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받으라
히 6:4-12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4-12 / 여러분은 어쨌든 복음을 이해하고, 하늘에서 내리신 기쁨을 맛보았고 성령도 받았습니다. 5)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선하신 가를 알고 앞으로 올 세계의 힘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6) 그런데도 계속 하나님께 등을 돌린다면 다시는 주께 돌아설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모욕하거나 뭇사람들 앞에서 욕되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셈이니 여러분은 어떤 회개로도 새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7) 밭에 충분한 비가 내려 농부가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되었다면 그 밭은 하나님의 복을 경험한 것입니다. 8) ㄱ) 그러나 밭이 가시나무와 엉겅퀴만으로 뒤덮인다면 그 밭은 쓸모없이 불에 태워질 것입니다. (ㄱ. 창3:17-18) 9)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렇다고 이 말이 여러분 모두에게 적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 각자가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각각 맺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10) 하나님은 결코 불공평하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으로 일해 왔고, 또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그분의 자녀들을 도움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잊어버리실 수 있겠습니까? 11) 우리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언제나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되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12) 그러니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따분해하거나 영적으로 태만하거나 무관심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오직 강한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으십시오.
기자는 성도들이 신앙에 있어서 성장하지 않고 나태함에 빠진 자들이 처할 수 있는 위험성(배교)을 언급하면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은 자들을 본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회개하기 어려운 자들(4-8) 본 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타락한 자들’이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유사 그리스도인인지에 대한 일치하지 않는 의견이 있습니다. 본 서신을 받고 있는 이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히브리서 기자가 배교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타락한 자들’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본 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타락한 자들’은 유사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들은 하늘의 은혜를 경험한(맛보고, 참여한바 되고) 자들로 은사, 성령, 말씀, 내세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목격자의 위치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나타내 주는 표현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는 회개에 이를 수 없는 자들로 스스로 죄를 회개하지 않으려하기에 하나님의 용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좋지 못한 나무이기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예비된 것은 합당하지 못한 것(가시, 엉겅퀴)을 내놓는 밭처럼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받아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는 자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9-12) ‘타락한 자들’이 다시 회개할 수 없고 멸망의 길로 스스로 가는 자들이라고 할 때, 히브리서 기자는 서신의 수신자들을 향한 ‘너희에게는’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들이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9). 그것은 이들이 보여준 행위에 기초한 판단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하나님도 이들의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자가 권면하고자 하는 것은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라는 것으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않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적용: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당신이 모델로 삼고 있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기업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까? 이들은 당신에게 어떤 도전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의 은사를 맛볼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 설 교 >
히브리서 6:4-12
[찬송가] 278장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히브리서 6장 1-3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서 벗어나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면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4-6절에서는 배교의 위험에 처한 이들을 향하여 타락의 길로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고합니다.
[경고(4-8)]
[(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여기서 언급된 이들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한 번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전에는 아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가르침을 받았고, 이제 그 뜻을 능히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하늘의 은사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경험한 사람들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셋째로, ‘성령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다양한 역사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특징의 사람들은 모두 실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어지는 6절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이 특징들을 가지고도 의도적으로 믿음을 버릴 수 있다는 것, 즉 배교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기자가 실제로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 지금 현재 배교의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믿음을 저버리는 상태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지만, 히브리서 전체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준엄한 경고와는 다른 느낌을 나타냅니다. 격려와 희망의 전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로마서가 더욱 의도된 책입니다. 그리고 로마서는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취소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책임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배교한 이들은 교회 가운데 알곡과 함께 섞여 있는 가라지, 즉 가짜 신자입니다. 이들은 신자인 듯 가장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믿음을 저버립니다. 반면 히브리서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을 향한 격려와 경고가 가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신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얻는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하심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그 신분에 걸맞게 사는 것은 이제 우리의 책임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한 가지 예화를 들어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설명합니다.
[(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걸맞은 삶이 바로 7절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땅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비를 잘 흡수하여 좋은 작물을 낸다면,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삶을 산다면, 즉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면 불사름을 당하고 맙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보다는 ‘무엇을 맺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열매를 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시와 엉겅퀴라면 하나님의 노하심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비를 잘 흡수하는 지혜로운 주님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가득합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이 단순히 처음 시작이 좋았을지라도 마지막이 잘못되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강력한 경고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이유로 갖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떠날 수 있는 유혹도 충분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처럼 행동은 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하여, 또한 여러 고난과 박해 가운데 흔들리는 이들을 향하여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말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9절을 통하여 이들이 구원에 속하여 있음을 확신하였고, 그 이유를 10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확신(9-12)]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랑으로 다른 성도들을 섬기고 봉사하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물건을 통용하였고,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권면하였으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랑의 모습을 실천하였던 당시의 상황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로마의 박해 가운데 당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가 이 신앙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시기입니다. 그들이 신앙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었고, 이러한 긴장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살아갔습니다. 내가 언제 죽임당할지 모르는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사랑으로 누군가를 섬기겠습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숨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사랑의 섬김이 더 돋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섬김은 목적이 분명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도록 이었습니다. 그들의 섬김은 분명 상을 받게 될 일이지만, 상급이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랑의 섬김을 행할 때, 그 동기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인지, 혹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함인지 고민하는 가운데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즉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과거는 물론이요,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들의 수고와 사랑의 섬김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의 섬김이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신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분의 전적인 주권으로 결정하십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백성은 삶의 변화를 통해 신자다운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수준의 변화입니다. 진정한 주님의 사람은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의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유혹하여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영적인 긴장감 가운데 날마다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것들을 행하도록 허락하사 함께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편지 수신자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표현한 이후에, 왜 자신이 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그 목적입니다. 마지막 그날에 이를 때까지 결코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이 세상 가운데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0절은 그것이 사랑의 섬김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살아가는 가운데 끊임없이 이것들을 세상 가운데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을 그저 교회 안에서의 신앙으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의 신앙의 모습으로 세상 가운데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한지 우리 삶의 모습으로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바르게 살기 위한 힘을 공급받아,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소망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에 참여한 우리에게 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영광스런운 구원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이 소망의 풍성함을 이어나가기를 소원합니다.
히브리서의 기자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바라는 가운데 믿음으로 어떤 순간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딤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10절에서는 사랑의 섬김을, 11절에서는 소망의 풍성함을, 그리고 이제 12절에서는 믿음의 견딤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끝없는 견딤의 연속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믿음(אמונה)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 등장합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한글 성경에서 믿음으로 번역된 경우가 하박국에서 한 번뿐이지, 히브리어 단어(אמונה)로서는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 첫 등장이 출애굽기 17장 12절입니다.
[(출애굽기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견딤을 나타내는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אמונה)가 바로 하박국에서 믿음(אמונה)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것은 ‘견디다’, ‘지속하다’, ‘견고하다’등에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אמונה)가 하나님에 대하여 쓰여진 구절들에서는 ‘진실하다’, ‘성실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이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견디어냈습니다. 그들이 완벽한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계속해서 유혹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로운지, 세상 법칙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인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마음이 둔하여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소망이신 주님을 향하여,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가운데, 영적인 긴장감으로 날마다 깨어있는 삶을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영원한 소망의 풍성함을 허락하시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은혜를 허락하시어 구원을 선물로 주셨고, 저희는 그 신실하심에 의지하여 오늘을 살아갑니다. 결코 좌절과 낙심에 빠지지 않을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시고, 사랑의 섬김과 소망의 풍성함, 믿음의 견딤을 통하여 이 신앙의 여정을 멋지게 이어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유혹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늘 영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며 날마다 깨어있는 삶을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대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4-5절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2.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까(7절)?
3. 우리가 구원에 속하였음을 어떻게 확신합니까(10절)?
4. 늘 깨어있는 가운데 사랑의 섬김과 소망의 풍성함, 믿음의 견딤으로 영과 진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택자는 완전히 타락할 수 없다
히 6:4-12 / 임진남 목사(김제)
경제학의 용어 가운데 기회비용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므로 포기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때 선택하여 사는 물건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전제품을 하나 살 때도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비교하여 삽니다. 그리고 한 곳에서 살 때도 이 제품을 살 것인가? 저 제품을 살 것인가를 비교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국 선택합니다. 자신이 산 제품을 가진 사람은 그 제품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고 기쁨을 가집니다. 기독교는 경제학을 설명하기 위해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지혜로운 자들이 어떻게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하는 지를 말씀하였습니다. 일만의 군대를 가진 자와 이만의 군대를 가진 자가 싸울 때 일만의 군대의 장수는 자신의 형편을 살피고 결국 상대방에게 화친을 청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당시 유대인들이 포기해야 하고 버려야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전통신앙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율법종교와 전통신앙을 버리지 못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시고 12사도를 세워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게 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께서 이제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보다 더 큰 구원의 능력으로 바다의 모래와 밤하늘의 별들 같이 그렇게 예수를 자신들의 구주로 믿는 자들을 부르시고 모으시는 사역을 계속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해 셀 수 없는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의 말씀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런 하나님의 큰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하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지킨 유전이나 전통만이 구원을 주는 신앙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증거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게 되자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말씀을 읽으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장 먼저 예수를 믿은 부류들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제사장 무리들과 유대인들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오천 명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도 수천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자녀들과 이웃들에게도 계속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되어 온 유대가 예수로 말미암아 소란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잡아 죽이기 위해 바울에게 유대사회를 소란케 하는 죄를 저지르고 다니고 있다고 로마총독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회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증가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이것을 그냥 나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는지를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속 그리스도인들을 회유하고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권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먹을 것과 일할 곳을 빼앗아 버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땅에서 도저히 살아가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들의 배가 고프면 배운 것을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4절에서 “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고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히브리서 기자가 1장부터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제부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이미 구약의 모든 종교적인 모습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의 몸으로 이루신 구속의 사건만이 유일한 것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렇게 변증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더 이상 유대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 사람은 유대교를 포기하고 자신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 자신이 포기해야 하는 비용이란 다름 아닌 생명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기는 것도 각오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1세기 유대사회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다고 하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습니까?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때도 오직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것 때문에 로마교회로부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서구사회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처음에 복음이 들어와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것 때문에 우리 조상들도 죽임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예수를 믿으면 결국 자신의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 되었습니다. 또한 저 중동지역에서 예수를 믿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슬렘이 예수를 믿는 신앙을 가지면 가족과 친인척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여전히 오늘날도 예수를 믿으면 자신의 생명을 빼앗기는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기로 작정하면 결국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고 하는 것도 각오하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믿음에 이러한 신앙의 특질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사회 속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성공하기 위해 믿는 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죽으로 오기 위해 교회에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기 위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부를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믿음이 곧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예수 믿으면 잘 살고 잘된다고 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무슨 힘이 있고, 이 사회에서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가 있겠습니까? 죄는 죄입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해야 성도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침묵하고 세상의 권력과 돈 때문에 타협하고 죄의 자리에서 나오지 않으면 결국 자신이 믿는 예수에 대한 신앙도 거짓이 된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본문의 이 말씀은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고 타락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우리 장로교가 가진 교리와 상반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번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견인하여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여 주신다고 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마치 예수를 믿어도 타락할 수 있다고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결코 상반되지 않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일시적으로 은혜를 받는 자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를 믿는 참된 신앙인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끝까지 가지고 소망 가운데 견고하게 승리하고 나갈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 예수를 믿어도 중간에 타락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를 믿고 중간에 타락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 못한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은 사람의 결정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짓 교리가 세워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자세하게 배운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지금 타락한 자들은 결국 참된 성도들이었다고 하는 것을 누구나 읽는 자는 다 알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은 성도가 타락할 수 있다고, 즉 하나님이 친히 판단하시기에 거룩하거나 의로운 사람도 영원히 멸망할 정도로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생각 없이 이 구절을 읽고 지나간다면 웨슬리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아주 사악한 해석입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말씀이 서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론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려고 할 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우리는 잘 이해되는 말씀을 가지고 좀 난해한 부분을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이 말씀이 구원받은 자도 타락하여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웨슬리처럼 가르치면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은 다 거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6장에서 영생을 주려고 작정한 자들이 영원히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또 그들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주신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은 결국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고 바울은 말하여 줍니다. 그런데 웨슬리처럼 문장 하나만 가지고 단어 하나만 가지고 성경전체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면 안 됩니다. 웨슬리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이 히브리서가 누구를 위해 쓰여지고 있는지 알면 됩니다. 6장12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7절에는 “약속의 기업을 받은 자들”에게 쓴 것입니다. 약속의 기업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구원을 상속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6장 4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믿음의 교부들은 이 말씀에 사용된 단어들이 대부분 성례, 즉 세례와 성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고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선생이신 칼빈은 아주 정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칼빈은 인간의 타락을 이중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6절에서 “타락한 자들” 이라고 하는 부류에 대하여 아주 쉽게 가르쳐 줍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타락한 자들” 이라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범죄를 지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타락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 예수를 믿지만 때론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합니다. 이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들에게 이렇게 믿음을 끝까지 소유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6절에서 나오는 “타락한 자들” 이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버린 자들입니다. 세례도 받고 성찬에도 참여하였지만 결국 이들이 가진 믿음이란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회유하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 자들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비록 로마 군인들이 못 박았지만 결국 유대인들이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찬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예수 믿는 믿음을 버린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이러한 믿음을 일시적인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잠시 믿은 것입니다. 이 믿음은 호기심에서 믿는 것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습니다. 이러한 신도 보고 저런 신도 있다고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과 성령의 은혜로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버리고 배교한 자들입니다. 어느 시대나 배교자들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배교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로마교회는 아예 집단적으로 배교한 종교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신앙을 거짓으로 만든 자들의 특징이 바로 어린아이의 신앙수준에 머물 때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르게 배우고 아주 깊은 교리의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다가올 때 참된 진리를 소유한 자들은 자신들이 배운 그 배움의 지식을 통해 선악을 분별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진리로 가득차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확고히 붙잡고 있으면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길 앞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이시며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담대하게 쉽게 고백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7-8절에서 아주 중요한 복음의 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땅과 그 위에 내리는 비를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신 그 가르침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땅, 즉 씨를 뿌려 열매를 맺는 땅을 말씀하실 때 그 땅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땅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흘러 버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 천국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면,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결국 버림을 받아 밖에서 이를 갈고 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불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들을 섬기고 있는 것을 아시고 있습니다. 성도의 섬김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아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나타내어야 할 부지런함이란 믿음에 대한 부지런함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모든 삶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가장 성실하고 충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12절에 게으르지 말라고 할 때도 믿음과 인내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에 대하여 게으르면 안 됩니다. 자신이 누구를 믿고 있는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부지런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가족을 위해, 타인을 위해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삶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에 게으르지 않고 사는 부지런함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들의 삶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부지런함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계속 배워야 하고 진리 안에 거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노승수의 히브리서 6:4-6절의 해석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6장4-6절은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묘사한 사람들은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인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정말 구원받았었다면, 이 구절은 참된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본문 자체를 살펴보는 것에 앞서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해야 한다. 정확한 문제는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단계를 경험하고 그 이후에 타락하여 자신들의 구원을 상실한 사람들인가” 이다. 이 질문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본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단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구원을 상실하였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일반적인 개신교 복음주의권 내에서 통용되는 것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단계에 포함되는 내용들을 제시한다: Regeneration(거듭남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Conversion, Justification, Adoption, the beginning of sanctification. 비록 순서는 다를 수 있고 어느 한 항목이 다른 항목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이 다섯 가지 요소 모두를 경험한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출발단계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신약성경에서 구원은 과거적 측면, 현재적 측면, 미래적 측면을 가지지만, 여기에서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 단계”를 경험한 사람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즉 구원받은 사람들로 정의한다. 따라서 “구원을 상실한다” 는 표현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정적인 시작단계에서 경험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경험에서 더 이상 죄에 대한 회개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거듭남을 회수하고 따라서 그들은 다시 한번 죄 속에서 영적인 사망을 경험하고, 그들의 칭의를 회수하고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 그들의 양자됨을 철회하고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며 또한 내적인 성화작용을 철회하고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삶 속에서 점증하는 거룩함의 패턴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의에 기초하여 히브리서 6장 4-6절은 한번 구원받았지만 타락하여 구원을 상실한 사람들을 언급하는 구절인가를 살펴보자. 먼저 우리는 6장 4-6절 자체를 살펴보고, 그 후 6장 7-8절, 그리고 9-12절과의 연관성에서 6장 4-6절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전체적인 문맥과의 연관성은 살펴보지 않을 것이다.
1. 6장 4-6절
먼저 6장 4-6절 자체를 살펴보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구절에 의거하여 이러한 경험들을 한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이 구절 자체에만 근거해서 그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사실 이 경험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초에 있는 긍정적인 경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험에 대한 정보에만 기초하여 마치 그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나가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출발단계를 경험하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출발단계를 경험하였는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실들, 예를 들어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구원자로서 믿고 신뢰하는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거듭남을 주셨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들을 양자로 삼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삶이 참된 구원의 증거를 제공하는 열매를 보여주기 시작하는지에 대하여 알아야만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요점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라는 구절만으로는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결론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어구들을 차례로 자세히 살펴보자.
(1) "한번 빛에 비취임을 받았다“(4절)
“빛에 비취임을 받았다”(photizo)라는 어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뜻 보기에 이 어구는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0장 32절에서 저자는 동일한 어구를 가지고 독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된 시간을 언급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또한 비록 photizo라는 동사는 아니지만 같은 어원의 명사인 photismos를 회심과 관련하여 두 번 사용하는 고후 4장 4절 6절은 유사한 개념적인 병행구를 제공한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4,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어구에 근거하여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시작단계”를 경험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히 10:32절에서 “빛에 비취임을 받았다”는 단어가 독자들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 즈음에 발생한 어떤 사건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이 단어는 “복음에 대하여 듣고 배우는 것”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약성경에서 phitozo라는 단어는 “복음을 믿었다” 혹은 “믿음을 가졌다”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열 한번 나타나는데, 때때로 단지 램프에 의한 빛을 언급하고(눅 11:36), 때때로 구원을 가져오는 특별한 배움이 아니라 일반적인 배움을 언급한다. 예를 들면, 요 1:9에서 사용된 photizo는 세상에 온 모든 사람을 비취는 것을 의미하고, 고전 4:5에서는 마지막 심판 때 오게 될 빛이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임을, 그리고 엡 1:18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수반되는 성장을 의미한다.
아마도 히브리서 6:4의 photizo가 “믿음을 가졌다”를 의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는 고후 4:4-6절인데, 고후 4:4-6에 나타나는 명사형 photismos와 관련하여, 바울이 복음의 빛을 보는 것과 관련하여 회심을 나타내는 확장된 비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 구절에서도 photismos라는 단어 그 자체가 회심하다(믿음을 가졌다)는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여러 가지 다른 단어들(phos - light-, lampo - shine - , photismos - illumination)을 사용하여 제시하는 것은 빛을 비췸에 대한 전체적인 비유일 뿐이고, 그런 여러 가지 단어들도 결코 회심을 의미하는 기술적인 용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세계에서, photizo는 “복음을 듣고 믿음” 혹은 “구원하는 믿음을 가짐”을 의미하는 기술적인 용어가 아니다. photizo는 배우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우리가 이 단어와 관련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photizo는 “복음을 듣고 이해한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정도이다. 분명히 복음의 사실들에 대한 그런 지적인 이해는 구원하는 믿음으로의 중요한 단계이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가 믿음에 본질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의 요소를 완전히 구성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어구에서 “한번”(hapax)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서 발생하는 결정적이고, 단번의 빛에 비취임을 지적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hapax(once)라는 단어가 단 한번 발생하고 반복되지 않는 사건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hapax는 히브리서 9:7에서 대제사장이 “매년 반복하여” “once a year” 성소에 들어가는 사건을 말하는데 사용된다. 빌립보서 4:16에서 바울은 hapax를 빌립보인들이 그에게 “once and again” 선물을 보내었다고 말하는데 사용한다 - 선물을 보내는 그 사건은 빌립보인들이 두 번째 선물을 보낼 때 반복되었다. hapax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언급하는 곳(예를 들어 히브리서 9:26-28)에서, “결코 반복될 수 없다”는 의미는 문맥 속에서 다른 언급들로부터 도출되는 것이지, hapax라는 단어 그 자체에 포함된 의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hapax(once)라는 이 단어는 그 자체로 “시간적으로 단 한번” 발생하고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반복할 것인지를 상술하지 않고 단순히 “한번” 발생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어떤 주장은 히브리서 2장 9절에 근거하여, “맛보았다”(geuomai)라는 용어는 어떤 것에 대한 완전하고 풍성한 경험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다(히 2:9).” 따라서 “하늘의 선물”이 성령을 의미하든(행 2:38; 8:20; 10:45; 11:17), 혹은 칭의를 의미하든(롬 5:15, 17), 이 사람들이 이 선물을 “맛보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참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했고, 구원에 참여했다는 것(롬 8:9,11)을 의미하거나 혹은 그들이 참으로 칭의를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고 그래서 구원을 경험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geuomai라는 단어가 “맛보다”를 의미할 때, 그 단어의 뜻에 내재된 것은 두 가지 사실들이다: (1) 맛봄은 일시적이다, (2) 그것에 대한 더욱 지속적인 경험이 따라올 수도 있고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이나 음료를 맛보는 것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27:34에서 사용된 geuomai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포도주를 마시도록 제공되었지만 그러나 그가 그것을 “맛보았을” 때, 그는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geuomai가 “어떤 것을 알게 되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6:4-6에 유사 어구가 요세푸스에게서 발견되는데(유대전쟁 2. 158), 에세네파의 신학적 견해에 대하여 “whereby they irresistibly attract all 재 have once tasted their philosophy.” 여기에서 요세푸스는 “한번 맛본” 이들은 에세네 철학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에세네 철학을 강력하게 공격한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히브리서 6장에서 “맛보다”는 단어만을 놓고 볼 때, 하늘의 선물, 하나님의 말씀의 선함을 “한번 맛본” 이들이 그런 것들을 강력하게 공격하였을 수도, 혹은 공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은 “한번 맛보았다”는 언급이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그들 자신의 것으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히 2장9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실제로 맛본 그것에 대한 “실제 경험”은 히브리서 2장 9절뿐만 아니라 geuomai가 언급된 모든 예들에서도 “실제 경험”이다. 히브리서 6:4-6에서도 그 사람들은 천국의 선물, 하나님의 말씀들, 오게 될 세대의 능력(개역성경은 내세의 능력)에 대하여 “실제적인 경험”을 가졌다. 그러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핵심은 그들이 그런 것들을 통하여 “구원하는” 경험을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 그들의 경험이 회심, 구원하는 믿음, 칭의 등등을 가져오는 그런 경험이었느냐 아니냐 이다. 따라서 만약 “천국적 선물”이 구원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천국의 선물을 맛본 “실제 경험”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he dorea tes epoiraniou(천국적 선물)이라는 정확한 어구는 신약성경의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그래서 천국적 선물이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한 다른 예들로부터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상, 선물(dorea)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다른 곳에서 성령을 언급하고(행 2:38; 8:20; 10:5; 11:17), 성령은 하늘로부터 보내어지기 때문에(행 2:33; 벧전 1:12), 히브리서 6:4절이 의미하는 것은 “천국적 선물을 맛본” 그들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어떤 경험을 가졌다는 것이다 - 아마도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요 16:8), 귀신을 쫓아냄(마 12:38), 어떤 종류의 치유받음(눅 4:14, 40; 고전12:9). 그러나 핵심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그런 경험들은 그 자체로 구원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방해하고”(행 7:51), 심지어 성령으로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이들도 “성령에 반대하여 저주를 선포할 정도로”(마 12:31) 그렇게 강력하게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맛본 다른 것들도 유사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함을 맛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참됨과 능력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어떤 것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말씀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오게 될 세대의 능력들”(우리 번역은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아마도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 악령을 내쫓음, 치유를 경험하는 것에서 성령의 새 언약의 능력에 대한 어떤 것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게 될 세대의 능력”을 맛봄은 복음에 선포하는 것을 포함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구원받았거나(빌 1:15-18: 잘못된 동기로 복음을 전함) 혹은 예언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예수의 이름으로 악령을 쫓아내었을 것이다(마 7:22-23). 그러나 핵심은 그런 경험들 자체가 그 사람은 구원받았다는 것을 필수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는 점이다(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너희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로부터 떠나거라 - 마 7:23). 즉 여기에서 맛봄의 본질은 상대적이다.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맛봄에 대한 신약성경의 예들은 맛봄이 일시적이고, 맛본 것들에 대한 더욱 지속적인 경험은 따라올 수도 있고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구절들에서, 이것은 천국적 선물, 하나님의 말씀, 오는 능력들의 맛봄은 일시적이었고 우리는 그런 맛봄에 대한 단순한 사실로부터 마치 그런 것들에 대한 더욱 지속적인 경험이 따라왔느냐 따라오지 않았느냐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성령에 참예한 자
어떤 견해들은 이 구절에서 “참예했다”(metochos)는 용어는 히브리서 3: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에서 그리스도 안에의 구원얻는 참예를 지적하는 것과 같이 성령에의 구원얻는 참예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령에 참예한 자가 되었다는 구절에서, 첫 번째 질문은 metochos (partaker)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이다. 영어 사용자나 한글 사용자에게 있어 이 단어가 가지는 정확한 의미가 분명하지는 않다. 이 단어는 very close participation이나 attachment 을 의미할 수 있고 혹은 a loose association with the other person or persons named 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3:14에서 “partakers(metochoi) of Christ”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구원에의 참예를 가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metochos는 associats나 companions를 언급하는 느슨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눅 5장7에서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어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을 때, 제자들은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metochoi)을 불러서 자신들을 돕게 했다. 여기에서 metochoi라는 단어는 물고기를 잡는 일에 있어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동료였던 이들을 언급한다. 시편 45:7을 인용하는 히브리서 1장9절은 metochos를 “친구”(RSV) 혹은 “동료”(NIV, NASB)를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에베소서 5장 7절은 불신자들의 죄악된 행동들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문자적으로는 동료가 되지 말라-고 말할 때, sum-metochos 라는 유사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metochos라는 단어는 공통적으로 다른 누군가와 어떤 것을 함께 하거나 함께 참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성령의 동료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사람들이 성령의 존재의 일부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으로서 성령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없고 자기존재의 어떤 부분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왜냐하면 metochos란 단어는 “to have a share of the being of another person”을 결코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어구는 성령의 사역에 어떤 방법으로 연관되고 성령이 주시는 유익들중 일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해석가들은 이 어구가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하는데, 확실히 그런 의미는 성령의 동료가 되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거듭남은 사람들이 성령에 참여하거나 혹은 성령의 유익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고 따라서 우리는 거듭남이 여기에서 의도된 의미이다 고 가정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어구는 성령의 어떤 유익이나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낫다. 예를 들면, 이 어구는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나 혹은 다른 영적 선물들을 사용함에 있어 성령의 유익들중 일부를 경험하는 것을 단순히 의미할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유익들중의 어떤 것들에 참여한 자들이다 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서 3장 14절의 그리스도의 동료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6장4절의 성령의 동료가 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metochos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명확하게 “partook of saving benefits from someone”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partook of some influence or benefit from (someone)”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 유익이나 영향의 정확한 종류는 각 상황이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오늘날 세계에 대한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역할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동료”가 되는 것은 자연히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성령과 관련하여, 성령은 오늘날 세계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하시는데, 그중에는 거듭남을 불러일으키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선물들의 제공,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 사역을 위한 능력의 부여 등도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동료”가 되는 것은 구원을 포함하여 성령이 주시는 “모든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유익들 중의 “일부”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5장 7절에 나오는 고기잡는 동료들의 예는 좋은 비유를 제공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다른 동료들과 관계를 가질 수 있었고 그들과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고받고 심지어 그런 관계에 의하여 삶이 전반적으로 변화됨 없이도 그들로부터 어떤 유익들을 받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좋은 비유는 이그나티우스의 To the Ephesians(ca. A.D. 110) 11:2에서 발견된다. 이그나티우스는 감옥에서 편지를 적는데 에베소인들의 기도에 대하여 감사를 표한다. “in which may I always be a sharer(metochos)” - 그는 언제나 그들의 기도들로부터 유익을 받기 원한다. 그래서 metochos라는 단어는 실제적으로 약한 것으로부터 실제적으로는 강한 것까지의 영향의 정도를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그 단어는 단지 “어떤 활동에 함께 나누거나 참여하는 것 혹은 참여자”를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히브리서 6장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교회와 관련되고 그래서 성령의 사역들 중의 일부에도 관련되고, 어떤 방법들에 의해서 성령에게 약하든 강하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상 - 즉 그들이 성령에 의한 거듭남의 유익에까지 참여했는지-은 결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4) 회개
저자가 한번 타락하였던 그런 사람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것”을 원한다고 암시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한번 가졌던 회개는 범해진 죄들에 대한 일종의 후회(sorrow)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중요한 단계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죄인됨을 보기 전까지는 예수께서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죄들을 용서할 것임에 대한 신앙을 가질 필요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로부터의 회개는 모든 참된 구원하는 믿음에 앞서야만 하거나 동반해야만 한다. 그러나 핵심은 "회개 그 자체가 구원하는 믿음은 아니다" 는 것이다. 히브리서 6장 1절에서 저자는 “죽은 행위로부터의 회개”를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으로부터 구별한다. 우리는 막1장 15절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와 행 19:4; 20:21; 26:20 등에서도 회개와 믿음을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그러나 구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구원하는 회개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회개, 즉 구원하는 믿음을 수반하지 않는 회개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12장 17절은 에서가 장자권을 판 것에 대하여 시도했던 마음의 변화를 말하면서 metanoia(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그를 구원에 인도하는 회개가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장자권과 관련하여 계약취소를 의미한다. 또한 누가복음 17장 3-4절(특히 내가 회개하노라 너는 용서하라)에서처럼 회개하다(metanoeo/metanoia)라는 단어는 구원하는 회개가 아니라 개인적인 잘못에 대한 미안함을 언급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것은 구원을 향한 회개가 아니라 잘못된 행동에 대한 단순한 유감을 의미한다. 구원하는 회개가 아닌 회개에 대한 또 다른 예는 유다의 행동에서도 발견된다: “때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은 삼십을 제사장들에게 도로 갖다주며”(마 27:3).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는 metanoia나 metanoeo가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회개에 대한 또다른 용어인 metamelomai 이다. 유다는 “회개했지만” 그러나 그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지는 않았다(요 6:70-71; 13:27; 행 1:16-20; 마 27:5를 보라). 바울이 고후 7:10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회개를 만든다”고 말할 때 이것은 적어도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는 회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우리는 회개는 이미 행한 행동들이나 죄들에 대한 슬픔(미안함, 아쉬움, 후회)를 의미하고, 그런 죄들을 버리려는 결심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모든 회개가 구원하는 믿음을 동반하는 하나님을 향한 내적이고 진정의 회개를 포함하지는 않는다.또 한 가지 문제는 회개가 참으로 구원하는 회개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지간에, 행 11:18의 “생명얻는 회개”는 언제나 즉시로 명백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또 다른 좋은 예는 베드로후서 2장 20-22에서 서술된 잘못된 교사들에게서 발견된다: 그들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을 통하여 세상의 더러움들을 피하였고”(20절)는 복음에 대한 지식과 회개에 대한 지식을 모두 가졌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후 그들은 자신들의 원래의 길로 돌아갔다. 더욱이 그들은 결코 실제로 구원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베드로가 “the dog turns back to his own vormit, and the sow is washed only to wallow in the mire 라는 속담이 그들에게 발생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22절).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회개는 단지 외적인 깨끗함만이었고 그들의 참된 본성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사실상,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종류의 회개가 있을 수 있다는 개념은 구원하지 않는 종류의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개념과 병행한다. 즉 지식과 찬성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인격적인 신뢰가 아닌 그런 종류의 인식적 믿음이 있다(예를 들면, 요 3:2; 행 26:27-28l 약 2:19; 고전 15:2; 딤전 1:19 등에서 니코데모, 아그립파, 사단들의 “믿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만약 히브리서 6:4에서 언급된 회개가 참된 구원하는 회개가 아니라면, 그런 회개에로 사람들을 “다시 새롭게”(restore)하는 것을 원한다고 저자가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 반대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답은 저자는 4-6절에서 언급한 “회개”가 구원으로 인도하는지 인도하지 않는지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의 실제적인 본질이 외적인 관찰에 의해서는 언제나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만약 누군가가 죄에 대하여 후회하고 그 죄를 버리기 원하고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게 되고 성령의 사역의 다양한 축복들을 경험하고 교회의 모임에 참여하고서도, 그후 그냥 돌아간다면, 그런 사람들을 또 다시 죄에 대한 회개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는 것을 단순히 말한다. 따라서 이 어구가 원래 회개가 필수적으로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도하고 죄들의 용서로 인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은 회개에 대하여 상세히 말하지 않고 있고, 그러므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요점은 "회개라는 단어 그 자체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는 것이다.
히브리서 6:4-6에 관한 기본적인 결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런 용어들 모두는 복음을 듣고 그것에 이끌리고 교회의 활동들에 밀접하게 참가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나 거짓된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설명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타락하기 전에 실제로 구원받았는가 혹은 실제로 구원받지는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우리의 결정은 용어들 그 자체로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만약 어떤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그 구절들의 문맥에서 발견되는 다른 사실들에 기초해야만 한다. 우리는 히 6:4-6절이 서술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최대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적어도 교회의 사귐에 밀접하게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후회를 했고 그들의 죄를 용서받으려는 결정을 했다. 그들은 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하였고 복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을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유익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때문에 삶에서 받게 될 변화를 알았고, 그들은 아마도 그들 자신의 삶에서 기로에 대한 응답들을 받았고 심지어 어떤 일들을 함에 있어 성령의 능력을 느꼈고 어떤 영적인 선물들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말씀의 참된 설교를 접하였고 그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긍정적이고 그런 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들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단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회개, 구원하는 믿음과 거듭남, 칭의, 양자됨, 성화의 시작). 사실상 그런 경험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 단계들에 예비적인 것이다. 그런 것들을 경험한 이들의 실제 영적인 상태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회개에로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긍정적인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후 그들이 타락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욕을 보인다면(6:6), 그들은 아주 의도적으로 그런 축복들을 거부하고 결정적으로 그것들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그 죄는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적인 거부와 아마도 그에 대한 공적인 비웃음을 포함한다: “crucify the Son of God” and “hold him up to contempt”(6절)
저자는 만약 이것이 발생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일종의 회개나 죄에 대한 후회로 다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고 말한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팍하고 그들의 양심이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하여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에게 성경이 참되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고 삶을 변화시키신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해 보았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중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반응할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성령께서 사람들의 삶에서 강력하게 일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죄로부터의 참된 회개는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알지만 그러나 그런 종류의 더 나은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것들에 대한 그들의 반복되는 익숙함과 성령의 많은 영향들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그들을 변화에 반대되도록 완고하게 만드는데 사용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자신이 편지를 적는 공동체 안에 바로 이런 식으로 타락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2:3; 3:8, 12, 14-15; 4:1, 7, 11; 10:26, 29, 35-36, 38-39; 12:3, 15-17). 그는 비록 그들이 교회의 모임에 참여하고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들중 일부를 경험하지만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 모든 것 이후에 타락한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저자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필수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저자는 특별히 영적인 상태가 아직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고하려고 편지하기 때문이다.
2. 7-8절과의 연관성
7-8절은 gar(왜냐하면)로 4-6절과 연결되어 저자가 4-6절에서 지적한 것을 뒷받침하는 이유 혹은 설명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비유를 4-6절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자주 내리는 비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사람들의 삶 안으로 오게 된 축복들에 가장 잘 조화된다. 즉 자주 내리는 비는 빛에 비취임을 받음, 천국적 선물과 하나님의 말씀과 오게 될 세대의 능력을 맛봄, 성령의 사역에 참예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비에 병행하는 것이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비는 “모든 종류의 땅”에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에 여전히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비가 온 결과로서 어떤 종류의 식물이 나타나게 될지 말할 수 없다. 만약 비가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땅에만 내린다면(즉 경작하는 자들의 목적에 유용한 채소를 낸다면),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7절). 그러나 동일한 비가(비유적으로 빛을 받음, 맛봄, 참예함) 단지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는 그런 부정적인 땅 위에도 내릴 수 있다. 차이는 경험하는 사건들의 종류가 아니라 비가 내리는 땅의 종류들이다. 즉 땅이 비에 반응하는 방법은 그 땅의 종류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4-6절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제공한다. 8절의 “만약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면”이란 어구는 직접적으로 6절의 “만약 그들이 타락한다면”이란 어구에 대응된다.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다”(8절). 7절에서의 채소를 내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 날카롭게 대조되면서 이런 결과들(저주받고 불살라짐)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마지막 심판의 그림이다. 더욱이 8절에서 단수 형용사 adokimos(worthless)와 단수 관계대명서 hes(of which)는 akanthas와 tribolous(가시와 엉겅퀴)라는 복수 명사들을 가리키는 것 이 아니라 단수 명사 ge(land)를 가리키기 때문에, 불살라지는 것은 단지 가시와 엉겅퀴가 아니라, 땅 그 자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락한 그 사람들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과 같다 - 그 마지막은 저주에 처하고 불에 살라진다.
또한 좋은 땅인지 혹은 나쁜 땅인지는 비를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 땅에서 나온 무엇인가를 보기 전에는 그 땅이 좋은 땅인지 나쁜 땅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일단 가시가 나타난다면, 그 가시들은 그 땅의 참된 본질을 드러낸다 - 가시는 나쁜 땅에만 속한다. 정확히 동일한 방법으로, 4-6절에 나타난 사람들은 그들이 빛에 비취임을 받고, 천상적 선물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할 때 그것만으로는 그들이 참으로 구원받았는지 불확실하다. 즉 그 순간에는 그들의 상태는 불분명한데 왜냐하면 그런 경험들은 그들이 받은 모든 것들이지만 그러나 그런 경험들은 그들의 반응, 즉 그들이 보이는 열매의 종류가 선한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번 타락하고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보이면, 이 악한 열매는 그들의 참된 상태가 처음부터 무엇이었는지 드러낸다: 그들은 처음부터 결코 참으로 구원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비유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마도 타락한 자들은 단지 그들이 타락한 이후에 가시를 생산하는 땅과 같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타락하기 이전에는 좋은 땅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언어는 이런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1) 타락하기 이전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한 지적이 없고, 그래서 이 견해는 그것을 지지하는 근거가 없는 단순한 사변에 불과하다. (2)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는 열매맺는 지속적인 과정을 지적하려고 현재분사를 사용한다:
“having drunk and continuing to bear”(piousa....kai tiktousa) useful vegetation(7절)
“having drunk and continuing to bear”(ekpherousa) thorns and thistles(8절).
따라서 과거에는 좋은 열매를 맺었다가 이제는 가시를 맺는 땅이라는 그런 아이디어는 이런 저자의 그림에 맞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4-6절에 언급된 긍정적인 경험들이 그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받았는지 구원받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반면, 타락하고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것에 대한 언급은 타락한 사람들의 참된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낸다: 처음부터 그들은 나쁜 열매만을 맺을 수 있는 나쁜 땅과 같다. 만약 가시를 내는 땅에 대한 비유가 4-6절을 설명한다면, 그들의 타락은 그들이 처음부터 결코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님을 보여준다.
3. 9-12절
비록 저자가 타락의 가능성에 대하여 가혹하게 말하지만, 9절에서 저자는 대부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독자들이 처함 가장 공통된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돌아간다(이제 저자는 그들을 “너희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Even though we speak like this, dear friends, we are confident of better things in your case-things that accompany salvation”(NIV)고 말한다. 우리는 마지막 어구를 “things that belong to salvation”으로 번역할 수 있다. echomena의 번역과 관련하여 BAGD, 334, 3은 echo의 중간태를 “hold oneself fast, cling to”로 번역하고, “of inner belonging and close association”으로 사용된 이 형태의 유일한 신약성경의 예로서 히브리서 6:9를 제시한다. BAGD를 따르면서 나는 “belonging to”라는 의미를 수용하는데, 그러나 동시에 NIV의 “accompany”를 따르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유사한 의미를 제공하고 논의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저자가 그런 “better things”을 말할 때 저자가 언급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10-12절은 9절을 설명하고(gar가 9절과 10절을 연결하는 것을 주목하라) 이 구절들은 여러 가지 “더 나은 것들”을 언급한다. 10절에서 저자는 그들의 삶에서 사역과 사랑과 섬김을 언급한다: “Your work and the love which you showed for his sake in serving the saints, as you still do.” 11절에서 저자는 소망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언급한다: “And we desire each one of you to show the same earnestness in realizing the full assurance of hope until the end.” 12절에서 저자는 이 소망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실현하는 그들은 믿음과 인내를 가질 것이다 고 말한다: “so that you may not be sluggish, but imitators of those who through faith and patience inherit the promises.” 이 방법으로 그는 참된 성도들을 격려한다.
그러나 핵심질문은 “무엇에 비하여” “더 나은 것”(better things)인가이다. 저자가 마음속에 생각하는 대조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가능한 해석들이 있다: (1) 심판 때에 불살라지는 것보다 더 나은 것(8절) (2) 빛에 비취임을 받고, 하늘의 은사,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게 될 세대의 능력을 맛보고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는 선한 경험들보다 더 나은 것들(4-5).
첫 번째 해석은 그럴듯하지 않다. 왜냐하면 (a) 히브리서에서 형용사 kreisson(better)은 나쁜 어떤 것에 대하여 좋은 어떤 것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어떤 것에 그것보다 더 좋은 어떤 것을 비교할 때(better covenant, better promises, better sacrifices, better possession, better country)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너희들의 경우에는 마지막 심판 때에 불살라지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우리가 분명히 느낀다” 고 말하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다. (b) 만약 저자가 “너희들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에게는 심판에서 불에 살라지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 있다고 확신한다” 고 말하기를 원했다면, 저자는 아마도 복수 ta kreissona (better things)를 사용하지 않고, “something better for you, that is, salvation”을 말하기 위하여 “something better”과 같은 단수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히 11:40의 단수 kreitton ti 와 비교하라). (c) 저자가 언급하는 더 나은 것들은 미래의 더 나은 것들(미래의 심판보다 더 나은 미래의 구원)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더 나은 것들로 더욱 잘 이해되는데, 왜냐하면 kai echomena soterias라는 어구에서 현재분사 echomena는 현재지속이라는 의미를 제공하는 것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즉 “things now presently belonging to salvation, and continuing to belong to salvation.” (d) 저자는 그들이 아직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여전히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저자와 독자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관심은 독자들에게 “너희들이 타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비교는 타락과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4-5절의 긍정적인 경험과 비교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이 더욱 적절하다: (a) 이 해석에서 더 좋은 것들은 4-5절에서 언급된 좋은 것들- 빛에 비취임, 맛봄, 참여함-보다 더 좋은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좋은 것”에 대조하여 “더 좋은 것”이라는 저자의 언어 사용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b) 저자는 그런 “더 좋은 것들”이 (심판에 대조되는) 구원이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동반하는” 혹은 “구원에 속한” 것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더 좋은 것들”을 10-12절에서 언급하는 사랑, 섬김, 믿음, 소망과 같은 그런 가치들로서 이해하는 것과 일치하는데,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인의 구원경험에 속하고 4-6절에서 언급된 긍정적인 경험들에 적절한 비교를 제공한다. (c) 10-12에서의 사랑, 섬김, 믿음과 같은 것들이 구원의 증거를 제공하는 유일한 선한 열매들이기 때문에, 저자가 그런 것들을 4-6절에 나타나는 그 자체로는 구원의 증거가 아닌 빛에 비취임, 맛봄, 참여함보다도 “더 좋은 것들”로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따라서 9절에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 대부분이 그가 4-6절에서 서술한 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것들은 구원에 속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그의 독자들에게 있어 더 나은 것이다 고 확신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으로 4-6절에 서술된 유익들은 구원에 속한 것이 아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요점은 우리가 kai echomena soterias 라는 어구를 “즉, 구원에 속한 것들” 혹은 “그리고 구원에 속한 것들”로 번역하는데 타당하다. 이런 방법으로 9절은 이 전체 단락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열쇠를 제공한다. 만약 저자가 4-6절에 언급된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받았다 고 말하려고 한다면, 9절에서 저자가 그의 독자들에 대하여 더 나은 것들, 즉 구원에 속한 것들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따라서 9절을 기록하면서, 저자는 4-6절에서 말한 그 사람들은 많은 복들을 가졌지만 그러나 구원에 속한 것들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6장 9-12절의 전체 단락은 저자가 6장 4-6절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타락에 빠지지 않은 성도들의 그룹을 그려내고 그들을 구별하는 것을 명백하게 한다. 이것은 저자가 4-6절에 나타나는 타락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 대부분이 다른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그들의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자신들의 삶에서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7-12절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적절하다: 7-8절은 4-6절에 서술된 사람들을 계속해서 가시와 엉겅퀴를 생산하는 열매맺지 못하는 땅으로 설명하고, 그래서 그들은 결코 구원받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9-12절은 그 독자들은 4-6절에서 말하는 일시적인 경험들보다 다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더 좋은 것들은 구원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7-8절과 9절은 4-6절에 서술된 그 사람들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고 지적한다.
복음의 맛만 보는 사람들
히브리서 6:4-8절을 중심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시비"를 읽고
▲ 홍성철 목사(코닷연구위원, 대전주는교회 담임)
한국교회 일부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맛만 보고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여긴다. 이런 자세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자신도 불행하게 되는 위험천만한 행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를 건강하게 바로 세우려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하고 예수를 믿도록 강단에서 강론해야 한다. 본고는 정주채 목사님의 구원의 확신에 대해 히브리서 6:4-8절의 해석을 확대하여 주장을 이어가고자 한다.
히브리서 6:4-6절은 신약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히브리서 6:4-5절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참예자가 된 사람과 6:6절의 이런 사람이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구절 사이에 하모니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질문은 다음과 같다: 6:4-5절에서 구원을 거의 경험한 사람이 6: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타락하여 회개할 수 없는가? 6:4-5절이 구원을 말하고, 6:6절은 구원의 상실을 묘사하는가? 왜 6:6절은 이런 사람들은 타락하고, 다시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하는가? 왜 6:6절은 타락한 자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는가?(아니면 회복은 가능한가?) 마지막으로 질문은 이 구절에서 저자가 경고하는 위험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구절은 4가지 다른 견해로 해석된다: 1) 이 구절에서 이 사람들은 참된 신자인데,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2) 이 사람들은 참된 신자인데 배교하면 상급을 상실할 수 있다; 3) 이 구절에서 이 사람들은 가설적 견해로서 성장과 성숙을 촉구하는 가설적 경고다; 4) 이 신자는 거짓 신자다. 이 사람은 배교하여 영원히 정죄를 받는다.
1. 네 가지 견해:
1) 알미니안적 견해(The Arminian view):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을 실제로 잃은 신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참으로 믿는다면 즉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 개혁파의 성도의 견인 교리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이 그를 영원히 구원받은 상태로 지킬 것이라는 견해다. 왜냐하면 구원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개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하나님이 실제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 사이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사람 영혼을 영적 사망에서 영생으로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중생하게 하는 능력을 제외하고도 결정을 믿는다는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신뢰한다고 결정할 때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그 사람을 사망에서 영생으로 일으키는가? 하나님이 그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었는가?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돌밭에 뿌린 씨도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도 잠깐 동안은 좋아 보인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 13:20-23). 다시 말해서 개혁자들은 이것들을 거짓 믿음이라고 부른다. 거짓 신자는 잠깐 동안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에 핍박이 오고 환란이 오면 참된 상태가 폭로되고 멀리 떠나간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데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심각한 죄는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알미미안주의자들은 히브리서 6장은 구원을 상실한 신자를 묘사한다고 본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많은 성경 구절에서 참된 신자는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요 6:39-40; 10:27-30; 롬 8:28-39). 둘째로 참된 신자가 구원을 상실한다면 그러면 이 본문은 그들의 구원을 다시 회복하기가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의 견해(Non-lordship salvation view)
이 견해에 따르면 참된 신자도 믿음을 부인할 수 있다는 사고다. 그러나 구원받은 채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은 제인 하지(Zane Hodges, Bible Knowledge Commentary, Hebrews [Victor Books])와 은혜 복음주의 협회(the Grace Evangelical Society) 사람들과 켄달(R. T. Kendall)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원 받은 믿음을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사건을 지적으로 동의해도 구원받은 믿음이라고 여겨준다. 다시 말해서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도 영원히 그 구원이 안전하다는 견해다. 그가 후에 무신론자가 될 수 있고, 혹은 그의 인생에서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믿었기 때문에 그의 구원은 영원히 안전하다는 견해다.
이 견해는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야고보와 요한일서에서도 이 견해를 반박한다. 성경은 분명히 참된 신자는 죄를 슬퍼한다. 그러나 회복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믿는다고 주장하나 참으로 구원 받지 않았을 수 있다(발람, 가룟유다, 시몬 말구스; 고전 15:2; 고후 6:1; 13:5; 딛 1:16).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을 박고 타락한 자는 회개하여 회복될 수 없고 상급을 상실하는 신자가 아니다.
3) 가설적 견해(The hypothetical view):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은 가설적 경고라고 말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일부 독자들은 결코 정죄와 저주를 받을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냥 가설적 경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들이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여 성숙과 성장으로 나아가도록 경고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가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데 이런 글을 경고로 했을 리는 없다.
4) 거짓 신자 견해:
이 사람들은 말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나 참된 신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고 여기나, 그러나 진정으로 구원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견해는 히브리서 6:4-5절의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인데 겉으로는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기 찾아오면 그들의 진정한 정체가 드러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버리고 유대주의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과 같은 편에 선다.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한다. 그들은 “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크리스천 믿음이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저자는 이런 배교자들에 대해 이런 사람들은 다시 회개하여 새롭게 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미 마음에 노출된 진리에 대해 마음을 강팍하게 했다. 그들이 잠깐 동안 구원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결코 구원을 받은 적이 아니었다.
이 견해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로 6:4-5절의 용어들은 거짓 신자들이 아니라, 진정한 신자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짓신자를 묘사하는 것이라면 왜 저자는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은 것 같은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대한 문제다. 둘째로, 만일 그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러면 그 무엇이 그들을 타락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처음에 결코 회개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들이 회개하여 회복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2. 복음의 맛만 본 사람들(6:4-5)
어떤 견해가 히브리서 문맥과 상황에 가장 잘 맞는지 고려해야 한다. 히브리서는 박해 중에 유대주의로 돌아가려는 유대인 신자 그룹에게 쓴 편지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주의에서 유력한 인물인 여호수아, 모세보다 우월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논증했다.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옛 언약인 유대주의로 복귀하는 것은 배교다.
히브리서 3-4장에서 저자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악하고 불신의 마음 때문에 타락하여 배교하지 않도록 광야에서 구약에서 완악한 유대인을 부정적 예를 사용하여 경고한다(3:7-12, 15; 4:3, 5, 7). 저자는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경고한다. 따라서 저자는 그들이 처음에 잡았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라고 도전한다(3:14).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세례의 모형인 홍해를 건넜고,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고, 그리스도의 모형인 바위에서 터진 물을 마셨다. 구약 이스라엘도 한번 구름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도 홍해 기적과 만나, 광야에서 보호받은 여러 가지 영적 경험과 유익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주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평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복음을 선포했지만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대부분 광야에서 죽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광야에서 홍해를 가르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만나의 은사를 경험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대조하여 히브리서 청중 가운데 타락하여 유대주의로 돌아가려고 하는 진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을 대상으로 6:4-5절에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이라고 비교하여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 6장에서 이 사람들은 구원을 실제로 받지 못하고 맛만 본 사람들이다.
1) 그들은 한번 비춤을 받았다.
히브리서 6:4-6절에서는 구원에 관한 용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칭의, 성화, 새로운 출생, 중생 거듭남, 거룩하게 흠이 없게 만드는 일이란 구원에 관련된 용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냥 어떤 사람들은 ‘한번 빛을 비춤을 받았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 ‘선한 말씀의 맛만 보았다’로 표현한다.
'한번'(하팍스, ἅπαξ) 그들은 복음을 들었고 이해했다. 그러나 구원은 받지 못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갈릴리 사람들은 이사야 9:1-2절에서처럼 그들은 어둠에서 복음의 빛을 비춤을 받았다. 이 사람들이 하늘의 빛을 비춤을 한번 받았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경험했다가 아니라, 지적으로 이해했다는 뜻이다. 빛의 비춤을 받았다는 구약 셉투아진트에서 지식과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빛을 비춤을 받는다는 뜻이다. 구약의 여러 구절에서 빛을 비춤을 받는다는 뜻은 ‘지식적으로 어떤 것을 안다’는 뜻이다. 최소한 이 빛을 비춤을 받는다는 것은 마음에 어떤 정보를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주어진 복음의 정보에 반응할 필요는 없는 것을 말한다.
어구 ‘빛을 비춤을 받았다’는 표현을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 사람들이 위대한 빛을 보았다고 표현된다. 이방인의 갈릴리 지역에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위대한 빛을 보았다. 그들은 빛을 보았다. 이 빛을 보았다는 것이 갈릴리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빛을 보았고,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는 기적을 보았다. 빛을 비춤을 받았다는 말은 곧 그들이 마치 컴퓨터 안에 어떤 정보의 지식을 집어넣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9절에서도 예수님은 세상에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빛을 비추었다는 것은 머리에 성경적 진리의 정보가 들어갔다. 그것을 비추었다고 표현한다.
히브리서에서 어떤 유대인 신자들은 한번 빛을 비춤을 받았고, 복음에 노출되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구원을 받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맛보았다. 아마도 6:4절의 하늘의 은사를 구원을 언급하는데 그것을 맛만 보았다. 성령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구원의 축복과 히브리서 교인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은사를 맛만 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2) 하늘의 은사를 맛만 보았다.
히브리서 일부 유대 신자들은 하늘의 은사에 경축했거나 그 안에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그것을 맛만 보았다고 언급된다.
동사 ‘맛보다’(규오마이, γεύομαι)는 개념은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맛보다’는 일시적으로 맛본 맛을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일시적 상태를 묘사한다. 예를 들자면 동사 ‘맛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혔을 때 신포도주를 주었으나 맛보고 마시지 않았다. 따라서 ‘맛보다’는 그 맛을 보고 그 맛이 어떤 맛인지 알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마시지 않고 그것을 마실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약간 맛만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맛을 보고 마시기로 행동하고 헌신하는 상태가 구원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도 맛만 보았다. 그들은 선한 주의 말씀 안에 살았거나 그것을 지켰다고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오는 시대에 능력에 대해서도 기대했거나 소망했다고 언급되지 않고 맛만 보았다고 언급된다. 어떤 음식을 맛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삼키고 먹고 마셔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맛만 보았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내 살이고 내 피니 마시라고 했다. 요한복음에서 먹고 마시고 일은 주님과 인격적 관계와 헌신하는 일을 의미한다. 민수기 13장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12정탐꾼을 파송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의 포도송이를 어깨에 이고 돌아왔다. 그들은 그 땅에 맛만 보았다. 그리고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헌신하지 않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그 땅의 맛만 보았다. 맛만 보는 것은 먹는 것이 아니다. 음식 맛만 보는 것은 그 음식을 마셔서 자신의 영양 상태로 먹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3) 그들은 성령의 참예하는 자들이었다.
그 다음에 성령의 참예하는 자였다(카이 네토쿠스 게내센타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καὶ μετόχους γενηθέντα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우리는 반드시 이 ‘참예하다’는 용어를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참예자’(메타코스, μέτοχος)는 흥미로운 용어다. 참예자는 성령을 소유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와 관련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이 역사할 때 그 주변에 있었다는 말이다. 참예했다(μετόχους)는 헬라어 아오리스트 시제로서 한번 과거에 한번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현장에 한번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성령이 일으키는 기적의 역사와 현장에 과거에 한번 참여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는 현장에 없었다. 참예자란 말은 누가복음 5장 7절에서 베드로가 새벽에 주님 말씀대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그 친구들이 고기를 끌어올리는데 참예했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성령에 참예했다는 말은 성령 하나님이 그 신자 속에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역사할 때 그 주변에 어떤 종교 활동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성령 하나님이 그들을 속에 내주하여 순종하게 하는 역사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구원의 선행단계 과정에만 있다가 핍박이 오니 믿음을 포기했다는 안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 습관적으로 나아와서 은혜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그들 속에 주님이 내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8:9절에서 만일 성령이 가지지 못하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6장의 이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는 동안에 교회 주변에 있었지, 성령 하나님이 중생한 삶 속에 임재하고 내주해 계시지 않았다. 성경 어디에서도 성령 하나님의 참예자가 되라는 말은 없다. 성령 하나님이 중생한 신자 속에 내주해 계신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는 주변에 참예자로 있는 것하고 성령 하나님이 그들 속에 내주해 계셔서 활동하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히브리서에서 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구원의 선행단계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구원의 선행단계 현장에 있었고, 한 단계 한 단계 믿음의 단계로 가는 과정 가운데 있었다. 이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는 공간에 함께 참여했다. 히브리서 6장에 따르면 이 사람들도 교회 왔고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는 당시 그 주변에 있었다. 의심 없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이 되는 구원의 선행과정 중에 있었는데, 도중에 포기하고 타락하여 배교하게 되었다.
4)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맛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레마의 말씀을 맛보았다(카이 카론 규사메노스 데우 래마, καὶ καλὸν γευσαμένους θεοῦ ῥῆμα ). 어떻게 맛을 보았는가? 그들은 선포된 말씀에 일시적으로 감동되었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선포된 말씀에 헌신하거나 주님에게 자신의 인생의 삶을 던지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바위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선한 말씀을 듣고 감동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신을 위해 죽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인생과 시간과 정성을 전폭적으로 바치지 않았다. 그것을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말씀에 감동되었다. 일시적으로 마음에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뿌리가 없었다. 그 씨에 뿌리가 없었다는 것은 일시적인 감동이었지 회심하거나 중생하지 않았다.
선한 말씀에 맛을 보았으나 그들은 히브리서 6:4-6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말로는 고백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말로만 고백하고 자신을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희생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에게 전폭적으로 맡기고 헌신하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라고 권면한다(고후 13:5).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라는 것인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시험해보라는 말이 무엇인가? 이것은 너희 자신 안을 보라는 말이 아니다. 너희 속에 누가 계신가? 과연 예수님이 계신가? 당신 속에 예수님이 계신 증거가 무엇인지 스스로 테스트해보라는 말씀이다.
5) 그들은 오는 시대의 능력을 맛보았다.
오는 시대의 능력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의 기적의 파워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수행되는 능력을 보았다. 그들은 나라를 맛보았다. 그들은 사도들이 행하던 사인과 기적을 보았다. 이 사람들은 빛을 비춤을 받았고, 구원의 은사를 맛보았고, 성령의 역사를 그 주변에서 보았고,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맛보았고, 기적을 보았다. 그런데 만일 타락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다시 회개하여 회복될 수 없다.
3. 타락한 자들은 새롭게 될 수 없다(6:6)
그런데 그들이 타락하여 멀리하면 회개하고 새롭게 되기가 가능하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과연 이 사람들은 과연 크리스천으로서 영적인 경험을 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인가?
1) 그들이 영적인 경험을 했어도 그들이 실제로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마 7:21-23). 이런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 하는 종교적인 일들을 많이 행할 것이다. 신약시대에 바리새인들도 많은 종교적 의식들을 많이 행했다.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일들을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구원을 받지 못했고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도 힘을 다해 수고하여 전도했다(마 23:15)
감동 있게 기도도 했다(마 23:14).
많은 종교적 헌신을 했다(마 23:16)
엄격하게 십일조도 드렸다(마 23:23)
종교적 전통을 선호했다(마 23:29-31)
규칙적으로 금식했다(눅 18:12)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마 23:15)
2) 그러나 인간 관점에서 볼 때 히브리서 6:4-5절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크리스천이지 의심스럽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운명을 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보면 크리스천의 모습이 있다. 우리는 히브리서 6:4-5절이 소위 자신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데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데마는 배교하여 바울을 예수님을 떠났다(딤후 4:10).
3) 만일 타락하고 주님을 떠나면 회개하고 새롭게 될 가능성이 없다(6:6). 그들이 이 사람들은 헌신이 약한 사람들이며 하늘의 상급을 잃을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고 말만 고백하는 자들이다.
히브리서 6:1-2절의 문맥에서 볼 때 저자는 유대주의로 돌아갈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경고하는 구절이다. 유대주의로 돌아가는 일은 예수님을 버리는 일이 되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된다.
4) 만일 그들이 떨어지면.
‘떠나가고 있는 것’과 ‘떨어지면’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떨어지면 실제로 예수님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차이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다.
(1) 만일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구원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만일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전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2)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에서 떠나면 왜 그가 회개할 수 없고 하지 않은지를 생각하라. 회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다. 만일 그들이 외관상 영적 경험을 맛보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사실 위험에 처해 있다. 만일 하나님을 떠나면 그들은 회개하거나 새롭게 되기가 가능하지 않다.
4. 타락한 자들의 심각한 결과(히 6:7-8).
1) 비가 내리는 땅은 결실을 맺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땅이 비를 받아들일 때 결실과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그 땅의 기능과 존재 이유를 다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을 적용시켜 말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가? 그러면 그 축복의 열매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 속에 성장한 열매를 보길 원한다. 특별히 성숙하게 자라는 열매를 보길 바란다.
2) 그러나 만일 마음속에서부터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너희는 거절당한다. 만일 땅이 비가 내려 축복을 받았는데 열매가 없다면 농부가 엉겅퀴와 가시를 불태워도 농부를 비난할 수 없다. 따라서 신자는 타락하지 않도록 영적 성장과 열매를 맺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예수 안에 산다(요 15:5). 그래서 타락할 위험이 없는 것이다.
5. 우리가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1)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열매로 전폭적으로 자신을 헌신해야 구원의 확신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 개인적 교제를 가지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동시에 거부하는 것이다.
2) 이 구절은 구원 확신은 성화에 열심인 사람에 의해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인내하는 자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까운 문맥인 히브리서 6:9-12절에서 분명히 성화와 인내를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은 어떤 환란과 박해 중에서도 인내하고 성화를 이루는 점에서 확신을 말할 수 있다.
3) 구원의 확신은 진리를 맛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 받고 죽은 주 예수님에게 헌신과 충성과 믿음이다. 하나님 축복이 비춰졌는데도 타락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회개는 가능하지 않다. 히브리서 6:4-8절은 배교의 가능성을 고려한다.
4) 하나님의 은혜의 빛에 자주 순종하지 않은 자는 위험한 사람이다. 배교가 자신이 스스로 회심했다고 여긴 자에게 경고하는 것은 믿음에서 떨어져 멀리 갈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진정으로 회심되지 않은 가능성을 언급한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종교적 열정』(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을 보지 않아도, 구원받았는지 조사하고 점검해보아야 한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실상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행동하지 않은 것은 거짓 믿음일 가능성이 높다(딛 1:16).
5) 그리스도를 말로만 고백하고, 삶에 열매, 곧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행동이 없다면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축복의 은혜의 비를 계속 내린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열매 순종의 열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행위가 있는가?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열매의 리스트와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라(갈 5:19-23). 내 삶에 가장 두르러진 열매는 무엇인가? 나는 점진적으로 육체의 행위를 부인하고 성령의 열매로 성장하고 있는가?
6) 자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다. 회개는 회심 때에 한번 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변화나 행동의 변화가 아니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진짜 회개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신자가 갖는 진정한 회개다. 과거에 불신자들은 복음주의자들을 회개하는 자로 불렀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매일 가까이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것들을 바로 보고 돌이킬 것이다. 회개는 합당한 반응이다.
7) 자신의 마음이 강팍한데도, 히브리서 6:4-8절의 경고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위험한 상황에 있다는 증거다. 저자는 이런 강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마음이 점점 강팍해가는 사람들에게 충격과 경고를 주어서 그들이 너무 늦기 전에 영적으로 깨어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하는 신자에게 주는 경고가 아니다. 이 구절은 그들이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을 형벌로 빠져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참 신자는 그들의 옛 생활 방식으로 빠져가지 않는다.
8) 참 신자는 믿음으로 순종으로 인내한다. 우리는 히브리서 10:36절에서 다시 강조한 인내의 필요성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가 멸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히 10:39). 다시 말해서 핍박과 환란 중에서도 구세주로 주님으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의 유일한 방법은 믿음과 순종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9)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예수를 포기하고 악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위험하여 영적으로 심각한 것이다. 만일 당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죄를 반대하고 매일 싸우면 이 경고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라. 주님과 함께 계속 거닐고, 그러면 하나님은 하늘 왕국에 안전하게 데려갈 것이다(딤후 4:18).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진정한 구원확신에 이르지 못하고 복음을 맛만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 은혜로 복음을 경험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강단에서 설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정직하게 진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지혜를 구하라고 공동체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히브리서 6장 4~12절에 대한 주석
1. 칼빈주석 : 히브리서 6장 6절
In short, the Apostle warns us, that repentance is not at the will of man, but that it is given by God to those only who have not wholly fallen away from the faith. It is a warning very necessary to us, lest by often delaying until tomorrow, we should alienate ourselves more and more from God. The ungodly indeed deceive themselves by such sayings as this, — that it will be sufficient for them to repent of their wicked life at their last breath. But when they come to die, the dire torments of conscience which they suffer, prove to them that the conversion of man is not an ordinary work. As then the Lord promises pardon to none but to those who repent of their iniquity, it is no wonder that they perish who either through despair or contempt, rush on in their obstinacy into destruction. But when any one rises up again after falling, we may hence conclude that he had not been guilty of defection, however grievously he may have sinned.
Crucifying again, etc. He also adds this to defend God’s severity against the calumnies of men; for it would be wholly unbecoming, that God by pardoning apostates should expose his own Son to contempt. They are then wholly unworthy to obtain mercy. But the reason why he says, that Christ would thus be crucified again, is, because we die with him for the very purpose of living afterwards a new life; when therefore any return as it were unto death, they have need of another sacrifice, as we shall find in the tenth chapter. Crucifying for themselves means as far as in them lies. For this would be the case, and Christ would be slandered as it were triumphantly, were it allowed men to return to him after having fallen away and forsaken him.
(99) Some render the verb “renew” actively, in this way, — “For it is impossible as to those who have been once enlightened, and have tasted of the heavenly gift, and have been made partakers of holy spirit, and have tasted the good word of God and the powers of the world to come, and have fallen away, to renew them again unto repentance, since they crucify again as to themselves to Son of God, and expose him to open shame.”
This is more consistent with the foregoing, for the Apostle speaks of teaching. It is as though he had said “It is impossible for us as teachers;” as they had no commission. To “renew” may be rendered to “restore.” It is only found here, but is used by the Sept. for a verb which means renewing in the sense of restoring. See Psa 103:5; Lam 5:21 (refs2). Josephus applies it to the renovation or restoration of the temple.
2. 김효성주석
[4-6절] [이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없음이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본문은 우리가 초보적 진리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보인다.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씀은 복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한 내용들,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내세에 있을 부활과 천국의 기쁜 일들과 심판과 지옥의 두려운 일들에 대해 믿게 된 것을 뜻하는 것 같다. ‘타락한 자들’이란 기본적 신앙에서 떨어져 배반한 자들 즉 배교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혹은 공공연하게 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하여 배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도가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 즉 소위 ‘성도의 견인(堅忍)’을 밝히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요 10:28; 빌 1:6),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과 중보 사역의 완전함, 성령의 인치심의 진리들은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자들은 잠시 연약할 수 있으나 마침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지 말고 가상적인 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겸손과 두려움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타락하여 믿음을 배반했다면 그는 참으로 중생한 자가 아닐 것이다.
[7-8절] [이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 은혜의 단비를 받아 성장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기는커녕 가시와 엉겅퀴 같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마침내 지옥 불에 던지울 것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타락과 배교의 위험한 경계선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성장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우리는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9-10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이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사랑의 수고로](전통사본)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하심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편지 수신자들이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 ‘구원에 가까운 것’이라는 원어(에코메나 소테리아스)는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라는 뜻이다(KJV, NASB, NIV). 그것은 그들에게 구원에 수반하는 행위의 열매들이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의 영적 미성숙을 책망하며 배교를 경고했지만, 실상 그들 속에 좋은 것들과 선한 행위의 열매들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셔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긴 것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행위’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의 수고로 성도들을 섬겼고 또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성도들을 섬기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또 알아도 곧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다 기억하신다.
[11-12절]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의 간절한 소원은, 첫째로,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은 이 권면의 말씀이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기를 원함을 나타낸다.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말은 열심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부지런과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로, 성도들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소망의 풍성함’이라는 원어는 ‘소망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셋째로, 우리는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살았고 마침내 약속들의 성취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약속들이란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들이 들어간 천국과 거기에서의 안식이다.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히 6:4-6
신자가 구원을 얻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핵심 근거로 드는 구절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앞뒤 문맥의 뜻을 찾고 히브리서의 전체 주제와 비추어봅시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첫 번째이자 결정적으로 잘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읽거나, 어떤 구절을 읽든 자기 생각으로 해석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고난 중에 있으면 위로와 힘을 주는 구절을,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으면 하나님의 신원(伸冤)을 바라는 구절만 찾아 읽습니다. 또 현재 읽고 있는 본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해보려는 노력은 아예 하지 않고 그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구절과 단어에만 초점을 맞춰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성경해석법을 배워보지 못한 일반 신자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비록 신자가 그렇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때로는 정말로 궁급한 신자에겐 큰 은혜를 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전문 사역자는 절대로 그래선 안 됩니다.
말하자면 자기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비슷한 맥락의 구절을 찾아서 억지로 그 의미를 짜내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본문 자체의 뜻을 즉, 저자가 당시의 독자에게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의미로 말했는지 밝혀내야 합니다. 신자들에게도 가장 먼저 그것부터 가르친 후에 실제 삶에 적용하는 차원에선 조금씩 넓혀나가도 되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말하는 바
상기 본문은 언뜻 신자가 죄나 잘못을 범하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이 말씀을 살피면 그 적용되는 대상이 구원 받은 신자라고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자들이 지닌 믿음을 묘사한 네 가지 표현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넷은 “1) 한번 비췸을 얻고,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3)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4)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입니다. 모두 일회성의 은혜를 받았다는 뜻이지 지속적으로 은혜 안에 거(居)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의 빛에 한번만 비췸을 얻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 현장의 로마 군병들도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가 분명히 그들의 심령에 비췄기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거듭나서 구원 얻은 것은 아닙니다.
둘째,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습니다. “하늘의 은사”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gift)”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에 베푸는 여러 모양의 귀한 선물 중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면 최소한 “하늘의 은사를 받고”라고 표현해야 타당합니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맛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성령에 참예한 바 된 것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것을 뜻합니다. 성령이 당신의 뜻대로 각 신자에게 나눠주는 영적 선물을 말합니다.(고전12:4-11) 그런 은사를 받은 신자는 당연히 또 자연히 성도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자기 은사를 사용하게 됩니다. 맛만 보았다는 것은 그런 사역을 한 적이 없으며 또 그럼 그 은사를 소유한 적도 없다는 뜻입니다. 불치병을 앓는 불신자가 신유의 은사로 병을 낫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막상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로 말 그대로 단순히 성령의 역사에 참여한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같은 맥락입니다. 마찬가지로 ‘맛보고’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예언도 수긍했습니다. 불신자가 전도 집회에 와서 말씀에 찔림을 받고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평소 교회에 출석하여서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특별히 종말론적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비록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그런 가치관이 확고히 서있지 않다면, 구원 받은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저자는 네 번이나 일회성을 의미하는 용어를 사용해서 타락한 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그랬다면 분명히 강조하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와서 거하는 즉, 거듭나서 구원 받은 신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락을 하되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형태로 배교한다고 합니다. 온전히 구원을 얻은 자라면 예수님의 은혜를 철저하게 부인하며 모욕하는 방식으로 거역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성령이 내주하므로 일시적으로 하나님, 교회, 성도들에게 상처받고 실망하여 신앙을 게을리 할 수 있어도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저자가 “예수를 현저히 욕보인다.”고 강하게 표현한 의도는 고의적으로 철저하게 예수님을 대적했음을 드러내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스스로 악의를 갖고 타락한 자에 대한 경고이지 하나님이 예수 믿은 후에 잘못을 범했다고 구원을 취소시킨다는 뜻과는 무관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작 배경과 동기
본문의 뜻을 더 정확히 알려면 히브리서를 저작하게 된 당시 상황부터 살펴야 하는데 그래야만 그 저작 동기와 강조하려는 주제가 분명해집니다. 먼저 서신을 받아 읽을 수신자들은 책 제목이 말하는 대로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자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임을 믿고 초대교회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으므로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식했습니다. 생전의 주님의 가르침과 사역도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입증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영광의 빛의 비췸을 받았으며,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 참예했을 수 있으며, 산상수훈과 종말에 관한 설교에 감동받았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재능과 특기를 활용해서 봉사했을 것입니다. 상기 본문의 표현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자 자기들 세력의 약화될 것을 염려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집요한 위협과 핍박이 그들에게 가해졌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박해는 유대교로부터 온 것입니다. 유대인 신자들로 유대사회에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아예 파문 추방했습니다. 이방인처럼 구원 받지 못할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 얻는 것은 틀렸고 반드시 지금까지처럼 모세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부추겼습니다.
이처럼 현실적 핍박 위에 영적인 공격까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지자 서서히 재차 유대교로 돌아가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래서 초대 교회 안에 동요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십자가 복음의 충족성 완전성 유일성 절대성에 대해 변증할 목적으로 저작된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과 그 십자가 희생 죽음을 구약의 제사장과 율법에 따른 제사에 비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인간 제사장과 달리 주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잇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메시아라고 변증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어야만 인간의 죄를 대속할 제물로서 완전한 조건과 자격을 갖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정체성을 변증한 후에 율법구원과 은혜구원을 대조합니다. 율법의 짐승 제물의 대속 효과는 행위로 범한 죄들만 그것도 일 년이라는 단기간만 미친다고 합니다. 매년 짐승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반면에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바쳐진 대속의 효과는 영단번(永單番 once for all)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율법의 한시적이었던 제사법도 폐지되었습니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8-20)
간단히 말해 율법에 따른 행위 구원은 틀린 것이므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실현한 은혜의 구원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는 책이 히브리서입니다. 자꾸만 율법을 따라야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교회 안팎의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위협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상기 본문이 예수 믿은 후에 잘못을 범하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의미라면 신자는 반드시 또 오로지 자신의 행위를 올바르게 세우는 일에만 믿음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또 은혜구원은 틀렸기에 다시 행위구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히브리서 전체가 힘써 금지하고 있는 권면과 정반대의, 의미가 됩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헛되고 헛된 것으로 전락되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 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저자가 특정한 주제를 강조하고자 한 편의 편지를 작성하는데 서로 다른 의미를 그것도 반대되게 쓸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의 저자가 일구이언 한다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히브리서의 구조와 주제
저자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어떻게 반박하고 있는지 책의 전체 구조를 간략하게 훑어봅시다. 먼저 1장에서 2:4까지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천사와 대조해서 변증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죄에 묶인 백성들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충성된 대제사장이었다고 선포합니다.(2:17)
이어지는 3장에선 유대인들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율법을 여호와께로부터 수여 받아 선포하고 가르친 모세보다 그리스도가 우월하다고 변증합니다. 그리고 4장에선 믿음으로만 얻는 안식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히브리 선조들이 약속은 받았으나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는데(4:1), 그 이유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3:8,9)
단순히 그분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히브리 선조들이야말로 출애굽 전후에 상기 본문(6:4,5)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하는 영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도 참예했고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보았습니다. 시내 산의 화염 가운데 강림하신 여호와를 멀리서 목격했고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도 들었으며 온갖 이적을 체험했으며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도 맛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분과 피의 제사로 세운 제사장 나라 언약을 끝까지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스스로 완악하게 거역했습니다. 겉으로는 구약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랐으나 육신에만 할례를 했지 심령에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형식적 문자적 습관적으로만 지켰지 율법의 정신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택했고 기적으로 보호 인도했으며 거룩한 율법을 수여했기에 구원은 이미 얻었다고 과신했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간주해서 외모로 차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지 못하고 대신에 그분을 시험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율법은 다가올 십자가 구원약속의 표징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래서 4장 말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해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5,16)
이런 예수님의 은혜 구원을 보장하기 위하여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멜기세덱과 비교하여 변증한 후에 교인들의 신앙적 배반에 대해 경고합니다.(5장) 그 후에 상기의 본문이 이어지는데 그 전에 6:1,2에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배교하여 타락하는 즉, 유대교로 재개종하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6:1,2)
“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혜를 순전히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간단한 진리를 말합니다. 먼저 그 도를 버리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런데도 그 권면에는 귀를 막고 대신에 “죽은 행실을 회개하려” 하고 또 “유대교 식의 세례와 안수를 행하려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런 일들은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참된 교훈”을 다시 닦는 일이므로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그보다는 완전한데 즉, 십자가 은혜 구원의 절대성 유일성 충족성 완전성을 다시 견고하게 붙들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이후로는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 은혜를 세밀하고도 깊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과 대제사장직의 기원을 비교한 7장,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말한 8장,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완전성을 말하는 9장,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을 말하는 10장으로 이어지고 10장 후반에는 변치 않는 믿음의 능력을 설명합니다. 그후 11장에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후에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은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했습니다.
본문 해석의 결정적인 열쇠
주목할 것은 상기 본문의 다시 타락한 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힌트가 본문의 앞과 뒤에 나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각기 하나씩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하는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4:2) “저희와 같이”에서 ‘저희’는 바로 약속을 받고도 하나님을 시험하여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히브리인 선조들을 지칭합니다. 마침 그들의 선조 가운데는 본문이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왕인데 구약시대에는 종종 그러했듯이 성령의 일회성 은사를 받았으나 구원을 받지 못했지 않습니까? (삼상10:9-13,16:14)
따라서 유대교로 재개종하여 십자가를 욕보인 자들에 관해 4:2에서 이미 그 선조들처럼 복음 전함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은 자라고 설명했기에 6:2이 말하는 바도 당연히 그와 같은 뜻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 저자가 비교적 짧은 책에서 자신의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전해들은 복음에 반드시 믿음으로 화합해야 구원을 얻으나 그러지 못했다면 아직 구원 얻지 못한 자입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어보려고 교회 생활을 시작한 자들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그분의 참 생명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자들이 다시 할례, 제사, 안수, 세례, 인식일 규정 등을 지켜야만 구원 얻는다는 유대교 교리를 좇을 리는 없습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12:15,16) 본문 뒤에 나오는 결정적인 힌트입니다.
교회 내에 다시 타락할 자가 있는지 잘 살펴서 믿음으로 잘 세워주어야 하는데 혹시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자가 있는지 주목하라고 합니다. 야곱의 형 ‘에서’는 너무나 사소한 현실적 필요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상속권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처음부터 믿음이 없던 자였습니다.
상기 본문에서 타락한 자는 초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기독교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 손해 내지 핍박이 두려워서 쉽사리 유대교로 재개종한 자들입니다. 율법의 짐승 제사와 인간 장로들이 제정한 종교적 규례들을 지켜야만 구원이 보장된다는 가르침에 현혹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물론 메시아 되심을 아무 미련 없이 포기했습니다. 에서처럼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信者, believer)가 아니라 교회의 일원(敎人 church member)이었을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유대인 신자더러 완악하게 하나님께 패역했던 선조들의 실패를 따르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이자 간절한 호소입니다. 예수 믿어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잘못을 범하면 그 구원이 취소된다는 의미는 전혀 없으며 또 성경전체에 그렇게 말하는 바도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당신의 독생자를 다시 현저히 욕보일 일을 절대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