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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1212 / 벧전 2:4-10 / 산 돌과 모퉁잇돌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12.23|조회수468 목록 댓글 0

산 돌과 모퉁잇돌

벧전 2:4-10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4-10 / 주께 오십시오. 그분은 산바위의 초석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집을 지으십니다. 인간들은 그리스도를 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인간들보다 더 귀한 존재로 그분을 택하셨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집을 짓는 데 쓰실 산돌이 되십시오.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그리스도를 통해 드리십시오. 6) 성경에 말씀이 있습니다. ㄱ) `내가 시온산 위에 튼튼한 주춧돌을 놓겠다. 그 머릿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이는 멸망하지 않는다!' (ㄱ. 70인역 사28:16) 7)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어느 누구보다도 귀중한 분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분이 ㄴ) `집짓는 이들이 버린 바로 그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ㄴ. 시118:22) 8) 또 성경에는 그분이 ㄷ)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며 장애물이 된 바위'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순종하지도 않는 자들은 결국 이처럼 벌을 받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ㄷ. 사8:14) 9) 그러나 여러분은 다릅니다. ㄹ)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손수 택하신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하고 순결한 겨레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널리 찬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ㄹ. 출19:5-6) 10) 여러분이 전에는 아무런 가치 없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그 은혜를 입고 여러분의 생활이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건물과 건물을 형성하는 재료를 통해 영적인 교훈을 이야기합니다.

 

보배로운 산 돌(4-5) 예수의 산 돌(living stone), 즉 인간의 손으로 다듬은 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시고 세워주신 생명을 가진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해 무지하고 극히 초보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창조주요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볼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산 돌되신 예수를 믿고 예수와 연결되는 삶입니다. 산 돌이신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사귐을 갖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분과 같이 산 돌들이 될 것입니다. 돌 하나는 별 소용이 없지만, 다른 돌들과 연결되면 집을 세우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닌 성령이 활동하시는 신령한 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보배로운 모퉁잇돌(6-8) 하나님은 예수를 모퉁잇돌로 세우셨습니다. 모퉁잇돌은 토대를 안정되게 하며 벽들을 세우고 사각의 형태를 갖추는 데 아주 중요한 돌입니다. 우리의 모퉁잇돌이신 예수께서는 삶에 대한 우리의 굳건한 토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건축자들은 그 돌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요긴한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가 되게 하시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혀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9-10) 예수를 생명을 주시는 산 돌로, 내 삶의 기초가 되는 모퉁잇돌로 삼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특권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의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규정하셨던 말씀을 인용하여, 과거 이스라엘의 특권과 사명이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셨으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주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잘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또 거룩한 나라의 사람, 즉 세상과 다른 구별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소중한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용: 산 돌이요 모퉁잇돌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은 구원의 은혜와 놀라운 특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마을의 외딴 저수지에서 낚시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빈손으로 낚시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아들의 낚싯대에 큰 물고기가 걸렸습니다. 물고기는 배가 볼록한 것이 알이 가득했습니다. 어종 보호를 위해 산란 어종 낚시를 금지하고 있었기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고기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그냥 가져가면 안 돼요? 이렇게 큰 물고기를 처음 잡았잖아요."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하게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다고 규칙을 어기는 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이제껏 정직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어릴 적 아버지와 낚시하며 배운 정직의 원칙이 오늘의 저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

벧전 2:4-10 /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들어가는 말]

요즘은 많은 교회들이 제자훈련을 하고 있어서 제자훈련이 뭔지를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 종류도 많습니다.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기치로 하는 제자훈련이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제가 우리 교회에 처음 부임해서 실시했던 <일대일 제자양육>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고, 요즘에는 더 많이 나왔습니다.

또 우리 교회에서 많이 해오고 있는 ‘삶 공부’도 제자훈련의 일종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삶 공부의 강사를 제가 하고 있고 <생명의 삶>은 어느 교회나 담임목사가 하도록 되어 있지만, 다른 교회들을 보면 <새로운 삶>, <경건의 삶>,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특히 <일터의 삶>과 같은 공부들은 평신도 리더들이 감당하는 것을 봅니다.

그 중 우리가 목장에서 목자 목녀 목부가 일대일로 실시하는 <확신의 삶>이 있는데, 이것은 평신도 리더가 다른 평신도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제자훈련을 많이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당연하게 넘어가지만, 오래 전에는 이런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평신도가 평신도를 인도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소그룹 운동이 일어났고 소그룹 성경공부가 이루어지면서 평신도 인도자가 다른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제자훈련 과정을 하는 것에는 굉장한 관점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목회자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라는 관점입니다. 이것을 정말 믿을 수 있어야 평신도 중심의 제자양육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이 불편한 교회들이 있고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평신도가 인도하는 제자양육 과정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는 가정교회야말로 평신도가 사역자이며 목회의 주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이라는 것은 앉아서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공부를 하고서 이렇게 예배도 하고 사랑을 나누고 행하는 삶 속에서의 실천이 있을 때 가장 좋은 제자훈련입니다. 가장 좋은 훈련은 연습을 하면서 배웁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론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론(말씀)도 배우지만, 배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진짜 제자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삶 공부에서 열심히 말씀을 공부하고, 또 배운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목장에서 말씀을 실천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기도해줍니다.

예수님은 지난주 본문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가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약간 바꾸셔서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신다면 우리가 과연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질문하셨지만, 그것을 조금 바꾸어 ‘너는 너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 ‘너는 너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독교인입니다.’ ‘주님의 제자입니다.’ 등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맞는 답입니다. 그런데 그런 답변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도 매번 참석하지만, 교회가 주변 사람들에게 별 영향을 못 미치고,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미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교회가 지탄을 받고,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해주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나는 누구다’라고 언급한 대답들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그런 말들과 우리의 실제 삶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만약에 살지 못한다면, 크리스천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제자 등의 신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토요일에 너무 일을 많이 하거나 밤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예배에 와서 굉장히 피곤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이 있어서 피곤한 것이 아니라 상습적으로 예배에서 졸고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예배자다.’ 하는 사실을 정말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안 믿는 분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머리로는 아는데 실제 삶에서는 그것이 안 나타난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 공부와 목장과 예배를 통한 전인적 제자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정의’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인격이고 혼입니다. 그래서 삶 공부에서는 지적인 부분을 터치해줍니다. 목장에서는 사랑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주는 가운데 감정을 터치해줍니다. 또 예배는 은혜를 받고 가는 게 아니고, 은혜를 받은 후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의지적인 결단을 하고서 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의지적인 면을 터치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정의가 다 터치되는 것이 전인적인 제자훈련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그렇게 제자훈련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사람으로서 생활 속에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잘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1. 빌립보 가이사랴에서의 신앙고백 (마태복음 16장)

 

지난주일 마태복음 16장 본문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황제의 도시인 빌립보 가이사랴의 한 복판에서, 로마 황제인 시저가 구세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베드로가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황제의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겠다는 결단이며 선언입니다.

그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이제 드디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로 고백한 제자들에게 비로소 그리스도(메시아)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를 그때로부터 설명하십니다. 메시아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한다는 것, 심지어 죽임을 당한다는 것, 그러나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시작하십니다(21).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다음부터 이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의하면서,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꾸짖습니다(22). 그가 예수님을 야단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 16:23)

바로 몇 분 전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7-18)하는 놀라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금방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까? 분명히 황제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가겠다고 말로는 고백을 했는데, 그것은 말뿐이었습니다. 말로 고백은 했지만,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과 부귀영화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고 하시니까, “그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하고 가로막으며 나오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여전히 속으로는 황제의 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길을 버리지 못하고, 이름만 바꾼 겁니다. 예수님의 길을 가겠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길과 같았습니다. 메시아의 길이 황제의 길보다 더 높고 강한 위치에 올라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주님은 “사탄”이라고, 또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 길을 갈 때 고난과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모른 채, 오직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에 가셔서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어 영광의 메시아로 다스리실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의 뜻은 예수님의 뜻의 뒤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 개인이 사탄이라는 게 아니고, 지금 베드로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즉 인간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래 이름은 시몬인데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나 ‘반석’이나 비슷한 단어였기 때문에 헷갈렸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우쭐했습니다.

“너는 베드로다” 하실 때 ‘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로스(Petros)’입니다. 하지만 ‘반석’은 ‘페트라(Petra)’입니다. 다른 단어입니다. ‘페트라’는 여성명사이고, ‘페트로스’는 남성명사입니다. 그런데 ‘페트...’까지만 듣고 흥분해서 ‘봐라, 내가 이제 2인자가 되었다.’라고 우쭐한 겁니다.

지금 이때가 어떤 상황입니까? 예수님이 그 동안 말씀을 전하신 그 능력, 그리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물 위도 걸으시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엄청난 능력을 보면서 ‘저분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이 분명한 상태에서, 제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눈에 들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왕이 되시면 그분 밑에서 한자리에 차지하기 위해 서로 ‘누가 크냐?’ 하며 다투던 때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선수를 치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 이제 내가 쟤네들보다 앞섰다.’라고 확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쭐해져서 주제넘게 행동한 겁니다. 요즘 말로 ‘오버’한 겁니다.

그리고 그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마땅히 지셔야 할 십자가를 지시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메시아는 고난 당하고 죽고 부활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가 정해주려고 합니다. 메시아는 그런 게 아니고 영광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자기가 정해주려 합니다. 바로 그것이 사탄의 생각이었고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고백하면서도 주님께서 ‘그럼 이렇게 하자’라고 하실 때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이처럼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려 하고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면, 우리도 똑같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심각하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추구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그것이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인가, 아니면 주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삶인가?’ 우리는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주님의 뜻을 조종하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의 생각이고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제목들입니다. 목장에서도 기도제목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줍니다.

예를 들어, ‘내가 건강하도록 기도해주십시오.’라고 했다면,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 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건강을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는 해야 하는 일이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건강해서 뭐 하려고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팠다가 건강해져서 못된 짓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계속 아팠으면 못된 짓을 못하고 이상한 데를 못 가는데, 몸이 나아서 날아갈 것 같으니까 이상한 데에 가고 못된 짓을 합니다. 그럼 건강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 겁니다. 내가 건강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삶을 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건강해져서 내 맘대로 그 동안 못하던 것을 신나게 하면서 살겠다는 것인지, 우리는 심각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 베드로의 깨달음 (4-8절)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반석”이 자기라고 생각해서 그런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자기가 성령을 받고서 변화되어, 그것이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노년에 베드로전서를 기록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깨달은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하실 때의 “반석”이 베드로(Petros)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4절)

여기서 분명히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라고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6장 이후로 ‘페트로스(Petros)’라는 단어가 ‘베드로’의 이름으로만 사용되지 ‘돌’이라는 뜻으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돌이라는 뜻의 단어로는 ‘리쏘스(lithos)’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4절에서도 ‘페트로스(Petros)’ 대신에 ‘리쏘스(lithos)’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돌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당했지만 하나님께 선택 받은 보배로운 산 돌’입니다. “The Living Stone”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십시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5절)

4절에서는 산 돌이 예수님이라고 했는데, 여기 5절에서는 누가 산 돌입니까? “너희”입니다. 이 “너희”가 누구입니까?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1:1-2)

이 지명들은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거기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가 베드로전서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을 말합니다.

원래 ‘산 돌’은 예수님이신데, 그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산 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함께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고 있는 중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기 위함입니다(5).

무슨 말입니까? 산 돌이시며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이고, 교회는 완벽히 지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중이며, 또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제사장이 뭡니까? 원래 제사장의 구약에서의 역할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그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교회(믿는 자들)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단순히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뒤바뀌니까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기쁨(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무엇이 이익인가, 자기에게 좋은 게 뭔가를 먼저 얻으려고 하다 보니까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좋아하는 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인데,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먼저 구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먼저 구하다 보면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오래 전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자신을 가리켜 “이 반석”이라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 자기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그 반석이라는 것, 또한 그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반석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물론 베드로(Petros)도 “이 반석(페트라 petra)”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백할 때 인간 ‘페트로스’가 ‘페트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뿐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할 때 그 “반석”(페트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6-7절)

이 구절들을 다시 보십시오.

- 5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6절: “내가 택한 보배로운 한 모퉁잇돌” (사 28:16)

- 7절: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시 118:22)

여기서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퉁잇돌이란 것은 당시 돌로 건물을 지을 때 모든 돌들이 그곳에서부터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모퉁잇돌이 중심을 잡고 있어서 건물을 짓게 됩니다. 모든 돌과 다 연결되는 돌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건물이 안 됩니다. 산 돌들로서 신령한 집으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인해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셔야 교회가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님을 가장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머리라고 말은 하는데, 실제로는 머리가 목사이거나 장로거나 집사거나 권사라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의 결국이 어떻게 됩니까?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8절)

이것은 이사야 8장 14절의 인용입니다. 성령 받고 변하니까 베드로가 몇 백 년 전에 쓰인 구약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겁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 자들인 우리에게 예수님은 보배이십니다(7).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그 돌에 부딪쳐 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교회의 정의 (9-10절)

 

이제 베드로는 “너희”가 누군가, “산 돌”이며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고 했으며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한 사람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더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9-10절)

여기서 첫째, “택하신 족속”이라는 것은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왕 같은 제사장들”이란 것은 왕이신 예수님과 같으며 또 세상을 위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거룩한 나라”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영역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것은, 소유주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표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사실입니다. 여러 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혼자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잘하겠다는 분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교회가 너무 문제가 많으니까 집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면서, ‘나 혼자 잘 믿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정에서 정말 예배를 드린다면 그 가정 자체가 교회가 되고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나 혼자 잘 믿겠다. 나를 그냥 놔둬라.’라는 식의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공동체로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기 이 표현들을 보십시오. 전부 다 복수입니다.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모여서 그저 쓸데없는 짓을 하고, 함께 즐기며 먹고 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선전)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리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세상에 전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인 교회의 목적입니다.

 

[나가는 말]

 

1) 마태복음 16장: 바 = 아들(son) / 요나 = 요한(John)

예수님이 베드로를 가리켜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이름입니다. 히브리식으로 요나이고, 헬라식으로는 요한입니다.

2) 바요나 시몬(Simon son of Jonah) = Simon Johnson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신 것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하면 ‘John's son Simon’인데, John’s son이라는 말이 Johnson이 되었습니다. Simon도 흔한 이름이고 Johnson도 흔한 이름이고, 또 Simon Johnson도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원래 ‘베드로’는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고,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을 성경적으로 하면 Simon Johnson입니다.

3) 바요나 시몬 (Simon Johnson) + 예수 그리스도 = 베드로(반석)

이 ‘바요나 시몬’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니까 뭐가 됩니까? ‘반석’이 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그 페트라, 즉 ‘반석’이 된 겁니다.

4) 베드로전서 2장: 각 사람 + 예수 그리스도(보배로운 산 돌) = “산 돌” (곧 페트라)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예수님이 원래 산 돌이신데 “너희도 산 돌 같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인 우리 각자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산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산 돌이 바로 그 페트라(반석)입니다.

5) 우리 모두 + 예수 그리스도 = 산 돌들 = 교회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고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산 돌들이 되고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그 교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곧 신령한 집이며,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보를 보십시오. 안쪽에 보면 우리 교회의 비전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성도가 행복한 교회”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영혼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듦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영혼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든다’는 것이 뭡니까?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예배, 교제, 양육, 사역, 선교를 통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드리고, 함께 교제하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열심히 서로 봉사하고 섬기며,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며 나아가다 보면,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교회가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며 성도가 행복한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어릴 때 다니던 교회가 분열된 슬픈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분의 책에서도 보고 듣기도 했습니다. 그 교회가 갈라지게 된 원인은 50원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50원짜리 ‘아이스케키’ 때문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의 막내아들이 어렸는데, 교회 사찰 집사님의 아이도 비슷한 나이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사모님이 막내아들에게 아이스케키 50원짜리 하나를 사주었습니다. 목사님 아들은 자랑하면서 먹는데, 사찰집사님 아들이 그것을 보고 먹고 싶어서 한 입만 달라고 했지만 안 줬습니다. 나중에 다 먹고 버린 막대기를 집사님의 아이가 주워서 흙이 안 묻은 쪽으로 핥았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가 그것을 보고 “네가 거지야?”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마침 거기 사모님이 있기에 아이를 때리고 야단을 치면서 메시지는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네가 거지냐? 자기 아이 입만 입이냐?” 하면서 막 뭐라고 했습니다. 사모님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자기에게 뭐라고 하는 소리니까 와서 따졌지만, 잘 안 되니까 목사님에게 가서 일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사찰집사님을 불러 부인 집사님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찰집사님도 열을 받았습니다. 이분이 평소에 정의를 부르짖던 분이었기 때문에, 그 전에 있었던 안 좋았던 일들을 사람들에게 막 말하며 성토하다 보니까, 목사님 편과 집사님 편으로 나뉘어 싸우다 결국 교회가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아이스케키 50원짜리 하나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평소에 쌓인 것들이 이때 폭발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교회도 많고 더 한 교회도 많습니다. 법정까지 싸움까지 가거나, 싸우다가 다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형편인데 교회가 계속 있어야 하는가? 교회가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데도 교회가 필요한가?

주님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는 있어야 한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외에는 이런 사명을 주신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셨는데, 그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해서 그런 것이지, 그것이 교회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여기 보십시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인 교회! 예배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또 복수로서 공동체인 교회! 교제하는 겁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 양육하고 훈련하는 겁니다. 긍휼을 얻은 자로서 긍휼을 베푸는 교회! 서로 섬기고 봉사하고 사역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덕을 알리고 전도하며 선교하는 교회!

이러한 일들을 통해 우리 교회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도 주님 안에서 행복한 성도가 되어, 주님께 영광 돌리는 개인과 가정과 온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산 돌이신 예수

벧전 2:4-5 / 조정의 목사

페이스북을 통해 한 친구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에 있었던 일인데, 한 그리스도인이 질문을 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가르침이 너무 싫다. 타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법륜스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라고 되물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니 그 가르침에 따라 살면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 겸손, 자비, 온유 등의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산다면 그것이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간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너머의 진리가 같다면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좌중은 그 말에 환호하였다는 글이었습니다. 저의 친구는 그 글에 공감하며 그것을 공유하기까지 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이 왜 불교인에게 그러한 것을 물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일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는 베드로전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해 “산돌”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돌’은 살아있다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살아있는 돌”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1장에서는 “산 소망”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항상 있고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산돌”은 길거리에 있는 잡다한 돌 중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 “모퉁이 돌”이라고 했습니다(행 4:11). 건축하는데 사용하는 돌로서 모퉁이 돌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집을 짓기 전에 평평한 돌을 먼저 구했습니다. 양 벽면이 맞닿는 곳에 모퉁이 돌을 두고 그것을 초석으로 해서 다른 벽돌을 쌓아가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에 다라 건물의 각도와 균형, 다른 수많은 돌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건물을 지을 때 건축가들이 모퉁이 돌을 선정하는데 가장 고심했다고 합니다. 건축물의 기준이 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살아있는 모퉁이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들이 가진 전통과 교황이 기준이 됩니다. 몰몬교에서는 몰몬경이나 조셉 스미스 같은 사람이 기준이 되고, 불교도 불경이나 부처가 삶의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는 어떤 기준이 있을까요. 자신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무엇이 유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 계산하면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이 모퉁이 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사랑, 온유, 겸손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하고 가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분의 메시지의 핵심은, 자신이 모든 삶의 기준이 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들이 가진 모든 권리, 기준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옳다 하시는 것이 옳고, 예수님이 가치 있다고 말씀하시는 그것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 그것을 제안하신 것입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 시간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면, 나를 따를 때 생명이 있고 잘 먹고 잘 살 것이라고 한다면 저를 따르고 여러분의 인생을 저에게 걸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럴 만한 매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외모는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고(사 53:2,3), 예수님의 출신 역시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사회적 위치는,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세리도 어떤 정치적인 지도층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카리스마는 어떻습니까. 강인함과 담대함보다는 온유와 겸손으로 일관된 모습이었고, 로마 군사들 앞에서 도살장에 끌러가는 어린양처럼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였고, 그분의 제자들도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너희들의 삶의 기준을 버리고 나를 섬기라’고 한다면 누가 따르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빵을 주었을 때는 따라다녔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어려운 말씀을 하실 때면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병 고침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좇으라고 할 때는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식민 지배에서 자신들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지만, 힘없는 예수님의 모습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랑하며 사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 더 도덕적인 삶을 살게 도와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더라도 그분을 모퉁이 돌로 삼지 않고, 그분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버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7,8절). 예수님을 기준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그분이 모퉁이 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를 모퉁이 돌로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솔로몬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많고 여자도 많았으며 뛰어난 지혜로 수많은 책을 썼던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쓴 전도서의 끝에서 그는,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전 12:13).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욥 38:4-6).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우리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 따라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즉 아무 의미 없고 가치 없다고 말합니다. 기준점을 잃은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모퉁이로 삼지 않은 모든 삶이 쓸데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분을 모퉁이 돌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듣기에 불편하지만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모퉁이돌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삼으신 분이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이 말씀 앞에서 예수님은, ‘나보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를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나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보다, 나아가 내 목숨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모퉁이 돌로 삼은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바로 하나님이 그분을 택하시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만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에서 “나아간다”는 말은, 이미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런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친밀한 연합 관계에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자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절). 우리를 “신령한 집”이 되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삼으며 완벽하게 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신령한 집은 ‘성전’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전인 이유는 거룩한 벽돌을 사용하고 멋진 색을 칠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분이 거하시기 때문에 성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자는 하나님이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우리는 사회 봉사를 하기 위해 어떤 공동체로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통해 진리를 선포하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마음의 욕심에 따라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던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살아가던,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옆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완벽하게 의미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능력과 유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끊으셨기에 놓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혜, 겸손, 온유,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신 완전한 의로움을 옷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과 우리의 제사장이 유사한 점은,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 제사 드리기에 앞서 거룩하게 하신 것, 거룩한 옷을 입혀주신 것과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신 것, 그리고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제물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절). 우리 역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완벽하게 의미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두려운 것은 내 삶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예물이 될까 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이런 악한 나를 받으실까 생각하게 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5절). 우리의 삶은 연약할 때가 있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삶을 예물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온전히 의로우신 예수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시고 우리 삶의 기준이 되셔서 우리의 삶이 완벽하게 의미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반드시 그리스도여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만을 기준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 예수님 없이 우리의 삶은 헛되고 헛되고 헛됩니다.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의미와 가치를 찾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예물이 된 것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바꾸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날마다 예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보배로운 산돌

벧전 2:4-10

1.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경찰철 통계에 의하면 2001년도 자살자 수가 1만 2277건이던 것이 지난해는 6%가 증가한 1만 3055건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 36건이고, 시간당 1.5명이 됩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생을 비관하여 죽음을 택하고 있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고 있을 것인데 참으로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지 못한 자살 기도자의 수를 생각하면 그 수는 10배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전화" 상담실에 의하면, 자살자들의 공통점은 어떤 충격에 빠져서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란 부정적 사고에 짓눌려 근래 말수가 많이 줄거나, 대인 기피현상을 보이거나, 잠을 이루지 못하여 불면증으로 시달리거나, 알코올 중독증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곧 우울증으로, 우울증은 정신질환가운데 유일하게 전염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주변에 우울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면 그 영향으로 비슷한 행동의 공명현상을 만들게된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아이고 죽겠다~"그러면 "너도 그렇냐? 나도 죽겠구만~" 하고는 꼬리를 물고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고등학교 2학년생이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했습니다. 그 후 열흘도 못되어 아버지가 따라서 자살해버렸습니다. 그저께는 아들이 자살한 곳에 와서 어머니가 뛰어내려 자살해버렸습니다.

나름의 특별한 자살 동기가 발견되는 사람도 있지만 모방 자살건수도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주로 세상에 대한 용기를 잃거나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란 열등감에서 자살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자살 방법을 알아내어서는 따라 행동에 옮기는 자살 전염병이 더욱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회적 현상에서 역으로 희망을 선전하며 부정 공명이 아니라 긍정 공명 운동을 벌여나가야 합니다. 자살 전염병이 아니라 희망 전염병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자아상 - 보배로운 산 돌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고향이 그의 이름 앞에 항시 따라 다녔습니다. 제자들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는 예수님이 어릴 적부터 자랐던 동네였는데, 갈릴리 지경의 작은 골짜기 마을이었습니다. 옛부터 별로 기록될만한 역사적 가치가 없었던 동네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그의 친구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나사렛 사람"이란 말을 듣고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코웃음을 친 적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어부보다 못한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서 늘 험한 일을 하였기에 억세고 거칠어서 흠모할 만한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보였던 분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예수님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그분의 말씀에 나타나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이렇게 출신 성분도, 외모도, 경제능력도 없어 보인 예수님이지만, 한 번도 비관하시거나 낙망하시거나 자조(自嘲) 섞인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따라 왔지만 그들에게 줄 아무 돈도 없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보스 역할을 하기 위한 정치자금이 전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 10:9-10a)

오늘 설교 본문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모양도 단단함도 없어서 집을 짓기에 쓸모 없어서 버린 돌과 같은 분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돌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 손에 드시니 그 돌이 "보배로운 산 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칼국수는 본래 가난한 서민들의 식사였는데 청와대에서 잘 드시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칼국수 선풍이 불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유명한 탈랜트가 묶은 머리띠가 전국 온 시장마다 그 모조품이 날개돋힌 듯이 팔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은 돌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으면 그 돌은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보배롭고 존귀한 돌이 됩니다. 뿐 아니라 그 돌은 그 속에 생명력을 지닌 산 돌이 됩니다. 이 산 돌에 관한 사건이 구약 성경에 두 차례나 실제적 언급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이 사용한 돌맹이었습니다. 작은 돌맹이에 불과한 돌이었지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던져지면서 그 돌은 살아서 적장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어 그를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 나온 것으로, 금과 은 동 그리고 철로 지어진 무섭고 거대한 신상을 무너뜨리어 산산조각을 내어버린 돌인데, 나중 도리어 그 돌 하나가 태산을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돌이 "사람의 손으로 뜨이지 않은 돌"이라고 했는데 바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돌을 의미하고, 그 순간 그 돌은 단순한 돌맹이가 아니라 "산 돌"(Living Stone)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붙잡혀 있음을 말씀하셨고 그렇게 인식하시며 행동하셨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고 가진 물질적 능력이 없으셨지만 이 자의식이 예수님의 삶이 빛이 되게 하셨고 능력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3. 너희도 산 돌이 되어 신령한 집을 세우라

 

베드로 사도는 오늘 설교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강권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우리가 산 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에게 붙잡힌 인식 즉 하나님의 소유된 자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의 실체는 남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조건이 아닙니다. 곧 내 마음입니다. 김 수경 선생이 쓴 「참으로 소중한 나」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매력 있어요

당신은 성격이 참 좋아요

차분하고 깊이가 있어 보여요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들 말했다.

 

그들은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다.

나한테 잘 보여서 득이 될 것이 무어라고 저러는 걸까.

그저 내 앞에서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

저들은 나를 모른다

 

내 모습이 어떤지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따금씩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면

언제나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몹시 자신감이 없어지고 소심해져서

기분이 굉장히 우울해졌다.

그럴 때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도 낮추었다.

 

누군가가 주목하면 나도 모르게 예민해졌다.

누군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면 입술이 떨렸다.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살폈다.

 

불청객 같은 기분이 가장 싫었다.

내가 굳이 있을 필요가 없는 자리에,

나를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머쓱하게 서 있어야 하는 기분

 

어디건 나를 간절히 원하며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면

굳이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너는 이곳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야."라는 초청장이 언제나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당해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고 좋아해준다고 느끼면

나는 안도하면서 내가 가진 것을

모두 꺼내 좋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게 무심하거나

차갑게 대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나는 즉시 경직되고 소심해져서

아무것도 꺼내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끊임없이 생각에 매달렸다.

왜 그들이 내게 차가운 거지?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걸까?

내가 그 때 어떤 행동을 했더라?

혹시 그 말이 저들에게 불쾌하게 한 걸까?

오, 그러지 말걸 . . .

혹시 그들이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만걸까?

혹시, 혹시 . . . ..

 

이런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런데 너무도 쉽게 잘 빠집니다. 늘 빠져 있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헤쳐 나온 후에 또 다시 빠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마음에 세겨둡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1-2)

동시에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을 세워야 합니다. 즉 우리 가정이 산 돌 같이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이 신령한 집이 될 것입니다. 가족이 서로를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지치고 피곤한 세상에서 가정은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 들어오면 생기가 넘치게 되어야 합니다. 나의 존재를 인식케 되고 긍정적 자아 의식을 재충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 서로를 물고 뜯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신령한 집"이란 믿음을 가집시다. 비록 경제적으로 넘치지 못하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하는 가정이 되면 산 돌처럼 생기 넘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벧전 2:2-10

요즘 저희 집 화단에 분홍낮달맞이꽃이 한창입니다.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꽃모양이 둥근달처럼 생겼다 해서 달맞이꽃이라고 하는데, 이 꽃은 낮에 핀다고 해서 낮달맞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분홍색깔을 띄어서 분홍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졌습니다. 이름은 그것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개신교인들의 이름인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체제에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벧전 2:9절에 따르면 기독교인을 부르는 이름이 네 가지나 나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리킵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그것입니다. 네 가지 칭호는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구약 개념과 연결됩니다.

 

1) 택하신 족속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선민사상이라고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으로 그들은 주변의 큰 나라를 부러워하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좌고우면 없이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구약 사상에 근거해서 이제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2)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도 역시 구약 사상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중재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이제 기독교인들이 온 인류를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것도 왕과 같은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최고 권위의 역할이라는 뜻입니다.

 

3) 거룩한 나라는 세상과 구별된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세상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구별했습니다. 근본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존재론적 차별성에 머물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 노력한다는 의미가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일상의 먹을거리마저 구별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사람은 이제 기독교인이야말로 참된 의미에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선포했습니다.

 

4)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말은 앞에서 거론된 세 가지 칭호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도 물론 구약 사상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규정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이제 기독교인이야말로 하나님의 소유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10절에서 다시 정리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본문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대한 네 가지 칭호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로 생각이 다르겠지요. 어떤 분들은 본문의 주장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동의할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옳은 말이긴 하나 뭔가 확 와 닿지 않는다고 여길 겁니다. 전자에 속한 분들은 믿음이 깊은 분들이고, 후자에 속한 분들은 믿음이 부족한 분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자에 속한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네 가지 칭호의 실질적인 의미를 모를 수가 있고, 후자에 속한 분들이 그 실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더 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에 속했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문이 설명한 네 가지 칭호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 신자의 존재론적 특성을 아는 일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게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9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문장에서 핵심은 네 가지 호칭 자체가 아니라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과 빛이 대비되었습니다. 이런 대비는 신약의 다른 곳에도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입니다. 요 1:5절은 이렇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어둠은 세상을, 빛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런 관점이 신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전통에 서 있습니다.

세상을 왜 어둠이라고 보았을까요? 죄가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할 겁니다. 옳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악합니다. 살인, 강도, 상해, 모함, 각종의 폭력이 매일 일어납니다. 겉으로 나타난 악만이 아니라 안에 숨어 있는 악도 많습니다. 유대계 독일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악은 유별난 게 아니라 평범합니다. 끔찍한 악을 행한 사람도 알고 보면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런 걸 일일이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죄와 악이 가득한 어둠이지만, 성경은 그런 차원만 보는 게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어둠을 말합니다. 죄와 악은 그 근본적인 어둠에서 나온 것뿐입니다. 근본적인 어둠은 뭘까요?

 

그것은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생명과의 단절은 곧 죽음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어둠은 그런 세상을 가리키는 메타포, 즉 은유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죽습니다. 요즘 5월에 예쁘게 피는 꽃들도 금세 시들어 땅에 떨어집니다. 쥐어짜면 녹즙이 흘러내릴 것 같은 요즘의 나뭇잎들도 가을이 되면 누렇게 변색됩니다. 지금 예배에 참여한 20대, 30대 청년들도 곧 70대, 80대 노인이 될 겁니다. 그리고 죽을 겁니다. 이걸 전제하면 세상이 어둠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둠과 죽음은 극복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은 죽음과 전혀 상관없이 작동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21세의 문화, 사회현상이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가상공간을 현실로 여기고 삽니다. 그런 가상공간은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무한 발전만 있습니다. 스마트폰 게임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무한한 재미를 제공합니다. 이런 기술과 문화에 지배받는 사람들의 의식에는 어둠과 죽음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듣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느낍니다. 세상에서 낙오가 되지만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든지 재미있고 유쾌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이런 현상이 인류에게 행복일까요? 아닙니다. 그건 불행입니다. 이런 생각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사람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어둠을 외면하면, 즉 어둠을 어둠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빛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만 계속 붙들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모르긴 해도 앞으로 후손들은 스마트폰을 하나님으로 믿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큰 착각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의 실존을 어둠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빛을 찾게 됩니다. 중세기 유럽 사람들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죄기도를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죄기도는 자신이 죄의 지배에 놓여 있다는 인간 실존에 대한 준엄한 통찰이자 고백입니다. 요즘 크게 사회 문제라 된 구원파 유의 기독교인들은 그걸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사죄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수준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과거의 죄만이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구원을 실증적으로(포지티브) 이해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잘못입니다. 기독교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존에 놓인 어둠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의 빛에 민감하게 됩니다.

일전에 대구샘터교회 아무개 집사님이 경험한 일화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포항 어느 깊은 숲에 있는 작은 집에서 혼자 며칠을 지냈습니다. 밤에 자리에 눕자 세상과의 단절,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사실 앞에서 공포가 밀려왔다고 합니다. 식은땀까지 흘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둠이 걷히기도 전인 새벽, 그러니까 아주 희미한 정도의 빛이 나타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에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둠을 경험했기에 빛에 민감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기자는 단순히 빛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기이한’ 빛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은 개역개정의 기이한이라는 형용사를 ‘놀라운’이라고 번역했는데, 좀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번역입니다. 마틴 루터는 그 단어를 ‘wunderbar’라고 번역했습니다. 독일어 분더바는 놀랍다는 뜻입니다. 그 단어의 어근은 기적이라는 뜻으로도 번역이 되는 Wunder입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그 빛은 기이하고, 놀랍고, 기적과 같은 경이로운 빛입니다. 이런 빛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도대체 놀라운 빛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것을 아는 게 기독교 영성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자신들은 왜 그런 경험이 없는지 혼란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호렙 산에서 불이 붙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 현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 안에서 스랍(천사)들의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하는 합창소리를 들었습니다. 신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각각 천사의 방문을 받고, 동거하기 전이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던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걸 보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빛으로, 또는 소리로 경험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은 이런 경험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뭔가를 직접 보거나 들었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귀신을 본 것처럼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로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성모 마리아 현현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이런 사건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지금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특수한 경험을 제가 다 아는 게 아니기도 하고, 그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가 아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런 여러 이야기들을 나열한 이유는 이런 현상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서 결국 오늘 본문과 성서가 말하는 놀라운 빛이라는 표현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빛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생명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은 빛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옛날부터 생명의 근원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은 빛의 근원인 태양을 신처럼 섬겼습니다. 모든 종교는 빛을 구원의 능력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빛과 그 빛의 근원인 태양 자체를 믿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생명은 태양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빛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구약성서를 우리에게 전해준 유대인들과 우리의 생각이 같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빛이 바로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인들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요한복음도 분명하게 말했듯이 초기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빛이,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놀라운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들이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놀라운 빛인지를, 즉 생명의 근원인지를 더 알고 싶은 분이 계신가요? 제 설교의 모든 것은 이 질문에 대한 해명입니다. 이것 외에는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 말고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미 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씀드렸고, 앞으로도 반복해서 말씀드릴 겁니다. 이건 몇 번 들어서 아는 게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도 들어도 부족할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알아도 그 세계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못할 겁니다. 수행하듯이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놀라운 빛이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놀라운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서 유일하게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니, 그리고 말씀(로고스)이 육신을 입은 사건이니 어찌 새롭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종말에 완성될, 또는 종말에 시작될 부활생명이 그에게서 선취되었으니 어찌 천지개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구원생명은 당시의 시대정신인 로마 황제가 줄 수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 제공하는 것과도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의 완성은 우리가 여전히 기다려야 할 그런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참된 생명의 놀라운 빛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베드로전서의 가르침을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 안으로 끌어들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또 믿으시지요? 이제 우리는 세상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 본문이 말하듯이 하나님이 행하신 그 귀하신 일을 선포해야 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선포는 어둠에서 빛 안으로 들어온 사람으로, 그리고 그런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여러분의 영적 분량에 따라서 성령께서 알려주실 테니, 마음을 열고 기다려보십시오.

 

 

 

 

 

축복 받은 자들

베드로전서 2:4-10 / 윤경문 목사,

요즘, 어른들과 어린이들 간에 세대차이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 서로가 의사소통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대차이’란 제목의 이런 이야기입니다.

[나쁜 짓을 한 아들이 아버지 앞에 서있습니다. “너를 잘못 키운 나의 잘못이다.” 아빠는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때립니다.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흑흑 거리고 웁니다). 흑흑흑.”

20년후, 그 아들이 커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도 똑같이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아들의 앞에서 자신의 종아리를 내리쳤습니다. “아들아, 이 아빠가 너를 잘못 키워서 미안하구나.”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들은 놀란 듯 뛰쳐나갔다. “엄마! 엄마! 큰일날어요. 아빠가 미쳤나봐요. “

더이상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들에겐 통하지 않는, 먹히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반면, 입장을 바꿔어 놓고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어른들에게 통하지 않을까요? 어쩜 어린이들 쪽이서도 더 답답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때문에요. 요즘 어른들과 어린이들 사이에 이 세대차이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Inside-out]이란 어린이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어린이영화인데요, 어른들도 보면 울고 나온다고 합니다. 이 영화가, 어른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유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라일리가 아빠가 직장을 멀리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가게되어, 새로운 곳에서 갑작스러운 환경변화를 겪게되면서, 느끼게 된 슬픔이란 감정이 생겨나자 내적혼란을 겪습니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것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린이의 마음의 슬픔을 생생하게 그려 내보여주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어른들도 어린시절 한번은 겪어본 아픔이 배어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Inside-out, “마음에 깊숙히 숨겨져 있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간은 감정”을 밖으로 내보여줌으로써 많은 이들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린이들의 내적인 감정을 이렇게 빤히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힘든일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과 부모들과의 이해 소통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특히,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많은 이미 가정과 교회에서도 어린이들과 어른들의 의사소통과 공감은 더 큰 과제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사역하셨던 이영지교수가 이민 가정에서 어떻게 세대차를 좁혀가고, 이해와소통을 해날갈 수 있을까 관심하며 [Cultural tug of War, 세대간 격차 줄이기]라는 책을 냈습니다. 미국에 사는 많은 한인 2세들을 인터뷰하셨는데, 부모들과 자녀들이 세대차뿐만 아니라, 가정과 학교에서 여러 문화를 줄다리기하며 살아야하는 이곳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 청소년들의 고충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어려워하는 모습과 함께요. 그분은 세대차를 좁혀주는 것으로, 결국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네는 의사소통”이 언어나 문화의 장벽을 초월한다”라고 말합니다. 교우여러분, 세대간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네는 의사소통”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쩔수없이 존재하는 세대차이, 문화차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마음과 마음올 어린이들과 더 깊이 소통하며, 그들의 아픔도 헤아리며, 하나님의 자녀들로 자라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자녀로 이 땅에 필요한 자들로 세워갈 수 있을까요?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으면서 한번쯤은 함께 생각해봐야 할 질문일줄 압니다.

오늘 베드로전서 2장 말씀은 1세기 크리스챤들을 향하여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크리스챤들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관한 정체성을 잘 알려주는 말씀이죠.

베드로전서 첫장에 보면, 이 편지가 소아시아지역에 흩여저 살고 있는 예수를 믿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를 향해 쓰이진것을 알수 있습니다. 1장 1절에 보시면, “본도,갈라디아, 갑바도니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써있습니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 땅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지금 터어키 지역인데, 여기 아시아란 우리들이 지금 아는 아시아가 아니라, 소아시아라고 불리우는 지역입니다

 

 

당시 이방인 지역이었던 이곳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선교를 통해 이 지역에 많은 크리스챤들 교회들이 세워졌었죠. 그런데, 베드로전서에서 그곳 크리스챤들을 향해서 좀 독특한 표현으로,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영어 ‘diaspora’란 개념이 담긴 말인데요, 원래 이 ‘디아스포라’란 말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지역을 넘어 흩어져 살게된 자들과 공동체를 일컬은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가지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본토를 떠나서 다른곳에 퍼져 살아야만했던 자들을 의미했죠)

그러나, 후에는 모든 ‘흩어져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여러가지 이유로 세계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일컬는 말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요즘처럼 global시대에는 디아스포라란-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가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에 첫절에서 크리스챤들을 향해서 디아스포라란뜻의 ,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그 공동체를 일컬어 이렇게 “나그네”라고 표현하시는데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나그네’는 그냥 나그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택하심을 있는 자들요,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서 ‘구별된’자로, 나그네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겐 좀 낯설지만, 초대교회에서는 교회의 특징중 하나로 ‘나그네’, ‘외인’ 등의 표현이 흔희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흩어져 살고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구별된 자로써, 특별한 소명을 가진 자들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에 따르면, 그들은, 살아있는 돌, Living stone이신 예수에게 나아온 자들이고,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 신령한 집(spiritual house)에서 자라나고, 하나님과 연결된 자들입니다. 그뿐 아니죠, 이들은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참, 가슴 퍽찬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다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이요. 그런데, 어째서 이들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르고 계실까요?

유대인던지, 이방인이던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믿고, 그의 말씀의 순종하는 자들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르고 계신데,. 9절 말씀에서는 좀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여기선, 그냥 제사장도 아니라, “왕같은 제사장”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왕같은 제사장” (Royal Priethood)란 용어는 사실 우리에게 얻뜻 이해하기 쉽지 않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유대인들에게는 다윗왕족과 연결된 제사장을 의미했지만,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는 좀 다른 의미로 쓰였습니다. 왕이신 예수님, 그분과 연결된 자들은 왕되신 예수님과 한 가족,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와 연결된 자로써, 제사장처럼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 제사장이란 직분을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재하는자, ‘다리는 놓아 주는 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다리를 놓아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이어주는 자들, 그런자들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서의 제사장으로 부름받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베드로전서에서 크리스챤들을 일컽는 이 말, “너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란 표현은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전과는 아주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주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리움을 받고 있는 소아시아의 디아스포라, 1세기 크리스챤들은 자신들을 새롭게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더불어,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자신들이 해야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면서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택하시고 제사장들로 세우신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9절 후반부에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들을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들은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셧던 것이죠.

 

디아스포라들의 선교적 역할에 관심하신 Luther Kim이란 분은 이 디아스포라를 “하나님의 씨앗”(The seed of God)으로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의해 선택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로 여러 필드에 펼쳐진 씨앗들이라고 보십니다. 사실, 이런 뜻에서 우리 모두는 디아스포라, 하나님의 씨앗들로, 세계 방방 곳곳에 펼쳐나가 살며,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1세기 소아시아의 크리스챤들처럼, 세계곳곳으로 흩어진 나그네들과 같은 자들이지만, 왕같은 제사장들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오늘 디아스포라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과 더불어, 여러분들의 가정의 자녀들, 우리교회에서 자라는 자녀들 모두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씨앗’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정말로 지녀야 할 자기 정체성은 오늘 이 말씀에서 찾아질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하나님 앞에서 택함을 받은, 왕같은 제자장들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모습에서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이세상 곳곳에 흩뿌려진 씨앗들이라고 볼때, 그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안에서 세워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어린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축복 받은 자들입니다., .

(세상에 흩뿌려진 하나님의 씨앗,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오늘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운덕을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도 이 세상에 왕같은 제사장들을 필요로 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

오늘 읽는 2장 9절 말씀은 사실, 500년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때 외쳤던 ‘만인제사장설’의 근거가 되었던 성경말씀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들’로 부름 받앗기에, 각자 부르심에 합당한 자신들의 직업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직업이 무엇이던간에, 그 일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고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서 사랑과 공의를 펼치며, 이들을 사랑으로 연결시켜주고 있다면 모두가 부름받은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게서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자들로 삼으시지 않겠습니까?이 세상에 가장 하나님의 손길과 사랑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서,죄와 얽메임에 있는 자들을 자유케하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마음상한 자들을 위로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일들을 위해 귀하여 쓰여지는 자들을 필요로 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 어린이들이 그런 귀한 하나님의 쓰임받는 자들이 되려면 먼저 자신들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요, 거룩한 왕같은 제사장들이 된자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그 중요한 사실을 알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 교회에서 그들이 듣게 되는 주님의 말씀, 예배 가운데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런 사실을 깨달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두 부름받은 자들, 교회 공동체서는 만나는 많은어른분들의 기도와 사랑어린 눈빛, 축복하는 말과 손길들을 통해서 그들은 마치 대가족안에서처럼, 축복받으면 자라날때 자신들이 누군인지 알아가지 않을까요? 그럴 때, 여러분들의 가정과 교회에서 어른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고, 축복을 받을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참 모습인 왕같은 제사장들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깨달게 되지 않을까요?

어떤 세대차이나 문화차이도 넘어서는 강력한 파우워를 가진 그리스도의 사랑, 말씀을 배우면서요.

 

목회자들 모임에서 한인 2세 사역자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깊은 대화들을 나누다보면 늘 어린 시절 그들이 겪었던 문화차이로 인해 힘들었던 고충들을 털어놓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어린 시절 고민 중 하나는 어디에서도 자기가 완전히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속할 곳이 아무 곳도 없는 것 같은, “out of place”의 느낌입니다. 다른 인종들이 주류인 학교에서 소속감, 자기들의 자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교회에서 비로서 자신들이 속한 자리, 가정과 같은 home을 느낌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감을 찾아갈 수 있었다는 사람들을 봅니다.

 

배아람(Aram Bae)란 2세 친구는 “Home Sweet Diaspora Home”이란 글에서 이렇게 어린 시절을 고백합니다. “High school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나, 교회는 저에게 사춘기를 견디게 해주었어요. 리치몬드에서 고등학교에서 얼마 안되는 아시안 학생으로 minority였지만, 교회에서는 달랐어요. 학교에서 저는 ‘nobody’였지만, 교회에서 저는 ‘somebody’였어요….교회 공동체는 제가 영적으로, 감성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곳이었고, 저의 아이덴티티를 갖게 해준 곳이었어요…어린 시절 제가 다니던 한국교회는 정말로 저에게 home, 따뜻한 가정이었지요.” 이분에겐, 교회가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고, 양육 받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억을 안고 다시 교회로 돌아 왔을 때, 따뜻한 가정에 돌아온 느낌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다시 한번 이곳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소리를 귀 기울이며, 그들의 고충도 헤아리며, 서로가 소통하며, 공감해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며, 그 마음을 헤아리면서요.

 

이렇게, 자신들의 소리를 들어주고, 축복해 주는 이들을 만날 때, 우리 교회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nobody’가 아니라, ‘somebody’임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고, 왕 같은 제사장들로 쓰여질 자 들임을 알아 갈 것입니다. 자신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하나님 백성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분의 보혈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찾아가 수 있을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린이들을 만나시고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축복하신다면, 그들이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고, 여러분들의 마음과 그들의 마음이 연결되어 가지 않겠습니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이런 축복을 받고 자는 우리 어린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자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받는 자들로 세우시고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3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로서, 어린이들을 향해 갖고 있는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사도바울과 마틴 루터킹, 그리고 윤동주 시인과 같은 크리스챤, 민족과 세계를 품어안는 하나님의 귀한 쓰임받는 인물들로 자라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세분 모두, 고향을 떠나 디아스포라로써 다른 곳에 흩어져 살았던 가정들의 자녀였고, 신앙의 가정,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난 자들이었습니다. 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받는 자들이 되어간 인물들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하고, 교우님들의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고 자라난다면, 자라난 아이들 안에서도 이런 인물들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3세대가 함께하는 쉐마의 밤을 통해서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축복하곤 합니다.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 되어가길 바라면서요.

그런데, 만일, 여러분들이 오늘 이런 말로 그들을 축복한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요?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사랑하는 교우여려분,

우리 모든가 이 땅에 어린이를 향해서,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을 이어주어 왕같은 제사장들이 되어, 회복과 치유를 가져오는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바라며, 모든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 백성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 모두 우리 교회의 어린이들, 이 땅에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 모두 어린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축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이런 축복을 가정에서, 교회에서 받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 왕같은 제사장들이 되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자들로 삼아가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이어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귀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실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 될, 우리의 어린이들을 위해 마음과 마음으로, 말로, 사랑으로 축복하십시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의 실제 의미는 무엇인가?

벧전 2:4-10 / 정병진목사

루터가 주장했던 "만인제사장설"은 원래 어떤 의미였을까? 그런데 그의 주장은 오늘날 상당부분 왜곡되어 전달되고 있다. 왜냐하면 루터의 이 주장을 "모든 사람은 다 제사장이다"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주장을 하려고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일반 평신도들이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죄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치고 전하는 로마카톨릭의 중보론이 틀렸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들고나온 것이다. 루터는 예수께서 속죄제사를 드린 이후에는 구약시대 레위인이나 제사장 같은 중보자격인 존재가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이신 예수님 이외에 그 어떤 중보자가 끼어들어와서도 아니되고 그런 존재가 없어졌기에 모든 성도들은 자기 스스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만일제사장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왜곡은 심해갔고 그러자 그는 처음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들이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데 이러한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더욱이 오늘날 일반 성도들의 직무는 구약시대 어떤 직무를 수행했던 자를 계승발전시킨 것이며, 목회자는 구약시대 어떤 직무를 수행했던 자를 계승 발전시킨 것인가? 오늘은 그것을 찾아보자.

 

1. 들어가며

 

오늘날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만인제사장설"에 대해서 아마도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말하기를,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성취한 이후에는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 되었다고 했으니, 이제는 더이상 목회자라는 직분이 필요없게 되었구나.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고 누구든지 성경을 해석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더욱이 더이상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필요없게 되었으니 굳이 평신도들이 목회자의 말에 순종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루터의 가장 염려했던 "만인제사장절"의 오해 중의 오해다. 루터는 이러한 의미로 "만인제사장설"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루터가 어떻게 되어서 만인제사장절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오늘날 성경이 가르쳐주는 성도들과 목회자의 직분과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루터가 말했던 만인제사장설의 핵심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이유는 로마교황의 면죄부판매였다. 면죄부판매는 사제 계급이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이용하여 일반성도들을 우롱한 대단한 잘못된 처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사제들은 오직 사제에게만 사죄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악용하여, 돈을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면죄부를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는 정말 사제에게만 사죄권이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사제계급(신부,주교,추기경,교황)에게만 사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회개 기도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요일1:9). 그래서 루터는 예수님 이외에 더이상 중보자는 필요없으며, 모든 성도들은 누구라도 사제라는 직분자 없이 즉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만인제사장설"인 것이다. 고로 만인제사장설이란 모든 믿는 자들이 제사장들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가 1520년 독일어로 펴낸 논재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에서도 그는 평신도가 제사장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평신도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사제의 도움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서 "만인제사장설"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모든 믿는 자는 대제사장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 이제는 더이상 사제계급의 중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에 관한 것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일 때문에 특수한 지위과 권위를 가진 사제집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성경은 목회자라는 직분을 인정하나 그것은 직무상의 직책일 뿐이라는 것이다.

 

3.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어떻게 왜곡되어 전달되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루터의 만인제사장절을 오해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루터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숙지하지 않은 채 글자만 보고 그렇게 판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사제와 같은 중보자 계급없이 모든 믿는 자들은 다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의 만인제사장설이 아니라, 만인이 다 제사장이구나라고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명칭만을 제대로 보았더라도, 그러한 오해는 불러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이 독일어로 "Priestertum aller Glabigen"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해보면, "Priesthood of all Believers(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모든 믿는 자들이 제사장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은 제사장적으서의 위치와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부 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대속물로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온 인류의 속죄제사를 드리셨다. 그러므로 더이상 드릴 속죄제물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구약의 제사장처럼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게 기도하고 죄의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루터의 만인제사장의 취지였고 그가 사용한 "만인제사장설"에 대한 해석이다.

 

4. 1524~25년 이후 루터는 왜 자신의 주장을 대폭 수정해야만 했는가?

 

하지만 듣는 자들은 그렇게 듣지 않았다. 자기 생각대로 들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1524년 토마스 뮌쳐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들고서 나왔다. 사제직이고 뭐고 다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또한 1525년에는 노동자들이 농민운동을 일으켜 지주계급을 싹슬이 청소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자기 위에 있는 권위자들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어딘가에서부터 잘못 전달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의 말했던 과거의 주장을 수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것이다.

첫째, 사제들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도 다 교리를 제대로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1525년 이후에는 일반성도들은 기독교교리를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왜나하면 일반성도는 교리적으로 무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회중이 목사를 세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1525년 이후에는 일반 성도는 다른 성도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바꿔버렸다. 그리고 셋째, 목사의 부재시에는 회중 가운데서 한 사람이 설교할 수도 있다고 했으나, 1525년 이후에는 공적으로 임명된 설교자만 설교할 수 있으며,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한 일반성도 때문에 영적으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잘못 설교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교정했다. 그렇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생각대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조금 있으면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버리는 것이다. 루터는 그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루터는 1525년이후 자신의 주장을 대폭 수정하게 된 것이다.

 

5. 루터가 말한 사제직이란 어떤 직분을 가리키는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루터가 주장했던 사제직이란 어떤 직분을 가리키는 것인가? 루터가 말한 사제직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의 권리를 남용하여 일반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라고 주신 직책이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사제직이란 하나님께서 섬기라고 주신 직책이지, 결코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라고 주신 직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들은 당시 일반 평신도 위에서 무소불휘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으니, 고해성사를 하는 평신도들의 죄를 자기들이 사해주지 아니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면죄부를 비싼 값에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성경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아놓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방식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놓고는 그것만이 절대적인 해석인 듯이 말했다. 그러자 루터가 그것을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성경에 무슨 내용이 쓰여있는지 몰라서, 사제들의 헛된 해석에 더이상 성도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는 즉시 헬라어원문에서 자기나라의 언어인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데 착수했다. 모든 평신도들의 손에 성경책을 들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성령으로 뜻을 헤아려 바른 진리를 따라가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제들의 엉터리 성경해석에 더이상 미혹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A.D.1534년 드디어 독일어판 성경을 제작하여 출간하게 되니, 그것은 위클리프영어성경(A.D.1382년) 이후 최초로 라틴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로 성경이 번역된 것이다.

 

6. 성경적인 일반 성도의 제사장직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벧전2:4의 말씀과 벧전2:9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먼저, 그 본문을 살펴보자.

벧전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선, 이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라는 용어는 "제사장(히에류스= priest)"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제사장직(히에라튜마=priesthood)"이라는 단어다. 다시 말해, 성도들이 다 제사장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이제는 제사장의 직무를 다 수행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이제 성도들은 누구든지 구약의 제사장처럼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느 누구도 중간에 끼어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7. 보다 더 성경적인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보다 더 정확한 성경적인 해석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레위인들의 직무를 이어받는 자이며, 신약의 목회자들은 구약의 레위인들 중에 제사장의 직무를 이어받은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레위인들의 직무는 회막에서 봉사하고, 제사장을 도와주며, 일반 백성들이 죄있는 상태로 함부로 성막에 접근하지 못하고 중간에 텐트를 치고 막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막이 교회를 상징하고, 제사장은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을 상징하며, 일반백성들은 죄인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면, 오늘날 레위인인 일반성도들은 교회를 위하여 일하고, 목회자를 도와 협력하며, 죄인들을 주님께로 잘 인도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레위인들 중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구약시대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졌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에서도 일반 성도들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목회자가 되어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이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년간의 인턴쉽 과정을 밟아,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목회자가 되려면 적어도 수년간의 신학공부와 성경지식을 쌓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자들이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처럼, 예배를 집례하고(성만찬과 세례식 포함)(번제단에서 5대 제사를 지냄), 성도들을 성령충만하게 인도하고(일곱금촛대에 붉을 밝히고 기름을 보충함), 중보기도하며(향단에 향을 사름), 매주일 새로운 설교말씀으로 성도들을 섬겨야 하는 것(안식일마다 떡상에 떡을 진설함)이다.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며(율법교육), 심방하여 성도들의 가정과 직장과 자녀를 축복하고(축복선언), 잘못된 이단으로 빠지게 되면 훈계하며 치리하는 일(재판)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들어와서 모든 성도들도 다른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으며, 약한 자들과 불신자들을 섬기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제사장의 직임을 이어받는 목회자들은 목회자의 직무로서 다른 성도들을 섬기고 있는 것이지 다른 성도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결코아니다.

 

8. 나오며

 

오늘날 루터가 그때의 상황보다 더 나은 지금의 상황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는 아마도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했을 것이 아니라 아마도 "만인레위인설"을 주장했으리라고 짐작해본다. 괜히 만인제사장설이라는 주장을 했다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나머지, 1525년이후 다시 자신의 가르침을 대폭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행착오를 다시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에는 단어 하나에도 이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는 만인제사장설이라는 것이 원래는 모든 사람이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었으며, 제사장과 같은 직분이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직분인 것이지 군림하기 위한 직분이 아니었다는 루터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면서, 성경적인 직분론을 바탕으로 자기 위치에서 질서 가운데 충성하여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출 19:1-6; 벧전 2:4-10; 마 16:13-20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1. 목회자는 성경을 무시하고, 교인들은 성경에 무지하다!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 2020)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전 백석대 신대원 교수인 류호준 교수의 책입니다. 이 책에서 류호준 교수는 오늘날 교회의 핵심적인 문제에 관해 이렇게 지적합니다. “목회자는 성경을 무시하고, 교인들은 성경에 무지하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한국교회에 온갖 문제가 생겼다!” 그렇습니다. 보수적인 교회들은 성경 자체(문자 자체)를 우상화하여 ‘성경 우상주의자’가 되었고, 진보적인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중시합니다. 또한 신학교와 교수들은 단지, ‘(서양)신학 지식 소매상’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러한 무지와 무시 속에서 성경의 본질은 희석되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기에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목회자와 말씀에 무지하기에 맘몬을 추구하는 중직자들이 이끄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말씀에는 무지하지만, 싸움에는 유능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에는 무관심하지만 자기 이익에는 밝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신앙 적폐 목록을 류호준 교수는 이렇게 나열합니다. “자기중심적 신앙, 종교적 열정 강조, 구원의 사회성에 대한 무지와 외면, 무차별적 고소·고발,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도덕성, 기업화된 교회, 시대착오적 성경해석 등등….”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요? 류호준 교수의 말입니다. “종교개혁의 후예라면 성경을 무엇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말씀을 무겁게 여기며 매일 그리스도와 죽고 사는 일에 천착한다면, 한국교회에 실천적 무신론자나 ‘카더라 신앙생활’ 성도가 없어질 것이다.”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입니다. 그 근본은 성경입니다. 류호준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처럼 닮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말씀대로 빚어진다면 우리 사회에서 극단주의나 근본주의 구호를 외치는 그리스도인, 무례한 기독교인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목사에 관해서도 류호준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는 죽음과 삶, 이생과 사후, 시간과 영원, 비참과 구원, 심판과 회복 사이에 서서 그 다리를 이어 주고 건네주는 사람입니다. 달리 말해, 이쪽에 있으면서 저쪽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본향을 사모하도록 자극하고, 삶의 충만한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도록 도와주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가 목사이며 설교자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이 제사장(오늘로 치면 목회자)에 관한 말씀이라, 목회자에 관한 류호준 교수의 말을 한 구절 더 인용해 볼까요? “목회자가 교인들을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거나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는 종교적 사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에 불과할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영적 부담감, 다시 말해 하나님의 값진 구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없는 사역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목회자가, 제사장의 나라로 부름 받은 교회가, 또한 천국의 열쇠를 받은 교인들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면 한국 교회는 물론 한국 사회 전체가 불행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의 나라로 부르시고(구약),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으로 선택하시는 말씀입니다(서신서).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어서 그들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복음서)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2. 제사장 나라가 되며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지 삼 개월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하였고 그 이후, 모세가 시내산을 등정하여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출 19:1-3)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 땅에서 히브리(떠돌이)로 살았던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4-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을 선민(혹은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여 세계만방에 ‘제사장 나라(a kingdom of priests)’로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제사장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통박사로 유명한 조병호 목사의 『제사장 나라 하나님 나라』 (통독원, 2014)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병호 목사는 제사장의 나라에 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레위 지파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12지파 사이에서 제사장 지파로서 복의 통로가 되었듯이,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과 세상 모든 나라 사이에서 복의 통로 역할을 하는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하여금 세우고자 하신 제사장 나라는 온 세상 사람들과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람 사랑 프로젝트였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의 ‘사람-사랑-프로젝트’라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키워드가 ‘제사장 나라’라면, 신약의 키워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서로 상충하는 다른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다시금 새롭게 세우신 나라가 제사장 나라를 함축하는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사장 나라의 ‘제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지 알 수 없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안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병호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는 나라였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나아가 조병호 목사는 교회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안에 예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사는 사람, 그래서 내 몸이 거룩한 성전,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이끄는 동력인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이 바로 그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의무에 대해 개인생활과 사회생활로 구분하여 권면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 모두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조병호 목사도 『제사장 나라 하나님 나라』 마지막 40장 ‘왜 예수님으로 튜닝(tuning)되어야 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있으나마나 하는 존재인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 튜닝되면 그들도 ‘세상의 빛’이 되고,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는 숨길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성전, 곧 교회로 만들고, 또한 동시에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을 숨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

하나님의 예정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넘어지는 자를 미리 정하셨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여 부딪치고 걸려 넘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음으로 이들 역시 다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하나님께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더 이상 ‘노예 오네시모’가 아니라, ‘형제 오네시모’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합니다(몬 1:16).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노예이지만, 믿는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보면 형제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소중하며, 그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다 같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오늘 본문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출 19:5a)”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요 3:16)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그렇습니다. 제사장 나라이자 거룩한 제사장인 우리들은 주께서 주신 사명을 이 땅에서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도 복이 쌓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말씀을 보면 이러한 축복을 받기 전에 먼저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 본문 말씀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제자들에게 묻는 장면입니다.

피에트로 페루지노, <천국의 열쇠를 받은 그리스도>(1482)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15)

그러자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따라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7-18)

그렇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세주, 구원자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세워졌고, 제사장의 나라가 확립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까지는 제자들에게 비밀로 주어졌습니다. 20절 마지막 절 말씀이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 16:20).” 이번 주 수요일은 사순절(Lent)이 시작되는 ‘성회수요일(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입니다. 따라서 다음 주는 사순절 첫째주일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현절기 동안 펼치신 하나님의 사역을 본받고, 또 사순절을 기념하며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비밀을 아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의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고백합니다.

 

5.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전에는 제사장의 나라가 아니었다면, 또 전에는 거룩한 제사장이 아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인 거룩한 성전을 통하여, 또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류호준 교수는 교회가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부단히 세상의 경계를 넘어 약자를 찾아가고 이들을 섬겼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도 약한 이를 보살피는 환대의 정신을 갖추자.” 그렇습니다. 이것이 택하신 족속의 사명이고 왕같은 제사장의 직분이며 거룩한 나라의 마땅히 행할 바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할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인용합니다. 류호준 교수의 고백에서 기독교 신앙의 참 뜻을 깨닫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분위기 안에 ‘은혜로 가득한 환대’를 불어넣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환대를 통해서 기쁨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마치 철철 넘쳐흐르는 물 대접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 입니다. 흘러내리는 눈물 속의 포옹, 숨 막히는 기쁨,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깨에 들쳐 메고 외치는 기쁨의 소리,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손들…. 우리가 은혜로 가득한 환대를 베풀 때, 우리는 환대받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우리 교회가 환대의 공동체가 되고, 또한 우리를 통하여 환대받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거룩하라

벧전 2:4-10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4-5).

 

1.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산 돌로 신령한 집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가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분은 우리 피조물과 다른 영광 가운데 거하심을 의미합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딤전 6:15-16). 거룩하신 하나님을 죄인이미 피조물인 우리가 볼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우리를 예수 안에서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산 돌이시고 그와 연합하여 죽고 다시 산 우리가 또한 산 돌입니다. 이제 예수님와 하나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리고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이제 우리는 날마다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축복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부와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늘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날마다 이 특권을 향유하십시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사랑과 축복을 경험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의 삶 전체에 가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거룩한 집,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2. 거룩한 삶을 사십시오.

 

거룩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윤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는 자가 거룩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날마다 뵈옵는 자는 예수의 피로 씻음 받고 성결한 삶을 살게 됩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자처럼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하셨느니라”(벧전 1:14-16).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 우리가 살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님처럼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고 그분의 형상을 닮아 변화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자만이 진정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으로 죄를 이길 수 없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체질을 바꾸십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4). 은혜 아래 있기에 죄에서 벗어나 자유케 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하라’는 명령은 단지 명령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경험적인 사실, 즉 여전히 넘어지고 실패하는 자신으로 인해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때는 겸손히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담대히 주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은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며 욕심으로 살 자들이 아니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의 거룩한 뜻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고귀한 목표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삶의 전체 안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이뤄질 것을 기대하며 추구하십시오.

 

3. 버림받은 예수를 따르십시오(벧전 2:4-5).

 

우리의 목표는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거룩한 삶을 사신 예수를 따르는 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세상과 함께 세상을 추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세상 욕심을 못 박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딤후 4:3-5). 버림을 받고 고난을 받는 이유는 세상의 길과 다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그리스도인의 길은 인간적으로 보아 어리석은 길이고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사람들로부터의 소외는 고통스럽지만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향해 이렇게 비난합니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 11:17)”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에 함께 할 수 없고,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에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고 세상에서 벗어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미움과 거부는 우리의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소외는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표지입니다.

 

이제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깊은 욕구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추구는 세상에서의 인정과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9). 이미 족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거부는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선택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어둠과 빛이 조화되고 어울릴 수 없습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어울리지 않는 것, 갈등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상에서 거치는 것이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이고 우리의 삶입니다. “또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8). 이제 오직 버림 받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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