 아닙니다. 내 전도대상자가 함께 시장을 보러 가자고 하면 무조건 함께 가셔야 합니다. 도움을 요청하면 무조건 시간을 내세요. ‘다음에 도와줄게! 지금은 좀 바빠! 미안해!’-이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늘 태신자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3절 말씀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는 값을 주고 음부된 여인을 찾아온 것만으로 모든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관계가 지속될 수 있어야 함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전도 있어서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한두 번 호감을 줄 만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일관성 있게 끊임없이 호감을 줄 때 마음이 열립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회가 워낙 각박하다보니, 좀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오늘날의 시대를 가리켜서 ‘M’세대라고 말합니다. M세대란 나 자신(Myself)을 중요시하는 세대, 이른 바 ‘나 홀로’ 족을 일컫습니다. M세대는 집단 생활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을 싫어하고 사생활을 중요시하며 자신의 진로를 독자적으로 계획하는 특성이 있습니다.(이상만, 교회를 살리는 10가지 전도 습관, 144)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오늘날의 사람들이 M세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마음 한 편으로는 진실된 “인간관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좀 더 신뢰할만한 관계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현실 속에서 전도에 대한 접근 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루 아침에 전도하려는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관계를 지속시킴으로써 전도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형편을 헤아려줌으로써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교회에 나가보지!”-이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단번에 되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기도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 실패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며 다음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 거절당했을 때는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넷째, 성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상대방의 신앙배경과 기독교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여섯째 교인확보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고, 정말로 영혼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만나야 합니다. 일곱째 전도하고자 하는 가정 식구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박용기 목사, 태신자 전도전략, 143) 마지막 여덟 번째, 정말 중요한 것인데,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미소로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에는 이거 하나만이라도 실천을 하세요. 여러분, 찡그린 얼굴로 전도할 수 없습니다. 웃는 얼굴, 미소 띤 얼굴로 전도하세요.
인류 역사상 최고의 그림은 어떤 작품일까요?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의 천장 벽화, 밀레의 ‘저녁 기도’, 렘브란트의 초상화들, 고흐의 ‘해바라기’ 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최고로 꼽습니다. 언젠가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루브르 미술관 개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그 미술관을 찾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도난당해 비어 있는 그 자리를 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이는 모나리자의 인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토록 모나리자를 사랑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녀의 매력적인 미소때문입니다. 모나리자의 신비스러운 미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있습니다.
세계는 미소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미소에 관한 속담이 나라마다 있을 정도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한국), “웃는 얼굴은 화살이 비켜간다”(일본), “미소 짓는 얼굴을 갖지 않는 자는 가게를 열지 말라”(중국). 종합해보면 미소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엄청난 보고임을 알 수 있습니다.(이상만, 교회를 살리는 10가지 전도습관, 157-15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는 그냥 되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보다 효율적인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좋은 관계를 형성해서, 그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이제 추석연휴가 시작됩니다. 고향에 찾아가실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이곳 춘천으로 찾아오는 친지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족들과 추석연휴를 즐겁고 유익하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추석연휴이기는 하지만, 성도의 본업이 전도임을 기억하고 믿지 않는 내 가정을 구원하는 데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업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퇴출됩니다. 본업에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반쪽 사랑이 되지 않도록 전심을 다해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관심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두 번째 값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물질을 전도를 위해서 사용하세요. 이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투자, 축복받는 비결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관계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오늘날의 전도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갈 때 태신자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립니다. 늘 미소짓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좋은 인상을 풍길 뿐만 아니라, 관계의 폭을 넓혀나가시기를 바랍니다.
10월 22일이 무슨 날이라고요? 새생명 축제일입니다. 한 사람이 한 명씩만 전도하세요.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위대한 불멸의 사랑
호 3:1-3 / 조상호 목사
사랑에는 세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첫째로 소위 ‘만약에’ 식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만약’ 우리가 어떤 요구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얻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상 줄께”, “당신이 나한테 선물을 준다면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성공해서 출세하면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저하고 결혼을 약속해 주시면 당신께 사랑을 바치겠어요.” 아마 주위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끈 달린 사랑‘ 혹은 ’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무엇의 대가로 제공하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 때문에’ 식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의 됨됨이나 소유나 어떠한 행위로 기인하는 사랑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아름답기 때문에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한테 잘 해주시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성격이 좋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을 ‘주판알 사랑‘, 혹은 ’계산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세째로 ‘불구하고’ 식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끈이 달려있지도 않고, 보답으로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에 ‘만약에’식의 사랑과 다릅니다. 또한 사랑 받는 사람 속에 어떤 매력적인 점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므로 ‘ 때문에’ 식의 사랑과도 다릅니다. 이 세 번째의 ‘불구하고’ 식의 사랑은 상대방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어떠한 조건에 있든지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불구하고‘ 식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불구하고‘ 식의 사랑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날마다 변덕을 부린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저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위대한 불멸의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랑보다 뛰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은 인간이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은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이 변화하는 이 시대와 환경 속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멸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전에 본문을 읽을 때,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호세아와 고멜
지금으로부터 약 2,800여년 전인 BC800년경에 이스라엘 나라에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거리의 여인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출신 성분이 별로 좋지 않은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결혼 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가출하여 다른 남자에게 간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는 그 아내가 부정한 행실을 버리고 성실한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의 자녀들에게 너희 어머니를 돌아오도록 탄원하라고 합니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해도 자녀들의 간곡한 호소를 그녀가 들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자녀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 아내 고멜은 호세아의 가장 순수하고 신실한 사랑을 외면해 버리고 물질로, 쾌락으로 유혹한 한 남자를 따라 간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과 가정과 자녀들 보다, 이 세상의 물질과 쾌락을 더 좋아하여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 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멜 자신이 생각하기를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영원무궁토록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결국 그 남자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할 수 없어 또 다른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에게도 버림을 받아, 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이 남자, 저 남자를 바꾸어 가면서 음녀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아무도 돌보아 주는 자가 없어 굶주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고멜은 노예시장으로 팔려가서 옷을 벗기우고 짐승처럼 경매에 부쳐지게 되었습니다.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여자라면 높은 값에 팔리겠지만, 고멜은 비싼 값을 내고 사가지고 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1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고멜은 ‘아내’라는 자리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좇아 떠나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과 가정을 버리고 떠나간 그 아내를,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아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머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 여겨야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또’라는 단어입니다. NASV이나 NIV 영어성경에는 ‘again'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비록 그녀가 배신했을지라도, 비록 그녀가 잘못 했을지라도, 비록 그녀가 가출하여 허랑 방탕하여 살았다 할지라도, 또 다시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호세아는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된 아내를 되찾기 위한 대가는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입니다. 여기에서 한 호멜은 약 228리터로서 한 호멜 반이면 342리터 정도로서 값으로 치면 은 15세겔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호세아는 제발로 걸어 와서 사정을 해도 받을까 말까한 고멜을 위해 은 30세겔이나 되는 거금을 지불하고 다시 사왔습니다. 노예 시장에 가서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갔던 그 여인, 자녀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달아났던 그 여인, 온갖 음란한 짓은 다 저질렀던 그 여인을 은 30세겔을 주고 다시 사왔습니다.
하나님과 나
그런데 이 호세아서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 좀 더 넓게 본다면 하나님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고, 고멜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란한 아내 고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한 호세아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건포도떡을 즐긴다 할지라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과거 우리가 죄악 투성이 가운데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맘대로 세상의 쾌락도 즐기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어떻게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실 때에는 그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차별하지 않고 다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일단 불러들이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옛날 방식으로 살지 못하게 하십니다. 불러들일 때에는 무조건적이지만, 불러들인 후에는 조건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성과 조건성이 함께 있습니다. 무조건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신분이나 배경이나 빈부 여하를 막론하고 아무 조건 없이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조건성이라는 것은 일단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도 “그래, 잘한다. 잘해”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할 때, 앗수르를 일으키셨습니다. 바벨론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신 차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사랑과 공의로 사랑하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호세아가 그냥 고멜을 데리고 왔습니까? 아닙니다. 호세아는 세상의 온갖 죄를 다 저지른 후 노예가 된 고멜을 위해 30세겔 이란 돈을 지불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냥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한 사랑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대가를 치루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사랑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진짜가 아닙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적당히 즐기다가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Enjoy일뿐,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간에도 대가와 희생은 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희생 없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내를, 내가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교회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 희생을 해야 합니다.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희생은 하지 않은 채 사랑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위선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랑은 가짜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값싼 사랑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의 구속을 위해 대가를 치루어 주셨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루어 주셨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18절과 19절에서 그 답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여기에서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영어로 Redemption이란 말로서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온다’라는 의미입니다. 호세아가 남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고멜을 위해 30세겔을 주고 다시 사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사오셨습니다. 구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까?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은이나 금 같은 없어질 것으로 대가를 치룬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 어느 동네에 남편이 병으로 떠나고 다섯 살과 세 살 된 두 아들을 어렵게 키우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었습니다. 부인은 하는 수 없이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공장 안의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느낀 두 아이들은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철길에서 조약돌을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았습니다. 한편 공장 안에서 일을 하던 엄마는 누군가로부터 애들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 밖으로 뛰어 나가보니, 아니다 다를까 공장건물 옆에 있는 철길에서 두 아이들이 놀고 있고, 저쪽에서는 기차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얘들아 피해라. 기차가 온다. 기차가 온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들은 엄마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열심히 놀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있는 힘을 다해 철길로 뛰어 갔습니다. 기차가 거의 다 왔습니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내었지만, 그 순간에 기차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두 아들을 살리고 난 엄마는 기차에 치여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이 난 채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부인의 장례를 치르고, 두 아들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어졌습니다. 고아원에 보내어진 두 아들이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들의 과거 이야기를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들었습니다. 두 아들은 오열을 합니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어머니, 우리를 위해 철길에 뛰어들었다가 산산조각으로 찢겨지신 어머니....”두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웠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여러분!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백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기찻길에서 놀고 있었던 두 아이들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의 절정은 병든 자를 고치시며, 눈먼 자를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가지고 5,000명을 먹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값 주고 산 것처럼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이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가장 위대한 불멸의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을 입은 자의 삶
그런데 사랑을 입은 자들은 사랑을 입은 것으로 끝내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는 대가를 치르고 그의 아내 고멜을 데려다 놓고 하는 말입니다. 호세아는 밟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아내를 용서하며 말합니다.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와 함께 지내자’, ‘더 이상 바람을 피우지 말라’고 합니다. 대가를 치루시고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살아라.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 이제는 새롭게 살도록 하라.” 여러분! 구속함을 받은 자답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돼지는 주인이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 주어도 도로 더러운 곳에 누워버립니다. 주인이 감당할 수 없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백성은 돼지가 아닙니다. 돼지와 같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입었으면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구속함을 받았으면 구속함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입었으면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미국 닉슨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정치적인 권력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할 뿐더러 지독할 정도로 냉철한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 그가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헤트필더와 휴스, 그리고 퀴에라는 상원의원 세 사람이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찰스 콜슨이 투옥되자, 그들은 그를 위해 날마다 기도 시간을 정하여 함께 기도하였고, 그를 찾아가서 위로하며 책을 주었습니다. 찰스 콜슨의 형 집행기간이 7개월 가량 남았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평상시처럼 기도하는 가운데 퀴에 상원의원의 마음에 그를 위해서 대신 옥살이를 해야겠다는 감동이 생겼습니다. 변호사이기도 했던 퀴에는 특수 법조문 안에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형기를 치를 수 있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법원에 제안해 보았지만 거절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퀴에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콜슨이 마침내 감옥에서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값없이 베푼 사랑 앞에 교만하기 그지없던 그의 자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남아 있는 형기 동안 그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동료 죄수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어떻게 하면 저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죄수들이 제일 싫어하는 빨래를 자청해서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죄수들은 그런 그의 태도를 믿지 못하고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죄수들은 자신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같이 봉사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하나 둘씩 감동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기도 모임을 시작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눕니다. 콜슨은 그의 자서전에서 “평생 동안 집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나는 저들을 사랑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고백할 만큼, 비참할 수밖에 없는 감옥에서 사랑을 베풀며 지냈습니다. 그 때 그는 일평생 죄수들을 위해서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 ‘거듭나기’(Born Again)라는 책 한 권을 발행했는데, 그 책은 한 때 미국 사회의 커다란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서 결심한대로 “교도소 선교회”(Prison Fellowship)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씁니다. 그후에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게 됩니다. 어느 외국잡지에 탬플턴상을 수상한 찰스 콜슨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현재 미국의 가장 건강한 사상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저술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전도자, 그리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가장 따뜻한 이웃인 그가 새로운 이웃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답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입은 사랑은 싸구려 사랑이 아닙니다. 끈 달린 조건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주판 알 튕기는 계산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참된 사랑입니다. 고통의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릅니다. 고통이 없는 사랑은 가짜 사랑입니다. 자식들 때문에 고통을 당해도 부모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에 고통스러운 것도 참습니다. 주님은 한번 맞으면 핏줄이 터질 만큼 무서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양손에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습니다. 목숨을 거셨습니다. 자신의 피를 철철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라. 내가 너를 사랑한 이 십자가를 잊지 말아라. 내가 너를 위해서 받은 고통과 고난을 잊지 말아라.” 오늘 이 시간 주님의 이 고통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2년도 첫 번째 성찬예배에서 잊었던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회복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외로움
호 3:1-5 / 이필재 목사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말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가 되시며 사랑 때문에 존재하시고 사랑 때문에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의 영원성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며 사랑 없이는 진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것은 죽음까지 당하시면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으로 성경에 조명되고 있습니다. 마치 너무나도 외로워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여인처럼 사랑할 자를 날마다 찾아 헤매시는 그런 분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면 여러분과 나를 만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제발 나를 만나주고, 제발 나를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영원히 같이 살자고 애원하듯 인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내가 누구를 만나 내 사랑을 줄 것인가? 어느 날 하나님이 외로워지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찌 내 사랑을 싫다고 도망가느냐! 제발 내게로 돌아와다오.”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충분히 나타났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어린 양이였는데 그 하나를 잃어버린 하나님은 견디지 못하시고 험산 계곡을 미친 듯이 소리치며 다니다가 그 사랑의 대상인 어린 양을 발견했을 때 너무 기뻐서 다시는 잃어버리기가 싫어 놓치지 않으려고 품에 안고 돌아오시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가 예술 작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싫다고 버리고 나간 탕자를 절대 포기하지 못하시고 밤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분이라서 돌아온 사랑의 대상을 책망할 능력을 상실합니다. 살아 돌아왔다는 그 한 가지 사건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서 큰 경비를 아까워하지 않고 최고의 품위 있는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표현으로 외로워서 혼자 못사는 그런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어느 날 큰 잔치를 배설하고 사랑의 대상자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어서 종들을 시켜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려오라고 하시며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대상이 날마다 필요하신 하나님, 혼자 계시면 외로워서 못 견디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이런 속성으로 조명되어 있습니다.
“만약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온갖 좋은 것으로 너를 채워줄 것이며 네가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해 주고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하늘나라를 네게 줄 것이니 제발 내 말을 믿고 나와 함께 살아다오.” 이렇게 하나님이 애원하고 계십니다. 버리고 떠난 인간을 절대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자존심을 다 버리시고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요, 그 절대적 실천 행위가 십자가 사건이 됩니다. ‘나는 죽으면서라도 너를 사랑해야 돼!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죽을 터이니 이제 네가 내 마음을 인정해 주겠니?’
이 호세아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 인간끼리 나누는 사랑도 자존심 때문에 깨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일 순위를 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 속에 내가 일순위로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원합니다. 제가 심방 다니면서 들은 소리인데, 요즘에 며느리들이 사랑의 순번을 정하는데 일 순위는 자기 자신이고 이 순위는 자녀이고 3번은 남편이고 4번이 강아지고 그래도 애교로 봐주시니까 시어머니가 5번이고 시아버지는 제일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들집에 들렸다 오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3번아 잘 있어라. 6번은 간다.” 이 사랑의 관계에서 자존심 부리는 사람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절대로 전화도 먼저 하지 않습니다. 미안한 일을 해 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먼저 하지 않습니다. 만나자는 말도 더욱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말 만나기가 싫은가하면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면서 자존심을 부리는 것, 이것이 사랑의 상대성입니다. 그런대 하나님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자존심은커녕 날마다 부르시고 찾아오시고 사랑한다고 하시고 도망가도 따라 오시고 죄를 졌다고 해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찬송가를 부르지 않습니까? “♬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 혹시나 내 사랑이 돌아오지 않을까 동서남북을 보며 내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방황치 말고 오라고 하십니다. 이 호세아 성경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 표현을 현실감 있게 하기 위해 호세아 선지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대상자들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 중 13대 왕이었던 여로보암2세의 통치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이 성경의 시작은 그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 조명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의 신분은 본래부터가 매춘부였는데 호세아와 결혼을 합니다. 고멜이라는 이름의 여자로 결혼 전부터 문제가 있는 여자로 나타나는데 왜 그렇게 됐는가? 이것이 곧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을 떠난 후부터 문제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 역사라는 것은 이미 버려져서 구원 능력은 전혀 없어진 완전 타락의 문제아들로 내버려진 매춘부와 같이 그렇게 되었다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절대적인 사랑으로 제자리로 되돌려서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너를 사랑해야 돼. 사랑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게 나야!’ 사랑의 절대적 대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나타난 하나님의 외로움을 몇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부인 고멜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는 고멜과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호세아는 가족을 위해 매우 성실하고 좋은 가장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잘 살고 있는 행복한 가정을 깨트리고 고멜이 남편과 세 자녀를 버리고 정부한테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가정은 고멜의 타락적 성품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마 이 호세아뿐만 아니고 모든 남성과 여성의 심리는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가장 자존심이 상할 때가 언제인가? 내가 최고로 신뢰감을 주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버림을 당할 때라고 봅니다. 특히 이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 누구나 최고로 두려워하는 문제가 사랑하는 자에게 버림당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남자들은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인간관계가 있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의 대상에게 인정받기를 기다리고 비로소 인정을 받았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감정을 가집니다. 또한 여자들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일생을 걸고 헌신하는 존재요, 남자들은 훌륭한 남편이라는 소리 한번 들으려고 평생 피 땀을 흘리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인간이었으니까 호세아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 고멜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열심히 노력하고 살았는데 결국 타락적 성품 때문에 버림당한 외로운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쯤 되면 예언자도 낙심합니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든 호세야가 절망적 자기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그의 영혼의 문을 두드려 하나님의 마음을 지금 보여줍니다. “호세아야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 네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마음이 곧 나다. 나는 처녀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랑했고 내 사랑의 모든 것을 주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치려고 계획했다. 아내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너와 함께 살면서 내 사랑의 모든 대상을 만들어 가려고 했는데 이스라엘이 나를 버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정부에게로 도망갔다. 너의 가정의 비극이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고멜의 성품과 똑같이 이스라엘이 나를 버리고 내가 아닌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타락성 때문이다. 네가 버림을 당해 슬퍼하듯 나도 내 사랑의 대상자 이스라엘에게 버림을 당해 너와 같이 슬퍼하고 있음을 알라.” 사실 호세아가 예언자가 된 것은 이것 때문에 그 영혼의 문이 하나님께로 열린 동기가 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어떤 계기를 만나면 인생을 정리해보는 심각성을 가져 봅니다. 고뇌를 통해서 성숙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실패나 좌절의 사건이 닥치면 더욱 자기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깁니다. 그럴 때 정리가 잘못되면 막가는 인생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잘되면 보다 나은 새로운 인생의 길을 출발하는 성공적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호세아의 고민은 버리고 떠난 고멜을 잊어버리고 정리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새로운 길이 주어질 텐데,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고민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버리고 떠난 인간! 그러나 하나님은 정부와 함께 달아난 이 택한 백성을 절대 잊을 수 없는 마치 순정파 남편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는 겁니다. 당시는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가장 방해하고 있는 마귀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알 종교였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마치 하나님과 바알의 전쟁터와 같은 인상을 줄만큼 하나님 백성의 정신사를 가장 강력하게 흐리게 한 것이 바알 종교의 세력이었습니다. 이 바알 종교의 세력이 얼마나 컸었는가 하는 것은 엘리야 사건에서 아주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호렙산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다 바알을 따라갔는데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엘리야라는 선지자 한 사람만 남고 모두 바알 신자가 되었다고 했으니 이 택한 백성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해석할 수 있는 좋은 말이 우리 문화에 글자 하나로 있습니다. 한이라는 말입니다. 이 한이란 말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말이 됩니다. 즉 사랑과 증오가 함께 있으며 좌절과 미련이 서로 모순되는 감정의 충돌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한이 들어와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병이 됩니다. 이때의 하는 말은 말 뒤에 숨어있는 뜻이 따로 존재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이 많았기 때문에 한 많은 백성으로서 문화적으로 마음을 감추기 때문에 직설적 표현을 하는 서구 사회같이 생각하고 말을 들으면 큰일 납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미워죽겠다.” 그 뒤에는 너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표현되는 말 자체 뒤에 따로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정말 바라는 것은 님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이 보내드린다고 마음을 감추는 문화의 언어로 변질되었습니다.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죽어도 안 하겠다고 말하는 애증의 갈등 문학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마주 보면서 얘기할 때는 그 눈빛을 잘 보고 그 말 뒤에 숨어있는 말을 집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인류의 시작을 보세요. 하와는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주었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나누는 기쁨으로 준 것입니다. 아담은 받아먹고 나니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너 때문에 다 망한 거야!” 지독한 원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없이는 또한 살 수가 없습니다. 아담은 사랑과 증오의 갈등을 안고 하와의 외로운 손을 잡아주며 하나님에게 야단을 맞고 그토록 아름답던 에덴에서 서글프게 쫓겨나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살 수 있는, 해산하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출산해야 하는 인간 고난의 최초 순례자의 길을 떠납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러한 관계는 계속되고 있는데 오늘 말씀에 호세야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의 고통은 계속됩니다. 자기를 떠나버린 고멜이 차라리 행복하게 산다면 그 행복을 자기 것으로 알고 인내로 견딜만합니다. 그러나 호세아를 떠난 고멜은 다시 매춘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호세아를 더욱더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매춘부라는 위치는 만인의 노리개요 장난감 취급을 받습니다. 선지자의 사랑을 받던 아내였던 고멜이 어둠의 길가에서 몸 파는 잡초로 타락한 현실을 호세아가 참을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처녀같이 아내같이 사랑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가서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바알 종교에 몸을 팔고 만국의 장난감 같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하나님이 지금 괴로워하신 겁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슬프다. 이성이여. 본래는 공주 같던 자가 조공 드리는 자와 같이 되었도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호세아에게 큰 고통스러운 작업을 시키십니다. 가서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데려오되 포주에게 빚이 있으니 그것을 네가 갚아주고 자유롭게 해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고멜이 진 빛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지만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값을 지불해주고 해방의 선물을 주실 때 비로소 인간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와 능력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의 빚을 하나님이 대신 갚아주시고 용서하여 주신 그 자체를 우리는 은혜라고 하고 이 개념은 거저 받았다고 하는 뜻입니다. 고멜같은 여자는 구원할 가치가 없다고 모두 생각할 터인데 하나님은 인간을 고멜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남성들과 유대 남성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민족들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보다 과거를 더 중요시 한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현재 만족하면 과거 같은 것은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데 남자들은 과거가 나타나면 그것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깨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인데 한국 남성과 히브리 남성의 자존심은 세계에서도 첫째, 둘째 갈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게일 선교사의 논문에 이것이 잘 반영되고 있습니다. 호세아도 유대 남자이니 자존심이 강합니다. 고멜을 다시 데려다 산다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은 치욕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그것을 명하셨는가? 하나님의 마음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도 그때만을 기다리신 듯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어떤 과거도 묻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그 자체만이 기쁘신 것입니다. 우리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의 사랑은 분명한 철학이 존재합니다. 이기주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소원대로 될 때만이 사랑이니 정열이니 떠드는 것이지 실망을 주었을 때는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하기로 선택한 대상을 향해서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언약의 하나님이요, 불변의 하나님입니다. 어떤 경우에 있다하여도 끝까지 찾아가서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그를 다시 사랑의 대상, 제자로 회복시키시는 그 자체가 구원입니다.
호세아는 이 일을 치르고 나서 히브리 민족에서 외칩니다. 6장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버리고 떠난 인간을 찾아나서는 하나님의 외로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존심은 십자가에 이미 다 못 박았습니다. ‘이래야 내 마음을 알겠니? 나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죽는 거야.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내가 당하겠는데 이것이 제일 큰 고통이라서 십자가를 지는 거야. 이제 내 마음을 보았으면 내게로 와. 나하고 함께 살아. 나와 함께 있으면 네가 있을 곳을 예비할거야. 다시 너를 데리러 올께.’ 이것이 기독교 진리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했을 때 내 마음은 어떤가? 그런데 ‘괜찮아! 오기만 하면 돼. 그것은 다 잊었어.’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수백 번도 더 심각한 고통을 겪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내 품으로 돌아온 사랑하는 자여! 나와 사랑을 나누자.” 거기에 대한 인격적 응답을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이 영원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옵소서.” 호세아는 이것을 우리에게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다소 힘든 부분이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강한 손에 붙들려서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호세아를 통해서 들려주신 하나님 사랑의 속성을 저희들이 잘 깨닫게 하옵소서. 어떠한 힘보다도 가장 강열한 힘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또 한 주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순례자의 길을 걷겠습니다. 저희들의 손을 붙잡아 주시며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사랑에 눈 먼 하나님
호 3:1-5 / 김경수 목사
한 곳에 정신을 잃고 있는 사람을 흔히 눈이 멀었다고 표현합니다. 권력에 정신을 잃은 사람을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돈에 정신을 잃은 사람을 돈에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왠지 눈이 멀었다고 하면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것은 조금 차원이 다릅니다. 사랑에 눈이 먼 것은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 눈이 먼 것은 추해 보이고 악해 보이지만 사랑에 눈이 멀게 되면 순백한 시인이 되고 내면의 감성이 풍성해집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거나 금지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총이나 칼처럼 무력적 힘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없앨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만큼 위대하고 무언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한쪽만 하는 짝사랑은 너무 안타깝고 측은해 보입니다. 서로하는 사랑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게 하지만 짝사랑은 반대로 모든 활력을 잃게 합니다. 사는 재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관심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짝사랑의 주인공이십니다. 그분은 창조 사역을 마치고 한가롭게 낮잠을 주무시거나 여행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기획하시고 설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으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고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 불순종하게 되고 불가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면서 사망과 죄에 빠져 저주스럽게 살게 된 것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점차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잊게 되었고 자기 임의대로 살게 되면서 그 심각성은 더욱 커져 가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보면서 상심이 커가시는데 그와 반비례로 사람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멀리 떠나가려고 하는 죄의 습성으로 인해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인해 사람을 짝사랑하게 된 하나님은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수도 없이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사랑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성경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왜 세상에서 방황하며 정처 없이 사느냐는 것입니다. 떠돌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며 고단합니까? 인생은 아무리 살아도 뒤돌아보면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시90: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성경은 천지를 창조한 내역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왕들의 이야기를 남겨두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삶을 산 사람들의 영웅담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율법이 어떻고 제사가 어떠하며 절기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떤 의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본다면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도 없고 성경이 기록된 목적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성경은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담고 있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고 완벽한 사랑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좋은 것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루하루 천지를 창조해 가시면서 고백하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완전하고 완벽한 창조입니다. 사람이 살기에 완전한 환경이며 완벽한 조건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선을 넘은 것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을 어기면서 불순종한 것입니다. 이 불순종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무기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며 누리기를 소원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인간 때문에 순식간에 뒤죽박죽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찾아오셔서 가죽옷을 입히시고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없는 사랑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서로 책임전가를 하면서 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끝내 뱀 탓을 하면서 은근히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추방당한 인간은 그 이후로 변함없이 하나님을 멀리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온갖 영적 간음과 더러움에 자신을 방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포기하실 만한데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없이 인내하십니다. 그리고 참고 용납하십니다. 그토록 당신에게 모욕과 멸시를 하는 인간인데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때가 되어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인간의 형상으로 보내십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인간을 대신하여 죽이기 위함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인간을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 문제가 해결되고 사람은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기꺼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즉시 죄가 소멸되는 축복을 누리게 됨과 동시에 새로운 신분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는 마귀의 자식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만큼 끝없는 사랑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교만하고 미련한 삶을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지 아니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실로 망극하신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좋은 것만 주시는 사랑입니다.
(마7: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모두가 좋은 것입니다. 햇빛과 공기, 마실 수 있는 생수와 가정의 기쁨이 되는 자녀, 등등.
그러므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부르짖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색하시거나 놀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할 때 절대적 낙심하면 안 됩니다.
(눅18: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매불망 저와 여러분 생각뿐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만 주시고자 하십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응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죠. 기도하지 않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만사를 형통하게 합니다. 기도할 때 능력을 받게 됩니다. 기도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사람의 마음이 바뀌기도 합니다.
기도는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천국 창고의 열쇠이자 영적 전쟁의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핑계입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귀가 엷은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평안이 옵니다. 기도할 때 응답을 가지고 오는 천사를 도울 수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는 일찍이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워낙 그의 형들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소년 다윗은 놀랍게도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으로 불행스럽게도 아내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장인에게서도 버림을 받게 됩니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자식들조차 반란을 일으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당해도 결코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한 번도 잊거나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사람처럼 배신하거나 뒤에서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편에 서서 그를 변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18: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라
나의하나님 나의하나님 구원의뿔이시오 나의산성이라
나의하나님 나의하나님 그는나의 여호와 나의구세주
인간의 죄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핍박하며 교회를 박멸시키려고 했던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빛되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고 바로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감격 속에 그분의 사명을 감당하는 위대한 사도의 삶을 삽니다. 그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한 번도 거역하거나 불순종하지 않습니다. 한결같이 일편단심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마지막 순교의 제물이 되면서도 그분을 위해서 죽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그 이후로 300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력도 지나가고 부귀영화도 지나갑니다. 이 세상이 지나갑니다. 혹자는 인생을 일장춘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잠깐 사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나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만날 수도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토해낸 더러운 것을 다시 핥아 먹을 수 있겠습니까?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결한 삶을 살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잠시잠깐 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생복락을 누릴 주님의 나라에 이르러 하늘 영광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좋아하십니다.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돌아와서 이제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예배하며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는 정신을 놓을 만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바람이 나십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멀리 타향으로 떠난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끌어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하고 야단치기 보다는 오히려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얼마나 신바람이 나시면 잔치를 다 베풀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조금만 관심을 보여드려도 감동을 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어느 날 새벽에 나와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너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하루를 출발하기 전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무 좋아하십니다. 누구를 만나려 가기 전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무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떤 축복을 받게 될까요?
먼저는, 존귀함을 받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삽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삽니다. 노예로 팔려갔지만 가는 곳마다 요셉은 존귀함을 받습니다.
(시91:14)-“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보디발 집에서도 가정총무로 인정을 받습니다. 사랑을 받습니다. 보디발 조차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존귀함을 받습니다. 간수가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존귀함을 받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존귀함을 받게 됩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로 존귀함을 누립니다. 무려 정권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한결같이 신임을 받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에게 와서 국정자문을 구합니다. 그의 의견을 경청합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비록 출신은 노예이지만 그는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거하였습니다.
그리고 형통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야베스는 복에 복을 받고 지경이 넓어지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항상 형통한 축복을 누렸습니다.
보호를 받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불속에서 춤을 추시면서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 눈이 멀었습니다. 오직 그분의 관심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자
호 3:1-5 / 이성희 목사
김정한님의 ‘산다는 것은 기다림과의 여행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 미운 사람, 만남부터 이별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마 그것은 신이 내린 아름다운 선물일 수도 있고, 가장 고통스런 형벌일 수도 있다. 죽기 전까지 계속되는 기다림이다”.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좋고 반가운 것을 기다리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나쁘고 괴로운 것일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은 반가운 일입니다. 즐거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림은 즐거움입니다. 군대 보낸 아들 훈련 5주 만에 면회 갈 때에 어머니의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가 참 좋은 일입니다. 사랑은 49%의 사랑과 51%의 기다림이란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기다림은 더 많고 길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기 위하여 자신은 몰랐지만 4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얻기 위하여 25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한 결 같이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25에는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시므온은 메시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메시야를 안고 축복하는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므온의 축복은 기다림의 은총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종말에 관한 비유 가운데 열 처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신랑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잠든 사람은 신랑의 잔치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말합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기다리며 일한 충성된 일꾼은 축복을 받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못하며 일하지 않은 악한 종은 책망을 받고 쫓겨났습니다. 충성된 종은 열심히 일하면서 주인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상대일 때가 있습니다. 데이트할 때 보세요. 만날 가치가 없는 상대라면 기다리지 않고 가버립니다. 가치 있는 상대라면 한 시간이라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기쁘고 보람이 있습니다.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은 낮 시간에 설렁탕 한 그릇을 먹으려고 30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30분을 기다려 10분 만에 먹고 가지만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간절한 소망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은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일입니다.
지구적 현상을 보면 종말적 현상이 곳곳에 있습니다. 미국 동부의 10월 폭설, 태국 방콕의 홍수, 터키의 대지진, 아프리카의 끊임없는 한발 등 이 모든 것은 성경이 이미 예고한 종말 징조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에 근거하여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준비해야합니다. 언제일지 그 날과 시간은 모르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세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인내와 기다림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명서였습니다. 지금도 제자의 도는 기다림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는 성탄과 더불어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여야 합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에게 성탄은 더 기쁜 날로 주어질 것입니다.
첫째, 내게 주신 자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요한복음 6:39에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까지 주님은 주님께 주신 자 가운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살리는 것이 소망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것입니다. 나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만약 내일 종말이 온다면 과연 무엇을 하겠습니까?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습니다. 종말을 맞는 자세는 오늘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내일에 대한 환상이 아닙니다. 정말 종말이 온다면 사과나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죽음 이후의 삶, 예수님의 재림 이후의 삶을 안다면 사과나무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심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심어야 할 것은 복음입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믿음의 환상은 무엇입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한 생명이라고 더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임금의 잔치비유에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핑계로 거절합니다. 밭을 샀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 때 임금은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 14:21)고 합니다. 잔치를 준비한 왕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잔치에 참여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한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하늘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 오십니다” 이 말은 아람 방언으로 ‘마라나타’라는 말입니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의 인사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종말적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금방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그들이 살아있는 희망이었습니다.
신학자 에른스트 케제만은 “종말론은 모든 기독교의 어머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마지막 날을 기대하는 종교입니다. 이 기대감이 없으면 기독교의 신앙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신앙은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오늘은 최초의 날이자 최후의 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의 남은 날의 첫째 날입니다. 종말적 삶의 의지를 가지고 살면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7세기의 영성가 요한 클리마쿠스는 “당신이 오늘 하루를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날을 경건하게 보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종말적 자세로 살면 하루하루 경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종말적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종말적 자세로 산다는 것은 개인의 신앙에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1944년 9월 1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기의 격추로 미 공군 병장이었던 로버트 스틴슨이 실종되었습니다. 미군은 15년 동안 수색하여 팔라우 근해에서 스틴슨 병장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65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와 안장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끝까지 찾는 열정이 대단합니다. 비록 시체지만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까지 찾는 마음이 갸륵한 것입니다.
지난 달 하마스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의 샬리트 병장은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 단체인 하마스의 요구대로 팔레스타인 병사 1,027명과 맞교환하여 석방되었습니다. 천명보다 한사람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이스라엘의 정신에 세계는 감동했고 큰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마스는 한 사람을 석방시키고 1,000명 이상을 찾아왔으니 엄청난 덕을 봤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반대입니다. 하마스 1,000명이 유대인 1명 가치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마스에게는 굴욕적 교환입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스라엘의 정신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유대인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띄우고, 전함을 보내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만일 오늘이 여러분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마지막 날을 마무리하겠습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잃은 양을 찾아야 하고, 버린 양을 데리러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이나,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내일 주님이 오신다면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내일 죽는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을 한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제자들의 심정을 보세요. 사도행전 1:11에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 다시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빨리 땅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전도는 화급(火急) 전도였습니다. 정말 물불을 안 가리고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정신없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종말적인 전파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모두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자이다.
요한복음 6:40에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자는 다시 살리실 것을 기대하는 자입니다. 마지막 날, 다시 살 것 믿지 못하면 이생에서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앞으로 살아야 할 아무 비전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다시 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냥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갑니다.
윤심덕은 일제강점기의 성악가이며 가수이며 배우입니다. 최초의 신여성이라 불립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는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차용한, 윤심덕의 ‘사의 찬미’입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네 인생은 나날이 변한다,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다 싫다”. 마지막 날에 대한 아무 기대가 없는 노래였습니다. 윤심덕의 마지막은 아무 희망이 없이 돈과 명예를 좇다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인생의 마지막, 인류의 마지막에 인생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한 해의 마지막에는 다시 새해가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종말에는 하늘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에는 다시 영원히 사는 삶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십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에 찬 대화가 오갔습니다. 마지막에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다시 사는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과학자 마이클 파라디(Faraday)는 임종 시에 어떤 사람들이 “당신의 영혼이 장차 어떻게 되겠다고 추측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추측이라고? 나는 추측에서 살지 않는다. 나는 확신에서 살고 있노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종말과 재림의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전쟁 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가정예배 때가 되면 재림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으면 “산아, 바위야, 나를 가리워라”라는 말씀을 같이 읽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를 외치고,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를 찬송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저의 교회에서 가까운 교회에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재림 설교를 하시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오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실감나는 설교를 하시려고 나팔수를 강단 뒤에 숨겨 놓았다가 “나팔소리와 함께 오십니다”라고 할 때 크게 나팔을 불었답니다. 나팔소리가 나자 “아멘”하던 교인들이 모조리 의자 밑으로 숨더랍니다. 종말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오신다면 두려워하고 조금 후에 오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준비된 자는 설레는 맘으로 기다립니다. 준비된 자는 기대감이 차 있었습니다. 공포와 환난과 지진과 어두움이 있으면 그 뒤에 빛과 영광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을 기다리는 마음이며 확신입니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은 종말의 ‘대 격변’(catastrophe)이란 말에 ‘좋다’, ‘기쁘다’란 뜻의 헬라어 접두사 ‘eu’를 붙여 ‘선한 대 격변’(eucatastrophe)이란 말을 만들었습니다. 환경재해가 점점 심해지고, 대홍수가 있고, 한발이 대륙을 덮치고, 폭설이 뒤덮고, 한반도 몇 배의 빙하가 떠내려 온다고 합니다. 이런 종말적 현상이 다시 살아 영원히 사는 새 생명의 잔치의 서곡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 영원히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43에는 예수님께 자신의 무덤을 드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아리마대 요셉이 등장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 죽음을 준비하는 자는 다시 살 것을 예비하는 자입니다.
결 론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랭커스터에 가면 ‘아미쉬’들이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재세례파인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자신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살았습니다.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옷에는 단추가 없고, 마차를 타고 다니고, 지금도 전기를 거절하고, 가전제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미쉬’의 고집은 “믿음은 행함이다”라는 것입니다.
■ 2006년 10월 2일 마을에 총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외부인의 총격으로 다섯 학생이 죽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우유를 수거하던 트럭 운전사가 자신의 딸이 출산 직후 죽은 것이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여 이 마을에 총질을 하고 범인도 자살을 하였습니다. 전국에서 이 마을 피해자 가족을 위하여 성금을 보냈는데 이 성금을 범인의 유가족에게도 전달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유가족과 똑 같이 나누어 범인의 유가족에게 준 것입니다. 범인은 교실에서 10명의 학생을 나란히 세워놓고 총을 겨눴습니다. 13세 소녀가 “나를 먼저 쏘세요”(Shoot me first)라고 했습니다. 이 소녀의 세 살 아래 동생이 “그 다음에는 저를 쏘세요”(Shoot me next)라고 하였습니다. ‘아미쉬’는 늘 이렇게 묻습니다. “둘째 단추를 끼우기 전에 당신은 첫째 단추를 끼웠는가?” “예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기 전에 당신에게 죄 지은 자를 당신은 용서했는가”. 그들의 신앙은 행동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한 생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라도 잃지 않겠다는 마음이 극진합니다. 용서할 때 마지막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3:5에는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자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그 은총으로 나아갑니다. 최후의 일인까지 잃지 않고 얻으려고 애씁니다.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 것을 기대하며 삽니다. 우리개인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자, 한 해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자 그리고 우리 인류의 마지막을 기다리며 영원히 살 것을 확신하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