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
수 19:40-51
40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41 그들의 기업의 지역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42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43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44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45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46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47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단이라 하였더라
48 단 자손의 지파가 그에 딸린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들의 마을들이었더라
49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50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51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수 19:41-51 / 경계선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42)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43)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44)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45)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림론과 46) 메얄곤과 락곤, 그리고 욥바 부근 경계선까지이다. 47) 그러나 단 지파의 경계가 그들에게는 살기에 너무 좁았다. 그래서 단 지파 사람들은 올라가 레센을 쳐서 무찌르고 그 성을 차지하고 살았다. 그러고는 레센을 자기들 조상의 이름을 붙여 단이라고 불렀다. 48) 단 지파 사람들이 각 씨족에 따라 그들 몫으로 차지한 성읍과 각 성읍에 딸려 있는 마을들은 위와 같다. 49) [땅 분배를 마치고 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대로 물려줄 땅을 다 분배한 뒤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도 차지하고 살아갈 땅을 떼어 주었다. 50) 여호와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달라고 하는 성읍을 그에게 주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산악지대에 있는 딤낫세라를 달라고 말해 두었다. 여호수아는 이 성읍을 다시 잘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51)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땅을 나누어 받았는가를 이야기하였다. 대제사장인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각 지파에 딸려 있는 집안의 어른들은 실로에서 여호와께 여쭈어 땅을 나누는 제비를 뽑았다. 실로에서 만남의 장막문 앞에 모여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땅 분배가 끝났다.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과 성읍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곳은 레센 지역을 쳐서 취하고 단이라 칭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특별히 분배받은 땅에 대해서 소개하고, 열두 지파의 땅 분배가 완료됩니다.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40-48) 마지막으로 단 지파가 땅을 분배받습니다. 단 지파는 동쪽으로는 베냐민 지파, 남쪽으로는 유다 지파, 북쪽으로는 요셉 자손,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경계로 하는 가나안 중앙 지대를 분배받습니다.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과 성읍에는 아모리 족속의 원주민과 블레셋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쫒아내고 정복하여야 할 땅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단 지파는 눈을 돌려 레셈으로 나아가 그곳을 쳐서 자신들의 땅으로 삼고 단이라 칭합니다(47). 이처럼 단 지파는 영토의 부족함을 스스로 개척해서 해결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원주민들을 쫒아내지 못하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레셈을 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땅을 나타낼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이 생겨납니다(삿 20:1; 삼상 3:20). 단 지파가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 지파들 중 최북단에 정착하게 된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좁은 땅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맞서 싸우며 해결하지 않습니다. 크고 강한 적들이 없는 새로운 땅으로 이주합니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단 지파는 이민족의 침입에 계속하여 시달렸고, 우상 숭배의 본거지가 되기도 합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 땅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루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특별 기업(49-50) 이스라엘의 땅 분배 이야기는 여호수아의 땅 이야기로 마쳐집니다. 여호수아가 스스로 자신에게 땅을 분배하였다면 권력 남용이라는 오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 땅을 주었습니다(49).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살아서 가나안 땅을 밟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이렇게 성취됩니다(민 14:30). 여호수아는 스스로 나서지 않고 백성들이 지도자의 노고를 치하하여 그의 몫을 챙겨주며, 하나님의 말씀이 아름답게 성취됩니다.
열두 지파의 기업 분배 완료(51) 기업의 분배가 완료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지 700여 년이 흘렀지만 그 약속을 정확하게 성취하십니다.
적용: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땅은 그냥 주어진 땅이 아니라 정복하고 차지해야 할 땅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 믿음으로 싸워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워싱턴 시를 지나가다가 한 흑인 청소부가 있는 대로 욕설을 퍼붓고 짜증을 내면서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곁에 조용히 다가가 “이 보게 젊은이,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맡기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겠나?” 하며 등을 두드리며 계속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청소를 할 때에는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듯,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괴테가 작품을 쓰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게나.”
< 설 교 >
작은 기업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수 19:40-51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수 19:40).
하나님이 맡기신 기업이 작아 보이지만 그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함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이 채우시기에 항상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자가 성도의 자세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큰 것을 맡기십니다.
단 지파는 마지막으로 기업을 얻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만족하지 못한 듯 합니다. 단은 에브라임과 베냐민, 유다 지파에 둘러싸여 있었고 심지어 아말렉이 근처에 있어서 자신들의 빼앗기기도 합니다(삿 1:34). 단 지파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 감사하지 아니하고 납달리 지경의 레센을 취하여 레센을 단이라 했습니다. 단 지파는 갈릴리 북쪽으로 가서 한 성을 차지한 후에 그곳을 단이라 했고, 그 후에 여로보암이 우상 숭배하는 신당을 만든 곳이 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기업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아말렉을 물리쳐야 하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오히려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각 지파별로 기업의 땅을 나눈 후에 자신의 기업을 얻습니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구한 후에 그 성을 재건하며 거했습니다. 유다 지파의 갈렙은 처음으로 기업을 얻었지만, 여호수아는 볼품없는 기업을 얻고 오히려 그 성을 재건하여 거한 것은 지도자의 겸손과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작은 것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함을 발견하고 그 은혜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기업
수 19:49-51
여호수아는 모든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한 다음에 자기 기업을 받았습니다. 자기 기업을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서 받았습니다. 49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을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감사를 표하는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탁월한 위용을 발휘한 여호수아가 영예로운 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무도 자신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한 개인을 부자로 만들고 있다는 불평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자신이 본을 보여 사욕을 전혀 갖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과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기업의 공정성 있는 분배만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두의 안녕이 확보되기까지는 자신의 이익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 두 차례 희귀한 용맹을 떨친 후에 사리사욕을 취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는 온 땅이 분배될 때까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보상 자체에서도 그의 동일한 절제와 검소함이 그대로 엿보입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위해 요청한 성읍은 단지 돌더미에 불과했는데 그 까닭은 그 곳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그 곳에 아직 성읍이 세워진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원한 것은 여호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탐심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동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미 베푸신 영예를 확증하려 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조금도 야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본 장의 마지막에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그 땅을 분할하는 일을 마쳤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미 확정된 경계성의 영구성을 지시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임의로 이동하면서 침해할 수 없는 경륜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땅을 분배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마지막 절에서 엄숙하게 결말을 짓기 전에-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하도록 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여호수아에게 할당된 특별한 기업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고 위대한 사 람이며 가나안 점령을 지휘한 사람으로서 자기와 자기 가족이 가장 먼저 기업을 갖겠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맨 나중에 기업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 모든 일이 자기 나라의 선을 추구한 것이지, 자기의 사욕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이 모두 정착할 때까지 떠돌이로 지내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기 개인의 만족보다는 공공의 복리를 더 위하는 위대한 본보기를 만인에게 남기었습니다.
2.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서 자기의 기업”을 소유했 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갈렙에게 기업을 가지도록 하셨을 때(14:9) 여호수아에게도 마찬가지로 약속을 주셨을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선택을 하는데 상당히 유의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소유한 이 분깃은 다른 분깃보다도 배나 기분 좋은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 섭리에 의해서 남겨진 것이 아니라 특별한 약속에 의해서 남겨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여호수아는 에브라임산에서 자기 분깃을 선택했습니다 이 산은 자기 지파에 속한 산이며 거기서 자기 자신을 그 공동체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특전을 사용해서 다른 지파의 기업 가운데서, 즉 유다 지파의 기업 내에서도 자기 분깃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자기 자신을 다른 백성들과 구분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 인간의 우월과 명예가 자기 가족이나 국가를 수치스럽게 하고 자기를 고립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회막은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내에 세워졌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가 그 회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머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4. 49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에게 기업을 주었다”고 기록되 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허락에 의하여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얻은 것입니다. 갈렙이 헤브론을 받은 것도 특별한 조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얻은 것은 그의 겸손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의 동의와 승낙이 없이는 기업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어떤 사람보다도 위대했지만, 전체 회중보다는 훨씬 작은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자기 가족의 재산까지도 하나님의 지도 아래서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서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5. 그 분깃의 성읍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다시 건축해야만 했 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성을 중건하고 거기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지파 백성들은 자기들이 세우지 않은 집에서 살아가는데 여호수아는 스스로 집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또 각 지파의 족장들이 이제 각 지파의 기업 분배를 완료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하면 완전한 것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 각각 기업이 분배되었습니다. 각자가 받은 분량대로 장사하여 이익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기업을 지키는데만 그칠 것이 아니라 기업을 확장시켜야 합니다. 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고 방어도 해야 하며 더 나아가 장막의 말뚝을 견고히 하여 터를 넓히며 휘장을 아끼지 말 것입니다(사 54:2).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므로 은혜에는 욕심을 더해야 합니다. 여기에 발전이 있고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분량에까지 성장할 것입니다. 기업을 잘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의 그 비참했던 역사들이 우리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기업을 지키는 길은 적을 완전히 추방하는 길입니다. 죄를 완전히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다시 재침범 못하게 방어하고 아예 죄를 멸절시키는 일입니다. 이 힘은 십자가만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소유함으로 이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받은 축복을 나누라
수 19:49-51 / 홍현수 목사
제가 시골에서 살 때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놀던 놀이 가운데 땅 뺏기가 있었습니다. 별다른 놀이 기구가 없던 옛날에 가장 재미있던 놀이였습니다. 넓은 마당 양쪽에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힘껏 한 발짝을 뛰어 줄을 긋고 이것이 내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내 땅을 뺏느라 애를 써서 넓은 땅을 마련해 놓고 한참 기뻐할 때 어머니가 "얘들아, 들어와서 손씻고 저녁 먹어라"하고 부르시면 그렇게 열심히 뺏어 놓은 그 소중한 땅(?)을 다 내버리고 집으로 달려가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오늘 이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땅뺏기를 하고 있습니다. 땅 투기, 아파트, 주식, 예금통장, 고가의 골동품, 하여튼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던지 소유하려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저녁에 어머니가 부르시면 지금까지 열심히 따 놓았던 땅을 다 내버리고 저녁 먹으러 집으로 가듯 인생의 황혼에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많은 것들을 모두 다 내놓고 가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받은 축복을 나누라"는 제목으로 인생을 참으로 아름답고 존귀하게 살아가는 비결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축복 받는 비결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시지만, 진정으로 지혜로운 인간은 받은 축복을 나누는 비결을 배우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정복한 땅을 나누는 이야기가 여호수아 13장부터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은 이제 모든 지파를 향한 기업 분배가 마무리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같은 영광과 안식은 그들의 능력과 수고의 열매가 아닙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입니다. 이 속에 있는 분배의 원리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 분배의 원칙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신 8:1, 7-9)고 말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들이 정복한 땅은 하나님께서 짧게는 45년 전에, 길게는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갈 때 "너와 네 자손이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 주마" 약속하셨던 약속을 475년 만에 이뤄주신 것입니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 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수 1:5-6)라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가나안 땅은 자기들의 힘이나 재주나 노력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땅만이 아닙니다. 땅과 함께 그 땅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인데 그것은 그들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재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약속을 지키시려는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어느 하나 내 힘으로나, 내 재주로나, 내 능력으로 이룩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 왕은 평생에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자재를 전부 준비해 놓고 또 자기가 드릴 수 있는 재산 전부를 봉헌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길이 길이 찬양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위대함과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존귀가 모두 주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도 주의 것입니다. … 부와 존귀가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니, 사람이 위대하고 강하게 되는 것도 주의 손에 달렸습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가 지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합니다. 제가 무엇이며, 저의 백성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힘을 주셨습니까? 모든 것을 주께서 주셨으므로,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바쳤을 뿐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올린 후에 자기의 아들 솔로몬에게 왕관을 씌워 왕위를 계승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이 있습니까? 돈이나 재물이나 재산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재능입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위가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직 여러분과 제가 살아 있습니까?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언제든지 주님께서 달라 하시면 모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저녁 먹으러 가는 어린 시절처럼, 모든 것을 놔두고 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웃과 더불어 나눠가져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워하는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과 사랑과 약속의 성취로 주신 가나안 땅을 12지파에게 각각 분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분배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 원칙을 살펴보면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첫째, 함께 의논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 눈의 아들 여호수아, 각 지파 별 족장들이 함께 모여 의논했습니다. 그때 모든 행정 책임자는 여호수아였습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이나 분배하는 일을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았지만, 여호수아는 그 일을 자기 단독으로 처리하지 아니하고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 엘르아살, 그리고 각 지파의 대표인 족장들(소위 실무자들)과 함께 의논했습니다.
우리들이 직장에서 일할 때나, 가정에서 하는 일이나, 더욱이 교회에서 일할 때, 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추진하는 것이 쉽기도 하고 빠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무슨 일이든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것이 좋고, 둘이 하는 것보다는 열이, 열이 하는 것보다는 백 명이 함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그 땅을 분배할 때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다음에 그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는 일에 관한 원칙을 여호수아 14장 1-2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우두머리들이 다음과 같이 분배하였다. 주께서 명하신 대로 그들은 제비를 뽑아, 아홉 지파와 둘로 나뉜 반쪽 지파에게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주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기 때문에, 각 지파의 몫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에 따라 분배되어야 했습니다. 뛰어난 지혜로써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했던 여호수아도 모두 한 민족인 이 많은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는 일을 공정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여러 기업을 나누어주신 하나님의 권위만이 각 지파에게 어떻게 기업을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방법은 이미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입니다. 그것이 제비 뽑는 방법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제비를 뽑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우연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배제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신앙적 결단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지혜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가장 공평하신 결정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의 상황을 한번 짐작해 보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 보면, 각 지파별로 인구의 숫자가 다릅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땅의 형편으로 보면 땅은 평야지대가 있고 산간지대가 있으며 계곡이 있고 해변이 있습니다. 나무와 숲이 있는 옥토가 있는가 하면 돌과 모래가 많은 박토가 있었습니다. 이미 나누어 놓은 땅은, 지형에 따라 조금 넓기도 하고 좁기도 했습니다. 서로 좋은 곳을 차지하고 싶을 것이며 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는 것은 이 인간의 모든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한다는 신앙적 결단인 것입니다. 그것이 혹 인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셋째는 이 제비를 뽑은 장소가 하나님의 회막 앞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는 깊은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유다 지파는 자기들의 기업을 시므온 지파에 나눠주었습니다.
19장 1절에 보면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9절에 보면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은 "유다 자손의 몫이 필요 이상으로 크기 때문에, 시므온 자손이 그들의 몫을 유다 지파의 유산 가운데서 받은 것이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 지파 자손들의 마음 씀씀이를 통해서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게 사는 길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 자손들은 자기들이 받은 땅이 지나치게 넓다는 사실을 알고, 시므온 지파에게 나눠주도록 한 일을 통해서 자기 자신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 12:1-3)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모든 민족의 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이유는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고, 그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많이 가지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지 않고, 나에게 주신 것, 그것이 비록 많은 것이 아닐지라도 남에게 나눠주는 것을, 나눠줄 줄 아는 넓은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아는 믿음으로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우리 기독교는 더 많이 가지는 것만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알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되도다"(행 20:3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나에게 축복으로 주신 것을 남과 더불어 나누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지파들은 다 작든 크든 자신들의 기업을 분배 받았는데,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에 속한 땅에 거하며 기업을 물려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찌 보면 다른 지파와 비교해 볼 때 시므온 지파가 불이익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시므온 지파가 불이익을 당한 부분이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9장을 보시면 야곱이 죽으면서 자기 아들들에게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합니다. "너는 이런 축복을 받아라, 너는 이런 축복을 받아라." 축복을 하는데 유달리 이 시므온에게는 축복대신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여기 야곱 중에서 나누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는 말은 야곱의 후손인 열두 지파 중에서 흩어지고, 그 지파 중에서 소멸되어지는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 야곱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서 자기의 열두 아들을 놓고 축복했던 것처럼, 모세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무려 200만 정도 되는 엄청난 많은 수의 사람을 앞에 놓고 각 지파별로 축복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명기 33장을 보면 다른 지파는 모세가 다 축복을 하면서 시므온 지파는 축복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모세가 시므온 지파를 열두 지파가 축복 받는 그 자리에서 열한 지파는 다 축복을 받았는데 이 시므온 지파는 축복의 대상에서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할 때 시므온은 축복이 아닌 저주를 받습니다. 모세가 열 두 지파를 축복할 때 시므온 지파는 축복을 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과 관련해 시므온과 그의 후손들과 관련된 성경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실 네 명의 아내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들이 태어났으니 그 아들들이 사이에 갈등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특별히 레아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요셉이나 베냐민처럼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에게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자기가 처해있는 형편과 처지,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라헬이 낳은 요셉에 대해서는 굉장한 시기심과 미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들판에서 양을 칠 때 자기가 미워하고 시기하던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오게 되었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요셉이 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서 형들은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미워했던 배다른 형제를 잡아 죽이자는 것입니다. 죽여서 구덩이에 처넣어 버리자는 겁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이렇게 그들의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맏아들이었던 르우벤의 말대로 요셉을 죽이지 않고 묶어서 물이 마른 샘 속에 던져 넣었다가, 나중에 유다의 권유로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형들이 양식을 위하여 애굽에 갔다가 그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어있는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그들을 알아 보았지만,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여서 볼모로 한 사람을 붙잡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내용이 창세기 42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42장 24절에 보면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영악하고 차가운 성품의 소유자인 시므온이 요셉 살해 계획도 주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므온은 레위와 함께 자기 누이 디나가 세김의 추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세겜 사람들을 속이고 잔인하게 학살을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죽을 때 시므온과 레위 모두에게 '너희는 영원히 흩어지리라'고 예언했습니다.
또한,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밑에서는 아론이 백성들을 데리고 금송아지 섬기는 일을 획책했습니다. 모세가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노가 모세에게 임해서 백성들을 처단해야 했는데, 그때 그 처단하는 일에 나선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자기 백성을 처단하는 일에 나서기가 쉽지 않은데 이 때 레위가 나서서, 제사장 지파가 되고 회복이 됐습니다. 비록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이 없고, 열두 지파 속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으니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명예로운 흩어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을 듣고도 시므온 지파는 광야 생활에서 모압 여인과 음행하도록, 족장부터 성적 방종에 넘어가도록 획책하는 일을 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바알브올이라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 여인들과 더불어서 음란하면서 우상숭배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염병이 들어서 하루에 24000명이 죽어 가는데 그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므온 지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민수기 25장 14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디안 여자와 함께 죽은 그 이스라엘 남자는, 시므온 가문의 지도자인 살루의 아들 시므리이다(새번역)."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모세에게 반역을 시도하고 그리고 우상숭배하고 이방여인을 끌어들여서 음란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는데 넘어가게 했기 때문에 광야 생활 초기 59,300 명이던 그들이 22,200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죄로 인해 지도자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결국 시므온은 유다 지파에 합해져서 나중에는 존재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초라하게 흩어졌습니다. 열두 지파의 한 사람이니까 결국은 구원 받은 지파입니다. 모두 구원받았지만 이 땅에서 초라한 역할도 있고 멋있는 역할도 있습니다.
1절에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유다지파에 더부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어떤 모습으로 임하였느냐에 대한 결과입니다.
시므온은 주어진 역할에 순종했습니다. 유다 지파의 땅에 들어가는 것에 아무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열두 지파 중에서 나만 땅이 없는 거야, 왜 우리만 유다 지파 밑에 들어가야 하는 거야.' 이러지 않고 '내가 유다 지파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기만 해도 감사하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유다도 그들의 땅을 주는데 기꺼이 순종했고, 시므온도 순종을 했습니다. 이런 시므온을 보면서 유다가 많이 가졌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에게 기업을 나눠주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힘든 시므온을 받아들이는 유다 지파는 아름다운 영성을 가진 지파라고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 지파에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똑같은 환경과 제도, 사건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이 어떤 모습과 자세로 임하였느냐에 따라 그들과 후손들의 미래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이 시므온 지파의 영성과 삶이 아니라, 유다 지파와 같은 영성과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여호수아가 요구한 땅
단 지파에 대한 기업 분배를 끝으로 역사적인 가나안 땅 분배 작업은 완전히 끝을 맺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딤낫 세라를 기업으로 요구하여 받은 뒤 그 성음을 중건하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거합니다.
49, 5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49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50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여호수아의 기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떠한 명령을 내리셨는지 성경에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정탐한 12명의 정탐꾼 중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신실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갈렙에게 내린 축복을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내리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같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여한 갈렙은 가나안에서 가장 먼저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러한 권한이 자기에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분배의 소명을 완수하기까지 결코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강한 신앙의 모범으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요구한 딤낫 세라는 세겜 서남쪽 27km 지점으로, 이 지역은 불모지대나 다름없는 산간지대였으므로 여호수아 개인의 역할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큰일에 작은 보수로 만족한 사람입니다.
그가 기업을 얻은 다음 그 성읍을 중건하였다는 말씀을 보아 무너지고 황폐한 곳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일에 전념한 그 자체가 여호수아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이며, 하찮은 땅을 분배 받았다고 해서 그 기쁨이 감소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지도자로서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한 모범적 자세라 할 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도, 영적 지도자도 항상 이와같은 자세로 백성을 위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행한 수고에 대해 특권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종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특권만으로 자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와 같은 지파인 요셉 지파가 땅을 조금 줬다고 불평했을 때, 여호수아는 '너희 스스로 개척하라'고 처방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자기 지파를 객관적으로 보았으며, 자기 자신의 기업도 고향 땅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 세라를 구한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먼저 백성들을 위해 기업을 분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위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작은 성읍 하나를 기업으로 요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백성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할 줄 아는 참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모두 다 분배할 때까지 그의 몫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업을 얻지 못하는 지파가 없도록 그의 전심을 쏟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내 욕심은 완전히 버린 무욕의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인격의 소유자일 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집 쓰고 살아야 잘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갖고 누려야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 안에서 잘 사는 것은 그런 세상의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 안의 성공은 그런 세상의 기준으로는 측량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곧 주님 안의 성공과 잘 사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거하는 동안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라야 잘 사는 것이고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생활관의 변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요구되는 진리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진리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고 그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첫째는 감사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만 가나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우에 도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고 구원 받아 천국백성의 대열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 하나님의 동행을 의식하며, 그분의 동행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항상 느끼고 가나안 전쟁과 같은 많은 어려운 고비와 시련에서 구원해 주시고 승리하게 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몸으로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형제 사랑의 도를 익힌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잘되는 것보다는 형제가 잘 되는 것을 더 원했고, 형제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형제가 감격할 때 자신의 일처럼 감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몫을 챙기는 것보다 형제의 몫을 챙겨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지도자의 도리를 알고 지도자의 처신을 알고 있은 사람입니다.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던 어머니의 부르심처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황혼의 때에 어서 오라" 하시면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내 놓고 가야 합니다. 또한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받은 축복을 나누라!" 유다 지파처럼, 여호수아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
수 19:40-51
저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강한 힘을 갖고 싶어집니다. 시대를 아는 힘, 성령의 능력, 사명을 성취할 힘, 감사와 믿음의 힘, 입술(말)의 힘과 거듭남의 힘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러한 생각도 제 욕심처럼 느껴집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의 권면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고후 12:7)”가 있었고, 이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고전 3:1~3)에게는 매우 불편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함으로써(고후 12:8~9) 하나님만 드러내는 삶을 살아냅니다.
어쩌면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드러내며, 하나님만 신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은혜’ 혹은 ‘선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사람이 ‘큰 능력’을 좋아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큰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되 하나님의 강함을 자랑할 수 있는 지혜와 은혜가 있어야겠습니다. 존 바클레이(John M. G. Barclay)는 이것을 “하나님 능력의 역학(dynamic) 즉, 십자가의 약함과 부활의 능력”라고 설명합니다.
땅을 분배받는 마지막 지파는 단 지파입니다. 단 지파는 매우 연약했습니다. 18개의 성읍으로 구성된 땅을 분배받았지만, 분배받은 땅을 제대로 점령할 수 없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유다, 동쪽으로는 베냐민, 동북쪽으로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블레셋이었습니다. 남쪽에 있는 블레셋은 이스라엘 12지파가 모두 협력해도 쉽게 점령할 수 없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단 지파가 블레셋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으니 그 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단 지파는 하나님과 다른 지파에게 도움을 구하는 방법 대신 자체적으로 정탐꾼을 보내 다른 땅을 알아보게 됩니다.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는 문제는 다른 지파도 똑같이 안고 있는 문제였으나, 단 지파는 가나안 북쪽에 있는 ‘레셈(사사기 18장에서는 라이스)’이라는 성읍을 차지하고, 그곳 이름을 단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아니라 단 지파 스스로가 점령한 땅에 대해 성경은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사기 1장 34절은 단 지파가 가나안 사람(아모리)들의 압박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단 지파의 이주에 관해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사사기 18장은 단 지파의 배교(背敎)를 지적합니다. 단은 라셈(라기스)을 점령할 때 그곳 사람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렇다면 블레셋도 쫓아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이후,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황금송아지 2개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습니다(왕상 12:28~29). 그들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않았고(왕하 10:29), 요한계시록 7장 5~8절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12 지파 이름에는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이주했던 것이 죄의 열매로 끝나버리게 된 것입니다.
요단 서편의 땅 분배가 끝나면서 여호수아의 기업 분배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요단 서쪽의 땅 분배는 갈렙(수 14:6~15)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여호수아로 마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자신에게 땅을 줄 수 없었기에 이스라엘 자손이 상의한 대로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실로에서 서쪽으로 18km 정도 떨어진 ‘딤낫 세라’ 성읍을 받습니다.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기에(민 13:8)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땅을 분배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대한 땅 분배가 끝났습니다. 땅 분배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여러 가지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실로의 회막 문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땅이었지만, 많은 지파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안 좋은 역사는 반복될까요? 아마도 우리에게 망각(忘却)의 능력이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약해져야 할 때와 강해져야 할 때를 구분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품기 위해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과 부르심의 자리가 부담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교만이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데도 감당하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따르고 싶지 않은 죄악의 모습입니다. 단 지파와 같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수 19:49-51 찬송 218장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별로 땅 분배작업에 대한 명령을 내리시자, 여호수아는 이 일에 온전히 매진했고 그 결과 각지파별 땅 분배작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장 51절 말씀입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 일부 지파도 있었고 이 일에 나 몰라라 하면서 뒷짐만 지고 서로 눈치만 보면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지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혹은 강한 질책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땅 분배를 마쳤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대단한 리더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정말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군대 총사령관과 같은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실패도 있었고, 실수를 통해서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인생 말년에 이르러 땅 분배작업까지 완수함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주신 사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모세에 뒤지지 않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은 그가 땅 분배를 마친 후에 보여준 모습이었습니다.
49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이처럼 그는 모든 지파가 다 땅을 분배 받은 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몫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받은 땅은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라는 곳이었습니다. 본래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에브라임 지파의 한 일원으로써 땅의 일부를 분배받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도자 자격으로 자신의 땅을 취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역을 마친 후에는 본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 가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로부터 받은 딤낫 세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차지하게 된 이 지역은 거친 산간지대였습니다. 더욱이 그곳에는 변변찮은 성읍 하나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직접 성읍을 세워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복에 일등공신 중의 공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는 충분히 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역시 모세의 뒤를 이은 것입니다. 모세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이끌었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백성을 이끈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무덤조차 변변히 세우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우상화 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광야에서 한줌의 흙이 되어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의 문턱에서 “너는 여기까지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함께 살펴볼 때 단지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흥미진진한 전쟁 이야기를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근본적인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악행을 저지르는 가나안 백성을 심판하시고, 영적으로 훈련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거룩한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특단의 조치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가나안 족속들이 가지고 있었던 악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바라본다면, 비록 그 과정이 인간적으로 과격한 면이 있다 해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정의를 바로 세우시고자 하는 뜻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도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복한 땅을 분배하는 일을 잘 마친 지도자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수아의 삶을 통해서 과연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습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이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인생의 말년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5).”
이처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족속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하나님만을 바로 섬기는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염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몸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기도 했고,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결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 한 명 두 명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게 될 때 말 그대로 강력한 영적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민족을 향해서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단지 땅을 분배받고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목적은 거룩한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삶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고난도 주시고, 은혜도 베푸시고, 때로는 심판도 하시고 용서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단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까? 술이나 도박을 끊고, 말도 조심하고, 때로는 다른 종교처럼 수행을 하면 되는 것입니까? 물론 이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거룩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아무리 우리가 거룩해 지려고 노력해봤자, 그것은 결국 헛된 노력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회복할 것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은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지칠 때가 있고 잠시 낙심할 수는 있어도, 결코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왜입니까? 거룩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변덕스럽지 않으시고, 흔들리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각각의 지파별로 땅을 분배하는 일을 마쳤다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셨던 약속이 드디어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은 상황에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 역시 믿음을 잃은 적이 있었고, 종종 애굽 땅을 그리워하며 하나님보다 차라리 애굽을 섬기겠다는 말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그들을 이곳 가나안 땅까지 이끄셨습니다.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땅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파기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땅을 분배할 때 요단 서쪽에서 가장 먼저 땅을 분배받은 사람은 갈렙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땅을 분배받은 사람은 여호수아였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45년여 전에 갈렙과 여호수아를 향해서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처럼, 여호수아처럼, 갈렙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주님의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머지 분깃, 딤낫세라
여호수아 19:49-51
땅분배가 순조롭게 마쳐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분배가 끝난 후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마지막으로 기업을 줍니다. 땅분배는 결국 갈렙으로 시작하여 여호수아로 마쳐졌습니다.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 때에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두사람이 땅분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것은 그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땅분배는 곧 믿음과 순종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여호수아서에 흐르고 있는 정신입니다. 불신과 불순종은 ‘멸망의 씨앗’이지만, 믿음과 순종은 상급을 낳는다는 것이지요.
여호수아가 분배받은 땅은 “딤낫 세라”였습니다. ‘딤낫 세라’는 ‘나머지 분깃(몫)’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땅을 나눠 가진 후 그 나머지 분깃을 여호수아가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지파의 땅을 분배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거할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리더로서 먼저 땅을 분배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땅을 주고 남은 땅을 받았던 것입니다.
딤낫 세라는 들어가서 그냥 살면 되는 그런 성읍이 아니었습니다. 딤낫 세라는 훼파된 성읍이었고, 보잘 것 없이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딤낫 세라에 들어가 살기 위해 여호수아는 먼저 그 성읍을 건설해야 했습니다.
* 적용
1. 진정한 리더는 딤낫 세라를 취한다.
여호수아는 진정한 리더였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쳔 리더는 싸움에 있어서는 가장 선봉에 서며, 공을 나눌 때는 가장 뒤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배자와 지도자는 둘 다 수장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지배자는 싸울 때는 그 백성을 총알받이로 쓰지만, 지도자는 자신이 가장 선봉에 섭니다. 지배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몫을 차지하고 남는 것을 백성에게 주지만, 지도자는 백성에게 모두 나눠주고 남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취합니다. 지배자는 가장 좋은 것을 자신의 몫으로 취하지만, 지도자는 좋은 것은 백성에게 돌리고 서로 갖기를 꺼려 하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취합니다.
진정한 리더는 딤낫 세라를 취합니다. 자신이 리더이거나 리더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크리스쳔 리더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닙니다. 세상의 정치체계와 헤게모니 구도를 결코 교회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먼저 나눠주고, 맨 나중에 남는 것이 있으면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 참된 리더입니다. 우리는 그런 리더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운명은 많은 경우 리더에 의해서 좌우되곤 합니다. 배의 운명이 선장의 자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 진정한 리더는 가장 좋은 땅을 취하지 않는다
크리스쳔 리더는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앞세우면 안됩니다. 훌륭한 리더는 위임분공에 철저합니다. 위임, 즉 각 구성원들의 특성에 맞게 임무를 부여하여 공동체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분공, 즉 공을 나누는 일입니다. 공동체의 협업으로 열매를 얻었을 때는 그 공이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배분이 되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을 나눌 때에 참된 리더는 가장 좋은 몫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가장 작은 것, 아직 개척이 필요한 것, 다른 이들이 선뜻 탐내지 않는 것, 그것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리더는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그 심령에 가득차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 또한 그러한 리더가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삽니다.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 리더는 결코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리더는 깨끗해야 하고, 자신의 욕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스스로 리더가 되라
리더라는 것이 꼭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리더 얘기를 자꾸 하니 “오늘 묵상은 나랑 상관없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꼭 특정 리더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리더로 부르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고, 맛을 잃은 세상에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리더로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리더란 단어는 응당 크리스쳔이란 단어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쳔은 남들을 먼저 배려하고 남는 것을 자기가 취하는 자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쳔은 다른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양보하고, 누구나 선뜻 갖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취하는 자입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힘들어서 꺼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일을 해도 표도 안나고,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한 것도 없이 욕만 먹는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반면 별로 한 것도 없이 유세를 떨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칭송받고 인정받기 위해 남이 한 일을 자신이 한 일처럼 위장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한 잘못이 아닌데도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책임을 감당하며, 십자가를 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자리를 찾아 다니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뺀질 뺀질 모든 일을 피해 다니면서 누릴 것은 받아 누리다가, 조금만 맘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헌신하고 수고한 사람들을 지적질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진정한 크리스쳔은 기꺼이 손해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취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취해야 하고, 누군가가 자신보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은 죽어도 못 봐주는 성정을 가졌다면 우리 마음의 주인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때문에 손해보는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힘이 없어서, 소심해서 어쩔 수 없이 손해 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힘도 능력도 있지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십니다. 썩을 것을 잃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영원한 것을 누리는 사람이 됩시다.
* 적용질문
1. 사심없이 구성원들만을 생각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리더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2.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십니까, 사소한 것에도 자기 욕심을 부리십니까?
3. 남들이 꺼려하는 자리를 좋아하십니까, 자기 이름이 드러나는 자리를 좋아하십니까?
4. 진정한 크리스쳔이십니까?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를 믿고 주님 말씀 따라 살려고 하지만, 내 안의 속사람은 나의 욕심을 따라 살라 말합니다. 많은 순간 다른 사람보다 좋은 것을 취하려 하고, 다른 사람보다 편해지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속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손해보며, 십자가를 지며, 짐을 감당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