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주는 유익이 정금보다 귀하리라
잠 8:12-21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14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16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
20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잠 8:12-21 / 나는 지혜라고 불린다네. 내가 사는 곳은 사려 깊음이라네. 깨달음, 깊은 생각, 이러한 것들을 얻으려면 내게 찾아오게. 나를 만나게. 13) 여호와를 무서워하는 것, 그분을 모시며 사는 것이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네. 나 지혜는 남을 우습게 여기고 우쭐거리며 남 앞에서 거만을 떠는 것과 못된 짓만 꾸미고 다니는 것을 정말 못견뎌 하지. 입을 벌렸다 하면 거짓말하는 것들을 보고 어떻게 그냥 견딜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미워한다네. 14) 나 지혜에게는 상황에 알맞게 일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좋은 생각이 있다네. 나 지혜에게는 세상의 이치가 어떠한 것인지 그 깨달음이 있다네. 또 무슨 일이든 끝까지 잘해낼 수 있는 힘도 있다네. 15) 나 지혜 없이 세상 임금들이 올바로 다스릴 수 있을까? 나 지혜 없이 세상 권력자들이 정의를 세우며 제대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을까? 16) 나 지혜 없이 한 나라 고관들이 일을 해나간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 없이 재판관들이 세상 일 가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러한 재판이 올바를 수 있겠느냐? 17) 나를 가슴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나의 사랑을 받으며 덕을 입지. 그런 사람만을 사랑한단 말이지. 나를 못보고는 견디지 못하여 새벽같이 일어나 내게 찾아오는 사람만 나를 만나 깨달음을 얻지. 18) 온갖 부귀영화가 나에게 있고 대를 물리는 재산을 버는 것과 성공하는 것도 나 지혜가 없이는 어림도 없지. 19) 나 지혜를 얻고서 거둬들이는 열매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얻으려고 몸부림 치는 금보다도 황금보다도 그 어떤 천금보다도 더 값진 것일세. 20) 나 지혜는 정의로운 길로만 움직이며 올곧은 길 한가운데로만 다닌다네. 21) 나 지혜는 나를 못 견디게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재산을 얻게 해주지. 그 사람의 금고가 가득가득 차게 해주지.
의인화된 지혜의 특성과 역할을 설명하면서 지혜를 구하기를 호소합니다.
지혜의 역할(12-16) 앞 절에서 설명한 지혜가 가지는 속성들을 다른 측면에서 의인화하여 설명합니다. 지혜에는 명철과 지식, 근신이 있으며, 명철은 사려 깊음으로 근신은 분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지식과 분별력과 사려 깊음의 모습이 있습니다. 지혜는 구체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권력자들에게 중요한 요소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왕들’이 지혜로 다스리며, 방백들은 지혜를 통해 정의를 세울 수 있습니다.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은 지혜를 통해서 다스립니다. 그러나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지혜가 있는 자는 악을 미워하고 교만, 거만, 악한 행실, 패역한 입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임에 분명합니다.
지혜의 가치(17-21) 지혜를 찾을 수 있는 자가 누가 될 수 있는지, 그 지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지혜는 오직 지혜를 사랑하는,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얻을 것이고, 지혜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지혜는 실제적인 삶에 영향을 끼치는 실천적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지혜를 발견한 자, 지혜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축복된 모습이 있습니다. 그는 지혜로부터 주어지는 부귀와 재물, 공의를 얻을 것이며, 지혜가 맺게 하는 풍성한 삶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정의로운 길과 공의로운 길로 다닐 것이며, 그 길을 걸으면서 부끄럽지 않은 방법으로 재물을 쌓게 될 것입니다. 이 재물은 땅에서의 재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이는 상급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혜가 맺는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소득은 순은보다 낫습니다. 따라서 지혜의 혜택을 입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두 가지를 해야합니다. 지혜를 사랑하고, 그 지혜를 찾는 일입니다.
적용: 지혜가 줄 수 있는 유익이 개인에게 얼마나 동기 부여가 되고 있습니까? 당신에게 있어서 지혜는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까?
봄이 되기 전, 정원사들은 더 아름답고 튼튼하게 자랄 나무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부지런히 나무의 가지를 잘라냅니다. 나무에겐 가지를 잘라내는 아픔이 있겠지만 가지치기는 나무의 건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가지를 잘라내는 아픔을 딛고서 이듬해 봄이면 나무는 더욱 싱싱한 자태를 뽐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 보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도통 이해 못 할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생도 가지치기의 아픔이 있을 때 더 성숙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 설 교 >
잠언 8:1-21
찬송가 315장 / 정한조 목사
지혜의 공개 초청(1-5절)
오늘 본문은 의인화된 지혜가 인생을 향하여 간곡하게 초청하는 내용(1-5절)과 지혜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선언하는 내용(6-21절)입니다.
(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잠언에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지혜’와 ‘명철’입니다. 하지만 지혜를 한마디로 딱 잘라서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몇 가지 말로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①지혜는 지식을 지식되게 해 주는데, 그 시작이자 과정이며 완성입니다. 즉 지혜가 없는 지식은 활용이 어렵습니다. 끈을 묶고 풀 줄 아는 지식이 있으면 그것을 이용해서 짐을 쌀 때에 어떻게 묶으면 잘 풀리지 않는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②지혜는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종합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한 부분만 조화롭고 아름답지 않고, 전 부분이 그러합니다. 자기 배우자와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사람은 자기 자녀도 그러하고 부모와도 그러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모두 그러합니다. 그래서 진주는 보석함에 있어도 진주이고, 자갈 사이에 있어도 진주이고, 진흙이나 모래 사이에도 진주이듯이, 지혜도 어디에 있느나 지혜입니다. ③지혜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과 하나님을 벗어나는 길을 바르게 분별하여, 언제나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만들어 주는 판단력과 결단력입니다. 아무리 지능지수가 높고,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삶운 언제나 어리석습니다. 자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언제나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압니다. 지난날의 삶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하나님이 없는 삶은 참 끔찍하게 여겨집니다. ④모든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배워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근본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명철은 분별력, 통찰력을 뜻하는 말인데, 특히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것과 하나님을 외면한 것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명철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 지혜와 명철을 사람으로 의인화해서 그것이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부르고, 명철은 소리를 높인다고 합니다. ‘부르다’는 말도 ‘소리를 높이다’는 뜻입니다. 지혜와 명철이 소곤거리며 사람을 부르지 않고, 소리를 질러서 부른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혜와 명철이 특정한 사람만을 부르지 않고, 모든 사람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즉 지혜와 명철은 소수의 사람, 특정한 사람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누구나 가져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특정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모든 사람을 초대합니다.
구체적으로 지혜가 어디에서 부르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2-3)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녀가 길가의 높은 곳들의 꼭대기에, 길들의 장소에 서며’입니다. 즉 여성으로 의인화된 지혜가 단순히 높은 곳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높은 곳들의 꼭대기에 있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인 ‘네거리(길들의 장소)’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을 어귀에 있는 성문에서도, 여러 출입문에서도 외친다고 합니다. 즉 그것은 세상에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 지혜를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알려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지혜가 다양한 곳에서 큰 소리로 사람들을 초청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우리가 지혜의 사람이 되기를, 명철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다시 외칩니다.
(4-5)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너희는 들을지어다
히브리어성경으로 4절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는 ‘너희를’입니다. 지혜가 부르는 대상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 각자 각자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혜의 부름에 응답하여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혜의 부름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미련한 사람(7장의 음녀의 골목으로 들어가는 어리석은 젊은이처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의 가치 선언(6-21절)
6-21절은 지혜의 고유한 가치를 6가지를 제시합니다.
① 지혜의 진실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6-9)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지혜는 진실합니다. 지혜는 거짓을 말하지 않고, 왜곡하여 말하지도 않습니다. 지혜의 진실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또렷하게 들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튕겨나가게 됩니다.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지금은 맞지만(옳지만) 그 때는 틀린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또 그 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린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그 때도 맞고, 지금도 맞으며, 앞으로 맞을 것이 진리입니다. 지혜는 솔로몬 시대도 옳고, 예수님 시대도 옳으며, 종교개혁시대에도 옳고, 지금도 옳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옳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진실한 진리입니다.
② 지혜의 고귀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10-11)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지혜는 은이나 정금(재물)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진주(최상의 보석)보다도 더 귀하다고 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지혜는 무슨? 재산이 최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압니다. 지혜를 따르며, 지혜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③ 지혜의 강직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12-13)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지혜는 명철과 지식을 가졌고, 악을 배척하는 강직함을 가졌음을 말합니다. ‘주소를 삼다’는 것은 ‘한집에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지혜와 명철은 둘이서 한 인생을 살아가는 부부와 같은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악을 미워하는 것’과는 동의어라고 합니다. 1:7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둘을 연결하면, “지식의 근본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는 악을 친구로 삼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교만, 거만, 악한 행실, 패역한 입을 미워합니다. 교만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높게 여기는 것이라면, 거만은 자신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과 거만은 자기를 실제의 자기보다 크게 여깁니다. 그러한 사람의 특징이 악한 행실, 함부로 행동합니다. 또한 패역한 입, 함부로 말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사람은 그런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④ 지혜에게 있는 계략과 지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14-16)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계략(計略)’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꾀나 수단.’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하게 한 모세는 자신이 지혜롭게 재판할 수 있도록 장인 이드로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쿠데타를 당해서 도망을 다닐 때에, 다윗을 완전히 잡을 수 있도록 조언한 아히도벨의 계략이 있었고, 다윗을 건지기 위해서 압살롬에게 위장 전향한 후새의 계략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혜에게 계략이 있다는 것은 국가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결정적인 지식이 있음을 뜻합니다.
⑤ 지혜의 신실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지혜는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사람에게 막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다’는 말이 2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남녀가 사랑을 할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처음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간절합니까? 또 함께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잘 갑니까? 여자 친구를 집까지 바래다 줄 때, 버스에 내려서 그 집에 갈 때까지 1초라도 함께 있으려고, 최대한으로 천천히 걷고 하지 않습니까? 지혜를 그렇게 사랑하면 만난다고 합니다. 반드시 만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쉽게 주실 수도 있으시지만,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 ‘간절함’을 통해서 주시곤 하십니다.
⑥ 지혜의 유용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18-21)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꿈꾸고, 재물을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갖기를 언제나 소망합니다. 그러면서도 반듯하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지혜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혜의 열매는 18금이나 순금보다 좋고, 그 수확은 순은(돈)보다 낫다고 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재물을 얻어서 자기 창고를 채우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지혜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고, 지혜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붙들리고, 하나님을 붙잡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세상을 붙잡으려고 하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누가 지혜를 담대하게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지혜가 베푸는 거침없는 은혜를 사랑하고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를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다가 정말 소중한 지혜를 하찮게 여기는 삶을 살지 않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혜를 간절히 찾고, 지혜를 사랑함으로, 지혜가 거침없이 주는 복을 누리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지혜와 명철이 높은 곳에서, 사방이 뚫린 도로에서, 마을 입구 성문에서, 마을에 있는 문들마다에서 우리를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고 있지만, 세상의 소리를 더 크게 듣고, 세상이 주는 것을 더 크게 여겨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외면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지혜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우리를 책임져 줄 수 있지만, 우리는 그저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혜를 참 하찮게 여겼고, 지혜가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지혜를 간절히 찾고, 지혜를 사랑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강물이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까지 흘러내려, 지혜가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것을 경험하는 복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지혜와 명철이 거리에서 여러 문들에서 우리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2. 금이나 은보다 지혜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와 같은 체험이 있었습니까?
3. 지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 앞에 지혜를 구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삶의 자리에서 지혜를 찾으며, 거침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날 자
잠언 8:17-21 / 피종진 목사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잘 만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복을 받는 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만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보화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사람은 말이 선하고, 그 생애 전체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신 사랑입니다(요 3:16). 예수님께서는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야 합니다(잠 8:17).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사모하고, 목마른 자가 물을 사모하고, 또 위험할 때에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응답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고 했습니다. 환난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하나님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약한 자는 강하게 해주시고, 위험한 자는 건져주시며, 가난한 자는 부유하게 해주시고, 슬픔이 있는 자는 기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분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슥 8:22).
셋째, 의롭고 공평한 길을 걷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잠 8:20) 이 세상에는 불의한 일도 많고, 불공평한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고 공평한 길을 걷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의로운 길, 공평한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공평한 길을 걷는 자에게 엄청난 재물을 주어 그들의 금고를 가득 채워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잠 8:21). 불의가 많고 불공평한 일이 많은 세상이라 할지라도 항상 의롭고 공평한 길을 걸으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예배란 헬라어에 보면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서 경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시편 5편 7~12절에 보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원수의 손에서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전쟁 중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전쟁에서 승리한 기록을 세계 역사에서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는 자에게는 부귀와 장구한 재물과 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잠 8:18,19).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의롭고 공평한 길을 걷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혜의 초청
잠언 8장 1-21절
잠언 8장에서 지혜는 마치 사람처럼 등장하고 있습니다. 1-5절까지 지혜는 사람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자신을 찾으라 초청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길가, 교차로, 성문 등 사람들이 자주 지나 드는 곳에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소수의 엘리트나 부자 혹은 특권층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지혜는 저 높은 히말라야 산 정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잠수함을 타고 바다 깊은 곳에 가야 있는 거도 아닙니다. 우리 일상 속에 지혜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직장과 가게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생활하는 집에도 지혜는 존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고도의 지식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요, 멘사에 가입할 만큼 똑똑한 아이큐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와 자세입니다. 즉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러한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열려 있습니다. 부자이든지 가난하든지,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지혜를 들으려고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남자는 자기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진실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가 딱 그런 심정입니다. 지혜는 누구든지 자기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만 있으면, 그에게 재물과 존귀함을 주려고 쌓아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지혜의 가치를 알고 그에 합당하게 대하고 또한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지혜는 좋은 것들을 풍성히 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18절을 보면, 지혜는 자신에게 부귀와 영예, 수많은 재물과 형통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19절에는 지혜가 자신을 얻는 자는 정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지혜를 가진 자가 얻을 순수 이익은 은을 얻은 것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는 자에게 풍성한 복을 가득 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길거리와 광장 등 여기저기서 사람들에게 소리를 쳐봐도 지혜를 찾으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혼기가 한참 지난 아들의 짝을 찾기 위해서 선 자리를 하나 잡았습니다. 선 자리에 나올 아가씨에 대한 정보를 어찌어찌 알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요. 미모면 미모, 학벌이면 학벌, 직장도 좋고, 부모님도 두 분다 인품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주변에 수소문해보니 아가씨가 요리도 잘하고, 집안 살림까지 잘합니다. 성격도 싹싹하고, 젊은 사람이 신앙도 좋아서,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믿음도 좋데요. 부모님은 아가씨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정작 선을 보러 나가야 하는 아들 녀석은 시큰둥 합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달랩니다. “얘,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나는 게 흔한 줄 아니? 너 그러지 말고 한 번 나가봐.” 아들이 말합니다. “엄마 내 스타일이 아니야…” 부모 속만 타는 거죠. “아니, 너는 이 좋은 아가씨를 두고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만나려고 그러는 거냐?” 오늘 솔로몬의 마음이 바로 이 부모와 같습니다. 세상에 지혜보다 더 훌륭한 신부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지혜를 소개해주고 싶은 거에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인생은 없다는 것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삶을 한 번 살아보라고 권면합니다. 자기 스타일 아니라는 이유로 선 자리 안 나가겠다는 노총각 아들 등 떠미는 어머니 심정으로, 솔로몬은 우리들에게 지혜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11절 보세요. 누구든지 그녀를 얻으면 값진 진주를 얻는 것보다 낫습니다. 은과 금을 얻는 것도 이 여인을 얻은 것보다 낫지 않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지혜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지혜를 놓치면 평생 땅을 치고 후회할 거라는 거죠. 지혜는 언제나 선하고, 올바르고, 정의롭습니다. 그러니 지혜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그 인생이 얼마나 복된 삶이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도대체 이 지혜라는 여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12-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8: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잠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12절을 보니 지혜가 사는 곳의 주소가 나와 있습니다. 명철, 지식, 근신을 찾는 자가 곧 지혜를 얻습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어떤 상황에 이르렀을 때,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선악 간에 파악하는 ‘분별력’을 가리킵니다. 솔로몬은 그것이 곧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미 솔로몬은 이러한 분별력 곧 지혜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을 봅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니, ‘교만, 거만, 악한 행실, 패역한 입’입니다. 이러한 죄악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미워하고 우리의 삶에서 그림자도 없게 하겠다고 배척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악을 버리고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는 진지한 삶의 태도가 결국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18절에 지혜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결국 자신을 얻을 것이라 했습니다. 또한 지혜는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자들이 곧 자신의 사랑을 입을 것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가 있다면, 이미 지혜는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달콤한 속임수로 유혹하는 음녀를 따라가지 마십시오. 지혜의 초청하는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부어주실 놀라운 축복의 약속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가 삶 속에 충만하여, 크신 은혜와 복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성공을 원한다면
잠언 8:12-21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성공을 원합니다. 아무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다 성공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집착을 합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물론 조금 더 생각하고 깊이 이해하면 성공이란 개념을 다르게 생각이 되지만 본능적으로 성공이란 내가 원하는 것들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갖기를 원합니다. 왜 돈을 많이 갖기를 원할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돈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또 힘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사업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기대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 이것이 성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것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들면 부귀와 영화를 가지고, 재물로 금고가 가득차며 (19, 21절),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소출이 매우 많은 것, 곧 많은 이익을 내는 것 (19절)입니다. 또 힘을 가지는 것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다면 올바르게 통치하고, 바른 법률을 만들고, 바른 재판을 하고, 사회 정의를 세우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물질과 권력을 가지지만 더욱이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람, 곧 돈을 바르게 벌어들이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 힘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의로우면서도, 곧 바르게 살면서도 재물과 힘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이런 것을 가질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는 한마디로 그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지혜있는 자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혜가 무엇인지, 그 지혜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하고 지혜있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먼저 지혜는 지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집니다. 사실 이 본문은 지혜가 지식도 가지고 있고 분별력도 가지고 있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구조형’ (construct)로 묶여져 있는데, 구조형이란 사랑과 마음이라는 두 단어가 구조형이 되면 ‘사랑의 마음’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도 구조형이라고 했을 때는 ‘분별력의 지식’이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분별력이라는 말, ‘메지모트 (מְזִמּוֹת)는 ‘목적’이라는 의미가 매우 강합니다. 따라서 지혜가 ‘지식과 분별력’을 가졌다는 말의 가장 정확한 의미는 지식을 어떤 목적에 맞게 내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라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자신의 어떤 목적에 맞추어 적절하게 내오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원하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굳이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아는 지식을 어떻게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내오느냐 이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런 지혜가 많은 사람이 바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혜로워 질 수 있는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혜가 나의 지식을 목적에 맞게 적절하게 내오는 능력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는가? 아마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가장 먼저 지혜로워지려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의 목적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지혜로워질 수 없습니다. 또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도 지혜로워질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것으로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 차원의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원할 수 있고, 이것을 위해서 남편이 술을 끊어야 한다든지, 돈을 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든지… 이런 자세한 목적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들백이라는 곳에 릭 워렌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는데 그 분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영향력있는 목회자가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저서인 ‘목적이 이끄는 삶’ 때문일 것입니다. 그 책은 세계적으로 히트를 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책에 영향을 받고, 그 책을 가지고 새벽기도를 하고 큐티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목적이 이끄는 삶’이 히트를 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사람들은 ‘목적이 불분명한 삶을 살고 있다’는 좋은 반증입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목적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그 목적에 맞는 지식을 내가 가져올 수 있고, 그렇게 할 때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지혜로울 수 없고, 내가 지혜롭지 못하다면 나는 성공이라는 것을 갖지 못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므로, 내가 성공을 원하고, 내가 성공의 지혜를 원한다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지식이 있어야 한다.
두번째로 지혜가 ‘지식을 목적에 맞게 내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들 손자 병법을 말하곤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다는 말이 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나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식의 성공을 원하면서도 의외로 자식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을 보게 된다. 가끔씩 우스개 소리로 부모님들이 자신의 딸의 손을 잡고 성형 외과를 찾아와서 이 아이를 ‘최진실’처럼 만들어 주세요 하고 말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유명한 배우의 사진을 들고 찾아와서 ‘이 배우 머리처럼 내 머리를 해세요’하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기를 모르고, 자기 자식을 모르는 것이다. ‘목적’만 앞섰지, 그 목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이다. 최진실에게는 최진실에게 맞는 머리 모양이 있는데, 최진실과 같은 얼굴 형태가 아닌 사람이 그 사람의 머리를 한다고 해서 멋있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들이 자식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이유는 너무 아이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주관적으로, 다 이해하는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자식을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목적하는 것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만약 자식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가장 먼저 자식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장사에서 성공을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장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누구나 다 아는 지식을 가지고는 성공하기 어렵다. 옷을 파는 것이 장사다 혹은 물건을 파는 것이 장사다 이런 지식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지식이다. 이런 지식을 가지고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장사가 무엇인지 다른 사람이 알 지 못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 상품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고, 고객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고, 나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중요한 조건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안에 흰색 속옷을 많이 입습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는 물 때문에 그런지 빨래를 해도 흰 속옷이 그렇게 하얗게 빨리지를 않습니다. 옛날 저희 어머니는 희게 하려고 빨래를 삶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제가 우연히 들은 것인데 흰옷을 희게 하려면 빨래를 할 때 세재와 함께 설탕을 한스푼 넣어주면 옷이 더욱 희게 된다고 하네요. 이런 것들을 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설탕도 알고, 흰 옷도 알고, 그것을 어떻게 빨래를 하는지도 압니다. 그런데 목적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흰 옷을 더욱 희게 빠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빨래를 하면서 세제와 함께 설탕을 한 스푼 넣어주는 것.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가진 사람 만이 옷을 희게 빨고 싶을 때 설탕을 한숫갈 집어 넣어 주는 지혜를 낼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의 첫 출발점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나를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나님이 없이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지식을 알지 못하면서 무엇인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오하이오 Dayton 근처에 Urbana Grimes Field라는 곳에서 일어난 일인데, 50년된 러시아제 엔진이었는데 조종사였던 Paul Sirks라는 사람이 비행기 앞에 있는 프로펠러를 돌렸는데, 엔진이 크르릉 크르릉 하더니 시동이 걸려가지고 그냥 날라 오른 것입니다. 프로펠러 비행기가 조종사도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고 한시간 여 동안이나 비행사 없이 하늘을 날라 다녔습니다 (excite.com, 11-24-97). 여러분, 이 비행기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 곧 지식의 출발점임을 아는 것이 인생의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 없이 비행기가 하늘로 날라 올랐다가는 안전하게 착륙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식의 출발점이고, 이것이 지혜입니다.
명철함이 있어야 한다.
또 한가지 지혜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는다’고 표현한다. 주소를 삼는다는 것은 ‘거주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명철을 거주지로 삼는다, 곧 명철함 속에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명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지혜가 안에 있는 지식을 목적에 맞게 내어오는 능력이라면, 명철은 외부의 정보를 내 안에 저장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이 명철을 때로는 현명함, 영리함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영리한 사람은 외부에서 발생한 여러가지 지식들을 내 안에 빨리, 그리고 많이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내 밖에서 발생한 일들은 나에게 필요한 하나의 정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명철하다는 것은 이런 정보가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쓸모 없는 것인지를 잘 분석하고, 분류합니다. 그리고 이 정보를 빠르게, 그리고 많이, 오래도록 저장합니다. 이것을 명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는 이렇게 저장되고, 분류된 정보를 목적에 따라 순간 순간 잘 내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철한 사람은 정보가 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좋은 정보인지 나쁜 정보인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식별력’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믿어도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명철함이 없다면, 바른 지식을 내 안에 저장할 수가 없고, 따라서 내 목적에 따라 바른 지식을 내어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이 영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 저 사람은 이마에 ‘사기꾼’이라고 써 붙이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 사람을 주관적으로 봅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본다는 말은 감정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호의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단력이 마비되어 버린다.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하고, 지혜롭지 못하면 결국 성공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이렇게 보십니다. 주관적으로 보십니다. 만약 객관적으로 보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사랑이라는 감정적, 주관적 관점으로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 위해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객관적으로 정보를 분류할 수 없을 때 많은 손해가 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것은 사랑에 눈이 머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간혹 지혜롭지 못한 사람의 문제는 명철함, 곧 정보를 바로 분류하고,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식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명철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 지혜는 영리함을 거주지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지혜’는 인격화 되어 있다. 이 지혜는 바로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이시다. 이 분들은 ‘지혜 그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내 안에 살게 해야 한다. 이 지혜를 내 안에 살게 하는 사람은 바로 ‘명철한 사람’ 곧 영리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명철을 주소지로 삼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지혜의 근본을 소유하지 못한 영리하지 못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
지혜를 찯고 구하는 사람이 지혜로워진다.
어떤 사람이 지혜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를 말씀 드렸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 그리고 판단력이 있는 영리함 등을 들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지혜를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 지혜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지혜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왜 나는 하는 일 마다 안되는 것인가를 한탄할 뿐이지, 이것은 순전히 내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많은 사람들은 사기꾼에게 속고 탄식하면서 사기꾼 만을 욕할 뿐 자신이 지혜가 부족해서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업에 망한 후에 환경을 탓하고, 불경기를 탓하고, 운이 없음을 탄식할 뿐 자신의 지혜가 부족했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따라서, 지혜는 끊임없이 지혜의 부족함을 깨닫고 구하고, 찾는 사람이 지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를 가지기 위하여 늘 지식을 가까이 하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자기가 영리해 지기 위하여 이 지혜를 구하고, 지혜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지혜로와지지 않는다. 지혜를 구하고, 찾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우선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성경은 ‘지혜의 책’이다. 이 성경을 늘 가까이 두고 읽는 사람이 지혜로와집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자꾸 묻는 것이다. 그 묻는 것의 첫 걸음이 기도이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길을 묻는 것이다. 또 주변의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하고, 무엇보다 인생을 먼저 산 사람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나이 먹은 쥐일수록 덫에 잘 걸리지 않고, 지혜로와지는 것은 그가 그런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생도 사실 다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지혜를 자꾸 배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스페인 격언이 있습니다. ‘새 바가지로 물을 퍼올리기 전에 옛 바가지를 결코 버리지 말라’. 이 격언의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보라. 이 지혜를 배우지 못해서 실수하고, 직장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이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 다시 말해, 자기가 다른 직장을 구하기도 전에, 기분 나쁘다고, 자신을 몰라 준다고, 직장 상사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었다고 사표를 집어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새 바가지로 물을 퍼올리기도 전에, 당연히 새 바자기를 물을 퍼올리면 된다고 믿고 혹은 착각하고 옛바가지를 집어 던져 버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옛 바가지가 조금 샌다고 해서 옛 바가지의 고마움과 필요성을 망각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지혜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런 사람이 직장을 잡지 못해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지혜를 배우고 습득하는 사람이다. 이런 지혜는 비단 책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또 내가 경험한 것들 속에서 배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또 내가 실패가 많은 지혜를 준다고 해서 실패를 경험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실패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것이 지혜를 직접 습득하는 것이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6,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부자 되길 원하십니까
잠언 8:17-21
저는 여러분이 영적으로 가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만 매여 사는 이들이 아니라 하늘의 꿈과 비전을 가슴에 담고 사는 이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힘들지만 어렵지만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가난한 모습으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두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재물만 많다고 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18절)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재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쉽게 말하여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갈3:8,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믿음, 그리고 복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확신하고 순종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세 가지 정도로 하나님 말씀 속에 있는 축복의 원리를 살피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요새 로리 베스 존스가 쓴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이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경영철학을 다룬 책인데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경영자로서 절실한 미덕이 있는 분이고, 솔선수범의 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원대한 목표를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귀를 열어 놓았던 리더입니다. 비주류의 밑바닥 출신이기에 어려운 자들을 알았고, 명료한 비전을 말할 수 있는 리더입니다. 또 인간적인 매력을 갖추고 조직원들을 끊임없이 신뢰합니다."
예, 예수님은 최고의 경영자입니다. 여러분의 일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자 되는 첫 번째 지름길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은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영적 상황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전반에 걸쳐 주님을 사랑하고 찾을 때 주님도 그를 사랑하고 만나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21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입지 않고 부자가 될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입지 않고 혹 부자가 되었어도 그 재물을 장구하게 누릴 수가 없습니다. (18절)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은 정의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재물을 소유하고 우리에게 베푸실 수 있는 풍요의 주님이십니다.
혼자 부자 되기 애쓰지 마시고 여러분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어야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은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께 맡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 맡기면 물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을 생각한다는 게 중요하기에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마6:33,34)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는 이가 세상의 재물축복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나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고 그렇게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 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잠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처음 익은 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주님을 먼저 대접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생각하고 그분에게 사랑을 베풀면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재물 축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말3:10)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그래, 왜 십일조 얘기가 안 나오나 했어?'하고 시큰둥해 하는 성도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 축복을 말하면서 십일조의 원리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주님을 우롱하는 짓입니다. 십일조의 원리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나중에 떼는 사람 치고 축복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십일조를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복 못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부지런하십시오.
우리는 재래로부터 부지런함을 삶의 좋은 미덕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함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자를 싫어하십니다. (잠24:33,34)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그렇습니다. 게으르면 부자 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부자 되길 원하면 열심히 일하십시오.
(잠6:6)은 또,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합니다. 그 어느 동물보다 개미는 부지런합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사람도 부지런함을 배우려면 개미에게서라도 배워야 합니다. (잠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게으른가 부지런한가의 차이가 바로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를 결정합니다. 또, (잠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본문 (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나를 간절히 찾는다"라는 말의 원래 뜻은 "나를 새벽이 찾는 자가 나를 만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이 새벽에 주님을 찾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나서 해야할 인간의 본분은 바로 부지런함입니다. (욥8:5-7)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서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함에 더하여 청결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에 부지런한 것은 차라리 더 죄악입니다. 마음이 청결하기 위해서는 헛된 욕심과 탐심을 버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어떤 면에서 보면 믿음의 본류를 떠난 말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부자 되는 것과 믿음 생활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유명한 (요삼1:2)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렇습니다. 영, 육, 혼은 모두가 건강할 때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그 물질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맘껏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 모든 경영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런 후에 열심히 일하십시오. 분명히 물질의 축복은 여러분 차지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