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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20220 / 살전 4:13-18 / 주의 재림과 부활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2.02.26|조회수2,005 목록 댓글 0

주의 재림과 부활

살전 4:13-18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3-18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늘 명심해 두십시오. 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슬픔에 못 이겨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4) 우리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15) 우리는 주께서 직접 일러주신 것을 토대로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비록 우리가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보다 먼저 주님을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16) 큰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이 불러모으시는 나팔 소리와 함께 주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17) 그 다음에 땅 위에 아직 살아남은 우리가 다 함께 구름에 싸여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명심하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14) 성경에서 죽은 자들에 대하여서 ‘잠을 자다’라고 쓴 것은 죽음에 대한 신앙적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죽음 이후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을 알고 귀한 말씀을 전합니다. 성도라 해도 지식이 없는 자들은 이방인들 같이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소망이 없어 슬퍼하였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부활의 신앙을 갖고 소망 중에 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을 가지되, 이방인과 같이 영원한 헤어짐에 대한 절망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자들이나 동일하게 차별이 없이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든지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주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15-18)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일곱 종류의 천사장이 있는데, 그들은 성도들의 기도를 받아 하나님께 드리거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좌하는 역할을 합니다(계 8:2, 3). 예수께서는 이러한 천사장들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 소리는 사탄에 대한 승리의 선포이며 동시에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영광과 생명으로 부르는 소리입니다. 이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재림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공중으로 끌려 올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성도들은 변화될 것입니다(고전 15:52).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함께 변화된 모습으로 영광의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이후로도 영원히 주님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성도들은 세상이 모르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적용: 오늘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맞이하시겠습니까? 주님을 맞이하실 준비가 되었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는데 그것은 강퍅한 마음의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마음이 연하여져서 복음을 영접하게 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림의 가장 확실한 징조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순간에 마무리될 것입니다.

 

< 설 교 >

주께서 강림하실 때

살전 4:13-18 / 석원태 목사

전(全) 성경은 예외 없이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이고, 단독적인 계시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 누구도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이런 말을 계시한 신(神)이 없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구약 전(全) 성경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목적대로 말씀하신 자기선언의 계시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의 최대(最大) 진리들 가운데 그 마지막 진리가 되는 '예수 자신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이 피조세계(被造世界), 특별히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하는 바울 사도의 영감 앞에서 풍성한 성령님의 은총에 잠기시기를 바랍니다.

 

Ⅰ. 주께서 강림하실 때는 교회의 소망이 성취되는 날입니다.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자금 이후로 주를 믿고, 주를 높이고, 주를 위하여 살다가 그 육신이 죽어 흙속에 있는 자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결코 예수 믿고 죽은 자의 영혼들이 잠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신자의 영혼은 죽을 때 주님에게로 가고, 그 육신은 마치 잠자듯이 티끌 속에 있다가 장차 주님 재림하실 때 그 잠에서 깨어 일어날(부활) 것을 가리킵니다.

다니엘서 12장 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적 죽음을 가리켜 '잠잔다'고 하였습니다. 그 영혼은 주께로 갔다고 하였습니다(행 7:59-60).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영과 육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자주 이 육신의 죽음을 가리켜 잠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의 자기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 11:11)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 재림 신앙에 불타고 있었는데, 그 재림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버린 가족들의 죽음에 너무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들 중에는 자기들 생전(生前)에 예수가 재림하신다고 믿다가, 죽음을 만난 자들 때문에 슬퍼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서 확실히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사도는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이 티끌 속에 있는 것을, 깨는 것을 전제하고 잠자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처럼,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먼저 별세한 그들을 부활시켜서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라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 세계(天國)로 인도되는 영광을 맞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보스(G. Vos) 박사는 말하기를 "부활시킨 성도들을 데리고 땅위로 오신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을 함께 하늘(天國)로 인도하심을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사도는 예수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듯이 예수 재림이 우리에게 천국으로 영접을 받는 소망을 주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살전 4:13b).

그렇다면 예수의 강림은 교회의 마지막 소망이란 뜻입니다. 예수 재림에 대한 예언은 성경에 무려 318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 24권이 빠짐없이 예수 재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2000년 기독교회의 신조적 신앙고백 속에는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주 재림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Ⅱ. 주께서 강림하실 때는 우주적인 영광스런 광경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 중에 「주 강림하실 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강림」(παρυσῖα)은 4장 16절, 23절에 사용된 단어는 문자적으로 공개적인 임재를 뜻합니다.

그 때,

 

1. 주의 호령이 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중에 「주께서 호령과」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실 때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신 경우와 같습니다(요 11:43). 죽은 자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명(命)하는 소리입니다.

사망(死亡)에서 부활로 호출하는 생명(生命)의 음성입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 우주적 호령 앞에 순식간에 부활하고 말 것입니다. 그 호령의 목적은 잠자는 자들을 깨우는 것입니다.

 

2. 천사장의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중에 「천사장의 소리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천사장은 미가엘(유 1:9, 계 12:7)인데,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탄 대적과 싸우는 천사입니다. 그가 주의 호령에 수종을 들고 있습니다. 그는 주의 호령에 부활 받은 성도들을 아버지 집으로 안내하기 위하여 예수 재림시에 동반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팔로 하늘로 좇아 강림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는 이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이스라엘을 만나려고 내려오실 때 들렸습니다(출 19:16-17, 19).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대적들로부터 구출하실 때 들렸습니다(습 1:16, 슥 9:14). 지금 예수님이 강림하시는 순간에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것은 천하만국(天下萬國)에 그리스도 안에 잠자고 있는 성도들을 깨우기 위한 소리였습니다. 실로 우주적인 소리가 아닌가!

물론 무덤에 잠자고 있는 그리스도 밖의 불신자들(악인)도 다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성도들에게 일어날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III. 주께서 강림하실 때 지상에 있는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1.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하반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꼭 하고 싶은 우선적인 말입니다. 저들은 예수 믿고 죽은 형제(兄弟)들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 후에 살아남을 자들이 부활을 받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상반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림」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 재림시에 생존(生存)하고 있는 자들을 총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장 15절 중에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는 말은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부활의 몸을 받고, 그 다음에 생존자(生存者)들의 부활이 뒤따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예수 믿고 먼저 세상을 떠난 자들 때문에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3.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중에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끌어 올려」라는 말인 하르파게소메다(ἁρπαγησόμεθα)는 '강제로 끌어당김을 당하다'라는 뜻으로 '홀연한 납치 상태', '불가항력적 납치상태'를 뜻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갔다'(취함; 창 5:24), 하나님이 에녹을 '옮겨 갔다'(히 11:5-6), 하나님이 엘리야를 불수레와 불병거로 이끌어 태우고, 회리바람으로 밀어 붙여서 승천시킴(왕하 2:11)과 같은 경우입니다. 예측이나 예상을 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역사일 뿐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성도들은 모두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를 입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홀연한 변화(變化)! 찰나적인 변화(變化)! 영광스러운 변화(變化)! 불사의 몸을 입는 변화(變化)! 천국에서 누릴 영생체(永生体)로의 변화(變化)가 아닌가?

'홀연히',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고야 말 필연적인 하나님 자신의 사건입니다.

 

4.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하반절에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본문에 공중으로 이끌림을 당하여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말은 '천국에서 주를 만나 산다.'는 말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성경을 크게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주님 재림시에 그가 공중에서 우리를 이끌어 올려 거기에서 7년 동안 공중 혼례를 즐기고, 땅에서는 대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7년 대환난 후에 주님이 지상 재림을 하여 1000년 동안 다윗 성에 왕도를 정하고 다스리시다가, 마지막 날에 심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 재림은 단회(1회)적인 사건입니다. 성탄이, 대속의 죽음이, 부활이,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 단 한 번이듯이 예수 재림도 단 번으로 성취되고 맙니다.

문제는 예수 강림과 주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우주적 광경 앞에,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다음에 생존한 신자들이 부활하고, 그래서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우주적 구속 사역이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사건과 함께 하늘이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 버리고 바다도 다시 그 모습들이 없어져 버리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되는, 자연계의 대 사건이 동시성을 띄고 일어날 것입니다(벧후 3:10, 13). 바울은 이 사건을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5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날, 그 때, 역사 속에서 예수를 믿은 은총 입은 자들이 땅에서, 하늘 공중에서, 바다에서, 산에서, 강에서, 무덤에서, 동서남북에서 주의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서 강림하시는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재림의 때에 대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고 하였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깨어있는 종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25:45-46).

이것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통하여 죄인 구원을 성취하고(요 19:30), 성령으로 세우신 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키고, 자랑하고, 전해야 될 생명(生命)의 비밀, 복음의 비밀, 소망의 비밀, 영생의 비밀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약속 앞에 교회는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7, 12, 20). 할렐루야! 아 멘

 

 

 

 

 

그리하여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3-18 / 곽선희 목사

이번 달 가이드 포스트지에는 특별한 보고서가 실려 있습니다. 현재 터키에 이스탄불이라고 하는 수도가 있고, 그 수도는 본래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이 콘스탄티노플 그 옛 도성 안에 성 소피아 사원이라고 있습니다. 아마 중동지구를 여행했던 분들은 한번씩 다 다녀왔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1700년 된 엄청난 성전입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1700년 전에 어찌 이렇게 큰 성전이 지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세 차례나 지진을 만났습니다마는 이 집은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서 있어서 기독교문화의 그 화려했던 옛날을 우리에게 증거해 줍니다. 거기에 소장되어 있는 비밀한, 아주 소중한 보고서가 있어서 이것을 이번 가이드 포스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제목은 라고 하는 문건입니다.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빌라도 총독의 보고서로서 대단히 중요한 증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나라의 운명까지도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각하께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시작이 되고 그 다음 내용은 대체로 성경에 있는 기록과 비슷하게 그 내용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는 '원치 않았지만 폭동이 무서워서 희생양으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비었고 제자들은 용기를 내서 예수 부활했다고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하나님에 아들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각하,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 본디오 빌라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부활절을 당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될 문제는 부활의 역사성입니다. 부활을 철학적으로 추상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문제가 아닙니다. 혹은 도덕적으로 설명할 문제도 아닙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철저한 사건으로부터 기독교는 시작이 됩니다. 이 역사적 사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 될 것입니다. 사실로 인간의 인간 됨은 바로 그의 생각에 있는 것이올시다. 생명은 바로 생각입니다. 믿음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영생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생각하라. 메멘토 도미니, 주님을 생각하라. 복잡한 일이 많겠습니다마는 이 두 가지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기에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각하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은 동물입니다. 알고 사는 것이 인간이요 아는 만큼의 인간은 존재합니다. 믿는 만큼에 우리의 생명의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요. 거기에 영생이 있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예수의 부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부활은 예수의 부활만이 부활이요 그것만이 부활입니다. 말로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비사로도 어떤 논리로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본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실일 뿐이지 우리가 알고 모르고 믿고 안 믿고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사실대로 실재할 뿐입니다. 부활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만이 부활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Immortality, 소위 영혼불멸같이 그런 이론도 아닙니다. 물론 옛 생명의 회생도 아닙니다. 특별히 윤회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며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설명해주는 또 증거해 주는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요 우리에 대한 약속이요 우리의 생명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그 어느 때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구속사적인 사건입니다. 첫 열매가 되십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우주적인 사건이며 구속 사건이며 동시에 부활에 대한, 부활 생명에 대한 증거며 우리에게 향하신 예표요 우리 생명에 향하신 약속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죽음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은 동물성인 죽음이요 하나의 자연현상이올시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은 절대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일 뿐이지 그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요. 오히려 자유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출생의 신비입니다. 성장의 신비입니다. 요새 뭐 DNA니 혹은 유전학이니 유전공학이니 해서 많은 연구를 합니다마는 뭐 그 '유전자를 읽었다. 해득했다' 뭐 이런 얘기들이 신문에 납니다. 굉장한 것처럼. 문자 그대로 해득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의 세계를 요만큼 해득 좀 해놓고 뭘 다 알고 문제의 해결이라도 난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요. 여러분, 여러분 생전에 죽지 않을 약이 나오리라고 착각하진 마세요. 죽어요, 그러니까 그런지 아세요. 그거는 아닙니다. 늙지 않는다고 해서, 안 늙어도 걱정이죠 사실은. 안 죽어도 걱정이죠. 여러분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에요. 그 성장이 신비롭고 유전인자가 신비롭고 죽음이라는 그 자체가 뭐냐? 점점 더 신비로워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과학자들이 더 신앙이 좋아요. 연구해갈수록 점점 더 깊은 세계를 발견해요. 놀라운 것이에요. 더욱 부활이라는 것은 더더욱 신비로운 것입니다. 참 생명이 육체라는 옷을 잠깐 입었다가 그 어느 순간에 벗어버린다고 생각하세요. 이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인간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을 "잔다." 잔다고 세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잔다. 예수님도 멀쩡하게 죽은 사람 지금 죽었다고 모두가 울고 있고 장례식까지 하고 있는데 "잔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관은 휴식이올시다. '잔다.' 잔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쉰다는 말이에요. 피곤해서 좀 쉬는 겁니다. 우리가 힘써 일하고 밤에 피곤해서 잡니다. 그 잠자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쉬는 것이요. 그리고 잔다는 말은 그 속에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잠자는 것 가만히 보면 애들 자는 건 예쁩니다. 어른 자는 건 영 아니에요. 게다가 코를 드렁드렁 골다가 숨넘어갈 것같이 꿀꺽거리면은 아이구 이거 참 힘들어요. 그래서 내가 잠드니 말이지 깨서 그거 계속 들으라고 그러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그 안에 있으니까. 죽은 것 같으나 생명이 그 안에 있어요. 그게 자는 것이에요. '잔다'는 말은 '생명이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혹 여러분이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아프고 답답하면 죽었을까? 아이고 얼마나 숨이 답답할까?' 그리 생각하십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죽음은 자는 것과 꼭같습니다. 생명은 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잠들어서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과 꼭같은 현상으로 죽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지옥 갈까 걱정하세요. 그거나 걱정하세요. 또 주님 앞에 가서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까 그런 걱정을 하더라도 죽는 자체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고 숨막힐텐데 그거 어떡하지?' 그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러분 잠들 때 그 걱정했습니까? 잠자는 것은 죽는 연습입니다, 그게. 매일매일 우리는 죽는 연습을 하고 죽었다 살았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잠이라는 것은 현상이야 어떻게 전개되든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 속에 생명 있다' 그 말이요. 또 하나는 잠이라는 말은 잠에서 깰 때가 있다. '깬다' 그 말이요. 지금은 자지만은 깨어날 때가 있어요. 그것을 내다보기 때문에 "잔다" 그랬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죽어서 장례식을 하는 사람을 보고도 "잠들었다." 예수님의 능력이 플러스알파로 역사할 때 그건 깨어나게 되는 거죠. 그 깨어날 아침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잔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평화롭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게 잔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잠이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잔다. 이게 문제올시다. 그리스도 안에 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잔다. 여기에 죽음을 넘어서는 엄청난 신비가 있는 것이올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를 믿고 그의 능력 안에 사는 거요. 그리고 자유한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 산다, 그리고 잠들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잔다고 말했습니다.

 

스텐버그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The Psychology of Love 라고 하는 책에서 사랑의 3요소를 말합니다. 우리가 인격과 인격관계에서 서로 믿고 사랑한다는 게 뭘 의미하느냐? 그것은 바로 Intimacy - 친밀감을 말한다는 것이죠. 가깝게 느낍니다. 상대방의 행복을 증진시키고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찹니다. 지시를 받으려는 마음, 지시하려는 마음으로 꽉 찹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거요. 여러분,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그 철없는 어린 아이들, 부모님의 사랑을 가까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잠깐만 떠나도 못삽니다. 그런데 따로 떨어져 노는 것 같이 장난감 가지고 놀고 친구와 같이 노는 것 같아도 지금 부모님이 여기 계시고 부모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고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친밀감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를 떠나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어요. 그러한 그러한 느낌이 실제적으로 육체의 생활 속에도 나타나고 있어요. 이 친밀감, 마치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그러면서 어머니의 눈을 쳐다보고 있는 거와 같이 바로 그러한 관계 친밀함이 있어요. 이것은 두 생명의 연합을 말하는 거죠. 또한 둘째는 정열이올시다. Passion 입니다. 관심이 있고 사랑과 사랑의 대상에 몰두합니다. 그의 사랑을 담뿍 받으면서 아무 구속이 없습니다. 자유하며 행복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Total Commitment 올시다. 전적으로 위탁을 하고 헌신합니다. 독립되게 별도로 걱정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에게 다 맡기었어요. 내 생명을 그에게 다 위탁해 버렸어요. 그리고 그의 뜻을 그대로 나의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자,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고 그리고 죽었어요. 이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자는 사람이다. 잠깐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장차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다. 지금도 영원히. 생명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요 그것은 헌신이요 그것은 행복이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엄청난 자유와 용기입니다. 그것으로 영원한 세계까지 이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활 생명 속에 사는 오늘의 생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마더 테레사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선물' 이라는 책에서 한평생 인도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생을 바친 이 수녀 테레사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선교적으로 사는 모습이다. 선교적으로 산다, 선교사적으로 산다. 다시 말하면 사명을 지니고 사는 거예요. 이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거요. 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요.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거예요. 증인으로 살고 선교사적으로 사는 것이요. 엄청난 사명을 지니고 삽니다. 두 번째는 명상가로 산다 그랬어요. Meditation,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명상이란 한가지만 생각하는 거요. 거기다가 사랑과 정열을 쏟는 거예요. 그 외에는 전혀 생각지 않는 거예요. 이게 명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쳐다보고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아요. 명상가적으로 사는 것이다. 셋째는 보편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의인이면서도 죄인 속에 삽니다. 선하면서도 악한 사람들 속에 보편적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마는 죄악 세상에 아무 불평 없이 그대로 흡수되어 살아갑니다. 철저한 보편성, 여기는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부하건 가난하건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철저한 보편성을 지니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순성을 말합니다. Simplicity. 그렇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말합니다. 심령의학에서도 말합니다. 병이 왜 생기느냐고요? 복잡성 때문에 생깁니다. 딱 한가지만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은 엄청난, 병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생각하고 저 생각하고 생각이 분열 분산되기 시작하면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니 병균을 이기지 못합니다. 단순성, 사랑에 대하여 단순하고 믿음에 대하여 단순하고 생의 목적에 대해서 단순하고 사명감에 대해 철저하게 Simple mind, Simplicity, 집중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생애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독일의 젊은 신학자였던 본 회퍼, 순교자입니다. 그는 기독교 윤리라는 책에서 에케 호모(ECCE Homo)라고 하는 유명한 말의 논문을 씁니다. 에케 호모라는 말은 Behold this man, 이 사람을 보라, 하는 말이요. 예수를 빌라도 앞에선 예수를 지칭한 말입니다. 그런 예수를 이런 각도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우상화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우상화하지 않았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직도 뭘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잘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처럼 깨끗이 지워버리세요. 자기가 우상화되는 것처럼 맹랑한 게 없어요. 별것도 아닌 것이 대단한 거처럼 착각을 하고 있어요. 잊어버리세요. 예수는 자기를 철저하게 우상화하지 않았다. 두번째는 성공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실적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내가 뭘 했노라. 예수님 병 고치고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랬어요. 그 많은 역사를 하고도 오히려 피했어요. 실적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했다면 뭐 했다는 얘기입니까? 여러분 자기 공적을 성공을 절대로 우상화해서는 안됩니다. 셋째는 죽음을 우상화하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 앞에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그늘이 전혀 없이 살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근심이나 공포가 전혀 없이 깨끗하게 정말 영원을 지향하며 가장 임시적인 세상을 아주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 부활사건 역사적인 부활사건이 이 제자들을 통해서 부활 신앙으로 화합니다. 부활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부활 신앙이 되고, 부활 신앙이 될 때 부활 생명이 됩니다. 이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빌라도가 이것을 긍정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막을 길이 없다고요. 부활생명은 가장 위대한 능력이요 지혜요 삶의 힘인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의 보장을 받고 그 믿음에 살고 그 사랑으로 살고 그 감격에 살고 그 능력에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가장 중요한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때때로 외면하고 스스로 자기를 우상화하면서 허망한 일에 끌려들며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며 부활 사건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부활 신앙을 새롭게 함으로써 순전하고 단순하고 보편적이고 거룩한 영생으로 이어지는 귀한 생을 오늘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할 그날의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 승리 생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죽음을 준비하기

살전 4:13-1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겹겹의 마음을 갖는 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터놓질 않아서, 꽁꽁 감추어진 마음을 탓하기란 쉽습니다. 사람들은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한결같은 마음, 담백하고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 주길 바라지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은 오히려 더 쉬울 수 있습니다. 그저 바로 이 순간, 내 마음이 가는대로 행하기만 하면 되지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내 마음을 그대로 받아 달라고, 요구할 수도 기댈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마음을 감추거나 억누르곤 합니다. 또 함께 젖어서 무너져 버리지 않도록, 어느 한쪽으로 흘러넘치는 마음은 가둬 둔 채로,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두 마음 세 마음인 채로 살아갈 때가 더 많기도 하지요. 그렇게 마음이 가는대로 행하는 것 보다는, 겹겹인 마음을 견디는 게 더 힘들 수 있습니다. 또 그런 견딤 때문에 여러 겹의 마음은 더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요. 그런데요. 청자를 즐겨 빚는 도예가 이윤범이 말하는 청자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런 견딤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흙에는 철분이 많아서 우리만이 만들 수 있는 청자를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냥 푸른빛이 아니라, 흙색갈이 배어 나와서 두 겹으로 우러나오는 그 느낌이 깊지요. 마치 검은 안감을 댄 자줏빛의 한복 치마가 아주 깊은 맛을 내듯 이요.”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깊은 곳에 감추어진 철분의 윤기까지 더해져서 두 겹으로 빛나는 그 청자를, 검은 안감을 댄 자줏빛의 한복 치마와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큰마음 속에 자잘하게 흔들리는 여러 마음들을 가둬두고, 조용히 견디거나 바라보는 일, 그건 느낌을 즉시 펼쳐 보이는 생동감에 비하면, 심심하고도 답답하겠지요. 하지만 내 힘으로 어찌 해볼 수 없는 것들 앞에서의 조용한 침묵은, 쓸쓸함 위에 평화라는 은은한 빛을 더해주기도 합니다. 원하는 것은 곧 바로 가지라고, 당신이 가질 수 있다고 과장광고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잘 접어 감추어둔 몇 겹의 고요한 마음이 더 귀해 보이까지 합니다.

 

2. 부유와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종말론은 멀게만 느껴지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주적 파국이야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니 미래적이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들 한 개인 개인의 종말은 언제나 문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우주적 파국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6)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때문에, 죽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죽지 않고 주님을 만나고 영원히 살게 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보다 진지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자신의 장례 계획서를 준비하신 분이 계십니까? 죽음을 남의 얘기처럼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연속성을 갖는 주제이지, 결코 불연속성의 주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삶을 더욱 활성화시키려고 한다면, 죽음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삶이 우리 주님의 능력의 손아래 있는 것처럼, 죽음도 주님의 손아래 있음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 때 삶의 진정한 가치와 목적이 뚜렷해 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오늘 제2 독서인 살전 4:13-18절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일상과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이는 것들입니다. 특별히 16절과 17절이 낯섭니다. 주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 호령과 나팔소리가 들리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서 살아 있던 사람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고 합니다. 마치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만한 이야기들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기독교인들을 정신 나갔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님이 재림할 때 자신들이 실제로 공중 부양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그 집단에 속해 있던 기독교인들은 휴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정한 날짜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자신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중으로 들림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 명시적으로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니 휴거가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일단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여기에 썼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이 처한 특별한 상황이 행간에 들어있습니다.

 

재림의 지연

 

본문 시작인 13b절에서 바울은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쓴 다음에 본문이 끝나는 18절에서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뭔가 슬퍼할만한 일이, 그리고 위로받을만한 일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실제로 믿었습니다. 이에 대한 직간접적인 흔적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요 21:15-25절은 부활 후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으로 사도의 직분을 맡긴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고난도 당하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는 옆에 있던 요한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거기 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요한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행 2:43-47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원시 공산주의 형태로 살았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필요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행 4:32-35절에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행 5장에는 부동산을 팔아서 일부를 감춰두고 나머지만 사도들 앞에 가져왔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돌연사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하고 세상이 끝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해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기도 전에 교인들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여기서 핵심 문제는 재림의 지연입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것들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재림 지연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절절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을 잠간 돌아보십시오. 그들이 추종하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패입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십자가에 달린 자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를 믿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경험에 근거해서 십자가 사건을 오히려 구원의 길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부활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힘들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신문 기자가 현장을 확인하고 육하원칙에 따라서 보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부활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어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를 재림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재림을 기다리면서 함께 지내던 교우들이 죽기 시작했고, 예수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의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죽은 교인들과 가족들은 부활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위해서 오늘 본문을 기록했습니다.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 그리고 위로받아야 할 근거가 무엇인지를 여기서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당한 슬픔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그들을 다시 못 만난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는 자들을, 즉 실제로는 죽은 자들을 예수님의 재림 때에 데리고 오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1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바울의 이런 설명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5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속 300킬로미터 속도로 달리는 KTX 기차와 시속 1천 킬로미터 속도로 날아가는 국제선 비행기를 그들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들보다 우리는 더 건강하게, 더 풍요롭게, 더 오래 삽니다. 그래서 그들보다 우리가 크게 앞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건 사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이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이런 방식으로 삶을 경험했기 때문에 같은 교인들과 가족들의 죽음, 그리고 재림 지연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낙심했습니다. 그게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묵시적 안목

 

바울은 이 문제를 당시의 특별한 글쓰기 방식으로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그것이 설교 앞부분에서 잠간 언급한 16, 17절에 나오는 휴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묘사된 것은 특이한 현상이니까 그 내용을 간추려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의 호령,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며, 살아남은 자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올라가고, 공중에서 재림의 주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종말과 휴거에 대한 묵시문학적 묘사입니다. 이런 휴거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화가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주의 재림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묵시문학의 글쓰기 형식을 빌려온 이유는 세계와 생명과 그것의 완성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열거된 묵시적 현상들이 가리키는 것은 마지막 때 세상이 완전하게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일시적으로 모양이 바뀌는 게 아니라 아예 근본이 바뀌는 겁니다. 본문에 나오는 구름과 하늘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십시오. 성서시대 사람들에게 구름과 하늘은 하나님의 생명이 은폐된 곳을 가리킵니다. 생명의 비밀이 숨어 있는 곳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주기도나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도신경도 다 이것을 가리킵니다. 즉 하늘은 단순히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을 가리키는 아니라 생명의 신비, 그 비밀을 가리킵니다. 그 신비와 비밀이 지금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을 가리켜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름으로 끌려올라가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와 세상의 모든 비밀이 완전히 노출된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이 되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다 변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차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억울한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이들의 불행도 없습니다. 지금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주 사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죽음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죽으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부자로 살았던 사람의 몸이나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의 몸이나 아무런 차별 없이 모두 재와 먼지가 될 뿐입니다. 지식인으로 살았던 사람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았던 사람도 구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인기를 끌었던 사람이나 무명의 촌부나 차이가 없습니다. 90살 이상 장수한 사람의 몸도 원소로 해체되고, 한창 젊었을 때 돌연사한 사람의 몸도 원소로 해체됩니다. 거기서는 전혀 다른 힘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심판하고 통치할 것입니다.

전혀 다른 힘이 무엇일까요? 그게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묵시문학 사상가들은 그를 인자(人子)라고 생각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인자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지만 부활 승천하셨고, 때가 되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겁니다. 그 심판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재림, 즉 주님의 강림이야말로 우리가 완전히 변화되어 구원받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삽니다. 그런 기다림만이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불안과 좌절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재림공동체로서 이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걸 걸었습니다.

 

깨어 있으라

 

오늘 제 3독서는 마 25:1-13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이 결혼 잔치와 같다는 비유입니다. 유대인들의 고대 결혼 풍속에 따르면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에 갔다가 밤중에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신랑이 돌아올 때 동네 처녀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하여 춤과 노래를 곁들이며 잔치를 베풉니다. 여기 열 명의 처녀들이 신랑 집에 모였습니다. 그중의 다섯 명은 등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했지만 다른 다섯 명은 어떻게 되겠지 하고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이 예상 외로 늦게 왔습니다. 처녀들은 졸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일어나서 등불을 밝혔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명의 처녀들은 등불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다섯 명에게 기름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바른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기름을 나누면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까지도 등불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구하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왔지만 이미 결혼 잔치집의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닫힌 문은 아무리 사정해도 다시 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비유를 정리하면서 예수님은 마 25: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비유와 비슷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살전 5:1-11절에도 나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6절) 이런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에 영적인 주파수를 맞추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삶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성경구절을 읽거나 설교를 들어도 마음의 설렘이 없습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진정성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도 이런 이야기에는 시큰둥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에서도 있었고,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계속되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재림의 재연으로 인해서 신앙적인 혼란을 경험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일상의 시간 경험에 길들여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시간의 비밀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를 깨닫고 믿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세상의 비밀을, 하나님 통치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이런 은총을 간구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재림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두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일상의 엄청난 무게를 쉽게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과 갈등을 겪고, 돈 문제로 유치하게 행동할 때도 있고, 허무의 심연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님의 재림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보다 더 위태롭습니다. 더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재림의 빛을 느끼지만 실제 삶의 무게를 피할 수 없다는 딜레마를 견뎌야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여기서 ‘이러한 말’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은 그런 이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혼자서는 일상의 과잉이라는 이 현실을 뚫고 나가기 어렵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대부분이 돈, 출세, 스펙, 자식, 사업, 또는 어떤 이들의 스캔들, 간혹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이런 것에 재미를 붙이면 더 이상 다른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격적이고 고상하고 재미있게 산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어떤 교우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은 세상살이가 재미없다고 말입니다. 인생살이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해서 빈둥대면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세상일의 근본적인 상대성과 한계성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런 깨우침은 신앙의 토대입니다. 젊은이들이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과도한 열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런 열정을 인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충분한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2천 년 전 출발부터 전혀 다른 관심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놓치면 기독교 영성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완성될 주의 강림에 영혼의 촉수를 민감하게 맞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인가요?

 

 

 

서로 위로하라

Ⅰ. 아는 것

 

1.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과 주권이 결합되어 하나님의 주권이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용어에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파악하고, 주권이라는 용어에서 주권의 개념, 용도, 사용방식에 대해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서 ‘하나님’에 포인트를 둘지 ‘주권’에 포인트를 둘지 결정해야 합니다. 기독교인, 성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이 주권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주권’의 사전적 의미는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능력’이고, 주권(권세)을 가진 자는 자기가 의도하는 바를 자기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20:25)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마20:26)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권세’가 ‘권세’라는 개념에 하나님이 따라다니지 않습니다. 하나님조차도 주권을 쓰는 방식이 세상과 같고, 하나님조차도 권세를 부리는 태도가 죄와 같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필요가 없고, 우리가 굳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온통 하나님이 하나님 마음대로 한다고, 하나님 뜻대로 한다고, 하나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하나님이 권세가 있다고, 하나님이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고, 하나님은 독재라고, 하나님이 하시면 어느 누구도 불평하면 안 된다고, 따지면 안 된다고, 인간이 할 일은 그저 복종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왜곡입니다.

 

2. 하나님의 대리자

주권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를 한 사람에게 맡기셔서, 마치 사람을 대리자로 세운 것처럼 여겨서, 본인이 하나님의 대리자 행세를 하는 것은 성경과 다릅니다. 하나님도 권세를 부리지 않으셨는데 사람에게 권세를 부리도록 위임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권세를 사용하신 대상은 오직 죄, 사단에게입니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비록 죄인일지라도 절대로 이기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원망 다 받아주시고, 사람의 불평 다 해결해 주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해도 다 수용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비유를 통해 언급하는 것이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토기장이 비유에는 두 부류의 토기장이가 나옵니다.

일반적인 토기장이의 소개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으냐”(롬9:21)이고, 토기장이히신 하나님의 소개가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고”(롬9:22)입니다. 이미 용도가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정해져 있는데 하나님 좋자고, 유익하고자가 아니고, 하나님 내키는 대로가 아니라 철저하게 상대방을 위하여,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원래 하나님의 뜻이 달라지는 것도 수용하고,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 변경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권세를 사용하는 원래,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Ⅱ. 서로 위로하라

 

1. 알지 못함을 원하지 아니하노니

4:13절의 핵심은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즉 ‘알아라’입니다. 성경의 표현은 인간에게 요구하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루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알아라’는 ‘너희가 연구해라, 너희가 찾아내라, 너희가 스스로 알도록 노력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쳐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보라’는 ‘너희가 보아야 한다’, 나중에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으라’도 인간이 듣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초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들려주신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꼭 들을 수 있도록, 절대로 놓치지 않도록 정확하고, 분명하게, 절대적으로 들려주신다는 선포입니다. ‘받으라’도 ‘인간이 받아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닙니다. ‘줘야 받지?’라고 반응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받을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일하셔서 그 열매, 그 결과가 인간에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일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고, 열매를 만들어내시는 책임자가 하나님이십니다.

 

2. 소망 없는 다른 이

13절에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부류는 ‘형제들’인데, 형제들의 특징은 ‘아는 자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소망 없는 다른 이’입니다. 소망이 없는 이유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요, 그들이 하는 것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모르기에 두려워하고, 모르기에 불안해서입니다. 형제들의 특징은 하나님,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무조건 나를 위한 것이기에 반드시 나에게 선한 결과가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것은 슬퍼하지 않은 것, 다르게 표현하면 기대하는 것,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너무나 명백한 기대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줄로 알고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의 유익이요, 이것이 신앙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선포가 성도를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숙한 성도의 신앙 간증을 들어보면 언제나 결론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 어떤 사건을 경험한 후에, 나중에사 ‘돌아보니 모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누림의 성도들은 어떤 상황,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도전에, 나중에가 아니라 시작도 하기 전에 ‘모두 하나님이 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인간이 극성을 떨어서 은혜로운 적이 없습니다. 신앙의 역사에서 인간의 열정이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을 감동시킬 것이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 여러분에게 은혜를 끼칠 것이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이 들려지게 할 것이고, 하나님이 고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자라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사람의 열심, 사람의 열정, 사람의 믿음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습니다.

 

3. 서로 위로하라

본문에는 ‘자는 자들에 관하여’ 온통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15절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17절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형제들이 할 일, 본문을 읽는 저와 여러분 성도들이 할 일은 13절과 18절에 나옵니다. 13절에서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나하노니’ 간단히 ‘제발 알아라’이었고, 18절은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입니다. 신앙은 당근으로 성도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고 채찍으로 성도를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말씀으로, 진리로 성도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더누림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아셔서 하나님으로 인해, 신앙으로 인해 위로받으시고 모든 순간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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