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속죄
히 9:23-28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3-28 /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속죄] 하늘에 있는 것을 본떠서 만든 땅 위의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이와 같이 모세가 짐승의 피를 뿌려서라도 정결하게 만들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형인 하늘에 있는 것들을 정결케 하려면 훨씬 더 나은 희생제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있는 참 성전을 본떠서 지은 땅 위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은 우리의 친구로서 하나님 앞에 계십니다. 2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땅 위의 대제사장이 해마다 정한 날에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뿌린 것처럼 자신의 몸을 해마다 희생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26) 만일 그래야 한다면 세상이 시작되던 때부터 몇 번이고 거듭 죽으셔야 했을 테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의 끝 날에, 죽음으로 죄의 세력을 영원히 제거하시려고 단 한 번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27) 마치 인간들이 한 번 죽은 뒤에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 것처럼 28) 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들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려 한 번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우리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는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ㄴ. 사53:12)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하늘의 원형과 이 땅의 모형(23-24) 모세를 통하여서 만들어진 성막과 희생의 제사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모형들의 정결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으면 정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피 뿌림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에 있는 원형은 이 땅에 있는 모형보다 더 우월하기에 이 땅에 있는 제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고귀하고, 값진 제물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을 만족할 만한 제물은 오로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더 좋은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불완전한 이 땅의 성소가 아니라 완전한 하늘의 성소에 넉넉히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이 땅에서 다 이루신 것을 보고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나타나셨습니다.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25-28)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하여서 희생의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속죄의 행위는 매년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다른 동물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단번에 자신의 몸을 영원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단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반복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어느 사람도 이 단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물론 성경에서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의 순간 없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동행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과 소멸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심판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서 십자가에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들은 성령이 증인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다 하시며 영생에 들어가고, 그리스도 없이 살아온 자들은 영벌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이것이 영원한 심판인 것입니다.
적용: 마지막 날에 당신의 자리는 어디인가요? 영생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영벌의 자리인가요?
한 사람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도 지나치지 않다. -마하트마 간디. 세상에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희생은 자신을 비우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어 성도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생명과 구원의 감격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히브리서 9:23-28
이창호A /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23-26)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다루면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 율법에 속한 제사장의 사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늘의 원형과 이를 불완전하게 재현한 땅의 모형 사이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희생제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드러냅니다. 하늘의 원형과 땅의 모형 사이에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일치하는 연속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땅의 모형은 하늘의 원형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한계와 불완전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의 탁월함이 짐승을 드렸던 땅의 제사장들의 일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속죄를 위한 제물은, 범죄의 성격과 이후 죄에서 해방되어 맞이하게 될 복락의 가치에 부응해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짐승들의 피를 드리는 제사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식적인 죄책으로부터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이지 일시적인 복을 보장해줍니다. 속죄를 받았다는 해방감과 기쁨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죄를 속량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복을 획득하기에는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를 위해 지성소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완전한 정결을 위해 더 고상한 희생제물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23절에,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옛 언약에서 희생 제물의 피로 정결하게 되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 율법, 성막, 하나님을 섬기는 데 쓰인 여러 기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시대에는 어떤 것으로 치환됩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표현대로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인 우리들입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막과 그 기물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간의 교제를 뜻합니다.
더 좋은 제물은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셔서,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이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성령을 부으시고,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회복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고귀한 희생으로 우리는 정결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성취하신 정결함의 결과,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진리로 자유하게 된 우리입니다. 땅을 디디고 살고 있으나 하늘에 속한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땅의 것에 집착한 나머지,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정결한 삶을 이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살아간다면, 단번에 죽으셔서 더 좋은 제물로 완벽하고 차원 높은 구원을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유다 지파로 오셔서 아론 반차와는 상관 없으셨던 예수님은 그림자에 불과한 옛 언약에 매이지 않으시고 바로 실체인 하늘로 들어가셨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다로 쓰인 헬라어 “엠파니조”는 법정적 어휘로 마치 재판장 앞에 변호인으로 나타나신 것을 드러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보혜사, 곧 변호인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스스로 감당하신 온전한 속죄에 근거하여 오늘도 간구하고 계십니다. 자기 백성인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확보해두신 여러 복들을 나누어주도록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5-26)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이지만 민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대속죄일에, 희생 제물의 피를 흘려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지성소에 영구히 머물지도 않았고, 직무를 마치고는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다음해에도 대속죄일에 다시 제물을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 대제사장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짐승을 희생제물로 삼지 않고, 자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늘 성소로 들어가신 후 다시 다른 제사를 드리시려고 나오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리신 십자가 고난이 계속되는 일이었어야 한다면, 주님은 자주 고난을 받으셔야 했지만 단번에 자기를 드려 죄를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범하게 될 모든 죄악들도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으로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늘에 속하게 된 성도로서 우리는 거룩한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단번에 드리신 십자가 고난의 희생으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되었고, 친히 우리를 변호하시고 간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도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요 소망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7-28)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한번은 죽기 마련입니다. 죽음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죄의 결과이며, 죄의 삯입니다(롬 6:23). 그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나타나실 때, 자기를 드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렇게 자기를 드리신 주님은 죄를 지으신 분이 아니셨기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두 번째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재림이라고 부릅니다. 신자에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궁극적 완성은 재림 때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고, 지금도 구원 받는 중이며, 마지막 재림 때에 구원이 완성되어 새창조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마지막이 아니고,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 눈에 보이는 현상계가 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언젠가 다시 오신다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소망이 아주 큽니다. 사망을 죽이신 우리 주님을 따라 죽음의 두려움을 없이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두려움 없이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인생을 마칠 수 있는 이유이며,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구원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듯이 우리 주님은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거기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떠밀리듯 나이 먹고, 늙어갑니다. 유한한 인생 가운데서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나는 오늘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능력 많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자기를 드려 구원을 이루셨고, 이루어가시고, 완전히 이루실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비추어주시는 말씀을 등불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태양이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비가 의로운 자와 불의자를 가리지 않듯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말씀의 등불은 믿는 사람 모두에게 비추어주시지만 이를 의식하고 살아가지 못할 뿐입니다. 생명의 길을 떠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라고 외쳤던 사도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갈 때,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말씀을 따라 행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 자기를 버리시고,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에 대한 결과로 우리를 기다리는 영원한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해 자기를 버리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위해 두 번째 나타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오늘을 주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세상의 것이 전부가 아님을, 하늘의 성소가 있음을 깨닫고 영원에 잇대어 오늘을 살아가도록 우리와 함께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히브리서 9:23-28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태어나셨다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히신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가 40일만에 승천하신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시려 다시 오시게 될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그리고 부활과 재림 그 하나 하나가 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런 중요한 제목들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보다 깊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야만 했으며 왜 십자가를 지셨으며 그가 승천하시어 무엇을 하고 계시며 재림하시어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귀중한 말씀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탄생, 십자가 부활 그리고 승천이 다 들어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기독교의 원리를 바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핵심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는 진리를 바로 깨달아 재림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23-26) [2]주님의 재림(27-28)입니다.
[1]먼저 23절부터 26절까지의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 땅에 내려 오셨는지 누가 물으면 어떻게 답을 하면 정답이 될까요? 23절부터 26절까지에서는 이 질문에 정답을 잘 정리해 준 말씀입니다. 23절부터 26절까지에서는 앞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옛 언약에서의 동물의 피로 드린 제사와 새 언약에서의 그리스도의 피로 드린 제사를 잘 비교해주므로 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 내려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의 피로 드린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드린 제사를 구별해주기 위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하늘에 있는 것들, 이런 것들과 더 좋은 제물, 또 손으로 만든 성소와 참 하늘, 그리고 해마다 드린 제사와 단번에 드린 제사라는 말로 구별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 모세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모형과 실체 또는 그림자와 실체라는 말로 구분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동물의 제사를 드렸는데 이런 동물 제사는 하나의 모형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희생양의 되신 것은 실체라는 것이며, 대 제사장이 사람이 지은 성소에 들어간 것은 그림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은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 제사장이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린 것은 그림자요 주님께서 스스로 단번에 십자가를 지신 것은 실체라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사람의 몸이나 집안 또는 어떤 물건이 더렵힘을 받았을 경우에는 동물의 피나 또는 동물을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뿌려 줌으로 정결하게 되었다고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정결은 일시적이요 부분적이며 외적인 정결이었던 것입니다. 23절에서는 이런 정결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므로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그런 제물가지고는 안되고 더 좋은 제물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더 좋은 제물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이 더 좋은 제물은 참 것의 그림자인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소에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고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고 구별해주고 있습니다. 24절은 더 좋은 성소가 무엇이며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대 제사장들은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서 속죄의 중보자가 되어주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어 언제나 우리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실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제사 드린 하늘의 성소는 참 성소이며 더 좋은 성소가 되는 것이며 부활 승천하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 곁에 바로 앉아서 우리들을 위해 간구해 주시기 위해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25, 26절에서는 해마다 드려진 제사와 단번에 드려진 제사를 구별해 주면서 주님께서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대 제사장은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해야 하므로 불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기의 몸을 단번에 드려 제사하므로 불완전한 사함을 온전한 사함으로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단번에 드려 만민의 죄를 온전히 사하시기 위해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고 과거형으로 써있는데 주님께서 처음에 베들레헴에 오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그 목적이 단번에 몸을 드리심으로 만민의 죄를 없이하시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2]다음은 27절부터 28절까지의 주님의 재림(27-28)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27절에 보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수명에 한계가 있어서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더러는 일찍 죽고 더러는 장수하여 100세를 넘기기도 할뿐입니다. 오래 사는 것에도 관심을 모으고 오래 살려고 건강을 보살펴야 하겠지만 오늘의 본문에서는 죽은 후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심판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행해질 것입니다. 28절에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는 이유에 대해 써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단번에 자기 몸을 드리신 주님께서 주님을 믿고 재림하실 주님을 바라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려고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말은 첫 번째 나타나심과 비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죄와 상관되어 오셨고 두 번째 오시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믿음과 소망의 성도들에게 영원한 구원으로 보상하시려고 오시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이 오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사랑에 어울리는 믿음을 가지라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은 주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온전하게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존재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어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죽으신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제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어 언제이고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 중보자로서 우리들을 위해 간구해 주시고 계시며 이제 때가 차면 주의 재림을 바라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삶을 허락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이라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즉 절대적인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을 나타내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처음부터 인간들을 높이시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신 사랑이요, 또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늘에 오르심도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계속 보호하시고 우리들을 위해 중재자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 바로 곁에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면 믿음을 지키느라 모든 고난을 잘 참아 낸 성도들에게 상을 주고 영원히 사는 나라에 들어오도록 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실 때에 어떤 환경이나 어떤 형편을 핑계대시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위해 절대적인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삶 자체를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삶이란 주님을 닮은 삶을 말하는 것으로 희생의 삶이요 진리를 위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주님 오셔서 우리들에게 상을 주실 때에 상을 받아 마땅할 삶을 살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김 대중 대통령께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니 외국 사람들은 그가 상을 받아 마땅하다고들한 것을 듣게 됩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마땅치 않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내리실 심판은 조금도 오차가 있을 수 없습니다. 꼭 상을 받을 사람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고 벌을 줄 사람에게는 벌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생은 운동경기의 운동장에 해당됩니다. 일평생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우리들의 운동장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따라 상을 주시던지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형편과 사정에 맞추어 신앙 생활을 한자는 하나님께서 그 형편과 사정에 맞는 상벌을 내리실 것이고 내 형편과 사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맞게 살려고 최선을 다한 자에게는 최선을 다한 것에 맞는 상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현실의 내 형편에 따라 믿어나가지 말고 주님께서 베푸시고 앞으로도 베푸실 사랑에 맞추어 신앙 생활해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일 오신다는 연락을 오늘 받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맞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신랑을 맞을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았다는 비유를 해주셨는데 우리 모두는 신랑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신랑을 맞을 수 있는 준비된 신부들이 다 되셔야 하겠습니다. 등잔에 기름을 미쳐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신부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뿌린 모든 씨앗의 열매를 다 거두게 될 것이며 주님 섬기는데 등한한 모든 씨앗의 열매도 다 가두게 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의 기준은 어떤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믿고 순종했는지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재림시에 상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 다 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더 좋은 제물은 무엇일까요? (23)
2.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23)
3. 참과 그림자가 대조됩니다. 서로 다른 색깔펜으로 하늘과 땅과 관련된 표현에 마크해보세요.
4.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나타나실 시점은 언제이며 그때 일어날 일은 무엇입니까? (27-28)
두 번째 나타나심
히 9:23-28
■ 도입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구약의 제도와의 비교를 통해서 예수님의 우월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구약시대의 성막제도와 제사제도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 살펴본 말씀과 관련지어서 생각해볼 때 율법에 따라 구약시대의 성막에 쓰인 거의 모든 물건이, 그리고 성소에서 드려진 모든 제물이 피를 뿌림으로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도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보다 나은 희생제물로 깨끗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좋은 제물로 깨끗해져야 할 하늘에 있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드려진 속죄 제사를 위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신이 친히 속죄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 자신이 더 좋은 제물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 본론
그렇다면 예수님이 친히 속죄 제물이 되어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예수님은 참 성소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구약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참 성소인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참 성소인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기 위함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으로 가는 열쇠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성막을 만드시고 제사장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이들 제사장 중의 우두머리인 대제사장들이 속죄함을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을 대표하여 짐승을 잡고 그것의 피를 내어 그 희생제물을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1년에 한번씩 성소에 나아가서 죄사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도 지성소로 나아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많은 이들을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오직 자기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죄를 없이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나아가사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많은 이들을 구원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서 예수님이 참 성소인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신 목적은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참 성소인 하늘의 성소에 거하시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실제적으로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들이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로 정결하게 된 새 언약의 말씀을 우리가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과, 구약의 성막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성소, 곧 예수의 피로써 정결하게 된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우리들이 속하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새 언약의 말씀과 하늘의 성소인 교회와 이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인 우리들이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받아 정결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늘의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땅이 하나님 나라인 것을 선포하면서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계속해서 25-2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짐승을 잡은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모든 이들의 죄를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구약의 대제사장의 법을 그대로 따르셨다면 당연히 예수님께서도 해마다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셔야 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로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구약의 제사제도도 그분의 손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때에 오셔서, 곧 ‘세상 끝에 나타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 한 번 희생제물로 드려 여러분과 저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는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속죄제사는 1년동안 유효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새벽에 나오신 여러분과 저에게도 이것이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 결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제물이 되셔서 자신을 드리신 사건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효력을 갖는 것임에 주목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원히 죄사함을 받는 것은 언제까지 그 효력이 유효합니까? 네.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27-28절을 읽어드립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핵심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두 번째 나타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숙한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을, 곧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숙한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고 갈망하면서 한 영혼이라도 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얻도록 잘 인도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시면서까지 여러분과 저의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해주심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도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두 번째 나타나심을 갈망할 수 있도록 말씀대로 살아가기에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죄를 없게 하심
히브리서 9:23-28
28절의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바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신앙은 당연히 예수님의 죽으심이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죽으심이 없기에 십자가와는 당연히 상관이 없는 믿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단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만을 바라보는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신뢰한다면 그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 기적에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이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도외시해서는 안됩니다. 소홀히 여겨서도 안되고 잘 아는 내용이라 하여 가볍게 지나가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철저히 우리의 문제를 파헤쳐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물론 이 물음에 대해 쉽게 ‘나의 죄 때문에’라는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또 다시 ‘죄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떤 상태에 처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간이 어떻게 되어진 것인가? 등등 쉴 새 없는 물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너무 잘 알고 있다며 가볍게 지나가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즉 가벼운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오심으로 단절이 화목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과 은혜안에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떤 자리에 와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고 피의 은혜를 알게 된 신자의 자리가 어떤 것인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교회 다니는 것을 전부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신앙을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 밖에 안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있게 된 자리는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자리인데 이 은혜가 길을 가다가 걸인에게 동전 하나 던져주듯이 아무렇게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주어진 은혜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런 은혜가 허락되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있는 신자는 자신의 의로움이나 행함을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예수님만을 구주라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자리입니다.
26절을 보면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끝에 나타나신 이유는 자신을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제사로 드리는 것, 즉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주님으로 인해서 나의 죄가 없게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즉 죄를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의를 보이고 행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게 되었다는 것은 심판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피해 보기 위해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큰 복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 죽음은 죄 값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쨌든 인간이 한번 죽음으로 죄 값을 치렀기 때문에 심판과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어도 내가 죽는 것으로 죄 값을 치르는 셈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값으로 인한 죽음은 단순한 육신의 사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구약의 제사가 죄 값을 대신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 값으로 대신 죽으심을 보여주는 모형이었을 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으로서 죄 값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자신의 행함과 의를 가지고 죄를 없이 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뿐입니다.
죄 없는 자는 심판과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바로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심판과 상관이 없는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세상을 끝내기 위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주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 안에서 믿는 자로 항상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늘의 생명과 복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 모든 소망을 두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한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음으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인내는 나의 참을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 사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을 가진 자로서, 예수님을 알게 된 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많이 갖게 합니다. 신앙은 교회를 출입하고 교회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가 없게 된 것을 아는 신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복된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존재성을 안다면 복된 존재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는 세상에서 복을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누리고 있는 풍성한 복을 내어 놓으며 살 뿐입니다. 세상이 소망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고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사나 죽으나 주님만을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날 위해 죽으신 그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따라서 신자로서 게으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소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충실해야 하는 것은 죄가 없는 자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세상에 이러한 복을 마음껏 증거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