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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11214 / 벧전 2:18-25 / 고용주에 대하여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12.23|조회수668 목록 댓글 0

고용주에 대하여

벧전 2:18-2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전 2:18-25 / [그리스도의 고난] 하인들이여, 주인을 존경하고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하십시오. 친절하고 사리판단이 명확한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잔인하고 난폭한 주인에게도 복종하십시오. 19) 만일 여러분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벌을 받았거든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여러분이 악한 일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다면 그것을 참아낸다고 무슨 상이 내리겠습니까? 옳은 일을 한 것 때문에 벌을 받고도 말없이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 운 일입니다. 21)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아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22) ㄱ)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짓거나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ㄱ. 70인역 사53:9) 23) 욕을 당해도 욕하시지 않고 고난을 받아도 보복하시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리고 몸소 ㄴ)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떠나서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신 대신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길 잃은 양처럼 헤매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적이 공격해 와도 여러분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 주서는 감독자와 목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사회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한계 속에서 그리스도인 종들이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고난을 참으면 그것이 바로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18-20) 사환은 헬라나 로마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가정 내의 종들을 말합니다. 지위상 사환들은 삶을 꾸려가기가 매우 어려운 이들이었습니다. 선한 주인 아래 있는 사환의 경우 삶이 열악하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주인으로부터 종종 부당한 취급을 받곤 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으며 참는 것은 덕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은 불친절한 주인의 거친 대우조차도 용납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21) 선을 행했는데도 고난 받고 또 그것을 견디고 있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본이라는 말은 학생이 윤곽선을 따라 그리는 것, 혹은 원본과 똑같은 오류가 없는 필적으로 재생된 복사본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셨기 때문에 그분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 받을 만한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했음에도 고난을 당하고 또 그 고통을 참아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22-25) 베드로는 예수께서 고난 받는 동안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생생하게 떠올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들을 자신 위에 두시고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죄의 궁극적 결과인 영원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담당한 구세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기위해 우리의 목자이신 그분께 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시련과 역경을 만나든지 목자로서, 영혼의 감독으로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적용: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나 상하관계가 있습니다. 누구나 선한 상관에게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런 한계를 넘어 까다롭고 인내하기 어려운 상전에게도 순종하며 존중을 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영국의 수필가인 찰스 램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33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의 동료 콜리지, 로이드와 함께 시집을 내고 '런던'지에 글을 기고하는 등 끊임없이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직장 때문에 퇴근 후에나 글쓰기가 가능했기에 그는 늘 정년퇴직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마지막 출근을 하는 날, 글쓰기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찰스 램이 옛 동료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한가하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운지 몰랐습니다. 매일 할 일 없는 시간이 반복되고 많아지다 보니 어느새 자신을 학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도 삶이 바쁜 가운데서 떠오른다는 것을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이 말을 부디 가슴에 새겨 부디 바쁘고 보람 있는 나날을 보내기 바랍니다.“

 

< 설 교 >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베드로전서 2:18-25

오늘 2장 18절부터 25절은 노예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해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18절은 사환은 그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부당하게 받는 고난’으로 연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예제도는 사람을 소유물로 여기는 창조질서에 반하는 제도입니다. 그럼에도 노예가 그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는데, 그 이유가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18)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8a)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당시에 노예제도는 보편적인 제도 였습니다. 1세기에 로마 제국에는 6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노예는 집안의 종이나 육체노동자뿐 아니라 의사, 교사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노예는 세습되거나 돈으로 거래되며 주인의 물건 중 하나로 취급됩니다. 초기의 로마 법에 “노예는 아무런 권리가 없고 소지품일 뿐이며, 사실상 주인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노예는 물건 중 하나처럼 취급되었는데, 당시에 가난과 빈곤을 대처하는 거의 유일한 제도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과 가족을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지경에 처했을 때, 마지막 경제적 파산으로 자기를 노예로 팔았습니다. 고대에 노예제도는 이렇게 사회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지금 또한 창조질서와 맞지 않지만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제도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노예제도처럼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지는 않지만,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돈으로 사고팔며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씁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사회 병리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돈으로 사고파는 것은 사람을 물질에 속박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사환은 집에서 함께 지내는 ‘가속’ 혹은 ‘하인’을 가리킵니다. 일반 노예보다는 가족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종입니다. 주인은 소유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주인은 노예를 통제하는 권한이 있었고, 그 권한으로 종을 학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종은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18절 후반부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18b)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그 이유는 노예제도를 지지하거나 사회적 안정을 지키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나 순종을 말씀하실 때, 사랑과 순종을 받는 사람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인이 종을 학대하고 악하게 대하더라도 주인을 미워하거나 보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듯이 세상에서 의인이나 악인을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선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5:44). 또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며,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마5:44-47). 17절에서 ‘모든 이들을 존경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18절의 ‘사환들아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의 연장선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추상적인 감상이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 실천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는 부당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하는 것으로 적용됩니다. 맹목적적이고 기계적인 순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극악한 범죄자라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입니다. 부조리한 노예제도 속에서 부당하고 포학한 주인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다른 사람의 인격을 훼손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말 할 수 있어도,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는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의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육체적 생명을 넘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인격을 함부러 말하고 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악한 사람이라도 순종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19-21) 부당한 고난

(19~20)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을 참고 순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며, 그것을 눈여겨 보십니다. 19절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은 사환들이 까다로운 주인에게 부당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먼저, 부당하게 받는 고난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작동하지 않고 하나님도 없어지는 자신만의 임계치가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의 살아계심과 그의 다스림을 인식하고 그 앞에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노예제도라는 창조질서에 반하는 제도 속에서, 까다로운 주인으로부터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다스림을 잊지 않고, 참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답다’고 번역된 원어는 ‘카리스’인데, 은혜를 뜻하는 단어로, 문맥에 따라 ‘은혜를 입다’, 인정 혹은 칭찬을 받을 만하다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20절에서도 동일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부당한 고난을 참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이 주어지는 것으로 연결합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은 단순한 삶에서의 곤란과 어려움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당하는 곤란과 어려움이 다 칭찬을 받는 고난은 아닙니다. ‘죄가 있어서 매를 맞는 것’은 칭찬을 받는 고난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인한 고난은 칭찬을 받는다고 합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앞의 문맥에서 볼 때,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하며 참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사랑할만한지, 용서할만한지, 순종할만한지, 참아줄 만한지에 따라 행동합니다. 세상에서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을 용서하거나 순종할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우리는 부조리한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노예제도처럼 사람을 사고팔며 소유하지는 않지만, 사람 자체보다 사람의 쓸모를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부르신 목적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든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로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목적 중 하나는, 부당한 고난을 참음으로 세상 속에서 참 자유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어야 하지만, 참 자유는 노예제도 속에서도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며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종을 인격으로 대하는 것을 넘어, 악한 주인 또한 인격으로 존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본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불순종하고 거역한 우리로 인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불순종했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같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주인이 부당하더라도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부당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모함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우리를 위해 그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믿는 사람을 일컬어, 신자 성도 또 제자라고 합니다. 제자라고 하는 것은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쫓아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 또한 제자로 부르심 받았기에, 부당한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22-25)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오게 하시다

(22-23)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죄가 없으십니다. 이사야 53장 9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그는 그 부당한 사람들에게 맞대어 보복하거나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바다와 폭풍도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께서 자기를 모함해 죽이려는 자들에게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졌거나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가 고난을 받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고난으로도 구원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부당한 고난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당한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9)”

(24~25)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해 죽으심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했습니다. 즉,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에게 보복하거나 죄에 대해 응징하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용서와 사랑으로 참을 수 있게 됐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다”는 말은 세상의 불의과 부조리에 낙심하고 때로는 정의감으로 정죄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에 당황해하며 왜 이런 고난이 세상 가운데 있는지, 불의와 부조리함에 실망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 불의와 부조리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참을 이유와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셔서, 갈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사람을 비인격화하는 세상의 부조리한 제도의 존재 기반이 약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많은 것들이 어그러지고 빗나갔지만, 여전히 저희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겨주심에 감사합니다. 또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함을 당하셨어도, 참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임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 가운데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악에게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를 본받으라

벧전 2:18-25

서론

이 세상에서 모범으로 삼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모범으로 삼을만한 사람이 그리 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실망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삶을 재현하였기에 사도시대로부터 이제까지 그들을 흠모하고 모범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사도들도 역시 인간이었기에 완전한 모범자는 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았기에 예수님의 삶을 재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 있어서 성도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위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최종목표는 예수님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아무리 많이 봉사하여도 말릴 사람이 없으며, 아무리 희생하여도 말릴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예수님을 모를 때 마음대로 살고 마음대로 죄를 짓던 방향을 바꾸어서 아무리 거룩한 생활을 하여도 말릴 사람이 전혀 없으니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본받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본문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이셨던 모범이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말씀 하나하나를 살펴보면서 주님을 본받는 비결을 찾아봅시다.

 

1.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본받으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고난의 종류에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죄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당신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죄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죄를 지어도 때리시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된 후에는 죄를 지을 때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신앙생활이 깊어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징계의 방법도 더욱 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미움을 사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마음과 육체와 영혼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하여 회개하고 정결케되므로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할 때까지 고난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군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습

니다. 이스라엘의 국가조직이 튼튼해지고 전쟁에서는 승승장구하며 강성한 나라요, 모든 면에서 안정을 찾았을 때 그는 기도를 게을리 하였고 방심하다가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받기까지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육체적인 고난보다도 더 힘든 것은 정신적인 고난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하고난 후에 그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2)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성도에게도 애매한 고난이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참으면 이는 틘㎢芽鳴?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고난의 이유도 알지 못하고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은 인내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얻어 인내하여 마지막에 아름다운 결말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욥의 인내를 들어 우리의 모범을 삼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

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약 5:10~11)

애매한 고난은 당할 때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입니다. 죄로 인한 고난이라면 자기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서도 이정도의 고난도 "싸다 싸!" 하면서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을 위한 고난은 목적을 가지고 당하는 고난이며, 자기가 자원하는 고난이기에 아무리 힘들고 괴로와도 이길 수 있는 정신력이 있고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애매한 고난은 어디서 무엇때문에 그리고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끝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괴롭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자기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어지는데 다른 사람을 인하여 연대책임을 져야하는 경우 혹은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종류의 고난이 다가올 때에 실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내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담은 어떤 의미에서는 애매한 고난을 당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주므로 받아 먹었습니다. 물론 여자의 머리로서 여자를 잘 보호하고 간수하지 못한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담은 일심동체로 주신 하와를 버리느냐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느냐 고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애매한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3) 선을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선을 위한 고난은 예수님처럼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거나 돕기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선을 이루기 위하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선을 위한 고난은 적극적으로 받으라고 권하셨습니다. 또 선을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당할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고난을 당할 때 이길 힘을 주시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엔 업고 가 주시든지 고난을 피할 길을 준비하사 반드시 고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죄로 인한 고난은 회개하면 사라집니다. 애매한 고난은 인내하면 반드시 아름다운 결말을 볼 수 있습니다. 선을 위한 고난은 적극적으로 취해야 할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은 성도를 순수하게 만들며 열매를 맺게 하며 하늘의 상을 얻

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회개하고 인내하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2. 겸손과 희생과 봉사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1) 그의 행위에서:그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죄를 짓지 아니하셨습니다. 일평생 죄를 짓지 않으시고 선을 행하신 예수님은 성도의 삶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일평생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사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셨기에 죄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2) 그의 증언에서: 그 입에 궤사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짓이 없는 삶을 사심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인간은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 속임을 받아 타락한 이후 거짓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실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진실만을 말씀하셨고 진실한 삶을 사셨습다.

인간은 자기를 잘 보이려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거짓을 일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혀 밑에는 거짓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갈먹이고 할례를 받아 새롭게 지음을 받아야 참말을 하며 참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짓의 아비 마귀는 어찌하든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짓을 불어넣어 참이신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짓된 삶을 살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이 아닌 이 세상을 사랑하게 하고 안주하게 하려는 거짓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그의 태도에서: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23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역사는 보복정치의 연속이었고 오늘날까지 보복정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하므로 보복은 보복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보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고난당하시는 것이 삶의 목표였고, 낮아지시는 것이 목표였고, 희생하시고 봉사하시는 것이 목표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이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4) 그의 호소에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호소하셨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호소하셨다 함은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시는 삶을 사셨겠습니까?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하나님께 호소하셨겠습니까? 겸손한 삶을 사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맡기는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심사에서 아무도 거짓이나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원수들조차도 예수님에게서 죄와 실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거짓 증인을 세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정신과 마음을 본받고 예수님의 행동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봉사와 겸손을 본받아 예수님을 좇아사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요, 보람있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목표를 삼고 따라갈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시니 얼마나 행복한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를 잘 보이고 옳게 보이려고 또는 잘난척 하려고 남을 욕하고, 힘이 있으면 남을 위협하여 자기의 수하에 두고 다스리려고 하며, 기회만 주어지면 보복하려고

하며,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방법과 정반대의 방법대로 살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대로 살 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봉사하며 살고자 할 때 기쁨이 넘치고, 겸손할 때 마음이 평안하며, 죽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희생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며, 나누어 줄 때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1) 예수님의 전적 순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는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로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서 한 사

람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무조

건 죄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죄로 삼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의로 살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사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었으나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다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키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그의 능력으로 잃은 양을 찾고 계십니다. 자녀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이 편치 않으면 영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서라도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는 모습이 더욱 영광스러운 모습일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찾은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기쁨이 크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완전무결하며 영원불변하나 잃어버린 자녀들이 돌아

올 때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2) 우리도 예수님처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순종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던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예배의 형식보다 낫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자녀를 키워가면서 순종 잘 하는 자녀를 볼 때 부모의 마음의 기쁩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졌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고 그리스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결 론

주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발차취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본받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가 천국을 향하여 가는 발자취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요, 이 세상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정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찾아 그 뒤를 따르는 각오와 결심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목표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내일도 예수님을 본받는 성도가 되십시다.

 

 

 

 

십자가 정신

벧전 2:18-25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빠지면 타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를 타종교와 명확한 선을 긋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다가 변화되신 사건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합니다. 주님에게서 광채가 나고 주님의 옷은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들이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의 내용이 주님의 별세 즉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만큼 십자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쥐어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흐릅니다. 구약은 양의 피로 충만하고 신약은 예수님의 피로 충만합니다. 십자가가 성경 진리의 핵심입니다.

본문은 그 당시 주인의 학대 속에서 고통당하던 종들을 위로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종들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에 관한 내용을 끄집어내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말하면서 그 고난이 주는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들여다보며 십자가 정신을 생각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믿는 자들에게 본을 보이는 고난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모델이 되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의 본을 보여주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의 본을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 가기만 하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게 변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왜 너는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그 친구의 질문에 “만약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는 신앙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라고 했답니다. 간디 주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디에게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간디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하숙집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간디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하숙집 주인이 간디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셨다면 간디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인도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모택동 역시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기독교요, 다른 하나는 서구 문물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실망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빠져서 중국을 공산화 시켰다고 합니다. 그의 주변에도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과 관련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몇 그룹의 사람들로 나눠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룟 유다 그룹이 있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돈궤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어두워 노예의 몸값인 은 삼십에 선생을 판 자입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가룟 유다 그룹에 속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등지고 살지는 않습니까?

본디오 빌라도 그룹입니다. 빌라도는 세속적인 인기와 명예와 권세를 잃을 것이 두려워서 죄가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의 주를 못 박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이 그룹에 속합니다.

구레네 시몬 그룹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구경하다가 로마 병정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지고가는 십자가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때에는 재수 없는 일을 만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복이었습니다. 롬 16:13에 보면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사도 바울이 인정할 정도로 귀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레네 시몬의 12대 후손이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입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그룹입니다. 평안할 때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난의 현장에서는 주님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현장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고난은 회피하고 영광만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모든 일에 앞장서는 것 같으나 헌신의 자리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요한 그룹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현장도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이라도 드려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죽음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도요한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스스로 육체적인 고통을 선택한 분들이 있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이 토마스 아켐퍼스입니다. 그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내용은 주로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피하라는 것, 자신을 바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자신에 대한 계속적인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의 영향을 받고 「걸식교단(mendicant order)」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결식교단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란시스입니다.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라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말씀대로 제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이 집 저 집에서 걸식을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저는 프란시스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닮으려고 했던 열정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정도 직장도 재산도 버리고 걸식하며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해마다 예루살렘에서는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길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가장행렬을 합니다. 저는 가장행렬 정도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십자가 처형을 재현합니다. 이런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필리핀에서는 고난당할 사람을 선택해서 십자가에 실제로 못을 박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은 흠이 없는 청년으로 몸에 상처도 없어야 하고, 빚진 것도 없어야 합니다. 필리핀 천주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 청년의 생활을 평생 다 책임져줍니다. 이건 아닙니다. 주님을 본받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자취라는 말이 나오는데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글씨를 배울 때 점선으로 된 글씨본을 따라서 그대로 글씨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본받아야 할 좋은 글씨체라는 뜻이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해서 자기체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자취를 따라 간다는 말은 전자가 아닌 후자 즉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 16:24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처럼 나무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정신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십자가 정신이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 뜻을 내려놓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자신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코뚜레를 한 소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코가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본받는 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곳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소하고 다른 점은 소는 코뚜레 때문에 억지로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소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이 알아지면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릴 때 어땠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이 그것을 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죽여 제물로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순종을 보시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났지만 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일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따라는 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2. 십자가 정신이란 타인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첫째는 아버지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십자가를 받아드리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범죄 해서 저주 가운데 빠졌는데 그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지 본문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주님은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변함없는 원칙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계와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고 이룬 것이 빈약하고 내 놓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직접적인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미워하시지 않고 미워하실 수 없다. 이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에게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의 원칙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가장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죄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 용서 받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흠이 없이 깨끗하고 정결한 양을 죽여 피를 뿌림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지은 죄로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양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입니다. 양의 생명을 바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때가 되고 절기만 되면 양을 잡았습니다. 한 마리 깨끗한 양에게 지금까지 저지른 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잡아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매번 매년 이 일은 제사장에 의해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양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양 한 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이 외쳤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바로 그분입니다. 이 어린양의 죽음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와 저주가 벗겨졌고 자유 함과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방법만을 고집하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갈보리의 십자가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십자가 밑에서 고백되어 지는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사실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문제가 십자가로 해결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영적인 문제, 가정의 문제, 대인관계의 문제, 환경의 문제, 건강의 문제, 죽음의 문제 등등 이런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도시 '양의 교회'라는 크고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의 종탑 밑에는 한 마리의 양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의 이름과 종탑 밑에 어린양을 쌔긴 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교회를 처음 세울 때 있었던 일인데, 교회 종탑을 만들게 위해 꽤 높은 곳에서 일을 하던 한 인부가 그만 실수로 발을 잘 못 디디는 바람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종탑 아래에는 단단한 아스팔트였기 때문에 떨어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밑을 양치기와 그가 이끄는 한 무리의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여선 사람들이 '저런! 저런!' 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지나가든 양떼 위에 '퍽!' 하고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인부가 아무 대도 다친 곳이 없이 그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부가 일어난 자리 밑에는 불상 하게도 한 마리의 어린양이 죽어 있었습니다. 이에 그 교회의 교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죽은 그 어린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짓고 있던 교회 이름 '양의 교회'라 하고 종탑 밑에 양을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양의 교회입니다. 어린 양되시는 주님이 죽으심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2, 주님은 믿는 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는데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에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시 103:3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대표적인 2가지 은택이 나옵니다. 첫째가 죄 사함의 은택이며, 둘째가 병 고침의 은택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모든 병을 고치시며”

병 고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계획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 8: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건강에 대한 믿음과 신유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우리가 병약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신 주님의 고난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94세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50살 때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예수님을 영혼 구원의 구세주로만 믿지 않고 병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음대로 무병장수 하다가 94세에 세상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이분은 자녀들을 모아놓고 “너희들 지난 40년 동안 내가 아픈 것 보았느냐”, “나는 병 없이 본향에 가련다.” 하시더니 94세에 소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죽던 날 시계를 보시더니 “나는 오늘 10시에 집으로 간다.” 하시더니 9시에 성경 요한계시록 20장, 21장을 읽다가 10시가 되자 “예수님이 계신다. 나는 가야한다. Goodbye!” 하고 손을 흔들더니 의자에 앉은 채로 본향집으로 가셨습니다. 막 11:23절에 보면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병든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2007년 1월 이스라엘 선교 갔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 일행은 나사렛 교회에 가서 기도사역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온 후에 나사렛 교회 목사님께서 우리의 기도사역을 통해서 C형 간염환자가 고쳐졌다는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3. 주님은 믿는 자들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길 잃은 가엾은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희망을 주십니다.

계22:16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나침반이라는 뜻입니다.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 뱃사람들은 별을 보고 길을 찾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광명한 새벽별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시 23:1 에 보면 여호와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면 방황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가 방황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주님을 어설프게 만나면 믿는 것 같은데도 인생의 방황이 계속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났습니까? 인생의 방황이 끝났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방황을 끝내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주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생의 방황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처럼 우리도 타인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희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높이심이 숨어있습니다. 빌 2:5-11을 보면 십자가 희생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주님을 부활시키시고 모든 자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자들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백화점 왕으로 유명한 워너메이커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평생 타인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분이 종로 2가에 있는 YMCA 건물을 지어준 분입니다. 그가 남을 위한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고 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젊을 때 하루는 장미화원을 잘 가꾼 한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자신의 정원으로 데리고 가서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장미꽃들을 꺾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개의 덩굴은 꽃 한 송이만을 남겨두고 모두 가지를 쳐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아니, 왜 가지를 모조리 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지를 잘라내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워너 메이커는 그날부터 나누어주는 사업을 시작했고 결국 점점 더 큰 사업체를 갖게 돼 나중에는 미국의 대재벌이 되었습니다.

남을 위하여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은 결코 나를 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복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정신으로 타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정신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 정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둘째는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고난의 삶

베드로전서 2:18-25

앞서 애매한 고난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의인이고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으로 삼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과 같이 의로우나 오히려 죄인이 되는 것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삶의 한 순간의 일이 아니라 삶 전체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다는 것을 증거하면서 그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애매히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위로는 그랬습니다. 오늘날 삯꾼 목자들이 밥벌이 삼아 강대상에 서서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이 겪고 있는 곤고한 일들이 풀려서 육신이 평안하게 되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반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고 참아야 하는 이유가 고난을 견디고 나면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고난을 견디는 목적이 상급에 있는 것이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셔서 얻는 상급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난은 보상을 기대하거나 결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지만 새롭게 얻은 것이 없습니다. 영광을 얻고 부활하셨는데 그게 상급입니까? 예수님은 원래 가만히 있어도 온전히 영광스러운 분이시고, 원래 죽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이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성,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는 아버지의 본성에 이끌려 살다보니 애매한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영광얼 얻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본성 자체가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본성이 의인이 죄인 앞에서 죄인이 되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 보이셔서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육신 가진 인생의 존재 의미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목적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 만한 영광이 없습니다. 축구공이 박물관이 잘 보관되면 영광스러울 것 같지만 사실은 경기장에서 발에 차일 때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듯, 인생도 고난을 참고 견디면서 얻는 보상이 있다면서 그 보상을 받을 때에 영광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축구공이 발에 차이듯 육신을 소비하는 그 자체가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우리의 육신은 약해지고 쇠잔하며 늙고 보잘 것 없이 되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발에 차여 너들너들해진 축구공의 모습은 축구공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삶을 산 것이듯 인생 또한 하나님 주신 육신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그 육신이 종과 같이 수고로이 살아가는 애매한 고난의 삶을 살고 나서 늙어 낡은 모습이 되면 그 모습 속에서 그간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었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이고 인생의 영광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심인데 그 계획이 말씀이 되니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며 우리 안에 생명이 되는 본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을 살며 육신이 평안해지려하고 그 평안을 얻으면 영광스럽고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며 육신이 평안해지기까지 고생한 것을 고난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그 고난 끝에 평안한 삶을 보상으로 또 상급으로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 말들은 모두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실 운명 그 자체로 인하여 이제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요 17장)하심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영광이나 복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본성에 이끌리어 수고하듯 살아가는 그 삶 자체가 영광스럽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고 하심도 이것이고,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하심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이끌려서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성에 이끌리어 십자가를 지심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하나님의 의와 뜻에 이끌리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 삶의 총화가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는 애매함의 극치입니다. 의인이 죄인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 만한 애매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며 그 본성으로 거듭나고자 하면서 예수님을 빌어 세상에서 성공하겠다고 하는 것은 완전한 망상이고, 그렇게 된다고 말하는 자들이야 말로 멸망의 사기꾼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고생이나 하는 것인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서 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삶의 한 절이라도 그렇게 살아 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평안하며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살고 있는데 그 보다 평안하고 영광스러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엔진을 생각해 보면,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폭발이 일어나고 열로 인하여 식혀주지 않으면 견질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지고 또 식히고 또 폭발하고 아주 빠르게 회전하는 고난 속에 있지만 그러라고 만든 것이니 그렇게 더 잘 할수록 평안하고 영광스러우며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도 그러한데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만드실 때 목적하신 바가 있고 그것을 아들을 보내어 보이셨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왜 영광스럽지 않으며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영광스럽지 않은 것은 단 하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 그 뿐입니다. 자기가 목사 아니라 목사 할애비라도 이것뿐입니다.

더욱이 이 삶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유일한 삶입니다. 예수 이외에 구원을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으니 예수님의 본성으로 사는 것 외에 구원이 없고,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하게 여기시는 것뿐이니 예수님과 같이 애매히 고난 받는 것, 의인인데 죄인이 되고 종과 같이 섬기는 그것만이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순종

벧전 2:18~25

살아가다보면 꿈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난 주에 있었던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역사적 .

인 사건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년이라는 . 50 , 50

희년의 해에 남북의 화해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간단한 일을 .

그동안 못해왔던 것에 대해서 허탈한 기분도 듭니다 그동안 막혀있던 것은 거리의 문제가 .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막혀있는 것이 무너지기를 .

바랍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회적인 장벽 신분의 장벽이 높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 .

도 노예제도는 당시의 성도들이 견디기 힘들어 하던 큰 문제였습니다 당시 노예경제 체제 .

를 가지고 있던 로마에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 때문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로마 .

시대에는 무려 천만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인구의 이 노예였던 셈입니다 노예 6 . 1/3 .

는 노동을 해서 로마를 먹여 살려야 했던 계급이었지만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말하는 노새가 있고 말하지 못하는 노새가 . , ‘

있다라며 노예를 말하는 노새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무런 권리 없이 살아야 했던 노예에게 ’ ‘’ .

는 주인의 생각이 곧 법으로 통용되었습니다.

2천년 전 로마의 노예제도

초대교회에도 노예출신이 많았습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성도가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밖에 . .

서는 노예거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히 혁 .

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이 성경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 때문에 기록되었습니다 . .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전도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도망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

의 주인은 바울이 잘 아는 사람 빌레몬이었습니다 이 빌레몬의 가정은 골로새교회가 시작 .

된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가 그 . . ‘

리스도안에서 변화되었다 전에는 무익한 자였지만 이제는 유익한 자다 이 사람이 당신을 . .

대신해서 나를 잘 섬겨주었다 그러니 이 사람을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합니 . ’

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 .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종으로 살아야 .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장 절부터 절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 . 7 20 24

게 말합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 “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

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

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라고 했습니다. ”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제는 운명적으로

어쩔 수 없이 종살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종으로서 그 자

리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라고 말합니다 절을 보십시오 . 18 .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

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노예나 종은 일을 아무리 잘해도 칭찬을 받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잘못할 때는 큰일날듯이 .

혼나게 되지만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특별히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을 만날 수 .

도 있습니다 천년 전에도 어떤 주인들은 노예를 잘 돌보고 자녀의 교육을 맡기기도 하 .2 ,

고 때가 되면 자유를 주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까다로운 주인들이었습니 , .

다 성경에 나오는 좋은 주인의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 .

사랑하는 종이 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 나아와서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 .

님은 종이 병들었다고 찾아온 이 백부장에게 감동하며 병을 고쳐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 .

은 주인은 드물었고 대부분의 경우 종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많은 날을 누군가를 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까다로운 주인을 만 .

났을 때 성경은 두려운 마음으로 순복하라고 말합니다 잘해주는 주인뿐만 아니라 까다로 ‘ ’ .

운 주인에게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합니다.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하라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항의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항거할 수 있는 상황에 있지 않 .

을 때에도 곱게 순종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 .

베드로전서 장 절의 이 사환에 대한 교훈은 우리를 향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 2 18 .

아가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

형편 없는 사람을 만날 때도 많고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 .

맞서고 싶은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좋은 마음으로 순복하라고 주님은 말씀 . ‘ ’

하십니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는 주로 일 때문이 아니라 관계 때문에 비롯됩니다 심지어 교회안에 .

서도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세상에서는 곧잘 . ?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올바른 일을 하고도 나쁜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 .

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는 아픔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섬겨 . .

야합니다 절을 보십시오 . 19 .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까다로운 주인을 섬길 때 애매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

참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미워하 .

고 비난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미워하는 세상이 너희를 미 ,,, . ‘

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대접받고 공정한 대 ’ .

우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를 해서는 안됩니다.

말도 안되는 억울한 일에 있어서도 순복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것은 상황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상대방이 까다롭든지 관용이 있는 사람이 .

든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대우하는 것에 대해서 .

일일이 반응하면 결국에 망가지는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를 나쁘게 대우하는 사람에 .

게 우리 또한 나쁘게 대우하고 좋은 사람에게 좋게 반응하면 공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

실상은 이렇게 하다보면 오히려 자신이 망가지게 됩니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느냐 .

에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흔들려서 .

는 안됩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비록 타락한 제사장일지라도 순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귀하게 보셨 .

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불의한 권력이라할지라도 끝까지 순복합니다 다윗 .. .

이 순복해야 했던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

받고 세움받은 사울을 대신할 왕이었지만 끝까지 사울에게 순복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이 지켜보십니다 지금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하는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

보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지켜 . .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하에서도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 .

름 예수님의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 , .

다 주인의 자리에 있을 때도 아래 사람에게 관용하고 잘 대해야 하고 종의 자리에 있을 . ,

때에도 순복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아름답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했습니다 . .

우리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 . .

원은 금이나 은과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 ,

배로운 피로 인한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 . .

는 사람은 사람에 의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을 보십시오 . 20 .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종류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3 .

첫번째가 죄로 인한 고난입니다 대부분의 고난이 이것에 해당합니다 고난의 대부분은 우 ‘ ’ . .

리의 죄나 연약함 때문에 당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 .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 미움받는 것은 자기 탓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옛말에 매도 벌어 . ‘

서 맞고 욕도 벌어서 먹는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질병도 그렇다고 합니다 병의 대부분은 , .. ’

환자 본인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바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 아무 음식이나 . ,

다 먹는 그런 절제 없는 생활에서 질병이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고난을 철저하 .

게 회개하면 이 고난조차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죄로 인한 고난과 애매한 고난

두번째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매한 ‘ ’ . .

고난의 실상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를뿐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 ..

허락하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반드시 억울하고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신 뜻이 있습 .

니다.

구 소련의 유명한 작가이자 반체제 인사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유년시절 신앙을 가지고 있

다가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반체제 인사로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우연 .

히 만난 유대교 의사로부터 병으로 고생할 때 정성껏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저항감과 억울 .

함에 젖어있던 솔제니친에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온 의사는 이 세상에서 이유없이 ‘

당하는 고난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무의식속에 있는 그의 일부를 흔들어 깨 ’ .

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에게 원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죄 .

인이라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 .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상대방에게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정

결케 하십시오.

세번째는 선한 일을 하다가 상을 받기는 커녕 고난으로 돌아오는 경우입니다 사랑과 선을 .

베풀었는데 배신과 부당함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경우도 자녀로 .

부터 그런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는 것은 아름답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 고 .

난은 자진해서 당하는 고난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렇게 당하는 고난이 어리석은 고난은 아 .

닙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있다라고 하셨습 . ‘ ’

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됨이며 복을 쌓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 ..

선을 베풀고 사랑한 것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 .

6 10 . 장 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

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작은 선행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상으로 복 ”. .

주십니다.

우리가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순복할 때 주님이 우리를 인정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 앞 .

에 설 때 잘했다 충성된 종아 라고 말씀하시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장 ‘ ’ . 15 58

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견 ” .

고하게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 때문에 고난당하는 일 믿음을 지키는 일은 헛되지 않 . ,

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

우리에게는 본이 필요합니다 절을 보십시오 . 21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 특별히 어려워 보이는 길을 가려는데 누군가 앞서 간 사람 ,

이 있으면 안심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간 발자취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 .

위해서 고난을 받는 일이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을 .

좇아가면 그 길이 좁고 어렵고 불가능한 길처럼 보여도 그곳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습 , ,

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주를 따라 섬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난받고 특별히 어려울 때 예수님을 생각하십 .

시오 사실 예수님보다 더 억울한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 .

죄라고는 없으셨습니다 정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 . .

을 섬기며 아름답게 사셨던 분입니다 절을 보십시오 . 22 .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그는 죄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입으로조차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 . .

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힘이 없다면 입술로라도 죄를 짓고맙니다 주인한테 맞서지는 못 .

해도 욕설을 퍼붓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입술로 죄를 짓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 .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절을 보십시오 . 23 .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매맞는 일보다 더 힘든 것이 모욕당하는 .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 .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욕설을 퍼부어주고 싶은 순간이 많습니다 그러나 욕하지 마십시오 . .

그리고 대놓고도 말고 뒤에서 그러지도 마십시오 또 위협하지도 마십시오 우리는 흔히 두 . . ‘

고 보자라고 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두고 보자라고 하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 . ‘ ’ .

그러면 그 때까지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절을 보십시 . 24

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실 때 욕하지도 위협하지도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

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 .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범

유대인들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 ‘ ’

너무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자 하나님 제발 저들을 보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굉 ‘ ’ .

장히 위력적인 기도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공의의 하나님께 의탁하십시오 언젠가는 . .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날 그날이 올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고난 당할 때 믿는 것입니다 참된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편안할 때 . .

는 순종하고 믿는 것이 간단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 진정한 순종과 믿음이 드러나게 .

됩니다.

여러분,

억울하고 고난당한 일에는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억울한 일을 당하신 이유는 .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도 죄인이었습니다 남에게 억울한 일을 가하고 부당한 .. ,

일을 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치 . ,

유하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가 시켜 .

서도 아니고 가룟 유다가 배신을 해서 고난을 당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히 .

고난을 택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믿음을 지키는 데도 고난을 당하는 것에는 선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주님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 .

난은 주님 앞에 갈 때 상급과 축복이 될 것입니다 절을 보십시오 . 25 .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

우리도 전에는 죄를 짓고 남에게 억울한 일을 했지만 주께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고 십자가 옆에 있던 백부장은 저는 진실로 하나 ‘

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메달렸던 죄수는 주여 당신의 나라 임 ’ . ‘

하실 때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도 임합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 . .

당할 때 복수하지 않고 위협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하며 그 길을 걸어갈 때 , ,

우리를 대적하던 이들이 돌아와 주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더 가까이 계십니다 원망과 . .

복수와 저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목자되고 감독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 .

하시고 함께 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 .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래서 맞서고 싶을 때

우리가 입술로 범죄하지 않게 하시고,

위협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주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소서.

그럴 때 그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생명과

구원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신

주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인과 직장

벧전 2:18-20 조정의 목사

오늘 본문까지의 말씀을 조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1장 시작에서부터 2장 9절까지 베드로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교리부분’을 다루고 있고, 그 이후부터는 그것을 어떻게 삶에 적용할지에 대해 ‘적용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두움과 멸망 가운데 있던 자들로서 전도서 기자의 유명한 말처럼, “헛되고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던 우리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영원한 기업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2:9).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멸망의 자녀, 하나님의 원수, 약속 밖의 사람들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라”(2:9).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라고 밝히고, 그 이후의 말씀부터는 그 목적에 맞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과 정치 체계 안에서 권세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이 직장생활에 대한 모든 지혜를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외에도 직장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성경의 원리들이 있습니다(엡 6:5-8, 골 3:22-25, 고전 7:21, 딤전 6:1-2, 딛 2:9-10). 그중에서 오늘 말씀은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직장인들은 연간 2,163시간을 일한다고 합니다(OECD국가 중 6년 연속 2위). 눈을 뜨면 일터로 나가서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이 직장이라는 것이 제품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버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부합하는 큰 의미가 우리의 직장생활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명령: 순종하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8). 베드로가 편지를 썼을 당시에 “사환”은 ‘노예’, ‘종’을 가리킵니다. 당시 교회 안에 부와 명예가 높은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 편지를 읽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람들(노예층)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며 여러 민족을 침략하면서 그곳의 포로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길거리에 유리된 사람들이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빚이 너무 많은 사람은 스스로 노예가 되기도 했고, 어머니가 노예인 사람의 자식은 자동적으로 노예가 되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는 많게는 전체 인구의 반이었고, 적게는 1/5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노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사환들’은 어떤 집에 소속된 노예들입니다(눅 16:13, 행 10:17, 롬 14:4).

 

여러분들은 아마도 ‘나는 노예가 아닌데’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제가 당시 노예들이 했던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건축업 관련업자, 교사, 어린이 돌보는 사람, 학원, 의사, 농부, 광부, 어부, 요리사, 상인, 경호원, 주택관리, 음악가 등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시는 일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당시에 사셨다면 대부분 노예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 사회를 경제적으로 지탱하고 있었던 계급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들은 봉사에 대한 급료를 받았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받은 급료를 모아 자유권을 사서 일반 평민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반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평민보다 낮은 계층이었고 법적 문제에 있어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고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와 이주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주인에게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가리켜 “살아있는 도구”라고 말했는데, 그들이 일하는 성과에 따라 주인의 명예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주인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에 따라 종에게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거나 생명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노예들, 화형이나 십자가 형을 당하는 노예들도 많았습니다.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종의 대우가 달라졌던 것입니다. 선하고 너그러운 주인을 만나면 명예와 지위를 누리지만, 까다롭고 악독한 주인을 만난다면 부당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많은 노예들이 있었던 교회에 베드로가 이와 같은 명령을 한 것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18). 이것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13)와 같은 명령입니다. 이 순종은 즉각적이고 자발적이며 의지적인 순종입니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슨 명령이든지 순종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법을 어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을 신처럼 여겨 순종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상사 위에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직장에서도 크리스천입니다>라는 책에서는 그러한 자세로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빌 2:14) 내 위에 권위를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어떤 상황에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복종’입니다. 속으로는 욕하면서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를 말합니다(골 3:22). 셋째는 ‘기도’입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딤전 2:1-2). 우리에게 세우신 상사들, 주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넷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거짓 없는 겸손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경건’입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태도를 말합니다. 감사, 복종, 기도, 겸손, 경건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춰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18). 베드로는 이러한 순종의 태도를 말하면서 “두려워함으로”라고 말합니다. 보다 정확한 번역은 “모든 두려움으로”(흠정역)입니다. 이것은 주인에게 두려워 떨면서 순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전서에서 인간에게 쓰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말입니다(1:17).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 마지못해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높이는 태도입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8).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주인에게 순종할 때,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순종하라는 명령입니다. 주인 중에는 선하고 관용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까다로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를 선대하는 상사에게는 순종하기 더욱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상사는 어떻습니까? 여기서 “까다로운”은 다른 번역으로 “고약한”(공동번역)입니다. 이는 까탈스럽고 별나고 변덕스럽고 불공정하고 상도를 벗어나고 난폭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야만적인 주인을 말합니다. 부당한 지시, 터무니없는 급료, 잘못한 것에 혹독한 징계를 내리는 주인, 차별대우 하는 주인, 신체적인 학대를 가하는 주인도 포함됩니다. 말씀은 선한 주인이든 악한 주인이든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인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힘으로 이러한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도 힘든 직장생활을 잘 견뎌냅니다. 까다로운 상사를 대할 때도 잘 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참는 이유는 그들과 다릅니다.

 

이유: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19-20)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참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도들도 많은 부당한 고난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분노와 슬픔, 낙심, 원망이 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상사의 부당한 대우에 이러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참아야 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를 갈면서 억지로 참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습니다. 하나님께 그들을 벌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에서 말씀했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권자이시라면, 내가 직장에서 겪는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을 보호하고 계십니다(1:5). 그것을 믿는다면 부당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유업을 하늘에 간직하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1:4). 지금 상사 앞에서 슬픔을 당하고 있지만 여러분에게는 하늘의 영원한 기업이 있습니다. 그분은 다 아실 뿐만 아니라 다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1:7). 우리가 당하는 슬픔, 고난, 낙심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할 때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낮은 모습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시기 위해 죽음까지 이르렀기에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 되어 어두운 데서 불러내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들입니다. 고난당하고 있는 현재의 환경을 보고 나를 괴롭히고 있는 상사를 본다면 우리는 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생각한다면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인정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눅 6:32; 2:20). 고난 중에 참는 것은 우리에게 칭찬이 된다는 것입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 취급은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얼마나 독특한지 보여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부당한 학대를 인내심 있게 참음으로써 그들은 노예적인 비굴한 태도와 반대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보여 준다……악을 인내심 있게 참으면, 그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 속박의 사슬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보여준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도 이러한 고난을 참을 수는 있지만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우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참아내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어려움 중에서 하나님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맺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20). 직장에서 우리가 지각을 하거나 성실하게 일하지 않아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사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정직하게 일하며, 성격이 별나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악행을 하여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 그것을 참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20). 여기서 말하는 “선을 행함”은 단순히 좋은 일이 아니라 앞에서 강조했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즉 ‘순종하라’는 명령을 말합니다. 주인에게 순종할 때 고난 받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참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21).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직장 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뜻을 품고 계실까’로 고민하고 계십니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는 것, 고난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이 계명은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두 번째 명령,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 때 여러분의 직장 상사와 동료들은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오늘 말씀을 통해 명령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을 성도들, 노예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고 있는 부당함과 불공정함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서 전체의 주제는 ‘고난 가운데 성도의 기쁨’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또다시 내일이 되면 직장에 나가실 것입니다. 상사를 만날 것이고 업무 스트레스보다 더 큰 스트레스인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나태함이나 게으름이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로 직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하신다면 이 무겁고 힘든 일을 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베드로전서 2:18~25 / 송용조 목사

자신이 어떤 현실에 처해 있든지 우리는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이런 저런 염려스럽고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만나게 된 자신의 처지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어떠하든지 그 현실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어떤 현실이 주어진다고 해도 믿는 생활을 감사와 기쁨으로 활기차게 해나갈 수 없습니다.

 

주인들에게 순복하라

 

“종들아 모든 일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8). 여기서 말하는 “종들”(사환들)은 주인의 소유로서 집안 일을 하는 노예들을 가리킵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들은 자유의 몸이 아닌 주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당시에는 종들을 인권을 가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도구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로마 제국의 노예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노예라는 신분과 처지에서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그들은 안고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은 성별간, 인종간, 사회계층간, 그리고 세대 간의 구분은 있지만 차별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엡 2:13,14,19).

또한 신약 성경은 노예들에게 그들의 주인이 선한 자이든 또는 까다로운 자이든지 간에 주인을 대항하지 말고,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베드로, 바울)은 노예 제도를 정죄하지도 않고, 노예 제도의 철폐를 주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노예 제도를 당시에 존재했던 삶의 현실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사도들은 노예들이 주인들에게 항거할 경우 유혈 사태가 일어날 것을 알았습니다.

과격한 항거 운동이나 혁명으로 유혈 사태의 발생을 원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노예나 주인은 다 한 가족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도적 교훈의 영향으로 마침내 노예 제도가 이 땅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노예처럼 다루고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까다로운 고용주와 상관들에게도 순복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가림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사람들을 존경하고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고용주와 상관들은 직원들과 부하들의 입장을 잘 헤아려 건전한 노동 조건을 마련하고 공정한 임금을 지불하며, 사람 대접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현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종과 자녀답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말고 참고 견디면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한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주님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 복음을 빛나게 하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베드로전서 2장 18절의 권면은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 데도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무와 본분에 충실했는데도 비난과 악평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좋지 못한 말을 듣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 분노의 감정이 치밀어 오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19-20절).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보복과 보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리고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보복과 보상을 생각하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선대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눅 6:32-35 참조).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한 수고와 희생과 고난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이 보상은 인간의 칭찬이나 어떤 세상적 성공이나 수입보다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막 10:29-30; 히 11:24-26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에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당하게 받는 고난이면 침묵하면서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해주실 것입니다(롬 8:28; 약 1:2-4; 벧전 5:10 참조).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의 잘못이 원인이 된 것이면 고치면 됩니다. 나의 잘못 때문이 아니고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경우라면 참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입니다(빌 1:29).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19).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자녀인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숨은 동기와 말과 행동을 다 아시며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십니다.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이라면 은혜로 여기고 선을 행하면서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고 갚아주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은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복음과 의(義)를 인해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주님과 복음을 잘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을 믿는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끝까지 선을 행하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욕을 욕으로 주먹을 주먹으로 되돌리면 복음을 가리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을 때에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셨는지를 생각하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벧전 2:21-25 참조).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우리 죄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을 때에 어떻게 참으셨는가를 본받아야 합니다.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다고 느껴질 때에,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선한 일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부당한 고난을 어떻게 참고 견디신 것을 생각하고 우리도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선한 일 곧 구원 사역에 끝까지 충성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돌보심을 받으며 귀히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고 난, 아름다움과 능력

 

벧전 2:18-25 / 김광준 목사

서론

베드로전서라는 짧은 성경을 보면 이 짧은 내용 안에 굉장히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구원과 종말에 대해서 다루고 성전과 제사장에 대해 이야기 하고 또 세상 권세를 어떻게 대하는지. 일상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고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다룹니다. 구원부터 종말, 일상까지 굉장히 광범위한 내용을 다룹니다.

하워드 마샬이라는 굉장히 유명한 신약학자가 계셨는데, 이분이 “만약에 신약 27권중에 교회를 위해 딱 한 권만 고를 수 있다면 베드로전서를 고르겠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만큼 광범위한 내용을 균형 있게 잘 다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조금 뻥을 섞어서 과장해서 말하자면 베드로전서를 잘 이해해도 기독교의 진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구원과 종말이라는 굉장히 큰 스케일의 내용을 말하지만 동시에 일상에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두고 진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상에서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고난은 성도의 소명이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고난은 성도의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18절부터 보면 사도 베드로는 사환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환은 주인에게 고용된 종을 말합니다. 이 때 종은 주인의 소유로 취급됐지만 급여를 받았으며 자신의 몸값을 치르고 자유의 몸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종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종들이 주인을 두려워하고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기독교가 노예 제도를 인정하나?’ 라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베드로는 갑자기 사회 체제를 뒤엎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체제 전복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뤄집니다.

19절부터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는 종, 오늘날로 적용하면 예수님을 믿는 피고용인, 직장인이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19절을 보시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한다는 말은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어려움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 일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20절을 보시면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종이 만약 죄를 지어서 거기에 따라 처벌을 받고 고통을 참는 것에는 칭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습니다. 18절 후반부에 말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주인, 까다로운 고용주도 무시하지 않고 두려움으로 순종하고 선한 일을 행했는데 억울하게 고난당하면 특히 믿음이 있다는 이유로 고통을 당한다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18절 후반부에 나오는 ‘까다로운 자들’은 단순히 업무 스타일이 깐깐해서 밑에 사람들을 고생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 까다롭다는 말은 원어상으로 ‘굽었다.’는 뜻인데 실질적인 의미는 정직하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까다로운 사람 밑에 있으면 예수님을 잘 믿는 종이 아무리 일을 열심히 잘해도 고통당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임금을 떼어 먹기도 하고 쓸 떼 없는 트집을 잡히기도 하고 별의 별일이 다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고난을 감내하는 일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심지어 21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부당한 고난을 감내하기 위해 부르심 받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증명) 고난이 소명이라고 할 때 아마 가장 적절한 인물은 욥일 것입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욥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난 가운데 흔들릴지언정 끝까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친구들의 비난과 삶의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결국은 그의 삶이 회복되고 이전보다 더 복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욥은 고난을 받음으로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이 돈이 많고 건강해서 믿는 게 아니라 참된 믿음이 있어서 믿는 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고난을 받음으로서 믿음을 증명해냅니다. 성도는 이런 믿음의 고난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적용) 혹시 지금 직장에서 사회생활하면서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마음에 안 드는 고용주, 직장 상사, 부하, 거래처 때문에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기도하면 다 잘 풀릴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부당하게 고난 받기 위해 우리가 부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부당하게 고난 받기 위해 성도로 부름 받고 동시에 직장으로도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고난을 이겨낼 때 적어도 우리는 참된 성도로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2.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은 증거가 된다.

(전환문장) 그러면 성도가 고난을 받을 때 실제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둘 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부당한 고난을 받으면 그것이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것이 우리 삶에 실제적으로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형용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난 받는 결과가 아름다움이라면 그냥 아름답지 않고 고난을 안 받고 싶기도 합니다.

19절과 20절의 아름답다는 번역은 한글 성경만이 가진 독특한 번역입니다. 원어에는 아름답다가 아니라 은혜롭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난 받는 것이 은혜롭다.”라고 하면 또 이게 이해가 잘 안됩니다. 교회에서 은혜라는 말을 얼마나 다양하게 씁니까? 그래서 이 ‘은혜롭다.’는 말을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아름답다고 하고 어떤 영어 성경에는 ‘칭찬 받을 만하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호의를 찾게 하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신용이 있다.’ 등등 굉장히 다양하게 번역을 해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난이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아름답다는 말은 원어에서 은혜롭다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전반적으로 은혜라는 말이 어떻게 쓰였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장 2절부터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으로 베드로의 편지가 시작됩니다. 1장 10절에 구원을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은혜라고 묘사합니다. 13절에도 구원을 ‘가져오실 은혜’라고 말합니다. 4장 10절에 교회를 섬기기 위한 은사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베드로전서 전반적으로 은혜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되어서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은혜롭다라고 하는 건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은 증거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어 그대로 표현으로는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이 고난이 우리가 은혜 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성경은 굉장히 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은 것만큼 아름다운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구원 받은 모습, 아름다운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은 바로 우리가 고난 받을 때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과할 때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모습, 구원 받은 자로서의 모습이 됩니다. 혹시 고난 중에 계십니까? 가정, 직장, 학교 등등의 공동체에서 부당하고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모습이 되셨습니다. 삶에서 당하는 고난은 알고 보니까 하나님 나라의 레드 카펫입니다. 그 레드 카펫의 붉은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부당한 고난을 하나님 때문에 참으며 은혜 받은 모습,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봉사하고 이웃에게 내가 가진 것으로 섬기는 모습도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부당한 고난을 하나님 때문에 감당한다면 은혜 받은 증거를 드러내어 더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3. 고난을 통해서 복음전파의 능력을 얻게 된다..

(전환문장) 마지막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고난을 통해서 복음전파의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명) 21절 상반절까지 우리가 부당한 고난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은 은혜, 즉 한글 성경의 표현으로는 아름다움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이야기 합니다. 이어서 사도 베드로는 부당한 고난을 받으신 우리의 참된 모범이신 분을 제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21절에는 우리도 고난을 위해 부름 받았지만 우리 보다 앞서서 고난을 위해 부름 받은 그리스도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본을 끼쳐서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본은 헬라어로 ‘휘포그람모스’인데 신약에서 딱 한 번 나오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여기 본은 교본을 뜻합니다.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점선으로 된 글자에다가 줄을 그어가면서 가나다를 배우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교본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교본이 없으면 글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라는 교본이 없으면 우리가 고난이 유익이라는 것을 알아도 고난의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이라는 글자를 점선으로 남겨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글자를 따라 쓸 수 있습니다.

21절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는 성도의 교본이라고 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22절부터 나옵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일단 죄가 없으십니다. 죄 없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19절에 나오는 부당한 고난을 암시합니다. 23절에 보면 욕을 당하셨다고 해서 그것을 똑같이 갚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18절에 사환들이 주인에게 고난당하면 참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종의 모습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채찍질 하는 자들을 물리적으로 심판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23절 마지막에 나오는 것처럼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여기 부탁은 위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충분히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공의로운 하나님께 모든 결정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에 죽게 의에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입니다.

22절부터 24절까지 부당하게 고난당하시고 모든 심판의 권리를 포기하신 예수님의 사역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25절에서 설명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고난 받으신 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까 보신 것처럼 21절에는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교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부당한 고난을 감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을 고난을 통해 죄인들이 돌아온 것처럼 우리가 부당한 고난을 감내할 때 우리를 통해 죄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3장 1절을 보시면 고난을 통해 영혼이 돌아오는 원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3장 1절을 보면 아내들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아내의 행실을 통해 돌아올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원어상으로 3장 1절에서 ‘이와 같이’가 제일 먼저 나오는데, 여기 이와 같이는 무엇과 같다는 것을 말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영혼들이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영혼들이 돌아온 것처럼 3장 1절에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이 아내의 행실을 통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남자가 아내의 종교나 인간관계나 권리를 다 주장했습니다. 불신자의 아내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내들이 불신자 남편이 주는 부당한 고난을 잘 감내하면 남편이 돌아올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리 될 것이라 합니다.

(적용)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그 고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 고난을 버텨내는 것이 참 힘듭니다. 당장 아프고 힘든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여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난을 통해 구원 받은 은혜를 드러내라, 우리는 고난을 위해 부름 받았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라” 실제로 고난을 당해보면 이런 정답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을 복음 전파의 능력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 부당한 고난일 때,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찾아온 고난일 때 이 고난은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고난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수한 고난을 복음전파의 원동력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우리의 고난이 억울하면 억울할수록 고난을 통한 복음 전파의 능력이 더욱 증폭됩니다. 이것이 복음이 능력을 얻는 원리입니다. 고난이 얼마나 아프고 힘듭니까? 이 설교를 하는 저조차도 고난이 오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이런 설교를 하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 험난한 세상을 살 때 기왕지사 고난을 받는다면 고난 가운데 소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고난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복음 전파의 능력이 됨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성도는 고난을 받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신 것처럼 이 땅의 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고난을 통해 교회로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순수한 고난은 복음을 전달하는 능력이 됩니다. 이번 한 주도 고난 가운데 은혜를 드러내고 능력을 경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함께 찬양 한 곡 부르며 기도로 나아가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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